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논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개념도 어렵고 문장도 어려워서 시간이 꽤 걸리더라. 그래서 일단 글의 전반부만을 먼저 올리고 후반부는 기일을 두고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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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은 관찰자의 선택에 의존하도록 구축되어왔다. 여기서 관찰자가 증인으로 소환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그가 설명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관찰자의 신체이지 그의 정신이 아니다. — A. N. 화이트헤드

 

내가 신화적 사고의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해온 퍼스펙티브의 상호성(la réciprocité de perspectives)은 더욱 폭넓은 적용범위를 요구할 것이다. — C. 레비-스트로스

 

 

본고의 주제는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사고의 하나의 틀인 ‘퍼스펙티브의 성질’(Århem 1993)과 ‘퍼스펙티브의 상대성’(Gray 1996)이다. 이 대륙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관념은, 인간적인 것도 있고 비-인간적인 것도 있는 다른 부류의 주체가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주체들은 특징적인 퍼스펙티브로부터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사고의 전제와 귀결은—리마(Lima 1995: 435-48)가 보여준 것처럼—우리 사이에 흔해빠진 상대주의에 대한 관념, 즉 무엇보다도 정신에 호소하는 것 같은 사고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은 그 전제와 귀결은 이른바 상대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과 직교하도록 위치지어진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어휘에 대해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퍼스펙티브즘이 보여주는 저항력은, 그 논쟁을 조장하는 존재론적인 분할이 확고하며 어디에도 적용된다는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특히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를 불문하고) 이미 결론내린 것처럼, 비-서양적인 우주론의 내적인 영역들에 대한 서술에 <자연>과 <문화>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사용해버리면 민족지적으로 엄격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함을 피할 수 없다.

 

우선 이 비판이 요구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라는 항목 하에 대치되어왔던 두 개의 범례를 포섭하는 술부(述部)를 분리하고 재배치하는 것이다. 즉 보편과 특수, 주관과 객관, 물리와 도덕, 사실과 가치, 여건과 구축물, 필요성과 자연발생성,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포함하는 수많은 이항대립이 그것이다. 개념의 카드를 잘라 다시 붙이는 나의 사유는 아마도 근대적인 ‘다문화주의자’의 우주론과 대조를 이루는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사고의 특징의 하나인 다자연주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다문화주의 개념은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원성이라는 상보적인 함의—자연의 단일성은 신체와 물질의 객관적인 보편성에, 문화의 다원성은 정신과 의미에 관한 주관적인 특수성에 의해 보증된다—에 기초한다. 이와 반대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개념은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원성을 조정하는 것 같다. 문화, 즉 주관적인 것은 보편성의 형상을 띤다. 자연, 즉 객관적인 것은 특수성의 형상을 띤다.

 

사변 이상의 것이기에는 너무나도 대칭적일 수 있지만 이 반전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적인 개념의 현상학적인 해석으로부터 전개하는 것 속에는 틀림없이 ‘자연’과 ‘문화’로 부를 수 있는 맥락의 구성적인 조건을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을 그 즉시 탈-실체화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재구성해야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서 <자연>과 <문화>의 범주는 그 내용이 서양의 유사물과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지위를 구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범주는 존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적인 배치, 가능성의 퍼스펙티브주의, 즉 관점을 보여준다.

 

자연/문화라는 구분은 확실하게 비판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비판은 이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가 그 구분에 부여한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인 가치’(Lévi-Strauss 1962b: 327)는 특히 비교에 관한 가치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원론에 서양적인 특징이 있다고 비판하는 화려한 산업은 이항성의 지적인 재산을 방기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문제는 매우 현실적인데, 민족지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대안은 현재로서는 포스트이항대립을 갈망하는 것으로 축소되는, 엄밀하게는 개념적인 것이라기보다 표현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다리기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 구분과 우리가 사용하는 구분을 대조하고 그것을 퍼스펙티브주의로 전화시켜보고자 한다.

