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의 강도적(强度的) 조건

 

 

1.

 

이 책에서 몇 번이나 인용했던 레비-스트로스의 문장을 한 번 더 살펴보자. 이 아메리카 중진 연구자는 브라질의 민족지학자들이 유연관계(類緣關係)의 개념에 대해 행했던 ‘비판적 분석’을 명확하게 선주민의 철학적 문제와 연결시켰다. 그것은 모두 최종적으로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제기한 것인데, 내 생각에 그는 이 일련의 문제계를 완전히 이해했다. 남아메리카 선주민의 유연관계는 실제로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학적인 이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최초의 작업 속에서 예언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우주론적인 이성이라는 이념을 사회학적인 이해범주, 친족의 원-도식—이 속에서 이념의 탈영토화하는 힘은 프로세스에 보존유지된다—에 귀착시킨 것이다. 『미국 인류학(American Anthropology)』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그는 투피남바 족을, 수년전부터 알고 있었던 남비콰라 족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족의 특정한 유대, 의리의 형제간의 관계성은 남아메리카의 많은 부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친족(관계성)의 단순한 표현을 훨씬 더 초월한다(1943: 398).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단어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아메리칸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틱한 유연관계가 가진 의미, 그 내적인 외재성의 차원이다.

 

 

 

2.

 

남아메리카(연구)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어 아메리카 선주민의 풍경 속으로 옮겨서 생각해보면, 『천 개의 고원』에서 제기한 두 개의 결연의 차이는 민족지적인 관점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아메리카 선주민에 관해 민족지학자가 행한 비교와 정확하게 합치한다. 즉 한편에서 사람들이 분명 ‘모호, 이접적, 야행성, 악마적’이라고 말할 강도적 혹은 ‘잠세적(潛勢的)’, 우주론적, 신화-의례적인 유연관계와, 다른 한편에서 혈연관계에 종속된 외연적이고 현실적인 유연관계와의 구별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주제에 대해 나는 이미 아마존의 친족에 관한 많은 작업에서 논해왔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간략하게 언급해두겠다.

 

아마존 사회에서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혼인에 의한 인척관계는 그 형용사의 모든 의미에서 유난히 섬세한 관계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위험하며 부서지기 쉽고 번거롭고 귀찮고 중요하기도 하다. 또 도덕적인 양의성을 가지며, 감정적으로 긴박하고 정치적인 전략이자 경제적인 기초이다. 결과적으로 인척관계의 유대는 탈비급(脫備給)의 집합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며, 혈연관계(유연성(類緣性)과 출자(出自))에 의해 은폐된다. 술어로서 인척관계(『친족의 기본구조』를 규정하는 아프리오리한 인척관계)는 인척관계 그 자체보다 오히려 혈족의 유형(이를테면 교차하는 조카와 숙부)으로 이해된다. 실제 인척관계는 지시와 참조를 통해 혈연화된다(‘나의 의리의 아버지[시아버지, 장인]’가 ‘나의 어머니쪽 삼촌’이라는 등). 인척관계의 특정한 용어는 동일한 혈족관계의 완곡어법 혹은 혈족관계의 추이(‘의리의 형제[처남, 매형]’보다도 ‘나의 아들의 어머니쪽 삼촌’이라고 부르는 등)를 표현하는 테크노니미(teknonymy)[각주:1]를 우선하는 탓에 경원시된다. 배우자는 성교와 식사를 함께 하는 일상의 친교를 통해 우나 카로(una caro), 즉 유일한 육체가 된다. 피터 리비에르(Peter Rivière)는 마을의 내혼제와 혈족 사이라는 환경이 널리 분포하는 기아나(Guiana)[각주:2]의 전형적인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1984: 70). “이념적인 집락에는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념적인 촌락에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 우선은 실재하는 촌락의 내부에 있겠지만, 특히 이념적인 집락의 외부, 즉 현실의 촌락의 이념적인 외부에서는 이념적인 유연관계로서—달리 말하면 강도적, 잠재적인 유연관계로서—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건 이념적이건 촌락을 떠나자마자 위장은 반전하며 유연관계는—총칭적인 만큼 강력하게, 현실적이지 않는 만큼 명백하게—지표를 가지지 않은 사회관계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의리의 형제는 나와 결혼하지 않은 자매와 형제관계이거나 나의 자매와 결혼하지 않은 자이다. 유연자(類緣者)는 적이며 따라서 적은 유연자에 대한 것이다. 유연자가 적이 아닌 경우, 즉 양친이나 동거인인 경우—‘이념적’인 경우—, 유연자로서 대해서는 안된다. 적이 유연자가 아닌 것은 그들이 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유연자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리하여 아마존의 매우 로칼한 관계성은 유연관계에 의한 강한 공시적 의미를 가지는 경향을 띤다. 결연은 로칼적으로 외혼제이며 드물지는 않다. 또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전략적이다. 즉 우정이나 사업상의 파트너인, 언제나 의례화된 유대이며, 물리적 혹은 정신적인 전쟁상태 혹은 은폐되거나 분명한 전쟁상태가 로칼 집단 간에 영속적인 이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공동체 간의 모호한 의례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강도적인 유연관계는 종의 경계에 걸쳐있다. 예를 들어, 동물, 식물, 정령 그리고 그 외의 인간성이 의문시되는 군생은 모든 인간과의 총합적-이접적인 관계를 함의한다. 타자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연자에 관한 것이며, 강탈과 증여—혹은 강탈이나 증여의 특수한 사례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교환’—의 우주론적인 게임을 의미지우는 파트너이다. 그 속에서 파트너들 간의 잠세력의 차이는 제로로 향한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무효화 되지 않는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자매는 항상 결혼할 수 없는 상태로서 어떤 일정한 비율로 모계집단의 파트너들 간의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자매 가운데 자신의 딸이 있는 남자 집단은 이러한 인세스트의 이념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모계의 조카딸 집단은 아마존의 많은 부족에서 결혼의 우선적인 대상이 된다). 즉 이 분석을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이러한 유연관계는 ‘실재하지 않게’ 된다. 여하간 주지하다시피 인세스트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현실적인 내혼제는 잠재적인 외혼제의 하한이다.

 

순수하고 잠재적인 유연관계 혹은 메타 유연관계는 아마존에서 타자성의 총칭을 이루는 도식인 것인데, 그것은 확실하게 『천 개의 고원』의 ‘이종(二種)의 결연’에 속한다. 그것이 출자(出自)에 적대하는 것은 혼인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지 않는 경우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혼인이 현실이 되는 장소에서 모습을 감추고 출산에 관한 생산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출산력을 모두 외부와의 악마적인 결연에 의존한다. 생산의 모드(등질적인 출자)가 아니라 포식의 모드(이질발생적인 간취)이다. 그것은 공생관계 간의 포획, 존재론적인 ‘재포식’에 의한 ‘재생산’이다. 자기를 외재화하는 조건으로서의 식인에 의한 타자의 내재화이며, 적—적으로서 행동하는 자—에 의해 ‘자기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종의 자기이다. 이것이 아마존의 우주론적인 실천에 고유한, 타자로의 생성이다. 잠재적인 유연관계는 친척보다도 전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친족에 선행하며 그 외부에서 전쟁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이 결연이 선행하는 강도적인 출자를 억압하는 표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출자가 초월성(신화적 기원, 선조, 동일한 출자집단)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모든 출자가 상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모든 출자는 국가를 기도한다. 그것은 국가의 출자인 것이다. 아마존의 강도적 결연은 국가에 저항하는 결연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오마주…).

