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머티즘 사상사에 관한 책의 서문을 번역했다. 프래그머티즘이 어째서 21세기의 '미래의 철학'과 다시금 접합되면서 활력을 얻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뒤로 갈수록 아주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은데, 어디까지 번역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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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
이토우 쿠니타케(伊藤邦武)
1. 복수의 탄생과 재생
세 번의 탄생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은 대체 언제 탄생했는가?
기묘하게도 프래그머티즘은 복수—적어도 두 번, 경우에 따라서는 세 번—에 걸쳐 탄생한다.
첫 번째 탄생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탄생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유방식이 하나의 유력한 철학사상으로서 미국 안팎의 철학계에서 선언된 것으로, 최초의 탄생에서 20년 이상이 지난 1898년에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사상은 이 무렵부터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여 미국철학에서 주류적 입장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탄생은 20세기 중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계의 배경으로 물러나있던 프래그머티즘이 다시금 미국 철학계의 중심으로 도약한 사실을 가리킨다. 프래그머티즘의 탄생의 해라기보다는 재생의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이 미국의 사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래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이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을 전후해서 미국철학은 다시 프래그머티즘으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그 확대운동이 20세기말까지 세계전체로 파급됨으로써 결국 20세기의 중심적 사상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첫 번째의 탄생시기인 1870년을 전후하여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이 사상의 ‘창시자’는 철학자 찰스 퍼스이다. 퍼스는 과학자ㆍ논리학자로서 평생을 보낸 사상가인데, 1870년을 전후한 당시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연구자로서 미국동부해안의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주변에서 몇몇 친구들과 ‘형이상학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조직했다. 그는 클럽의 중심적 인물로서 이 클럽의 토론석상에서 이 사상의 이름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두 번째의 탄생시기인 1898년에 이 사상의 의의를 세계로 설파한 이는 퍼스의 사상적 동반자이며 형이상학 클럽의 멤버이기도 했던 윌리엄 제임스였다. 그는 이 무렵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런 그가 19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국서부해안의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철학의 개념들과 실제적 효과(Philosophical Conceptions and Practical Results)’라는 제목의 강연을 행하고 그 속에서 이 철학사상이 하나의 독립된 체계적 세계관, 인간관, 인간의 지적능력과 본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임을 강하게 설파했다. 제임스의 이 강연 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각국에서 이 사상에 공명하는 철학자, 사상가들이 생겨났고, 이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양의 유력한 사조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의 탄생시기인 1951년에 이 사상의 재생을 부추긴 것은 당시 하버드대학의 가장 유력한 철학교수이자 논리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이다. 그는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로 대표되는 영어권의 분석철학을 계승한 미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가 이 해에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라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유력한 논리실증주의라는 사상의 근본적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의 대안적 사상의 원리로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발상의 의의를 주창했다.
콰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세계의 철학계 전체를 이끈 중심적 사상가였기 때문에 그의 이 주장에 의해 프래그머티즘은 논리실증주의의 세례에서 벗어나 보다 세련된 철학사상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콰인 자신은 자신의 사상을 오로지 프래그머티즘으로만 특징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하간 그 후에 이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콰인의 프래그머티즘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 사상을 전개해왔고, 이 전개운동은 ‘네오 프래그머티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첫 번째ㆍ두 번째 탄생의 반향
그런데 퍼스가 처음으로 이 사상을 형성하고 제기했을 때, 그의 주변에는 제임스뿐만 아니라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Oliver Wendell Holmes Jr.)와 천시 라이트가 있었다. 그들은 법률, 철학, 의학, 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도유망한 전문가ㆍ연구자로서 활약 중이었다. 이 시기는 미국 최대(최악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종결된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60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이 비참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청년세대의 날 선 의식을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표현하고자 했으며 그 사적모임의 명칭으로 ‘형이상학 클럽’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다시금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의 기반을 본격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의기투합이라기보다는 청년세대 특유의 굴절된 자의식 혹은 유머감각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하버드에 모인 퍼스의 동료들은 일부러 ‘형이상학’이라는 고루한 이름을 표명함으로써 그 반대로 새로운 별종의 사상을 만들어내자는 역설의 열기를 내보이고자 했다.
