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維新の精神」을 번역한 것이다. 저작집의 해제에 따르면, 이 논문의 1장과 2장은 잡지 『みすず』 1965년 3월호에, 3장은 1965년 5월호에, 4장은 1966년 7월호에 실렸다. 이것을 1997년 발간한 저작집 4권에 모아 실었다. 각주는 본문의 이해를 돕고자 번역자가 일본위키피디아를 참조하여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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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の精神」[유신의 정신]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1.

  세월 참 빠르다. 이미 ‘메이지’가 끝난 지 50여년이 흘렀다. 일본의 역사적 과정도 이윽고 유신 후 백년의 이정표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일본의 각계에서는 유신백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 ‘행사’들이 어떻게 치러질지는 몰라도, 거기서 울려 퍼질 선율의 한두 개는 이미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해양국 일본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 가운에 어떤 사람들은 백년 전의 ‘해방책’(海防策)[각주:1]과 동일한 모티브를 가지고 노래할 것이다. ‘천황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티브는 ‘조적정벌(朝適征伐)하라’는 예의 목가적인 태평함으로 느긋하게 나아갈 자유를 향한 도전일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개국의 로쿠메이칸(鹿鳴舘)[각주:2] 전통’에 도취한 사람들이 현대적인 정장을 하고 아메리칸 잉글리시를 토해내며 오로지 ‘서양인과의 교제’의 욕구를 충족하려할 것이다. 

  이 여러 모티브들이 함께 구성하는 테마는 유신을 재현하는 ‘명곡’을 이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분명 있겠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터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결합하고 ‘민족의 상징’을 분명히 하면서 ‘국가독립’의 장비를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유신의 테마를 현대에 재현하는 ‘명곡’ 아니던가? 일본의 ‘음악평론가’도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작곡의 기술적 규칙은 넘쳐나고 곡조는 더할 나위 없다. ‘해방책’(海防策)은 ‘건강한 마음’으로 표현되며, ‘로쿠메이칸(鹿鳴舘)적 개국’은 ‘로코코풍의 화려함?’으로 반복출현하고, ‘천황’의 모티브는 ‘상민풍의 토착성’의 ‘민요가’를 덧붙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신의 주제는 그러한 모티브들로 짜 맞춰진 테마일까? 우리는 여기서 ‘유신의 노래’의 모티브를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유신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2.

  유신은 무엇으로 유신일 수 있는가? 그리하여 서두의 ‘노래’의 주제를 구성하는 제1동기는 유신에서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물론 다양한 각도에서 유신의 원리이든 사태이든지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이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신을 일으켰는가? 라고 사람들이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해방책’을 둘러싼 사태의 변천을 개관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해방책’의 대량발생의 계기는 외국선의 도래였다. 특히 막부말기 외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일본국 내의 ‘학자선생’들 대부분은 ‘해방책’을 열렬히 논했다. “토우진”(唐人)[각주:3]들은 방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이는 해안에 “다이바”(台場 에도시대 말기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포대)를 설치하고 대포를 일렬로 배치함’과 동시에 나무 덩굴에 ‘소포’를 숨겨야 한다고 제안했고, 어떤 이는 “토우진”은 대륙전에 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륙시켜서 창이나 검으로 찔러죽이자 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겐코우”(元寇 1274년과 1281년 원군이 일본을 침공한 사건)의 선례와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토우진”의 군함까지 밀어붙이고 군함에 직접 뛰어올라 ‘적’을 전멸시키자고 딴에는 진지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 모습은 광신적인 옛 군부지도자와 같고 또 오늘날의 ‘재군비론자’와 같으며 말하자면 황당무계하여 손톱만큼의 리얼리즘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막부가 가장 정통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막부의 전쟁과 군대에 관한 지식은 저 멀리 여러 번주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그러나 ‘해방책’(海防策)을 둘러싼 이 엉망진창의 갖가지 비난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막번체제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백 가지 천 가지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각주:4]의 사태가 여기저기서 발생한 것이다. 