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식민지기 조선인 제자가 일본인 스승에게 보낸 것이다. 이 조선인은 창씨개명을 하여 "오오이시 히사오"(大石久雄)라는 이름을 가졌다. "오오이시 히사오"는 편지에서 지난날 스승의 가르침을 감사히 여기며 스승의 안부를 묻고 있다. 또 자신이 일본군에 왜 지원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면서 지원병에 합격하면 스승을 찾아가겠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식민지기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 대한 연구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병력동원'의 강제성을 부각하는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편식에 의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사회를 다각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지원병 제도와 그 실태에 대한 연구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1938년 4월 3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시행되었고, 1943년 8월 1일 병역법을 개정하여 조선인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전까지, 조선인은 강제징집의 대상이 아니었다. 1944년 징병제에 의해 강제징집된 조선인은 청년특별연성소(대개 소학교에 부설)에서 일본어와 교련 등의 예비군사훈련(총 600시간, 대개 일본인 소학교 교사에 의해 지도)을 이수한 후 일본군 부대에 배치되었다. 병역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조선인 특별지원병은 16,380명으로 추산된다. 1943년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된 이후에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지원병은 육군에 한해 지원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그 이후에는 해군에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인에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된 이후, 오히려 지원병의 조선인 경쟁률은 더욱 높았다. 그것은 지원병의 경우, "예과련"(予科練), 즉 예과연습생으로 지원하여 장교로 편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군비행예과연습생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했다(해군은 지원병만 받았다). 1944년 10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비행기 자체로 군함을 격퇴하는 "카미가제"라는 새로운 전술이 해군을 중심으로 도입되었고 소위 이 전술을 주무기로 하는 이른바 "카미가제" 특공대라 통칭되는 각종 부대가 해군과 육군에 설치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 "카미가제" 특공대원이 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조선인들 중에도 "카미가제" 특공대에 지원한 이들이 있다. 해군특별지원병으로 전쟁동원된 조선인은 12,166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292명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또 "카미가제" 특공대로 전사한 조선인은 이제까지 11명으로 확인된다.
다음의 편지에서 징병제의 실시 이후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지원한 어느 조선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새해가 밝아옵니다. 축하합니다.
삼가아룁니다.
포근한 남선(南鮮)의 하늘에 초겨울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왠지 모를 차가운 느낌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건강하게 열심히 지내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헤어질 때가 마치 어제 오늘 일처럼 선명하고 왠지 당시 선생님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며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군요.
되돌아보면 소학교 시절의 기억은 더욱 선생님과 한마음이었고, 선생님께서는 앞날의 우리들에게 밝은 광명을 비춰주셨습니다. 회고의 정이 새록새록 합니다.
선생님의 자애심 깊은 눈동자와 열의에서 사람의 힘을 쑥쑥 끌어당기는 매력을 느꼈습니다.
청아한 졸업식 날, 신사의 마을의 어느 나무 아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졸업 후의 사회생활의 상식에 대해 친절하고 정중하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해주시며 감격에 젖으셨지요.
짧은 인생길에서 어느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의 사랑에서 인간 최고의 극치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셨지요.
우리 일본인들에게 부모인 것이지요.
단순히 성인(聖人)의 말이나 철학 또는 어려운 논문에는 여러가지 도덕적인 언사나 그저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들이 씌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의 사랑을 그 말로부터 향기를 내오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소수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당연한 것 같은 어려운 격언이나 성인이 한 말은 어떤 범인이라도 주창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실제로 국가에 기여할 수 있을 때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중한 시국의 우리들에게는 조금도 유예할 시간이 없습니다.
레이테섬이야말로 천하의 명분이 달려있는 결전장입니다.
"아카사카타이"(若桜隊), "키리코미타이"(切込隊), "반다타이"(万朶隊) 등은 모두 결연한 청년장교이며 순국지사의 강자입니다.
"의는 산악보다도 무겁고 죽음은 깃털보다도 가볍다"고, 침착하게 적의 함선에 혼신을 감행하는 유구한 대의에 살아갑니다.
