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주는 번역자주임.

* 소절의 구성은 독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자가 임의로 한 것임.

* 이 글의 이해를 위해 필리페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을 알아야 하는데, 한국어로 전혀 소개된 바가 없으므로 그나마 다음의 글(http://sarantoya12.tistory.com/45)을 참조할 수 있다고 봄.

* 다음 글의 논지는 퍼스펙티브주의가 다만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의 새로운 퍼스펙티브로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으로서 확장가능하다(확장해야한다)는 것임.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각주:1]

 

 

 

1.

 

우리는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를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이론으로서 논했다. 나는 ‘여기서’ ‘이론’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십수년간 인류학에서는 야생의 사고 이후 참된 이론적 상상력이라는 성격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내게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인류학자 당사자의 이론적 상상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그러한 경향에 대해 외재적인 이론으로서 가능한 대상이라기보다—예를 들어, 일차적인 애니미즘적 존재론의 이차적인 인식론으로 상정되거나(Descola 2005), 수렵민의 ‘모방적’ 문화에서 출현한 현상학적인 프래그머티즘(Willerslev 2004)으로 규정되는 이론의 대상이라기보다—, 바로 우리에게 이론에 관한 또 다른 이론적 이마주를 구성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지인의 시점(視点)’을 미세하게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말리노프스키), 비가시의 맹점을 지적하며 나아가 탁월한 비판적 전통에서 관찰자의 시점 속으로 현지인의 시점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퍼스펙티브주의가 이러한 전통과 대립해서 이뤄내는 작업은 그것과 ‘대칭적’인 작업, 즉 현지인으로서의 시점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문화에서 현재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이며 시점의 인류학에서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확실히 시점의 선주민적 개념은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류학자의 시점은 선주민의 시점이 될 수 없다(그것은 지평의 융합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후자[선주민의 관점]와의 (퍼스펙티브적인) 관계의 개념이다. 그것은 반성적인 탈장소화적 관계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성적인 구조이며, 인류학자에 의한 퍼스펙티브주의 자체의 기술(記述)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인류학을 통과한 또 다른 인류학이기 때문이다. 고로 퍼스펙티브주의는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서브타입적인 애니미즘도 아니고 인류학자의 이성만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성이 소유하는 ‘실천의 도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입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의 개념이다. 그 가장 흥미로운 사용법은 우리에게 이국적으로 비쳐지는 우주론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오염된 우리 인류학에 대한 저항-분석을 행하는 것이다.

 

 

2.

 

상상력의 결여를 논외로 한다 해도—그것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비근대적인 사람들에 대해 이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찬하거나 혹은 이론적으로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이중 잣대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약간의 모순이 포함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편에서는 선주민의 실천의 본질을 하이데거적인 도구존재자(das Zuhandenes)라는 술어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준-명제적 표상’[각주:2](스페르베르 Dan Sperber 1942~, 프랑스의 인류학자)에 대한 참된 인식의 모든 기능을 거절한다. 그러한 ‘표상’은 백과사전이나 범주화의 온당하고 분명한 경계로서 나타날 때에는 야생의 사고를 구속해버리고 만다.

 

