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마루야마 마사오 특집호에 실린 또 한편의 논문을 번역했다.

근대사상가로서 마루야마의 면모는 일본의 정치사상가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하며 정치사상사를 재구성했다는 데에 있다. 마루야마는 독일의 현대사상가들의 이론을 방법론의 도구 삼아 일본의 정치사상가들을 근대사상가로 '발견'하고 발굴했다. 마루야마의 이러한 작업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근대사상에 일본의 시대적 맥락의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사상에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은 서구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입되는 과정을 사상가들의 사유를 통해 소상하게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현대의 최신 사상을 연구한다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다음의 논문은 마루야마가 만하임, 베버, 헤겔의 이론을 통해 후쿠자와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을 다룬다. 결국은 마루야마의 분투는 슈미트와의 가상적 대결로 집약되고, 20세기 인류사를 결정 지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인식론적 토대가 동일한 근대적 사유체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김항, 슈미트, 그리고 다음의 논문을 조합하여 마루야마의 근대성에 대한 나 나름의 사유를 정리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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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론

「「虚妄」に賭けることは可能か?丸山真男にとっての福沢諭吉」

‘허망’에 건다는 것이 가능한가?  

마츠다 코우이치로우(松田宏一郎)

 

1. ‘이데올로기’와 ‘사유범형’(思惟範型)

 

마루야마 마사오는 사상사가로서 ‘후쿠자와 연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후쿠자와 독해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 때문에 후쿠자와의 사상보다도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왔다. 그러나 이 관심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마루야마가 그려낸 후쿠자와의 이미지는 과도하게 이상화되었고, 반대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영향권에 휩쓸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을 간과했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마루야마는 자신이 후쿠자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후쿠자와의 논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경험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있지만, 그가 그 정도로 후쿠자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연구의 초기부터 “사람들은 일본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후쿠자와의 구체적인 비판의 적확함과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겨 그 비판의 근저에 흐르는 사유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즉 마루야마는 자신이야말로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을 비판적으로(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검토한다고 자부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첨예한 사안을 다루었다거나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어떤 의도에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를 자신은 알고 있다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저술에서 제기된 사항에 대해, 일단 자신의 ‘시좌’(視座)를 감추며 말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재구성하는 작업공정에, 무엇보다도 후쿠자와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마루야마가 생각했다)는 점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보기에 오규 소라이와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고는 일본 역사상 그러한 타입의 사상가가 극히 소수였을 것이다. 후쿠자와가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을 의식했다는 것, 즉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어떠한 원칙에 따르며 그것이 어떠한 도구와 스타일로 논해질 수 있을까를 의식했다는 것이 일본사상사의 예외적 사례이며, 마루야마에게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자신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의식이 좀처럼 생겨나기 어렵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도 말해지듯이 마루야마의 전제였다.

나아가 후쿠자와의 ‘방법’의 발견은 마루야마 자기의 ‘방법’의 발견이었다. 어쩌면 마루야마는 1942년의 논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비판」에서 자기의 발견을 의식했을 것이다. 혹은 후쿠자와를 일본의 만하임으로 논하고 싶은 희망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이데올로기 폭로’에서 ‘이데올로기론’으로 후쿠자와의 논의가 ‘성숙’하고 있다고 논한 것은, 후쿠자와가 단지 유교의 표면적인 덕목이 현실의 권력구조를 은폐하고 지배관계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허위’라고 폭로하고 그 해학을 밝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 ‘사유범형’(Denkmodelle, 만하임의 용어)으로서 ‘역사적 사회구조와의 조응성’을 검토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즉 적대의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 그 허위성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회구조’(geschichtlichen gessellschaftlichen Struktur)가 어떻게 사람들의 ‘사유’나 ‘시좌구조’를 구속하는가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우수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온갖 입장을 특정한 상황에서의 원근법적 인식으로 의식하기에, 어떠한 테제에서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거부하고 독자에게도 자기의 퍼스펙티브의 배후에 다른 퍼스텍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의 세계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다.”

온갖 테제의 이면을 들추어 원근법(퍼스펙티브)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라는 것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무한한 생각의 깊이는 그 배후에서 얼마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 존재’라 부르기에는 근거가 기이하다. 이것은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정치학자 1889~1974)가 말했던, 마루야마의 학생시절 논문 「정치학에서 국가 개념」(1936년)에 대해 ‘존재피구속성’(Seinsverbundenheit des Denkens)이라는 것으로는 포지티브한 국가에 대해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와 연관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겠다.

물론 이것은 후쿠자와가 ‘사유범형’의 관찰자로 안주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마루야마 자신도 그렇게 안주하기를 원치 않았다.

마루야마의 견해에서 후쿠자와는 ‘역사적 사회구조’에 의한 ‘사유’의 구속이 어떻게 일어나며 무엇을 일으키는가 라는 문제를 명확화 했으며, 바로 이것을 자기의 ‘사유’의 ‘방법’으로 의식했고, 나아가 이 의식은 후쿠자와가 ‘가치의 분산화를 통한 국민정신의 유동화’를 과제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학문적 시도를 명기했다. 앞서의 인용문 외에도 마루야마는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이라는 표현을 했다. 즉 후쿠자와는 자기의 의지로 ‘퍼스텍티브’를 ‘유동화’할 수 있었다. 이른바 퍼스펙티브를 자기조작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주체임에 자부하며 나아가 그와 같은 주체의 성립을 ‘국민정신’으로 일으키고자 시도한 것이다. (‘국민정신’(Volksgeist)의 다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하임의 서술에서 이 ‘유동화’라는 말에 대응하는 부분은 다음의 인용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노라면 정치라는 영역에서 이론이 다양한 모습으로 분열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즉 사회의 유동성(sozialen Strome) 가운데 성립하는 개개의 의견[입장—만하임에 의한 보족]은 각각의 흐름 속에서 다른 지점에 서 있고, 그 지점에서 흐름 그 자체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유동화’에 대비되어 협소하게 경직된 퍼스펙티브에 대해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역사적 현실로서의 일본사회에 향해 있을 때, 거기에서 찾아낸 것은 온갖 형태의 정신의 화석화이며 그 필연적 결과로서 사회적 가치의 일방적 응집이었다.”

