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라캉의 '일본론'--서구의 일본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도 읽힐 수 있는--을 바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분석한다. 일본인의 정신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가 18세기에 출현한 근대적 정신문화현상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역시 연구자는 동일한 논제를 다루더라도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는 "야마토타마시이"를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으로 풀이한 반면(『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이득재 역, 문화과학사, 2003 참조), 가라타니 고진은 그것을 그것의 허구성과 회귀성이라는 비평의 자리로 올려놓으며 다음의 문제의식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글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2002년 이후 일본의 근대문학에 대한 비평을 그만두고 왜 [세계사의 구조], [제국의 구조]로 연구주제를 옮겨왔는지 그 고민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원문은 http://www.kojinkaratani.com/jp/essay/post-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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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분석 재고 (강연) 2008년 12월 7일

오늘 제가 <일본라캉협회>에 초대된 것은 예전에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에서 라캉을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논문에서 저는 라캉이 일본에 대해, 특히 한자의 훈독 문제에 대해 말한 것을 인용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문제를 말할 것인데, 이에 앞서 약간의 경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은 1991년에 쓴 것으로, 『가라타니 고진 전집 제4권』(이와나미 서점)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정신분석』(코단샤 학술문고)이라는 제목의 책과 다릅니다. 후자는 2002년에 쓴 것으로, 여기서 저는 앞서 쓴 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일본정신분석」을 쓸 당시에 저는 일본인론과 일본 문화론을 부정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 안에 포섭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 후 저는 ‘일본론’에 대해 어떠한 글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분으로는 저의 그 논문을 다시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와카모리 요시키(若森栄樹, 1946~ 프랑스철학자, 라캉학회 이사) 씨를 비롯한 라캉파 사람들에게 저의 논문이 평가받아 강연을 의뢰받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재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재고라 해도 별도로 새로운 견해를 제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제가 이야기함으로써 여러분들이 다시금 고민할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 온 것입니다.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의 주제는 제가 1980년대 후반에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에 쓴 논점을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마루야마는 서양의 사상사를 기준으로 일본의 사상사를 고찰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본 사상사에는 다양한 개별 사상의 좌표축이 될 만한 원리도 없고 어떤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할 전통도 없으며, 모든 외래 사상이 수용되어 공간적으로 잡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원리적인 대결이 없기 때문에 발전도 축적도 없다(『일본의 사상』이와나미 신서 1961 년). 다시 말해,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법 없고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자신과의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로 저장되며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면 돌연 호출된다. 그리하여 일본은 어떤 무엇이라도 다 있다. 그는 그것을 ‘신도’라고 부릅니다. “‘신도’는 이른바 수직으로 휑하게 늘어진 물주머니처럼 당대의 유력한 종교와 ‘습합’하여 그 교의내용으로 채워왔다. 이 신도의 ‘무한포옹’과 사상적 잡거성은 앞서 언급한 일본의 사상적 ‘전통’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같은 책).

마루야마 마사오는 서양과 비교하여 일본을 고찰한 사람인데, 다른 한 사람, 중국과 비교하여 일본을 고찰한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 문학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 1910~1977)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 서양과의 접촉에서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은 그에 대한 반동적인 ‘저항’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그것이 없이 원활하게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는 일본에는 사상의 좌표축이 없다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의견과 같습니다. 즉, 원리적인 좌표축의 존재는 ‘발전’보다 오히려 ‘정체’를 이끌어 낸다. 일본의 ‘발전’의 비밀은 자기도 원리도 없는 것에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시적인 침체를 수반하더라도 중국과 같은 ‘저항’을 통한 근대화가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편이 오히려 서양 가깝다고.

저는 그들의 주장에 별로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했을 때 확실히 그렇습니다. 근대 일본의 다양한 문제가 여기세 집약됩니다. 단지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아무래도 집단으로서의 일본인의 심리를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넓은 의미로 ‘정신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루야마는 『일본의 사상』 이후 1972년에 「역사의식의 古層」이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사상』에서 지금 언급한 문제, 즉 신도라든가 사상의 좌표축이 없다든가 하는 것들을 고대로 역행해서 풀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古史記』의 분석을 통해 수행했습니다. 그 때 그가 ‘古層’에서 찾아낸 것은 의식적인 조작ㆍ제작에 대해 자연적인 생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였습니다. 고층(古層)은 일종의 공동 의식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의 古層’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편, 당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의 일본문화론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모성사회 일본의 병리』라는 책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융 학파였기 때문에, 당연히 집합무의식 같은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룹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인의 경우는 의식의 중심에 자아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정합성을 갖는다. 그리고 자아는 심층[무의식]에 존재하는 자기와 연결된다. 이에 반해 일본인의 경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도 확실하지 않고 의식의 구조도 오히려 무의식 내에 존재하는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중심을 가지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모성사회 일본의 병리』).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집합적 무의식을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데에 의심을 품습니다. 어느 일본인 개인을 정신 분석할 수 있겠으나, ‘일본인의 정신분석’이란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자, 프로이트는 어떻습니까? 그는 집단심리학과 개인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매우 신중했습니다. 그는 개인 심리라는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집단 심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개인 심리와 별개로 상정되는 집단 심리(귀스타브 르봉)를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집단적인 것이 어떻게 전해질까요? 이에 관해 프로이트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학설을 가지고 온다거나 인류의 과거 경험이 제식(祭式) 등을 통해 전승된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가지를 말하지만, 명확히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라캉은 이 문제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의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언어에서 생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집단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은 언어의 습득을 통해 집단적인 경험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즉, 언어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면, 집단 심리학과 개인 심리학의 관계라는 성가신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라캉은 사람들의 언어습득을 어떤 결정적인 도약으로서,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때 언어가 집단적인 경험으로서 과거로부터 면면히 계승되는 것이라고 하면, 개인에게 집단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일본인 또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볼 때 그것을 의식 또는 관념의 수준이 아닌 언어적인 수준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물론 언어라고해도 다음에 주의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ㆍ일본 문화의 특징을 일본어의 문법적 성격에서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어는 주어가 없다, 그래서 일본인에게는 주체가 없다는 등과 같은. 그러나 그렇다면 같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주변 국가인 한국은 어떻습니까? 기이하게도 일본 문화를 언어로부터 고찰하는 어느 연구자도 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본 문화의 특성을 제대로 보려면, 서양이나 중국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한국과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카인ㆍ아메리카 문화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메리카(합중국)를 유럽, 라틴아메리카 혹은 동양과 비교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캐나다와 비교해야 합니다. 즉, 아메리카 문화의 특성은 같은 영국의 옛 속국이며, 같은 이민 국가인 캐나다와 비교했을 때 보이기 시작합니다. 캐나다에서 이러한데, 미국은 왜 이럴까. 그러나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외라고 하면, 총에 의한 대량 사살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Bowling for Columbine입니다. 그는 캐나다는 미국보다 오히려 총 소지 비율이 높은데 총을 사용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폭력 사건을 통한 문화론이며, 게다가 정신분석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캐나다와 미국의 차이는 영국과의 관계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을 생각할 때, 서양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론은 일본을 서양이나 중국과 비교하여 고찰한 것입니다. 그래서는 틀에 박힌 인식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는 ‘일본정신분석’의 특질은 언어로부터 살펴보는 것, 한국과의 비교에서 살펴보는 것, 이 두 지점에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중국에 대한 관계의 차이에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한국이나 베트남 등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모두 한자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전부 방기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어가 독립어라면 주변의 언어는 교착어이다) 한자의 사용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한자가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자에서 유래한 두 종류의 표음적 문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3종의 문자로 단어의 출처를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 기원의 단어는 한자 또는 카타카나로 표기됩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무시한다면, 문학은 물론 일본의 모든 제반 제도와 사고는 이해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제반 제도와 사고는 그러한 에크리튀르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에서는 어떤 외래 사상도 수용될 수 있지만 단지 그것들은 잡거하고 있을 뿐 내적인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문자사용의 행태에서입니다. 한자나 카타카나로 수용되는 것은 결국 외래적인 것이며, 그래서 무엇을 받아들인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외래적인 관념은 어떤 것이든 먼저 일본어로 내면화되므로 거의 저항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기상 어차피 한자나 카타카나로 구별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내면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투쟁도 없으며 단순히 외래적인 것으로 정리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외래적인 것은 모두 저장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일본의 사상’의 문제는 문자의 문제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역사의식의 古層’이라고 하는 것 혹은 집합무의식과 같은 것은 보지 않다고 됩니다. 한자, 카나, 카타카나의 3종 에쿠리튀르가 병용되어 온 사실에 주목하면 됩니다. 이것들은 현재 일본에서도 존재하고 기능합니다. 일본적인 것을 고찰하는 데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기이하게도 제가 생각한 이것을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도 무엇인가를 하려면 누군가 이미 손대고 있는 선행 연구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라캉입니다. 사실상 저는 와카모리(若森) 씨가 번역한 라캉의 짧은 논문을 읽고 라캉이 일본의 문자, 특히 한자의 훈독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는 ‘에크리’의 일본어판 서문에서 ‘일본어와 같은 문자의 사용방식을 쓰는 사람은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독자는 이 서문을 읽는 즉시 나의 책을 덮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쓰인 책이다’ 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라캉이 주목한 것은 일본에서 한자를 훈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발화하는 인간을 위해서 음독은 훈독을 주석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로[음독과 훈독]를 연결시키는 펜치는, 그것들[음독과 훈독]이 구워낸 와플처럼 생생한 것을 보면, 실은 그것들이[음독과 훈독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일본을 제외하고] 어느 나라에도 국어에서 시나어[중국어]를 구사하는 행운을 갖지 못하고, 무엇보다도—더욱 강조해야 할 점인데—, 끊임없이 사고(思考)로부터, 즉 무의식으로부터 어휘(파롤)와의 거리를 감지 가능하게 할 정도로 미지의 국어에서 문자를 차용하지 않습니다. 정신 분석을 위해 가끔 국제적인 여러 언어 가운데 적당할 것 같은 언어를 꺼내 보일 때에 성가신 일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해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하면, 일본어를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임을 막론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임이 일상다반사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1972년 1월 27일) (*번역자 덧붙임: 아는 만큼 번역했음. 오역이 있을 수 있음. 원문 참조 바람.)

