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역은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운 작업이었다.

김항의 이 논문은 2014년 8월 도우지샤대학(同志社大学人文科学研究所)의 『社会科学』44(2)에 실린 것이다.

근대의 사유의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상으로부터 '일본론'이라는 사유의 공백을 찾아나서는 그것이 공백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대가 안고있는 근원적인 사유의 불가능성과 연결짓는다. 그리고 일본정치사상사에서 사유의 공백으로 남은 불가능성이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된다"고 결론짓는다. 이 논의의 흐름은 그의 박사논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조선 혹은 해방후 한국으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사상적 지주였던 박종홍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는 그가 가진 특유의, 근대의 사유체계와 시대적 맥락을 연결시키고 정치사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성력을 볼 수가 없다. 박종홍의 사상적 이력을 슈미트에 대비시키고 만다. 밋밋하다. 한국어와 일본어 각각의 논문의 퀄리티가 이처럼 차이 나는 이유가 무얼까 싶다.

일부 중략했으며 역시 오역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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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範と事実のはざまで」[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론」—

 

1. 문제의 소재

사고는 그 한가운데에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내포한다. 이 공백은 사고주체의 인내, 논리의 치밀함, 언어능력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대상의 시공간적인 한계 등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공백은 사고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잠재하는 것이고, 주체의 태만이나 방법의 오진에 의한 지식의 결여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공백이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드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언어화되는 사고의 한계를 가리키는 이 ‘공백’의 현시는 어떤 공간에서 다양한 사고의 총체인 언어체제의 효력을 일거에 허공에 매다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와 같은 실천을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에 의거하며 방법론으로서 제기한다.

 

“푸코는 『지의 고고학』의 서문과 완전히 일관된 방법으로, 주체(과학 공동체의 구성원)의 관점에 기초한 통상과학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으로부터, 주체에 대한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전체’와 ‘표상’(‘언표전체가 부각되어’ ‘그렇게 묘사되는 … 표상’)의 순수한 발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감벤은 여기서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을 토마스 쿤의 그것과 구별한다. 쿤의 패러다임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과학적 언설을 ‘정상’으로 판단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동의되는 규범 내지 전제이다. 이 속에서 쿤의 패러다임은 학지(學知)의 영위에 포획된 제 주체가 현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패러다임은 아감벤에 따르면, 그렇게 동의되는 인식의 틀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의 패러다임은 사고가 언어의 문턱을 넘어 제 언어가 현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사고의 공백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푸코가 근대의 규율권력의 패러다임으로 묘사했던 ‘팬옵티콘’을 생각해보자. 알다시피 팬옵티콘은 감시하는 시선의 교묘한 배치에 의해 주체에 대한 규율이나 통제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를 가능하게 하는 패러다임적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패러다임으로서 팬옵티콘은 근대의 권력-주체론에서 연구자가 동의하는 인식 프레임, 혹은 근대의 권력작용의 범례의 규칙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푸코의 팬옵티콘이라는 장치는 근대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한계영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푸코는 팬옵티콘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규율이나 통제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힘이 불가시하며 감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실정화한다는, 극한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형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권력론을 관통하는 공백이다. 이것은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로 표현할 수 있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행사되는 것이라면, 권력기관은 비대칭적인 주체동료의 관계로, 그 비대칭성을 사고하여 언표화하는 다양한 언설과 함께 환원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법에서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누군가를 억압하여 금지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팬옵티콘은 그러한 구속주체 없이 권력의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속에서 놀라운 것은 불가시하고 감지할 수 없는 시선이 인간을 훈육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팬옵티콘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 없는 순수한 권력의 작동이었다. 푸코는 잔혹하고 가시적인 권력의 동작이 팬옵티콘으로 ‘이행’했다는 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팬옵티콘이라는 주체 없는 권력의 작동이야말로 권력의 극한적인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극한의 형상이야말로 “주체로의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 전체’와 ‘표상’의 순수한 발생”을 다루도록 촉구하는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주체를 단호하게 끊어내는 권력론이며 주체가 아닌 순수한 주체화만을 문제 삼는 권력론의 한계영역이다. 주체가 게재되는 권력론에서 최종심급은 권력이 아닌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권력의 주체와 객체라는 ‘신화소’를 권력론으로 끌고 들어오는 치졸한 형이상학에 다름 아니다. 푸코는 팬옵티콘을 ‘권력 작동의 영점’라고도 할 수 있는 차원의 극한의 권력론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의 팬옵티콘은 권력론의 공백을 문제화한다. 주체에 오염된 권력론은 권력 작용의 메커니즘(이것이야말로 권력론의 궁극의 테마이다)을 최종적으로 주체나 객체로 환원하기 때문에 권력이 산출하는 주체화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사고의 영역에서 주변화하고 말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의 작동을 사고할 때의 극한 영역, 즉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를 공백으로 내장시켜왔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이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그 순수한 발생을 주체와 객체로 귀속시키고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의 효과로 분절화될 수밖에 없는 주체와 객체를 역으로 권력의 기원으로 사고하도록 강제해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실체 없는 주체화라는 권력의 순수한 작동은 기존의 권력론이 가진 그 효과에 의한 공백으로서 그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공백을 언어화함으로써 권력론의 실효성을 일거에 허공에 매달고 바로 ‘패러다임의 전화’를 기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길게 푸코의 이야기를 한 것은 다음의 논의에서 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일본연구’ 혹은 ‘일본론’에서 공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일본’이라는 것을 사념하여 발화하는 가능성의 조건, 혹은 그 조건 없이 ‘일본’에 휘감기는 언어는 성립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결코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다음의 논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공백이 결코 실체로서 담론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백은 담론에서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다양한 전략과 우회를 거쳐 추적되어야 한다. 즉 일본론이라는 담론에서 말하지 않고 남겨둔 대상이나 개념들이 아니라 말했던 것 속에서 잠재된 회피와 부인의 전략을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사상’에 관한 에세이에 주목하여 소묘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론’이라는 것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 ‘일본적인 것’을 담론화한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2. 모노(モノ)와 사실을 직시하는 실제가(實際家)

