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노우치 야스시의 총력전체제』(筑摩書房, 2015)에 실린 나리타 류우이치의 해제를 번역했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다음의 글에서와 같이, 전전-전후를 단절보다는 연속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즉 전시기의 총력전체제가 전후일본의 사회시스템의 기초를 다졌다는 주장이다. 전전-전후를 단절의 관점에서 파악한 '시민사회파'의 주류 속에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일본 바깥의 일본연구자에게 더욱 영향을 끼쳤고, 그들에게 다양한 각도에서 전전-전후를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해왔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총력전체제론에 관한 그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최근 다양한 관점의 '전후일본론'이 제출되는 가운데, 이 책의 내용은 조금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다만 일찍이 전전-전후의 일본의 연속성에 착목한 논의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다음의 해제는 일본 바깥에서 현대일본에 대한 연구사를 개괄해보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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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内靖)와 ‘총력전체제’론에 관하여

나리타 류우이치(成田龍一)

 

0.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시대의 대전환기인 1980년대 후반이다. 그 직접적 계기는 일본의 사회과학이 이때의 시대적 전환을 다룰만한 구상을 구축할 수 없음에 대한 초조함이었을는지 모른다.

 

1.

야마노우치는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의 문하생이었으며 경제사 연구자로 출발하여 전 생애에 걸쳐 사회과학 전반으로 관심영역을 넓혀갔다. 1960년 안보투쟁 때에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고, 1970년대 전반기에는 교원으로서 학생운동과 교류하며 역사적인 전환을 자신의 학문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라는 과제와 격투를 벌였다.

야마노우치는 1960년대 냉전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역사적 분석과 시대상황에 대한 고찰을 왕복하며 일본과 세계의 폭넓은 사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일찍이 그는 사회과학이나 사상의 새로운 흐름에 대처하면서 시대비판적인 새로운 이론을 구축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여 연구대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적 틀을 모색했다.

야마노우치는 각 년대의 무대마다 정면승부의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 일환으로 야마노우치가 번역에 관여한 것을 개관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논의가 얼마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로날드 필립 도어(Ronald Philip Dore)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노사관계의 비교사회학』, 1993년 M. J. 피오리와 C. F. 세블의 『제2산업분수령』, 1997년 메리치의 『현대를 사는 유목민—새로운 공공 공간의 창출을 향하여』, 2006년 데랑티(Gerard Delanty)의 『커뮤니티—글로벌화와 사회이론의 변용』, 2003년 R. 코엔과 P. 케네디의 『글로벌 소시얼러지』 등 그의 관심은 사방에 뻗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물들은 일본의 사회과학이 직면한 과제에 몰두한 결과이며, 야마노우치 자신의 저작과 겹쳐보면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이 걸어온 궤적을 알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중에서도 야마노우치는 스스로 도달한 이론에 안주하지 않고 그 깊이를 더해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제출하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틀을 만들어낸 학자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본서에 실린 총력전체제의 고찰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총력전 시기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제까지 그의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된 테마로서, 그가 50대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산출된 결과이다.

 

2.

우선 야마노우치 야스시에게 1980년대 후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자. 1986년에 간행된 『사회과학의 현재』(미래사)의 맺음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랜 세월 나는 시민사회파의 조류 속에서 특수한 구조성을 짊어진 근대일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시각을 견지해왔고 서구근대사회의 이념화된 상을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근대서구사회 자체의 거대한 구조변화에 눈을 돌림으로써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일본평론사, 1982년)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1970년대의 모색을 정리한 것이며, 그 후 새로운 방향성을 탐색하고자 한 것이 『사회과학의 현재』이다.

그러나 야마노우치는 출간 직후 이 논문집을 절판했으며 다시금 『니체와 베버』(미래사, 1993년)를 저술하는 등 대전환에 이은 모색을 반복해왔다. 이 모색 속에서 사회과학의 탐구와 병행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한다.

이와 별개로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시민사회파의 이론적 맹점’을 검토하면서 그 해답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역사적으로 총력전 하에서 전개되었던 ‘사회과학의 변질(패러다임 체인지)’에 착목한다. 그리고 이 양자를 합쳐 총력전체제론을 고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지평 속에서 야마노우치는 ‘1990년대의 나는 이른바 한 꺼풀 벗겨졌다’(「총력전ㆍ글로벌리제이션ㆍ문화의 정치학」『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 체험』(築摩書房, 1999년))라고까지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야마노우치에게 총력전체제는 이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야마노우치는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에게서 사사받았다. 산업혁명(세계자본주의)의 고찰에서 그 지적탐구가 시작되었고, 『영국산업혁명의 사적분석』(青木書店, 1966)이 이때의 성과물이다.

야마노우치는 계속해서 마르크스의 세계사 인식을 고찰하여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미래사, 1969년)을 집필한다. 그는 전후의 사회과학을 압도했던 마르크스의 이론, 그 전후적 해석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저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복선형의 역사발전단계론의 융성 등 당시 ‘발전도상국’에 대한 고양된 관심에 조응하여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으로 전개된 다양한 논의에 대한 야마노우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오츠카사학(大塚史學)의 멤버이자 요절한 아카바네 히로시(赤羽裕)의 『저개발경제분석서설』(岩波書店, 1971년)에 대해서도 그는 크게 공감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야마노우치의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은 ‘시민사회파’의 마르크스 이해와 더불어 그에 공진하여 상호보완관계를 형성한 ‘전후역사파’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이다.

전후사회-전후사상의 핵심인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파’. 그 성과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그 이론적 틀을 검토하는 것이 야마노우치의 출발점이었다.

그 후,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대한 고찰로 돌아서서 1976년부터 78년에 걸쳐, ‘초기 마르크스와 시민사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마르크스의 『경제학ㆍ철학초고』를 검토한 논고를 연재해나갔다(『현대사상』1976년 8월~78년 1월). 이 논고는 소외론에 착목하여, 후기 마르크스를 규준으로 삼았던 철학자 히로마츠 와타루(廣松渉)와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이 작업은 후에 『수고자(受苦者)의 시선』(青木社, 2004년)으로 출간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도 이 흐름 속에 있다. 이 책에는 ‘소외론의 재구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마르크스의 후기사상에는 사라진 ‘포이에르바하의 모멘트’에 관심을 돌렸다.

나아가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베버의 주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논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착목하여 베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오오츠카 히사오로 대표되는) 이제까지의 베버 해석을 비판하고 파슨즈와 시스템론을 검토했다. (마르크스와 베버라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이론적 지주(支柱)에 대한 야마노우치만의 검토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이때 야마노우치가 소외론에 착목한 것은 1970년대를 축으로 하는 세계이해가 소외론에 응축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마노우치는 ‘마르크스의 체계적 이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의 전용(全容)을 밟아가면서 ‘역사적 현실에 마르크스의 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수고자의 시선』)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에 안주하지 않고 이론을 발전시켜왔던 야마노우치의 자세와 상통한다.

