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데스콜라의 1996년 논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제는 상식(?)이 된 그의 자연 개념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논문이다. 이 논문이 실린 『자연과 사회: 인류학적인 관점』은 인류학 내에서 '문화'에서 '자연'으로 개념의 '존재론적인 전환'을 이끌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용어와 관련해서는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이 논문의 일본어번역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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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구축: 상징생태학과 사회적 실천
필리프 데스콜라
이제는 많은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자연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구축되어 왔으며 이러한 개념이 문화ㆍ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존재론의 한 패러다임에 불과하며 그에 적합하지 않는 많은 문화에 투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다. 이렇게 재고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서양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내적인 비판이다(그 중에서도 Rosset 1973, Horigan 1988, Latour 1994 참조). 이것은 또한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스스로 말하거나 그에 관여하는 존재양식을 기술하기에는 자연-문화의 이분법이 부적절하거나 혹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도구임을 깨달은 인류학자들의 민족지적 연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인간의 성향이나 행동의 원인이 식물과 동물에 유래한다고 생각할―이것은 인류학의 가장 오래된 난제 중 하나다―뿐만 아니라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비인간적인 유기생명체의 범위를 정령, 괴물, 인공물, 광물, 나아가 양심, 혼, 커뮤니케이션 능력,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성장할 수 있는 것, 사회적인 처신, 도덕률 등의 두드러진 특징을 가진 어떤 존재물에까지 확장시킨다. 생물, 인공물, 도깨비 간의 경계가 흐릿하고 또 비인간과 인간이 상당수의 특성을 공유하는 수많은 문화들에서 토착의 분류법을 끌어오기 위해 사용하는 형태학적ㆍ행동학적 상동성의 기준의 유용성은 극히 한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공통의 기준은 토착의 분류기준을 등한시함으로써 다양하게 개념화된 존재를, 우리가 서양적인 자연의 범주 내에서 찾은 것으로 상정된 사물의 분류질서에 끼워 맞출 뿐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주의적인 편견의 귀결은 인류학 내의 분업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민족생물학자들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물종의 민속분류와 명명법 연구에 야심을 한정하는 한편으로, ‘상징’ 인류학은 토착의 코스몰로지 이론을 해명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그 구성요소가 영역 고유성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분류되는 듯하다. 분류의 방식에 따라 그 내용이 동질적으로 되거나 이질적으로 되기 때문에 분류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정의되어 다뤄져왔다. 이것은 인류의 단일성을 상정하는 이 학문분야에서는 이례적인 변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이론적인 이원론은 어떤 모습으로 제시된다 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항 대립으로 지속되는 데에 공헌한다. 자연이 문화ㆍ역사횡단적인 실재의 범위에 있다고 상정되는 이상, 통상의 물리적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현상이나 존재물이 초자연적이라고 라벨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한 세기 전에 뒤르켐이 말했듯이(Durkheim 1960), 초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관념은 필연적으로 사물의 자연 질서 관념에서 비롯되며 우주 법칙의 합리적인 움직임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현상과 어울리는 잔여 범주에 다름 아니다. 물론 자연-초자연의 대립은 물리적 세계의 수학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루클레티우스(T.C. Lucretius)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종교라는 환상에 대항하는 유물론 철학의 대표적인 무기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학적으로 보편적인 것임을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화생태학이나 마르크스주의인류학의 몇몇 조류 등 근대의 자칭 유물론적 접근은 뒤르켐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자연의 사회적 구축을 물리적ㆍ기술적 제약이 마음속에 기계적으로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연의 관념이란 이데올로기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즉 ‘객관적’인 물질적 힘의 왜곡된 표상―생태계로부터 자의적으로 선출된 제약요인이든 불완전하게 정의된 생산력의 단계든―이며 그것이 사회들의 구조와 진화를 형상화해왔다(Descola 1988). 이 자연의 페티쉬화는 극단적인 생태학적 상대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이 속에서 모든 사회는 적응에 의한 고유의 산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매우 유사한 환경을 공유한 사회들이라 할지라도 한 사회가 다른 한 사회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문화의 이분법은 예를 들어 구조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했듯이 때로 유용하고 실속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렇지만] 『친족의 기본구조』(레비-스트로스 1949)에서 인세스트 터부(근친혼 금기)가 혼인교환의 기원과 조건이기 때문에 자연-문화의 이분법이 사회생활의 기원과 조건이기도 하다는 설명의 기반의 가설적 전제로서 기능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표명된 것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타나는 결연이론의 기원―사견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과 이론적으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인간화(호모니제이션)(Descola and Palsson 1996 참조) 과정에 관한 최근 논고를 살펴보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느닷없이 문화가 발생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저작, 특히 「구조인류학과 생태학」(레비-스트로스 1972)에서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배후로 밀어내고 자연주의적인 사고를 표명하고 있다. 이 속에서 정신의 움직임은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차이를 해설하기 위한 여과장치로 간주된다. 