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술술 읽힐 글이 아니다. 각 잡고 필기하면서 공부해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의 대략(http://sarantoya12.tistory.com/86)을 이해한 후에 최근 이 사상이 어떤 이론적 맥락에서 재평가되는지를 알고 나면, 적어도 왜 서구의 근대적 사고체계가 문제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 퍼스의 재평가가 철학(수학의 철학 Philosophies of Mathematics)과 논리학에 한정되어 있지만, 실은 기호학, 지식사회학, 정치철학, 인류학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있다. 예를 들어 ‘공생과 연대’로 나아가는 퍼스의 공동체주의는 존 듀이에게 계승되어 최근에는 걸출한 여성정치철학자들(현대의 프래그머티즘을 이끄는 학자들 중에는 여성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을 중심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또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호학이 핵심적인데 이 글에서는 다만 간략하게만 언급되어 있어 글의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다룬 책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두아르도 콘, 사월의 책, 2016년 9월 예정). 그 책이라면 퍼스의 기호학의 현재적인 학문적 의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체계의 핵심에 있는 데카르트주의, 그리고 데카르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플라토니즘. 퍼스의 사상과 그 사상을 복원한 현대의 사상가들이 이 데카르트주의와 플라토니즘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를 잘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제 서구중심의 근대세계는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우리는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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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프래그머티즘

맥베스(Danielle Macbeth)와 띠에르슬랭(Claudine Thiercelin)

 

 

퍼스 재평가의 조류

2014년은 퍼스 사후 백년이 되는 해였다. 또 퍼스보다 세 살 연하인 제임스는 1910년에 사망했다. 2010년대에 사는 우리는 따라서 고전적 프래그머티스트의 사후 1세기가 지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프래그머티즘은 이 사상의 원류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14년에는 미국의 퍼스협회를 필두로 여러 학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퍼스 사후 백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고, 그보다 25년 전인 1989년에는 <퍼스생애 150주년 국제학술대회>가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1989년은, 로티가 『프래그머티즘의 귀결』이라는 책에서 퍼스의 의의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명칭을 고안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폄하한 때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이 국제학술대회는 프래그머티즘의 본향인 하버드대학의 수학과 철학의 연구동, 대학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당인 ‘메모리얼 홀’을 주회의장으로 삼아 일주일간 진행되었다. 수백 개의 개인발표를 포함하여 엄청난 규모로 진행된 이 대회는 퍼스에 대한 국제적인 철학 대회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티가 퍼스의 의의를 축소하자고 제창한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35년이 흘렀다. 그 동안 이 철학에 대한 위상은 크게 변모했다. 그리고 이 사상의 역사를 단순화해서 말하면, 그 최초의 징조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의 국제학술대회에서 나타났으며, 프래그머티즘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금의 흐름으로 귀결되었다. 

25년 전 국제학술대회 논문집에 서술된 퍼스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① 유럽계의 철학자들에 의한 퍼스 평가의 고양

② 미국에서 퍼스 논리학의 평가

③ 수학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

이제 이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유럽계의 철학자들에 의한 퍼스 평가의 고양

1989년의 이 대회에서 미국계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유럽계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다수 기조강연을 행했는데, 그중에는 토마스 세벅(Thomas A. Sebeok 1920~2001, 헝가리 출신 미국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생명기호학’을 제안했다), 움베르트 에코, 위르겐 하버마스,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 1922~, ‘언어론적 전회’를 주장하는 독일철학자), 야코 힌티카(Jaakko Hintikka 1929~, 핀란드의 철학자) 등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각각의 사상적 원류로서 퍼스에 대해 열정적으로 논했다는 것은 그때까지 미국철학 내부의 사상가로 여겨왔던 퍼스가 ‘유럽계의 현대철학에서도 원조의 한사람으로 간주된다’는 평가가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퍼스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함께 ‘기호학’의 창시자라는 것은 20세기 후반 유럽철학의 주류였던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기호, 의미,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미 충분히 인식되었던 바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독자적인 퍼스해석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호론적 문제의식이 소쉬르 계통의 프랑스 사상을 넘어서 보편적ㆍ초월론적인 프래그머틱한 관점으로 나아가고, 그러한 관점을 채용하는 하버마스, 아펠 등의 철학에까지 미친 결과, 퍼스의 언어철학이 영미권과 대륙철학의 양쪽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학술대회를 통해 확실해졌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리차드 로티는 분석철학과 유럽철학의 불필요한 이분법을 강하게 비판하고 데리다와 푸코의 사상의 프래그머티즘적 성격에 강한 관심을 표해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20세기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듀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의 3인의 사상가를 꼽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듀이의 사상적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 학회에 참가한 유럽철학자들이 보여준 ‘언어철학적 전환’의 이미지는 로티의 해석과 반드시 겹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퍼스 논리학의 평가

