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에서 안티나르시스를 통해 포스트구조주의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이다. 즉 '공의'와 토테미즘의 차이에 주목해서 '공의'의 타자개념을 이해하면, '적'이 왜 포스트구조주의 인류학의 생성에서 핵심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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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의 형이상학

 

 

 

1.

 

상식에 반하는 구조주의의 독해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약간 돌아가는 길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민족지학자로서의 나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1962년이라는 전환기에 출간된 두 권의 책, 『오늘날의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전(前)구조주의’는 『신화학』의 ‘포스트구조주의’로 대체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두 권의 책에서 ‘토테미즘’과 ‘공의(供儀)’의 전형적인 대비를 설정하고 바로 신화적인 것으로서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 덕분에 구조인류학의 한계로 어렴풋하게 느낀 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술어의 지리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레비-스트로스의 방법론의 영역의 한계—, 그것은 수학적-역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이며, 그 한계의 방향으로 이 방법론의 어떤 잠재성을 이끈다. 이 대비는 특히 아마존 동쪽의 투피어족(Tupi語族)으로 분류되는 아라우에테(Araueté)에서 행한 나의 연구를 되돌아보고 아마존의 민족지를 재독하기 위해 중요하다. 그것은 내게 호전적인 카니발리즘과 샤머니즘의 의미, 즉 투피와 그 외 아메리카 선주민 사회의 중심(혹은 ‘탈-중심’)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체제를 재고하고자 할 때의 기점이 된다.

 

 

2.

 

아마존 선주민 사이에서 ‘공의’에 관한 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아메리카 저지대의 문화와 안데스나 중부아메리카의 국가체제 간의 역사적ㆍ유형적인 관계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아마존 선주민에게 공의는 극히 중요한 신학정치적인 장치이다. 이 문제의 배후에는 미개로 일컬어지는 사회에서 국가의 발생이라는 더 큰 문제가 놓여있다. 일단 샤먼은 초월적인 것을 위탁받은 원-사제의 모습을 떠안는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는 샤머니즘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아메리카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공의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프랑스사회학(Hubert et Mauss, 1950/1899)에서 주어지는데, 이것은 여전히 이 분야에서 일반적인 참조문헌으로 자리하지만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샤머니즘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와 공의 개념 간의 연결은 그들의 샤머니즘 실천으로부터 내가 직접 받은 인상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생사관에 관한 담론으로부터 그 연결을 이해했다. 아라우에테의 우주론에서는 사후(死後)의 카니발리즘에 의례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하늘의 신들(les Maï)은 마침내 천국에 입성한 죽은 자의 혼을 먹어치우는데, 그것은 죽은 자가 먹어치우는 자와 동일한 불사의 상태로 변신(metamorfose)하기 위한 서곡이다. 내가 민족지에 논했던 것처럼, 이 신비적인 장례의 카니발리즘은 투피남바족(Tupinamba族)(16세기 브라질의 남단 끝에 살았고, 지금은 투피어족의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리오데자네이루와 바히라에 정주하고 있다)의 호전적 사회학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한 구조변형이다.

 

우선 투피남바족의 카니발리즘의 일반적인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을 포획하고 쏘아죽이고 의례적으로 먹는 일련의 과정에 공들이는 시스템이 문제이다. 전쟁포로는 같은 언어와 관습을 가진 민족에 의해 포획되는데,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 엄중하게 의례가 집행될 때까지 포획자들 옆에서 충분히 오랜 기간 살아간다. 그들은 대체로 자상한 돌봄을 받고 중후한 집행의례를 위해 길게 이어지는 준비기간 동안 감시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생활한다. 이것은 [포획자의] 집단의 여성을 처로 받아들이는 관습을 포함한다—따라서 포로는 의리의 형제[처남]로 변용된다(예전에는 투피어(Tupi語)에서 ‘적’과 ‘의리의 형제’의 호칭이 같았다. 토바자(tovajar)는 문자 그대로 ‘적대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이미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포식이 친척관계를 얼마만큼 함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례적인 사이클은 포로를 죽일 때 최고점에 달한다. 그것은 사제자에게 통과의례의 가치를 가진 행위이다(그는 이때 새로운 이름을 획득하고 기념으로 신체를 상처 입히고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낙원으로 통하는 권리를 얻는다 등등). 그 의례 가운데 모든 협력자, 즉 방문객과 이웃마을의 초대 손님들이 포로의 신체를 먹는다. 예외는 살해에 가담한 사제이다. 그는 포로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례를 위해 격리된다. 즉 상을 당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죽임을 당한 ‘적대자’와 동일화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투피남바족의 식인은 종종 ‘인신공양’의 한 형태로 해석되어왔는데, 그것은 초기의 [식민지] 연대기 제작자들 몇몇이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고 브라질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플로레스탕 페르낭지스(Florestan Fernandes 1920~1995)(1970/1952)가 만들어낸 정치한 개념(그는 앙리 위베르(Henri Hubert)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도식을 16세기 브라질에 관한 자료에 적용했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때 페르낭지스는 원전에는 기재되지 않은 정보, 즉 공의의 받는 측, ‘초자연적인 실체’를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공의란 그룹의 죽은 자의 혼을 위해 행하는 것이며, 전쟁의 포로를 죽거나 먹음으로써 복수 혹은 축복을 행하는 것이다.

 

아라우에테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투피의 카니발리즘에 초자연적인 실체가 관여하며 그들이 의례적인 이성(理性)을 통해 죄를 면할 수 있다’는 사고에 이론(異論)을 주장했다. 아라우에테의 경우, ‘초자연적인 실체’가 식인관계의 능동적인 극(極)의 역할을 맡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식인에 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조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투피남바족의 사회학을 통한, 이 민족의 생사관에 관한 나의 해석이다. 아라우에테의 하늘의 신들(les Maï)은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주체가 되는 집단이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즉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살해하는 그룹과 그 동맹자가 포로를 먹는다. 그러나 공의의 객체(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포로)는 아라우에테의 죽은 자가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아라우에테에서 산 자는 결국 공(共)-주체의 위치를 점하며, 그것은 아라우에테에게 적의 그룹이 점하는 위치이며 희생자는 그로부터 유래한다. 요컨대 아라우에테의 신성한 카니발리즘으로부터 투피남바족의 식인적 카니발리즘으로의 변용은 이러한 실천의 상징적 내용과 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라그마틱한 변화, 아니 혹은 퍼스펙티브의 번역이다. 그것은 가치들과 주체-객체의 기능, 방법-목적의 기능, 자기-타자의 기능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나는 시점(視點)에 의한 교환의 이념이 식인에 관한 아라우에테와 투피남바족의 모티브를 기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교환은 행위자(actant)의 도식에서는 투피의 카니발리즘 그 자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나는 이 교환을 퍼스펙티브를 교환하는 프로세스라고 정의했다. 그 속에서 ‘나’는, 타자가 ‘나’에게 빙의함으로써 ‘타자’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타자가 ‘나’가 된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타자 속의 나이다. 문자 그대로 ‘타자를 횡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단순하면서도 반복되어왔던 하나의 물음에 답을 준다. 즉 도대체 누가 실제로 적을 먹을까 라는 물음이다. 의례적 카니발리즘에서는 질(質)적인 의미에서 희생자의 고기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 문제는 물질적인 측면이나 ‘실체’일 수 없다. 나아가 우리가 아는 자료에 한에서는 적의 신체에 어떤 물질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효과가 머물고 있다는 증언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없다. 먹히는 ‘물질’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체라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하나의 기호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타(他)의 기호와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먹히는 것은, 적과 먹는 자와의 관계이며 달리 말하면 적의 조건이다. 희생자로부터 흡수되는 것은 타성의 기호이며, 그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시점으로서의 타성이다. 카니발리즘과 선주민의 전쟁의 타입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적의 시점에 의한 상호적인 자동결정이라는 역설적인 운동을 함의한다.

