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맞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타자의 개념은 '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보다 '적'에 더욱 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 그런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음미해볼만한 좋은 글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인류학(의 민족지적인 방법론)에 시사하는 것은 깊다. 다른 인류학자들이 이 글을 어떻게 독해하고 받아들일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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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속의 적
1.
『안티 나르시스』, 이것이 내가 쓰려했던 책 제목이다. 여기서는 몇몇 장에서 그 계획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고의 경험이며 인류학적인 픽션의 훈련이다. ‘사고의 경험’은 보통의 의미에서 경험 속으로 (상상적인) 사고의 침입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 속으로 (실재적인) 경험의 침입이다. 어떤 경험을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상을 경험하는 것 혹은 ‘사고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의 사례에서 경험이란 아마존의 선주민에 관한 민족지학자의 동시대적인 경험이며, 시도된 경험이란 그러한 경험에 의해 조정된 픽션이다. 따라서 픽션은 인류학적이지만, 그러한 인류학이 픽션은 아니다.
픽션이란 선주민의 이념을 개념으로서 다루고, 그러한 결정으로부터의 귀결을 그려내는 것이다. 즉 그로부터의 개념이 전제로 삼는 전(前)개념적인 토양 혹은 내재평면을, 개념이 존재하도록 불러내게 하는 개념적 인물을, 개념이 설정한 실재적인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이념들을 개념으로서 다루는 것은 개념이 다른 것으로서, 현실적 대상의 다른 타입으로서, 대상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개인적인 인지, 집합표상, 명제적 태도, 우주론적 신념, 무의식의 스키마(schema 인간의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의 구조), 텍스트의 복합, 구체화된 성향, 그러한 다양한 것들로 다루는 것은 그로부터 이론적인 픽션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란 선주민의 ‘원시심성’에 관한 연구도 아니고 ‘인지과정’의 분석도 아니다. 그 대상은 선주민이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사고의 대상이며 그 개념이 투영하는 가능세계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세계관에 대한 민족-사회적인 시도가 문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첫째] 보이도록 준비된 세계, 시각에 앞서는 세계가 아니기에, 사고의 지평이 설정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의 분할에 앞서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둘째] 이념을 개념으로 다루는 것은 그 설명들을 상황의 (생태학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등의) 초월적 관념의 말에 의거하는 것이며, 문제의 내재적 관념을 특권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셋째]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의 해석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를 실험하는 시도이며, 따라서 우리의 사고를 실험하는 시도이다. “모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는 자기 자신의 문화의 실험이다”(와그너).
조금 더 설명해보자. 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인간들의 정신과도 다른 ‘인지과정’의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주민이 다양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특별한 신경생리를 갖추었다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정확하게 ‘우리처럼’ 사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사고하는 것, 즉 그들에게 주어지는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란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선주민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 인간이 아닌 많은 주체가 완전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고한다고 생각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참조의 수렴점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퍼스펙티브의 분산화라는 의미에서 이성(理性)인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가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는 실제에 대한 선주민의 지(知)와 적잖이 다른 그 표상, 즉 오늘날 표상의 글로벌 시장이 부당하게 취급하는 ‘전통적인 지(知)’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또 그 심적인 범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표상성에 관해 종(種)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의 과학은 끊임없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 개인적이든 집합적이든 이성적이든 약간의 이성을 결여한 것이든 그 자체에 앞서는 외재적 사물의 상태를 부분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표상이 아니다.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생득적이든 획득적이든 세계의 사물—정신이든 사회성이든—의 특성을 표시하는 것은 범주도 아니고 인지과정도 아니다. 여기서 그 존재가 조장하는 대상이란 선주민의 개념의 대상이며, 그것들이 구성하는 세계이며(세계는 그리하여 정신을 표상한다), 그것이 출현해왔던 잠재적인 기저이다.