 

 

퍼스펙티브주의

 

이 고안을 도입하도록 자극한 것은 아마존의 민족지에 자주 등장하는 선주민의 이론에 대한 언급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 거하는 동물 및 다른 주체—신들, 정령, 죽은 자, 우주의 다른 위계에 거하는 자, 식물, 천문학적 현상, 지리학적 기복, 물체와 인공물—를 보는 양태는 이 존재들이 인간이나 서로를 보는 양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보자. 평상시의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동물을 동물로서 본다. 정령에 관해서는, 평소 볼 수 없는 이러한 존재[정령]를 보는 것은 ‘상태’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확증한다. 한편 포식동물과 정령이 인간을 사냥감의 동물로서 보는 것처럼 사냥감의 동물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정령과 포식동물로서 본다. 아마존의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대해 기록한 바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인간을 맥(獏ㆍ貘: 포유동물로 모양은 물소를 닮고 흑갈색이며, 남태평양ㆍ남미 등지의 밀림의 물가에 산다) 혹은 멧돼지로 본다’. 동물과 정령은 우리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본다. 이 존재들은 자신들의 집과 마을에 있을 때는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파악한다. 나아가 자신의 습관과 특징을 어떤 종류의 문화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즉 식량을 인간의 음식으로서 (예를 들어 재규어는 피를 마니옥 술로, 죽은 자는 귀뚜라미를 물고기로,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며, 자신의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을 문화적인 장식품이나 도구로서 보며, 자신의 사회체계를 인간적인 제도(추장, 샤먼, 의례, 혼인규칙 등)처럼 조직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로 본다’는 표현은 지각대상에 대해 문자 그대로 언급하는 것이며, 아날로지에 의한 개념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현상의 감각적인 틀이라기보다 범주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사례에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여하간 우주론적인 도식론의 주(主)이며(Taussing 1987: 462-63), 교차하는 퍼스펙티브와 의사소통하며 그것들을 제약하는 것에 바쳐진 자, 즉 샤먼은 항상 개념을 감지가능하게 하고 직관을 이해가능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동물은 사람이다. 혹은 자신을 인격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념은 ‘각각의 종(種)의 가시적인 형태는 포장된 것(의복)이며 그 속에 인간적인 형상을 은폐한다’라는 사고와 연결된다. 그 인간적인 형상은 통상, 동일한 종(種) 혹은 샤먼 등의 어떤 종-횡단적인 존재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이 내적인 형상은 동물의 정신이다. 즉 인간적인 의식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지향성과 주체성이며, 이른바 동물적인 가면 밑에 숨겨진 인간적인 신체도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표면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공통하는, 정신의 일 부류인 의인화된 본질 그리고 각각의 종에 특징적인,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외견 간의 구분이 존재한다. 특히 후자의 외견은 고정된 속성이라기보다 가변적으로 탈착 가능한 의복이다. 실제로 ‘의복’이라는 관념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변신(Metamorphose)—동물의 모습을 하는 정령, 죽은 자, 샤먼, 다른 동물을 보는 동물, 의도치 않게 동물이 되어버린 인간—을 특권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아마존의 문화들이 노정하는 ‘변태에 넘치는 세계(highly transformational world)’로 편재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남미 선주민에 관한 몇몇 민족지에 기록되어왔는데, 대체로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인데도 ‘그것이 정말로 균형 잡힌 시각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서 다뤄지는 우주론에서는 참으로 고상하다. 또 그것들은 북미의 북극권과 아시아의 문화권에서의 그것보다 한층 창의에 넘치는 가치를 수반한 것으로 보이며 더 진귀하고, 다른 대륙의 열대지역의 수렵채집민의 원조이기도 하다. 남미 중에서도 북서아마존 지역의 사회들이 더 완결적으로 전해오고 있다(Århem 1993, 1996을 참조). 그렇지만 지금 과제에 더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와리족의 카니발리즘에 관한 민족지(Vilaça 1995)와 주르나족의 인식론에 관한 민족지(Lima 1995)이다. 이것들은 비-인간적인 관점과 우주론적인 범주에서 관계론적인 자연이라는 논점을 타성의 일반경제의 출현이라는 더 넓은 틀과 연결 짓는다(Viveiros de Castro 1993a, 1996b).

