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래서 본래의 문장의 맛을 살려내기가 어려웠다. 부분적으로 의역을 했고, 역시나 오역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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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역사의 웅덩이(歴史の窪地)

1. 역사의 웅덩이

일본문화가 창조성으로 넘쳐난 때는 대체 언제인가? 본서의 관심은 이 소박한 의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은 예전부터 번성했다고 하는데도 이런 식의 질문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은 정치적으로 구획된 시대를 각 시대별로 그 성격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해왔지만, 어느 시기에 창조의 환경이 크게 조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무엇보다 역사는 결코 평평하고 단조로운 평면이 아니라 요철(凹凸), 틈새, 단층이 많은 함몰지대를 이룬다. 그러한 요철을 억지로 평평하게 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함몰이나 기복의 다채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역사를 측량하는 방법을 찾아내야한다. 본서의 표제로 제기한 <부흥문화>란 바로 그러한 측량을 위한 하나의 지표이다. 간단히 말해 부흥기 혹은 <戰後>라는 것은 일종의 옛이야기와 같은 — 짧고 조금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적이 일어나는 — <자유>의 시간대이며, 이 때문에 활동기와 안정기에는 볼 수 없는 특성이 나타난다. 거대한 파괴 후의 다공질의 지반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부지불식간에 빗물처럼 담아내는 역사의 웅덩이, 그것이 부흥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흥은 전쟁의 환란이나 재난 등과 비교하면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수수하며,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변경할 기회를 제공해주기 어려울 것이라 느껴진다. 그런 탓일까, 부흥기를 긍정적으로 다뤘던 철학이나 평론은 많지 않다. 본래 오늘날의 작가나 예술가, 비평가들은 대체로 활동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외적인 카오스가 출현하는 때야말로 일상의 사회가 감춰두었던 것 — 인간의 폭력성, 질서의 기만, 혹은 정신의 기적적인 아름다움 등등 — 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평상시에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들의 비자명성이 사람들에게 재인식되기 때문이다. 분명 문화나 예술의 중요한 사명은 사회에 경보를 울리기 위해 <예외상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본래 문화나 예술에는 경보기로서의 사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상당한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기능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본서의 기저가 되는 질문이다. 애초에 부흥문화란 정의상 거대한 사건(전란이나 재난)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건 후에 —혹은 그 흔적으로 — 작동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 때, 전쟁이나 재해 이전의 베이스라인의 딱 거기까지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건 후=흔적에 새로운 소재나 방법론을 불러들이면서 시스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일본의 부흥문화의 본뜻이다. 그 반대로 구래의 질서가 불사조와 같이 화려하게 부활한다는 스토리는 일본문화가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파괴나 재난은 종종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변경을 문화에 가한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변이 속에서도 파국으로 향하는 일직선으로 밀어닥치는 것이 아니라, 부흥기 혹은 <전후>라는 웅덩이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이러 저리 옮겨 다니며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 —, 이와 같은 안식과 창조의 시간대가 일본문화에는 확실히 존재해왔다. 나는 이 시간대에서, 선대의 비평가인 하나다 키요테루(花田清輝)가 말했던 <부흥기의 정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자 한다.

 

2. 두 종류의 부흥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부흥문화론>이라는 구상 자체는 결코 나의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점다. 예를 들어, 비평가 야마자키 마사아키(山崎正昭)는 7세기에 일어난 하쿠스키노에(白村江)[백마강] 전투(*번역자 덧붙임: 663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전투)의 <전후>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하쿠보우(白鳳) 문화]가 실은 하쿠스키노에(白村江) 전투의 패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663년, 일본은 당의 수군의 결정타를 맞았고 텐지(天智) 천황은 조선경영을 단념하고 내정으로 전향한다. 실은 이때 섬나라 일본의 운명이 결정지어진 것인데, 일본 최초의 문화는 하쿠스키노에의 전후문화였다는 것이다. ...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문화는 언제나 부흥문화로서 발전해왔으며, 그 원형이 7세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방점 인용자)