 

내가 전개한 이 주제는 분명히 이 분야의 어떤 고전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해석이다. 서양의 다문화주의적인 인류학의 목적은 현지인의 시점에서 경험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선주민의 다자연주의적 인류학은 적의 시점에서 서서 ‘기호물리적’인 포획(죽이고 먹는 것)을 자기기술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간주한다. 인류학으로서의 안토르포파지(anthropophagy 식인풍습)이다.

 

내가 이 착상을 품은 것은 아라우에테의 싸움의 노래를 들을 때였다. 그 노래 속에서 전사(戰士)는 부름과 답함이 복잡하게 엮인 놀이를 통해 죽은 적의 시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말한다. 그 노래의 (두 가지 의미에서) 주체=주제인 희생자는 그가 죽인 아라우에테의 자를, 그리고 그를 죽인 자—‘화자(話者)’ 자신으로 요컨대 죽은 적의 말(파롤)을 노래하는 자—를 식인적인 적으로 이야기한다(무엇보다도 아라우에테는 말 외에는 먹을 수 없다). 아라우에테의 살육자들은 그 적을 통해 스스로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과 같은 상태가 된다. 즉 ‘적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희생자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 순간부터, 혹은 오히려 희생자의 목소리에 의해 스스로의 특이성을 표명한 순간부터 스스로를 주체로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퍼스펙티브주의이다.

 

투피의 호전적인 기호론적 식인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코뮌 밖에서는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선주민의 정치철학이 존재한다는 이 테마는 그와 동시에 정치에 관한 식인적인 철학이기도 한데, 전쟁에 관한 클라스트르의 이론에서 그 개략이 묘사된다(Clastre 1977, 선구적인 논문으로서 Clastre 1968과 1972 참조). 그러나 몇몇 아마존 연구자의 노력 덕분에 그의 민족지의 일반성과 복잡성은 내가 투피의 연구테마로 삼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마침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업이 조준한 것은 아마존 사회의 기초적인 제도로서 포식자의 타성(他性)의 체제이다. 이 사고방식에 의하면, 사회체제의 ‘내면성’은 외계의 상징적인 자원—이름과 혼, 인격과 전리품, 말과 기억—을 포획함으로써 남김없이 구성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는 적이 가져온 특성을 거두어들이는 움직임의 원리를 삼음으로써 그와 동일한 특성에 의해 ‘규정’되도록 작용한다. 이것은 투피남바족의 생활에서 중대한 의례의 순간, 즉 포로를 죽일 때 나타나며 그때 의례의 장(場)은 살해자와 그 희생이 되는 자의 쌍방의 형상에 걸쳐 배분된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은 무한하게 반사(反射), 반향(反響)된다. 결국 여기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포식의 형이상학’의 핵심이 있다. 내부 없는 사회로서의 미개사회는 그 외부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 내재성은 그 초월성과 호응한다.

 

이와 같이 나는 샤머니즘이 아닌 전쟁과 카니발리즘에 의해 처음으로 공의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모스의 정의가 적절하지 않다면—받는 사람도 성스러운 물건도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토테미즘의 논의에서 제기한 관념은 [모스의 정의와] 반대로 투피의 식인풍습[인류학으로서의 안트로포파지]을 새롭게 밝혀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3.

 

토테미즘과 공의의 대비는 처음부터 오지브와족(Ojibwa族, 북미인디언의 한 부족)의 토템과 마니도(Manido)[오지브와족의 홍수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시스템 사이에 놓인 직각적인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토테미즘』 1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Lévi-strauss 1962a: 32). 『야생의 사고』 7장에서 이 대립은 일반화되어 묘사되며(1962b: 298), 다음과 같이 시스템화된다.

 

  1. 토테미즘은 전체로서 동형의 두 차이의 시스템 간에 형식적 및 가역적인 상관관계를 정함으로써 두 병렬적인 계열(série)(자연종과 사회집단) 간의 상동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립한다.

  2. 공의는 연속적으로 방향 지어진 단 하나의 계열의 존재를 정립한다. 그 계열 속에는 양극단에서 비상동적인 두 개의 항(인간과 신) 사이를 하나의 실재적이고 불가역적인 매개가 움직인다. 그 속에서 유사성은 동일성 혹은 연속하는 아날로지적인 근접성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3. 토테미즘은 은유적이며 공의는 환유적이다. 즉 토테미즘은 ‘참조항의 해석체계’이며 공의는 ‘조작자의 기술체계’이다. 전자는 랑그의 영역이며, 후자는 파롤의 영역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공의는 언뜻 보면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분석되는 또 하나의 ‘변용의 체계’에서 비율의 균형에 관한 다른 타입의 프로세스를 현실화한다. 토테미즘의 논리변용은 상호적인 입장을 치환, 전치, 교차 혹은 그 밖의 조합적이고 외연적인 재분배로 간주하도록 항들 사이를 설정된다. 즉 토테미즘은 비연속성의 유형이다. 그와 반대로 공의적인 변용은 자연을 자신의 술어로 개변하도록 내재적인 관계성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공의적인 변용은 그것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용은 조합이라기보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이 말한 의미에서의 전도(轉導 transduction)이다. 그것은 연속성의 에너지의 도움을 받는다. 토테미즘의 목적은 각각의 극에 있는 차이의 두 계열 간에 유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의의 목적은 자기동일화한다고 가정되는 두 극 사이에 하나의 장면 혹은 식별불가능한 어떤 계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차이를 이룬다(외부를 통한 것이 아니라 내부를 통해). 수학적인 알레고리를 빌어 말하면, 토테미즘에서 구조변용의 모델은 조합의 분석이다. 그때 공의의 강도적인 형태변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왕국’(레비-스트로스)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오히려 미분적인 계산의 어떤 영역으로 향한다. 희생자의 죽음이 접선 즉 신성(神性)의 곡선에 대한 최적의 근사치라고 상상해보자….

 

이와 같이 레비-스트로스류의 정의에서 토테미즘은 형식의 시스템으로서 이해되며, 그 한편으로 공의에 대해서는 힘의 시스템이 현존하는 것을 시사하도록 형식화에 호소한다. 유동하는 진짜 기계. 레비-스트로스는 예를 들어 ‘저장고’ 간의 ‘연속성의 해결’, ‘자동적으로’ 보충하는 ‘유사성의 결여’ 등이라는 표현을 증거로 삼으면서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는 용기라는 완전한 도식주의를 활용했다. 이 사고로부터 공의의 원리로서 잠세성(潛勢性)의 차이라는 단서의 이념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4.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는 축적된 상징 에너지를 경감시키는 것으로서 웃음과 미적인 감정을 분석하면서 물(水)-에너지적인 언어가 다시 나타난다. 레비-스트로스는 ‘뜨거운’ 역사를 가진 사회를 언급할 때에도 그렇게 다룬다. 집단의 불평등성 혹은 타자들의 착취에 포함된 잠세성의 차이를 사용해서 생성이나 에너지를 산출하기 위해 엔트로피에 저항한다는 것이다(Lévi-strauss et Charbonnier 1961: 44-48).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은 거의 주목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주술의 일반원리의 소묘』에서 마나의 개념을 만들어낼 때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위베르와 모스는 마나가 사상(事象)과 존재물을 차이/미분화하는 가치의 이념이라는 것(“주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속에서 인정되는 각각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계층적인 배열(arrangement)의 이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계층적인 차이(니체와 함께 하는 모스!)는 휴이트에 의해 ‘주술적인 잠세성’이 된 마나(mana)와 오렌다(orenda)라는 개념의 번역과 정합하는 것임이 강조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사상(事象)의 상대적인 지위와 상호적인 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잠세성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事象)이 상호 작용하려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마나의 개념이란 그러한 가치들의 관념이며, 이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에 다름 아니다. 주술적인 사고와 주술에 관한 사고방식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Hurbert et Mauss 1950/1902-1903: 114).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틈으로서의 마나라는 레비-스트로스류의 해석은 그러한 이유로 시니피앙의 계열과 시니피에의 계열 간의 상관적인 차이의 모델을 끌어오며, 그때 그 모델은 토테미즘형의 설명 그리고 이 두 계열 간의 끝없는 변조(‘조정’의 결여)상태에 지지되는 위베르와 모스의 ‘잠체성의 차이’와 아주 유사한 불균형으로서의 공의형의 설명, 이 두 설명 사이의 하나의 타협이다.