한편 유럽계의 퍼스평가와는 반대로, 미국 내부에서 퍼스평가는 기묘하게도 로티의 소극적 판정에 호응하는 듯한 어떤 부정적인 색채를 띠었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상징적 대표이며 앞장에서 살펴본 네오프래그머티즘의 위대한 보스라고 말할 수 있는 콰인이 평한 퍼스의 논리학이 그러하다.

콰인은 1989년의 이 대회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행한 프레게-러셀 유래의 논리학을 통한 퍼스 평가와 그에 대한 수정의견ㆍ비판적 의견을 검토했다. 퍼스에 대한 콰인의 예전 평가는 하츠혼(Charles Hartshorne, 1897∼2000)과 와이스(Paul Weiss, 1901~2002)가 편집한 『퍼스 저작집』(전6권, 1931-35)의 논리학에 관한 서평(1935년)에 담겨있다. 하츠혼과 와이스는 콰인과 마찬가지로 C. I. 루이스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의 제자이며, 당시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조수로 근무했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화이트의 권유로 그때까지 간행된 퍼스의 논문과 미간행 원고를 총합하여 퍼스의 체계적인 사상의 전모를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 『저작집』 편집자의 한 사람인 하츠혼이 103세라는 나이에 미국의 현역철학자 최장수자로서 등장하여 퍼스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비교 검토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열 살 이상 젊은 콰인—그럼에도 90세에 가까웠다—은 예전의 서평에서 행한 자신의 분석에서 그 일부를 수정할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라고 표명했다.

콰인의 맨 처음 평가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퍼스가 창시한 형식논리학은 ‘존재그래프’라는 이름의 기하학적 수단에 따른 기호법을 채용하여 지나치게 복잡했다. 그래서 논리학으로서는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복잡한 방법과는 별도로,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표준적인 기호논리학에서는 한정사의 도입 등에 관한 연구성과가 확실히 돋보인다. 그러나 프레게-러셀 유래의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명제개수(命題開數)’ 개념의 파악이 불충분하며, 그 때문에 이 형식을 사용한 논리연산은 실질적으로 러셀이 비판한 조지 불(George Boole 1815~1864)의 대수적(代數的)인 집합산(集合算)의 구식단계에서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콰인은 이 대회에서 이러한 자신의 예전 평가를 변경할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대수(代數)는 수 대신에 문자를 사용하여 수의 성질이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며, 집합산(集合算)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과 같은 집한연산을 가리킨다. )

그런데 이 강연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 콰인의 논리학사 이해가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이뤄진 논리학의 다원적인 발전을 더 강하게 의식해야 했고 그 속에서 퍼스의 역할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이 대회의 논문집을 참조할 수 있다.

 

수학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

한편 콰인과 젊은 세대 간의 의견의 차이는 이 대회의 주최측에 의해서도 표명된다. 그 점에서 이 대회는 하버드대학의 신구 철학자의 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로티는 콰인의 입장에 가까웠고, 그것은 네오프래그머티즘을 콰인과 쿤의 연장선상에서 구상했던 로티로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콰인에서 로티, 퍼트넘으로 넘어간 네오프래그머티즘 운동은 이 대회를 전후해서 그 주역을 퍼트넘으로 삼았고, 이후 로티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퍼트넘과 그 일파는 이 대회에서 퍼스가 1898년에 하버드대학 주변에서 행한 ‘추론과 사물의 논리’라는 표제의 연속강연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다. 그들은 이 연속강연을 한권의 저작집으로 하버드대학 출판국에서 근간할 예정임을 공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퍼스의 논리관이 프레게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콰인에게 결함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 차이로부터 수학의 철학에게 결정적으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퍼스가 제창한 ‘연속주의’라는 이름의 특이한 형이상학적 입장과 그로부터 귀결되는 다양한 지식관ㆍ인식론의 통찰을 중시할 필요를 제기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추론과 사물의 논리』에 첨부된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필자 자신이 편집ㆍ번역한 『연속성의 철학』(이와나미 문고, 2001년)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논문집의 간행

