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또 하나의 논문. 앞서 번역한 후지타의 논문과 비교해서 좀더 분명하게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그의 평가가 집약되어 있다.  

※ 아래 두 장의 사진의 출처는 2009년 게이오의숙 창립 150주년 기념 일본 국내 순회 전시한 福沢諭吉展의 도록집.

 

-----------------------------------------------------------

「維新における福沢の選択」[유신에서 후쿠자와의 선택]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막부 말기 전국적인 환란의 한복판에서 단 한 곳, 마치 에도시대의 "데지마"(出島)[각주:1]처럼 후쿠자와의 학원[塾]만이 '책을 읽는' 문명을 논한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그들이 창 밖의 도막(倒幕)의 싸움의 총성소리를 들으며 '원서'를 읽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어쩌면 게이오의숙 사람들이 그것만이 이 나라의 명예로운 전통이라고 스스로 되새겨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게이오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이도 그것을 어느 때는 지침으로, 또 어느 때는 자숙의 기준으로 삼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그렇게 한 이유 혹은 동기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전통'으로 자부할 때에도, 또 그것을 '교육'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의외로 언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그 점이 언급된다 해도 극히 단순히 후쿠자와는 '공부를 좋아했다'거나 '정치를 싫어했다'라는 성향으로 환원되고, 그도 아니면 '학자의 본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후쿠자와의 교육자적 관심만을 그 동기로 치부한 경우도 많다.

  위의 경우에 후쿠자와의 행동은 일본전래의 예의 '미담'의 하나로 이야기되고, 그때에는 '학도'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비판이 봉쇄되는 경향마저 있다. 물론 후쿠자와는 전대미문의 '공부를 좋아한' 사람이며 매우 '정치를 싫어하는' 부류에 속했다. 또 일본에서 최초로 '학자'(오늘날로 말하면 인텔리겐차)의 고유한 '직분'(Beruf)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친 사람이다. 

  그런데 후쿠자와가 유신도막(維新倒幕)의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탄환이 날아다니고 백도(白刀)가 춤을 추는 에도의 거리에서 감히 한가롭게 공부에 전념했던 것은 위와 같은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그는 '막부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다. 또한 그는 번(藩)에 대해서도 '안중에 없는 번'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부모의 원수'처럼 생각했던 막번 체제가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 모셔두었던 칼을 휘두를 법도 했지만 반대로 가지고 있는 칼을 구태여 팔아버리고, 부랑, 난폭, 암살이 횡행하는 격란의 에도의 시내에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은 단정한 모습으로 지내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한 데에는, 분명 '좋아함'이나 '가르침'을 넘어선 깊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 남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극히 명료한 원리의 문제였다. 후쿠자와는 누구에게도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모두가 무장한 상황에서 무장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 느낄만한 공포를 억누르고 무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같은 원칙에서 눈 앞에서 벌어지는 도막전쟁(倒幕戰爭)의 쌍방의 '주역'에게 '냉담함'을 요구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후쿠자와는 그의 원리에 입각해서 유신의 적극적 구상을 만들어내고자 했으며, 저 특정한 상황에서 저 특수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전투에 참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것이 온갖 내전 일반을 싸잡아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물론 정치적 무관심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확고한 보편적 원리와 함께 예리하며 거대한 정치적 리얼리즘이 그의 판단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도막전투의 시기 그의 '미행'[美擧]을 본받는다는 핑계로 '학자'로서 정치사회적 비판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이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후쿠자와의 원리적 태도(정신)를 심히 왜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로 하여금 단연코 '비무장'과 '불개입'을 결심케 했던 것과 동일한 원칙이 그에게 오로지 '원서'를 읽히게 했던 것이다. 

  그 원리·원칙은 무엇인가? 내가 '보물찾기'와 같이 그 '발견의 장면'을 짓궂게 미루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에서는 다 알려진 그의 원칙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저 유신의 상황에서 그의 원칙이 어떻게 관련되며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정신상태를 그에게 요구했는가 라는 핵심이 인상적으로 전달되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즉, 그 원칙이란 '문명'의 정신을 일본에 배양하여 확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쇄국' 체제를 부수고 '개국' 체제를 모색하는 것이 그 원칙의 첫 번째 귀결(corollary)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입장에서는 막부말기의 '무력투쟁'에서 당사자 쌍방은 모두 비판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사바쿠"(幕: 도쿠가와 막부 말기 막부의 편에 들어준 당파)든 '근왕'(勤王)이든 누구 할나 것 없이 '양이(攘夷)·쇄국주의자'의 무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쵸닌"(人: 도시에 사는 상인과 장인)과 그 밖의 '하등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국의 "사무라이"라는 무사신분에 발 들여놓은 무리들은 "사바쿠"든 '근왕'이든 "술에 취한 듯이" 광기에 가득 찼다. 그 열광은 지적인 감동이 아니었다. 양쪽 다 '양이'(攘夷) 혹은 "사바쿠"라는 한 지점에 집착했을 뿐이다.

  막부는 종종 '개국'을 하는 것 같았고, 또 지난 후에 보면 '개국'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실을 아는 후쿠자와에게는 '천하제일의 양이번(攘夷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츠 야스요시(勝安芳)[각주:2]조차 전력을 다해 '포대'(砲臺)를 만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막부는 얼마간 '개국'파의 외견을 띠었고 나아가 다소 '개국'적 행동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막부가 대외교섭에 맞닥뜨렸던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대외교섭이란 것은 군함 '흑선'과 그 포성에 의해 외부로부터 강제되었던 것이 아니던가. 즉 막부의 '개국'적 양상은 자기의 내적원리와는 어떤 관계도 없는 단순한 외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기서 백년 전의 '일본정치'의 역사적 모습의 정신적 모양새를 비추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이 나라는 군사적으로는 강제되지 않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 백년 전도 지금과 같았다. 막부는 가능하다면 쇄국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립근거였기 때문이다. '양학자'(洋學者)라고 해도 그 상당수는 '양이'(攘夷)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근왕'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양 파벌은 이렇게 '우락부락한' 어깨를 들먹이며 쇄국과 양이라는 막부 원리를 위해 맹렬한 싸움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막부의 붕괴였는데,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막부의 붕괴 하에서, '문명'을 밀고간 '민권'을 확대하며 '국민'을 형성한 담당자가 있었는가? 없었다. '도막근왕파'가 만약 그 담당자였다면, 후쿠자와는 흔쾌히 그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후쿠자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폭력파'가 정치를 해야한다면 "도저히 이 나라는 세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후쿠자와도 도막의 주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근왕파'의 일군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류의 '문명'의 진보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새로운 과제를 이끌어갈 힘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강했다. 사실 유신 후의 수다한 사례가 후쿠자와의 판단을 실증한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학원만이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의미와 경계를 내외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음산한 상황 하에서 단 한 사람만이 쾌활한 태도로 '문명'의 미래를 전망하며 그 신화의 습득과 구체화의 준비에 몰두했다. 그 성과는 드디어 '메이지'에 입성함과 동시에 사회공헌으로 출현했다. 만약 메이지 유신에 '문명'을 원리적으로 추진한 사회적 변혁의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 유신변혁에서 최고의 '유신'적 측면은 후쿠자와에게서 상당부분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역사의 한 꼭지, 즉 유신에서의 후쿠자와의 선택과 후쿠자와에서의 유신의 실현, 이 둘의 역설적인 결합은 작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1. "데지마"(出島) 1634년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서 나가사키에 축조된 인공섬으로,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달란드와의 교역이 행해졌다. 192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1823-189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 사무라이.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