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選詳圖』는 식민지기 중학교의 지리교과용으로 편찬된 지도첩이다. 이 지도첩을 간행한 제국서원(帝国書院)은 1917년 설립된 민간출판사로 주로 중학교용 지리교과서와 지리첩을 출간했다. 제국서원의 설립자 모리야 스사비오(守屋荒美雄)는 주로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을 출간했는데,  『新選詳圖』의 저자 또한 모리야 스사비오이다. 1934년 초판 발행한 『新選詳圖』는 지리첩 중에서 최고의 발행부수를 기록하며, 지금까지 제국서원이 사회과교과서와 지리첩 출판사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음의 『新選詳圖』는 세계편과 제국편의 두 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제국편은 일본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제국의 각 지방도를 담고 있다. 문부성, 조선총독부검정판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내지'의 것과 달리 조선총독부의 검정을 별도로 받아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소장하고 있는『新選詳圖』 세계편은 1936년에 발행한 삼정판(三訂版)으로, 총 76개의 지도와 색인과 부록의 세계주요통계를 싣고 있다. 

 

 

『新選詳圖』 세계편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전세계의 영토가 일본을 위시해, 만주국, 중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루투칼, 소비에트연방, 미국, 덴마크 등에 의해 분할되었음이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유럽과 아시아가 비교적 다른 대륙에 비해 주요도시부까지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新選詳圖』제국편에는 총 69개의 지도와 색인과 일본지리통계표 등의 부록이 담겨있다. 지도는 수도를 시작으로 일본제국이 영토를 확장한 순서대로 편찬되었다. 즉 관동지방, 중부지방, 근기지방(오사카, 고베, 교토), ... 큐슈지방, 대만, 북해도, 사할린, 조선지방, ... 만주국 등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다음의 <제국의 팽창>이라는 부제의 지도를 보면, ①1875→②1895년→③1905년→④현재(1935)의 연대기 순서대로 일본제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新選詳圖』가 복간되었고, 원본 또한 중고서적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거래되는 것으로 보아 희귀본은 아닌 것 같다. 조선에서 출간된 조선총독부검정판은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각 대학도서관에서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도 식민지기 조선의 "중학교"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던 탓인 것 같은데, 조선총독부검정판보다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온  『新選詳圖』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좀더 알아보아야 할 부분이다. 일본 내지에서 출간된 것과 조선총독부검정판과 어느 부분이 얼마나 내용이 다른지를 비교분석한다면, 제국에서의 제국에 대한 시선과 식민지에서의 제국에 대한 시선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음은 『新選詳圖』제국편에 실린 경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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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식민지기 조선인 제자가 일본인 스승에게 보낸 것이다. 이 조선인은 창씨개명을 하여 "오오이시 히사오"(大石久雄)라는 이름을 가졌다. "오오이시 히사오"는 편지에서 지난날 스승의 가르침을 감사히 여기며 스승의 안부를 묻고 있다. 또 자신이 일본군에 왜 지원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면서 지원병에 합격하면 스승을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식민지기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 대한 연구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병력동원'의 강제성을 부각하는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편식에 의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사회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지원병 제도와 그 실태에 대한 연구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1938년 4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되었고, 1943년 8월 1일 병역법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전까지, 조선인은 강제징집의 대상이 아니었다. 1944년 징병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조선인은 청년특별연성소(대개 소학교에 부설)에서 일본어와 교련 등의 예비군사훈련(총 600시간, 대개 일본인 소학교 교사에 의해 지도)을 이수한 후 일본군 부대에 배치되었다. 병역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조선인 특별지원병은 16,380명으로 추산된다. 1943년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된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지원병은 육군에 한해 지원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그 이후에는 해군에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된 이후, 오히려 지원병의 조선인 경쟁률은 더욱 높았다. 그것은 지원병의 경우, "예과련"(予科練), 즉 예과연습생으로 지원하여 장교로 편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했다(해군은 지원병만 받았다). 1944년 10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비행기 자체로 군함을 격퇴하는 "카미가제"라는 새로운 전술이 해군을 중심으로 도입되었고 소위 이 전술을 주무기로 하는 이른바 "카미가제" 특공대라 통칭되는 각종 부대가 해군과 육군에 설치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 "카미가제" 특공대원이 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 중에도 "카미가제" 특공대에 지원한 이들이 있다. 해군특별지원병으로 전쟁동원된 조선인은 12,166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292명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또 "카미가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인은 이제까지 11명으로 확인된다. 

