이 논문의 전반부(http://sarantoya12.tistory.com/84)에 이어 후반부를 번역했다. 이 논문은 1998년의 「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ism」을 조금 수정해서 2005년 『The land within: indigenous territory and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에 실린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세부적인 차이만 있을뿐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1998년 논문에서는 우주론(cosmology)에 기반해서 아메리카인디언의 퍼스펙티비즘을 중점적으로 논했다면, 2005년의 논문에서는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의 논리(적 연관)을 좀더 부각시켰다. 

 

실은 지난 전반부를 번역했을 때에는 무척 고되었다. 반면 이번에 후반부는 즐겁게 번역했다. 그동안 카스트로의 그외의 글들의 번역과 강의준비와 리뷰를 통해 공부가 늘은 탓이다.

 

카스트로의 이론이 워낙 압축된 논문이라 결코 혼자 독해될만한 것 같지는 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고 서로 파악한 내용을 교환하고 토론해야만 습득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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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족중심주의

 

이제는 매우 유명해진 데스콜라의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에게는 인간성이 집단의 경계에서 소멸한다는 것, ‘진짜 인간’을 의미하는 대자적인 민족 명칭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으로부터 예증된 사고, 바꿔 말하면, 어떤 방식을 통해 외지인을 인간-외의 영역에 속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까지 다루는 사고를 논하고 있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는 서양의 가련한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집합적인 생활 본래의 자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태도의 보편적인 상호성을 어떤 일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수년 후 대앤틸리스제도[서인도제도의 주요섬군]에서 스페인인은 선주민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긴 시간에 걸쳐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수장하고자 했다(Lévi-Strauss 1952: 329).

 

이 우화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지하다시피 모순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야만인이란 무엇보다 우선 야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수년 후 앤틸리스의 사례를 재인용할 때, 레비-스트로스는 퍼스펙티브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타자>의 인간성에 대해 조사할 때에 백인은 사회과학에, 인디오는 자연과학에 의지하였고, 백인은 인디오가 동물이라고 결론내린 반면 인디오는 유럽인이 신이 아닌가 의심했다((Lévi-Strauss 1955a: 82-83). ‘동일한 무지에서’ 저자는 후자의 태도 쪽이 보다 더 인간에 적합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본 것처럼 이 우화는 이와는 별도의 것을 보여준다. 우선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하나다. 즉 유럽인침략자와 마찬가지로 인디오는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인간성을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외지인은 인간을 동물이나 정령으로부터, 문화를 자연이나 초자연으로부터 구분하는 경계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자 매트릭스로서 자연/문화의 대립은 사회적 통각이라는 보편으로서 나타난다. 즉 스페인침략자들에 의한 질문의 해답은 긍정형으로 나타난다. 확실히 야만인은 혼을 가지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글을 썼을 때, 우리가 만든 것과 동일한 구분을 야만인도 만들어낸다고 논증한 것에는 그들의 충분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야만인이 그들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문화를 자연으로부터 구분하고 자연민족(Naturvolke)이 항상 타자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 간의 문화적 구분의 보편성은 인간적인 <자연>으로서의 <문화>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크게 변하고 있다. 야만인은 이미 자민족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주론적인 중심을 점하고 있다. 야만인은 동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대신에 그들이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립시키기 위해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이 아닌 사람인지를 드러내야한다. 그들에게 자연과 문화는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영역의 일부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과 동물성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인 <거대한 분할>을 우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견해는 생태학의 기본적인 교훈을 예언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바로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Raichel-Dolmatoff 1976; Wagner 1977). 이전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인간적인 속성을 다른 인간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피와 살이 거론되었다. 이제는 우리에 의한 대상화의 한계가 허용되는 한에서 습득해야 하는 ‘생태학적 예지’를 그들이 표할 때에 그러한 속성이 자신의 종의 경계를 저 멀리 뛰어넘어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한다(Århem 1993). 일찍이 야생의 사고를 내추럴리즘의 유아단계인 자기도취적인 애니미즘으로 동화한 것에 반론하기 위해 토테미즘이 인간과 자연 간의 인지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애니미즘은 다시 야만인에 귀속되고, 또 (서둘러 강조하건대 데스콜라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 속에서 애니미즘은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는, 순진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어리석은 탓에 우리 근대인이 항상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인 혼교를 둘러싼 진정한 혹은 적어도 ‘유효한’ 지(知)가 되고 있다. 근대적인 오만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미개와 포스트모던의 하이브리드(hybrid)다.

 

따라서 두 개의 이율배반은 실은 하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의 관념을 확장하기 위해 자민족중심주의자답게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토테미즘에서처럼 대립시킨다. 혹은 그들은 그러한 구분을 표명시키지 않고 우주중심적으로 애니미즘적이기에, 세계에 있는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인 관용성의 모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폐쇄적인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일까(Levi-Strauss 1991:ⅹⅶ)?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율배반의 해법은 예를 들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태도를 논한 최신버전이 정당하다고 단언하며 그 외의 버전을 전근대-포스트모던의 그늘로 쫓아내자고 하듯이 한 쪽을 선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테제와 안티테제가 함께하는 진실이지만(양자 모두 견실한 민족지적인 통찰과 일치한다), 동일한 현상을 각기 다른 양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는 적합하지 않는 자연과 문화라는 카테고리의 실체론적인 이해를 조정한다는 점에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부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저 자민족중심적인 자기언급을 만들어내는, 보통 ‘인간’으로 번역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용어는 자연종으로서의 인간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은 오히려 인격성의 사회적 조건이며, 특히 ‘진정한’, ‘실제’, ‘진짜’ 등의 강조말로 수사되는 경우 체계적이지 않을지라도 용어 논리상으로는 실명사(實名詞, noun substantive)라기보다 대명사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를 지시한다. 언명의 표지라 해도 이름은 아니다. 이 용어는 (‘사람’을 민족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되는 의미론적인 감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사람’을 ‘인간’이라는 집합적인 대명사로 이용함으로써) 명사에서 퍼스펙티브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집합적인 동일성의 카테고리에는 한 에고의 근친에서부터 인류 전체, 나아가 의식의 모든 존재까지 맥락적ㆍ대조적으로 표시하는 대명사에 특징적인 시야의 특출난 가능성이 부착된다. ‘민족명’으로 응고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처럼 생각된다. 문헌에 기록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민족명의 상당수는 자기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명된 경우(그 대부분이 멸칭(蔑稱)이다)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명에 의해 대상화되는 자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타자로 격하되는 자다(Urban 1996: 32-44). 민족명은 제3자의 이름이며, ‘우리’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들 간에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고유명사학의 수준에 있는 자기언급의 기피다. 이름은 그것을 운반하는 자나 그 인물 앞에서 발설되지 않는다. 이름 짓기는 외재시키는 것,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집합적인 자기언급은 ‘사람이라는 종의 성원’이 아니라 ‘인격’을 의미한다. 그것은 발화하는 주체의 관점을 기록하는 인칭대명사며, 고유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이나 영령을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이라고 서술하는 것이며, 비-인간에 주체라는 언표행위의 위치를 점하는 의식적인 지향성과 행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이 비-인간들이 내려주는 혼과 정령으로서 대상화된다. 주체란 혼을 가진 자이며, 혼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혼과 주체성이란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퍼스펙티브와 관련한 카테고리이며, 우주론적인 지시사(指示詞)이기도 하다. 그 분석에 필요한 것은 실체적인 심리학보다도 기호의 용어론이다(Viveiros de Castro 1992b: Taylor 1993b: 1996).

 

이처럼 관점이 부여되는 모든 존재는 주체일 수 있다. 혹은 더 정확성을 기하자면, 관점이 있는 곳에 주체의 위치가 있다. 우리의 구축주의적 인식론이 소뤼르의 정식—‘관점이 대상을 창조하는’ 주체적인 존재는 원초적으로 관점이 그로부터 발생되는 고정된 상태다—에 의해 요약 가능한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관점이 주체를 창조한다는 선을 따라 전개된다. 관점에 의해 활성화된 것이나 행위능력을 가진 것은 우선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와리(Vilaça 1992), 테네(McDonnell 1984), 마세(Århem 1993) 등은 ‘사람’을 의미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존재의 계층을 표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이 말들은 인간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말이 멧돼지(peccary)나 원숭이(howler monkey), 비버(beaver)에 의해 사용될 때에는 멧돼지, 원숭이, 비버로 자기 언급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이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에 선다, 라는 것만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샤먼의 설명 혹은 보통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공언하는 바에 따르면, 비-인간들은 자신을 형태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으로 간주한다. 동물을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사람화와 문화화를 함의한다. 즉 선주민적인 사고의 인간중심적인 성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것이 문제시된다. 자신에 관한 일인 것처럼(vicariously) 참조항의 관점에 서는 모든 존재는 주체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이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본다. 인간적인 신체의 형태와 인간적인 문화—특수한 배치에 ‘신체화되는’ 지각과 행위의 도식—는 앞서 논한 자기-지시와 동일한 타입의 대명사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재귀적 혹은 통각적인 도식(스트래선(1988)이 말한 의미에서는 ‘물상화’)이며, 이를 통해 모든 주체는 스스로를 파악한다. 즉 축어적이며 구성적인 인간적인 속성이 예를 들어 부적절하게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될 수는 없다. 이 속성들은 관점에 내재되어 있으며, 관점과 더불어 이동한다. 인간은—태어날 때부터—바로 그 특권(prerogative)을 향유한다. 그리고 헷갈리기 쉬운 형용모순을 바엘이 제시한 것처럼(Baer 1994: 350) “자신을 자신으로서 본다”.

 

확실히 해두자. 혼을 받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물은 그것들이 (변장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그것들은 (잠재적으로)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주체>의 본성이다. 주체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할 때의 형상이다. 애니미즘은 실체적이며 인간적인 질(質)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대자적인 관계의 실제적인 등가성이다. 이리는 이리를,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처럼—인간으로서—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리는 이리에게 인간이다. 왜냐하면 앞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기 때문이며, 인간성이란 <주체>가 띠는 일반적인 형상을 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형태 혹은 문화적 관습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타입의 의식과 지향성을 비-인간적인 존재에 부여하는 것은 통상 중립적으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의인화’로 불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두 라벨은 대립하는 우주론적인 태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양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진화론은 어마무시하게 인간중심적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의인화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대로 선주민의 애니미즘은 의인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분명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간을 제외한 수많은 존재가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일 수 없다. 구래의 ‘미개의 나르시시즘’은 풍문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진짜 사례를 찾아보자면, 근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마르크스가 우리의 종에 대해 기술한 일설을 살펴보자.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인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임을 확증한다. (중략) 그렇다, 동물 또한 생산한다. (중략) 그러나 동물은 단지 자신 혹은 그 존재를 위해 직접 필요로 하는 것만을 생산한다. 즉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중략) 동물은 다만 그에 속한 종의 기준과 욕구에 따라 형상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다른 종의 기준에 따라서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Marx 1961[1844]: 75-76 in Sahlins 1996).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산한다”는 이 명제를 통해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지 간에 나는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라면 다른 동물종 각각은 특수한 인간성인 것은 아닐까?) 인간성은 행위자의 보편적인 형상이라는 점에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관념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르크스의 판단을 실은 그 순수한 반전이다. 그것은 모든 종들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동물 속에서 지각되는 이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의미에서 인간은 보편적 동물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 보편성은 인간중심적인 반면, 선주민의 경우에 보편성은 의인화다.

 

지금까지 내가 논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각각의 종의 대자적이고 재귀적인 관계와 논리적인 등가물을 표현한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북서부해안의 츠므시족(Tsimshian族)의 우주론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자.

 

주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보기에 세계에는 영적인 영역에 둘러싸인 인간적인 공동체라는 틀이 있으며 그 영적인 영역은 모든 존재가 각각의 특징에 따른 삶을 영위하며 상호 존재에 간섭하는 동물의 왕국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로—예를 들어 연어로—변신한다면, 연어인간에게 자신은 우리에게서의 인간인 것으로서, 인간은 나스노크[정령] 혹은 연어를 탐하는 곰으로 나타난다. 이 번역의 과정은 몇몇 차원을 횡단한다. 예를 들어 스키나 강에 떨어진 목화 잎사귀는 연어인간에게는 연어다. 잎사귀에게는 연어가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연어인 것처럼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곰처럼 보이지 않는다면(Guédon 1984: 141-42).

 

즉 연어는 인간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연어에게 나타나는 것이라면—이것이 애니미즘이다—, 연어는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인간 또한 연어에게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이것이 퍼스펙티브주의다.

 

아마도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에서는 데스콜라의 모델에서 예견되는 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관계가 토테미즘과의 사이에 놓여있다. 왜 동물들(이나 그 외의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는 것일까? 내 생각에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그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리라. 멧돼지가 자신을 멧돼지로 보는 것(그리고 인간이나 그 외의 존재가 그 특징적인 의복 밑에 멧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보일 때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간주하며, 비-인간으로부터는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령으로—간주된다면, 동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퍼스펙티비론적인 애니미즘의 비대칭적인 비틀림은 토테미즘이 노정하는 대칭성과 매우 흥미로운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 특수한 동물이라는) 재귀적인 동일성의 상관이 인간적인 계열과 동물적인 계열의 관계에 대한 기초가 된다. 후자에서 (한 인간은 한 동물에게, 다른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 그러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차이의 상관이 두 계열을 분절한다. 차이의 상관이 대칭적이고 가역적인 구조를 산출하는 반면, 동일성의 상관은 애니미즘이라는 비대칭적이고 유사투영적인 구조를 산출한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결국은 애니미즘이 주장하는 것이 동물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라기보다 동물들은—우리처럼—자기 자신과 다르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밖에 있는 외연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포적인 것이다. 모든 것에 혼이 있다면, 이로부터 어떤 분류도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간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아니다. <존재의> 기저에 있다는 인간성은 시사적으로 종 특유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성을 문제시한다.

