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현실>을 그리다:
‘조용한 혁명’ 이후 인류학과 과학ㆍ자연ㆍ인간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와 철학자이자 『식인의 형이상학』을 번역(공역)한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의 대담을 간추려 요약 정리한다. 한국인류학의 수준은 일본인류학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지만, 80년대 이후의 한국인류학의 흐름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모색하는 데에 참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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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의 조용한 혁명
(히가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에서 인류학은 철학이나 사상과 하나였다. 당시에는 사상연구자가 인류학문헌을 읽는다거나 반대로 인류학자가 철학문헌을 읽는 일이 일상사였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인류학과 철학은 급속도로 단절된다. 브루노 라투르의 인류학이 부분적으로 들어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프랑스의 특수한 과학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철학의 측면에서도, 이론으로서도 인류학은 종말을 고했다. 그런데 최근 인류학에 새로운 흐름이 다발적으로 생성되고 있다.
(카스가) 인류학은 80년대 후반 사상적으로는 표상주의[한국에서는 상징인류학이라는 타이틀로 유입되었다]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인류학자들은 조사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의식을 강하게 표명함과 동시에, 기존의 민족지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것이 어떤 단절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제임스 클리포드의 『문화를 쓴다』로 대표되는 표상주의에 갇히고 만다. 인류학이 이전의 민족지적 전통에 과도하게 반응한 것은 표상이 대리/대변(representation)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From the Native’s Point of View”(현지인의 관점에서)는 지금까지도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새로운 흐름이 80년대 후반에 생겨난다. 그 대표주자로 로이 와그너와 메를린 스트래슨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리/대변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한다.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거칠게 말하면 그들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가능세계를 표출시키는 것이다. 즉 문화의 ‘발명’ 혹은 ‘인공물’의 측면을 강조한다. 조사대상인 사람들 자신이 문화를 ‘인공물’로 ‘발명’하듯이, 인류학자 또한 그들의 문화를 ‘인공물’로 ‘발명’해나간다. 이를 통해 선주민의 사고는 우리의 사고의 잠재태가 되며, 양자는 서로에게 반향한다—수평적 반향(lateral reflection). 이 수평적 반향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과 공명한다.
세 번의 전회
(히가키) 인류학에서는 지금까지 세 번의 전회가 있었다. 그 첫 번째 전회는 19세기 후반 인류학이 성립한 사실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인류학자는 미지의 세계에 들어가 그 세계의 미세하고 희귀한 문물을 기술한다’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류학의 출현을 말한다. 두 번째 전회는 국민국가의 존재방식을 성찰하면서 그 비판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성찰의 인류학(Self-reflexive Anthropology)이다.
(카스가) 성찰인류학은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가키) 포스트콜로니얼의 담론은 자기성찰 속에 표상의 문제를 포괄한다[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가 딱 그렇다].
(카스가) ‘자기성찰’은 근대를 특징짓는 자기성찰성에 갇힌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히가키) 자기성찰은, 예를 들어 유럽이라는 주체가 타자를 볼 때 거울을 보듯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타자를 봄으로써 자신을 본다는 것, 타문화를 보면서 자문화를 본다는 것. 이것이 근대의 자기포박성이다.
(카스가) 여기서 관점이 어디에 있는지가 언제나 의문시된다. 이에 대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관점[퍼스펙티브]이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논하면서 이 의문을 종결시킨다. 이것이 세 번째 전회이다. 이 세 번째 전회가 일어난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레비-스트로스를 계승한 프랑스의 인류학자들을 함께 거론할 필요가 있다.
(히가키) 브루노 라투르는 프랑스인류학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필리페 데스콜라와 프레드릭 켁이 이른바 프랑스인류학의 주류라 할 수 있다.
(카스가) 그러나 최근의 인류학 내의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를 이끄는 이들은 비서구의 인류학자들이다. 스트라샌 등과 같은 영국인은 존재론적 전회와 이론적으로 연결되지만, 그 자신은 존재론적 전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스트라샌의 기념강연에 초청되어 “Who is Afraid of the Ontological Turn?”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바 있는데, 이것은 존재론적 전회가 비서구의 인류학자들을 중심으로 ‘트릭스터’(trickster: 신화세계에서 선과 악, 창조와 파괴, 신과 자연의 세계를 넘나들며 장난치는 존재)처럼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작금의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트라샌 등의 영국인류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고착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것이 현재 영국의 인류학이다. 이렇듯 인류학의 상황은 확실히 변하고 있다.