실제 문제의 소재는 사고의 능력과 ‘판단의 시스템’과의 특권적인 동일시, 그리고 인식과 명제 모델과의 특권적인 동일시에 있다. 동시대적인 인류학은 현상학적이고 구성주의적인 경향과 인식론적으로 도구론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데, 최근 비서양적인(혹은 비근현대적인, 비문학적인, 비학문적인, 그밖에 ‘구성하는 것’이 부재한) 지성을 구성하기에는 이 모델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변명들을 한다. 바꿔 말하면 인류학적 담론은 패러독스적인 시도에 열중한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를 타자의 담론의 비명제적인 본질에 관한 명제와 중첩시킨다. 그것은 이른바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수다와 같다. 선주민이 자기해석이라는 실천에 대해서는 숭고한 모멸을 보이면서 우주론이나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이론적으로) 만족스러울까? 선주민에게 있어서 해석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에 관한 인류학자에 의한 해석을 증대시킬 수 있는 큰 이점을 갖고 있으며, 우주론적인 [개념적인] 건축물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인류학자에 의한 장대한 대성당(cathédrale)[의 구성]—이 장대한 대성당에서 사회는 그 장치에 따라 조금이라도 발전하고 시스템적인 것으로 조직화된다—을 가능하게 만든다. 요컨대 선주민이 보다 실천적이라면 인류학자는 보다 이론적이다. 나아가 명제적이지 않은 양상이란 이동과 순환의 ‘맥락’에 강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로 그것[‘맥락’]이 이 양상을 과학의 담론과 그 놀라운 보편화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의 대극에 놓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관계적인 배치’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러나 우리의 그것[‘맥락’]이 선주민의 그것과 비교해서 대체 얼마나 더 시스템에 한정되고 더 상황과 결부되며 더 배치되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서는 우선 비지배적인 사고에 내재하는 전(前)명제성이라는 테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지금까지 요구하지 못한 타자의 ‘합리성’에 대한 권리의 재확립를 중요하게 다루겠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깊은 사고는 다른 사고의 이마주의 투영이지, 다른 야생의 이마주의 투영이 아니다. 명제야말로 이성적인 언명의, 그리고 또 이론적인 담론의 원자의 프로토타입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한다. 즉 명제 스스로가 명료하지 않은 사고에 대항해야 한다. 비명제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원초적인 것으로서 비개념적인 것 나아가 반개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만다. 이것은 물론 개념 없는 타자에 ‘찬성’하기 위해, 혹은 ‘반대’하기 위해 주장된다. 이성적 개념의 부재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성과 행동, 사고와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민족이 실존적으로는 소외되지 않음의 표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이것들 모두는 명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이며 관념의 극히 고풍스러운 개념을 재인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잇단 개념을, 개별적인 것을 보편으로 포섭하는 조작으로서, 본질적으로 분류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서 파악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개념의 거부가 아니라 개념 속에서 미세화철학(infra-philosophy)을 집어내고 그와 상호적으로 미세화철학 속에서 잠재적인 개념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개념의 인류학적인 개념에 다다라야 한다. 그것은 모든 창조적인 (‘야생의’) 사고의 명제외부성을 그 적극성 자체로 떠안는 (생득적인 것이든 획득된 것이든) 범주라는 전통적인 개념과 (명제적이든 준명제적이든) 표상이라는 전통적 개념과 (꽃에 대한 것이든 홑꽃이든 겹꽃이든) 신념이라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혹은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는 개념의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에 그것은 어떤 아카데믹한 환경에도 수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이러한 담론에 관한 어떤 구조적인 결과도 낳을 수 없는 인류학적 담론으로서 근원적으로 외재적으로 위치 지어진 담론-대상에 포함된 내용의 특성과 관련된 서술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보로로족과 쿠나족이 ‘퍼스펙티브주의자’였는지를 묻는 질문이 어느 정도 토론의 장에 열기를 가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류학자는 숲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여기저기 ‘퍼스펙티브주의자’를 가리키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술 더 떠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잘 표현된 정신을 들고 와서 ‘어떻게 하면 퍼스펙티브주의자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회의주의자들은 냉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심중을 애써 드러내려했다. 즉 퍼스펙티브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떠들썩한 소란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을 둘러싸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의,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세부에 집착할 뿐이었다. 여하간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하게 제약된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산출된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특수효과와 관련될 뿐이었다. 그러한 프래그머티즘의 원리는 원리이고, 관계자—관계자가 재규어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들이 재규어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재규어가 말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말의 병(病)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수용의 맥락에서 보면, 이 모든 사태는 인류학자의 이론으로서 퍼스펙티브주의의 귀결에 관한 진지한 검토가능성을—그것[퍼스펙티브주의]은 인류학에서 모든 개념의 실체에 부과하는 변용이다—단숨에 막아버린다. 결국 [퍼스펙티브주의라는] 사고에 곁붙는 암호로 표시되는 사고는 인류학의 수많은 대상 중 하나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야말로 인류학의 또 다른 사고를 기획한다. 그것은 서양적인 ‘인류학적 인류학’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인류학으로서, 그것을 근저에서 뒤집는다.

 

 

3.

 

부분적으로 말하면, 퍼스펙티브주의의 자연주의자적 (아날로지주의자적) 해석이란 퍼스펙티브주의를 어느 한 세계의 대상화의 도식의 하나, 즉 애니미즘의 하나, 수많은 특성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류학이라는 국지적인 장소에서 필리페 데스콜라의 대작인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2005)에서 제시한 개념을 잇는 길을 닦는다. 나는 여기서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는 나의 작업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나와 데스콜라의] 차이점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호 내실 있는 대화를 기반으로 표명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학이라는] 우리 학문이 다루는 그 외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깊은 동의를 전제로 한 것이다.

