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 포스트구조주의적 인류학으로의 여정』(원제 Canibal Metaphysics: For a Post-structural Anthropology 2014년 12월 출간)의 일본어판(2015년 10월 출간) 해설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한국에서 지식계는 물론 인류학계에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이론의 흐름을 이끌고 있는 인류학자이다. 다음의 글을 통해서는 당연히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을 전혀 알 수는 없고, 다만 그의 학문적 의의와 계보를 엿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먼저 공부해두어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학문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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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에서 『안티나르시스』로: 『식인의 형이상학』 해설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1970년대까지 현대사상 속에서 인류학은 매우 철학에 가까운 학문이었다. 그 속에는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호론과 구조주의는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발생한 유파이며, 그것은 항상 철학을 포함하는 인문학 전체를 아우를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사반세기,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목소리는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포스트콜로니얼의 이론이 융성했고, 그 속에서 데리다와 스피박의 주장은 여러 방식으로 인류학과 관련된다. 일본 또한 민속학과 고유의 사상사의 발굴이 다방면에서 행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인류학의 ‘이론’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인류학 자신이 이미 탐구할 ‘미개’의 땅을 잃었다는 사정이 있을는지 모른다(브루노 라투르가 ‘과학’ 인류학이라는 장르로 활약하고 있고 최근 우주인류학까지 선언한 것은 그러한 사정을 현저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인류학은 진정 힘을 잃은 것일까? 특히 철학에 대해 혹은 철학이라는 유럽적인 지식세계의 내부에서 저항하는 강한 힘을 잃어버린 것일까? 실은 그렇지 않다.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라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출신의 이 인류학자는 영어권에도 불어권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의 상징인 브라질에서 출현한 이 인류학자의 존재는 다시금 인류학 이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는 레비-스트로스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연결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의 이론적 교착을 이뤄내었다. 그러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은 현대철학에서 아감벤 사상의 유행과 유사한 점이 있다. 벤야민과 푸코와 들뢰즈를 연결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매우 깊은 곳에서 로마적 종교성을 이끌어내었다. 이처럼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영미계의 인류학자인 스트라샌과 와그너, 그리고 프랑스계의 데스콜라와 라투르, 중국사상학자인 프랑소와 줄리안, 들뢰즈&가타리를 너무나도 수월하게 연계하고 횡단한다. 그 속에서 그의 사상의 중핵은 물론 레비-스트로스이며, 나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배경에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있다. 그에 입각한 전개는 대단히 견실하다.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인류학의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본래 일본은 영미권과 독일, 프랑스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는 제3자로서 이탈리아나 브라질과 같은 입장에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거의 누구도 그렇게 한 이는 없다(물론 발신하는 언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게다가 그 이상의 문제로는 그동안 스트라샌이나 데스콜라의, 인류학의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저작마저 일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일본의 인문학자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며 더 이상 따져들 수가 없다. 다만 브라질의 인류학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번역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사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공헌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제 서설은 이 정도로 해두자. 그의 이 책은 모든 점에서 현대철학의 성과를 인류학으로 받아 안고 독자의 개념설정을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극히 야심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좁은 범위에서 이것은 레비-스트로스를 들뢰즈&가타리를 통해 재독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들뢰즈&가타리가 이룬 철학지리학적인 탐구를 그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신이 5장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철학의 포스트모던의 흐름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이론이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부당하게 경시되어왔다는 사정이 있다(이 점은 푸코와 데리다가 일찍부터 사회과학화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조류는 실제로는 들뢰즈&가타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개되어 온, 애초부터 영국의 메를린 스트라샌(『증여의 젠더』)과 미국의 로이 와그너의 주장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라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지적한다. 나아가 프랑스 인류학과의 연관에도 그는 주시한다. 현재 프랑스 인류학은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과 이어지는 속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영향권 하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가 칭찬하면서도 비판하는 필리페 데스콜라(『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주장과 그에 연결되는 인류학의 본류의 논의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세세하게 구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크게)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이론』에 이르기까지의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한 것에 대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인 데스콜라 또한 그러한 것에 대해—그는 데스콜라의 업적에 대해 아낌없이 상찬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등의 이론도 데스콜라와 연관시킨다—, 후기의 레비-스트로스가 들뢰즈&가타리의 특히 『천개의 고원』의 생성과 리좀의 논의와 깊게 중첩된다는 것을 밝혀낸다. 토템적인 조합의 사고가 아닌 혼인=연계(alliance)라는 개념(그와 대립하는 것은 직선적인 계보(filiation)이다)을 강조하며, 생물학적(베르그송)ㆍ인류학적(『신화이론』의 레비-스트로스)인 생성적 리좀성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 후자의 논의를 확장시킨다.

  물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들뢰즈&가타리의 인류학적 기술, 특히 『안티오이디푸스』를 인류학의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행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리좀과 생성이라는 관점이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와 관련하지 않는 영미의 인류학에서도,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이론』을 독해할 때에도, 미래 인류학의 논의를 추진해가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것을 그가 명시한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시도의 중심축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서두에 언급한 『안티나르시스』라는 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본래 그가 쓰고자 했지만 쓰지 못한 책의 제목이며, 바로 이 책이 그 일부로 자리한다.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 신체와 식인이라는 테마도 이 개념으로 수렴된다(당연히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자의 독자적인 패러프레이즈이다).

  안티나르시스라는 개념은 극히 광대한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물론 포르투칼의 구식민지 출신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그는 상층계급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도 불어도 능숙하다), 비서양이라는 입장에서 인류학을 검토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칙으로서 제시된다.

  서양인에게 인류학이란 언제나 ‘타자’의 탐구였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자기에 대한 타자로 설정되며 타자 속에서 다른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이기에 나르시스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것이 탐구의 대상이든지, 서양적인 원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자기가 모든 관점의 중심이다. 인류학의 ‘성립’과 연관해서도 여지없이 그러한 나르시시즘이 중심에 있다.

  그런데 관찰대상이 되는 아마존의 인디오는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자신은 인간이자 문명인이고, 다른 문명권의 서양인이 비인간이다. 인디오는 당연히 서양인을 비인간으로서, 이물로서 관찰한다. 그들 자신의 고유의 기술이 있다. 여기서 인류학적 기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유럽의 관점도 아마존의 관점도 포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퍼스펙티브주의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의 관점—그 자신이 다자연주의의 아이디어를 공급하는—에서 보면, 동물도 관점이 있고 사자(死者)도 관점이 있다. 그는 동물이 인간을 보는 순간에는 동물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안티나르시스는 인간과 자기의 측면을 고정하고 거기에서 타자의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 대신 그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제시한다.