‘정신의 화석화’의 비유는 막스 베버에게서 찾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의 정신』(1920)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장차 이 철의 감옥에 살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거대한 발전이 끝날 그때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인가 혹은 옛 사상이나 이상이 부활할 것인가. 그러고도—그 어느 쪽이 되어도—어떤 종류의 기이한 거만함으로 분장한 기계적 화석(mechanisierte Versteinerung)으로 변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이 논문의 1905년 초판에서 이 부분은 ‘중국적 화석화’였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1905년판에 익숙하다고 하면 ‘중국적 화석화’(chinesische Versteinerung)라는 표현이 주는 임팩트는 좀 더 강했을 것이다.

좀 더 따져보면, 이 ‘중국적 화석화’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베버의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1904년)에서 ‘중국적 경직성’(chinesische Erstarrung)이 있다. Erstarrung은 ‘응고’ ‘굳어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마루야마가 이것을 Versteinerung[화석화]와 같은 내용의 개념으로 간주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전쟁 전 출간한 이 논문의 번역서인 『사회과학방법론』(1936년)에서 이 부분은 ‘지나인식(支那人式)의 무감각’으로 번역되었다. 나아가 이 인용문 바로 앞에 “‘역사적 개체’가 되는 자의 범위는 언제라도 유동적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도 ‘유동화’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베버의 논의를 정확히 살펴보면, ‘화석화’는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다다르기 전에 ‘정신이 없는 전문인, 심정이 없는 향락인’이 스스로를 ‘연료’(화석이기 때문에)로 ‘철의 감옥’에 계속 공급하는 사태를 말한다. 한편,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나타나는 ‘화석화’는 근대화의 장해가 되는 ‘사회와 정신의 응어리’이다. (‘응어리’는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논문의 chinesische Erstarrung가 힌트가 되었을지 모른다.) ‘연료’와 ‘응어리’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근대적 합리화 이전에 ‘중국적’ 합리화 같은 것이 있다는 베버의 빈정거리는(진지한 것이었나) 표현에 대해 후쿠자와는 ‘중국적’인 현상을 ‘반개’(半開)적 동양의 전형으로 보고, 일본이 조속히 그곳으로부터 탈출하자고 요청한다. 이 점에서 ‘화석화’의 비유는 후쿠자와론과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서도 마루야마는 ‘정신이 없는 전문인’이 천황제의 연료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사태를 암시하기 위해 ‘화석화’의 비유를 숨겨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에는 또 한 부분에서 ‘유동’에 대한 중요한 문단이 있다.

“사회과학적 인식의 ‘객관성’ 곧 경험적 소여는 늘 가치이념—이것만이 사회과학적 인식에 인식가치를 부여한다—에 기반하고 규정되며 이 가치이념으로부터 그 의의가 이해된다. … 우리들은 모두 생존의 의미를 엮어내는 궁극최고의 가치이념의 초경험적인 타당성을 무엇인가의 형태로 마음 깊이 믿고 있는데, 이 신념은 경험적 실재가 신념에 의해 의의를 획득하는 구체적인 여러 관점의 끊임없는 변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변동을 포함한다. … 가치관계의 구체적인 형성은 늘 유동적이며 인간문화의 유원(幽遠)한 미래에까지 변동해간다.”

즉 인식의 ‘객관성’은 부동의 가치이념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항상 ‘관점’을 ‘변동’시킴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픽션’과 ‘허망’

그렇다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어떻게 해서 ‘화석화’한 ‘국민정신’을 ‘유동화’했다고 본 것일까? 마루야마는 조금은 의외의 각도에서 그 논리들을 연결하는 이음새의 개념을 투입한다.

“앞서 우리는 후쿠자와의 주요한 명제가 모조리 조건적인 인식이며 이른바 괄호 친 이해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기서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을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유희이다’라는 명제는 그가 붙인 최대의 괄호일 것이다. 유희란 짐멜도 서술하듯이 인간 활동에서 그 모든 실체성을 사상(捨象)하고 형식화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픽션이다. 그리하여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 후쿠자와는 인생의 전체를 ‘흡사’[恰も]라는 괄호를 치고 그것을 픽션으로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의식하는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인용한 것처럼 확실히 후쿠자와는 “인생은 본래 유희이고 한 장면의 유희를 유희라 하지 않고 흡사 진정한 것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마루야마는 이것을 ‘픽션’ 개념과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은 큰 비약을 동반하는 논리적 재구성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퍼스펙티브’가 ‘존재피구속적’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입각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퍼스펙티브’를 위와 같이(‘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인식하고 그것을 ‘유동화’하고자 시도하는 자는 존재할 수 없다. 마루야마는 오규 소라이를 통해 ‘성인’(聖人)을 제도의 ‘제작자’로서 외부에 선 절대적 작위자로 논함으로써 퍼스펙티브(소라이의 경우는 ‘도’(道)였다)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내는 논리를 구축했지만, 후쿠자와에 대해서는 그러한 절대자를 상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픽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희인 인생을 “‘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픽션으로 판단한다”라는 후쿠자와 독해에 도움을 준 것은 마루야마가 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문제』(1917년)일 것이다. 확실히 짐멜은 ‘흡사’=als ob를 단서로 유희로의 진정성이 제도의 (‘형식’의) 실효성을 기초 짓는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사교는 유희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특히 존경하는 것처럼 ‘행한다’. 이것은 대개 거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유희나 예술이 현실로부터의 모든 일탈에 의해서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마루야마가 주로 언급하는 짐멜의 Gessellighkeit(사교)의 장 가운데에는 정치한 분석이 사교적 대화나 ‘교태’로 향하는 것과 같이, 짐멜의 관심은 내용적 가치를 ‘괄호 치는’ 사교상의 기능으로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짐멜은 같은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유희가 단순한 형식의 만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용이 어떠한 고유 가치를 가져서는 안된다. 즉 논의가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더 이상 사교적인 것이 아니다.”

