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펙티브주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으로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조금 어렵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고 그의 사상의 심오함에 매료될 것이다. 그의 논리가 명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사상보다 그의 시야가 훨씬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      

 

 

퍼스펙티브주의

 

1.

 

타니아 스톨츠 리마(Tânia Stolze Lima)와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는 관념을 제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학의 행적을 재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이념과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재형상화하는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는 이 지적혼란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이 표현이야말로 적절하다). 그 속에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적인 개념이 덧붙여지는데, 이 개념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현대철학의 어떤 프로그램의 의외의 파트너—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암약하는 선구자—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가능세계의 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 근대성의 엄청난 이항대립의 외부에서 일거에 만들어진 것, 혹은 모든 존재론적인 물음에 인식론적인 회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비판주의의 헤게모니의 종언을 확실히 고하며 ‘초월론적 경험론’과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깃발 하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고의 도주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포식의 형이상학’을 우주론적으로 상정한 분석을 통해 명확해진다. 레비-스트로스의 요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이 형이상학은 결연관계를 보여주는 선주민의 범주의 강력한 사변적 생산성에서 그 가장 높은 표현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다른 개념, 즉 잠재적인 결연관계라는 개념으로 번역했다. 잠재적인 결연관계란 들뢰즈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의 ‘타자의 구조’라고 불렀던 특징적인 도식주의를 뜻한다. 즉 그것은 카니발리즘=식인이라는 기호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며, 이 세계의 주민을 상상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종들 간의 퍼스펙티브주의, 존재론적인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이 선주민의 또 하나의 인류학의 세 측면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서양의 인류학과 대칭적인 반대방향의 변용이다—여기서 대칭적이라는 것은 라투르의 의미에서이며, 반대방향이라는 것은 와그너의 반전(reverse)의 인류학의 의미에서이다. 이 삼각형을 그려냄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우리[의 철학]’의 대극에 있는 ‘이국적인 사람들’의 철학의 윤곽을 분명히 묘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가타리 1991)의 제4장(「철학지리학」)에서 착수한 압도적인 프로그램을 현실적인 것으로 시도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례에서 가령 방법론적인 모호함이나 의도적인 다의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해도—언제든 그러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우리는 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2.

 

이 작업은 완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즉 현실에 내재하는 퍼스펙티브라는 다양체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아마존의 코스모폴리탄성에 관해 우리가 행한 탐구의 결과와 레비-스트로스가 『인종과 역사』에서 보고한 아메리카 대륙정복의 주제로 잘 알려진 우화 사이에서 어떤 공명이 인다는 것을 불현듯 간취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몇 년 후 앤틸리스 제도에서 스페인인이 선주민들에게 혼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물에 담가놓으려 했다. (레비-스트로스 1973/1952: 384)

 

이 저자는 이 인류학적인 갈등 속에서 어떤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찾아내었다. 즉 인간본성의 전형적인 출현이란 그들 자신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선천적인 탐욕은 인간성이라는 속성을 하나의 전체의 종(種)으로 확장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인데, 그러한 탐욕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인간성이라는] 속성 중 하나이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란 상식(필시 그것은 단지 통각이라는 계기에 불과하지만)과 같은 것이며 더 잘 분할된 세계의 문제이다. 교훈이 친숙하다고 해서 교훈의 엄숙함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같음에게서 다름은 (선주민의) 다름에게서 다름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나타나며, 같음은 부지불식간에 다름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분명 이 우화에 매료되었고 『슬픈 열대』에서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보족적으로 짓궂은 주름을 삽입한다. 양자 간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며, 타자의 인간성에 관한 조사에서 서양인은 사회과학을 채용하는 반면 선주민은 오히려 자연과학을 신용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선주민이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전자의 주장에 반해, 후자는 서양인이 신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남기며 끝낸다. “나의 결론은 [양자가] 모두 무지하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선주민]의 행동이 더 인간에 적합하다”(1955: 81-83). 만약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례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타자에 관해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해도, 다름의 다름은 같음의 다름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참은 그 반대일 것이다. 실제로 선주민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관한 두 타자—동물성과 신성(神性)—간의 관계성은 우리가 기독교로부터 승계받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사적인 대비는 타이노의 우주론적인 위계보다 오히려 우리의 그것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다.