지금까지 25년 전의 퍼스 평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로티류의 네오프래그머티즘에 대한 프래그머티즘의 비판적 계승과 대결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퍼트넘의 새로운 프래그머티즘 해석으로 나타나는 한편, 맥베스 등 로티측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언어철학을 기반으로 내부적 비판이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앞서와 같이 퍼트넘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퍼스의 수학사상은 이후 더 넓은 맥락에서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이러한 퍼스의 논리사상ㆍ수학사상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지난 20년 간 (앞에서 언급한 하츠혼이 편집한 1930년대의 저작집을) 면밀하게 교정한 저술연대순의 퍼스저작집의 재출간과 그 부산물로서 『퍼스 주요논문집』(전2권)이라는 매우 완결적인 논문집의 간행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폭넓은 독자층에게 다시금 현대의 관점에서 그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나아가 그의 수학논문 수십 편이 수록된 논문집이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수학의 철학 분야에 관련된 문헌을 더욱 쉽게 독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현대철학의 선구자로서의 퍼스’라는 이미지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이 논문집은 기하학의 연속성, 무한소, 칸토어의 연속성가설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루었고, 이 논문집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텍스트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퍼스의 수학논문집도 앞서의 저작집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이미 전집에 실린 것들이지만 그에 접근할 수 있는 독자는 한정적이었다.) 이 논문집의 간행에 의해 25년 전 퍼트넘과 그 일파가 제기한 퍼스의 독자적인 수학사상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퍼스의 수학ㆍ논리학의 이해

여기서는 이 분야의 최근 연구에서 퍼스에 대한 관심문제로서 다음의 두 논점을 지적해둔다.

① 전문적인 수학자로서 퍼스의 구체적인 업적을 19세기 이후의 수학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의 문제—이에 관해서는 특히 ⑴ 퍼스가 고안한 특이한 토폴로지의 의의를 19세기의 수학사를 조망하는 가운데 재평가한다. ⑵ 그의 무한소 이론을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 러시아의 수학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독일의 수학자)의 무한소 개념과 비교 검토한다. ⑶ 그의 기하학적 연속성의 관점을 아브라함 로빈슨의 초준해석(超準解析 nonstandard analysis: 비표준해석이라고도 한다)과의 비교를 통해 퍼트넘의 해석을 넘어 보다 근대적인 ‘범주론(category theory)’과의 유사성의 지적으로 나아가는 등 극히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한 테마로서 최근 흥미로운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② 퍼스의 수학론을 프래그머티즘의 진리론이라는 테마와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의 과제—이미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논리학의 역사의 시야에서 보면, 그가 19세기 후반에 한정사를 포함하여 형식논리학을 체계화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성과를 통해 그는 프레게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한 논리학을 타파하고 현대논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콰인의 퍼스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논리학상의 성과를 프레게-러셀류의 논리학의 사상과 등가로 놓기에는 얼마간의 보류를 요한다. 그 큰 문제 중 하나가 (예를 들어 논리실증주의의 설명에서) 이제까지 프레게-러셀의 ‘논리주의’로 불러왔던 사고에 퍼스가 기여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프레게-러셀의 논리주의는 수학적 명제와 진리를 이미 논리학의 개념과 진리로 바꿔 써왔다는 것, 즉 수학은 논리로 환원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퍼스는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한 바로는, 형식적인 사고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수학적 사고와 진리이며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오로지 형식적으로 순수한 수학에서 파생한, 한계가 분명한 분야에 관한 적용례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서는 수학이야말로 논리적인 가능성이라는 통상의 개념을 넘어서 모든 의미의 가능성을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참된 가능성의 학문이다.