1980년대 후반 야마노우치는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 제시한 이론적 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다시금 니체로 향한다. 『사회과학의 현재』와 『니체와 베버』는 니체를 축으로 사회과학을 재검토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것은 ‘니체의 논리에 의한 니체 비판’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총력전체제론은 이 시기의 야마노우치에 의해 선택된 주제에 다름 아니다. 총력전체제와 니체에의 착목은 자본주의 분석을 축으로 근대사회를 고찰한 야마노우치의 관심과 고찰의 대전환이었다. ‘근대비판’과 ‘현대사회’에 대한 고찰의 개시였다.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전환기였다. 1989년 전후를 반환점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붕괴, 이미 진행된 새로운 지(知)로서 ‘현대사상’의 활황, 그리고 일본경제의 난숙기로서 버블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 사태를 야마노우치는 (근대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전환으로 보았으며 그 기점을 총력전체제에서 구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궤적이 1980년대 후반의 야마노우치에 담겨있다. 총력전체제론은 야마노우치 스스로가 자신의 사고를 나선형으로 단련하고 그로부터 쌓아올린 사고를 해체하면서 재조립한 그의 작업의 일부이다.

 

3.

총력전체제론은 「전시동원체제의 비교사적 고찰—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세계』1988년 4월, 본서 제2장)에서 처음으로 제창되었으며, 『총력전과 현대화』(1995년)가 그 체계적인 저서가 되었다. 『세계』논문이 『총력전과 현대화』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15년간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에 집중했다.

총력전체제론은 이제까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파악한 전쟁(제2차 세계대전-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을 ‘총력전’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총력전’에 대한 세계상의 재해석, 역사인식의 전화, 역사분석의 방법적 검토를 행하고 그 현재적 위상을 새롭게 측정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을 프로젝트로 기획하고 수많은 국내ㆍ국외 연구자를 끌어들여 공동연구로 조직한 다음 그 연구 성과를 『총력전과 현대화』로 제출했다. 야마노우치는 권두에 「방법적 서설—총력전과 시스템 통합」(본서 제3장)을 실었다.

『총력전과 현대화』는 「제1부 총력전과 구조변혁」「제2부 총력전과 사상형성」「제3부 총력전과 사회통합」으로 구성되어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를 주장한다.

“우리들은 국민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기의 총동원제체에 의해 (계급사회로부터) 사회 시스템통합이라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대의 문제성을 다루고자 했다.”(「편집방침에 대하여」)

총력전체제론은 총력전으로 운영되는 전시총동원체제의 형성을 사회적 재편성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현대화’가 진행되어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로 이행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가족-시민사회-국가라는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영역구분이 해체되고 사회는 ‘사회시스템의 전체적 운영’이라는 관점으로 통합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총력전체제 하에서 진행된 시스템 사회화. 여기에서 ‘계급이해의 대립’은 ‘제도적 조정’의 대상이 되어 국가적 공동성을 향해 사회의 통합화가 추진된다. ‘복지국가는 전쟁국가’이며, ‘사회국가적인 복지체제’는 총력전 하에서 ‘하나의 이념’이 되기도 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이러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3중 구조를 갖는다. 즉 ① 이론적 수준에서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를 말한다. ② 역사적 고찰로서 ‘전시동원체제’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총력전체제 과정에서 공ㆍ사의 구별은 모호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국민’으로 파악되고 그 속에서 전쟁수행의 ‘합리화’가 지향된다. 그와 더불어 ③ 총력전체제 하에서 (‘위태로움’과 ‘새로운 수준’을 함께 부둥켜안으며) 사회과학적 지식도 전회하게 된다. 야마노우치는 이 세 수준의 복합을 고찰대상으로 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축하고 그 분석을 행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③의 논점이다. 예를 들어, 오오코우치 가즈오(大河内一男)의 전시 운영을 ‘참가와 동원’—‘전시동원체제의 합리적 설계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것을 결의한다’(「전시기의 유산과 그 양의성」 본서 제5장)—이라는 관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오오코우치는 총력전이 계급관계를 뛰어넘으며 당연히 있어야 할 사회정책을 ‘현실’의 문제로 만드는 환경이라고 인식하고 이 인식에 의거해 ‘큰 방향전환’을 했다 라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근대의 원점’을 성립하는 ‘개인’과 결별하여 (오오코우치는 새롭게) ‘사회적 시스템의 총체’라는 입장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야마노우치가 총력전체제 하에서 ‘국가의 성격’이 변했다는 오오코우치의 인식과 재평가를 지적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전시기 지식인’의 ‘이론적 전향’—‘사회과학은 이제야 사회 운영을 그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기능적 운행의 역할을 짊어진 장치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 본서 제6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인의 ‘전향’[転身] 내지는 ‘전회’(転回)는 예전부터 착목된 바이며, 오오코우치의 경우에도 ‘전향’[転回]으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예외적 사례’로 다뤄져온 것에 반해(石田雄 『일본의 사회과학』 동경대학출판회, 1984년 등), 야마노우치는 이 전향이야말로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논점은 ‘시민사회파’에 의해 이론적ㆍ역사적으로 검토되었다. 오오코우치를 필두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 마루아먀 마사오 등이 주도한 전후 프로젝트는 전시프로젝트의 전후적 이해로 새롭게 위치 지었다. 야마노우치는 (‘시민사회파’의 자기상(自己像)처럼) 전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총력전체제론으로서) 전시에 일어난 것을 발견해내고자 했다.

이렇게 전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사회과학의 변질’로서 ① ‘시민사회파’는 ‘무자각’했다(전시기의 전향이 아닌 전후 전향)고 말하고 그 반전으로서 ② 자신의 작업은 이 지점에 준하면서 ‘시민사회파’를 비판하고자 했다. 따라서 ③ 오오코우치의 주장 및 오오츠카, 마루야마의 이해를 ‘근대로의 회의’(‘근대의 초극’)를 축으로 재구성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의 요지이다.

또 하나, 총력전체제는 전쟁을 ‘전투’에서 분리하여 사회편성-시스템으로 파악한다. 이 속에서 스탈리니즘, 뉴딜, 파시즘이 병치되고, 총체로서 근대가 비판된다. 야마노우치는 현대사를 파시즘과 뉴딜의 ‘대결’로 그려내기 이전에도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로 파악하여, ‘파시즘형’과 ‘뉴딜형’의 차이를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적 편성교체의 분석 속에서 ‘내부의 상위구분’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전시의 평가를 둘러싼 논의임과 동시에 전후에 이뤄지는 전시평가의 기준을 둘러싼 논쟁이며 전후와 현재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야마노우치에게서 전시하의 ‘합리성’에 관한 논의는 저항이 아닌 전시동원의 국면에 있으며, 그 동원으로 대표되는 전시의 ‘합리성’이 전후를 만들어내었다는 인식에 있다. 이 관점에 의해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전시-전후의 연속/단절에 머물지 않고 그 단절을 뒷받침한 인식과 방법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를 역사적ㆍ논리적, 전시의 행위ㆍ전후의 해석 등 이중삼중의 복합적인 비판을 논한다. ‘시민사회파’의 평가와 더불어 ‘시민사회파’가 그려낸 역사상, ‘시민사회파’의 역사적 인식이 총력전체제론에 의해 반전된다. ‘시민사회파’가 전시의 저항을 뚫고 전후를 이끌어 전후민주화를 추진했다는 구도와 역사상, 그것을 지지하는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한편, 야마노우치는 전투가 끝나도 총력전하에서의 시스템통합은 계속 진행되어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통합한다는 주장한다. 즉 그는 전시-전후의 단절/연속이라는 담론에 대해 네오연속설을 새롭게 주창한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역사가 절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연속성에 착목했다.