사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본인은 한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을 자국의 음성으로 읽었다. 즉 훈독으로 읽은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음성을 한자를 쓰면서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흔한 일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으로부터의 문자의 수용은 당연한 일이었고, 세계의 여러 문명의 중심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은 이를 경험했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단지 [외부로부터] 알파벳을 수용했다고 해서 바로 자신의 말을 적기 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에서 온, 문명에서 온 텍스트를 번역하는 형태로 자국의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단테가 라틴어로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이탈리아 지방의 한 방언으로 번역해서 썼습니다. 그 방언이 현재의 이탈리아어가 되었습니다. 즉, 단테가 번역을 통해 만든 말로 지금의 이탈리아 사람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메이지 일본의 언문일치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를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언문일치’의 경우 그 말하는 방식이 그럭저럭 타당하다고 하면 도쿄지방에서뿐입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언문일치의 문장이란 ‘언’(구어)과는 무관한 새로운 ‘문’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러한 ‘문’으로 말하게 됩니다. 언문일치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제가 다다른 생각은 메이지에서 일어난 일이 이미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시대에 걸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헤이안시대에 지방 사람들이 교토의 궁정에서 이야기되는 말로 쓰인 「겐지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교토의 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방 사람들이 방언으로만 말하면 통하지가 않는데, 헤이안시대에 통할 리가 없었겠지요. 「겐지 이야기」와 같은 화문(和文)이 어디서나 통했던 것은 그것이 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한문의 번역을 통해 형성된 화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헤이안 시대의 여성작가, 시인)라는 여성은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던 사람으로 한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어를 의도적으로 괄호에 넣고 「겐지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은 한자를 수용해서 훈독을 해서 일본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탈리아 사람은 이탈리아어가 애초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일본어의 에크리튀르가 한문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자이기 때문에 외래적입니다. 그러나 외부성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이 한자를 외래어로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한자가 남아있으면서 그 외부성이 소거된 것입니다. 이 점이 기이합니다.

저는 이 점에 주목합니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제도=문명이 전면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과거와 환관을 포함한 문관제도가 일찍부터 확립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중국의 제도=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거부합니다. 이 기이한 방식이 문자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라캉에서 배운 사고로부터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인은 이른바 ‘거세’가 불충분합니다. 상징계에 진입하면서도 상상계라고 할까요, 거울단계에 머물러있습니다. 이 견해는 일본의 문화ㆍ사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다뤄 온 문제는 이러한 문자의 문제를 관통하는 ‘정신분석’을 통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라캉이 일본인에게는 ‘정신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상형문자’로 파악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인데, 이는 음성언어화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에 있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로는 이른바 ‘상형문자’가 그대로 의식에서도 드러난다. 거기에서는 ‘무의식에서 파롤까지의 거리를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억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상형문자)를 항상 노출시키고 있기—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일본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캉의 일본론을 읽고 제가 떠올린 것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겐지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잘 만들어내는 일이라 해도 그 속에 진실이 있어야 하며, 만들면서도 아와레(あはれ, 마음에 스미는 절절한 정취)를 이르는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일. ......더욱이 헛소리를 하면서도 헛소리에 없는 것을 아는 일. ......이야기에 좋고 나쁜 것은, 유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시비와 같지 않으므로 그 정취를 말하는 것.”(* 번역자 덧붙임: 옛 일본어라 오역이 있을 수 있음. 원문 참조 바람.)(「겐지 이야기 구술의 작은 빗」) 즉, 이야기에서 ‘좋고 나쁨’은 유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시비’와는 다르다. 이야기는 만드는 일, 그런 것인데, 그러므로 표현되는 ‘사물의 아와레’야말로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캉이 말한 것을 상기해주십시오. “일본어를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임을 막론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임이 일상다반사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이러한 견해ㆍ사고를 “야마타고코로”(大和心)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해도 똑같은 것입니다. 제가 ‘일본정신분석’이라고 했을 때 ‘일본정신’은 이와 같은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군국주의 혹은 체육계의 일본정신과 다른, 어떤 모양새(여성스러움)입니다. 실제로 야마토타마시이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겐지 이야기」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물론 그것은 한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의 반대 개념이 카라고코로(漢意)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유교와 불교의 사고방식을 가리키지만,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 도덕적, 이론체계적 사고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자로 표현되는 개념을 가리킵니다. 군국주의적인 일본 정신은 물론 漢意입니다. 반면 노리나가(宣長)는 ‘사물의 아와레’라는 감정을 견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적ㆍ이론적이지 않더라도 인식론적이며, 도덕적이지 않더라도 깊은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인 것이다, 라는 겁니다.