 

 

4.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서 설정된 파노라마를 재검토하며 수정하고 완성시키는 작업이다. 이 속에서 데스콜라는 토테미즘이라는 관념을 세 개의 ‘존재론’ 혹은 ‘동일화의 양식’—이 동의어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재-종별화한다. 이 세 개의 존재론이란 애니미즘, 아날로지주의, 자연주의이다. 그렇게 데스콜라는 사각형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그 매트릭스에서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이, 서로 다른 존재의 종(種)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인 차원(「데스콜라의」 신조어로는 ‘물리성’과 ‘내부성’)의 연속성 혹은 비연속성의 관계에 따라 배분된다. 이 매트릭스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관한 졸고(1998/1996)에서 내가 제시한 도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데스콜라는 고맙게도 다른 곳에서 그에 관해 주기(注記)해 주었다. 앞서도 일부를 참조했지만, 나는 이 텍스트에서 두 개의 ‘교착하는’ 존재론적 도식 간에 간결한 대비를 설정했다. 그것은 존재하는 종(種)들 간에 형이상학적인 연속성(종(種)으로서의 혼)과 물리적인 비연속성(특정의 신체)의 조합이다. 이러한 조합은 선주민의 심리형질적인 다자연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물질적인 연속성과 형이상학적인 비연속성의 조합이야말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인 다문화주의에 전형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창조물의 모든 잔여와 정신적 실질에 의해 (그 동시대적인 변화에 의해) 절대적으로 분리되면서도 신체적 물질을 통해 소통한다. 이렇게 드러난 대비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도식을 그려낸다. 다른 두 개의 도식인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형상, 즉 물리적 차원과 형이상학적 차원 간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평행한’ 관계가 그려내는 형상을 덧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준 최초의 충격은 우리 세대의 많은 인류학자들(혹은 철학자들)을 이끈 충동과 거의 같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야생의 사고의 비연속적이고 분류적인,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토테미즘적이고 신화론적인 경향의 측면에는 관심을 보인 반면, 연속적이고 ‘초범주적(trans-category)’인, 환유적이고 우발적인, 범형적이고 의례적인 양상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결국 우리는 수년간, 레비-스트로스 쪽으로 나아가기를 권유하면서도 오히려 레비-브륄 쪽을 재검토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토[각주:3]라는 갈래길과 마찬가지로 이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하간 이 방향들은 화자의 시점을 믿어야할 만큼 먼 것은 아니다.) 데스콜라가 제1의 형이상학으로 제시한 애니미즘은 그 자신의 아마존 경험에서 출발하여 바로 이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애니미즘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도 인격이며 사회적 관계의 항이라는 발상을 근본적인 전제로 삼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토테미즘과 반대로 애니미즘은 인간 내적인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 자연의 다수성(多數性)을 사용하는 분류체계이며,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범주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계열(série)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열—인격의 계열—이 존재하게 되며 ‘자연’과 ‘문화’ 간의 관계는 은유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환유적인 인접성에 속하게 된다.

 

나로 말하자면, 야생의 사고와 지나치게 결부된 관념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야생의 사고』에 포함된 토테미즘과 공희(供犧)의 (이 책의 8장 및 9장을 참조할 것) 극히 문제적인 대립이라는 ‘마이너’한 극을 논했다.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과 카니발리즘을 분석할 때 공희의 축에 놓은 것(레비-스트로스의 의미에서)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 쪽에 두었다. 그리고 대략 이러한 개념상의 ‘동의어’ 덕분에 우리 작업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공희의 환유로 향했다. 이 방향에서 분류적인 이성과는 ‘다른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조주의의 중심적 개념의 조합적인 것도 아날로지적인 것도 아닌 해석을, 변용이라는 해석을 지향했다. 그렇게 나는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저자와는 다른 궤도를 밟아갔다. 데스콜라는 『야생의 사고』의 프로젝트를 확장하고 더 풍부하게 만들고자 했다. 토테미즘의 관념을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종적(種的)인 의미에 한정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이 관념은 결국 의미작용의 활동성의 동의어에 불과했다) 그것을 존재론의 하나의 타입으로 변용해버렸기 때문에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의 연역절차는 명확하게 ‘공희적인 것’이 아니라 ‘토테미즘적인 것’(레비-스트로스의 본래의 의미에서)으로부터 촉발되고 있다. 데스콜라는 그의 대상을 닫힌 조합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실천의 도식의 유형학을—세계와 타자와의 대상화의 형식을—유한의 구성요소의 규칙에 따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날로지주의자적’임과 동시에 ‘토템주의자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우주론에 기여한 공헌의 특수성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을 두 개의 하위타입으로 분할한 것, 즉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의 토테미즘으로 분할한 것에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지주의의 정의는 일련의 문명화된 현상과 스타일에 (특히 일찍이 ‘야만적’이라고 불려왔던 민족의 그것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아날로지주의는 무엇보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에서 주장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 책은 엄청난 고증학적 지식과 섬세한 분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론과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아날로지주의자적인 것이다. 그는 전체적 분류로 기울어져 있고, 동일화로, 대응시스템으로, 성질로, 미크로코스모스-매크로코스모스적인 투영의 도식을 편향적으로 선호한다. 실제로 [책의] 구성을 보면 데스콜라의 시스템이, 그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네 개의 존재론에서 하나를 우세하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동일화시키는 사고 자체가 아날로지주의자의 사고인 것이다. 애니미즘주의자적인 정신 혹은 자연주의자의 뇌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령 퍼스펙티브주의적 사고이며, 바로 이 책이 그 하나의 비전이다.