늠름한 하쿠보우 문화의 기저에는 확실히 <부흥>의 동기가 있었다. 텐지 천황의 조선경영이 하쿠노스키노에(白村江)의 패전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 10년 후 임신(壬申)의 난이 이어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상을 입은 후에야 아수카요미가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 7세기 후반 천황의 궁) 및 후지와라쿄우(藤原京: 아수카 시대 말기[694-710] 야마토의 도읍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등장했다. 일본사를 돌아보면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전후>의 공간에서 결정적인 변이가 반복해서 발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부흥기 혹은 <전후>의 사례에 더해, 중국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다룬다. 중국의 국가적 위기나 멸망체험은, 종종 바다 건너의 일본문화에도 중대한 변이를 일으켰다. 적잖이 기묘한 것은 자국의 리얼한 <전후>뿐만 아니라 이국의 사실상의 <전후>도 일본의 부흥문화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원격조작이 일어난 것도 역시 극동의 섬나라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사가인 하야시야 타츠사부로(林屋辰三郞)도 야마자키와는 다른 각도에서 일본의 부흥문화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역사의 변혁기를 맞아 언제나 고대가 부활해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복고주의도 상고(尙古)사상도 현실로의 부정을 깊이 머금은 혁신의 일본적 표상으로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 연희ㆍ천력의 시기는 새롭게 장원을 기초로 하는 귀족정치를 열어가는 전환기였으며, 일본문화로의 자각과 함께 율령국가가 깊이 추념되어 續『万葉』(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편집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和歌모음집)의 의미를 담아 새롭게 『古今和歌集』이 만들어졌고, 『일본기』의 속편에 대해 『실록』이 편찬되는 등 노래와 이야기 모음집이 꽃피우며 새롭게 고전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고전부흥에 의한 고전의 창조였다. 고대, 중세의 변혁기에는 또 연희ㆍ천력을 고전적 세계로서 『新古今和歌集』이나 야마토 회화 등이 창조되었다. ...”

하야시야는 옛 것에서 혁신성을 끌어왔다고 하는 일본의 정치나 문화의 경향을 날카롭게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메이지 정부는 천황친정 및 행정단위로서의 쇼우(省: 정부의 행정관청)를 채용했는데, 이것은 고대의 율령국가의 리메이크였다.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메이지인의 의도는 거꾸로 말해 고대국가의 틀을 형식적으로 <부흥>하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어디까지나 왕정복고였지 시민혁명이 아니었음을 여기서 한번 더 언급해둘 가치가 있다. (나아가 서양의 르네상스가 이슬람을 경유하여 전승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정신을 부흥했던 경우에 비추어볼 때, 일본의 <고전부흥>은 어디까지나 자국에 잔존된 자산을 되살리는 것이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복고=혁신의 사상은 일본사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사에서도 관찰된다. 우선 제3장에서 살펴볼 것과 같이, 중국은 이 사상의 선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야시아와 같이 복고=혁신을 일본의 사례에 한정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동아시아의 시간은 반드시 직진하지 않는다. <古>는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속에 잠재되어 신흥세력이 스스로의 주장을 합법화하고자 할 때 재이용된다. 이러한 <왔다 갔다>의 시간감각 속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와 문화는 서양과 같은 초월적인 신을 매개로 하지 않고, 자신들이 했던 것으로부터 정의의 보증을 부여받는다. 정통성의 원천으로서 <古>를 불러내는 것은 일신교적인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가장 실천적인 정치수단의 하나였다.

하여간 야마자키와 하야시야의 견해를 짚어가면서 우리들은 대략 두 종류의 부흥을 상기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이나 재난 후의 부흥이며, 또 하나는 고대의 문화, 예술, 정치 시스템의 부흥=르네상스이다. 본서는 어느 쪽인가 하면 전자에 무게를 두면서 후자의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이 양자의 견해는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양자 모두 문화의 재생의료로서 부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3. 사회의 만성적 부상