그 엄연한 실행 후의 다음 생이야말로 불신실행의 열열한 선물이며 실천이지 않겠습니까.
건아의 대망은 예과련이며 특공대 간부입니다. 소생은 단호하게 지원했습니다.
"멋지게 폭격한 전함을 어머니에게 사진"으로 보내고 싶다고 제 맘대로 노래하는 유년시절의 심경도, 나아가 우리들 청년의 기개도 점차 기일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결연히 예과련을 지망해서 멋지게 합격의 영광을 획득하는 것이 소생의 숙원입니다. 그 날은 1월 하순경이 될 것이며 대전까지 여행할 예정입니다. 멋지게 합격한 후에는 한번 선생님께 찾아뵙고자 합니다. 순천우체국의 김혁군에 말했더니 자기도 함께 가자고 합니다.
[쇼와] 19년의 기개에 가득찬 해도 어느덧 5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선생님께서는 늘 건강하시고 수양하시길 기도합니다.
은사에게
쇼와19년[1944년] 12월 25일
오오이시 히사오
[원문]
新年明けまして
お目度ふ御座います。
拝啓…
暖い南鮮の空を木枯の吹く音が聞へ何となくぞっとする程冷たひ感じの時節と相成りました。此の折柄先生には御変りなく元気すて精勵せられる事と拝察致します。
先生にお別れてはまだ昨日今日の様な心地いたし何となく当時の先生の面影が目前に浮かんで来て感慨無量なものがあります。
@ふれば早五年!!歳月は人を待たず悠々として流れてゐます。
顧見ますれば小学校時代の記憶は一層先生の心と結びついて前途に明るい光明を與へてくれる様に@更回顧の情が湧き起ってくろのであります。
先生の慈愛深き瞳と熱とはぐんぐんと人の力を引きつける魅力が感ぜられて参ります。
晴の卒業の際@は神社のお村の木の下で卒業後に於ける我々に対する社界の常識と懇切丁寧なる餞の言葉とを@ふし、全く感激に堪へません。
短期の人生間に於いて或る何物か尊い物を見つけ出す事は非常に難しい事ではありますが又キリストやソクラテスの好く人間最高の極致を見つけ出す事が出来るのであります。
豈吾々日本人に於いておやであります。
単に聖人の言とか哲学とか又は難しい論文とには色々な道徳的な事や唯形式的に流れる事が書かれてゐるのであると思ふのでありますが、キリストの好きかと愛とをその言葉から響き出し又実践した人は小いものと思ゐます。
唯さういふ様な難しい格言とか又は聖人が言った言葉はどんな凡人でも唱へる事はできます。
然しそれを実践にうつしその実践した事が実際に国家に貢献し得る事こそ誠に尊いものであると思います。
@@なる時局の@@は吾々の一寸の猶豫を與へません。
レイテ島こそ天下分目の決戦場であります。
若桜隊、切込隊、万朶隊等は皆@顔の青年将校であり殉国志士の強者であります。
「義は山嶽よりも重く死は鴻毛よりも軽しと」緃容[従容]として敵艦船に体当りを敢行し悠久の大儀に生きてゐます。
あの尊き後次世こそ不信実行の烈々なる賜物であり実践かであります。
@中健児の待望は予科練であり特幹であります。小生は断乎として志望しました。
「見事轟沈した敵艦を母へ写真」で送りたひと無邪気に歌ふ幼時の心境も又吾々青年の意気をいやが上@@軒日切するものがあります。
断じて予科練を志望するそして見事合格栄光を獲得するのが小生の本望であります。其日は一月下旬で太田まで旅行せられます予定であります。見事合格した@には一度先生に面会かうと(@天郵便局の金赫君)に語りますと自分もどうかと一緒@と@ぼしてゐます。
一九年度の意気ある年も後四、五日で暮れて行きます。
どうか先生@は御元気@て御修養の程祈って止りません。
では無事に新年を御迎へしまして命@御精進下さらん事切@@@@止りません。
恩師へ
昭和一九年一二月二十五日
大石久雄 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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