이러한 총력전체제 인식은 이제까지 논의된 일본의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의 맥락에서 일본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본의 ‘특수성’이 전쟁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며, 합리성이라는 ‘보편성’을 전쟁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따라서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총력전을 수행한 ‘근대’에 대한 비판—‘근대비판’(야마노우치는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이며, 이제까지 근대비판으로 간주된 것은 ‘근대화’ 비판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유럽의 근대’를 모델화하는 인식에 기반한다는 비판인 것인데, 야마노우치는 파슨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시민사회가 그 자체의 전향 속에서 시스템사회로 ‘변질’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즉 근대 그 자체의 근거 속에서 ‘전체주의화와 재봉건화’의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도 베버도 ‘유럽의 근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근대가 가진 ‘합리성’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소외를 논했다고 해석한다.

큰 논리-인식의 틀로 제출된 총력전체제론은 따라서 전후의 인식-전후사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그려낸 도면을 지면과 바꾸는 작업이다.

전후비판으로서 총력전체제론은 1940년 체제론(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1940년 체제』 동양경제신보사, 1995년)과의 차이를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노구치는 부제에 ‘안녕 전시경제’라고 하며 현재가 ‘전시경제’로부터의 전환기라고 말한다. 총력전을 이끌었던 전시체제가 전후 일본경제에 크게 기여했으며, ‘일본형경제시스템’이 전시기에 탄생했다는 인식이 그 배후에 존재한다.

야마노우치가 전시와 전후를 관통하는 총력전체제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에 반해 노구치는 40년 체제가 고도경제성장을 실현시켰다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노구치는 그 후 일본경제의 미래의 전개를 열어가기 위한 탈각기로서 90년대를 위치 짓는다. 나아가 노구치는 이 시기를 ‘특수’한 시기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야마노우치와 다르다.

 

4.

야마노우치가 제기한 총력전체제론의 의의와 특징은 1980년대 일본과 세계의 변화양상,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의 변화를 응시하는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축에 있다.

‘일본’에 초점을 맞추면, ‘전후’에서 이륙하여 이제까지 ‘서양’에서 모델을 구한 상황에서 그 반대로 ‘일본’을 모델로 삼는 양상이 발생해왔으며(예를 들어 앞서 로날드 필립 도어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등), 그와 병행하여 포스트모던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세계’에서는 전후의 국제관계를 규정해왔던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냉전체제-전후의 가치를 축으로 삼은 지적작업 그 자체의 역사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양방에 주목한 것이 총력전체제론이다.

그리하여 총력전체제론은 냉전붕괴의 예감 속에서 논의를 전개해간다. 1990년을 전후하여 ‘69년’의 총괄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총력전체제론은 강단파 비판, ‘시민사회파’ 비판, 근대비판이며, 전후사상에 대한 총비판이다.

이것은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이 『총력전과 현대화』『내셔널리티의 탈구축』(1996년)과 한 세트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이요타니 토시오(伊豫谷登士翁), 브레트 드 바리가 편집한 『내셔널리티의 탈구축』은 사카이 나오키의 서론(「내셔널리티와 모(국)어의 정치」)을 비롯해서 「제1부 내셔널리즘과 콜로니얼리즘」「제2부 표상으로서의 내셔널리티」「제3부 내셔널리티의 현재」 등의 10편의 논문을 모아놓았다. 이 저서는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역사에 입각하여 정치, 문학, 사회사상 등의 측면을 관계적으로 다루며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과 현대화』에서 이러한 내셔널리즘-국민국가와 결부하여 전개되어온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사회과학의 학지에 대한 비판적 총괄이기도 하다.

공동연구로 진행된 총력전체제론의 일단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야마노우치의 주창 하에 결집된 이들은 ① 일본에 있는 「일본연구」자 외에 미국의 일본연구자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외에 독일의 일본연구자, 나아가 비교의 관점에서 각지의 독일연구자도 참여했다. 후에는 오스트리아, 중국, 한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 있는 연구자도 참여했다.

이렇듯 ‘국경’을 초월한 광범위한 참여는 ② 전문분야의 경계를 넘어섰다. 즉 야마노우치를 전공하는 경제학ㆍ경제사 외에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사회학에서부터 철학ㆍ사회사상, 문학연구까지 인문학ㆍ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문호를 개방했다. 공동연구로서 총력전체제론은 각각의 ‘학지’를 견지함과 더불어 그 ‘학지’가 가진 제도성, 그에 유래하는 자명성을 새롭게 검토하는 작업이었다.

필연적으로 이 공동연구는 ③ 대학이라는 제도를 넘어선 지적인 공동작업이 되었으며 야마노우치의 주변은 ‘지의 양산박(梁山泊)’과 같았다. 연구회에서는 종종 게스트를 초빙하였으며, 해외의 학자와 심포지엄을 공동개최했다. 매년 연구팀을 조직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각지로 흩어져 논의를 전개했다. 그때 마침 미국의 일본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고, 그 중심에 섰던 코넬대학의 사카이 나오키, 브레트 드 바리(Brett de Bary), 빅터 코쉬만(Julian Victor Koschmann)이 총력전론을 이어받았다.

그 외 캐롤 클러크(콜럼비아대학), 하리 하르트니안(뉴욕대학), 앤드루 고든(하버드대학), 텟사 모리스-스즈키(당시 캘리포니아대학) 등이 일본연구자로 활약하면서 총력전체제론을 전개해나갔다. 또 독일의 독일연구자로서 미하엘 프린츠 등이 참가하여 비교의 축을 복수화했다.

이것은 총력전체제론을 해외로 발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력전과 현대화』 영문판은 1998년 코넬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Total Warand "Modernization", East Asia Program, Cornell University, 1998, Ithaca). ‘일본’을 사례로 하는 고찰에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로 확장해갔다.

인식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보편성, 그에 수반하는 근대비판, 그로부터 도출되는 현대일본론—현대사회로의 시스템에 대한 고찰로 나아갔다.

총력전체제론은 ‘소국민’으로서 전시기를 보낸 야마노우치가 전후사의 서술방식에 제기한 문제의식으로 군인을 아버지로 둔 개인사의 검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을 지지한 것은 ‘현재’의 인식이며, ‘학지’ 비판의 ‘학지’로 삼았던 야마노우치의 강고한 논리였음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5.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전후의 전쟁의식에 대립한 것이다. 아니, 정확이 말하면 전후-근대-강단파의 견해에 준거하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전쟁관에 대한 도전이며 논쟁이다.

따라서 총력전체제론이 제기되었을 때 그 대응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총력전체제론의 이론적 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로서) 역사학계 주류와의 논의이다. 일례로 1996년 5월 『총력전과 현대화』의 합평회가 행해졌다. 그리고 이때의 논의에 기반하여 『연보 일본현대사』「총력전ㆍ파시즘과 현대사」(제3호, 1997년)가 발간되었다.

