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 1장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러다가 이 책을 다 번역할 것 같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글은 너무나도 멋지다.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데, 글이 언제부터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읽으나마나한 글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정신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에서 그뿐만 아니라 학문과 지식 그 자체를 건전한 방식으로 이끌어나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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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1.
나는 예전부터 내 분야의 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오마주로서 책을 쓰고 싶었다. 『안티 나르시스—마이너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라 이름 붙여질 책이 그것이다. 동시대의 인류학을 관통하는 개념적 긴장을 특징짓는 것이 그 책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곧 이 프로젝트에 모순이 있음을 알았다. 즉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안티 나르시스라는 주제의 탁월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세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허구 속 작품 혹은 보이지 않는 작품—그 최적의 해설자는 보르헤스이다—으로 남겨두자고 결정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책 그 자체보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독자의 뛰어난 해석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쓰기보다 마치 타인이 그것을 쓴 것처럼 여기고 그 책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책, 『식인의 형이상학』은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책에 대한 소개서이다. 이 책은 몇 번이나 구상해왔던 것인데,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지면에서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나의 전문분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민족지적’ 현재—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인류학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민족에게 개념적으로 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함의는 정반대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류학 이론의 내부에 있는 차이[相違]나 변동은 대개 (오로지 역사-비판적인 관점에서) 인류학자가 속한 사회형태, 이데올로기논쟁, 지적세계, 학문적인 맥락의 차이와 국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일까? 인류학 이론에 의해 도입된 가장 흥미로운 개념, 질문, 실체, 행위자(agent)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혹은 민족, 집합체)의 상상력에서 그 원천을 찾아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퍼스펙티브를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학의 동요하는 오리지널리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세계와 ‘객체’의 세계에서 산출된 개념과 실천 간의 결합—항상 다의적이지만 종종 다산적이기도 하다—에야말로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질문은 인식론적인, 즉 정치적인 질문이다. 식민주의는 인류학을 하나의 역사적인 아프리오리로서 구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인류학이 그 인과응보의 순환을 닫아놓고 있음을 우리가 다소간 찬성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이제야 그 학문분야를 재구축하는 프로세스를 급진화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류학은 그 새로운 사명,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이론-실천을 전면적으로 떠안을 용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학은 당연히 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인류학자가 연구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닌—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그 무엇에 대해서든)—인류학의 지적 프로젝트가 그것에서 산출한 사회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일부의 범위에서는 다음의 설을 받아들여 왔다. 즉 인류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이국취향이고 미개주의이며 서양의 야비한 흥미와 관심에 따라 ‘타자’가 항상 ‘표상되거나’ ‘발명된’ 도착적인 무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이든 사회학이든 이러한 자만에 가득한 온정주의를 두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는 발언권을 주지 않으면서 이른바 타자를 변모시키고 만다. 주체적 환상이라고도 하는 것을 이중화하고 식민주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라는 객체적 생산물의 변증법에 호소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욕에 모멸을 덧붙이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비서양적이고 전통적인 민족에 대해 ‘서양적인’ 언설을 밀어붙인다 해도 우리의 ‘타자의 표상’을 미화할 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이론적인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자민족중심주의의 최종단계이다. 다름[他]에 대해서도 같음[同]을 보기 위해—즉 타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은 ‘우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결국 우리는 목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여정을 단축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 즉 우리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류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돌려 세운다’(Maniglier 2005b: 773-774). 왜냐하면 모든 이문화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실험을 감행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 속의 변화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문화는 그 연구에 기초해서 정식화되는 사회와 문화의 이론에 영향을 주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공생산(共生産)하는 사고로부터 온갖 귀결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기묘한 구축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내파하지 않도록 그 흔한 ‘작은 서사’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적인 고발을 하는 필자가 쓴 그대로 인류학은 항상 대상을 잘못 구축하는데, 비판에 직면한 그때부터 광명을 비추고 대상을 정직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과 타자』(Fabian 1983)나 그와 비슷한 그 외의 많은 논의로 경도되는 곳에서 우리가 인지적인 절망이라는 정체에 새롭게 직면하는 것은 사물 자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탓이거나 그도 아니면 타자가 보편적인 이성을 체현해서 미신(迷信)을 퍼뜨리는 케케묵은 신비주의적인 마술 탓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선주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전의 저자들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선주민을 이국적인 대상으로 보고 보지 못하는 것에 의해—그들은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든 간에 인류학의 지나친 이국취향이 그 반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루스트는 시간과 타자에 대해 조금은 숙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직전의 그렇게 지나친 과거만큼 오래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인지-정치의 재귀적인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맹종하는 것 같은 관계성 속에 인류학을 끌어들이는 것, 즉 아첨하는 대항의식을 포함해서 이 두 과학이 설파하는 근대의 메타서사를 떠안는 것이다(England et Leach 2000). 