선주민의 이념을 개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그것들을 철학적인 의미가 갖춰진 것으로서 혹은 잠세적으로 철학적인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서 고찰한다는 것을 뜻한다. 선주민이 그 서사 속에서 철학자가 아닌 유일자라는 이유를 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무책임을 결정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부러 강조하자면, 필자 또한 철학자가 아니다. 개념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가령 언뜻 보면 사고 그 자체에 관련된 필연성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고에, 혹은 개념적 이성의 엄밀한 건축학이라기보다 표상의, 형상의, 집합적 표상의 유창하고 얼룩진 도식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고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 속에 잘 알려진 역사적이고 심리학적인 심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브리콜라쥬를 이루는 것과 그 기호 사이에, 엔지니어와 그 개념 사이에(Lévi-strauss 1962b) 창설적인 인간의 신화시학과 서양적 합리성의 특정한 세계 사이에(Vernant 1966: 229), 형상의 범형론적인 초월성과 개념의 통사론적인 내재 사이에(들뢰즈&가타리 1991), 그 사이에 ‘결정적인 균열’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다소간 직접적으로 헤겔에게서 발단이 시작되는 이러한 대비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내게는 개념에 대해 (비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선주민의 이념을 인류학자의 이념과 같은 평면 위에 위치지어서 파악한다는 결정에서 찾아진다.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인류학적인 이념은 그것이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의 집합성의 지성적인 실천론과 엄밀하게 연속한 것으로서 위치 지어진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제시된 실천론은 인류학자의 담론과 선주민의 담론 간의 권리상의 등가성을 주장한다. 모든 것은 마치 그 담론들의 ‘상호적인 전제’라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지식과의 관계에서일 뿐이다. 인류학적인 개념은 이 관계를 현실화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양자는 그 표현에서도 내용에서도 온전하게 연관된다. 그것들은 선주민의 문화의 참된 반사(反射)(실증주의자의 꿈)도 아니며, 인류학자의 문화의 환영적인 투영(구축주의자의 악몽)도 아니다. 그 개념들이 ‘반사’하는 것은 두 문화 간의 이해가능한 관계이며, 그것들이 투영하는 것은 그것들 자신의 전제로서 두 문화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두 근거를 상실한다. 그것들은 항상 반대쪽을 가리키는 벡터이며, 트랜스텍스트적인 인터페이스이다. 그 기능이란 원형 그대로의 의미에서 같음 안의 다름이며, 그곳의 것을 표상한다.
인류학적인 개념의 관계적인 기능과 기원은 보통은 이국적인 언어로 드러난다. 즉 마나, 토템, 쿨라, 포틀래치, 터부, 굼사/굼라오 등이다. 조금 더 중요성이 낮은 다른 개념은 이 학문의 기원의 전통과 그것들의 대상인 전통 사이의 아날로지가 이끌었던 어원학적인 기호성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증여, 공의, 친족, 인격 등이다. 다른 한편, 마지막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민족들의 개념적인 장치를 일반화해서 만든 신조어가 있다. 애니미즘, 분할적 대립, 한정교환, 분열생성…… 또 그 반대로 혹은 더 문제적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분산되어 특수한 이론적 구조의 내부로 이탈하는 단어가 있다. 근친상간(incest)의 금기, 젠더, 상징, 문화 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들은 보편화된다.
결국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란 ‘주체’와 ‘대상’의 세계로부터 가능한 개념과 실천 간의 관계적인 공진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강고한’ 과학에 대한 우리의 열등컴플렉스를 분쇄시켜준다.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쿨라의 기호는 프랙탈의 기호와 등가이다. 결연의 복합시스템은 상상적이지만, 그것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제시하는 퇴행적인 시나리오와 마찬가지로 상상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바다의 거대한 균열을 지도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트로브리안드 섬의 재산소유시스템은 극지의 빙모[산의 정상부분을 덮은 빙하]의 탐색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탐구에서 흥미롭다. 만약 과학을 규정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즉 우리의 세계에 정착한 행위주체(agency)와 관련되는 한에서 발명의 능력이 문제시된다면—, 그때 인류학은 학문적 위계(hierarchy)의 정점 가까이에 위치할 것이다(1996a: 5).
