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6년 5월호에 실린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이 논문은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이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와 만나는 여러 지점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조금 더 논의를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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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라는 ‘궤변’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 개념에 기초한 칸트인류학 비판
오오하시 칸타로우(大橋完太郎)
(사상사/표상문화론)
1.
경험은 일말의 분자로부터 수백 년을 단번에 앞질러서 생명의 전 역사를 거슬러 인간사회에 이르는 장대한 총합의 시도를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일찍이 진화론이 지껄였던 그러한 ‘자연의 철학’은 종종 최악의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이 발언은 1976년에 발표한 미셸 푸코의 논고 「<생물-역사학>과 <생물-정치>」의 서문의 일부이다. ‘생명의 역사’가 초래한 최악의 결과란 무엇인가? 푸코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우생사상에 기초한 사회정책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한 우생학이 나치즘 정권 하에서 단종과 격리의 논의를 형성했고 실제로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되었던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위기에 저항한 프랑스의 현대지식인으로서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사례는 푸코의 염려를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는 모리스 블로흐의 논의에 기초하여 레비-스트로스가 놓인 상황과 그의 작업의 의의를 개괄한다. 블로흐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가 독자의 인류학 이론을 구상한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강력하게 대두된 우생사상에 대한 저항이었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라는 종의 이론, 나아가 인종의 이론을 지지하는 ‘자연주의’적인 견해와는 다른 관점을 세우고자 했다. 1943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9년에 간행한 『친족의 기본구조』는 우생학의 이름으로 알려진 사회-생물학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우생학적인 사고는 진화론적인 관점 하에서 자손을 남기려는 이전 세대의 관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부모-자식의 유전학적인 연결을 강조하고 그에 의해 친족관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타인이 자신과 혈연관계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사회의 기원과 성립을 설명하는 사고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사회를 혈연적 유대로 환원하는 사고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는 일종의 에고이즘을 은폐할 뿐이다. 거기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한 존재라거나 그 이행할 때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 망각되고 만다. 근친상간 금지란 인간사회의 기반에 혈연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혈연이 아닌 것들과 유대를 맺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구성한 복잡한 교섭체계로 [근친상간 금지가] 사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의 복잡성이 뇌를 중심으로 하는 신경계의 복잡함에 기원하지도 않으며 문화를 뇌의 구조의 직접적인 반영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에 침전되면서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를 만들고 변화시킨 존재이며 그러한 변환의 주체로서 인간정신을 일종의 ‘튜링 머신’(Turing machine)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1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이 두 사람에게 생물학적 진화론의 기원의 사고의 총합은 위험한 귀결을 초래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분리 및 결합의 양태이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분열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한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를 검토하면서 그 문제점을 소묘해나가겠다.
2.
칸트는 1784년에 간행한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보편사의 이념』에서 자연의 경향성과 사회의 통일성을 가교하여 인간을 사회의 형성으로 향하게 한 것을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이라고 명명했다. 이 인간본성은 분명 모순된 내용을 포함한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본성은 ‘사회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성벽(性癖)이지만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사회를 분단하는 공포의 한 일반적 저항과 연결된 성벽’이다. 전자의 사회적 경향성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 자신의 자연적 소질이 발전해가는 것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혼자 있고 싶다(고립하고 싶다)’는 성질을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립상태의 양의성이다. 고립상태에 놓인 인간은 자기의 경향과 타자의 경향이 상반되며 결과적으로 그 인간은 자기 안에서 타자에 대한 경향을 발견함과 동시에 타자 안에서도 자기에 대한 저항이 있음을 본다. 이 저항을 단서로 인간은 문화적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힘을 불러일으키고, 태만으로 기우는 마음을 넘어서게 하며, 분명 함께 있는 것은 싫지만 놓아줄 수도 없는 동료들 옆에서 공명심과 지배욕과 소유욕에 뛰어들어 하나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인간을 몰아세운다. (p.8 (A21))