 

강도적인 혹은 일의적(一義的)인 유연관계는 아마존 사회, 그리고 아마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변별하는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화의 ‘기저’(레비-스트로스 1991: 295)를 다루고 있다. 『신화학』에서 분석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는 신화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군을 우리 문화에 고유한 신화와 비교해보면, 전자에서는 모계적인 결연관계가 우위에 있으며 후자에서는 부모인 자가 우위에 있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중심적인 등장인물은 [변용의] 공식상에서 유연자로서 관계 지어진다. 이 신화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을 하나 예로 들면, 그것은 식인적인 의리의 아버지[양아버지], 모든 문화재의 비-인간적인 소유자이다. 그는 의리의 아들[양아들]을 죽이고자 일련의 시련을 부여하는데, 그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대체로 그것은 그를 동정하는 다른 비-인간들 덕분이다). 그리고 그는 수련의 귀중한 성과를 가지고 동료 인간들 곁으로 돌아온다. 이 원신화의 내용(레비-스트로스 1971: 503 et s.)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시나리오와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이 있으며,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영웅이 있다. 그리고 문명의 불, 여성의 ‘증여’, 인간의 죽음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대항적인 영웅은 의리의 아버지이거나 의리의 형제이며, 그리스적, 근동적, 서아프리카적 혹은 프로이트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구세계의 신화에 항상 따라다니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구세계에서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훔쳐야 하는 것에 반해, 아메리카 선주민은 의리의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훔쳐야 하며, 의미의 형제에게서 그것을 증여로 받아내야 한다. 여하간 그들은 동물이다.

 

우리가 ‘신화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증여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반적인 규범으로서 타자에 관한 담론—이다(Wagner 1978). 그것은 신화 속에서 단 한번 증여되며 그 이후는 소여(所與)된다[주어진다]. 즉 인간이 그로부터, 또 그에 대항하여 자신을 정의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다. 이 담론은 존재론적인 부채의 기한이나 한계(인간은 그 속에서 존재한다)를 정립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부채는 출자 혹은 부모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기초가 되는 계보적인 소여’—, 혼인이나 결연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타자란 무엇보다도 하나의 유연자이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선주민의 신화가 유연관계를 항상 거기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는 사소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신화는 혈연관계와 같다든가 신화가 상상하는 세계에서 전(前)-인간은 혼인의 금지를 무시한다는 등—, 유연관계가 신화의 ‘틀’(『신화학』의 의미에서)을 구성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틀 내지는 조건설정은 다양한 존재자를 포함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동물의 유연자로 넘쳐난다. 유연자는 동물,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인간이어야 한다. 즉 식물, 별, 기상, 인공물…(미래의 비-인간이다—진정으로 신화에서는 현재 인간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이다. 그러나 길은 두 갈래로[비-인간으로 향하는 길과 인간으로 향하는 길] 같지 않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비-인간과의 결연이 아마존에서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를 포함한다. 『질투심 많은 여 도공』의 의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바로의 토템과 터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신화, 특히 문화의 기원을 다루는 신화는 유연관계와 교환에 관한 것이며, 친자관계와 출산에 관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에게 특징적인 인세스트에 대해서도 완전히 동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친족의 기본구조』의 기초와 동일하게 위치 지었다. 즉 ‘출자의 인세스트’나 부모와 자식 간의 프로이트적인 인세스트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제와 자매 혹은 ‘결연의 인세스트’로서 문제시된다. 신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신화에서는 형제와 자매간의 인세스트의 결과로서 태양과 달의 기원이 설명된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저자가 ‘아메리카의 불가타(Vulgata)[각주:3]’라고 부르며 M1의 기초로 삼는 것이 이 이야기이다. 이 보로로의 기준신화에서 어머니와 아들 간의 원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나 아버지가 일으키는 사투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다시 쓰이면서—구조인류학의 유머로서—, ‘사촌’들 간의 인세스트나 ‘유연자’들 간의 다툼이 된다. 보로로 사회는 외혼제의 모계씨족에 의해 조직되며, 그 속에서 모든 개인은 모변의 씨족에 속한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한 사람의 유연자이며, 혼인에 의해 결합되는 씨족의 구성원이다. 아버지의 시점에서 보면, 아들은 아내의 형제가 된다. 인세스트의 문제성을 이동시키는 레비-스트로스의 이 방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도곤 신화에 대한 코멘트로 유효하게 활용된다. 즉 “자매와의 인세스트는 어머니와의 인세스트로 대체되지 않지만, 반대로 생식에 의한 혈연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세스트의 강도적인 모델이 된다”(들뢰즈&가타리 1972: 187)

 

 

 

3.

 

그러나 엄밀하게는 이 내재평면에는 결연과 출자의 대립적인 구별—필연적으로 외연적인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만약 두 결연이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두 출자가 있다. 만일 모든 생산이 출자적이라고 해도 모든 출자가 필연적으로 (재)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재생산적이며 행정적인 (표상적이고 국가적인) 출자가 존재한다 해도 그와 마찬가지로 전염성의 괴물적인 출자가 있으며 그것들은 자연에 반하는 결연과 생성, 인세스트적 혹은 종을 넘어서는 연결로부터 귀결한다.

 

내혼과 외출자. 그것이 반-친족관계의 기본구조이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 외혼의 인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른 아메리카 선주민의 이념적인 촌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출자에 의한 혈연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집단의 많은 아이들은 『슬픈 열대』에서 묘사된 카두베오 족의 이념적인 사례처럼 본래 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우리가 자연으로 여기는 감각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출산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담고 있다. 낙태와 영아살해는 대체로 보통의 실천이며, 따라서 집단의 보존은 생식보다는 양자(養子)결연에 의해 이뤄진다. 전쟁원정의 주요한 목적은 아이들을 손에 넣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55: 205-208)

 

그 외의 구조주의의 교의를 전도시키는 일탈적인 예는 투피남바 족이다. 그들은 자매의 딸과의 결혼을 선호하며,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외부에 의리의 형제를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의례적으로 죽임당하거나 먹혀버리기 전의 적에게 일시적인 배우자로서 자기 자신의 자매를 제공한다. 인세스트와 거의 유사한 지나친 내혼은 식인적인 지나친 외혼이기도 하다. 신화의 과장된 도식 속에서 그것은 자매와의 성교이며, 작은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앞선 도식의 이중의 뒤틀림 속에서 그것은 어떤 별(星)과의 결혼, 특정의 자매를 위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인세스트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결정한다는 것과 비교하자면, 하나든 둘이든 결연이 있으며 하나든 둘이든 출자가 있는 것인가, 신화는 원초적인 출자를 표하는가 등은 그다지 알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결국 질문은 외부가 내부에서 생겨나는가—결연은 출자의 하위에 있으며 그에 의존하는가—, 혹은 그 반대로 내부는 외부의 반복인가—출자나 혈연관계는 결연이나 유연관계의 특수한 경우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때 강도적인 이접으로서의 차이는 물론 제로로 향한다….

 

이 유연관계와 혈연관계 간의 ‘구별 없고 식별불가능한 모호한 영역’—그것들은 미분화된 것이 아니고 결국 그 속에 무한의 반향, 내적인 전개, 프랙탈적인 내포가 끌려 들어온다—이야말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서 쌍둥이 인물이 중요하다는 것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구조’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며 『신화학』의 전개를 통해(특히 태양과 달의 신화를 매개로) 구체화하며 『살쾡이 이야기』에서 ‘모든 시스템의 열쇠’로 변용된다(레비-스트로스 1991: 295). 왜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쌍둥이성은—일시적이고 미완성이며 준-매개적이며 분산되며 불균형하며 적대적인 인세스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유사성의 원형이나 혈연의 동일성을 표상하지 않고 잠세적인 유연관계를 내적으로 반복한다. 불균형한 쌍둥이는 ‘피하기 어려운 비대칭성’의 신화적 인격화이며, 그것이 세계의 조건을 형상화한다. 유연자의 환유로서 혈연관계이며, 차이의 은유로서 쌍둥이성이다. 이 살과 피를 맛보기 위해서 여기서 잠시 라이프니츠주의를 몸에 둘러야 할 것이다.