 

여하간 이것은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매개(중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끌어내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존재론의 체제는 서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체제와 다르다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신체와 마음에 대해 역전의 기호작용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앤틸리스 제도[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스페인인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차원이지만, 선주민에게 그것은 신체이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가진 것을 (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가진 것을 (동물이나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한지를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나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3.

 

로이 와그너(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이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매개가 된 멜라네시아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신체는 생득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존재론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자연’)의 차원에 속하며, 그러한 차원은 ‘관습적’인 기호화조작의 반(反)-발명적인 결과이다. 그에 반해 마음은 구축되는 차원에 있다. 그것은 ‘분화하는’ 기호화의 산물이며 “근본적인 구별을 넘어서거나 이 세계의 특이한 개체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관습적인 세계를 명시하거나 구체화한다”(Wagner 1981: 42). 한편 선주민의 세계에서 혼은 “모든 사태에 관한 암묵의 습관적인 질서의 출현…으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혼을 가진 자가 타자(존재)와 비슷한 양태를 총합하며 나아가 그 양태의 피안에서 혼을 가진 자는 그들[타자]을 차이화한다”(같은 책 94). 반대로 신체는 행위자(agent)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생득적인 기반이나 ‘내재적인 인간성’의 보편성에 대항해서 만들어 내야하는 근본적인 형상이다(같은 책 86-89). 첨언하면, 서양인들의 실천은 소여의 신체-물체(자연)의 기반으로부터 ‘혼을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문화를 분화하는 것)에 있다. 그에 비해 선주민의 실천은 소여의 사회-정신의 연속성으로부터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공간을 분화하는 것)에 있다. 후에 살펴보듯이 그것은 신화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된다.

 

와그너의 이론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치밀하고 매우 독창적이며 계몽적인 요약을 거부한다. 독자들에게 『문화의 발명』(Wagner 1981)의 일독을 권한다. 그 책의 설명은 매우 세밀한 동시에 성공적이다. 거칠게 말하면, 와그너의 기호론은 (인간 그리고 아마도 비인간에 관한) 실천의 이론이다. 그것은 상징화의 두 양태를 상호 재귀적으로 조작하면서 실천을 철저하게 일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실천이란 ⑴ 습관적 내지는 집합적인 (문자기호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그 속에서 기호는 ‘제시 대상’의 이질적인 평면으로 거슬러가는 한에서, 즉 기호가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고 간주되는 한에서 표준화된 맥락(의미론, 형식언어의 영역)에서 조직된다. 그리고 ⑵ 차이화하는 혹은 발명적인 (구체적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습관적인 상징화에 의해 표상되는 현상의 세계는 관습적인 대립을 소멸하면서 ‘그 자신에 의해 표상되는 상징’, 즉 상징과 제시 대상으로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선 주시해야 하는 것은 제시 대상의 세계—‘실재’—가 여기서는 기호론적인 효과로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기호의 타자란 ‘스스로를 표상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춘 다른 기호이다. 사건 내지는 기회로서의 현세적(現勢的)인 존재자의 존재양태는 토테고리(tautégorie)[각주:1]이다. 나아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양태 간의 대비는 그 자체가 관습화한 조작(그리고 지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발명과 관습의 구별은 그 자체가 관습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관습은 반(反)-관습으로부터 산출된다. 이 대비는 따라서 내재적으로 재귀적이다. 특히 인간문화는 근본적으로 상징화의 양태와 대립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문화는 ‘소여’의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행위와 발명에 대해 획득된 요소를 (습관적으로) 중시한다. 문화(관습에 대한 인간의 마이크로한 체계)는 행위자(agent)의 책임영역(‘구축된’ 세계)에 속한다고 정의됨으로써 상징되며, 나아가 ‘소여’인 비-구축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귀속으로서의 반(反)-구축이다)에 의해 상징된다.

 

문화적인 관습의 모든 총체의 핵심은 어떤 단순한 구별 속에 있다. 즉 비-관습화되거나 관습 그 자체의 비-관습화인 맥락의 타입—이것들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연히 분절화된다—, 그리고 ‘소여’ 내지는 ‘생득’이라는 관습적인 겉치레 하에서 ‘동기’로서 반(反)-발명되어야 하는 맥락의 타입 간의 구별이다. 본질적으로는 […] 두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동기 지어진 집합체(사회와 그 관습)를 ‘생득’으로서 항상 반(反)-발명하는 분화하는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사람들, 그리고 분화하는 동기를 반(反)-발명하는 집합적인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자들이다. (Wagner 1981: 51)

 

 

4.