 

수학론에서 본 진리의 객관성

퍼스는 이렇듯 가장 넒은 의미에서 수학을 가능성의 학문으로서 ‘사물의 가설적 상태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수학은 모든 대상의 영역에 적용 가능한 가설-귀결 관계에 관한 일반이다. 그렇다고 그가 수학적 추론이 가진 확실성, 보편성, 필연성을 방기한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수학적 추론으로부터 내재적ㆍ가설적ㆍ추론적이며 게다가 ‘객관적인 요소’를 건져내면서 그 형식적 필요성을 용인했다.

이 독특한 주장은 당연하지만 어떤 인식론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의 ‘탐구의 이론’과 ‘기호학적 인식론’과의 교차점에서 수학적 명제의 진리와 추론의 타당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그러나 문제는 인식론적인 테마에 한정되지 않는다. 퍼스가 채용한 수학관은 20세기 이래 수학의 존재론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입장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라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0세기에 활발하게 논의된 수학의 철학 분야에서 중심적인 테마 중 하나는 이른바 ‘실재론 대 유명론’의 대립이다. 퍼스는 이 주제에 대해 수학의 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 걸쳐 매우 풍부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의 논의는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어떤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스콜라적 논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수학론에 대한 그의 관심의 초점은, 이 테마와 얽힌 그의 수학론을 논함으로써 프래그머티즘과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테마인 ‘프래그머티즘과 진리의 객관성’과 가장 밀착된 문제로서 특히 이 존재론적 주제와 엮여있는 최근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학적 진리를 둘러싼 실재론ㆍ비실재론 논쟁과 퍼스의 관점에서 본 해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970년대에 폴 베나세라프(Paul Benacerraf 1931~, 미국의 철학자, 현대의 수학의 철학을 대표하는 연구자 중 한사람)가 제기한 모든 수학적 진리의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라는 것을 다룰 필요가 있다.

 

수학의 철학에서 ‘플라토니즘’

플라토니즘이라는 말은 이 책에서 논한 듀이의 철학사론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 명칭은 여하간 플라톤의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철학적 발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수학의 철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듀이의 『철학의 개조』(1920년)까지 갈 것 없이 19세기 이후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등 유럽계의 철학사상에서 플라토니즘은 나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사상의 편향을 가리는 말로 사용되어 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학의 철학에서 플라토니즘이라는 명칭은 조금 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된다.

실은 이 말은 베나세라프보다 한 세대 먼저인 파울 베르나이스(Paul Isaak Bernays 1888~1977)라는 독일의 논리학자ㆍ수리철학자(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보다도 조금 연장)에 의해 1935년을 전후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막스 프랑크와 함께 수학했고 그 후 다비트 힐베르의 조수로 일했으며 1921년 괴팅겐대학의 조교수로 취임했다. 베르나이스야말로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수학의 철학의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나이스는 나치를 피해 1934년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했고 거기서 행한 ‘수학적 진리’라는 국제적인 강연에서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강연의 테마는 ‘수학의 기초의 새로운 위기’였는데, 이 위기는 아렌드 하이팅(Arend Heyting 1898~1980),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Nikolaevich Kolmogorov 1903~1987, 러시아의 수학자) 등이 품었던 문제의식, 즉 직관주의와 유한주의의 가능성, 혹은 형식체계의 불안전성을 둘러싼 새로운 탐구의 필요성이라는 의식을 가리킨다.

베르나이스는 이 강연에서 플라토니즘에는 온건한 타입과 강한 타입의 두 종류가 있으며, 세부적인 차이는 별도로 하고 이것들 모두가 수학적 대상의 집합 전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연수 전체라는 집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체’를 우리의 사유작용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베르나이스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은, 어떤 수학적 대상의 집합이 만드는 전체는 그 전체를 사고하는 인식주체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해석하는 입장에 있다. 즉 무엇인가의 수학적 대상의 전체가 그것을 파악하는 인식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고를 그는 플라토니즘이라고 불렀다.