한편 『신화학』에서 자연-문화의 구분은 의미론적인 매트릭스로서 신화 속에 그려진 다양하고 대조적인 속성과 특성을 정리하기 위한 중심적인 도구로 재등장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소재의 대부분을 의거해온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 사회에서는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문화가 나눠지지 않는다―가령 나눠진다 해도 우리의 분리방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축을 따라 묘사한 대립항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정통한 인류학자들에게 납득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 이항대립은 동일사회 혹은 근린사회에서 수집한 새로운 자료로부터 유효한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패러독스의 열쇠는 자연-문화의 구분이 민족지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각 가능한 성질의 대조적인 조합을 레비-스트로스가 때마침 정리할 때에 사용한 총칭적인 라벨링에 지나지 않는 한편으로, 아메리카인디언들은 우리가 하듯이 두 개의 다른 존재론적 영역 하에 이것들의 성질을 끼워 맞출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자연이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난해한 질문을 설정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문화가 각기 다른 시기에 생겨난 자연에 관한 특유의 사고방식을 가능한 한 기술하도록 스스로를 한정해야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경험적으로 무궁무진한 자연-문화의 다종다양한 복합을 비교가능하게 하는 질서의 일반원칙을 탐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은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외의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대주의는 확립되어야 하는 존재를 다시금 전제로 삼아버리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에 의해] 만약 모든 문화가 섞임 없이 자연세계를 코드화하는 특정한 의미체계이며 그 자연세계에 우리 자신의 [서양] 문화가 그렇게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든 특징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자연-문화(들)의 분단의 바로 그 원인이 의문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주의의 선언이란 그와 모순되게도 서양문화에 주어진 인식론적인 특권, 즉 스스로 내린 자연의 정의가 다른 모든 문화를 가늠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는 유일한 문화라는 특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가령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ㆍ물리적 환경의 표상을 만들어낼 때 공통의 어떤 일반적인 패턴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와 작용의 징후를 어디서부터 찾아야할까? 그러한 탐구는 민족생물학적인 분류학에만, 적어도 그것에만 의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선 동식물의 분류는 자연의 사회적인 객체화에 한정된 한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분류과정에서 각각의 문화는 환경의 특정한 특징과 그 환경에 대한 실천적인 관여의 특정한 형식을 특히 내세우게 되는데,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는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로컬적인 이론, 비인간의 사회학과 존재론, 사회적ㆍ비사회적 영역의 공간표상, 다른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물을 다루는 방법이나 관계방식을 통제하는 의례적인 규정과 금지 등의 측면이 포함된다. 게다가 진화민족생물학자가 강조해왔던 분류구조의 보편성으로 간주하기에는 이제까지 강한 의문이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의문에는 민속분류의 단위를 좌우하는 의미론적 결정요인의 터무니없는 다양성(Friedberg 1986, 1990)이나 분류의 산물의 자의성(Ellen 1993)의 지적에서부터 자연종의 존재 그 자체(Ellen 1979)나 민족생물학적 분류를 계층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상정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Howell 1989)까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지각이 생물종 사이에서 찾아지는 불연속에 대응하고 분류영역고유의 내포에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가령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은 남는다. 그러한 보편적인 패턴에 대해 아는 것이 비인간을 개념화하는 방식의 실제의 다양성을 더 깊게 이해하는 것에 어떠한 공헌을 할 것인가? 바꿔 말하면, 만약 모든 문화가 식물이나 동물을 동일한 절차에 기초한 분류로서, 그러나 그 각각의 문화가 생물에 특정한 속성과 사회적 측면을 부여하고 그것들과의 관계들을 각각 독자의 방법으로 다룬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민족생물학적인 분류법이 그 다양화의 과정에서 부차적인 움직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비인간의 개념화에 공통된 특징은 그것들이 항상 인간계에 대한 참조에 의해 기초 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사회적인 범주와 관계들이 우주의 질서화를 위한 정신의 주물과 같은 것으로 사용될 시에는 사회중심주의적인 모델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서양의 코스몰로지처럼 자연을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한 질서를 가진 실재로서 부정적으로 정의할 시에는 이원론적인 단일세계라는 것이다. 비인간의 사회적 개체화는 포섭 혹은 배제의 그 어느 쪽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해도 인간의 객체화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다. 어떤 과정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회의 관념들과 실천의 배치이며 모든 사회는 그로부터 자기와 타자의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Descola 1992: 111). 이 두 과정에서 환경은 고정적인 것이고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며 문화라는 매체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버클리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인간의 유기적ㆍ비유기적 환경이 특정한 문화적인 코드의 프리즘을 통해 지각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상징적 소산이라고 서술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개념적으로 질서지운 다음 현재적(顯在的)인 사회적 분류에 과도한 비중을 두는 것은 종에 고유하고 유전적으로 만들어지는 지각적ㆍ산정적(算定的)인 프로세스로 그것을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오인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그렇게 되면 뒤르켐적인 낡은 이원론이 곧바로 재생되고 말 것이다. 그 속에서 자연은 사회의 단순한 사생화에 불과하고, 즉 사람들의 실천이나 환경을 이용하거나 지각할 때의 물리적인 요인의 쌍방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현재적인 사회적 분류의 정적인 투영으로 간주된다.
