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만과 푸코

번역글 2014. 12. 10. 02:12

<사회학의 행방>을 다룬 『현대사상』2014년 12월호에서 루만과 푸코를 비교한 논문을 번역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논문은 루만의 사회시스템론의 관점에서 푸코의 논의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사회시스템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콧 파슨즈의 <현대사회들의 체계>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푸코의 저작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이 논문을 읽지 말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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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学理論のツインピークスを超えて」[사회학 이론의 트윈픽스를 넘어서]

오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

 

 Ⅰ. 사회학의 빈곤

사회학이라는 앎은 근대사회의 자기의식의 순화된 형태의 하나로 19세기에 태어났다. 사회학의 그다지 깊지 않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근년의 이론의 빈곤이다. 사회학사에서 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은 항상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1980년대 전후의 연구를 끝으로 영향력 있는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이론의 생산은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현 단계의 이론이 이미 충분히 올바르고 설득적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많은 사회학자는 현 단계의 이론이 ‘최장부도거리’(最長不倒距離: 점프 경기에서 넘어지지 않고 착지하는 가장 먼 거리)라고 평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 단계의 이론이 완전무결하고 설득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증거로는 경험적 연구는 양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연구가 근거 혹은 전제로 삼는 이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회학 연구의 대다수는 20세기 말의 ‘최장부도거리’의 연구를 간단하게 무시한다.

그렇다면 심오한 이론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논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반성과 탐구를 결여한 연구는 중대한 희생을 동반한다. 그 희생이란 사회의 전체성에 대한 시야를 잃는 것이다. 어떤 사회현상도 국소적인 원인관계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복잡하면서도 무수한 제 관계 속에서 어떤 원인관계와 논리관계가 중요한지는 전체사회에 미치는 제 요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전체사회의 여러 요인 중에 어떤 원인관계와 논리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 이론이다. 요컨대 이론에의 자각을 결여한 사회학적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상식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여기에서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보겠다. 20세기말까지 사회학 이론의 정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나아가 우리가 전진하기 위해서 어떠한 이론적 구상이 필요한가?

내가 보기에 현 시점에서 사회학 이론의 정점에는 두 개가 있다. 두 사람의 사회학자로 대표되는 두 정점. 두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관심과 완전히 다른 주제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방법도 문체도 완전히 대조적이다. 실제로 상호 간에 교류도 없었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다. 사망한 년도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태어난 년도는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독일인이며 또 한 사람은 프랑스인이다. 얼핏 다르게 보이는 두 학자의 이론은 실은 동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이론의 무엇이 부족한지도 드러날 것이다.

두 사회학자, 사회학 이론의 쌍두마차는 바로 니클라스 루만(1927-1998)과 미셸 푸코(1926-1984)이다.

 

Ⅱ.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우유성(偶有性)으로부터의 자기창출

1. 선택의 결합으로서 커뮤니케이션

루만은 구조-기능분석이라 불리는 사회시스템의 이론을 정식화한 탈콧 파슨즈 밑에서 사회학 교육을 받았다. 즉 루만도 사회를 ‘시스템’으로 개념화하는 이론을 계승한다. 시스템으로 간주되는 실체는 물론 사회뿐만 아니다. 시스템은 요소와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요소 사이에 특정한 관계가 있으며 무언가의 질서가 형성될 때, 그것은 시스템으로 불린다. 사회 시스템은 어떤 특징을 가진 시스템인가? 다른 시스템과 어떻게 다른가?

적어도 네 개의 중요한 시스템이 있다. 기계, 생체, 정신(인격), 그리고 사회이다. 루만은 이 네 개 중에서 사회시스템을 다음의 세 조건으로 정의한다. 첫째, 사회시스템은 자기창출시스템이다. 자기창출시스템의 엄밀한 정의는 후술하겠다. 여기에서는 내부에 설계자를 가지지 않는다고 거칠게 이해해도 좋다. 기계는 외부에 설계자가 있다. 그러나 생체, 정신, 사회는 모두 자기창출적이다. 둘째, 사회시스템은 의미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다. 이 점에서 정신과 사회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생체는 그렇지 않다. 셋째, 사회시스템은 요소가 커뮤니케이션한다. 이 점에서 정신과 사회는 구별된다. 정신시스템에서 요소는 사고와 감정이라는 정신프로세스에 놓여있다.

사회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세 개의 계기가 중요하다. 오토포이에시스(*), 의미, 커뮤니케이션이다.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해명해보겠다. 다른 두 계기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루만은 의미개념을 현상학에서 빌려온다. 의미의 본질은 부정(구별)에 있다. 즉 지향대상의 의미(그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것)는 가능성의 지평 가운데에 부정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이것’이 ‘테이블’이라는 것은 ‘책상이 아니다/의자가 아니다…' 등 부정을 매개로 규정된다. 의미의 근본적인 특징은 그러한 부정된 가능성이 소거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다는 데에 있다. 결국 부정되어 선택되지 않는 선택지는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중립화되고 괄호 안에 들어가서, 취득된 선택지로서 보류되는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 autopoiesis: 칠레의 생리학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제창한 생명 시스템을 특징짓는 개념. 자기 생산을 뜻하며 시스템의 구성 요소를 재생산하는 메카니즘을 가리킴. )

사회학사의 표준적인 이해에서 사회시스템의 이론에 의미개념을 도입한 것은, 루만의 획기적인 업적이다. 루만 이전에 사회학 이론에서는 ‘기능’의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사회시스템론과 ‘의미’의 개념에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현상학적 사회학을 필두로 하는 각각의 학파가 물과 기름처럼 대립해왔다. 루만은 사회시스템론이 의미개념을 거둬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양자 사이에 가교를 세웠다.

의미에 기초한 세계 체험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 의미는 대상을 무엇인가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때 세 차원에 따른 일반화가 발생한다. 첫째, 의미는 사상적(事象的) 차원에 따라 일반화한다. 이것도 저것도 말(馬)이지 암소가 아니라는 등등. 둘째, 시간적 차원의 일반화가 발생한다. 보이는 방식이나 모습이 변해도 저것은 말(馬)인 채로. 셋째, 사회적 차원의 일반화. ‘비자아’가 다른 사람의 자아로 체험된다. 즉 같은 대상이나 세계가 다른 시계(視界)로 체험되는 것이 사회적 일반화이다. 이 사회적 차원이 ‘커뮤니케이션’에 관계한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를 커뮤니케이션으로 간파하는 것은 이론의 비약이다. 루만은 이렇게 자화자찬했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는 행위 혹은 인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시스템의 부분시스템인) 경제시스템은 다양한 형식의 매매를 통해 작동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며 이 시스템에서는 은행구좌를 소유하는 ‘인간’은 요소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전달’ ‘이해’라는 세 가지의 선택의 총합이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비가 내리고 있네’라고 말한다고 치자. 이 때 우선 A로서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선택한 것이다. A는 B가 단지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A가 정말로 B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을 B가 인지하기를 A는 의도하고 있다. 이것이 전달의 수준의 선택이다. 이 두 가지를 B가 이해할 때, 커뮤니케이션은 완결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과 접속하여 커뮤니케이션을 하나하나 생성해간다. 커뮤니케이션의 접속이란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선택이 후속의 커뮤니케이션의 전제로 채용됨을 가리킨다. ‘전제로서 채용된다’는 것은 반드시 받아들이는 쪽에 전달이 수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실제 접속에서는 ‘거부’보다 ‘수용’의 개연성이 높다. 커뮤니케이션의 가능한 최대도달범위, 즉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총체가 ‘전체사회’라 불린다.