덧붙이자면, 마루야마가 사용한 ‘괄호 치기’라는 표현도 직접적으로는 짐멜이 사용한 Aufhebung(변증법의 ‘지양’과 같은 말이면서, 실질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허공에 매단다는 뜻도 있다)에 대응된다. 다만 마루야마의 ‘괄호 치기’는 구키 슈조(九鬼周造 1888~1941)의 『‘삶’의 구조』(1930년)에서 ‘교태’[媚態]를 논한 부분에서 “실생활에 대항하는 괄호 치기”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괄호 치기’가 끝난 것은, 후쿠자와의 ‘국민정신의 유동화’의 프로젝트가 일본에서 ‘사교’ 공간의 자율적 가치를 확립한 후 한 단계 더 나아가 논의를 추진시키는 개념조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픽션’이 걸려든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라는 마루야마의 표현은 인간을 초월한 신앙과 자연에 기초하지 않는 ‘휴머니즘의 논리’만으로 ‘국민정신’이 스스로를 타고 넘어서는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픽션’이 매우 신뢰할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은 ‘픽션’에 의한 자기극복의 논리는 짐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개념』에도 Fiktion은 등장한다. 현실이나 역사가 어떻든 간에 ‘평등’이라든지 ‘자유’라는 일반적 이념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일단 ‘픽션’으로서 낱낱의 개인으로 해체하여 논리를 다시 짜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으로서의 ‘인간성의 순수개념’이 생생한 ‘개성’을 ‘외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맥락이 쌀쌀맞다(よそよそしいものであるという文脈で用いられている。).

무슨 이유에서인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않은데, 마루야마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픽션’ 개념에는 헤겔의 『순수법학』(1934년)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위 혹은 바깥의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권리주체’라는 fivtive한 사고방식이 왜 가능한가를 논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즉 권리주체의 권리(특히 사적소유권)은 국가의 실정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라는 마루야마의 사고방식은 무엇으로부터 뒷받침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객관적 법(objective Recht)과 달리,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주관적 법(subjective Recht: 실정법적 질서에 선행하는 권리)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점점 중요해진다. 즉 사적소유권이라는 제도를 보증하는 법 질서가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이며, 늘 변동하면서도 인간의 의지(Willkur)로 형성된 질서에 지나지 않으며 신의 영원의 의지나 이성이나 자연에 입각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는 경우이다. 특히 이와 같은 질서의 설립이 민주주의적 수속에 따라 행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객관적 법과는 달리 그 현실존재로부터 독립된 법, 그리고 객관적 법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것 이상으로 ‘법’(“Recht”)인 (주관적) 법이라는 사상은 법 질서에 의해 사적소유권의 제도가 폐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사적소유권의 제도]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관적 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왜 개인의 자유, 자치적 인격이라는 윤리적 가치에 연결되는가 라는 문제는 이 자유에는 항상 소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격으로 승인하지 않는 질서, 즉 주관적 법을 보증하지 않는 질서, 이러한 질서를 본래 법질서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헤겔의 논의와 조합하면 한층 더 명확해지듯이, 후쿠자와가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다”라고 마루야마가 논평할 때의 ‘휴머니즘’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이상주의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치적 인격’이라는 ‘픽션’ 이외에 근거를 가지지 않는 법=권리체계의 가능성을 후쿠자와가 구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법의 근본규범에 실체성을 상정하기 어려운 민주주의 국가에서야말로 ‘픽션’의 역할은 중요하다.

마루야마가 이렇게 후쿠자와를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1952년)에서 “자연법사상에서 국가이성의 입장으로의 과도기로서 『문명론의 개략』은 특수의 입지를 점한다”라는 기술은 조금 기묘하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에서 “유명론의 사회관”(121쪽)으로부터 “안과 밖이라는 두 계기에 의해 후쿠자와의 이른바 조숙한 성장을 이끌었던 국가이성(레종 데타) 사상은 언어가 가진 본래의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불가피하게 수반했다”(153쪽)라고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앞서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쿠자와가 스스로의 ‘사유방법’에 대해 성찰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개인이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과 국가가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문명론의 개략』에서 이미 행했다 라는 큰 줄거리를 잡아가고 있다.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은 적어도 초기의 논리구성을 보면, 이데올로기론을 픽션론으로 연결하며 이행시키고, 이 속에서 베버, 만하임, 헤겔을 억지로 공투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루야마의 싸움 상대는 그의 눈앞의 일본사회를 우선 놓아두면, 슈미트이다. 법을 기초 지은 근본규범이라는 ‘픽션’을 인간은 견딜 수 없다. 신 혹은 자연 혹은 단체로서의 국민을 실체로서 그대로 승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단주체가 나타난다는 것 이외에 법체계를 담보하는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에 마루야마는 매료되면서도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픽션’을 음미하며 선택하는 주체의 옹호는 이야말로 베버가 말한 ‘가치이념’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증보판 후기의 유명한 한 구절, “전후민주주의를 ‘허망’으로 보는가 아닌가는 결국에는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문제가 아니라 논자의 가치관에 걸려있다. …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실재’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에는 분명히 베버를 의식한 용어법이라 해도 마루야마의 ‘사유방법’의 언명이 존재한다. 더욱이 ‘방법’적으로 말하면, ‘대일본제국’의 ‘허망’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는 편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는 감동하지 않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전후(戰後)의 강연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람과 사상>(1971년)에서 그가 후쿠자와에서 ‘픽션’의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래 기본적으로 인생은 유희이다. 즉 허구이며 픽션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정작 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진폭의 흔들림을 막을 수 있다. … 이것이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결입니다.”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은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평”이라는 인생교훈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가령 후쿠자와가 결국 그러했다 하더라도 마루야마는 ‘전후민주주의’라는 ‘픽션’에 ‘방법’적으로 ‘내기’를 걸었던 것이 아니던가?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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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은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운 작업이었다.