(히가키) 지금까지의 인류학은 역시 문화에 특히 주목해왔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도 데리다적인 정의와 레비나스적인 윤리와 연결되어 그것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에드워드 사이드와 스피박이 그 전형인데, 거기서는 휴머니즘/인간성이 중시된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자연주의(naturalism)의 흐름도 존재해왔다.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이나 스트라샌의 인공물에 대한 고찰이 그것인데, 사물 그 자체에 내재된 주체성을 찾아내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특권성—이것이 19세기적인 제국주의를 이끌어왔다—의 수정을 기도하는 것이다. 이 흐름은 정치적으로는 차별과 식민주의와 전쟁이 계속되는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인공지능이나 선진과학 등의 기술의 융성과도 관계한다. 이러한 자연주의가 20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이론적으로 분출된 것이다.
(카스가) 맞다. 80년대 이후 선진국들에서 산업구조가 변화됨에 따라 산업 그 자체에 대한 재고찰이 행해졌고 그 다른 한편에서 소련이 해체되었다. 또 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바이오와 정보산업이 활기를 띠어갔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주목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회변화가 존재한다.
(히가키) 스트라샌과 와그너는 레비-스트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금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연구는 레비-스트로스를 『천개의 고원』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카스가) 와그너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당연히 의식하고 있었다. [영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는 구조주의적 도식을 만들었고(물론 간단한 도식이지만), 와그너는 구조주의적이며 3차원적으로 매우 복잡한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뉴기니의 고산지대의 사회가 갖는 신화를 구조적으로 분석했다. 다만 레비-스트로스로부터 자극을 받긴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를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없다.
(히가키) 데스콜라나 켁은 자신들이 본류라고 말한다(웃음).
(카스가) 프랑스에서는 어떤 학문을 하든지 간에 교육과정 속에 철학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철학을 빼고서는 학문을 말할 수 없다.
(히가키) 그렇다. 프랑스 인류학에서는 모스, 바디유, 레비-스트로스라는 계보가 강조되고, 그 다른 한편으로 샤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공동관계 속에서 20세기 전반의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 의미에서 프랑스인류학은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프랑스인류학과 영국인류학의 병행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둘 다 식민정책에 기인한 제국주의시대의 잔존물이다.
(카스가)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류학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의 인류학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민족지가 매우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자신이 현지에 가서 식인에 관한 직접적인 데이터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의 사례를 스스로의 사고와 연결 지으면서 일종의 사고실험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포로에게 성찬을 대접하고 누이의 남편으로 삼았다는 그의 기술은 그의 조사지의 과거기록에도 없으며 다만 페르난데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와 쓴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민족지적 분석은 구체적인 사실군이 아니라 이론화의 예시이다.
(히가키) 확실히 민족지학자라면 다양한 사례를 사용해서 도식적인 전망을 도출해내야 한다.
(카스가) 그렇다. 인류학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은 이론으로 만들어가는 데 저해가 되지만, 그 한편으로 텍스트의 외부성을 환기시키고 ‘뭔가 이상한데 재밌네’라고 할 만한 텍스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재밌음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는 없다. 그는 인류학을 잘해나가기 위해서 철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고를 둘러싸고 인류학을 재구축하며 이를 통해 철학과 인류학의 두 영역을 연결한다.
인간세계를 넘어서
(히가키) 철학과 인류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고, 인류학의 세 번째 전회, 즉 현재의 인류학에 대해서 질문해보겠다. 인류학의 세계적인 흐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본에서도 작년 ‘인류학의 전회’라는 타이틀로 인류학의 최근 성과를 총서로 번역출간하고 있다. 인류학에 기대되는 역할은 지역연구와 국제공헌만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간 인류학이 문화, 이민족, 혹은 다문화공생사회라는 테마에 함몰되어왔던 것이 아닌가? 물론 이러한 테마는 중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미국의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익화 등의 다문화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지구화와 이민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단지 이론적으로 다문화공생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기력하다. 이에, 신유물론이나 사변적실재론이라는 현대사상의 새로운 흐름과 관계하는 것이긴 한데, 인간 자신의 자연성을 고찰하면서 인간 그 자체에서 무언가를 도출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인간세계에 머물지 않는 관점, 즉 자연이라는 개념이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자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다자연주의라고 말하는 그것으로서 이 자연은 그 자체로 매우 복잡하다.