 

플라토니즘의 딜레마

여기서 플라토니즘의 가능성을 논하는 베르나이스 자신의 문제의식이 인식주체와 그 대상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는 점에 주의해보자. 이것은 그와 그 주변의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신칸트학파나 현상학이라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미국류의 프래그머티즘과는 완전히 다른 철학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은 당시 ‘새로운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넘어서 수학의 철학의 영역에서 계속해서 확장된다. 그런데 신칸트학파가 아닌 분석철학의 버팀목인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기초로 하여 다시금 플라토니즘의 문제를 제기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미국의 베나세라프이다.

베나세라프는 베르나이스와 함께 편집한 『수학의 철학』에서 20세기의 수학의 철학의 기본적 맥락을 널리 알림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이 대표적 논문집 2쇄에 자신의 1937년 논문인 「수학적 진리」를 한편 수록했는데, 이 논문이야말로 그 후 수학의 철학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결정짓는다.

그 논문에서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적 대상의 독립자존을 주장하는 플라토니즘에 준하여 수학적 대상이라는 추상적 존재의 실재성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의 인식에 관한 직접적인 앎, 즉 직관적 파악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수학에 관한 진리는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을 조금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① 수학적 대상은 일반적으로 개개의 언어와 공간적 특성 혹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한 추상적 존재이다.

② 한편 우리의 지식이란 일반적으로 인식된 대상과의 인과적 접촉에 기초한 정당화된 인식이다, 라고 보통 이해된다. 따라서 추상적 대상인 수학적 대상은 통상의 의미에서 지식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③ 고로 수학적 대상에 관한 인식은 보통의 의미에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뉴욕보다 오래된 대도시가 적어도 세 개 존재한다’는 문장과 ‘17보다 큰 완전수는 적어도 세 개 존재한다’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전자는 구체적인 대상인 뉴욕에 ‘더 오래된’이라는 경험적 성질을 연결시킨 문장이다. 후자는 추상적인 대상인 17에 ‘더 큰’이라는 경험적 성질을 연결시킨 문장이다(완전수란 그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그 자신과 같은 수, 예를 들어 6이나 8과 같은 자연수를 말한다).

이 두 문장은 닮아있다. 그러나 전자는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에서 충분히 처리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자연수와 그 부분집합이 가령 존재한다 해도 그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특수한 인식을 필요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애당초 진리라고 할 수 없거나, 이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

형식적 사물이나 추상적 대상의 승인과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까? 퍼스의 수학론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의 특이한 수학관이 수학적 대상에 관한 진리를 둘러싼 이 논쟁에서 이제까지 고려되지 않았던 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띠에르슬랭의 해석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수학의 철학에서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의 문제를 다뤘던 사상가는 적지 않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콰인의 대응인데, 이 입장에서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은 그것을 결여하고서는 과학의 현실에의 응용이 불가능하다는 프래그머틱한 요청에 기초한 것만이 인정된다. 또 콰인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대상인식에서 직관적 파악을 인정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마디(Penelope Maddy)의 답변도 잘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유명론에 가까운 실재론과 그 반대로 매우 강고한 실재론의 각각의 사례인데, 여기서는 이 논의를 염두에 두고 퍼스의 이론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논고를 소개한다. 그것은 맥베스와 띠에르슬랭이라는 두 여성철학자의 해석이다.

앞서 베나세르프가 말한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의 3단 논법에서 결론[③]을 피해 수학적 대상에 관한 진리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두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수학적 대상이 어떤 추상적인 것일지라도 경험적인 지각의 차원과 연결된다는 입장이다. 즉 ①에서 ②로의 추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채용하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경험적ㆍ인과적 연결을 거부할지라도 그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즉 ②에서 ③으로의 추리를 부정하는 입장의 방향이다. 띠에르슬랭은 퍼스의 수학 사상을 전자의 방향으로 해석하는 반면, 맥베스는 퍼스가 후자의 방향을 채용했다고 해석한다.