또한 노리나가(宣長)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면 죽어도 좋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비록 극락에 간다고 정해져도 죽는 것은 슬프다, 라는 것입니다. 신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신뿐만 아니라 나쁜 신도 있다, 나쁜 일을 해도 행복한 경우도 있으며, 선한 일을 해도 불운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신을 진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라고. 이것을 보면, “일본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다”라는 라캉의 말이 납득됩니다.

노리나가(宣長)의 언설은 유교를 비판한 노장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지만, 그는 정작 노장도 漢意도 비판합니다. 노장이 설파한 자연은 인공적인 유교 사상에 대해 인공적으로 사유된 자연에 불과하다, 라고. 야마토고코로(大和心)라고 하면 배외주의적으로 들리는데, 노리나가(宣長)는 일본의 신도 또한 漢意이라고 합니다. 신도라는 것은 불교와 유교에 대항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체계이다, 라고. 반면 노리나가(宣長)가 말하는 자연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은 ‘~의 길’이며,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고학’(古學)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자신의 학문을 ‘고학’이라고 부르며 한번도 ‘국학’(國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고의 길’(古の道)을 현세에 실현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취한 것은 오히려 온건한 점진적 개혁의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정토종의 문인이었으며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국학’을 만든 것은 노리나가(宣長) 사후에 등장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입니다. 그것은 이념으로 상정되는 고대사회를 지금 세상에 실현하려는 정치사상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왕정복고 사상으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노리나가(宣長)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아츠타네(篤胤)와 같은 생각을 漢意로 비판할 것입니다.

노리나가(宣長)가 말한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라는 것은 작위성이나 억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는 꽤 괜찮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정신분석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일본인에게 실제로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인이라는 것도 밝혀질 수 없습니다. ‘고의 길’은 노리나가(宣長)가 일종의 분석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념으로 세우면 필연적으로 히라타 아츠타네가 말한 신도적 이념이 됩니다.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는 이내 일본 정신이 됩니다. 즉, 야마토고코로(大和心)라는 것은 실제로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얻고 유지하는 것에는 대단한 지성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노리나가(宣長)는 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고학’입니다. 그러나 고학이라도 해도 『古事記』를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겐지 이야기」를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이를 통해 漢意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정신분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정신 분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라캉에 대해, 저는 야마토고코로(大和心)를 갖기 위해서는 역시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저는 2002년 ‘일본정신분석’을 쓴 이후 이러한 문자의 문제 혹은 일본의 문제, 문학의 문제에 대해 쓰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동안 계속 생각해 온 것은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그 중에 일본을 특별히 다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일본인으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일본의 문제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한 것은 이곳이 ‘일본라캉협회’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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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이 마루야마 마사오와 어떤 점에서 사상과 고민을 공유하는지를 볼 수 있다. 더불어 [세계사의 구조]에서 좀 더 일본의 문제로 중심을 옮겨 [제국의 구조]를 저술하게 된 배경을 읽어낼 수 있다. 번역이 직역에 가깝고, 오역이 있을 수 있겠다.    

원문은 http://www.kojinkaratani.com/jp/essay/post-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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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마루야마 마사오라고 하면 서양에 뒤쳐진 일본의 전근대성을 비판하는 지식인, 곧 근대주의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나도 그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마루야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때는 1984년경이다. 그때 일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 주목을 받았다. 이 현상은 먼저 ‘현대사상의 붐’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 자신이 그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주목받았고, 나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했다. 내가 그때까지 수행한 ‘근대비판’의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내가 한 작업이 잘못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어긋나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나는 ‘근대비판’을 끝까지 파고들면 자발적인 주체(주관)에 대한 비판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각기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있지만, 그 의지는 ‘타인의 욕망’에 매개된 결과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 주체는 무의식의 구조의 결과(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인식론적 주관은 자유롭지 않으며 이미 언어적 제도(시스템) 가운데 규정된다.

따라서 ‘근대비판’은 자유로운 개인 주체라는 허구에서 출발하는 부르주아적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이와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를 부정하는 지식인의 권력(지식권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즉, 대중을 계몽하고 지도하는 지식인=전위당이라는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이러한 주체 비판은 주체의 부정이 아니다. 그 반대로 지식의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개별 주체와 그의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활동의 창출을 의미한다. 이것은 1968년 오월혁명으로 상징되는 운동과 동일하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는 기존의 좌익을 부정하는 새로운 좌익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후에 돌이켜 보면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 혹은 지식의 해체(deconstruction)가 급진적 의미를 갖는 시기는 한정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가져온 소비사회ㆍ정보사회에 바로 따라잡히기 때문이다. 즉, 근대비판의 담론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촉진한 해체에 흡수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이미 그 내실은 이와 같았다. 이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나 발생한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대개 포스트산업자본주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하다면,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전(戰前)의 ‘근대의 초극’(近代の超克)의 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주체 비판’은 서양적인 주관이원론에 대해 동양적인 ‘주객합일’을 세우는 부류의 담론과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를 휩쓸었던 거품경제 탓인지 해외의 주목을 끌었다. 나 자신도 참가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본’이라는 국제회의가 열릴 정도였다. 왜 주목받았는가? 서양 사회는 소비사회라고 해도,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그러한 담론을 보여줄 정도로 급격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한 변화를 막아낼 만한 것이 확고했다. 그래서 약간의 변화조차도 획기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런 변화가 급격했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그 ‘선진성’이 세계적으로 눈에 띈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 일본 사회의 전근대적인 측면이 비판되다가 갑자기 일본이 포스트모던의 선두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본의 포스트모던은 오히려 근대가 누락된 결과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지점에 근대비판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1984년 나는 그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는 일본의 근대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해왔지만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뒤늦게야 이 문제를 마루야마 마사오가 고민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나는 마루야마가 서 있던 장소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장소는 일본에서 세상을 고민한다면 피할 수 없는 장소이다.

2

1984년에 부상한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 당시 ‘현대사상’의 유행은 뉴아카데미즘이라고도 불렸다.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이항 대립이나 계층성을 탈구축하는 새로운 지식인의 등장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운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본래 일본에서는 대중의 활동과 유리된 지식인이 우위를 점한 예가 없다. 그런데 추상적인 관념만으로 대중을 무시하고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다고 하는 지식인 비판담론은 늘 횡행해왔다. 지식인을 비판하는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지식인이라고 말하는 편이 강했다. 예를 들어, 일본에는 ‘상아탑’ 같은 것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아탑에 대한 비판이 늘 존재했고 그러한 비판이 승리해왔다. (주 1)