 

 

다자연주의

 

주체적인 위치의 다원성을 아우른 세계라는 사고방식은 즉각 상대주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분명 상대주의에 대한 직접적 내지는 간접적인 언급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종종 나타난다. 마쿠나족(makuna族)의 민족지학자인 카이 오렌이 전경으로 밀어낸 다음과 같은 판단을 생각해보자. 오렌은 아마존의 북서부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적인 우주를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 관해 말하자면, 현실에 대해 다원적인 관점이 있다는 사고를 포함하는 바, “모든 지각은 동등하게 유효하며 또한 진실하”고 “세계에 대한 진실하고 정확한 하나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Århem 1993: 124).

 

오렌은 확실히 옳다. 다만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완전히 그 반대로 세계에는 진실로 정당한 하나의 표상만이 존재한다고 마쿠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유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어망 속에 타버린 물고기로서, 독수리에게 보이듯이 본다면, 우리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독수리로 변신하고 있다는 것, 즉 보통 때라면 누구의 평면에도 기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병 들을 불운의 전조다. 퍼스펙티브는 분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샤먼만이 종에 관해 양성구유적인 것처럼 각기 다른 종들을 교신시킬 수 있는데, 그것도 특수하고 제약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층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이론은 오렌이 논한 것처럼 동일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다원성을 상정한 것일까? 민족지학자의 논의를 수용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반대로 취하는 것은 여기까지 해두자. 모든 존재는 세계를 동일한 비법으로 본다(표상한다)—바뀐 것은 그것들이 보는 세계다. 동물은 인간과 동일한 카테고리와 가치를 이용한다. 우리 세계처럼 그들의 세계는 어로와 수렵, 요리와 발효주, 교차사촌혼과 전쟁, 의례와 입사식, 샤먼과 추장, 정령을 중심으로 움직인다(Guédon 1984: 142). 달과 뱀, 재규어가 인간을 맥이나 야생돼지로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그들이 맥이나 야생돼지를, 즉 인간에 적합한 식량을 먹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는 있을 수 없으며 비-인간은 고유의 구역에서 인간이며, 그들은 사물을 인간이 보듯이 본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곳의 것들은 별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은 재규어에게 발효주다. 죽은 자의 영(靈)에게 부패한 유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다. 우리가 진흙탕으로 보는 것은 맥에게는 거대한 의례용 건물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반직관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도와 땅의 반전으로서 널리 알려진 착시도처럼 그 자체가 반대물로 변형하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라드 웨이스(Gerard Weiss)는 캄파족(campa族)의 세계를 “다른 타입의 존재가 동일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상대적인 외견의 세계”로서 기술하고 있다(1972: 120).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웨이스가 간과하는 것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사실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을 본다는 사실의 단순한 귀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같은 사물’로 간주된다는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관계에서 무언가의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일까? 웨이스의 정식은 물(物) 자체의 망령이 덧씌워져 있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다자연주의다. 문화상대주의는 일종의 다문화주의가 전제하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표상의 다양성이며 각각은 외재적으로 통일된 자연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데, 자연은 그것들의 표상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은 그 반대물을 제시한다. 실재하는 다양성으로 골고루 적응되는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현상학적 혹은 표상의 통일체다. 유일한 ‘문화’와 다원적인 ‘자연’, 즉 불변의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퍼스펙티비즘은 다자연주의다. 퍼스펙티비즘은 표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퍼스펙티브가 표상하지 않는 이유는 표상이 정신의 재산인 반면 퍼스펙티브는 신체에 거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설 수 있는 능력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혼의 잠재능력이며, 그래서 비-인간은 정신을 가진(혹은 정령인)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그리고 어떤 관점은 차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는 혼에 없다. 혼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을 관통하는 동일자며, 모든 곳에서 같은 사물을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신체의 특수성에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가능해진다. 만약 비-인간이 인격이며 혼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동물들이 우리가 다른 사물을 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그것들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언급하는 것은 물리학적인 차이—이 점이 제기되는 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단일성을 인식한다—가 아니라 각각의 종들의 신체를 특이한 것으로 만드는 정태, 경향성, 역능이다. 즉 먹는 것, 교신하는 방법, 사는 곳, 군집성이라든지 단독성이라든지 등등. 신체의 형태학은 정태로서의 이것들의 차이에 대한 힘으로 넘쳐나는 기호지만, 그것은 눈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인간적인 외견은 재규어적인 정태(jaguar-affect)를 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신체로 부르는 것은 변별적인 신체적인 실질이나 특징 있는 해부학적 구조와 무관하다.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정태와 존재의 양태의 집합체다. 혼이라는 형상적인 주체와 유기체라는 실질적인 물질성 사이를 정태와 역능의 다발로서 신체가 점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퍼스펙티브의 원천이 있는 중핵적인 평면이 존재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라는 정신적인 본질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체적인 매너리즘(maniérisme)이다.

 

그러나 신체 간의 차이는 외재적인 관점의 타자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적으로 모든 부류의 존재는 동일한 형상(인간이라는 총칭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타성(他性)이 그 자체로 파악되는 양태다. 통상의 양태에서 우리가 동물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신체가 각각(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퍼스펙티비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만약 <문화>가 혼의 관념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의 재귀적인 퍼스펙티브라면, <자연>이란 다른 신체적 정태에 대한 행위자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문화>가 <주체>의 본성이라면, <자연>은 신체인 한에서, 즉 다른 누군가에 대한 무언가인 한에서, <타자>의 형상이다. <문화>는 ‘나’라는 대명사의 자기참조적인 형상을 띤다. 반면 자연은 비인칭적인 대명사인 ‘그것’에 의해 드러난다. 객체의 특히 ‘비-인격적’인 형상이다(Banveniste 1966a: 25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시선에서 신체가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전한 일화 속 스페인 사람과 앤틸리스 주민이 취한 타자의 인간성을 탐사하는 방법이 그처럼 비대칭적이었다는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인에게 타자를 혼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로 판단하고자 했다. 반면 선주민의 목적은 타자가 어떤 부류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유럽인에게 우월하고 변별적인 것, 즉 퍼스펙티브의 차이화 장치(=微粉機)는 혼이다(인디오는 인간인가, 동물인가?). 인디오에게 그것은 신체다(유럽인은 인간인가, 정령인가?). 유럽인은 인디오가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인디오는 유럽인이 혼을 가지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혼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가 알고자 했던 것은 이것들의 ‘혼’의 신체가 그들 자신과 동일한 정태를 가지고 있는지—유럽인이 인간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였다. 정리해보자. 유럽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에 스스로가 가진 것과 동일한 혼이 있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성립된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함으로써 성립된다.

 

잉골드가 강조한 것처럼(Ingold 1994: 1996), 서양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양의적이다. 한편으로 사람이라는 종은 그 외의 것들과 동일한 동물종이며, 동물성이라는 영역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반면 인간성은 동물을 배제하는 도덕적인 조건이다. 이 두 가지 지위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라는 문제와 이접적인 이념으로서 양립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근대인]의 우주론은 인간과 동물 간에 형이하학의 연속성과 형이상학의 불연속성을 가정한다. 전자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인류’를 만들어내며, 후자는 인문학의 대상이 된다. 정신은 우리의 중요한 차이화 장치다. 정신은 우리를 동물이나 물질 일반보다 상위에 위치 지으며 우리 동료들에 대해 개별의 인간을 특이화 한다. 정신은 집합의식과 시대정신 등의 어휘를 통해 문화와 시대를 구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체는 주요한 융화장치(=집적회로)이며, ‘근대적인 융합’의 매체다. (DNA, 탄소화합물 등) 보편적인 기질(에 의해 융화된) 다른 생물에게 우리를 접속시킨다. 달리 말하면 모든 물질적 ‘신체’라는 궁극적인 자연에 연결시킨다. 한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의 존재들 간에 형이상학의 연속성과 형이하학의 불연속성을 조정한다. 전자는 애니미즘—예를 들어 ‘미개의 융합’—으로, 후자는 퍼스펙티비즘으로 귀결된다. 정신과 혼—비물질적인 실질이라기보다 재귀적인 형상으로서—은 융화하고, 신체—물질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활성화하고 있는 정태의 체계로서—는 차이화 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이다. 아마존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른 논의를 살펴보자. 르나르-카즈비츠의 마치겡가족의 신화론에 대한 저작(Renard-Casevitz 1991)을 검토해보자. 인간인 주창자가 외부자의 마을을 방문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뱀과 박쥐, 불덩어리를 ‘물고기’, ‘아구티’, ‘마코앵무’(인간의 식량)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렇게 불리게 된 신화를 해설하면서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아님을 깨닫는다.

 

신화는 모든 국면에서 유효한, 문화횡단적이고 민족횡단적인 규범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규범은 동일한 기쁨과 혐오, 음식에 관한 동일한 가치나 동일한 금지와 기피를 규정한다. (중략) 신화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야만적인 선호나 부적절한 언어의 이용이 아니라 견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바에 있다(Renard-Casevitz 1991: 25-26).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더할 나위 없는 평범함을 인정해버렸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없었다.

 

퍼스펙티브에 몸을 두는 것은[mise en perspective] 보편적인 사회적 실천의 적응과 전조에 불과하며 X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Y의 시부모라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중략) 점유된 장소에 따른 이름의 가변성은 어떻게 A가 동시에 X에게서 물고기이며 Y에게서 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Renard-Casevitz 1991: 29).

 

사회생활에 고유한 위치에 기반한 상대성의 일반화는 종들 간 혹은 세대 간의 차이에 적응함으로써 인간적인 문화를 자연에, 즉 절대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귀결에 이른다는 것이 문제시된다. 누구라도 ‘물고기’를 먹게 되고, ‘뱀’을 먹는 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나르-카즈비츠가 말한 친족에서 위치잡기와 존재의 상이한 유형에 따라 물고기 혹은 뱀으로 알려진다는 것 간의 아날로지는 매우 흥미롭다. 사고실험을 해보자. 친족용어는 열려진 관계사로서 논리를 조작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는 명칭의 계층에 속한다. (물론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나타내는 라벨이 있다. ‘이항술어’ 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물고기’나 ‘나무’ 등의 개념은 닫힌 혹은 명확하게 경계를 긋는 ‘고유’ 명사이며,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특성에 의해 어떤 대상에 끼어 맞춰진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 곧 ‘물고기’, ‘뱀’, ‘해먹’, ‘카누’ 등의 명사에 의해 지명되는 실질은 관계사로서 명사와 대명사 간에, 실사(實詞)와 직시(直示) 간에 있는 무언가로서 사용된다. (‘물고기’ 등의 자연종의 이름과 ‘해먹’ 등의 인공물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다—다음을 참조할 것.) 한 인물은 그 인물을 아버지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한에서 아버지다. 즉 부성과 관계한다는 것인 반면, ‘물고기성’ 혹은 ‘뱀성’은 물고기나 뱀 본래의 특성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은 어떤 사물 또한 이 사물을 물고기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이며 물웅덩이가 맥의 해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누이인 이사벨의 딸 니나가 나의 조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면, 어떤 상대주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통상 표현이 의미하는 한에서 주관론적인 니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사벨은 니나에게서의 어머니가 아니다. 이사벨은 니나의 어머니고 이사벨은 바로 객관적으로 니나 어머니며 나도 니나의 외삼촌이다. 관계는 내적으로 속격(屬格)—이처럼 산자의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인 것처럼 나의 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며, 그리고 나는 그 인물의 외삼촌이다—이며, ‘그 자체’가 무엇이든지간에 단지 물고기로서 표상된다는 것을 함의하는 “X는 누군가에게서의 물고기다”라고 하는 부류의, 외적이고 표상적인 연결이 아니다. 니나는 이사벨의 딸이지만 내 딸은 아니기 때문에 니나는 내게서의 ‘딸’이 아니다—왜냐하면 니나는 실제로 정확하게는 나의 누이의 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세계(real world)>라는 어구는 서 있는 위치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꿔내는 <어제>나 <내일>과 같은 것이다”(Whitehead 1929: 65, in Latour 1994: 197). 즉 관점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다. ‘어제’나 ‘내일’이라는 관념에 주관적인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나의 어머니’나 ‘너의 형’이라는 관념도 그와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종의 현실세계는 그 관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각기 다른 종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관점에 의해 각각의 종 동료들이 분기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사물에 대한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사물과 존재야말로 관점이다(Deleuze 1969: 203). 즉 여기서 문제는 ‘원숭이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Chency&Seyfarth 1990)가 아니라 원숭이를 통해 어떤 세계가 표현되는가, 원숭이는 어떤 세계에 대한 관점에 있는가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적 실질’은 이러한 타입에 관한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동일한 양친을 둔 두 개인이 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물고기, 같은 뱀, 같은 카누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종이라고 상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마존 지역의 우주론에서 인간과 인척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것들로서 종종 동물들이 사고된다는 것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나의 누이는 나의 처형의 아내인 것처럼—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간의 피는 재규어의 발효주다. 종들 간의 혼인을 이야기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화는 실로 무수히 많다. 인간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자식이 동물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부모와의 어려운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행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의 아날로지를 하나의 아날로지로 묶는 그 자체다. 이렇듯 퍼스펙티비즘이 교환들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퍼스펙티비즘의 교환의 양태(서두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퍼스펙티브의 상호성)로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교환 자체가 이 용어에 의해—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서—규정되어야 한다(Strathern 1988, 1992a, b).