그 속에서 아카자와 시로우(赤澤史朗)는 합평회에 대해 ‘진실로 근래에 보기 드물게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어’ ‘당초 예정된 종료 시각을 연장했음에도 논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아카자와는 ‘일본근현대사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틀의 인식에 관한 논의의 결실을 맺고자 한다’며 ‘총력전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특집으로 삼은 의도를 말하고 있다. 아카자와를 필두로 집필에 참여한 필자들은 정면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 다른 대응은 (총력전체제론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사회학ㆍ경제학 등의 영역에서이다. 좌담회 「공간ㆍ전쟁ㆍ자본주의」(야마노우치+이와자키 미노루(岩崎稔)+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현대사상』1999년 12월)는 총력전체제론의 의의를 평가하면서 식민지론(외부)이 결여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국분석으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평가로서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내셔널리즘과 젠더』(1998년)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의 「근현대사로의 초대」(『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근현대Ⅰ, 岩波書店, 2014년)을 들 수 있다.

우에노는 야마노우치의 논의를 네오연속설로 평가하는 한편, 시스템사회화에는 의문을 표하며 평가를 보류한다. 우에노의 문제제기는 국민국가론과 총력전론과의 관계에 있다.

한편 요시다 유타카는 근 20년의 근현대일본사 연구의 총괄을 행하는 속에서 ‘국민국가론’ ‘총력전체제론’ ‘메이지시대의 평가’ 그리고 ‘역사학에서 인식론’을 제기하고 총력전체제론이 종래의 파시즘론의 맥락의 논의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근현대사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요시다는 총력전 과정에서 차별의 시정과 사회의 평준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다면 어느 수준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는지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이렇듯 하나의 해석적 틀, 역사적 문제설정—패러다임으로 수용되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현대’라는 ‘시스템사회’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기 때문에, 총력전체제론을 주축으로 한 그의 단독논문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총력전체제론의 주요논문은 『시스템 사회의 현대적 위상』(岩波書店, 1996년)과 『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筑摩書房, 1999년)에 분산되어 있다.

본 논문집은 위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는 논고를 포함하여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6.

총력전체제론 이후 야마노우치의 연구행적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야마노우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글로벌리제이션을 직접적 연구대상으로 삼고 환경문제와 ‘수고적(受苦的) 인간’—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탐구를 계속해나간다.

‘자본주의의 세계중심부의 사회시스템은 총력전체제를 통과함으로써 대항적 이해를 통합할 수 있었다’는 인식 하에서 그는 ‘근대의 생활원리’의 근거뿐만 아니라, 그 혁명성 속에서 ‘소외로 향하는 전도적(轉倒的) 의식의 동인’과 ‘관료제적 합리화로 향하는 형식성의 동기’를 탐구하고자 했다.

1970년대의 변화에 이어 1980년대 말 자본주의 시스템이 또 한 번의 변용을 맞이했을 때 야마노우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총력전 하에서 경험한 첫 번째 변질 이후 글로벌리제이션에 직면하여 두 번째 변질을 경험한다.”

‘거대한 전시동원’—총력전 체제가 만든 사회시스템통합이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의 기반이 되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동원체제가 준비한 국민국가적 통합은 그 군사력과 함께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의 세계시스템의 유산으로 계승되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야마노우치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 불리는 사상(事象)을 해명할 뿐만 아니라 현대라는 시대에서 내셔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을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의 분석적 틀을 되묻고자 했다. 글로벌리제이션 연구를 통해 일본 나아가 ‘서양’ 중심의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대적인 지의 존재양상의 한계를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근대로 불리는 시대의 전환으로서 글로벌리제이션의 역사성을 재고하고자 한 것이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해석을 거쳐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전개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일관된 문제의식이었다.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하나가 총력전체제론이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과제를 재설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여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가 이론적 지주로 삼은 것은 ‘시민사회파 사회과학’—‘모택동적 마르크스주의’—‘베버ㆍ파슨즈ㆍ마르크스’—‘니체와 하이데거’이며, 어느 시기부터 그는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의 이론적 근거를 재해석하여 자신의 이론적 틀을 스스로 허물어갔다. 이 궤적은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 그 자체의 궤적과 중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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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읽기

독서일기 2015. 3. 15. 23:47

문해력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책을 한번 읽어서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모른다. 책을 끝까지 읽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다음, 그 문제의식으로 다시 처음부터 읽은 후에야 책이 이해된다. 어떤 책이든 처음 붙잡을 때에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따라가지 못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게 되어 집중력도 생기지 않는다. 두번째 읽을 때 비로소 집중력있게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첫번째 독서는 두번째 독서를 위한 것이다.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의 『현대일본의 역사』(이산, 2005[2002])는 7,8년전에 읽은 것인데, 어쩌다 책장을 한두장 넘기다 끝까지 다시 읽게 되었다. 분명히 줄이 쳐져 있고 나름 책과의 대화를 시도한 흔적이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연대기적 역사서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연대기적 역사서야말로 연대기적 사실에 밝아야 행간에 감춰진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7,8년 동안 전후 일본의 사상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일본인' 연구를 해온 덕에 이제야 나는 앤드루 고든의 문제의식을 접수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 그렇게 무지해놓고서 제국-식민지의 삶을 연구하겠다고 했으니.. 인터뷰 조사를 하면서 얻어들은 시대상황의 파편들은 어디서부터 파고들어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일례로 1927년 스즈키상사의 파산은 1929년 일본제국에서 일어난 경제공황의 신호탄이었으며 1930년 이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질서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스즈키상사에 입사하여 조선으로 건너간 어느 '일본인', 그 후손의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인데, 스즈키상사의 도산과 1929년의 공항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스즈키상사의 도산으로 인해 타이완을 비롯한 일본제국의 '외지'의 수십군데의 은행들이 연쇄파산하기에 이르렀고 일본제국은 산업부문을 재편하면서 "국가공동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질서를 잡아가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어려웠지" "그때는 살기 괜찮았지"라는 이야기들이 연대기적 역사서의 사건들과 맞아떨어질 때, 특정한 사건에 몰입하면서도 그 무게감을 공정하게 책정하는 '역사'에 놀라움을 느낀다.      

"도쿠가와 시대에서 2001년까지"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에도시대인 1800년 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의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훑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대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일본'이 '서양'과 대립하면서 '서양'을 받아들이며 '아시아'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과 '아시아'가 교착되는 이유는 근대 바로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일본의 근대라는 수수께끼의 풀이과정이다. 그러나 근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풀이과정은 진행중이다. 

 

두번 읽은 또 하나의 책은 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의 『전후 일본의 사상공간』(어문학사, 2010[1998])이다. 어느 시민강좌에서 강연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전후 일본의 사상'에 관한 그 어떤 책보다 이해하기 쉽다. 오사와 마사치가 깊게 이해하고 쉽게 설명하는 '지식인'이기도 하고.

