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마루야마 마사오 특집호에 실린 또 한편의 논문을 번역했다.

근대사상가로서 마루야마의 면모는 일본의 정치사상가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하며 정치사상사를 재구성했다는 데에 있다. 마루야마는 독일의 현대사상가들의 이론을 방법론의 도구 삼아 일본의 정치사상가들을 근대사상가로 '발견'하고 발굴했다. 마루야마의 이러한 작업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근대사상에 일본의 시대적 맥락의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사상에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은 서구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입되는 과정을 사상가들의 사유를 통해 소상하게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현대의 최신 사상을 연구한다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다음의 논문은 마루야마가 만하임, 베버, 헤겔의 이론을 통해 후쿠자와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을 다룬다. 결국은 마루야마의 분투는 슈미트와의 가상적 대결로 집약되고, 20세기 인류사를 결정 지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인식론적 토대가 동일한 근대적 사유체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김항, 슈미트, 그리고 다음의 논문을 조합하여 마루야마의 근대성에 대한 나 나름의 사유를 정리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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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론

「「虚妄」に賭けることは可能か?丸山真男にとっての福沢諭吉」

‘허망’에 건다는 것이 가능한가?  

마츠다 코우이치로우(松田宏一郎)

 

1. ‘이데올로기’와 ‘사유범형’(思惟範型)

 

마루야마 마사오는 사상사가로서 ‘후쿠자와 연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후쿠자와 독해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 때문에 후쿠자와의 사상보다도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왔다. 그러나 이 관심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마루야마가 그려낸 후쿠자와의 이미지는 과도하게 이상화되었고, 반대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영향권에 휩쓸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을 간과했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마루야마는 자신이 후쿠자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후쿠자와의 논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경험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있지만, 그가 그 정도로 후쿠자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연구의 초기부터 “사람들은 일본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후쿠자와의 구체적인 비판의 적확함과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겨 그 비판의 근저에 흐르는 사유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즉 마루야마는 자신이야말로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을 비판적으로(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검토한다고 자부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첨예한 사안을 다루었다거나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어떤 의도에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를 자신은 알고 있다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저술에서 제기된 사항에 대해, 일단 자신의 ‘시좌’(視座)를 감추며 말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재구성하는 작업공정에, 무엇보다도 후쿠자와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마루야마가 생각했다)는 점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보기에 오규 소라이와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고는 일본 역사상 그러한 타입의 사상가가 극히 소수였을 것이다. 후쿠자와가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을 의식했다는 것, 즉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어떠한 원칙에 따르며 그것이 어떠한 도구와 스타일로 논해질 수 있을까를 의식했다는 것이 일본사상사의 예외적 사례이며, 마루야마에게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자신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의식이 좀처럼 생겨나기 어렵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도 말해지듯이 마루야마의 전제였다.

나아가 후쿠자와의 ‘방법’의 발견은 마루야마 자기의 ‘방법’의 발견이었다. 어쩌면 마루야마는 1942년의 논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비판」에서 자기의 발견을 의식했을 것이다. 혹은 후쿠자와를 일본의 만하임으로 논하고 싶은 희망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이데올로기 폭로’에서 ‘이데올로기론’으로 후쿠자와의 논의가 ‘성숙’하고 있다고 논한 것은, 후쿠자와가 단지 유교의 표면적인 덕목이 현실의 권력구조를 은폐하고 지배관계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허위’라고 폭로하고 그 해학을 밝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 ‘사유범형’(Denkmodelle, 만하임의 용어)으로서 ‘역사적 사회구조와의 조응성’을 검토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즉 적대의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 그 허위성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회구조’(geschichtlichen gessellschaftlichen Struktur)가 어떻게 사람들의 ‘사유’나 ‘시좌구조’를 구속하는가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우수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온갖 입장을 특정한 상황에서의 원근법적 인식으로 의식하기에, 어떠한 테제에서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거부하고 독자에게도 자기의 퍼스펙티브의 배후에 다른 퍼스텍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의 세계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다.”

온갖 테제의 이면을 들추어 원근법(퍼스펙티브)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라는 것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무한한 생각의 깊이는 그 배후에서 얼마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 존재’라 부르기에는 근거가 기이하다. 이것은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정치학자 1889~1974)가 말했던, 마루야마의 학생시절 논문 「정치학에서 국가 개념」(1936년)에 대해 ‘존재피구속성’(Seinsverbundenheit des Denkens)이라는 것으로는 포지티브한 국가에 대해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와 연관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겠다.

