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6년 5월호에 실린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이 논문은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이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와 만나는 여러 지점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조금 더 논의를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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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라는 ‘궤변’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 개념에 기초한 칸트인류학 비판

 

오오하시 칸타로우(大橋完太郎)

(사상사/표상문화론)

 

1.

경험은 일말의 분자로부터 수백 년을 단번에 앞질러서 생명의 전 역사를 거슬러 인간사회에 이르는 장대한 총합의 시도를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일찍이 진화론이 지껄였던 그러한 ‘자연의 철학’은 종종 최악의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이 발언은 1976년에 발표한 미셸 푸코의 논고 「<생물-역사학>과 <생물-정치>」의 서문의 일부이다. ‘생명의 역사’가 초래한 최악의 결과란 무엇인가? 푸코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우생사상에 기초한 사회정책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한 우생학이 나치즘 정권 하에서 단종과 격리의 논의를 형성했고 실제로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되었던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위기에 저항한 프랑스의 현대지식인으로서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사례는 푸코의 염려를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는 모리스 블로흐의 논의에 기초하여 레비-스트로스가 놓인 상황과 그의 작업의 의의를 개괄한다. 블로흐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가 독자의 인류학 이론을 구상한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강력하게 대두된 우생사상에 대한 저항이었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라는 종의 이론, 나아가 인종의 이론을 지지하는 ‘자연주의’적인 견해와는 다른 관점을 세우고자 했다. 1943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9년에 간행한 『친족의 기본구조』는 우생학의 이름으로 알려진 사회-생물학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우생학적인 사고는 진화론적인 관점 하에서 자손을 남기려는 이전 세대의 관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부모-자식의 유전학적인 연결을 강조하고 그에 의해 친족관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타인이 자신과 혈연관계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사회의 기원과 성립을 설명하는 사고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사회를 혈연적 유대로 환원하는 사고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는 일종의 에고이즘을 은폐할 뿐이다. 거기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한 존재라거나 그 이행할 때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 망각되고 만다. 근친상간 금지란 인간사회의 기반에 혈연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혈연이 아닌 것들과 유대를 맺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구성한 복잡한 교섭체계로 [근친상간 금지가] 사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의 복잡성이 뇌를 중심으로 하는 신경계의 복잡함에 기원하지도 않으며 문화를 뇌의 구조의 직접적인 반영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에 침전되면서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를 만들고 변화시킨 존재이며 그러한 변환의 주체로서 인간정신을 일종의 ‘튜링 머신’(Turing machine)[각주:1]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이 두 사람에게 생물학적 진화론의 기원의 사고의 총합은 위험한 귀결을 초래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분리 및 결합의 양태이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분열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한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를 검토하면서 그 문제점을 소묘해나가겠다.

 

 

2.

칸트는 1784년에 간행한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보편사의 이념』에서 자연의 경향성과 사회의 통일성을 가교하여 인간을 사회의 형성으로 향하게 한 것을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이라고 명명했다. 이 인간본성은 분명 모순된 내용을 포함한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본성은 ‘사회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성벽(性癖)이지만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사회를 분단하는 공포의 한 일반적 저항과 연결된 성벽’이다. 전자의 사회적 경향성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 자신의 자연적 소질이 발전해가는 것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혼자 있고 싶다(고립하고 싶다)’는 성질을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립상태의 양의성이다. 고립상태에 놓인 인간은 자기의 경향과 타자의 경향이 상반되며 결과적으로 그 인간은 자기 안에서 타자에 대한 경향을 발견함과 동시에 타자 안에서도 자기에 대한 저항이 있음을 본다. 이 저항을 단서로 인간은 문화적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힘을 불러일으키고, 태만으로 기우는 마음을 넘어서게 하며, 분명 함께 있는 것은 싫지만 놓아줄 수도 없는 동료들 옆에서 공명심과 지배욕과 소유욕에 뛰어들어 하나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인간을 몰아세운다. (p.8 (A21))

인용한 이 구절이 칸트에 의해 ‘문화 상태로의 진정한 첫걸음’이라 불리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에게 타자에 대한 적대와 질시, 자기 것을 독점하고픈 욕구는 ‘거친 자연소질’이지만 이 소절을 통해서 인간은 ‘목가적인 양치기’나 온후한 ‘방목된 양’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 칸트는 생각한다. 비사회성 혹은 일반적 저항은 인간이 자연에게서 받은 은혜이며 때로 재해를 일으키면서도 그것 없이는 문화적인 발전을 구동시킬 수 없는 본원적인 자연의 힘이다. “인류를 길러내는 자연과 예술 및 그보다 우월한 사회적 질서는 모두 비사회성이 맺은 결실이다. 이 비사회성은 자기훈련을 거쳐 그 강제적인 기법을 통해 자연의 맹아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도록 우리 신체에 강요한다”(p.11 (A22))는 언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칸트가 생각하는 문명사의 발전에서 자연 상태로부터 문화적인 상태로 이행할 때에 필요한 ‘자연의 힘’이 개체의 레벨에서 요구된다. 문화적인 상태는 자연 상태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연성을 괄호에 넣고 그와 별개의 특수한 자연성에 의해 구동됨으로써 발생한다. 루소적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통해(이 타입의 자연성은 홉스의 자연 상태와 유사하다) 자연과 역사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연의 합목적성에 따라 사회의 발전이 보증된다. 이 또 하나의 자연성의 내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티격태격 하고 사람을 시기하고 경쟁을 좋아하는 허영심,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혹은 지배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태만을 좋아하는 자연성과 불화하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조정하는 해결책으로서 자연이 요청하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의 실현이다. 칸트에게 역사의 목적성과 자연의 목적성의 일치는 이처럼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성을 화합시킴으로써 성립한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자연성이 실제로는 얼마만큼 질적으로 다르며 또 어느 정도로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질의 총체와 역사적 성질의 총체의 차이는 예를 들어 유전과 민족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어휘에 의해 사고될 수 있다. 그리고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을 하나의 자연으로 사고하고자 한 칸트가 보편사의 성립, 인류사의 기원, 만물의 종언, 인종의 차이를 거의 동시에 사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푸코와 레비-스트로스가 우려한 바는 이미 칸트의 영위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칸트에게 인류의 기원과 종말을 생각하는 것과 인종 간의 차이와 동일성을 사고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엇이 저류로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3.

여기서는 앞서 서술한 모호한 자연의 영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칸트에 의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차이에 주목해보자. 1788년에 발표한 『철학에서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에서 칸트는 요한 게오르그 아담 포레스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개념을 구별하고 있다. 자연사란 ‘인간이성의 손에 닿지 않는 자연의 사건에 대한 서사이며’ ‘식물이나 동물의 최초의 성립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서사를 말할 권리는 신이나 조물주에 속하며,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법칙을 관찰에서 끌어내어 현재와 옛 시대와의 연관을 작용법칙에 따라 추적하는 권능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 방식으로 세계의 기원을 탐구하는 ‘자연사’에 대해 칸트는 그 가능성 자체는 인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사의 탐구는 자연기술의 정치화(精緻化)에 의해 한계지어진다.