 

 

5.

 

결국 차이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이미지, 외연적인 이미지와 강도적인 이미지가 있다. 즉 형식과 힘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양립불가능’(1962b: 295)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두 이미지를 나는 (레비-스트로스가 종종 인용한)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덴마크의 물리학자)의 의미에서의 상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겠다. 이 경우 토테미즘과 공의는 두 개의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시에 필요로 하면서도 동일한 일반적 현상에 관해서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기술, 즉 이질적인 계열의 분절화 작용만큼의 의미 혹은 기호작용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적어도 레비-스트로스로 말하자면, 이러한 상보성은 분명 비대칭적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열린 강의에서 그는 구조인류학이 역사에 저항하는 ‘유체(流體)라기보다는 변용에 관한 어떤 방법’(1973/1960: 28)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동시에 차이/미분화하는 역학보다도 오히려 집단의 대수학을 제안한다. ‘유체의 방법론’은 뉴턴이 미분법에서 명명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대로 인류학에서 구조의 방법론은—아마도 이 방법의 관습적인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힘이라기보다는 형태를, 차이보다는 조합을, 물결모양보다는 다루기 쉬운 입자상태를, 파롤을 밀어내서 랑그를, 행위보다는 유형화를, 각각을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따라서 구조의 방법론을 다소 거스르는 [유체의 방법론의] 이러한 측면은 통상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비주류의 기호학(혹은 존재론)의 양태로서 다뤄진다. 이 책이 서두에서부터, 사고 가능한 것의 한계에 대한 증언이든 의미의 결여의 재평가이든 아니면 착오의 힘의 표현이든 비주류의 인류학에 대해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공의는 상상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위해 끌어온 것이며, 토테미즘은 객관적인 것과 참됨을 높게 평가한다(같은 책 301-302). 이러한 판단은 『벌거벗은 인간』(1971: 596-603)에서 전개된 신화와 의례 간의 중대한 대립에서 되풀이되고 일반화된다. 즉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판단은 그가 연구한 민족의 우주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우주론의 특정한 측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토테미즘은 오늘날 야생의 사고 속의 일반적인 분류행위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공의는 항상 [토테미즘과] 잘 어울리는 구성적 해체를 바라고 있다. 토테미즘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해체되는지는 주지한 대로이다.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기를 멈추고 분류의 방법과 의미작용의 시스템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연종의 계열에 대한 참조는 부차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의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즉 공의적인 관계성의 표현으로 기능하는 신성(神性)을 토테미즘의 자연종과 마찬가지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제도적 결정화가 특수사례의 하나에 불과할 때, 공의의 일반적 도식은 무엇과 유사한 것일까? 혹은 토테미즘과 비교해서 더 공의적인 언어로 문제를 형식화하기 위해 공의를 특이성의 현실화로 만드는 역동적인 잠재성의 영역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의는 얼마만큼의 힘을 일으킬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의 가치판단과 거리를 두었을 때, 은유적인 불연속성과 환유적인 연속성, 위치적인 양과 방향을 가진 질(質), 범형론(範型論 paradigm)의 참조와 통어론(統語論 syntax)의 조작 간의 대비가 내게는 완전히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나는 투피의 의례적인 카니발리즘을 공의 속에(범형!)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반(反)-토테미즘의 참된 조작으로서 카니발리즘은 잠재적으로는 상호적인 변환으로 나타난다(투피남바족의 사회에서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보복의 명령이다)는 것인데, 실재적으로 말하면 연결된 같은 부류의 항들은 불가역적이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은 고도의 유사성과 ‘비유사성’(희생자의 신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해체하고 먹는다는 난폭한 물리적인 접촉)이며, 그것은 살해자와 희생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에 비규정적이고 식별불가능한 영역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있음을 함의한다. 사람이 공의의 요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실체의 존재를 정립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가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에서 행한 투피남바족의 의례의 삼중의 해석에서 행위자(actant)는 먹는 자의 집단, 죽임을 당해 희생당한 인물, 그리고 적의 집단이다. ‘죽음’은 의례의 세 축에 의해 교대로 바뀌고 바뀌는 가정된 보상 기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순환하는 힘을 조정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에 다름 아니다.

 

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공의’의 개념을 이 새로운 레비-스트로스류의 의미에서 정말로 식인의 의례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투피의 카니발리즘에는 상상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보복은 ‘불가능’할 수 있지만 상상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사회적인 포이에스의 도식이며, 적의 집단과의 영속적인 불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집단적인 시간을 의례적인 것으로 산출하는 기구(제한없는 보복의 순환)이다. 여하간 만약 항상 적을 상상해야한다면—타자를 그러한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 목적은 실제로 적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를 타자로서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가령 토테미즘의 개념보다 더 많은 것이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난다 해도,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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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는 번역자주임.

* 소절의 구성은 독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자가 임의로 한 것임.

* 이 글의 이해를 위해 필리페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을 알아야 하는데, 한국어로 전혀 소개된 바가 없으므로 그나마 다음의 글(http://sarantoya12.tistory.com/45)을 참조할 수 있다고 봄.

* 다음 글의 논지는 퍼스펙티브주의가 다만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의 새로운 퍼스펙티브로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으로서 확장가능하다(확장해야한다)는 것임.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각주:1]

 

 

 

1.

 

우리는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를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이론으로서 논했다. 나는 ‘여기서’ ‘이론’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십수년간 인류학에서는 야생의 사고 이후 참된 이론적 상상력이라는 성격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내게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인류학자 당사자의 이론적 상상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그러한 경향에 대해 외재적인 이론으로서 가능한 대상이라기보다—예를 들어, 일차적인 애니미즘적 존재론의 이차적인 인식론으로 상정되거나(Descola 2005), 수렵민의 ‘모방적’ 문화에서 출현한 현상학적인 프래그머티즘(Willerslev 2004)으로 규정되는 이론의 대상이라기보다—, 바로 우리에게 이론에 관한 또 다른 이론적 이마주를 구성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지인의 시점(視点)’을 미세하게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말리노프스키), 비가시의 맹점을 지적하며 나아가 탁월한 비판적 전통에서 관찰자의 시점 속으로 현지인의 시점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퍼스펙티브주의가 이러한 전통과 대립해서 이뤄내는 작업은 그것과 ‘대칭적’인 작업, 즉 현지인으로서의 시점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문화에서 현재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이며 시점의 인류학에서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확실히 시점의 선주민적 개념은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류학자의 시점은 선주민의 시점이 될 수 없다(그것은 지평의 융합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후자[선주민의 관점]와의 (퍼스펙티브적인) 관계의 개념이다. 그것은 반성적인 탈장소화적 관계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성적인 구조이며, 인류학자에 의한 퍼스펙티브주의 자체의 기술(記述)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인류학을 통과한 또 다른 인류학이기 때문이다. 고로 퍼스펙티브주의는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서브타입적인 애니미즘도 아니고 인류학자의 이성만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성이 소유하는 ‘실천의 도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입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의 개념이다. 그 가장 흥미로운 사용법은 우리에게 이국적으로 비쳐지는 우주론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오염된 우리 인류학에 대한 저항-분석을 행하는 것이다.