물론 이것은 후쿠자와가 ‘사유범형’의 관찰자로 안주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마루야마 자신도 그렇게 안주하기를 원치 않았다.

마루야마의 견해에서 후쿠자와는 ‘역사적 사회구조’에 의한 ‘사유’의 구속이 어떻게 일어나며 무엇을 일으키는가 라는 문제를 명확화 했으며, 바로 이것을 자기의 ‘사유’의 ‘방법’으로 의식했고, 나아가 이 의식은 후쿠자와가 ‘가치의 분산화를 통한 국민정신의 유동화’를 과제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학문적 시도를 명기했다. 앞서의 인용문 외에도 마루야마는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이라는 표현을 했다. 즉 후쿠자와는 자기의 의지로 ‘퍼스텍티브’를 ‘유동화’할 수 있었다. 이른바 퍼스펙티브를 자기조작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주체임에 자부하며 나아가 그와 같은 주체의 성립을 ‘국민정신’으로 일으키고자 시도한 것이다. (‘국민정신’(Volksgeist)의 다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하임의 서술에서 이 ‘유동화’라는 말에 대응하는 부분은 다음의 인용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노라면 정치라는 영역에서 이론이 다양한 모습으로 분열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즉 사회의 유동성(sozialen Strome) 가운데 성립하는 개개의 의견[입장—만하임에 의한 보족]은 각각의 흐름 속에서 다른 지점에 서 있고, 그 지점에서 흐름 그 자체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유동화’에 대비되어 협소하게 경직된 퍼스펙티브에 대해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역사적 현실로서의 일본사회에 향해 있을 때, 거기에서 찾아낸 것은 온갖 형태의 정신의 화석화이며 그 필연적 결과로서 사회적 가치의 일방적 응집이었다.”

‘정신의 화석화’의 비유는 막스 베버에게서 찾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의 정신』(1920)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장차 이 철의 감옥에 살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거대한 발전이 끝날 그때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인가 혹은 옛 사상이나 이상이 부활할 것인가. 그러고도—그 어느 쪽이 되어도—어떤 종류의 기이한 거만함으로 분장한 기계적 화석(mechanisierte Versteinerung)으로 변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이 논문의 1905년 초판에서 이 부분은 ‘중국적 화석화’였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1905년판에 익숙하다고 하면 ‘중국적 화석화’(chinesische Versteinerung)라는 표현이 주는 임팩트는 좀 더 강했을 것이다.

좀 더 따져보면, 이 ‘중국적 화석화’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베버의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1904년)에서 ‘중국적 경직성’(chinesische Erstarrung)이 있다. Erstarrung은 ‘응고’ ‘굳어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마루야마가 이것을 Versteinerung[화석화]와 같은 내용의 개념으로 간주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전쟁 전 출간한 이 논문의 번역서인 『사회과학방법론』(1936년)에서 이 부분은 ‘지나인식(支那人式)의 무감각’으로 번역되었다. 나아가 이 인용문 바로 앞에 “‘역사적 개체’가 되는 자의 범위는 언제라도 유동적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도 ‘유동화’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베버의 논의를 정확히 살펴보면, ‘화석화’는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다다르기 전에 ‘정신이 없는 전문인, 심정이 없는 향락인’이 스스로를 ‘연료’(화석이기 때문에)로 ‘철의 감옥’에 계속 공급하는 사태를 말한다. 한편,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나타나는 ‘화석화’는 근대화의 장해가 되는 ‘사회와 정신의 응어리’이다. (‘응어리’는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논문의 chinesische Erstarrung가 힌트가 되었을지 모른다.) ‘연료’와 ‘응어리’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근대적 합리화 이전에 ‘중국적’ 합리화 같은 것이 있다는 베버의 빈정거리는(진지한 것이었나) 표현에 대해 후쿠자와는 ‘중국적’인 현상을 ‘반개’(半開)적 동양의 전형으로 보고, 일본이 조속히 그곳으로부터 탈출하자고 요청한다. 이 점에서 ‘화석화’의 비유는 후쿠자와론과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서도 마루야마는 ‘정신이 없는 전문인’이 천황제의 연료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사태를 암시하기 위해 ‘화석화’의 비유를 숨겨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에는 또 한 부분에서 ‘유동’에 대한 중요한 문단이 있다.

