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강도적(强度的) 조건
1.
이 책에서 몇 번이나 인용했던 레비-스트로스의 문장을 한 번 더 살펴보자. 이 아메리카 중진 연구자는 브라질의 민족지학자들이 유연관계(類緣關係)의 개념에 대해 행했던 ‘비판적 분석’을 명확하게 선주민의 철학적 문제와 연결시켰다. 그것은 모두 최종적으로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제기한 것인데, 내 생각에 그는 이 일련의 문제계를 완전히 이해했다. 남아메리카 선주민의 유연관계는 실제로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학적인 이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최초의 작업 속에서 예언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우주론적인 이성이라는 이념을 사회학적인 이해범주, 친족의 원-도식—이 속에서 이념의 탈영토화하는 힘은 프로세스에 보존유지된다—에 귀착시킨 것이다. 『미국 인류학(American Anthropology)』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그는 투피남바 족을, 수년전부터 알고 있었던 남비콰라 족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족의 특정한 유대, 의리의 형제간의 관계성은 남아메리카의 많은 부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친족(관계성)의 단순한 표현을 훨씬 더 초월한다(1943: 398).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단어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아메리칸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틱한 유연관계가 가진 의미, 그 내적인 외재성의 차원이다.
2.
남아메리카(연구)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어 아메리카 선주민의 풍경 속으로 옮겨서 생각해보면, 『천 개의 고원』에서 제기한 두 개의 결연의 차이는 민족지적인 관점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아메리카 선주민에 관해 민족지학자가 행한 비교와 정확하게 합치한다. 즉 한편에서 사람들이 분명 ‘모호, 이접적, 야행성, 악마적’이라고 말할 강도적 혹은 ‘잠세적(潛勢的)’, 우주론적, 신화-의례적인 유연관계와, 다른 한편에서 혈연관계에 종속된 외연적이고 현실적인 유연관계와의 구별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주제에 대해 나는 이미 아마존의 친족에 관한 많은 작업에서 논해왔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간략하게 언급해두겠다.
아마존 사회에서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혼인에 의한 인척관계는 그 형용사의 모든 의미에서 유난히 섬세한 관계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위험하며 부서지기 쉽고 번거롭고 귀찮고 중요하기도 하다. 또 도덕적인 양의성을 가지며, 감정적으로 긴박하고 정치적인 전략이자 경제적인 기초이다. 결과적으로 인척관계의 유대는 탈비급(脫備給)의 집합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며, 혈연관계(유연성(類緣性)과 출자(出自))에 의해 은폐된다. 술어로서 인척관계(『친족의 기본구조』를 규정하는 아프리오리한 인척관계)는 인척관계 그 자체보다 오히려 혈족의 유형(이를테면 교차하는 조카와 숙부)으로 이해된다. 실제 인척관계는 지시와 참조를 통해 혈연화된다(‘나의 의리의 아버지[시아버지, 장인]’가 ‘나의 어머니쪽 삼촌’이라는 등). 인척관계의 특정한 용어는 동일한 혈족관계의 완곡어법 혹은 혈족관계의 추이(‘의리의 형제[처남, 매형]’보다도 ‘나의 아들의 어머니쪽 삼촌’이라고 부르는 등)를 표현하는 테크노니미(teknonymy)를 우선하는 탓에 경원시된다. 배우자는 성교와 식사를 함께 하는 일상의 친교를 통해 우나 카로(una caro), 즉 유일한 육체가 된다. 피터 리비에르(Peter Rivière)는 마을의 내혼제와 혈족 사이라는 환경이 널리 분포하는 기아나(Guiana) 1의 전형적인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1984: 70). “이념적인 집락에는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2
