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노우치 야스시의 『총력전체제』(筑摩書房, 2015)에 실린 나리타 류우이치의 해제를 번역했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다음의 글에서와 같이, 전전-전후를 단절보다는 연속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즉 전시기의 총력전체제가 전후일본의 사회시스템의 기초를 다졌다는 주장이다. 전전-전후를 단절의 관점에서 파악한 '시민사회파'의 주류 속에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일본 바깥의 일본연구자에게 더욱 영향을 끼쳤고, 그들에게 다양한 각도에서 전전-전후를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제공해왔다.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총력전체제론에 관한 그의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최근 다양한 관점의 '전후일본론'이 제출되는 가운데, 이 책의 내용은 조금 시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다만 일찍이 전전-전후의 일본의 연속성에 착목한 논의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다음의 해제는 일본 바깥에서 현대일본에 대한 연구사를 개괄해보는데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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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内靖)와 ‘총력전체제’론에 관하여
나리타 류우이치(成田龍一)
0.
야마노우치 야스시가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시대의 대전환기인 1980년대 후반이다. 그 직접적 계기는 일본의 사회과학이 이때의 시대적 전환을 다룰만한 구상을 구축할 수 없음에 대한 초조함이었을는지 모른다.
1.
야마노우치는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을 대표하는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의 문하생이었으며 경제사 연구자로 출발하여 전 생애에 걸쳐 사회과학 전반으로 관심영역을 넓혀갔다. 1960년 안보투쟁 때에는 대학원 생활을 보냈고, 1970년대 전반기에는 교원으로서 학생운동과 교류하며 역사적인 전환을 자신의 학문에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라는 과제와 격투를 벌였다.
야마노우치는 1960년대 냉전체제의 한가운데에서 역사적 분석과 시대상황에 대한 고찰을 왕복하며 일본과 세계의 폭넓은 사례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왔다. 일찍이 그는 사회과학이나 사상의 새로운 흐름에 대처하면서 시대비판적인 새로운 이론을 구축함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여 연구대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적 틀을 모색했다.
야마노우치는 각 년대의 무대마다 정면승부의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 일환으로 야마노우치가 번역에 관여한 것을 개관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논의가 얼마나 다방면에 걸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로날드 필립 도어(Ronald Philip Dore)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노사관계의 비교사회학』, 1993년 M. J. 피오리와 C. F. 세블의 『제2산업분수령』, 1997년 메리치의 『현대를 사는 유목민—새로운 공공 공간의 창출을 향하여』, 2006년 데랑티(Gerard Delanty)의 『커뮤니티—글로벌화와 사회이론의 변용』, 2003년 R. 코엔과 P. 케네디의 『글로벌 소시얼러지』 등 그의 관심은 사방에 뻗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물들은 일본의 사회과학이 직면한 과제에 몰두한 결과이며, 야마노우치 자신의 저작과 겹쳐보면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이 걸어온 궤적을 알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중에서도 야마노우치는 스스로 도달한 이론에 안주하지 않고 그 깊이를 더해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제출하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연구의 틀을 만들어낸 학자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본서에 실린 총력전체제의 고찰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총력전 시기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이제까지 그의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된 테마로서, 그가 50대부터 시작한 프로젝트에서 산출된 결과이다.
2.
우선 야마노우치 야스시에게 1980년대 후반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살펴보자. 1986년에 간행된 『사회과학의 현재』(미래사)의 맺음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랜 세월 나는 시민사회파의 조류 속에서 특수한 구조성을 짊어진 근대일본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시각을 견지해왔고 서구근대사회의 이념화된 상을 기준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근대서구사회 자체의 거대한 구조변화에 눈을 돌림으로써 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일본평론사, 1982년)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1970년대의 모색을 정리한 것이며, 그 후 새로운 방향성을 탐색하고자 한 것이 『사회과학의 현재』이다.
그러나 야마노우치는 출간 직후 이 논문집을 절판했으며 다시금 『니체와 베버』(미래사, 1993년)를 저술하는 등 대전환에 이은 모색을 반복해왔다. 이 모색 속에서 사회과학의 탐구와 병행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상한다.