 

더 밀고 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퍼스펙티브주의가 (다른 존재도 포섭하는) 모든 동물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브주의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종(種)의 동물에서이다. 뛰어난 포식자나 육식성의 동물, 예를 들어 재규어, 아나콘다, 검은 독수리, 독수리, 혹은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으로 관계적인 상태와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존재론은 퍼스펙티브주의에 상당히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둘째, ‘인격성’과 ‘퍼스펙티브성’—특정한 관점에 서는 능력—은 이러저러한 종(種)에 고유한 변별적 특성이라기보다 정도와 태도의 문제이다. 이 잠재성의 양태를 어떤 동물보다도 완전하게 현세(現勢)적으로 등장시키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안에는 자신의 종에 대해 더 우세한 강도를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보다도 ‘더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Hallowell 1960: 69). 또 다른 논점은 사후(事後)에 본질이 되는 성질에 관한 것이다. 이전에는 보잘 것 없던 존재가 (꿈과 샤먼의 담론에서) 인간사에 해를 끼치는 능력 있는 의인화된 행위자로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 자신의 일이든 타자의 일이든 인격의 경험은 우주론을 둘러싼 명문화된 어떤 의무보다도 결정적이다.

 

나아가 혼과 주관성이, 살아남은 종(種)의 개체의 표상으로 회귀하는 사례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신화 이후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은 의식의 능력 등의 정신적인 속성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우주론의 사례 또한 발견된다. 한편 동물의 영적인 ‘주(主)’의 관념(‘사냥감의 어머니들’이나 ‘멧돼지의 주재자들’)은 주지하다시피 아메리카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 영적인 ‘주’는 모두 인간적인 지향성과 유사한 것을 갖추고 있으며 그와 관계된 동물성의 위격(位格)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개별 동물에게는 정신이 없을 것이라며 인간-동물 관계를 위한 간주관적인 영역을 창출한다. 덧붙여, 영적인 형체로 보였던 동물과 종의 영적인 주재자 간의 구분이 항상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항상 관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Alexiades 1999: 194)을 말해둔다. 분명한 것은 숲에서 동물을 만났을 때, 단지 동물일 뿐이라 여겼던 것들 모두가 다른 본성을 가진 정령의 변장인 경우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기억해 두어야하는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보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과 동물 간의 비-차이화(non-differentiation)라는 원초적인 상태라는 점이다.

 

[신화란 무엇일까?] — 만약 당신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이다, 라고. 이 신화의 정의는 우리에게 꽤 흥미로운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Levi-Strauss & Eribon 1988: 193).

 

신화의 이야기 속에는 그 모습, 이름, 행동이 인간적인 속성과 비-인간적인 속성이 농밀하게 섞여있는 존재들로 넘쳐나며, 그것들은 현세(現勢)하는 인간-간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과 동일한 상호교신가능성에 의해 공유된 맥락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신화 속에서 관점 간의 차이가 무효화되거나 강화되거나 하는 잠세적인 초점을 찾아낸다. 신화라는 이 절대적인 담론에서 각각의 종(種)은 스스로에 대해—인간으로서—다른 종의 눈에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별적으로 규정된 동물과 식물, 정령의 본성이 이미 노정된 것처럼 행동한다.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은 무언가의 방식으로서 샤먼이며 아마존의 문화에서 그것은 확실하다(Guss 1989: 52).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신화는 주체 없는 담론이다(Lévi-Strauss 1964: 19). 혹은 ‘주체만’으로 가능한 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담론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담론에 의해 말해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 퍼스펙티브주의의 보편적인 소실점에서 한 신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前)-주체적 및 전(前)-객체적이라고도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신체와 이름이 혼과 행동에 침투해서 섞여가는 존재의 상태이다. 바로 신화가 그 종언을 이야기하려는 경우(境遇)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원이란 끝(end)이기 때문에.