나아가 서양과학의 전통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 비인간의 다양한 표상을 수미일관한 체계적인 관념의 집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일상적인 행동과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즉 살아 움직이는 지식과 신체기법 속에서, 또 실제적인 선택이나 분주한 의례 속에서 ‘말할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것들 속에서 표현된다(Bloch 1992).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주로 비언어적인 실천의 심적 모델을 세세하고 단편적인 것으로부터 재구축해왔다. 얼핏 보기에는 사사로운 행위나 조각난 발언을 이어붙임으로써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들어왔다(Descola 1994a). 이것들의 의미 있는 패턴은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행위의 가이드라인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의 민족지적인 분석의 청사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전자의 가능성을 내가 선호하는 이유는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성원의 대부분은 자신의 문화적인 관습의 기본원리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해도 토대를 이루는 패턴의 한 기초방식에 자신의 실천을 적용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 이러한 토대가 되는 패턴, 곧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도 조직하는 것 같은 패턴은 내 생각으로는 문화ㆍ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정신의 보편적 구조는 아니다. 이렇듯 내가 프락시스(praxis)의 도식 혹은 도식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 단지 객체화된 특성, 즉 관계의 카테고리의 기본적인 조합 하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다양성을 포섭하는 데에 제 역할을 다하는 인지유형 혹은 매개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들의 패턴은 관계하는 요소들의 숫자보다 다양하지 않으므로 이것들의 프락시스 도식이 무한의 변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해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인지적 보편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해도 비인간의 사회적인 개체화를 조직하는 정신모델을, 문화를 넘어서 존재하는 유한한 조합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친족체계의 아날로지를 사용하면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사회실천으로서 친족체계는 결연의 규칙, [친족] 호칭, 행동양식에 의한 사회적 영역의 질서화의 원칙, 그리고 다종다양한 신체적 구성요소의 호환성과 비호환성, 집합적ㆍ개인적인 권리와 정체성의 귀속성과 전도(傳導)를 규정하는 다양한 개체들 간의 호환성과 비호환성에 관한 관념들에 의해 구조화된다. 즉 친족체계는 관계양식, 분류양식, 그리고 동일화 양식을 조합시켜 조직한다. 이것들은 이제까지 망라적으로 기술되고 이해되어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많은 인류학자는 유한의 변환군으로 종합하여 다뤄왔다. 비인간의 사회적인 객체화 또한 관계양식, 동일화 양식, 그리고 분류양식의 조합에 의해 동등하게 구성되며 그와 마찬가지로 취급되도록 적합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상징생태학
동일화 양식
자(自)와 타(他)의 경계를 획정하는 동일화 양식은 인간과 비인간을 다루는 데에도 표현되며, 그것이 특정한 코스몰로지나 사회의 토포그라피(topographie)를 형상화한다.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토테미즘적인 시스템’과 ‘애니미즘적인 시스템’ 간의 대립은 이러한 동일화 양식의 두 양상을 반영한다(Descola 1992). 토테미즘적인 분류가 자연종들 간의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비연속성을 사용해서 사회적 단위의 경계를 결정하는 분절질서를 개념적으로 조직하는 것에 반해(Lévi-Strauss 1962) 애니미즘은 자연의 존재물에 인간적인 성향과 사회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그 때문에 토테미즘적인 분류의 대칭적인 반영이다.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개념적 질서를 사회에 부여하기 위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인 관계들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종 간의 관계들을 개념의 항으로 조직하기 위해 사회생활을 구조화하는 기본적인 카테고리를 사용한다. 비인간은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에서는 기호로서 다뤄지며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에서는 관계의 항으로서 다뤄진다. 여기서 강조해야하는 것은 이 둘의 동일화 양식이 단일한 사회 내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마쿠나족(Makuna族)에 관한 Arhem(1996)의 논의 참조).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은 분절조직과 결부되기 때문에 출자(出自)집단을 가지지 않은 사회에는 분명 부재하지만, 그 다른 한편의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공계(共系)적인 사회에서도 분절사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양쪽의 시스템이 다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예를 들어 네이티브아메리카 사회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처럼 많은 경우 비인간의 서로 다른 범주 간에는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며, 그 한편으로 토테미즘적인 분류에 의해 객체화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애니미즘을 통해 객체화된다.