 

이제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론을 입수했다. 그 존재론에서는 개별의 신체적 실질과 실체적인 형태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여기서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철학에서의 전통적인 대비를 불러온다면—사이에는, 혹은 ‘삶의 사실’과 ‘제도적 사실’—셜의 최근 저작(Searl 1995)에서 제시된 이원성을 불러온다면—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셜의 이 저작에 대해 간단하게 논해보겠다. 저자는 의식이란 독립된 실재성에 있는, 그가 삶의 사실과 객체라고 한 것—중력과 산, 나무와 동물(모든 자연종은 이 계층에 속한다)—을 그 존재, 동일성, 목적이,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특정의 문화적인 의미에서 유래하는, 제도적이라고 불리는 사실과 객체—혼인과 화폐, 도끼와 컴퓨터 등—에 대치한다. 문제가 되는 이 저작은 베르크(Peter Berger)와 루크만(Thomas Luckmann)의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구성』이라 불리는 것에 주의하자. (삶의 사실에 대한 언명을 포함한) 제도적 사실이 구축된다고 하지만, 삶의 사실은 구축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자연/문화의 이원론의 현대화된 버전에서 문화상대주의는 자연의 보편주의가 자연인 객체에 적합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화적인 객체에 대해 유효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논의를 셜이 우연히 착목했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모든 사실은 정신 내지는 제도적인 타입에 관한 것이며 모든 객체는 나무와 물고기조차 화폐와 카누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나무토막이나 종이조각으로서가 아니라 화폐나 카누로서)이며, 이 또한 특수한 실재성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와 이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라고. 이것은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며, 그것도 극단적이며 절대적인 모습을 띠는 상대주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애니미즘적인 퍼스펙티비즘의 존재론이 함의하는 하나는 자율적인 자연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의 ‘자연’이 다른 자에게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정적인 규칙, 혹은 제도적 사실을 표하는 정식이 “맥락 C에 있어서 X는 Y로 간주된다”(Searle 1959: 51-52)라고 한다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선주민적 사실은 바로 이 타입에 관한 것이다. “재규어의 맥락에 있어서 피는 발효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적 사실(셜의 정식에서 Y)은 보편적인 것의, 삶의 사실이 보편적이고 제도적 사실이 특수하다는 셜의 대안을 피해가는 어떤 것이다. 퍼스펙티비즘을 (모든 사실을 제도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들에는 문화적인 가변성이 있다고 결론내릴) 구축론자의 상대주의로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은 그 반대물로서 자연상대주의문화보편주의(이 표현은 라투르로부터 빌려왔다) 혹은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방식으로는 다자연주의의 하나의 사례다.

 

 

야생의 신체

 

아마존의 우주론에서 신체가 우수한 사회적 장치로서 나타난다는 관념—즉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동일한 타입의 존재를 통합하는 것—은 이 지역의 민족학에서 고전적인 질문을 새로운 조망 하에 재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마존의 사회들에서 신체성의 의의라는, 지금은 고풍스럽게 울려 퍼지는 이 주제(Seeger, DaMatta&Viveiros de Castro 1979)는 우주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주제를 통해 예를 들어 동일성의 카테고리—개별적이든 집합적이든, 민족적이든 우주론적이든—가 빈번하게 특히 식사의 실천과 신체장식 등의 신체적인 성구를 통해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식량이나 요리 제도의 상징적인 함축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익힌 것과 날 것”에서부터 피로족 사람들을 백인과 문자 그대로 차이화하며 피로족을 피로족으로 만드는 ‘진짜’ 음식(Gow 1991a)까지. 중앙브라질에서 ‘신체적인 실질 집단’을 규정하는 음식기피(Seeger 1980)에서부터 식습관에 연관된 존재의 기본적인 분류(Baer 1994: 88)까지. 공식성(共食性)과 식생활의 유사성과 먹이-객체와 포식자-주체라는 상대적인 조건의 개념적인 생산성(Vilaça 1992)으로부터 혼인, 식사, 전쟁 등과 관련한 타자와의 모든 관계의 ‘술어적’ 평면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편재성(Viveiros de Castro 1993)까지. 이 보편성은 신체를 구성하는 습관과 과정이 바로 동일성과 차이가 출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동일성의 확정과 사회적 가치의 유통의 경우 신체를 기호론적으로 정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Turner 1995). 아마존 사회체에서 관계성의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물의 자원적 제약—사회적 교환이 증여경제나 상품경제처럼 물질적인 객체화에 의해 매개되지는 않는 상황—과 (특히 그 가시적인 표면에서) 신체의 중층결정 간의 연결에 대해서는 터너가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리했으며, 인간적인 신체가 사회적인 객체의 원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신체의 사회적 구축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적인 기질의 문화화라기보다 시차적(示差的)으로 인간적인, 이른바 인간적인 신체의 산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특징지어짐으로써 신체를 ‘탈-동물화’하려는 갈망이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아무 특징도 없는 신체를 다른 인간적인 집단과 그 외의 종으로부터 차이화함으로써 특수화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차이를 낳는 퍼스펙티브의 장으로서 신체는 그 퍼스펙티브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차이화되어야 한다.

 

인간적 신체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계보투쟁의 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며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제어될 필요 때문이 아니다(Riviére 1994). 신체는 주체가 표현하기 위한 근원적인 도구임과 동시에 타자의 시야에 던져진 특단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신체가 사회적으로 최대한 객체화된다는 것, 즉 장식과 의례적 피로(披露)를 통해 표현되는 최대한의 특수화가 동시에 최대한의 동물화의 기회가 되는 이유다(Goldman 1975: 178; S. Huge-Jones 1979: 141-142; Seeger 1987 ch. 1&2; Turner 1991; 1995). 그때 신체는 깃털, 채색, 도안, 가면, 그 외의 동물적인 보철들로 덮인다. 의례적인 동물로 치장하는 인간은 초자연적으로 벌거벗은 자신의 신체의 ‘자연적인’ 특수성을 자신에게 드러낸다. 이 인간은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으로 나타남으로써 정신의 ‘초자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정신 모델은 인간적인 정신인 반면, 신체 모델은 동물적인 신체다. 그리고 주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화가 <나>의 총칭이 되는 형상을 띠고 자연이 <그것>의 형상을 띤다면 주체자신의 대상화에는 신체의 특이화—문화의 자연화 곧 문화의 신체화—를 요하게 되는 한편, 객체의 주체화는 정신의 수준에서 의사소통—자연의 문화화 곧 자연의 초자연화—을 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연/문화의 구분의 문제계는 인간-동물이 공유하는 애니미즘적 사회성의 이름하에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퍼스펙티비즘의 광명 하에 재독되어야 한다.

 

‘신체 모델은 동물적 신체’라는 사고를 지지하기 위한 중요한 논거는 아마존 민족지와 신화론에서 인간으로 ‘치장하는’ 동물, 즉 인간의 신체를 의복처럼 몸에 두르는 사례가 사실상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인간적인 신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신체는 의복에 싸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동물이 인간적인 의복과 장식을 몸에 두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적인 의복을 몸에 두르고 동물이 되는 것인가, 동물이 동물적인 의복을 벗고 인간으로 나타나는가, 이 둘 중 하나다. 인간적인 형상은 신체의 내부의 신체며, 원초적인 벌거벗은 신체—신체의 ‘혼’—다.

 

이러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체는 여건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신체의 계속적인 제작이라는 수법이 강조된다(Viveiros de Castro 1979). 신체적, 성적, 영양적인 유체의 공유를 통해—물질적인 본질(substantial essence)의 수동적인 유전이 아니라—개인을 적극적으로 동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친족 관념(Gow 1989; 1991a), ‘고기’로 기재되는 기억 이론(Viveiros de Castro 1992a: 201-207), 나아가 더 일반적으로는 신체에 위치지어진 지식 이론(Mc Callum 199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형성은 정신보다도 신체에서 이뤄진다. 신체의 변태, 즉 정태와 역능을 규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건이라기보다 행위수행적인 신체의 특징, 즉 신체가 ‘자연적으로’ 차이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신체를 차이화시켜야 한다는 사고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항상 그 가능성이 표명된다. 종들 간의 변신(metamorphose)과 분명히 연계되어 있다. 신체를 탁월한 차이화 장치로서 조정함과 동시에 그 변신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론에서는 특이성이 정신의 특징으로 상정되지만, 이를 통해 (이를테면 독아론은 항상 문제시된다 해도)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 표명되는 것도 아니라면, 교육이나 종교적인 회심 등의 과정에 더 잘 일어나는 심적 내지는 정신적인 변태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바로 정신이 심적이 필요로 하는 차이의 장이기 때문이다(서양인은 인디오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신체적인 변신은 영적인 회심이라는 유럽적인 주제인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는 그 반대물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이라는 복합체에서 영적빙의라는 양의성 없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희귀한 것도 신체의 변신이 우세하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선주민의 종교적 회심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주민의 ‘문화적응’ 경험은 정신적인 동화라는 사고보다도 서양의 신체적인 습관의 수용과 신체화—음식물, 의복, 민족 간의 섹스, 육체적인 능력으로서의 언어 등—쪽에 초점을 둔다. 사회문화적인 변용에 관한 인류학의 이론은 혼혈이나 인종적 동화가 민족-문화적 구분의 상실과 연결된다는, 서양의 민족발생론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와 반대로 문화적응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변화, 즉 무엇보다도 현지의 ‘신념’에 악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과정으로서 규정된다. 문화적응은 딱 문화가 종교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되는 것처럼, 종교적 회심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더욱 세밀한 채색을 가하는 것 같은 아비투스의 개념조차 문화적응에 휘말린 신체의 변화는 그 원인보다도 ‘집합적 표상’의 수준에서의 그 효과로서 이해된다. 생각해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변신이 평온한 과정이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가치가 부여된 목적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독아론이 우리의 우주론을 위협하는 환영(幻影)—동종의 동료들이 인식할 수 없다는 공포의 확장, 잠재적으로 절대적인 정신의 특이성을 고려해둔다면 실은 그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라면, 변신의 가능성이 표현하는 것은 그 대극에 있는 공포, 동물로부터 인간을 이미 차이화할 수 없다는 공포, 나아가 자신이 먹은 동물 신체에 잠재된 인간적인 것을 보는 공포다(Goldman 1975: 183; Brightman 1993: 206ff; Erikson 1997: 223). 이것은 퍼스펙티비즘의 더욱 중요한 민족지적 반복 속에서 번역된다. 동물들의 옛 인간성이 가시적인 형상에 숨겨진 현재의 영성(靈性)에 부가되기 때문에 신화적으로는 인간과 동일 실체인 몇몇 동물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명된다면, 특정 동물을 먹기 전에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가 필요하다는, 식량금기 혹은 예방책으로서 성립되는 복합이 산출된다.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는 동물의 영을 무력화하고 그 고기를 식물로 구체화하든지 덜 인간적인 다른 동물로 의미론적으로 환원한다—이 모든 것은 사람을 먹는 보복의 포식으로서 이해되는, 질병의 모습을 취하는 복수의 위협 하에 있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은 포획물의 영, 인간을 동물로 변태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치명적인 전치를 통해 포식자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독아론이라는 문제와 동등한 것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이다. 독아론이라는 문제가 신체적인 유사성이 정신 사이에 실재하는 공동성을 보증하는 것인지에 대한 염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은 정신의 유사성이 실재하는 신체적인 차이에 우월한지를, 그리고 먹힌 동물이, 가령 샤먼에 의한 탈주술화의 시도가 있다 해도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지를 위태로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근원적인 독아론자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세련되거나 문자 그대로 식인적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될 이유는 없지만.

 

아마존의 카니발리즘이 의도하는 것은 적의 주체적인 상(相)을 흡수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적(敵)은 동물의 신체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탈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주체화된다(Viveiros de Castro 1992a; Fausto 2001 참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샤먼의 움직임 속에 선량한 부분은 죽은 동물을 탈주술화해서 먹기 위해 어떤 위험도 존재하지 않도록 순수하게 자연의 사체로 변신시킨다는 점이다. 반대로 정령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그것들은 한층 더 탁월한 대식가, 즉 사람을 잡아먹는 자가 된다. 따라서 탁월한 동물적 포식자는 정령들이 즐겨 나타나는 형상이 된다. 나아가 왜 먹잇감인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 보는가, 포식자는 우리를 먹인감인 동물로 보는가, 왜 먹히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동물은 정령과 관계하는 경우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있다.

