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의 마지막 장인 <13장 구조주의의 생성>의 번역본을 올린다. 한 번 더 손을 봐야하는데, 일단 올려두고 차차 고치겠다. 또 『식인의 형이상학』 독서평도 조만간 올리겠다.
이제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의 재평가의 이론적 맥락을 어렴풋이 알겠다. 몇가지 세부적인 논점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아니 그보다 무엇보다 그것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는('안티 나르시스'로 언명되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도 독서평에 언급하겠다. (당장 써야할 다른 글들이 있어서.. 여하간 흥미진진한 지적탐구였다.)
이 글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다른 번역글들을 읽은 후에 읽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의 반 정도만 번역한 것이기에 이 글에서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특히 '강도(强度)'라는 개념이 걸리는데 '실천'과 관련된 개념이기도 해서 그 개념을 다룬 <11장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을 조만간 번역해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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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생성
1.
이 책에서는 구조주의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의 하나의 구조변용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그것[구조주의]이 서양적인 로고스적 포이에시스의 특징적인 문제와 개념(같음과 다름, 연속과 이산,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자연과 문화 ……)에 침투되면서도 억제된 다의적인 운동을 갖추고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고 늘 왜곡과 수정을 포함하는 한에서는—변화된 결과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제기한 다음의 주장을 다시금 반복해둔다. 인류학이란 번역을 그 내적인 조건으로 삼으며, 스스로가 논한 담론에 의해 규정되는 담론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소쉬르의 언어학 혹은 톰프슨(D’Arcy Wentworth Thompson 1860~1948, 영국의 생물학자)의 형태학과 접촉함으로써 형성되었음을 고려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메리카 선주민의 바로 가까이에 있었기에—필드에서도 도서관에서도—획득된, 생생하고 창조적인 경험의 산물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테일러(Anne-Christine Taylor)의 말을 빌려 말하면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반’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측면이며 그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제기한 문제와 개념의 유효성이 ‘문화현상’—얼마만큼 광범위하든—에 한정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가 그 주사위를 흔들어 던지는[사고 그 자체가 움직이는] 순간이다. 즉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위대한 개념적 매개에 힘입어 그 자신의 ‘맥락’에서 불거진 것이며, 페르시아사람이든 브라질사람이든 무언가를 사고하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타자를 사고하게 만들었다. 타자를 사고하게 만드는 것은 무언가를 넘어서 그 건너편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유산에 관한 재평가가 진행되는 가운데 오늘날 이목을 끄는 질문은 구조주의가 하나인가 다양한가,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이용한 두 개의 대극적인 방법을 연속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단절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레비-스트로스 본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의 발상과 방법이 어떤 근본적인 통일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는 해석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구조주의가 요청하는 이론적인 인격성과 그 자신이 분열하고 있었음—그러나 대립하지는 않았다—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이 이자(二者)는 영원히 등가에 놓일 수 없는 쌍생아이며, 문화적 영웅과 배신자, 중재하는 인물(신중하게 질서를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과 분단시키는 반인격(연속색채주의와 무질서의 달인이기도 하다)이다. 여기서 전혀 다른 두 개의 구조주의가 찾아지는데,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보여준 것처럼 그 둘은 항상 둘 이상의 어떤 것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그 초기에 이미 나중에 스스로가 뒤집을 내용도 함께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조인류학이 ‘어떤 방법…유체법(流體法)이 아닌 변용’(Lévi-strauss 1973/1960: 28)을 이용한다고 기술하고 있음을 살펴보자. 변용이라는 중요한 개념은 그 자체가 점진적으로 변환해간다는 마땅한 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범하게 말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전체를 통해 중요한 개념임이 분명하다. 그의 작업은 우선 구조의 개념을 넘어서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아날로지적인 방식으로 대수적(代數的)인 치환보다는 역학적인 유체법에 접근해간다. 이러한 개념의 변천은 그 자체가 연속색채적이며 적잖이 전위적이며 약간의 퇴행을 보여준다 해도 그 가고자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신화학』의 1권과 2권 사이에서의 일이다. 『꿀에서 재로』(신화학 2권)에서 다음의 흥미로운 각주는 아마도 이러한 변화의 가장 명시적인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에드먼드] 리치가 비난한 것은 …… [내가] 이항도식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변용이라는 개념을 톰프슨(D’Arcy Wentworth Thompson)에서 차용하여 쭉 이용해왔는데, 그 개념 자체가 완전히 아날로지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Lévi-strauss 1966: 4, n.1)
레비-스트로스는 이 생각을 20년 후에 다시 강조한다. 그에게 변용의 개념은 논리학이나 언어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박물학자인 톰프슨 혹은 그 배후에 있는 괴테와 뒤러(Albrecht Dürer)에서 유래한다(Lévi-strauss et Éribon 1988: 158-9). 그 속에서 변용이란 논리학과 대수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 감성론적 혹은 역학적인 조작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구조주의의 고전적인 국면에서 나타나는 중심적인 대립적 개념패러다임—{토테미즘, 신화, 비연속성} vs {공의, 의례, 연속성}—은 레비-스트로스가 조금 더 후년에 그려내는 것처럼—예를 들어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 보이는 유명한 신화와 의례의 대립에서 보이는 것처럼—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훨씬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명확한 분수령은 친족관계를 묘사하기에 적당한 유한의 대수(代數)와 신화의 강도의 형식 간에 존재한다.