동일화의 세 번째 양식은 우리에게는 보다 익숙한 내추럴리즘이다. 내추럴리즘은 요컨대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 즉 우연성과 인간의 의지에 의한 영향의 어느 쪽에도 외적인 원리에 따라 어떤 사물이 존재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신념이다(Rosset 1973). 내추럴리즘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전형적인 서양의 코스몰로지로서 특정한 존재론적 영역, 즉 (스피노자의 유명한 ‘신이 곧 자연’과 같은) 신으로부터 생기든 세계의 그물망에 내재하든(‘자연의 법칙’), 여하간 섭리나 원리가 없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질서와 필연성의 장을 만들어내었다. 내추럴리즘이 우리 자신의 동일화 양식이며, 그것이 과학적 실천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 속에도 젖어들어 있는 이상, 그것은 우리의 인식론, 특히 타자의 동일화 양식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조화하는 ‘자연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 이 맥락에서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학문으로서는 흥미롭지만 잘못된 표상, 즉 우리가 자연이라는 부르는 현상의 특정하게 한정된 범위를 단지 표상적으로 조장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선입관에 사로잡히지 않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인 영역으로서의 자연의 존재 그 자체는 대화가 가능한 동물이나 인간과 캥거루 사이의 친족적 유대와 마찬가지로 경험으로부터 그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갈릴레오 이후 근대과학이 리얼리티의 내적인 움직임을 점차 유효하게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 우리의 이원론적인 코스몰로지의 근원적인 진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바로 라투르가 설득적으로 논의한 것처럼(Latour 1994), 17세기 이후 과학기술의 전개를 특징지은 점차 진전하는 자연의 인공화는 자연과 사회의 두 극단 사이의 대립을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실천적으로 가능해졌다. 존재론적인 혼종성의 개념화를 방어하는 이원론적인 에피스테메는 실제로 현상의 측면에서 혼종화의 증식을 지지해왔다. 사회생물학자가 좋아하는 내추럴리즘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설명은 이 패러독스의 동시대적인 예시다. 자연이 DNA라는 장치 하에 그 생식능력을 최대화함으로써 사회관계의 [생성을] 촉진하게 될 때 그 [자연]은 바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말한 희소한 수단과 무한의 목적의 자유 시장에서의 호모 이코노미스처럼 행동한다(Sahlines 1976, Ingold 1996). 그렇게 생각하면 내추럴리즘은 애니미즘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내추럴리즘은 자연과 문화의 실제의 혼종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도 그 사실을 개념화할 수 없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은 내추럴리즘이 은유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을 의례에 의해 산출하는 상징적인 변신(metamorphose)으로 개념화한다.
관계양식
그러면서도 애니미즘, 토테미즘, 그리고 내추럴리즘은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 속에서 특정한 관계적인 정체성을 분할하는 추상적인 위상학적 격자(grid)일 뿐이다. 이것들의 정체성은 사회적인 실천(praxis)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스타일과 가치에 반영된 관계양식 혹은 상호작용의 도식에 매개될 때 상호 구별되며 인류학적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이 관계양식의 두 양상을 포식과 호혜성이라는 라벨로 정의한 바 있다(Descola 1992). 양자는 애니미즘의 일반적인 틀에서 아마존 강 상류 유역의 기술, 거주패턴, 분업 등이 매우 유사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별개로 존재한다.
콜롬비아 동부의 투칸 인디언의 코스몰로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호혜성이란 생물권(生物圈)을 공유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다. 엄격한 균형의 원리에 기반하며, 이 생물권은 동적 평형을 가진 닫힌 서클로 간주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력의 총량에 한정되기 때문에 내적인 교환은 특히 사냥과 같은 음식물 조달의 과정에서는 비인간으로부터 빼앗은 에너지의 일부가 비인간에게 되돌려지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인간의 혼을 ‘동물들의 주재자’에게 반환하는 것과 그 귀결로서 일어나는 피수렵동물로의 변신에 의한 에너지의 피드백은 확실하게 행해진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신하는 것이며, 양자는 공히 호혜적인 교환에 의한 우주의 일반적인 균형의 원리에 기반한다. 언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각 부족, 각각의 로컬집단은 자신을 지역적인 메타시스템으로 통합되는 하나의 요소로서 다루며, 여성, 상징, 인공물의 규칙화된 교환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포식은 에콰도르동부와 페루의 히바로族에서 지배적인 가치로 표현된다. 여기서도 비인간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성질을 일정 정도 공유하는 인격(aents)으로 생각되며, 인간은 (재배되고 있는 식물에게는) 혈족적, 혹은 (숲의 동물들에게는) 인척적 유대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은 인간과의 교환 네트워크에는 참가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취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 대신 비인간들은 여성이나 아이의 피를 마심으로써 마니옥[카사바]의 보복을 행하거나, 수렵동물의 경우에는 과잉의 수렵자들을 뱀에 의한 교상으로(신화담론에서는 식인적인 포식으로) 벌함을 ‘동물들의 주재자’에 위탁함으로써 보복하고자 한다. 이 호혜적인 포식은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 또한 통제한다. 히바로 부족들 간의 머리사냥과 끊임없는 분쟁은 (여성과 아이의 유괴와 더불어) 잃은 생명을 벌충할 필요성을 가까운 친인척의 실제의 정체성 혹은 가상의 정체성을 포획함으로써 표현한다. 이때 보복은 기대되지만 실제로 의도되지는 않는다. 즉 상호의 포식이란 적의에 가득 찬 상호관계를 통해 생명을 똑같이 교환한다기보다 호혜성에 대한 일방적인 거절에 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쌍방에 대한 대조적인 양식으로서 호혜성과 포식은 문화의 에토스에 침투한 지배적인 도식을 구성한다. 그러나 호혜성과 포식 양자는 특정한 상황에서 각각의 반대물의 존재를 다시금 배제하지는 않는다. 히바로 부족들 간의 균형적인 호혜성은 통상의 결연을 통제하며, 때로는 시집보내기를 즐기는 투칸족은 우주전체의 식물연쇄에 자신이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Arhem 1996 참조). 바꿔 말하면 호혜성은 투칸족에게 포식을 포섭하게 하고 히바로 부족에서는 그 반대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타입의 계층적인 포섭은 세 번째 관계양식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보호다. 보호는 비인간의 재생산과 번영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 의존하고 있는 곳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여기서 비인간은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인간과 관계가 깊은 몇몇 가축동물과 재배식물이 될 것이다. 이 동식물종은 사회전체로서 중요한 구성요소(예를 들어 가축화된 소), 혹은 더 작은 친족단위로서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반려동물, 선조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 등)로 나타난다. 의존적인 유대는 종종 호혜적이지만 비인간에 대한 보호는 많은 경우 유익한 결과를 보증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공리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존의 기반을 보증하거나 감정적인 애착의 필요를 채운다거나 교환을 위한 통화를 제공하거나 혹은 박애적인 신성(Divinity)과의 유대를 영속시키기 위해 기능할 수 있다. 현대의 보호주의 운동과 같은 가장 이타적인 차원에서도 비인간에 대한 보호는 [인간 측의] 자기욕구의 충족을 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자연지배와 소유를 다른 차원으로 변환한다. 그 차원이란 죄의식이 누그러져 지배가 온정적인 보호와 비적인 오락으로 왜곡되고 변형되는 소세계다.