“사회과학적 인식의 ‘객관성’ 곧 경험적 소여는 늘 가치이념—이것만이 사회과학적 인식에 인식가치를 부여한다—에 기반하고 규정되며 이 가치이념으로부터 그 의의가 이해된다. … 우리들은 모두 생존의 의미를 엮어내는 궁극최고의 가치이념의 초경험적인 타당성을 무엇인가의 형태로 마음 깊이 믿고 있는데, 이 신념은 경험적 실재가 신념에 의해 의의를 획득하는 구체적인 여러 관점의 끊임없는 변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변동을 포함한다. … 가치관계의 구체적인 형성은 늘 유동적이며 인간문화의 유원(幽遠)한 미래에까지 변동해간다.”

즉 인식의 ‘객관성’은 부동의 가치이념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항상 ‘관점’을 ‘변동’시킴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픽션’과 ‘허망’

그렇다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어떻게 해서 ‘화석화’한 ‘국민정신’을 ‘유동화’했다고 본 것일까? 마루야마는 조금은 의외의 각도에서 그 논리들을 연결하는 이음새의 개념을 투입한다.

“앞서 우리는 후쿠자와의 주요한 명제가 모조리 조건적인 인식이며 이른바 괄호 친 이해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기서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을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유희이다’라는 명제는 그가 붙인 최대의 괄호일 것이다. 유희란 짐멜도 서술하듯이 인간 활동에서 그 모든 실체성을 사상(捨象)하고 형식화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픽션이다. 그리하여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 후쿠자와는 인생의 전체를 ‘흡사’[恰も]라는 괄호를 치고 그것을 픽션으로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의식하는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인용한 것처럼 확실히 후쿠자와는 “인생은 본래 유희이고 한 장면의 유희를 유희라 하지 않고 흡사 진정한 것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마루야마는 이것을 ‘픽션’ 개념과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은 큰 비약을 동반하는 논리적 재구성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퍼스펙티브’가 ‘존재피구속적’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입각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퍼스펙티브’를 위와 같이(‘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인식하고 그것을 ‘유동화’하고자 시도하는 자는 존재할 수 없다. 마루야마는 오규 소라이를 통해 ‘성인’(聖人)을 제도의 ‘제작자’로서 외부에 선 절대적 작위자로 논함으로써 퍼스펙티브(소라이의 경우는 ‘도’(道)였다)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내는 논리를 구축했지만, 후쿠자와에 대해서는 그러한 절대자를 상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픽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희인 인생을 “‘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픽션으로 판단한다”라는 후쿠자와 독해에 도움을 준 것은 마루야마가 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문제』(1917년)일 것이다. 확실히 짐멜은 ‘흡사’=als ob를 단서로 유희로의 진정성이 제도의 (‘형식’의) 실효성을 기초 짓는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사교는 유희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특히 존경하는 것처럼 ‘행한다’. 이것은 대개 거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유희나 예술이 현실로부터의 모든 일탈에 의해서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마루야마가 주로 언급하는 짐멜의 Gessellighkeit(사교)의 장 가운데에는 정치한 분석이 사교적 대화나 ‘교태’로 향하는 것과 같이, 짐멜의 관심은 내용적 가치를 ‘괄호 치는’ 사교상의 기능으로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짐멜은 같은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유희가 단순한 형식의 만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용이 어떠한 고유 가치를 가져서는 안된다. 즉 논의가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더 이상 사교적인 것이 아니다.”

덧붙이자면, 마루야마가 사용한 ‘괄호 치기’라는 표현도 직접적으로는 짐멜이 사용한 Aufhebung(변증법의 ‘지양’과 같은 말이면서, 실질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허공에 매단다는 뜻도 있다)에 대응된다. 다만 마루야마의 ‘괄호 치기’는 구키 슈조(九鬼周造 1888~1941)의 『‘삶’의 구조』(1930년)에서 ‘교태’[媚態]를 논한 부분에서 “실생활에 대항하는 괄호 치기”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괄호 치기’가 끝난 것은, 후쿠자와의 ‘국민정신의 유동화’의 프로젝트가 일본에서 ‘사교’ 공간의 자율적 가치를 확립한 후 한 단계 더 나아가 논의를 추진시키는 개념조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픽션’이 걸려든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라는 마루야마의 표현은 인간을 초월한 신앙과 자연에 기초하지 않는 ‘휴머니즘의 논리’만으로 ‘국민정신’이 스스로를 타고 넘어서는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픽션’이 매우 신뢰할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은 ‘픽션’에 의한 자기극복의 논리는 짐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개념』에도 Fiktion은 등장한다. 현실이나 역사가 어떻든 간에 ‘평등’이라든지 ‘자유’라는 일반적 이념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일단 ‘픽션’으로서 낱낱의 개인으로 해체하여 논리를 다시 짜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으로서의 ‘인간성의 순수개념’이 생생한 ‘개성’을 ‘외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맥락이 쌀쌀맞다(よそよそしいものであるという文脈で用いられている。).