이 문장에서 아날로지는 선주민의 개념과 자연과학의 대상 사이에 설정된다. 그것은 가능한 퍼스펙티브이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대상에 관여하듯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의 사상(事象)을 위해 사람은 이념과 선주민의 실천에 대한 과학적 기술을 산출해야 한다(라투르에 따르면, 과학적인 객체는 무관계한 실체를 제외하면 기술(記述)되기를 참고 기다린다). 다른 존재전략은 존 호턴 콘웨이(John Horton Conway 1937~, 영국의 수학자)가 고안해내었듯이 선주민의 개념을 과학적인 이론과 그의 ‘유사성의 테제’에 따라 비교하는 것이다(1993: 348-354). 게다가 다른 전략이야말로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인류학이 늘 지나치게 ‘과학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과학 그 자체와의 관계에서—즉 인류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과학일 수 있는가 아닌가, 과학이어야 하는가 아닌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문제인데, 인류학은 탐구하는 사람들의 개념과의 관계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선주민의 개념을 착오, 꿈, 환상으로 낮게 평가하기 위해서든, 다음으로 어떻게 그리고 왜 ‘타자’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든, 혹은 그것들을 많든 적든 과학에, 즉 인류학에게 같은 실질을 가진 지(知)의 의지의 성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활성화시키는 것이든 여하간 지나치게 과학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호턴의 유사성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체의 과학을 손에 넣었는지 모른다(Latour 1991: 133-134). 과학의 이마주. 그러나 이런 사고의 금괴는 서양적인 전통과 다른 사람들의 지적활동과 연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지반은 아니다.
라투르의 아날로지와 다른 아날로지를, 호턴의 유사성과 다른 유사성을 상상해보자. 즉 선주민의 개념을 프랙탈과 판구조 이론(plate tectonics)과 유사한 실체로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코기토와 모나도와 같은 영역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아날로지를 상상해보자. 그 속에서 우리는 앞서의 인용을 차용하면서 ‘분할’로서의 인격이라는 멜라네시아적 개념(Strathern 1988)이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와 똑같이 상상적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선주민의 지배영역의 철학’(Clastre 1974/1962)을 국가의 헤겔적인 학설과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마오리의 우주진화론을 엘리아류의 패러독스와 칸트적인 안티노미(antinomie 이율배반)와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해보자(Schrempp 1992). 아마존적인 퍼스펙티브주의를 라이프니츠의 시스템과 똑같이 흥미로운 철학적 대상으로서 이해해보자. … 그리고 만약 문제가 철학적인 가치로서 중요한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라면, 즉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라면, 그때 인류학은 철학을 대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강력한 철학적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며, [우리의] 철학의 과잉의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지평이 조금씩 확대되는 것이며, 다음으로 우리를 ‘철학적’이라고 일컫는 인류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팀 잉골드의 깊은 정의를 떠올려보자(1992: 696). 그것을 원문 그래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인류학은 그 안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철학이다 Anthropology is the philosophy with people in”. 이 정의에서 잉골드는 ‘사람들 people’이란 ‘보통의 사람들 ordinary people’이고 죽은 자의 공동체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서의 the people과 ‘민족’으로서의 the people 사이에서 말장난을 한다. 그것은 내부의 다른 사람, 다른 사람들과의 철학이다. 즉 우리와 관계를 맺는 이상으로 이 혹성의 다른 민족의 ‘비철학’—삶—과의 관계와 맞부딪히는 철학적 활동이다. 즉 ‘코뮌이 아닌’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만약 실재하는 철학이 상상적인 야생으로 넘쳐난다면, 인류학이 목표로 삼는 철학지리학은 실재적인 야생과 함께 하는 상상적인 철학을 만들어낼 것이다. 실재하는 두꺼비가 그 안에 있는 상상적인 정원(메리앤 무어(Marianne Moore 1887-1972, 미국의 시인, 그녀의 시 세계는 이미지즘에서 출발해 사물주의로 나아간다). 그리고 두꺼비들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종종 왕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들과 키스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차용한 내용에서 중요한 위치변환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윽고 (사회의 멜라네시아적인 형식으로서의) 쿨라의 인류학적 기술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류학적 형식으로서의 ‘사회성’의) 멜라네시아적인 기술인 쿨라가 문제이다. 혹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여기서는 그 자체로 이해의 장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하여 결연과 토지소유의 복합시스템은 선주민의 사회적 상상력으로부터 생겨나는 발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쿨라를 항상 하나의 기술(記述)로서 기술(記述)하는 것이 필요하며, 선주민의 종교를 항상 하나의 이해로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선주민의 상상력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념성을 개념으로 변용시켜야 한다. 후자를 전자로부터 끌어내고, 전자로 돌아가야 한다. 개념이란 개념성 간의 복합관계, 전(前)개념적인 장치와의 배열(arrangement)이다. 인류학의 경우, 관계 속에 있는 개념성은 무엇보다 특히 인류학자의 개념성과 선주민의 개념성—관계의 관계—을 포함한다. 선주민의 개념은 인류학자의 개념이다. 그것은 물론 구축에 의한 개념이다.