인용한 이 구절이 칸트에 의해 ‘문화 상태로의 진정한 첫걸음’이라 불리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에게 타자에 대한 적대와 질시, 자기 것을 독점하고픈 욕구는 ‘거친 자연소질’이지만 이 소절을 통해서 인간은 ‘목가적인 양치기’나 온후한 ‘방목된 양’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 칸트는 생각한다. 비사회성 혹은 일반적 저항은 인간이 자연에게서 받은 은혜이며 때로 재해를 일으키면서도 그것 없이는 문화적인 발전을 구동시킬 수 없는 본원적인 자연의 힘이다. “인류를 길러내는 자연과 예술 및 그보다 우월한 사회적 질서는 모두 비사회성이 맺은 결실이다. 이 비사회성은 자기훈련을 거쳐 그 강제적인 기법을 통해 자연의 맹아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도록 우리 신체에 강요한다”(p.11 (A22))는 언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칸트가 생각하는 문명사의 발전에서 자연 상태로부터 문화적인 상태로 이행할 때에 필요한 ‘자연의 힘’이 개체의 레벨에서 요구된다. 문화적인 상태는 자연 상태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연성을 괄호에 넣고 그와 별개의 특수한 자연성에 의해 구동됨으로써 발생한다. 루소적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통해(이 타입의 자연성은 홉스의 자연 상태와 유사하다) 자연과 역사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연의 합목적성에 따라 사회의 발전이 보증된다. 이 또 하나의 자연성의 내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티격태격 하고 사람을 시기하고 경쟁을 좋아하는 허영심,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혹은 지배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태만을 좋아하는 자연성과 불화하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조정하는 해결책으로서 자연이 요청하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의 실현이다. 칸트에게 역사의 목적성과 자연의 목적성의 일치는 이처럼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성을 화합시킴으로써 성립한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자연성이 실제로는 얼마만큼 질적으로 다르며 또 어느 정도로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질의 총체와 역사적 성질의 총체의 차이는 예를 들어 유전과 민족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어휘에 의해 사고될 수 있다. 그리고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을 하나의 자연으로 사고하고자 한 칸트가 보편사의 성립, 인류사의 기원, 만물의 종언, 인종의 차이를 거의 동시에 사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푸코와 레비-스트로스가 우려한 바는 이미 칸트의 영위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칸트에게 인류의 기원과 종말을 생각하는 것과 인종 간의 차이와 동일성을 사고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엇이 저류로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3.
여기서는 앞서 서술한 모호한 자연의 영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칸트에 의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차이에 주목해보자. 1788년에 발표한 『철학에서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에서 칸트는 요한 게오르그 아담 포레스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개념을 구별하고 있다. 자연사란 ‘인간이성의 손에 닿지 않는 자연의 사건에 대한 서사이며’ ‘식물이나 동물의 최초의 성립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서사를 말할 권리는 신이나 조물주에 속하며,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법칙을 관찰에서 끌어내어 현재와 옛 시대와의 연관을 작용법칙에 따라 추적하는 권능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 방식으로 세계의 기원을 탐구하는 ‘자연사’에 대해 칸트는 그 가능성 자체는 인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사의 탐구는 자연기술의 정치화(精緻化)에 의해 한계지어진다.
