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구조주의, 토테미즘과 공의, 신화의 신화학 등에 관한 논의를 알지 못하면 이 글을 독해해내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성' 개념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연결되는지(즉 '결연'과 '생성'의 개념적 결합)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끈기있게 읽어나간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말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리라 본다. 

그것은 근대의 개념적 기초의 핵심을 뒤집고 파헤쳐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장을 펼쳐보이는 것인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호혜성', '교환', '사회', '연대' 등 근대의 '희망적인 실천 조작'은 허구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참된 '강도적인 조건'(카스트로의 이 용어는 '생성의 결연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을 탐구할 수 있을까? 그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겠다. 적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안내자의 본분을 충실히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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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이 모든 것은 아니다—생성

 

 

 

1.

 

앞서 지적한 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의 두 저자는 원시적인 에너지가 출자의 에너지라는 사실이 ‘단 하나의 문제도’ 변화시키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우연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차 에너지가 ‘결연의 에너지’인 것처럼 다른 내재적인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자문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연의 개념을 이접적 총합으로 구성하는 조건을 결정짓는 것이 문제이다.

 

결연의 강도적인 해석 가능성은 『천 개의 고원』의 생성에 관한 긴 글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생성 개념은 베르그송과 니체에 관한 연구 이후 들뢰즈의 중심적 관심사였으며, 『의미의 논리학』에 대한 관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에 대한 공저(들뢰즈&가타리 1975) 이후 생성 개념은 특이한 개념적 굴절과 강도를 갖기 시작했고, 1980년의 책(『천 개의 고원』)의 「1730년: 강도가 되는 것, 동물이 되는 것,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의 고원에서 도주의 속도에 도달했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미메시스—모방이든 재생산이든—에서 비껴나(“미메시스주의는 매우 나쁜 개념이다…”) ‘메메시스’—기억이든 역사든—마저 피해 도주하고 질주한다. 생성은 건망증적이며 전(前)역사적이며 반아이콘적이며 불모이다. 그것은 실천에서의 차이이다.

 

 

 

2.

 

『천 개의 고원』의 제10장은 레비-스트로스가 확립한 계열적-공의적인 이론과 토템적-구조적인 이론의 대립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즉 한편에서는 인간과 동물과의 상상적 동일화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차이와 자연적 차이와의 상징적 상관관계라는 대립이 있다. 계열과 구조라는 이 두 아날로지적인 모델 사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성이라는 베르그송적인 모티브를, 즉 계열적 유사함으로도 구조적 유사함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종의 관계를 도입한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면 구조주의의 분석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를 지시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분석틀에서 관계는 몰적이고 논리적인 대상으로서 기능하며 본질적으로는 외연화된 것(대립, 모순, 매개)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생성은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이며 분자적이고 강도적이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형태학을 가로지르는 관계성과는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생성의 이접적 총합은 형식적인 구조의 편성 규칙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평균상태와는 멀리 떨어진 실재적인 다양체에서 작동한다(DeLanda 2002: 75).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한 것이며 같은 것이다.”

 

계열적 유사함은 상상적인 것이고 구조적 상관은 상징적인 것인 반면, 생성은 실재적인 것이다. 은유도 형태변화도 아닌 생성은 스스로 만들어낸 두 개의 관계항을 탈영토화하는 운동이며 새로운 ‘부분적인 연결’의 수단에 의해 그것들을 관련짓도록 규정하는 관계성으로부터 그것들[두 개의 관계항]을 떼어낸다. 생성이라는 동사는 이 의미에서 술어적 조작이나 타동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재규어로 생성한다(devenir-jaguar)는 것의 함의는 재규어가 되는 것(devenir in jaguar)과 같지 않다. ‘토템적’인 재규어는 인간이 ‘공의적’으로 변용하는 것이자 상상적인 것인데, 그 변용은 실재적이다. 고양이과 동물이 생성 그 자체이다. 즉 재규어가 되는 것에서 ‘재규어’란 행위의 내재적 측면이며, 그 초월론적인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성이라는 것은 자동사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한 마리의 재규어가 되는 순간 재규어는 없다(따라서 우리는 앞서 생성의 이접적인 다양체를 가리키기 위해 ‘인간-재규어’라는 형식을 사용했다). 저자들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를 시사적으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동물로 생성함과 동시에 그 동물이…로 생성한다는 민첩한 행동과 계속해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으로 생성하는가? 인간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되는가?) (들뢰즈&가타리 1980: 290)