 

앤틸리스 제도의 사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인류학의 교차배열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구별되기 시작하는 두 특징과 분명하게 일치한다. 첫째, 그는 예상외의 방법으로 애니미스트로서 새로운 (조금은 일방적이라고도 생각되는 방법으로) 정의된 존재론의 중심에 신체성의 이코노미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확인했다는 것은 이미 『신화학』에서 풍부하게 명시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즉 신화들의 변용의 어떤 신화적 변용이야말로 목적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엄격한 데카르트주의자와 변덕스러운 라블레주의자[각주:2]를 연결하는 하나의 산문이다. 그것은 비교에 의한 법신학적인 음울함(우리 분야를 만들어내는 권리와 의무, 질서와 원리, 범주와 ‘도덕적 인격’을 떠올려보자)에 의해 고통 받았던 우리 자신의 인류학의 망령과 같은 용어로 설명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器官)의 흐름과 물질적인 코드, 지각의 다양성과 동물로의 생성 등의 관점으로부터 형상되는 선주민의 인류학이다. 둘째, 그 덕분에 존재자의 잠재적인 차원(‘마음’)의 흔적 혹은 총칭 없는 지위에 관한 이론적 함의가 일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선주민의 지(知)의 구조적인 힘에 관한 주요한 전제로서 서양 인류학에 의해 묘사된 그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다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놓쳐버린 이미지를 쫓아내었다’. 이 이중의 비틀림, 즉 일상적인 실천에 부착된 물질주의와 사변적인 것, 애니미즘에 관한 심리주의자와 실증주의자라는 이중의 비틀림이야말로 라이프니츠, 니체, 화이트헤드, 들뢰즈에서 볼 수 있는 이러저러한 이름표와 연결된 철학적 명제와의 (적어도 증명됨과 동시에 구축되는) 유사함의 명목으로 우리가 ‘퍼스펙티브주의’라 부른 것이다.

 

 

5.

 

다양한 민족지학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거의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지적했을 뿐이지만—, 신세계의 많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란 시점(視點)의 다양성에서 구축된 것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 모든 존재자는 지향성의 중심이며, 그들은 다른 존재자를 그들의 특성과 각각의 능력에 의해 이해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제와 귀결은 가장 먼저 떠올릴 상대주의의 잘 알려진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은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간의 대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평면으로 정리된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관점에서 본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러한 저항은 한창 논쟁중인 존재론적 분할의 이식가능성을 의문시한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는 서로 달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 간의 분할—학문에서 마치 헌법의 제1조와 같으며, 그 속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의 오래된 모습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을 비서양의 우주론의 특정한 차원과 내재적인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한다면, 엄격한 민족학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자연’과 ‘문화’라는 두 범형과 나란한 속성, 즉 보편과 특수, 객체와 주체, 물리현상과 도덕, 사실과 가치, 소여와 창설된 것, 필연과 우연,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지도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의 우주론에 대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 특유한 표현을 지시하기 위한 ‘다자연주의’라는 표현을 활용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전자는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간의 상호 함의를 근거로 삼는다—한편으로는 신체와 실체의 객체적 보편성에 의해 보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시니피에(記意)의 주체적 고유성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인데, 아메리카 선주민의 개념은 그 반대로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양성을 상정한다. ‘문화’ 내지는 주체가 보편성의 형식을 그려내고 ‘자연’ 혹은 객체가 개별의 형식을 그려낸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민족지에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이러한 다양한 타입의 액터(actor)와 주체적인 행위자(agent)—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후학적인 현상, 많은 경우에 대상, 그리고 인공물—가 정착한 세계를 기술하는 코스모폴리틱한 이론에 대한 참조로 넘쳐난다. 이것들 모두가 퍼스펙티브, 욕구, 인지를 배치하는 전반적인 총체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혼’과 유사한 것을 부여한다. 이 유사함은 거의 수행적인 통각의 동일한 양태를 포함한다. 즉 마음을 가진 동물과 그 외의 비인간은 ‘자신을 인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다’. 즉 지향적인 대상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측면을 가진 대상의 구성은 사회와 실재의 관계성에 의하며, 그것들은 재귀적이고 상호적으로, 즉 집합적인 대명사의 이중의 양태 하에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인간이 보는 것—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또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 제기된 철학적인 문제이다.