 

차이로서 쌍둥이성은 자신의 인격을 분할하여 그로부터 강도적인 범주가 출현함으로써 시작된다. 『살쾡이 이야기』의 ‘숙명적인 분할’의 장에서 매우 명확하게 설명된 것처럼(“내가 키운 딸/아들이든 내가 죽인 아들/딸이든”) 모친의 은혜 속에 있는 한 아이가 ‘그 자신의 쌍둥이’인 것이다(레비-스트로스 1991: 87 et s.). 왜냐하면 그는 대립하는 성(性)의 이중의 잠재성을 갖춘 것인데, 그것은 단일성을 가진 새로운 개인이 태어날 때에 최종적으로 상실된다(‘슈뢰딩거의 고양이’의 패러독스는 이 신화적인 주제의 하나의 변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살쾡이 이야기』 10쪽에서 언급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아마도 양자(量子)의 고양이 그 자체의 형식이 가시적인 것이리라). 이 책이 아메리카 신화에서 일반적인 남성의 쌍둥이 한 쌍만을 생각한다는 것에 주의하자(디오스쿠로이(Dioskuroi)[각주:4]와의 대비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벌거벗은 인간』에서 저자는 동성의 쌍둥이는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인세스트)가 만들어내는 틀의 ‘파생적’이며 ‘보족적’인 변용 상태라고 주장한다(레비-스트로스 1971: 190-192). 즉 아메리카 선주민의 동성의 쌍둥이의 차이는 무엇보다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 한 쌍이라는 ‘기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제기하는 것은 일찍이 프랑수아즈 에리티에(Francoise Heritier, 1933~ 프랑스의 인류학자)(1981: 39)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차이가 성적인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즉 모든 성(性)은 차이적이라는 것이다—모든 시스템이 기호적인 것이기도 하다(Manigler 2000: Viveiros de Castro 1990). 왜냐하면 한 번 더 레비-스트로스를 거론하면 친족의 본질적인 경험은 성(性)의 대립이라는 경험이 아니라 대립으로서 이해되는 다른 성(性)에 대한 경험이다. 이 구조주의의 근원적인 직관에 대한 스트라샌의 해석은 앞서 살펴보았다.

 

 

 

4.

 

아마존 선주민의 근저에 흐르는 우주론적인 범주로서 잠세적인 유연자라는 관념은 이제까지 참고한 이론이나 민족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체의 ‘교환론’의 이미지와의 단절을 산출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재인식하면서 간소하게 그 논의의 결론을 이끌어내겠다. 즉 포식이나 포착이라는 관념—강탈과 증여, 카니발리즘과 적이 되는 것—이 그것들을 항상 연결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들은 결연의 힘의 움직임을 선주민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상태로서 이해된다. 그것은 구조기능주의든 구조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친족의 고전적인 이론(‘가족의 영역’, ‘공공의 영역’)에서 보이는 가(家)-공(公)의 유연자로 환원될 수 없는 우주론적인 힘이다. 강탈, 증여, 감염, 소비 그리고 생성. 문제는 이 교환이다. 잠세적인 결연은 타자로의 생성이며, 그것이 아마존의 친족관계를 휘감으며 위치짓는다. 이러한 친족관계를 통해 그들에 대한 민족학—『친족의 기본구조』에 충실하기 이전에(충실하기 위해서) 『신화학』에 충실하다—은 철학자 파트리에 마니글리에의 고찰을 선취했다.

 

친족관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상호관계의 조정이나 규정은 친족을 통해 배타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그렇다면 친족을 매개로 원초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는 세계의 사상(事象)의 순환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Maniglier 2005b: 768)

 

 

 

 

 

 

  1. 에드워드 타일러가 만든 조어. 그리스어의 자식을 뜻하는 teknon과 이름을 뜻하는 onoma를 합성한 것이다. 아이를 둔 부부가 자신의 고유명 대신에 아이의 이름과 연결지어 불리는 관행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남아메리카 대륙북부의 베테수엘라와 브라질 사이의 대서양 연안지방. [본문으로]
  3. 가톨릭교회 공인의 라틴어 번역 성서. [본문으로]
  4. ‘제우스의 자식들’이란 뜻. 그리스 신화중 제우스와 레다 사이에 출생한 쌍생아, 카스토르(Kastor)와 폴리데우케스(Polydeukes)를 말함.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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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 1장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러다가 이 책을 다 번역할 것 같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글은 너무나도 멋지다.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데, 글이 언제부터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읽으나마나한 글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정신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에서 그뿐만 아니라 학문과 지식 그 자체를 건전한 방식으로 이끌어나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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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1.