  이는 어떤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서양인에게는 서양인이 보는 관점이 있으며, 인디오에게는 인디오가 보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 실재하고 그게 대해 다양한 문화적 상대성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동물이나 사자(死者)의 문화가 있으며 각각의 관점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되는 자연은 일의적(一意的)인 것으로 규정되고 만다. 나아가 그러한 ‘객체적’인 대상X 등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손님에게 대접하는 맥주는 어떤 동물들에게는 피일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대상으로서 부여되는 것이 인간에게는 맥주이고 어떤 동물에게는 피인가 라고 묻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있는 맥주/피로서의, 그 자신이 다양체인 자연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다양체로서의 자연, 그 속의 잠재성 그 자체를 다자연주의는 긍정한다.

  물론 다양한 해석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자연주의가 해석의 혹은 이문화적(동물의, 사자의) 관점의, 인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을 묻는다면 이렇다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동물에게는 동물이 인간이며, 사자에게는 사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학자는 현지인에게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주장하는 다자연주의는 단순한 다문화주의의 자연화적 비전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다자연주의는 확실의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것은 다른 언어의 번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번역이 배반인 것처럼 어떤 이중의 뒤틀림을 예비하는 변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번역이 본래 배반에 가까운 작용이듯이 생성으로서의 변용도 그렇게 찾아진다. 다자연주의에는 들뢰즈&가타리적인 잠재성의 다양체로서의 자연을 도입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변용이 언제나 일어난다. 우리 자신이 인간/비인간의 이행 그 자체이다.

  신체의 중요성이 언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점이란 본래 신체적인 것이다. 다자연적인 것이란 그 자신이 신체이다. 그것은 라이프니츠, 들뢰즈&가타리에서 마이너철학의 계보를 연결지음과 동시에 아메리카인디오 독자의 세계관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으로 말하면, 토테미즘적인 분류를 넘어 어떤 샤머니즘적인 의례를 거쳐 포식의 인류학(아마존의 식인이라는 존재방식, 즉 신체를 먹는 존재방식은 alliance의 수행에서 중요하다)까지 확장된다. 포식을 통해 우리는 신체를 자신 안으로 거둬들이고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넘어 다양체로 변용하는, 아니 본래 그와 같은 것으로서 존재하는 그곳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러 안티나르시스의 혹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적인 다자연주의의 영역의 광대함이 밝혀진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후기 레비-스트로스와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중첩시킴으로써, 안티나르시스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티나르시스가 안티오이디푸스의 패러프레이즈라는 것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서양적인 문화의 근원에 대한 아메리카인디오적인 자연주의를 도입하고자 하는 의미도 상당히 강하다.

  최근 프랑스사상(아니, 마르크스와 벤야민,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크리프케(Saul Aaron Kripke)까지 고려하면 서양현대사상 그 자체)의 축은 그리스사상 대 유대사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유대를 그리스에 대항하게 하는 것으로서 다루는 ‘타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브라질에서 발언하는 메시지는 오히려 아메리카인디오를 포함한 타자이다. 그리스와도 예루살렘과도 일절 관련하지 않는 ‘타자’. 프랑소와 줄리안이 중국을 다루면서 말하는 ‘밖’을 연상시키는 그것. 다자연주의가 다문화주의를 뒤집은 것이 아닌, 이러한 거대한 대칭축을 포함하면서 그려내는 것으로서. 그렇다면 일본은? 줄리안의 중국과도 다른 일본은? 그에 대한 답은 이제 그가 아닌 우리가 내려야 한다.

  이러한 광대한 인류학적 시도가 지금 이 시대에서, 진정 지구화라는 사태가 진행하는 시대에서 시작되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것이 프랑스 인류학에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들은 제각각 포루투칼어와 영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정은 크다(이 책에서 필자 본인은 브라질 포루투칼어의 번역자의 이름을 들면서 불어판을 오리지날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번역자들에게 말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 영어로 출판된 것과 같이, 글로벌세계에서 메이저언어로 마이너한 지역으로부터의 주장을 발신하는 전략은 앞으로 점차 커질 것이다.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를 읽어나가는 데에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좋든 싫든 들뢰즈&가타리의 사고가 단순한 유행이나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 속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과학에서 그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하는가는 중요한 과제이다. 리좀이든 다양체이든 그 자신으로서는 엄밀한 마이너과학의 개념으로서 읽힐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들뢰즈&가타리의 사고를 레비-스트로스 후기와 접합시킴으로써 그 잠재적인 힘을 원리적인 측면에서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를 수렴하면서 그리스적인 것이 아닌 자연, 즉 아폴론적이지도 디오니소스적인 것도 아닌 자연, 경계의 자연에 그대로 관련하고 있다는 것, 이제까지 유럽사상 일변도였던 ‘철학’이라는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이 책 12장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친구’라는 개념의 유럽성이 비판되며, 아메리카인디오의 ‘적’의 개념이 강하게 밀려나오는 등 이 책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아메리카인디오와 그리스-유대의 자연이라는 광역의 논의를 영역으로 하는 이 책은 반드시 일본어의 비전을 밝혀줄 것이며, 그리하여 일본의 관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환기시켜줄 것이다. 

 

※ '존재론적 전회'를 주제로 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강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cNTdIG-Z_ho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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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정신에서, 네트워크상(狀)의 프시케가 아닌 특이적 프시케로

: 사고의 탈식민화와 Endo-epistemology로의 전회를 위해

콘도 카즈노리(近藤和敬)

 

개요

본고는 사변적 전회 이후의 대륙철학의 동향, 철학과 함께 운동하는 인류학의 근년의 동향, 필자 자신의 과학적 인식론상의 입장의 급진화를 거친 견해로서, 특이적 프시케론(혹은 Endo-epistemology)을 전개한다. 먼저 1절에서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식인의 형이상학』의 사고의 ‘탈식민화’의 곤란함에 대해 논한다. 그 다음의 2절에서는 사고의 ‘탈식민화’의 문제를 서양근대철학사의 문제로서 파악한다. 3절에서는 이 ‘탈식민화’의 하나의 후보 사고양식인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론을 검토하고 그 문제점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4절과 5절에서는 이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론과 구별되는 특이적 프시케론의 거점의 이론을 제시한다.