역자해제에서도 밝혔듯이, 오사와 마사치는 순환론적인 역사관으로 전후 일본을 다루고 있다. 즉 1945년 패전을 기점으로 이전의 60년('전전/전간')이 이후의 60년('전후')으로 반복된다는 기본적인 틀을 설정해놓고 있다. 사회시스템의 이론이 순환론적인 역사관과 친화적인 이유는 내가 보기에 시스템 그 자체가 반복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60년을 단위로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예시하며 '전후에 반복되는 전전론'을 전개하고 있고, 그 근저에 '자본주의'라는 사회시스템을 깔아놓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두번 읽은 것은, 오사와 마사치가 이 책에서 6,70년대를 '다이쇼데모크라시'에 빗대어 중심이 없으면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결여된 상태로 분석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오사와 마사치는 이러한 자기부정이, '근대의 초극'이 일본제국을 보편성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기억의 억압과 배제("기억상실")라는 표현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신체는 이탈되고 참된 자아는 형이상학으로 회귀하는 '일본인론', 어째서 '일본인론'은 늘 이렇게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다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의 『国家と犠牲』(NHKBOOKs, 2005)과 『歴史/修正主義』(岩波書店, 2001)를 두번 읽었다. 전자가 후자보다 나중에 나온 책인데, 전자를 먼저 읽었다. 다카하시의 책들을 두번 읽은 이유는 '일본인' 연구의 나의 입장을 좀더 정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테츠야는 일본에서 '전쟁책임론'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歴史/修正主義』는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의 『패전후론』(1997년) 이후 일본에서 전개된 역사수정주의 논쟁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책 말미에는 역사수정주의와 전후일본의 역사관 논쟁에 관한 문헌목록과 더불어 다카하시 본인도 참여한 "일본군위안부"의 법정소송과정이 덧붙여져 있다. 『国家と犠牲』은 역사관 논쟁에서 제출된 몇가지 논점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18,19세기 유럽(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형성된 내셔널리즘에서 시작되어 데리다의 국가론으로 마무리짓는 이 책에서 저자는 과연 '전쟁 없는 국가'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질문한다. 저자 자신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만큼 가능하다'고 답한 것처럼, 역사적 입장이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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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2015년 2월호에 실린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반지성주의와 마주하다'는 부제의 이번 호에서 날로 우익화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글을 번역할까 하다가 신자유주의와 푸코의 논의를 연결짓는 다음의 논의가 조금 더 '지금'의 고민에 맞닿을 수 있겠다 싶었다. 

연구자는 앞선 학자와 그의 이론을 끊임없이 현재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학문을 시대 속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며, 연구자 본인을 사회화하는 방식이다. 다음의 글은 연구자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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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주체는 두렵지 않다: 푸코와 신자유주의, 반지성주의

하코다 테츠(箱田徹, 사회사상사)

 

“경영자를 비롯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활기에 찬 일본의 부활’을 위해 신진대사의 촉진과 이노베이션(innovation)에 맞서는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국가는 이를 서포트함으로써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한다.” -수상관저-

“그러나 우리는 복지국가가 끝났다고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란 정신과병원이기도 하며, 장애자시설이기도 하며, 형무소이기도 하며, 가부장제적이고 식민주의적이고 이성애주의적인 학교이기도 하다.” -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Beatriz Preciado)

“이제 인턴도 누구나 거쳐 가는 과정이 되었다. 주변에 휩쓸려갈 뿐.”

  작년 10월말, 비상근[시간강사]으로 담당했던 ‘글로벌커리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발언한 것에 대해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의견을 말하며 강의실은 열띤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인턴 설명회나 면접 때문에 수업에 나올 수 없다고 연락하거나 수업 도중에 빠지겠다고 하는 등 취업활동의 홍보가 개시된 후 3개월 정도는 취업활동과 수업이 겹치는 것을 기업이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개별 기업의 무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일본사회 전체에서 보면 혜택 받은 환경에서 성장했고, 버블기의 신세대였던 학생들의 깜짝 놀랄 에피소드와 비교해서도 그 조급함과 절실함이 지금에서야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취직한다 해도 결코 평안 무사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유일한 바람은 자신의 현재 능력과 미래의 커리어뿐이다. 그런 생각이 이상할 것 없는 학생들로서는 사람이 노동을 통해 얻는 것은 자금이 아니라 자신의 자본주식에 합당한 소득이라는 인격자본이라는 견해가 설득력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드 홉스테터(Richard Hofstadter, 1916~70, 미국의 정치학자)가 『아메리카의 반지성주의』에서 언급한 인텔리전스(능력)와 인털렉트(지성)의 잘 알려진 대비에 따르면, 사물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지성인이 되기보다 정보수집과 문제해결에 뛰어난 능력자가 되어 스스로의 인격자본 가운데 지금부터라도 가능한 부분을 고도화하는 것이 첩경이다. 이제 국가는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해가며 그에 ‘편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학생은 능력자를 목표로 하는 혹독함과 그럼에도 장래를 보중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는 것 같다. 한편, 격주로 강의에 출석하는 게스트 강사는 비판적인 사고를 단련하고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능력과 지성의 관계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학생과 우리를 둘러싼 상황에야말로 반지성주의적인 움직임을 극복할 어떤 계기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것을 푸코의 아메리카 신자유주의의 통치론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신자유주의자 푸코

  작년 12월말 푸코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던 인터뷰가 있다. 벨기에의 사회학자 다니엘 자모라의 「푸코를 비판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인터뷰가 그것이다. 프랑스어 잡지인 『밸러스트』의 웹사이트에 게재된 시점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다가 아메리카의 좌익잡지 『자코뱅』사이트에 영역되어 게재되면서 화제로 떠올랐다. 12월 11일자 워싱턴포스트지의 웹사이트에서 국제정치학자인 다이엘 드레즈너(Daniel Drezner)가 다루었던 것도 한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푸코가 리버타리안(libertarian 자유방임주의자)의 최고의 친구인 이유」이다. 아카데미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쇠퇴 후 등장한 이가 푸코이며,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런데 자모라에 따르면, 푸코는 좌익이 끊임없이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사상에 호의적이었다. 드레즈너는 자모라의 인터뷰를 길게 인용한 후 보수파에게 혐오하지 말고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있다. 푸코의 저작은 ‘마르크스보다 다루기 쉬우며 경제학적으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푸코의 사상을 베이스로 하는 학자는 구래의 마르크스주의학자보다 훨씬 신자유주의와 친화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드레스너의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지만, 정치적인 좌우를 불문하고 드레즈너와 자모라가 말하는 것과 같이 푸코가 신자유주의에 호의적이었다는 논의는 비록 소수이지만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특히 1978~79년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생명정치의 탄생』은 그 후반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상세하게 언급하면서 주목받았다. 푸코를 좌익아카데미즘의 대명사로 간주하는 사람들이라면, 푸코로부터 하이에크, 프리드만, 베커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논의되었다는 것은 푸코에게 그러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아닐까? 자모라의 비판을 살펴보자.

  자모라는 ‘푸코는 생전에 신자유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상투적인 이미지와 결별하고 싶었다’고 하며, 『생명정치의 탄생』뿐만 아니라 푸코의 생전 인터뷰 등을 보면, 푸코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에 강하게 경도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자유주의 경제사상]에서 자신의 눈으로는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제기하는 좌익세력보다도 규범적이지도 권위적이지도 않는 통치성의 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증으로 드는 것은, 구통일사회당과 내셔널센터의 CFDT(프랑스민주주의노동동맹, 당시 총재는 에드몽 메르(Edmond Maire))라는 68년 5월에도 활약했던 두 세력이 1970년대 중반 사회당으로 합류하여 당 내외에서 ‘제2의 좌익’ 노선을 걸으며 푸코에 근접해갔다는 것이다. 이 세력은 사회당과 공산당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중심형의 사회주의 노선(‘제1좌익’)에 대항하여 ‘자주관리’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푸코는 1981년 이후 CFDT와 폴란드의 ‘연대’지원과 협력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68년 5월’ 이후의 좌익주의 운동과 비판적인 사조의 고양은 70년대 중반 이후 운동의 퇴조와 신철학파의 등장과 함께 변모했으며, 1981년 미테랑 정권이 성립된 이후 좌익의 리버럴화(중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과 푸코의 지적인 변천이 일치한다는 것이 자모라의 주장의 기본구도이다.