 

 

2.

 

상상력의 결여를 논외로 한다 해도—그것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비근대적인 사람들에 대해 이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찬하거나 혹은 이론적으로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이중 잣대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약간의 모순이 포함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편에서는 선주민의 실천의 본질을 하이데거적인 도구존재자(das Zuhandenes)라는 술어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준-명제적 표상’[각주:2](스페르베르 Dan Sperber 1942~, 프랑스의 인류학자)에 대한 참된 인식의 모든 기능을 거절한다. 그러한 ‘표상’은 백과사전이나 범주화의 온당하고 분명한 경계로서 나타날 때에는 야생의 사고를 구속해버리고 만다.

 

실제 문제의 소재는 사고의 능력과 ‘판단의 시스템’과의 특권적인 동일시, 그리고 인식과 명제 모델과의 특권적인 동일시에 있다. 동시대적인 인류학은 현상학적이고 구성주의적인 경향과 인식론적으로 도구론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데, 최근 비서양적인(혹은 비근현대적인, 비문학적인, 비학문적인, 그밖에 ‘구성하는 것’이 부재한) 지성을 구성하기에는 이 모델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변명들을 한다. 바꿔 말하면 인류학적 담론은 패러독스적인 시도에 열중한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를 타자의 담론의 비명제적인 본질에 관한 명제와 중첩시킨다. 그것은 이른바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수다와 같다. 선주민이 자기해석이라는 실천에 대해서는 숭고한 모멸을 보이면서 우주론이나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이론적으로) 만족스러울까? 선주민에게 있어서 해석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에 관한 인류학자에 의한 해석을 증대시킬 수 있는 큰 이점을 갖고 있으며, 우주론적인 [개념적인] 건축물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인류학자에 의한 장대한 대성당(cathédrale)[의 구성]—이 장대한 대성당에서 사회는 그 장치에 따라 조금이라도 발전하고 시스템적인 것으로 조직화된다—을 가능하게 만든다. 요컨대 선주민이 보다 실천적이라면 인류학자는 보다 이론적이다. 나아가 명제적이지 않은 양상이란 이동과 순환의 ‘맥락’에 강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로 그것[‘맥락’]이 이 양상을 과학의 담론과 그 놀라운 보편화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의 대극에 놓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관계적인 배치’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러나 우리의 그것[‘맥락’]이 선주민의 그것과 비교해서 대체 얼마나 더 시스템에 한정되고 더 상황과 결부되며 더 배치되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서는 우선 비지배적인 사고에 내재하는 전(前)명제성이라는 테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지금까지 요구하지 못한 타자의 ‘합리성’에 대한 권리의 재확립를 중요하게 다루겠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깊은 사고는 다른 사고의 이마주의 투영이지, 다른 야생의 이마주의 투영이 아니다. 명제야말로 이성적인 언명의, 그리고 또 이론적인 담론의 원자의 프로토타입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한다. 즉 명제 스스로가 명료하지 않은 사고에 대항해야 한다. 비명제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원초적인 것으로서 비개념적인 것 나아가 반개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만다. 이것은 물론 개념 없는 타자에 ‘찬성’하기 위해, 혹은 ‘반대’하기 위해 주장된다. 이성적 개념의 부재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성과 행동, 사고와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민족이 실존적으로는 소외되지 않음의 표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이것들 모두는 명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이며 관념의 극히 고풍스러운 개념을 재인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잇단 개념을, 개별적인 것을 보편으로 포섭하는 조작으로서, 본질적으로 분류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서 파악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개념의 거부가 아니라 개념 속에서 미세화철학(infra-philosophy)을 집어내고 그와 상호적으로 미세화철학 속에서 잠재적인 개념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개념의 인류학적인 개념에 다다라야 한다. 그것은 모든 창조적인 (‘야생의’) 사고의 명제외부성을 그 적극성 자체로 떠안는 (생득적인 것이든 획득된 것이든) 범주라는 전통적인 개념과 (명제적이든 준명제적이든) 표상이라는 전통적 개념과 (꽃에 대한 것이든 홑꽃이든 겹꽃이든) 신념이라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혹은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는 개념의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에 그것은 어떤 아카데믹한 환경에도 수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이러한 담론에 관한 어떤 구조적인 결과도 낳을 수 없는 인류학적 담론으로서 근원적으로 외재적으로 위치 지어진 담론-대상에 포함된 내용의 특성과 관련된 서술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보로로족과 쿠나족이 ‘퍼스펙티브주의자’였는지를 묻는 질문이 어느 정도 토론의 장에 열기를 가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류학자는 숲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여기저기 ‘퍼스펙티브주의자’를 가리키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술 더 떠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잘 표현된 정신을 들고 와서 ‘어떻게 하면 퍼스펙티브주의자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회의주의자들은 냉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심중을 애써 드러내려했다. 즉 퍼스펙티브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떠들썩한 소란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을 둘러싸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의,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세부에 집착할 뿐이었다. 여하간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하게 제약된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산출된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특수효과와 관련될 뿐이었다. 그러한 프래그머티즘의 원리는 원리이고, 관계자—관계자가 재규어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들이 재규어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재규어가 말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말의 병(病)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수용의 맥락에서 보면, 이 모든 사태는 인류학자의 이론으로서 퍼스펙티브주의의 귀결에 관한 진지한 검토가능성을—그것[퍼스펙티브주의]은 인류학에서 모든 개념의 실체에 부과하는 변용이다—단숨에 막아버린다. 결국 [퍼스펙티브주의라는] 사고에 곁붙는 암호로 표시되는 사고는 인류학의 수많은 대상 중 하나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야말로 인류학의 또 다른 사고를 기획한다. 그것은 서양적인 ‘인류학적 인류학’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인류학으로서, 그것을 근저에서 뒤집는다.

 

 

3.

 

부분적으로 말하면, 퍼스펙티브주의의 자연주의자적 (아날로지주의자적) 해석이란 퍼스펙티브주의를 어느 한 세계의 대상화의 도식의 하나, 즉 애니미즘의 하나, 수많은 특성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류학이라는 국지적인 장소에서 필리페 데스콜라의 대작인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2005)에서 제시한 개념을 잇는 길을 닦는다. 나는 여기서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는 나의 작업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나와 데스콜라의] 차이점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호 내실 있는 대화를 기반으로 표명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학이라는] 우리 학문이 다루는 그 외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깊은 동의를 전제로 한 것이다.

 

 