 

변신의 관념은 이미 몇 번이나 언급한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교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신체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장’이라는 사고와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을 해석할 때에 상기되는 외견본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양립시켜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중요한 오인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체적인 ‘외견’을 비활성적이고 허위인 것으로서, 정신적 ‘본질’이 활성 있는 진정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오인이다(골드만의 결정적인 견해를 참조할 것. Goldman 1975: 63, 124-145, 200).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의복과의 관계로 신체에 대해 말할 때의 사고에서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신체가 특정 종의 의복이라기보다 의복이 특정 종의 신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피부에 효과적인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적절한 의례적 맥락에서 이용된다면, 몸에 둘러진 인물의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태시키는 힘을 저장한 동물의 가면이 사용된다(혹은 적어도 그 원리가 알려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면-의복을 두르는 것은 동물적인 외형 밑에 인간적인 본질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신체의 힘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샤먼이 사용하는 동물적인 의복은 코스프레가 아닌 도구다. 그것은 카니발 의복이 아니라 다이빙용품이나 우주복에 가깝다. 잠수복을 몸에 두를 때의 지향은 수중에서 숨을 쉬게 하는 것,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를 기묘한 덮개 밑에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물 사이에서 인간적인 타입의 내적인 ‘본질’을 씌우는 의복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동물 각각을 규정하는 정태와 역능을 품고 있는 변별적인 장비다. “외견은 속일 수 있다”(Hallowell 1960; Riviére 1994).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인상으로는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주제로 다뤄지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이야기의 관심은 그것이 숨기는 것보다도 이 의복이 이루는 것에 있다. 게다가 존재와 그 외견 사이에 있는 것이 신체다. 그리고 그 신체는 단지 그것인 이상의 것이다—이야기 그 자체는 어떻게 외견과 일관되지 않는 신체적인 제스처에 의해 항상 외견이라는 ‘가면이 새겨지는’ 것일까를 이야기한다. 즉 다음과 같다. 신체는 처분가능 및 교환가능하며 그 ‘배후’에는 형상의 측면에서 인간으로 확정 가능한 ‘주체성’이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관념이 외견과 본질 사이에서 우리가 품는 대비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 관념은 신체의 객체적인 교환가능성이 정신의 주체적인 동등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 틀에서 해석될 수 있는 남미 민족지학의 또 하나의 주제는 산자와 죽은 자 간의 사회학적 불연속성이다(Carneiro da Cunha 1978).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근본적인 구분은 정신이 아닌 신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죽음은 신체적인 파국이며,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교통하는 ‘활력’을 억누르는 차이화 장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은 동물의 시야로 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을 죽은 자의 세계를 보는 양태로 향한다. 그것은 산자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로부터 결정적인 순간까지 분리되므로 죽은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인 신체와의 분리에 의해 규정되는 영(靈)으로서 죽은 자는 논리적으로 동물의 신체로 옮아간다. 이것은 왜 죽은 자가 동물로 변태하는지, 또 그와 마찬가지로 왜 인척이나 적대자 등의 다른 신체적인 타성의 형상으로 변태하는지가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애니미즘은 인간과 동물 간의 주체적이고 사회적인 연속성을 끌어내고, 그 육체적인 보완물인 퍼스펙티비즘은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사이의 객체적이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연속성을 확립한다. (조상숭배에 기초한 종교는 그 정반대를 가정한다. 즉 정신적 동일성이 죽음이라는 신체적인 장벽을 뛰어넘으므로 산자와 죽은 자는 동일한 정신을 표하는 만큼 동일하다—이렇듯 한편에서는 초인적인 조상의 영의 빙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죽은 자의 동물화와 신체적인 변신이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내포하는 다양한 논점들을 이제까지 검토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신의 종-횡단적인 균일성에 부여된 우주론적인 역할이다. 내 생각으로 이 속에서 특정 카테고리의 관계론적인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악평일색이었고 유용성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초자연>이라는 카테고리다. ‘천체 이상’의 유형이 속하는 우주지(宇宙誌)의 영역으로 라벨링되거나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지향성을 가진 존재의 제3의 유형—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내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정령’이다)—을 규정하는 것 등 잘 알려진 사용례와는 별도로 초자연의 관념은 특정한 관계적인 맥락과 특수한 현상학적인 질을 지시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 맥락과 질은 사회적인 세계를 규정하는 간주관적인 관계로부터도 동물의 신체화의 ‘간-객체적 관계’로부터도 마찬가지로 구별된다.

 

대명사적인 계열과의 유사(Benvenisete 1996a, b)에 따라 (혼이나 정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재귀적인 <나>와 (신체적 타성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자연이라는 비인격적인 <그것> 사이에는 간과된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너>라는 2인칭이며, 그 관점이 <나>의 관점의 잠복된 메아리인 것처럼, 다른 주체로서 받아들여진 타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관념이 초자연적인 맥락을 규정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체가 우주론적으로 우세한 다른 관점에 포획된다는 예외적인 맥락, 그가 비-인간적인 퍼스펙티브의 <너>인 맥락에서는 <초자연>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형상이다. 인간적인 나를 이 <타자>에게서 <너>로 대상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의미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상황의 전형은 처음에는 단순히 동물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로부터 정령이나 죽은 자로서 나타나 인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를, 인간이 숲 속에서 마주친다는 것이다. (타일러의 텍스트에서는 이 의사소통의 역동성이 정교하게 분석되어 있다(Taylor: 1993b). 이 만남은 응답자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비-인간적인 주체성에게 정복되면 그것들 쪽으로 옮겨가서 발신자와 동일한 부류의 존재—죽은 자, 정령, 동물—로 변태해버리기 때문이다. 비-인간에게서 <너>라고 불려 그에 응답한 자는 그 존재의 ‘2인칭’의 조건, 즉 그에게서의 <나>의 위치에 이미 담겨 있는 비-인간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자다. (정의상 혹은 공식적으로 다자연적인 존재인 샤먼만이 여러 퍼스펙티브를 왕래할 수 있고 자신의 주체의 조건을 잃지 않고 동물 혹은 영적인 주체로부터 <너>로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을 <너>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만남의 기준형식은 타자가 ‘인간적’임을 서둘러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자동적으로 응답자를 탈인간화하고 소외시켜서 먹잇감—동물—으로 변신시키는,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견의 배후에 숨겨진 것으로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품고 있는 염려가 진정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외견이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무엇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느 쪽이 지배적인 관점인지, 즉 어느 쪽의 세계가 작동하는지가 결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위험하다. 특히 모든 것이 인간이며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때에는.

 

 

맺음말을 대신해서

 

서로 대조해본 두 개의 우주론적인 관점—내가 ‘서양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통약불가능하다. 컴퍼스라는 것은 한쪽의 다리를 고정하고 다른 한 쪽의 다리가 그 주변을 돌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응하는 다리를 우리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다른 다리가 문화적인 다양성의 축을 그려내도록 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론적인 컴퍼스의 기준이 되는 다리로서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에 대응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자연’을 계속적인 변화와 변이에 위탁하고 있다. 양쪽 다리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컴퍼스—상대주의의 극단—는 기하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컴퍼스의 끝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다리가 머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이 구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머리 부분의 끝 주변을 배회한다. 라투르(Latour 1991)가 정교하게 논한 것처럼 <이론>이 실천이라는 ‘중간세계’를 실태나 원리 등의 대치된 영역으로 분리하고 순화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끝에 있는 점은 우리의 근대에서 이론-외적인 실천에서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연>과 <문화>처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아마도 모든 신화적 사고—는 그 정반대의 궤적을 선회한다. 왜냐하면 신화론의 대상은 <자연>과 <문화>의 분리가 아직 순수한 잠재성이라는, 바로 머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퍼스펙티비의 잠세적인 원천에서 절대적인 운동과 제한 없는 다원성은 경직된 부동성과 형용할 수 없는 통일성을 구분불가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점을 이야기해보겠다. 선주민이 옳다고 한다면 두 관점 간의 차이는 문화적인 문제도 아니고, 하물며 ‘정신성’의 문제도 아니다. 상대주의와 퍼스펙티비즘, 혹은 다문화주의와 다자연주의 간의 대조성이 우리의 다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닌 선주민의 학설 하에서 독해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퍼스펙티비의 상호성은 상호성 그 자체로 적합하다. 그리고 차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사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중 몇몇은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똑같이 언제나 잘 사고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보는 아마도—가령 이 용어가 그 경우에 더 적합하다면—의식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항상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류는 그 긴 역사를 통해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엮여왔을 것이다(Levi-Strauss 1955b: 255)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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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현대사상 2015년 12월 <인공지능> 특집호에 실린 '인공생명'에 관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규명한다면, 인공생명은 무의식을 규명한다. 역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규명되어야 인공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생명은 인공지능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생명을 통해 무의식이 규명될 수 있다니,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지능 개념이 인공지능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공지능이 지능 개념을 아우르고 또 생명 개념이 인공생명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인공생명이 생명 개념을 아우른다는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이 있다. 심지어 기술이 의식을 앞서는 singularity에서 더 나아가 다시 의식이 기술을 앞서가는, 그러나 이번에는 기술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기술을 이끌어간다는 post-singularity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한편의 논문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그러한 singularity가 예술, 건축과 어떻게 교차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건축과 신체의 관계를 논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건축의 형식으로서의 순수한 신체'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파악했을 뿐이다. 이에 관해서도 다른 한편의 글을 더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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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화하는 사회와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케가미 타카시(池上高志 복잡계 연구자)

 

 

최근 10년 간, 그 이전까지의 과학발전과 비교하면 과학에 대한 이해와 기술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데이터흐름(data flow)의 존재로서 그 압도적인 양, 압도적인 복잡함, 초고속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과학과 비교도 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의 양이 어느 정도 쌓여 복잡화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에 ‘생명화’가 깃든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 이론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

 

인공물에 생명성이 깃드는 것을 ‘인공생명화’라고 일러두자. 다양한 서비스와 미디어의 배후에 있는 기술이 자동화되면서 그 작동방식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제어가 미치지 못하게 되고, 편리성뿐만 아니라 시스템 고유의 자율성과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와 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인공생명화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해방식은 생명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창발성을 기본으로 한’ 이해방식이다. 왜냐하면 자동화되는 그 작동방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는 상향식(bottom up)을 찾아내어 이해한다는 태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하향식(top-down)의 인과적인 발생에서 이해한다는 태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즉 세계는 점차 인공생명화된다. 예를 들어 딥러닝(Deep Learning)을 비롯한 기계학습방법이 데이터와 함께 공진화함에 따라 데이터센터가 신전이 되고 구글이 대학의 연구실을 흡수해가며 학문을 인솔한다. 이렇듯 이러한 흐름 자체가 세계의 인공생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의 인공생명화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동화와 인공생명화

 

기술발전의 한 방향은 자동화다. 현재 모든 것의 자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의 로봇이나 비행기의 오토파일럿은 인간을 대신해서 장치를 조작하고 조종하고 있다. 티켓과 식품이 다양한 자동판매기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이 또한 상점에서 사람이 파는 것 대신에 기계가 파는 것이다.

 

이 자동화된 기계들은 아직 생명화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것은 이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의 예측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근 상당히 멀리 갔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가정에 도입된 “Pepper君”이라는 로봇. Pepper군은 실은 우리의 예측을 쉽게 뒤집었다. 2015년 7월의 TED×Tokyo에 Pepper군이 개발자인 미츠요시 슌지(光吉俊二)와 함께 등장했다. 그런데 Pepper군은 팔을 휘적거리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했다. 마치 아이가 보채는 것과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Pepper군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혹은 자동차의 자동운전이 구글 등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자동차라는 것은 본래 말 혹은 인간을 대신해 물건을 옮기기 위한 자동기계다. 장해물을 만나면 자동정지한다거나 속도를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이제까지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 운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전 그 자체도 자동화되어 인간은 탑승만 할 뿐이다. 처음에 이 자동운전 카-를 유튜브인가 어디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일반도로를 보통속도로 주행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험코스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Pepper군에 대해서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자동운전 카-에 대해서는 사람이 운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모두 ‘자연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Pepper군과 구글 카- 등의 진보한 기술ㆍ인공물은 섬뜩함과 생명성을 띤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이 사회에서 인공생명화된 최초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즉 인공생명화란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ㆍ미디어가 자동화하여 그 작동방식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자연현상화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스템의 조작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조작이 아닌 소프트웨어 그 자체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기계를 보고 “이거, 어떻게 하면 움직이지?”라는 감상을 갖는 것은 그 조작에 흥미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자연현상’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든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서 이해를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상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기술이 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여기서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공생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공생명이 이제까지의 우리의 생명관을 변신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공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논의되는 생명보다 ‘광범위하다’. 인공생명화하는 기술은 우리의 제어를 벗어나 자율성ㆍ항상성ㆍ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을 갖는다. 자율성은 자동화와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항상성이란 자신의 기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자기발전성이란 우리와의 관계성과 자기 자신의 기능을 혁신시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자동기계화와 인공생명화 간의 차이는 사회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의 구축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이 ‘사람인지 프로그램인지’를 대화식의 테스트를 통해 표면화시켰듯이 생명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무엇이 생명인가’라는 정의항목을 리스트업할 수 있다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비생명적인 머신’이 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비생명적인 머신이라면 이미 충분히 생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튜링테스트와 달리 여기서의 인공생명은 ‘언어적인 대화의 성립’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스며든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방식으로도 구별된다. 언어가 의식의 산물이라면, 사람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인공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튜링테스트보다도 훨씬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의 관계성으로서의 인공생명의 문제를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 위해 다음으로 ‘겉보기의 생명현상’을 다뤄보겠다. 이것은 생명의 ‘속살’을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이야기다.

 

 

마네킹 강연과 신선한 생명

 

마네킹 강연이란 마네킹에 3D 프로젝션ㆍ매핑을 가해서 표정 등을 만들어내어 ‘강연’을 하게 하는 시도로서, 2013년 3월 사카베 미키오(坂部ミキオ)와 야마가타 요시카즈(山縣良和)라는 두 젊은 패션디자이너가 『絶ㆍ絶命展』에서 발표한 전시수법이다. 이 전시는 시부야 파르코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마네킹 얼굴의 입체면에 맞춰서 이미지를 투영하고 인간의 얼굴을 마네킹에 재구성한다. 실제로 투영된 것은 몇몇 연구테마에 대해 강연하는 자신들의 얼굴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아바타에 의한 가상세계 강연이다. 배경에는 각각 강연 내용에 대응되는 발표용 슬라이드가 깔린다. 마네킹 옷의 직물, 시뮬레이션 되는 큰 무리의 새들의 동영상, Mind Time Machine이라는 세 개의 스크린과 15개의 비디오카메라, 그 배후의 인공 뉴트럴네트워크(neutral networks)로 만들어낸 뇌 시스템 동영상, 움직이는 기름방울의 실험동영상 등 연구테마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絶ㆍ絶命展』은 12일간 지속된 전시회로 ‘삶’과 ‘죽음’과 ‘신생(新生)’의 세 구간으로 나누어 각각 나흘씩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우리가 젊은 두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해낸 테마가 ‘신선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신선함’과 패션의 ‘신선함’의 연결을 시도해본다는 뜻이다. ‘신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업데이터할 가능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신선한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인공생명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생명의 정의는 자기복제 혹은 자기유지 등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규정된 것에 비해, ‘신선한 생명’은 주관적 혹은 감각질적인 질문으로서 최종적으로 혹은 처음부터 추구해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질이 없는 생명 시스템은 기능적인 생명과 같은 기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생명 연구에 대한 이 도전의 응전으로서 절명전(絶命展)에 출품한 것, 그것이 마네킹 강연이었다.