 

혼의 유사성은 이 혼이 표현하거나 지각하는 것과의 대립을 포함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 정령, 그 외의 우주적인 액터를 보는 방법은 이러한 존재자가 인간을 보거나 스스로를 보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이 토톨로지(Tautologie 동어반복)는 퍼스펙티브의 영도(零度)이다. 전형적인 인간, 그것도 규범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며 동물을 동물로서 이해한다. 정령에 관해 말하면,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를 보는 것은 그 ‘상태’가 규범적이지 않다—병에 걸렸다거나 트랜스상태이거나 다른 부차적인 상태이다—는 것을 분명히 뜻한다. 사냥감은 인간을 정령이나 포식자로 보지만, 포식동물과 정령 측에서 보면 인간은 사냥감이다.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인간을 맥[각주:3]이나 멧돼지로 보고 죽인다’(Baer 1991: 224). 우리가 비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은 바로 그 자체로(그 각각의 동종의) 동물이나 정령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서 자신을 간취한다(혹은 생성한다). 그리고 그 버릇이나 특징은 문화적인 겉모습에 의해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음식을 인간의 음식과 같이 이해한다(재규어는 피를 옥수수 술로 보며,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는 등). 그것들은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식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으로 조직된다(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

 

조금 더 밀고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동물(대개의 경우 타자를 포함한 모든 것이며, 적어도 죽은 자를 포함한다)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비주의는 대개 재규어, 아나콘다, 독수리, 혹은 남미수리와 같은 대형의 포식자나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동물들이다. 또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들이다. 실제로 퍼스펙티브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이고 관계론적인 입장과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형이상학은 퍼스펙티브주의에 매우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그렇지만 그 상대적인 입장의 관계성 속에서 포식자의 힘의 서열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사실상의 인격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논점은 모든 동물종이나 존재의 모드가 그러하다는 것을 (권리상)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분류학(taxonomy), 분류, ‘민족-과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나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적(强度的)으로 인간이며, 잠재적으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신이 어떤 인간존재라는 것을 보여줄(인간존재로 변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잠세력이 문제이다. ‘인간인 것’ 그리고 ‘퍼스펙티브를 가진 것’, 그것은 정도, 맥락, 서 있는 위치의 문제이며, 어떤 종(種)인가라는 두드러진 고유성이 문제는 아니다. 어떤 비인간적인 존재는 다른 것보다도 더 완전한 방식으로 이 잠세력을 현실화하며, 나아가 그 가운데 특정한 존재자가 우리 종이 가진 잠세력보다도 더 우월한 강도를 가지고 그 잠세력을 보여준다. 이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이다(Hollowell 1960: 69). 게다가 이 문제에는 본질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aposteriori)한 (경험적인) 성질이 관련된다. 하찮은 존재자가 인간처럼 꾸밀 수 있는 더 적합한 행위자(agent)로서 (환상, 병마, 샤먼에 의해)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어떤 존재가 인격을 갖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어떤 우주론적인 도그마 이상으로, 무엇보다 ‘인격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존재자를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 그 무엇도 없다면—즉 생사회(生社會)의 다양체라는 점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규범이다. 즉 완전히 기묘한 것인데, 아마존 사람들은 무릇 있을 법하지 않은 형식으로 숨은 인간을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있을법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으로 보인다거나, 같은 종족이나 때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항상 가까지 있는 이웃에 대해 인간성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잘 알려진 자민족중심주의를 수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조건에 관한 우주론적인 독아론을 감수해왔던 옛 유럽(확실히 종(種)들 간의 간주체성이라는 위로를 통해 완화되고 있다)을 과감하게 탈마술화하는 고려로 향하면 우리가 다루는 이국적인 민족은 두 개의 유치한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게 된다. 즉 동족 간에 종종 매우 유사한 작은 차이와 완전히 다른 종들 간에 보이는 큰 유사함이라는 두 개의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그 속에서 타자는 무엇에도 이를 수 없다. 자민족중심주의와 애니미즘은 과대하든 과소하든 극단적인 것이다.