보호는 상호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종종 비대칭적인 관계의 반복에 의해 다른 존재론적인 차원을 이어주고 증폭하는 의존의 연쇄이기도 하다. 몇몇 문화에서는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에 행하는 박애적인 보호를 통해 또 다른 비인간군을 대표하는 것들, 즉 신성에 포섭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태도를 정의하기도 한다. 신성은 때로 지역경제에서 특히 중요한 동식물의 화신이 되며, 인간이 이용하고 보호하는 비인간의 궁극적인 제공자로서—때로는 직접적인 생명의 부모로서—다뤄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조나 보호자로서 다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는 포식의 형식(직접적인 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인 비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과 호혜성의 형식(동식물인 비인간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영속시키기 위해 신성의 비인간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조합시킨 포섭적인 관계 시스템으로서의 가치를 보호하기에 이른다. 이것들의 관계항 세트가 여기서는 계층적으로 조직되는데, 비인간의 사회적인 객체화는 또한 아날로지의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다.
범주화 양식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의 개념화는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나누어 가지는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지되는 범주에 개체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할당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그러나 범주화는 단지 분류학적인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다(Quere 1995 참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의 주류 민족생물학자에게 자연종의 분류는 서술적 추론, 곧 대상을 무언간의 계층으로 내포함을 뜻한다. 이 관점에서 분류된 대상은 실체로서 이해되며 상호 대조적인 특징과 보통은 특정한 언어적 특징에 의해 구별된다. 이렇게 분류된 것은 개인의 심적인 표상으로 다뤄지고 그 표상에는 동질적으로 간주되는 지각적 특징의 결과로서 시차적인 자율성을 부여받는다. 분류학적인 유형이 자연에서 소여의 항목 혹은 특정한 인지와 지각의 제약의 결과의 항목에 기초해서 행해진다고 보면, 민족생물학의 민속분류의 내적인 구성이 보편적이지 않은 몇몇 특징적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Atran 1990, Berlin 1992). 그러나 범주화의 프로세스는 칸트의 도식론의 전통에 따르면 개별적인 것을 조직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동적인 공간을 질서화하는 프로세스로서 보다 넓은 시야를 획득하게 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범주들의 구성은 그 상대적인 위치의 한 함수이며, 관계적인 정체성은 대체로 암묵적인 절차에 의해 구축된다. 아유르베다의학(인도의 전통의학)에서 질병의 분류(Zinmermann 1989)나 마다가스카르의 자피마나리族의 사회적 특성의 조직화(Bloch 1992)는 그러한 분류의 원리들에 관한 소박한 인류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분류학적인 유형은 속성의 논리에 기반하는 것에 반해, 종종 범례적이라고 칭하는 이러한 질서화의 종류(Petitot 1985)는 관계의 논리에 기반한다. 이 변별은 새롭지 않다. 칸트는 기억에 기여하는 체계화로서 스콜라학파적인 구분과 자연의 구분을 다르다고 생각했다. 후자는 확립된 라벨이 아닌 조합의 법칙에 기반하여 생물을 나눈다(Kant 1947). 그러나 패트릭 토르(Patrick Tort)에 따르면 이 두 개의 분류도식은 상반된 것으로 다뤄질 수 없다. 토르는 18세기 드 마르세(Château De Marçay)가 만든 비유의 분류에서 사용된 어휘를 가져와 유사성으로 분류되는 은유적인 도식 그리고 속성 혹은 성질에 의해 분류되는 환유적인 도식을 통하면 어떤 분류 장치도 성립될 수 있다고 논했다(Tort 1989). 이 도식의 어느 쪽도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쪽이 확립한 눈에 보이는 질서는 다른 한쪽의 도식의 고유한 질서에 의해 항상 은폐되기 때문이다.