에토우 쥰(江藤淳)은 안보투쟁 직후의 상황을 전후 일본을 지배했던 사고의 틀과 연결지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고가 근저에 깔려 있다. 한 방울의 기름도 없는 드럼통과 같은 불모가 ‘논단’이라는 장소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육체에 쌓인 피로에 진력난다면 그때는 풍요로운 ‘사상’이 회복되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공백 혹은 불모는 더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일종의 지적파산 후의 공허함이다. / 무엇이 파산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전후 일본의 인텔리겐차가 신봉해온 규범이며 사고의 형태일 것이다. (…) 요컨대, 전후 15년간 대다수의 지식인이 군림했던 허구의 모든 것이 파산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소위 ‘진보파’ 지식인을 향한 직격탄이다. 에토우는 전후 민주주의가 배양한 사상적 및 정치적인 요소가 일거에 폭발했다고 하는 안보투쟁 속에서 역으로 전후 민주주의라는 틀의 파산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비난의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예상대로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에토우는 마루야마가 안보투쟁 중에 행한 <복초의 설>(複初の說)이라는 강연을 겨냥하면서, 전후의 지식인이 만들어내었던 허구란 <8.15>에 모든 것은 끝나기 시작했다는 역사의식이며 헌법이 바뀌어 정치가 변하고 이에 따라 일본전체가 바뀐다고 하는 도덕적인 이상주의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후의 허구는 에토우가 보기에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이상(理想)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를 쌓아가는 속에서 전후 일본이 ‘점차 백치적으로 비만’해진 사실을 외면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전후의 지식인을 비판한다. “인간은 폐쇄된 머리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외에도 위라는 것이 있어서 머리가 자살을 공상한다 해도 위는 착실히 저작운동을 한다는 냉철한 사실에 점차 눈떠간다.” 즉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구에 기반한 도덕담의(談義)에 빠져들었던 것이 안보투쟁 후의 허탈상황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후’라는 허구를 없애보자. 생활하는 실제가들의 노력이 일본을 지탱해왔고 그 노력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 이상가(理想家)의 환상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가들이 얼마나 개인의 불행을 참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생활자는 불운을 관념으로 흘려보내고 해소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로 라는 것 이외의 사상에 관여하지 않았다. 권력과 사상, 도덕의 야합은 차고 넘친다.”