 

인격의 조건(인간의 형식이란 보편적인 통각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은 아마도 우리 종과 다른 집단을 ‘거절하는’ 바로 그 때에 다른 종에게 ‘확장된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개념—내재적인 잠세력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그 상위에 있다. 인간성이란 동족이라는 입장에 관한 것이며, 집단의 재귀적인 모드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인간성은 포식자 혹은 먹이의 원초적인 입장과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퍼스펙티브의 타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른 집단, 다른 인간적인 다양체를 휘감게 된다. 이 유사성과 동족성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어떤 특정한 포식자의 차이라는 단호한 미결정성으로서 생성되고 그에 선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친족관계의 프로세스는 바로 이렇게 구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착상을 주었던 것은 포식자의 내재적인 안정화로서의 ‘재생산’이며, 그 단호한 미완성이며, 베이트슨(혹은 발리사람)이 말한 것처럼 ‘강도(强度)가 지속하는 평면’을 상찬하는 방식이다. 카니발리즘을 다루는 다른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추산한 동일성이라는 발상을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의거해서 완전히 정식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니발리즘의 문제성은 … 습관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삶이 정착하게 될 포식의 하한선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84: 144; 1971: 617 참조)

 

이것은 바로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교훈을 응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유사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차이는 제로로 향해간다”(레비-스트로스 1971: 32). 주지하다시피 ‘향해간다’는 동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타자를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는 ‘무엇도 무효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그 개념의 힘을 완전히 개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한까지 최소화될 때뿐이다. 예를 들어 쌍둥이 간의 차이가 그러하다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철학자들은 말한다(레비-스트로스 1991).

 

 

6.

 

실제 비인간이 한편으로 비가시의 얼굴 형태를 한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의 다양한 차원에서 근저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맥락, 즉 샤머니즘에서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종들 간의 신체적인 장벽을 횡단하거나 이질적인 주체성의 퍼스펙티브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숙련된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이 자신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해내는 방식으로 샤먼이 그들[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낼 때, 샤먼은 종을 넘어선 대화에서 강력한 대화자의 역할을 확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서사를 말하기 위해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데, 그것은 속인(俗人)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접촉 혹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정치적 수완, 즉 일종의 외교를 요한다. 서양의 상대주의가 공적인 정치로서 다문화주의를 채용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먼적인 퍼스펙티브주의가 채용하는 것은 우주론적인 정치로서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어떤 인식의 모드를 함의한 행동의 모드이며, 혹은 오히려 인식의 어떤 특정한 이상(理想)이다. 그러한 이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양근대가 촉진한 객체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에 있다. 이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에게는 대상의 범주가 텔로스를 부여한다. 즉 인식하는 것은 ‘객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대상에 내재하는 것과 인식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힘이며,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부당하게 혹은 피하기 어려운 대상에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인식한다는 것은 탈주체화하는 것이며, 주체의 일부를 이상적인 최소상태로 감축하기 위해 객체 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일부를 명시하는 것이다(혹은 이목을 끄는 비판효과를 확보하기 위해 주체의 일부를 확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객체화의 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객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을 재인식한다. 그리고 주체는 ‘그것’이라고 하듯이 ‘외부로부터’ 자신을 생각해내는 데 성공할 때에 자신이 객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문다. 타자의 형식은 사상(事象)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완전히 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린다. 즉 인식하는 것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려져야만 하는 것의 시점(視點)을 입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상(事象) 속의 누구’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없다면, ‘왜’라는 물음에 지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 타자의 형식은 인격이다. 유행의 어휘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인격화 내지는 샤머닉한 주체화란 정신에 관한 현대철학자(내지는 현대정신에 관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지향적인 태도’를 보편화하는 경향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주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물리적’이고 ‘함수적’(Dennett 1978)인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의 인식론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완전한 객체적 표상에 이르기 위해 ‘주위의 지향성’을 영도(零度)로 감축하고자 하는 탐구를 저 멀리 하고, 완전히 그와 정반대에 거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인식은 시스템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행위자(agent)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통해, 지향성이 최대화된 상태에서 번득임을 조준한다. 샤머니즘은 정치의 기술이라고 우리는 주창한다. 오히려 이제는 정치의 기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샤머니즘적인 기술은 진정 각각의 사건을 행위로서, 즉 상태 혹은 무엇인가의 행위주체의 지향적인 속성의 표출로서 보는 데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성공은 대상이나 노에마(noema)[각주:4]에 속할 수 있는 지향성의 질서와 정비례한다. 하나의 실체 내지는 하나의 사상의 상태는 주체화, 즉 그것들을 인식하는 인간과의 사회관계의 현실화로 지연되지 않는다. 그것은 샤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즉 인식의 잔류물, 정확한 인식을 거스르는 ‘비인격적 요인’이다. 반복할 것까지도 없지만, 우리의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은 반대의 의미=방향을 갖고 있다. 즉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상식의 지향적인 태도를 편리한 허구로서, 표적으로 삼는 대상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요소를 물리적인 프로세스로 분해할 수 없을 때 채용하는 무언가로 생각한다. 모든 작용을 사건의 인과연쇄로 환원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농밀한 상호작용(특히 원격 ‘작용’)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근대의 자연주의적인 세계에서 주체가 불충분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객체라고 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인식론적인 습관이 따르는 것은 그 반대의 원리이다. 즉 객체란 불충분하게 이해되지 않는 주체이다. 여기서는 인격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기 위해서는 인격화해야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객체는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후자에서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식—하나의 정신의 형식,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주체와 분명한 관계성을 가지든지—즉 행위자의 ‘가까이’ 존재하는 무언가(Gell 1998)로서 규정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두 선택지에서 비인간적인 행위주체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식 하에서 지각한다는 이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초인간적인 주체성의 세계에 있는 ‘문화’의 해석 속에서 다양한 사건이나 ‘자연’의 대상을 사회의 행위주체성이 이끌어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무언가의 변용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다만 야만적인 사실이지만,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기술의 산물이며 고도로 세련된 행위이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에게는 ‘맥주’이며, 우리가 진흙이라고 보는 것을 맥은 멋진 의례의 장으로 경험한다, 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인공물은 이러한 모호한 존재론을 구비한다. 그것은 객체이지만, 필연적으로 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응고된 행위와 같은 것이며, 비물질적인 지향성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떤 것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타자에게는 ‘문화’이다.