실제로 이 두 작업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이다. 한편(자연기술)에서는 학문으로서 위대한 체계의 위용으로 나타나는 데에 반해, 다른 한편(자연사)에서는 단순한 편린이나 동요하는 몇몇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다. 이처럼 양자를 분리하여 후자를 독자적인 하나의 학문으로서, 눈앞의 (그리고 어디서라도) 작품이라기보다도 투영도(投影圖)의 모습으로만 수행 가능한 학문(여기서는 대다수의 질문에 대해 ‘해답 없음’이 제시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으로 그려낼 때에 내가 여기서 바라는 것은 한편의 학문에 대한 잘못된 통찰에 의해 본래는 다른 한편의 학문으로만 귀속하는 사태를 바라는 대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자연사에서 현실적인 인식의 범위(실제로 이미 약간은 소유되고 있다)와 그와 동시에 이성 그 자체만으로 자연사적 인식의 한계와 이 인식을 최선의 모습으로 확장하기 위한 원리들을 보다 명확한 방식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연사의 탐구를 ‘투영도’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데에 대한 염려를 말하고 있다. 이성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정밀과학(자연기술)의 성과를 확장하는 것은 이성의 자의적인 행사일 뿐이다. 기원이나 성립을 묻는 ‘자연사’의 탐구는 이성에 내재하는 인식의 한계와 그것을 ‘최선’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원리에 기초하여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전개된다. 칸트는 포레스트가 제창한 흑인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유전적 특성의 존재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인도인, 아메리카인의 유전적 특성을 동일한 클래스 분류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한 인종을 특별시하지 않는 칸트의 인종이론은 그 의미에서 평등하며 반인종차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실은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개념 자체가 칸트에게 이념(이성개념)일 뿐이며 그 의미에서 오성에 의한 무조건적인 논증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칸트는 자연기술에서 이해된 인류라는 보편적인 표징을 근간, 종족들(변종들), 나아가 다양한 인간품종(變樣種)으로 분류하는데, 이 분류 자체는 관찰을 거쳐 자연기술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 모두는 종에 대한 단순한 이념이며, 생식에서 최대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이 이성에 의해 통합된다는 정도로 상정”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성은 생식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을 동시에 보증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서 특별히 합목적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리하여 종족의 다양성이 근간의 합목적성에 의해 기초 지어지고 보증되는 것과 동일한 구도로 변양종의 다양체는 종족의 합목적성과 그 통일성을 한계 짓는다. 달리 말해, 교배의 무한의 가능성은 그것이 일정 정도의 통일성을 필연적으로 파괴하는 변양종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보증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이 생각은 동물과의 비교에서 명백한 주장으로 귀결된다. 즉 칸트에게 이성에 의해 통일되는 인간에게는 잡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은 다양성과 그 통일이라는 이념에 의해 통제되며,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한 인간은 ‘자연적인 부류’, 즉 ‘하나의 근간으로부터 맹아를 꽃피운 자연적인 종’으로서 자연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인종이란 생식능력을 통해 유전적인 다양성을 담보하면서 통일되는 각각의 클라스 내에서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칸트의 인종론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연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연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한정된 관찰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이다. 이것은 인과연쇄를 가능하게 하는 힘(‘근본력’)의 개념을 매개로 발견되는 이른바 아프리오리한 인과성에 의해 규정된다. 또 하나는 인간의 다양성과 통일을 인간고유의 것으로 만드는 이념과 관련된 자연사적인 자연이다. 후자는 자유의 목적을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다른 곳에서 자연사적인 혈족관계 속에서 근친상간 금기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자연의 목적성과 유용성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즉 근친상간이 유전적 자질을 수렴시키고 자연적 다양성을 해친다는 것이 마치 자연 그 자체의 목적인 것처럼 조정된다. 자연의 요청과 경험에 기초한 도덕적인 요청이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자연의 목적성을 근거로 경험적인 자유가 제한된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이성의 명법은 인간이라는 종을 유용한 한계 내에서 다양한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명이다.

이러한 사고가 칸트가 생각한 종말과 얼마나 관계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언해두겠다. 칸트가 말하는 ‘만물의 끝’이란 모든 것이 물리적인 레벨에서 붕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끝’이란 시간적 존재자가 영원한 모습으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에서—다시금, 할 만한가?—‘만물의 끝’은 이념이며 그 기원은 물(物)의 ‘도덕적 경과’에 대한 사변이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고유한 산물이다. ‘인간들의 손을 거친 만물의 그 끝은 그들이 선한 목적을 가질 때조차 어리석은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참된 끝이란 ‘일체의 변화가 멈춘 어떤 시간점’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때 사고와 감정은 전혀 교대하지 않고 석화하며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문다. 존재자는 그 속에서 시간의식을 빼앗기고 ‘절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실천이성의 이념이 가진 궁극목적을 달성한다.

칸트에게 자연과 기원, 그렇게 종말로 휘감기는 사고는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권리를 보증하는 것으로서 이념의 목적의 위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드러낸다.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보편적 자연법칙에 안주하는 인간본성(=자연)과 그로부터 일탈하는 반자연적인 인간본성의 갈등이 있다. 거기에서 소여로서의 자연성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자연성을 구성하는 인간의 본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본성은 인간본성을 뛰어넘는 본성을 가지고자 하며, 그것이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유사의 구조를 가지는 논의가 생물학적인 지견을 기반으로 전개될 때, 그것은 인종에 기초한 논의가 된다. 모순된 복수의 본성은 여기서 자연기술의 대상으로서 자연과 자연사를 구성하는 자연으로 치환된다. 식민지 개척을 통해 공간적인 지평에서 발견된 인종 간의 기호적인 차이가 인간의 유전에 얽힌 자연법칙을 증명하는 표상을 구성한다. 그 표상에 대해 오성이 이념의 감독 하에서 움직이며 가능한 해석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고찰도 올바른 비판철학의 구도 속에 있다. 즉 그 자체로 실체화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상정되는 ‘근간’이 인간의 변양체(變樣體)를 다양하게 발생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각각의 인간의 종을 통일시키는 것으로서 계층화되어간다. 이 속에서 인류는 자연의 목적과 도덕적인 요청이 결과적으로 일치하는 합목적적인 존재로서 이념에 포섭된다. 이념, 즉 이성의 목적은 인종을 <혈족관계의 다양성과 통일> 하에 종별화해가게 된다. 표현을 달리 하면, 이성의 프로그램에는 혈연의 연속성과 통일이 이미 기입되어 있다. ‘만물의 끝’에는 별개의 이념이 저장되어 있다. 그 이념의 궁극적인 달성은 인류의 정지이자 오성의 소멸이며 영원으로의 융합이다. 그러나 이 이념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는 신 외에는 없다. 칸트는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한 인간의 영위로서 노자의 체계와 동양의 범신론, 또 스피노자주의 등을 들고 있는데, 이것들이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켜 인간의 ‘절멸’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시도로 생각했다. 인간의 지혜는 오히려 절멸을 피하기 위해 이성의 이념에 반하지 않는 소극적인 선(善)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칸트의 사고는 세 개의 요소—즉 문화의 발전에서 모순된 인간본성이 맡은 역할, 자연사적 인간에 내재하는 생물학적 집단성의 보존의 프로그램, 절멸을 숭고한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피하는 소극적인 실천—의 총체로서 이해된다. 이성의 목적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구동시킨다. 발전한 문화에서 인간의 기원의 탐구는 이성의 한계 내의 자연기술의 수법의 연장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이념으로서 발견되는 종의 보존의 논리가 그와 동시에 인류를 절멸의 실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맡는다. 즉 칸트는 오성의 무한원점(無限遠占)에 있는 이성의 존재를 축으로 하여 순수이성의 자연의 영역을 실천이성의 자유의 영역과 접합시킨다. 여기서 생물학적인 생식 현상도 ‘인류’라는 특수한 종의 이념으로 전환되며, ‘반(反)-절멸’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를 구성하는 특정의 순수한 종이 절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종이나 잡종을 말소한다는 ‘소극적인 선’에 기초한 생각이 도출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4.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혈연관계에 얽혀있는 종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곧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상황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사고가 생식에 의해 연결된 신체를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일 수 있다, 라는 것을 상기해보는 것은 유효하다. 『성찰』의 「제1답변」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추론의 기초로서 어떤 원인의 계열에도 의거하지 않으며, 어떤 무언가 이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인식되는 것에 나 자신의 존재를 사용하는 것을 오히려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 관해서는 내가 일찍이 어떤 원인에 의해 산출되었는가보다 내가 어떤 원인에 의해 현재 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일찍이 모든 원인의 계기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나는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반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또 조부에 의한 것임을 내가 고찰하고, 그리고 양친의 양친을 탐구하면서 나는 무한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그렇게 질문은 끝나기 때문에 어떤 제2의 원인이 있다고 내가 단정한다, 라고 하는 경우는 완전의 별개가 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정신은 신체의 생식적인 연결과 단절되는 곳에서 나타난다. 이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원칙적으로 신체의 발생론적 질서에 믿음을 주지 않고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도 삼지 않는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철학은 이런 류의 형이상학의 현대적 복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한성 이후』에서 메이야수가 칸트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태도를 ‘상관주의’로 명명하고 그 불철저성을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원과 역사라는 문제계를 재고하기 위해 메이야스가 제시한 논의는 앞서 전개한 비판철학의 체계에 기초한 견해에 어떤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을까? 메이야수의 핵심 개념인 ‘선조이전성’을 단서로 생각해보자.