 

에토우의 비판은 명료하다. ‘사실’이나 ‘실제가’와 ‘허구’나 ‘이상가’라는 대비에서와 같이, 에토우가 주어진 표준으로 사실을 계측하는 시선을 거부하고 사실 그 자체를 스스로의 눈과 입으로 바라보며 비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전후의 지식인은 이 의미에서 어떤 종류의 주어진 규범이나 이상을 맹신하는 머리만 큰 인텔리겐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에토우의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에토우의 고유한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에토우는 걸출한 한 사람의 비평가의 추종자가 됨으로써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비평가란 에토우가 “비평을 창조했으며 예술적인 표현을 고양함과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 절대자이며 그 사람이 “참아왔고 지금도 참고 있는 것의 무게에 비교하면” “일본 근대” 나아가 “역사” 그 자체마저 의미를 잃게 된다며 존경심에 마지않았던 고바야시 히데오이다. 1961년에 행해진 어느 대담에서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에토우: 결국 우리들 현대의 인텔리겐차의 미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얕다는 것이죠. (…) 우리들의 생활이 언제나 정치의 과잉 속에 있기 때문에 작은 체험이 정말로 어렵게 되어버렸죠. 현대 사회에서 어느 순간인가 이데올로기랄까 관념이랄까 그러한 것에 속박되어 좀처럼 사물[모노 モノ]을 만질 수 없어요. (…)

고바야시: 그렇지요. 그런데 가령 여성이 키모노를 보는 경우에 맞춤옷을 보는 느낌으로 본다는 것이죠. 나는 그 관점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봅니다. (…) 미(美)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에 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에토우: 제대로 생활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고바야시: 지식과잉이랄까, 언어과잉이랄까. 미란 것은 바로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에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있지요. 생활의 반려이니까요. / 그렇다 해도 현대문화에서는 미의 위치에 대한 사유—, 미의 일상성에 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유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면 언어 외에는 그 무엇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미’를 언어로밖에 사유할 수 없는 인텔리겐차가 에토우가 비판했던 전후 지식인이며 옷을 보는 여성이나 일상에 있어서 미를 경험하는 자가 실제가임은 명백하다. 이 문답에서 두 축은 머리와 입으로 미를 사념하여 발화하는 지식인과 모노를 이것저것 손에 쥐고 선택하는 일상의 사람들인데,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후자야말로 자연의 진정한 미적 감각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와 같은 인식의 태도는 ‘다양한 의장(意匠)’으로부터 ‘모차르트’에까지 이르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의 핵심을 이루는 시좌(視座)에 다름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다’(花の美しさなどない。あるのは美しい花である。)라는 언명으로 대표되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은 작가의 눈이나 손과 그 앞에 나타나는 일회 한정의 ‘모노’ 사이의 조우를 온갖 개념이나 전제를 제거하고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가 ‘역사란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규정할 때에, 역사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가버린 일회 한정의 실감을 말한다. 그의 역사관이 위와 같은 비평관에 근거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에토우는 이와 같은 고바야시의 비평 및 역사관을 마스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이 ‘모노’와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며 공허한 이상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비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와 에토우가 자연에서 건강한 눈과 손으로 전후의 폐허를 살아내었던 형상으로 제시하는 실제가란 전후의 ‘일본론’에 대한 래디컬한 비평이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라는 ‘허구’로 환원되어 사념되었던 ‘일본’적인 것의 ‘의장’을 철거하는, 사실로서의 실제의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고바야시와 에토우는 언어, 이념, 개념 등으로 구성된 전후의 ‘일본론’으로부터 실제로 생활이나 사실을 존립시키는 ‘일본’을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 ‘실제가의 일본’은 근대적인 역사기술이나 국체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이념이나 이상이 말하고 표상하는 역사나 국가야말로 생활의 장에서의 ‘건강한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 그리고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와 같은 ‘실제가의 일본’을 ‘전통’으로 제시함으로써, 근대 이후의 ‘일본론’에 대한 역사적인 비평을 기도했다. 고바야시가 오규 소라이, 모토오리 노리나가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는 사상사의 계보를 다시 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 고바야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암시적인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시론을 전개한다.