실제로 이 두 작업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이다. 한편(자연기술)에서는 학문으로서 위대한 체계의 위용으로 나타나는 데에 반해, 다른 한편(자연사)에서는 단순한 편린이나 동요하는 몇몇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다. 이처럼 양자를 분리하여 후자를 독자적인 하나의 학문으로서, 눈앞의 (그리고 어디서라도) 작품이라기보다도 투영도(投影圖)의 모습으로만 수행 가능한 학문(여기서는 대다수의 질문에 대해 ‘해답 없음’이 제시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으로 그려낼 때에 내가 여기서 바라는 것은 한편의 학문에 대한 잘못된 통찰에 의해 본래는 다른 한편의 학문으로만 귀속하는 사태를 바라는 대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자연사에서 현실적인 인식의 범위(실제로 이미 약간은 소유되고 있다)와 그와 동시에 이성 그 자체만으로 자연사적 인식의 한계와 이 인식을 최선의 모습으로 확장하기 위한 원리들을 보다 명확한 방식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연사의 탐구를 ‘투영도’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데에 대한 염려를 말하고 있다. 이성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정밀과학(자연기술)의 성과를 확장하는 것은 이성의 자의적인 행사일 뿐이다. 기원이나 성립을 묻는 ‘자연사’의 탐구는 이성에 내재하는 인식의 한계와 그것을 ‘최선’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원리에 기초하여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전개된다. 칸트는 포레스트가 제창한 흑인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유전적 특성의 존재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인도인, 아메리카인의 유전적 특성을 동일한 클래스 분류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한 인종을 특별시하지 않는 칸트의 인종이론은 그 의미에서 평등하며 반인종차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실은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개념 자체가 칸트에게 이념(이성개념)일 뿐이며 그 의미에서 오성에 의한 무조건적인 논증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칸트는 자연기술에서 이해된 인류라는 보편적인 표징을 근간, 종족들(변종들), 나아가 다양한 인간품종(變樣種)으로 분류하는데, 이 분류 자체는 관찰을 거쳐 자연기술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 모두는 종에 대한 단순한 이념이며, 생식에서 최대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이 이성에 의해 통합된다는 정도로 상정”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성은 생식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을 동시에 보증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서 특별히 합목적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리하여 종족의 다양성이 근간의 합목적성에 의해 기초 지어지고 보증되는 것과 동일한 구도로 변양종의 다양체는 종족의 합목적성과 그 통일성을 한계 짓는다. 달리 말해, 교배의 무한의 가능성은 그것이 일정 정도의 통일성을 필연적으로 파괴하는 변양종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보증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이 생각은 동물과의 비교에서 명백한 주장으로 귀결된다. 즉 칸트에게 이성에 의해 통일되는 인간에게는 잡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은 다양성과 그 통일이라는 이념에 의해 통제되며,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한 인간은 ‘자연적인 부류’, 즉 ‘하나의 근간으로부터 맹아를 꽃피운 자연적인 종’으로서 자연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인종이란 생식능력을 통해 유전적인 다양성을 담보하면서 통일되는 각각의 클라스 내에서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칸트의 인종론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연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연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한정된 관찰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이다. 이것은 인과연쇄를 가능하게 하는 힘(‘근본력’)의 개념을 매개로 발견되는 이른바 아프리오리한 인과성에 의해 규정된다. 또 하나는 인간의 다양성과 통일을 인간고유의 것으로 만드는 이념과 관련된 자연사적인 자연이다. 후자는 자유의 목적을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다른 곳에서 자연사적인 혈족관계 속에서 근친상간 금기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자연의 목적성과 유용성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즉 근친상간이 유전적 자질을 수렴시키고 자연적 다양성을 해친다는 것이 마치 자연 그 자체의 목적인 것처럼 조정된다. 자연의 요청과 경험에 기초한 도덕적인 요청이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자연의 목적성을 근거로 경험적인 자유가 제한된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이성의 명법은 인간이라는 종을 유용한 한계 내에서 다양한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명이다.
이러한 사고가 칸트가 생각한 종말과 얼마나 관계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언해두겠다. 칸트가 말하는 ‘만물의 끝’이란 모든 것이 물리적인 레벨에서 붕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끝’이란 시간적 존재자가 영원한 모습으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에서—다시금, 할 만한가?—‘만물의 끝’은 이념이며 그 기원은 물(物)의 ‘도덕적 경과’에 대한 사변이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고유한 산물이다. ‘인간들의 손을 거친 만물의 그 끝은 그들이 선한 목적을 가질 때조차 어리석은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참된 끝이란 ‘일체의 변화가 멈춘 어떤 시간점’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때 사고와 감정은 전혀 교대하지 않고 석화하며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문다. 존재자는 그 속에서 시간의식을 빼앗기고 ‘절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실천이성의 이념이 가진 궁극목적을 달성한다.