막부에 의한 ‘국론의 통일’은 덧없이 사라졌다. ‘통일적 해방책’이 붕괴하고 제멋대로의 다양한 ‘해방책’이 분출했다. 즉 ‘해방책’이 활황을 맞이할수록 실제의 ‘해방’(海防)은 가장 취약해지고 불안정해졌다. 이미 그것은 체계적 통일성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방비 계획일 뿐 실제로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막번체제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외적인 무방비는 외부로부터 충격을 더욱 세게 직접적으로 받게 한다. 이미 막부체제의 쇄국은 시행할 것까지도 없었다. 나아가 ‘해방책’ 논의의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제멋대로의 논리가 회자되는 속에서 막번체제가 세운 의견의 유통체계는 붕괴되었다. 위에서 위로 의견을 올려 보내면 번주와 막번의 중간관료의 결정을 통해서만 주변으로 전달된다는 이른바 정점을 공유하는 무수한 삼각형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모두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 해체되었다. 당연히 제멋대로의 논의는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삼각형을 더 큰 삼각형으로 통합해가던 막번체제의 의견체계 역시 그에 따라 해체된 것이다. ‘처사횡의’(処士横議)의 금지는 가련하게도 ‘팻말’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횡단적 논의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외의 온갖 경우와 마찬가지로 횡적인 논의의 전개는 횡적인 행동의 전개를 동반한다. ‘횡의’(橫議)의 발생은 ‘횡행’(橫行)의 발생을 도모한다. 번의 경계를 허물고 전국을 '횡행'해갔다. 즉 ‘탈막번’의 낭인이 ‘부랑’을 시작했다. 이제 낭인(浪人)이란 불쌍한 실업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논하고 논쟁하며 연락하며 날뛰었다. 아니, 그들은 그러려고 ‘탈막번’한 것이다. 이른바 그들은 의식적이며 적극적으로 낭인이고자 했다. 옛 낭인처럼 사회체제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구사회를 스스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들에게 낭인이란 이미 불쌍한 존재가 아니며 자랑스러워할 존재였다. 낭인은 막부를 대신해서 ‘천하국가’를 짊어져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분’이 아닌 ‘뜻’만으로 상호 판단하여 결집하는 ‘지사’(志士)가 생겨나고 그들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네이션 와이드의 연결망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었다. 구사회의 체제 내에 신국가의 핵이 생겨난 것이다. 유신의 정치적 한 측면이 이때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러한 횡적인 결집이 결코 ‘존황도막’(尊皇倒幕)의 ‘지사’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바쿠하”(佐幕派 에도막부 말기 막부를 돕자는 일파)의 ‘지사’ 역시 마찬가지의 양태로 사회적 과제를 실현해갔다. 여하간 ‘봉건의 범위를 초월해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행동했다. 막부 말기 유신의 ‘진짜’ 싸움은 이렇게 ‘구태여 봉건군주의 명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양 파벌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쇼우기타이”(彰義隊)[각주:5]이든 “하코다테”(函館)의 군(軍)이든 그들 모두는 ‘지사’들의 집합이었다. 그들은 ‘상경’을 번주에게 제지당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며, ‘일을 성사시키려면 군주를 떠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번 정부는 우리를 도망자라고 보아도 좋다’고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토사(土佐:高知県의 일부지방의 옛 지명)를 출발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1837-1919)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출현한 ‘낭인’과 ‘지사’의 정신형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일단 ‘신분’ㆍ‘격식’ㆍ‘문벌’의 원리를 버리고 ‘뜻’에 따른 결합의 원리를 세우고 나면 횡적인 연결은 다만 사족 사이의 연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기병대’가 생겨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기병대’뿐만 아니다. “보신”(戊辰)[각주:6]에서 초우슈(長州)의 본진(本陣)의 이름도 ‘중의소’(衆議所)였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코뮌’의 이름을, ‘소비에트’의 이름을, ‘인민회의’의 이름을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유신에서 횡적인 결합은 이미 이야기되어온 것처럼 하층무사 이하 민중으로 넓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앞서의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고 각처로 진행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 없이는 ‘사민평등’의 슬로건이 제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뜻’ 곧 이념이야말로 ‘신분’에 대항하여 평등에 복무한다.