나는 예전부터 내 분야의 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오마주로서 책을 쓰고 싶었다. 『안티 나르시스—마이너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라 이름 붙여질 책이 그것이다. 동시대의 인류학을 관통하는 개념적 긴장을 특징짓는 것이 그 책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곧 이 프로젝트에 모순이 있음을 알았다. 즉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안티 나르시스라는 주제의 탁월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세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허구 속 작품 혹은 보이지 않는 작품—그 최적의 해설자는 보르헤스이다—으로 남겨두자고 결정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책 그 자체보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독자의 뛰어난 해석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쓰기보다 마치 타인이 그것을 쓴 것처럼 여기고 그 책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책, 『식인의 형이상학』은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책에 대한 소개서이다. 이 책은 몇 번이나 구상해왔던 것인데,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지면에서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나의 전문분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민족지적’ 현재—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인류학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민족에게 개념적으로 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함의는 정반대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류학 이론의 내부에 있는 차이[相違]나 변동은 대개 (오로지 역사-비판적인 관점에서) 인류학자가 속한 사회형태, 이데올로기논쟁, 지적세계, 학문적인 맥락의 차이와 국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일까? 인류학 이론에 의해 도입된 가장 흥미로운 개념, 질문, 실체, 행위자(agent)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혹은 민족, 집합체)의 상상력에서 그 원천을 찾아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퍼스펙티브를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학의 동요하는 오리지널리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세계와 ‘객체’의 세계에서 산출된 개념과 실천 간의 결합—항상 다의적이지만 종종 다산적이기도 하다—에야말로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질문은 인식론적인, 즉 정치적인 질문이다. 식민주의는 인류학을 하나의 역사적인 아프리오리로서 구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인류학이 그 인과응보의 순환을 닫아놓고 있음을 우리가 다소간 찬성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이제야 그 학문분야를 재구축하는 프로세스를 급진화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류학은 그 새로운 사명,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이론-실천을 전면적으로 떠안을 용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학은 당연히 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인류학자가 연구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닌—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그 무엇에 대해서든)—인류학의 지적 프로젝트가 그것에서 산출한 사회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일부의 범위에서는 다음의 설을 받아들여 왔다. 즉 인류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이국취향이고 미개주의이며 서양의 야비한 흥미와 관심에 따라 ‘타자’가 항상 ‘표상되거나’ ‘발명된’ 도착적인 무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이든 사회학이든 이러한 자만에 가득한 온정주의를 두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는 발언권을 주지 않으면서 이른바 타자를 변모시키고 만다. 주체적 환상이라고도 하는 것을 이중화하고 식민주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라는 객체적 생산물의 변증법에 호소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욕에 모멸을 덧붙이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비서양적이고 전통적인 민족에 대해 ‘서양적인’ 언설을 밀어붙인다 해도 우리의 ‘타자의 표상’을 미화할 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이론적인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자민족중심주의의 최종단계이다. 다름[他]에 대해서도 같음[同]을 보기 위해—즉 타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은 ‘우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결국 우리는 목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여정을 단축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 즉 우리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류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돌려 세운다’(Maniglier 2005b: 773-774). 왜냐하면 모든 이문화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실험을 감행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 속의 변화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문화는 그 연구에 기초해서 정식화되는 사회와 문화의 이론에 영향을 주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공생산(共生産)하는 사고로부터 온갖 귀결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기묘한 구축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내파하지 않도록 그 흔한 ‘작은 서사’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적인 고발을 하는 필자가 쓴 그대로 인류학은 항상 대상을 잘못 구축하는데, 비판에 직면한 그때부터 광명을 비추고 대상을 정직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과 타자』(Fabian 1983)나 그와 비슷한 그 외의 많은 논의로 경도되는 곳에서 우리가 인지적인 절망이라는 정체에 새롭게 직면하는 것은 사물 자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탓이거나 그도 아니면 타자가 보편적인 이성을 체현해서 미신(迷信)을 퍼뜨리는 케케묵은 신비주의적인 마술 탓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선주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전의 저자들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선주민을 이국적인 대상으로 보고 보지 못하는 것에 의해—그들은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든 간에 인류학의 지나친 이국취향이 그 반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루스트는 시간과 타자에 대해 조금은 숙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직전의 그렇게 지나친 과거만큼 오래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인지-정치의 재귀적인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맹종하는 것 같은 관계성 속에 인류학을 끌어들이는 것, 즉 아첨하는 대항의식을 포함해서 이 두 과학이 설파하는 근대의 메타서사를 떠안는 것이다(England et Leach 2000). 이 과학들은 세계의 모든 집합체의 실존에 관한 실험을 분석자의 ‘사고의 집합체’라는 관점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는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 지지해야 하는 것은 인류학은 자유로운 환경에 계속해서 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학은 거리의 기법에 계속해서 거해야 하며, 서양적인 혼에 감추어진 아이러니로부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서양이 하나의 추상이라고 한다면, 그 혼도 결국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밀어붙여온, 이성을 외재화하는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충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 멈출 수가 없는, 동일성이라는 갑갑한 개인실 너머의 이야기이다. 진정한 내(內 endo)-인류학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 분야의 절망적인 논제인데,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외(外 exo)-인류학—현실적인 중요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필드의 과학’—에 의해 촉발되어온 이론적인 환기장치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목적은 중요한 인류학 이론이 모두 선주민의 지적실천의 번역이라는 주장을 예증하는 데에 있다. 이 이론은 학문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대상의 위치’에 있는 집합체의 지적인 실천과 강한 구조적 연속성을 가진다. 인류학 담론의 변용을 퍼포머티브하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학 담론은 본래 학문분야를 변용하는 조건을 내화한다. 즉 인류학에서 사실이란 (물론 이론적으로는)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에 대한 민족-인류학적 담론의 왜곡이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이런 길을 가는 필자는 아메리카 연구를 하는 민족학자이다)라는 아마존 사람들의 관념을 예로 들어—이른바 손에 쥐고—봄으로써 『안티 나르시스』는 우리가 연구하는 집합체의 고유한 사고스타일이 이 분야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스타일과 그 함의를 파헤쳐 검토함으로써 특히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낼 것이다. 개념의 새로운 인류학, 그것은 결국 인류학의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반(反)-실현하는 것인데, 그에 따라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의 존재론적인 자기규정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은 인간(그리고 비인간)의 사고를 인식의 장치들—분류, 서술, 판단, 표상…—로 환원한다기보다 훨씬 더 우선시된다. ‘비교존재론’(Holbraad 2003)으로서의 인류학—그것이 진정한 내재라는 관점이다. 사고에 대해 다른 사고를 한다는 이러한 작업의 기회와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념적인 상상력—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집합체의 삶에 고유한 창조성과 성찰성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에 대한 인류학 이론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2.

이 책의 제목이 의도하는 것은 인류학이 이 분야에서 『안티 나르시스』에 걸맞는 위대한 책의 최초의 장들을 쓰기 시작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의 창설신화에서 중심인물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인류학의 성스러운 수호자 혹은 악마적인 후견인의 후보자를 나르키소스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인 혹은 악마는 (특히 ‘철학적’이라고 말해지는 버전에서는) 인류학적 담론의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그들(우리이기도 하다), 비-서양, 비-근대, 비-인간—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징과 기준을 결정한다는 망상에 항상 지나치게 사로잡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서양적이며 비-근대적인 것으로서 타자를 구축하는 속에서 타자를 ‘가지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합리성, 개인주의와 기독교는 타자를 가지지 않을까? (아마도 잭 구디에 대해서는 덜 조심해도 될 것 같다. 즉 알파벳의 에크리튀르와 혼자(婚資: 신부대와 지참금)에는 타자성이 없을까? 나아가 그러한 타자를 비-인간(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타자로서의 비-인간)으로 자아내는 속에서 당연히 크게 결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사의 혼, 랑가주, 노동, 열림, 금지, 니오터니(neoteny)[각주:1], 메타 지향성일까?

이것들의 결여는 모두 상통한다. 왜냐하면 실제는 어느 것도 같기 때문이며, 문제는 바로 답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분할의 형식, 혹은 그와 마찬가지의 배제의 형식이 인종을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서양의 생물학적인 유사관계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형식이 온갖 타종(他種)과 타민족을 일반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타자성으로 혼합해버린다.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타자와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를 자문하는 것은—타의 종, 타의 문화,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이다—이미 하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인간(에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인간’을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거나 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거나 인간존재는 자유로우며 불확정하다는 등은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명백히 역사적 이유를 갖지 않으며 은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응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고유성은 고유성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그에 응답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타자의 모든 고유성에 대한 무한의 권리를 부여했으리라. ‘우리’의 지적전통에서 천년을 이어져온 것, 바로 그것이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 없음에 의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한다. 결여, 유한성, 부재는 남은 생명을 위해 종(種)이 품도록 운명지어진 구별이다(마치 우리에게 그것을 믿게 하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무거운 짐, 그것은 보편적인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은 주지하다시피(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세계빈곤적’이다. 종달새는 말할 것도 없다…. 비서양의 인간에 대해서도 그것들에게는 세계 속에서 얼마 안되는 몫만이 할당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으로서 우리만이 완성된 인간,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장대한 미완성이며 세계의 억만장자이며, 세계의 저축가이며, ‘세계를 본뜨는 자들’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바로 모든 식민주의의 기원이다.

그에 따라 문제는 변화하며 그에 답하는 방법도 변화한다. 즉 마이너인류학은 거대한 분할에 저항하고 작은 다양체를 증식시킨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한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이다. 완성되고 마무리된 휴머니즘에 저항하는, ‘제한 없는 휴머니즘’(Manigler 2000)이며, 그것은 인간성을 예외적인 영역으로 두지 않는다. 다양체를 증식시켜야 함을 강조해 두겠다. 왜냐하면 여기서 데리다(2006)를 상기하는 것이 좋은데, 문제는 기호와 세계, 인격과 사물,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을 통합-분할하는 경계를 파기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안이함이나 일원론의 가벼움이라는 것은 융합주의의 곡선으로 구부러지며, 그것들을 ‘환원하지 않는’(라투르) 것, 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윤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접어서 조밀화하고 무지개빛으로 빛나게 하며 구부려 꺾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일반화한 연속색채주의…”(Deleuze et Guatari 1980: 123). 연속색채주의, 이 구조주의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주의의 흐름과 얽혀있는 프로젝트가 작성된다.