다음의 편지에서 징병제의 실시 이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지원한 어느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축하합니다.

삼가아룁니다.

포근한 남선(南鮮)의 하늘에 초겨울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왠지 모를 차가운 느낌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건강하게 열심히 지내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헤어질 때가 마치 어제 오늘 일처럼 선명하고 왠지 당시 선생님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며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군요.

되돌아보면 소학교 시절의 기억은 더욱 선생님과 한마음이었고, 선생님께서는 앞날의 우리들에게 밝은 광명을 비춰주셨습니다. 회고의 정이 새록새록 합니다.  

선생님의 자애심 깊은 눈동자와 열의에서 사람의 힘을 쑥쑥 끌어당기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청아한 졸업식 날, 신사의 마을의 어느 나무 아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졸업 후의 사회생활의 상식에 대해 친절하고 정중하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해주시며 감격에 젖으셨지요.

짧은 인생길에서 어느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의 사랑에서 인간 최고의 극치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지요.

우리 일본인들에게 부모인 것이지요.

단순히 성인(聖人)의 말이나 철학 또는 어려운 논문에는 여러가지 도덕적인 언사나 그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들이 씌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의 사랑을 그 말로부터 향기를 내오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당연한 것 같은 어려운 격언이나 성인이 한 말은 어떤 범인이라도 주창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실제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을 때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중한 시국의 우리들에게는 조금도 유예할 시간이 없습니다.

레이테섬[각주:1]이야말로 천하의 명분이 달려있는 결전장입니다.  

"아카사카타이"(

 

新年明けまして

お目度ふ御座います。

拝啓

南鮮木枯となくぞっとする程冷たひじの時節相成りました折柄先生には御変りなく元気すて精勵せられる拝察致します

先生におれてはまだ昨日今日心地いたしとなく当時先生面影目前かんで感慨無量なものがあります

ふれば早五年!!歳月たず々としてれてゐます

顧見ますれば小学校時代記憶一層先生びついて前途るい光明へてくれる更回顧ってくろのであります

先生慈愛深とはぐんぐんときつける魅力ぜられてります

卒業@神社のお卒業後ける々にする社界常識懇切丁寧なる言葉とをふし感激へません

短期人生間いて何物つけ非常しいではありますがキリストやソクラテスの人間最高極致つけ出来るのであります

豈吾日本人いておやであります

聖人とか哲学とかしい論文とには々な道徳的唯形式的れるかれてゐるのであるとふのでありますがキリストのきかととをその言葉から又実践したいものとゐます

さういふしい格言とか聖人った言葉はどんな凡人でもへるはできます

しそれを実践にうつしその実践した実際国家貢献こそいものであるといます

@@なる時局@@々の一寸猶豫へません

レイテこそ天下分目決戦場であります

若桜隊切込隊万朶隊等青年将校であり殉国志士強者であります

よりも鴻毛よりもしと緃容[従容]として敵艦船体当りを敢行悠久大儀きてゐます

あの後次世こそ不信実行々なる賜物であり実践かであります

@中健児待望予科練であり特幹であります小生断乎として志望しました

見事轟沈した写真りたひと無邪気幼時心境又吾青年意気をいやが@@軒日切するものがあります

じて予科練志望するそして見事合格栄光獲得するのが小生本望であります其日一月下旬太田まで旅行せられます予定であります見事合格したには一度先生面会かうと(@天郵便局金赫君りますと自分もどうかと一緒ぼしてゐます

一九年度意気ある後四五日れてきます

どうか先生御元気御修養程祈ってりません

では無事新年御迎へしまして御精進下さらん事切@@@@りません

恩師

昭和一九年一二月二十五日

大石久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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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단인용을 금합니다.