(※프시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딸의 이름으로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마음, 혼을 의미한다.)

 

1. 인류학과 철학의 교차성: 《사고의》 탈식민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근저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은 한편으로 아마존의 사고에 의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질 들뢰즈의 ‘이단’의 구조주의에 의거한다. 목적도 두 가지이다. [철학이]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인류학이] 철학과는 다른 방식의 개념창조의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에 대해 논한다. ‘식민화’(콜로니얼리즘)란 우선은 대항해시대 이후 근대서양 제국의 산업자본주의체제의 자원수탈의 요청에 의해 서양국가와는 다른 토지에서 행해지는 토지, 신체, 권리, 생산수단에 관한 수탈전반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한해서 ‘탈식민화’는 통속적인 세계사의 서술을 빌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의 민족자결과 독립운동의 융성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적(그리고 경제적인) 독립으로서 근대국가로의 자립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탈식민화라는 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단순하지 않다. 첫째로 현재의 탈식민화 상황이 실제로는 구종주국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선진국과의 경제적 및 심리적 부채관계로 전개되며, 구종주국으로서는 구식민지국의 정치적 독립이 반드시 경제적 주종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탈식민화를 촉진하는 하나의 동인으로 긍정되는 민족자결주의 이념이 항상 인종주의, 내셔널리즘, 다양한 래디컬리즘으로 타락하는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피착취민족의 당파성이 민족주의로 변모하는 것은 항상 그리고 현재 계속해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후술하겠지만, 이와 같은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은 각각 동일성의 지배를 희구하는 것인 한에서 구조적으로 식민주의를 지지하는 사고와 별반 차이가 없으며, 이 점에서 《사고의》 탈식민화에서 극히 중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말하면 근대서양이 지배자이고 그 이외는 피지배자라는 구도가 상기되는데, 이 상정은 역사적 및 정치경제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게다가 《사고의》 탈식민화에서 이 구도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게 읽힌다. 근년의 ‘자발적 종속’ 논의와 푸코의 ‘주체화=예속화’ (subjectiviation) 논의를 상기한다면, 역사적으로 《사고의》 식민화는 식민지에서뿐만 아니라 근대서양의 내부에서도 동시에 수행되어왔다. 18세기에 생겨난 ‘국민국가’라는 제도로서의 장치 혹은 ‘인구’라 불리는 집괴(集塊)의 형성은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근대서양 자신의 《사고의》 식민화의 성과로 간주된다.

필자는 《사고의》 식민화/탈식민화에 대한 논의를 제외하고 식민화/탈식민화를 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며 오히려 위험하기조차 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고의》 식민화의 성립은 겉으로는 정치경제적 식민화의 제도를 없애는 탈식민화로 간주되지만(따라서 탈식민화 운동이 정체한다), 실질적으로는 이전과 동일한 시스템을 오히려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해야만 현재 상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사고의》 식민화가 근본적으로는 산업ㆍ금융자본주의 체제에서 능동적인 아젠다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개체의 정신의 거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논한 것처럼, 그렇게 거세된 정신은 그들의 고유한 의미에서 ‘신경증’의 주체이며, 요컨대 다소간 《제대로 된》 근대적 시민이다. 식민화의 최종형태는 식민지의 인간들이 스스로를 근대적 시민으로 생산/재생산하며 미래의 빚진 돈을 현재에 투기하여 글로벌시장과 자본에 보다 큰 에너지를 비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 이외에 어떠한 미래가 있겠는가? 가난한 농촌에서 생활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지식과 기술을 몸에 익히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의 노동자로서 움직이고, 또 투자를 받아 기업을 일으키고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를 보다 좋게 만드는 것 이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겠는가? 물론 환경ㆍ자원ㆍ인구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해도 그 외의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 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데 말야, 그게 전부가 아냐, 라는 거거든.”

 

우리는 항상 근대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Nous sommes toujours modernes, mais Ce n’est pas tout.

 

이 말은 라투르 저작의 불어제목인 Nous n’avons jamais été moderns(일본어 제목은 『허구의 ‘근대’』, 직역하면 ‘우리는 일찍이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다’)를 연상시킨다. 필자는 이 제목이 표상하는 라투르의 해결책에 강한 위화감을 느낀 기억이 있는데, 여기서 그 문제를 드디어 정식화할 수 있게 되었다. 순수한 서양근대인인 라투르가 ‘대칭성인류학’을 제기하면서 ‘우리는 일찍이 한 번도 근대(인)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러한 라투르에 비하면 아직 ‘현지인’의 자격에 머물고 있는 필자가 철학의 이름으로 ‘우리는 항상 근대인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때야말로 Pas-Tout, Not-Whole의 이론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확실히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근대적 시민으로서 행동하는 쪽이 좋다. 아니, 그쪽이 훨씬 유리하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적 시민이라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니다. 근대적 시민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근대적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함의하지 않는다. 근대적 시민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혁명=절망=광기인가 라는 아이러니컬한 이항대립은 실로 신경증적인 시스템 측의 명법이 혁명자 측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혁명은 ‘우리는 근대적 시민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아니고서는 생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이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문구는 오히려 철학 쪽에서야말로 극히 중요하다. 상대에게 가해왔던 것이 단순한 제국주의가 아니라면, 정치경제적인 착취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것을 고발하는 주체로 간주되어 왔던 근대정신 그 자체이다. 바로 이 때문에 푸코와 들뢰즈가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프랑스의 알제리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문제로 삼은 것은 항상 서양의 전체주의이며 서양의 시스템이며 서양의 근대정신이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은 같은 뜻을 갖지 않을까? 물론 그 동의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알제리 문제에는 고유의 문제군이 담겨 있고 그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철학이 해야 하는 것,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은 그것을 곁눈질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2. 보편적 정신의 형식적 정의

《사고의》 탈식민화는 보편적 정신에 의해 개시된다.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편적 정신’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살펴볼 특징에 의해 이 ‘보편적 정신’이 규정되는데, 일부러 이것을 미리 규정하려는 것은 앞서 다뤘던 모든 ‘근대정신’과의 차이가 의식되기 때문이다. 근대정신이 구체적인 역사와 제도적이고 텍스트적인 실질을 수반하는 구체물인 것에 반해, 여기서 ‘보편적 정신’은 그러한 구체적인 것을 그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모델’로 포함하는 형식적인 (공리론적인) 구조물 혹은 ‘형식적 대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의도된 ‘모델’로서 근대정신을 포함하면서도 그것과 같은 자격에서 인종주의와 내셔널리즘도 포함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정신은 특정한 철학자의 특정한 개념을 가리키지 않는 한편, 그 특징이 해당되는 임의의 철학자의 임의의 (경우에 따라서는 체계의 일부로서만 들어낼 수 있는) 개념에 대해 타당하다.