 

3. 고바야시 히데오의 마루야마 마사오 비판

고바야시 히데오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문예춘추』에 에세이를 연재했다.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 「考えるヒントⅠⅡ」인데, 그 연재 중반에 주요하게 언급된 것은 오규 소라이였다. 어째서 소라이였던 것일까? 그가 이에 대해 확실히 표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발언이 있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소라이론에서 언급된 부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는 익히 알려진 책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구조의 역사적 추이로서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고학(古學) 문헌학의 비합리주의로 전환되는 필연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소라이의 학문을 사상의 형태의 해체과정으로 다뤄지는 작업의 성질상, 마루야마의 논술은 디알렉틱(ディアレクティーク, 변증법)보다 오히려 아날리틱한 성질이 강하며, 따라서 애매함 없이 특히 소라이에 관해서 이런저런 생각할 점이 있지만 나로서는 다만 소라이라는 인물의 내막[懐 ふところ]에 관해 더 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미 훑은 바와 같이,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은 소라이의 사상 속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맹아란 인간의 질서(道)는 자연의 질서(性)와 달리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이라고 정식화함으로써 질서의 수정이나 전복가능성까지 정치적 사상으로 열어놓는 논리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구해진다. 이 속에서 소라이는 질서를 자연이나 사실에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 사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인’이라는 인격에 의해 구성되는 픽션으로 다룬다. 따라서 소라이는 사실을 추상화하여 논리를 구축하는 근대적인 사상가인 것이다. 그런데 고바야시는 소라이론을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

 

“소라이는 회의파도 아니고 비합리주의도 아니다. 사물과 자연에 있는 이(理)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理)는 탐구하는 마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理)를 만나면 좋은데, ‘세계는 이(理)이다’라거나 ‘이(理) 속에 세계가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理)라는 언어에 도취해버리고 만다. 학자의 도취심[醉心]에 빠지면, 그 사유는 학설의 수미일관 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공자가 ‘좋아한다’라는 말에 주의했던 것은 이와 상통한다. 소라이는 후세의 학문에서 의지를 찾는 것에 예민하고 마음을 찾는 것에 서두르며 이(理)를 마음에서 구하여 다변이 된다고 했는데, 공자처럼 학자가 되면 달변을 싫어하고 ‘생에 기대한다’는 침착한 태도를 학문의 근저로 삼게 된다고 했다. 이(理)를 말하며 지혜를 즐거워하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쪽이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알기보다 행하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소라이의 기본적인 사상이었다.”

 

고바야시는 이와 같이 이(理)보다도 생을 중시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진 자로서 소라이를 그려낸다. 이것은 근대적인 맹아를 제시했던 이론가 소라이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제가 소라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로써 고바야시는 마루야마의 비판을 되받아친다. 즉 ‘사실에 모리를 조아리는’ ‘실감신앙’이라는 비난을 마루야마에게 되돌려주면서 그것이야말로 ‘실제가의 일본’이라는 계보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계보를 고바야시는 진사이에서 소라이를 거쳐 노리나가에 이르는 ‘일본의 전통’으로 잣아 내는 것이다.

…(중략)…

 