자, 그렇다면, 우리들로서는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의문을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접속되는가? 왜 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무시되지 않고 후속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선택의 지평을 형성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수용되는 확률이 거부되는 확률보다 높은가? 이러한 의문은 루만이 제기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서는 질문을 적어두는 것으로 끝내고 루만의 이론을 서둘러 소개하겠다.

2.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으로서의 사회시스템

시스템 이론에는 두 세대가 있다고 한다. 루만은 제2세대를 대표하는 시스템 논자의 한사람이다. 제2세대의 시스템이론은 ‘제2차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이라 불린다. 루만 이전의 사회시스템론, 즉 파슨즈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기능분석의 사회시스템론은 제1세대의 시스템론에 대응한다.

제1차 시스템이론과 제2차 시스템이론은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론이 어떠한 ‘구별’과 어떠한 ‘차이’에 집중하느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1차 시스템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부분/전체’의 구분이다. [제1차 시스템이론에서는] ‘전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분’의 단순화 총화를 넘어서는 것이 시스템의 시스템다운 근거가 된다. 제2차 시스템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시스템/환경’의 차이이다.

시스템과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시스템을 환경으로부터 구분하는 메르크말(Merkmal: 標識)은 무엇인가?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복잡성의 격차이다. 복잡성이란 ‘요소’ 및 ‘요소 간의 관계’의 다양도를 말한다. 시스템은 환경보다 복잡성이 덜하다. 사회시스템의 내측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접속의 다양도가 환경에서의 그것보다 낮다. (사회시스템의 하나인) 조직시스템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대학시스템에서는 연구나 교육에 직접적ㆍ간접적으로 관련된 커뮤니케이션만이 그 속의 요소로서 인식(=관찰)된다. 환경에서는 친구 동료의 친목을 위한 모임도 가능하지만,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은 대학시스템에서는 관심 밖이다. 복잡성의 감축이야말로 시스템의 근본과제, 곧 시스템이 존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어떤 종류의 시스템에는 인풋도 아웃풋도 없다’. 이와 같은 시스템에는 사회시스템도 포함된다. 인풋도 아웃풋도 없는 시스템이라는 개념화는 루만이 제기한 가설 가운데에서 가장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인풋과 아웃풋의 부재는 시스템이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경우에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조작적으로 닫혀있다는 것은 ‘시스템/환경’을 구별하는 조작 자체가 시스템의 내재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즉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시스템은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언어’는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시스템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나 ‘언어에 의해 지시되는 지시대상(물자체)’ 또한 말로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말과 그 외부는 말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 밖의 현실 또한 언어화하지 않고서는 언어시스템 속에 들어와 다른 어휘와 발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결국 ‘인풋’이 되는 것도 모두 언어시스템에 내재하는 요소이며 순수한 인풋이 아니다.

생체는 이미 조작적으로 닫혀있기 때문에 인풋도 아웃풋도 없는 시스템이다. 그 전형이 면역시스템이다. 먼역시스템에서는 항원이 되는 침입물이 인풋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스템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리셉터(수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식별할 수 있는 항원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면역시스템은 말하자면 외부에 닫힌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이미지에 합치하는 대상만을 항원으로 인식한다. 이 의미에서 항원은 이미 면역시스템의 내적인 요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시스템이나 사회시스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사회시스템에 대해 생각해보자. 커뮤니케이션은 다만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만 반응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접속해간다. 조작적인 닫힘은 전체로서의 사회시스템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부분 시스템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법시스템. 그것은 ‘법이다/아니다’라는 판별기준에 따라 ‘법’으로 간주하는 커뮤니케이션에만 반응한다.

이와 같이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에는 인풋도 아웃풋도 없다. 그러나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들은 서로를 환경으로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혈액의 순환시스템과 면역시스템은 공히 각각 조작적으로 닫혀있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주지 않으면, 어느 쪽의 시스템도 작동되지 않는다. 혹은 경제시스템도 법시스템도 조작적으로 닫혀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상태가 ‘구조적인 커플링’이다.

이와 같은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을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해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란 자기언급적인 창출이 시스템의 전체성(시스템 자신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개개의 요소에까지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생체의 요소(혈액순환시스템에서 혈액의 순환, 면역시스템에서 항원과 항체 등등)는 생체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산출되지 않는다. 정신시스템의 요소인 사고와 감정은 사고와 감정을 통해서만 하나하나 만들어진다. 사회시스템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 밖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모두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다. 루만은 이 시스템 개념을 생물학자인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J. Varela)에게서 차용하여 사회시스템에 채용했다.

확인하면, 시스템의 오토포이에틱한 활동을 통해 환경의 과잉한 복잡성은 감축된다. 복잡성을 좀 더 과감히 감축하기 위해서는, 즉 시스템의 선택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내적인 복잡성을 높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한 분업이나 유연한 조직체계를 가진 조직이 일매암(一枚巖)의 집단보다도 다양한 환경에 좀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복잡성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자체의 복잡성을 증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시스템이 내적인 복잡성을 증대하여 선택능력을 높이는 과정으로서 사회시스템의 진화를 도모할 수 있다. 루만에 따라면, 진화는 세 단계를 거쳐 왔다. 환절적(環節的) 시스템(동일한 시스템이 횡적으로 결합한 시스템)으로부터 성층적 시스템(계층의 분화를 가진 시스템)을 거쳐 기능적으로 분화한 시스템(다양한 기능으로 특화되는 시스템을 내부에 가진 시스템)으로 변화해왔던 것이다. 이  세번째 단계의 시스템, 즉 기능분화한 시스템이 근대사회에 대응한다.

결국 근대사회는 기능적 시스템을 분출시키는 사회시스템이다. 어떠한 기능이 있는가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능시스템은 그 시스템에 고유한 ‘매체’를 가진다. 이 경우 매체는 각각의 시스템에 관여적인 이원코드에 의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경제시스템의 매체는 화폐이며, 코드는 ‘지불하다/지불하지 않는다’의 이원적인 선택지이다.

3. 우유성과 필연성의 통일로서의 우유성

이상과 같이 루만의 이론을 표준적인 오서독스로 해설해보았다. 해석의 측면에서 독창적인 지점은 전혀 없다. 이 요약만으로는 루만의 이론이 적이 따분해 보일는지 모르겠다. 이 이론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이러한 구성을 구동시키는 모티브를 알아야 한다. 즉 이 모티브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을 꼭 집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유성 Kontingenz 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유성이란 필연성과 불가능성 둘 다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는 양상, 바로 그것이다. 즉 필연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이 우유성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보류를 동반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우유성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영화를 관람하거나 잘 수 있다. 나의 선택은 우유적이다.