 

이 끝—또 귀결이라는 의미에서도—은 주지하다시피 레비-스트로스의 기념비적인 사부작(Lévi-Strauss 1964, 1966, 1967, 1971)에서 분석한 자연과 문화의 차이화이다. 그러나 그 과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지점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우리 근대적인 진화론자의 신화에 흐르는 동물로부터 차이화된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적인 거대한 분할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가 자연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문화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인간들에게 이어지고 유지되는 속성들을 동물들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Lévi-Strauss 1985: 14, 190; Brightman 1993: 40, 160). 인간이란 자신과 동일한 그대로 이어지는 자이다. 동물이 원-인간이지, 인간이 원-동물은 아니다.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인간성은 원초적인 플래넘(plenum)[일종의 확산장치]의 요소’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정식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동물에 한정되지 않으며 잠재적으로 모든 것의 원초에서 나타난다는 형상이다.

 

칸바족의 신화론의 대부분은 어떻게 해서 처음의 칸바족 사람들이 점차 동물 및 식물종의 최초의 대표자로 불가역적으로 변신했으며 또 천체와 지형의 기복으로 변태했는지에 관한 역사이다. (중략) 즉 우주의 전개란 그 무엇보다도 다양화의 과정이며, 인간성이란 원초적인 실체이며, 그로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 아닐지라도) 다수의 존재와 사물의 범주가 생겨났다. 오늘날의 칸바족은 변화를 피해간 선-칸바족의 후예이다(Weiss 1972: 169-70).

 

우리에게 익숙한 인류학=인간학에서는 언제나 문화에 의해 은폐된 동물성이라는 토대 위에 인간성을 구축하는데—우리는 예전에는 ‘완전히’ 동물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안의 ‘밑바닥에’ 동물인 채로 남아있다—, 이와 반대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서는 우주에 거하는 동물과 그 외의 존재는 예전에는 인간이었으며, 그 분명한 양태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인간이기를 계속해왔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연의 모든 존재의 공통적인 참조항은 종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조건으로서의 인간성이다’(Descola 1986: 120). 사람이라는 종과 인간적인 조건의 구분은 강조되어야 한다. 이 구분의 강조는, 분명 이 구분을 공유하는 인간적-정신적인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사고로서 동물적인 의복, 그리고 퍼스펙티브주의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샤머니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아마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개의 특징을 연결한다. 즉 수렵의 상징적 가치화와 샤머니즘의 중요성이다. 수렵에 관해서는 생태학적 의존이 아니라 상징적인 공명이 질문시 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겠다. (수렵이든 어로이든) 동물적인 포식에 부여하는 우주론적인 가중치, 동물의 영적 주체화, 고유한 퍼스펙트비즘이 인정되는 인간-외의 지향성으로 우주가 넘쳐나고 있다는 이론에 관해서는, 츠카노족과 주르나족이라 불리는 부지런한 화전경작민—경작 외에는 주로 어로로 살아간다—과 캐나다와 알래스카의 우수한 수렵민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이 의미에서 식물, 천체현상, 인공물의 정령화는 동물의 정령화 혹은 그 파생물로 간주될 수 있다. 동물은 인간-외의 <타자>의 원형이며, 인척이라는 타성 외의 원초적인 형상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나타난다.