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문제는 대수와 치환군의 이론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화의 문제는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감성적 형식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한편, 이 감성적 형식은 연속적인 것과 비연속적인 것에 동시에 속한다. (Lévi-strauss et Éribon 1988: 192)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변용에 대한 구조주의의 관념에는 구조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이중의 변용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것은 단 하나의 복합적인 변용이며 그 속의 이중의 뒤틀림은 동시에 ‘역사적’이기도 하고 ‘구조적’이기도 한 조작에 의해 변용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새로운 수학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Petitot Thom). 그러나 나는 이 변화가 무엇보다도 그의 인류학의 특권적인 대상의 타입이 변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용은 초기에는 주로 대수-조합적인 도식에 기초했으나 이후 그것은 모습을 바꾸어 다른 위상으로 이행해간다. 그리고 뒤이어 처음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토폴로지적이고 역학적인 특징을 갖춘 도식이 만들어진다. 통사론적인 교체와 의미론적인 창출, 논리적인 치환과 형태발생학적인 압축 간의 경계선은 더욱 비틀리고 이론(異論)이 많아지며 복잡한 것, 즉 프랙탈적인 것이 된다. 형식과 힘(변환과 흐름)의 대립은 그 윤곽을 잃고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되어 간다.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방법론이 다룬 다양한 문제에 관한 고찰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변화를 특히 강조한다거나 그 변화에 구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레비-스트로스는 “내가 『친족의 기본구조』 이후 구상한 계획은 방법론적으로 연속한다”(1964: 17)라고 늘 강조했다. 연속성—구조주의의 어휘 속에 양의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연속성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옳다. 그것은 자명하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사고를 해석자가 수정하려드는 것은 다소간 이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프랑스의 대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 발상의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건전한 구조주의자인 우리는 그의 작업을 독해하는 열쇠는 비연속성에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명확한 단절을 주장하기보다는 구조적인 담론의 ‘상태’가 복잡한 공존과 강도적인 중첩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기획의 비연속성은 두 개의 고전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계기성(繼起性)의 축이 있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다양한 국면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는 공존의 축이다. 이것은 작품이 두 개의 담론을 갖고 있다거나 두 개의 운동을 기술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이 두 비연속성은 작품의 계기가 이 두 개의 운동—작품 전체 속에서 대위법에 의해 대립하는 운동—각각이 부여하는 중요성에 의해 구별되는 한에서 공존한다.
2.
통시성에서 시작해보자. 이 관점에서 보면, 구조주의는 토테미즘과 같다. 즉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로 토테미즘처럼, 그 존재양식이 실체적이지 않고 차이적이다. 이 경우에서 『친족의 기본구조』(1967/1949)로 대표되는 전(前)-구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 위상과 『신화학』(1964-1971) 혹은 그에 뒤이은 『가면의 길』(1979), 『질투심 많은 여 도공』(1985년), 『살쾡이 이야기』(1991년)이라는 세 작품과 연관된 포스트구조조의적인 두 번째 위상 사이에 차이선이 그어진다는 것은 몇몇 해석자에 의해 종종 지적되어왔다.
나는 두 번째 위상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 위상 직전에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작업이 행해진 짧은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테미즘의 문제에 관한 두 연구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며, 저자 자신이 그것을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 간의 휴지기(비연속성)이라고 적어놓았다. 실제로 1962년의 바로 이 작품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달리 말해 인간적 기호과정의 구체적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를 질서지우는 광대하고 체계적인 기획을 행했다. 그리고 토테미즘을 원시적인 비이성의 상징으로까지 고양하여 모든 이성적인 활동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의 작업의 이 순간이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악의적인 평가(1980: 289)가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즉 “구조주의는 위대한 혁명이며 거기서 세계전체는 더 이성적인 것이 되었다”.
들뢰즈가 [칸트적인] 비판철학에 겨눈 것과 동일한 이론(異論)을 『야생의 사고』에 겨누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들뢰즈는 칸트적인 초월론적 영역이란 표상의 경험적 형식의 ‘전사(轉寫)’이며, 조건 그 자체에 조건지운 것을 회고적으로 투사함으로써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 야생의 사고는 길들여진 사고의 가장 이성화된 형식, 즉 과학(‘과학적 사고에는 두 개의 다른 양태가 있다’(Lévi-strauss 1962b: 24))으로 전사(轉寫)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반대로 길들여진 사고와는 전혀 유사하지 않은, 본래적인 야생의 사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어떤 수확고를 확보하기’ 위해 길들이는 것을 상기해보자(앞의 책 28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좀 더 화해적인 정신으로 생각해서 다음과 같이 어울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구조주의에서 세계가 더 이성적인 것이 될 때에는 반드시 이성은 다른 무언가…아마도 더 세계내적이고 좀 더 통속적으로 말하면 더 세속적인 무언가가 된다. 그렇지만 그 이성은 더 예술적이면서 공리주의적이지도 않고 채산주의적이지도 않다.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가 전(前)구조주의적인 책이라는 것은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후기 작업과의 대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것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하간 데이비드 슈나이더와 루이 뒤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이 1949년의 이 저작을, 인문과학을 구성하는 이항을 축으로 형성된 것으로 분류한 것은 정당하다. 즉 한편으로는 개인과 사회—사회적인 동화와 통합이라는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문화—본능과 제도라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홉스와 헤르더, 혹은 더 최근의 이름을 들자면, 뒤르켐과 보아스의 이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최초의 대작에서 논한 것은 무엇보다 ‘인류학적’인 문제, 즉 인간화의 문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문화적인 통합의 출현을 다룬다. 그 속에서 ‘집단’, 즉 사회가 초월론적인 주체와 분석되는 모든 현상의 최종원인으로 유지된다. 특히 파트리스 마니그리에((Patrice Maniglier 2005a)가 강조하듯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되면 돌연 모든 것이 우연 속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특정한 타입의 배우자를 금지하거나 규정하는 다양한 규제, 그것들 모두를 집약하는 인세스트(근친상간) 금기는 사회성이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가정한 순간으로부터 이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Lévi-strauss 1967/1949: 561)