4.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고바야시의 ‘일본론’은 일종의 극한을 다룬다. 왜냐하면 그의 ‘일본론’을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인 설명도 신비적인 분장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실한 생활인의 눈과 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일본’은 어느새 ‘일본’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확실한 사실로서 사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념을 단순한 자연주의나 실감신앙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의 생활이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때까지 세계를 파악해왔던 전이해(前理解)를 허공에 매달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즉 고바야시의 ‘실제가’는 자연이나 사실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엄격한 태도나 방법을 갖추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루야마도 1961년에 썼던 『일본의 사상』의 후기에서 “고바야시 씨는 사상의 추상성이라는 것의 의미를 문학자의 입장에서 이해했던 소수의 한사람이며 나로서는 실감신앙의 일반적 유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극한 형태로서 고바야시 씨를 인용할 생각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고바야시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1964년의 『증보판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의 후기에서 “전후 민주주의라는 허망에 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바야시의 강인한 정신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같이 온갖 인식의 틀을 젖혀버리고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룬 반면, 마루야마는 그와 동일한 강인한 정신을 통해 자연/사실의 존재양상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인위적인 제도로서 가져오려는 규범(그리고 규범화하는 결단)을 옹호했다. 마루야마의 ‘허망’이란 속임수나 거짓말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픽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 속에 날 것[ナマ]의 생의 불변성과 건강함을 보는 방법적인 아나키의 시선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상위의 규범을 창출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단이 있다. 그리고 고바야시의 시선과 마루야마의 결단은 암시적인 논쟁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고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반대로 보일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방향은 실제로는 사고에서 동일한 회피 전략을 거꾸로 공유하는 경상(鏡像)과 같다. 그렇다면 양자는 무엇을 회피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과 규범은 결코 강인한 정신이나 결단하는 주체에 의해 가교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칸트파를 상기시킬지도 모를 이 언명은 규범과 사실의 이원론에 기초해서 규범과 문화영역에 독자의 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안점은 고바야시와 마루야마의 ‘일본’이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회피하면서 언설화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들의 일본론은 일본을 소여의 것으로 전제하고 그 특질을 서술해내는 통속의 일본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일본론은 실체화된 ‘일본’을 철저히 물음으로써 ‘일본’을 자연화하고 미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일본은 일본이 서양기원이든 동양기원이든 기존의 술어나 범주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고 반대로 환원 그 자체를 다시 묻는 장소이다.

이 속에서 그들에게 일본은 서양근대가 이룩하고자 했던 계몽의 프로젝트를 계승하는 급진적인 하나의 비판적인 기획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서양근대의 계몽의 프로젝트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주체 스스로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게 하는 기획이었다면, 고바야시와 마루야마는 계몽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 아닌 그 태도나 방법을 적극적 및 근원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의 주체나 기존의 이해의 틀을 철저하게 허공에 매다는 강인한 정신은 모두 칸트가 정식화했던 계몽에서의 주체와 정신의 궁극의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야말로 근원적인 불가피성이 잠재한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피하며,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이 시사하는 것처럼 데카르트적인 회의는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광기의 식별불가능성을 노정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미트-벤야민-푸코-데리다의 논쟁 그 자체에서 결단하는 주체가 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과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한편으로 신을 모델로 하는 한에서 결단하는 주체는 결코 사실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규범의 인격화로서 미래로 이끌리던지 초월의 고양으로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한 한에서 정신은 기존의 규범을 내던지고 정신으로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존의 관념을 방법적으로 (언어적으로) 허공에 매달고 사실을 찾아내는 정신이 광기에 빠진다면 기존의 규범질서는 결코 방법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따라서 규범으로부터 사실에 이르는 고바야시의 정신과 사실로부터 규범으로 향하는 마루야마의 결단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무능하고 우울한 생의 형상을 회피한 결과 엮어진 것은 ‘픽션’ 외에 다름 아니다. 양자의 비판적 및 반성적인 지적영위에 의해 추출되었던 ‘일본’은 극히 이성적이고 위생적이며 지적인 주체와 정신의 장소이자 이름이었다. 이 ‘일본’은 통속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일본론과 결별하며 엄격한 방법과 금욕의 태도로부터 추출되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일본론’은 어떤 종류의 극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의 일본론이 성립되었던 사고의 공백이란 바로 결단하지 않으면서 과거와 단절하지 않는 어떤 우유부단한 주체 혹은 유약한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 주체와 정신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결코 빼내올 수 없다. 그것은 규범이 통제하는 힘과 사실이 압도하는 힘에 의해 이중 구속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체와 정신은 ‘일본’이라는 것을 결코 완전히 형상화 한다거나 관념화 한다거나 역사화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이 우유부단하며 유약한 주체와 정신으로부터 새로운 ‘일본론’이 엮어질 수 있을까? 그 작업은 여기서의 과제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엮여진 ‘일본론’은 신이나 이성을 모델로 하는 주체나 정신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될 것이다. 이 때 ‘일본’은 국경이나 역사 속에서 자기폐쇄적인 경상(鏡像)에 달라붙는 아이덴티티가 아닌 타자와의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애정에 넘치는 분열적인 공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장으로 사념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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