동식물의 표준적인 민속분류는 많은 경우 유사성의 원리, 곧 은유적인 도식에 따라 조직된다. 그러나 명명의 의미론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면 무엇보다 [이미] 분류된 것의 질과 용도에 따라 변별이 행해지는 아속(亞屬)의 분류군의 차원에서 명명을 결정하는 것은 종종 환유적인 도식이다. 반대로 상징적 혹은 토테미즘적인 분류는 환유적인 도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인간집단(class)과 비인간집단(class)은 상호 맞물리는 성질의 이어짐을 통해 연결되는데 만약 하나의 범주에서 나타나는 대조적인 세트의 조직화가 다른 한쪽의 조직화 개념모델 또는 그 반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상관시키기 때문이다(이 사회중심주의적인 버전에 대해서는 Derkheim and Mauss(1903)를, 그 역에 대해서는 Levi-Strauss(1962)를 참조). 그러나 상징적인 분류에 개입하는 연관의 원리는 그 자체로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말소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템종의 본질적인 성질과 그 토템명으로 불리는 출자집단의 성원들의 본질 사이에 유사성이 강조되는 경우가 있다. 환유적 도식과 은유적 도식—이 둘은 많은 상징적 분류에서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논리ㆍ맥락의 차원에 있다— 간의 경계의 결여가, 레비-스트로스가 토템환상(1962)이라고 부른 인류학적인 페티쉬가 지속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각각의 문화와 역사적인 에피스테메는 이 둘의 분류도식을 분절하고 접합함으로써 특정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조합의 존재방식은 지배적인 도식의 종류와 그 도식에 의해 포섭되는 차원의 숫자와 분류의 각 차원에서 각각의 도식에 의해 특권화되는 분류양식의 종류의 따라 다르다. 이것들의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은유적 도식은 형태학적 유사성에 의해 분류될 것이며(미쉘 아당송(Michel Adanson, 프랑스 식물학자, 1727-1806)이래 주류식물학), 아날로지(구조, 디자인, 지적능력 혹은 도덕적 성향의 아날로지)와 (구조음운론, 분기론, 인종주의적 생태인류학처럼) 대조적인 특징의 매트릭스에 의해서도 분류될 것이다. 환유적 도식에서도 그것은 속성과 용도에 의해 (예를 들어 고전 이전의 서양의 식물학처럼) 공간적인 우유성(偶有性)의 관계(민족생물학의 민속분류에서 생식영역에 의한 분류 혹은 민속 코스몰로지에서 토포스에 의한 분류)에 따라, 혹은 시간적인 우유성의 관계(특정한 출자집단의 빈속분류나 진화생물학의 계보적인 원칙)에 의해서도 분류될 것이다. 내 생각에—오히려 신념에 기반한 편향된 행위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분류도식과 분류양식의 계층적인 조합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서로 다른 종류의 범주화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이 탐구에 의해 적어도 민족을 연구하는 과학이 장기간에 걸쳐 그 사이를 진동해왔던 두 개의 선택지, 곧 문화적 방법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선택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류학적 종별화만 배려한 생물종의 질서화에서 인공적인 보편성이라는 선택지를 회피할 길이 열리게 된다.
조합(Combination)
지금까지 가설에 기초하여 다양한 명제를 제시해왔는데, 민족지적인 사례 몇 가지를 제공함으로써 논의의 범위와 잠재적인 이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면의 제약상 다양한 동일화 양식과 관계양식의 조합으로부터 발생한 비인간의 객체화의 몇몇 타입만을 주목하여 분류양식을 다뤄보겠다.
애니미즘적인 변이
애니미즘은 동일화 양식으로서 적어도 세 개의 주요한 타입의 관계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것은 포식, 호혜성, 그리고 보호다. 히바로 부족에서 포식적인 애니미즘의 사례는 앞서 언급되었는데, 그 특성은 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호전적인 사회들의 상당수에 적용가능하다. 그 속에서 인격, 정체성, 신체, 그리고 구성요소의 결함과 포획이 카니발리즘적인 사회철학의 시금석을 형태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문두루쿠족(Mundurucú族)(Murphy 1958)이나 그랑차코의 니바크레족族(Ritzenthaler 1978)을 들 수 있다. 호혜성은 포식의 반전이며,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예배, 혼, 식물 혹은 총 생명력의 끊임없는 교환에 의해 활성화되는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을 특징짓는다. 그러한 시스템에서 지배적인 신념은 인간이 비인간에 대해, 특히 비인간이 식물을 제공해준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의무를 면해보려는 한편 비인간은 호혜성의 균형을 재확립하려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비인간이 인간의 인격의 구성요소를 취하거나 식물을 먹거나 생명력의 일부를 탈취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제까지 이미 다룬 북서아마존의 투칸사회 외에 북미의 북극ㆍ아북극지방 사람들, 예를 들어 이누이트(Blaisel 1993), 몬타니에 나스카피(Speck 1935), 북부오지브와(Hallowell 1981), 마 베티세크(Karim 1981) 등의 사례에서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호는 지배적인 관계양식으로서 애니미즘적인 시스템과 거의 관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주로 수렵이 인간과 비인간을 매개하는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쪽의 보호는 보호받는 종과의 직접적이고 영속적인 관여와 비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존을 보여주며, 길들여진 것과의 상호관계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하마욘은 남시베리아의 에키리트족과 불라가트족이 실천하는 [목축의 샤머니즘]에 대한 분석에서 보호적인 애니미즘의 사례를 분명하게 기술했다(Hamayon 1990: 605-704).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축동물(소, 말, 양)의 상징적인 지위는 시베리아의 사냥꾼의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부리야트족의 수렵사회가 피수렵동물과 [숲의 정령]과 그들과의 관계를 평등하고 동맹적인 관계로 다룸에 반해, 부리야트족의 목축민들은 인간과 보호받는 비인간(소)과 그 쌍방을 보호하는 ‘주재자 소’로 부르는 비인간 간에 계층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소가 하위에 위치함에 따라 동물의 공희를 통한 교환관계가 확립되며, 그 보답으로서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지속이 보증된다.