이 퍼스의 사적연구클럽 내의 사상의 선언은 그 후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라는 과학잡지에서 논문시리즈로서 공표되기도 했는데, 그 반향은 극히 한정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 제임스가 이 사상의 내실과 의식을 세계에 설파했을 때에는 그에 동조하거나 반발하는 철학자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제임스는 버클리 강연 후 1906년과 1907년에 두 연구기관에서 일반청중을 상대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연속강연을 행하였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에두아르 르 루아(Édouard Le Roy), 가스통 밀로(Gaston Milhaud) 등의 사상가들로부터 상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실러(Ferdinand Canning Scott Schiller)와 미국의 존 듀이 등 많은 찬동자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당시 정통의 철학세계에서는 이 사상을 기묘하고도 유치하며 풋내 나는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 사상을 경시한 철학자들은 전통주의적인 사람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프래그머티즘과 마찬가지로 구래의 신칸트주의와 헤겔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분석철학이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상을 구상해온, 그들보다도 한세대 젊은 철학자인 영국의 무어와 러셀조차도 이 사상이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라고 하면서 강하게 비판한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면, 일본에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 출판된 때는 메이지40년[1907년]인데, 이후 일본에서도 이 사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다나카 오도(田中王堂 1868~1932, 와세다대학 문학부 교수, 존 듀이의 제자이며 일본에서 프래그머티즘에 기초하여 평론활동을 전개했다.) 일파 등의 열렬한 신봉자가 나오는 한편 메이지45년[1912년]에 출간된 『영ㆍ독ㆍ불ㆍ일 철학어휘』에도 ‘실용주의’라는 용어로 소개되었다.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 교토대 철학교수, 교토학파 창시자) 또한 당시 미국에 있던 친구 스즈키 타이세츠(鈴木大拙)를 통해 제임스의 사상을 접했으며 다이쇼 기간 동안 교토대학의 <철학개론>에서 이 사상을 ‘실용주의’라고 번역하여 ‘진리란 인생에서 유용(useful)한 것을 뜻한다. 그 외에 다른 영속 불변한 것 자체에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고 소개했다.
세 번째 탄생과 논리실증주의 비판
제임스가 활약한 이후 20세기 전반의 미국에서 프래그머티즘은 세상의 이러저러한 평판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으로부터 이입된 논리실증주의의 엄격한 논증스타일에 압도되어 일시적으로 사상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윽고 콰인이 이 사상의 재생을 선언함과 동시에 루돌프 카르납(Rudolph Carnap)으로 대표되는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강력한 내재적 비판을 전개한 결과 러셀류의 분석철학의 일 분파라고 할 수 있는 카르납의 사상은 크게 방향전환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콰인을 계승한 철학자로서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리차드 로티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래그머티즘을 기초로 삼아 사상을 전개하며 20세기 후반의 철학계에서 활약했다. 그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분석철학의 유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지만, 논리실증주의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특유의 ‘사실과 가치의 변별’이라는 대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하게 프래그머티즘 진영에 서있다.
