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1997년의 초판발행본을 2014년 <東京国際ブックフェア>[도쿄국제북페어] 기념으로 개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이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은 일본어 원서와 논문구성이 많이 다르다. 일본어 원서가 198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 한정해서 후지타 쇼우조우의 전체주의론과 '경험'론을 아우른 반면, 한국어 번역본은 19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이러저러하게 발표한 것까지 쓸어담았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1부와 2부, 5부의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라는 논문만이 일본어 원서에 있다. 2014년 재출간한 일본어 원서를 보면,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논문 한편을 더 넣은 것에 대해 상세하게 부가설명하고 있듯이, 책을 재구성하는 것은, 특히 저자 사후에는 매우 조심스럽고 유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이런저런 논문을 벼룩시장의 물건마냥 모아놓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나아가 후지타 쇼우조우의 『저작집』(みすず書房, 1997-8년, 총 10권)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방대하고 그 궤적을 하나의 주제로 말하기 어렵다. 일본어 원서의 해제에서와 같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이후 사상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에서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으로 이론적 틀이 변화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일본의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런데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그의 저술 활동 전반의 글들을 모아놓아 출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작집을 출간하든지, 아니면 다른 제목의 책으로 재구성을 하든지. 창비라는 나름 공신력 있는 출판사에서 "시정잡배"나 하는 짓을 하다니...  

  본 글은 2014년 7월에 출간한 일본어판의 『全体主義の時代経験』의 소개글이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1927년생으로 1953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마루야마 마사오 문하에서 사상사를 공부했으며,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마루야마가 전공투와의 갈등 이후 도쿄대 교수를 사직한 이후에도 마루야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본서의 서두(1994년 작성)에서 후지타는 대학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학사회라는 "학자의 세계"는 실제로는 "직업적인 대학교수의 세계"라고 하면서, 사제지간이라는 협소한 인간관계에 갇혀 "존경에 넘치는 내재적 이해"만을 추구할 뿐 이성과 비판이 살아숨쉬는 "학문"이 불가능한 세계라고 말이다. 그리고 저자소개란에는 "법정대학 근무"라고만 되어 있어서, 나는 그가 법정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생계를 이으며 학문활동을 수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법정대학에서 1953년에서 71년까지, 80년에서 93년까지 조수직과 교수직을 역임했다. 그러고도 자신은 제도화되어 경직화되는 "학계" 속에서 위치를 점하고 싶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학자"의 사교계를 경멸했다고, 젊은 시절 처음부터 그랬다고 말하다니! 물론 1971년 법정대학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약 9년간 재야의 학자로 지낸 바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몸담기 전부터 혐오했다는 세계에 발들여놓은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은 본서의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타자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사상의 이단아"로서 그가 자신이 비판한 일본사회와 학계의 당사자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다. 그의 다른 글에 있을지도.

  후지타의 글은 매우 박력있다. 문체에 힘이 넘친다. 그는 처음부터 정면을 파고든다. 이러저러한 도입부가 없다. 이론적 배경이라든지 시대상황이라든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을 처음 접할 때에는 낯설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읽다보면, 그의 힘에 끌리고 그의 논지에 설득된다. 문체의 힘으로 독자를 필자의 논리로 끌고가는 이 독서'경험'은 그가 말한 '경험'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지타는 전후일본, 더 나아가 근대의 시대가 '경험'을 결여한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데, 왜 경험이 없다고 말할까? 그는 '경험'과 '시험'을 구분한다. '시험'은 해답이 있다. 오답 또한 해답이 아니기에 오답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시험'은 예측불가능성을 배제한다. 현대사회는 '시험'의 연속이다. 통과의례와 같이 학교라는 '시험'을 통과한 후 취직이라는 '시험'을 맞이한다. 취직한 후에도 관료기구의 문서주의에 의해 주어진 메뉴얼을 따른다. 이와 같은 현대사회는 후지타에 따르면, '선험주의'의 온상이다. 후지타는 경험이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예측불가능한 것으로서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로운 경험"이란 자신을 흔드는 사물, 곧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개방적 태도이다. 이에 따라 경험은 정신적 현상이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타자는 단지 경쟁적 대립항일뿐이며, 이러한 타자를 불안해하고 무서워한다. 그렇게 타자와의 개방적 관계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망상과 허위의식을 제작한다. 이것이 후지타가 말하는 '경험의 소멸'이며, '경험'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인간형이다. 경험의 소멸은 인류를 '무사회상황'에 빠뜨리며, 이 속에서 인간은 사교가 소멸된 무사회적 독립자가 된다.