 

널리 보급된 수렵민의 이 이데올로기는 샤먼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비-인간은 비가시적인 의인(擬人)의 형태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적 위상에서 근본적인 전제에 놓인다. 다만 이 사고는 어떤 특수한 맥락에서 전경(前景)으로 등장하는 샤머니즘이다. 아마존의 샤머니즘을 정의하자면, 어떤 개인이 의도적으로 신체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종의 주체성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서기 위한—이 존재들과 인류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양태의—분명한 소질이다. 비-인간적인 존재가 자신을 보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존재를 (인간으로) 봄으로써 샤먼은 종-횡단적인 대화에서 활약하는 방언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들은 그 다음에 이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귀환할 수 있다. 그것은 보통의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해후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일종의 정치적 기법—외교—이다. 서양의 ‘다문화주의’가 공공정책으로서의 상대주의라면, 아메리카대륙의 샤먼의 퍼스펙스티비즘은 우주적 정치활동으로서의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앎의 양태를 암시하는 행동의 양태, 혹은 지식에 관한 어떤 이념이다. 이 이념은 몇몇 측면에서 서양적 근대에서 우대받아왔던 객관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을 이룬다. 후자[서양의 객관주의적 인식론]에서 객체(=대상)이라는 범주는 텔로스(telos)를 산출한다. 즉 앎은 객체화(=대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주체에 속한 것으로부터 혹은 원치 않는 모습으로부터 혹은/그리고 불가피하게 대상에 투사되는 것으로부터 객체 자체의 본래적인 것을 구분해낼 수 있다. 나아가 앎은 탈주체화하는 것, 현전하는 주체의 일부를 이념적으로 최소량까지 줄여나가서 대상으로서 해명하는 것이다. 객체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객체화 과정의 귀결로 간주된다. 주체는 주체가 산출하는 객체와 함께 구성되고 인식되며, 하나의 ‘저것’으로서 ‘외부에서’ 보이게 될 때에 객관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적 게임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는 것은 비실재적인 추상인 채로 남는다. <타자>의 형식이란 물(物)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리는 것 같다. 앎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아야만 하는 저기—저편이라기보다 저 자(者)—의 시점(視點)에 서는 것이다. 즉 샤먼의 지(知)는 ‘누군가’ 즉 다른 주체나 다른 행위자인 ‘무언가’를 조준한다. ‘타자’의 형식이란 인격이다.

 

유행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샤먼적인 인격화ㆍ주체화는 데네트(Dennett 1978)를 필두로 하는 정신에 관한 근대적인 철학자들(혹은 근대정신에 대한 철학자들)이 조망해온 ‘지향자세’의 보편화 경향을 반영한다. 더욱 정확성을 기하자면—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자면—, 세계의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의 표상에 이르기 위해 ‘환경적인 지향성’을 제로까지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이념적인 인식론에 직면한다. 진정한 지(知)는 지향성의 최대한의 개방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주체성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취한다(Gell 1998). 나는 앞서 샤머니즘을 정치적 기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것을 정치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즉 샤먼의 탁월한 해석이란 하나하나의 사건을 실제로는 하나의 행동, 즉 어떤 행위자의 내적인 상태와 지향적 속성의 표현으로 본다는 결과에 이른다(앞의 책: 16-18). 성공적인 해석은 대상 혹은 노에마(Noema: 의식의 대상이 되는 측면)로 회귀하는 지향성의 서열에 정비례한다. 주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물이나 물(物)의 상태, 바꿔 말하면 알고자 하는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관계를 결정할 수 없는 자는 샤머니즘적으로 무의미하다—즉 그것은 정밀하고 정확한 지(知)에 대해 저항하는 ‘비인칭적인 요인’이자 인식론적인 잔재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객관주의적인 인식론은 그 반대쪽으로 선회한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지향자세를 편의적인 의제로만, 즉 목표-대상의 행동이 매우 복잡하고 원초적인 물리적 과정으로 분해할 수 없을 때에 우리가 채용하는 무언가로만 간주한다. 망라적ㆍ과학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모든 행동을 인과론적인 사건의 연쇄로, 그리고 그러한 연쇄를 (원격작용 등이 아닌) 물질적으로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근대의 자연주의자의 세계에서 주체는 충분히 분석되지 않는 객체이고,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반전을 포함하는 것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해석상의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객체란 불완전하게 해석된 주체이다. 여기[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서는 인격화하는 것 자체가 앎이다. 알기 위해서 인격화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대상이란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즉 객체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상—인간을 모습을 하는 동물로서, 정신으로서—에 이르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혹은 적어도 표출하는 주체와 대자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자에게 ‘접근하여’(Gell 앞의 책) 존재하는 무언가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제2의 선택지에 관해서는 비-인간적인 행위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상 하에서 지각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인간-외의 존재의 주체성의 세계로 향하는 ‘문화’의 번역은 ‘자연적’인 몇몇 사건과 대상을 사회적 행위능력의 가설형성적 추론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색채를 띠게 된다. 가장 많이 보이는 사례로서, 인간에게는 삶의 사실뿐 인 것이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고도로 문명화된 인공물과 장비품으로 변태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의 ‘발효주’이며, 우리가 진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맥에게는 의례용의 큰 건물이다. 인공물에는 이 흥미진진한 양의적(兩義的)인 존재론이 있다. 그것[인공물]은 대상이지만 필연적으로 어떤 주체를 지시하며, 그 때문에 동결된 행동, 즉 비-물질적인 지향성의 물질적인 구현화처럼 보인다(Gell 1988: 16-18, 67). 요컨대 ‘자연’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타자에게 ‘문화’일 수도 있다. 여기에 바로 인류학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이 담겨있다.