우선 띠에르슬랭의 약력을 소개하면, 그녀는 소르본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학위를 취득한 프랑스인 철학자로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 프래그머티즘에 비교적 냉담했던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형이상학자로서 퍼스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1970년대 이후 유럽 철학자들의 퍼스 평가의 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녀의 퍼스 해석에 따르면, 퍼스의 입장은 유명론과 가까운 콰인의 입장과 수학적 인식의 직관적 파악을 인정하는 (예를 들어 괴델과 같은) 플라토니즘 사이에 위치한다. 그녀의 이해에 의하면, 퍼스는 수학적 대상을 단지 추상적ㆍ자존적 존재가 아닌 가설적ㆍ추론적ㆍ귀결적으로 확장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적 대상에 대한 이 이해는 반데카르트주의에 서는 것이며 인식의 직접성, 비매개성, 내관성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퍼스는 수학적 대상에 관해, 강한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 즉 ‘대상이 인식주체에서 완전하게 초월한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애당초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강한 플라토니즘이 거부된다고 해서 수학적 대상의 가설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방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 대상의 일반성과 경험적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수학적 대상=가설적인 대상의 파악이라는 인식적 사태를 가능하게 하는 가설형성적 추론의 역할에 있다.

 

가설형성적 추론이란 무엇인가?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이란 우리가 보통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합리적인 설명을 도출하고자 하는 일종의 추측적인 추론이며, 연역적 추론(deduction)과도 귀납적 추론(induction)과도 다른 독자의 추론형식을 갖는다. 

연역이란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전제에 포함되는 내용을 분석적으로 석출하는 추론이다. 귀납이란 유한한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 보다 일반적인 명제를 형성하는 추론이다. 이에 비해 가설형성은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능케 하는 어떤 가설을 제언하는 추론이다. 이를테면 ‘이제까지의 경험이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사상(事象) C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만약 H가 있다면 C의 성립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고로 어쩌면 H인 것은 아닐까?’라는 추론의 형식이다.

이 추론에 나오는 H는 하나의 가설이면서도 C로 이어지는 전제이기 때문에 하나의 일반자 내지는 보편자이다. 따라서 수학적 대상이 가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일반자이자 보편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경험적인 대상과 단절된 존재자라는 의미에서의 추상적 존재는 아니다. 가설형성이라는 추론에는 불가사의한 현상 속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지각’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가설을 찾아내는 것은 데카르트적 직관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순수하게 수동적인 감각경험도 아니며, 단정적인 인과적 상호작용도 아니다. 그것은 시사적(示唆的)인 인식이며 능동과 수동의 중간에 위치한 인식이며 경험내재적 및 경험초월적인 인식이다.

퍼스는 직관과 감각의 중간에 위치한 이 미묘한 인식의 형태를 기호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아이콘적 표상’이라고 불렀다. 전제로부터 귀결을 분석해서 산출하는 연역적 작업은 기호에 포함된 개념내용을 분석적으로 해석하는 작업과 다르다. 연역적 작업을 허용하는 기호는 의미내용을 확정한 상징이다. 반면 어떤 불가해한 사상(事象) 속에서 이해 가능한 개념을 읽어 들임으로써 이 형태를 부각하는 가설형성적 작업은 이 사상(事象)을 아이콘으로 보고 그 속에서 어떤 시사적(示唆的)인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아이콘적인 표상은 시사적인 의미를 대상으로 가지는 한에서, 경험적인 현실이나 객관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확보한다. 그것은 가설적인 것이라 해도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사상(捨象)하는 추상적 대상은 결코 아니다. 나아가 이 아이콘 내의 형상을 파악하는 움직임은 바로 대상 속에서 어떤 모습을 발견한다는 도상적(圖像的)인 사유의 움직임이라는 의미에서 기하학적인 추론을 그 본성으로 한다. 즉 가설형성적 추론으로서 수학적 추론은 그 대상에 관해 준-경험적인 차원을 가짐과 동시에 그 인식의 스타일로서 도상적인 사고를 본질로 한다.

콰인은 퍼스의 논리학이 도상적인 방향으로 편향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띠에르슬랭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콰인이 가설형성적 추론의 대상으로서의 수학적 개념이라는 발상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퍼스에게는 수학이 논리학에 선행한다. 이것은 상징으로서의 기호에 순화되어 형식화된 논리학 체계가 상징에 본질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상징은 결코 아이콘이나 인덱스적 성격을 완전하게 사상(捨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퍼스의 사고에서는 상징의 차원만으로 추론하는 논리학은 기호의 복합적인 차원을 추상화한 것만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수학적 추론에 비해 파생적이며 이차적이다.