그리고 뒤이어 눈이 번쩍 뜨이는 결론이 전개된다. 사회성은 상징적인 사고와 공통의 외연을 갖지만 그것[상징적인 사고]에 앞서지도 않고 그것의 존재이유도 아니라는 것, 친족의 사회학이란 기호학(모든 교환은 기호의 교환이며, 즉 퍼스펙티브의 교환이다)의 하위구분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질서는 모드 속에서 반질서의 영속적인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것들을 동시에 논한다. 이 마지막 주장의 화음은 여전히 울려 퍼지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기술의 제2의 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친족의 사회학은 ‘반(反)-사회학’, 즉 세계적인 경제학에 장(場)을 양도하기 시작한다—바꿔 말하면 [세계적인 경제학은] 『신화학』에서 그려지는 아메리카선주민의 내재평면에 대신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학』에서 바로 음의 질서의 역전이 완료하기—혹은 거의 완료하기— 때문이다. 더 앞으로 나아갈 필연성[사회의 존재필연성]은 전혀 없다. 즉 모세와 대지가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사회라는 개념은 간(間)사회적인 서사의 변천에 시스테마틱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무용한 것이 된다. 자연/문화라는 대립은 선주민의 사고에 내재하는 신화의 주제가 되기 위한 (객체적이든 주체적이든) 보편적인 인류학의 조건이 아니다. 이 테마는, 그것을 사고하는 것은 양의적이지만, 일련의 신화이론의 전개 속에서 점차 증대한다. 그리고 ‘구조’라 불린 대수적인 형식의 대상은 점차 유동적인 윤곽을 그리게 되고, 이미 서술한 것과 같이 변용의 아날로지적인 사고로 변화해간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서사를 구성하는 관계성은 사회민족지적인 현실성을 갖춘 표상적인 경향, 공기적(共起的)인 비전, 차이의 분배로 성립되는 조합의 전체라기보다도 오히려 ‘접속과 이질성’, ‘다종다양성’, ‘비시니피앙의 절단’, ‘지도제작법’이라는 원리를 더욱 모범적으로 제시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들을 ‘리좀’이라는 개념의 이름 하에서 구조의 모델과 대치시켰다—‘리좀’의 개념은 반-구조의 고유명으로 제기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슬로건이 되었다.
『신화학』이 제시한 방향성이란 실제로 일반화된 이질적인 횡단성이다. 그래서 한 민족의 신화는 그 다음의 두 번째 민족의 의례를 변용시키고, 나아가 세 번째 민족의 기술을 변용시킨다. 그리하여 한 민족의 사회조직은 다른 민족의 신체장식(정치적이면서 우주론(코스몰로지)과 화장(化粧 코스메톨로지) 사이를 왕복하는 방식)이다. 그 속에서 신화의 대지가 기하학적으로 둥글다는 사실은 지질학적인 다공성(多孔性)에 의해 항상 숏컷된다. 그 덕분에 변환은 해저의 마그마가 뿜어대는 것처럼 여기저기 분출하며 아메리카 대륙의 양단을 넘나들게 된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구조주의란 ‘사회 없는 사회학’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클라스트르는 구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신화학』과 함께 우리는 구조 없는 구조주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클라스트르와는 반대로] 칭찬하고 싶다. 『날 것과 익힌 것』과 『살쾡이 이야기』 사이를 순회해보면, 연속하는 계열(série)로서 형성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화는 수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리좀을 작성한다. 즉 그것은 중심도 기원도 없는 거대한 캔퍼스이며, ‘하이퍼스페이스’(Lévi-strauss 1967: 84) 위에 배치된 담론의 태고로 거슬러가는 집합적으로 거대한 배열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기호의 흐름, 물질의 흐름, 사회적인 것의 흐름’(들뢰즈&가타리 1980: 33-34)에 의해 횡단된다. 리좀 모양(狀)의 네트워크에서는 다양한 구조화의 역선(力線)이 경주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제한 없는 다양성과 근원적인 역사적 우연성 탓에 하나의 법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수목 모양(狀)의 구조에 의해 표상될 수도 없다. 무수한 구조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정신 속에 존재하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구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즉 신화의 기본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는 결국 열려진 다양체, n-1의 다양체이다. 혹은 기준신화 M1에 경의를 표하고, 오히려 <m-1>로 말해야 할까? 이 보로로족의 신화는 『날 것과 익힌 것』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데, 후에 (M7-12)로 등장하는 제족(Gê族) 신화의 반전적(反轉的)ㆍ소실적(消失的)인 비전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준신화란 임의의 신화이며,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기준 없는’ 신화, 즉 m-1의 신화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화는 다른 신화의 하나의 비전이며 다른 신화는 모두 제3, 제4의 신화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n-1의 신화는 기원을 표현하지 않으며, 운명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기준을 가지지 않는다. 기원에 대한 담론인 신화는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회피된다. 기준 ‘신화’는 신화의 의미에, 즉 의미의 기능으로서의 신화에 자리를 양도한다. 즉 그것들은 하나의 코드를 다른 코드로 전환하며, 어떤 문제를 유사한 문제에 투영시키고 (라투르가 말했던 것처럼) ‘참조=기존의 순환’이 되어 애너그램(anagram, 단어의 철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로 만들기)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반(反)-실현시킨다.
이 책은 번역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개념을 처음으로 다룰 때에 그 총체적인 번역가능성을 중시했다. 즉 “신화를 이러한 담론의 모드로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번역자란 배신자라는 정식[이탈리아 속담]은 실상 제로에 가깝다”(Lévi-strauss 1958/1955: 232). 『벌거벗은 인간』에서 이 정의는 확장되어 의미론적인 평면에서 실천론적인 평면으로 유영한다. 우리는 다만 번역 가능한 것 이상을 [신화로부터] 배우지만, 신화는 무엇보다도 번역이다.
모든 신화는 본질적으로 번역이다. […] 신화는 하나의 언어 또는 하나의 문화나 하위문화 속에서가 아니라, 자언어와 타언어, 자문화와 타문화와의 결절점에 위치지어지는 존재이다. 고로 신화는 결코 자신의 언어에 속하지 않고 다른 언어에 대한 하나의 퍼스펙티브이다…… (Lévi-strauss 1971: 575-577)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에서 바흐친이 보이는 것이리라. 『천 개의 고원』의 두 저자[들뢰즈&가타리]는 이 논의를 매우 특징적인 방식으로 일반화시킨다. “만약 언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야말로 존재한다. 언어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즉 번역이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 1980: 536).