그러나 이념적인 촌락에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 우선은 실재하는 촌락의 내부에 있겠지만, 특히 이념적인 집락의 외부, 즉 현실의 촌락의 이념적인 외부에서는 이념적인 유연관계로서—달리 말하면 강도적, 잠재적인 유연관계로서—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건 이념적이건 촌락을 떠나자마자 위장은 반전하며 유연관계는—총칭적인 만큼 강력하게, 현실적이지 않는 만큼 명백하게—지표를 가지지 않은 사회관계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의리의 형제는 나와 결혼하지 않은 자매와 형제관계이거나 나의 자매와 결혼하지 않은 자이다. 유연자(類緣者)는 적이며 따라서 적은 유연자에 대한 것이다. 유연자가 적이 아닌 경우, 즉 양친이나 동거인인 경우—‘이념적’인 경우—, 유연자로서 대해서는 안된다. 적이 유연자가 아닌 것은 그들이 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유연자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리하여 아마존의 매우 로칼한 관계성은 유연관계에 의한 강한 공시적 의미를 가지는 경향을 띤다. 결연은 로칼적으로 외혼제이며 드물지는 않다. 또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전략적이다. 즉 우정이나 사업상의 파트너인, 언제나 의례화된 유대이며, 물리적 혹은 정신적인 전쟁상태 혹은 은폐되거나 분명한 전쟁상태가 로칼 집단 간에 영속적인 이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공동체 간의 모호한 의례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강도적인 유연관계는 종의 경계에 걸쳐있다. 예를 들어, 동물, 식물, 정령 그리고 그 외의 인간성이 의문시되는 군생은 모든 인간과의 총합적-이접적인 관계를 함의한다. 타자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연자에 관한 것이며, 강탈과 증여—혹은 강탈이나 증여의 특수한 사례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교환’—의 우주론적인 게임을 의미지우는 파트너이다. 그 속에서 파트너들 간의 잠세력의 차이는 제로로 향한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무효화 되지 않는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자매는 항상 결혼할 수 없는 상태로서 어떤 일정한 비율로 모계집단의 파트너들 간의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자매 가운데 자신의 딸이 있는 남자 집단은 이러한 인세스트의 이념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모계의 조카딸 집단은 아마존의 많은 부족에서 결혼의 우선적인 대상이 된다). 즉 이 분석을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이러한 유연관계는 ‘실재하지 않게’ 된다. 여하간 주지하다시피 인세스트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현실적인 내혼제는 잠재적인 외혼제의 하한이다.
순수하고 잠재적인 유연관계 혹은 메타 유연관계는 아마존에서 타자성의 총칭을 이루는 도식인 것인데, 그것은 확실하게 『천 개의 고원』의 ‘이종(二種)의 결연’에 속한다. 그것이 출자(出自)에 적대하는 것은 혼인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지 않는 경우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혼인이 현실이 되는 장소에서 모습을 감추고 출산에 관한 생산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출산력을 모두 외부와의 악마적인 결연에 의존한다. 생산의 모드(등질적인 출자)가 아니라 포식의 모드(이질발생적인 간취)이다. 그것은 공생관계 간의 포획, 존재론적인 ‘재포식’에 의한 ‘재생산’이다. 자기를 외재화하는 조건으로서의 식인에 의한 타자의 내재화이며, 적—적으로서 행동하는 자—에 의해 ‘자기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종의 자기이다. 이것이 아마존의 우주론적인 실천에 고유한, 타자로의 생성이다. 잠재적인 유연관계는 친척보다도 전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친족에 선행하며 그 외부에서 전쟁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이 결연이 선행하는 강도적인 출자를 억압하는 표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출자가 초월성(신화적 기원, 선조, 동일한 출자집단)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모든 출자가 상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모든 출자는 국가를 기도한다. 그것은 국가의 출자인 것이다. 아마존의 강도적 결연은 국가에 저항하는 결연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오마주…).