첫째, 메이야수는 ‘인간의 역사’를 선조나 인류에 얽매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조이전적’ 개념이란 ‘세계에 대한 온갖 형태로 인간적 관계에 앞서 제기된’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출발에 앞서는’ ‘알 수 있는 한 지구상의 온갖 생명의 형태에 앞서는’ 것이다.

반면 상관주의자는 선조이전적 심급을 생각할 때에 필연적으로 ‘후방투사’를 행한다고 메이야수는 지적한다. (이것은 바로 칸트가 자연사 개념을 전개할 때에 목격한 사태이다.) 즉 상관주의자는 ‘현재를 기점으로서 과거를 후방투사’한다. 현재 존재하는 인간의 주관성을 통해 모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때 후방투사된 언명 속에 나타나는 선조이전적 언명의 대상은 상관주의자에게 극히 모호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즉 간주관적인 방식으로 검증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명에 의해 올바로 기술되는 측면에서 그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서 기술된 사상(事象) 그 자체가 의식과 무관계하게 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사상은 올바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의 괴리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메이야수는 선조이전적 사건이 의식의 발전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의식에 앞서는, 바꿔 말하면 시간의식이 증여로서 주어지기 이전의 사건은 초경험적이며 존재론적인 레벨에서 상관주의에 의해 파악되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관주의에 부수하는 이러한 곤란에 대해 메이야수는 ‘원화석’(原化石)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과학적 수법을 통해 드러나는 선조이전의 연대에 논의를 한정함으로써 대처한다. 그 속에서 비교적 최근 탄생한 인류라는 종의 발생과 사멸은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즉 메이야수는 과학이 보여주는 시간성에 대해 그것이 의식의 시간성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고의 독립적인 의미를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인류’라는 문제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메이야수는 자신의 책의 본문에 달아놓은 긴 주석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경계를 서술하고 있다.

선조이전성의 논의가 본질적으로 ‘목격자 없음’의 반론과 구별된다면, 선조이전성에 대한 논의는 반대로 의식의 단독의 탄생과 죽음이 그 자체로, 의식적인 것일 수 없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때 상관주의는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되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개별적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자신을 지켜낸다.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된 시간이란 여러 의식의 공동체의 시간이며 그 속에서 탄생과 죽음은 다른 의식에게도 탄생과 죽음이며, 다시금 에고의 집합성에게 소여로 환원되면서 전개된다. 우리는 상관주의자의 이러한 대응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생과 사멸을 그에 대한 타자의 인식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이 도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의를 선조이전의 것으로 제한한다. 선조이전의 것은 모든 공동체를 일소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어떤 상관성도 이미 다룰 수 없게 된 시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과학에 의한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이점을 갖는다.

인간의 의식의 발생과 기원을 묻지 않는 명백한 이유가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첫 번째 이유는 상관주의에 의한 시간의식은 간주관적이며 공동체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이 공동적인 의식에서 모든 삶과 죽음은 거기에 속한 다른 주체에 대한 삶과 죽음 외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상관주의적인 시간의식에서 다뤄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이야수의 비판은 간주관적인 의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에도 고유한 삶과 죽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고유한 삶과 죽음이라는 표현이 엄밀한 의미에서 타당한지는 차치해둔다. 메이야수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의식의 간주관성의 구조 속에서 어떤 삶과 죽음이 항상 간주관성의 작업을 통해 여러 의식(에고)에게 소유로 환원되고 만다는 것이다. 메이야수가 이것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식에서도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삶과 죽음이 다른 존재에게 집합성을 보존하기 위한 소여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은 태어나고 죽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메이야수의 시도는 모든 사상(事象)의 고유한 생성과 소멸을 묻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선조이전의 것’이란 삶과 죽음, 발생과 사멸을 ‘공동성으로부터 일소’하기 위해 던져지는 사변적 도구(tool)가 아닐까?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는 이성의 합목적성의 이름 하에서 인간의 발생을 ‘인류사’(혹은 인간의 ‘자연사’)라는 지평에서 사고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연개념의 모순과 다양성 혹은 이념으로서의 외부성은 담보로 제공되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은 자유의 조건으로, 즉 도덕적인 요청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으로는 생물의 역사처럼 다만 확고한 인간의 역사가 확립된다. 이러한 칸트의 인류사의 구조를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의 관점에서 보면, 칸트가 ‘인류’의 이름으로 제시하고자 한 ‘공동성’의 의식도 분명해진다. ‘인류’란 칸트에게 불사의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직조한 인간의 ‘자연사’는 분기하면서 순환된 복수의 인종의 병립구조를 보존하며 ‘인류’가 통일체로서 연장해갈 수 있는 수단과 목적을 제공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됨으로써’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 구조 속에 종과 다른 것 혹은 종으로서 다른 이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불순’하고 ‘잡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통일을 견지하는 다양성으로부터 일탈하는(그렇게 간주되는) 자들은 휴먼적인 인간에 의한 순화의 폭력에 짓밟힐 수 있다. 역사에 총합되지 않는 삶과 죽음을 영위하는 잡종적인 존재방식이 바로 그러한 폭력에 저항한다. 

 

 

 

  1. 1936년 영국의 튜링(Turing, Alan M 1912-54)이 고안한 상상의 계산 기계. 현재의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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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 시리즈로 출간된 다섯 권 중 4권인 『人と動物の人類学』[사람과 동물의 인류학](2012년, 靑風社)의 서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 책에 담긴 총 열편의 논문 중 서너 개를 골라 번역할 생각이다. 인류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이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주요테마로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동물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 완전히 파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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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지구적 차원에서 묻다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

1. 분절된 사람과 동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람과 동물은 별개의 존재이다. 우리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영위하고 세계를 만드는 주인공이며, 그 주변에 개와 고양이,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식용을 위해 사육되는 소와 돼지가 있고, 나아가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 기린이나 코끼리나 사자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 이렇게 배치된 데에는 그 나름의 인류사적인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비롯된 합리성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그러한 사람과 동물의 배치가 고착되어왔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기독교의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동물로부터 사람을 떼어내고 사람을 사고와 감정과 정신을 가진 존재로 다뤄왔다. 그 의미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명료한 분할선이 그어져있다. 동물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토대로 구축된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의 생활과 제도에서도 사람과는 다른 존재이다.

한편 사람과 동물 사이에 그어진 분할선은 서양사고의 내측에서 천천히 붕괴되어왔다. 동물들은 적자생존의 개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탄생이후 유구한 세월을 거쳐 이뤄져온 그러한 영위의 결과 동물로부터 사람이 탄생해왔다는 학설이 19세기 중반 제창되었다. 생명과학과 영장류학 등 사람과 동물의 공통적인 평면을 다루는 현대과학의 현저한 진전에 따라, 오늘날 적어도 학문상으로 사람과 동물은 그렇게 확실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사람과 동물이 별개라는 사고방식이 깊게 침투해있다. 동물에게는 정신도 감정도 없다는 생각이 근현대의 주류적인 사고방식이 되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으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대항적인 사고방식이 출현하고 있다. ‘사람 동물’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동물로부터, 동물로부터 사람을 구분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말이다.

