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 포스트구조주의적 인류학으로의 여정』(원제 Canibal Metaphysics: For a Post-structural Anthropology 2014년 12월 출간)의 일본어판(2015년 10월 출간) 해설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한국에서 지식계는 물론 인류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인류학자이다. 다음의 글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을 전혀 알 수는 없고, 다만 그의 학문적 의의와 계보를 엿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먼저 공부해두어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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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에서 『안티나르시스』로: 『식인의 형이상학』 해설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1970년대까지 현대사상 속에서 인류학은 매우 철학에 가까운 학문이었다. 그 속에는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발생한 유파이며, 그것은 항상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 전체를 아우를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반세기,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의 이론이 융성했고, 그 속에서 데리다와 스피박의 주장은 여러 방식으로 인류학과 관련된다. 일본 또한 민속학과 고유의 사상사의 발굴이 다방면에서 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인류학의 ‘이론’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류학 자신이 이미 탐구할 ‘미개’의 땅을 잃었다는 사정이 있을는지 모른다(브루노 라투르가 ‘과학’ 인류학이라는 장르로 활약하고 있고 최근 우주인류학까지 선언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현저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류학은 진정 힘을 잃은 것일까? 특히 철학에 대해 혹은 철학이라는 유럽적인 지식세계의 내부에서 저항하는 강한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라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출신의 이 인류학자는 영어권에도 불어권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의 상징인 브라질에서 출현한 이 인류학자의 존재는 다시금 인류학 이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연결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의 이론적 교착을 이뤄내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현대철학에서 아감벤 사상의 유행과 유사한 점이 있다. 벤야민과 푸코와 들뢰즈를 연결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매우 깊은 곳에서 로마적 종교성을 이끌어내었다. 이처럼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영미계의 인류학자인 스트라샌과 와그너, 그리고 프랑스계의 데스콜라와 라투르, 중국사상학자인 프랑소와 줄리안, 들뢰즈&가타리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연계하고 횡단한다. 그 속에서 그의 사상의 중핵은 물론 레비-스트로스이며, 나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배경에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있다. 그에 입각한 전개는 대단히 견실하다.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인류학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본래 일본은 영미권과 독일, 프랑스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제3자로서 이탈리아나 브라질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거의 누구도 그렇게 한 이는 없다(물론 발신하는 언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게다가 그 이상의 문제로는 그동안 스트라샌이나 데스콜라의,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저작마저 일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일본의 인문학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더 이상 따져들 수가 없다. 다만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번역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 서설은 이 정도로 해두자. 그의 이 책은 모든 점에서 현대철학의 성과를 인류학으로 받아 안고 독자의 개념설정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극히 야심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좁은 범위에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를 들뢰즈&가타리를 통해 재독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들뢰즈&가타리가 이룬 철학지리학적인 탐구를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5장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의 포스트모던의 흐름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부당하게 경시되어왔다는 사정이 있다(이 점은 푸코와 데리다가 일찍부터 사회과학화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조류는 실제로는 들뢰즈&가타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어 온, 애초부터 영국의 메를린 스트라샌(『증여의 젠더』)과 미국의 로이 와그너의 주장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라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지적한다. 나아가 프랑스 인류학과의 연관에도 그는 주시한다. 현재 프랑스 인류학은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과 이어지는 속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영향권 하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가 칭찬하면서도 비판하는 필리페 데스콜라(『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주장과 그에 연결되는 인류학의 본류의 논의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크게)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 이르기까지의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인 데스콜라 또한 그러한 것에 대해—그는 데스콜라의 업적에 대해 아낌없이 상찬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등의 이론도 데스콜라와 연관시킨다—, 후기의 레비-스트로스가 들뢰즈&가타리의 특히 『천개의 고원』의 생성과 리좀의 논의와 깊게 중첩된다는 것을 밝혀낸다. 토템적인 조합의 사고가 아닌 혼인=연계(alliance)라는 개념(그와 대립하는 것은 직선적인 계보(filiation)이다)을 강조하며, 생물학적(베르그송)ㆍ인류학적(『신화이론』의 레비-스트로스)인 생성적 리좀성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후자의 논의를 확장시킨다.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들뢰즈&가타리의 인류학적 기술, 특히 『안티오이디푸스』를 인류학의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행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리좀과 생성이라는 관점이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지 않는 영미의 인류학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이론』을 독해할 때에도, 미래 인류학의 논의를 추진해가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것을 그가 명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시도의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서두에 언급한 『안티나르시스』라는 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본래 그가 쓰고자 했지만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이며, 바로 이 책이 그 일부로 자리한다.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 신체와 식인이라는 테마도 이 개념으로 수렴된다(당연히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자의 독자적인 패러프레이즈이다).
안티나르시스라는 개념은 극히 광대한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물론 포르투칼의 구식민지 출신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그는 상층계급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도 불어도 능숙하다), 비서양이라는 입장에서 인류학을 검토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칙으로서 제시된다.
서양인에게 인류학이란 언제나 ‘타자’의 탐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 대한 타자로 설정되며 타자 속에서 다른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기에 나르시스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이 탐구의 대상이든지, 서양적인 원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모든 관점의 중심이다. 인류학의 ‘성립’과 연관해서도 여지없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이 중심에 있다.