이 과학들은 세계의 모든 집합체의 실존에 관한 실험을 분석자의 ‘사고의 집합체’라는 관점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는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 지지해야 하는 것은 인류학은 자유로운 환경에 계속해서 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학은 거리의 기법에 계속해서 거해야 하며, 서양적인 혼에 감추어진 아이러니로부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서양이 하나의 추상이라고 한다면, 그 혼도 결국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밀어붙여온, 이성을 외재화하는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충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 멈출 수가 없는, 동일성이라는 갑갑한 개인실 너머의 이야기이다. 진정한 내(內 endo)-인류학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 분야의 절망적인 논제인데,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외(外 exo)-인류학—현실적인 중요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필드의 과학’—에 의해 촉발되어온 이론적인 환기장치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목적은 중요한 인류학 이론이 모두 선주민의 지적실천의 번역이라는 주장을 예증하는 데에 있다. 이 이론은 학문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대상의 위치’에 있는 집합체의 지적인 실천과 강한 구조적 연속성을 가진다. 인류학 담론의 변용을 퍼포머티브하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학 담론은 본래 학문분야를 변용하는 조건을 내화한다. 즉 인류학에서 사실이란 (물론 이론적으로는)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에 대한 민족-인류학적 담론의 왜곡이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이런 길을 가는 필자는 아메리카 연구를 하는 민족학자이다)라는 아마존 사람들의 관념을 예로 들어—이른바 손에 쥐고—봄으로써 『안티 나르시스』는 우리가 연구하는 집합체의 고유한 사고스타일이 이 분야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스타일과 그 함의를 파헤쳐 검토함으로써 특히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낼 것이다. 개념의 새로운 인류학, 그것은 결국 인류학의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반(反)-실현하는 것인데, 그에 따라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의 존재론적인 자기규정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은 인간(그리고 비인간)의 사고를 인식의 장치들—분류, 서술, 판단, 표상…—로 환원한다기보다 훨씬 더 우선시된다. ‘비교존재론’(Holbraad 2003)으로서의 인류학—그것이 진정한 내재라는 관점이다. 사고에 대해 다른 사고를 한다는 이러한 작업의 기회와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념적인 상상력—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집합체의 삶에 고유한 창조성과 성찰성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에 대한 인류학 이론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2.
이 책의 제목이 의도하는 것은 인류학이 이 분야에서 『안티 나르시스』에 걸맞는 위대한 책의 최초의 장들을 쓰기 시작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의 창설신화에서 중심인물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인류학의 성스러운 수호자 혹은 악마적인 후견인의 후보자를 나르키소스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인 혹은 악마는 (특히 ‘철학적’이라고 말해지는 버전에서는) 인류학적 담론의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그들(우리이기도 하다), 비-서양, 비-근대, 비-인간—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징과 기준을 결정한다는 망상에 항상 지나치게 사로잡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서양적이며 비-근대적인 것으로서 타자를 구축하는 속에서 타자를 ‘가지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합리성, 개인주의와 기독교는 타자를 가지지 않을까? (아마도 잭 구디에 대해서는 덜 조심해도 될 것 같다. 즉 알파벳의 에크리튀르와 혼자(婚資: 신부대와 지참금)에는 타자성이 없을까? 나아가 그러한 타자를 비-인간(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타자로서의 비-인간)으로 자아내는 속에서 당연히 크게 결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사의 혼, 랑가주, 노동, 열림, 금지, 니오터니(neoteny), 메타 지향성일까? 1
이것들의 결여는 모두 상통한다. 왜냐하면 실제는 어느 것도 같기 때문이며, 문제는 바로 답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분할의 형식, 혹은 그와 마찬가지의 배제의 형식이 인종을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서양의 생물학적인 유사관계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형식이 온갖 타종(他種)과 타민족을 일반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타자성으로 혼합해버린다.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타자와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를 자문하는 것은—타의 종, 타의 문화,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이다—이미 하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인간(에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인간’을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거나 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거나 인간존재는 자유로우며 불확정하다는 등은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명백히 역사적 이유를 갖지 않으며 은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응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고유성은 고유성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그에 응답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타자의 모든 고유성에 대한 무한의 권리를 부여했으리라. ‘우리’의 지적전통에서 천년을 이어져온 것, 바로 그것이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 없음에 의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한다. 결여, 유한성, 부재는 남은 생명을 위해 종(種)이 품도록 운명지어진 구별이다(마치 우리에게 그것을 믿게 하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무거운 짐, 그것은 보편적인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은 주지하다시피(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세계빈곤적’이다. 종달새는 말할 것도 없다…. 비서양의 인간에 대해서도 그것들에게는 세계 속에서 얼마 안되는 몫만이 할당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으로서 우리만이 완성된 인간,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장대한 미완성이며 세계의 억만장자이며, 세계의 저축가이며, ‘세계를 본뜨는 자들’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바로 모든 식민주의의 기원이다.