 

2. ‘와/과’를 생각하기 위한 수사실험

『사람과 동물의 인류학』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사람과 동물’이라는 저 흔한 표현에 담긴 ‘와/과’에 주목해보자. 우리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 ‘와/과’를 끼우고 사람‘과’ 동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식하는 못하는 사이에 사람과 동물을 분리한다. 혹은 사람‘과’ 동물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람과 동물을 병렬로 놓는다. 여하간 ‘와/과’를 끼어둠으로써 사람과 동물은 다른 존재가 된다.

사람과 동물을 분리하고 별개의 존재로 만드는 언변은 ‘와/과’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와/과’ 자리에 ‘에게’를 삽입해보자. 사람에게 동물, 동물에게 사람이라고 말할 때, 사람과 동물은 병렬에 놓인다. 혹은 사람에게는 동물이, 동물에게는 사람이 나뉘어 적용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에게’에 의해 사람과 동물 사이는 멀어진다.

나아가 이번에는 ‘의’를 삽입해보자. 사람의 동물이란 사람의 소유물로서의 동물이며, 동물이 사람에 종속되게 된다. 그때 사람은 동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동물은 관리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동물의 사람이라고 하면, 동물 속에 있는 인격이나 인간성과 같은 것이 읽힐 것이다.

조금 더 이러한 수사실험을 이어보자. 이것은 사람과 동물을 분리해서, 구분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상상해보기 위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이다.

‘와/과’ 대신에 ‘은/는’을 삽입해보자. 사람은 동물, 동물은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어떤 사태가 나타날까? 사람은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다. 보통 사람은 동물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사람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놓고 있다. 반대로 동물은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어떠할까? 동화나 민요에서 동물은 말을 하거나 울거나 우는 등 사람처럼 행동한다.

‘와/과’ 대신에 ‘도’를 넣어보면, ‘은/는’을 사용할 때와는 의미내용이 다르다. 사람도 동물이라는 표현은 사람 또한 동물의 범주에 포함됨을 의미한다. 반면 동물도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듣는 이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동물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 표현에는 동물도 사람의 범주에 포함됨을 뜻한다. 지구상에는 북미선주민들과 같이 전통적으로 동물도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으로 ‘(으)로부터’를 넣어보자. 사람으로부터 동물, 동물로부터 사람. 사람으로부터 동물로, 혹은 그 반대로 동물로부터 사람으로는 무언가가 부여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사람으로부터 ‘사육’ 동물에게는 먹이가, 동물로부터 사람에게는 고기 등이 얻어지는 것처럼. ‘(으)로부터’는 증여의 방향을 나타낸다. 나아가 그렇게 바꿔 말하는 속에는 ‘와/과’에서 구별되는 것처럼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설정된 경계선을 초월하여 사람으로부터 동물로, 혹은 그 반대로 동물로부터 사람으로 영역을 침범하는 초경의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과 동물의 ‘와/과’를 대신에서 그 자리에 다른 단어들을 넣어보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양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동물 또한 사람이라는 사태이거나(행위주체성), 사람과 동물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섞이는 모습이거나(분리불가능성), 사람과 동물 사이에 분할선이 가정되거나(경계성), 그러한 분할선을 넘어 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침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초경성).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의 양태가 가능하다.

 

3. 문학이라는 본보기

그런데 문학은 이제까지 사람과 동물의 관계의 다양한 존재방식에 관해 실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는 알래스카 여행에서 만난 동물들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과 대조하면서 동물도 사람도 함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행위주체임을 상기시킨다. 프란츠 카프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고뇌를 그렸다. 그레고르에게는 사람의 내면성과 벌레의 신체성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합되어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서 말(馬)의 혼 속에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16살의 존 그래디의 심정과 성장을 그렸다(『모두 다 예쁜 말들』). 1915년 북해도의 천염개척촌에 어느 큰곰이 나타나 이틀간 6명을 살해한 일본 동물피해의 역사상 가장 큰 참사를 다룬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는 경계를 넘어온 맹수와 그 공포와 사람들의 격투를 그렸다.

문학에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성으로 넘쳐난다. 이에 대해 『인간과 동물의 인류학』에서 시도하는 것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존재방식을 지구차원에서 민족지로 기술 검토하는 것이다.

 

4. 네 가지 관계성

‘행위주체성’, ‘분할불가능성’, ‘경계성’, ‘초경성’이라는 네 가지 양태를 설정한 속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탐구해보자.

제1부 ‘행위주체성’에서는 동물이 가진 ‘행위주체성’이 상정되는 민족지적 상황이 다뤄진다. 동물의 사람 혹은 동물은 사람 혹은 동물도 사람이라는 관계성이 다뤄진다.

「동물과 말하는 사람들」(1장)에서 야마구치 미카코(山口未花子)는 주체를 가진 동물과 관계를 맺는 캐나다 수렵민인 카스카족을 통해 ‘동물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한다. 카스카에게 동물은 사람과 같은 존재이다. ‘동물과의 대화’는 단순한 해석이나 믿음의 산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카스카족의 생활 속에서 재검토해보면 그것은 동물과의 신체적ㆍ초자연적인 교섭을 통해 획득된 기술이나 지식임을 할 수 있다. 카스카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면서 동물과 교섭함으로써 동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왔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더욱 농밀한 사회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

「고자질 하는 돼지꼬리원숭이」(2장)에서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는 보르네오섬의 수렵민인 푸난 사회에서 천계의 신에게 사람의 조야한 행동을 고자질 하는 동물의 사례를 들고 있다. 동물은 사람과 같이 행동한다. 오쿠노는 사람과 동물,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항을 상정하고 그것들을 관계 짓는 구래의 동물 애니미즘을 비판하고 사상(事象)과 환경을 좇아 살아가는 그들의 행동 속에서 행위주체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여 동물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제2부 ‘분리불가능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섞여있다는 ‘분리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사람도 동물이며 동물 또한 사람이라는 사태를 다룬다.

「서구에 나타나는 혼종성으로서 괴물」(3장)에서 마츠다이라 토시히사(松平俊久)는 중세에서 근세까지 나타난 유럽의 괴물을 다룬다. 괴물은 사람과 동물을 융합한다. 본래는 대립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동물을 하나의 신체의 구성요소로 만드는 괴물 그 자체는 무질서에 지배되지만, 그 한편으로 괴물은 사회적ㆍ집합적인 이해 혹은 합의라는 이름의 질서가 부여된 창조물이라는 적극적인 의미 또한 갖고 있다.

「‘인간고릴라’와 ‘고릴라인간’의 민족지」(4장)에서 오오이시 타카노리(大石高典)는 중부아프리카의 수렵채집민인 바카족과 농경민인 바쿠베레족을 다루고 인간과 고릴라가 표상 속에서 어떻게 섞이는지를 민족지적으로 그려낸다. 바카족은 바쿠베레족을, 죽으면 고릴라로 다시 태어나는 ‘고릴라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바쿠베레족은 바카족을 작은 동물로 변신하여 밭작물을 훔쳐가는 등 나쁜 짓을 한다고 여기며, 또 고릴라 안에는 고릴라이면서도 혼은 인간인 ‘인간고릴라’가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오오이시는 이 두 사회의 상호관계의 지평에서 사람도 동물이며 동물도 사람이라는 착종적ㆍ혼동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살아있는 만다라」(5장)의 서두에서 이시쿠치 토시아키(石倉敏昭)는 인간과 그 외 동물들에 공통하는 구강(口腔) 공간을 다루면서 사람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카트만두분지에 위치한 네와르 지방도시 산쿠에서 만다라 모양의 도시공간구성의 경계를 이루는 네 개의 ‘문’과 그 외부의 ‘숲의 사원’을 둘러싼 바슐라 요기니 여신의 신화를 검토하고, ‘인간성’, ‘동물성’, ‘여성성’이라는 각각의 원리가 어떻게 상호 결합하여 사람과 사람 이외의 존재로 이루어지는 집합적인 세계상을 직조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제3부 ‘경계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포함하여 존재자들 사이에 그어진 ‘경계성’의 존재양식을 검토한다. 사람과 동물, 사람에게 동물이라는 표현 속에 보이는 분절을 둘러싼 문제를 다룬다.