 

내가 이 책에서 설정한 문제는 구조주의를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도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스콜라가 해명하고 넘어선 도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야생의 사고』를 『말과 사물』과 동일시한 후에 그것[『야생의 사고』]을 다시 쓴 것이다. 반면, 내가 최근에 시도한 도전은 『천의 고원』을 통해 그동안 인류학에서 잊혀져왔던 모든 것들을 되새기면서 그것들을 토대로 『신화학』을 재독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분류가 가진 문제성에 알레르기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로고스중심주의성과 그만큼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우리 인류학자는 기분상으로는 모두 아날로지주의자이다.… 이 의미에서 퍼스펙티브주의자는 분류적인 리비도의 재중복화 혹은 ‘강도화’이다. 이 특징적인 문제는 분류된 것이 분류하는 것이 될 때 무엇이 생성되는지를 정식화하는 만큼 그러하다. 문제는 자연이 그 속에서 분할되는 종을 질서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종들이 스스로 이러한[질서화] 작업을 하는지를 알 게 될 때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있다. 이에 대해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그 종들은 어떠한 본성을 가졌을까?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정확하게는 같은 의미인데—우리가 선주민에게 인류학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때 무슨 일이 생길까?

 

 

5.

 

그리하여 ‘사회’ 혹은 ‘문화’ 인류학은 ‘형질’ 혹은 ‘자연’ 인류학과 대비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류학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인류학이 연구하고 있는 민족에게 ‘사회’ 혹은 ‘문화’의 위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민족에게 인류학이란 어떤 것인가—그 민족이 행위자이고 이론적인 수동자[피관찰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인류학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학을 만드는 것이 인류학을 비교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뜻한다. 물론 비교만이 우리의 분석의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비교는 우리의 최초의 수단이자 최후의 지평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항상 이미 반드시 구조적인 방법과 같은 의미에서의 비교였고(『신화학』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비교), 모든 변용의 대상은 반드시 다른 것의 변용일 뿐이었고, 오리지널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가 모두 변용에 이른다면, 비교란 변용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문화가 스트라샌의 화려한 과정적 정의(1992c: 47)처럼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의 다른 영역 사이에서 아날로지를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면, 모든 문화는 거대하고 다차원적인 비교장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인류학이 와그너가 말한 것처럼(1981: 35), ‘문화를 문화의 통역에 의해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의 탐구를 특징짓는 조작이란 어떤 것이든 문화의 일반적 성질이어야 한다’. 결국 인류학자와 선주민은 ‘직접적으로 비교가능한 지성의 조작’ 속에서 서로에게 관여한다(Herzfeld 2001: 7). 그러한 조작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비교이다. 문화 내부의 관계 혹은 내적인 비교(스트라샌이 말한 ‘영역 사이에서의 아날로지’)와 문화 간의 관계 혹은 외적인 비교(와그너가 말한 ‘문화의 발명’)은 엄밀하게 존재론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비교가능성은 반드시 직접적인 번역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존재론적인 연속성은 인식론적인 투명성을 함의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아마존의 민족들이 탐지하는 아날로지를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를 원주민의 비교와 비교할 때에 우리의 비교에 무엇이 생성될까?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적인 인류학을 원용함으로써, 다의성(多義性)의 관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교라는 우리의 아카데믹한 인류학에서 상징적인 절차를 재개념화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는 조작이란 관찰자에 의해 이뤄지는 동등하게 외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둘 이상의 복수의 실체들 간의 명확한 비교는 아니다. 그것은 정수를 찾아낸다거나 입법적인 가치를 갖는 변이(variation)를 동일시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히 이것은 인류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절차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장치에서 다수 가운에 하나, 즉 인류학적 방법에서 하나의 ‘통제적 규칙’에 불과하다. 반대로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비교는 방법의 ‘구성적 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개념적 장치와의 연관에서 ‘관찰되는 것’의 실천적이고 담론적인 개념의 번역이 포함된 절차이다. 따라서 비교에 대해 말할 때에 우선 다뤄지는 비교란 종종 불명료하고 자동적인—그 설명 혹은 논점화는 방법의 중요한 계기이다—비교이며, 그 속에서 인류학자의 담론이 그 하나의 항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으며 필드워크나 민족지적인 모노그래프의 독해가 처음부터 기능하는 그러한 비교이다.