이와 별개로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시민사회파의 이론적 맹점’을 검토하면서 그 해답을 이론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역사적으로 총력전 하에서 전개되었던 ‘사회과학의 변질(패러다임 체인지)’에 착목한다. 그리고 이 양자를 합쳐 총력전체제론을 고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지평 속에서 야마노우치는 ‘1990년대의 나는 이른바 한 꺼풀 벗겨졌다’(「총력전ㆍ글로벌리제이션ㆍ문화의 정치학」『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 체험』(築摩書房, 1999년))라고까지 말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야마노우치에게 총력전체제는 이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야마노우치는 도쿄대학 경제학부에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에게서 사사받았다. 산업혁명(세계자본주의)의 고찰에서 그 지적탐구가 시작되었고, 『영국산업혁명의 사적분석』(青木書店, 1966)이 이때의 성과물이다.
야마노우치는 계속해서 마르크스의 세계사 인식을 고찰하여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미래사, 1969년)을 집필한다. 그는 전후의 사회과학을 압도했던 마르크스의 이론, 그 전후적 해석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 저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복선형의 역사발전단계론의 융성 등 당시 ‘발전도상국’에 대한 고양된 관심에 조응하여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으로 전개된 다양한 논의에 대한 야마노우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오츠카사학(大塚史學)의 멤버이자 요절한 아카바네 히로시(赤羽裕)의 『저개발경제분석서설』(岩波書店, 1971년)에 대해서도 그는 크게 공감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야마노우치의 『마르크스ㆍ엥겔스의 세계사상』은 ‘시민사회파’의 마르크스 이해와 더불어 그에 공진하여 상호보완관계를 형성한 ‘전후역사파’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이다.
전후사회-전후사상의 핵심인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파’. 그 성과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그 이론적 틀을 검토하는 것이 야마노우치의 출발점이었다.
그 후,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대한 고찰로 돌아서서 1976년부터 78년에 걸쳐, ‘초기 마르크스와 시민사회상’이라는 제목으로 마르크스의 『경제학ㆍ철학초고』를 검토한 논고를 연재해나갔다(『현대사상』1976년 8월~78년 1월). 이 논고는 소외론에 착목하여, 후기 마르크스를 규준으로 삼았던 철학자 히로마츠 와타루(廣松渉)와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이 작업은 후에 『수고자(受苦者)의 시선』(青木社, 2004년)으로 출간되었는데, 앞서 언급한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도 이 흐름 속에 있다. 이 책에는 ‘소외론의 재구성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마르크스의 후기사상에는 사라진 ‘포이에르바하의 모멘트’에 관심을 돌렸다.
나아가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베버의 주저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논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착목하여 베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오오츠카 히사오로 대표되는) 이제까지의 베버 해석을 비판하고 파슨즈와 시스템론을 검토했다. (마르크스와 베버라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이론적 지주(支柱)에 대한 야마노우치만의 검토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이때 야마노우치가 소외론에 착목한 것은 1970년대를 축으로 하는 세계이해가 소외론에 응축되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마노우치는 ‘마르크스의 체계적 이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의 전용(全容)을 밟아가면서 ‘역사적 현실에 마르크스의 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수고자의 시선』)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은 마르크스에 안주하지 않고 이론을 발전시켜왔던 야마노우치의 자세와 상통한다.
1980년대 후반 야마노우치는 『현대사회의 역사적 위상』에서 제시한 이론적 틀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 시기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다시금 니체로 향한다. 『사회과학의 현재』와 『니체와 베버』는 니체를 축으로 사회과학을 재검토하고자 한 시도였다. 이것은 ‘니체의 논리에 의한 니체 비판’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총력전체제론은 이 시기의 야마노우치에 의해 선택된 주제에 다름 아니다. 총력전체제와 니체에의 착목은 자본주의 분석을 축으로 근대사회를 고찰한 야마노우치의 관심과 고찰의 대전환이었다. ‘근대비판’과 ‘현대사회’에 대한 고찰의 개시였다.