토테미즘적인 변이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전형적인 관계양식은 필연적으로 이분법적이다. 이 시스템에서 비인간은 사회적인 분류에 사용되는 차원의 레토릭을 제공한다. 비인간은 사회가 그 분절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며, 그 자체로 인간과의 사회적인 관계항을 구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인간의 의미와 기능은 사회적 분류라는 역할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 실천적 혹은 상징적인 잠재성의 다양한 측면이 사회생활의 다른 차원에서 강조될 수 있다. 그 때문에 토템종과의 포식적 관계는 분류개념으로서의 종과 그 종의 개개의 성원들 간의 명확한 구별이 이뤄져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버리지니(Aborigine, 오스트로네시아계의 원주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속에서 수렵은 인간과 동물 간에 행해지는 교환과 계약의 산물로만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극히 일상적인 음식물 조달의 활동으로 취급된다(Testart 1987). 아메리디안[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리베리아의 코스몰로지처럼 피수렵동물과의 관계가 인척관계나 결연관계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렵자들은 그들의 포획물을 그 죽음이 배상해야하는 분신으로 다루지 않는다. 포식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그 속에서 특정한 코스몰로지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수렵의 범위를 벗어나면 동물의 이례적인 취급은 비인간의 커뮤니티와 인간의 커뮤니티 간의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의례적인 조직에서 강조되고, 그 속에서 사회의 전체성을 만드는 서로 다른 분절들 간의 연대와 상보성이 장려된다. 그 때문에 동물은 맥락에 따라 먹기에 적합한 것이 되거나 사고의 양식(糧食)을 가늠하지만 사회적인 파트너는 될 수 없다.
토템인 비인간과의 호혜적인 관계는 포식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토템종은 사회분절의 단순한 시니피에(기의)인 이상 인간과의 호혜적인 관계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를 벗어나면 순수한 토테미즘 시스템은 예외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많은 경우 비인간의 적어도 그 일부와의 애니미즘적인 시스템과 조합되며, 그에 따라 호혜관계를 표할 수 있다. 그러한 사례는 브라질의 보로로족에서 발견된다.
토테미즘적인 시스템과 보호 관계의 조합은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의 양식의 상대적인 이분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다른 관계양식만큼 명백하지 않다. 보호받는 비인간은 반드시 토템종의 세트의 일부가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토템의 기능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즉 비인간은 사회적인 지위와 관계의 징후로서 사용될 수 있다. 누어족은 이 후자에 대한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누어족은 분절리니지의 개념화에서 특정한 비인간(포유동물, 조류, 파충류, 나무)이 취하는 매우 정통의 토테미즘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회적인 과정과 관계를 소에 의해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에반스-프리차드 1940: 19). 이러한 측면은 의례생활에서 특히 강조된다. 예를 들어 남성들의 입사식에서 각각의 젊은 남성들은 그의 ‘수소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 이름은 이름의 원주인인 특정한 수소를 소유하지 않은 뒤에도 장기간 보유된다. 누어족의 사례에서 소는 보호하기에 적합한 것이며,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의 징후로서 사고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그리고 교환의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직접적인 대체물로서 사회화하기에도 적합한 것이다.
내추럴리즘의 변이
모든 동일화 양식 중에서 내추럴리즘은 분명 서양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표명은 이율배반을 일으키고 유토피아의 영역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서로를 파트너 등의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물로 상상하는 호혜성의 관계를 구축하기를 바란다 해도 내추럴리즘의 코스몰로지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는 어떤 공통의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 내추럴리즘은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연결된 커뮤니티에 속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 서술적인 역할을 잃지만, 양자가 다른 존재론적 영역에 고정될 때 호혜성의 변증법은 이원론의 무효화라는 불가능한 원망을 표하는 은유에 불과하다. 이런 류의 원망은 철학과 문학의 담론에 광범위하게 표명되어왔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에서) 셸링,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괴테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 (자연의 변증법에서) 엥겔스 혹은 최근의 미셸 세르(Serres 1990) 등의 다양한 대변인이 여러 형식을 통해 말해왔다.