 

각각의 나눠진 세 기간에 조금씩 다른 실험을 시도했다. ‘삶’ 기간에는 마네킹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투영했고, ‘죽음’ 기간에는 앞서의 모습에 스크래치나 반전 등을 가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패턴이 얼굴에 투영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뜻밖의 효과를 내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즉 사람은 한 가지에 길게 집중할 수 없다. 반드시 주의를 잃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관람객을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마네킹에 신선함을 가미했다. 그 때문에 ‘신생’의 기간에도 같은 효과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생’의 기간에는 또 하나의 응전으로서 실제 인간 모델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프로젝션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섬뜩함이 출현하게 된다. 안드로이드 개발의 일인자인 이시구로 히로시는 “사람은 모두 섬뜩하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말을 체현했다. 이 섬뜩함은 ‘죽음’의 기간에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효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관람객을 계속해서 붙잡아두려고 했고, 그런 시도 속에서 사람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을 투영함으로써 발생한 ‘효과’는 차원이 다른 섬뜩함을 만들어내었다.

 

로봇을 기계적인 것에서 인간적으로 것으로 끌어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이 겹치는 데서 오는 상당한 섬뜩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섬뜩한 골짜기’다.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시구로는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 배후에는 섬뜩한 골짜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섬뜩한 골짜기에서 전형적인 인간의 이미지로부터 일탈한다. 그 일탈이 신선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선함이라는 것은 예측을 벗어나는 ‘보지 못한 것’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네킹 강연을 본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의 일탈’을 ‘보는 측의 상상력’으로 보충하고자 한다. 신선함은 섬뜩함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일탈적인 섬뜩함은 신선함을 구성한다. TED×Tokyo에서 난폭하게 굴었던 Pepper군에게서 본 것은 바로 섬뜩함에서 비롯된 실제성(actuality)이다. 이러한 섬뜩함에서 생성된 신선함은 의식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생명이 우리 사회에 출현하기 시작하면 생명인 우리의 의식도 변혁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다—인공생명화된 시대의 인간상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인간이란 인공생명화되는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ㆍ시대를 변혁하는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패션이란 그 하나의 양상일 것이다. 아티스트인 아라카와 슈사쿠(荒川修作)는 ‘착륙장(landing site)’이라는 아이디어로 미타카 천명반전주택(三鷹天命反転住宅)을 지었다.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주택이란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가치와 언어를 만들어내어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다. ‘착륙장’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감각기관은 모순을 일으키고, 그 결과 순수한 신체와 자기 자신 혹은 건축이라는 형식에 빠져든다. 그 형식 속에 없는 것을 보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려는 능력은 인간의 기본적 성능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능적인 것(먹이를 찾아내거나 적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발휘하는 어떤 것)으로 회수하게 되면 신체와 건축은 상실되고 만다.

 

『絶ㆍ絶命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삶’의 기간에 행해진 통상의 프로젝션ㆍ매핑을 ‘죽음’의 기간에서 다양한 효과를 통해 파괴해보면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신선한 생명’이 잠깐씩 나타난다. 효과는 이형적(異形的)이다. ‘죽음’에서 생명성이 반전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카와의 말을 빌려 말하면, 그곳이 ‘착륙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적으로는 주의집중의 문제이지만, 더 파고들면 파괴됨으로써 출현하는 순수한 신체라는 형식이 드러난다. 섬뜩한 골짜기는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내재화되면서 베일에 덮이는 것이다. 은폐됨으로써 보는 측의 상상력을 상기시켜 신선함(freshness)을 이끌어낸다.

 

아라카와와 깅스는 그들 자신이 쓴 『건축하는 신체』라는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의 제목은 처음에는 ‘생명을 건축한다’였다. 그런데 결국 제목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자 한 것은 생명의 재구축 혹은 생명을 재구성(reconfigure)함으로써 생명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인공생명적인 접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인공생명 연구가 아라카와&깅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과 정반대인 이유를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생명 연구의 많은 부분이 생물과 유사해지도록 자기복제와 자기유지 등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아라카와&깅스는 눈, 귀, 코, 입 모든 것을 빼앗고 그 다음에 남는 ‘신체’의 형식 혹은 생명성이라는 형식을 순수하게 추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지(天命反転地)’는 형식=건축으로서의 신체 혹은 생명이 내려앉는 장소가 된다. 향후의 인공생명은 아라카와&깅스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향해갈 것이다. 그 목적이야말로 “지금 당장 도움을 주는 과학”을 넘어선 가치의 창조다. 인공생명화된 세계에서는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재창출되어야만 과학 또한 창조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아라카와&깅스가 목표로 했던 것이 생명의 재구성(reconfigure)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술적 특이점’이다.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의 문제

 

기술적 특이점은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의 가치가 바뀌는 문제를 다룬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45년에는 AI가 인류보다도 훨씬 현명해질 것이며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불연속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저에서부터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예부터 논의되어온 나노기술에 의한 새로운 의료기술의 진보나 수명을 20년 연장시킨다거나 과학의 오토메이션화가 진행됨으로써 교육의 내용 그 자체가 바뀐다거나 하면 지금까지의 세계관ㆍ인생관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시스템의 나노기계화에 의한 치료가 실현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다빈치(da Vinchi)’라 불리는 수술원조로봇은 숙련된 외과수술을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 과학의 오토메이션화에 대해 말하면, 코넬 대학의 ‘유레카 프로젝트’는 실제 데이터에서 배후의 수리모델을 자동적으로 산출할 수 있고, 캠브리지 대학의 아담과 이브 로봇은 합성생물학에서의 가설과 검증을 자동적으로 행할 수 있다.

 

여하간 이러한 논의로부터 기술적 특이점의 문제가 촉발되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SpaceX의 창시자인 엘론 머스크와 같이, 그러한 기술혁신에 의한 세계가치의 전환을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극단적으로는 SF의 터미네이터, 공각기동대, 혹은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201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직업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특이점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넘어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변하여 폭발적인 기술의 진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년 전의 인간의 가치관과 현재 인간의 가치관이 불연속적이듯 향후 인간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다. 가치관의 개혁은 철학서와 종교에서 일어나기보다 현재의 기술변혁에 의해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AI는 인공생명화하는 기술 중 하나로서 사이드효과에 불과하다. 닉 보스트롬(Niklas Boström)이 말했다시피 “자율적으로 작업을 판단해서 실행하는(Sovereign)” 타입이 등장하는 순간 인류는 위협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 Sovereign이라는 타입이 인공생명을 뜻한다. da Vinchi 기술로봇도, 유레카도 인공생명은 아니다. 그것은 기계화된 도구 혹은 진보된 프로그램이다. 그곳에는 SF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기술은 없다. 그렇다면 인공생명이 만들어진다면 위협이 될까? 나는 인공생명화된 기술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다만 그것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의 기술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기술이 필요하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요구된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과 다시금 해후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인공생명

 

초현실주의는 본래 어떤 사물의 특정한 사용법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른 것들과 합성하여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미로, 키리모 등의 아티스트들이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트랜스시켜서 무의식의 구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흐름이 오토마티슴(automatisme)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것을 좀 더 형식화한 아티스트가 마르셀 뒤샹이다.

 

뒤샹의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이 있다. 최근 아티스트인 모리 유우코(毛利悠子)가 이 작품이 도쿄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견학을 왔다. 모리 유우코는 다양하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운드아트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젊은 예술가다. 예를 들어 종이가 천천히 말려들어가면서 먼지나 흙을 묻히고 그것이 악보의 역할을 한다. 그것을 센서로 읽어 들여서 모터를 움직이게 하여 음이 생성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은 환경의 노이즈를 음으로 변환시키는, 즉 장치 자체의 내부 상태로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인 장치다. 이것은 또 다른 인공생명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와 함께 도쿄대 미술관에서 뒤샹의 작품제작의 메모를 보고 처음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소재의 설명이다.

 

그림. 마르셀 뒤샹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도쿄대학 교양학부 미술박물관 소장.

 

<신부> 부분

ㆍ신부

약한 실린더가 있는 모터, 사랑의 가솔린 저장고, 욕망의 마그네트 발전기 등

ㆍ높은 곳에 게시, 은하

레터박스, 알파벳, 환기통, 그물망

 

<독신자> 부분

ㆍ수컷 모형의 아홉 개의 거푸집, 제복과 틀에 박힌 묘지, 독재자 기계

사제, 헌병, 경찰관, 카페도어보이 등

ㆍ물레방아가 있는 고랑

물레방아, 고랑, 사륜차

ㆍ모세혈관

ㆍ여과기, 파라솔

ㆍ초콜릿 파쇄기

총검, 장식용 리본, 롤러, 루이 15세의 권좌

ㆍ가위

ㆍ안과의사 증인, 검안도

 

요컨대 이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은 서로 무관계한 구성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아라카와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의미의 메커니즘’ 그 자체이며, 형식으로서의 인공생명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가진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압살시킨 다음, 전체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처음부터 유념해왔다.

 

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본래 초현실주의가 테마로 한 무의식을 폭로하고자 한 활동, 우리의 마네킹 강연, 이시구로 히로시의 안드로이드, 그리고 아라카와 슈사쿠의 건축하는 신체는 무의식을 건드리거나 혹은 무의식을 시스템의 설계원리로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AI연구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으로서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어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의식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식이라는 것은 거대한 무의식의 극히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AI가 다루지 않은 창조성, 자기 참조성, 욕망과 유희가 무의식 안에 있다. 따라서 어떻게 무의식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열쇠가 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인공생명화가 지금 사회로 향하고 있다. 

 

 

池上高志 「人工生命化する社会とシュルレアシスム」 『現代思想』 2015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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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인 흐름에서 들뢰즈 계열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의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10년 전 글이고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했는데,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주체와 객체에 관한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버리자는 그의 주장처럼 이 글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예상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하고 나니 그 어격들이 ‘상식’처럼 느껴진다. 언어를 관통하는 바람! “바람의 인류학”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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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

 

 

팀 잉골드(Tim Ingold)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느끼는 감각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감각을 정립된 사고의 범주나 규범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야외/열린 공기(open air)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하늘이나 대기를 순환하는 것일까? 그것들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대기가 우리 혹성을 감싸고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원을 그린다고 한다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어떤 형상이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하늘로 이뤄진 이 열린 세계의 밖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바람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열린 곳에 거할 수 있을까? 열림이 닫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바람은 어떻게 부는 걸까? 나는 지금부터 ‘야외/열림’(in the open) 속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다음에서 논할 것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가 지면에 의해 분할된 하늘과 대지라는 상호 배타적인 반구로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흐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은 외부로서의 주변과의 촉각적인 접촉을 가늠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이 혼합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호흡하며 땅을 형상화하는 뒤섞인 삶-선들(life-lines) 속에서, 하늘의 바람과 빛과 습기는 끊임없이 경로를 자아내면서 대지의 물질과 결합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본고는 네 단계를 밟는다. 먼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하늘의 현상이 쉽게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거주기능의 지면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드러나듯이 사람과 사물만 거할 수 있는 지면과 새와 구름을 뺀 빈껍데기뿐인 하늘이라면, 그 하늘은 실내공간을 모델로 하는 세계의 유비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열린 세계에서 존재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열린 객체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매질(媒質)의 흐름에 한결같이 침투하기 때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유기체가 매질로부터 공기를 취하면서 방출하는 호흡과정은 모든 생명에 근원적이다. 마지막으로 열림 속에 거하는 것은 기후-세계(weather-world) 속에 거하는 것임을 밝힐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지속하는 가운데 바람, 비, 햇빛, 그리고 대지와의 결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을 어떻게 습득하는지에 관해 인지발달심리학의 영역에서는 현재 몇몇 논쟁이 진행 중이다. 많은 연구는 우주에 둘러싸인 견고한 구체로서의 대지라는 ‘올바른’ 지식은 모든 곳의 아이들이 그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세계를 이해할 때 맨 처음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전제와 대립함을 시사한다. 그 전제에서 지면은 평평하다. 그리고 만일 지지대가 없다면 사물은 낙하한다. 대지는 공처럼 둥글며 사람들은 낙하하지 않고 그 표면의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다는 반직관적인 이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역사적 패러다임과 비견될 만큼 하나에서 열까지 개념적인 재구축이 아이들의 정신 속에서 요청된다. 6세에서 11세까지의 아동의 경험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대지에 대한 사고가 팬케이크와 같은 평평한 대지라는 최초의 멘탈 모델에서 시작해서 이 전제를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은 정보와 조정하기 위해 아이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중간적인 모델을 거쳐 최종적인 구 모양의 대지에 이른다는 발달의 시퀀스를 특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osniadou 1994; Vosniadou&Brewer 1992; 그림 1 참조).

 

그림1. 대지의 메타모델. Vosniadou&Brewer(1992: 549)에서 게재.