(카스가) 인간세계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그러나 초월적인 조감도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현실을 새롭게 그려낼 것인가? 이 테마에는 스트라샌을 필두로 하는 현대 인류학자들의 고심의 존재론적 전회가 놓여있다. 예를 들어 조셉 존슨은 캐나다의 수렵민의 세계관은 물리학과 같은 자연의 진실을 그 자체로 다룬다는 주장을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전개하고 있다. 또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저서도 있다. 콘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숲의 환경 속에서 비인간을 포함하는 유기체들이 상징이 아닌 아이콘과 인덱스의 수준에서 어떻게 복합적인 의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저술인데, 이러한 ‘존재론적 전회’를 밀어붙이는 인류학자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경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과학의 성과랄까 보편적인 진리가 축척되면서 불가사의한 현실을 허구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존재론적 전회의 흥망은 여기에 달려있다. 나아가 존재론적 전회는 서양의 인식론적 주체를 비판하는데, 존재론적 전회의 비판론자들은 존재론적 전회가 서양적인 보편주의를 재구축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이를 어떻게 돌파해나가는가가 관건이다. 스트라샌의 영향을 받은 과학인류학자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과학을 기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기술을 빼고서는 과학을 이야기할 수 없으며 과학 특유의 사고법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히가키) 인류학의 세 번째 전회의 특징은 로봇이나 유전자공학 등의 첨단과학을 그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주의는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테크노그라시적인 사물을 별종의 자연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과학 혹은 자연은 어떤 과학이며 어떤 자연인가?
(카스가) 수학적 언어와 자연언어는 완전히 다르므로 아날로지만으로는 상호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히가키) 과학의 언어라고 말한다면, 과학 자체도 언어인 것이다. 수식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 또한 하나의 문화이다. 자연을 어떤 위상에서 다룰 것인가 혹은 자연적인 신체란 무엇인가? 즉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서양에서 발전한 일종의 신화라고 말하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로 되돌아가고 있다. 여하간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을 문제시한다 해도 반드시 문화가 섞이기 마련이다. 그 속에서 자연과 다자연주의를 생각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작금의 인류학에서 이러한 환경, 자연, 테크노그라시로 기우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카스가) 간단치는 않다. 방법론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되면, ANT의 분석론과 같은 연구방법론으로 경도되고 만다. 문제는 어떤 접근법도 데카르트적인 심신이원론을 우선적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언어와 자연언어를 누구보다도 먼저 완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었다. 현대의 우리는 뇌신경과학과 정보공학의 발전에 의해 바로 이 두 개의 영역을 가교시킬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의 내부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것을 다루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이 작업 자체가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며 과학의 새로운 지침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가키) 최근 일본인의 DNA 분석을 대규모로 진행한 바 있다. 이 기법은 과거에는 차별을 조장한다 하여 비판받았다. 일본열도의 인간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를 유전자를 통해서 밝혀내는 것이다. 즉 DNA를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일본인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단일한 것이 아님을 자연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것이며, 이것은 유물론적인 정치로 나아가고 있다.
(카스가) DNA 결정주의로 비판받았던 것이 오늘날의 기법으로 사용되어, 문화를 붕괴시키고 있다. 인간인가 비인간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자신을 다시 보는 것이다.
(히가키) 물론 이러한 DNA적인 기법 이전에 일본어 화자 공동체라는 하나의 틀이 있다. 이것의 습속, 역사, 문화적인 깊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러한 문화적인 논의와는 별도의 출발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만큼 철저하게 파헤쳐야 할까? 자연인류학과 문화인류학, 고고학과 철학과도 연결되는 이 테마를 과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함으로써, 포스트콜로니얼니즘을 한칼에 베어버리고 전복시키는 장치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결코 반동이 아니며 사물과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에 대한 논의를 열어가는 것이다.
(카스가) 좌파적인 관점에서도 자연주의는 진보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오늘날의 가능성
(히가키) 퍼스펙티브주의란 무엇인가?
(카스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강조하듯이 그것은 ‘타자의 타자는 타자이다’라는 테마로 향하며 차이의 (내재적인) 제한 없는 생성을 이끌어내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샌과 와그너를 읽어왔다면, 그들이 이미 아날로지의 연쇄라는 형태로 이 논의를 전개해왔고 다만 어떤 주의로 주장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히가키) 『식인의 형이상학』의 원제가 『안티 나르시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식인의 형이상학』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저항이다. 결국 『안티 오이디푸스』도 나르시시즘이 아닌가 라는. 나르시시즘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타자를 말할 수 없다고.