「오키노시마(隠岐島)의 둔갑하는 뱀」(6장)에서 콘도 시아키(近藤祉秋)는 오키노시마의 노인에게서 들은 사람으로 변신하는 뱀 이야기와 체험담을 회상한다. 이 속에서 동물은 동물로 고정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인 종 분류법은 현실세계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다양한 종 분류법의 하나이지 않을까? 콘도는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의 정체를 꿰뚫어본다거나 지벌[각주:1]의 원인을 찾는다거나 하는 주제에 관한 오키노시마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니미즘’론의 지평에서 검토하면서 동물 분류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고찰한다.

「야생동물과 사귀는 법」(7장)에서 이케다 미츠호(池田光穂)는 생물다양성 보존을 둘러싼 논의에 등장하는 반달곰과 듀공과 현대일본인 사이에 상상되는 ‘사귀는 법’을 다룬다. 동물에 대한 사람의 ‘믿음’의 인지과정을 단서로 반달곰의 ‘항의활동’과 듀공의 법적인 ‘당사자적격’을 기술 검토한 하에서 동물에 대한 사람의 일방적인 ‘섀도복싱’ 상황을 그려낸다.

제4부 ‘초경성’에서는 동물이 사람과 동물 사이에 가설적으로 설정된 경계를 넘어 인간의 영역으로 침투하거나 몸을 던지는, ‘경계성’을 둘러싼 문제를 고찰한다. 이 속에서 동물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관계의 양태를 둘러싼 문제가 거론된다.

「공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계>의 재생산」(8장)에서 메구로 토시오(目黒紀夫)는 아프리카의 마사이 사회에서 오늘날 야생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경계를 넘어 침입하여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파괴하는 사태를 다룬다. 마사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야생동물과 ‘경계’를 만들지 않고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일상적 및 쌍방향적인 공격과 회피를 통해 거리와 긴장감을 수반한 공존을 실현하고 있다. 메구로에 따르면, 현재 정부의 개발ㆍ보존정책에는 그러한 ‘경계를 둘러싼 전술=거리의 재생산’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

「간극의 초경성(超境性)의 재검토」(9장)에서 니시자키 노부코(西崎伸子)는 자연보호사상을 출발점으로 하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설정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전개에 관한 전망을 살펴보고, 에디오피아의 야생동물 보호의 맥락에서 야생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경계를 넘어 침입하는 사태를 로칼한 경계인식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리고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계성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것 혹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는 자연환경을 주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 등을 제시한다.

「동물에 숨겨진 증여」(10장)는 Nadasdy, Paul(2007) "The Gift in the Animal: The Ontology of Hunting and Human-Animal Sociality" American Ethnologist 34(1), pp.25-43의 번역본이다. 지금까지 필리프 데스콜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팀 잉골드 등은 사람과 동물, 문화와 자연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이끌어왔다. 폴 나다스디는 그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 ‘동물에 숨겨진 증여’라는 북방선주민의 사고방식을 위치짓고 탐구한 인류학자이다. 그는 사람도 동물도 함께 ‘인간’이라는 관념 속에 포섭되는 존재로 여기는 북방선주민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둘러싼 북방선주민의 서사를 ‘은유’로 다루는 종전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여기서 ‘인간’으로 번역한 것은 나다스디의 원문의 “person”이다. 북방선주민은 사람에게도 사슴(moose)에게도 ‘인간성’(personhood)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 의미에서 사람은 사람인간이며 사슴은 사슴인간이다.

 

5.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성

사람과 동물을 절단한 분할선에 의해 양자의 관계성이 정해져왔다는 지점에 동물을 둘러싼 오늘날의 과제가 숨겨져 있다. 동물은 사람을 위해 애완화되고 애완화하는 사람 손에 의해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단절된다. 동물은 육식을 위해서만 집단 속에서 사육되고 가축화된다. 사람과 달리 동물에게는 정신이나 감정이 없다고 간주되고 동물은 사람에 의해 관리ㆍ통제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인데, 그러한 동물들에 관한 문제의식이 이 책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특히 산업화 시대 이후 사람을 위해 목숨을 잃는 동물의 영을 위로하는 신앙실천이 왕성하게 이뤄져왔으며, 또 오늘날 유럽을 시작으로 동물권에 중점을 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동물을 사람과는 다른 단순한 물적 존재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사람과 동물의 관계의 분할선을 뒤흔들고 있다. 아니 본래부터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다양하지 않았는가!

이 책 『사람과 동물의 인류학』의 목표는 인류사회라는 큰 시야 속에서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양상을 그려내고 동물에 관한 현대적인 과제를 생각해가기 위한 단서를 찾아내고 그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데에 있다.

 

 

  1. 신(神)이나 부처에게 거슬리는 일을 저질러 당하는 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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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구조주의, 토테미즘과 공의, 신화의 신화학 등에 관한 논의를 알지 못하면 이 글을 독해해내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성' 개념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연결되는지(즉 '결연'과 '생성'의 개념적 결합)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끈기있게 읽어나간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말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리라 본다. 

그것은 근대의 개념적 기초의 핵심을 뒤집고 파헤쳐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장을 펼쳐보이는 것인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호혜성', '교환', '사회', '연대' 등 근대의 '희망적인 실천 조작'은 허구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참된 '강도적인 조건'(카스트로의 이 용어는 '생성의 결연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을 탐구할 수 있을까? 그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겠다. 적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안내자의 본분을 충실히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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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이 모든 것은 아니다—생성

 

 

 

1.

 

앞서 지적한 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의 두 저자는 원시적인 에너지가 출자의 에너지라는 사실이 ‘단 하나의 문제도’ 변화시키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우연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차 에너지가 ‘결연의 에너지’인 것처럼 다른 내재적인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자문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연의 개념을 이접적 총합으로 구성하는 조건을 결정짓는 것이 문제이다.

 

결연의 강도적인 해석 가능성은 『천 개의 고원』의 생성에 관한 긴 글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생성 개념은 베르그송과 니체에 관한 연구 이후 들뢰즈의 중심적 관심사였으며, 『의미의 논리학』에 대한 관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에 대한 공저(들뢰즈&가타리 1975) 이후 생성 개념은 특이한 개념적 굴절과 강도를 갖기 시작했고, 1980년의 책(『천 개의 고원』)의 「1730년: 강도가 되는 것, 동물이 되는 것,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의 고원에서 도주의 속도에 도달했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미메시스—모방이든 재생산이든—에서 비껴나(“미메시스주의는 매우 나쁜 개념이다…”) ‘메메시스’—기억이든 역사든—마저 피해 도주하고 질주한다. 생성은 건망증적이며 전(前)역사적이며 반아이콘적이며 불모이다. 그것은 실천에서의 차이이다.

 

 

 

2.

 

『천 개의 고원』의 제10장은 레비-스트로스가 확립한 계열적-공의적인 이론과 토템적-구조적인 이론의 대립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즉 한편에서는 인간과 동물과의 상상적 동일화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차이와 자연적 차이와의 상징적 상관관계라는 대립이 있다. 계열과 구조라는 이 두 아날로지적인 모델 사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성이라는 베르그송적인 모티브를, 즉 계열적 유사함으로도 구조적 유사함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종의 관계를 도입한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면 구조주의의 분석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를 지시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분석틀에서 관계는 몰적이고 논리적인 대상으로서 기능하며 본질적으로는 외연화된 것(대립, 모순, 매개)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생성은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이며 분자적이고 강도적이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형태학을 가로지르는 관계성과는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생성의 이접적 총합은 형식적인 구조의 편성 규칙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평균상태와는 멀리 떨어진 실재적인 다양체에서 작동한다(DeLanda 2002: 75).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한 것이며 같은 것이다.”