 

그런데 이 연구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이 실험에서 직면하는 조정의 문제는 세계에 대한 아이들 스스로의 직관 혹은 ‘소박한 이론’에 관여한다기보다 말한 것 혹은 질문에 의해 유도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험상황의 요청과 관계한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이 비판자들은 실험 중의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에 대한 어떤 신념이나 직감 혹은 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오픈마인드적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의 지식은 교사 등의 지식을 가진 성인뿐만 아니라 교실 한구석에 있을 법한 지구의까지, 발판이 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획득된다. 여기서 넘어야 하는 최초의 관념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적절한 발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구의의 ‘과학적’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기성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에서는 그 그림들을 그들 스스로 그리게 하거나 대화에 답하게 했을 때 작은 아이들과 큰 아이들 간에, 나아가 아이들과 어른들 간에 그 이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나는 이 논의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지식의 획득이 생득적인 정신구조에 의해 결정되는가 혹은 학습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더 근저적으로 의존하는가라는, 심리학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논쟁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진영의 공통된 요소다. 이 두 논의 진영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다른 인식들은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모두 잘못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더욱 기묘한 것은 대지가 있는 장소에는 하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두 진영이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여하간 하늘의 성질과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서 개략한 논쟁에서 대립적인 각각의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에서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두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의 질문에 응한 여섯 살의 에단은 대지는 공의 형상을 취하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밑을 보아야 하고 대지는 우주(space)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험자가 에단에게 대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대륙과 같은 형태의 윤곽을 그려 넣는다. 다음으로 실험자는 “그러면 하늘을 그려줘”라고 말한다. 당황한 에단은 “하늘은 형태가 없어”라고 반론하면서 “우주를 말하는 거지?”라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을 그려야 했고 대지를 나타내는 원 주변에 또 하나의 둘레를 덧그린다(Vosniadou&Brewer 1992: 557; 그림2 A 참조).

 

그림2. A: 에단이 그린, '하늘'에 둘러싸인 구형의 대지. B: 다아시가 그린 하늘과 (집이 있는) 지면 및 구형의 대지. Vosniadou&Brewer(1992: 558)에서 게재.

 

두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는 대지, 사람들, 하늘에 관한 다음의 항목들에서 선택 가능한 16개의 조합이 하나씩 그려진 그림카드 한 세트를 준비했다. 대지: 고체의 구/평평한 구/떠 있는 구/원반, 사람들: 빙 둘러 서 있다/위에만 서 있다, 하늘: 빙 둘러 있다/위에만 있다. 아이들(5세에서 10세)과 어른들까지 포진된 참가자들에게 각각 우선 현실의 지구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카드를 선택하게 했다. 다음으로 ‘가장 비슷한 것’에서 ‘가장 비슷하지 않은 것’까지 순위를 정하기 위해 남은 카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밟아나갔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52-4). 피실험자의 3분의 2정도는 최초의 선택지로서 고체의 구를 빙 두른 사람들과 하늘이 배치된 조합을 선택했다. 이 조합의 그림에서 대지는 녹색과 갈색이 섞인 구로 표현되고 경직된 레고 모양의 사람들이 그것을 빙 둘러 서 있으며 구름을 묘사하는 것 같은 둥실둥실한 하얀 문양이 드문드문 그려진 강물 색의 배경을 하고 있다(그림3). 연구자는 대다수의 참가자들의 이 선택이 “지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드러낸다”고 설명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55-7). 그러나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역설적이다. 구 모양을 한 고체의 대지의 바깥 표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배치되는 한편, 하늘은 대지의 배경으로 깔리고 뒤를 쳐다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지를 구로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관점은 구름이 점재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림3. 사람들과 하늘이 에워싼 구형의 대지. Nobes et al.(2005: 54)에서 게재.

 

구 모양의 대지와 하늘을 한 장에 그려 넣으려는 시도에 수반되는 관점의 이중성은 두 번째 실험의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실험의 참가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단은 실험자가 하늘이 아닌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주는 우리 주변 일대에 있다는 이해를 전달하기 위한 의사표시로 바깥쪽의 원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실험의 다른 참가자인 아홉 살의 다아시의 반응은 조금 색다르다. 다아시는 실험자의 요청에 응하여 둥근 대지를 그리고 달과 별 또한 그려 넣었다. 이때 실험자는 에단에게 한 것과 똑같이 다아시에게도 하늘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다아시는 이 질문에 당황한다. “그것은 뭔가 이상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해결책은 구름의 밑단과 매우 비슷한 대충 몇 개의 수평선을 종이 상단에 이미 그려져 있는 대지, 달, 별의 위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험자가 “사람들은 어디에 살지?”라고 묻자 다아시는 종이 하단에 밑 부분이 있는 것처럼 집을 그려 넣었다. 실험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다아시는 또 다른 집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물었을 때 다아시는 결국 실험자의 요구에 굴복하여 집 하나를 지우고 막대 모양의 인간을 둥근 대지 위에 그려 넣었다(그림 2B 참조). 그런데 이것은 일련의 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집은 대지 위에 있는 거지?”라고 실험자는 지워 없어진 집 옆에 아직 남아있는 집 그림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좀 전에는 둥글게 그렸으면서 왜 이 대지는 평평한 거야?” 그 후 다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아시: 그래도 그것은 지면에 있기 때문이야.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왜 평평하게 보이도록 그린 거야?

다아시: 그래도 지면은 평평하잖아.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대지의 모습은...

다아시: 둥글지.

(Vosniadou&Brewer 1992: 570)

 

실험자에게 다아시는 둥근 대지의 표면과 평평한 대지의 표면이라는 관념 사이를 왔다 갔다 헤매는, 마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실험자가 깨닫지 못한 것은 다아시가 대지(earth)와 지면(ground)의 구분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완벽하게 수미일관된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다아시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에 그려진 대로 대지는 정말이지 둥글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는 집은 지면 위에 지어졌고 지면은 평평하다. 즉 그림 속 집은 지면에 있고 결코 대지의 표면에 있지 않다.

 

물론 ‘earth’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사물을 뜻할 수 있다. 발밑의 지면(ground)을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흙(soil) 그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혹은 이 혹성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실험의 인터뷰의 맥락에서 대지는 분명히 마지막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아시는 그에 따른 구분을 지키기 위해 ‘ground’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험자는 그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검토해보면, 과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하늘을 덧그려서 혹성으로서의 대지의 그림을 완성하라는 실험자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대지는 그 위에 사람들이 생활하고 그 생활이 만든 현상학적인 지면의 모습으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과는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아니라 같은 페이지에 이중으로 그려진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하나는 우주로부터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우리 혹성의 그림이며, 또 하나는 거주자의 현상학적 세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지면과 하늘, 사람들이 사는 주거의 그림이다. 그러나 실험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들 자신의 관점의 이중성을 피험자에게 투영한다(Vosniadou&Brewer 1992: 569-71). 이와 같이 다아시는 그 외의 많은 피험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대지 모델(dual earth model)’의 소유주다. 즉 그 모델은 대지는 평평하다는 소박한 전제와 공처럼 둥글다는 성숙한 이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합성모델 중 하나다(그림 1).

 

두 개의 대지모델에 따르면, “대지는 두 개 존재한다. 하늘에 떠있는 둥그런 것과 사람들이 사는 평평한 것이다”(Vosniadou&Brewer 1992: 550). 두 개의 대지모델의 소유주는 지면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구름, 태양, 달, 별뿐만 아니라 주민들 자신이 표면에 발 딛고 서 있는 또 다른 대지도 볼 수 있다. 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 모양의 대지는 앞서 다룬 두 사례 연구 중 후자에서 ‘올바른’ 그림 카드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보여준다(그림 3). 연구자에 따르면, 이 카드를 선택한 아이들은 “사람들과 하늘이 대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Nobes et al. 2005: 59).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대기며, 그것은 대지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희박해지는 가스 상태의 덮개다. 카드에 그려진 하늘이 대기의 정확한 표현으로 이해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으며, 실험자도 그렇게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카드를 선택한 피험자는 하늘의 디자인을 일상의 경험에서 실제로 본 형태와 색깔을 그려 넣는 일종의 벽지로 다루었고 그 위에 아마도 교실 한쪽에 놓여있는 눈에 익은 지구의를 모델로 하는 완전히 다른 대지의 이미지를 덧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아시가 혹성적인 대지와 발밑의 지면을 구별할 필요성을 제기했듯이, 대지를 견고한 구 모양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완전히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성을 둘러싼 대기와 머리 위의 하늘을 구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하늘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실제로 첫 번째 사례의 실험자는 “아이들에게 하늘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기묘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인정한다(Vosniadou&Brewer 1992: 544).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제의 목적은 하늘이 대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하늘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판별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둥근 대지 위에 하늘을 그린 다아시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두 개의 대지 모델을 표명한 반면, 대지의 주변에 원을 그린 에단은 올바른 구 형상 모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대기라는 관념을 결여한 에단은 실험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하늘이 아닌 우주라고 생각했다. 다아시는 하늘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지면으로 인식된 대지의 그림에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거주에 관계된 이상 하늘은 ‘위’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자들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실험자들은 함께 작업한 아이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지구의 대지의 바깥쪽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반직감적이며,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Vosniadou&Brewer 1992: 541). 바로 그대로다. ‘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대지의 주자(住者 exhabitants)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면과 마찬가지로 하늘 또한 사람들이 거주(inhabit)하는 세계의 일부다. 요컨대 하늘은 경험에 주어진 세계, 즉 현실의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현상학적인 차원에 속한다. 혼란의 원인은 실험자가 이 차원들 간의 구별에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대지를 설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주자의 관점에서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력한 접근법 중 하나가 제임스 깁슨의 선구적인 작업인 『생태학적 시각론』(Gibson 1979)에서 제시된다. 깁슨은 우선 그가 ‘물리세계’와 ‘환경’으로 불리는 것들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1979: 8). 혹성인 대지는 자기를 둘러싼 대기와 함께 물리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대지와 대기는 해양과 지표면에 생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환경은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의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 주변에 상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환경은 물리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만 공간 속의 사물과 신체의 현실이 아니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자의 현실이다. 이렇듯 상정된 환경은 “매질(medium)과 물질(substance) 및 양자를 나누는 면(surface)에 의해 적절하게 기술된다”고 깁슨은 주장한다(1976: 16).

보통 인간에게 매질이란 공기다. 당연히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기는 약간의 저항과 함께 우리가 움직이고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사물에 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방출된 에너지나 규칙적인 진동을 전달하고, 그에 따라 우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나아가 공기는 후각 수용체의 흥분을 일으키는 분자를 확산시키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있다. 깁슨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매질은 이동과 지각을 제공한다. 반면 물질은 이동과 지각의 상대적인 저항이다. 물질은 바위나 자갈, 모래, 진흙, 나무, 콘크리트 등과 같은 어느 정도의 경도차가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의 소재는 생명에게 불가결한 물리적 기반을 설치한다. 여하간 우리는 서 있기 위해서도 그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통해서 이동하거나 지각할 수 없다. 물의 지위는 양의적이다. 물고기와 같은 수생생물에게 물은 매질이다. 인간과 같은 육상생물에게 그것은 물질이다. 그런데 이 양의성은 그 자체로는 생물과 매질의 구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며, 다만 환경의 질이 특정한 생명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는 논점을 부각한다(Gibson 1979: 16-21).

 

매질과 물질의 접점이 된다. 면은 방출된 에너지가 반사하거나 호흡하는 장소며, 진동이 매질에게 전달되는 장소며, 매질로의 증발이나 확산이 발생되는 장소며, 우리의 신체가 접촉하는 장소다. 지각에 관여하는 만큼 면은 “거의 모든 활동이 그 속에서 행해지는 장소”(Gibson 1979: 23)가 된다. 모든 면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배치를 통해 변형과 붕괴에 저항하고 특유의 형상과 특징적이고 물질적인 결(texture)을 만들어낸다. 깁슨은 그 실례로서 자질구레한 주변의 면면을 담은 각기 다른 종류의 여섯 장의 사진을 제시한다. 나무의 단면, 하늘의 구름, 풀 베인 초원, 직조된 천,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 그리고 돌무더기. 어떤 사진이더라도 표면의 결을 보고 그것이 어떤 면인가를 바로 특정할 수 있다(1979: 26-7). 우리는 면에 반사된 빛이 가지는 고유한 산란 패턴에 의해 시각적으로 결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만약 포위광 속에 변별 가능한 패턴이나 구조가 없다면 그 속에서 특정 가능한 결은 존재할 수 없으며 면을 지각하는 대신 공허함만을 느낄 따름이다(Gibson 1979: 51-2).

 

하늘의 지각은 좋은 사례다. 청명한 여름날의 결 없는 푸른 하늘과 발밑의 대지의 결을 비교하면, 대지의 면은 통상 지면으로 불리는 무언가로 지각되는 반면 머리 위의 하늘은 끝없는 공허의 공간으로 지각된다. 깁슨에 따르면, 지면이란 “지상의 환경의 문자 그대로의 기초……그 외의 모든 면의 규준이 되는 면이다”(1979: 10, 33). 그것은 중력에 의해 대지로 이끌린 사물을 떠받치며,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뻗어나간다. 대조적으로 하늘은 면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결 없는 공허함 속에, 예를 들어 구름처럼 하늘 속에 면을 특정할 수 있는 결 있는 영역은 가능하다. 그래도 하늘의 노을구름은 예를 들어 강우로 지면에 내려앉은 물방울과 다르다. 물방울이 마르면 하나의 면(물의 면)이 사라지고 또 다른 면(마른 흙의 면)이 남는 반면, 구름이 사라질 때에는 어떤 면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약 숲 속에서 위를 쳐다보면 천장처럼 위를 덮은 나뭇잎들이 머리 위의 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 사이의 빈공간은 하늘로 열려 있으며 우리는 단지 틈을 볼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틈이다”라고 깁스는 말한다(Gibson 1979: 106).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깁슨의 설명에는 모순이 있다. 만약 하늘이 공허함의 전형이라면, 또 올려다 볼 때 지각되는 것이 그 공허함이라면, 하늘은 거주 환경의 일부인가 아닌가? 환경은 틈을 가질 수 있는가? 환경은 정말로 ‘열려’ 있는가? 깁슨이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환경이 공간 중의 사물, 즉 닫힌 윤곽선의 형태와 공허한 공간에 정지된 것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환경은 오히려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지며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안에 산, 구름, 불, 일몰, 돌, 별이라는 다양한 물(物)을 가진다”(1979: 66). 이처럼 구름과 일몰 혹은 별은 환경 중에서 하늘로 불리는 부분에 위치 지어진 현상으로서 제시된다. 하늘은 거주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두 부분, 혹은 반구의 한쪽이다. 또 다른 한쪽은 대지다. 거주자가 서 있는 지면은 대지-하늘의 경계며 수평선, 즉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상반구와 하반구 간의 경계의 큰 원”(1979: 162)으로 확장된다.