『벌거벗은 인간』에서 보여준 이 신화의 퍼스펙티브적인 정의는 인류학 그 자체에, 즉 레비-스트로스가 이미 1954년에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으로서 제시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는 또한 『신화학』이 ‘신화학의 신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두 정의는 수렴된다. 구조주의적인 신화의 담론은 온갖 인류학의 모든 조건를 설정한다. 온갖 인류학은 인류학의 변용이며, 그 자체가 대상이다. 그것[온갖 인류학]은 모두 항상 ‘어떤 문화를 다른 문화의 분절점’에 위치짓는다.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신화로,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이동하려는 것은 신화에서 신화의 과학으로, 문화에서 문화의 과학으로 이동하려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나는 여기서 마니그리에(Maniglier 2000)의 근저에 있는 주장을 일반화한다). 횡단성과 대칭성이 문제이다. 이와 같이 『신화학』의 구상과 브루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탠저스(Isabelle Stengers)의 일반화된 대칭성 원리와의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련을 찾아낼 수 있다.
만약 신화가 번역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신화가 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번역은 표상이 아니라 변용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우선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변용하는 것이다. 즉 표상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Lévi-strauss 1979: 144). 『신화학』이 메타대상에, 바로 홀로그램적인 특징을 부여한다. 그것은 정말로 신화적인 리좀이며, 그것과 함께 리좀적인 것이 형성되며 각각의 신화 속에서 범아메리카적인 신화시스템의 축도(縮圖)(‘단 하나의’ 신화)를 포함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것은 확실히 구조가 변용의 시스템으로서 더욱더 엄밀하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표상을 자기의 일부로 삼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다”(Maniglier 2000: 238). 이렇게 우리는 구조를 ‘변용주의’로서 혹은 변용주의자적으로 개재념화할 수 있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대표인 듯한] 프롭(prop)적인 형식주의와도 촘스키적인 변형주의와도 다르다.
따라서 한 구조는 항상 둘 사이에 있다. 즉 두 개의 변이 사이, 동일한 신화의 두 개의 시퀀스 사이, 혹은 동일한 텍스트 내부에 있는 두 개의 수준 사이에 있다…. 따라서 통일성이라는 것은 다양한 변이 속에서 자기동일적으로 반복하는 형식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하나의 것이 다른 것으로의 당연한 변용을 보여줄 수 있는 모형(母型)=매트릭스를 말한다. … 그리고 구조는 엄밀하게 그 현실화와 외연을 같게 만든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집요하게 무시되곤 하는, 구조주의와 형식주의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Maniglier 2000: 234-235)
구조 없는 구조주의인가? 적어도 구조와는 다른 관념에 의해 작동하는 구조주의. 그것은 구조라기보다도 구조에 대한 대립개념인 『천 개의 고원』의 리좀에 더 가까운 개념일 것이다. 이렇게 구조와는 다른 개념을 레비-스트로스의 저작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혹은 아마도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에는 구조라는 개념에 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사용법이 있다고 말해야 하겠다. 그 하나는 통일적인 초월론적 원리이며, 불변적이고 형식적인 법칙이다. 또 하나는 발산의 조작자, 연속적인 변이의 변조기(변이의 변이)이다. 그것들은 닫힌 문법적인 조합으로서의 구조와 열린 미분적 다양성으로서의 구조이다.
『신화학』 시리즈의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모티브를 빌려 그 속의 ‘열린 것과 닫힌 것과의 분석적인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여기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서 자연과 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문제의 하나의 비전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가 신화에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열린 것과 닫힌 것과의 변증법은 인류학의 메타신화학의 평면상에서도 기능하지 않을까라고 역으로 반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신화학』이 ‘신화학의 신화’라면 그것은 그 자체가 그 구조변용인 것처럼 신화 속에서 전개하는 테마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 변용은 내용에서 형식으로, 또 그 반대로 이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분석한 신화가 ‘닫힌 그룹’을 형성한다는 것에 종종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다. 닫혀 있다는 이념은 종종 구조분석과 불가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항상 ‘그룹은 닫혀있다’는 것, 즉 신화의 연쇄의 최후의 변용을 다루어가면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룹’은 다양한 축을 둘러싸고 닫혀 있다. 이러한 강조는 신화의 언어가 반드시 장황하다는 테마, 즉 신화의 ‘문법’을 설정한다는 조건과 결부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그러한 기획을 기꺼이 상상했던 것 같다. 그가 ‘열린 작품’이라는 관념에 매우 반발했음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닫힌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는 결국 닫힌 구조의 수는 이론적으로 무한하다는, 즉 열린 상태가 펼쳐진다는 일견 역설적인 인상을 준다. 구조는 닫혀있다. 그러나 구조의 수 그리고 구조를 가두는 길은 열려 있다. 즉 구조적인 전체화의 마지막 레벨이라는 의미에서, 또 구조에서 이동하는 의미론적 축의 아포리아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 구조의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신화 ‘그룹’은 결국 다른 그룹의 수많은 교차점에서 다시금 발견된다. 그리고 각각의 그룹에서 각각의 ‘신화’는 또한 상호연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아가 각각의 신화에서는…. 그룹은 스스로 닫힌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분석은 닫힌 채로 있을 수 없다.
어떤 신화도 닫혀 있음을 금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이 분석의 한가운데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석 속에 흔적을 남긴 영역의 외부로 어쩔 수 없이 내디뎌야 한다. (Lévi-strauss 1971: 538)
나아가 특히 닫힌 명법에 부여된 중요성은 저작의 다양한 부분에서 분명하게 상대화되어 있다. 그 구절들은 반대의 의미에서 분석의 무제한, 변용의 나선모양의 진행, 동적인 불균형, 비대칭성, 구조의 측면적인 상호접수, 이야기가 전개되는 수준의 복수성, 보족적인 영역들, 신화를 질서지우기 위해 필요한 축의 복수성과 다양성, 이것들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불균형에 다름 아니다.