포식적 내추럴리즘에 대해서도 그것은 숲의 대부분이 개간을 위해 한꺼번에 제거되었던 중세에 활약한 옛 유럽적 실천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 실천이란 데카르트철학에 의해 정당성을 입증 받았던, 세계의 기계화에 그 표현—기술적 의미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의 표현—을 빌린 실천이다. 그리고 이 실천은 부르주아 사회가 자연 질서의 체현으로서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던 시대에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유럽의 역사적 운명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했다. 그 상태에서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장식을 두르고 특정한 가축동물과의 관계와 정원의 발전(Thomas 1983)에서 이미 경험한 감수성과 행동방식을 야생종과 자연의 경관으로까지 확장했다. 자연을 초월론적인 객체로 페티쉬화함으로써 (그 통제 방식은 포식적인 자본주의로부터 근대경제의 합리적인 관리로 치환되었을 뿐인데) 환경보호운동은 서양의 코스몰로지의 근거를 되묻기는커녕 오히려 근대 이데올로기에 전형적인 존재론적 이원론을 영속시켜왔다. 그러나 환경운동가가 보여주는 프로세스는 아무리 의미있는 것이라 해도 내추럴리즘의 해체로 향해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범위의 비인간의 생존이 점차 인간에 의한 파괴로부터 보호받도록 되고 있고, 머지 않아 사회적인 규약과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큰고래, 오존층, 남극의 생존조건은 현재 동물원에 있는 야생종과 생물데이터뱅크의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자연은 그 유래를 갖는 정의로부터 멀어져가고 자율적인 발전의 원리에 의한 산물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즉 그러한 올 수밖에 없는 붕괴는 개념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역사의 길고 긴 한 장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결론
자연이라는 관념은 그 모호함으로 인해 서양사상의 역사의 건설블록을 이루는 일련의 이분법(자연-문화, 자연-초자연, 자연-예술, 자연-역사, 자연-정신 등)에서 주요한 기둥이 되어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Heidegger 1968), 자연은 일련의 반정립적인 개념의 기본용어 이상의 것으로 지속해왔다. 이것들의 모든 변별에서 자연은 대립하는 각각의 개념의 바로 그 특징을 정의하는 하나의 포섭적인 전체성으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자연에 의해 그 개념규정을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많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개념을 초월하려는 시도로서 그 존재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 개념을 진압해버리면, 서양의 공적(功績)으로서 철학적인 대 건조물 전체가 너덜너덜하게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지적대변동은 하이데거가 계속해서 비판한 ‘존재(Being)’의 위대한 무익함과 대치하는 장에 우리를 남겨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가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아직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수많은 문화들에게는 이국적인 우리의 코스몰로지를 변조할 뿐이다. 그렇다면 글로벌리제이션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의 철폐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원리로의 회귀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사회적 장치에 의해 인간과 비인간이 더 이상 쾌적하게 관리될 수 없는 혼종성의 세계에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대처하고자 분투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를 근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통의 기반이다.
그러한 카드의 절단이 최종적으로 일어날까? 또 그것이 보다 좋은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학에서 인식론적 귀결은 분명 예기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문화의 이분법의 유산인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고찰하는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 양자를 반정립적인 프로세스로 의도적으로 옮기는 것을 퇴폐시킬 것이다.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성과 물리적 자연을 자율적인 실체로 다루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며, 그리하여 개개의 존재와 집합적인 존재의 구축을 진정 생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길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존재물들은 자기완결적인 것 혹은 외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공작된 것 혹은 인간에게 지각되는 것이든, 유형 혹은 무형이든, 그렇게 구축된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와 정체성을 가진다. 관계와 결부된 사물들에 앞서는 관계방식이 존재한다면, 이 관계들은 그 항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 그 자체 속에서 자신을 현세화(現勢化)시킨다. 비이원론적 인류학은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구조현상학이다. 그 속에서 관계들의 로컬한 시스템이—라투르(Latour 1994)와 카론(Callon 1991)이 대칭성의 인류학으로 제창한—유대의 규모와 유형을 통해 서로 다른 기능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라 변환군의 변이로서, 즉 한정된 수의 요소들 간의 호환성과 비호환성에 의해 구조화되는 조합의 세트로서 기술되며 비교된다. 이 요소들 사이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객체화의 관계들(Descola 1994b), 범주화의 양식들, 매개의 체계들, 그리고 특정환 환경에 적합시키는 기술적ㆍ지각적 어포던스(affordance: 일종의 행위 유도성)(Gibson 1979)의 유형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연-문화가 직교하는 낡은 격자(grid)를 떨쳐낸다면, 새로운 다차원적 인류학의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돌도끼와 쿼크, 재배식물과 게놈, 수렵의례와 석유산업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도 포함하는 관계들의 단일한 세트 내의 다양한 변이로서 이해될 수 있다.
Philippe Descola. 1996. Constructing Natures: Symbolic Ecology and Social Practice in Nature and Society: Anthropological Perspective. London & NY: Routeledge.
「自然の構築:象徴生態学と社会学実践」『現代思想』2017年3月号(難波美芸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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