김항의 이 논문은 2014년 8월 도우지샤대학(同志社大学人文科学研究所)의 『社会科学』44(2)에 실린 것이다.

근대의 사유의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상으로부터 '일본론'이라는 사유의 공백을 찾아나서는 그것이 공백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대가 안고있는 근원적인 사유의 불가능성과 연결짓는다. 그리고 일본정치사상사에서 사유의 공백으로 남은 불가능성이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된다"고 결론짓는다. 이 논의의 흐름은 그의 박사논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조선 혹은 해방후 한국으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사상적 지주였던 박종홍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는 그가 가진 특유의, 근대의 사유체계와 시대적 맥락을 연결시키고 정치사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성력을 볼 수가 없다. 박종홍의 사상적 이력을 슈미트에 대비시키고 만다. 밋밋하다. 한국어와 일본어 각각의 논문의 퀄리티가 이처럼 차이 나는 이유가 무얼까 싶다.

일부 중략했으며 역시 오역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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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範と事実のはざまで」[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론」—

 

1. 문제의 소재

사고는 그 한가운데에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내포한다. 이 공백은 사고주체의 인내, 논리의 치밀함, 언어능력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대상의 시공간적인 한계 등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공백은 사고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잠재하는 것이고, 주체의 태만이나 방법의 오진에 의한 지식의 결여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공백이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드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언어화되는 사고의 한계를 가리키는 이 ‘공백’의 현시는 어떤 공간에서 다양한 사고의 총체인 언어체제의 효력을 일거에 허공에 매다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와 같은 실천을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에 의거하며 방법론으로서 제기한다.

 

“푸코는 『지의 고고학』의 서문과 완전히 일관된 방법으로, 주체(과학 공동체의 구성원)의 관점에 기초한 통상과학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으로부터, 주체에 대한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전체’와 ‘표상’(‘언표전체가 부각되어’ ‘그렇게 묘사되는 … 표상’)의 순수한 발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감벤은 여기서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을 토마스 쿤의 그것과 구별한다. 쿤의 패러다임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과학적 언설을 ‘정상’으로 판단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동의되는 규범 내지 전제이다. 이 속에서 쿤의 패러다임은 학지(學知)의 영위에 포획된 제 주체가 현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패러다임은 아감벤에 따르면, 그렇게 동의되는 인식의 틀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의 패러다임은 사고가 언어의 문턱을 넘어 제 언어가 현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사고의 공백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푸코가 근대의 규율권력의 패러다임으로 묘사했던 ‘팬옵티콘’을 생각해보자. 알다시피 팬옵티콘은 감시하는 시선의 교묘한 배치에 의해 주체에 대한 규율이나 통제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를 가능하게 하는 패러다임적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패러다임으로서 팬옵티콘은 근대의 권력-주체론에서 연구자가 동의하는 인식 프레임, 혹은 근대의 권력작용의 범례의 규칙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푸코의 팬옵티콘이라는 장치는 근대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한계영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푸코는 팬옵티콘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규율이나 통제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힘이 불가시하며 감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실정화한다는, 극한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형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권력론을 관통하는 공백이다. 이것은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로 표현할 수 있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행사되는 것이라면, 권력기관은 비대칭적인 주체동료의 관계로, 그 비대칭성을 사고하여 언표화하는 다양한 언설과 함께 환원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법에서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누군가를 억압하여 금지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팬옵티콘은 그러한 구속주체 없이 권력의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속에서 놀라운 것은 불가시하고 감지할 수 없는 시선이 인간을 훈육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팬옵티콘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 없는 순수한 권력의 작동이었다. 푸코는 잔혹하고 가시적인 권력의 동작이 팬옵티콘으로 ‘이행’했다는 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팬옵티콘이라는 주체 없는 권력의 작동이야말로 권력의 극한적인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극한의 형상이야말로 “주체로의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 전체’와 ‘표상’의 순수한 발생”을 다루도록 촉구하는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주체를 단호하게 끊어내는 권력론이며 주체가 아닌 순수한 주체화만을 문제 삼는 권력론의 한계영역이다. 주체가 게재되는 권력론에서 최종심급은 권력이 아닌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권력의 주체와 객체라는 ‘신화소’를 권력론으로 끌고 들어오는 치졸한 형이상학에 다름 아니다. 푸코는 팬옵티콘을 ‘권력 작동의 영점’라고도 할 수 있는 차원의 극한의 권력론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의 팬옵티콘은 권력론의 공백을 문제화한다. 주체에 오염된 권력론은 권력 작용의 메커니즘(이것이야말로 권력론의 궁극의 테마이다)을 최종적으로 주체나 객체로 환원하기 때문에 권력이 산출하는 주체화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사고의 영역에서 주변화하고 말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의 작동을 사고할 때의 극한 영역, 즉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를 공백으로 내장시켜왔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이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그 순수한 발생을 주체와 객체로 귀속시키고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의 효과로 분절화될 수밖에 없는 주체와 객체를 역으로 권력의 기원으로 사고하도록 강제해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실체 없는 주체화라는 권력의 순수한 작동은 기존의 권력론이 가진 그 효과에 의한 공백으로서 그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공백을 언어화함으로써 권력론의 실효성을 일거에 허공에 매달고 바로 ‘패러다임의 전화’를 기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길게 푸코의 이야기를 한 것은 다음의 논의에서 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일본연구’ 혹은 ‘일본론’에서 공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일본’이라는 것을 사념하여 발화하는 가능성의 조건, 혹은 그 조건 없이 ‘일본’에 휘감기는 언어는 성립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결코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다음의 논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공백이 결코 실체로서 담론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백은 담론에서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다양한 전략과 우회를 거쳐 추적되어야 한다. 즉 일본론이라는 담론에서 말하지 않고 남겨둔 대상이나 개념들이 아니라 말했던 것 속에서 잠재된 회피와 부인의 전략을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사상’에 관한 에세이에 주목하여 소묘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론’이라는 것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 ‘일본적인 것’을 담론화한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2. 모노(モノ)와 사실을 직시하는 실제가(實際家)