정의 1. 보편적 정신이란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 인류만이 아니라는 조건에서 성립한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인류란 생물종명(혹은 생물분류명)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항상 그 외연을 확장해온 역사적 개념으로서 ‘인류’이다. (북아메리카의 흑인노예해방을 상기해보라. 혹은 스페인의 중미인디언에 대한 의심도.) 다른 관점에서 말하면, 인류란 보편적 정신을 (공)유한다는 신앙과 그 신앙고백에 의해 지지되는 공동체이다.

정의 2. 보편적 정신이란 그것을 가진 자의 내면에 있지만, 그것을 가진 어떠한 자도 그 자체로서 가질 수 없는 자이며, 그 보편적 정신에 비해 그것을 가진 자는 항상 무엇인가를 결여한 자가 되고 마는, 이른바 이상(理想)적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초자아의 형성과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보편적 정신이란 ‘특정 타입의’ 초자아와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며 권리상의 초자아 일반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 의미에서 보편적 정신을 갖는다는 신앙에 의해 지지되는 공동체로서의 인류는 프로이트가 말한 것과 같이 (징벌하는 아버지를 인간 외부에 설정하는) 원시종교의 끊임없는 세속화 운동 그 자체에 의해 유지된다. 요컨대 보편적 정신이란 내면화된 초월신 종교로서의 도덕법칙이다.

정의2에 의해 보편적 정신은 각 개별적 정신에 대해 ‘모델/복사본 관계’(들뢰즈 2007:190)를 가질 수 있다. 즉 보편적 정신을 내면화하는 각 개별적 정신은 보편적 정신을 ‘모델’로 하는 ‘복사본’이다. ‘모델/복사본 관계’는 다음의 그림 1로 표현된다.

그림 1. ‘모델/복사본 관계’ 

 

그림 1에서 하나의 복사본에는 하나의 개별적 정신이 대입되지만, 그것과 ‘모델’을 매개하는 ‘유사성’의 관계로 연결되는 또 다른 복사본에는 동일한 개별적 정신의 다른 시간의 자(者)(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외에 (정의 1에 의한) 동일한 인류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타인이 대입된다. 이 그림을 사유하는 한, 타인의 얼굴에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가 보이는 것은 그 얼굴(보이는 것)에 도덕법칙의 보편적 정신(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그것을 보는 자가 보편적 정신의 복사본이기 때문이다. 즉 너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보편적 정신)을 본다는 것이다(인류에 대한 사랑과 신앙).

유사성의 정도를 확인해보면, 그림 1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데아적인 도식에 기초하여 교사론(敎師論)에서 논한 것과 같이 (따라서 그것은 교회제도의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유사성의 (혹은 분유의) 정도에 따라 쉽게 계급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다음의 그림 2이다.

그림 2. --다(多)에 의한 복사본의 계층질서 

 

각 복사본은 이 계층질서에 따라 무수한 운동을 조직한다. 학교교육에서 개발도상국의 근대화, 그리고 이른바 ‘글로벌리제이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방향적인 시간변화는 이 도식에 기초한다. 그 자들이 모두 향하는 것은 일자(一者)=선이며, 저항해야 하는 것은 유사성의 결여의 카오스=악이다. 그래서 이 계층질서가 작동하는 시스템에 항의하는 자와 이 시스템으로 전이(轉移)된 자는 이 질서의 흥과 망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가질 수 없으며, 그 결과로서 악=카오스를 구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카오스야말로 바뀌어야 할 새로운 선이며 최후의 의거이다.

보편적 정신은 이상과 같이 ‘유사성’의 정도에 기초하여 《복수의》 ‘전체’를 구성한다. 근대정신은 이와 같은 ‘전체’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면 탈식민화란 그 근대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이미 서술했듯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 또한 그것이 파시즘이든 인종주의이든 내셔널리즘이든 래디컬리즘이든 근대정신과 다른 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전체’와 그것과는 또 다른 ‘전체’는 한편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어느 쪽이 진짜 ‘전체’인가를 둘러싸고 복권을 놓고 싸우게 된다. (그것이 아니라면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다). 실로 이는 탈취해야 하는 ‘전체’라는 ‘모델’에 대한 ‘복사본’의 위치를 지정해준다. 그리고 그것들의 각 ‘전체’는 앞서 살펴본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계층질서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그 방식으로는 근대정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해도, 그것과 유사한 다른 모양의 무언가로 회귀하고 만다. 이 의미에서 보편적 정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사고의》 탈식민화란 이상과 같이 정의된 보편적 정신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탈보편적 정신’이다.

 

3. 탈보편적 정신의 하나의 길: 네트워크상의 프시케

그렇지만 탈보편적 정신은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포스트모던의 본래 의미는 ‘거대서사의 종언’이다. ‘거대서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유사성’에 기초한 계층질서에서의 상승운동에 불과한 이상, 포스트모던이라는 시대인식은 보편적 정신의 도식이 그 무엇도 잘해나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동일성’의 철학에서 ‘차이’의 철학으로, 독일관념론에서 프랑스 현대사상으로. 탈보편적 정신은 근대의 종언이라는 테마로 반세기 동안 다양하게 논해져왔다. 소위 ‘현대사상’(즉 그것 자체가 역사적인 산물로서의 ‘현대’ 사상)이란 이 탈보편적 정신의 하나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형화하고 통속화해서 논하고자 한다. 그래서 여기서 포스트모던은 보편적 정신과 마찬가지의 공리론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의 1. 포스트모던은 하나의 전체(‘거대서사’)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모형(‘작은 서사’)을 구하는 미니멀리즘이다. 미세한 차이가 다종다양한 차이를. 거대 도식이 아니라 미묘한 차이를 낳는 디자인을. 거대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한 개성을.