1980년대 후반은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전환기였다. 1989년 전후를 반환점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붕괴, 이미 진행된 새로운 지(知)로서 ‘현대사상’의 활황, 그리고 일본경제의 난숙기로서 버블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이 사태를 야마노우치는 (근대사회에서) 현대사회로의 전환으로 보았으며 그 기점을 총력전체제에서 구한 것이다. 이러한 탐구의 궤적이 1980년대 후반의 야마노우치에 담겨있다. 총력전체제론은 야마노우치 스스로가 자신의 사고를 나선형으로 단련하고 그로부터 쌓아올린 사고를 해체하면서 재조립한 그의 작업의 일부이다.
3.
총력전체제론은 「전시동원체제의 비교사적 고찰—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세계』1988년 4월, 본서 제2장)에서 처음으로 제창되었으며, 『총력전과 현대화』(1995년)가 그 체계적인 저서가 되었다. 『세계』논문이 『총력전과 현대화』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15년간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에 집중했다.
총력전체제론은 이제까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파악한 전쟁(제2차 세계대전-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을 ‘총력전’으로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총력전’에 대한 세계상의 재해석, 역사인식의 전화, 역사분석의 방법적 검토를 행하고 그 현재적 위상을 새롭게 측정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론을 프로젝트로 기획하고 수많은 국내ㆍ국외 연구자를 끌어들여 공동연구로 조직한 다음 그 연구 성과를 『총력전과 현대화』로 제출했다. 야마노우치는 권두에 「방법적 서설—총력전과 시스템 통합」(본서 제3장)을 실었다.
『총력전과 현대화』는 「제1부 총력전과 구조변혁」「제2부 총력전과 사상형성」「제3부 총력전과 사회통합」으로 구성되어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를 주장한다.
“우리들은 국민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기의 총동원제체에 의해 (계급사회로부터) 사회 시스템통합이라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대의 문제성을 다루고자 했다.”(「편집방침에 대하여」)
총력전체제론은 총력전으로 운영되는 전시총동원체제의 형성을 사회적 재편성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현대화’가 진행되어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로 이행된다는 인식을 갖는다. 가족-시민사회-국가라는 근대사회를 만들어낸 영역구분이 해체되고 사회는 ‘사회시스템의 전체적 운영’이라는 관점으로 통합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총력전체제 하에서 진행된 시스템 사회화. 여기에서 ‘계급이해의 대립’은 ‘제도적 조정’의 대상이 되어 국가적 공동성을 향해 사회의 통합화가 추진된다. ‘복지국가는 전쟁국가’이며, ‘사회국가적인 복지체제’는 총력전 하에서 ‘하나의 이념’이 되기도 한다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이러한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3중 구조를 갖는다. 즉 ① 이론적 수준에서 ‘계급사회에서 시스템사회’를 말한다. ② 역사적 고찰로서 ‘전시동원체제’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총력전체제 과정에서 공ㆍ사의 구별은 모호하며 사람들은 새로운 ‘국민’으로 파악되고 그 속에서 전쟁수행의 ‘합리화’가 지향된다. 그와 더불어 ③ 총력전체제 하에서 (‘위태로움’과 ‘새로운 수준’을 함께 부둥켜안으며) 사회과학적 지식도 전회하게 된다. 야마노우치는 이 세 수준의 복합을 고찰대상으로 하여 총력전체제론을 구축하고 그 분석을 행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③의 논점이다. 