에토우 쥰(江藤淳)은 안보투쟁 직후의 상황을 전후 일본을 지배했던 사고의 틀과 연결지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고가 근저에 깔려 있다. 한 방울의 기름도 없는 드럼통과 같은 불모가 ‘논단’이라는 장소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육체에 쌓인 피로에 진력난다면 그때는 풍요로운 ‘사상’이 회복되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공백 혹은 불모는 더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일종의 지적파산 후의 공허함이다. / 무엇이 파산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전후 일본의 인텔리겐차가 신봉해온 규범이며 사고의 형태일 것이다. (…) 요컨대, 전후 15년간 대다수의 지식인이 군림했던 허구의 모든 것이 파산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소위 ‘진보파’ 지식인을 향한 직격탄이다. 에토우는 전후 민주주의가 배양한 사상적 및 정치적인 요소가 일거에 폭발했다고 하는 안보투쟁 속에서 역으로 전후 민주주의라는 틀의 파산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비난의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예상대로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에토우는 마루야마가 안보투쟁 중에 행한 <복초의 설>(複初の說)이라는 강연을 겨냥하면서, 전후의 지식인이 만들어내었던 허구란 <8.15>에 모든 것은 끝나기 시작했다는 역사의식이며 헌법이 바뀌어 정치가 변하고 이에 따라 일본전체가 바뀐다고 하는 도덕적인 이상주의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후의 허구는 에토우가 보기에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이상(理想)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를 쌓아가는 속에서 전후 일본이 ‘점차 백치적으로 비만’해진 사실을 외면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전후의 지식인을 비판한다. “인간은 폐쇄된 머리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외에도 위라는 것이 있어서 머리가 자살을 공상한다 해도 위는 착실히 저작운동을 한다는 냉철한 사실에 점차 눈떠간다.” 즉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구에 기반한 도덕담의(談義)에 빠져들었던 것이 안보투쟁 후의 허탈상황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후’라는 허구를 없애보자. 생활하는 실제가들의 노력이 일본을 지탱해왔고 그 노력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 이상가(理想家)의 환상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가들이 얼마나 개인의 불행을 참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생활자는 불운을 관념으로 흘려보내고 해소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로 라는 것 이외의 사상에 관여하지 않았다. 권력과 사상, 도덕의 야합은 차고 넘친다.”

 

에토우의 비판은 명료하다. ‘사실’이나 ‘실제가’와 ‘허구’나 ‘이상가’라는 대비에서와 같이, 에토우가 주어진 표준으로 사실을 계측하는 시선을 거부하고 사실 그 자체를 스스로의 눈과 입으로 바라보며 비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전후의 지식인은 이 의미에서 어떤 종류의 주어진 규범이나 이상을 맹신하는 머리만 큰 인텔리겐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에토우의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에토우의 고유한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에토우는 걸출한 한 사람의 비평가의 추종자가 됨으로써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비평가란 에토우가 “비평을 창조했으며 예술적인 표현을 고양함과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 절대자이며 그 사람이 “참아왔고 지금도 참고 있는 것의 무게에 비교하면” “일본 근대” 나아가 “역사” 그 자체마저 의미를 잃게 된다며 존경심에 마지않았던 고바야시 히데오이다. 1961년에 행해진 어느 대담에서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에토우: 결국 우리들 현대의 인텔리겐차의 미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얕다는 것이죠. (…) 우리들의 생활이 언제나 정치의 과잉 속에 있기 때문에 작은 체험이 정말로 어렵게 되어버렸죠. 현대 사회에서 어느 순간인가 이데올로기랄까 관념이랄까 그러한 것에 속박되어 좀처럼 사물[모노 モノ]을 만질 수 없어요. (…)

고바야시: 그렇지요. 그런데 가령 여성이 키모노를 보는 경우에 맞춤옷을 보는 느낌으로 본다는 것이죠. 나는 그 관점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봅니다. (…) 미(美)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에 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에토우: 제대로 생활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고바야시: 지식과잉이랄까, 언어과잉이랄까. 미란 것은 바로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에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있지요. 생활의 반려이니까요. / 그렇다 해도 현대문화에서는 미의 위치에 대한 사유—, 미의 일상성에 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유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면 언어 외에는 그 무엇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미’를 언어로밖에 사유할 수 없는 인텔리겐차가 에토우가 비판했던 전후 지식인이며 옷을 보는 여성이나 일상에 있어서 미를 경험하는 자가 실제가임은 명백하다. 이 문답에서 두 축은 머리와 입으로 미를 사념하여 발화하는 지식인과 모노를 이것저것 손에 쥐고 선택하는 일상의 사람들인데,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후자야말로 자연의 진정한 미적 감각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와 같은 인식의 태도는 ‘다양한 의장(意匠)’으로부터 ‘모차르트’에까지 이르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의 핵심을 이루는 시좌(視座)에 다름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다’(花の美しさなどない。あるのは美しい花である。)라는 언명으로 대표되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은 작가의 눈이나 손과 그 앞에 나타나는 일회 한정의 ‘모노’ 사이의 조우를 온갖 개념이나 전제를 제거하고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가 ‘역사란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규정할 때에, 역사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가버린 일회 한정의 실감을 말한다. 그의 역사관이 위와 같은 비평관에 근거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에토우는 이와 같은 고바야시의 비평 및 역사관을 마스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이 ‘모노’와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며 공허한 이상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비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와 에토우가 자연에서 건강한 눈과 손으로 전후의 폐허를 살아내었던 형상으로 제시하는 실제가란 전후의 ‘일본론’에 대한 래디컬한 비평이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라는 ‘허구’로 환원되어 사념되었던 ‘일본’적인 것의 ‘의장’을 철거하는, 사실로서의 실제의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고바야시와 에토우는 언어, 이념, 개념 등으로 구성된 전후의 ‘일본론’으로부터 실제로 생활이나 사실을 존립시키는 ‘일본’을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 ‘실제가의 일본’은 근대적인 역사기술이나 국체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이념이나 이상이 말하고 표상하는 역사나 국가야말로 생활의 장에서의 ‘건강한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 그리고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와 같은 ‘실제가의 일본’을 ‘전통’으로 제시함으로써, 근대 이후의 ‘일본론’에 대한 역사적인 비평을 기도했다. 고바야시가 오규 소라이, 모토오리 노리나가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는 사상사의 계보를 다시 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 고바야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암시적인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시론을 전개한다.