4.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서 설정된 파노라마를 재검토하며 수정하고 완성시키는 작업이다. 이 속에서 데스콜라는 토테미즘이라는 관념을 세 개의 ‘존재론’ 혹은 ‘동일화의 양식’—이 동의어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재-종별화한다. 이 세 개의 존재론이란 애니미즘, 아날로지주의, 자연주의이다. 그렇게 데스콜라는 사각형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그 매트릭스에서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이, 서로 다른 존재의 종(種)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인 차원(「데스콜라의」 신조어로는 ‘물리성’과 ‘내부성’)의 연속성 혹은 비연속성의 관계에 따라 배분된다. 이 매트릭스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관한 졸고(1998/1996)에서 내가 제시한 도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데스콜라는 고맙게도 다른 곳에서 그에 관해 주기(注記)해 주었다. 앞서도 일부를 참조했지만, 나는 이 텍스트에서 두 개의 ‘교착하는’ 존재론적 도식 간에 간결한 대비를 설정했다. 그것은 존재하는 종(種)들 간에 형이상학적인 연속성(종(種)으로서의 혼)과 물리적인 비연속성(특정의 신체)의 조합이다. 이러한 조합은 선주민의 심리형질적인 다자연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물질적인 연속성과 형이상학적인 비연속성의 조합이야말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인 다문화주의에 전형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창조물의 모든 잔여와 정신적 실질에 의해 (그 동시대적인 변화에 의해) 절대적으로 분리되면서도 신체적 물질을 통해 소통한다. 이렇게 드러난 대비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도식을 그려낸다. 다른 두 개의 도식인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형상, 즉 물리적 차원과 형이상학적 차원 간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평행한’ 관계가 그려내는 형상을 덧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준 최초의 충격은 우리 세대의 많은 인류학자들(혹은 철학자들)을 이끈 충동과 거의 같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야생의 사고의 비연속적이고 분류적인,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토테미즘적이고 신화론적인 경향의 측면에는 관심을 보인 반면, 연속적이고 ‘초범주적(trans-category)’인, 환유적이고 우발적인, 범형적이고 의례적인 양상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결국 우리는 수년간, 레비-스트로스 쪽으로 나아가기를 권유하면서도 오히려 레비-브륄 쪽을 재검토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토[각주:3]라는 갈래길과 마찬가지로 이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하간 이 방향들은 화자의 시점을 믿어야할 만큼 먼 것은 아니다.) 데스콜라가 제1의 형이상학으로 제시한 애니미즘은 그 자신의 아마존 경험에서 출발하여 바로 이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애니미즘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도 인격이며 사회적 관계의 항이라는 발상을 근본적인 전제로 삼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토테미즘과 반대로 애니미즘은 인간 내적인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 자연의 다수성(多數性)을 사용하는 분류체계이며,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범주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계열(série)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열—인격의 계열—이 존재하게 되며 ‘자연’과 ‘문화’ 간의 관계는 은유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환유적인 인접성에 속하게 된다.

 

나로 말하자면, 야생의 사고와 지나치게 결부된 관념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야생의 사고』에 포함된 토테미즘과 공희(供犧)의 (이 책의 8장 및 9장을 참조할 것) 극히 문제적인 대립이라는 ‘마이너’한 극을 논했다.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과 카니발리즘을 분석할 때 공희의 축에 놓은 것(레비-스트로스의 의미에서)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 쪽에 두었다. 그리고 대략 이러한 개념상의 ‘동의어’ 덕분에 우리 작업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공희의 환유로 향했다. 이 방향에서 분류적인 이성과는 ‘다른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조주의의 중심적 개념의 조합적인 것도 아날로지적인 것도 아닌 해석을, 변용이라는 해석을 지향했다. 그렇게 나는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저자와는 다른 궤도를 밟아갔다. 데스콜라는 『야생의 사고』의 프로젝트를 확장하고 더 풍부하게 만들고자 했다. 토테미즘의 관념을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종적(種的)인 의미에 한정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이 관념은 결국 의미작용의 활동성의 동의어에 불과했다) 그것을 존재론의 하나의 타입으로 변용해버렸기 때문에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의 연역절차는 명확하게 ‘공희적인 것’이 아니라 ‘토테미즘적인 것’(레비-스트로스의 본래의 의미에서)으로부터 촉발되고 있다. 데스콜라는 그의 대상을 닫힌 조합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실천의 도식의 유형학을—세계와 타자와의 대상화의 형식을—유한의 구성요소의 규칙에 따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날로지주의자적’임과 동시에 ‘토템주의자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우주론에 기여한 공헌의 특수성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을 두 개의 하위타입으로 분할한 것, 즉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의 토테미즘으로 분할한 것에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지주의의 정의는 일련의 문명화된 현상과 스타일에 (특히 일찍이 ‘야만적’이라고 불려왔던 민족의 그것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아날로지주의는 무엇보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에서 주장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 책은 엄청난 고증학적 지식과 섬세한 분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론과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아날로지주의자적인 것이다. 그는 전체적 분류로 기울어져 있고, 동일화로, 대응시스템으로, 성질로, 미크로코스모스-매크로코스모스적인 투영의 도식을 편향적으로 선호한다. 실제로 [책의] 구성을 보면 데스콜라의 시스템이, 그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네 개의 존재론에서 하나를 우세하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동일화시키는 사고 자체가 아날로지주의자의 사고인 것이다. 애니미즘주의자적인 정신 혹은 자연주의자의 뇌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령 퍼스펙티브주의적 사고이며, 바로 이 책이 그 하나의 비전이다.

 

내가 이 책에서 설정한 문제는 구조주의를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도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스콜라가 해명하고 넘어선 도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야생의 사고』를 『말과 사물』과 동일시한 후에 그것[『야생의 사고』]을 다시 쓴 것이다. 반면, 내가 최근에 시도한 도전은 『천의 고원』을 통해 그동안 인류학에서 잊혀져왔던 모든 것들을 되새기면서 그것들을 토대로 『신화학』을 재독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분류가 가진 문제성에 알레르기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로고스중심주의성과 그만큼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우리 인류학자는 기분상으로는 모두 아날로지주의자이다.… 이 의미에서 퍼스펙티브주의자는 분류적인 리비도의 재중복화 혹은 ‘강도화’이다. 이 특징적인 문제는 분류된 것이 분류하는 것이 될 때 무엇이 생성되는지를 정식화하는 만큼 그러하다. 문제는 자연이 그 속에서 분할되는 종을 질서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종들이 스스로 이러한[질서화] 작업을 하는지를 알 게 될 때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있다. 이에 대해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그 종들은 어떠한 본성을 가졌을까?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정확하게는 같은 의미인데—우리가 선주민에게 인류학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때 무슨 일이 생길까?

 

 

5.

 

그리하여 ‘사회’ 혹은 ‘문화’ 인류학은 ‘형질’ 혹은 ‘자연’ 인류학과 대비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류학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인류학이 연구하고 있는 민족에게 ‘사회’ 혹은 ‘문화’의 위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민족에게 인류학이란 어떤 것인가—그 민족이 행위자이고 이론적인 수동자[피관찰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인류학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학을 만드는 것이 인류학을 비교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뜻한다. 물론 비교만이 우리의 분석의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비교는 우리의 최초의 수단이자 최후의 지평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항상 이미 반드시 구조적인 방법과 같은 의미에서의 비교였고(『신화학』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비교), 모든 변용의 대상은 반드시 다른 것의 변용일 뿐이었고, 오리지널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가 모두 변용에 이른다면, 비교란 변용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문화가 스트라샌의 화려한 과정적 정의(1992c: 47)처럼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의 다른 영역 사이에서 아날로지를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면, 모든 문화는 거대하고 다차원적인 비교장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인류학이 와그너가 말한 것처럼(1981: 35), ‘문화를 문화의 통역에 의해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의 탐구를 특징짓는 조작이란 어떤 것이든 문화의 일반적 성질이어야 한다’. 결국 인류학자와 선주민은 ‘직접적으로 비교가능한 지성의 조작’ 속에서 서로에게 관여한다(Herzfeld 2001: 7). 그러한 조작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비교이다. 문화 내부의 관계 혹은 내적인 비교(스트라샌이 말한 ‘영역 사이에서의 아날로지’)와 문화 간의 관계 혹은 외적인 비교(와그너가 말한 ‘문화의 발명’)은 엄밀하게 존재론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비교가능성은 반드시 직접적인 번역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존재론적인 연속성은 인식론적인 투명성을 함의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아마존의 민족들이 탐지하는 아날로지를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를 원주민의 비교와 비교할 때에 우리의 비교에 무엇이 생성될까?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적인 인류학을 원용함으로써, 다의성(多義性)의 관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교라는 우리의 아카데믹한 인류학에서 상징적인 절차를 재개념화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는 조작이란 관찰자에 의해 이뤄지는 동등하게 외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둘 이상의 복수의 실체들 간의 명확한 비교는 아니다. 그것은 정수를 찾아낸다거나 입법적인 가치를 갖는 변이(variation)를 동일시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히 이것은 인류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절차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장치에서 다수 가운에 하나, 즉 인류학적 방법에서 하나의 ‘통제적 규칙’에 불과하다. 반대로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비교는 방법의 ‘구성적 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개념적 장치와의 연관에서 ‘관찰되는 것’의 실천적이고 담론적인 개념의 번역이 포함된 절차이다. 따라서 비교에 대해 말할 때에 우선 다뤄지는 비교란 종종 불명료하고 자동적인—그 설명 혹은 논점화는 방법의 중요한 계기이다—비교이며, 그 속에서 인류학자의 담론이 그 하나의 항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으며 필드워크나 민족지적인 모노그래프의 독해가 처음부터 기능하는 그러한 비교이다.