복잡성의 감축은 바로 시스템의 근본과제이다 라고 앞서 나는 말했다. 이것은 시스템에서 요소와 요소 사이의 관계가 우유적임을 함의한다. 요소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와 같이’ 될 때에 시스템은 복잡성을 감축한다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시스템에서 우유성은 이중적이다. 자기 선택에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존하는 타자의 선택에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사회시스템에서 우유성은 본원적으로 이중일 수밖에 없다. (즉 우유성은 둘을 합산한 이중이 아니다.) 우유성은 타자의 규정적 요소의 하나이다. (즉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확정적으로 예기할 수 없는 것이 타자이다.) 그 타자와의 상관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의 우유성도 주제화된다. 결국 타자가 없다면 우유성 그 자체도 있을 수 없다.

복잡성을 감축하며 질서를 창출함으로써 시스템을 환경으로부터 끊어내는 것은 우유성을 흡수하여 질서에 (유사) 필연성의 양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본래에서라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었던 관계가 마치 ‘이와 같은 것에 다름 아니다’로 나타날 때에 질서가 성립하며 시스템이 환경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이다.

루만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러나 우유성이 결코 환원되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우유성은 괄호에 넣어져 무해화(無害化)되지만, 실제로는 보존된다. ‘의미’에 관해서도,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선택에 관해서도, 각 기능시스템을 정의하는 미디어의 이원적 코드(수용/거부)에 관해서도, 거부된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온존된다.

루만의 이론은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는 것이다. 헤겔에서는—적어도 교과서적으로 채택된 헤겔에서는—내적으로 필연적인 ‘본질’, 곧 대문자의 ‘이념’이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외화한다. 현상 자체는 우유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우리들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다양한 우유적인 현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념이다 라고. 루만의 시스템론은 그 반대이다. 필연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도 실은 우유적이다. 필연성이야말로 가면이며 그 실태는 우유성에 있다. 헤겔과 루만의 대조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헤겔에게서 ‘필연성(본질)/우유성(현상)’이라는 대립 자체를 지지하는 양상은 필연성이다(필연성={필연성/우유성}). 루만에게서는 그 반대로 ‘필연성/우유성’이라는 대립의 지평은 우유성에 있다(우유성={필연성/우유성})

다시금 정리하면, 루만은 다음과 같이 논한 것이 된다. 시스템 내로 거둬들인 요소—사회시스템의 경우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존재양상과 그 관계의 양태는 본래적으로 우유적이며 복잡의 과잉이다. 바로 그 때문에—시스템이 아이덴티티를 가지기 위해서는—복잡성을 감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시스템은 자신의 반전상(反轉像), 자신의 부정(우유성의 부정)을 자신의 ‘되어야 하는 모습’으로 투사함으로써 환경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분하고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4. 래디컬한 구성주의와 래디컬한 아이러니즘

루만의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의 이론은 그 이론적인 함의가 반실재론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실재’도 각각의 시스템의 내적으로 조작된 ‘관찰’의 상관물이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에 외재한다고 간주되는 임의의 ‘실재’는 그 자체, 시스템의 구성물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면역시스템은 생체에서 ‘이물’을 발견하지만, ‘이물’ 자체는 면역시스템의 관찰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이와 동일하게 사회시스템도 성립한다. 법시스템은 위법행위와 존법행위를 발견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법시스템의 고유한 관찰이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스템의 구성물 외에 진짜 실제(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색’은 객관적인 실재로 보이지만, 색을 식별하는 능력의 하나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실제는 이와 동일하다. 이것을 ‘래디컬한 구성주의’라 부른다.

루만이 말년에 저술한 책들의 타이틀은 기묘하다. 어쨌거나 『사회 X』. 이 X에 다양한 기능적 분야 명칭이, 예를 들어 경제, 법, 정치, 교육, 예술이 들어간다. 타이틀은 모든 X가 사회시스템의 구성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이 ‘사회 X’의 궁극의 버전은 X가 관찰=구성의 주체로 자기언급적으로 회귀하는 경우, 곧 ‘X=사회’가 되는 경우이다. 『사회의 사회』이다. 사회는 전체로서 하나의 관찰(인식)의 형성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이 구성되는 유사적 ‘실재’라는 것이다.

이 래디컬한 구성주의의 실천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당연히 보편적인 진리 혹은 보편적인 정의라는 차원은 배제된다. 항상 특정의 시스템의 관점으로 보는 유사적 ‘진리’ 혹은 ‘정의’가 있을 뿐이다. 진리 혹은 정의는 시스템의 관점에 의해 상대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래디컬한 구성주의는 우리의 사회적 실천에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 래디컬한 구성주의가 함의하는 실천적인 태도는 래디컬한 아이러니라고. 이 이론은 사람들이 ‘진리’ 혹은 ‘정의’로서 서로에게 관여한다는 것이 특정의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이라는 것을 아이러니컬하게 폭로하는 데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학이 성립하는 것, 사회학이 성립하는 것은 단지 사태를 기술함으로써일 뿐이다. 그러한 기술이라면 ‘사회의 사회학’으로서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왜 필연적인가?

 

Ⅲ. 미셸 푸코의 이론—담론과 권력

1. 연구의 세 단계

루만과 푸코는 일반적으로 자질이 전혀 다른 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앞서 보았듯이, 루만의 사회학은 철저히 추상적인 시스템 이론의 구축을 지향한다. 그에 비해, 푸코의 학문적인 주제는 늘 역사, 서양의 역사였다. 그의 탐구는 학문과 사상과 철학에 향해 있는 한편, 정치적인 실천과 무명의 인물의 사적인 영위에 향해 있다. 어쨌거나 언어와 언표의 역사야말로 푸코의 생애 내내 변하지 않는 연구대상이었다.

본래 추상적인 이론의 구축을 목표로 삼았던 루만도 그 저작이나 논문을 읽으면 역사에 대한 엄청난 지식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푸코의 최종적인 목표 또한 역사에 있다. 그러나 그의 역사학은 통상의 역사학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푸코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주행하며 그에 공명한다.

푸코의 학문적 행보는 분명하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초기 연구의 주제는 담론과 에피스테메이다. 『광기의 역사』(1961)에서 『말과 사물』(1966)을 거쳐 『지의 고고학』(1969)에 이르는 저작들, 곧 1960년대에 잇따라 발표한 제 저작들에 대응하는 시기이다. 중기는 1970년대이며 이 즈음의 푸코는 권력분석, 특히 근대의 생물권력(생명정치)의 역사적인 기원에 관한 연구에 전념한다. 대표작은 『감옥의 탄생』(1975)과 『앎에 의지 성의 역사Ⅰ』(1977)이다. 이 시기의 연구가 가장 사회학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생의 기법에 관심을 쏟았다. ‘자기에의 배려’를 핵으로 하는 생의 기법 말이다. 대표작은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Ⅱ』와 『자기에의 배려 성의 역사Ⅲ』(1984)이다.