카르납의 실증주의에서는 외적인 세계에 관한 과학적 진리로서의 사실적 진리 이외에는 도덕이나 미적인 가치에 관한 진리일 뿐이다. 그 외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주관적인 감정이나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은 진리에 관한 이러한 과학일변도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리고 콰인 이후의 분석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색채가 남아있는 입장뿐만 아니라 프래그머티즘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입장도 포함한다. 20세기 후반의 분석철학의 주류는 당연히 후자라 말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향이 크게 우세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패거리 세대의 구세주와 배반자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의 형성에는 이와 같이 복수의 탄생이 관계하고, 그 발전의 역사 또한 장기간에 걸쳐있다. 게다가 이 형성과 발전의 궤적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 즉 다양한 입장의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앞서 ‘들어가며’에서 서술한 것처럼 현대사상으로서 이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사조의 교대 속에서 긴 호흡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이 긴 호흡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 사상이 복수의 탄생을 거쳐 몇 번이나 재생해왔다는 그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이렇게 복잡한 역사적 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한편으로 우리가 가령 ‘프래그머티즘이란 어떤 사상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에 대한 답변 또한 복수일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적어도 누군가가 ‘이 사상은 본래 어떤 사상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정의와 이미지를 제기할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장기간에 걸친 사상운동에서 그만큼 다양한 철학자가 관련된 이상, ‘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 여기저기 흩어질 수밖에 없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분명한 하나의 사상체계 혹은 세계관이 아니라 다수의 사상이 모여든 일종의 모호하고 어렴풋한 철학적 신념의 패거리 세대가 아닐까—? 우리는 경우에 따라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재밌게도 이 상념은 실은 이 사상의 (두 번째) 탄생기에 이미 공적으로 표명되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아서 러브조이(Arthur Oncken Lovejoy 1873∼1962)라는 철학자는 하버드대학의 제임스의 제자였는데, 그는 오늘날 철학사의 대작인 『존재의 대연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러브조이는 1908년에 『Journal of Philosophy』라는 잡지에 「13인의 프래그머티스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이 잡지는 당시 제임스를 중심으로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아성이며 지금도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잡지의 지위를 갖고 있다. 러브조이의 이 논문을 수록한 논문집은 『13인의 프래그머티스트』라는 제목으로 1965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프래그머티스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서로 매우 다른 철학을 품고 있으며, 나아가 그 속에는 분명히 모순된 입장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세하게 해명한다. 이때 ‘13’이라는 숫자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배신자 유다 또한 포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족일지 모르나, ‘이 운동의 구세주가 누구이며 배신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사상운동의 처음부터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온 이 운동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보여주는 프래그머티즘의 역사의 통람 또한 하나의 수수께끼를 해명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구세주도 배신자도 한사람으로 한정되지는 않겠지만.)
프래그머티즘은 초점 없는 사상?
여하간 스승으로서 제임스 자신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책을 발표한 그 이듬해, 프래그머티즘의 거점이 되는 잡지에 러브조이의 논문이 실렸다는 사실을 보아도 이 사상의 주변에 흐르는 혈기와 함께 여러 의미에서 사상의 혼란이라든지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형성, 발전, 장래를 생각해본다는 이 사상은 탄생의 시점부터 이미 혼란스러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정합적인 사상의 기라성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의미에서 ‘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프래그머티스트의 수만큼 답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상은 일반적으로 말의 ‘정의’라는 것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음에서 상세하게 논하듯이 우리의 지성이 산출하는 사상의 레테르, ‘~이즘’이나 ‘~주의’라는 입장이 사상 그 자체로서 확실하게 고정된 정의를 가질 수 없고 경계와 윤곽이 희미하며 다양한 사상의 ‘내용’, ‘의미’, ‘의의’라는 것은 그 사상의 명칭에 있기보다도 그것이 응용되고 활용되는 장면에서 구체적인 이용의 맥락 하에서만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이 주장하는 주요의제 중 하나이다.