일본에서 지식인과 대중의 괴리는 서양이나 아시아 국가에 비하면 근소하다. 그 원인의 하나는 일본 사회에서는 의외로 사회적 이동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도쿠가와 시대에도 입양에 따른 계급 이동이 많았다. 그래서 좋은 집안이라고 해도 대부분 4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 있는 조상이 없다. 그래서 일본인은, 지금 불우하여 옛 가문 이외에는 정체성을 확보할 길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 4대 이상의 조상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러한 사실 자체는 사회적 이동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일본인은 이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이와 같은 일본 사회에 지배계급이나 지식계급이 오랫동안 대중으로부터 격리된 사회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논의를 그대로 들여오는 것은 종종 해학적인 자기기만일 뿐이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서 지식인은 대체로 귀족, 지주, 부르주아 등의 지배 계급 출신이다. 이 점은 사회적 이동성이 크고 대중 사회화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에 속하는 지식인의 대부분은 이른바 세습적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중(하층계급)과 떨어져있다. 그들은 당연히 좌익 또는 자유주의자이다. 이곳에서는 필연적으로 대중문화와 하위문화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출현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지식인과 대중의 갭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런데 일본에서 대중문화와 완전히 단절된 지식인이 존재할까. 예를 들어, 지금도 내가 아는 미국의 지식인은 텔레비전도 거의 보지 않으며 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에 반해 일본의 지식인은 그렇지 않다(주 2). 1960년대부터 일본의 대학생은 공개적으로 만화를 읽는다. 이런 풍토에서 일부러 대중문화를 논의하고 비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츠루미 슌스케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상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인 경험과 지혜를 발굴했는데, 일본에서 그것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리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실제로 그런 작업은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에 간단히 접수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츠루미 슌스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판단은 실로 지식인주의이에요. [...] 나는 당신의 철학을 매우 신뢰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일상적 감각은 믿지 않아요. 당신의 감각은 일반 일본인과 매우 달라요. 자라온 생활환경을 보더라도 내 쪽이 훨씬 ‘전근대적’이거든요. (웃음)” (「구전되는 전후사, 보편적 원리의 입장」, 『사상의 과학』 1967년 5월호, p117)

마루야마 비판은 정확하다. 그러나 츠루미 슌스케의 문제는 지식인을 비판하고 대중적인 존재와 경험을 높게 평가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 비판성이 금세 비활성화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스스로의 자세를 바꿀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에 저항할 수 없고 흡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츠루미는 추상적인 사상이나 원리의 지배를 비판한다. 그러나 서양이나 아시아에서는 그런 비판이 필요하고 효율적이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지식인이 지배한 적이 없고 사상이나 원리가 지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추상적인 사상이나 원리는 간단히 ‘漢意’(*)(本居宣長: 모토오리 노리나가, 1730~1801, 일본의 한학자)로 거부될 수 있다. 오히려 일본에 필요한 것은 ‘사상’ 혹은 ‘원리’이다. 마루야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역자 덧붙임: ‘漢意’(“카라고코로”)는 중국적 사고방식과 중국의 문물을 의미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중국의 문물을 “카라고코로”로 배격하고 일본 고유의 정신인 ‘大和魂’(“야마토타마시이”)를 정립했다.)

“일본에서 사상 따위는 현실을 치장할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고, 인간이 사상을 갖고 살아간다는 전통이 부족해요. 이는 종교가 없고 도그마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데올로기 과잉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반대예요. 마술적인 말이 범람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건 뭐건 간에 무이데올로기 국가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중 사회의 가장 선진국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나 나올 법한, 마치 관념이 기모노를 입고 걸어 다닐 법한 그런 정신적 기후, 그렇게까지 관념이 생생한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보고 법을 설파하라. 내가 19세기의 러시아에 태어났다면 사상의 준거라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스탈린주의에도 관념에 사로잡힌 병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잔학함은, 그가 새디스트였거나 관료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관념에 사로 잡혀 추상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 보고 산 인간은 보지 않았던 것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관념에 빠져 드는 병리 그리고 무의 사상으로 순응해서 살며 매일을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살기 편할까요? 저는 확실히 후자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상에 의한, 원리에 의한 삶의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상이 오늘 내일의 현실을 바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류우 이치로와의 대담 『마루야마 좌담 5』 pp.138-9)

이처럼 마루야마 마사오는 한편으로 경험론적이고 사실적인 태도를 전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이나 원리의 우위를 설파한다. 마루야마는 어느 쪽이 우세하다든가 혹은 그것들의 ‘종합’이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속한 맥락이 사상을 경시한다면 사상을 중시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을 보고 법을 설파하라’는 바로 이를 뜻한다. 하지만 그의 이 태도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보다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실제로 마루야마에 관해서는 사상이나 원리의 필요를 설파하는 측면만이 부각되었고 그러한 인상만 남아있다. 그 결과 츠루미 슌스케야말로 '지식인주의'의 전형인데도, 반대로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 전형으로 간주된다.

3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러한 역설적인 스탠스와 민첩한 발놀림은 하나의 입장으로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학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점에서 일본에서 가장 마루야마에 가까운 사람은 고바야시 히데오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가 객사했다는 소식에 마사무네 하쿠쵸는 톨스토이의 추상적인 사상이 결국 실생활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글을 썼다. 반면 고바야시는 이에 격렬히 반박했다. “모든 사상은 실생활에서 탄생한다. 그러나 태어나 자란 사상이 드디어 실생활에 결별 때가 오지 않는다면, 무릇 사상이라는 것에 어떤 힘이 있을까?” (「作家の顔」[작가의 얼굴]). 이것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그대로이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위의 발언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탄압받고 프롤레타리아 문학파의 전향이 잇따랐던 시기, 즉 추상적인 “사상”이 “실생활”에 굴복한 시기에 나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때까지 고바야시는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에 비판적이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스탠스를 급격히 바꿨다. 맑스주의자 자신이 자기 ​​비판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일본에서 사상이 개개인을 넘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으로” 존재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비교하면 마르크스주의 문학론이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든지 ‘공식주의’적이라든지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라고.

이론은 본래 공식적인 것이다. 사상이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면, 사회 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마르크스주의 문학가)은 살아갈 수 있었다. 이 본래의 성격을 지닌 사상, 우리 문단의 공전의 수입품을 홀로 떠맡아 그들이 얻은 것은 참으로 귀중했으며, 공식주의가 무언가 하는 질문 따위로 폄하될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그들의 작품에는 후세에 길이 남을 걸작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또한 그들의 소설에 많이 등장한 인물은 가상의 인간 군상일지 모른다. 이는 사상에 의해 왜곡되고 이론에 의해 과장된 결과였으며, 결코 개인의 취향에 의한 실패 혹은 성공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자연주의 소설은 부르주아 문학이라기보다 봉건주의적 문학이며, 서양의 자연주의 문학의 걸작이 시대성의 한계를 가진 반면, 우리나라의 사소설(私小説)의 걸작은 개인의 면모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말살했던 것은 이 면모이다. 사상의 힘에 의한 정화가 마르크시즘 문학 전반에 나타나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사상의 힘으로 문사기질(文士氣質)을 정복한 것에 비하면, 작중 인물의 취미나 버릇을 생생하게 그릴 수 없었던 무력함 따위는 크게 문제될 것 없다. (「私小説論」 『고바야시 히데오 전집』제3권 p132)

마루야마 마사오는 고바야시 히데오와 거의 같은 취지의 다른 역설적인 발언에 대해 ‘참으로 신선한 지적’이라고 말한다(『일본의 사상』 이와나미신서 p78). 고바야시 히데오는 그때까지 사상이나 원리를 ‘다양한 의장’으로 비판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 그것을 긍정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단의 이동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1984년의 시점에서 나는 그것을 ‘비평’이라고 했다. 물론 이렇게 부른 것은 고바야시 히데오가 비평가였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때 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평」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평가라고하는 사람들이 모두 ‘비평’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비평’은 방법이나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언설 공간)에 속하는 동시에 속하지 않는 모순에 찬 위험한 본연의 자세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회피’(はぐらかし)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는 그것[‘비평’]이 본인의 몸을 찢어놓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데리다의 탈구축이 알제리 출신의 유대인이 프랑스의 ‘지식’ 속에서 취한 최대한의 전략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 ‘비평’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습득’할 수 있을까? 정말로 철학자는 그런 것을 새로운 동향으로 습득할 수 있으며, 일본의 철학자는 늘 그래 왔다. 만약 일본에서 (소수의) 비평가나 작가가 철학자나 사회과학자에 비해 오히려 “내용”적으로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우월성이 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비평”이 방법 혹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차이로서의 장소』코단샤 학술 문고)