푸코의 경우, 이와 같이 연구의 단계가 매우 신축성 있는 형태의 3기로 나뉜다. 이 단계들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째서 연구의 주제가 이처럼 옮겨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사회학 이론으로서 푸코의 연구의 골격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2. 담론의 분석

초기 연구에 대해서는 대표작인 『말과 사물』만을 극히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 대작의 주제는 서양의 에피스테메의 변화이다. 에피스테메란 특정 시기 사회의 사고 시스템의 기본적인 배치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에피스테메의 준거점, 곧 에피스테메의 좌표축의 원점이 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이 변화해왔다. 중세로부터 이어진 르네상스에서 그것은 ‘유사’이다. 그에 비해 고전주의 시대(17세기~18세기)에 준거점은 ‘표상’으로 옮겨간다. 마지막으로 근대(19세기)의 에피스테메의 준거점은 ‘인간’, 선험적 및 경험적인 이중체로서 인간이다.

유사의 에피스테메의 시대로부터 표상의 시대로의 전환점에서 푸코는, 17세기 초두에 출현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본다. 돈키호테는 아직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에 살고 있다. 그 에피스테메에 따라 문헌은 세계 그 자체에 연속적이며 세계와 닮아가야 한다. 돈키호테는 세계라는 직물이 문헌과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돈키호테가 세계를 해독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늘 ‘유사’였다. 그는 근소한 유사를 단서로 여인숙을 성(城)으로, 가축의 무리를 군대로, 여종업원을 귀부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미 ‘유사’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유사에 기초한 해석의 타당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돈키호테의 행동은 원활하지 않았으며 망상과 환각에 의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앎, 곧 박물학, 부의 분석, 일반문법의 세 가지는 상호 독립적인 분야이지만, 이미 ‘표상’이라는 태양의 중심을 회전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박물학이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그리고 일반문법이 문헌학으로 환치된다. 이 자리바꿈은 독립적으로 발생하지만, 완전히 같은 형식을 취한다. 그 어떤 전환에서도 중심은 ‘표상’에서 ‘인간’으로 이행했다. 이와 같이, 에피스테메의 세 준거점은, 인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객체이기도 한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다.

푸코의 견해로는 그 ‘인간’마저 지금(20세기 후반)에 와서 주역의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인간은 ‘물가의 모래 얼굴처럼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푸코와 루만이 동시대적으로 공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만의 사회시스템론이야말로 인간주의의 소멸이라는 푸코의 예언을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는 행위와 인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때에 루만은 사회학의 이론에서 ‘인간’을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 이와 같은 에피스테메의 변화는 어떻게 찾아진 것인가?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인데, 푸코의 담론(discourse)은 언어의 의미와 더불어 언어의 존재조건(특정 언어의 존재를 지지하는 구체적인 조건의 전체)을 가리킨다. 담론의 집합을 시스템으로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시대와 사회 각각의 담론이 희소화되고 있다. 즉 문법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것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카이브는 랑그의 범위보다 훨씬 한정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현재 말해지거나 쓰이는 것의 파롤의 총체보다 크다. 즉 아카이브는 가능적인 것을 포함한다. 또 아카이브는 계급적 이해에 엮이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넓다. 그런데 어떠하든 반복하자면 그것은 문법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모든 것은 아니다. 루만의 술어를 차용하면, 담론의 복잡성은 감축하고 있다.

담론의 희소화에는, 다시 말해 담론의 집합의 복잡성의 감축에는 시대와 사회마다 명확한 방향성이 있다. 그 경향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무언가 기준이 되는 희소화의 특정의 방향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바로 에피스테메의 준거점을 찾아낸 것이다.

푸코의 담론분석은 루만의 래디컬한 구성주의와 동일한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근대의 앎이 외적인 실재로 간주하는 것, 즉 담론의 실정적인 근거가 되는 ‘인간’은 담론에 의한 구성물이다. 이와 같은 관점이야말로 구성주의와 친화적이지 않는가?

나아가 이와 같은 구성주의의 철저화는 울가(S. Woolgar)와 폴라치(D. Pawluch)가 ‘존재론적 선긋기 ontological gerrymandering’라 했던 문제를 남긴다. 존재론적 선긋기란 ‘실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그와 같은 구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객관적인 실재를 전제로 한다는 문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시대의 부의 분석과 근대의 경제학을 비교할 때에 ‘인간’이라는 실재가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부의 분석은 교환가치의 학문이며, 여기에서 상품은 항상 그것에 의해 교환될 수 있는 다른 상품의 표상으로 다뤄진다. 그러나 19세기 경제학은 노동이라는 활동이 표상의 분석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부에 일정한 질서가 있으며 무엇인가를 무엇인가로 팔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시간, 노동, 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경제학은 말한다. 이때 표상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전환이 발생한다. 즉 노동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소비하는 ‘인간’이라는 실재가 경제학의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의 분석’과 ‘경제학’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이한 담론을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 이때, 한편에서는 표상(교환가치)에 의해, 또 한편에서는 인간(노동)에 의해 파악되는 ‘동일한 대상’이 담론외적인 실재로서 전제된다. 실재가 구성되는 것임을 가리키는 연구는 이처럼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미래를 알지 못하는 속에서 전제되고 만다. 이때, 구성되는 유사 실재와 객관적인 진정한 실재 사이에 자의적인 경계가 설정된다. 이것이 존재론적 선긋기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겠다.

3. 권력의 분석

담론의 집합의 복합성은 감축되고 있다. 즉 담론은 희소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담론의 분포에 특정의 경향성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담론의 출현과 존재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회답으로서 푸코가 전제하는 것은 권력이다. 우리는 보통 권력을 억압의 작용으로 간주한다. 그에 비해 푸코가 발견한 권력은 담론의 생산을 선동하는 권력, 곧 구성하는 권력이다. 푸코의 초기 담론 분석은 이렇게 권력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우선 그는 『말과 사물』이 발견한 근대의 인간주의적인 주체, 이것을 구성하는 권력의 윤곽을 그리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이 권력은 푸코가 발견한 권력이다. 푸코는 이것을 ‘생물권력 bio-pouvoir’이라 이름 지었다. 고전적인 ‘죽이는 권력’에 반해 ‘살리는 권력’이다.

생물권력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권력의 전형이다. 그 생물권력의 한 형태가 『감옥의 탄생』이 구체적으로 묘사한 규율훈련형 권력이다. 밴덤이 고안한 감옥, 팬옵티콘이 그것을 물질적ㆍ건축적으로 은유한다. 또 규율훈련형 권력의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효과는 『앎의 의지』가 상술한 ‘고백’이다. 규율훈련형 권력에 의해 감시받는 자는 끊임없이 고백에 쫓긴다. 나는 올바르게 행동했을까, 나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등등의 강박적인 자기반성과 고백은 끝날 줄을 모른다. 그 고백의 결과로서 개체의 ‘내면’이 산출된다. 고백해도 고백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원천으로서의 ‘내면’ 말이다.