강도적인 혹은 일의적(一義的)인 유연관계는 아마존 사회, 그리고 아마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변별하는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화의 ‘기저’(레비-스트로스 1991: 295)를 다루고 있다. 『신화학』에서 분석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는 신화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군을 우리 문화에 고유한 신화와 비교해보면, 전자에서는 모계적인 결연관계가 우위에 있으며 후자에서는 부모인 자가 우위에 있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중심적인 등장인물은 [변용의] 공식상에서 유연자로서 관계 지어진다. 이 신화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을 하나 예로 들면, 그것은 식인적인 의리의 아버지[양아버지], 모든 문화재의 비-인간적인 소유자이다. 그는 의리의 아들[양아들]을 죽이고자 일련의 시련을 부여하는데, 그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대체로 그것은 그를 동정하는 다른 비-인간들 덕분이다). 그리고 그는 수련의 귀중한 성과를 가지고 동료 인간들 곁으로 돌아온다. 이 원신화의 내용(레비-스트로스 1971: 503 et s.)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시나리오와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이 있으며,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영웅이 있다. 그리고 문명의 불, 여성의 ‘증여’, 인간의 죽음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대항적인 영웅은 의리의 아버지이거나 의리의 형제이며, 그리스적, 근동적, 서아프리카적 혹은 프로이트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구세계의 신화에 항상 따라다니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구세계에서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훔쳐야 하는 것에 반해, 아메리카 선주민은 의리의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훔쳐야 하며, 의미의 형제에게서 그것을 증여로 받아내야 한다. 여하간 그들은 동물이다.
우리가 ‘신화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증여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반적인 규범으로서 타자에 관한 담론—이다(Wagner 1978). 그것은 신화 속에서 단 한번 증여되며 그 이후는 소여(所與)된다[주어진다]. 즉 인간이 그로부터, 또 그에 대항하여 자신을 정의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다. 이 담론은 존재론적인 부채의 기한이나 한계(인간은 그 속에서 존재한다)를 정립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부채는 출자 혹은 부모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기초가 되는 계보적인 소여’—, 혼인이나 결연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타자란 무엇보다도 하나의 유연자이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선주민의 신화가 유연관계를 항상 거기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는 사소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신화는 혈연관계와 같다든가 신화가 상상하는 세계에서 전(前)-인간은 혼인의 금지를 무시한다는 등—, 유연관계가 신화의 ‘틀’(『신화학』의 의미에서)을 구성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틀 내지는 조건설정은 다양한 존재자를 포함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동물의 유연자로 넘쳐난다. 유연자는 동물,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인간이어야 한다. 즉 식물, 별, 기상, 인공물…(미래의 비-인간이다—진정으로 신화에서는 현재 인간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이다. 그러나 길은 두 갈래로[비-인간으로 향하는 길과 인간으로 향하는 길] 같지 않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비-인간과의 결연이 아마존에서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를 포함한다. 『질투심 많은 여 도공』의 의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바로의 토템과 터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신화, 특히 문화의 기원을 다루는 신화는 유연관계와 교환에 관한 것이며, 친자관계와 출산에 관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에게 특징적인 인세스트에 대해서도 완전히 동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친족의 기본구조』의 기초와 동일하게 위치 지었다. 즉 ‘출자의 인세스트’나 부모와 자식 간의 프로이트적인 인세스트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제와 자매 혹은 ‘결연의 인세스트’로서 문제시된다. 신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신화에서는 형제와 자매간의 인세스트의 결과로서 태양과 달의 기원이 설명된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저자가 ‘아메리카의 불가타(Vulgata)’라고 부르며 M1의 기초로 삼는 것이 이 이야기이다. 이 보로로의 기준신화에서 어머니와 아들 간의 원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나 아버지가 일으키는 사투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다시 쓰이면서—구조인류학의 유머로서—, ‘사촌’들 간의 인세스트나 ‘유연자’들 간의 다툼이 된다. 보로로 사회는 외혼제의 모계씨족에 의해 조직되며, 그 속에서 모든 개인은 모변의 씨족에 속한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한 사람의 유연자이며, 혼인에 의해 결합되는 씨족의 구성원이다. 아버지의 시점에서 보면, 아들은 아내의 형제가 된다. 인세스트의 문제성을 이동시키는 레비-스트로스의 이 방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도곤 신화에 대한 코멘트로 유효하게 활용된다. 즉 “자매와의 인세스트는 어머니와의 인세스트로 대체되지 않지만, 반대로 생식에 의한 혈연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세스트의 강도적인 모델이 된다”(들뢰즈&가타리 1972: 187) 3
3.