 

비교의 이 두 개의 양상은 등가적인 것도 별개의 것도 아니다. 그 제1의 조작은 통상 권장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대립적인(그것은 제2의 조작을 부각시킨다) 대상화적 삼각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며, 관찰된 자에게 충분한 속성적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큼은 알차다. 여기서 추려진 삼각형은 참된 삼각형이 아니다. 2 더하기 1이 필연적으로 3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류학자(‘1’이다)가 자신의 문화와 다른 둘 이상의 복수의 문화—그것들은 서로 다르다—의 관계항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카친족과 누어족을 비교할 때, 그는 항상 카친족과 누어족의 요구에 따라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비교의 무대에서 사라져 그 자신이 카친족 혹은 누어족으로부터 [누구인가를] 문제제기를 받는(부여받는) 것을 비가시하고 마치 이 양자가 스스로 비교를 행하는 것처럼 하는…그러한 관점을 행한다. 이와 같이 카친족과 누어족은 인류학적인 담론 내부에서 발생한다. [인류학자들이라는] 다른 사회문화적 실체로부터 제기된 문제의 의해, 그들이 비교가능해진 사회문화적 실체라는 공통의 대상성을 부여된다. 그러한 타(他)의 실체는 비교라는 움직임의 규칙을 규정하면서 유비 없이 이 움직임의 외부에서 출현하고 만다. 만약 이 논의가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발상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면, 그것은 나의 논의가 바로 그 발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의 억견(臆見 doxa)과는 반대로 비교에 의해 복수화가 산출한, 대상에 내재한 대칭성이란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의 대칭성에 관한 마법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주체는 비교의 순수정신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숨겨진 타(他)의 비교—앞서 언급했다시피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와의 관계에 포함되는 비교—는 그 자체로 판명될 수 없다.

 

이러한 포함이야말로 ‘번역’이라 불린다. 오늘날 문화적인 번역을 인류학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투적이다. 물어야 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이 번역이며 번역일 수 있으며 번역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조작은 어떻게 실현하는가? 이다. 이 속에서 바로 타랄 아사드(Talal Asad 1986)가 제시했듯이, 내가 책임을 진(번역한) 말에서 사태는 복수가 된다. 인류학에서 비교는 번역의 역할을 맡는다. 그 역은 옳지 않다. 인류학은 번역을 위해 비교를 행한다. 인류학은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일반화하고 해석하고 맥락화하고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 비교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속담처럼 번역이 언제나 배신이라면, 그 이름을 고치는 번역은—여기서는 발터 벤야민(혹은 오히려 루돌프 판비츠(Rudolf Pannwitz))을 차용한다—도래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며, 출발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이란 버려진 개념이 번역자의 개념적인 장치를 뒤틀고(déformer) 전복시키는 번역이다. 원 장치의 의도는 그 속에서 해명되며, 그리하여 도래하는 말은 변용된다. 번역, 배신, 변용. 구조인류학의 이 과정은 주지하다시피 ‘신화’라고 불린다. 그것[‘신화’]은 ‘구조인류학’의 동의어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를 번역하는 것은 우선 그것이 포함하는 번역의 이마주를 번역하는 것이다. 억제된 다의성의 이동이라는 이마주가 그에 해당한다. 여기서 ‘억제된’이란 걷기를 억제된 낙하로 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의성에 대한 주장이며, 즉 동의어적인 개념 사이에서 타성(他性)을 참조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다의성은 무엇보다 다른 퍼스펙티브적인 위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서, 인류학적인 시도의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로서 나타난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선주민적인 이론은 다양한 양식의 신체성이 ‘자연적으로’ 세계를 정동적인 다양성으로 경험하는 방식 속에서 암묵적인 비교로 이뤄진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이론은 우리에게 역립(逆立)된 인류학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타입의 심성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표상하며 그러한 세계가 그 다양한 개념적인 비전의 유일한 기원으로 정립되는 방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민족인류학이 명석한 비교에 의한 절차에 따르는 한. 이제 퍼스펙티브주의적인 문화주의자의 기술(記述)이 부인하고 탈정당화는 것은 인류학적 이성이 자신의 대상을 원초적 혹은 물신화된 형태로서 회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반(反)- 혹은 전(前)- 인류학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개념은 이러한 역립의 역립을 주장한다. 이제야 그것은 선주민의 주변을 에워싼다. 선주민의 전회. [이것은 물론] 아담 쿠퍼(Adam Kuper 2003)가 거대한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운동—그것은 ‘근대의 선주민화’(Sahlins 2000)가 말했던 반성적인 위치의 이동을 뒤집는 것인데—에 대해 비꼬는 투로 말한 ‘선주민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그것은 전회(turn)이며 거스르는 것, 카이로스[각주:4], 덫, 우회, 예기치 않은 전회이다. 토마스 하디가 아닌 퍼스펙티브의 예술을 소비한다. 천재 헨리 제임스가 중요하다. 선주민의 전회란 (우리 중 몇몇 동료가 가끔씩 즐기는 선주민 헐뜯기가 아닌) 나선형의 전회여야 한다. 아담 쿠퍼의 퍼스펙티브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역사는 실제로는 괴담이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주의적이고 인지적인 인류학 혹은 (어느 날 내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르(Patrice Maniglier)에게서 들은 말로) ‘또 다른 인지주의’ ……

 

 

6.

 

그러나 최후에 남는 문제는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앤틸리스(Antilles) 제도의 우화이다. 그것은 다만 퍼스펙티브주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퍼스펙티브주의자이다. 그것은 간종적(間種的)인 퍼스펙티브주의를 주제화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복수(複數)의 신화에 대한 (하나로 수용되지 않는) 역사적 수용으로 읽힌다. 나는 이 서사를 다음과 같이 몽상했다. 즉 주인공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어느 낯선 마을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주민들은 그를 환영해주었고, 그에게 호리병에 든 ‘카사바의 술’을 마시고 다시 젊어지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민들이 그에게 건넨 호리병 안에는 인간의 피가 들어있었다. 그의 결론은 이 무리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우화는 커뮤니케이션의 분리=이탈의 주변을 순회하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화자들은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것을 알지 못한다(푸에르토리코의 우화의 경우에서 ‘대화’는 상호적인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가 세운 비교추론의 평면과 관련된다). 모든 것은 마치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사물에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같고 서양인과 선주민 또한 같은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대화’란] 자기기술적인 개념이 타자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자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양인과 선주민이 개념을 규정하는 기준(의도)으로서 이해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역사도 신화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의 주변을 맴돈다.

 

잘 생각해보면, 앤틸리스 제도의 우화는 민족지적인 문화 혹은 우리 자신의 필드워크의 메모에서 보이는 수다한 우화와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그것들은 무엇보다 인류학적인 시추에이션 혹은 사건을 다룬다. 예를 들어 쿡 선장의 그 유명한 최초의 에피소드에서 마샬 살린스가 분석했듯이(1985), 푸에르토리코의 교착된 경험의 구조적 변용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두 개의 프로토타입과 관련된다. 아마존의 선주민에게서 보면, 간(間)문화적인 것이란 간종적(間種的)인 것의 특수한 일례일 뿐이며, 역사란 신화의 일례일 뿐이다.