(카스가) “From Native’s Point of View”가 인류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테제라는 것을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 관점에서 반성은 확실히 나르시시즘적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이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타자의 타자는 타자이다’로 향하는 첫걸음으로서 그는 ‘타자’를 자기의 포식자와 같은 적(敵)의 이미지로 제기한다.
(히가키) ‘적’(敵)은 플라톤적인 우애와 같은 그리스 철학에 대한 어떤 안티테제이다.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그리스적인 ‘친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은 지중해문화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특정한 종교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라는 비판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문화적 배경은 유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아마존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 때문에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신교적 체계와는 다른 문화기반을 가지는 아메리카대륙의 선주민 인디오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류학을 구축할 수 있었다.
(카스가) 서양화(西洋化)란 동시에 근대과학의 보급과 발전이기도 하다. 아무리 서양이 싫다 해도 서양에서 생겨난 과학적 사고방식은 제도적으로 세계각지로 확산되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의 입장은 이것을 더 넓은 사고방식의 관점에서 다시 다뤄보자는 것이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다시피 스트라샌의 아날로지적인 연대가 매우 중요한데, 이 연대가 대칭적인 표현으로서 프랙탈적인 구조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과 대비한다면 대칭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날로지적인 유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비대칭적이며 그것은 결정적으로 과학적인 유대와 다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레비-스트로스의 실타래가 나타난다. 『신화학』에서 전개된 신화 간의 유대는 원칙적으로는 대칭성의 파괴로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문화가 패턴의 실뭉치라고 한다면, 그가 통찰한 패턴에서 패턴으로의 변화는 과학을 포함해서 우리의 생활을 분석하기 위한 지침이 될 수 있다.
(히가키) 프랑스철학에서 푸코는 의학사를 발굴해내었지만 과학전체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았다. 들뢰즈&가타리는 스트라샌과 같이 프랙탈과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과학 그 자체를 그 정도로 탐구한 것은 아니다. 데리다에 대해서는 좋든 싫든 ‘언어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레비-스트로스의 이질성이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는 ‘야생의 사고’라는 테마로 서양적인 과학을 대칭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표적은 역시 ‘과학’이 아닌가?
(카스가)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대상화했지만 과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히가키) 그러므로 레비-스트로스를 어떻게 읽어야하는가는 큰 과제로 남아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들뢰즈&가타리의 다양체와 잠재성의 논의를 연결짓는 수법으로 레비-스트로스를 다루고 있으며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독해라고 생각한다. 또 레비-스트로스에게는 패턴의 문제가 있다. 그는 생물학적인 모델 패턴의 변형과 확장을 원용하면서 문화의 구조를 보고자 했다.
(카스가) 그의 표현대로, ‘구체적인 것의 과학’을 가지고 과학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히가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철학자에게 가시와 같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의 사상은 다루기 쉽다. 그들은 철학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 대해서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세부적이기 때문에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레비-스트로스가 60년대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루기 어려운 존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통합적으로 다루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반동적으로 흐르게 되고, 그 어렵다는 라캉적인 정신분석과 비교해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카스가) 타자의 철학ㆍ사상과의 유대 하에서 그 자체의 실용성을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웃음). 고유명사가 많은 까닭에 읽기가 귀찮기도 하고.
(히가키) 그러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든 데스콜라든 라투르든 들뢰즈&가타리든 어떤 의미에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자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스가)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이 아니었다면 인류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인류학은 영미계가 강했기 때문에 그의 작업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의 업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연구를 계속해오고 있다. 내가 삼은 그의 지침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 문장인 ‘인류학의 목적은 인간을 용해시키는 것이다’에 있다. 또 하나는 『신화학』을 지지하는 ‘감각적인 것은 이론적인 것이다’에 있다. 전자는 이미 현대인류학의 테마의 하나가 되었다. 내게 ‘용해’는 ‘구체적인 것의 과학’의 구축이 근대과학과 함께 전개해온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후자의 연구를 통해 열려진다. 근대과학은 ‘구체적인 것’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도 수학자도 좌변과 우변에 완전히 다른 것을 놓음으로써 방정식을 만들어낸다. 양변은 단지 약속에 따라 증명과 물리량의 측정에 따라 등치된다. 새로운 대칭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들뢰즈도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도래할 수밖에 없는 민중’을 위한 과학을 예술ㆍ철학과 나란히 놓은 것이다.
(히가키) 들뢰즈도 『감각의 이론』이라는 책을 썼다. 프란시스 베이건의 그림을 사용하면서 감각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을 접합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감성의 논리이다.