 

3.

『안티 나르시스』 초고는 인류학의 학문분야를 근저에서부터 재생하는 책무를 짊어진 몇몇 인류학자들에 의해 정성스레 개시되었다. 잘 알려진 저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작업은 미숙한 평가를 받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다—그것은 그들의 출신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하는 것은 우선 미국인 로이 와그너이다. 그의 공적은 ‘반전(reverse) 인류학’에 대한 풍부한 착상과 함께 ‘발명’과 ‘관습’에 관한 훌륭한 기호론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 개념의 비전을 그려낸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를린 스트래선은 페미니즘과 인류학을 교착시킨 탈구축-잠세화에 공헌했다. 그것은 바로 ‘선주민의 감성론’과 ‘선주민의 분석’이라는 발상-력을 제시한 것이며, 그것이 서양적 이성에 의한 멜라네시아적인 반(反)-비판이라는 이른바 두 개의 면을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포스트-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적 기술의 방식을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고뉴(Bourgogne)[각주:2] 출신의 브루노 라투르는 집합체와 ANT(행위자네트워크론)의 초존재론적 개념을 제출하고 ‘지금(근대)인 적이 없다’는 역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었으며 과학실험에 대한 인류학에 다시금 매력을 불어넣었다. 부작위 혹은 작위에 의한 오류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최근에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그 외의 많은 연구자들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러나 인용되든 말든 그들 앞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 분야의 과거에 눈을 돌려 과거를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로 시선을 향하고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바에 따라 루소를 창시자로 봐야 한다면,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구조주의에 의해 인간과학을 재구축하려한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인류학으로 이르는 도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잠재적으로 ‘무근거화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이 도정은 ‘모세가 결코 그 훌륭함을 알지 못한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며, 아마도 그가 실제로는 나아가지 않은 도정이다. 인류학적인 지(知)는 선주민의 실천의 하나의 변용으로 간주되고 ‘인류학은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탐구이다’(레비-스트로스 1958/1954: 397). 그리고 그 10년 후에는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 정의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올 수밖에 없는 철학’(Hamberger 2004: 345)의 안내자를 설정했다. 그것은 무제한성과 잠재성이라는 표지에 의해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친족연구에 관한 구조주의자의 유산을 총결산한 잡지 『인간』의 어느 권호의 후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강렬하고도 결정적인 다음의 코멘트를 남겨두었다.

 

사람과 신, 친구와 적, 내부자와 외부자라는 대립의 중립으로서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착상한 유연관계(類緣關係)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브라질의 동료들이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만한 사태를 끌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이 개념의 경향으로부터 어떤 결말을 가진 인상이 분명해졌다. 기쁘든 슬프든 어느 쪽이든 철학은 다시금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이국의 민족에 기대어 산발적으로 도움을 얻은 우리의 철학이 아니라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즉 그들의 철학이다. (레비-스트로스 2000: 720)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브라질의 동료들에 의해 정확하게 기술된 논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실제로 우리는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유연관계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관습을 민족지의 한 축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비-관계성의 양상에 대해 환기한 두 개의 철학—‘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구동시킨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사이에서 보이는 관계성이라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한 개략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기쁘든 슬프든 여하간 문제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혹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의 모호한 경계의 양측에 구성된 초영역적인 문제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 간에 다시금 확실한 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의 혁명은 이 수십년 간 생태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세계를 완전히 고난의 장소로 변형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 직전에 일어난 사고의 열광과 풍요의 그 짧은 시기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길이 있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에는 한편으로는 아마존의 사고에 기대는 것—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초’(Taylor 2004: 97)를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이며, 다른 한편으로 질 들뢰즈에 의한 ‘이단의’ 구조주의(Lapoujade 2006)에 기대는 것이다. 목적도 둘이다.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개념창조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류학이 문제이다. 조금 전 과거를 되돌아본 탐구의 의도는 회고적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있다. 어떤 가능성을 불러내는 것, 어떤 구름의 열린 틈을 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학문분야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지적인 프로젝트로서, 정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는 다른 결말—다소 과장되게 말하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1. 형태는 유생(幼生)인 채 성적으로 성숙(成熟)해지는 일. 유형 성숙(幼形成熟). [본문으로]
  2. 프랑스 중부의 손(Saône) 강 우안의 지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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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펙티브주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으로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조금 어렵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고 그의 사상의 심오함에 매료될 것이다. 그의 논리가 명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사상보다 그의 시야가 훨씬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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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펙티브주의

 

1.

 

타니아 스톨츠 리마(Tânia Stolze Lima)와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는 관념을 제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학의 행적을 재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이념과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재형상화하는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는 이 지적혼란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이 표현이야말로 적절하다). 그 속에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적인 개념이 덧붙여지는데, 이 개념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현대철학의 어떤 프로그램의 의외의 파트너—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암약하는 선구자—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가능세계의 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 근대성의 엄청난 이항대립의 외부에서 일거에 만들어진 것, 혹은 모든 존재론적인 물음에 인식론적인 회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비판주의의 헤게모니의 종언을 확실히 고하며 ‘초월론적 경험론’과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깃발 하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고의 도주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포식의 형이상학’을 우주론적으로 상정한 분석을 통해 명확해진다. 레비-스트로스의 요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이 형이상학은 결연관계를 보여주는 선주민의 범주의 강력한 사변적 생산성에서 그 가장 높은 표현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다른 개념, 즉 잠재적인 결연관계라는 개념으로 번역했다. 잠재적인 결연관계란 들뢰즈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의 ‘타자의 구조’라고 불렀던 특징적인 도식주의를 뜻한다. 즉 그것은 카니발리즘=식인이라는 기호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며, 이 세계의 주민을 상상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종들 간의 퍼스펙티브주의, 존재론적인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이 선주민의 또 하나의 인류학의 세 측면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서양의 인류학과 대칭적인 반대방향의 변용이다—여기서 대칭적이라는 것은 라투르의 의미에서이며, 반대방향이라는 것은 와그너의 반전(reverse)의 인류학의 의미에서이다. 이 삼각형을 그려냄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우리[의 철학]’의 대극에 있는 ‘이국적인 사람들’의 철학의 윤곽을 분명히 묘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가타리 1991)의 제4장(「철학지리학」)에서 착수한 압도적인 프로그램을 현실적인 것으로 시도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례에서 가령 방법론적인 모호함이나 의도적인 다의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해도—언제든 그러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우리는 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2.