 

계열적 유사함은 상상적인 것이고 구조적 상관은 상징적인 것인 반면, 생성은 실재적인 것이다. 은유도 형태변화도 아닌 생성은 스스로 만들어낸 두 개의 관계항을 탈영토화하는 운동이며 새로운 ‘부분적인 연결’의 수단에 의해 그것들을 관련짓도록 규정하는 관계성으로부터 그것들[두 개의 관계항]을 떼어낸다. 생성이라는 동사는 이 의미에서 술어적 조작이나 타동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재규어로 생성한다(devenir-jaguar)는 것의 함의는 재규어가 되는 것(devenir in jaguar)과 같지 않다. ‘토템적’인 재규어는 인간이 ‘공의적’으로 변용하는 것이자 상상적인 것인데, 그 변용은 실재적이다. 고양이과 동물이 생성 그 자체이다. 즉 재규어가 되는 것에서 ‘재규어’란 행위의 내재적 측면이며, 그 초월론적인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성이라는 것은 자동사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한 마리의 재규어가 되는 순간 재규어는 없다(따라서 우리는 앞서 생성의 이접적인 다양체를 가리키기 위해 ‘인간-재규어’라는 형식을 사용했다). 저자들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를 시사적으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동물로 생성함과 동시에 그 동물이…로 생성한다는 민첩한 행동과 계속해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으로 생성하는가? 인간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되는가?) (들뢰즈&가타리 1980: 290)

 

이어서 저자들은 생성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일관성을 가진 동사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외관을 치장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놀랍게도—생성은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출자를 생산하는 것도, 출자를 통해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op.cit., 292). 생산도 출자도 아니다. 도로시가 토토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 속에 없다‘는 인상을 품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강도적인 사고란 생산에 관한 사고이다”라고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는 말한다(2003: 15). 그러나 사태는 이 정도로 일반적이지는 않다. 『천 개의 고원』에서 생성의 개념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주론에서 중축의 역할을 맡는다. 그것은 ‘모든 것은 생성하기’ 때문도 아니고—거기서는 개념적으로 파탄을 맞이하고 있다—, 생성 이외의 중요한 사고가 이 책에 없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천 개의 고원』의 가장 뛰어난 반-표상적 장치가 표상작용을 무효로 만드는 장치라는 의미에서 생성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이 딱 반-표상적인 장치인 것과 같다. 생산과 생성, 이 둘은 다른 운동이다. 이 둘은 모두 자연을 포함하며 강도적이고 전표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하나의 운동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이다. 생성은 욕망의 프로세스이며, 욕망은 실재적인 것의 생산이며,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하면서도 같은 것이며, 생성은 리좀이며, 리좀은 무의식의 생산과정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방향에서 그것들은 결코 같은 운동이 아니다. 생산과 생성은 “두 개의 의미=방향에서 같은 궤도를 그리지 않는다”. 생산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 실현되며 자연이 생산과정으로서 나타난다(“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그것의 본성상 생산 혹은 산업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10)). 반대로 생성은 인간과 자연의 ‘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이다. 즉 포획의 순간이며 공생이며 이질성 간의 횡단적인 결합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294, 296). “자연은 이렇게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출자의 생산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같은 책: 296). 생성은 생산이라는 거울의 반대측에 있다. 투피남바 족이 적을 가리키는 용어를 상기해보면, 이것은 ‘역방향의’ 동일성이다.

 

우주는 출자에 의해 기능하지 않는다”(같은 책). 이것이 언외(言外)로 암시하는 것은 우주가 외연적-현실적임과 동시에 그 모든 상태에서 강도적-잠재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주가 출자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면—다른 무언가에 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결연에 의해 작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의 첫 번째 고원에서 우리는 이미 “수목은 출자인 반면, 리좀은 결연이며 다름 아닌 다만 결연이다”(같은 책: 36)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생성은 진화가 아니다. 적어도 혈연이나 출자에 의한 진화가 아니다. 생성은 출자로부터 그 무엇도 생산하지 않으며, 모든 출자는 상상적인 것이다. 생성은 항상 출자와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결연과 관계한다. (같은 책: 291)

 

좋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도곤 신화의 강도적이고 모호하고 야행성의 출자를 주장하는 분석으로부터 『천 개의 고원』에서 이러한 관계의 양식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부인하기까지 무엇이 변화한 것일까? 강도적인 결연은 어떻게 상상적인 것으로 생성될 수 있을까?

 

이 변화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시선이 동일종내의 지평으로부터 종간의 지평으로 크게 방향전환을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즉 욕망의 인간적인 이코노미로부터—그것은 역사-세계적ㆍ인종적ㆍ사회정치적인 욕망이며, 가족적ㆍ인격주의적ㆍ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적인 욕망이다—, 종을 횡단하는 정동(情動)의 이코노미로의 변환이다. 그것은 종이라는 자연의 영역, 그리고 그 한정적인 총합을 무시하며 우리를 내재평면에 포함된 이접을 통해 연결짓는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의 이코노미라는 관점에서 외연적인 결연은 강도적이고 분자적인 출자를 제한하는 움직임, 그것을 출자집단이라는 몰적인 형태 하에 현실화한다. 그러나 정동의 우주적인 이코노미—비인간적인 힘으로서의 욕망—라는 관점에서는 비로소 출자야말로 그 상상적 동일화의 방법에 의해 이질적인 존재 사이에 있다는 반-자연적인 만큼 더더욱 실재적인 결연을 제한하게 된다. “만약 진화가 참된 생성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등급이나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활용하는 공생의 영역에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출자는 있을 수 없다”(들뢰즈&가타리 1980: 291).

 

덧붙여 들뢰즈가 유념하는 꿀벌과 난초의 예를 보면, “어떤 꿀벌-난초도 그로부터 결코 태어날 수 없는” 하나의 배열(arrangement)—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꿀벌이나 어떤 난초도 그것 없이는 자손을 남길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하나의 배열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종의 자연적인 출자는 두 종 간의 반-자연적인 결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시된 섹슈얼리티의 탈영토화가 여기서 실현된다. 성에 관한 이항논리적인 조직화는 바이섹슈얼리트도 포함하며(‘젠더의 원자’를 참조), ‘n개의 종(種)’과 분자적인 레벨에서 연결되는 ‘n개의 성(性)’으로의 도정을 과시하게 된다. “섹슈얼리티는 남자가 여자로 생성하는 것, 인간이 동물로 생성하는 것을 경유하여 진행된다. 즉 입자(粒子)의 방출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341). 만일 동물로의 생성에 포함된 모든 동물이 하나의 다양체라면(“모든 동물은 무엇보다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군집이다”(같은 책: 293)),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어떤 보편적인 악마적 환유로 이끌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다양이며 부수적이며 이질적이며 출자의 밖에 있는 비재생산적인 사회성을 그 다양체가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병을 출자와, 감염증을 유전과, 오염에 의한 군생을 성적 재생산이나 성적 생산과 대립시킨다…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 내지는 혼인은 자연계를 횡단하는 참된 자연이다. (같은 책: 295)

 

그래서 결연이다. 그러나 어떤 결연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와 분열증』 제1권은 두 개의 출자를 제창했다. 하나는 강도적이고 배아종적이다. 또 하나는 외연적이고 체세포적이다. 이 후자는 배아종적인 유입이라는 욕망을 대리하는 ‘억압적인 표상’의 역할을 행하는 외연적인 원리이며, 결연에 의해 반-정립된다. 이제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결연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논한 사회체로서 남성이라는 젠더에게조차 내적인 결연(최초의 집단적인 호모섹슈얼리티)인 것이다. 또 하나는 생성에 내재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형태변화(신화적 계보, 동물을 출자하는 것)로는 환원될 수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교환이나 상징적 분류(외혼, 토테미즘)로도 환원될 수 없다.