 

비교의 이 두 개의 양상은 등가적인 것도 별개의 것도 아니다. 그 제1의 조작은 통상 권장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대립적인(그것은 제2의 조작을 부각시킨다) 대상화적 삼각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며, 관찰된 자에게 충분한 속성적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큼은 알차다. 여기서 추려진 삼각형은 참된 삼각형이 아니다. 2 더하기 1이 필연적으로 3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류학자(‘1’이다)가 자신의 문화와 다른 둘 이상의 복수의 문화—그것들은 서로 다르다—의 관계항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카친족과 누어족을 비교할 때, 그는 항상 카친족과 누어족의 요구에 따라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비교의 무대에서 사라져 그 자신이 카친족 혹은 누어족으로부터 [누구인가를] 문제제기를 받는(부여받는) 것을 비가시하고 마치 이 양자가 스스로 비교를 행하는 것처럼 하는…그러한 관점을 행한다. 이와 같이 카친족과 누어족은 인류학적인 담론 내부에서 발생한다. [인류학자들이라는] 다른 사회문화적 실체로부터 제기된 문제의 의해, 그들이 비교가능해진 사회문화적 실체라는 공통의 대상성을 부여된다. 그러한 타(他)의 실체는 비교라는 움직임의 규칙을 규정하면서 유비 없이 이 움직임의 외부에서 출현하고 만다. 만약 이 논의가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발상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면, 그것은 나의 논의가 바로 그 발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의 억견(臆見 doxa)과는 반대로 비교에 의해 복수화가 산출한, 대상에 내재한 대칭성이란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의 대칭성에 관한 마법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주체는 비교의 순수정신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숨겨진 타(他)의 비교—앞서 언급했다시피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와의 관계에 포함되는 비교—는 그 자체로 판명될 수 없다.

 