 

 

애니미즘

 

내가 말하는 ‘퍼스펙티브주의’는 최근 데스콜라의 논의(Descola 1992: 1996)가 복권시킨, 토테미즘과 대칭적 혹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자연의 계열과 사회의 계열을 분절시키는 양태로서의 ‘애니미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데스콜라는 ‘자연의 대상화’의 세 가지 양태를 구분할 때, 비-인간에 대한 모든 개념화는 항상 사회의 영역을 참조한다고 단정한다. 토테미즘이란 사회의 내적인 질서를 논리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 자연종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자연과 문화의 관계는 은유적이며 계열-내, 계열-간의 불연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애니미즘에서는 ‘사회생활의 기본 범주’가 인간과 자연종 간의 관계를 조직화하며, ‘자연의 존재에 인간적인 성향과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기초해서 자연과 문화 간의 사회형태적인 연속성이 규정된다(Descola 1996: 87-88). 자연주의란 서양의 우주론에 전형적이며 환유적인 불연속성에 의해 분리된 영역인 자연—필연성의 영역—과 문화—자연발생성의 영역—간에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조정한다. ‘애니미즘적 양태’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 사회처럼 ‘자연과 자신의 사회화를 대상화하는 핵심적 전략’(Descola 1992: 115)으로서 동물이 되려는 사회의 특징으로서, 세련된 내적인 구분을 결여한 사회형태학 하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 또한 토테미즘과 공존하는 조합의 방식에서 생겨나기도 하며, 거기서는 사회가 내적으로 분할된다. 예를 들어 보로로족과 그들의 의한 아로에/보페의 이원론처럼(Crocker 1985).

 

데스콜라의 논의는 야생의 사고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적인 상상력을 특징짓는 토테미즘과 분류의 논리에서 은유의 일방적인 과정에 대해서 폭넓게 나타나는 불만의 한 사례이다. 이러한 불만에서 생겨난 것이 구조주의라는 이름의 달의 뒷면을 탐사하고자 하는 근래의 시도이며, 이 시도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성주의가 떠나보낸 감정을 ‘상호융합’과 ‘애니미즘’ 등의 관념에 의해 되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데스콜라가 해놓은 많은 정리(定理)는 (정리를 시도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에 이미 있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사회생활의 구조화의 기본적인 범주’는 본질적으로 데스콜라가 논한 애니미즘의 사례에서는 친족범주이며, 특히 혈족과 인척이라는 범주이다. 그런데 『야생의 사고』에서 다음과 같은 소견을 볼 수 있다.

 

토템 분류나 직능 분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민족에서 혼인교환이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 문화를 중개하며 또 직접 응용하는 모델이 되기 때문임을 이와 같은 신화는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Lévi-Strauss 1962b: 170[레비-스트로스 1999: 203 일부수정]).