 

이 작업은 완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즉 현실에 내재하는 퍼스펙티브라는 다양체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아마존의 코스모폴리탄성에 관해 우리가 행한 탐구의 결과와 레비-스트로스가 『인종과 역사』에서 보고한 아메리카 대륙정복의 주제로 잘 알려진 우화 사이에서 어떤 공명이 인다는 것을 불현듯 간취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몇 년 후 앤틸리스 제도에서 스페인인이 선주민들에게 혼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물에 담가놓으려 했다. (레비-스트로스 1973/1952: 384)

 

이 저자는 이 인류학적인 갈등 속에서 어떤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찾아내었다. 즉 인간본성의 전형적인 출현이란 그들 자신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선천적인 탐욕은 인간성이라는 속성을 하나의 전체의 종(種)으로 확장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인데, 그러한 탐욕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인간성이라는] 속성 중 하나이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란 상식(필시 그것은 단지 통각이라는 계기에 불과하지만)과 같은 것이며 더 잘 분할된 세계의 문제이다. 교훈이 친숙하다고 해서 교훈의 엄숙함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같음에게서 다름은 (선주민의) 다름에게서 다름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나타나며, 같음은 부지불식간에 다름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분명 이 우화에 매료되었고 『슬픈 열대』에서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보족적으로 짓궂은 주름을 삽입한다. 양자 간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며, 타자의 인간성에 관한 조사에서 서양인은 사회과학을 채용하는 반면 선주민은 오히려 자연과학을 신용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선주민이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전자의 주장에 반해, 후자는 서양인이 신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남기며 끝낸다. “나의 결론은 [양자가] 모두 무지하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선주민]의 행동이 더 인간에 적합하다”(1955: 81-83). 만약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례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타자에 관해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해도, 다름의 다름은 같음의 다름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참은 그 반대일 것이다. 실제로 선주민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관한 두 타자—동물성과 신성(神性)—간의 관계성은 우리가 기독교로부터 승계받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사적인 대비는 타이노의 우주론적인 위계보다 오히려 우리의 그것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다.

 

여하간 이것은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매개(중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끌어내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존재론의 체제는 서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체제와 다르다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신체와 마음에 대해 역전의 기호작용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앤틸리스 제도[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스페인인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차원이지만, 선주민에게 그것은 신체이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가진 것을 (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가진 것을 (동물이나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한지를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나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3.

 

로이 와그너(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이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매개가 된 멜라네시아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신체는 생득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존재론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자연’)의 차원에 속하며, 그러한 차원은 ‘관습적’인 기호화조작의 반(反)-발명적인 결과이다. 그에 반해 마음은 구축되는 차원에 있다. 그것은 ‘분화하는’ 기호화의 산물이며 “근본적인 구별을 넘어서거나 이 세계의 특이한 개체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관습적인 세계를 명시하거나 구체화한다”(Wagner 1981: 42). 한편 선주민의 세계에서 혼은 “모든 사태에 관한 암묵의 습관적인 질서의 출현…으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혼을 가진 자가 타자(존재)와 비슷한 양태를 총합하며 나아가 그 양태의 피안에서 혼을 가진 자는 그들[타자]을 차이화한다”(같은 책 94). 반대로 신체는 행위자(agent)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생득적인 기반이나 ‘내재적인 인간성’의 보편성에 대항해서 만들어 내야하는 근본적인 형상이다(같은 책 86-89). 첨언하면, 서양인들의 실천은 소여의 신체-물체(자연)의 기반으로부터 ‘혼을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문화를 분화하는 것)에 있다. 그에 비해 선주민의 실천은 소여의 사회-정신의 연속성으로부터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공간을 분화하는 것)에 있다. 후에 살펴보듯이 그것은 신화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된다.

 

와그너의 이론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치밀하고 매우 독창적이며 계몽적인 요약을 거부한다. 독자들에게 『문화의 발명』(Wagner 1981)의 일독을 권한다. 그 책의 설명은 매우 세밀한 동시에 성공적이다. 거칠게 말하면, 와그너의 기호론은 (인간 그리고 아마도 비인간에 관한) 실천의 이론이다. 그것은 상징화의 두 양태를 상호 재귀적으로 조작하면서 실천을 철저하게 일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실천이란 ⑴ 습관적 내지는 집합적인 (문자기호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그 속에서 기호는 ‘제시 대상’의 이질적인 평면으로 거슬러가는 한에서, 즉 기호가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고 간주되는 한에서 표준화된 맥락(의미론, 형식언어의 영역)에서 조직된다. 그리고 ⑵ 차이화하는 혹은 발명적인 (구체적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습관적인 상징화에 의해 표상되는 현상의 세계는 관습적인 대립을 소멸하면서 ‘그 자신에 의해 표상되는 상징’, 즉 상징과 제시 대상으로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선 주시해야 하는 것은 제시 대상의 세계—‘실재’—가 여기서는 기호론적인 효과로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기호의 타자란 ‘스스로를 표상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춘 다른 기호이다. 사건 내지는 기회로서의 현세적(現勢的)인 존재자의 존재양태는 토테고리(tautégorie)[각주:1]이다. 나아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양태 간의 대비는 그 자체가 관습화한 조작(그리고 지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발명과 관습의 구별은 그 자체가 관습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관습은 반(反)-관습으로부터 산출된다. 이 대비는 따라서 내재적으로 재귀적이다. 특히 인간문화는 근본적으로 상징화의 양태와 대립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문화는 ‘소여’의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행위와 발명에 대해 획득된 요소를 (습관적으로) 중시한다. 문화(관습에 대한 인간의 마이크로한 체계)는 행위자(agent)의 책임영역(‘구축된’ 세계)에 속한다고 정의됨으로써 상징되며, 나아가 ‘소여’인 비-구축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귀속으로서의 반(反)-구축이다)에 의해 상징된다.

 

문화적인 관습의 모든 총체의 핵심은 어떤 단순한 구별 속에 있다. 즉 비-관습화되거나 관습 그 자체의 비-관습화인 맥락의 타입—이것들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연히 분절화된다—, 그리고 ‘소여’ 내지는 ‘생득’이라는 관습적인 겉치레 하에서 ‘동기’로서 반(反)-발명되어야 하는 맥락의 타입 간의 구별이다. 본질적으로는 […] 두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동기 지어진 집합체(사회와 그 관습)를 ‘생득’으로서 항상 반(反)-발명하는 분화하는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사람들, 그리고 분화하는 동기를 반(反)-발명하는 집합적인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자들이다. (Wagner 1981: 51)

 

 

4.

 

앤틸리스 제도의 사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인류학의 교차배열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구별되기 시작하는 두 특징과 분명하게 일치한다. 첫째, 그는 예상외의 방법으로 애니미스트로서 새로운 (조금은 일방적이라고도 생각되는 방법으로) 정의된 존재론의 중심에 신체성의 이코노미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확인했다는 것은 이미 『신화학』에서 풍부하게 명시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즉 신화들의 변용의 어떤 신화적 변용이야말로 목적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엄격한 데카르트주의자와 변덕스러운 라블레주의자[각주:2]를 연결하는 하나의 산문이다. 그것은 비교에 의한 법신학적인 음울함(우리 분야를 만들어내는 권리와 의무, 질서와 원리, 범주와 ‘도덕적 인격’을 떠올려보자)에 의해 고통 받았던 우리 자신의 인류학의 망령과 같은 용어로 설명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器官)의 흐름과 물질적인 코드, 지각의 다양성과 동물로의 생성 등의 관점으로부터 형상되는 선주민의 인류학이다. 둘째, 그 덕분에 존재자의 잠재적인 차원(‘마음’)의 흔적 혹은 총칭 없는 지위에 관한 이론적 함의가 일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선주민의 지(知)의 구조적인 힘에 관한 주요한 전제로서 서양 인류학에 의해 묘사된 그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다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놓쳐버린 이미지를 쫓아내었다’. 이 이중의 비틀림, 즉 일상적인 실천에 부착된 물질주의와 사변적인 것, 애니미즘에 관한 심리주의자와 실증주의자라는 이중의 비틀림이야말로 라이프니츠, 니체, 화이트헤드, 들뢰즈에서 볼 수 있는 이러저러한 이름표와 연결된 철학적 명제와의 (적어도 증명됨과 동시에 구축되는) 유사함의 명목으로 우리가 ‘퍼스펙티브주의’라 부른 것이다.

 

 

5.