 

이어서 저자들은 생성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일관성을 가진 동사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외관을 치장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놀랍게도—생성은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출자를 생산하는 것도, 출자를 통해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op.cit., 292). 생산도 출자도 아니다. 도로시가 토토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 속에 없다‘는 인상을 품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강도적인 사고란 생산에 관한 사고이다”라고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는 말한다(2003: 15). 그러나 사태는 이 정도로 일반적이지는 않다. 『천 개의 고원』에서 생성의 개념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주론에서 중축의 역할을 맡는다. 그것은 ‘모든 것은 생성하기’ 때문도 아니고—거기서는 개념적으로 파탄을 맞이하고 있다—, 생성 이외의 중요한 사고가 이 책에 없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천 개의 고원』의 가장 뛰어난 반-표상적 장치가 표상작용을 무효로 만드는 장치라는 의미에서 생성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이 딱 반-표상적인 장치인 것과 같다. 생산과 생성, 이 둘은 다른 운동이다. 이 둘은 모두 자연을 포함하며 강도적이고 전표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하나의 운동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이다. 생성은 욕망의 프로세스이며, 욕망은 실재적인 것의 생산이며,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하면서도 같은 것이며, 생성은 리좀이며, 리좀은 무의식의 생산과정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방향에서 그것들은 결코 같은 운동이 아니다. 생산과 생성은 “두 개의 의미=방향에서 같은 궤도를 그리지 않는다”. 생산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 실현되며 자연이 생산과정으로서 나타난다(“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그것의 본성상 생산 혹은 산업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10)). 반대로 생성은 인간과 자연의 ‘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이다. 즉 포획의 순간이며 공생이며 이질성 간의 횡단적인 결합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294, 296). “자연은 이렇게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출자의 생산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같은 책: 296). 생성은 생산이라는 거울의 반대측에 있다. 투피남바 족이 적을 가리키는 용어를 상기해보면, 이것은 ‘역방향의’ 동일성이다.

 

우주는 출자에 의해 기능하지 않는다”(같은 책). 이것이 언외(言外)로 암시하는 것은 우주가 외연적-현실적임과 동시에 그 모든 상태에서 강도적-잠재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주가 출자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면—다른 무언가에 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결연에 의해 작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의 첫 번째 고원에서 우리는 이미 “수목은 출자인 반면, 리좀은 결연이며 다름 아닌 다만 결연이다”(같은 책: 36)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생성은 진화가 아니다. 적어도 혈연이나 출자에 의한 진화가 아니다. 생성은 출자로부터 그 무엇도 생산하지 않으며, 모든 출자는 상상적인 것이다. 생성은 항상 출자와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결연과 관계한다. (같은 책: 291)

 

좋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도곤 신화의 강도적이고 모호하고 야행성의 출자를 주장하는 분석으로부터 『천 개의 고원』에서 이러한 관계의 양식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부인하기까지 무엇이 변화한 것일까? 강도적인 결연은 어떻게 상상적인 것으로 생성될 수 있을까?