  그런데 실은 20세기의 야만적인 '전체주의'는 서구 근대의 빛나는 지적혁명의 연속적 성과 위에 나타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논의를 빌어 '난민'(displaced persons)의 생산과 확대재생산, 그리고 그러한 난민을 규정하고 추방함으로써 확보되는 '시민권'은 19세기 이후 서구 근대의 정치체제의 세속화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16,17세기의 '인문주의의 시대'를 지나 18세기의 '철학, 이성의 세기'를 거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승리 위에 보다 광범위한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출현했고, 이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공존과 공생의 문화체계에서 탈각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된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본래 이데올로지(관념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치사회의 근본특질을 규정하는 개념 자체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면서 '신칸트주의' 또는 '신헤겔주의'와 같이 고유명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할 뿐인 사상적 무능을 드러내는 한편, 베버의 '문화인'과 같이 '몰가치성'의 과학주의적 문명인간의 "정치적 사무원"의 위치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는 이 과정을 "'이데올로기'의 저항적 일면→'강령화'→그 내부의 '사상'과 '스케줄'의 분화→'스케줄의 우위'와 '사상의 구실화'"로 도식화한다. 무사회상황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제도화'는 이데올로기를 형애화하여 부정적 말살의 강령적 도구를 만들어내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정치적 전체주의에서 더 나아가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를 논한다. 아렌트가 이데올로기의 과잉으로서 정치적 전체주의를 논했다면, 후지타는 오히려 20세기에 이르러 이데올로기의 지배의 시대가 실질적 종언을 고한 후 그 후에 남겨진 형애화된 이데올로기가 강령적 도구가 되어 정치적 전체주의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상적 형애화로부터 출현한 기술관료(테크노그라트), 그리고 화폐, 토지, 노동의 상품화라는 특수한 사회적 실존, 복제기술과 모방행위가 전체성으로 이어지는 사회관계의 '전국면'과 연결된다. 후지타는 이러한 20세기의 소비사회에 당면하여 정치적 전체주의가 개인을 '안락에의 예속상태'로 분절시킨다고 말한다. 쓰고버리는 1회용의 '향유'는 시간을 분절하고, 분설된 시간은 인간의 자연에의 귀속을 막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욕구불만족은 당연한 것인데, '정치적 전체주의'는 불쾌를 회피하는, 즉 불쾌를 일으키는 사물(타자) 그 자체를 소거시키는 자연적인 반응의 결여태로서 '안락'을 추구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구비한다. 후지타는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을 기본범주로 하여 1980년대의 '고도성장'의 일본사회의 상황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분석한 것이다.   

  '경험'이 결여된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는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후지타가 인류의 문명사, 20세기론, 현대일본사회론의 문제군을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다는 것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독자에게 '경험'의 '시련'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실천의 문제를 제기한다. 후지타의 전체주의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그것은 21세기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무사회적상황'에서 '타자성'의 상실을 우리가 어떻게 진단하고 윤리적인 문제로 삼아야하는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藤田省三,『全体主義の時代経験』(1997년 초판개정), みすず書屋,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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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권의 책으로 2014년을 마감했다. 한권은 지난해 12월 20일 오사카대학에서 열린 <グローバル冷戦と1950年代日本の文化/運動>[글로벌냉전과 1950년대 일본의 문화/운동]이라는 심포지엄에서 받아온 『時代に抗する―ある「活動者」の戦後期』[시대에 저항하다: 어느 "활동가"의 전후]라는 책이고, 또 한권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와의 대담집인 『作家自身を語る』[작가 자신을 말하다]라는 책이다. 두권 모두 별도의 집필자가 인터뷰를 정리, 재구성했다.

