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의 글은 요약가능하지 않다. 그의 글은 어떤 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논제를 풀어내는 장--번역을 포괄하는 언어의 장--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어떤 문장보다 더 핵심적이거나 핵심적이지 않은 문장이 없다. 그의 글에서 각각의 문장들은 균등하게 논제를 나눠가진다.

왜 그러한가, 왜 그러할 수 있는가는 바로 그의 글이 말해준다. 니콜라이 레스코프라는 러시아 작가에 관해 비평한 「이야기꾼」이라는 글에서 그는 소설과 이야기를 구분하면서 이야기가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반해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은 공유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에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라는 서사예술은 대를 이어 구전되며 사람들에게 지혜를 선사하는 반면, 소설은 고독한 개인에 기반하며 자신을 고립시킨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의 등장은 이야기의 몰락을 뜻한다. "요컨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사적인 것"이 뻔뻔스럽게 영역을 확장해가는 현상이야말로 이야기의 정신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주범이다."(482쪽) 

이렇듯 벤야민이 이야기와 소설을 대비시켜가며 소설을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가 진리의 서사적 측면으로서 지혜를 공유하는 언어의 개방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통풍상태가 열악하다"고 말한다.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자유로움을 인류는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밀하고 관례적이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토론"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며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구현하는 서사능력의 일깨움으로서 "언어" 능력 자체를 빼앗아간다.

그러하기에 그의 글은 "언어" 능력을 어떻게 구사해야하는가의 범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리의 서사적 측면으로서 인류의 지혜를 어떻게 언표해야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그 자체로 이해가능하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정보" 대신 이야기하는 기술을 시전하는 것이다. 그가 예시한 두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나는 헤벨의 「뜻밖의 재회」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 스웨덴의 팔룬 지방에 젊은 광부와 그의 아름다운 약혼녀가 살았다. 젊은 광부는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무너진 광산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로부터 50년후 1809년 팔룬지방의 광부들은 광산 속 흙과 황산염에 파묻힌 그 젊은 광부를 발견한다. 황산염에 파묻힌 덕에 그 젊은 광부의 모습은 마치 조금전까지도 살아있었던 것처럼 50년전 그대로이다. 그의 가족, 친지는 모두 죽어 없고, 백발의 약혼녀만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슬퍼하기보다는 기쁨에 차서 젊은 광부임을 알아본다. 그녀는 젊은 광부의 유일한 연고자로서 젊은 광부를 자신의 침실에 들인 뒤 하루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교회에 안치시킨다.

또 하나는 헤르도토스의 『역사』에 있는 사메니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포로로 잡혔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사메니투스를 모욕하기 위해 이집트의 포로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사메니투스를 세워두었다. 자신의 딸이 하녀의 모습으로 물을 긷는 모습, 사형대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아도 아무 미동도 않던 사메니투스가 그의 늙은 시종을 보고서 비로소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었다. 

이 두 이야기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각자의 삶에 녹여 자기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벤야민은, 정보는 이야기가 갖는 이러한 진폭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팔룬 지방의 젊은 광부가 광산 속에 파묻혀있던 50년동안 유럽 각국은 전쟁을 하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헤벨의 「뜻밖의 재회」에서 젊은 광부와 그의 늙은 약혼녀의 50년만의 재회는 이러한 연대기적 사건의 나열과 대비되는 "자연사"로서 빛을 발한다. 

이야기가 인간의 삶과 맺는 방식은 수많은 기억들을 이어주며 그 기억 속의 삶에 영속성을 불어넣어준다. 반면 소설은 죽음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기억이 "삶의 의미"를 얻는다. 소설은 실제적 삶을 살지 못한 "선험적 고향상실성의 형식"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은 교환불가능한 고립된 운명의 불꽃을 태움으로써 역시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립된 운명의 독자들을 데운다. 죽음이 삶을 데우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서 삶의 불꽃을 태우는 이야기꾼과 대비된다.