그러나 엄밀하게는 이 내재평면에는 결연과 출자의 대립적인 구별—필연적으로 외연적인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만약 두 결연이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두 출자가 있다. 만일 모든 생산이 출자적이라고 해도 모든 출자가 필연적으로 (재)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재생산적이며 행정적인 (표상적이고 국가적인) 출자가 존재한다 해도 그와 마찬가지로 전염성의 괴물적인 출자가 있으며 그것들은 자연에 반하는 결연과 생성, 인세스트적 혹은 종을 넘어서는 연결로부터 귀결한다.
내혼과 외출자. 그것이 반-친족관계의 기본구조이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 외혼의 인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른 아메리카 선주민의 이념적인 촌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출자에 의한 혈연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집단의 많은 아이들은 『슬픈 열대』에서 묘사된 카두베오 족의 이념적인 사례처럼 본래 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우리가 자연으로 여기는 감각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출산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담고 있다. 낙태와 영아살해는 대체로 보통의 실천이며, 따라서 집단의 보존은 생식보다는 양자(養子)결연에 의해 이뤄진다. 전쟁원정의 주요한 목적은 아이들을 손에 넣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55: 205-208)
그 외의 구조주의의 교의를 전도시키는 일탈적인 예는 투피남바 족이다. 그들은 자매의 딸과의 결혼을 선호하며,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외부에 의리의 형제를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의례적으로 죽임당하거나 먹혀버리기 전의 적에게 일시적인 배우자로서 자기 자신의 자매를 제공한다. 인세스트와 거의 유사한 지나친 내혼은 식인적인 지나친 외혼이기도 하다. 신화의 과장된 도식 속에서 그것은 자매와의 성교이며, 작은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앞선 도식의 이중의 뒤틀림 속에서 그것은 어떤 별(星)과의 결혼, 특정의 자매를 위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인세스트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결정한다는 것과 비교하자면, 하나든 둘이든 결연이 있으며 하나든 둘이든 출자가 있는 것인가, 신화는 원초적인 출자를 표하는가 등은 그다지 알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결국 질문은 외부가 내부에서 생겨나는가—결연은 출자의 하위에 있으며 그에 의존하는가—, 혹은 그 반대로 내부는 외부의 반복인가—출자나 혈연관계는 결연이나 유연관계의 특수한 경우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때 강도적인 이접으로서의 차이는 물론 제로로 향한다….
이 유연관계와 혈연관계 간의 ‘구별 없고 식별불가능한 모호한 영역’—그것들은 미분화된 것이 아니고 결국 그 속에 무한의 반향, 내적인 전개, 프랙탈적인 내포가 끌려 들어온다—이야말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서 쌍둥이 인물이 중요하다는 것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구조’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며 『신화학』의 전개를 통해(특히 태양과 달의 신화를 매개로) 구체화하며 『살쾡이 이야기』에서 ‘모든 시스템의 열쇠’로 변용된다(레비-스트로스 1991: 295). 왜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쌍둥이성은—일시적이고 미완성이며 준-매개적이며 분산되며 불균형하며 적대적인 인세스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유사성의 원형이나 혈연의 동일성을 표상하지 않고 잠세적인 유연관계를 내적으로 반복한다. 불균형한 쌍둥이는 ‘피하기 어려운 비대칭성’의 신화적 인격화이며, 그것이 세계의 조건을 형상화한다. 유연자의 환유로서 혈연관계이며, 차이의 은유로서 쌍둥이성이다. 이 살과 피를 맛보기 위해서 여기서 잠시 라이프니츠주의를 몸에 둘러야 할 것이다.
