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은 조계산을 등지고 다도해와 면한 작은 읍이다. 식민지기 벌교읍은 해산물의 중간집산지였다. 1921년 <금곡상회(金谷商會)>라는 상업회사가 들어선 이후 일본인들이 모여들었고, 벌교면이 읍으로 승격된 1938년에는 일본인 호수 140호, 인구는 562명이었다. 당시 벌교읍의 총 호수는 4670호, 인구는 2만2870명이었다. 벌교읍에는 조선인학교인 벌교공립보통학교와는 별도로 일본인학교인 벌교북소학교가 있었다. 1945년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벌교 출신의 일본인들이 만든 모임이 <벌교회>이며, <벌교회>에서 정기적으로 간행한 문집이 『벌교문집』이다.
<벌교회>는 1978년 10월 8일 히로시마에서 첫 대회를 가진 이후 1990년대까지 2년에 1회 정기회합을 개최했으며(1978~84년까지는 매회 개최), 『벌교문집』은 1989년 12월 15일자를 끝으로 폐간했다.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일본인들의 각종 동창회와 향우회 등은 1965년 <한일협정>과 한일국교수교를 계기로 결성된 이래 한국방문과 문집간행 등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바, 대체로 1990년대 이후 그 활동이 점차 사그라진다. <벌교회> 역시 그 '전형'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1970~80년대에 걸쳐 모교방문, 정기회합, 문집간행 등의 활동을 벌였고, 문집의 내용에 있어서도 "마음의 고향"(心の故郷)을 키워드로 조선에 살았던 풍요로운 시절과 귀환과정 및 그 직후 살기 어려웠던 시절을 대비하며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렇듯 그들이 '식민지 조선'을 "고향"으로 서사화하고 한국("모교')방문 활동을 지속하는 까닭을, 제국주의에서 국민주의로 변모하는 戰後 일본의 국민적 동일성에서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정치에 대한 문화적 저항'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하필 "후루사토"(故郷)인가, 그리고 그 활동시기가 1960~80년대에 집중되는가를 해명하지 못했다. 단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고향"이겠고, <한일협정> 이후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겠고, 회원의 연령이 점차 높아가고 새로운 회원이 영입되지 못하는 구조라는 '상식'에 의거했을 뿐이다. 그러나 귀환 후 한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복잡한 시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식'에 의거한 전제들을 재고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후 일본의 '상식' 그 자체에 제국-식민지의 역사에 대한 '은폐'와 '폭로', '성찰'과 '회귀'가 얽혀있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서 그들의 복잡한 시선이 배태되기 때문이다.
『문집』은 표면상 식민지 근대의 문화사를 보여준다. 한국방문을 통해 한국이 얼마나 근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식민지 당시의 문화유산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를 말한다. 그들의 고향은 일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상실의 고향"이지만 한국에서는 성장의 발판이 되는 "밑그림의 고향"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향은 '조선'의 전통과 '일본'의 근대 모두를 담고 있다.
1919년 설립된 벌교금융조합 건물 (*출처:『벌교문집』)
등록문화재 226호 2005년지정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벌교읍의 홍교(왼쪽)과 쇼와다리(오른쪽) (*출처:『벌교문집』)
일본인은 홍교를 "메가네하시"(안경다리)라고 불렀다. 홍교는 영조 때 지은 아치형(무지개형) 다리이다. 쇼와다리라는 다리이름은 '쇼와'(昭和) 6년[1931년]에 세워진 것이기에 붙여진 것인데, 해방 이후에도 소화다리로 불렸다.
현재 벌교홍교 (*출처: 보성군청 홈페이지)
1937년 벌교읍 승격기념 마츠리 (*출처: 『벌교문집』)
벌교의 운송회사 '산양자동차' (*출처:『벌교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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