예를 들어, 오오코우치 가즈오(大河内一男)의 전시 운영을 ‘참가와 동원’—‘전시동원체제의 합리적 설계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것을 결의한다’(「전시기의 유산과 그 양의성」 본서 제5장)—이라는 관점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오오코우치는 총력전이 계급관계를 뛰어넘으며 당연히 있어야 할 사회정책을 ‘현실’의 문제로 만드는 환경이라고 인식하고 이 인식에 의거해 ‘큰 방향전환’을 했다 라고 야마노우치는 주장한다. ‘근대의 원점’을 성립하는 ‘개인’과 결별하여 (오오코우치는 새롭게) ‘사회적 시스템의 총체’라는 입장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야마노우치가 총력전체제 하에서 ‘국가의 성격’이 변했다는 오오코우치의 인식과 재평가를 지적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전시기 지식인’의 ‘이론적 전향’—‘사회과학은 이제야 사회 운영을 그 바깥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의 기능적 운행의 역할을 짊어진 장치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 본서 제6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지식인의 ‘전향’[転身] 내지는 ‘전회’(転回)는 예전부터 착목된 바이며, 오오코우치의 경우에도 ‘전향’[転回]으로 다뤄져왔다. 그러나 ‘예외적 사례’로 다뤄져온 것에 반해(石田雄 『일본의 사회과학』 동경대학출판회, 1984년 등), 야마노우치는 이 전향이야말로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논점은 ‘시민사회파’에 의해 이론적ㆍ역사적으로 검토되었다. 오오코우치를 필두로 오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 마루아먀 마사오 등이 주도한 전후 프로젝트는 전시프로젝트의 전후적 이해로 새롭게 위치 지었다. 야마노우치는 (‘시민사회파’의 자기상(自己像)처럼) 전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총력전체제론으로서) 전시에 일어난 것을 발견해내고자 했다.
이렇게 전시기에 일어난 변화를 ‘사회과학의 변질’로서 ① ‘시민사회파’는 ‘무자각’했다(전시기의 전향이 아닌 전후 전향)고 말하고 그 반전으로서 ② 자신의 작업은 이 지점에 준하면서 ‘시민사회파’를 비판하고자 했다. 따라서 ③ 오오코우치의 주장 및 오오츠카, 마루야마의 이해를 ‘근대로의 회의’(‘근대의 초극’)를 축으로 재구성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의 요지이다.
또 하나, 총력전체제는 전쟁을 ‘전투’에서 분리하여 사회편성-시스템으로 파악한다. 이 속에서 스탈리니즘, 뉴딜, 파시즘이 병치되고, 총체로서 근대가 비판된다. 야마노우치는 현대사를 파시즘과 뉴딜의 ‘대결’로 그려내기 이전에도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의 편성교체’로 파악하여, ‘파시즘형’과 ‘뉴딜형’의 차이를 총력전체제에 의한 사회적 편성교체의 분석 속에서 ‘내부의 상위구분’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전시의 평가를 둘러싼 논의임과 동시에 전후에 이뤄지는 전시평가의 기준을 둘러싼 논쟁이며 전후와 현재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문제의식에 다름 아니다.
야마노우치에게서 전시하의 ‘합리성’에 관한 논의는 저항이 아닌 전시동원의 국면에 있으며, 그 동원으로 대표되는 전시의 ‘합리성’이 전후를 만들어내었다는 인식에 있다. 이 관점에 의해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전시-전후의 연속/단절에 머물지 않고 그 단절을 뒷받침한 인식과 방법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그의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를 역사적ㆍ논리적, 전시의 행위ㆍ전후의 해석 등 이중삼중의 복합적인 비판을 논한다. ‘시민사회파’의 평가와 더불어 ‘시민사회파’가 그려낸 역사상, ‘시민사회파’의 역사적 인식이 총력전체제론에 의해 반전된다. ‘시민사회파’가 전시의 저항을 뚫고 전후를 이끌어 전후민주화를 추진했다는 구도와 역사상, 그것을 지지하는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한편, 야마노우치는 전투가 끝나도 총력전하에서의 시스템통합은 계속 진행되어 현대사회의 시스템을 통합한다는 주장한다. 즉 그는 전시-전후의 단절/연속이라는 담론에 대해 네오연속설을 새롭게 주창한 것이다. 그는 1945년 8월 역사가 절단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연속성에 착목했다.