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작업을 이러한 “비평”으로 보고자 한다. 일본 학자 중에 마루야마와 같은 비평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학 비평을 전문으로 한다고 비평가는 아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자신 또한 이것[“비평”]을 방기했던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고바야시 히데오는 원리를 중시하는 태도에서, 대상은 감상(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몰입에 의해서만 감수(感受)할 수 있다는 베르그송 철학으로 옮겨갔다. 실제로 그것은 이론적ㆍ분석적 태도를 약은 “漢意”로 간주하는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로 귀착한 것이다. 즉, 사상이 ‘의장’에 불과한 일본의 상황에 저항하는 대신에, 바로 거기에 몰입해 버린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그것을 “실감신앙”이라고 명명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마루야마야말로 고바야시 히데오가 상실한 비평성을 그 후에도 계속 이어온 유일한 사람이다.

이러한 “비평”은 일본 고유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 그것은 칸트의 ‘비판’과 함께 제기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고바야시 히데오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것을 고전 철학에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사상이 실생활을 넘어선 무언가라는 생각은 합리론이다. 사상이 실생활에서 유래한다는 생각은 경험론이다. 여기서 칸트는 합리론이 우세할 때 경험론에서 그것을 비판했고 경험론이 우세할 때 합리론에서 그것을 비판했다. 즉, 그는 합리론과 경험론이라는 이율배반을 지양하는 제3의 입장에 선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제3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가 아닌 헤겔이 되고 만다. 이 의미에서 칸트의 비판은 민첩한 발놀림에 있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했지만, 경험론적인 사상이 지배하는 영국에서는 ‘헤겔의 제자’임을 공언했다. 그런데 칸트에 관해서도 마르크스 관해서도 그것을 하나의 입장이나 체계에 집약시켜 버리는 사람들이 비판철학이나 마르크스주의를 형성했던 것이다. 거기서는 그들의 “비평”(트랜스크리틱)이 간과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신칸트학파가 아니라 칸트의 ‘비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칸트의 비평성을 보고자했을 뿐이며,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오히려 마루야마 자신의 비평성이 그런 칸트를 발견해낸 것이다.

4

2003년 이라크 전쟁 시 나는 미국의 서부 해안에 있었다. 그때 몇몇 지인으로부터 미국의 반동화가 대단한 것 같은데 괜찮을까 라는 문의가 있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서는 연일 가두시위가 있었다. 나는 오히려 일본이야말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유럽​​ 각국은 물론 한국과 인도에도 거대한 항의 시위가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후(戰後)의 정책을 버리고 처음으로 해외파병을 한 것이 주목받던 시기에, 거리에서 반대 운동이 거의 없다는 것은 바깥에서 보면 소름끼치는 일이다.

거리의 데모(시위행진)는 낡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인터넷 등의 보급으로 항의수단이 다양해졌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시가전이나 무장 시위는 낡은 것이지만 고전적인 데모는 지금도 서양과 아시아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고 효과적이다. 그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쿠노 오사무가 강조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대표의회제도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데모와 같은 직접행동이 불가결하다.

그런데 일본에는 데모가 없다. 그것은 인터넷 등의 탓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인터넷을 데모의 광고나 연락 수단으로 이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은 웹에 의견을 쓴 것만으로 이미 뭔가 행동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주 3) 일본인의 이런 행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를 들어, 와츠지 테츠로는 쇼와 초기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의 시위운동의 날에 어느 창문에 적기가 매달리고 국수당의 시위운동의 날에 그 옆 창문에 제국의 깃발이 매달리는 명백한 태도 결정의 표시, 또는 시위운동에 늘 기뻐하며 일개 병졸로 참여하는 것을 공공인으로서의 의무로 하는 각오, 이것들은 데모크라시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민중들 사이에 공유되는 관심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치는 다만 지배욕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전문직으로 변했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무산대중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지도자’들의 그들만의 집단운동에 그쳐 지도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거의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이 운동이 공허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민중이 마치 공원을 파손할 때 나오는 태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공공적인 것을 ‘강 건너 불구경’(よそのもの)으로 느낀다는 것, 따라서 경제 제도의 변혁 따위의 공공적인 문제에 진심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관심은 단지 그 ‘집’ 내부의 생활을 보다 풍부할 때에만 불러오는 것 등은 여기서 분명히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풍토』이와나미서점 p168)

와츠지가 지적한 현상은 이후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1960년 안보투쟁에서 시민에 의한 데모가 연일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때는 전학련의 데모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쿠노 오사무는 이에 감명을 받았고 일본의 시민주의의 정착을 보았다. 하지만 진정한 ‘정착’은 없었다. 이후 이 같은 데모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와츠지의 말을 빌면, ‘지도자들의 무리 운동’ 밖에 남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이후 신좌익의 과격한 데모가 평범한 시민의 데모를 억압했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평범한 시민의 데모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가 과격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내에서 소멸한 구 ‘신좌익’의 과격파가 일본 밖에 살아남은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다.

와츠지의 지적은 데모에 관해서만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특히 외국에서 눈에 띄는 것인데, 일본인은 거의 정치적 의견이나 사상적인 의견이 없다. 단지 이야기의 소재는 인테리어라든지 패션 같은 ‘가정 내부의 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괴상할 정도로 세련됨을 보이며 웅변된다. 또 공공의 문제에 무관심하더라도 쓰레기 소각장 설치나 식품오염과 같이 ‘가정 내부’에 유입되는 문제가 발생하면 갑자기 격앙하여 과격한 반대 운동을 행한다.

이러한 사정은 쇼와 초기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즉,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변화, 예를 들어, 대중 사회, 소비 사회, 정보 사회라는 것의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쳐도 그러한 양상이 다른 어느 곳보다 현저한 곳이 일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한 것처럼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대중 사회의 가장 선진국’인 것이다.

와츠지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개인이 성벽에 의해 외계로부터 분리된 도시 공동체 속에서 길러지는 반면, 일본에서 개인은 ‘집’에 있어서 공공성에 무관심하다. 서양에서는 집에서도 사적이지 않다. 사적인 것은 방뿐이며 복도는 공적이다. 따라서 방에 열쇠를 걸어 둔다. 반면 일본인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에서 거주한다.