  한편,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푸코의 조수이기도 했던 영국의 연구자 콜린 고든은 사회민주주의에 신자유주의적인 전략이 일부 도입되었다는 의미에서 푸코가 블레어(영국의 노동당 출신의 수상)적인 제3의 길을 앞서 제기했다고 말했다. 자모라는 이를 인용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푸코가 좌익 속에서 프리드만파의 텍스트를 처음부터 착실하게 읽어갔다는 것을 평가하면서 푸코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은 당시 프랑스 사회보장제도개혁과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의 마이너스소득세에 대한 관심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보장제도는 사회운동의 세력을 거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국가통제의 수단이었던 복지국가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을 복수의 사상가의 이름을 들어 비판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 자모라는 최초의 인터뷰에 대한 반향을 받아 작성한 텍스트에서, 복지국가가 전환점에 있다는 진단 그 자체는 드문 것이 아닌데 푸코는 복지국가를 넘어서 사회주의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파괴에 적극적으로 공헌했다’고 말한다. 푸코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사회보장제도를 둘러싼 개인의 건강이나 보건에 관한 욕구가 보편적인 형태로 채워질 수 없으며, 건강의 ‘권리’라는 사고방식에 의문을 표하는 한편, 그 욕구의 확장에는 제동장치를 걸 수 없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건강보건을 소비와 선택의 문제로 파악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편승하는 것이며 사회적 자유주의나 제3의 길이라는 현대사민주의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반면 현재의 좌익이 요구하는 것은 사회보장제도나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공평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자모라의 결론이다.

 

  2. 전간기(戰間期)에 등장하는 세 개의 통치성-복지국가, 전체주의국가, 신자유주의국가

  푸코는 서방선진국의 통치의 양태의 변용과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두 개의 논점을 ‘안전성’(security)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하고자 했다. 자모라는 어쩐지 여기서 망설이는 것 같다. 확실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푸코는 특정의 제도적인 틀을 제시하지 않았다. 푸코의 신자유주의론에 대한 불만과 비판, 그리고 의외의 평가의 대부분은 이러한 태도에 기인한다. 푸코가 1970년대 말 복지국가의 현황에 내린 비판을 당시의 이론적 지형에 위치지어보자.

  20세기 후반 유럽에 등장한 국가의 통치의 존재방식은 세 가지라고 푸코는 말한다. 전체주의국가와 복지국가, 그리고 신자유주의국가가 그것이다. 푸코가 말한 ‘전체주의국가’란 19세기 이후 시대를 특징하는 존재로서 정당과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를 가리킨다. 1977년의 통일사회당의 주간신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하게 논의한 ‘전체주의국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한다.

  “국가의 사명이란 전체주의가 되는 것, 즉 모든 것을 적확하게 제어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주의국가라는 것은 정당, 국가장치, 제도에 기초한 시스템, 이데올로기가 하나가 되어 위에서 아래로 균열과 틈새, 일탈이 거의 없이 제어되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겠죠. / 온갖 제어장치가 단 하나의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다양한 이데올로기, 언설, 행위를 하나의 바위덩어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푸코는 이러한 타입의 국가는 과거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체주의는 꽤 오랜 기간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의 어느 타입의 명확한 체제를 가리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부활을 목도하지 않습니다.” 이 인터뷰는 바더마인호프그룹(Baader Meinhof Gruppe, 독일적군파)의 변호사 크라우스 크로와상의 서독일로의 강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행해진 것인데, 그의 전체주의국가에 대한 비판은 이 인터뷰의 논점에서 벗어나 있다는 주장은 ‘파시즘’으로 몰리기 쉬운 의회 밖 좌익의 현상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했기 때문에서이다.

  국가권력이 연속적 및 항상적으로 진화해간다는 인식은 ‘국가혐오’ 즉 국가권력의 비대화에 대해 좌익과 보수파가 다른 형태로 품는 경계심의 하나의 타입이다. 이 감각은 각각의 국가와 제도 혹은 통치성의 종별성(種別性)을 상실시킬 수 있으며 사회보장과 강제수용소를 동일시하는 것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한편, 현상의 종별성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 ‘안전성’이다.

  “국가와 주민 사이의 관계는 현재, 본질적으로는 소위 ‘안전성의 계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략] 일찍이 이 관계는 영토계약으로서, 국경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기능이었습니다. / 오늘날 국경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주민에게 계약으로 제시하는 것은 ‘당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가올 수 있는 모든 사고, 손해,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국가를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위하는 것에서 불확실한 사상(事象)에 대한 안전성의 제공에까지 국가와 주민의 관계는 변화한다. 경계할 수밖에 없는 대상은 국가 밖에 있지 않고 국가의 내측이 있다. 테러리즘이 문제시되는 것은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주민의 안전성(치안)을 의도적으로 혼란시킬 뿐만 아니라 개인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와 개인 사이의 안정의 관계 자체를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통치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통치하는 측과 통치당하는 측의 관계변화로 파악된다. 국가의 주요한 역할은 군비와 대외전쟁을 통해 외국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며 주민의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에서 국내에 개인과 사회에 일어날만한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사회보장(소셜 세큐리티)이 이 두 가지의 통치성을 잇는 열쇠이다. 광의의 사회보장정책을 국가레벨에서 실현하는 복지국가를 떠받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을 연결하는 어떤 종류의 사회계약이며, 베버리지 보고서(Beveridge Report, 1941년 영국에서 창설한 <사회보험 및 관련사업에 관한 각 부처의 연락위원회>의 위원장인 베버리지가 1942년에 제출한 보고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1942년에 제출한 이 보고서는 ‘전쟁계약’으로도 볼 수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그러한 사회계약에서 [제 국가는]—전쟁을 행하는 것, 따라서 살해하러 가는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에 대해—어떤 타입의 경제조직, 사회조직에 의한 다양한 안전성(고용보장, 질병이나 예상치 못한 사태의 보장, 연금보험)을 제공하는 계약이었다. 전쟁이 요청되는 그 때에 보장계약이 행해졌던 것이다.”