 

3. 고바야시 히데오의 마루야마 마사오 비판

고바야시 히데오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문예춘추』에 에세이를 연재했다.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 「考えるヒントⅠⅡ」인데, 그 연재 중반에 주요하게 언급된 것은 오규 소라이였다. 어째서 소라이였던 것일까? 그가 이에 대해 확실히 표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발언이 있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소라이론에서 언급된 부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는 익히 알려진 책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구조의 역사적 추이로서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고학(古學) 문헌학의 비합리주의로 전환되는 필연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소라이의 학문을 사상의 형태의 해체과정으로 다뤄지는 작업의 성질상, 마루야마의 논술은 디알렉틱(ディアレクティーク, 변증법)보다 오히려 아날리틱한 성질이 강하며, 따라서 애매함 없이 특히 소라이에 관해서 이런저런 생각할 점이 있지만 나로서는 다만 소라이라는 인물의 내막[懐 ふところ]에 관해 더 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미 훑은 바와 같이,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은 소라이의 사상 속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맹아란 인간의 질서(道)는 자연의 질서(性)와 달리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이라고 정식화함으로써 질서의 수정이나 전복가능성까지 정치적 사상으로 열어놓는 논리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구해진다. 이 속에서 소라이는 질서를 자연이나 사실에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 사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인’이라는 인격에 의해 구성되는 픽션으로 다룬다. 따라서 소라이는 사실을 추상화하여 논리를 구축하는 근대적인 사상가인 것이다. 그런데 고바야시는 소라이론을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

 

“소라이는 회의파도 아니고 비합리주의도 아니다. 사물과 자연에 있는 이(理)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理)는 탐구하는 마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理)를 만나면 좋은데, ‘세계는 이(理)이다’라거나 ‘이(理) 속에 세계가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理)라는 언어에 도취해버리고 만다. 학자의 도취심[醉心]에 빠지면, 그 사유는 학설의 수미일관 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공자가 ‘좋아한다’라는 말에 주의했던 것은 이와 상통한다. 소라이는 후세의 학문에서 의지를 찾는 것에 예민하고 마음을 찾는 것에 서두르며 이(理)를 마음에서 구하여 다변이 된다고 했는데, 공자처럼 학자가 되면 달변을 싫어하고 ‘생에 기대한다’는 침착한 태도를 학문의 근저로 삼게 된다고 했다. 이(理)를 말하며 지혜를 즐거워하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쪽이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알기보다 행하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소라이의 기본적인 사상이었다.”

 

고바야시는 이와 같이 이(理)보다도 생을 중시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진 자로서 소라이를 그려낸다. 이것은 근대적인 맹아를 제시했던 이론가 소라이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제가 소라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로써 고바야시는 마루야마의 비판을 되받아친다. 즉 ‘사실에 모리를 조아리는’ ‘실감신앙’이라는 비난을 마루야마에게 되돌려주면서 그것이야말로 ‘실제가의 일본’이라는 계보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계보를 고바야시는 진사이에서 소라이를 거쳐 노리나가에 이르는 ‘일본의 전통’으로 잣아 내는 것이다.

…(중략)…

 

4.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고바야시의 ‘일본론’은 일종의 극한을 다룬다. 왜냐하면 그의 ‘일본론’을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인 설명도 신비적인 분장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실한 생활인의 눈과 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일본’은 어느새 ‘일본’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확실한 사실로서 사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념을 단순한 자연주의나 실감신앙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의 생활이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때까지 세계를 파악해왔던 전이해(前理解)를 허공에 매달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즉 고바야시의 ‘실제가’는 자연이나 사실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엄격한 태도나 방법을 갖추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루야마도 1961년에 썼던 『일본의 사상』의 후기에서 “고바야시 씨는 사상의 추상성이라는 것의 의미를 문학자의 입장에서 이해했던 소수의 한사람이며 나로서는 실감신앙의 일반적 유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극한 형태로서 고바야시 씨를 인용할 생각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고바야시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1964년의 『증보판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의 후기에서 “전후 민주주의라는 허망에 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바야시의 강인한 정신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같이 온갖 인식의 틀을 젖혀버리고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룬 반면, 마루야마는 그와 동일한 강인한 정신을 통해 자연/사실의 존재양상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인위적인 제도로서 가져오려는 규범(그리고 규범화하는 결단)을 옹호했다. 마루야마의 ‘허망’이란 속임수나 거짓말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픽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 속에 날 것[ナマ]의 생의 불변성과 건강함을 보는 방법적인 아나키의 시선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상위의 규범을 창출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단이 있다. 그리고 고바야시의 시선과 마루야마의 결단은 암시적인 논쟁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고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반대로 보일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방향은 실제로는 사고에서 동일한 회피 전략을 거꾸로 공유하는 경상(鏡像)과 같다. 그렇다면 양자는 무엇을 회피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과 규범은 결코 강인한 정신이나 결단하는 주체에 의해 가교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칸트파를 상기시킬지도 모를 이 언명은 규범과 사실의 이원론에 기초해서 규범과 문화영역에 독자의 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안점은 고바야시와 마루야마의 ‘일본’이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회피하면서 언설화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들의 일본론은 일본을 소여의 것으로 전제하고 그 특질을 서술해내는 통속의 일본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일본론은 실체화된 ‘일본’을 철저히 물음으로써 ‘일본’을 자연화하고 미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일본은 일본이 서양기원이든 동양기원이든 기존의 술어나 범주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고 반대로 환원 그 자체를 다시 묻는 장소이다.