 

이것이 선주민의 교훈이며, 인류학은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시방편의 교환—문제가 된 어휘에 손대지 못하는 단순한 기호 변화—을 위해 소여나 구축된 것의 미분/차이적인 배치를 빼앗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온전한 차이’(Wagner 1981: 51)라는 것이 있다. 노골적인 초월성으로서 실천, 반인류학적인 순수한 타자성—구축될 수 없는 것, 정착하지 않는 것, 관습이나 담론에 반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세계와, 인간의 형식을 몸에 걸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내재적인 인간성의 세계와의 차이이다. 이러한 선주민의 세계의 의인화된 가설과 근본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소여가 아닌 것으로서 소여가 아닌 존재로서 인간을 ‘구축한다’는 집요한 인간중심주의적 노력이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것까지 포함해서 서양의 철학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이국적인 민족의 나르시시즘의 천국(혹은 디즈니판 인류학)이라는 판타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인간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선주민의 세계를 가까이에 두는 것도 아니고 활기를 부여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해두어야겠다. 모든 것이 인간인 장소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자이다.

 

우리의 인류학이 꿈꾸는 더 많은 세계는 하늘 위와 땅 밑에 있다.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며 모든 관계성은 사회적인 것처럼 이 다방향성을 우리 세계의 환상처럼 기술하는 것, 그 첫 번째 발명을 두 번째 습관으로 환원함으로써 이 둘을 통일하는 것, 그것은 양자 간의 관계성의 매우 단순한—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하찮은—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용이함은 결국 모든 종류의 복잡함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론적인 일원론은 최종적으로는 인식론적인 이원론—에믹과 에틱, 은유적과 자의적, 의식과 무의식, 표상과 현실, 환상과 진리 등—을 비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리적으로 유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히 두 양상을 통일된 상태로서 각각의 주민 간에 하나의 변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분할은 단일자연주의적이다.

 

 

 

 

  1. ‘같음’을 의미하는 taut와 allegory를 합쳐서 만든 용어로 셸링(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이 신화해석에서 사용했다. 알레고리가 다른 주제를 유사에 의해 표현하는 반면, 토테고리는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2.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94?-1553?)는 프랑스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이야기 작가이다. ‘가르강튀아 이야기’ ‘팡타그뤼엘 이야기’를 발표하여 그 독특한 요설(饒舌)과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제자로서 온화한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서 본능과 자연에 입각한 낙천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역설했다. [본문으로]
  3. 맥(獏ㆍ貘)은 포유동물로 모양은 물소를 닮고 흑갈색이며, 남태평양ㆍ남미 등지의 밀림의 물가에 산다. [본문으로]
  4. 노에마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지향적 객관 혹은 지향적 대상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