  자발적으로 전쟁에서 죽을 가능성을 조건으로 내걸고 그것과 맞바꿔 사회보장의 수급자격을 얻는다는 구도는 ‘총력전체제와 더불어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가 성립했다’는 논의선상에서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푸코가 말하고자 한 것은 전쟁과 통치, 통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다음의 두 지점이 동시에 그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복지국가에 의한 주민의 배제와 포섭(혹은 생명정치)이 그 당시의 전환점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전체주의국가와 복지국가에 대한 반응 혹은 비판으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통치의 존재방식이 나타났다는 것. 이 두 지점에서 우익의 국가혐오를 설명해낼 수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사상이나 정책이념은 케인즈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바꿔 말하면 집산주의와 계획주의라는 의미에서의 국가의 경제개입에 반대하는 입장 하에서 전간기(戰間期)에 형성되었던 제 조류이며, 전후 앵글로색슨형의 신자유주의와 대륙유럽형의 신자유주의로 갈린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フーコーの戦争—<統治する主体の誕生>』(2013年)의 3장 참조) 여기서는 후자의 지점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명정치의 탄생』의 1979년 3월 7일의 강의에서 프랑스의 복지국가체제가 1970년대에는 모두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진단 하에 당시 보수정권에서 마이너스소득세가 검토되기에 이른 경위를 상세하게 다룬다. 확실히 푸코는 마이너스소득세라는 구상 속에서 ‘전쟁계약’에 기초한 완전고용형 복지국가와 국민연대의 모델을 방기함과 더불어 절대적 빈곤개념의 도입과 비규율적인 지원의 메커니즘을 간파했다. 그런데 자모라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분석의 동기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의 사상적 접근이 아니라 국내경제가 전환점을 맞이한 프랑스에 있어서 사회정책의 개혁동향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실제로 69년 이후 경제의 추락과 73년의 석유파동을 거쳐 74년에 성립된 지스카르 데스탱 정권하에서 시작된 움직임을, 푸코는 ‘현재 문제인 것은 포괄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하나가 짊어져야 할 전체’로서 묘사하고 있다.

  푸코는 1970년대의 프랑스는 이중의 의미에서 안전성이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한편에서는 치안의 의미에서 안전성(테러리즘, 범죄, 형벌 등)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보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안전성의 문제이다. 사회보장을 둘러싼 문제는 사람들의 최저한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전후(戰後)부흥기의 과제가 끝나고 욕구가 복수화ㆍ개별화하는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에 있다. 83년 출간된 서적에  실린 CFDT 간부와의 인터뷰에서 푸코는 이러한 욕구를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상세하게 검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푸코에게 사회보장에 늘 따라다니는 이 문제는 사람들의 자율에 대한 갈구와 관련된다.

  “의심 없는 적극적인 요구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현실의 자율을 보장하면서 자기 자신과 환경 사이의 더욱 풍부하고 많고 다양하며 유연한 관계에 길을 열어줄 보장에 대한 요구입니다.”

  존재로부터의 자율 혹은 독립이라는 표현이 사회정책의 논의에서 인용될 때에는 확실히 양의성을 띤다. 그 위에서 푸코는 제도 그 자체가 수요의 증대에 견디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환자들 중 일부는 보험적용제외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도를 바꿀 때에 당사자 본인의 참가와 분권화의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계획을 본인이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호의적으로 말하면, 사회적인 안전성의 동요에 대해 무언가의 형태로 당사자의 결정권을 확대하여 쓰기 쉽도록 하는 것 외에는 방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편 치안(안전성)에 관해서 푸코는 1977년의 앞서 인용했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전한 사회—현재는 ‘안전’이라는 표현이 곧잘 사용된다—란 특정의 행위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의 위험성을 인정한 하에서 그 존재를 허용하는 ‘약삭빠르고 교활한’ 성격을 구비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안전한 사회는 전면적인 억압을 기정사실화하는 전체주의사회와는 타입이 다르다. 그러나 반면 이 사회는 치안이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사람들에게 부담을 요구한다. 그 내용은 ‘파시즘이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것, 그리고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을 과제로 삼아야하지 않는가라고 푸코는 말한다. 이 ‘무엇인지’가 신자유주의형 통치와 관련된다는 것이 최근 몇 년간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3. 생산하는 주체의 생산-인적자본론의 인간학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복지국가와 전체주의국가라는 두 가지에 대항하는 통치성으로서 파악했다. 양자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이것은 통치하지 않는 통치, 통치에 대항하는 통치로 말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생명정치의 탄생』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인간학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2014년 3월에 영면한 인적자본론의 주요이론가 게리 베커(Gary Becker)는 2012년 5월 근무지인 시카고 대학에서 푸코의 강의록 편집자의 한 사람이었던 법학자 베르나르 아르쿠르의 사회로 푸코의 조수이자 강의록편찬자인 프랑소와 에발도와 토론했다. 이 귀중한 자리에서 베커는 인적자본론에 관한 푸코의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바는 거의 없다’고 말하며 푸코의 논의가 중요한 포인트를 적확하게 집어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푸코 자신은 베커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한 논점에 대해 두 가지를 부가했다. 노동하는 개인이 경제 분석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그 개인이 생산하는 주체가 되는 것. 당연히 베커 본인은 이 점이 신경 쓰였다.

  “푸코는 ‘게리 베커는 소비를 둘러싼 매우 흥미로운 이론을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도 흥미로운 일이고요.(웃음)”

  푸코와 베커 이 두 사람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인적자본론에서 개인의 모든 활동이 무엇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즉 생산으로서 파악된다는 점이다. 물론 인적자본이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는 고전파 경제학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1950년대의 아메리카에 주류파 노동경제학을 혁신하는 존재로서 등장한 인적자본론은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

  인적자본론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서 자금을 취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발적인 존재와 떼어지지 않는 인적자본의 소유자이며, 그 자본주식에 의해 프로로서 소득을 취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노동자관은 경제학에 있어서 인간상의 큰 전환을 수반한다. 자유주의경제학이 모델로 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의 개인을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교환ㆍ거래를 수행하는 ‘상인’에 빗댄다면, 신자유주의경제학에서는 그와 동일한 경제인을 ‘기업’으로 다룬다. 이 경제인은 자본을 이용하여 소득을 산출한다. 노동자는 같은 일을 한다 해도, 지역과 년대에 따라 수입이 다르다. 이 보편적인 사실이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적자본의 구성이 다르다는 관점에서 잘 설명된다는 것이 인적자본론의 주장이다. 베커는 이 자발적인 관점을 ‘인간중심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데, 맥락적으로는 기업형 경제인의 행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온갖 주체를 ‘생산하는 주체’로 바꾸는 조작을 포함한다. 이것이 베커의 소비이론을 흥미롭게 다뤘던 푸코의 관점이다. 푸코는 베커 자신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비하는 인간은 소비하는 한에서 생산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무엇인가를 생산할까요? 그가 생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만족에 다름 아닙니다. 또 소비를 기업 활동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한 기업 활동으로서의 소비에 의해, 개인은 자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어떤 자본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자발적인 만족으로 간주되는 무엇인가를 생산합니다.”

  혹은 개인은 ‘투자가’가 된다. 부모가 양육에 할애하는 시간은 아이의 인적자본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투자이며 이주는 지위나 보수의 개선을 위한 투자로 이해된다. 이 의미에서 인적자본론의 세계에서는 노동자나 소비자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계급이나 착취도 없다. 마이크로한 레벨에서 보면, 인적자본의 개량을 위해 투자가 행해지며 그 인적자본을 활용하여 소득을 산출하는 생산자=기업으로서의 개인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 정책레벨에서는 그러한 개인=기업가가 갖는 인적자본에의 충실한 투자만이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나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라는 원칙이 제시된다.