 

이 변화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시선이 동일종내의 지평으로부터 종간의 지평으로 크게 방향전환을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즉 욕망의 인간적인 이코노미로부터—그것은 역사-세계적ㆍ인종적ㆍ사회정치적인 욕망이며, 가족적ㆍ인격주의적ㆍ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적인 욕망이다—, 종을 횡단하는 정동(情動)의 이코노미로의 변환이다. 그것은 종이라는 자연의 영역, 그리고 그 한정적인 총합을 무시하며 우리를 내재평면에 포함된 이접을 통해 연결짓는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의 이코노미라는 관점에서 외연적인 결연은 강도적이고 분자적인 출자를 제한하는 움직임, 그것을 출자집단이라는 몰적인 형태 하에 현실화한다. 그러나 정동의 우주적인 이코노미—비인간적인 힘으로서의 욕망—라는 관점에서는 비로소 출자야말로 그 상상적 동일화의 방법에 의해 이질적인 존재 사이에 있다는 반-자연적인 만큼 더더욱 실재적인 결연을 제한하게 된다. “만약 진화가 참된 생성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등급이나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활용하는 공생의 영역에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출자는 있을 수 없다”(들뢰즈&가타리 1980: 291).

 

덧붙여 들뢰즈가 유념하는 꿀벌과 난초의 예를 보면, “어떤 꿀벌-난초도 그로부터 결코 태어날 수 없는” 하나의 배열(arrangement)—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꿀벌이나 어떤 난초도 그것 없이는 자손을 남길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하나의 배열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종의 자연적인 출자는 두 종 간의 반-자연적인 결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시된 섹슈얼리티의 탈영토화가 여기서 실현된다. 성에 관한 이항논리적인 조직화는 바이섹슈얼리트도 포함하며(‘젠더의 원자’를 참조), ‘n개의 종(種)’과 분자적인 레벨에서 연결되는 ‘n개의 성(性)’으로의 도정을 과시하게 된다. “섹슈얼리티는 남자가 여자로 생성하는 것, 인간이 동물로 생성하는 것을 경유하여 진행된다. 즉 입자(粒子)의 방출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341). 만일 동물로의 생성에 포함된 모든 동물이 하나의 다양체라면(“모든 동물은 무엇보다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군집이다”(같은 책: 293)),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어떤 보편적인 악마적 환유로 이끌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다양이며 부수적이며 이질적이며 출자의 밖에 있는 비재생산적인 사회성을 그 다양체가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병을 출자와, 감염증을 유전과, 오염에 의한 군생을 성적 재생산이나 성적 생산과 대립시킨다…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 내지는 혼인은 자연계를 횡단하는 참된 자연이다. (같은 책: 295)

 

그래서 결연이다. 그러나 어떤 결연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와 분열증』 제1권은 두 개의 출자를 제창했다. 하나는 강도적이고 배아종적이다. 또 하나는 외연적이고 체세포적이다. 이 후자는 배아종적인 유입이라는 욕망을 대리하는 ‘억압적인 표상’의 역할을 행하는 외연적인 원리이며, 결연에 의해 반-정립된다. 이제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결연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논한 사회체로서 남성이라는 젠더에게조차 내적인 결연(최초의 집단적인 호모섹슈얼리티)인 것이다. 또 하나는 생성에 내재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형태변화(신화적 계보, 동물을 출자하는 것)로는 환원될 수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교환이나 상징적 분류(외혼, 토테미즘)로도 환원될 수 없다.

 

모든 생성은 하나의 결연이다. 이것은 반복해서 말하자면 모든 결연이 하나의 생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적이고 사회정치적인 외연적인 결연이 있고, 그리고 반-자연적이고 코스모폴리틱하고 강도적인 결연이 있다. 외연적 결연이 출자를 구별하는 것에 비해 강도적 결연은 종을 교란한다. 혹은 오히려 비연속적인 종별화라는 제한적인 총합에 의해 반-실현된다. 샤먼이 재규어로 생성될 때, 그가 재규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면 재규어의 자손에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재규어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규어가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재규어와 결연을 맺는다.