나아가 프래그머티스트들 간에는 각각의 주장의 방향과 중점의 위치가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그 핵심에 있는 사유방식, 즉 많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을 이어주는 발상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입장의 이합집산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서로의 주장이 중첩되면서 부상하는, 이 사상의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그리고 그 초점은 흐릿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2. 제임스가 생각한 ‘프래그머티즘의 의미’
방법론에서 진리론으로
여기서는 앞으로 좇아갈 프래그머티즘의 사상내용의 전개의 그 첫걸음으로서 이 사상을 정면에서 특징지었으며 그와 더불어 그 보급에 가장 공헌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책을 우선 다루고, 그 속에서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성격규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임스의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버클리에서 강연을 한지 8년이 지난 후인 1906년과 그 이듬해에 보스턴의 로웰협회와 뉴욕의 콜롬비아대학에서 일반청중을 상대로 행했던 연속강연,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표제의 강연시리즈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8회에 걸쳐 행해진 강연시리즈는 ‘프래그머티즘과 상식’, ‘프래그머티즘과 휴머니즘’, ‘프래그머티즘과 종교’ 등의 제목의 회차를 포함하고, 특히 2회차의 강연인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서 그는 이 사상의 골격을 분명하게 그려내었다.
‘프래그머티즘의 의미’란 무엇인가?—이 강연의 설명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즘이란 본래는 ‘방법’이며 이제는 ‘진리’의 이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이 사상은 두 얼굴을 가진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때 프래그머티즘이 ‘본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이 사상의 시초의 발안자인 퍼스에게 이 사상은 무엇보다 우리의 지적탐구의 ‘방법’에 관한 기본이론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진리의 이론이기도 하다는 것은 퍼스의 사상을 계승하고 확장하는 제임스 본인이 이 사상을 ‘진리론’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철학상의 더욱 폭넓은 영역에서 활용의 가능성을 넓혀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임스는 퍼스가 생각한 ‘프래그머틱한 방법’에 대해 퍼스의 표현을 다소간 그 자신의 용법으로 바꾸어 소개한다. 그리고 이 퍼스의 사상을 나름의 진리론으로 변경한 결과를 자신이 이해하는 프래그머티즘으로서 표명한다. 이와 같이 그가 전개한 논의는 퍼스가 주장하는 방법론을 진리와 가치라는 철학의 근본원리에까지 적용하고 반성한 것이며 이로써 이 사상의 혁명적 성격은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에 의한 프래그머티즘 해설
프래그머티즘의 중핵적 사상을 논하는 제임스의 설명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그 문장도 읽으면 바로 이해될 수 있을 만큼 단순 소박하지 않다. 이것은 그의 강연이 일반청중을 대상으로 했다 해도 그 청중의 대다수가 지식계급이었고 강연자체가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제임스의 해설을 읽는 자는 누구라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와 닿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설은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상가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선 염두에 두고 논하는 글이다. 그 문체는 19세기 후반에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즘을 다룬 것이기에 돌려서 말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것은 이 사상이 어떤 고풍의 분위기와 만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선 여기에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애초 프래그머틱한 방법은 이것 없이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형이상학상의 논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이 말이 처음으로 철학에 도입된 것은 1876년 찰스 퍼스에 의해서였다. … 퍼스는 우리의 신념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하나의 사상의 의의를 밝히는 것은 그 사상이 어떤 행동을 산출해내는 데에 적합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그 사상의 유일한 의의이다. 우리의 모든 사상의 차이는 가령 얼마나 미묘한 것이라 해도 근저에는 실제상의 차이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미묘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완전하고 명석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얼마나 실제적인 결과를 일으키는가?—그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감동을 기대할 수 있는가?—어떤 반동을 우리는 각오해야 하는가? 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은 이제는 더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진리론의 의미로 활용될 수 있다. … 즉 진리란 그들에 의하면, 관념(그 자체가 우리의 경험의 일부에 불가하다)이 참되기 위해서는 이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다른 부분을 만족시키는 관계에 있어야하며 경험의 다른 부분들을 총괄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무한히 잇따라 생기는 특수한 현상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아도 관념적 지름길을 통해 경험부분의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헤집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소위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관념, 물(物)과 물(物) 사이를 잘 연결해서 어떤 불안함도 없이 돌아다니며 사태를 간략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경험의 한 부분에서 다른 한 부분으로 순조롭게 우리를 운반해가는 관념, 이것이 바로 그만큼의 의미에서 참됨이며 그만큼의 범위에서 참됨이며 도구라는 의미에서 참됨이다.