  이렇게 보면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답게 만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신을 일으킨 것은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와 ‘낭인횡행’(浪人橫行)과 ‘지사’의 횡단적 결합이다. 바꿔 말하면, ‘해방책’을 포함한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횡단적 논의와 횡단적 행동, 그리고 현세적 지위(status)가 아닌 ‘뜻’을 가지고 모여든 횡단적 연대가 출현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유신은 유신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을 보아도 ‘해방책’ 논의가 비등하기 전부터 이미 앞서와 같은 여러 계기가 점차 성장했고 막번체제의 내적위기는 심화되어갔다. 아니, 본래의 막번체제 자체가 전국의 다이묘(大名) 분국제(分國制)에서 엄청나게 전개된 ‘횡행시대’에서 ‘횡행’의 계기를 모조리 탈각시키고 ‘다이묘 분국제’의 계기만을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횡행’의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상 막번체제는 그 처음부터 어떤 역사적 무리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부체제가 종종 직면한 문제에는 그 역사적 무리수가 전반적으로 크든 작든 노정해왔던 것이다. 그 내포적 위기의 증대의 극치에서 ‘해방책’의 논의가 일어났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횡의’(橫議)ㆍ‘횡행’(橫行)ㆍ‘횡결’(橫結)이 발전할 때만이 유신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본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20세기 후반에 이른 지금, ‘횡’의 토론과 ‘횡’의 행동 형태와 ‘횡’의 연대가 달성되었다고 하면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이룬 것일까? 세상은 이미 자국(自國)만의 세상이 아니다. 자번(自藩)만의 세상이 아닌 것처럼. 유신의 원리를 ‘오늘의 과제’로 살려내고자 한다면, ‘해방책’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본의 상태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소련을 비롯해서 많은 이웃의 국민들과의 ‘횡’의 교류와 연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행동 그대로 시무를 시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말잔치로 끝날 소지가 다분하다. 현재 유신의 ‘해방책’을 답습하는 것은 오히려 유신의 원리를 방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신의 원리를 오늘날의 세계에 살려내는 길은 ‘해방책’의 고사(古事)를 방기해서 ‘비무장’을 관철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 과연 유신에서 오늘날의 ‘비무장’으로 이어지는 방책이 어떻게 제출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그 방책이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 풀어놓은 유신의 원리에 더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원리를 오늘날에 살려내는 길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행한 자가 있다. 게다가 그는 유신최대의 지도자였다. 그 사람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이다. 그는 소란을 피우던 ‘해방책’의 논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생각하라’고. 그는 그렇게 ‘세계보편의 진리’가 왜 중요한지를 설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해보게, 제군. 제군의 큰 소동은 마치 끝나지 않은 전쟁의 휴전상태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강도를 생각하는 고로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경계심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분 나는 대로 공사에 임하면 될까? 국제적 교제에서도 그러한 처방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매한 것이 아닌가. 즉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해와 이득을 따졌을 때 불이익에 큰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상대방이 상대방을 밟으려는 ‘예의’를 행한다 해도 이쪽에서는 그와 똑같이 행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외국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일단 ‘예의’를 실행해본다. 그렇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 ‘격의 없이’ 솔직하게 교섭해봐야 한다. 이쪽이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감에도 불구하고 저쪽이 겉으로만 그런 척을 하고 실제로는 일본을 빼앗으려는 ‘발칙한 행동’을 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의 진리에 등지는 세계 속의 죄인’이기 때문에 그때야말로 ‘진리를 수립하고 일본국의 위력을 떨쳐보여야’하는 것이다(福沢諭吉, 『唐人往來』).

  후쿠자와는 위와 같이 설파했던 것이다. 최근 ‘해양국가’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만약 저 때에 있었더라면 ‘후쿠자와는 파워ㆍ폴리틱스의 실태를 모르는 단순한 도덕주의자다’ 라는 식의 발언을 뽐내듯이 좌담회나 어디서 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후쿠자와는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러한 초보적 개념에 꼼짝 못할 인물이 절대 아니다. 반대로 후쿠자와는 파워로 기능하는 것은 물리적 힘만이 아니고, 윤리와 제 개념과 경제력 등도 큰 파워로 작동된다는 점을 충분히 방법적으로 자각하고 주목했던 선구자였다. 물론 위의 문장에서도 그러한 점이 충분히 고려되고 있다. “분큐”(文久 1861-4년간의 연호)의 상황이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고불역(萬古不易)의 격률(格律)을 제출한다. “세상을 다스릴 때에도 난을 일으킬 때에도 지켜야 하는 것은 세계보편의 진리”라고. 그렇게 “유일의 진리를 지키면서 움직인다면 아무리 적이 대국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함부로 타인의 모욕을 받지 않으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의’가 ‘폭력’에 압도되었던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수많은 예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베트남 하나의 사례만 보아도 분명하다. 아니, 우리들은 중일전쟁의 예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통감의 경험을 가지도 있으면서도 결단의 순간에 감히 전자의 예만을 방패삼아 군사적 폭력을 자국에 허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무능력자라 놀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 정신적 임포텐츠가 어떻게 유신의 전통을 독점할 수 있을까? 보여 달라.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을 다한다”고 했던 후쿠자와의 말은 뜻밖에도 일본국 헌법 전문의 한 구절에 완전히 부합한다. 헌법의 이 원리는 이미 백년 전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에 의해 ‘자주성’으로서 제출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 전통에 영광 있으라, 라고 기원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3.