불균형은 항상 주어진다. (Lévi-strauss 1966: 222)
각각의 구조는 다른 구조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그 불균형을 은폐한다. 그런데 그것[구조]은 인접한 다른 구조로부터 차용한 항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벌충할 수 없다. (Lévi-strauss 1967: 294)
불균형을 넘어서기 위해 구조가 변화 혹은 강화될 때조차 다른 평면상에 나타날 때에는 새로운 불균형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구조는 피하고 싶은 비대칭성에 신화를 찾아내는 능력을 부담한다. 신화를 찾아내는 것은 신화를 구성하는 불균형을 만회하면서도 숨기는 노력 그 자체이다. (같은 책 406)
남아메리카에서와 같이 동적인 불균형은 바로 그 때문에 일군의 변용이 한창 진행될 때 나타난다. (1971: 89)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신화의 변용가능성과 번역가능성에 부응하는 신화학의 형식적인 특성인 것만은 아니다.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그 내용의 근본적인 요소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신화는 자신 속에서 사고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러한 불균형을 횡단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은 불균형 그 자체이며, ‘세계의 존재’(1971: 539)의 불일치성 그 자체이다. 신화는 그 자신의 신화학, 혹은 ‘내재적’인 이론(1964: 20)을 포함한다. 그 이론은 다음과 같다.
…원시적인 비대칭성은 그것을 파악하는 시점(視點)에 의해 높음과 낮음,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가까움과 멈, 왼쪽과 오른쪽, 수컷과 암컷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재적인 것에 고유한 이 불균형에 의해 신화적인 사변=투기는 개시된다. 왜냐하면 이도저도 인간의 사고대상의 모든 존재는 그러한 사고를 앞에 두고 이 불균형으로 조건 지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책 1971: 539)
3.
영속적인 불균형이 신화를 횡단한다. 그리고 모든 구조주의에 반향하는 신화학의 신화가 나타난다. 우리는 닫힌 문법의 조합으로서의 구조의 관념과 열린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구조의 관념 간의 이 이원성이 그의 만년의 저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현한다는 것을 이미 검토했다. 실제로 이 이원성은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저작을 횡단한다. 그것은 변화해가는 개념—그 처음은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중요하고 그 다음은 『신화학』에서 두드러진다—의 각각을 상대적으로 지지한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 보자. 혹은 이 통시적인 행적을, 이미 논한 공시적인 비연속성과 결부시켜보자. 아주 초기부터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위의 텍스트 혹은 반(反)-텍스트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최후의 전(前)구조주의자가 아니라면—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최초의 포스트구조주의자도 아니다). (고전적인 토테미즘의 도식과 같이) 대칭적인 대립, 동등성, 이원성, 비연속과 가역성을 구조주의가 특히 편애한다는 상정은 무엇보다 오늘날에도 놀라우리만치 수준 높은 1956년의 논문에서 행한 쌍분조직의 개념에 대한 비판에 의해 전복된다. 그 속에서 이항대립, 대칭성, 비연속의 이전 상태로서 삼항, 비대칭성, 그리고 연속성이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신화의 기본정식’에 의해서도—그것은 고전적이기도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전복된다. 대칭성과 가역성을 제외하면 탐구될만한 것은 모두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의 두 국면(『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와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신화에서 생겨나는 변용을 설명하는 외연적 이론의 어휘의 한정에 유보적이었다는 점에도 착목해야 한다(Lévi-strauss 1971: 567-568; 1991: 249).
특히 『신화학』의 마지막 두 권이 안정적이지 않은 이원론을 상기시키는 두 형상의 전개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질투심 많은 여 도공』(1985년)에서 신화의 기본정식을 충분히 예시하고 있지만,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사회학적인 이원성의 동적 불균형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그 속의 ‘영속적인 불균형’이라는 표현은 투피족의 숙부와 조카의 결혼을 기술하기 위해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최초의 직감과 동일한 것(굳이 말하자면 같은 잠재적 구조)으로 행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A:B::C:D라는 타입의 토템적인 아날로지를 사전에 붕괴해버리는 기본정식과, 이항대립의 정적인 균형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동적인 이원론은 두 개의 특권적인 표현(혹은 현실화)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 한편은 다른 편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어슴푸레하고 푸르스름하거나 보이지 않는 달’이며, 또 다른 한편에서 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더 유동적이며 파장상태로 진동하고 다층구조적이며 구조주의에 이른바 하위양자(量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하간 인류학자는 항상 유대의 이론—관계성이라고 해도 좋다—을 실천한다.
우선 기본정식이 있다. 그것은 수학적인 도착의 일그러진 기념비(monument)이다. 기본정식을 사용하면 우리는 토템적인 은유와 공의적인 환유와의 단순한 대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단숨에 은유의 관계와 환유의 관계가 등가라는 입장에 놓인다. 거기에는 은유에서 환유로, 혹은 그 반대로 항상 뒤틀림이 생긴다(Lévi-strauss 1966: 211). ‘이중의 뒤틀림’, ‘정원 외의 수의 뒤틀림’은 실제로는 순연한 (오히려 하이브리디티하고 복잡한) 구조변용과 완전히 똑같다. “불균형한 관계…… [그것은] 신화의 변천에 고유한 특성이다”(Lévi-strauss 1984: 13). 자의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 어휘와 기능, 외관과 내용, 연속성과 비연속성, 시스템과 그 외부, 이것들의 비대칭적인 변환—여기에서는 레비-스트로스적인 신화분석의 모든 것을 관통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주제가 엿보인다(2001). 앞서의 몇몇 곳에서(10장) 논한 들뢰즈의 생성의 개념에 대해, 만약 그것이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개념의 장치에 반해서(즉 횡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신화의 기본정식’이 근사치의 번역이라는 것—그것은 외국어의 기묘한 악센트와 왜곡을 행하면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인 담론의 거의 모든 차원으로 침투한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혹은 오히려 들뢰즈가 생성이라고 부른 이 순간적인 운동일반을 앞서 예감시킨 것임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생성이란 이중의 뒤틀림이다.