정의 2. 포스트모던은 국소주의이다. 큰 것을 조망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정의 작은 장소를 정밀하게 본다면 전체조차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조차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요구하는 것은 특정하게 운위되는 것들이며, 그 속에서 세세하고 미세한 차이를 축적해간다.

정의 3. 포스트모던은 생명주의라는 의미에서 프시케를 용인한다. 혼(魂)은 세부에 머문다. 세부의 미세한 차이야말로 생성변화의 원인이며, 따라서 그러한 지각조차 되지 않는 미세한 차이야말로 프시케(움직임의 원인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질(實質)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포스트모던을 생각해보면, 그 특징을 다듬어낼 수 있고, 1970년대 이후의 문화론의 대부분은 이것으로 설명 가능하다. 정의 3에 느닷없이 프시케가 등장하는지에 대해 해설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프시케]은 ‘보편적 정신’이라는 전체론적 구조를 부정하는 이상 거의 불가피하다. ‘보편적 정신’을 인식하는 경우에 생명은 이 보편적 정신의 역동성으로 회수된다. 헤겔이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이야말로 ‘생명’이라고 했듯이. 그러나 포스트모던에서는 이 ‘보편적 정신’이 효과를 갖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것이 향하는 방향이나 질서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인간과 동물과 물(物)과의 구별도 아직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움직임’이라는 플라톤의 프시케의 가장 포괄적인 규정(『파이돈』245C-E)에서 프시케는 ‘생명’의 규정과 연결된다. 드디어 인간의 보편적 정신은 운동을 생성변화 혹은 생명의 범형으로 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여러 다양한 생성변화야말로 생명 혹은 프시케의 장이 된다. 즉 생명은 미세한 것, 지각되지 않는 미분적인 것으로 해소된다. 요컨대 포스트모던이란 모나드로지가 승리한 시대이며, 라이프니치의 시대이다. 라투르가 네트워크의 왕자라면(Herman 2009), 라이프니치야말로 네트워크의 제왕이다.

모나드로지의 문제는 인간과 비인간을 대칭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연속성의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든 것은 모나드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모나드에는 창이 없기 때문에) 계층질서를 대신해서 단독의 정점을 가지지 않는 네트워크의 조직화를 촉발할 수 있다. 독립해서 상호 환원불가능한 모나드 동료들 간의 통일된 방향을 갖지 않는 모임이 그 모임의 신뢰도에 따라 허브를 형성해서 네트워크상의 집괴(集塊)를 자기조직화한다. 네트워크의 유니트(액터), 즉 모나드에 사람도 해당된다면 물(物)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와 같이 자기조직화하는 세계에서 리얼리티는 네크워크의 견고함에 의해 담보되며, 언제나 네트워크를 변신, 재조직화하는 것을 통해 재귀적인 리얼리티를 양성해갈 수 있다. 그 모습은 일정의 목적과 방향만으로 리얼리티를 감지하는 (어떤 의미에서 극히 남성적인) 보편적 정신에 의한 (기계론적인) 조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복잡계, 오토포이에이션, 창발주의.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대상지향형존재론도 매우 난폭하긴 하지만, 이러한 사고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여기서 논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틀어박힌 대상 내적인 일차성질(모나드 내의 무제한의 벽 혹은 감각질)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내에서만 네트워크가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가능성, 즉 네트워크 자체가 생성변화할 가능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마니그리어(Patrice Maniglier)가 지적한 것처럼 하만과 라투르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라투르가 수용되었다고 한다면 그 배경에는 조금이라도 위와 같은 사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에서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는 정말로 ‘탈보편적 정신’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모나드 혹은 부분 속에 은폐된 전체에 있다. 