이러한 포함이야말로 ‘번역’이라 불린다. 오늘날 문화적인 번역을 인류학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투적이다. 물어야 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이 번역이며 번역일 수 있으며 번역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조작은 어떻게 실현하는가? 이다. 이 속에서 바로 타랄 아사드(Talal Asad 1986)가 제시했듯이, 내가 책임을 진(번역한) 말에서 사태는 복수가 된다. 인류학에서 비교는 번역의 역할을 맡는다. 그 역은 옳지 않다. 인류학은 번역을 위해 비교를 행한다. 인류학은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일반화하고 해석하고 맥락화하고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 비교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속담처럼 번역이 언제나 배신이라면, 그 이름을 고치는 번역은—여기서는 발터 벤야민(혹은 오히려 루돌프 판비츠(Rudolf Pannwitz))을 차용한다—도래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며, 출발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이란 버려진 개념이 번역자의 개념적인 장치를 뒤틀고(déformer) 전복시키는 번역이다. 원 장치의 의도는 그 속에서 해명되며, 그리하여 도래하는 말은 변용된다. 번역, 배신, 변용. 구조인류학의 이 과정은 주지하다시피 ‘신화’라고 불린다. 그것[‘신화’]은 ‘구조인류학’의 동의어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를 번역하는 것은 우선 그것이 포함하는 번역의 이마주를 번역하는 것이다. 억제된 다의성의 이동이라는 이마주가 그에 해당한다. 여기서 ‘억제된’이란 걷기를 억제된 낙하로 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의성에 대한 주장이며, 즉 동의어적인 개념 사이에서 타성(他性)을 참조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다의성은 무엇보다 다른 퍼스펙티브적인 위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서, 인류학적인 시도의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로서 나타난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선주민적인 이론은 다양한 양식의 신체성이 ‘자연적으로’ 세계를 정동적인 다양성으로 경험하는 방식 속에서 암묵적인 비교로 이뤄진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이론은 우리에게 역립(逆立)된 인류학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타입의 심성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표상하며 그러한 세계가 그 다양한 개념적인 비전의 유일한 기원으로 정립되는 방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민족인류학이 명석한 비교에 의한 절차에 따르는 한. 이제 퍼스펙티브주의적인 문화주의자의 기술(記述)이 부인하고 탈정당화는 것은 인류학적 이성이 자신의 대상을 원초적 혹은 물신화된 형태로서 회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반(反)- 혹은 전(前)- 인류학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개념은 이러한 역립의 역립을 주장한다. 이제야 그것은 선주민의 주변을 에워싼다. 선주민의 전회. [이것은 물론] 아담 쿠퍼(Adam Kuper 2003)가 거대한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운동—그것은 ‘근대의 선주민화’(Sahlins 2000)가 말했던 반성적인 위치의 이동을 뒤집는 것인데—에 대해 비꼬는 투로 말한 ‘선주민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그것은 전회(turn)이며 거스르는 것, 카이로스[각주:4], 덫, 우회, 예기치 않은 전회이다. 토마스 하디가 아닌 퍼스펙티브의 예술을 소비한다. 천재 헨리 제임스가 중요하다. 선주민의 전회란 (우리 중 몇몇 동료가 가끔씩 즐기는 선주민 헐뜯기가 아닌) 나선형의 전회여야 한다. 아담 쿠퍼의 퍼스펙티브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역사는 실제로는 괴담이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주의적이고 인지적인 인류학 혹은 (어느 날 내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르(Patrice Maniglier)에게서 들은 말로) ‘또 다른 인지주의’ ……

 

 

6.

 

그러나 최후에 남는 문제는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앤틸리스(Antilles) 제도의 우화이다. 그것은 다만 퍼스펙티브주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퍼스펙티브주의자이다. 그것은 간종적(間種的)인 퍼스펙티브주의를 주제화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복수(複數)의 신화에 대한 (하나로 수용되지 않는) 역사적 수용으로 읽힌다. 나는 이 서사를 다음과 같이 몽상했다. 즉 주인공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어느 낯선 마을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주민들은 그를 환영해주었고, 그에게 호리병에 든 ‘카사바의 술’을 마시고 다시 젊어지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민들이 그에게 건넨 호리병 안에는 인간의 피가 들어있었다. 그의 결론은 이 무리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우화는 커뮤니케이션의 분리=이탈의 주변을 순회하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화자들은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것을 알지 못한다(푸에르토리코의 우화의 경우에서 ‘대화’는 상호적인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가 세운 비교추론의 평면과 관련된다). 모든 것은 마치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사물에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같고 서양인과 선주민 또한 같은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대화’란] 자기기술적인 개념이 타자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자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양인과 선주민이 개념을 규정하는 기준(의도)으로서 이해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역사도 신화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의 주변을 맴돈다.

 

잘 생각해보면, 앤틸리스 제도의 우화는 민족지적인 문화 혹은 우리 자신의 필드워크의 메모에서 보이는 수다한 우화와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그것들은 무엇보다 인류학적인 시추에이션 혹은 사건을 다룬다. 예를 들어 쿡 선장의 그 유명한 최초의 에피소드에서 마샬 살린스가 분석했듯이(1985), 푸에르토리코의 교착된 경험의 구조적 변용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두 개의 프로토타입과 관련된다. 아마존의 선주민에게서 보면, 간(間)문화적인 것이란 간종적(間種的)인 것의 특수한 일례일 뿐이며, 역사란 신화의 일례일 뿐이다.