푸코의 연구는 나아가 고백을 강요하는 권력, 규율훈련형 권력의 역사적인 기원으로 거슬러 간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고대 헤브라이즘의 전통 중의 목자[牧人]적 권력이다. 헤브라이즘의 세계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은유된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배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하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은 은유는, 푸코에 의하면 헤브라이즘의 전통 외에는 없다.

생물권력의 특정 타입에 대한 종속이 근대의 인간주의적인 주체를 산출한다. 푸코의 이 분석은 매우 선명하고 설득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으면, 하나의 곤란을 불러들인다. 학문적인 곤란이 아닌 실천적인 곤란.

만약 주체가 권력의 상관물로 구성된다면, 주체는 어떻게 권력에 저항할 수 있을까?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해방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는 주체야말로 권력에의 저항의 거점이었다. 주체는 권력이라는 독립적인 실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야말로 권력의 주요한 산물임을 깨닫고 말았다. 이 래디컬한 구성주의에 영합하는 결론을 전제로 할 때에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루만과 마찬가지로 아이러니즘만이 남겨진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는 그 무엇도 아니며, 계몽의 입장에서 사태를 냉소적으로 기술하는 것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인 것 같다.

그러나 푸코는 다른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푸코의 말년의 탐구로 이어진다.

4. 자기에의 배려

푸코는 탈출을 위한 단서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 헤브라이즘과는 다른 서양의 전통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사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자기에의 배려 souci de soi, epimeleia heautou’라는 관념이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에의 배려는 그리스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핵적인 관념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상의 중심적인 테제로서, 특히 소크라테스의 이름과 결부된 테제로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이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자기에의 배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길 가는 행인을 붙들고 설파한 것은 자신의 부속물—부와 지위 등등—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해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자신을 깨닫고 가능한 한 선량한 사람이 되도록 배려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푸코는 스토아학파가 자기에의 배려를 위해 자기 음미의 네 가지의 기술을 제안했음에 주목했다. 동지들 간에 서로가 서로의 생활의 세부를 기술하는 편지, 자기의 양심의 점검, 자기 인식을 위한 아스케시스(금욕), 그리고 꿈의 해석이 그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통치 가능하도록 자기에의 배려를 유지하기 위한 생의 기술이 있다면 (머지않아 규율훈련형의 권력으로 성장해간다) 목자의 권력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저항의 거점을 확보하지는 않을까? 이것이 푸코의 암묵적 의도이다.

고전고대에 ‘자기에의 배려’라는 관념을 탐구하는 속에서 푸코의 최종적인 관심은 ‘파레시아 parresia, parrhesia’라는 그리스의 관념에 있다. 죽음 직전 2년간 푸코는 파레시아만을 연구했다. 파레시아란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 진리에의 용기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자기에의 배려를 통해 진리에 도달한 주체는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의 배려’가 그리스 사상의 중심적인 관념이라고 한다면, ‘파레시아’는 그 중심 중에서도 중심이다.

고전고대의 문화의 내부에서 파레시아와 파레시아가 되어야 할 것과의 구별을 덧붙이겠다. 푸코가 파레시아와 철저히 대립하는 실천으로 본 것이 ‘레토릭’이다. 파레시아란 단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레토릭의 안목은 ‘잘 말하는 것’에 있다. 레토릭의 교사의 전형은 소피스트이다. 소피스트에 대항하여 그들의 기만을 폭로한 소크라테스가 바로 파레시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레시아, 곧 진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는 확실히 권력에 위협적이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의 지배층이 소크라테스를 역겹게 느껴 민회에서 사형까지 언도했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체제에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여기까지 푸코의 사고를 쫓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최종지점에서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의 배려와 파레시아를 적출하는 사상사연구자로서 푸코의 수완은 대단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그가 탐구한 것을 찾아낸 것일까. 푸코가 말한 것들은 주체를 구성하는 권력, 규율훈련형의 권력과 생물권력에 저항의 거점이 되었을까?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의 실마리는 푸코가 말한 관념과 실천 속에 있을까?

아무래도 어떤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자기에로 배려하는 개인과 규율훈련형 권력이나 목자적 권력이 산출하는 주체성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자기 자신에 자기언급적으로 배려하는 개인이란 주체의 정의 그 자체가 아니던가? 권력에의 저항거점은 그 권력의 산물과 너무나 흡사하다. 불합격을 받은 답안을 고치지 않고 다시 제출하는 것이 아닌가? 파레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파레시아는 ‘고백’과 정말 유사하다. 고백과 파레시아는 어떻게 다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기에의 배려’라든가 ‘파레시아’는 원죄에 의해 추방당하기 전 인류가 살았던 낙원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종류의 ‘고백’이다. 그것은 원시적인 고백, 아직 무구하며 원죄를 범하기 전의 고백이다. 고백이 강박적인 철저성을 띠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신=목자에 의한, 혹은 판옵티콘의 감시자에 의한 보편적인 시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철저한 보편적인 시선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고백은 강박적으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에 해당하는 것은 보편화한 감시이다. 그러한 감시자 앞의 무고한 고백, 그것이 ‘자기에의 배려’이며 또 ‘파레시아’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회답일까? 무고하며 원시적인 고백은 권력에의 저항거점을 마련해주는가? 결국 자기에의 배려와 파레시아에서 권력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거점을 구하는 것은 ‘철저한 고백은 안되지만, 적당한 고백이라면 좋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철저한 고백이 권력의 효과에 내재하는 것이라면, 적당한 고백 역시 그러하다. 예를 들어, 성실하고 학교 측에 순종하는 극단적인 우등생과 적당히 게으르면서 아쉬운 대로 공부하며 학교 측에 대강 따르는 (그러면서 종종 위반도 하는) 생도의 두 부류가 있다고 치자. 전자는 학교권력에 내재한다. 그렇다면 후자는? 후자는 권력에서 해방되었을까? 극단적인 우등생이 학교 권력에 내재한다면, 적당히 하는—따라서 적당히 나쁜—생도도 그러하다. 그런데 푸코의 말년의 논의는 적당히 하는 생도가 학교의 지배에서 벗어나있다는 제안에 가깝다.

루만은 논리의 귀결에 충실한 실천적인 태도를 채용했다. 그것이 래디컬한 아이러니즘이다. 푸코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이론적인 함의를 철저하게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 권력의 지배에 저항하는 거점을 찾아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불철저로부터 오는 유사적인 저항에 다름 아니다. 진짜 저항도 해방도 거기에는 없다.

 

Ⅳ. 신의 육화처럼

1. 유대교의 반복

이제까지 사회학 이론의 두 정점을 개관했다. 일견 완전히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사회학자, 루만과 푸코. 그러나 두 사람은 완전이 동일한 논리에 따라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발생을 설명하는 이론은 같은 형식을 공유한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 단서가 담론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복잡성 혹은 우유성의 과잉이다. 루만에게서 이 전제는 명시적이다. 푸코의 경우에는 묵시적이지만 동일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단서[복잡성 혹은 우유성의 과잉]의 과잉성을 환원하려는 초월(론)적인 계기가 외부에,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집합 외부에 자율적으로 착종한다고 간주된다. 그 초월(론)적인 계기가 루만에게서는 ‘사회시스템’이며, 푸코에게서는 ‘권력’이다. 그 초월(론)적인 계기, 곧 시스템과 권력은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무력(無力)을 보상하는 반전상(反轉像)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력’이란 과잉의 복잡성을 처리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다른 것도 될 수 있다’라는 우유성을 중화하여 무해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력을 해소하는 계기가 초월(론)적인 외부에 착종된다. 루만도 푸코도 사회의 작동을 이러한 플롯으로 설명했다.