벤야민이 이 글을 썼던 1930년대 소설은 아마도 장르의 시대적 성격이 지금의 소설과는 다른 것 같다. 왜냐하면 벤야민의 글에서 대비되는 이야기와 소설 각각의 장르적 성격은 지금에 와서는 중첩되기도 하고 반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기억의 뮤즈로서 이야기가 공동체의 언어의 장으로 더이상 작동되지 못한다는 점이며, 인간과 인간을 자유롭게 통풍하는 언어적 능력이 "정보"의 능력에 밀려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신즉물주의"를 그토록 경계하고 비판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벤야민이 경고한 대로 지금의 시대는 '작품을 보는 법, 즉 작품의 사실내용과 진리내용이 어떻게 삼투하는지를 해명하는 법'(575쪽)을 모르고 그저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글쓰기만이 만연하다. 요약되지 않는 그의 글쓰기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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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은 조계산을 등지고 다도해와 면한 작은 읍이다. 식민지기 벌교읍은 해산물의 중간집산지였다. 1921년 <금곡상회(金谷商會)>라는 상업회사가 들어선 이후 일본인들이 모여들었고, 벌교면이 읍으로 승격된 1938년에는 일본인 호수 140호, 인구는 562명이었다. 당시 벌교읍의 총 호수는 4670호, 인구는 2만2870명이었다. 벌교읍에는 조선인학교인 벌교공립보통학교와는 별도로 일본인학교인 벌교북소학교가 있었다. 1945년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벌교 출신의 일본인들이 만든 모임이 <벌교회>이며, <벌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간행한 문집이 『벌교문집』이다.

<벌교회>는 1978년 10월 8일 히로시마에서 첫 대회를 가진 이후 1990년대까지 2년에 1회 정기회합을 개최했으며(1978~84년까지는 매회 개최), 『벌교문집』은 1989년 12월 15일자를 끝으로 폐간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일본인들의 각종 동창회와 향우회 등은 1965년 <한일협정>과 한일국교수교를 계기로 결성된 이래 한국방문과 문집간행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바, 대체로 1990년대 이후 그 활동이 점차 사그라진다. <벌교회> 역시 그 '전형'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1970~80년대에 걸쳐 모교방문, 정기회합, 문집간행 등의 활동을 벌였고, 문집의 내용에 있어서도 "마음의 고향"(心の故郷)을 키워드로 조선에 살았던 풍요로운 시절과 귀환과정 및 그 직후 살기 어려웠던 시절을 대비하며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렇듯 그들이 '식민지 조선'을 "고향"으로 서사화하고 한국("모교')방문 활동을 지속하는 까닭을, 제국주의에서 국민주의로 변모하는 戰後 일본의 국민적 동일성에서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정치에 대한 문화적 저항'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하필 "후루사토"(故郷)인가, 그리고 그 활동시기가 1960~80년대에 집중되는가를 해명하지 못했다. 단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고향"이겠고, <한일협정> 이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겠고, 회원의 연령이 점차 높아가고 새로운 회원이 영입되지 못하는 구조라는 '상식'에 의거했을 뿐이다. 그러나 귀환 후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복잡한 시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식'에 의거한 전제들을 재고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후 일본의 '상식' 그 자체에 제국-식민지의 역사에 대한 '은폐'와 '폭로', '성찰'과 '회귀'가 얽혀있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서 그들의 복잡한 시선이 배태되기 때문이다.

『문집』은 표면상 식민지 근대의 문화사를 보여준다.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이 얼마나 근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식민지 당시의 문화유산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를 말한다. 그들의 고향은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상실의 고향"이지만 한국에서는 성장의 발판이 되는 "밑그림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향은 '조선'의 전통과 '일본'의 근대 모두를 담고 있다.  

1919년 설립된 벌교금융조합 건물 (*출처:『벌교문집』)

 

등록문화재 226호 2005년지정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벌교읍의 홍교(왼쪽)과 쇼와다리(오른쪽) (*출처:『벌교문집』)

일본인은 홍교를 "메가네하시"(안경다리)라고 불렀다. 홍교는 영조 때 지은 아치형(무지개형) 다리이다. 쇼와다리라는 다리이름은 '쇼와'(昭和) 6년[1931년]에 세워진 것이기에 붙여진 것인데, 해방 이후에도 소화다리로 불렸다.  

현재 벌교홍교 (*출처: 보성군청 홈페이지) 

 

 

 

1937년 벌교읍 승격기념 마츠리 (*출처: 『벌교문집』)

 

벌교의 운송회사 '산양자동차' (*출처:『벌교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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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인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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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인'을 위한 경성 및 조선의 여행안내도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제작되었다. 한일합방(1910년) 이전의 경성안내도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08년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한 京城案内記 -京城市街全図及市街全景写真』가 있다. 동경경제대학 도서관 사이트에서 열람가능하다. (http://repository.tku.ac.jp/dspace/handle/11150/2248) 이밖의 경성관광안내도에는 일반적으로 전차노선과 주요건물 및 관광지가 표시되어 있다. 큐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사이트에서 다양한 경성도와 사진을 열람할 수 있다. (http://matsu.rcks.kyushu-u.ac.jp/lab/?page_id=705)

본 지도는 1928년 제작발행된 것으로 발행소는 경성이다. 조선여행안내소를 보면, 온천지 표기가 가장 눈에 띈다. 이것은 '내지인'을 위한 안내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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