  한국에서 인터뷰록의 출판은 일본에서만큼 활발하지 않다. 한국의 출판시장의 다양성이 일본에 비해 협소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시대적 성찰의 가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되어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리타 류우이치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역사에 대한 "카타리카타"(語り方: 말하는 방식) 그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는 존재양식에 그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정치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을 뿐더러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저 역사가 주어진 것이라고, 그 "주어진 역사"를 학습할 뿐이다.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말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시대와 시대의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대적 성찰을 통해 인류가 더 나은 인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먼저 『時代に抗する―ある「活動者」の戦後期』[시대에 저항하다: 어느 "활동가"의 전후]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이 책은 스기모토 아키노리(杉本昭典)라는 인물의 전후 일본공산당 활동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는 1928년생으로 1946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한다. 효고현(兵庫県)의 어느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금속제조회사에서 근무한 그는 일본공산당의 "경영공작자"로서 노동운동을 이끈다. 그가 공산당원이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패전 후 비로소 자신이 "군국소년"으로 길들여져왔음을 자각하고,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1946년 6월 치러진 총선거에서 18년간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어느 공산당 후보의 연설만으로 공산당이 스스로의 역사를 열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정신이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응당 그 시대정신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서 다음의 시대를 말한다. 지금은 과거에서 미래를 말하지 못하는 시대, 더 정확하게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당시 일본은 저항하는 삶에게서 역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시대였나보다. 

  일본공산당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본공산당은 패전 직후 진주한 미군을 "해방군"이라 칭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赤旗』복간제1호(1945년 10월)에는 미점령군을 "해방군"으로 평가하고 감사와 협력의 희망을 표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일본점령 초기정책은 '비군사화'(육군의 해체, 산업의 비군사화 등)와 '민주화'(정치적 민주화, 재벌해체, "이에"(家) 제도의 폐지, 노동제도의 개혁 등)였다. 그런데 1946년 6월 포츠담 칙령 이후 미국의 태도가 돌변하여 '점령목적에 유해한 행위'는 모두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에 일본공산당은 합법과 비합법이라는 이중적 구조로 조직을 운영했다. 한편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연설, 6월 마샬플랜 공표, 10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연합인 코민포름의 설치 등 냉전기가 개시되면서, 일본공산당은 국제사회주의 연대를 표방하는 '국제파'와 일본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자는 '소감파'로 갈리게 된다. 이 의견의 대립은 다수파인 '소감파'가 소수파인 '국제파'를 '분파활동"을 이유로 제명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공산당의 분열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공산당의 다수파는 군사노선을 취하면서 당내에 '군사위원회'--"Y"라는 별칭의 중핵자위대: 이것이 1960년대 학생운동의 폭력투쟁을 선도했던 "중핵파"로 이어진다--를 설치하여 폭력투쟁을 이끈다. 이것이 일본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60년대 학생운동 내의 만연한 "린치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스기모토 아키노리는 당내 소수파인 '국제파'의 일원으로 1950년 한반도의 반전운동을 주도했고,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61년 공산당원에서 제명되었고, 그후 "사회주의혁신운동"의 전국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지금까지 의료생협협동조합과 시민운동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일본공산당은 1922년 창립된 후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내가 만난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공산당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다 하더라고 그 역사의 유구함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일본공산당은 갖가지 선거에서 후보를 내며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으로 자리하고 있다. 1946년 공산당원으로 입당한 후 1961년 제명되기까지의 어느 공산당원이자 노동운동가의 회고담을 정리한 이 책은 사실상 이념지향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으로의 역사를 기획하고 다양한 지층의 삶을 발굴하여 미래의 인류의 자산으로 삼고자 할 때에, 살아있는 역사로서 그의 공산당 활동의 이력을 담은 이책의 의미와 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作家自身を語る』[작가 자신을 말하다]를 소개하겠다. 이 책은 2012년 한국에 번역되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것은 2013년 12월에 발간한 것이고, 한국에 번역된 것은 2007년 5월에 출간한 것이다. 오에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2011년 3.11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변화한다. 오에는 2005년 인터뷰 이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앞으로 소설은 쓰지 않고 삶을 정리해나가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3.11 이후 일본의 "애매함"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결심한다. 실제로 오에는 반핵, 반전, 반우경화의 각종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머지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한다. 내가 읽은 2013년 12월본은 3.11 이후의 인터뷰를 더해서 출간한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나는 <만연원년의 풋볼>까지만 읽었는데,  『作家自身を語る』을 읽고나서 그 후의 책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가장 최근작인 『晩年様式集』은 꼭 읽어보고 싶다. 그의 후기작은 초기작과 중기작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힘으로 계속 성장하여 그들 간의 새로운 인연으로 엮이며 또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시대의 어느 국면의 집점을 연결하는 역할을 전신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晩年様式集』에 이르러 그 삶들을 성찰하여 "신화와 토착"의 어떠한 양식을 만들어내었다고 하니, 8,90년대의 "낡은" 시대의 감각을 버리지 못해 오는 시대와 협의할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중년"의 삶에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한다. 