자, 그렇다면 이 논리는 유대교적이다. 종교에 유비하는 것이 느닷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루만과 푸코가 사회학이론에서 활용하는 논리는 고대 유대교의 무의식적으로 발동된 논리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 무슨 뜻인가? 설명해보겠다.

유대교는 인류사상 최초의 엄밀한 일신교이다. 유대인은 인간에 대해 가능한 한 초월론적이며 전능한 유일신을 믿었다. 그런데 일찍이 베버가 주목했듯이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대 유대인의 공동체 주변에는 강대한 제국이 있었고, 그에 비해 유대인은 너무나 유약했다. 유대인은 전쟁에도 끊임없이 패했으며 수시로 침략당하여 급기야 나라가 망해 집단적으로 포로가 되기도 했다. 보통은 불운이 덮치거나 전쟁에 패하면, 그 공동체의 신은 버림받는다. 인간은 번영과 승리를 위해 신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도 마찬가지의 기대를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 그러하다면 유대인만큼의 불운과 패배라면 야훼에 대한 신앙은 당연히 저버려야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것이 베버가 가진 의문이었다.

유대인만큼 고난과 패배를 경험한 민족은 없다. 그런데 유대인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전능의 유일신을 만들어냈다. 어째서일까? 전능의 신이야말로 유대인의 극단적인 유약함을 보상하기 때문이다. 전능의 신은 유대인 자신의 상이다. 단지 그것을 반전하는 상, 유대인 자신의 실태를 거꾸로 뒤집는 상, 유대인과 역접에 의해 대응하는 상이다. 유약한 유대인은 강한 신이라는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외화하여 그것을 초월적인 수준에 착종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유약함은 신의 강함에 의해 보강되고 해소된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이 잇따른 패배와 침략과 이산(離散)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루만과 푸코의 사회학이론은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수준에서 유대교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수준에는 수습하기 어려운 유약함이 있다(과잉의 복잡성, 순치할 수 없는 우유성). 그리고 이 유약함을 반전시키는 초월(론)적 계기, 곧 시스템과 권력이 이 곤란을 해소한다.

2. 신의 육화의 논리

그러나 종교와 사회학이론 간의 이러한 유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기에 사회학이라는 앎에 내재하는 인식상의 이득이 있을까? 있다.

이 유비는 사회학 이론의 두 정점을 넘어서고, 나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상기해보자. 유대교는 완결적이지 않다. 유대교 다음에 기독교가 후속한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 부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전능한 신의 육화라는 착상이다.

사회학이론의 이제까지의 도달점은 유대교의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하다면, ‘신의 육화’에 대응하는 부분에까지 나아간 이론이 있지 않을까? 신의 육화라는 기묘한 이야기 속에 있는 합리적인 핵을 흡수하는 사회학 이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신의 육화’는 유대교의 논리에 무엇을 부가할까? 유대교는 포이에르바하적인 소외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란 인간의 유적인 본질의 외화라고 했다. 이제까지 말한 것과 같이 유일신으로서의 야훼는 확실히 유대인의 유적(공동적) 본질을—반전을 도모하는—외화시키는 것이다. 그 신의 육화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은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공동적ㆍ유적 본질이 ‘신’이라는 형태로 외화될 때 신과 인간 간에는 역접의 관계가 있다. ‘전능한 신’이라는 관념은 공동적ㆍ유적 본질(유약함)을 반전시키는 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접은 본래 인간 그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이며 분열이다. 그 분열 한쪽의 극을 신으로 외화함으로써 인간은 분열을 은폐해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이 인간이 된다. 신 자신에게도 같은 분열ㆍ모순이 내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신’이라는 형식의 분열이 초월적인 신 자체에 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역접이 아닌 순접으로 전화한다. 왜냐하면 ‘인간/신’이라는 분열은 본래 인간 그 자체에 내재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를 쉬운 표현으로 반복해보자. 인간들(유대인의 공동체)은 유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접의 형식으로(반전상이라는 형식으로) 그 유약함을 부정하는 강력한 유일신을 착종한다. 그러나 그 신이 인간이 된다. 즉 신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약하다. 이 인간과 신과의 동일성(‘마찬가지’라는 관계)을 순접이라 했다.

이 육화의 논리까지 조직하는 사회학 이론이 구상 가능할 것이다.

3. 제3자의 심급과 구심화/원심화 작용

마지막으로 나 자신(오오사와)의 사회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논해보고자 한다. 전부터 나는 사회시스템의 질서를 설명한 후에 ‘제3자의 심급’이라는 관념을 활용해왔다. 제3자의 심급은 루만의 ‘시스템’과 푸코의 ‘권력’ 혹은 유대교의 ‘전능한 신’과 등가의 움직임을 갖는 초월(론)적인 계기이다. 이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의 이론 또한 유대교적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신체에 관한 현상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임의의 지향작용은 이중작용의 복합에 의해 성립한다고 생각해왔다. 이중작용을 나는 ‘구심화작용/원심화작용’이라 한다. 세계에 내속하는 신체는 현상을 늘 이 <나>에 구심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구심화작용이다. 이와 동시에 구심화의 중심을 <나>의 외부로 원격화하는 움직임이 활성화한다. 이것들이 원심화작용이다. 이 이중의 작용은 레비나스가 모방했다. <나>가 (<타자>의) 얼굴을 볼 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나>가 타자의 얼굴을 볼 때(구심화작용), <나>는 타자의 얼굴 또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원심화작용).

이 구심화/원심화 작용을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에 대응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하는 요소로 발전할 수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구심화/원심화 작용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조건이다. <나>가 전달하려고 하면, 혹은 <나>가 이해하고자 하면 우선 대상을 <타자>로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것이 또 한 사람의 <나>(또 하나의 자아)이면서 결코 <나>가 동일화할 수 없는 무한의 차이이기도 하다는 모순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 구심화/원심화작용이다.

구심화/원심화작용을 전제로 할 때에는 신체들 간의 간신체적(間身體的) 연쇄가 형성된다. 즉 동일한 대상에 대한 경험을 함께 귀속하는 복수의 신체가 단일한 신체처럼 느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킬 때 그 손가락의 연장선에 있는 대상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 때 하나의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다수의 눈이 마치 하나의 신체처럼 느끼고 수용한다. 이것이 간신체적 연쇄이다.