그런데 관찰대상이 되는 아마존의 인디오는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자신은 인간이자 문명인이고, 다른 문명권의 서양인이 비인간이다. 인디오는 당연히 서양인을 비인간으로서, 이물로서 관찰한다. 그들 자신의 고유의 기술이 있다. 여기서 인류학적 기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유럽의 관점도 아마존의 관점도 포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퍼스펙티브주의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의 관점—그 자신이 다자연주의의 아이디어를 공급하는—에서 보면, 동물도 관점이 있고 사자(死者)도 관점이 있다. 그는 동물이 인간을 보는 순간에는 동물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안티나르시스는 인간과 자기의 측면을 고정하고 거기에서 타자의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서양인에게는 서양인이 보는 관점이 있으며, 인디오에게는 인디오가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실재하고 그게 대해 다양한 문화적 상대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나 사자(死者)의 문화가 있으며 각각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되는 자연은 일의적(一意的)인 것으로 규정되고 만다. 나아가 그러한 ‘객체적’인 대상X 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손님에게 대접하는 맥주는 어떤 동물들에게는 피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대상으로서 부여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맥주이고 어떤 동물에게는 피인가 라고 묻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있는 맥주/피로서의, 그 자신이 다양체인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양체로서의 자연, 그 속의 잠재성 그 자체를 다자연주의는 긍정한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자연주의가 해석의 혹은 이문화적(동물의, 사자의) 관점의, 인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을 묻는다면 이렇다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동물에게는 동물이 인간이며, 사자에게는 사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학자는 현지인에게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장하는 다자연주의는 단순한 다문화주의의 자연화적 비전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다자연주의는 확실의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번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번역이 배반인 것처럼 어떤 이중의 뒤틀림을 예비하는 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번역이 본래 배반에 가까운 작용이듯이 생성으로서의 변용도 그렇게 찾아진다. 다자연주의에는 들뢰즈&가타리적인 잠재성의 다양체로서의 자연을 도입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변용이 언제나 일어난다. 우리 자신이 인간/비인간의 이행 그 자체이다.
신체의 중요성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점이란 본래 신체적인 것이다. 다자연적인 것이란 그 자신이 신체이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들뢰즈&가타리에서 마이너철학의 계보를 연결지음과 동시에 아메리카인디오 독자의 세계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으로 말하면, 토테미즘적인 분류를 넘어 어떤 샤머니즘적인 의례를 거쳐 포식의 인류학(아마존의 식인이라는 존재방식, 즉 신체를 먹는 존재방식은 alliance의 수행에서 중요하다)까지 확장된다. 포식을 통해 우리는 신체를 자신 안으로 거둬들이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어 다양체로 변용하는, 아니 본래 그와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는 그곳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러 안티나르시스의 혹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적인 다자연주의의 영역의 광대함이 밝혀진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후기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중첩시킴으로써, 안티나르시스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티나르시스가 안티오이디푸스의 패러프레이즈라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서양적인 문화의 근원에 대한 아메리카인디오적인 자연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미도 상당히 강하다.
최근 프랑스사상(아니, 마르크스와 벤야민,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크리프케(Saul Aaron Kripke)까지 고려하면 서양현대사상 그 자체)의 축은 그리스사상 대 유대사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유대를 그리스에 대항하게 하는 것으로서 다루는 ‘타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브라질에서 발언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아메리카인디오를 포함한 타자이다. 그리스와도 예루살렘과도 일절 관련하지 않는 ‘타자’. 프랑소와 줄리안이 중국을 다루면서 말하는 ‘밖’을 연상시키는 그것. 다자연주의가 다문화주의를 뒤집은 것이 아닌, 이러한 거대한 대칭축을 포함하면서 그려내는 것으로서. 그렇다면 일본은? 줄리안의 중국과도 다른 일본은? 그에 대한 답은 이제 그가 아닌 우리가 내려야 한다.
이러한 광대한 인류학적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서, 진정 지구화라는 사태가 진행하는 시대에서 시작되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인류학에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들은 제각각 포루투칼어와 영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정은 크다(이 책에서 필자 본인은 브라질 포루투칼어의 번역자의 이름을 들면서 불어판을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번역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같이, 글로벌세계에서 메이저언어로 마이너한 지역으로부터의 주장을 발신하는 전략은 앞으로 점차 커질 것이다.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를 읽어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좋든 싫든 들뢰즈&가타리의 사고가 단순한 유행이나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과학에서 그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리좀이든 다양체이든 그 자신으로서는 엄밀한 마이너과학의 개념으로서 읽힐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사고를 레비-스트로스 후기와 접합시킴으로써 그 잠재적인 힘을 원리적인 측면에서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를 수렴하면서 그리스적인 것이 아닌 자연, 즉 아폴론적이지도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아닌 자연, 경계의 자연에 그대로 관련하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유럽사상 일변도였던 ‘철학’이라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이 책 12장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친구’라는 개념의 유럽성이 비판되며, 아메리카인디오의 ‘적’의 개념이 강하게 밀려나오는 등 이 책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메리카인디오와 그리스-유대의 자연이라는 광역의 논의를 영역으로 하는 이 책은 반드시 일본어의 비전을 밝혀줄 것이며, 그리하여 일본의 관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환기시켜줄 것이다.
※ '존재론적 전회'를 주제로 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강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NTdIG-Z_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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