 

모든 생성은 하나의 결연이다. 이것은 반복해서 말하자면 모든 결연이 하나의 생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적이고 사회정치적인 외연적인 결연이 있고, 그리고 반-자연적이고 코스모폴리틱하고 강도적인 결연이 있다. 외연적 결연이 출자를 구별하는 것에 비해 강도적 결연은 종을 교란한다. 혹은 오히려 비연속적인 종별화라는 제한적인 총합에 의해 반-실현된다. 샤먼이 재규어로 생성될 때, 그가 재규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면 재규어의 자손에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재규어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규어가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재규어와 결연을 맺는다.

 

오히려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무차별성은 식별불가능성, 모호성이라는 하나의 구역이 두 개의 항 간에 설정된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항이 각각의 분화에 선행하는 점을 직접 실현한 것과 같다. 유사하지 않으며 미끄러지고 극단적인 근접, 절대적인 접근이다. 자연적인 출자가 아니라 반-자연적인 결연이다. (들뢰즈&가타리 1993: 100)

 

생성에 대한 이 정의가(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범형적인 이원론을 횡단하는 방법임을 주의해야한다. 즉 {출자, 환유적인 연속성, 계열적 유사함} 대 {결연, 은유적 불연속성, 대립적 차이}이다. 자연에 반하는 결연에 의해 정립된 접선적-미분적인 ‘절대적인 접근’은 상징적-문화적 결연(외혼)에 의해 정립된 출자의 리니지 간의 절대적인 ‘비접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두말할 것도 없이(들뢰즈&가타리 1972: 131), 그러한 접근은 ‘두 개의 항’ 사이에 어떤 동일화나 상상적 미분화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고전적인 구조주의처럼 자연적 출자와 문화적 결연이 대립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도적 결연이 자연에 반한다는 것은 그것이 문화에도 사회에도 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함된 제3항, 타의 관계성, 즉 ‘새로운 결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연’은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나쁜 말이기도 하다. 인격과 사물 간의 경계를 횡당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러한 단어는 모두 좋은 말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을 미생물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결연은 좋은 말이다. 힘(Force)은 인간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은 말이다. (라투르 1993)

 

 

 

3.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는 결연, 즉 인간과 비인간 간의 유연관계(類緣關係 affinté란 ad-finis와 관련한다)의 기본적인 예를 발견하기 위해 아프리카 연구의 맥락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다. 열 번째 고원의 ‘어떤 마술사의 추억, 그 두 가지’라는 제목의 절에서 저자들이 환기하는 것은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연구한 ‘성스러운 사춘기’인 인간-동물, 혹은 마르셀 그리올(Marcel Griaule)이 기술한 수단의 몇몇 전승에서 인간-하이에나이다.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생각되는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하이에나-인간은 마을을 벗어나 혹은 두 마을 사이에 서식하며 양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한 영웅, 혹은 상호 다른 쪽 마을의 약혼자를 동반한 두 사람의 영웅이 인간-동물에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마치 결연의 완전히 다른 두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즉 하나는 악마적인 결연이며, 그것을 밖에서 강제된 결연, 그 법을 모든 출자에 강제하는 결연(괴물, 인간-동물과의 강제된 결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락 받은 결연이며, 그것은 반대로 출자의 법과 일치하는 결연, 마을의 인간이 괴물을 물리치고 그들 자신의 관계를 조직화한 후에 정해진 결연이다. 이것은 인세스트의 문제로 변용된다. 왜냐하면 인세스트 금지가 결연 일반의 적극적인 요구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자에 대해 완전히 이질적이고 완전히 적대적인 어떤 종의 결연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세스트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인간-동물은 항상 인세스트에 대해 하나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제2종의 결연이 인세스트를 금지하는 것은 오직 두 개의 다른 출자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만 출자의 권리 하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인세스트는 두 번 나타난다. 우선은 결연이 출자를 숨길 때, 결연의 괴물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출자가 결연을 하위에 종속시키며 그것을 다른 리니지로 배분할 때 출자의 금지된 힘으로 나타난다. (들뢰즈&가타리 1980: 303, n.15)

 

“인세스트의 질문은 변용될 것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이론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찰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인세스트]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제 결연이야말로 이중의 파급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출자의 프로세스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시인할 수 없는 성교나 꺼림칙한 애정을 격려하는 결연의 힘’이기도 하다. 그 목적은 관리뿐만 아니라 ‘출산을 방해하는 것’(같은 책: 301)이다. 즉 반-출자적인 결연,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교환론적이고 억압적이고 출자를 생산하는 결연 또한 여기서 어떤 야생적이고 숨겨진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마치 다른 결연, ‘악마적’ 결연에 오염된 것처럼. “결연과 출자가 결혼의 법에 의해 규제되는 것은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은 위험한 감염력을 보유한다. [에드먼드] 리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loc. cit.). 『천 개의 고원』의 열쇠가 되는 이 장에서 ‘힘’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제도—하나의 구조—를 지시하기를 멈추고, 하나의 힘, 하나의 잠세력—하나의 생성—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형식으로서의 결연에서 실체로서의 출자를 뛰어넘어 힘으로서의 결연이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공의(供儀)의 신비적-계열적인 요소 속에도, 토테미즘의 신화적-구조적인 요소 속에도 없다. 우리는 생성의 마술적-실재적인 요소 속에 있다.

 

우리는 사회계약의 요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교환을 모른다. 그것이 아는 것은 다만 도둑질과 증여뿐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219). 그러나 결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환과 [또 다른] 교환이 있다. 이 말은 자본가-상인의 의미에서 ‘교환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나의 교환이며 도둑질과 증여의 범주에 속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증여교환’에 의해 확립되는 결연이며, 이중의 포획을 끊임없이 상호 행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시적인 사물의 흐름을 횡단하고 비가시적인 퍼스펙티브를 교체한다(반-양도한다). 주고받고 되돌려준다는 ‘세 계기’의 직접적인 이접적 총합을 현실화하는 것은 ‘도둑질’이다. 증여는 상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덜 폭력적인 교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증여행위의 목적은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반응[답례]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상대에게서 혼을 뺏는 것이다(서로가 서로의 혼을 뺏는 것으로서의 결연). ‘증여의 교환’이 아닌 사회적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가 어떤 행위에 말 거는 행위이며 어떤 반응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 그때 비로소 사회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성은 단지 회귀성일 뿐이기에 사회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타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삶이란 강탈이다.

 

 

 

4.

 

아프리카의 주술사를 다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한편으로 신화와 토테미즘 제도의 명석 판명한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사제와 공의의 기술이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대립시키면서, 생성을 실천과 담론(주술의 소설)으로서 주술사와 연결시킨다.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Goldman 2005). 왜냐하면 아마존의 횡단적인 샤머니즘은 주술, 요술, 생성의 [판명하고 모호한]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로부터 숙려해야하는 주제가 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골드만의 논문에서 착상한 몇몇 단서만을 보여주려 한다. 모스의 작업에 대해 말하자면, 샤머니즘을 생각하기 위해 되돌아볼만한 것은 공의에 관한 문장이 아니라 주술에 관한 연구이다. 위베르와의 공저인 그것은 이제까지 고루하다고 경시되어왔지만 그 유명한 『증여론』의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증여론』의 하우는 『친족의 기본구조』의 ‘호혜제의 원리’의 기원인데 그것은 『주술의 일반이론의 소묘』에서 마나의 교환론적인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유하는 시니피앙’(레비-스트로스 1950)의 이전 단계의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는 것은 ‘주술자와 그의 주술’이 아니라 『신화학』제3권에 있는 매우 신비한 코멘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M60신화를 요약한 데 이어서 다룬 것은 대중소설 장르의 계열의 형식을 채용한 신화서사의 존재이며, 이 서사 특유의 몽상적인 분위기이며—이 속에서 허구의 정신과의 만남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그것이 개념적인 왜곡이나 지각의 불명료함을 일으킨다—, 주술사의 실천에 대한 비밀스런 암시이다. 그것은 동물과의 ‘일체화’의 과정을 선도하도록 환각제를 섭취하는 의례와 연결된다.