간신체적 연쇄는 우유적·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상술할 여지는 없지만, 간신체적연쇄는 역접과 부정의 계기를 품지 않으며, 순접적으로 제3자의 심급을 불러일으킨다. 즉 간신체적연쇄는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반전시키지 않고—제3자의 심급으로서 투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서술했듯이 신의 육화의 논리는 인간과 신 사이의 순접관계와 등가였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제3자의 간신체적연쇄로까지 환원할 수 있을 때 육화의 논리를 그 내부로 짜 넣는 사회학이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종래의 사회학 이론의 도달점은 유대교로 진단가능했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여기에 기독교적인 비틈을 가하는 것이다. 신의 육화에 대응하는 계기를 지닌 사회학이론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천적인 함의에 대해서도 말해두고자 한다. 루만은 어떠했는가. 그는 사회변혁을 목표로 삼는 임의의 운동을 아이러니컬하게 조용히 바라보았다. 여하간 운동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들은 편견과 환상에 기초한 운동이기 때문이다(자신들의 상대적인 가치관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오판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다르다. 그는 반대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는 운동에 뛰어들기위해 시대에 뒤떨어진 고대적인 가치관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리스도의 육화의 원리까지 조직화한 논리가 있다면 어떠할까? 그것은 실천에 관해 무엇을 시사할까? 아마 그 원리가 지시하는 운동 역시 실패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올바르게 실패하지 않을까? 즉 지나고 나서 되돌아볼 때 그것이야말로 성공이었다고 여겨지는 형태로 실패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구제자로서 임했던 신이 결국 인간에게서 배신당해 참담하게 사형에 처해졌다. 이보다 더한 실패가 있을까? 인간을 구제한다는 신이 거꾸로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실패야말로 기독교를 일으켰다. 만약 신이 이 만큼의 대실패를 연행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있을 수 없었다. 공전의 대실패야말로 성공을 위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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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2월 17일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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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政事の構造:政治意識の執拗低音」[정사의 구조: 정치의식의 집요저음]

이 논문은 『현대사상』마루야마 특집호 맨 마지막에 실린 것으로 1984년 11월에 행한 마루야마의 강연록이다. 이 강연은 강연에 앞서 출간한 『日本文化のかくれた形』[일본의 숨은 형](1995년 국역본 출간)이라는 책의 보론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일본의 정치구조와 정치사상사의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블로그에는 논문의 번역본 전체를 올리지는 않겠고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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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사(政事)는 일본어로 “마츠리고토”라 읽는다. 일본어의 한자에는 음독과 훈독이 있다. 음독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한자음에서 차용한 것이고, 훈독은 한자로 표기하되 그 일본어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가령 “形”이라는 한자를 한국어에서는 “형”이라 읽는데, 그것은 “모양”을 뜻한다. 그런데 “모양”은 “形”의 기의가 아니라 한국어의 기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자의 훈’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한자의 한국어 기표인 것이다. 즉 일본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되 “かた”[카타]로 읽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고 중국어의 한자발음을 차용한 “형”이라 읽는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한자어 훈독은 ‘중화문화’의 유래와 일본문화와의 습합과정을 밝히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아니,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유발해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시기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번역’에 집착했던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에도시대 중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중국의 한자어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일본주의 혹은 일본정신을 강조하며 “漢心”(카라고코로: 중국식 사고방식)을 배격하려했던 것도 일본의 한자어 훈독이 일본에 유입된 ‘외래사상’을 끊임없기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모토오리 노리나가뿐만 아니라 일본주의 혹은 일본사상을 견지하고자 했던 일본의 사상가들은 모두 그러한 프로젝트에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사상은 ‘진짜는 밖에 있다’는 ‘밖’을 전제하는 사상으로 일본의 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왜곡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 즉 일본정치사상의 ‘집요저음’(*)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집요저음’은 음악학의 용어로 집요하게 반복되는 저음의 음형을 가리키는 basso ostinato의 번역어이다.)

2.

먼저 마루야마는 일본에서 천황제 국가, 곧 야마토 국가(大和国家)가 확립된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율령체제를 받아들이고 당제의 법과 정치의 용어를 유입하면서도 몇몇 용어는 ‘훈독’으로 남겨두었다. 그중의 하나인 “마츠리고토”는 메이지유신까지 “정치(政治)”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마츠리고토”(政事)는 발음이 “祭事”와 같다는 것으로 일본고대의 제정일치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간주되어왔으며 일본의 “국체”가 예부터 존재해왔다는 준거로 제시되어왔다. 그런데 제정일치설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게다가 政事=祭事라면 일찍부터 일본의 고문헌에 “祭事”가 등장했을 터인데 “祭事”가 일본역사에 등장한 것은 헤이안시대 이후이다. 마루야마는 政事를 “마츠리고토”로 훈독한 유래는 “奉仕事”에 있다고 주장한다. 천하의 신하는 천황의 명을 받아 각자의 직무를 다하는 것, 이것은 천하의 “마츠리고토”였다는 것이다. 즉 “마츠리고토”(政事)를 할 때의 주어는 군주가 아니라 군에게 소임을 다하는 신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치구조에서는 정통성의 소재와 정책결정의 소재가 분리되어 이원화된다. “마츠리고토”는 이와 같은 이원화를 보여준다. 정통성은 천신으로부터 이어져온에서 천황에서 주어지되, 결정은 신하의 직무에서 행해진다. 당의 율령제부터 서구의 절대군주제에 이르기까지 최고정치기구는 황제로 표상되어왔다. 여기서 황제를 넘어서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는 행정기구를 직접적으로 예속하며, 예속된 행정기구는 관료제로서의 신하를 말한다. 반면 일본의 천황은 정통성의 층위에는 존재하지만 결정의 층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본정치구조에서 신하는 관료제가 아니라 결정권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에 위치한다. 당의 율령제와 서구의 절대군주제에서 ‘신’은 ‘民’과 구별되며 ‘君’에 엮여 ‘군신’으로 말해지는 반면, 일본에서는 ‘황국신민’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 ‘신’은 ‘민’과 엮인다.

그런데 “마츠리고토”는 상급자에 대한 직무의 헌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정치적 직무를 마친 후의 보고로 행해진다. “마츠리고토”는 야마토로 돌아와 무사평정을 대군에게 보고하는 것이며 그러한 순환의 일단의 완결을 가리킨다. 이때 천황은 “마츠리고토”의 결과를 다만 수리하는 지위에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마츠리고토”는 천황과 신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신과 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치자와 피치자는 →←라는 대립과 지배의 관계로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동방향적으로 직무하는 관계에 놓인다.