  이와 같이 인적자본론의 주장을 견실하게 파고드는 푸코의 흥미는 정치적이며 인간학적인 것이다. 실천적인 측면에 강한 경제사상에서 기업으로서의 개인, 생산하는 주체라는 인식론적인 틀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적자본론이 의도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을 경제 분석의 중심으로 조직하는 것, 개개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을 합리적인 경제활동으로 파악하는 것을 중심적인 과제로 삼는 것이다. 푸코는 인적자본론과 고전파경제학,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노동을 둘러싼 입장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가능한 것, 그것은 결코 현실의 자본주의가 노동의 현실을 추상화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른바 현실주의적 비판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언설에서 노동자를 추상화하는 방식에 대해 이론적 비판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라고 신자유주의자는 말합니다. 경제학자가 노동을 이 정도로 추상적으로 다뤄왔던 것은 [중략] 고전파경제학자가 경제학의 대상을 자본, 투자, 기계, 생산물 등에서 이뤄지는 프로세스로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현실의 추상화란 노동이 균일한 시간이라는 요소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자본주의가 노동의 리얼리티를 그와 같은 것으로 ‘현실적으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고전파경제학이론이 그와 같은 추상화의 조작을 ‘이론적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마르크스형의 자본주의 비판과는 반대로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시각을 바꾸는 것이 된다. 따라서 노동에 관한 이론을 만들어내며 그것을 자본주의 중심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생각이며, 그것이 인간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통한다고 푸코는 이해한다. 신자유주의자는 로빈스에 의한 경제학에 관한 중요한 정의—경제학이란 목적과 선택적 용도를 구비하는, 희소수단과의 관계방식으로서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이다—를 ‘이용’했다고 푸코가 말한 것은 이 의미에서일 것이다.

  나아가 생산하는 주체의 생산, 기업=주체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도식은 단순한 이념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푸코는 생각했다. 인적자본론의 정치적인 요소와 함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을 빼버리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정치적 함의의 심각함과 밀도 혹은 그것이 불러오는 위협의 요인이 지금 이야기하는 프로세스의 수준에서 행하는 분석과 프로그램의 유효성 그 자체에 어느 만큼이나 차지하는가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경제현상의 분석이 활용하는 인간상이 사회현상 일반의 분석으로 확대됨으로써 사회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과의 관계를 역전하고 경제적인 것이 다시금 우위에 서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다뤄야한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다. 달리 말하면, 앞서 논한 매크로한 레벨에서의 안전성의 통치와 마이크로한 레벨에서의 생산하는 주체에 대한 인간학이 맞물리는 것에서 신자유주의형 통치가 성립한다. 이 점이 바로 푸코가 새로운 통치의 존재방식으로서 신자유주의에, 그리고 그 퍼스펙티브에 기반한 논의의 토대가 되는 인적자본론의 인간상에 강한 관심을 보여준 근거이다.

  그런데 온갖 통치실천은 그 무엇의 ‘진리’와의 관계에서 행해진다고 푸코는 생각했다. 신자유주의형 통치에서 진리란 ‘시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통치가 자유방임이라는 접근을 통해 존중해야하는 지표가 아니다. ‘통치의 자기제한의 원리가 아니라 통치에 대항하기 위한 원리’로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란 국가에 의한 통치가 언제라도 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감시하며 법적으로 제어하는 구조임과 동시에 그 기준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4. 통치의 분열[失調]과 도전하는 주체

  생활면에서 국가에 의한 보호의 전망이 흔들리는 한편, 항상 교활하며 때때로 폭력적인 수단에 의해 사회는 통치된다. 푸코가 논한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관한 안전성(치안, 안전, 사회보장)의 위기의 시대에는 이러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푸코는 그러한 위기에의 응답으로서 부담의 거부라는 전략을 제시한다. 앞서 들었던 77년의 인터뷰에서 ‘권력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해명하는 것이란 안전성(치안, 안전)의 대가로서 짊어질 새로운 속박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이권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것인가’ 라는 어느 질문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안전성의 시스템에서 거리를 두고 대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사실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편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통치전략을 거부하고 부질없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이것이 통치당하는 측의 하나의 전략이라는 것이 푸코적인 논의이다. 국가에 의한 통치=통솔에 대해 이끌리는 방향과 그 존재방식에 변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에 의한 통치가 이제 와서 국민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인정하는 경우에도 이러한 접근이 여전히 유효할까? 서두에 인용했던 『일본재흥전략』개정 2014—미래에의 도전의 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경영자를 비롯하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활기에 찬 일본의 부활’을 위해 신진대사의 촉진과 이노베이션(innovation)에 맞서는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고, 국가는 이를 서포트함으로써 ‘세계에 으뜸가는 비즈니스 환경’을 정비한다.”

  물론 여기서는 시장경쟁을 성립시키기 위한 환경의 정비가 통치의 역할이라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기본적인 이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제 제도적인 틀을 준비하기에는 글렀다는 체념도 보이는 것 같다. 표제의 ‘도전’이라는 단어에 관해서도 일본경제전체가 안고 있는 과제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과제를 동격으로 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도전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마치 일본경제부활의 열쇠인양 묘사되고 있다. 이노베이션(innovation)의 잠재적인 주역인 기업가와 고도인재가 되는 이들은 한줌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도전’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원의 윤리조차 될 수 없다. 푸코에 의하면, 시장이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시장외의 제도=환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신자유주의형 통치에 특징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위의 텍스트에서 통치하는 측이 어떻게 환경을 정비할 수 있을까, 그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푸코가 태어난 시대보다도 통치의 위기가 심화된 속에서 자모라와 같은 푸코 비판이 나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개혁과 재정(財政)소멸에 의해 복지국가의 기반 그 자체가 여기저기서 무너지는 이때에 푸코와 같은 신자유주의론이 그것을 후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본고에서 검토한 안전성과 인적자본에 관한 논의가 말해주는 것처럼, 푸코에게 현재는 어떠한 의미에서는 위기이며 전환기임을 확인해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푸코의 논의로 말하면 통치에 의한 통솔이 혼란스러울 때야말로 통치당하는 측에서는 자율을 요구할 가능성, 자신을 스스로 다양하게 이끌 가능성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서두에서 인용했던 페미니스트 베아트리스 프레시아도(Beatriz Preciado)의 텍스트 ‘우리들은 <혁명>을 말한다’의 한 구절에 대해 자모라는 인터뷰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좌익의 전형으로 비판하지만, 프레시아도는 오히려 복지국가의 기능부전이라는 상황을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의 ‘위기’로 포착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공동성과 조직화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다.

  서두에서 소개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개발도상국에서 저널리즘과 UN 기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게스트 강사의 이야기를 토대로 행해진 그룹발표에서 어떤 그룹은 일의 리스크가 무서운 것인가라는 논점을 제출했다. 리스크란 가능성의 진폭이기 때문에 결과가 부정적이라 해도 독창적인 관점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의로 발전했다. 토론이 끝난 후의 감상문에는, 정세[政情]가 불안한 곳에서 일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접했을 때 재미있다고 생각했지 두렵지는 않았다는 소감이 많았다. 그러한 ‘재미’에는 사물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두 가지의 다른 ‘도전하는’ 주체가 동거하고 있을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도전’에 잘 들어맞는 인텔리전스(능력)의 강화로 나아가는 것. ‘도전’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하고 “능력을 넘어서는” 인털렉트(지성)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러나 후자로 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통치의 틀이 벗겨지는 시대에서 미래가 두려워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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