2.
사고의 이마주로서 카니발리즘. 개념적 인물로서 적. 이에 대해 질문한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지리학에 한 개 장 정도를 할애해야 할 것이다. 서양적인 전통에서 타자의 프로토타입적인 표현은 친구라는 형상이다. 친구야말로 타자인데, 다만 그것은 자기의 ‘계기’로서의 타자이다. 만약 나를 친구의 친구로 자기규정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잘 알려진 정의 속에서 친구가 다른 자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존재한다. 친구는 주체를 조건지운 형식에 회고적으로 투영되는 타자의 조건이다. 프란스시 울프(Francis Wolff)가 말한 것처럼(2000: 169), 이 정의는 다음의 이론을 포함한다. 즉 ‘타자에 대한 모든 관계는, 고로 모든 우성(友性)의 형식은 그 근거를 인간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찾아낸다’. 사회적 관계는 자기에 대한 관계를 기원 혹은 모델로 전제한다.
그러나 친구는 다만 ‘인류학’만을 근거 짓지 않는다. 만약 그리스철학의 구성의 역사정치학적인 조건을 고찰한다면, 친구는 진리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불가결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고에 내재하는 현전(現前), 사고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 살아있는 범주, 초월적인 살아있는 것’(들뢰즈&가타리 1991: 9)이다. 친구는 결국 타자가 개념적 인물로서 불린 것이며, 개념에 고유한 타자의 도식이다. 철학은 친구를 요구한다. 사랑은 지(知)의 요소이다.
그런데 아메리카 선주민과 ‘우리’의 철학과의 가치의 동일시라는 서두의 문제는 초월론적인 규정으로서 적에 의해 구성된 세계를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라이벌로서의 친구가 아니라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실천적인 적의 내재이다. 그 속에서 적의(敵意)란 우성(友性)의 결여적인 보완물도 아니고 부정적인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권리의 구조이다. 그것이 지(知)와의 다른 관계, 다른 진리의 영역과의 관계를—즉 카니발리즘,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와의 관계를—규정한다. 만약 들뢰즈적인 타자가 시점의 개념 그 자체라고 한다면, 초월론적인 규정으로서의 적이라는 시점에서 구성되는 세계란 무엇일까? 단지 선주민만이 알고 있는 궁극의 귀결로 밀고 나아가는 애니미즘은 퍼스펙티브주의적일뿐만 아니라 적대주의적이기도 하다.
3.
이것들 모두는 ‘불가능한’ 물음을 정식화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선주민의 사고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때] 인류학자의 목적은 이러한 사고를 설명하고 해석하고 맥락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될 수 없고, 그것[선주민의 사고]이 우리의 사고에 맞는 효과를 이용하여 그로부터 귀결을 이끌어내고 검증하게 될까? 선주민의 사고를 사고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즉 우리가 사고하는 것(다른 사고)이 ‘언뜻 보면 비합리’인가 아닌가, 나아가 나쁘게 말하면 타당 이성적인가 아닌가를 사고하지 않고 사고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이 다른 사고를 이러한 양자택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로서, 이러한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서 사고하는 것, 이라고.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선 중성화하지 않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이 타자에 대한 사고의 중성화라는 이런저런 형태에 관한 물음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고가 인류의 인지적 보편을 밝혀줄까? 그것은 어떻게 그러할까? 그것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지식의 어떤 전달양식에 의해 설명될까? 그것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세계의 비전을 표현할까? 그것은 기능적으로 정치적인 권력의 배분을 유효화할까? 등등. 이 질문들을 매달아 놓는 것, 혹은 적어도 그 질문들 속으로 인류학을 집어넣고 닫지 않는 것 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다른 사고를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단지 사고를 의심하지 않는 잠재성의 현실화로서 사고하도록 결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주민이 말한 것을 ‘믿는’ 것, 그들의 사고를 세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여기서 전형적으로 질 낮은 방식으로 설정된 문제가 보인다. 어떤 사고를 믿는다거나 혹은 믿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신념의 체계로서 사고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인류학적인 문제란 신념의 심리학적인 용어로도 진리치라는 논리학적인 용어로도 결코 제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를 신념 혹은 불신앙의 가능한 유일대상으로서 억견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또 진리판단의 가능한 유일대상으로 또 명제집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그들의 사고를, 신념에 관한 그들의 담론과 관련짓고 규정할 때 일어나는 나쁜 문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때 문화는 일종의 도그마적인 신학이 되고 만다. 혹은 인류학이 이러한 담론을 억견 혹은 명제집합으로 받아들일 때 문화는 인식론적인 기형학이 된다. 착오, 광기, 환상, 이데올로기. 라투르가 말한 것처럼 “신념이란 심적 상태가 아니다. 몽테뉴 이래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의 결과이다”(1996b: 15).