 

강조해두겠다. 다의성이란 인류학자와 선주민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협하는 수많은 병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적인 무능력, 맥락에 대한 무지, 공감의 결여, 부작법(不作法), 순진무구, 악의, 망각 등의 인류학적인 언명화를 경험적으로 헤매는 모든 뒤틀림(déformer)과 태만이 아니다. 이러한 우화적인 병리와는 반대로 다의성이란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범주이며, 인류학에 고유한 문화적 번역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차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정적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인류학적인 담론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그 실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즉 권리상의 의문이다). 번역이란 다의성의 공간으로 자신을 던져 놓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다의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번역의 전제는 다의성이 결코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반대로 번역은 다의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잠성화(潛性化)시키기 위해, 즉 접촉하는 ‘언어’의 실재하지 않는다고 상상된 공간을, 즉 다의성에 의해 은폐된 공간을 개방하고 확장하기 위해 행해진다. 다의성은 관계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근거를 마련하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차이이다. 번역이란 언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다의성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며, 근원적인 일성성(一聲性)과 궁극적인 장황성(冗長性 redundancy)을 상정함으로써 타자를 침묵 하에 보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있는 곳의 것과 우리가 ‘그렇게 서술하고자 했던’ 것 간의 본질적인 유사성이다.

 

허츠펠드(Michael Herzfeld) 씨는 최근 다음과 같이 논했다. “인류학은 다의성(무이해)에만 전념한다. 인류학자인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다의성도 포함해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의성이란 일반적으로는 공통하는 의미를 가진 다양한 관념 간의 상호적인 통약불가능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통의 의미를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2003: 2)라고. 나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인류학자가 (권리상)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허츠펠드가 ‘공통하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 바로 공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 의한 것뿐이라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는 또한 문제로 삼는 ‘관념’의 통약불가능성은 통약불가능성을 방해하기는커녕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하겠다(람벡(Michael Lambek)이 제기한 것처럼). 왜냐하면 통약불가능성만이 구태여 비교되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통약가능한 것을 비교하는 것은 상호 가능한 것으로 귀환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결국 무이해는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가 찾아내어 다의성의 의미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다의성은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해석의 결여’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해석의 ‘과잉’이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해석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이 해석들은 필연적으로 다수적이며, 세계를 보는 상상적인 방식이 아닌 보이는 실재의 세계와 관련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실제로 다른 종의 실재적 세계는 각각의 시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세계’는 이렇듯 다양한 종(種)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점으로서 각각의 종의 다수성의 추상공간이다.

 

그리하여 인류학은 다의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inter/esse라는 간(間)존재, 간(間)실재라는 자의적인 의미에 놓인다. 그러나 로이 와그너(1981: 20)가 말했듯이, 뉴기니의 다리비 족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이해하지 않는 그들의 방식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않는 방식과 같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제시한 인류학의 정의들 중 가장 적합한 정의일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무이해라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쌍방의 무이해가 같지 않다는 ‘초월론적 사실’에 있다. 따라서 누가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누가 누구를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중요치 않다. 다의성은 착오가 아니며 멸시도 아니며 오진도 아니다. 그것은 다의성을 포함하는 관계성의 근거 그 자체이며, 외부와의 관련 속에 늘 있다. 착오와 멸시가 그 자신으로서 구성되는 것은 주어진 ‘언어의 움직임’일 따름이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언어의 다른 움직임들 간의 간극 속에서 생성된다. 착오와 멸시는 다시금 구성되는 전제를 상정하며, 등질적으로 구성된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문제를 일으키는 전제의 이질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고 전제로서 이질성을 상정한다. 다의성은 전제를 규정한다. 왜냐하면 전제가 다의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다의성은 변증법적인 모순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다의성의] 총합은 이접적이며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더 다른 다의성을 규정해야 한다.

 

다의성이란 결국 주체적인 실패가 아닌 객체화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착오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물상화된 혹은 물신화된 언어에서 객체화의 상상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닌 다의성은 모든 사회관계의 경계이며, 그리하여 언어의 움직임이 최대한 다수화하는 ‘간문화적(間文化的)’인 관계의 경계의 사례에서 초객체화된 조건이다. 이러한 다수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류학자의 담론과 선주민의 담론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문화에 관한 인류학자의 개념은 와그너가 논한 것처럼 다의적이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해결의 시도로서 나타난다. 다의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를, 그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으로 상상할 때 산출되는 패러독스”(1981: 27)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고로 ‘오해’가 ‘이해’로 자기변용할 때, 인류학이 맨 처음의 자신의 무이해를 ‘그들의 문화’에서 선주민의 주제로 변용할 때, 그리고 백인이 ‘원산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상품’인 것을 선주민이 이해할 때, 그러할 때조차 다의성은 동일성이 되지 않는다. 타자의 타자는 언제나 타자이다. 그리고 만약 다의성이 오진, 환상, 거짓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적인 실증성의 형성 그 자체라고 한다면, 그에 대립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초월론적인 의미의 실재를 희구하는 일의적인 것이다. 착오나 환상은 무엇보다 각각의 다의성의 이면에 일의적인 것을 숨긴 것이며, 인류학자는 [자신을] 그 복화술사로 상상한다.