이 속에서 그들에게 일본은 서양근대가 이룩하고자 했던 계몽의 프로젝트를 계승하는 급진적인 하나의 비판적인 기획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서양근대의 계몽의 프로젝트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주체 스스로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게 하는 기획이었다면, 고바야시와 마루야마는 계몽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 아닌 그 태도나 방법을 적극적 및 근원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의 주체나 기존의 이해의 틀을 철저하게 허공에 매다는 강인한 정신은 모두 칸트가 정식화했던 계몽에서의 주체와 정신의 궁극의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야말로 근원적인 불가피성이 잠재한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피하며,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이 시사하는 것처럼 데카르트적인 회의는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광기의 식별불가능성을 노정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미트-벤야민-푸코-데리다의 논쟁 그 자체에서 결단하는 주체가 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과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한편으로 신을 모델로 하는 한에서 결단하는 주체는 결코 사실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규범의 인격화로서 미래로 이끌리던지 초월의 고양으로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한 한에서 정신은 기존의 규범을 내던지고 정신으로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존의 관념을 방법적으로 (언어적으로) 허공에 매달고 사실을 찾아내는 정신이 광기에 빠진다면 기존의 규범질서는 결코 방법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따라서 규범으로부터 사실에 이르는 고바야시의 정신과 사실로부터 규범으로 향하는 마루야마의 결단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무능하고 우울한 생의 형상을 회피한 결과 엮어진 것은 ‘픽션’ 외에 다름 아니다. 양자의 비판적 및 반성적인 지적영위에 의해 추출되었던 ‘일본’은 극히 이성적이고 위생적이며 지적인 주체와 정신의 장소이자 이름이었다. 이 ‘일본’은 통속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일본론과 결별하며 엄격한 방법과 금욕의 태도로부터 추출되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일본론’은 어떤 종류의 극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의 일본론이 성립되었던 사고의 공백이란 바로 결단하지 않으면서 과거와 단절하지 않는 어떤 우유부단한 주체 혹은 유약한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 주체와 정신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결코 빼내올 수 없다. 그것은 규범이 통제하는 힘과 사실이 압도하는 힘에 의해 이중 구속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체와 정신은 ‘일본’이라는 것을 결코 완전히 형상화 한다거나 관념화 한다거나 역사화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이 우유부단하며 유약한 주체와 정신으로부터 새로운 ‘일본론’이 엮어질 수 있을까? 그 작업은 여기서의 과제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엮여진 ‘일본론’은 신이나 이성을 모델로 하는 주체나 정신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될 것이다. 이 때 ‘일본’은 국경이나 역사 속에서 자기폐쇄적인 경상(鏡像)에 달라붙는 아이덴티티가 아닌 타자와의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애정에 넘치는 분열적인 공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장으로 사념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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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나의 페친이 본 블로그에 올린 김항 논문의 번역글을 읽고 페북에 감상문을 적어올렸다. 김항의 마루야마 독해에 대한 정리글이었는데, 거기서 나의 페친은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관련하여 김항이 논하는 마루야마의 '결단'과 그 한계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 또한 그 부분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 터라 학기가 끝난 후 읽으려고 미뤄두었던 김항의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을 서둘러 읽었다. 본 글은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에서 김항의 마루야마의 '결단'과 그 한계에 대한 부분만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

김항의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은 2008년 동경대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을 2010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이 밝히듯이 일본의 근대국가론의 모순과 한계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며 이 모순과 한계가 (전전과) 전후의 일본정치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등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혹은 주조되는가를 고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순과 한계를 제국의 타자에 대한 그들의 사유로 집약하고자 했다. 여기서 제국일본의 타자는 식민지 조선(인)이다.

그런데 본 발제를 전개하기에 앞서 책의 전체적인 감상을 간단하게 추려 말하면, 본론의 패기만만한 전개에 비해 결론은 참으로 소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자신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의 재능과 노력을 요한다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 김항은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칼 만하임과 칼 슈미트, 칸트와 마루야마 마사오 사상의 연관성,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일본 평론가 및 사상가들의 시대성을 러일전쟁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엮어가는 그의 탁월한 구성력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할말이 없다. 그러나 후자에 있어서 특히 제국일본의 타자로서 식민지의 문제에 이르러 그는 그저 주저앉고 만다는 인상이다. 이것은 그가 이 책의 후기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지적받은 것에 대한 변론으로서 "국가라는 구성물의 <동일화불가능한 문턱>을 억압하는" 동일의 근원인 식민지를 문턱으로 열어놓은 것에 논문의 의의를 구하며 공동체의 차원에서(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와 공동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열려진 문턱'을 향후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음에도, 그 이후 아직까지 전작을 넘어서는 뚜렷한 연구물이 나오지 않는 것과 관련지을 수 있겠다. 

또 하나는 일본의 연구지형에서 그에게 요구되는 과제와 한국의 학계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제국일본의 식민지적 타자에 관심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그가 이룩한 탁월한 연구성과임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자양분이었을 따름인 근대일본의 정치사상의 형성과 궤적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 자체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 이후에 더 밀고나갔어야 할 그의 사유가 정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종주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해, '종주국'과의 특수한 관계로서 '식민지'에 대해 말할 것을 요청받는 반면, '식민지'인 '모국'에서는 그 관계를 거세한 채 보편성으로서 '종주국'을 말할 것을 요청받는 '식민지적 연구자'의 학문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항을 응원하고 싶고, 더 기다려보련다.