이제 부흥문화가 일본을 해명하는 하나의 열쇠를 갖는다고 하면, 오늘날의 일본사회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논의가 적용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예스>라고 답하겠다. 왜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고 있고, 그 둔한 탄력성이 풍부한 시스템을 묻어버려야 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에둘러 돌아가는 것이긴 한데, 이 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두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냉전종결 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글로벌의 이권을 장악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전면화는 소비의 사이클을 점점 가속화하여, 온갖 사물을 하나의 다발로 유통시키는 상품으로 변하는, 이른바 유체역학적(流體力學的) 상태를 불러들인다. 이에 따라 종래 인간을 보호해왔던 가치관에도 강한 타격이 가해지게 된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숭고한 가치관에도 예외가 아니다. 본래 서양의 <사랑>의 개념은 절대적인 유한성에 갇힌 인간을 정신적인 무한성/영속성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유약한 개체는 사랑의 작용에 의해 특별한 존재로서 이 세계와 이어진다... . 그렇지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지금에 와서는, 무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가 되어버렸고, 그 대신에 유한의 상품화된 <에로스>를 전전하는 것이 대대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한다. 아이덴티티와 존경의 기반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임기응변의 유체적(流體的)인 에로스 속에서 구해진다. 물론 에로스는 타자를 상품으로 바꾸어버리지만, 쉽게 이동되는 상품으로서의 에로스가 매개되기 때문에 사람은 다종다양한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한발 한발 내딛을 수가 있다. 에로스는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점에서 양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유한의 에로스의 전제(專制) 곁에서 사랑은 이제 기껏해야 에로스의 대해원에서 가끔 기적적으로 출현하는 암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한 무한의 사랑과 영원의 행복을 꿈꾸는 시대착오의 로맨틱은 현대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주인공이 그러한 것과 같이, 극한까지 포화된 어떤 에로스의 거품이 꺼져버린 후 온갖 인간적 감정이 증발된 백치적인 미래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이다... .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바람은 인간이라고 한다면 무언가로의 변모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욕망의 언약이 오늘날의 사회를 넘치도록 채우고 있지만, 에로스는 애초부터 크든 작든 반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때로 가정—즉 재생산=생식의 장—을 위협하며(불륜이나 동성애) 많은 인간의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속악한 이미지를 사회에 흩뿌린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의 아이덴티티의 기반에 깊게 침투한 다종다양한 에로스의 에너지를 말소시키자는 것은 이제 인간의 존경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에로스의 영역에 정치권력이 간섭하려 하고 그때마다 왕왕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들의 불안정한 개체를 안도시키고 승인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이미 여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만성적인 상처를 완치하지도 못한 채 우리들은 에로스라는 기호의 대해원을 헤매는 네델란드인처럼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 한편으로,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거대한 상실이 세계자유로서 단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어느 정도 인류사회의 문명화가 진행된다 해도, 아니, 문명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우발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상실이나 피해는 공포스러울 만치 심대하다는 것은 지금의 일본인에게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여러 상처로부터 인간을 완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쁜 점은 이러한 유체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무엇이 굴욕감의 원인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이나 발언이 무언가의 박자에 맞추어 굴욕감을 부채질 하고, 그 굴욕의 이유는 자신밖에 (혹은 자신이라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의 희귀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영원의 사랑>을 꿈꾸는 것만도 불가능한 채, 죽음에 이를 때까지 크고 작은 여러 상처와 굴욕감을 이고 가는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들의 숙명적 상황이 아닐까?

 

4. <다시 일어서는> 철학

전쟁과 재해라는 거시적 상실이든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미시적 상실이든 인간의 지를 초월하는 셀 수 없는 상처가 개인에게 축적되어갈 때, 그 당사자에게도 자각될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이 증가해간다. 그 상처=비밀이 일정한 양을 넘어서면, 그때까지 친밀했던 인간과도 소원해지며 서로 이해될 수도 없다. 실제로 타인에게는 어떻게 해도 전달될 수 없는 상처=비밀이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모티프는 작금의 서구에서도 두드러지는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누구라도 무언가의 상처나 굴욕감을 갖고 있다는 그 하나가 오늘날의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존재론적인 공통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짊어진 존재끼리 새로운 동료로서 서로를 발견하는 것도 충분히 일어날만한 일이다. 상처=비밀의 축적은 단지 기존의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만은 아니다. 에로스가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처럼, 상처는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면서도 미지의 커뮤니케이션을 생성한다. 상실이나 삽질은 확실히 몸을 쓰리도록 갈기갈기 찢는 체험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인간끼리의 새로운 결합과 공명의 가능성도 잠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상처는 연대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셀 수 없는 상처=비밀을 짊어진 현재의 문명에 있어서 그 상처들로부터 출발해서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상처 없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리 없고, 인간에게도 사회에게도 실수나 상실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가 문명론적인 과제로 상승된다. 그 때에 우리들은 상처를 미학적으로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실천적 철학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다시 일어서는> 철학의 단서는 일본의 부흥문화의 역사 속에 수두룩하다. 반복해서 말하면, 일본의 부흥기란 간단한 치료요법의 시간대가 아니며, 혹은 원래의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검은 구름에 긴장하는 시간대도 아니다. 전례의 작은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대이다. 우리들의 선조는 폭풍이 지나간 후=흔적의 시공간을 다양한 사상의 모색이나 표현을 발휘하는 특별한 웅덩이로 변화시켜왔다. 이러한 웅덩이의 문화체험 그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들 자신의 생존의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본서가 겨냥하는 바이다.