이상의 해석을 정리하면, 수학적 대상의 지각이라는 인식에는 가설형성적인 요소가 본질적으로 관여한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인 앎이라는 의미에서의 직관이 아니고, 그보다 추론적이고 가설형성적ㆍ확장적인 지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포리오리한 인식이 아닌 지각경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험적인 인식이라는 본성은 결여되지 않는다. 퍼스의 입장은 ‘수학적 대상의 인식’을 이와 같이 성격짓기 때문에 베나세르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맥베스의 해석

한편 띠에르슬랭과는 또 다른 논의로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한 맥베스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캐나다대학 출신으로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피츠버그학파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현재 펜실베니아주의 하바포드 콜리지(Haverford College)의 교수이며 대표작으로 『프레게의 논리학』이 있다.)

띠에르슬랭에서 확인했듯이 퍼스의 인식론에서는 수학적 인식이든 감각적 인식이든 어떤 인식작용도 기본적으로는 기호적이며 비직관적이기 때문에 수학적 대상에 관해서도 직관적인 접근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퍼스의 입장에서는 수학적 대상인 수와 기하학적인 도형은 당연하게도 그 자체로서 독립 자존하는 플라톤적 대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또 다른 의미에서 수학적 대상을 추상적인 존재로 승인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수학적 대상 내지는 수학적 개념의 ‘의미’를 퍼스의 의미 이론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본다면, 그러한 개념의 유래를 경험이나 지식의 역사적 발전의 차원에서 되돌아보도록 하는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의 초반부에 서술했던 ‘프래그머틱한 격률’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외부세계의 대상도 아니고 내관(內觀)에 부여되는 직관적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실험적인 상황 하에서 상정되는, 가정과 귀결의 관계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추이적(推移的)ㆍ추론적ㆍ조건법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퍼스의 이 사상에 관해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개념의 의미의 비인과적ㆍ추이적ㆍ귀결적ㆍ조건법적 성격을 적용하는 것이 실은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적 개념 일반이라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수학적 개념이나 논리적 개념에 대한 것이라는 매우 독특한 사실이다.

확실히 퍼스 자신이 의미의 격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예는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에 대한 명제인데, 그로부터 그의 개념의 의미에 관한 분석이 외적세계에서 경험적 성질의 인식을 전형으로 한다는 이해가 자연스레 도출된다. 그러나 그의 의미의 격률의 최초의 정식화는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 실은 과학의 이론의 해명에 앞서) 전문적인 철학 잡지에 게재된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전개된다.

퍼스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적 개념보다도 오히려 수학적 개념의 의미 분석이 중요한 문제이며, 이 점을 이해한 버클리의 사상의 의의와 그 분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버클리는 영국경험론 철학자로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관념에 의해 가능하다는 관념론의 주장으로 유명한데, 수학의 철학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무한소 개념을 비판하며 당시 역학이 전제로 삼은 뉴튼적인 물질 개념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능성에 열린 수학적 진실

퍼스는 이 버클리론에서, 제곱근과 허수 등 그 자체로는 경험적인 이미지와 감각적 지각에 대응하지 않는 개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유의미한 개념인지를 문제로 삼는다. 이 개념은 얼핏 보면 참으로 기묘한데, 수학적 대상에 대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복잡한 수가 아닌 단순하게 마이너스를 표시하는 숫자를 생각해도 된다. 마이너스는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양한 계산과 표시를 가능케 하는 매우 유효하고 생산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들은 의미에 관해 귀결적ㆍ추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귀결적 의미란 그것들이 어떠한 계산적 실천과 증명적 실천과 작도적(作圖的) 실천 속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맥베스에 따르면, 퍼스뿐만 아니라 프레게에서도 실은, 일반적으로 논리주의의 철학으로 이해되는 그의 플라토니즘에는 결코 단순한 직관적 인식으로 수용되지 않는, 귀결주의적ㆍ조건법적 의미의 이론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수학이나 논리학의 이른바 아포리오리한 개념이야말로 조건법적인 의미내용의 전형을 드러낸다는 사고는 이제까지 수다한 프래그머티즘의 진리론에서 상대주의와 비실재론적 경향에 대해 매우 선명한 반론의 가능성의 효과를 갖는다.