 

 

7.

 

따라서 무엇보다 우선 선주민으로 회귀하는 것 이상으로, 혹은 그것과 별개로 의문이 생긴다. 만약 회귀가 있다면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이며, 철학의 전면적인 회귀이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그것들은 우선 동의어일까? 그렇다면 좋다!) 간의 배타적인 양자택일이 아니라 실험형이상학 혹은 필드의 철학지리학으로 이해되는 인류학과, 개념을 창조하는(들뢰즈&가타리 1991) 고유의 에스노인류학의 실험으로 이해되는 철학과의 이접적 총합으로서 회귀이다. 이 인류학과 철학의 횡단화는—이것은 『천의 고원』의 저자가 ‘악마적 결연’으로 지명한 것인데—같은 목표를 향해 설정되어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상태(어떤 내포의 고원)에 진입한다.

 

사회인류학이나 문화인류학이 훨씬 이전부터 근본적 및 전체적으로 철학적 문제와 개념에 의해—특히 무엇보다 ‘신화’라는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그 문제에 이르기까지—횡단해온 것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철학으로부터, 즉 인류학의 문화적 매트릭스로부터 어떻게 멀어졌는가를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극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학자가 철학자와 결코 단절하지 않고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과 구태여 맺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라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무엇이 가능한가? 칸트를, 하이데거를,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면서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용의 평면에서 직접적인 평행성을 설정하는 것도 우선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마존적인 우주론에서 본질의 세계와 현현(顯現)의 세계 간의 다의적인 유사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플라톤의 독해로 이끌릴 수 있다(그러나 그 유일한 관심은 이 선주민의 플라토니즘이 얼마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가를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야생의 사고가 우리에게 부여한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류학이 연구해온 집합성에 의해 발견되는 수많은 복잡한 기호실천적인 배열 속에서 우리가 착목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며, 특히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다. 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서 파악되는 파동을 전파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로서 그것을 선택했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는 인류학적 담론에 의해 재총합되는 대상이다(굳이 말하자면, 선주민의 이론에서 실천적인 방식으로 이 정도까지 알찬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메리카의 어느 민족지학자가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과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어느 선주민이 되는 것, 이 둘의 만남의 결과이다. 선주민이 되는 것,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천의 고원』의 생성에 대한 장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내가 소리 높여 선언했듯이 “선주민들은 들뢰즈주의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렇기도 하다라는 것은 우선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을 선주민의 사고로 두드려 보면 공허한 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들뢰즈에 의해 특권시된 일련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 속에서 비주류의 계보 속에 있는 만큼 그 전통의 외부끼리의 연대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지 않다. 선주민은 들뢰즈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칸트주의자이기도 니체주의자이기도 베르그송주의자이기도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이기도 메를로-퐁티주의자이기도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프로이트주의자이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레비-스트로스주의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버마스주의자이기도 한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분명 ‘문제는 질 낮은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자연주의자의 반(反)인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철학을 야생의 사고의 빛에 비추어 읽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의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가 되는 것, 이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 밖의 사고와의 만남을 위해 저 밖을 사고하며, 다른 끝으로 향하는 것(그러나 중국을 사고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고의 경험은 모두 우리의 사고의 경험이다.

 

 

 

  1. 이마주는 프랑스어로 어떤 사물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상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베르그송은 이 말을 자신의 현상학적 용어로 개념화한다. 베그르송의 이마주는 표상과 실재의 중간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2. 명제적 표상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식표상을 가리킨다. 즉 주체, 대상, 시간 등이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나는 추상도가 높은 표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토 쪽은 시간상 한쪽 공간만을 선택해야 하는 산책길의 두 갈래로 나뉜 각각의 방향을 뜻한다. [본문으로]
  4.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시각’을 뜻한다. 이와 대조되는 말로 크로노스가 있다. 크로노스가 과거에서 미래로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흐르는 기계적인 시간을 뜻한다면, 카이로스는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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