 

  1. 레이테Leyte) 제2차세계대전 때 미국과 일본 간의 전투가 벌어진 필리핀의 섬. 레이테만 전투는 1944년 10월 20일 미국이 레이테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레이테는 태평양의 군사지배권을 결정짓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미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세를 확정지었다. [본문으로]
  2. 1944년 10월 21일 출격한 제1진의 카미가제 특공대 중 하나. [본문으로]
  3. 적진에 돌진하는 부대. [본문으로]
  4. 일본육군항공대의 특별공격대. 1944년 10월 21일 비행사단으로 편성되었다. [본문으로]
  5. 군인칙유(軍人勅諭)의 일부를 변형하여 만든 가사. 군인칙유는 1882년 메이지 천황이 육해군의 군인에게 내린 칙유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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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또 하나의 논문. 앞서 번역한 후지타의 논문과 비교해서 좀더 분명하게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그의 평가가 집약되어 있다.  

※ 아래 두 장의 사진의 출처는 2009년 게이오의숙 창립 150주년 기념 일본 국내 순회 전시한 福沢諭吉展의 도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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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における福沢の選択」[유신에서 후쿠자와의 선택]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막부 말기 전국적인 환란의 한복판에서 단 한 곳, 마치 에도시대의 "데지마"(出島)[각주:1]처럼 후쿠자와의 학원[塾]만이 '책을 읽는' 문명을 논한 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그들이 창 밖의 도막(倒幕)의 싸움의 총성소리를 들으며 '원서'를 읽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어쩌면 게이오의숙 사람들이 그것만이 이 나라의 명예로운 전통이라고 스스로 되새겨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게이오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이도 그것을 어느 때는 지침으로, 또 어느 때는 자숙의 기준으로 삼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쿠자와가 그렇게 한 이유 혹은 동기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전통'으로 자부할 때에도, 또 그것을 '교육'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의외로 언급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그 점이 언급된다 해도 극히 단순히 후쿠자와는 '공부를 좋아했다'거나 '정치를 싫어했다'라는 성향으로 환원되고, 그도 아니면 '학자의 본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후쿠자와의 교육자적 관심만을 그 동기로 치부한 경우도 많다.

  위의 경우에 후쿠자와의 행동은 일본전래의 예의 '미담'의 하나로 이야기되고, 그때에는 '학도'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비판이 봉쇄되는 경향마저 있다. 물론 후쿠자와는 전대미문의 '공부를 좋아한' 사람이며 매우 '정치를 싫어하는' 부류에 속했다. 또 일본에서 최초로 '학자'(오늘날로 말하면 인텔리겐차)의 고유한 '직분'(Beruf)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친 사람이다. 

  그런데 후쿠자와가 유신도막(維新倒幕)의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탄환이 날아다니고 백도(白刀)가 춤을 추는 에도의 거리에서 감히 한가롭게 공부에 전념했던 것은 위와 같은 이유뿐만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그는 '막부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다. 또한 그는 번(藩)에 대해서도 '안중에 없는 번'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부모의 원수'처럼 생각했던 막번 체제가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 모셔두었던 칼을 휘두를 법도 했지만 반대로 가지고 있는 칼을 구태여 팔아버리고, 부랑, 난폭, 암살이 횡행하는 격란의 에도의 시내에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은 단정한 모습으로 지내며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한 데에는, 분명 '좋아함'이나 '가르침'을 넘어선 깊은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외에 남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극히 명료한 원리의 문제였다. 후쿠자와는 누구에게도 한발짝도 양보할 수 없는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모두가 무장한 상황에서 무장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 느낄만한 공포를 억누르고 무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같은 원칙에서 눈 앞에서 벌어지는 도막전쟁(倒幕戰爭)의 쌍방의 '주역'에게 '냉담함'을 요구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후쿠자와는 그의 원리에 입각해서 유신의 적극적 구상을 만들어내고자 했으며, 저 특정한 상황에서 저 특수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전투에 참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것이 온갖 내전 일반을 싸잡아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물론 정치적 무관심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확고한 보편적 원리와 함께 예리하며 거대한 정치적 리얼리즘이 그의 판단의 기저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도막전투의 시기 그의 '미행'[美擧]을 본받는다는 핑계로 '학자'로서 정치사회적 비판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이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후쿠자와의 원리적 태도(정신)를 심히 왜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로 하여금 단연코 '비무장'과 '불개입'을 결심케 했던 것과 동일한 원칙이 그에게 오로지 '원서'를 읽히게 했던 것이다. 