“성벽의 내부에서 사람들은 공동의 적을 상대로 단결하여 공동의 힘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호했다. 공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이웃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존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동의 생활기조로 그 모든 생활 방식을 규정했다. 의무의식은 온갖 도덕적 의식의 가장 전면에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개인을 말살하려 하면 공동이 강하게 개인성을 일깨워 개인의 권리는 의무의 반면(반면)으로서 의식의 전면에 함께 등장했다. 그래서 ‘성벽’과 ‘열쇠’는 그들의 생활양식의 상징이다.” (『풍토』이와나미서점 p165)

‘집’을 지키는 일본인에게는 영주가 누구여도 단지 그의 집을 위협하지 않는 한 지장을 초래하지 않았다. 그래 위협받아도 그 위협은 인내와 복종(忍従)에 의해 방지되었다. 단적으로 어떤 노예적인 노동을 강요해도 그에게서 ‘집’ 내부의 닫힌 공간을 빼앗은 적은 없다. 이에 비해 성벽 내부의 생활에서 위협에 인내와 복종(忍従)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는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의 투쟁으로 막는 것 외에 길이 없다. 전자에 있어서 공공적인 것은 무관심을 수반한 인종(忍従)이 발달하고, 후자에 있어서 공공적인 것은 강한 관심과 관여와 함께 자기주장의 존중을 발전시킨다. 데모크라시는 후자에서 진정으로 가능하다. 의원선거는 여기서 처음으로 그 의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민중의 ‘여론’이란 여기서 처음으로 존립한다. (pp167-8)

와츠지가 일본인이 공공적인 것에 무관심하며 그런 의미에서 ‘사적’이라는 주장은 날카로운 지적이다. 물론 ‘성벽’이나 ‘집’과 같은 것이 개인의 존재방식의 차이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존재방식의 차이가 그런 차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존재방식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의 역사적인 존재방식에 달려있다. 하지만 애초에 와츠지와 같은 인식이 없었다면, 그러한 역사 그 자체가 보일 수 없다.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가 시도한 것은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구명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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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통적인 사회(공동체)에서 개인이 출현하는(individuation) 패턴을 고찰 했다. 일본의 사례는 예를 들어, 퇴니스처럼 게마인샤프트에 대한 게젤샤프토로는 설명 할 수 없고, 또한 리스먼처럼 전통 지향에 대해 내부 지향과 타인 지향이라는 두 유형을 가져 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근대화와 함께 발생하는 개인의 사회에 대한 태도를 결사형성적(associative)과 비결사형성적(dissociative)의 세로축 그리고 정치적 권위에 대한 구심적(centripetal) 태도와 원심적(centrifugal) 태도의 가로축이라는 좌표로 만들어 분석했던 것이다. 이는 다음의 그림과 같이 네 가지의 유형이 만들어진다. (원문의 그림 참조)

I 자립화 individualization D 민주화 democratization

P 사화(私化) privatization A 원자화 atomization

간단히 설명하면, 민주화하는 개인의 유형(D)은 집단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유형이다.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I)은 그로부터 자립하지만, 동시에 결사형성적이다. 민주화 유형이 중앙 권력을 통한 개혁을 지향하는 반면 자립화 유형은 시민적 자유의 제도적 보장에 관심을 갖고 지방 자치에 열심이다. 그런 사화(私化)하는 개인의 유형(P)은 민주화 유형의 정반대된다. 즉, P는 정치 활동의 좌절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사적인 세계에 잠겨드는 유형이다. 또한 P와 원자화하는 유형(A)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사화(私化)하는 개인은 원자화하는 개인과 비슷하지만(정치적으로 무관심하지만), 관심이 사적인 문제에 국한된다. 후자[원자화하는 개인]는 유동적이다. 전자는 사회적 실천으로부터 은둔하는 것이며 후자는 도망치는 것이다. (중략) 원자화하는 개인은 일반적으로 공공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종종 바로 이 무관심이 갑자기 광기의 정치 참여로 전환될 수 있다.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조해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유형은 권위주의 리더십에 전적으로 귀의하고 또한 국가 공동체ㆍ인종 문화의 영원불멸 성이라는 관념으로 표현되는 신비적 ‘전체’ 속으로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출현의 다양한 패턴」『마루야마 마사오 전집』제9권 p385)

즉, 사화(私化)하는 개인의 유형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지만, 원자화된 개인의 유형은 ‘과도한 정치화와 완전한 무관심’ 사이를 왕복한다.

이 네 가지 유형에 대해 마루야마는 ‘한 인간이 네 가지 중 한 가지 유형에 전면적으로 순수하게 속하며 평생 변하지 않는 것은 희소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각 사회는 이러한 여러 유형의 분포에 의해 구성되며, 또 그 분포의 정도는 문화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근대화가 내발적이고 천천히 생기는 경우에서 I와 P의 분포가 많아지고, 다른 후진국의 근대화에서는 D와 A의 분포가 많아진다.

이렇게 보면 근대 일본의 특징은 전통 사회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화(私化)와 원자화의 ‘조발(早發)적인 등장’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유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마루야마의 분석은 일반적인 도식에 기초하여 일본의 사례를 관찰한 결과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일본의 특이성에서 출발해 그것을 예외 없이 다룰 수 있는 보편적인 도식을 고안 한 것이다. 이 논문은 원래 영어로 작성됐다. 이는 일본을 하나의 사례로 다루면서도 보편적인 이론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도식은 일반적으로 근대에 대해 사고하고자 할 때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근대적 개인’과 ‘근대적 자아’라고 하는 말이 자주 사용되지만 그 의미가 모호하여 논의를 혼란하게 만들 뿐이다.

여기서 먼저 와츠지가 고찰한 것을 마루야마의 도식에 따라 검토하면, ‘성벽’ 안에서 공공성을 위한 공동의 투쟁과 동시에 발생하는 개인이란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I)이며, ‘집’ 안에서 그 외부에 무관심한 개인은 사화(私化)하는 개인의 유형(P)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I)가 약하고 (P)가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와츠지와 같이 ‘몬순 풍토의 특수 형태’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와츠지는 차이를 유럽의 자유 도시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하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게다가 유럽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중국과의 비교로도 고찰하고 있다. “지나[중국]의 민중은 국가의 힘을 빌릴 수 없고 단지 동향단체를 활용하여 광범위한 교역을 능숙하게 처리해왔다. 따라서 무정부적인 성격이 이러한 경제적 통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지나의 국가로 불리는 것은 이러한 민중 위에 오른 관료조직인 것이지 국민의 국가적 조직은 아니었다”(『풍토』). 달리 말해, 이 같은 사회에서는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은 있어도 사화(私化)하는 개인의 유형은 소수이다.

한편, 마루야마는 일본에서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I)이 성장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일본에서 통일 국가의 형성과 자본의 본원적 축적의 강행이 국제적 압력에 신속히 대처하며 ‘외국에 뒤떨어지지 않은 나라’가 되기 위해 놀라운 초속도로 진행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숨 돌릴 틈 없는 근대화—말단의 행정 마을에 이르기까지 관료 지배의 관철과 경공업 및 거대한 군수 공업을 기축으로 하는 산업 혁명의 수행—로 이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그 사회적 비밀의 하나는 자주적 권한에 의거하는 봉건적=신분적 중간 세력의 저항의 취약함에 있다. 메이지 정부가 제국 의회 개설에 앞서 화족 제도를 일신했고, 유럽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사회적 영예를 짊어진 강인한 귀족적인 전통과 자치 도시, 특권 길드, 불입권을 가진 사원 등, 국가 권력 대한 사회적 바리케이드가 얼마나 취약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입신출세’의 사회적 유동성이 극히 조기에 성립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ㆍ경제ㆍ문화 모든 면에서 근대 일본은 갑자기 구성된 사회이며(지배층 자신의 다수가 갑자기 구성되었다), 민주화를 수반하지 못한 ‘대중화’ 현상도 테크노그라시의 보급과 함께 비교적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일본의 사상』이와나미신서 p44-45)