(카스가) 레비-스트로스의 추상성은 매우 높다.
(히가키) 그렇다. 그 추상도는 들뢰즈와 또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레비-스트로스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카스가) 영미계의 인류학에서도 『친족의 기본구조』는 비판해도 『신화학』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못한다. 레비-스트로스에서 남은 것은 바로 이 작업이다.
인류학과 근대
(히가키) 인류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철학이나 사회과학(사회학)과의 관계성은 예전부터 논해져온 바이고 최근에는 선사고고학이라는 분야에서 착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외에도 예를 들면 앞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과학인류학자로 소개된 브루노 라투르의 ANT도 그 교착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낸다.
(카스가) 개인적인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회과학에 거의 기대하는 바가 없다. 지금 나의 대학소속은 ‘사회과학연구과’인데, 예를 들어 ‘사회학이론’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지금의 사회과학은 새로운 토픽으로 옮겨갔는데, 현장은 그와 동떨어져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히가키) 즉 문화적 표상을 좇을 뿐이다. 난민, SNS, 혹은 빈곤문제 등의 ‘유행’에 빠져있다.
(카스가) 일종의 사고의 태만이다. 철학과 인류학은 각각의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한 유행에 빠지지 않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부과한다고 생각한다. 그 한편으로 개념에 의거해서 세계를 재구축하려는 강한 집념이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구체의 세부에 대한 집착이라는 엄격함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학자가 해설자가 되려는 학계의 풍토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스가) 매우 소박한 의미에서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은 사실이며, 나아가 국가와 법을 가진 이상 동물 집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사실을 인류학도 사회과학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히가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은 어떻게 넘어설까, 혹은 어떻게 그것이 연결되는가로 논의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ㆍ자연ㆍ인간
(히가키) 이제 우리의 대담도 끝을 향하고 있다. 다시 과학의 문제로 되돌아오면, 과학이 신체에 침투되는 가운데 인간이 점차 사이버화되는 것인가? 윤리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기술적으로는 이미 그것을 넘어서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근대가 갖고 있는 이념을 어떻게 사고해야 할까? 나 자신은 이러한 이념이 이미 소멸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물과 비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는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혹은 말년의 데리다가 물은 것처럼, 동물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카스가) 우리는 지금 전체적인 조망이 부재한 단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 개인의 전망을 말하면, 50년 후에도 인류학이 존재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단지 테크노그라시의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양자생물학에서 비결정성을 생각할 때, 현 단계에서는 고전역학적인 이론과 양자역학의 논의는 완전히 정합성을 갖고 있지 않다. 양자의 수준에서 정합화될 수 없기 때문에 분자와 세포, 혹은 인간사회의 레벨에서 전체를 통일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의 생물과학처럼 세부적으로 쪼개어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열역학과 진화론처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인류학 또한 자신의 전망을 갖기 어렵다.
(히가키) 20세기의 사회과학은—통계과학은 별도로 하고—일반적으로 그러한 물리현상과 사회현상의 접합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19세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2020년에는 어떤 기술이 등장할 것이며 어떤 사회적 문제가 나타날 것인지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감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것의 이미지와 형태가 기술에 의해 완전히 변해가고 있는데 이 원리를 누구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학과 일본
(카스가) 안타깝게도 지금의 일본에서 인류학과 민속학은 거리를 두고 있다. ‘일본적인 인류학’에 대해 말하면, 일본을 연구하는 인류학보다 일본의 인류학자에 의한 해외연구가 훨씬 더 ‘일본적’이며, 이른바 보편으로 통하는 고유성을 띠고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앞으로의 인류학은 민속학과 관계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히가키)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과제로 남겨진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일본연구에 민속학을 편재하는 것이다. 일본철학의 역사에서 민속학적 사고가 가진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만한 것이 아니다. 또 그러한 민속학적 사고의 흐름은 세계적인 다자연주의에 대해 또 다른 방향의 접근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스가) 공감한다. 그러나 나 자신은 일본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을 경계한다. 국제적으로 발언하는 경우에도 “From the Native’s Point of View”를 역이용할 생각이 없다. 자기 속에 타자를 끌어낸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올가미일 뿐이다. 오히려 타자의 타자로서, 또 다른 타자가 되는 전망을 세워야 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은 레비-스트로스의 자식으로서 그 작업을 보여준 것이다.
春日直樹+檜垣立哉、「新な<現実>を描く」『現代思想』3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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