이러한 총력전체제 인식은 이제까지 논의된 일본의 ‘특수성’이 아닌 ‘보편성’의 맥락에서 일본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본의 ‘특수성’이 전쟁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며, 합리성이라는 ‘보편성’을 전쟁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따라서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총력전을 수행한 ‘근대’에 대한 비판—‘근대비판’(야마노우치는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다)이며, 이제까지 근대비판으로 간주된 것은 ‘근대화’ 비판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유럽의 근대’를 모델화하는 인식에 기반한다는 비판인 것인데, 야마노우치는 파슨즈,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시민사회가 그 자체의 전향 속에서 시스템사회로 ‘변질’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즉 근대 그 자체의 근거 속에서 ‘전체주의화와 재봉건화’의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도 베버도 ‘유럽의 근대’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근대가 가진 ‘합리성’을 비판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소외를 논했다고 해석한다.
큰 논리-인식의 틀로 제출된 총력전체제론은 따라서 전후의 인식-전후사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총력전체제론은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이 그려낸 도면을 지면과 바꾸는 작업이다.
전후비판으로서 총력전체제론은 1940년 체제론(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1940년 체제』 동양경제신보사, 1995년)과의 차이를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노구치는 부제에 ‘안녕 전시경제’라고 하며 현재가 ‘전시경제’로부터의 전환기라고 말한다. 총력전을 이끌었던 전시체제가 전후 일본경제에 크게 기여했으며, ‘일본형경제시스템’이 전시기에 탄생했다는 인식이 그 배후에 존재한다.
야마노우치가 전시와 전후를 관통하는 총력전체제를 부정적으로 파악한 것에 반해 노구치는 40년 체제가 고도경제성장을 실현시켰다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노구치는 그 후 일본경제의 미래의 전개를 열어가기 위한 탈각기로서 90년대를 위치 짓는다. 나아가 노구치는 이 시기를 ‘특수’한 시기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야마노우치와 다르다.
4.
야마노우치가 제기한 총력전체제론의 의의와 특징은 1980년대 일본과 세계의 변화양상, 그리고 그와 더불어 ‘지’의 변화를 응시하는 새로운 사회이론의 구축에 있다.
‘일본’에 초점을 맞추면, ‘전후’에서 이륙하여 이제까지 ‘서양’에서 모델을 구한 상황에서 그 반대로 ‘일본’을 모델로 삼는 양상이 발생해왔으며(예를 들어 앞서 로날드 필립 도어의 『영국의 공장ㆍ일본의 공장』등), 그와 병행하여 포스트모던의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한편, ‘세계’에서는 전후의 국제관계를 규정해왔던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냉전체제-전후의 가치를 축으로 삼은 지적작업 그 자체의 역사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 양방에 주목한 것이 총력전체제론이다.
그리하여 총력전체제론은 냉전붕괴의 예감 속에서 논의를 전개해간다. 1990년을 전후하여 ‘69년’의 총괄이라는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총력전체제론은 강단파 비판, ‘시민사회파’ 비판, 근대비판이며, 전후사상에 대한 총비판이다.
이것은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이 『총력전과 현대화』『내셔널리티의 탈구축』(1996년)과 한 세트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이요타니 토시오(伊豫谷登士翁), 브레트 드 바리가 편집한 『내셔널리티의 탈구축』은 사카이 나오키의 서론(「내셔널리티와 모(국)어의 정치」)을 비롯해서 「제1부 내셔널리즘과 콜로니얼리즘」「제2부 표상으로서의 내셔널리티」「제3부 내셔널리티의 현재」 등의 10편의 논문을 모아놓았다. 이 저서는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역사에 입각하여 정치, 문학, 사회사상 등의 측면을 관계적으로 다루며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과 현대화』에서 이러한 내셔널리즘-국민국가와 결부하여 전개되어온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사회과학의 학지에 대한 비판적 총괄이기도 하다.
공동연구로 진행된 총력전체제론의 일단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야마노우치의 주창 하에 결집된 이들은 ① 일본에 있는 「일본연구」자 외에 미국의 일본연구자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외에 독일의 일본연구자, 나아가 비교의 관점에서 각지의 독일연구자도 참여했다. 후에는 오스트리아, 중국, 한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 있는 연구자도 참여했다.