 

오히려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무차별성은 식별불가능성, 모호성이라는 하나의 구역이 두 개의 항 간에 설정된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항이 각각의 분화에 선행하는 점을 직접 실현한 것과 같다. 유사하지 않으며 미끄러지고 극단적인 근접, 절대적인 접근이다. 자연적인 출자가 아니라 반-자연적인 결연이다. (들뢰즈&가타리 1993: 100)

 

생성에 대한 이 정의가(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범형적인 이원론을 횡단하는 방법임을 주의해야한다. 즉 {출자, 환유적인 연속성, 계열적 유사함} 대 {결연, 은유적 불연속성, 대립적 차이}이다. 자연에 반하는 결연에 의해 정립된 접선적-미분적인 ‘절대적인 접근’은 상징적-문화적 결연(외혼)에 의해 정립된 출자의 리니지 간의 절대적인 ‘비접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두말할 것도 없이(들뢰즈&가타리 1972: 131), 그러한 접근은 ‘두 개의 항’ 사이에 어떤 동일화나 상상적 미분화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고전적인 구조주의처럼 자연적 출자와 문화적 결연이 대립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도적 결연이 자연에 반한다는 것은 그것이 문화에도 사회에도 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함된 제3항, 타의 관계성, 즉 ‘새로운 결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연’은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나쁜 말이기도 하다. 인격과 사물 간의 경계를 횡당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러한 단어는 모두 좋은 말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을 미생물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결연은 좋은 말이다. 힘(Force)은 인간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은 말이다. (라투르 1993)

 

 

 

3.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는 결연, 즉 인간과 비인간 간의 유연관계(類緣關係 affinté란 ad-finis와 관련한다)의 기본적인 예를 발견하기 위해 아프리카 연구의 맥락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다. 열 번째 고원의 ‘어떤 마술사의 추억, 그 두 가지’라는 제목의 절에서 저자들이 환기하는 것은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연구한 ‘성스러운 사춘기’인 인간-동물, 혹은 마르셀 그리올(Marcel Griaule)이 기술한 수단의 몇몇 전승에서 인간-하이에나이다.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생각되는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하이에나-인간은 마을을 벗어나 혹은 두 마을 사이에 서식하며 양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한 영웅, 혹은 상호 다른 쪽 마을의 약혼자를 동반한 두 사람의 영웅이 인간-동물에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마치 결연의 완전히 다른 두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즉 하나는 악마적인 결연이며, 그것을 밖에서 강제된 결연, 그 법을 모든 출자에 강제하는 결연(괴물, 인간-동물과의 강제된 결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락 받은 결연이며, 그것은 반대로 출자의 법과 일치하는 결연, 마을의 인간이 괴물을 물리치고 그들 자신의 관계를 조직화한 후에 정해진 결연이다. 이것은 인세스트의 문제로 변용된다. 왜냐하면 인세스트 금지가 결연 일반의 적극적인 요구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자에 대해 완전히 이질적이고 완전히 적대적인 어떤 종의 결연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세스트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인간-동물은 항상 인세스트에 대해 하나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제2종의 결연이 인세스트를 금지하는 것은 오직 두 개의 다른 출자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만 출자의 권리 하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인세스트는 두 번 나타난다. 우선은 결연이 출자를 숨길 때, 결연의 괴물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출자가 결연을 하위에 종속시키며 그것을 다른 리니지로 배분할 때 출자의 금지된 힘으로 나타난다. (들뢰즈&가타리 1980: 303, n.15)

 