 

여기서는 그 후 많은 민족지학자가 주장한 아마존의 우주론적 조작자로서의 인척의 역할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 간의 교환모델과 토템적인 체계모델의 상보적인 분포를 시사하면서 여기서 논하고 있는 애니미즘적인 모델과 아주 유사한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수렴(收斂)의 사례를 들어보자. 데스콜라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공존의 사례로서 보로로족을 참조했다. 그러나 토템과 마니도(Manido)[오지브와족의 홍수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 각각의 체계가 조합되어 있는 오지브와족(Ojibwa, 북미인디언)의 사례도 인용할 수 있다(Lévi-Strauss 1962a: 25-33). 그것은 토테미즘과 공희(供犧) 간의 일반적인 대립을 나타내는 매트릭스로 기능했기 때문에(Lévi-Strauss 1962a: 295-302), 토테미즘/애니미즘의 구분의 틀에서 직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를 대비해보자. 이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특징적인 차이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기존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의 대비를 다루면서, 근대적인 자연주의를 오로지 ‘존재론적인 이원론’이라는 말로 기술하는 것은 어딘가 불충분해보인다. 토테미즘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혼성의 현상으로서 존재론적이라기보다 분류적인 것 같다. 즉 다른 두 개의 양태처럼 자연과 문화 간의 관계들의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하게 이론적이고 시차적인 상관관계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부터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를 논하겠다.

 

애니미즘은 인간적인 계열과 비-인간적인 계열과의 관계들에 사회적인 특징을 조정하는 존재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연과 사회 사이의 틈이 바로 사회 그 자체이다. 자연주의는 반전된 공리에 기초한다. 사회와 자연의 관계들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다. 실제로 애니미즘적인 양태에서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사회적인 세계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은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환경에 놓이게 되는데(그리고 이 의미에서 자연은 포괄적인 사회의 일부이다), 자연주의에 있는 존재들에게 이와 동일한 구분은 자연의 내부에 있다(그리고 이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회는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자연현상이다). 애니미즘은 사회를, 자연주의는 자연을 무표(無標)의 극으로서 아우른다. 이 극은 제각기 대조적으로 세계의 보편적 차원으로서 기능한다. 그 때문에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는 비대칭적이고 환유적인 구조이다(그것들은 은유적이고 등가적인 구조인 토테미즘과 구별된다).

 