이어서 『살쾡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동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는 이원론’ 혹은 ‘영속적인 불균형[에 있는 이원론]’을 통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가 정말로 사변=투기적인 계기에 접근해간다는 개념적인 운동을 살펴보자. 레비-스트로스는 실제로 형식으로서의 불균형이 어떻게 해서 신화적 담론의 내용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조건이었던 불균형이 어떻게 해서 주제로서의 불균형이 되는지, 또 무의식의 도식이 어떻게 해서 ‘깊은 착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 신화의 깊은 착상은 무엇일까? […] 이것들의 신화는 이항적인 계열의 형식을 취해서 세계의 전진적인 조직화를 표상한다. 그러나 각각의 단계를 만들어내는 부분 사이[의 대립]가 없다면, 참된 등가성이 출현하지 않는 […] 시스템의 우수한 기능은 동적인 불균형에 의거하며, 그것이 없다면 시스템은 항상 움직임 없는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 신화가 침묵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연현상과 사회생활이 배치되는 두 극에 관해서가 아니다. 즉 하늘과 대지, 불과 물, 위와 아래, 가까움과 멈, 선주민과 비선주민, 동향인과 이방인 등은 쌍생아가 아니다. 정신은 그것들을 연결지으려고 하지만, 그것들 간에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사고가 구상하는 것처럼 연속적이고 미분적인 거리야말로 세계의 기계를 흔들어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Lévi-strauss 1991: 90-91)
신화는 신화들 사이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그 자신으로서 사고하다[스스로를 사고한다]. 그것은 어떤 운동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만약 그것이 ‘반성=굴절’한다면, 즉 스스로를 변용시킨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불균형으로 향해 반성-굴절하는 것에서 피해갈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의 최후의 위대한 분석이 다루는 이 불완전한 이원성은 ‘모든 시스템의 열쇠’가 되는 쌍둥이이며 자기발동적인 비대칭성의, 완성된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살쾡이 이야기』에서 동적인 불균형으로부터 구조주의에 관련된 참된 이원성이란 자연과 문화의 변증법적인 투쟁이 아니라 고르지 않은 쌍둥이 사이의 강도적이며 끝없는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의 쌍둥이는 열쇠이며 암호=숫자이며 신화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학의 합(合)언어이다. 암호=숫자, 그것은 두 원리의 근본적인 불일치성, 차이의 내적한계로서의 대립, 다수성 속에 있는 개별의 사례로서의 둘이다.
마니그리에는 구조주의적인 기획의 두 가지 주요한 국면 사이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첫 번째 계기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이행한다는 문제와, 그 두 가지의 질서의 비연속성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로서는 그러한 탐구야말로 유일하게 자연인류학에 대한 사회인류학의 특이성을 보증한다. 두 번째 계기는 인간의 별도의 영역에서 구성되는 것을 집요하게 고발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 (Maniglier 2000: 7)
실제로 『친족의 기본구조』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이 책에서 앞서 언급했다시피, 저자는 절대적인 행복을 ‘사회적인 인간에게는 영구히 거절되는 것이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극히 프로이트적인 언명을 이전에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다른 문장과 비교해보자. 거기서 저자는 신화를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이지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역사’라고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다른 종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결여에 결코 체념하지 않고 마주했음을 덧붙인다. 그런데 모든 종(種) 간의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간종적(間種的)인 연속성)이라는 이 노스탤지어는 사후(死後)의 인세스트(근친상간)에 응한 ‘자기들 사이’의 삶(간종적인 비연속성)이라는 노르탤지어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적인 반(反)-담론으로 생각한 사태의 강조점과 의미가 변한 것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구조주의적 인류학의 제2의 담론의 수준이 출현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 포함된 불협화음, 혹은 ‘두 구조주의’ 간의 창조적인 긴장은 『신화학』 속에 특히 복잡한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우리는 훨씬 앞부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연속성과 비연속 간의 신화의 변증법을 통해 『친족의 기본구조』의 친족의 대수학—그것은 이산적인 측에 있는데—에 이의(異議)를 제기했음을 보았다. 이 차이는 단지 형식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섞여서 나타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감성론적인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인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제한 후에 어떻게 참된 구조주의자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즉 『신화학』은 저자가 『주어진 말』(1984)에서 소극적으로 기술한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에 대한 신화적 표상의 연구’의 중심적인 기획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마니그리에가 지적한 것처럼, 바로 『신화학』을 집필하면서 이 저자는 자연과 문화의 근원적인 대립의 타당성에 이의(異議)를 주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로 레비-스트로스가 서양의 숙명적인 결함이라고 진단한 정신적 착란을 선주민에게 이행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실제로 『신화학』은 자연과 문화 간의 순수하고 일의적인 이행을 그려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레비-스트로스가 거기서 스스로에게 과제로 부여한 것은 횡단적인 회로, 좁은 길, 막다른 어두운 길, 두 방향으로 동시에 흐르는 강 등 구부러진 미로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부작의 최초의 1권의 전반부 이래로 어떤 의미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향하는 일방통행을 그리려했던 것이 아니다. 이후 하나의 시리즈로 모이는 7권의 책들이 그려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모호함의 신화학’(『꿀에서 재로』(신화학 2권), ‘흐름의 신화학’(『식사법의 기원』신화학 3권), 문화에서 자연으로 퇴행하는 길 혹은 역행하는 행적, 이 두 질서 간의 상호 침투하는 영역, 짧은 휴지기, 짧은 주기성, 랩소디의 반복, 아날로지에 기초한 모델, 연속하는 왜곡, 영속적인 불균형, 준-삼항의 이중화하는 이원론, 그리고 변환을 횡단하는 다수의 축에 의해 상정외의 방식으로 분기하는 이원성…. 꿀과 성적인 매력, 연속색채주의와 독물, 달과 양성구유, 부산함과 악취, 일식(日食)과 클라인의 항아리, 가까이 보면 무수하게 복잡한 프랙탈인 코흐곡선에 변형하는 요리의 삼각형…. 신화학이 기능적으로 사고하며 노르탤지어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의 내용은 신화 그 자체가 산출되는 추진력을 부정함으로써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으로는 어떤 연속체에서는 부정이 사고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가 어떤 측면과 그 이면, 전진하거나 퇴행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것이야말로 구조주의적인 담론의 두 방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역도 참이다).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 보이는, 신화와 의례 간의 논쟁적인 구별은 결국 신화 그 자체의 메시지를 내면화하는 재귀적인 운동으로서 나타난다. 즉 『살쾡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투피족의 위대한 신화는, 모든 의례의 본질(물론 의례이고 신화는 아니다)과 동일한 궤적을 그려내는데, 그에 따라 정의되는 것은 감퇴하는 경향에 놓인 대립의 점차적인 연쇄이며, 현실의 최종적인 비대칭성을 파악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에 의한 징후 없는 수렴이다. 마치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로서 이론(異論) 없이 기능하는 신화만이 ‘신화론의 신화’, 즉 『신화학』인 것처럼. 그렇지 않을까? 이것은 분명 다시 한 번 다뤄야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벌거벗은 인간』의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보자. 그것은 하늘과 불을 획득하는 북아메리카 신화와 연관된 것인데, (불을 획득하기 위해) 화살로 만든 사다리를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부수어 하늘과 땅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날 것과 익힌 것』을 시작할 때는 원초적인 연속성을 감소시키고 이산시키는 이론을 강조했음을 상기해보자. 그러나 반복컨대 그제야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결론짓는다.