이것은 와츠지가 ‘성벽’이라는 은유로 말하려고 한 문제이다. 즉, ‘성벽’은 ‘강인한 귀족적인 전통과 자치 도시, 특권 길드, 불입권을 가진 사원 등의 국가 권력에 대한 사회적 바리케이드’를 의미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통일 국가의 형성이 빨랐고 산업화도 빨랐다. 중국에서는 서양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러한 ‘사회적 바리케이드’가 강하고 그것이 국민국가의 형성과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주 4) 한편, 그런 바리케이드가 없었던 일본에서는 급속한 자본주의화가 진행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일본에서는 국가와는 다른 ‘사회’의 차원이 무화되어 있었던 데에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러한 개인이 없어도, 혹은 오히려 없는 편이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항한다고 하면 고작 ‘사화’ 혹은 ‘원자화’에 의한 정도로밖에 할 수 없다. 또한 여기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로 귀결되고 만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발적인 결사(어소시에시션)에 따른 ‘사회’의 차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6

근대 일본에서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I) 대신 사화하는 개인의 유형(P)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이 문제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현대 문학에서이다. 예를 들어, 메이지 10년대의 자유 민권 운동은 기본적으로 도쿠가와 시대에도 유지 된 농촌의 자치적인 코뮨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괴멸당할 때에 사람들은 정치적 현실을 거부하는 ‘사화’로 향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문학으로 향했다. 처음에 그것은 키타무라 토우코크가 그러했듯이 현실에서 패배를 ‘상상의 세계’에서 초월하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직 ‘빈 하늘을 쏘는’ 투쟁이 존재했다. 그러나 토우코크의 자살 이후 일본의 근대 문학은 정치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내면성으로 잦아들었다. 이것은 근대 문학 일반의 특징은 아니다. 다만 I가 무화된 근대 일본에서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을 거부하는 개인은 P로서만 발견되었던 것이다.

일본 자연주의 문학도 그 연장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화’하는 의식에 기초하며, 실제로 곧 ‘사소설’(私小説)되어 갔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바야시 히데오는 ‘사소설론’에서 일본의 ‘私’는 개개인의 면모이지만, 서양의 ‘私’는 ‘사회화한 私’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도식으로 말하면 자립화하는 개인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일본의 사소설(私小説)은 P의 유형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학은 이것을 으깨고자 했고, 그러나 결국 전향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대부분 사소설(私小説)로 향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신민)의 개인화를 두려워한 일본의 국가에게는 이러한 ‘사화’조차도 위험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러한 문학가가 이를 통해 무언가 국가에 저항하는 것 같은 ‘기분’을 가졌던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시대폐색의 현상」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강권에 대해 어떠한 불화도 일으킨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한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게서 마루야마 마사오가 사화하는 유형과는 다른 결사형성적인 개인을 발견한 것은 과연 그답다. “이렇게 그는, ‘강권의 존재에 대한 몰교섭’을 주장하는 부류의 ‘개인주의적’ 경향의 배후에 수동적인 모습을 취한 순응이 숨어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다쿠보쿠는 일반적으로 급진적 사회주의의 협조자 혹은 감상적인 로맨티스트라고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행동을 검토하면, 그의 생활태도는 당시의 자칭 ‘개인의 해방’의 주창자의 상당수보다 훨씬 열린 결사형성적인 개인주의의 기풍에 접근해있는 것이 분명하다”(「개인의 출현의 다양한 패턴」『마루야마 마사오 전집』제9권 p399).

그러나 다쿠보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근대 문학의 기조는 사화하는 개인의 유형에 있었다. 즉 ‘사소설’(私小説)이다. 이것은 협의의 사소설(私小説)이 쓰이지 않는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강권의 존재에 대한 몰교섭”을 주장하는 부류의 ‘개인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데모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일본인이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현대사회(게젤샤프트)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그것을 일반적으로 대중 사회와 소비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사화(私化)하는 개인에게는 단순한 데모라도 큰 도약을 의미한다. 만약 시위에 간다고 하면, 원자화한 유형으로 이루어진 군중 또는 폭도로서 갈 뿐이다. 이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 후 데모는 없다. 반면 자립화하는 개인의 유형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자주적 집단”, 즉 협동조합ㆍ노동조합 기타 각종 어소시에시션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반대로 개인으로서도 강하다. 결사형성적인 개인은 오히려 결사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 사화(私化)하는 개인은 정치적으로 취약 할 수밖에 없다.

앞서 나는 일본에 ‘상아탑’이 없다고 했다. 이것도 바로 다음의 사정과 관련된다. 유럽 ​​대학은 자치 도시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국가에서 자립한 어소시에이션으로 발전해 왔지만, 일본의 대학은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대학이 ‘상아탑’이 되려고도 않으며 허용되지도 않고, 실제로는 항상 비판되어 왔다. 이 점에 대해 마루야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권력 앞에 평등하게 엎드리는 신민이 창출된 된 데에는, 그들 대부분이 저항다운 저항을 보이지 않고 성공한 배경에 국가가 교육권을 재빨리 독점했던 것이 큰 의미를 갖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의무교육을 하는 것은 오늘날 근대 국가의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만, 이 제도가 일본만큼 무작위로 원활하게 진행된 나라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교회라는 매우 큰 역사적 존재가 국가와 개인 사이에 있고, 이것이 자주적 집단이라고 하는 것, 즉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집단이 소위 모범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가 교육을 전통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도 교회와 국가 사이에 교육권을 둘러싸고 매우 큰 다툼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시대부터 가령 불교 사찰은 완전히 행정기구의 말단이 있었습니다. 즉, 일본에서는 사원이 이미 자주적인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서당 교육을 국가 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쉬웠던 것입니다. 그 외, 유럽, 자치 도시 및 지역 코뮨 역시 국가 권력의 만능화에 저항하는 보루가 되어 자주적 낙원의 전통을 만드는 기능을 담당했는데, 이 점에서도 일본에서 도시는 대부분 행정 도시였습니다. 하여 도쿠가와 시대의 마을에 남아 있던 자치도 정촌제(町村制)에 의해 완전히 관치행정의 말단에 포섭되었고, 그리하여 중앙집권 국가가 완성되고 나면 국가에 대항하는 자주적 집단이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그 점에서도 자유 없는 평등화, 제국신민적인 획일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사상과 정치』마루야마 마사오 전집 제7권 p128-9)

이와 같이 메이지 이후에 발생한 문제는 도쿠가와 시대 또는 이에 앞서 쇼쿠호우(織豊) 정권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에서 절대주의적 집권화가 일어난 것은 이 시기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철저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철저했다. 철저하지 않았던 것은 도쿠가와 체제가 다른 제후를 철저하게 박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쿠가와는 다른 제후를 전면적으로 제압하는 대신에, 참근교대(參勤交代) 등으로 다른 제후를 약화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것은 외적으로 동아시아 일대에 유럽과 같이 다른 절대주의 국가에 대항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적으로는 천황제 아래의 “쇼군”이라는 위치에 따라 다른 제후의 반란의 싹을 미리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화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도쿠가와 체제는 ‘철저’했다. 유럽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적한대로 왕권에 대한 서로마 교회의 대응이 강했고, 결과적으로 ‘중성국가’(中性國家)(칼 슈미트)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쇼쿠호우(織豊) 정권에서 도쿠가와 체제에 이르는 과정에서 一向宗(정토진종) 등의 종교 세력은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종교의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一向宗은 사카이(境) 등의 도시국가, 카가(加賀) 등의 농민 코뮨 국가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쿠가와 체제가 종교를 제압한 것은 자주적 결사를 지원하는 정신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박탈한 것을 의미한다.