  그 외 이 책은 감동적인 교훈을 던져주는 말들로 빼곡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샤르트르와의 교류,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우정, 스승인 와타나베 카즈오(渡辺一夫)에 대한 평생에 걸친 존경과 신뢰는 내가 스스로 신뢰를 저버린 관계들과 인연들을 아프게 되돌아보게 한다. 오에가 말한 "자유검토의 정신"은 관계들을 비판적으로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신뢰를 이어가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는 것인데, 나는 불신함으로써 내가 자유로와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또 소설가로서 오에의 근면함은 단지 맹목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을 인용하며 근면함이란 세상의 변혁에 투신하되 자신의 일을 놓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집회에 참여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평소와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처럼. 자동차를 타지 않고 전철을 이용하는 이유를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나는 근면함을 배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자질로 말해지는 것들이 결코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에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장남인 "히카리"와의 50년이 넘는 삶은 매우 구체적이다. 오에는 50년을 매일밤 자정무렵 손을 씻기 위해 자다가 일어나는 "히카리"를 살펴주고 스스로 이불을 덮지 못하는 "히카리"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오에는 어느날 '이것이 나의 "영원"인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정황들 속에서 '인간'을 묻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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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출판된 학사 개설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본서 역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개념과 이론을 구성원의 생애와 그 생애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잘 설명해내었다. 학문에 대한 시대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학사'의 본래적 의미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에서 21세기의「비판이론」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20세기 유럽의 비판적 지성으로 자리매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서들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한 개설서이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사회연구소의 창설과 초기 호르크하이머의 사상

제2장. 「비판이론」의 성립 - 초기의 프롬과 호르크하이머

제3장. 망명 속에서 빚어진 사상 - 벤야민

제4장. 『계몽의 변증법』의 세계 -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제5장.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도르노와 전후독일

제6장. 「비판이론」의 새로운 전개 - 하버마스

제7장. 미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찾아서

 

  알려진 것과 같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들로 구성된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연구소>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유대계 부호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자적이며 전문적인 마르크스주의 연구기관으로 창설되었으며, 호르크하이머가 1930년 소장으로 취임한 후 1932년 『사회연구지』를 창간하면서 '비판이론'의 발상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당시 실증주의적인 개별과학이 헤겔적인 전체성의 관점을 상실하는 경향에 비판적이었고, "철학적인 이론과 전문화된 과학적 실천의 부단한 변증법적인 상호침투와 전개'를 주창했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처음부터 정신분석학, 문화학, 경제학, 문학, 음악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총체적인 관점의 학문을 지향했음을 말해준다. 