 

이 코멘트에서 엿보이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전혀 다른 신화실천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특별하게 다룬 기원신화와 함께 흘러가는데, 이 흐름에 반하기도 한다(마치 이 둘 의미=방향을 가진 흐름이 같은 책 속에서 상기되듯이). 변용의 서사와 ‘주술사의 소설’의 장르—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렇게 부른다—에서는 인격에 관한 퍼스펙티브의 변이—그 민첩한 행동—가 서사에 대한 강한 언어적 조작의 목적이 된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시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 나타나는 주술자로의 생성으로 직접 되돌려진다.

 

레비-스트로스가 『식탁작법의 기원』의 이 장에서 고안한 것처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속 신화의 단조로운 역사적 퇴행이 아니라 신화에 내적인 측방적인 생성이다. 그것은 준-사건 위에 뿔뿔이 흩어진 조각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조각조각 분열시키면서 생성을 다양체의 체제 속으로 들여온다. 우화, 소문, 험담, 가족과 마을의 민속학—로버트 레드필드의 ‘작은 전통’—, 우스꽝스러운 역사, 수렵의 삽입절, 정령의 방문, 악몽, 급작스런 불안, 전조…이러한 것들은 마이너 신화의 요소이다. 즉 시뮬라크르, 환각, 거짓에 대한 기억과 도구로서의 신화이다. ‘거대한 전통’에 대한 신화, 즉 세계 속의 철학이나 종교가 주로 사용하는 신화(리쾨르류의 근동 신화)가 ‘부조리하다 고로 나는 믿는다’는 교의나 신념을 일으킨다면, 레비-스트로스의 마이너 신화(주술사로 이야기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는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격언을 이중으로 뒤집는 설명이다. “만일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이언스 워즈(Science Wars)에서 변함없이 나타나듯이 종교와 주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크다.

 

요컨대 공의도 아니고 토테미즘도 아니다. “두 개의 일을 한 번에 말하는 것. 그것은 항상 제3의 일이다…”(레비-스트로스 1988: 176). 실제로 『야생의 사고』에서 공의의 개념은 두 개의 조작을 하나로 합침으로써 두 개의 ‘허구의 친구’ 즉 간계열적인 유사성과 외계열적인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야생의 계열상의 다른 조작, 즉 토테미즘은 결국 차이에 대한 최선의 모델이 아니라고 결론내려야 한다. 오히려 그 조작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모델이며, 우리에게 차이의 모든 프로세스를 지시하지 않는다. 클라인의 사원군과 순열의 타블로라는 균형 잡힌 아날로지에 매료되어서는 안된다. 상관하는 상동성으로부터 변용하는 어긋남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Maniglier 2000: n.26).

 

1962년의 이 책에서 논한 토테미즘은 분류에 관한 관계 시스템이며 상관하는 계열 사이에서 그 무엇도 생겨나지 않는다. 즉 그 모델은 완전히 균형 잡힌 모델과 같다. 토테미즘의 ‘잠세력의 차이’는 각각의 계열에 내적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무언가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생성이 명시하는 것은 순수한 외재성으로서의 관계성, 항들이 속한 계열로부터 항들을 추출하는 것으로의 관계성, 즉 리좀이 되는 것이다. 생성이 구하는 것은 항들에 닫힌 관계성의 이론이 아니라 관계성에 대해 열린 항들의 이론이다. 따라서 여하간 생성은 관계성의 제3의 타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고, 앞서 논한 대로 오히려 관계성에 대한 제3의 개념이다. 이것을 매개로 토테미즘을 공의와 함께 읽어내야 한다. 관계론적인 차이의 일차성에 대해 재영토화의 이차성. 보편적인 강도의 다양체로서의 생성의 또 다른 현실화. 생성은 토테미즘의 분리와 공의의 혼합(순화와 매개—라투르) 속에서 동시에 현실화하며 공의의 장치의 여백과 토테미즘의 분류 사이에서, 나아가 ‘종교’의 주변과 ‘과학’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반-실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토테미즘의 아날로지적인 도식은 자연적인 차이와 사회적인 차이 사이의 대칭성뿐만 아니라 그 존재이유로서 비대칭성을 기초로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토테믹한 종은 내적인 실천—곰은 곰과 결혼하고 살쾡이는 살쾡이와 결혼한다—이며, 그 실천을 통해 토테믹한 종은 외적인 실천을 행하는 사회적인 종을 의미하게 된다—곰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은 살쾡이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외적인 차이는 내적인 차이가 되며, 구별은 관계성이 되며, 항들은 기능들이 된다. 토테미즘의 배후에는 기본정식이 갖춰져 있다. 『야생의 사고』의 제4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토테미즘 장치를 카스트 장치로 변용시킨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때 레비-스트로스가 내혼기능의 특수성과 외혼클랜의 기능적인 등질성 사이에 있는 대칭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토테미즘에 ‘상상적’, ‘환상’, ‘공허한 형식’, ‘허구의 횡령(橫領)’이라는 어휘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토테미즘은 허구의 순수한 힘인 공의와는 대조적으로 근본적인 진실이 되는데, 여기서 카스트를 다룸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게 분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참된 문화를 잘못 자연화한다. 토테미즘 집단은 자연을 참된 문화로 잘못 삼는다”(169). 즉 자연과 문화가 영속적인 불균형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동등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계열에서 ‘진실’인 것이 어떤 계열에서는 ‘환상’에 대응한다. 이 모티브—‘의미의 상보성의 원리’라 말할 수 있다—는 ‘마르셀 모스의 업적에 대한 서론’으로부터 『살쾡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에 나타난다.

 

요컨대 겸손하게 말한다 해도 인류학의 주요한 개념—관계성의 개념—의 미래는 인류학이 차이와 다양체, 생성과 이접적 총합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두는가에 달려있다. 관계성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은 구조주의와 관계론적인 존재론과의, ‘기초를 닦지 않는’ 행보를 존중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질 들뢰즈의 철학이 만들어낸 계열—즉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흄, 니체, 버틀러, 호르크하이머, 베르그송, 그리고 타르도[각주:1] 등의 인물들, 그리고 퍼스펙티브, 힘, 정동, 습관, 사건, 과정, 파악, 횡단성, 생성, 차이라는 이념으로 넘쳐나는 풍경—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마이너 구조주의의 계보인데, 그로부터 본질적인 분절화와 매개물이 도출된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칸트주의자에게서 물리친 저 기념비적인 초월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전략적인 직무이다. 작은 것들과 함께 하는 구조주의. 진중히 말해야한다. 그것은 칸트에 얽매인 구조주의가 아니다.

 

진중하게 분명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원론(이른바 ‘이원론’)이든 말든 다시금 후진하면 ‘데카르트주의적 인류학’의 양팔에 의지하기 위해 칸트주의 인류학을 방기한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를 (유연성이 있든 말든 인지적 생득설에 의거하는) 경험적 주체를 가진 ‘칸트주의’로 대체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투영적 접선을 받아들이면서 타(他)의 전(前)구조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때로 인류학의 미래인 것처럼 등장하는 이 전구조주의는 동일성과 실체, 본질과 초월성, 행위주체성과 의식을 다시금 산출하는 것을 상찬하는, 관계성에 대한 기묘한 반동이다. 신체와 기호의 ‘물질성’ 또한 구현화라는 수수께끼를 재구현화하거나 행위주체성의 기적을 상찬하거나 하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조작인 탓에 여기저기 동원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친족에 대해 프랑스 인류학이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로의 일직선으로 향하지도 않으면서 지난 20년간 구조주의적인—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관계론적인—교환론의 기초를 파헤쳐 붕괴시키는 데에 의기양양할 따름이다. 신체의 흐름에 가닿는 생득적인 이념을 확립하려는 역사. 그것은 실체에 대한 실체에 다름 아니다.

 

 

 

  1. 타르도(Jean Gabriel de Tarde), 1843-1904, 사회학에 심리학 개념을 도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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