도쿠가와 체제는 외견상 영주분국제이지만, 실제로는 지방분권적인 의미에서의 ‘봉건제’는 성립하지 않았다. 반대로, 도쿠가와 체제 아래에서 ‘국민’적 동일성이 형성되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발견한 “야마토고코로”(大和心)는 고대가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형성된 감정적인 동일성에 근거한다. 그것은 이미 근대적인 네이션의 의식이며, 같은 시기 독일에서 발생한 그것과 병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빠르게 만들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도쿠가와 체제는 가산 관료 국가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을 도입했지만, 그것은 말뿐으로 실제로 그런 국가는 되지 않았다.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사는 관료화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칼 사냥” 이후 그때까지의 농민=무사, 무사=농민이라는 현실적 기반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이후 무사는 땅을 가질 수 없고 관료로 살아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과 조선에서와 같이 관직에 의해 토지 재산을 얻는 가산 관료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기능주의적 근대 국가의 관료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충성의 대상을 영주에서 천황으로 대표되는 메이지 국가로 대체했을 때, 근대 국가 관료제가 완성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천황과 쇼군이라는 이원성을 해소하고 상당수의 봉건 제후를 통합하여 절대주의 왕권 국가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도쿠가와 체제에서 이미 준비된 것이다.

이와 같이 메이지 이후에 볼 수 있는 일본의 특징은 도쿠가와 시대로 거슬러 봐야한다. 그렇다면, 더욱 이전으로 역행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루야마는 그것을 역사의식 ‘古層’에까지 역행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도 한때 ‘일본정신분석’이라고 칭하고, 그런 역행을 기획했다. 그러나 현재 나는 그런 역행이 아니라 그것을 세계사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검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보여준 아시아적 생산 양식과 봉건적 생산 양식이라는 관점을 재고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일본 자본주의 논쟁’ 이후 마루야마 마사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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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간 가라타니 고진의 『帝国の構造 中心・周辺・亜周辺』[제국의 구조: 중심, 주변, 아주변](青土社, 2014년 8월)과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b, 2013년 10월)을 읽었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길들여진 속독 때문인지, 찬찬히 읽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놓친 논의가 적지 않다. [제국의 구조]는 강독세미나가 계획되어 있어 다시 읽게 되겠지만, [트랜스크리틱]은 아무래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또 [제국의 구조]는 일본어판으로 읽어서 원전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은 읽으면서 의심되는 번역어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원서를 구입할 생각이다.

[제국의 구조]는 가라카니 고진의 가장 최근의 저작으로서, [세계사의 구조]를 수정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2012년 9월부터 두달간 [세계사의 구조]를 가지고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순회강연한 강연록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계사의 구조]를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내용이 수정보완됐는지는 모른다. 

내가 [제국의 구조]를 읽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어느 지인 때문이기도 하고, '식민지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과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제국" 그 자체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1910년(한말의 역사를 '대한제국기'와 '보호국기'로 세분화하면 1905년 '보호국기')부터 1945년까지가 '일제강점기'로 시기구분되며 '식민지의 역사'로 통칭되면서 "제국"의 경험이 사상되어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제국"은 "식민통치"와 동일시되고, 이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문화적 실천의 양상은 협력/(회색지대)/저항으로 도식화되어 당시의 시대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만주제국'(1932~1945)의 건설 이후, 특히 1938년 총동원체제 이후 조선의 지식계를 휩쓸었던 지식인 및 사회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상적 전향에 대해 제대로 규명해낸 논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제까지 본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사상적 변절로 치부하거나 거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라면 근대적 식민지 경영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로부터 해소되는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식민지적 근대 담론으로 대체하는 논의 정도이다. 가라타니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나 노동자가 전쟁지지로 돌아서고 제2인터내셔널이 와해된 것은 국가에 의한 잉여 가치의 재분배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외에서 얻어지는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자본도 임노동자도 공통의 이해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만 착취를 찾아내고 그것을 국가권력에 의해 해소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트랜스크리틱, pp.439-40). 일본제국이 아시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을 때--『「大東亜共栄圏」の経済構想─圏内産業と大東亜建設班審議会─』(安達宏昭、吉川弘文館、2013)  참조--, 조선인은 그 잉여가치의 직접적 수혜자가 될 수 있었고 되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가와 임노동자를 자본(화폐)과 노동력(상품)이라는 경제적 범주의 '담지자'로서만 발견하고 주체적인 실천의 계기를 찾지 못할 때, 가라타니는 그것은 전혀 [자본]의 결함이 아니며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제 경제를 '이론적' 시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노 고조의 말을 인용하여 [자본]이 공황의 필연성을 말한 것이지 혁명의 필연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혁명이 '실천적' 문제라고 했을 때 이 '실천적'인 것을 칸트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트랜스크리틱, pp.440-1). 

그래서 그는 맑스의 [자본]에서 혁명운동--이제까지의 혁명운동이 폭력을 동반했다면 앞으로의 '혁명운동'은 비폭력적이기 때문에 "대항운동"이라고 한다--의 계기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추출해내는 한편, 그 실천의 윤리를 칸트로부터 정초한다. [트랜스크리틱]이 그 인식론적 토대를 다루었다면, [제국의 구조]는 그러한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하고 인류의 대안을 제출한다.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교환양식'과 칸트의 윤리는 "타자의 문제"로 집중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론적 통각X"로 넘어서고자 했고, "초월론적 통각X"는 타자의 타자성에서 주어진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보는 나의 얼굴은 나에게 '강한 시차'--역겨움으로 다가오는 이율배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타자의 타자성은 마치 죽은 자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듯이, 미래의 타자에 대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듯이 이질적인 '객관성'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타자를 넘어설 수 없고 타자는 내게 언제나 '초월론적 주관'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가 칸트의 '전회'이다. 가라타니는 '초월론적'이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인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정신분석적이거나 구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나는 타자의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끊임없이 회의되고 자성된다'--라는 점에서 그는 칸트의 '전회'야말로 관계의 장을 펼쳐보이는 트랜스크리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제국의 구조]에서 그와 같은 트랜스크리틱의 인식의 방법론을 통해 맑스의 [자본]의 이론에 기초하여 교환양식의 세계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교환형태"가 [제국의 구조]에서 "교환양식"으로 용어가 바뀐 것인지 아니면 번역어의 문제인지는 찾아볼 일이고, 가라타니의 "교환양식"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씨족사회의 호수제(증여의 의무), 재분배와 수탈, 상품교환을 각각 교환양식 A, B, C로 도식화하고, 교환양식 A의 '강박적 회귀'를 교환양식 D로 규정했다. 여기서 '강박적 회귀'란 프로이드의 '죽음의 충동'과 같이 과거의 어떤 기억이 강박적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A, B, C가 그 자신의 세계사적 실현을 통해 스스로 지양하고 그 결과 교환양식 D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제국"의 경험에서 문뜩 헤아릴 수 없는 관용의 깊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혹시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그리고 개인들을 조건짓는 다차원의 사회적 관계들"이라고 하는 교환양식D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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