이렇듯 ‘국경’을 초월한 광범위한 참여는 ② 전문분야의 경계를 넘어섰다. 즉 야마노우치를 전공하는 경제학ㆍ경제사 외에 정치학, 역사학, 교육학, 사회학에서부터 철학ㆍ사회사상, 문학연구까지 인문학ㆍ사회과학의 모든 분야에 문호를 개방했다. 공동연구로서 총력전체제론은 각각의 ‘학지’를 견지함과 더불어 그 ‘학지’가 가진 제도성, 그에 유래하는 자명성을 새롭게 검토하는 작업이었다.
필연적으로 이 공동연구는 ③ 대학이라는 제도를 넘어선 지적인 공동작업이 되었으며 야마노우치의 주변은 ‘지의 양산박(梁山泊)’과 같았다. 연구회에서는 종종 게스트를 초빙하였으며, 해외의 학자와 심포지엄을 공동개최했다. 매년 연구팀을 조직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각지로 흩어져 논의를 전개했다. 그때 마침 미국의 일본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고, 그 중심에 섰던 코넬대학의 사카이 나오키, 브레트 드 바리(Brett de Bary), 빅터 코쉬만(Julian Victor Koschmann)이 총력전론을 이어받았다.
그 외 캐롤 클러크(콜럼비아대학), 하리 하르트니안(뉴욕대학), 앤드루 고든(하버드대학), 텟사 모리스-스즈키(당시 캘리포니아대학) 등이 일본연구자로 활약하면서 총력전체제론을 전개해나갔다. 또 독일의 독일연구자로서 미하엘 프린츠 등이 참가하여 비교의 축을 복수화했다.
이것은 총력전체제론을 해외로 발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총력전과 현대화』 영문판은 1998년 코넬대학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Total Warand "Modernization", East Asia Program, Cornell University, 1998, Ithaca). ‘일본’을 사례로 하는 고찰에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로 확장해갔다.
인식의 측면에서는 ‘일본의 특수성’뿐만 아니라 보편성, 그에 수반하는 근대비판, 그로부터 도출되는 현대일본론—현대사회로의 시스템에 대한 고찰로 나아갔다.
총력전체제론은 ‘소국민’으로서 전시기를 보낸 야마노우치가 전후사의 서술방식에 제기한 문제의식으로 군인을 아버지로 둔 개인사의 검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을 지지한 것은 ‘현재’의 인식이며, ‘학지’ 비판의 ‘학지’로 삼았던 야마노우치의 강고한 논리였음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5.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전후의 전쟁의식에 대립한 것이다. 아니, 정확이 말하면 전후-근대-강단파의 견해에 준거하는 (‘시민사회파’와 ‘전후역사학’의) 전쟁관에 대한 도전이며 논쟁이다.
따라서 총력전체제론이 제기되었을 때 그 대응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총력전체제론의 이론적 틀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로서) 역사학계 주류와의 논의이다. 일례로 1996년 5월 『총력전과 현대화』의 합평회가 행해졌다. 그리고 이때의 논의에 기반하여 『연보 일본현대사』「총력전ㆍ파시즘과 현대사」(제3호, 1997년)가 발간되었다.
그 속에서 아카자와 시로우(赤澤史朗)는 합평회에 대해 ‘진실로 근래에 보기 드물게 뜨거운 논쟁이 전개되어’ ‘당초 예정된 종료 시각을 연장했음에도 논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아카자와는 ‘일본근현대사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틀의 인식에 관한 논의의 결실을 맺고자 한다’며 ‘총력전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특집으로 삼은 의도를 말하고 있다. 아카자와를 필두로 집필에 참여한 필자들은 정면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또 다른 대응은 (총력전체제론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면서도 비판적 견해를 보이는) 사회학ㆍ경제학 등의 영역에서이다. 좌담회 「공간ㆍ전쟁ㆍ자본주의」(야마노우치+이와자키 미노루(岩崎稔)+요네타니 마사후미(米谷匡史), 『현대사상』1999년 12월)는 총력전체제론의 의의를 평가하면서 식민지론(외부)이 결여되어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국분석으로서는 불충분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평가로서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의 『내셔널리즘과 젠더』(1998년)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의 「근현대사로의 초대」(『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 근현대Ⅰ, 岩波書店, 2014년)을 들 수 있다.