 

다양한 민족지학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거의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지적했을 뿐이지만—, 신세계의 많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란 시점(視點)의 다양성에서 구축된 것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 모든 존재자는 지향성의 중심이며, 그들은 다른 존재자를 그들의 특성과 각각의 능력에 의해 이해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제와 귀결은 가장 먼저 떠올릴 상대주의의 잘 알려진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은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간의 대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평면으로 정리된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관점에서 본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러한 저항은 한창 논쟁중인 존재론적 분할의 이식가능성을 의문시한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는 서로 달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 간의 분할—학문에서 마치 헌법의 제1조와 같으며, 그 속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의 오래된 모습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을 비서양의 우주론의 특정한 차원과 내재적인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한다면, 엄격한 민족학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자연’과 ‘문화’라는 두 범형과 나란한 속성, 즉 보편과 특수, 객체와 주체, 물리현상과 도덕, 사실과 가치, 소여와 창설된 것, 필연과 우연,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지도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의 우주론에 대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 특유한 표현을 지시하기 위한 ‘다자연주의’라는 표현을 활용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전자는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간의 상호 함의를 근거로 삼는다—한편으로는 신체와 실체의 객체적 보편성에 의해 보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시니피에(記意)의 주체적 고유성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인데, 아메리카 선주민의 개념은 그 반대로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양성을 상정한다. ‘문화’ 내지는 주체가 보편성의 형식을 그려내고 ‘자연’ 혹은 객체가 개별의 형식을 그려낸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민족지에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이러한 다양한 타입의 액터(actor)와 주체적인 행위자(agent)—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후학적인 현상, 많은 경우에 대상, 그리고 인공물—가 정착한 세계를 기술하는 코스모폴리틱한 이론에 대한 참조로 넘쳐난다. 이것들 모두가 퍼스펙티브, 욕구, 인지를 배치하는 전반적인 총체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혼’과 유사한 것을 부여한다. 이 유사함은 거의 수행적인 통각의 동일한 양태를 포함한다. 즉 마음을 가진 동물과 그 외의 비인간은 ‘자신을 인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다’. 즉 지향적인 대상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측면을 가진 대상의 구성은 사회와 실재의 관계성에 의하며, 그것들은 재귀적이고 상호적으로, 즉 집합적인 대명사의 이중의 양태 하에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인간이 보는 것—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또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 제기된 철학적인 문제이다.

 

혼의 유사성은 이 혼이 표현하거나 지각하는 것과의 대립을 포함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 정령, 그 외의 우주적인 액터를 보는 방법은 이러한 존재자가 인간을 보거나 스스로를 보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이 토톨로지(Tautologie 동어반복)는 퍼스펙티브의 영도(零度)이다. 전형적인 인간, 그것도 규범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며 동물을 동물로서 이해한다. 정령에 관해 말하면,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를 보는 것은 그 ‘상태’가 규범적이지 않다—병에 걸렸다거나 트랜스상태이거나 다른 부차적인 상태이다—는 것을 분명히 뜻한다. 사냥감은 인간을 정령이나 포식자로 보지만, 포식동물과 정령 측에서 보면 인간은 사냥감이다.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인간을 맥[각주:3]이나 멧돼지로 보고 죽인다’(Baer 1991: 224). 우리가 비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은 바로 그 자체로(그 각각의 동종의) 동물이나 정령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서 자신을 간취한다(혹은 생성한다). 그리고 그 버릇이나 특징은 문화적인 겉모습에 의해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음식을 인간의 음식과 같이 이해한다(재규어는 피를 옥수수 술로 보며,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는 등). 그것들은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식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으로 조직된다(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

 

조금 더 밀고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동물(대개의 경우 타자를 포함한 모든 것이며, 적어도 죽은 자를 포함한다)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비주의는 대개 재규어, 아나콘다, 독수리, 혹은 남미수리와 같은 대형의 포식자나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동물들이다. 또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들이다. 실제로 퍼스펙티브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이고 관계론적인 입장과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형이상학은 퍼스펙티브주의에 매우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그렇지만 그 상대적인 입장의 관계성 속에서 포식자의 힘의 서열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사실상의 인격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논점은 모든 동물종이나 존재의 모드가 그러하다는 것을 (권리상)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분류학(taxonomy), 분류, ‘민족-과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나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적(强度的)으로 인간이며, 잠재적으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신이 어떤 인간존재라는 것을 보여줄(인간존재로 변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잠세력이 문제이다. ‘인간인 것’ 그리고 ‘퍼스펙티브를 가진 것’, 그것은 정도, 맥락, 서 있는 위치의 문제이며, 어떤 종(種)인가라는 두드러진 고유성이 문제는 아니다. 어떤 비인간적인 존재는 다른 것보다도 더 완전한 방식으로 이 잠세력을 현실화하며, 나아가 그 가운데 특정한 존재자가 우리 종이 가진 잠세력보다도 더 우월한 강도를 가지고 그 잠세력을 보여준다. 이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이다(Hollowell 1960: 69). 게다가 이 문제에는 본질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aposteriori)한 (경험적인) 성질이 관련된다. 하찮은 존재자가 인간처럼 꾸밀 수 있는 더 적합한 행위자(agent)로서 (환상, 병마, 샤먼에 의해)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어떤 존재가 인격을 갖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어떤 우주론적인 도그마 이상으로, 무엇보다 ‘인격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존재자를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 그 무엇도 없다면—즉 생사회(生社會)의 다양체라는 점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규범이다. 즉 완전히 기묘한 것인데, 아마존 사람들은 무릇 있을 법하지 않은 형식으로 숨은 인간을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있을법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으로 보인다거나, 같은 종족이나 때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항상 가까지 있는 이웃에 대해 인간성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잘 알려진 자민족중심주의를 수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조건에 관한 우주론적인 독아론을 감수해왔던 옛 유럽(확실히 종(種)들 간의 간주체성이라는 위로를 통해 완화되고 있다)을 과감하게 탈마술화하는 고려로 향하면 우리가 다루는 이국적인 민족은 두 개의 유치한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게 된다. 즉 동족 간에 종종 매우 유사한 작은 차이와 완전히 다른 종들 간에 보이는 큰 유사함이라는 두 개의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그 속에서 타자는 무엇에도 이를 수 없다. 자민족중심주의와 애니미즘은 과대하든 과소하든 극단적인 것이다.

 

인격의 조건(인간의 형식이란 보편적인 통각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은 아마도 우리 종과 다른 집단을 ‘거절하는’ 바로 그 때에 다른 종에게 ‘확장된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개념—내재적인 잠세력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그 상위에 있다. 인간성이란 동족이라는 입장에 관한 것이며, 집단의 재귀적인 모드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인간성은 포식자 혹은 먹이의 원초적인 입장과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퍼스펙티브의 타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른 집단, 다른 인간적인 다양체를 휘감게 된다. 이 유사성과 동족성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어떤 특정한 포식자의 차이라는 단호한 미결정성으로서 생성되고 그에 선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친족관계의 프로세스는 바로 이렇게 구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착상을 주었던 것은 포식자의 내재적인 안정화로서의 ‘재생산’이며, 그 단호한 미완성이며, 베이트슨(혹은 발리사람)이 말한 것처럼 ‘강도(强度)가 지속하는 평면’을 상찬하는 방식이다. 카니발리즘을 다루는 다른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추산한 동일성이라는 발상을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의거해서 완전히 정식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니발리즘의 문제성은 … 습관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삶이 정착하게 될 포식의 하한선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84: 144; 1971: 617 참조)

 

이것은 바로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교훈을 응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유사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차이는 제로로 향해간다”(레비-스트로스 1971: 32). 주지하다시피 ‘향해간다’는 동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타자를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는 ‘무엇도 무효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그 개념의 힘을 완전히 개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한까지 최소화될 때뿐이다. 예를 들어 쌍둥이 간의 차이가 그러하다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철학자들은 말한다(레비-스트로스 1991).