  그 원리·원칙은 무엇인가? 내가 '보물찾기'와 같이 그 '발견의 장면'을 짓궂게 미루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지금에서는 다 알려진 그의 원칙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저 유신의 상황에서 그의 원칙이 어떻게 관련되며 어떠한 행동과 어떠한 정신상태를 그에게 요구했는가 라는 핵심이 인상적으로 전달되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즉, 그 원칙이란 '문명'의 정신을 일본에 배양하여 확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쇄국' 체제를 부수고 '개국' 체제를 모색하는 것이 그 원칙의 첫 번째 귀결(corollary)이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입장에서는 막부말기의 '무력투쟁'에서 당사자 쌍방은 모두 비판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사바쿠"(幕: 도쿠가와 막부 말기 막부의 편에 들어준 당파)든 '근왕'(勤王)이든 누구 할나 것 없이 '양이(攘夷)·쇄국주의자'의 무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쵸닌"(人: 도시에 사는 상인과 장인)과 그 밖의 '하등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국의 "사무라이"라는 무사신분에 발 들여놓은 무리들은 "사바쿠"든 '근왕'이든 "술에 취한 듯이" 광기에 가득 찼다. 그 열광은 지적인 감동이 아니었다. 양쪽 다 '양이'(攘夷) 혹은 "사바쿠"라는 한 지점에 집착했을 뿐이다.

  막부는 종종 '개국'을 하는 것 같았고, 또 지난 후에 보면 '개국'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실을 아는 후쿠자와에게는 '천하제일의 양이번(攘夷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카츠 야스요시(勝安芳)[각주:2]조차 전력을 다해 '포대'(砲臺)를 만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막부는 얼마간 '개국'파의 외견을 띠었고 나아가 다소 '개국'적 행동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막부가 대외교섭에 맞닥뜨렸던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대외교섭이란 것은 군함 '흑선'과 그 포성에 의해 외부로부터 강제되었던 것이 아니던가. 즉 막부의 '개국'적 양상은 자기의 내적원리와는 어떤 관계도 없는 단순한 외적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여기서 백년 전의 '일본정치'의 역사적 모습의 정신적 모양새를 비추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이 나라는 군사적으로는 강제되지 않는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 백년 전도 지금과 같았다. 막부는 가능하다면 쇄국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립근거였기 때문이다. '양학자'(洋學者)라고 해도 그 상당수는 '양이'(攘夷)의 도구나 마찬가지였다. '근왕'파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양 파벌은 이렇게 '우락부락한' 어깨를 들먹이며 쇄국과 양이라는 막부 원리를 위해 맹렬한 싸움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막부의 붕괴였는데, 그들의 눈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막부의 붕괴 하에서, '문명'을 밀고간 '민권'을 확대하며 '국민'을 형성한 담당자가 있었는가? 없었다. '도막근왕파'가 만약 그 담당자였다면, 후쿠자와는 흔쾌히 그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이 후쿠자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폭력파'가 정치를 해야한다면 "도저히 이 나라는 세워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후쿠자와도 도막의 주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근왕파'의 일군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류의 '문명'의 진보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새로운 과제를 이끌어갈 힘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강했다. 사실 유신 후의 수다한 사례가 후쿠자와의 판단을 실증한다. 

  그리하여 후쿠자와의 학원만이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일부러 무장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의미와 경계를 내외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음산한 상황 하에서 단 한 사람만이 쾌활한 태도로 '문명'의 미래를 전망하며 그 신화의 습득과 구체화의 준비에 몰두했다. 그 성과는 드디어 '메이지'에 입성함과 동시에 사회공헌으로 출현했다. 만약 메이지 유신에 '문명'을 원리적으로 추진한 사회적 변혁의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 유신변혁에서 최고의 '유신'적 측면은 후쿠자와에게서 상당부분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역사의 한 꼭지, 즉 유신에서의 후쿠자와의 선택과 후쿠자와에서의 유신의 실현, 이 둘의 역설적인 결합은 작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1. "데지마"(出島) 1634년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의 일환으로서 나가사키에 축조된 인공섬으로,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달란드와의 교역이 행해졌다. 192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본위키피디아) [본문으로]
  2. 1823-1899.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의 정치가. 사무라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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