 

강조해두겠다. 다의성이란 인류학자와 선주민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협하는 수많은 병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적인 무능력, 맥락에 대한 무지, 공감의 결여, 부작법(不作法), 순진무구, 악의, 망각 등의 인류학적인 언명화를 경험적으로 헤매는 모든 뒤틀림(déformer)과 태만이 아니다. 이러한 우화적인 병리와는 반대로 다의성이란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범주이며, 인류학에 고유한 문화적 번역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차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정적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인류학적인 담론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그 실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즉 권리상의 의문이다). 번역이란 다의성의 공간으로 자신을 던져 놓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다의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번역의 전제는 다의성이 결코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반대로 번역은 다의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잠성화(潛性化)시키기 위해, 즉 접촉하는 ‘언어’의 실재하지 않는다고 상상된 공간을, 즉 다의성에 의해 은폐된 공간을 개방하고 확장하기 위해 행해진다. 다의성은 관계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근거를 마련하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차이이다. 번역이란 언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다의성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며, 근원적인 일성성(一聲性)과 궁극적인 장황성(冗長性 redundancy)을 상정함으로써 타자를 침묵 하에 보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있는 곳의 것과 우리가 ‘그렇게 서술하고자 했던’ 것 간의 본질적인 유사성이다.

 

허츠펠드(Michael Herzfeld) 씨는 최근 다음과 같이 논했다. “인류학은 다의성(무이해)에만 전념한다. 인류학자인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다의성도 포함해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의성이란 일반적으로는 공통하는 의미를 가진 다양한 관념 간의 상호적인 통약불가능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통의 의미를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2003: 2)라고. 나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인류학자가 (권리상)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허츠펠드가 ‘공통하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 바로 공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 의한 것뿐이라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는 또한 문제로 삼는 ‘관념’의 통약불가능성은 통약불가능성을 방해하기는커녕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하겠다(람벡(Michael Lambek)이 제기한 것처럼). 왜냐하면 통약불가능성만이 구태여 비교되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통약가능한 것을 비교하는 것은 상호 가능한 것으로 귀환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결국 무이해는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가 찾아내어 다의성의 의미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다의성은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해석의 결여’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해석의 ‘과잉’이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해석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이 해석들은 필연적으로 다수적이며, 세계를 보는 상상적인 방식이 아닌 보이는 실재의 세계와 관련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실제로 다른 종의 실재적 세계는 각각의 시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세계’는 이렇듯 다양한 종(種)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점으로서 각각의 종의 다수성의 추상공간이다.

 

그리하여 인류학은 다의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inter/esse라는 간(間)존재, 간(間)실재라는 자의적인 의미에 놓인다. 그러나 로이 와그너(1981: 20)가 말했듯이, 뉴기니의 다리비 족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이해하지 않는 그들의 방식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않는 방식과 같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제시한 인류학의 정의들 중 가장 적합한 정의일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무이해라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쌍방의 무이해가 같지 않다는 ‘초월론적 사실’에 있다. 따라서 누가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누가 누구를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중요치 않다. 다의성은 착오가 아니며 멸시도 아니며 오진도 아니다. 그것은 다의성을 포함하는 관계성의 근거 그 자체이며, 외부와의 관련 속에 늘 있다. 착오와 멸시가 그 자신으로서 구성되는 것은 주어진 ‘언어의 움직임’일 따름이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언어의 다른 움직임들 간의 간극 속에서 생성된다. 착오와 멸시는 다시금 구성되는 전제를 상정하며, 등질적으로 구성된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문제를 일으키는 전제의 이질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고 전제로서 이질성을 상정한다. 다의성은 전제를 규정한다. 왜냐하면 전제가 다의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다의성은 변증법적인 모순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다의성의] 총합은 이접적이며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더 다른 다의성을 규정해야 한다.

 

다의성이란 결국 주체적인 실패가 아닌 객체화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착오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물상화된 혹은 물신화된 언어에서 객체화의 상상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닌 다의성은 모든 사회관계의 경계이며, 그리하여 언어의 움직임이 최대한 다수화하는 ‘간문화적(間文化的)’인 관계의 경계의 사례에서 초객체화된 조건이다. 이러한 다수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류학자의 담론과 선주민의 담론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문화에 관한 인류학자의 개념은 와그너가 논한 것처럼 다의적이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해결의 시도로서 나타난다. 다의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를, 그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으로 상상할 때 산출되는 패러독스”(1981: 27)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고로 ‘오해’가 ‘이해’로 자기변용할 때, 인류학이 맨 처음의 자신의 무이해를 ‘그들의 문화’에서 선주민의 주제로 변용할 때, 그리고 백인이 ‘원산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상품’인 것을 선주민이 이해할 때, 그러할 때조차 다의성은 동일성이 되지 않는다. 타자의 타자는 언제나 타자이다. 그리고 만약 다의성이 오진, 환상, 거짓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적인 실증성의 형성 그 자체라고 한다면, 그에 대립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초월론적인 의미의 실재를 희구하는 일의적인 것이다. 착오나 환상은 무엇보다 각각의 다의성의 이면에 일의적인 것을 숨긴 것이며, 인류학자는 [자신을] 그 복화술사로 상상한다.

 

 

7.

 

따라서 무엇보다 우선 선주민으로 회귀하는 것 이상으로, 혹은 그것과 별개로 의문이 생긴다. 만약 회귀가 있다면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이며, 철학의 전면적인 회귀이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그것들은 우선 동의어일까? 그렇다면 좋다!) 간의 배타적인 양자택일이 아니라 실험형이상학 혹은 필드의 철학지리학으로 이해되는 인류학과, 개념을 창조하는(들뢰즈&가타리 1991) 고유의 에스노인류학의 실험으로 이해되는 철학과의 이접적 총합으로서 회귀이다. 이 인류학과 철학의 횡단화는—이것은 『천의 고원』의 저자가 ‘악마적 결연’으로 지명한 것인데—같은 목표를 향해 설정되어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상태(어떤 내포의 고원)에 진입한다.

 

사회인류학이나 문화인류학이 훨씬 이전부터 근본적 및 전체적으로 철학적 문제와 개념에 의해—특히 무엇보다 ‘신화’라는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그 문제에 이르기까지—횡단해온 것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철학으로부터, 즉 인류학의 문화적 매트릭스로부터 어떻게 멀어졌는가를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극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학자가 철학자와 결코 단절하지 않고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과 구태여 맺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라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무엇이 가능한가? 칸트를, 하이데거를,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면서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용의 평면에서 직접적인 평행성을 설정하는 것도 우선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마존적인 우주론에서 본질의 세계와 현현(顯現)의 세계 간의 다의적인 유사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플라톤의 독해로 이끌릴 수 있다(그러나 그 유일한 관심은 이 선주민의 플라토니즘이 얼마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가를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야생의 사고가 우리에게 부여한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류학이 연구해온 집합성에 의해 발견되는 수많은 복잡한 기호실천적인 배열 속에서 우리가 착목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며, 특히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다. 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서 파악되는 파동을 전파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로서 그것을 선택했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는 인류학적 담론에 의해 재총합되는 대상이다(굳이 말하자면, 선주민의 이론에서 실천적인 방식으로 이 정도까지 알찬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메리카의 어느 민족지학자가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과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어느 선주민이 되는 것, 이 둘의 만남의 결과이다. 선주민이 되는 것,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천의 고원』의 생성에 대한 장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내가 소리 높여 선언했듯이 “선주민들은 들뢰즈주의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렇기도 하다라는 것은 우선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을 선주민의 사고로 두드려 보면 공허한 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들뢰즈에 의해 특권시된 일련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 속에서 비주류의 계보 속에 있는 만큼 그 전통의 외부끼리의 연대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지 않다. 선주민은 들뢰즈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칸트주의자이기도 니체주의자이기도 베르그송주의자이기도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이기도 메를로-퐁티주의자이기도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프로이트주의자이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레비-스트로스주의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버마스주의자이기도 한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분명 ‘문제는 질 낮은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자연주의자의 반(反)인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철학을 야생의 사고의 빛에 비추어 읽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의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가 되는 것, 이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 밖의 사고와의 만남을 위해 저 밖을 사고하며, 다른 끝으로 향하는 것(그러나 중국을 사고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고의 경험은 모두 우리의 사고의 경험이다.