무슨 이유에서인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않은데, 마루야마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픽션’ 개념에는 헤겔의 『순수법학』(1934년)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위 혹은 바깥의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권리주체’라는 fivtive한 사고방식이 왜 가능한가를 논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즉 권리주체의 권리(특히 사적소유권)은 국가의 실정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라는 마루야마의 사고방식은 무엇으로부터 뒷받침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객관적 법(objective Recht)과 달리,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주관적 법(subjective Recht: 실정법적 질서에 선행하는 권리)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점점 중요해진다. 즉 사적소유권이라는 제도를 보증하는 법 질서가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이며, 늘 변동하면서도 인간의 의지(Willkur)로 형성된 질서에 지나지 않으며 신의 영원의 의지나 이성이나 자연에 입각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는 경우이다. 특히 이와 같은 질서의 설립이 민주주의적 수속에 따라 행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객관적 법과는 달리 그 현실존재로부터 독립된 법, 그리고 객관적 법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것 이상으로 ‘법’(“Recht”)인 (주관적) 법이라는 사상은 법 질서에 의해 사적소유권의 제도가 폐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사적소유권의 제도]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관적 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왜 개인의 자유, 자치적 인격이라는 윤리적 가치에 연결되는가 라는 문제는 이 자유에는 항상 소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격으로 승인하지 않는 질서, 즉 주관적 법을 보증하지 않는 질서, 이러한 질서를 본래 법질서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헤겔의 논의와 조합하면 한층 더 명확해지듯이, 후쿠자와가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다”라고 마루야마가 논평할 때의 ‘휴머니즘’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이상주의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치적 인격’이라는 ‘픽션’ 이외에 근거를 가지지 않는 법=권리체계의 가능성을 후쿠자와가 구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법의 근본규범에 실체성을 상정하기 어려운 민주주의 국가에서야말로 ‘픽션’의 역할은 중요하다.

마루야마가 이렇게 후쿠자와를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1952년)에서 “자연법사상에서 국가이성의 입장으로의 과도기로서 『문명론의 개략』은 특수의 입지를 점한다”라는 기술은 조금 기묘하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에서 “유명론의 사회관”(121쪽)으로부터 “안과 밖이라는 두 계기에 의해 후쿠자와의 이른바 조숙한 성장을 이끌었던 국가이성(레종 데타) 사상은 언어가 가진 본래의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불가피하게 수반했다”(153쪽)라고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앞서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쿠자와가 스스로의 ‘사유방법’에 대해 성찰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개인이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과 국가가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문명론의 개략』에서 이미 행했다 라는 큰 줄거리를 잡아가고 있다.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은 적어도 초기의 논리구성을 보면, 이데올로기론을 픽션론으로 연결하며 이행시키고, 이 속에서 베버, 만하임, 헤겔을 억지로 공투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루야마의 싸움 상대는 그의 눈앞의 일본사회를 우선 놓아두면, 슈미트이다. 법을 기초 지은 근본규범이라는 ‘픽션’을 인간은 견딜 수 없다. 신 혹은 자연 혹은 단체로서의 국민을 실체로서 그대로 승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단주체가 나타난다는 것 이외에 법체계를 담보하는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에 마루야마는 매료되면서도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픽션’을 음미하며 선택하는 주체의 옹호는 이야말로 베버가 말한 ‘가치이념’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증보판 후기의 유명한 한 구절, “전후민주주의를 ‘허망’으로 보는가 아닌가는 결국에는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문제가 아니라 논자의 가치관에 걸려있다. …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실재’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에는 분명히 베버를 의식한 용어법이라 해도 마루야마의 ‘사유방법’의 언명이 존재한다. 더욱이 ‘방법’적으로 말하면, ‘대일본제국’의 ‘허망’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는 편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는 감동하지 않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전후(戰後)의 강연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람과 사상>(1971년)에서 그가 후쿠자와에서 ‘픽션’의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래 기본적으로 인생은 유희이다. 즉 허구이며 픽션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정작 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진폭의 흔들림을 막을 수 있다. … 이것이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결입니다.”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은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평”이라는 인생교훈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가령 후쿠자와가 결국 그러했다 하더라도 마루야마는 ‘전후민주주의’라는 ‘픽션’에 ‘방법’적으로 ‘내기’를 걸었던 것이 아니던가?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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