  서두의 ‘유신의 노래’의 제2모티브인 ‘천황’에 대해서 말해보자. 두말할 필요 없이, 유신에서 ‘천황’의 의미이든 유신의 결과로 태어난 ‘천황제’이든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즉 다각적인 관련 하에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파고드는 분석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다 다룰 수가 없다. 또 여기서의 과제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하려는 것은 유신을 사회변혁으로서의 유신으로 만드는 원리가 ‘천황’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을 검토하는 것이다. 유신에 의한 일본의 신생(新生)이 그것[천황제]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질문에 관해 ‘천황’ 심볼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한 한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앞서 대략적으로 개관하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천황이 있기 때문에 유신의 변혁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천황’은 고대 이래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전통적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 전통적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가치’가 막부 말기와 유신에서 부각된 것일까? 이것 역시 잡다한 질문 중 하나이지만, 한마디로 답한다면 새로운 가치체계의 제시와 ‘전도’(傳道)를 행하는 ‘예언적 리더쉽’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앞서 서술한 ‘낭인’의 ‘횡의(橫議)ㆍ횡행(橫行)’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 새로운 질서로의 통합을 가져야만 하는 ‘지도’가 보편적 가치나 초월적 가치의 ‘예언’을 통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가치의 ‘예언’은 당연히 무엇보다 사람의 내면에 호소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예언의 지도’ 하에 사회적 운동이 전개될 때에 그 운동은 사람들의 ‘회심’을 동반하며 그 ‘회심’을 기축으로 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내면에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면 그 외적 구체화로서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나아가, 바꿔 말해서 이 경우에 사회질서의 변혁은 사회의 가치체계 그 자체의 변혁을 동반한다. 이때 사회질서는 가장 깊은 지점에서 근저적으로 재생한다. ‘막말로우시’(幕末浪士)는 일반적으로 보아 그러한 ‘회심’을 거쳤는가? 노-이다. ‘횡의(橫議)ㆍ횡행(橫行)’은 신분의 해체를 일으켰고 신분사회의 해체는 그들 ‘낭인’에 충성의 대상을 제거했다. 주군에의 인격적인 헌신은 그 대상을 상실하고 헤매었다. 이 내면적 공허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로우시’(浪士)[각주:7] 중에는 그 정신적 공허의 지점에 히라테 미키(平手造酒)[각주:8]나 “신센구미”(新撰組)[각주:9]와 같이, 전략적인 퍼스펙티브를 내던지고 단지 전투만을 전문으로 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탄생시켰다. 또 그들은 그 내면적 공허를 운명으로 체념하고 ‘어쨌거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정신적으로 소극적인 사생활주의도 대량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자포자기의 길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충성대상을 원했다. 그렇게 문제는 이 선택의 기회에서 발생했다. 예를 들어 니이지마 죠(新島襄 1843-1890 교육가 종교가)의 도(途)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 ‘회심’을 거쳐 광대한 세계로 재생하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도(途)는 우주와 세계의 법칙을 파악하고 세계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나와 달리 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강렬한 애국심은 결코 ‘나라’(國)에 얽매이지 않았다. 니이지마 죠에게 충성의 궁극적 대상은 보편신으로 일원화되었으며, 후쿠자와에게는 지성의 우위가 범할 수 없는 수준에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예언’이 되어 전일본의 ‘로우시’(浪士)의 내면에 스며들었던가? 그들의 심리적 욕구에 재빨리 응했던 것은 오히려 눈앞에 있는 전통적인 가치로서 ‘천황’이었다.