“인세스트의 질문은 변용될 것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이론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찰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인세스트]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제 결연이야말로 이중의 파급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출자의 프로세스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시인할 수 없는 성교나 꺼림칙한 애정을 격려하는 결연의 힘’이기도 하다. 그 목적은 관리뿐만 아니라 ‘출산을 방해하는 것’(같은 책: 301)이다. 즉 반-출자적인 결연,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교환론적이고 억압적이고 출자를 생산하는 결연 또한 여기서 어떤 야생적이고 숨겨진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마치 다른 결연, ‘악마적’ 결연에 오염된 것처럼. “결연과 출자가 결혼의 법에 의해 규제되는 것은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은 위험한 감염력을 보유한다. [에드먼드] 리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loc. cit.). 『천 개의 고원』의 열쇠가 되는 이 장에서 ‘힘’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제도—하나의 구조—를 지시하기를 멈추고, 하나의 힘, 하나의 잠세력—하나의 생성—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형식으로서의 결연에서 실체로서의 출자를 뛰어넘어 힘으로서의 결연이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공의(供儀)의 신비적-계열적인 요소 속에도, 토테미즘의 신화적-구조적인 요소 속에도 없다. 우리는 생성의 마술적-실재적인 요소 속에 있다.

 

우리는 사회계약의 요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교환을 모른다. 그것이 아는 것은 다만 도둑질과 증여뿐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219). 그러나 결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환과 [또 다른] 교환이 있다. 이 말은 자본가-상인의 의미에서 ‘교환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나의 교환이며 도둑질과 증여의 범주에 속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증여교환’에 의해 확립되는 결연이며, 이중의 포획을 끊임없이 상호 행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시적인 사물의 흐름을 횡단하고 비가시적인 퍼스펙티브를 교체한다(반-양도한다). 주고받고 되돌려준다는 ‘세 계기’의 직접적인 이접적 총합을 현실화하는 것은 ‘도둑질’이다. 증여는 상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덜 폭력적인 교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증여행위의 목적은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반응[답례]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상대에게서 혼을 뺏는 것이다(서로가 서로의 혼을 뺏는 것으로서의 결연). ‘증여의 교환’이 아닌 사회적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가 어떤 행위에 말 거는 행위이며 어떤 반응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 그때 비로소 사회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성은 단지 회귀성일 뿐이기에 사회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타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삶이란 강탈이다.

 

 

 

4.

 

아프리카의 주술사를 다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한편으로 신화와 토테미즘 제도의 명석 판명한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사제와 공의의 기술이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대립시키면서, 생성을 실천과 담론(주술의 소설)으로서 주술사와 연결시킨다.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Goldman 2005). 왜냐하면 아마존의 횡단적인 샤머니즘은 주술, 요술, 생성의 [판명하고 모호한]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로부터 숙려해야하는 주제가 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골드만의 논문에서 착상한 몇몇 단서만을 보여주려 한다. 모스의 작업에 대해 말하자면, 샤머니즘을 생각하기 위해 되돌아볼만한 것은 공의에 관한 문장이 아니라 주술에 관한 연구이다. 위베르와의 공저인 그것은 이제까지 고루하다고 경시되어왔지만 그 유명한 『증여론』의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증여론』의 하우는 『친족의 기본구조』의 ‘호혜제의 원리’의 기원인데 그것은 『주술의 일반이론의 소묘』에서 마나의 교환론적인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유하는 시니피앙’(레비-스트로스 1950)의 이전 단계의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는 것은 ‘주술자와 그의 주술’이 아니라 『신화학』제3권에 있는 매우 신비한 코멘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M60신화를 요약한 데 이어서 다룬 것은 대중소설 장르의 계열의 형식을 채용한 신화서사의 존재이며, 이 서사 특유의 몽상적인 분위기이며—이 속에서 허구의 정신과의 만남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그것이 개념적인 왜곡이나 지각의 불명료함을 일으킨다—, 주술사의 실천에 대한 비밀스런 암시이다. 그것은 동물과의 ‘일체화’의 과정을 선도하도록 환각제를 섭취하는 의례와 연결된다.