 

3.

우선 마루야마의 내셔널리즘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한편으로는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로 대표되는 '문화사'를 비판하며,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며 내셔널리즘을 구축하려했던 마루야마는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칼 만하임에게서 인식론적 토대를 마련한다.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에서 개인은 일정의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며 구속되고, 개인의 사회구조에 대한 지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그 사회는 개인이 획득한 시야에 의해 구성된다. 이와 같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 독자성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픽션성'에 의해 그 주체를 존립시킨다. 마루야마는 소라이론(徂徠論)을 통해 일절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개인을 홉스-슈미트의 주권자와 중첩시키고, 개인의 사적인 영역, 다시말해 법적인 영역에 주권자로 들어온 개인의 소여를 정치화한다. 이때 개인의 정치화는 위기의식에서 발로된 결단을 말한다. 마루야마는 이렇게 개인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이며 그 정치적인 것을 위기의 사상에서 추출한다. 

본래 근대일본정치사상사에서 개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아니라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에서이다. 후쿠자와는 '개국'의 위기에서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주권국가에게서 구했다. 김항에 따르면, 슈미트는 <대지의 노모스>에서 15세기 유럽공법이 "신대륙 발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대륙 발견"은 유럽세계를 개방함과 동시에 지구가 닫힌 세계임을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개국'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상징적 사태임과 동시에 더 큰 '닫힌 사회'로서 '국제사회'를 인식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일본의 '주권국가'로의 변모를 '개국'에 의한 역사적 과정으로 보고, '주권국가'라는 역사적 구축물과 '개인'이라는 보편적인 근대성의 담지자를 결합하고자 했다. 그런데 후쿠자와의 '개인'이 국가에 의해 매개되는 보편성의 담지자라고 한다면, 마루야마의 '개인'은 (자연화에 지지되는)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상대화하고 대치한다.

마루야마가 결단하는 '개인'을 '초인'이나 '주권자'나 '단독자'가 아닌 '국민'으로 이름지은 것은 아시아에서 개인의 주체적 의식인 내셔널리즘이 수동적인 '결단'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결단'은 현재형이지만-개인에서 내셔널리즘으로-, 아시아에서 '결단'은 수동적이다. 그래서 막부말기와 메이지초기 '결단'은 공간적으로 밖과 안을,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분할하고 단절한다.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국가주의와 국제주의는 시공간을 단절하고 분할하고, 이 단절과 분할은 '결단'이라는 한 점으로 집약된다. 내외를 분할하면서 통합하고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면서도 접속시키는 '결단'은 한 눈으로는 행해지고 한 눈으로는 보여진다. 마루야마의 내셔널리즘이란 이 '결단'이 무한히 반복됨을 말하며, 근대성이란 이 결단을 행하는 절대고독의 개인의 실천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마루야마의 '개인'은 역사적 산물이자 유일한 실재이면서도 소여로서 타자를 갖지 못한다. 개인의 타자는 다만 외부에서 부여된 외적 질서로서 그 질서를 구축하는 개인의 지적 작업에 의해 이해될 뿐이다. 이 속에서 에스닉이나 젠더는 범주로 성립되기 전에는, 어떠한 이성이나 지에 의해 분류되기 전에는, 완전한 타자로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은 완전한 무-관계성으로 타자를 만나고 이러한 타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동일성에서 분류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김항은 마루야마의 타자가 안고 있는 문제가 내셔널리즘의 배제에 의한 이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의 결단의 틈새에서 언어도 이성도 관계도 없는 다만 육체로 남아있는 자기의 문제이다.

김항에 따르면, 이것은 마루야마의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마루야마의 육체에 새겨진 제국일본의 '치명적 유산'이다. 후쿠자와가 '개국'의 위기에서 관습적 윤리의 인간관계를 끊어내고 '일본인'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축하고자 했을 때 개인은 다만 '국체'에 매개될 뿐이며 '국체'의 운명공동체에 귀속될 뿐이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개인'을 유일의 실재로 지양하며 '국체'에서 구해내고자 했지만, 그 위기의식을 '개인'의 성립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한에서 개인을 엄습하는 공포로부터 온갖 관계성을 박탈당한 육체의 자기로 잔존될 뿐이다.  

 

4. 

여기까지가 1부의 대략의 줄거리이다. 본서는 결론을 제외하고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2부는 국민국가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제목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국민국가론을, 3부는 전후의 제국의식과 일본인론을 다루고 있다. 마루야마의 '결단'은 본서의 핵심적인 모티브로 1,2,3부 각각을 이끌고 있다. 1부에서 마루야마의 '결단'의 임계점을 제시했다면, 2부와 3부는 그것의 역사성과 원리를 검토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

일전에 번역한 김항의 논문에서 마루야마가 슈미트의 '결단주의'에서 '결단'의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조금 더 면밀하게 상술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본서에서는 마루야마가 슈미트의 '결단주의'를 '개인'의 결단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소라이론의 '결단'의 논리로 가져온 것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마루야마의 개인의 '결단'은 오규 소라이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이어지는 '결단'의 계보를 구축한 '결단'이다.  

마루야마에게 네이션은 (낭만적인) 민족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결단에 의한 지양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마루야마의 개인의 '결단'의 성격은 루소의 일반의지와 다르다. 과거의 작위성(자연화된 작위성)의 민족공동체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다. 마루야마의 '개인'은 유일한 실재로서 사회의 지를 창출하는 주체이며 그렇게 창출된 지를 지양하는 주체이다. 다시 말해 작위성을 창출하면서도 지양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마루야마는 '픽션성'이라고 한 것이다.

 

정리해보니 정리가 덜 되었다. 2부와 3부를 틈나는 대로 정리하면서 논의를 심화시키고 싶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관련해서도.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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