  만약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조금이라도 ‘교토’와 밀접하게 연결된 체제였다면 ‘천황’ 심볼이 ‘낭인’의 심리적 욕구에 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번(藩)과 막부에 대한 충성의 소멸은 연쇄적으로 조정에 미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막번체제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즉시 조정에도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또 반대로 막번 체제가 조정을 권위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출하는 체제였다면, ‘낭인’의 충성일반으로의 심리적 결핍은 그렇게까지 경박하게 ‘천황’에 흡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천황’ 심볼은 사회적 가치로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낭인’의 충성에의 심리적 욕구는 간단하게 즉석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생의 충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충성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는, 이른바 내면적 노동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혁명의 이름에 값하는 사회적 ‘회심’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점을 고려하면, 막번체제와 조정의 관계는 ‘낭인’의 심리적 욕구가 기성의 심볼로서 이미 만들어진 ‘천황’을 재빠르게 수렴할 수 있도록 알맞게 기능했던 것이다. ‘천황’ 심볼은 ‘막번’과 함께 무너지기에는 너무 ‘막번’과 떨어져 있었던 데다 당시 그 어떤 ‘낭인’에게도 ‘막번’보다 높고 큰 충성대상으로 바로 떠오를 정도로 유통되고 삼투되었던 것이다. 무가(武家) 체제에 있어서 ⑴ ‘공가’(公家) 세계와 ‘무가’(武家) 세계와의 엄격한 분리 ⑵ ‘무가’와 그의 전통적인 명목상의 ‘존황’(尊皇) 이라는 두 계기의 결합은 해체기에 이르러서 ‘낭인’의 존황열(尊皇熱) 상승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때 막번체제의 전통적 ‘존황’이 극도로 ‘명목화’되어 종종 『甲子夜話』[각주:10]가 말해주는 것처럼 은근히 천황을 깔보았던 막번체제에 애정을 소진한 ‘낭인’이 도리어 존항에게 진심을 다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막번에 분개하고 껍데기만 남은 존황을 공격함으로써, 존황은 진정한 존황이 되었다. 또 이름만의 존황을 추구했던 막부에 대한 도막주의(倒幕主義)가 성립되었다. 이 과정은 막번체제의 가치 시스템이 마침내 역회전을 시작한 것이며, 결코 가치체계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번 체제는 본래 카마쿠라(鎌倉)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스스로의 손으로 실증해가는 자주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요령 좋게 고대의 권위에 편승하여 ‘往夷大將軍에 부임’ 받는 것으로 자기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 결과 이번에는 반대로 고대의 망령이 반역자에 편승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막부제도가 명목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고대의 망령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황열이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번 말기에 이르러 ‘천황’ 심볼의 가치상승이라는 현상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보다 포지티브한 계기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거국(擧國)[闔国]의 상징이라는 계기가 거기에 있다. 물론 그것은 흑선도래의 ‘위기’로 인해 긴급히 요구되었다. 그 시기에 딱 맞는 상징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황국’의 설파는 고대 이래의 시간적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막부체제를 일시적으로 경과하는 역사적 상대화를 꾀했고, 그와 동시에 공간적으로도 번국할거(藩國割據)의 다이묘령국제(領國制)를 넘어설 수 있음을 의미했다. 효과적이라는 측면만을 말하면, 이 정도로 즉효작용을 가진 심볼은 아무리 초근대적인 ‘정신분석학’적 기술이나 ‘사회심리학’적 테크닉을 구사한다 해도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를 대체하고 나아가 훨씬 강인한 내면적 정착성을 가진 사회적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세계와 국민에 의해 반복적으로 점검되고 검증되는 보편주의적 가치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황국’이 거국(擧國)[闔国]을 상징한다는 말은 무엇보다 성구가 맞는다. (‘皇国’과 ‘闔国’의 일본어 발음이 “코우코구”로 같음) 그런데 어조가 지나치게 맞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군에 대한 퍼스널한 충성밖에 모르는 사무라이들은 ‘황국’ 심볼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國) 그 자체에 대한 책임과 충성을 알게 된 반면, 이때 괄호에 넣어진 ‘근대로의 대전환’은 정신구조의 자기변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퍼스널한 충성은 의연하게 퍼스널한 충성 그 자체로 좋았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확대하는 일뿐이었다. 막부 말기의 근왕가(勤王家)는 ‘제 다이묘는 소군이었고 조정은 대군이었다’로 말해지는 종래의 소충(小忠)을 대충(大忠)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메이지가 되었을 때도 정부는 ‘소충소의’의 관행을 타파하여 ‘대충대의’를 만들어낼 것을 선전했다. 