물론 어느 시대가 부흥기인가 하는 것은 지난 후에 되돌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당연히 어렵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따라서 온갖 <부흥>은 반신반의인 채 그대로이다. 우선 미시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많은 상실로 넘쳐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무엇이 사건의 <後>인가, 그것이 아니면 <前> 혹은 <最中>인가 라는 것은 점점 판별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2013년의 일본은 재액의 <후>인가 아니면 <전>일까?)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잃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는 힘(탄력성)을 문명에 파묻기 위한 역사기술이 제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국민을 억지로 통합하고자 하는 공식적으로 평평한 역사적 서사뿐만 아니라 생기 넘치는 에너지의 생산지로서 전통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문화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며 세계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과제에 응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평가를 고쳐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쓸쓸함>(侘び寂び)이나 <무상관>(無常觀) 등의 손 때 묻은 일본적 미학을 염불처럼 반복해서는 이제 오늘날의 복잡하고 가혹한 세계에 대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의 세계의 상황을 되짚어가면서 일본이 오랜 세월동안 다듬은 부흥문화를 하나의 가치체계로서 부흥하고자 한다. 물론 이 시도가 잘 되었는가는 본서를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판단할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두고자 한다. 어떤 장부터 읽어도 상관없지만, 나로서는 제1장과 제2장, 제3장과 제4장, 제5장과 제6장이 각각 한데로 묶이면서 전체를 구성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는 처음 부분에서는 일본의 고대문학을, 다음 부분에서는 근세의 중국 및 일본을, 마지막 부분에서는 근현대 일본의 문학과 서브컬쳐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두 장씩 한 단위로 읽으면 내용의 이해가 보다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어서 시작해보자.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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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것은 아니고, 서장과 본론의 부분부분 읽으면서 생각난 것들을 적어둔다. 

너무 재밌어서 계속 읽고 싶지만, 새벽에 나가봐야해서 메모만 남기고 자야겠다.

1. 정말 재밌다. 그리고 쉽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이 재밌고 쉬울 수 있는지. 그는 독자의 어렴풋한 의문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서 논리를 끌어낸다. 독자는 자신의 의문이 무언지 집어주고 풀어주니 재밌을 수밖에.

2. 적어도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세대교체가 시급하다. 486을 포함하여 썩은 머리들이 인문학을 독점해왔다. 학계는 학계대로 삭민주의가 판을 치고, '대중인문계'에는 약장수들이 판을 치고 있다. IMF이후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은, 그래서 한국사회의 폐부를 누구보다도 온몸으로 느끼며 위선에 길들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자유로이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끔 썩은 머리들이 비켜줬으면 좋겠다. 내 주위에는 정말 똑똑한 젊은 연구자들이 많은데, 기성학계의 권력에 눌리고 밀려 소질과 재능을 소진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3.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평은 눈이 부시도록 뛰어나다. 하루키가 일본사회의 무엇을 보여주는지, 그래서 하루키의 한계와 문제는 무엇인지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데,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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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 그녀에게서 이 책을 받았으니 내 손에 들어온지 3년만에 읽은 것이 된다. 그녀는 니이가타(新潟)의 시바타(新発田)로 인터뷰 조사를 하러 온 내게 '뭐하러 제국주의자의 반동분자를 만나느냐'고 질타했더랬다. 니이가타는 재일코리안의 북송사업의 송환항구가 있었던 곳이며(주*), 일본제국의 패전 후 '외지'로부터 귀환한 일본인의 정착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니이가타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과도할 만치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이 아주 드물게 있는데,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내게 준 책이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이라는 책이다. (주* 1959~1984년에 걸쳐 186차례 약 9만4천명의 재일코리안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かぞくのくに>[가족의 나라](2012년, 양영희 감독)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실상과 아픔을 알 수 있다. ) 

이 책의 저자인 이소가와 수에지는 1907년 시즈오카(静岡) 출생으로 1928년 보병으로 입대하면서 조선의 나남(羅南)으로 건너가 1930년 소집해제된 후 흥남공장의 노동자로서 <태평양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약 10년간 복역하고 1947년 귀환한 일본인이다. 저자는 '귀환 후 소학교의 야간수위 일 등을 하다 현재는 무직'이라고 밝히고 있다(책이 출간된 1984년 시점에서). 무산자의 당당함이란!