제임스, 콰인, 로티를 따라 점차적으로 더욱 강하게 비실재론적 논조가 만들어지는 인식의 전체론적 성격의 발생과정을 생각해보자. 제임스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담화의 우주’라는 전체론적 시스템을 형성하고 그 속에는 중심도 주변도 없지만 모든 신념과 진리는 이 영역의 불확정적인 발전에 조응하여 그 진리치를 바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콰인은 이제까지의 아포리오리 내지는 분석적인 수학의 진리는 신념의 거미줄의 중심부분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건강하며 이 외측에 있는 신념은 경험을 이루는 매우 가변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로티는 신념 전체가 자문화의 관심의 견지라는 조건 속에서 의미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은 것, 바꿔 말하면 진리의 후보를 결정한다.

그런데 맥베스의 퍼스론은 인식의 전체론적 이미지에 관한 이러한 이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새로운 도식을 제안한다. 그녀가 보기에, 퍼스의 신념의 거미줄에서 가장 외측에 있고 그에 따라 항상 개정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콰인에게는 가장 중심에 있는 논리와 수학의 명제이다. 반대로 퍼스의 신념의 거미줄에서 가장 내측에 있고 그에 따라 보다 건강한 진리요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보통의 일상적 경험에서의 감각적 인식의 명제와 신념이다. 퍼스의 수학론에서 수학적 진리는 아포리오리도 아니고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개념구성의 가능성으로 열려져 있으며 그 결과로서 항상 새로운 진리의 발견에 열려져 있다. 그것은 인식의 전체적인 영역의 중심이 아니라 외측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신념의 궁극의 기반

그러나 그렇다면 왜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 건강하고 수학적 진리는 그보다 가변적인 것일까? 그것은 후자가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성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신념은 동물이 가진 신념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체의 생리적 조건에 제약되는 신념이며 무엇보다도 견고한 핵을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동물적 신념에 이러저러한 정신적 개입을 행함으로써 세계를 더 넓게 볼 수 있는 조감도적인 인식과 표상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 조감도적인 표상을 철저하게 추상화함으로써 데카르트 좌표와 토폴로지적 표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수학적 신념의 세계이다. 그것으로 도달하는 이 과정은 역사적 진화의 과정이며 그 궁극의 기반이 되는 것은 감각적ㆍ일상적인 경험이다.

퍼스가 강조했듯이 신념의 가장 깊은 루트는 동물적인 본능에 있다. 그러나 그 본능에서 정신적 진화의 결과로서 수학적인 추상적 사고가 성장한다. 따라서 수학적 진리의 세계가 세계와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결여한다고 해서 그에 관한 실재론을 방기하는 것은 아니다. 

맥베스가 보기에,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는 우리의 수학적 인식이 ‘직관인가, 직접적 외계와의 인과관계인가’라는 잘못된 이분법 하에서 제기된 것이다. 수학적 진리가 직관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면, 외부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플라톤도 주목했다시피, 역사적인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개념적 성과로서 그 의미는 항상 개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인과적인 연결을 결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 기반을 가지지 않는 비ㆍ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ㆍ감각적 경험이라는 기반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파생된다는 의미에서 외적인 경험세계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또한 20세기에 활발했던 네오프래그머티즘의 상대주의적 경향에도 이러한 잘못된 이분법이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로티와 그 일파의 다원적 진리론에서는 ‘직관인가,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인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인가, 세계관 및 가치관의 관여인가’라는 이분법을 사용하는데, 이때에도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 없이는 실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실재성 및 객관성과 외계와의 인과관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맥베스에 따르면, 이미 로버트 브랜덤(Robert Boyce Brandom)도 강조했던 이 발상을 퍼스의 수학론에 의한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방향에서 더욱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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