네트워크에서 주체가 아닌 대상을 문제로 삼을 때, [주체에서 대상으로의] 전환은 보편적 정신의 구도에서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로의 전환이다. 보편적 정신의 구도에서 말하는 주체란 그 구도의 계층질서에서 운동하는 자이며, 어떤 종류의 부채=원죄(혹은 목적)에 따라 운동하는 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자유의지란 칸트가 말한 것처럼 주어진 목적을 스스로의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상이 문제시될 때에는 이윽고 대상은 그러한 하나의 방향(목적, 부채, 원죄)으로 구성되는 ‘전체’를 전제로 하지 않고 (원죄=부채=목적으로부터) 《자유롭게》 (원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코제브는 그것을 ‘동물(과 다르지 않는)’이라고 말했다) 그 본성에 따라 운동하는 부분으로 사유된다. 부분의 자유로운 운동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 질서(네트워크)를 창발한다. 다만 그 질서는 부분에 대해 그것을 결여한 전체로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의 자유로운 운동의 결과로 산출되며, 그 운동을 제어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카카오상의 네트워크가 그러한데, 바로 부분(액터)의 자유로운 운동에서 네트워크라는 고차원의 질서가 자기조직화된다. 질서가 있고 운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부분(액터)은 결코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며 전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도 아니다. 또 전체를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존재에 앞서는 전체를 논리적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분을 초월한 것(‘모델/복사본 관계’의 의미에서 ‘모델’)으로서의 《하나의》 전체와는 다른 ‘전체’가 각 부분의 자유 및 주체적인 운동 속에 숨어 있다. 즉 그 부분을 부분이게 하면서 자족하게 하는 것인데, 그 《다수의》 부분의 ‘전체’가, 즉 그 부분의 본성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무한개의 성질의 다발이라는 ‘전체’가 그 부분에 숨어있다. 이 성질은 다른 액터와의 이항 이상의 관계에 의해 현실화하는 관계적 성질(예: 어떤 물체는 가시광선을 쐬면 적색 이외의 파장을 흡수하는 성질을 갖는다. 즉 인간이 그것을 보면 붉게 보인다는 성질을 갖는다)과 그 자체만으로 현실화하는 고유성질 혹은 일차 성질(예: 만일 그러한 성질이 있다면, 예를 들어 어떤 것이 있을 때에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성질, 혹은 나만이 갖는 나의 아픔이라는 성질)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의 성질이 실제로 열거되는 것도, 현실화되는 것도, 인식되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해당 부분에서 권리상으로 그것들이 《하나의》 다발을 이룬다는 것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들이 다발을 이루지 않는다면 해당 부분은 실로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른 동일성 하에서 다발을 형성한다. (결국 그것들이 단지 《하나의》 다발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발 자체가 항상 요청되는 이상, 《복수의》 다발의 형성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다시금 예측불가능하며, 또 그 다발 속에서 모듈과 같은 것을 가질 수 없다. 즉 단순하게 말하면, 인격(단지 성격만이 아니라 신체적인 능력도 포함해서)이 복수화하고 그것들 사이의 상호교류는 (그것들이 공시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의 미디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질이 다발(즉 무언가의 통일성)을 성립한다는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이 부정이 다음 절에서 논의된다.) 그 경우, 그 부분이 갖는 제 성질은 모두 항상 그것과 접속하는 다른 부분과의 그때마다의 관계에 의해서《만》 현실화된다. 바꿔 말하면, 그 부분이 어떤 성질을 갖는가는 그 부분이 다른 부분과 실제로 관계를 갖기 전까지는 누구도(신조차도) 알 수 없다. 그 부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 부분이 어떤 다른 부분과 관계를 갖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무엇이 가짜인가 혹은 오히려 무엇이 실제인가는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갖기 전까지 본질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 부분은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자유의지에 따라 그 부분이 갖는 본성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능력》으로서, 바꿔 말하면 ‘가능성’으로서 담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로부터 자유의지의 힘에 의해 ‘실제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가능성과 현실성의 균열에 거한다. 자신이 그러할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을, 그렇게 하고 싶거나 하고 싶지 않다는 것에 의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을 자유의지에 따른 주체적인 행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포스트모던에서 탈보편적 정신의 요청이란 실제로 금용자본제체의 세련된 (산업자본체제에서의 노동자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 및 경제적인 주체적 액터의 형성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포스트모던에 의한 탈보편적 정신은 실제로도 그렇게 말해지듯이 주요한 노동형태의 변화, 2차산업에서 3차산업로의 (산업자본체제에서 금융자본체제로의) 이행에 대응하는 노동형태의 변화에 호응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것은 주체를 보편적 정신의 목적성이라는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특정한 초월적 목적 없이 게임으로서, 유희로서, 흥미로서 능력의 자유로운 발휘를 향유한다. 나도, 유전자도, 동물도, 소립자도, 각각이 각각의 성질의 다발 하에서 특정한 목적 없이 그 보유능력을 발휘하거나 발휘하지 않거나 한다. 당연한 귀결로서 능력의 발로의 옳고 그름 사이의 거리가 벌어짐에 따라서 자유의지가 개재하는 정도도 커진다. 무기적인 물체에서 그것은 최소화되고, 유기적인 생명, 특히 고등한 정신조직을 가진 생물일수록 그 차이도 커진다. 그리고 세계는 그러한 액터들이 구성하는 게임적인 현실성을 직조한다.

보편적 정신이 전체와 부분과의 환원불가능한 거리에 의해 정의된다고 한다면, 네트워크상의 프시케는 하나가 되는 전체를 억압함으로써 각 부분의 내부에, 그 부분 고유의 미니 전체(라투르의 표현대로라면 ‘미니초월’)로서 그것을 회귀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부분과 전체의 거리가 제로가 됨으로써, 각 부분 간의 미세한 차이가 결코 없어지지 않음으로써 정의될 수 있다.

 

4. 탈보편적 정신의 또 하나의 길: 특이적 프시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갖는다(동물도 신체를 갖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갖는다(동물과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갖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하는 것을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에서는 타자의 혼과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갖는다는 것을 의심한다(2015:35).

‘만약 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면’(같은 책: 69)에서 이 ‘만약’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자신의 저서에서 진지하게 다루는데, 이것이 앞 절에서 살펴본 의미와는 다른 의미인가 라는 것이 여기서의 본질적 문제이다. 카스트로에 대한 비판의 상당부분은 그의 설정이 앞 절에서 본 것과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심증에서 비롯된다. 이 ‘만약’은 예를 들어, 플라톤 연구자인 후지사와(藤沢)에 의해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과학이 우주의 물리적인 위상에 대해 새롭게 파헤친 지각은 『우주의 프시케』의 사상과 상호보완적이기는 커녕 동일한 사태의 다른 말—‘물’ 언어와 비‘물’ 언어—에 의한 기술일 가능성이 크다”(2014:13).

형이상학에서 ‘존재’로서의 ‘존재’를 묻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해도(Maniglier 2014), 혹은 정통한 ‘형이상학’이 결국은 그러한 것일뿐이라고 해도(安藤 1965), 그 이외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면,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철학사적인 경위를 보면 (플라톤으로 거슬러 가면) 프시케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면, 그것이 앞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라이프니츠풍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아닌지(후에 보는 것처럼 스피노자풍의 것인지)라는 것은 반드시 물어야 할 문제이다.

문제는 역시 Pas-Tout를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얼핏 보면 스피노자야말로 전체주의의 철학자처럼 비춰지지만(바디우 1988:129-136), 실은 그 반대로 스피노자야말로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들뢰즈가 그것을 어디까지 철저하게 파헤쳤는가는 별도로 하고), Pas-Tout의 철학, Endo의 철학의 첨단까지 밀어붙인 모험자이다. 스피노자는 오히려 전체라는 것을 만남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내버림으로써 부분만의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에티카』「제1부 신에 대해」에서 ‘영속ㆍ무한의 실유(實有)’인 신=자연의 개념의 정의를 도출한다. 『에티카』전체의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 부분만을 읽으면 얼핏 모형적인 신 개념을 자의적으로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즉 ‘존재의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라는 명제에 등장하는 ‘모든 것’에 관해, 스피노자는 ‘전체’=‘신’으로 인식한다고 읽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2부 이후 정의된 우리 인간의 정신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부에서 정의된 유한양태인 이상, 연장 속성에서도 사유 속성에서도 어느 쪽이든 그 변상(變狀)의 원인을 결여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도 ‘전체’를 인식할 수도 지각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라는 명제를 우리 인간 정신만이 가능한 인식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그것은 검증한다거나 경험한다거나 하는 것이 가능한 명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어떤 개념적 설정(공리적인 정의)에서 필연적으로 인도되는 특정의 개념적 설정이다. 이 자체는 그 이상의 방식에서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검증 가능한 것은 이 개념적 설정에서 2부 이후로 이끌리는 인간에 대한 제 정리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끌기 위한 개념적 설정 그 자체의 진위를 검증할 수 없다. 다만 오로지 그 설정에 의해 검증 가능한 사태에 관한 타당한 추론을 검증하는 것, 그 이상의 정당성은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이 의미에서 『에티카』1부는 순수한 형이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1부는 공통개념에 의한 2종인식이다). 그리고 1부에서 관심은 ‘전체’인데, 이 ‘전체’의 후보자는 그 자신이 가진다고 상상된 ‘전체성’이 부정되어 가고, 하나인 전체만이 ‘무한(정)’으로 간주된다.