전후 일본사회에서 패전 후 '외지'에서 귀환한 일본인은 "히키아게샤"(引揚者)로 통칭된다. 히키아게샤의 '고난의 귀환'의 자서전적 수기는 차고 넘친다. 이는 1968년 알제리의 독립 후 프랑스로 귀환한 "피에누아르"(주**)의 수필, 소설, 자서전 등의 수기가 1000편이 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은 그것들과는 아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조선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한 일본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주** pied-noir, 독립 이전의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을 이르는 말, 알베르 카뮈, 데리다 등이 있다)

이 책은 흥남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노동운동의 초기 역사를 아주 소상하게 기술해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이 가진 가치는 분명하다. 1927년 부임한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는 산업개발정치를 표방하며 특히 북조선에서의 공장 건설과 발전소 개발을 주요 식민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30년 흥남공장에서는 약 6천명의 노동자가 있었고 흥남의 인구는 약 3만명에 달했으며, 1945년 패전 시 공장종업원은 4만5천여명, 흥남의 인구는 18만여명에 이르렀다. 1931년 상해에 본부를 둔 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를 발기로 아시아 전역에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중심은 흥남의 노동자들이었다. 또 1927년 일본 본토에서 보통선거로 실시된 중의원선거에서 비밀조직으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이 출마 대패한 후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맞이했을 때 일본공산당원의 다수가 조선의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잠입한 일본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립--, 그리고 자발적인 흥남의 노동자들이 국제적 노동조합운동의 기치로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 '태평양노동조합'이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32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 검거되었고 그 후 10년간 흥남교도소와 경성교도소에 복역했다. 경성교도소에서 정치범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는 날에는 반드시 "적기의 노래"와 "공산당 만세"를 한번은 조선어로 또 한번은 일본어로 부르고 외쳤다고 한다. 그것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동지를 위한 배려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의 노동운동과 공산당의 초기 역사는 네이션의 시야를 넘어서는데, 네이션을 넘어선 아시아의 시야에서 그것을 해명한 논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시 그들이 추구했던 노동운동과 코뮌의 가치가 일국의 사회주의 혹은 아나키즘 혹은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이것은 시야를 갖추지 않으면 역사를 발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분야의 연구자들의 몫이고,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45년 8월 15일 전쟁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옥음"을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과 함께 들은 직후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방송이 끝난 후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들의 표정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안심하고, 어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뻐했다. 그들 중 누구도 슬픔하거나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나는 돌연 패전국의 국민이 되었다. ... 전형적인 침략전쟁의 귀결이며 자업자득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 그런데 나의 상념에 스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의 총결산을 행해야 하는 날이 구체적 일정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pp.232-3)

제국주의에 맞섰던 코뮌주의 혁명가가 제국의 성원으로서 식민지배의 청산을 책임지는 위치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청산의 과제란 사상의 이념이 무엇이었든지간에 '외지'에 남겨진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군국주의 국가 일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동시에 이방의 땅에 버려진 패전 일본인이 지금이야말로 힘을 합쳐야만 하는 혼돈의 현실에의 항전이다."(p.258)

주지하다시피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귀환'이 아닌 '억류'의 조치를 취했으며, 10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북한의 공산주의 입장에 따라 식민지배자의 역사적 처벌을 감내할 것인가 동포의 구제를 모색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의 협력을 얻어 야밤탈주를 감행한다. 그 또한 1947년 1월, 북조선에서 추위와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9백여명의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다.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에게 "기곡"(キコク)으로 불렸던 이소가와(磯谷)의 코뮌적 지향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국가권력을 상실한 구식민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 이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정치적 이해"에 충실했던 그의 행보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그러한 그의 행보를 이끌어내었던 시대의 사상적 구조는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기곡"와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사상적 구조에 놓인 "제국주의의 반동적 분자"의 이야기도 놓칠 수 없다.

니이가타에서 소식이 왔다. 1918년생인 나의 가장 최고령의 제보자가 위독하다고 한다. 그가 내게 빌려준 자료를 돌려받고 싶다고 하고, 나는 그의 방 한가득한 자료를 얻고 싶다. 담판을 지러 가야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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