 

이 코멘트에서 엿보이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전혀 다른 신화실천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특별하게 다룬 기원신화와 함께 흘러가는데, 이 흐름에 반하기도 한다(마치 이 둘 의미=방향을 가진 흐름이 같은 책 속에서 상기되듯이). 변용의 서사와 ‘주술사의 소설’의 장르—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렇게 부른다—에서는 인격에 관한 퍼스펙티브의 변이—그 민첩한 행동—가 서사에 대한 강한 언어적 조작의 목적이 된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시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 나타나는 주술자로의 생성으로 직접 되돌려진다.

 

레비-스트로스가 『식탁작법의 기원』의 이 장에서 고안한 것처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속 신화의 단조로운 역사적 퇴행이 아니라 신화에 내적인 측방적인 생성이다. 그것은 준-사건 위에 뿔뿔이 흩어진 조각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조각조각 분열시키면서 생성을 다양체의 체제 속으로 들여온다. 우화, 소문, 험담, 가족과 마을의 민속학—로버트 레드필드의 ‘작은 전통’—, 우스꽝스러운 역사, 수렵의 삽입절, 정령의 방문, 악몽, 급작스런 불안, 전조…이러한 것들은 마이너 신화의 요소이다. 즉 시뮬라크르, 환각, 거짓에 대한 기억과 도구로서의 신화이다. ‘거대한 전통’에 대한 신화, 즉 세계 속의 철학이나 종교가 주로 사용하는 신화(리쾨르류의 근동 신화)가 ‘부조리하다 고로 나는 믿는다’는 교의나 신념을 일으킨다면, 레비-스트로스의 마이너 신화(주술사로 이야기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는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격언을 이중으로 뒤집는 설명이다. “만일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이언스 워즈(Science Wars)에서 변함없이 나타나듯이 종교와 주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크다.

 

요컨대 공의도 아니고 토테미즘도 아니다. “두 개의 일을 한 번에 말하는 것. 그것은 항상 제3의 일이다…”(레비-스트로스 1988: 176). 실제로 『야생의 사고』에서 공의의 개념은 두 개의 조작을 하나로 합침으로써 두 개의 ‘허구의 친구’ 즉 간계열적인 유사성과 외계열적인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야생의 계열상의 다른 조작, 즉 토테미즘은 결국 차이에 대한 최선의 모델이 아니라고 결론내려야 한다. 오히려 그 조작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모델이며, 우리에게 차이의 모든 프로세스를 지시하지 않는다. 클라인의 사원군과 순열의 타블로라는 균형 잡힌 아날로지에 매료되어서는 안된다. 상관하는 상동성으로부터 변용하는 어긋남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Maniglier 2000: n.26).

 