그에 따라 문제는 변화하며 그에 답하는 방법도 변화한다. 즉 마이너인류학은 거대한 분할에 저항하고 작은 다양체를 증식시킨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한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이다. 완성되고 마무리된 휴머니즘에 저항하는, ‘제한 없는 휴머니즘’(Manigler 2000)이며, 그것은 인간성을 예외적인 영역으로 두지 않는다. 다양체를 증식시켜야 함을 강조해 두겠다. 왜냐하면 여기서 데리다(2006)를 상기하는 것이 좋은데, 문제는 기호와 세계, 인격과 사물,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을 통합-분할하는 경계를 파기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안이함이나 일원론의 가벼움이라는 것은 융합주의의 곡선으로 구부러지며, 그것들을 ‘환원하지 않는’(라투르) 것, 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윤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접어서 조밀화하고 무지개빛으로 빛나게 하며 구부려 꺾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일반화한 연속색채주의…”(Deleuze et Guatari 1980: 123). 연속색채주의, 이 구조주의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주의의 흐름과 얽혀있는 프로젝트가 작성된다.
3.
『안티 나르시스』 초고는 인류학의 학문분야를 근저에서부터 재생하는 책무를 짊어진 몇몇 인류학자들에 의해 정성스레 개시되었다. 잘 알려진 저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작업은 미숙한 평가를 받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다—그것은 그들의 출신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하는 것은 우선 미국인 로이 와그너이다. 그의 공적은 ‘반전(reverse) 인류학’에 대한 풍부한 착상과 함께 ‘발명’과 ‘관습’에 관한 훌륭한 기호론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 개념의 비전을 그려낸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를린 스트래선은 페미니즘과 인류학을 교착시킨 탈구축-잠세화에 공헌했다. 그것은 바로 ‘선주민의 감성론’과 ‘선주민의 분석’이라는 발상-력을 제시한 것이며, 그것이 서양적 이성에 의한 멜라네시아적인 반(反)-비판이라는 이른바 두 개의 면을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포스트-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적 기술의 방식을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고뉴(Bourgogne) 출신의 브루노 라투르는 집합체와 ANT(행위자네트워크론)의 초존재론적 개념을 제출하고 ‘지금(근대)인 적이 없다’는 역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었으며 과학실험에 대한 인류학에 다시금 매력을 불어넣었다. 부작위 혹은 작위에 의한 오류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최근에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그 외의 많은 연구자들을 덧붙여야만 한다. 2
그러나 인용되든 말든 그들 앞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 분야의 과거에 눈을 돌려 과거를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로 시선을 향하고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바에 따라 루소를 창시자로 봐야 한다면,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구조주의에 의해 인간과학을 재구축하려한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인류학으로 이르는 도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잠재적으로 ‘무근거화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이 도정은 ‘모세가 결코 그 훌륭함을 알지 못한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며, 아마도 그가 실제로는 나아가지 않은 도정이다. 인류학적인 지(知)는 선주민의 실천의 하나의 변용으로 간주되고 ‘인류학은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탐구이다’(레비-스트로스 1958/1954: 397). 그리고 그 10년 후에는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 정의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올 수밖에 없는 철학’(Hamberger 2004: 345)의 안내자를 설정했다. 그것은 무제한성과 잠재성이라는 표지에 의해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친족연구에 관한 구조주의자의 유산을 총결산한 잡지 『인간』의 어느 권호의 후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강렬하고도 결정적인 다음의 코멘트를 남겨두었다.
사람과 신, 친구와 적, 내부자와 외부자라는 대립의 중립으로서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착상한 유연관계(類緣關係)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브라질의 동료들이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만한 사태를 끌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이 개념의 경향으로부터 어떤 결말을 가진 인상이 분명해졌다. 기쁘든 슬프든 어느 쪽이든 철학은 다시금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이국의 민족에 기대어 산발적으로 도움을 얻은 우리의 철학이 아니라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즉 그들의 철학이다. (레비-스트로스 2000: 720)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브라질의 동료들에 의해 정확하게 기술된 논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실제로 우리는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유연관계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관습을 민족지의 한 축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비-관계성의 양상에 대해 환기한 두 개의 철학—‘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구동시킨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사이에서 보이는 관계성이라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한 개략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기쁘든 슬프든 여하간 문제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혹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의 모호한 경계의 양측에 구성된 초영역적인 문제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 간에 다시금 확실한 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의 혁명은 이 수십년 간 생태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세계를 완전히 고난의 장소로 변형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 직전에 일어난 사고의 열광과 풍요의 그 짧은 시기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길이 있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에는 한편으로는 아마존의 사고에 기대는 것—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초’(Taylor 2004: 97)를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이며, 다른 한편으로 질 들뢰즈에 의한 ‘이단의’ 구조주의(Lapoujade 2006)에 기대는 것이다. 목적도 둘이다.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개념창조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류학이 문제이다. 조금 전 과거를 되돌아본 탐구의 의도는 회고적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있다. 어떤 가능성을 불러내는 것, 어떤 구름의 열린 틈을 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학문분야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지적인 프로젝트로서, 정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는 다른 결말—다소 과장되게 말하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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