위의 문장은 하나의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꽤 길지만 인용해두었다.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주의
프래그머티즘을 설명한 제임스의 이 문장들을 우리의 스타일대로 정리하면 두 논의로 요약된다.
① 프래그머티즘은 제1의 의미에서는 우리의 지적인 논의의 소재가 되는 개념과 사상의 ‘의의’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며, 자신의 개념과 사상을 명석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이다. 그러나 개념의 의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념명석화의 방법을 설파하는 이 사상은 그와 동시에 인간의 지적활동으로서 탐구방법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퍼스의 이 이론, 즉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우리의 탐구가 항상 탄력적이며 계속해서 오해를 개정하는 가류적(可謬的)인[과오를 거듭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탐구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확실한 지식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17세기 서양근대 이후의 데카르트적인 지식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그 의미에서 무엇보다 ‘반데카르트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② 한편, 이 사상은 더 넓은 의미에서 관념과 경험의 진리를 무엇에 대한 이론으로 삼는다. 이 진리관에서는 어떤 관념이 참되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이며 ‘물(物)과 물(物) 사이를 잘 연결해서 … 우리의 경험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순조롭게 우리를 운반해가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 행동에서 유용한 도구로 진리를 보는 것인데, 그것이 ‘진리’라는 관념의 단순한 정의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서 살펴보듯이 진리를 도구로 삼는 이 사상은 존재론적 ‘다원주의’ 혹은 사실과 가치의 구별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를 근저에서부터 전복하는 혁명적인 견해를 이끌어낸다.
다각적인 타원구조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이처럼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주의라는 매우 대범한 주장을 전개한다. 말할 것도 없이 반데카르트주의라는 것은 서양근대의 선조격인 데카르트적 발상을 근본에서부터 비판하고 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원주의적인 진리론을 제창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의 일원론을 구가해왔던 뉴튼적 서양근대의 과학관에 강력한 이견을 제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의미에서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의 근본적인 지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 두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이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혁명적인 사상인가 혹은 그러한 발상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어떠한 임펙트를 주는 발상인가에 대해서는 근대 및 현대철학의 다양한 전제를 하나씩 밝혀내야 비로소 답할 수 있는 문제이며 철학적으로도 이러저러한 검토가 필요한 문제이다. 이 책의 앞으로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 관심을 두고 근 100년간의 프래그머티즘의 역사 속에서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적 진리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제안되었으며 또 어떠한 방향으로 돌진해왔는지를 사상가들의 사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하간 이 책이 보고자 하는 것은 프래그머티즘 100년의 역사가 방법과 진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사상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퍼스와 제임스라는 두 사상가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이 고안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이 속에는 분명 완전하게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지지 않는 논의의 흔들림이나 주장의 어긋남이 있다. 그러나 이 흔들림과 어긋남은 이 사상이 지금까지 그 활력을 잃지 않고 발전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며 결코 사상의 모호함과 빈약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프래그머티즘은 그 처음의 형성과정부터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논제를 가지고 있었고,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사상의 역동적인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사상의 수다한 궤적이 현대철학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골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서문에서 말한 것을 본론의 1부 「원류의 프래그머티즘」에서 더 상세한 실제의 논의내용을 통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독자들은 또한 2부 「지난 프래그머티즘」과 3부 「앞으로의 프래그머티즘」의 논의에 다다르면 이 사상의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구조가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바로 그 이후의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운동 속에서 더욱 강도를 더해가며 보존되고 진폭을 넓혀 전개되어 그로부터 오늘날의 우리시대의 새로운 프래그머티즘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도정을 염두에 두면서 방법론과 진리론으로서 그 실제의 다양함과 그 활용의 가능성에 대해 지금부터 순차적으로 검토해보겠다.
伊藤邦武、「プラグマティズムとは何か」『プラグマティズム入門』、ちくま新書、201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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