1962년의 이 책에서 논한 토테미즘은 분류에 관한 관계 시스템이며 상관하는 계열 사이에서 그 무엇도 생겨나지 않는다. 즉 그 모델은 완전히 균형 잡힌 모델과 같다. 토테미즘의 ‘잠세력의 차이’는 각각의 계열에 내적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무언가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생성이 명시하는 것은 순수한 외재성으로서의 관계성, 항들이 속한 계열로부터 항들을 추출하는 것으로의 관계성, 즉 리좀이 되는 것이다. 생성이 구하는 것은 항들에 닫힌 관계성의 이론이 아니라 관계성에 대해 열린 항들의 이론이다. 따라서 여하간 생성은 관계성의 제3의 타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고, 앞서 논한 대로 오히려 관계성에 대한 제3의 개념이다. 이것을 매개로 토테미즘을 공의와 함께 읽어내야 한다. 관계론적인 차이의 일차성에 대해 재영토화의 이차성. 보편적인 강도의 다양체로서의 생성의 또 다른 현실화. 생성은 토테미즘의 분리와 공의의 혼합(순화와 매개—라투르) 속에서 동시에 현실화하며 공의의 장치의 여백과 토테미즘의 분류 사이에서, 나아가 ‘종교’의 주변과 ‘과학’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반-실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토테미즘의 아날로지적인 도식은 자연적인 차이와 사회적인 차이 사이의 대칭성뿐만 아니라 그 존재이유로서 비대칭성을 기초로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토테믹한 종은 내적인 실천—곰은 곰과 결혼하고 살쾡이는 살쾡이와 결혼한다—이며, 그 실천을 통해 토테믹한 종은 외적인 실천을 행하는 사회적인 종을 의미하게 된다—곰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은 살쾡이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외적인 차이는 내적인 차이가 되며, 구별은 관계성이 되며, 항들은 기능들이 된다. 토테미즘의 배후에는 기본정식이 갖춰져 있다. 『야생의 사고』의 제4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토테미즘 장치를 카스트 장치로 변용시킨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때 레비-스트로스가 내혼기능의 특수성과 외혼클랜의 기능적인 등질성 사이에 있는 대칭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토테미즘에 ‘상상적’, ‘환상’, ‘공허한 형식’, ‘허구의 횡령(橫領)’이라는 어휘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토테미즘은 허구의 순수한 힘인 공의와는 대조적으로 근본적인 진실이 되는데, 여기서 카스트를 다룸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게 분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참된 문화를 잘못 자연화한다. 토테미즘 집단은 자연을 참된 문화로 잘못 삼는다”(169). 즉 자연과 문화가 영속적인 불균형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동등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계열에서 ‘진실’인 것이 어떤 계열에서는 ‘환상’에 대응한다. 이 모티브—‘의미의 상보성의 원리’라 말할 수 있다—는 ‘마르셀 모스의 업적에 대한 서론’으로부터 『살쾡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에 나타난다.

 

요컨대 겸손하게 말한다 해도 인류학의 주요한 개념—관계성의 개념—의 미래는 인류학이 차이와 다양체, 생성과 이접적 총합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두는가에 달려있다. 관계성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은 구조주의와 관계론적인 존재론과의, ‘기초를 닦지 않는’ 행보를 존중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질 들뢰즈의 철학이 만들어낸 계열—즉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흄, 니체, 버틀러, 호르크하이머, 베르그송, 그리고 타르도[각주:1] 등의 인물들, 그리고 퍼스펙티브, 힘, 정동, 습관, 사건, 과정, 파악, 횡단성, 생성, 차이라는 이념으로 넘쳐나는 풍경—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마이너 구조주의의 계보인데, 그로부터 본질적인 분절화와 매개물이 도출된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칸트주의자에게서 물리친 저 기념비적인 초월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전략적인 직무이다. 작은 것들과 함께 하는 구조주의. 진중히 말해야한다. 그것은 칸트에 얽매인 구조주의가 아니다.

 

진중하게 분명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원론(이른바 ‘이원론’)이든 말든 다시금 후진하면 ‘데카르트주의적 인류학’의 양팔에 의지하기 위해 칸트주의 인류학을 방기한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를 (유연성이 있든 말든 인지적 생득설에 의거하는) 경험적 주체를 가진 ‘칸트주의’로 대체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투영적 접선을 받아들이면서 타(他)의 전(前)구조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때로 인류학의 미래인 것처럼 등장하는 이 전구조주의는 동일성과 실체, 본질과 초월성, 행위주체성과 의식을 다시금 산출하는 것을 상찬하는, 관계성에 대한 기묘한 반동이다. 신체와 기호의 ‘물질성’ 또한 구현화라는 수수께끼를 재구현화하거나 행위주체성의 기적을 상찬하거나 하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조작인 탓에 여기저기 동원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친족에 대해 프랑스 인류학이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로의 일직선으로 향하지도 않으면서 지난 20년간 구조주의적인—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관계론적인—교환론의 기초를 파헤쳐 붕괴시키는 데에 의기양양할 따름이다. 신체의 흐름에 가닿는 생득적인 이념을 확립하려는 역사. 그것은 실체에 대한 실체에 다름 아니다.

 

 

 

  1. 타르도(Jean Gabriel de Tarde), 1843-1904, 사회학에 심리학 개념을 도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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