우리가 아는 자연주의의 존재론에서 사회/자연의 경계면은 자연이다. 즉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동일한 유기체이며, 다른 신체와 힘과의 ‘생태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신체-대상으로서 모든 것을 생물학 및 물리적인 필요성의 법칙에 의해 규제받는다. ‘생산력’은 ‘자연의 힘’을 이용한다. 사회적인 관계, 이것은 주체 간의 계약적 관계 내지는 제도화된 관계이며, 인간적인 사회 내부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연주의의 문제이다—이것들의 관계들 속에 어떤 것이 ‘비-자연적’인 것일까? 자연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의 자리매김은 불안정하며, 우리의 전통이 보여준 것처럼,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오늘날 그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자연의 일원론과 (문화연구와 상징인류학이 현대적인 표현형의 하나가 되고 있는) 자연/문화의 존재론적인 이원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이원론과 (신체/정신, 순수이성/현실이성 등의) 그 상관물을 확립하는 것은 <자연>의 관념이 궁극적인 참조항이라는 성질을 강요할 뿐이다. <자연>의 관념과 <초자연>의 관념의 신학적인 대립, 그 투명한 인식론의 직접적인 계보의 후예로서 <자연>의 관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는 <정신>의 현대적인 이름이다. 적어도—자연과학(Naturwissenshaften)과 정신과학(인문과학 Geistewsissenchaften) 간의 구분을 떠올려보라—<자연>과 <은총> 간의 불확실한 계약의 이름이다. 애니미즘에 관해서는 불안정함이 대극(對極)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질문은 동물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와 자연의 혼성을 인식한다 해도, 우리 사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종합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자연을 보편적인 사회적 형식으로부터 차이화하는 것이며, 또 ‘특히’ 인간적인 신체를 ‘공적(公的)’으로 종-횡단적인 정신으로부터 차이화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인간적인 세계 속에 있는 차이와 성질을 비-인간적인 세계에 투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정의하는 것과, 즉 인간-내의 범주와 관계성이 모든 사물의 배치도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되는 ‘사회중심’적인 모델로서 애니미즘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해도 그것이 과연 의의 있는 일일까(Descola 1996)? 이러한 투영론적인 해석은 이론에 대한 몇몇 주석에 분명하다. ‘토템적 체계가 자연에 따르는 사회를 모델로 한다면, 애니미즘적 체계는 사회에 따르는 자연을 모델로 한다’(Århem 1996: 185). 여기에서 분명해지는데, 문제는 애니미즘이라는 용어의 전통적인 의미와 ‘미개의 분류’를 사회형태학으로 환원하는 것과의 사이에 원치 않는 유사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래드클리프-브라운—토테미즘에 대해 서술한 그의 최초의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회/자연의 관계에 부여된 고전적인 특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잉골드(Ingold 1991, 1996)는 아날로지칼한 투영 혹은 자연의 사회적인 모델화라는 도식이 자연주의의 환원론을 피해가지만 [결국] 자연/문화의 이원론에 빠질 뿐이라고 말한다. ‘진짜 자연적’인 자연과 ‘문화적으로 구축된’ 자연을 구분함으로써 무한후퇴에 직면하는 우주론에 관한 전형적인 이율배반으로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모델 혹은 아날로지라는 관념은, 사회관계가 구성된 것이라는 자의적인 영역과 그러한 관계가 표상된 것이라는 비유적인 영역 간의 구분을 먼저 묘사하도록 상정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사회성에 의해 인간과 동물이 관련된다는 사고는 모순적이지만 제1의 존재론적인 불연속성에 의존한다. 비-인간적 세계에 대한 인간적인 사회의 투영으로 해석되는 한, 애니미즘은 ‘토템적’ 내지는 분류적인 독해에 현혹된 채의 환유의 은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영역과 그것과 인간적인 사회와의 관계성을 관념화하기 위해 인간적인 사회의 영역의 범주를 비유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기술할 수 있을까의 문제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질문은 데스콜라가 말한 ‘애니미즘’과 어딘가 닮아있는 것도 같은 퍼스펙티브주의가 실제로 어떤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표명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즉 ‘동물은 인격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하나 의문이 있다. 만약 애니미즘이 인간적인 인지와 지각의 능력, 즉 동일한 주체성의 형식을 동물에 부여하는 것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동물이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면 동물과 인간 간의 차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약 동물이 사람이라면 왜 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퍼스펙티비즘이 생겨나는 것일까? 우연찮은 신체적인 형상(의복)을 정말로 외견과 본질 간의 대비의 관계로 기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Descola 1986:120; Århem 1993: 122; Riviére 1994; S. Hugh-Jones 1996a). 마지막으로 애니미즘이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대상화의 기능이라면 남미의 우주론에서 이 대립이 담당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암시하는 그 수많은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서양적인 이원론에 대한 선주민의 투영이 아니라고 한다면, 또 다른 ‘토템적 환상’을 다룰 수 있을까?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을 단지 개략적으로 이용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이 개념들은 아메리카대륙의 다수의 신화의 의미론적인 대조성, 단일하고 근본적인 이분법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이 대조성을 조직하기 위해 『신화학』에서 사용하는 ‘백지의 라벨’(Descola 1996: 84)에 불과한 것일까?

 

(계속 이어집니다)

 

 

Perspectivism and Multinaturalism in Indigenous America in THE LAND WITHIN-Indigenous territory and perception of environment, 2005, pp. 36-74.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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