우에노는 야마노우치의 논의를 네오연속설로 평가하는 한편, 시스템사회화에는 의문을 표하며 평가를 보류한다. 우에노의 문제제기는 국민국가론과 총력전론과의 관계에 있다.
한편 요시다 유타카는 근 20년의 근현대일본사 연구의 총괄을 행하는 속에서 ‘국민국가론’ ‘총력전체제론’ ‘메이지시대의 평가’ 그리고 ‘역사학에서 인식론’을 제기하고 총력전체제론이 종래의 파시즘론의 맥락의 논의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근현대사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요시다는 총력전 과정에서 차별의 시정과 사회의 평준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렇다면 어느 수준에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는지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총력전체제론은 이렇듯 하나의 해석적 틀, 역사적 문제설정—패러다임으로 수용되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야마노우치의 관심은 ‘현대’라는 ‘시스템사회’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기 때문에, 총력전체제론을 주축으로 한 그의 단독논문집은 발간되지 않았다. 총력전체제론의 주요논문은 『시스템 사회의 현대적 위상』(岩波書店, 1996년)과 『일본의 사회과학과 베버체험』(筑摩書房, 1999년)에 분산되어 있다.
본 논문집은 위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는 논고를 포함하여 야마노우치의 총력전체제론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6.
총력전체제론 이후 야마노우치의 연구행적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하겠다. 야마노우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글로벌리제이션을 직접적 연구대상으로 삼고 환경문제와 ‘수고적(受苦的) 인간’—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탐구를 계속해나간다.
‘자본주의의 세계중심부의 사회시스템은 총력전체제를 통과함으로써 대항적 이해를 통합할 수 있었다’는 인식 하에서 그는 ‘근대의 생활원리’의 근거뿐만 아니라, 그 혁명성 속에서 ‘소외로 향하는 전도적(轉倒的) 의식의 동인’과 ‘관료제적 합리화로 향하는 형식성의 동기’를 탐구하고자 했다.
1970년대의 변화에 이어 1980년대 말 자본주의 시스템이 또 한 번의 변용을 맞이했을 때 야마노우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총력전 하에서 경험한 첫 번째 변질 이후 글로벌리제이션에 직면하여 두 번째 변질을 경험한다.”
‘거대한 전시동원’—총력전 체제가 만든 사회시스템통합이야말로 글로벌리제이션의 기반이 되었고 ‘두 번의 세계대전과 그 동원체제가 준비한 국민국가적 통합은 그 군사력과 함께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의 세계시스템의 유산으로 계승되었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야마노우치는 글로벌리제이션이라 불리는 사상(事象)을 해명할 뿐만 아니라 현대라는 시대에서 내셔널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상(事象)을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이제까지의 사회과학의 분석적 틀을 되묻고자 했다. 글로벌리제이션 연구를 통해 일본 나아가 ‘서양’ 중심의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대적인 지의 존재양상의 한계를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근대로 불리는 시대의 전환으로서 글로벌리제이션의 역사성을 재고하고자 한 것이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해석을 거쳐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전개한 것이 야마노우치의 일관된 문제의식이었다.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하나가 총력전체제론이며, 시대적 변화에 따라 과제를 재설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여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고자 했다.
야마노우치가 이론적 지주로 삼은 것은 ‘시민사회파 사회과학’—‘모택동적 마르크스주의’—‘베버ㆍ파슨즈ㆍ마르크스’—‘니체와 하이데거’이며, 어느 시기부터 그는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을 비판하기 위해 ‘시민사회파 사회과학’의 이론적 근거를 재해석하여 자신의 이론적 틀을 스스로 허물어갔다. 이 궤적은 전후 일본의 사회과학 그 자체의 궤적과 중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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