 

외견상 이 우주관은 ‘중공구(hollow sphere)’ 모델과 유사하다. 그것은 두 개의 대지 모델과 마찬가지로 평평한 대지의 관념과 고체의 구인 대지의 관념 사이를 매개한다. 중공구 모델에서 대지는 아랫부분이 고체이고 윗부분이 속이 빈 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개의 반구지대 사이의 평평한 경계면에 서 있다. 그들에게 하늘은 머리 위의 돔으로 나타난다(Vosniadou&Brewer 1992: 549-50 그림 1 참조). 그러나 이 우주관과 깁습의 모델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깁슨의 모델에서는 거주자의 지각에서 ‘구형의 영역’은 무한하다. 지평선은 거주자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경계가 될 수 없다. 지평선에 도달하거나 지평선을 횡단할 수 없다. 사물은 가로막힌 장벽을 뚫고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위를 볼 때 닫힌 면에 둘러싸인 자기를 발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의 생명은 열림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평한 기반과 돔 형상의 상부를 가진 중공반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깁슨은 바로 그 국한이라는 사고가 윤곽을 그리는 실천에서 비롯된 인공물임을 시사한다(1979: 66). 그러나 하늘은 윤곽을 갖지 않으며 그것을 그릴 수 없다. 그릴 수 있는 것은 하늘 사물이며 하늘 비춰진 실루엣이다.

 

그런데 깁슨은 다른 곳에서 “열린 환경은 좀처럼 혹은 전혀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게 열린 환경에서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1978: 78). 보통 상황에서 환경은 언덕과 산, 그리고 동물과 식물, 물체와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물들로 “넘쳐나고” 있다. 혹은 달리 말하면, 환경은 설치된다(furnished). 그리고 깁슨은 “대지를 정비하는 것은 방에 배치된 가구처럼 대지를 생활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이 없는 하늘은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거주 불가능하고, 따라서 생물체에게 어떤 부분의 환경도 되어줄 수 없다. 새는 그 속을 날 수 없다. 그리고 텅 빈 대지는 서 있거나 걷기 위한 기반 이외의 그 무엇도 거주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대지에 설치된 것들은 그 외의 모든 행동의 기반을 제공한다”(1979: 78). 깁슨이 생각하는 지각자는 열림에 남겨지는 만큼 앞서 묘사한 심리학적 실천 속에서 대지의 면의 “바깥쪽에 들러붙은” 인형처럼 세계의 외주자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대 위의 배우로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비품과 배경이 설치된 면에 단 한 번 입장할 수 있다. 무대장치를 배회하듯이 혹은 다락방에 들어간 집주인처럼 이 사람들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세계의 한복판을 신중하게 걷도록 운명 지어진다.

 

환경은 단지 대상(object)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진,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속에 있는 대상”(1979: 66)이라고 깁슨은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대상으로 다뤄지는 사물들을 생각해본다. 대지 위에는 산과 돌과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구름과 일몰과 별이 있다. 대지 위의 사물들 중에 아마도 돌만이 통상의 의미에서 대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때에도 각각의 돌은 그 주변의 돌들이나 그것이 있었던 지면과 흘러들어온 과정과 분리되어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언덕은 대지의 면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지의 면을 형성하고 대지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풍광(landscape)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떨어져 나와야만 언덕은 대상으로 사고될 수 있다. 또 불은 대상이 아니라 연소과정의 출현이다. 하늘을 살펴보자. 천문학적인 중요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별은 대상이 아닌 빛의 점으로 지각된다. 일몰은 태양이 태평양의 저편으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빛남으로 지각된다. 구름 또한 대상이 아니다. 모두 법칙성이 없는, 매질의 흐름 속에서 번영하고 흐르는 잠시잠깐의 팽창이다. 구름을 관찰한다는 것은 구름에 설비된 물품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오지 않는 형성-과정의 하늘/정보(sky-in-information)의 잠시잠깐의 출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진정 열린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은 자신 안에 갇혀서 세계에 등을 돌리고 자신에 이르게 된 경로와 차단하여 응결된 외면만을 누군가의 시선에 방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는 안팎이 없으며 다만 오고 감(coming and going)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성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형성, 팽창, 성장, 융기, 발생이므로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서 언덕은 융기한다. 또 언덕은 언덕을 오름으로써 혹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음으로써 경험된다(Ingold 2000: 203). 불은 타오르는 불꽃의 흔들거림과 연기의 소용돌이와 그 열에 의해 알 수 있다. 돌은 구른다. 돌의 둥근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이 굴러다님이다. 돌 위를 걸을 때 밭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과 별이 빛난다.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것들(they are)이란 그 빛나는 각각이며 피어오르는 각각이다. 언덕이란 융기하는 것이며, 불이란 타오르는 것이며, 돌이란 구르는 것이다.

 

즉 깁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늘과 대지의 열린 지구가 거주 가능한 환경으로 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대상으로 설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설비된 세계란 실물의 모형, 즉 실내로 끌고 들어와 전용의 공간에 재구축된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언덕은 무대장치처럼 지면위에 설치되고 별, 구름, 태양, 달은 매달린다. 이 본뜬 세계(as if world)에서 언덕은 융기하지 않으며 불은 타지 않으며 돌은 구르지 않으며 태양과 달과 별은 빛나지 않으며 구름은 피어오르지 않는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단1도 진행되지 않는다. 단 한번 무대가 설치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열린 세계는 그들을 위해 새롭게 준비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열린 세계는 서서히 사람들 주변에서 형태를 잡아간다. 열린 세계는 바로 그러한 형성과 변용의 과정의 세계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지각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또 지각된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에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자와 지각된 현상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침투당하는 세계-형성의 동적인 과정에 착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응결된 물질과 그것이 보여주는 견고한 표면으로부터 물질이 그 속에서 형태를 취하며 녹아들어가는 매체로 시야를 옮겨야 한다. “대부분의 활동이 일어나는” 곳은 깁슨이 생각한 면 위(1979: 23)가 아니라 매질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생명의 바람

 

야외/열림에서 아무 것도 없다 하더라도 매질은 중지하지 않는다. 매질은 거의 언제나 유동상태에 있다. 때로는 이러한 흐름이 거의 지각되지 않을 만큼 미비하지만, 때로는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건물을 쓰러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풍차를 움직일 수 있고 선박을 세계각지로 보낼 수 있다. 이 매질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나는 몇 년 전 이 질문을 하버드대학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기후와 땅(land)의 관계(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었다. 나는 실내에서 학술적인 문헌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것과 야외에서 주변 땅과 함께 기후에 녹아들어가면서 논의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를 검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땅과 기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것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리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대개 실내에서 생각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설비된 실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이 내부공간에서 쫓겨난다면 외주자 외에 어떤 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면, 대지와 하늘의 열린 세계를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사유의 환경의 고향”(메를로-퐁티 1967: 62)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까?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우리는 교외를 거닐기로 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미풍이 불었다. 우리는 미풍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인정했듯이,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과 호흡을 통해 미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이 느낌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만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느낀다는 것(feeling)과 만진다는 것(touch)이 촉감을 가리키는 데에서 단순 교환 가능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할 때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때 등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진다. 그리고 친밀한 사교의 형식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지고 타자는 우리를 만진다. 만진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특정기관, 특히 손, 입술, 혀, 발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사물에 대한 신체적 접촉을 기도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자기와 그 주변 간의 어떤 종류의 상호침투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세계가 준비한 ‘우리에게 침입하는’ 존재방식이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메를로-퐁티 1974: 168). 따라서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우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는 만지는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만지는 주체로서의 지각자, 이 둘을 분리시키기 위한 존재론적 전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느끼지 않고 만질 수 없다.

 

요컨대 바람을 느끼는 것은 이 혼효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지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촉각적인 지각에 대한 이 이해는 시각적인 혹은 청각적인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하늘의 현상으로 되돌아가보자. 하늘은 바람 이상으로 지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이란 우리가 그것 보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교외를 거닐면서 모든 종류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햇빛에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빛 속에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빛남 그 자체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빛은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로서 경험되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바람 속에서 만질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늘 속에서 본다. “하늘의 푸름을 바라보는 나는 무세계적 주체로서 그와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 몸을 싣는다. 나는 이 신비함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다가와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나는 하늘 그 자체가 된다. …나의 의식은 이 무한한 푸름으로 채워진다”라고 메를로-퐁티는 쓰고 있다(1974: 19-20).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신비함이란 시각의 신비함이며, 사물이 보인다는 완전한 일상성의 이면에는 본다는 근원적인 경험이 있음을 발견한 경이로움이다. 빛은 바로 이 발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Ingold 2000: 264-50). 마찬가지로 음의 신비함은 우리가 듣는다는 발견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주변의 바람 속에서 만지고 하늘 속에서 보고 비 속에서 듣는다. 신학자인 존 헐은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바로 태양이 세계를 빛에 적시듯이, 내리는 비가 어떻게 세계를 음에 적시면서 “모든 것의 윤곽을 분명히 하는지”를 묘사한다. “나의 신체와 비는 섞이면서 하나의 청각적으로 촉각 가능한 3차원의 우주가 되고 그 속에서 신체를 통해 나의 의식은 뻗어간다”(Hull 1997: 26-7, 120).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 산다는 것은 매질의 흐름, 즉 햇빛, 비, 바람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이 잠김은 각각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물론 바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니콜 레벨(Revel 2005)은 필리핀의 파라완 고산족이 어떻게 새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지를 기술한다. 새는 아주 일시적이긴 하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동료로서 고찰된다. 이 관계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은 연날리기의 실천으로 응축된다.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잎사귀나 종이를 붙여 만드는 연은 새를 모방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육생의 인간이 조류인 동료를 경험할 수 있는 공유 가능한 매개다. 연날리기 기수는 얼레를 쥐고 실을 풀어 바람과 장난치면서 새가 날개로 느끼는 것을 느낀다. “대지에 붙어 있는” 파라완족의 연날리기 기수는 “하늘에서 꿈결 같은 기분이 되고 이 고양의 느낌은 하늘을 빙글빙글 도는 덧없는 공작물의 반짝임과 일치한다”(Revel 2005: 407). 새가 된 그들의 의식은 연에 생기를 부여한 것과 동일한 공기의 흐름에 투사되어 대기의 변덕스러움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상으로만 설비된 본뜬 세계에서는 연도 새도 날 수 없다. 대상들의 세계에 바람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바람은 단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예를 들어 불이나 구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불이 타오르는 것이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과 같이 바람은 부는 것이다. 바람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속하며, 세계에 대한 무언가의 실물모형에 속하지 않는다. 새는 공기의 ‘틈’을 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나무는 활처럼 휜 기둥과 줄기 속에 자기를 키워준 바람의 흐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류학과 물질문화연구 분야에서는 마치 사람들과 물질적인 사물이 실제로 이미 그곳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지각은 서로에 대해 활동하는 신체화된 인격과 물질화된 사물 간의 상호작용이 된다. 나아가 만약 사물이 ‘반응한다(act back)’면 그것은 바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물에도 행위주체성(agency)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연의 사례를 살펴보자. 땅에 발 딛은 기수는 실이라는 경로를 통해 연에 작용하고 하늘의 연은 그에 상호적으로 기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이(것)들의 활동을 통해 양자는 서로의 움직임에 대한 스스로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연은 기수의 행위주체성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다. 연이 나는 것은 바람의 흐름 속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단절되면 바람은 죽은 새처럼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지면에 떨어진다. 바람을 품은 연에 의해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크리스토퍼 틸리의 풍광(landscape) 현상학 탐구를 살펴보자. 틸리는 화가와 나무를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화가는 나무를 보고 나무는 화가를 본다. 이는 나무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화가의 감정을 흔들어(affect) 화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 이 의미에서 나무에게는 행위주체성이 있으며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2004: 18). 그리고 나무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연필을 쥐고 그 나무의 고유한 곡선을 그려나가는 화가의 시각-수작업적인 몸의 움직임은 나무 그 자체의 움직임과 공진한다. 공기의 흐름 속에서 급강하하는 연의 움직임에 기수의 몸의 움직임이 공감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기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기수와 연, 화가와 나무처럼 상호 공진하는 움직임은 매질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적심/잠김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이라도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적심/잠김 때문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기수는 연과 상호작용할 수 없고 화가는 나무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조금 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사람과 사물로 환원된 세계에서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히 사물에게 ‘행위주체성’을 부여할 뿐이라면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과도하게 선언된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창작물이며, 그 연원은 현실에 대한 전도된 관점에 있다. 즉 다양한 종류의 형태들(forms)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세계(生世界)의 동적인 잠재력을 형태 그 자체 속에 분배된 내적인 속성으로 사고하고 그로부터 세계가 움직여나간다고 상정하는 관점이다(Ingold 2005b: 125). 이것은 마치 강이 흐르는 원인이 소용돌이와 강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강의 흐름 그 자체가 없다면 상호작용하는 소용돌이도 강둑도 있을 수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질의 흐름이 없다면 사람도 나무도 새도 구름도 불도 일몰도 혹은 우리가 고찰해온 다른 모든 현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의는 바로 생명이 의미하는 것과 관계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나 나무도 살아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그 자체로 이미 닫힌 실재들이 거하고 있는 곳으로 추측하는 사고의 관습은 생명이 사물의 내적 속성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저 멀리 떼어놓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생명 속에 사물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물은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에 감긴다. 모든 실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여된다는 인식은 고전적인 인류학 문헌에서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존재론적인 제약(commitment)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 전통적인 오랜 사고관습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실로 비활성의 사물에 생명과 정령을 불어넣는 신념의 체계다. 그런데 이 사고관습은 이중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하나는 애니미즘이 세계에 대한 신념체계라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세계 속에 있는 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폐쇄성보다 개방성, 즉 항상 유동상태에 있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과 응답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 하나는 애니미즘은 사물 속에 생명을 주입한다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운동으로 사물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애미니즘적 우주관이 바람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람은 사람들의 삶에 형상과 방향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행위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바람이 곧 행위주체성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바람은 불어옴이며 부는 무언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임은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그 자체다. 따라서 바람에 인격적 힘을 복귀시키는 것은 어떤 기묘함도 아니고 의인화도 아니다.