무엇보다 전체의 후보는 ‘본질’인데, 이것을 표현하는 속성은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무한의 양태를 포함함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다른 속성이 무수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 둘의 속성(사유와 연장)밖에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 무수한 속성을 무한하게 포함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한 실체로서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서 실체로서의 신에 포함되는데, 바꿔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가령 그것이 인식된다 해도 신=자연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로 이 의미에서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유’는 이 ‘신=자연’만으로 인식되어 그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즉 모나드로 인식되는 ‘자유’가 박탈된다. 무한하게 넓어지는 광대한 우주 전체조차 간접무한양태에 불과하다. 가령 속성 그 자체에까지 거슬러 간다 해도, 그 속성이 모든 것은 아니다. 끝까지 말한다 해도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일 수 있는 개념적 설정이야말로 ‘영속ㆍ무한의 실유’인 ‘신=자연’의 정의인 것이다. 목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사유에 목적을 떨구어 놓으면 목적 그 자체는 불가능한 것(기껏해야 우리의 불가피한 오진 혹은 상상물)이 된다. ‘일반적인 것’의 규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스피노자가 ‘신=자연’이라는 전체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개념설정에 의해 정말로 철저한 방식으로 (부정신학과 같이 중도포기하지 않고) ‘전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파기한다. 우리 양태는 이 개념설정을 취하는 이상, 절대적으로 어떠한 ‘전체’와도 만날 수 없으며 인식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모든 전체와의 만남, 혹은 인식은 원인의 결여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는 오진이며 우리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물체라는 양태의 ‘합일’에 의해 구성되고, ‘개체는 정도의 차가 있지만 혼(animata)를 가진다’. “왜냐하면 모든 물에 관해서, 필연적으로 신 안에 관념이 있고, 그 관념은 인간신체의 관념과 동일한 신을 원인으로 하며, 따라서 우리가 인간신체의 관념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모든 물(物)의 관념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같은 책). 그리고 그 개체의 혼=프시케는 인간정신이 인간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개체를 대상으로 한다. 즉 “모든 동물과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 높은 인간이며 잠재적인 인간이다”(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2015:69). 그러나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간’ 개념은 바로 ‘혼’으로 용해된다. 그것은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개체에 조응하여 달라지는 것(다자연주의)이어야 한다.

스피노자의 부분(양태 혹은 오히려 개체)은 어떤 의미로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적인 ‘전체’를 가지는 것도,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개체에는 어떤 의미로도 자유의지도, 욕구능력도 인식되지 못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각 부분이 서로 같은 전체를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슷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필연 속에서 성립된다고 간주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 프시케=animata는 특이적일까?

이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인’ 사랑은 정신이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수반하면서 자기 자신을 관상(觀想)하는 움직임이다. 바꿔 말하면, 이 사랑은 인간정신이 설명하는 한에서 신이 자기의 관념을 수반하며 자기 자신을 관상하는 움직임이다. 따라서 정신의 이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의 사랑의 일부분이다. (V, 36 증명)

이 귀결로서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 인간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의 정신의 지적인 사랑은 같다. (V, 36계)

내재적인 (endo적인) 자기 안에서의 영원한 인식 가능성, 스피노자는 이것을 ‘제3종인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과의 일치는 전체와의 만남이 아니라, 특이적 및 영속적(즉 now here=no where이다) 부분과의 만남이다. 신의 일부로서 신이 개물(個物)인 나를 보는 것, 내가 신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 일치한다. 바로 ‘논증의 익명적 주체가 우리와 자기동일화해간다. 자기와 살고 있는, 그러나 표상도 재인(再認)도 없는 만남이다’(上野 1999:158). ‘우리의 정신의 눈이 검증 그 자체’(같은 책: 159)가 되어 검증하는 영원 안에서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신=자연과 양태 간의 양의성, 결정불가능한 반복가능성, 이 내재성이야말로 ‘endo’의 의미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특이적 프시케이다.

 

5. Endo-epistemology로

마지막으로 에피스테몰로지와의 관계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상의 논의는 거의 그 자체로 20세기 과학 및 과학에 대한 철학의 다양한 논의의 하나의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그 속에서] 보편적 정신에 대응하는 것은 과학적 정신=과학적 방법이라는 정식에 기초하여 (그러나 각각에서 무엇을 과학적 정신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이하다) 그 ‘복사본’인 개개의 과학자의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전적인 과학철학이 있다. 이것을 과학의 사회학의 ‘external approach’와 비교하면 ‘internal approach’로 부를 수 있다. 이에 따라 external과 internal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external이 근대사회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을 기초로 할 때에 보편적 정신의 대응물을 과학적 방법으로서 뒤르켐적인 집단적 정신 혹은 초-정신성에서 구하는 것을 보면 그것 또한 보편적 정신의 구조인 것 자체는 변함이 없다.

프시케상의 혼에 대응하는 것은 각각의 계보에 따라 다양하다.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 이후의 자연주의, 파이어아벤트(Paul Karl Feyerabend, 1924~1994)의 방법 없는 과학이 이른바 정통파 과학철학 내에서 이에 대응하고, 프랑스계에서는 푸코 이후의 계보학적 권력분석이 대응하며, external에서는 앞서 본 사회과학의 근대성을 비판하는 라투르 이후의 과학기술인류학이 대응한다.

그렇다면 특이적 혼에 대응하는 Endo-epistemology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그 모든 것을 논하기에는 남은 지면이 얼마 없으므로 특징만을 간단하게 서술하겠다.

1. 모든 것은 부분이며, 모든 것은 부분에 (그것이 개물(個物)이라면) 정도의 차가 있지만 혼이 인식되는 것이므로, 인간과 자연의 사물 (혹은 문화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하는 어떠한 이유도 없는 양태(부분)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완전히 동등하다.