칸트에게 자연과 기원, 그렇게 종말로 휘감기는 사고는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권리를 보증하는 것으로서 이념의 목적의 위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드러낸다.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보편적 자연법칙에 안주하는 인간본성(=자연)과 그로부터 일탈하는 반자연적인 인간본성의 갈등이 있다. 거기에서 소여로서의 자연성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자연성을 구성하는 인간의 본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본성은 인간본성을 뛰어넘는 본성을 가지고자 하며, 그것이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유사의 구조를 가지는 논의가 생물학적인 지견을 기반으로 전개될 때, 그것은 인종에 기초한 논의가 된다. 모순된 복수의 본성은 여기서 자연기술의 대상으로서 자연과 자연사를 구성하는 자연으로 치환된다. 식민지 개척을 통해 공간적인 지평에서 발견된 인종 간의 기호적인 차이가 인간의 유전에 얽힌 자연법칙을 증명하는 표상을 구성한다. 그 표상에 대해 오성이 이념의 감독 하에서 움직이며 가능한 해석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고찰도 올바른 비판철학의 구도 속에 있다. 즉 그 자체로 실체화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상정되는 ‘근간’이 인간의 변양체(變樣體)를 다양하게 발생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각각의 인간의 종을 통일시키는 것으로서 계층화되어간다. 이 속에서 인류는 자연의 목적과 도덕적인 요청이 결과적으로 일치하는 합목적적인 존재로서 이념에 포섭된다. 이념, 즉 이성의 목적은 인종을 <혈족관계의 다양성과 통일> 하에 종별화해가게 된다. 표현을 달리 하면, 이성의 프로그램에는 혈연의 연속성과 통일이 이미 기입되어 있다. ‘만물의 끝’에는 별개의 이념이 저장되어 있다. 그 이념의 궁극적인 달성은 인류의 정지이자 오성의 소멸이며 영원으로의 융합이다. 그러나 이 이념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는 신 외에는 없다. 칸트는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한 인간의 영위로서 노자의 체계와 동양의 범신론, 또 스피노자주의 등을 들고 있는데, 이것들이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켜 인간의 ‘절멸’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시도로 생각했다. 인간의 지혜는 오히려 절멸을 피하기 위해 이성의 이념에 반하지 않는 소극적인 선(善)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칸트의 사고는 세 개의 요소—즉 문화의 발전에서 모순된 인간본성이 맡은 역할, 자연사적 인간에 내재하는 생물학적 집단성의 보존의 프로그램, 절멸을 숭고한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피하는 소극적인 실천—의 총체로서 이해된다. 이성의 목적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구동시킨다. 발전한 문화에서 인간의 기원의 탐구는 이성의 한계 내의 자연기술의 수법의 연장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이념으로서 발견되는 종의 보존의 논리가 그와 동시에 인류를 절멸의 실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맡는다. 즉 칸트는 오성의 무한원점(無限遠占)에 있는 이성의 존재를 축으로 하여 순수이성의 자연의 영역을 실천이성의 자유의 영역과 접합시킨다. 여기서 생물학적인 생식 현상도 ‘인류’라는 특수한 종의 이념으로 전환되며, ‘반(反)-절멸’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를 구성하는 특정의 순수한 종이 절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종이나 잡종을 말소한다는 ‘소극적인 선’에 기초한 생각이 도출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4.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혈연관계에 얽혀있는 종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곧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상황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사고가 생식에 의해 연결된 신체를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일 수 있다, 라는 것을 상기해보는 것은 유효하다. 『성찰』의 「제1답변」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추론의 기초로서 어떤 원인의 계열에도 의거하지 않으며, 어떤 무언가 이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인식되는 것에 나 자신의 존재를 사용하는 것을 오히려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 관해서는 내가 일찍이 어떤 원인에 의해 산출되었는가보다 내가 어떤 원인에 의해 현재 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일찍이 모든 원인의 계기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나는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반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또 조부에 의한 것임을 내가 고찰하고, 그리고 양친의 양친을 탐구하면서 나는 무한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그렇게 질문은 끝나기 때문에 어떤 제2의 원인이 있다고 내가 단정한다, 라고 하는 경우는 완전의 별개가 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정신은 신체의 생식적인 연결과 단절되는 곳에서 나타난다. 이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원칙적으로 신체의 발생론적 질서에 믿음을 주지 않고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도 삼지 않는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철학은 이런 류의 형이상학의 현대적 복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한성 이후』에서 메이야수가 칸트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태도를 ‘상관주의’로 명명하고 그 불철저성을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원과 역사라는 문제계를 재고하기 위해 메이야스가 제시한 논의는 앞서 전개한 비판철학의 체계에 기초한 견해에 어떤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을까? 메이야수의 핵심 개념인 ‘선조이전성’을 단서로 생각해보자.
첫째, 메이야수는 ‘인간의 역사’를 선조나 인류에 얽매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조이전적’ 개념이란 ‘세계에 대한 온갖 형태로 인간적 관계에 앞서 제기된’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출발에 앞서는’ ‘알 수 있는 한 지구상의 온갖 생명의 형태에 앞서는’ 것이다.