이 번드르르한 어조는 그러나 매우 실현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한 충성은 특정의 가문의 특정의 사람에게 향해있을 때야말로 퍼스널한 충성인 것이기 때문에 원래 자유로이 신축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매우 곤란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정부가 되자마자 ‘대교선포’(大敎宣布)하며 일본 중의 신관ㆍ승려를 동원하여 ‘교도직’에 앉히고 ‘기대되는 인간상’의 선전선동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막부 말기 “로우시”에 관한 한 모두 ‘황국’에의 ‘대충주의’가 풍미했고, 현실가능하기 어려운 일이 비교적 간단하게 가능했던 것은 어떤 역사적 전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했던 명목적 존황의 전통 외에 실은 도쿠가와 시대에 ‘주군에의 퍼스널한 헌신’이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이미 순수하게 특정인격에 대한 퍼스널한 헌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주군이란 이미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고 ‘주가’의 ‘상속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번주의 우두머리도 ‘나라 바꿈’에 의해 바뀌었고 이에 따라 낭인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전근’했으며 교설(敎說)도 유교에 의해 ‘율법화’되었으므로 중세무사의 ‘퍼스널한 충성’이 완전히 합리화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적인 제도로 변하여 이동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화된 충성이 ‘법’에의 충성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als ob’(가정)된 ‘퍼스널에의 충’이며 동시에 ‘als ob’(가정)된 ‘법에의 충’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역설적으로 퍼스널한 충의 ‘제도화’ 혹은 ‘율법화’ 혹은 ‘보편화’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충성의 감각은 정부(貞婦)의 서방에 대한 것처럼 특정자에 대한 철저한 충이 결코 아니다. 물론 추상적인 ‘법’에의 헌신은 있을 수 없다. 그냥 딱 ‘황국’에 맞춰진 것이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천황’ 개인에 대한 연정도 아니고, 그러한 탓에 어디에도 편승되는 ‘충성’!?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신상태로 유신을 목표로 하여 시대를 선도했던 지도적 “로우시”(浪士)는 ‘황국’을 확실히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심볼로 자각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는 ‘천하’와 ‘총체’[惣体]가 진정한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의미에서 지도적인 “로우시”에게는 분명 ‘나라’의 의식이 독립적으로 생겨났다. 이 “로우시”는 앞 절에서 논했던 자발적 ‘낭인’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충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심리적 욕구불만의 ‘낭인’은 정신구조에 있어서 전통적인 룸펜적 낭인에 속한다. 여기서 전자[“로우시”]는 후자[‘낭인’]에 충의 대상을 부여함으로써 이것[충]을 조직화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이 ‘지사’들은 충의 대상에 걸맞는 ‘옥’(玉)을 자유로이 조작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천황’은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고 ‘천하’ 그 자체가 아니라면 거국(擧國)[闔国] 그 자신도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각주:11]가 ‘조정이 진력을 다해 각번각심(各藩各心) 혹은 양이(攘夷)라 말하고 혹은 거국(擧國)[闔国]이라 말하고 혹은 개국(開國)이라 말한다. 오늘날 이를 통일하지 않고서는 천하의 와해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 따라서 하나의 모략을 설계하자. 오늘날의 제후의 봉토는 모두 조적(朝敵) 도쿠가와가 수여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으며 천자(天子)의 옥새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크게 명분을 올바로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천하를 세운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하’의 ‘통일’이 목적이고, 다른 ‘명분’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구사되어야 하는 수단이다. ‘조적’이라는 것도 ‘천하의 옥새’라는 것도 장기의 말처럼 조정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황국’을 가장 많이 휘두른 그들이야말로 천황에 대해 가장 충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의 변혁의 정치적 측면을 짊어진 자가 실은 천황에 충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불충으로 ‘모략의 수단’으로서 ‘옥’(玉)을 조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배신의 마키아벨리즘이 탄생함과 동시에 ‘국가’(스테이트)가 전통적 가치와 세간의 권위의 포위로부터 독립하는 사고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열강에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전진하며 대외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권위에의 