따라서 이 불가역적인 매개행위가 다음과 같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자연의 영역에서 양적인 빈곤화—시간적으로는 인간의 삶이 넘쳐난 [유한한] 기간, 공간적으로는 하늘에서 펼쳐진 비참한 모험 후에 동물종의 수가 감소한 것이 그 대가이다. 그리고 또 질적인 빈곤화라는 대가도 있다. 딱따구리가 불을 획득하기 위해 그 붉은 깃털의 아름다운 장식의 대부분을 잃게 되면서(M729) 반대로 개똥지빠귀가 붉은 앞가슴을 획득한다 해도, 그것은 불을 획득할 때 자신의 실패에 기원한 해부학적인 상해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인류학의 문화로의 이행이란 원초의 조화의 파괴에 의해 혹은 그렇게 변질을 일으키는 미분적인 거리의 도입에 의해 자연의 평면에서 자연을 연속적인 것에서 비연속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 일종의 열화(劣化)를 수반한다. (Lévi-strauss 1971: 448)
『신화학』의 단순함 속에서 방향을 놓치기 쉬운 통로의 하나가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돌연 극히 중요해진다. 이때 구조주의의 두 담론 간의 모호함, 즉 『친족의 기본구조』의 빛나는 인간화라는 담론과 인간성의 자진분리를 고발하는 담론 간의 모호함은 분석적인 방법에 의해 ‘내면화되며’ 그 신화의 내재적 반성=굴절 속에 놓인다. 두 이야기=역사를 말하는 것이 신화이며, 그 속에서는 퇴행적인 행적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의 기원이란 가치저하적인 것일까? 이때 퇴행적인 행적이란 재생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더 비참한 것일까?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에서 연속성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단순한 환상이나 제멋대로의 상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비연속성을 제약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병의 징후로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지구규모로 다시금 열기를 띠는 것, 차가운 역사의 종말, 그것은 자연의 종말이기도 하다.
여하간 레비-스트로스가 몇 번이나 강조한 것처럼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 어떤 측면과 그 이면, (토테미즘적인) 전진하는 방향과 (공의적인) 퇴행하는 방향—그것들은 구조주의적인 담론 그 자체의 두 방향이다—이 포함되어 있다면, 아마존의 샤머니즘과 퍼스펙티브주의는 분명히 그 이면, 즉 퇴행하는 방향의 세계에 속한다. 요리의 불의 기원에 관한 복잡한 문명화 과정은 이 도식을 전제한다는 것을 상기해두자. 즉 하늘과 땅의 이접적(離接的 disjunction) 연결, 계절의 주기성의 창출, 자연종의 차이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브주의자인 샤머니즘은 이와는 반대로 퇴행적인 원리에서 작동한다. 천지의 해질녘의 연속색채성(샤머닉한 여행)이라는 원리, 모든 존재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기저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 ‘초자연’의 영역을 정의하면서 자연과 문화 간의 구별을 근본적으로 교란시키는 환각제(담배)의 테크놀로지의 원리, 즉 문화로서 사고되는 자연의 원리이다—초자연. 이 개념은 구조주의적인 방법의 반(反)샤르트르적으로 빈정거리는 정의(Lévi-strauss 1962b: 9장)임을 상기해두자. 이 방법은 정말로 신화에 의해 더욱 건전하게 실천된다. 그것은 방법이라는 신화에 저항한, 신화라는 방법이다.
4.
이 책에서는 결국 신체에 대한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만년의 위상은 인간정신의 통일성과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체의 다양성과의 긴밀한 투쟁의 무대에 놓인다. 『날 것과 익힌 것』의 서장에서 그는 무엇보다 정신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점차 신체가 투쟁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이후로는 명확하게 우위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분명하게 강조된다. 작은 굴절이 우위에 놓인다. 인간정신의 심리학은 선주민의 신체의 반(反)-사회학에 그 장소를 양도한 것이다.