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신념에서 기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신념이라는 양태 하에서 [그들의 사고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 그 알레고리적인 (뒤르켐에게서는 사회적인 알레고리이며, ‘문화유물론’의 아메리카학파에게서는 자연적인 알레고리이다) ‘진리의 기저’를 주의 깊게 암시하든, 더 나쁘게는 그들의 사고가 사물의 내적인 궁극의 본질에 접근한다고 상상하든, 그 어느 쪽도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하다면 그들이 천성적으로 신비적(神秘的)인 지(知)를 견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미의 신념으로, 도그마로, 확실성으로 환원하는 인류학은 반드시 신념의 의무라는 덫에 걸린다. 선주민의 의미일까, 그들 자신의 의미일까?”(Wagner 1981: 30). 의미의 평면은, 의미, 의미작용, 의미생성은, 심리적인 신념이나 논리적인 명제로 넘쳐나지 않으며, 그 ‘기저’는 진리와는 다른 것을 포함한다. 선주민의 사고가 만약 그것[신념]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억견의 형식 또한 논리의 형상이 아닌 의미의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개념산출의 자기 참조적인 장치로서 ‘그것 자체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념에 의해 질문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인류학적인 결정으로서는 중대한 갈림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인 타자를 다뤄보자(들뢰즈&가타리 1969a; 1991). 타자는 가능세계의 표출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항상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관습적인 흐름 속에서 나에 의해 현실화된다. 타자 속에 포함된 가능성은 나에 의해 전개된다. 가능성이란 검증의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이며, 엔트로피적인 방식으로 그 구조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내가 타자에 의해 표현된 세계를 전개할 때, 그것은 타자의 가능세계를 실재적인 것으로 검증하는 것이며, 그 속에 진입하는 것이며, 혹은 그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전개’는 이러한 신념의 요소를 도입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기술하면서 들뢰즈는 타자의 개념설정의 한계조건을 제시한다.
전개의 이러한 관계성은 우리와 타자와의 공동성도 대립도 형성하며 그 구조를 해소해버린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타자를 대상의 상태로 환원하고 다른 경우에는 주체의 상태로 귀착시키고 만다. 따라서 타자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공적인 것이든 우리에게는 특정의 경험의 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표현된 것이 아직 우리에게 그것을 표현하는 것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기이다. 하나의 가능적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타자(들뢰즈&가타리 1968: 335).
그리고 결론으로 이러한 고찰의 근원적인 격언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전에 인용한 규정은 너무 많이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자와 함께 자기를 지나치게 전개한 것이며, 타자를 지나치게 전개한 것이며, 그 불명료한 가치들을 유지하여 스스로의 표현 밖에는 현실존재하지 않는 표현된 모든 것들로 우리의 세계를 채우며, 우리의 세계를 다수화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는 이 교훈에 담긴 이점을 끌어내는 자이다. 타자의 가치를 불명료한 채로 남겨두는 것은 그것이 가둔 무언가의 초월론적인 비밀을 칭송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표현된 가능성을 현실화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무한히 가능한 채로 남겨두도록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공상으로 탈현실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으로 공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인류학적인 경험은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특수한 인공적인 조건’의 형식적인 내화에 의존한다. 타자의 세계가 그 표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기야말로 영원의 조건으로 자기변용하는 것이다. 즉 인류학적인 관계에 내적으로 잠재하는 것으로서 이 가능적인 것을 실재화하는 영원의 조건으로 자기변용하는 것이다. 만약 그 권리상, 인류학에 무언가가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전개=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양화하는 것이며, ‘타자의 표현 밖에는 현실존재하지 않는 표현된 모든 것들로 넘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주민처럼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그 이상으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바로 순간적으로 ‘그들처럼’ 사고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어떤 명석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계를 타자의 시선 하에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이 현실화하려고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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