차이로서 쌍둥이성은 자신의 인격을 분할하여 그로부터 강도적인 범주가 출현함으로써 시작된다. 『살쾡이 이야기』의 ‘숙명적인 분할’의 장에서 매우 명확하게 설명된 것처럼(“내가 키운 딸/아들이든 내가 죽인 아들/딸이든”) 모친의 은혜 속에 있는 한 아이가 ‘그 자신의 쌍둥이’인 것이다(레비-스트로스 1991: 87 et s.). 왜냐하면 그는 대립하는 성(性)의 이중의 잠재성을 갖춘 것인데, 그것은 단일성을 가진 새로운 개인이 태어날 때에 최종적으로 상실된다(‘슈뢰딩거의 고양이’의 패러독스는 이 신화적인 주제의 하나의 변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살쾡이 이야기』 10쪽에서 언급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아마도 양자(量子)의 고양이 그 자체의 형식이 가시적인 것이리라). 이 책이 아메리카 신화에서 일반적인 남성의 쌍둥이 한 쌍만을 생각한다는 것에 주의하자(디오스쿠로이(Dioskuroi)와의 대비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벌거벗은 인간』에서 저자는 동성의 쌍둥이는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인세스트)가 만들어내는 틀의 ‘파생적’이며 ‘보족적’인 변용 상태라고 주장한다(레비-스트로스 1971: 190-192). 즉 아메리카 선주민의 동성의 쌍둥이의 차이는 무엇보다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 한 쌍이라는 ‘기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제기하는 것은 일찍이 프랑수아즈 에리티에(Francoise Heritier, 1933~ 프랑스의 인류학자)(1981: 39)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차이가 성적인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즉 모든 성(性)은 차이적이라는 것이다—모든 시스템이 기호적인 것이기도 하다(Manigler 2000: Viveiros de Castro 1990). 왜냐하면 한 번 더 레비-스트로스를 거론하면 친족의 본질적인 경험은 성(性)의 대립이라는 경험이 아니라 대립으로서 이해되는 다른 성(性)에 대한 경험이다. 이 구조주의의 근원적인 직관에 대한 스트라샌의 해석은 앞서 살펴보았다. 4
4.
아마존 선주민의 근저에 흐르는 우주론적인 범주로서 잠세적인 유연자라는 관념은 이제까지 참고한 이론이나 민족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체의 ‘교환론’의 이미지와의 단절을 산출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재인식하면서 간소하게 그 논의의 결론을 이끌어내겠다. 즉 포식이나 포착이라는 관념—강탈과 증여, 카니발리즘과 적이 되는 것—이 그것들을 항상 연결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들은 결연의 힘의 움직임을 선주민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상태로서 이해된다. 그것은 구조기능주의든 구조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친족의 고전적인 이론(‘가족의 영역’, ‘공공의 영역’)에서 보이는 가(家)-공(公)의 유연자로 환원될 수 없는 우주론적인 힘이다. 강탈, 증여, 감염, 소비 그리고 생성. 문제는 이 교환이다. 잠세적인 결연은 타자로의 생성이며, 그것이 아마존의 친족관계를 휘감으며 위치짓는다. 이러한 친족관계를 통해 그들에 대한 민족학—『친족의 기본구조』에 충실하기 이전에(충실하기 위해서) 『신화학』에 충실하다—은 철학자 파트리에 마니글리에의 고찰을 선취했다.
친족관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상호관계의 조정이나 규정은 친족을 통해 배타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그렇다면 친족을 매개로 원초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는 세계의 사상(事象)의 순환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Maniglier 2005b: 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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