반면 상관주의자는 선조이전적 심급을 생각할 때에 필연적으로 ‘후방투사’를 행한다고 메이야수는 지적한다. (이것은 바로 칸트가 자연사 개념을 전개할 때에 목격한 사태이다.) 즉 상관주의자는 ‘현재를 기점으로서 과거를 후방투사’한다. 현재 존재하는 인간의 주관성을 통해 모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때 후방투사된 언명 속에 나타나는 선조이전적 언명의 대상은 상관주의자에게 극히 모호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즉 간주관적인 방식으로 검증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명에 의해 올바로 기술되는 측면에서 그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서 기술된 사상(事象) 그 자체가 의식과 무관계하게 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사상은 올바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의 괴리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메이야수는 선조이전적 사건이 의식의 발전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의식에 앞서는, 바꿔 말하면 시간의식이 증여로서 주어지기 이전의 사건은 초경험적이며 존재론적인 레벨에서 상관주의에 의해 파악되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관주의에 부수하는 이러한 곤란에 대해 메이야수는 ‘원화석’(原化石)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과학적 수법을 통해 드러나는 선조이전의 연대에 논의를 한정함으로써 대처한다. 그 속에서 비교적 최근 탄생한 인류라는 종의 발생과 사멸은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즉 메이야수는 과학이 보여주는 시간성에 대해 그것이 의식의 시간성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고의 독립적인 의미를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인류’라는 문제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메이야수는 자신의 책의 본문에 달아놓은 긴 주석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경계를 서술하고 있다.
선조이전성의 논의가 본질적으로 ‘목격자 없음’의 반론과 구별된다면, 선조이전성에 대한 논의는 반대로 의식의 단독의 탄생과 죽음이 그 자체로, 의식적인 것일 수 없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때 상관주의는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되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개별적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자신을 지켜낸다.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된 시간이란 여러 의식의 공동체의 시간이며 그 속에서 탄생과 죽음은 다른 의식에게도 탄생과 죽음이며, 다시금 에고의 집합성에게 소여로 환원되면서 전개된다. 우리는 상관주의자의 이러한 대응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생과 사멸을 그에 대한 타자의 인식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이 도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의를 선조이전의 것으로 제한한다. 선조이전의 것은 모든 공동체를 일소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어떤 상관성도 이미 다룰 수 없게 된 시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과학에 의한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이점을 갖는다.
인간의 의식의 발생과 기원을 묻지 않는 명백한 이유가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첫 번째 이유는 상관주의에 의한 시간의식은 간주관적이며 공동체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이 공동적인 의식에서 모든 삶과 죽음은 거기에 속한 다른 주체에 대한 삶과 죽음 외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상관주의적인 시간의식에서 다뤄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이야수의 비판은 간주관적인 의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에도 고유한 삶과 죽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고유한 삶과 죽음이라는 표현이 엄밀한 의미에서 타당한지는 차치해둔다. 메이야수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의식의 간주관성의 구조 속에서 어떤 삶과 죽음이 항상 간주관성의 작업을 통해 여러 의식(에고)에게 소유로 환원되고 만다는 것이다. 메이야수가 이것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식에서도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삶과 죽음이 다른 존재에게 집합성을 보존하기 위한 소여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은 태어나고 죽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메이야수의 시도는 모든 사상(事象)의 고유한 생성과 소멸을 묻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선조이전의 것’이란 삶과 죽음, 발생과 사멸을 ‘공동성으로부터 일소’하기 위해 던져지는 사변적 도구(tool)가 아닐까?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는 이성의 합목적성의 이름 하에서 인간의 발생을 ‘인류사’(혹은 인간의 ‘자연사’)라는 지평에서 사고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연개념의 모순과 다양성 혹은 이념으로서의 외부성은 담보로 제공되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은 자유의 조건으로, 즉 도덕적인 요청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으로는 생물의 역사처럼 다만 확고한 인간의 역사가 확립된다. 이러한 칸트의 인류사의 구조를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의 관점에서 보면, 칸트가 ‘인류’의 이름으로 제시하고자 한 ‘공동성’의 의식도 분명해진다. ‘인류’란 칸트에게 불사의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직조한 인간의 ‘자연사’는 분기하면서 순환된 복수의 인종의 병립구조를 보존하며 ‘인류’가 통일체로서 연장해갈 수 있는 수단과 목적을 제공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됨으로써’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 구조 속에 종과 다른 것 혹은 종으로서 다른 이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불순’하고 ‘잡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통일을 견지하는 다양성으로부터 일탈하는(그렇게 간주되는) 자들은 휴먼적인 인간에 의한 순화의 폭력에 짓밟힐 수 있다. 역사에 총합되지 않는 삶과 죽음을 영위하는 잡종적인 존재방식이 바로 그러한 폭력에 저항한다.
- 1936년 영국의 튜링(Turing, Alan M 1912-54)이 고안한 상상의 계산 기계. 현재의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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