 

 

6.

 

실제 비인간이 한편으로 비가시의 얼굴 형태를 한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의 다양한 차원에서 근저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맥락, 즉 샤머니즘에서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종들 간의 신체적인 장벽을 횡단하거나 이질적인 주체성의 퍼스펙티브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숙련된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이 자신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해내는 방식으로 샤먼이 그들[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낼 때, 샤먼은 종을 넘어선 대화에서 강력한 대화자의 역할을 확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서사를 말하기 위해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데, 그것은 속인(俗人)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접촉 혹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정치적 수완, 즉 일종의 외교를 요한다. 서양의 상대주의가 공적인 정치로서 다문화주의를 채용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먼적인 퍼스펙티브주의가 채용하는 것은 우주론적인 정치로서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어떤 인식의 모드를 함의한 행동의 모드이며, 혹은 오히려 인식의 어떤 특정한 이상(理想)이다. 그러한 이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양근대가 촉진한 객체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에 있다. 이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에게는 대상의 범주가 텔로스를 부여한다. 즉 인식하는 것은 ‘객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대상에 내재하는 것과 인식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힘이며,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부당하게 혹은 피하기 어려운 대상에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인식한다는 것은 탈주체화하는 것이며, 주체의 일부를 이상적인 최소상태로 감축하기 위해 객체 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일부를 명시하는 것이다(혹은 이목을 끄는 비판효과를 확보하기 위해 주체의 일부를 확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객체화의 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객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을 재인식한다. 그리고 주체는 ‘그것’이라고 하듯이 ‘외부로부터’ 자신을 생각해내는 데 성공할 때에 자신이 객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문다. 타자의 형식은 사상(事象)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완전히 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린다. 즉 인식하는 것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려져야만 하는 것의 시점(視點)을 입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상(事象) 속의 누구’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없다면, ‘왜’라는 물음에 지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 타자의 형식은 인격이다. 유행의 어휘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인격화 내지는 샤머닉한 주체화란 정신에 관한 현대철학자(내지는 현대정신에 관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지향적인 태도’를 보편화하는 경향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주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물리적’이고 ‘함수적’(Dennett 1978)인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의 인식론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완전한 객체적 표상에 이르기 위해 ‘주위의 지향성’을 영도(零度)로 감축하고자 하는 탐구를 저 멀리 하고, 완전히 그와 정반대에 거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인식은 시스템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행위자(agent)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통해, 지향성이 최대화된 상태에서 번득임을 조준한다. 샤머니즘은 정치의 기술이라고 우리는 주창한다. 오히려 이제는 정치의 기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샤머니즘적인 기술은 진정 각각의 사건을 행위로서, 즉 상태 혹은 무엇인가의 행위주체의 지향적인 속성의 표출로서 보는 데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성공은 대상이나 노에마(noema)[각주:4]에 속할 수 있는 지향성의 질서와 정비례한다. 하나의 실체 내지는 하나의 사상의 상태는 주체화, 즉 그것들을 인식하는 인간과의 사회관계의 현실화로 지연되지 않는다. 그것은 샤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즉 인식의 잔류물, 정확한 인식을 거스르는 ‘비인격적 요인’이다. 반복할 것까지도 없지만, 우리의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은 반대의 의미=방향을 갖고 있다. 즉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상식의 지향적인 태도를 편리한 허구로서, 표적으로 삼는 대상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요소를 물리적인 프로세스로 분해할 수 없을 때 채용하는 무언가로 생각한다. 모든 작용을 사건의 인과연쇄로 환원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농밀한 상호작용(특히 원격 ‘작용’)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근대의 자연주의적인 세계에서 주체가 불충분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객체라고 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인식론적인 습관이 따르는 것은 그 반대의 원리이다. 즉 객체란 불충분하게 이해되지 않는 주체이다. 여기서는 인격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기 위해서는 인격화해야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객체는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후자에서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식—하나의 정신의 형식,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주체와 분명한 관계성을 가지든지—즉 행위자의 ‘가까이’ 존재하는 무언가(Gell 1998)로서 규정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두 선택지에서 비인간적인 행위주체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식 하에서 지각한다는 이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초인간적인 주체성의 세계에 있는 ‘문화’의 해석 속에서 다양한 사건이나 ‘자연’의 대상을 사회의 행위주체성이 이끌어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무언가의 변용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다만 야만적인 사실이지만,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기술의 산물이며 고도로 세련된 행위이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에게는 ‘맥주’이며, 우리가 진흙이라고 보는 것을 맥은 멋진 의례의 장으로 경험한다, 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인공물은 이러한 모호한 존재론을 구비한다. 그것은 객체이지만, 필연적으로 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응고된 행위와 같은 것이며, 비물질적인 지향성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떤 것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타자에게는 ‘문화’이다.

 

이것이 선주민의 교훈이며, 인류학은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시방편의 교환—문제가 된 어휘에 손대지 못하는 단순한 기호 변화—을 위해 소여나 구축된 것의 미분/차이적인 배치를 빼앗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온전한 차이’(Wagner 1981: 51)라는 것이 있다. 노골적인 초월성으로서 실천, 반인류학적인 순수한 타자성—구축될 수 없는 것, 정착하지 않는 것, 관습이나 담론에 반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세계와, 인간의 형식을 몸에 걸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내재적인 인간성의 세계와의 차이이다. 이러한 선주민의 세계의 의인화된 가설과 근본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소여가 아닌 것으로서 소여가 아닌 존재로서 인간을 ‘구축한다’는 집요한 인간중심주의적 노력이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것까지 포함해서 서양의 철학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이국적인 민족의 나르시시즘의 천국(혹은 디즈니판 인류학)이라는 판타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인간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선주민의 세계를 가까이에 두는 것도 아니고 활기를 부여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해두어야겠다. 모든 것이 인간인 장소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자이다.

 

우리의 인류학이 꿈꾸는 더 많은 세계는 하늘 위와 땅 밑에 있다.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며 모든 관계성은 사회적인 것처럼 이 다방향성을 우리 세계의 환상처럼 기술하는 것, 그 첫 번째 발명을 두 번째 습관으로 환원함으로써 이 둘을 통일하는 것, 그것은 양자 간의 관계성의 매우 단순한—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하찮은—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용이함은 결국 모든 종류의 복잡함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론적인 일원론은 최종적으로는 인식론적인 이원론—에믹과 에틱, 은유적과 자의적, 의식과 무의식, 표상과 현실, 환상과 진리 등—을 비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리적으로 유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히 두 양상을 통일된 상태로서 각각의 주민 간에 하나의 변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분할은 단일자연주의적이다.

 

 

 

 

  1. ‘같음’을 의미하는 taut와 allegory를 합쳐서 만든 용어로 셸링(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이 신화해석에서 사용했다. 알레고리가 다른 주제를 유사에 의해 표현하는 반면, 토테고리는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2.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94?-1553?)는 프랑스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이야기 작가이다. ‘가르강튀아 이야기’ ‘팡타그뤼엘 이야기’를 발표하여 그 독특한 요설(饒舌)과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제자로서 온화한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서 본능과 자연에 입각한 낙천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역설했다. [본문으로]
  3. 맥(獏ㆍ貘)은 포유동물로 모양은 물소를 닮고 흑갈색이며, 남태평양ㆍ남미 등지의 밀림의 물가에 산다. [본문으로]
  4. 노에마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지향적 객관 혹은 지향적 대상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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