  한편 당시 독일에서는 1919년 세계최초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된 이래 좌우익의 정치세력의 대립이 격화일로에 있었다. 유럽에서는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민중생활이 더욱 궁핍한 가운데 위기일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이러한 정황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불러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문명적 비판에서 학파 고유의 사상을 구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창기 멤버였던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를 상대화하는 사상적 도구로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초기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통합하여 사회심리학을 구상하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다. 프롬은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리비도의 발산양상으로서 사회의 리비도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문명에 숨겨진 인간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프롬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의 대립 끝에 <사회연구소>와 결별했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사상적으로 통합하려 했던 그의 시도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만한 것이 아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라는 이름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데카르트 이후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는 이원론을 "전통적 이론"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따라 (대상을 수용하는) 감성의 수동성과 (개념을 파악하는) 오성의 능동성을 통합하는 '구상력'을 "비판적 이론"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비판적 이론"은 사회전체가 가진 분열적 성격에 대해 주체의 비판적 태도와 행동을 통해 그 모순을 자각함으로써 성립하는 이론이다. 이 "비판적 이론"이 전후 독일에서 소문자에서 대문자로 바뀌어 '비판이론'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1932년 독일 총선거에서 히틀러의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히틀러가 합법적인 권력을 획득한 이래 유대인의 배제와 추방이 공식화되었고 1933년 3월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연구소>는 폐쇄되었다. 호르크하이머, 프롬, 아도르노 등은 <사회연구소>의 뉴욕이전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비판이론'은 이처럼 망명자의 자기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1941년 뉴욕에서 초판발행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이자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유럽에서 자행되는 야만적인 살상이 고도의 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는 통찰로부터 기획된 것이다. "야만은 계몽이라는 인간의 기획에서 우연히 일탈한 것이 아니라 계몽 혹은 문명화라는 개념 자체 속에 처음부터 배태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이 의문은 '자연과 문명의 유화(宥和)'라는 테제로 이어졌다. 즉 외부에 있는 자연의 지배는 쾌락에 기우는 내부의 자연(욕망)의 억압을 댓가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연지배라는 문명의 역사, 계몽의 과정은 동시에 체념의 역사에 다름아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행하는 자연지배는 보존해야 하는 자기(내적자연)을 상실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자연을 억압함으로써 확립한 '자기'란 보존해야만 했던 자기 그 자체를 상실한 이른바 공허한 자기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억압하는 10년간의 고행 끝에 '고향'에서 저지른 것은 아내의 구혼자들과 이를 묵과한 하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새로운 야만'이었다. 이처럼 억압된 힘을 빼앗긴 자연(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자연)은 '새로운 야만'으로 부활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지배'와는 다른 자연과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아도르노에 의해 "예술의 원사(原史)"로 말해진다. 

  1969년 독일의 신좌익운동의 발흥 속에서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소>를 점거한 학생운동세력과 대립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간접적으로 협력했던 마르쿠제가 전후 독일의 신좌익 학생운동의 지지를 얻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도르노는 신좌익학생운동 세력과 적대적이었고, 아도르노 자신 또한 신좌익운동과 파시즘의 친화성을 읽어내었다. 결국 1969년 아도르노는 심장발작으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신좌익계 과격파의 이론적 지주라는 위치를 부여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과 유희가 일치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의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설파한 마루쿠제와 국민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 노이만에 한한 것이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이 전후 독일에서 재판된 것은 1969년 4월이다. 

  아도르노는 1951년 전후 독일에서 재건된 <사회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1958년 소장에 취임한 이래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기만족적인 관점에 머물러서는 비판적 정신은 절대적인 물상화에 대항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이데올로기의 체현 그 자체를 거부했다. 아도르노는 '동일화'가 언제나 그 외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에, 미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놓아두는 능력으로서 '비동일화'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타자와 이화(異化)하는 '비동일적인 것'의 인식을 지향했다. 

  '비판이론'의 제2세대인 하버마스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자연과 문명의 유화' 테제는 이질적인 능력을 통합하는 능력으로 발휘되었다. 포퍼, 루만, 푸코, 데리다 등과의 논쟁을 이끌며 그들의 이론을 흡수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총합해왔던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비판적 태도 그 자체를 실천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라는 이질적인 사상사의 통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대표작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유화'라는 과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과 문명의 유화'를 생활세계와 시스템이라는 관계로 풀어내고자 했다.  

  최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3세대"에서는 푸코의 권력론을 사회적인 승인관계의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와 사회정의를 분배와 재분배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문제로 나아가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호소미 카스유키(細見和之), 『フランクフルト学派 ホルクハイマー、アドルノから21世紀の「批判理論」へ』, 中公新書, 2014년 10월 25일.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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