2. 모든 것의 특이적 프시케는 지와 의식뿐만 아니라 무지와 예속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오히려 스스로와 유사하지 않은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바로 무지가 주제=질문화 될 수 있다. 특이적 프시케에서 의심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전제 없는 귀결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의심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다른 특이한 타자(1의 특징에 의해 인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와의 만남이다.

3. (수학과 논리학을 포함하여) 자연과학의 타당한 인식은 특이한 타자와의 만남 후에 형성되는 공통개념의 제2종 인식으로 간주된다. 그것이 타당한 한에서 그 인식은 진정한 관념을 이룬다. 이에 따라 그것은 신 가운데 있는 것이며, 개개의 관념인 한해서 신을 원인으로 한다. 즉 그 타당한 인식(재인(再忍)이 아니라 인식, 즉 관념의 형성) 자체 또한 자연=신의 산물이며, 양태가 되는 한에서 자연=신의 움직임 그 자체이다.

4. 3에서 논한 것과 같은 과학적 인식(타당한 개념 혹은 진정한 관념)을 실제로 과학자가 형성할 때에 3과 같은 자기인식을 반드시 수반할 필요는 없다. (이제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과학자라는 개체는 다양하고 특이한 다른 프시케와 함께 움직이며 무엇을 이루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

5. 개개의 과학의 개개의 관념과 판단(긍정 및 부정) 그 자체는 신=자연의 산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 자체의 인식은 특이적인 프시케의 반사적(내재적, 양의석) 비틀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6. 진리(혹은 진정한 관념)는 신=자연의 양태화하는 논증(긍정 및 부정의 판단)이 구성되는 개개의 그 장소뿐이며, 그 이외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발견해야 하는 진리도, 진리의 특권적인 범형(진리 외부에 있는 진리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조건 항목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Endo-episemology를 실제의 과학적 발견(즉 개개의 관념과 판단의 산출)의 장소나 역학계와 같은 어느 정도 체계화된 이론에 대해 실제의 사례 연구로 보여주는 것. 또 하나는 위의 조건 항목의 3을 필요로 하는 과학의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는 것.

이상과 같이, Endo-epistemology의 시도는 과학에 관한 철학의 기술적인 논의이며,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탈보편적 정신의 실천이며, 따라서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운동’의 하나로 변모한다. 여기서 철학은 인류학의 이념과 불가분한 지점에 다다른다.

 

近藤和敬「普遍的精神から、ネットワーク状のプシューケーでなく、特異的プシューケーへ:思考の脱植民地化とEndo-epistemologyへの転回のために」『現代思想』2016年3月臨時増刊号。

 

※ 몇몇 군데의 중대한 오역을 바로 잡았습니다.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과학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요즘, '애니미즘'을 불러오는 '존재론적 전회'가 인문학계의 전위적인 이론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 '전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속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2016. 2. 27)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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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6년 1월호에 실린 아즈마 히로키의 2쪽짜리 글을 번역해올려둔다. 한때 일본의 포스트모던을 대표하는 비평가이자 인문학자였더랬는데.. 포스트모던의 기운이 다한 것처럼 그도 그렇게 보인다.   

 

 

인문학과 반복불가능성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인문학의 현재적 의의에 대한 주제로 원고 의뢰를 받았다. 평소 관심이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집필을 수락했지만, 필자의 문제의식이 본지의 독자들과 겹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연구자가 아니고 어느 대학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2015년에는 ‘문학부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부각되었던 해였는데, 필자로서는 사태의 본질이 대학교원의 고용문제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인문학은 반드시 대학에 소속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본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필자는 그것을 반복불가능한 역사를 파악하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자연과학은 반복가능한 사상을 다루는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반복불가능하게 보이는 현상을 반복 가능한 틀로 포착하는 그것이야말로 자연과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윈주의는 역사를 파악하지 않았는가 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요시가와 히로마(吉川浩満)의 『理不尽な進化: 遺伝子と運のあいだ』[불합리한 진화: 유전자와 운 사이](朝日出版社, 2014/10/25)에서 지적한 대로, 진화론이야말로 그 반복가능성과 반복불가능성의 모순을 양쪽으로 가르는 학문이며, 그에 따라 자연과학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었다.

인문학자는 ‘이 역사’를 단 한 번의 기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인문학자는 우연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역사의 세세한 부분까지 중시해야 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에 비해 자연과학자는 ‘이 역사’를 무한의 반복 속에서 하나의 사례, 통계 속에서 하나의 샘플로 해석한다. 그들에게 본질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계산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우연의 사건은 ‘노이즈’로 배제될 수밖에 없고, 교과서는 새로울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제도와 관습의 차이는 기본적으로는 이 차이로 귀결된다.

이와 같이 정리하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느 쪽이 올바른가,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가 라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보편을 인식할 수 있지만, 실존으로서는 단지 한번밖에 살 수 없다. 인류는 보편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인식은 하나의 역사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립’은 이와 같은 인간의 실존 구조 그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학제적으로’ 운위된다고 해서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문학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만으로 살 수 없다. 본래 자연과학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다. 반복 가능한 사상(事象)을 다루는 자연과학과, 그것 자체가 반복 불가능한 ‘유럽 근대’의 산물이라는 모순 앞에서 일찍이 후설은 『유럽의 제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고, 또 데리다도 그 책의 부록해설논문에서 『기하학의 기원 서설』로 주제화했다.

그렇다면, 다시금 의뢰받은 주제로 되돌아와서,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단 한번 ‘이 역사’ 속에서 문화를 구축하는 한에서, 자연과학이 발달하여 세계의 물리적 제도력을 증강시킨다 해도 인문학의 전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아니게 되고 의식이 정보가 되고 기억이 복제가능하게 되고 ‘나’의 수가 무한히 증식가능해진다 해도, 그 속에서 ‘이 나’가 있는 한, 문학과 철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인문학의 미래는 보증된다.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인간은 반드시 존재한다. 다만 그 종사자가 앞으로 지금과 같은 노동환경을 향유할 수 있을까, 20세기와 같은 사회적 영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라는 것에 대해서는 보증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뒤집어보면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인문학은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도 거의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다.

 

(東浩紀「人文学と反復不可能性」『現代思想』2016年1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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