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1997년의 초판발행본을 2014년 <東京国際ブックフェア>[도쿄국제북페어] 기념으로 개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이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은 일본어 원서와 논문구성이 많이 다르다. 일본어 원서가 198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 한정해서 후지타 쇼우조우의 전체주의론과 '경험'론을 아우른 반면, 한국어 번역본은 19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이러저러하게 발표한 것까지 쓸어담았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1부와 2부, 5부의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라는 논문만이 일본어 원서에 있다. 2014년 재출간한 일본어 원서를 보면,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논문 한편을 더 넣은 것에 대해 상세하게 부가설명하고 있듯이, 책을 재구성하는 것은, 특히 저자 사후에는 매우 조심스럽고 유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이런저런 논문을 벼룩시장의 물건마냥 모아놓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나아가 후지타 쇼우조우의 『저작집』(みすず書房, 1997-8년, 총 10권)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방대하고 그 궤적을 하나의 주제로 말하기 어렵다. 일본어 원서의 해제에서와 같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이후 사상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에서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으로 이론적 틀이 변화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일본의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런데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그의 저술 활동 전반의 글들을 모아놓아 출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작집을 출간하든지, 아니면 다른 제목의 책으로 재구성을 하든지. 창비라는 나름 공신력 있는 출판사에서 "시정잡배"나 하는 짓을 하다니...
본 글은 2014년 7월에 출간한 일본어판의 『全体主義の時代経験』의 소개글이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1927년생으로 1953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마루야마 마사오 문하에서 사상사를 공부했으며,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마루야마가 전공투와의 갈등 이후 도쿄대 교수를 사직한 이후에도 마루야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본서의 서두(1994년 작성)에서 후지타는 대학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학사회라는 "학자의 세계"는 실제로는 "직업적인 대학교수의 세계"라고 하면서, 사제지간이라는 협소한 인간관계에 갇혀 "존경에 넘치는 내재적 이해"만을 추구할 뿐 이성과 비판이 살아숨쉬는 "학문"이 불가능한 세계라고 말이다. 그리고 저자소개란에는 "법정대학 근무"라고만 되어 있어서, 나는 그가 법정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생계를 이으며 학문활동을 수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법정대학에서 1953년에서 71년까지, 80년에서 93년까지 조수직과 교수직을 역임했다. 그러고도 자신은 제도화되어 경직화되는 "학계" 속에서 위치를 점하고 싶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학자"의 사교계를 경멸했다고, 젊은 시절 처음부터 그랬다고 말하다니! 물론 1971년 법정대학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약 9년간 재야의 학자로 지낸 바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몸담기 전부터 혐오했다는 세계에 발들여놓은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은 본서의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타자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사상의 이단아"로서 그가 자신이 비판한 일본사회와 학계의 당사자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다. 그의 다른 글에 있을지도.
후지타의 글은 매우 박력있다. 문체에 힘이 넘친다. 그는 처음부터 정면을 파고든다. 이러저러한 도입부가 없다. 이론적 배경이라든지 시대상황이라든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을 처음 접할 때에는 낯설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읽다보면, 그의 힘에 끌리고 그의 논지에 설득된다. 문체의 힘으로 독자를 필자의 논리로 끌고가는 이 독서'경험'은 그가 말한 '경험'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지타는 전후일본, 더 나아가 근대의 시대가 '경험'을 결여한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데, 왜 경험이 없다고 말할까? 그는 '경험'과 '시험'을 구분한다. '시험'은 해답이 있다. 오답 또한 해답이 아니기에 오답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시험'은 예측불가능성을 배제한다. 현대사회는 '시험'의 연속이다. 통과의례와 같이 학교라는 '시험'을 통과한 후 취직이라는 '시험'을 맞이한다. 취직한 후에도 관료기구의 문서주의에 의해 주어진 메뉴얼을 따른다. 이와 같은 현대사회는 후지타에 따르면, '선험주의'의 온상이다. 후지타는 경험이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예측불가능한 것으로서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로운 경험"이란 자신을 흔드는 사물, 곧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개방적 태도이다. 이에 따라 경험은 정신적 현상이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타자는 단지 경쟁적 대립항일뿐이며, 이러한 타자를 불안해하고 무서워한다. 그렇게 타자와의 개방적 관계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망상과 허위의식을 제작한다. 이것이 후지타가 말하는 '경험의 소멸'이며, '경험'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인간형이다. 경험의 소멸은 인류를 '무사회상황'에 빠뜨리며, 이 속에서 인간은 사교가 소멸된 무사회적 독립자가 된다.
그런데 실은 20세기의 야만적인 '전체주의'는 서구 근대의 빛나는 지적혁명의 연속적 성과 위에 나타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논의를 빌어 '난민'(displaced persons)의 생산과 확대재생산, 그리고 그러한 난민을 규정하고 추방함으로써 확보되는 '시민권'은 19세기 이후 서구 근대의 정치체제의 세속화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16,17세기의 '인문주의의 시대'를 지나 18세기의 '철학, 이성의 세기'를 거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승리 위에 보다 광범위한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출현했고, 이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공존과 공생의 문화체계에서 탈각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된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본래 이데올로지(관념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치사회의 근본특질을 규정하는 개념 자체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면서 '신칸트주의' 또는 '신헤겔주의'와 같이 고유명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할 뿐인 사상적 무능을 드러내는 한편, 베버의 '문화인'과 같이 '몰가치성'의 과학주의적 문명인간의 "정치적 사무원"의 위치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는 이 과정을 "'이데올로기'의 저항적 일면→'강령화'→그 내부의 '사상'과 '스케줄'의 분화→'스케줄의 우위'와 '사상의 구실화'"로 도식화한다. 무사회상황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제도화'는 이데올로기를 형애화하여 부정적 말살의 강령적 도구를 만들어내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정치적 전체주의에서 더 나아가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를 논한다. 아렌트가 이데올로기의 과잉으로서 정치적 전체주의를 논했다면, 후지타는 오히려 20세기에 이르러 이데올로기의 지배의 시대가 실질적 종언을 고한 후 그 후에 남겨진 형애화된 이데올로기가 강령적 도구가 되어 정치적 전체주의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상적 형애화로부터 출현한 기술관료(테크노그라트), 그리고 화폐, 토지, 노동의 상품화라는 특수한 사회적 실존, 복제기술과 모방행위가 전체성으로 이어지는 사회관계의 '전국면'과 연결된다. 후지타는 이러한 20세기의 소비사회에 당면하여 정치적 전체주의가 개인을 '안락에의 예속상태'로 분절시킨다고 말한다. 쓰고버리는 1회용의 '향유'는 시간을 분절하고, 분설된 시간은 인간의 자연에의 귀속을 막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욕구불만족은 당연한 것인데, '정치적 전체주의'는 불쾌를 회피하는, 즉 불쾌를 일으키는 사물(타자) 그 자체를 소거시키는 자연적인 반응의 결여태로서 '안락'을 추구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구비한다. 후지타는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을 기본범주로 하여 1980년대의 '고도성장'의 일본사회의 상황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분석한 것이다.
'경험'이 결여된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는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후지타가 인류의 문명사, 20세기론, 현대일본사회론의 문제군을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다는 것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독자에게 '경험'의 '시련'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실천의 문제를 제기한다. 후지타의 전체주의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그것은 21세기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무사회적상황'에서 '타자성'의 상실을 우리가 어떻게 진단하고 윤리적인 문제로 삼아야하는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藤田省三,『全体主義の時代経験』(1997년 초판개정), みすず書屋,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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