이렇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신화학의 행적의 종반에서 그가 자신의 야심을 더욱 온건한 범위에 머물렀다는 인상을 준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이론적인 기획 속에서 가장 고도의 숙명으로 불리는 것이 현실로 드러난다. 그것은 타자의 사고를 그 자신의 말로 되돌리고 그러한 ‘타자로의 열림’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학이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를 통해 발견한 태도이며 그 자체가 자신이 연구한 타자를 특징짓는다. 인류학은 그 이전에는 타자를 자신의 껍질 속에 가두는 자민족중심주의자임을 상상함으로써 기쁨을 찾아내었다.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보이는 당혹스러운 메시지란 타자의 타자는 그 또한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장소는 이미 타자성에 의해 규정된다. 더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인류학 자신이 취한 입장은 바로 야생의 사고, 즉 자신의 대상과 공통하는 내재평면의 흔적과 공재적(共在的) 수준에 있다는 원리를 설정하는 것이다.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서 정의하고 인류학적인 지(知)를 선주민의 실천의 변환으로서 정의하면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투영하는 것은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즉 안티 나르시스이다.
5.
1960년대에 우세를 점한 결혼의 결연조직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론은 20세기 최후의 사반세기가 되어 점차 많은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앞장서서 강력하게 효과적인 문체로 사회체의 ‘교환주의’라는 개념전반을 완고하게 거부했고, 이러한 [구조주의적 이론의] 전락을 이끌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태도가 『천의 고원』을 견인했다는 데에 재론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질문한 사항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행위의 일반적인 모델로서 생산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교환은 경시된다. 그리고 순환(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모스적인 의미에서의 일방적인 교환에 비긴다)은 그 속에서 각인보다 하위의 위상에 놓인다. 『천의 고원』에서는,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생산을 다른 비표상적인 관계, 즉 생성에 그 장소를 양도한다. 만약 생산이 출자에 관련한다면 생성은 결연과 친화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생산에서 생성으로 이행할 때에 반(反)-교환주의의 입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대체로 때마침 잊혀졌지만,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과 엄밀하게 동일하지 않다. 들뢰즈&가타리의 ‘욕망하는 생산’은 부족과 충족이라는 사고방식이 우위에 있는 헤겔-마르크스주의적인 ‘필요성의 생산’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들뢰즈&가타리 1972: 33 et s.). 이 차이는 몇 번이나 강조되었다. 즉 “우리의 문제는 마르크스로 돌아가서는 결코 안되었다. 문제는 망각이며, 그곳에는 마르크스의 망각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망각에는 잔존하는 작은 파편이 부상한다…”(들뢰즈 1973).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절단이라는 시스템이 일반화된 순환의 프로세스와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도 덧붙여놓겠다. 이 점에 대해 리오타르는 조금은 악의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1977: 15). “이러한 자본의 배치, 흐름의 순환은 순환이라는 시점(視點)이 생산이라는 시점(視點)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에 의해 필요하게 된다…”.
생산의 유한주의적(혹은 무한적인 대화로서 유한적인 것일 수도 있는) 그리고 필요주의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인류학의 영역에서 현재 유통되는 생각이다. ‘교환주의’의 입장이 일반적으로 인류학에서 비판되는 것은 이 이름 하에서 혹은 이 이름을 띠는 사태—지배, 허위의식, 이데올로기—에서이다. 그러나 만약 경제학이 필요로 하는 생산과 기계상(狀)의 경제의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 생산-노동과 생산-기능 사이에 이러한 구별을 설정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 필요하다면, 그것과의 아날로지에서 결연-구조와 결연-생성변화, 교환-계약과 교환-변화 사이에 구별을 설정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관심을 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우주론에서 강도적인 결연과, 구조주의를 포함한 친족의 고전적인 이론의 외연적인 결연과의 모호한 동음이의성에서 이러한 구별을 의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결연의 계약주의자적인 개념을 분리해낼 수 있다. 당연히 이 두 사례에서 동음이의적인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그것이 재생산이라기보다는 괴물적인 것이라고 해도 이 상호 엮여있는 대립적 개념 간에 어떤 출자(出自)가 주어진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이란 가령 생산개념을 전복시킨다 해도 경제학의 생산개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에서 잠세적인 결연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 침투되었고 역광 속에서 (이른바 잠재적으로) 나타난다. 그 안티ㆍ오이디푸스적이고, 따라서 자기전복적인 잠세력은 충분히 해방되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비계약주의적이고 비변증법적인 교환의 개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이익도, 증여의 아포리아적인 총합도, 무의식의 목적론도, 시니피앙의 움직임도, 포함적인 합치도, 타자의 욕망의 욕망도, 계약도, 저항도 아닌 교환개념이며, 오히려 타자로의 생성이라는 방식으로서의 교환개념이다. 결연이란 친족의 고유한, 타자로의 생성이다.
결연의 기계적이고 리좀적인 잠재성이란 결국 출자의 유기체적이고 수목형의 수직성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에 더욱 가깝다. 따라서 극복해야 하는 것은 결연을 출자의 거동으로부터 해방하고 그것과는 반대로 출자에 의한 결연의 조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연의 ‘괴물적’인 힘, 즉 창조적인 힘은 해방된다. 결연의 쌍생아의 개념, 즉 교환의 개념에 대해 말하면 오늘날 하나는 분명하다. 즉 교환의 개념은 통설에 반해서 결코 생산을 다른 것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류학에서 교환은 항상 생산 하에서 드러나는 형식으로서 다루어져 왔다. 즉 사회성의 생산이다. 고로 문제는 교환과 호혜성이라는 위선적인 위장으로 은폐된 생산의 벌거벗은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개념을 (反-)자연적인 요소, 생성의 요소로 되돌려놓으면서 출자적이고 주체적인 생산기계 속에서 그 양의적인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교환 혹은 퍼스펙티브의 무한한 순환—교환의 교환, 변신의 변신, 시점의 시점, 이것들이 곧 생성이다.
이중의 운동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괴물적인 결연에 입각한, 자연에 저항한 혼인이라는 이중의 유산으로 향한다. 즉 들뢰즈와 함께 하는 레비-스트로스이다. 그 고유명은 강도(强度)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강도에 의해서만 찾아지는 것, 우리가 그곳에 강도를 남겨두었던 잠재적인 유보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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