 

열린 세계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오가는 것임은 앞서 고찰했다. 메를리-퐁티는 화가의 작업을 논하면서 “당연히 존재에는 흡기(吸氣 inspiration)와 호기(呼氣 expiration)가 있다”(19666: 266)고 말한다. 숨을 마시고 내쉬면서 사람은 매질과 통섭하면서 개방한다. 흡기란 숨이 되는 바람이며, 호기란 바람이 되는 숨이다. 호흡에서 오고감의 교차는 생명의 본질이다. 수많은 언어에서 생명과 바람 그리고 호흡을 나타내는 단어가 병행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고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애니미즘 개념의 기반이 된 ‘생기를 들이마신다(animat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animare(삶을 부여한다)와 anima(숨)에 유래하며, 바로 이 둘은 그리스어의 anemos(바람)에서 유래한다. 즉 생명은 그 생성하는 형태와 함께 매질의 흐름에 휘감긴다. 데이비드 메컬리가 쓴 것처럼 “대기의 두터움에 잠기는 머리 혹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휘감기는 가슴과 다리와 함께 우리는 공기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호흡하고 사고하며 꿈을 꾼다”(Macauley 2005: 307). 바로 이 때문에 열림 속에 산다는 것은 생명이 신체의 모습을 띤 견고한 거푸집 속에 직조되거나 말려드는 것과 같은 육화(肉化)의 경험이 아니다. 또 정신이 세계의 물질적인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이탈의 경험도 생겨날 수 없다.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은 오히려 세계 속에 형성의 파동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사람들과 사물들의 “끊임없는 탄생”(1966: 266)이라고 한 것에 영원히 입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호흡이 세계가 스스로를 그러한 곳으로 열어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토해낸 최초의 호기인 것처럼. 이 속에서는 바람이 신체로서 육화하기보다 신체가 호흡 속에 풍화(風化 enwinded)한다.

 

 

기후-세계

 

나의 관심은 내부에 산다/거한다(inhabit)는 것이 무엇인지, 즉 닫혀 있기보다 오히려 열려 있는 세계-구의 안에 산다/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세계에 장벽은 없으며 거주자 각각의 다양한 이동에 따라 조금씩 노출되는 지평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평상은 없으며 단지 발아래의 지면이 있다. 천정은 없으며 머리 위 활을 그리는 하늘만이 있다. 설치된 비품은 없으며 형성과 함입만이 있다. 나는 앞서 우리가 주로 실내에서 사고와 집필을 하기 때문에 문서에서 묘사된 세계를 마치 닫힌 내부 공간에 이미 완비된 것처럼 상상한다고 지적했다. 그 본뜬 세계에는 오직 사람들과 사물들만 거하며 바람, 비, 햇빛, 안개, 서리, 눈 등으로 경험되는 매질의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인간과 물질세계의 관계에 관한 모든 논의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매질을 누락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했다. 내가 제시한 대안은 열림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물에 의해 구비가 끝났다는 세계의 면 위에서 생명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거주자들은 구비가 끝난 면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과정의-세계 속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자가 그 속을 움직이는 매질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이 결론과 더불어 나와 학생들이 애버딘셔의 유원지를 걸으면서 고심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기후와 땅의 관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지면에 의해 분할되는 서로 다른 영역, 즉 각각 하늘과 대지, 매질과 물질로 귀속되는 것일까? 요컨대 깁슨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는 “대기환경의 매질은 기후라 부르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1979: 19). 따라서 기후는 매질 속에서 진행 중인 무언가다. 그러나 대지의 물질은 이 진행 중인 것을 투과하지 않는다. 지상의 면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불투명하며, 매질과 물질은 각각의 영역을 견지하면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대지가 땅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하늘에 등지고 그 이상의 교류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에 따라 기후는 땅 위를 휘감으면서도 그 형성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거주자가 알고 있듯이 비는 경작지를 진흙의 바다로 만들고 우박은 견고한 바위를 깨뜨리고 번개는 여름의 건조한 땅에 산불을 내고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를 모래 언덕으로, 눈은 눈덩이로, 호수와 바다에 파도를 일으킨다. 알래스카의 코유콘 사람들의 환경인지에 관한 한 연구에서 리처드 넬슨이 서술한 것처럼 “기후는 쇠망치고 땅은 철침”이다(Nelson 1983: 33). 땅이 매질의 흐름에 반응하는, 보다 미세하고 정밀한 방식도 있다. 서늘한 여름 아침에 식물의 덩굴이나 거미줄을 장식하는 이슬을 생각해보자. 혹은 수풀의 떨어지는 잎사귀나 구부러진 나무줄기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남겨진 흔적을.

 

경험이 풍부한 거주자는 어떻게 땅을 바람과 기후의 치밀한 기록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코유콘 사람들은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갑자기 타오르는 정도에 따라 태풍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고 유핏크족의 노인은 눈을 뚫고 나온 식물의 언 꽃송이의 방향이나 얼어붙은 호수의 눈의 ‘파도’로부터 탁월품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Bradly 2002: 249, Nelson 1983: 41). 그러나 땅을 읽어낼수록 물질의 끝과 매질의 시작을 확신에 차서 분석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기후가 그 흔적을 땅에 남기는 것은 바로 매질과 물질의 결부(binding)를 통해서다. 따라서 땅 자체는 양자를 분리하는 경계면이 아니라 모호하게 고정된 혼효와 혼합의 영역대가 된다. 누구나 여름에 침엽수림을 걷노라면 ‘지면’과 현실이 명료하게 나뉘는 면이 아니라 덩굴, 낙엽, 암설, 이끼, 돌과 바위, 나뭇가지, 크레바스의 균열, 나무뿌리의 엉킴, 늪과 습지를 뒤덮은 부초 등이 얽히고설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장소의 지하는 딱딱한 돌덩이로 이뤄져 있고, 어느 장소는 청명한 하늘 위에 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중간지대에서, 생물의 거대함과 계속해서 견고해지는 환경을 관통하는 능력에 조응한 그 깊이 속에서 살아간다.

 

이 의미에서 생물은 땅 속에서 사는 것이지 그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매질과 물질이 혼합되지 않는 세계, 즉 견고한 구 안에 대지가 갇혀 있고 하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계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라도 물질과 매질의 경계면의 분리가 교란되고 상호 침투되며 연결된다. 생명이 세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운동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정을 통해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 그 자체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장과 운동에서 생명은 계속해서 전개되는 직물의 일부가 된다. 땅은 말하자면 항상 커나간다. 고고학자가 과거의 삶의 흔적을 해명하기 위해 땅을 파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땅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만져질 수 있는 얽히고설킨 거주자들의 삶-선들(life-lines)이다. 바람 또한 땅을 불어서 물질과 혼합시키며 오솔길이나 산길에 통과의 흔적을 남긴다. 바람(wind)은 ‘구부러짐(winds)’이다. 그렇게 비틀어진 경로를 따라 지상의 여행자는 길을 떠난다. 경로는 때로 밧줄과 닮았다. 사미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밧줄에 매듭을 묶으면 바람이 멈추고 풀면 다시 불기 시작한다고 한다(Helander&Mustonen 2004: 537). 이처럼 땅과 기후의 관계는 대지와 하늘의 불투명한 경계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묶고 푸는 관계다. 열린 세계에 살아가는 일은 기후를 물질적인 삶의 형태와 연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땅의 결을 짜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묶으면 경계는 사라진다. 매듭이 그것을 만든 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묶는 것이 세계를 포함하거나 닫는 것이 아니다.

 

묶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불이다. 우리는 난로 연기에서 역의 변화, 즉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휘발적인 모습으로 물질을 매질로 방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후-세계에서 연기는 촉발됨에 따라 공기의 흐름과 혼합, 구름으로 응축되기도 한다. 내가 조사한 핀란드 북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거주가 ‘연기’로 설명된다. 한적한 한겨울에 백야가 하늘에 수직으로 올라서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 설명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서 난로가 있는 주거지는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마찬가지로 열린 세계에 속한다. 살아있는 신체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주거지는 거주자의 끊임없는 오고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따뜻한 외투와 같이 거주자의 주위를 에워싸는 주거지로서의 ‘실내’를, 앞서 서술한 닫힌 공간에 재구축하는 본뜬 세계의 ‘실재’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가 삶을 위한 장소라면, 후자는 일종의 컨테이너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를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자기완결적인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은 근대건축에서 오랜 야망이었다. 이 봉쇄된 귀결의 일부는 장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그 자체로 불가피한 측면의 교란을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숨김으로써 대지와 하늘의 완전한 분리라는 환상을 창출했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근대건축에서 난로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경위를 해명할 수 있다. 난로가 주거지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한편 연기는 길게 이어지는 굴뚝의 내부로 격리되었다. 공장의 높은 굴뚝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대지와 하늘의 절대적인 분리를 소리 높여 선언하고 그와 동시에 불꽃이 타오르는 교란의 지점을 은폐시켜버렸다. 그런데도 굴뚝의 역사는 아직까지 쓰이지 않고 있다.

 

출발점이 된 대지와 하늘의 이미지로부터 참으로 멀리 왔다. 그 이미지는 구 모양의 대지가 윤곽선의 하늘에 완전히 둘러싸인 에단의 그림에 응축되어 있다(그림 2 A).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올바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그림은 사람들을 대지의 외면에 외주자(外住者)로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거주가 가능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질문했다. 깁슨은 사람들이 활동 속에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물들로 박혀 있는 열린 대지의 면을 상상하라고 회답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세계가 열려 있지 않고 오히려 닫혀 있는 한에서 지상은 환경으로서 거주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부분적인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거주자는 크든 작든 세계로부터 추방자의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나는 열린 세계에는 대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열림에 거주하는 것은 닫힌 면 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매질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생명은 거주자의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이러한 흐름에 잠겨 있다. 이 기후-세계에는 대지와 하늘을 분리하는 명확한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물질과 매질이 존재자를 조성하는 혼합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존재자는 그 활동을 통해 기후-세계를 땅의 결로 묶는다. 그림4는 외주(外住)로부터 거주(居住)로의 이론적 여행을 추적한 것이다.

 

그림4. A: 대지의 외주자, B: 기후-세계의 주거(내) 거주자.

 

알래스카의 코유콘 족은 그들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수수께끼를 통해 불러들인다. 수수께끼를 내는 자는 수수께끼에 언급된 존재의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 익숙한 인간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를 모방함으로써 마치 그 자신이 수수께끼의 대상이 된 것처럼 특징적인 움직임을 표명한다. 그 존재들은 마치 일련의 바람처럼 모든 것을 휘감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 기후-세계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이 세계는 누구도/개체로서의 어떠한 일자(一者)도 가지지 않는다(no-one).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멈추는 것은 없으며 수수께끼를 내는 자가 불러오는 이미지가 나타나건 말건 사라져간다. 20세기 초엽 예수회 사제인 줄리안 제티가 기록한 수수께끼 중 하나에서 수수께끼를 낸 자는 그 자신을 한 묶음의 풀이라고 생각한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기 주변을 나는 온몸으로 쓸어낸다

over-there around I-sweep-with-my-body

(Jetté 1913: 199-200)

 

수수께끼를 낸 자는 빗자루(broom)며 빗자루은 쓸어내는 것이다. 그는 바로 첫눈 위를 의연히 뚫고 버티는 풀처럼 자신의 주변을 쓸어낸다. 바람 속에서 풀을 꺾거나 땅 위에 쌓인 부드러운 눈을 만지면 작은 원 모양이 그 주변을 쓸어낸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는 에단이 그린 대지와 하늘 그림과는 스펙트럼의 대극을 이룰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거주자의 관점에서 본 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의 다양성의 총체를 정밀도와 같이 응축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의 전체는 한 묶음의 풀 안에 있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대지로부터 맹아를 틔우고 지금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은 눈 속에 소구획을 창출함으로써 세계 내에 자신의 장소를 만든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는 열린 세계에 거하는 것이다.

 

 

 

Earth, Sky, Wind, and Weather.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y Institute 13: S19-38, 2007.

(http://onlinelibrary.wiley.com/wol1/doi/10.1111/j.1467-9655.2007.00401.x/full)

「大地、空、風、そして天候」(古川不可知訳)『現代思想』2017年3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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