 

 

 

  1. 이마주는 프랑스어로 어떤 사물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상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베르그송은 이 말을 자신의 현상학적 용어로 개념화한다. 베그르송의 이마주는 표상과 실재의 중간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2. 명제적 표상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식표상을 가리킨다. 즉 주체, 대상, 시간 등이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나는 추상도가 높은 표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토 쪽은 시간상 한쪽 공간만을 선택해야 하는 산책길의 두 갈래로 나뉜 각각의 방향을 뜻한다. [본문으로]
  4.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시각’을 뜻한다. 이와 대조되는 말로 크로노스가 있다. 크로노스가 과거에서 미래로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흐르는 기계적인 시간을 뜻한다면, 카이로스는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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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이세이샤(水声社)"에서 출간하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 문헌 목록

다음의 사이트에서 번역해 올립니다.

http://www.suiseisha.net/blog/?p=4803

 

 

《총서 인류학의 전회》

 

일찍이 세계 각지의 이국적인 사물을 기록하고 비교ㆍ분석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문화ㆍ사회 인류학은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흐름과 함께 현저한 변모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인류학의 현대적 양상은 이제까지 일부 전문가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본 총서는 그러한 변화를 주도해온 인류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국내의 지적공백을 메우고 사상철학의 세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는 야심찬 기획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인류학자

 

오늘날 사상, 철학, 예술, 실천의 현장에서 요구되고 있는 지성의 형태는 대범하게 변화하고 있는 인류학자의 ‘다음의 인류학’과 기이한 공명을 이루고 있다. 인류학은 다시금 현대사상의 최전선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 총서는 지금 인류학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태동을 세계 최초로 소개하려고 한다.

 

 

『부분적인 연결』 원제: Partial Connections (2005[1991])

메를린 스트래선 저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류학자 중 한 사람인 스트래선의 이론적 주저이며, 저서로서는 첫 번역. 스트래선은 전통적인 인류학에 대한 (자기)비판을 근거로 ‘우리’와 ‘그들’의 실천의 끝없는 착종 속에서 새로운 민족지적 가능성을 찾아내어 독자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내었다. 논의의 단선적인 흐름을 수많은 주름으로 의도적으로 분단하는 그 실험적인 스타일은 독자들을 때로는 당혹스럽게 만들고 또 때로는 독자들에게 도발한다. 초판 간행에서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사고를 자극하는 기념비적인 책.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영혼』 원제: The Inconstancy of the Indian Soul: The Encounter of Catholics and Cannibals in Sixteenth-century Brazil(2011)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저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를 주도해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대표작으로 저자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논문 중 하나”라고 부르는 화제작. 16세기 브라질 해안가에 거주한 투피남바족은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대하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보여주는 ‘변덕’ 때문에 ....... 이 책은 선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투피남바족의 변덕을 사고함으로써 선교사의 설명을 넘어서서 투피남바족의 사회철학 혹은 <존재론>을 해명해간다.

 

 

『변형하는 신체』 원제: Body Transformations Evolutions And Atavisms In Culture (2005)

알폰소 링기스 저

경쾌하고 색채가 풍부한 인류학 에세이 여행.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정신분석·문화인류학·진화생물학 등 학문의 여러 영역들을 섭렵하면서 우리의 ‘몸’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동물과 인간,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고대사회와 현대사회 등 기존의 분류법을 교묘하게 넘나들면서 현대의 윤리적 행위의 방식까지도 근본적으로 질문한다. 철학적 고찰에 시적인 상상력을 혼합한 링기스의 문체는 독서의 즐거움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일관되게 ‘인류’되기의 질문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모방과 타자성』 원제: Mimesis and Alterity: A Particular History of the Senses (1992)

마이클 터시그(Michael Taussig) 저

타문화와 만날 때 발생하는 화학반응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모방’에 관한 통찰력에 영감을 받아 독자의 방식으로 논한 미국의 인류학자 터시그의 저서이며, 그의 첫 번역물. 무대는 콜롬비아와의 국경을 접한 다리엔. 거기에 거주하는 인디언과 조우한 유럽인은 이윽고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과의 관계로부터 이탈한다. ‘모방과 공명하는 마술’이라고 기술한 터시그는 ‘타자(모방)’에 비치는 ‘모방(타자)’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독자들에게 그 어지러움을 선사한다.

 

 

『발터 벤야민의 묘비』 원제: Walter Benjamin's Grave (2007)

마이클 터시그 저

중남미 지역을 주요 무대로,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혹적인 경험을 그려낸 인류학자 터시그는 그와 동시에 민족지학, 자전적 기술, 문화 비평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현대의 가장 중요한 ‘이동수필가’이기도하다. 비평가 벤야민이 나치독일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을 선택한 스페인의 국경마을을 방문해 경계와 묘지에 대한 사색을 둘러싼 표제작 「발터 벤야민의 묘비」등 총 여덟 편을 수록한 터시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다(多)로서의 신체』 원제: 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dical Practice (2002)

안네마리에 몰(Annemarie Mol) 저

네덜란드 대학병원에서 동맥경화의 진단ㆍ치료를 사례로, 의학, 철학, 인류학 사이를 대담하게 횡단하는 실험적인 민족지. 몰은 민족지과 이론적 고찰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를 병치하는 특이한 구성을 통해 죽상동맥경화증이라는 <하나의> 병이 다양한 행위, 장소, 진료, 치료와의 상호작용 속 에서 본질적으로 복수의 성(性)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논한다. ‘실천적 존재론’의 방향성을 보여줌으로써,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 큰 영향을 준 명저.

 

 

『아트와 에이전시』

알프레드 제리

제리의 유작 『아트와 에이전시』는 우리에게 상식을 버리라고 한다. 예술작품과 우리와의 관계는 예술과 감상자가 아니라 덫과 먹이의 중층적인 상호관계에 있다. 예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그것에 행위주체가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문제로 삼는다. 파푸아뉴기니의 방패에서 뒤샹의 ‘큰 유리’까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하는 예술을 ‘행위주체(에이전시)’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급진적인 이론서.

 

 

『자연과 문화를 넘어』

필리프 데스콜라 저

프랑스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계승자로서 현대인류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가 데스콜라의 저서.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연’과 ‘문화’라는 이원론에 의문을 던지고, 인간과 비인간(동식물)이 지속적으로 맞부딪치는 생태학의 다양한 집합체로서 인간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방법인 ‘자연의 인류학’을 제창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인류학의 영역을 넘어 심신이원론,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사회와 과학기술의 존재양식을 재고하려는 시도이다.

 

 

(2018.08. 보충)

 

『법이 만들어질 때: 근대행정재판의 인류학적 고찰』 원제: La fabrique du droit : une ethnographie du Conseil d'État

브뤼노 라투르 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을 향하여』 원제: Non-lieux : introduction à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é

마르크 오제 저

※ 한국어번역본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2017년 9월 아카넷)

 

『경제인류학: 인간의 경제를 향하여』 원제: Economic anthropology : history, ethnography, critique

크리스 한, 케이스 하트 저

 

『유감세계: 판데믹은 신화인가?』 원제: Un monde grippé

프레데릭 켁 저

 

『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 원제: Écrivains, savants et philosophes font le tour du monde

미셸 세르 저

 

『프레이머 프레임드』 원제: Framer framed

트린, T. 민하 저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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