3.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주목된 바와 같이 정통성의 층위와 결정권의 층위가 분리되는 패턴은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출현하는데, ‘천황친정’의 외형은 섭정(攝政)과 관백(關白: 天皇를 보좌하여 정무를 총리하던 太政大臣의 중직)이라는 섭관제(攝關制)를 등장시킨다. 섭관제는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츠리고토”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통치자의 배후에는 늘 ‘후견’이 있었다. 이처럼 비공식화 혹은 ‘身内’(“미우치”)화(**)는 결정과정의 복잡한 사태로 이어진다. ‘후견’에게도 ‘후견’이 있다. 이러한 ‘후견’의 존재로 인해 공적지위라 해도 내실은 사적인 가정(家政)기관인 것이다. (**“미우치”(身内)는 일본어에서 자신과 가까운 쪽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측근’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패턴은 무가(武家) 정치에서도 완전히 재생산되어왔다. 막부라는 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치형태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인데, 일본에서만 공가(公家)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무가정권이 발생했다. 물론 일본국 통치의 정통성의 소재는 쇼군이라는 칭호가 조정에서 수여되는 것이 상징하는 것과 같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공가에 있다. 그러나 통치의 실권은 막부에게 있으며 게다가 그 실권은 점점 확대되어 그 반대급부의 효과로 율령제는 명목화된다. 그럼에도 그 막부는 겉으로는 조정에 대해 ‘후견’할 뿐이라고 말한다. 막부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쇼군의 ‘후견’이 존재하며 ‘후견’이 현실의 결정권을 갖는다. 이처럼 결정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집권의 지위 자체는 형식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후견’ 자체가 사화(私化)(***)되는 과정과 같다. (*** 사화(私化)는 결사형성적/비결사형성적의 횡축과 정치적 권위에 대한 구심적/원심적의 종축의 좌표에서 비결사형성적이며 정치적 권위에 대해 원심적인 좌표에 위치하는 개인의 출현패턴을 가리킨다.)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정통성과 결정권의 이원화 경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실권의 하강화 경향과, 또 한편으로는 실권의 “미우치”화 경향이 또 다른 파생적 패턴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사에서 ‘혁명’이 부재한 것을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혁명의 대역을 맡아온 것은 실질적 결정자의 부단한 하강하 경향이며 이러한 권력이 자연적 경향성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통성의 소재와 결정권이라는 의식적 분리 및 그것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하강경향과 “미우치”화경향이라는 일본정치의 ‘집요저음’은 병리현상으로서 결정의 무책임체제로 이어져왔다. 아래에서 위로 규정되는 “마츠리고토”는 결정이 신하에게로, 또 그 신하의 신하에게로 하강해가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불특정의 상급자에게로 무한히 역급(逆及)되는 곳에서 ‘궁극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마츠리고토”의 완료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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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의 저자, 다케우치 요우(竹内洋)는 1942년생으로 역사사회학 및 교육사회학 분야의 연구자이다. 그는 2003년『教養主義の没落』[교양주의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낸 후 마루야마 마사오를 중심으로 한 戰後일본사회론과 '범형지식인'[규범형 지식인]의 관계를 그려내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본서라고 한다. 그래서 [교양주의의 몰락]을 함께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무엇보다 본서는 읽기 쉽다. 다케우치의 주장에 따려면, 어렵게 쓰인 책들의 상당수는 책의 저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케우치 본인 또한 그렇게 많이 당해왔다면서.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케우치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서를 읽은 후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시대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끊임없이 교감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론을 소개하거나 그 이론을 디뎌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할 때에 시대적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이론이거나 이론을 사체화하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론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야말로 시대적 공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가 생성("なる")이 아닌 제작("つくる")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본서의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한편, 여러 변수를 엮어내어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낸다. 우선 다케우치에 따르면, 다이쇼 시대의 구제고교(5년제의 중학교 과정 이후 대학진학을 위한 2년제의 고등교육과정)에서 탄생한 교양주의는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인격의 고양과 사회변혁을 꾀하는 인생관을 가리킨다.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학사회에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사회에 대한 사상적(좌익 혹은 우익의) 개입으로 실천된다. 그리고 저자는 그 바로미터에 마루야마 마사오를 위치짓는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법학부적인 실천활동의 여지도 있으면서 문학부적인 아카데미즘의 향기도 나는 절표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다케우치는 대학장(大學場)의 기능적 측면을 권력장의 지향과 순수아카데미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법학부와 문학부가 각각 전자와 후자를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제국대학"의 역사적 특수성일 터인데, 어쨌거나 테크노그라시를 양산한 법학부와 인문지식인을 배출한 문학부는 각각 대학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양자를 횡단하는 "상징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활력을 얻고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오가며 이상주의=정치주의의 현실화라는 실험을 감행해왔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33세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정치사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저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이 시대적 힘을 얻은 것은 과거에 대한 비평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의 예감에서이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이후 몇년간 이렇다할 논문이 없었고, 마루야마의 첫 저서인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년)의 판매고는 1000부에 그쳤다. 실제로 이 기간동안 마루야마는 폐결핵으로 폐의 한쪽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년)의 출간 이후이다. 이 시기 일본의 대학사회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두고 전학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이 점차 세를 키워갈 때였다. 이들 학생운동세력이 마루야마의 저술을 돌려읽으면서 인텔리의 교양으로서 마루야마가 위치짓게 되었던 것이다. 마루야마는 지식인을 본래의 인텔리와 유사인텔리의 두 층위로 나누고 후자의 유사인텔리가 파시즘의 선봉이 되어왔음을 비판하며 본래의 인텔리로서 지식인에게 대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의 "계몽"의 방식은 지식인의 대중에 대한 교화가 아니라 대중의 스스로 지식인 되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루야마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정치를 말하는 그의 화법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은 미래에 그래야한다라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의 "새로운 정치주체로서의 국민을 그려내는 계몽활동"이며 "대중의 시민화"에 대한 예감이다.

  1960년대 이후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비판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식인 세대의 등장은 바로 마루야마가 예감한 "대중 인텔리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계에 있어서 세대투쟁"은 사회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학이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의 출세를 보장하지 않으며, 대졸인구의 팽창이 대졸 학력자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1960년대 이후 학원투쟁의 중심세력은 대학지식인을 범형으로 하는 문화적 쁘띠부르조아에 동일시하지 않고, 문화부르조아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요시모토 다카하키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대학해체론"과 같이 제도론을 기피하고 정신론을 고집하는 전공투의 대학론과 그 좌익적 언설에서 전전(戰前)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의 일본국가주의로의 회귀를 읽어낸다. 마루야마는 전전 자신이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국가주의"가 전후 정치적 교양주의의 새로운 유행으로 재등장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공투의 파국을 예감했다. 마루야마는 정년 5년을 앞두고 1971년 교수직을 사직한 이후 더이상 "계몽"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만년의 마루야마는 생리적 혐오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전의 "원리일본사"(原理日本社)적인 것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일본정치사상의 고층(古層), 즉 '집요저음'이며, 전후의 좌익학생세력에게서 또 다시 나타나는 파시즘의 원류이기도 하다.  

  다케우치는 교양주의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정치적 교양주의의 신층, 인격적 교양주의=다이쇼 교양주의의 중층, 인생론적 교양주의=번민문화의 고층. 그런데 이 교양주의의 실현의 장으로서 대학은 1990년대 이후 점차 문화자본의 총량을 잃어감에 따라 제 역할을 더이상 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이제 대학은 학생의 프롤레타리아를 넘어서 지식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에 이르렀다. 마루야마라면 이 시대의 대학에 대해 무엇을 말했을까. 그리고 "대학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丸山眞男の時代―大学・知識人・ジャーナリズム』, 中公新書,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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