심리적 연결에서 벗어나 ‘국가’의 이해상황을 리얼하게 판단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의 대외독립은 ‘국가’ 관념의 대내독립 특히 전통적 신조체계로부터의 독립과 분리로 이어진다. “스테이트맨”(Statesman)이란 실은 이러한 사고로 ‘국가’(스테이트)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의 전통적 가치체계에 매달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거의 모든 사고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 유신의 정치적 지도자에서 “스테이트맨”이 탄생했다는 것은 앞서와 같은 내적과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본에서 ‘현실주의’라는 이즘을 물건으로 내다파는 많은 지식인들은 이 ‘정치적 리얼리즘의 정신적 기초’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도리어 종종 정치적 리얼리즘을 상실하고 있다. 리얼리즘 없는 ‘현실주의’라는 골계의 모습은 유신의 정신과는 관련이 없다. 이른바 열광적인 ‘존황’에 유신의 유신다운 근거를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가련하게도 초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스테이트맨”의 탄생이 정치적 측면에서 유신의 원리를 표현했던 것인데, ‘정치가’(政治家)에서 ‘정치적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해도 그에 따라 사회의 가치 시스템이 ‘민주화’로 향하여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스테이트맨”의 정치적 리얼리즘은 전통적 가치를 통합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써 그 결과 그것을 온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의 정신구조라는 국면에서 유신은 “스테이트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기구 밖에서, 즉 ‘정치외의’ 영역에서 거국(擧國)[闔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짊어져왔다. 극도로 목적의식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선택하여 탐구했던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막부 말기의 동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정치적’으로 과열하지 않고 냉정하게 정치사회의 침착함으로 선두에 서서 어쨌든 곧 도래할 유신을 맞이하여 앞서 논했던 이른바 새로운 사회의 “스테이트맨”다운 직분을 맡음으로서 그 준비에만 전념했던 자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정말로 얄미울 정도의 전망과 선택이었다. 당연히 유신의 사회변혁의 큰 부분이 그와 그의 동지에 의해 짊어지게 되었다.

  그 후쿠자와에게 우리의 신성한 거국(擧國)[闔国]의 심볼이 어떻게 다뤄졌는가. 심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황국’이라든지 ‘조정’이라든지 ‘본조’(本朝)라든지 ‘본나’(本那)라는 문자에 궐자(闕字)하는 것을 폐했던 이가 후쿠자와였다. 궐자, 즉 문장 중에 ‘존경하는 심볼’이 나올 경우 문장이 끝나지 않아도 그 앞에 한 글자를 띄어쓰기 하여 그 “존경하는 심볼” 앞에 “천한 심볼”이 위치하지 않게 하는 습성은 전후 일본에서 마침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즉 그전까지 궐자 있는 문장이 범람했던 것이다. 이것은 명목론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결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당연히 막부 말기, 유신 당시에 있었던 궐자는 일반적 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궐자를 행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당할지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관습의 노예’를 거부했던 후쿠자와는 그 궐자를 폐해버렸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궐자가 ‘국법’의 명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국법’이 정해주지 않은 것인데 단지 ‘세간의 선례’라는 것만으로 그것에 ‘따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각주:12]에 찾아가 궐자가 ‘국법’의 규칙인지 아닌지를 묻고 정중하게 절차를 밟아 폐해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기화(奇禍)’를 지혜롭게 막고자 한 후쿠자와의 정 떨어질 만큼 신중한 이른바 비무장방어법을 엿볼 수 있는데, 이와 동시에 ‘법’ 이외의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정신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유신 이후의 그의 후기 저작에 나타난 사유방식이 명료하게 관철되고 있다. 앞서의 구관을 깨는 대범한 지적모험이 극도로 진중한 절차를 거쳐 단행되는 것에도 후쿠자와의 하나의 정신을 볼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나라’의 강제력이 ‘법’ 이외의 어떠한 전통적 권위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거국(擧國)[闔国]은 이미 ‘법’에의 충실을 통해서만이 통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황국’이 반드시 거국(擧國)[闔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황’(皇)의 글자에 궐자를 동반하는 것과 같은 정신에 의해 나라가 통합되는 것은 거국(擧國)[闔国]이 아니었다.

  ‘국가인’(Statesman)에게 거국(擧國)[闔国] 개념은 ‘천황’ 심볼의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가 보기에 이 전통적 심볼이 통합수단으로 남용되었고 그 결과 온존되었던 것이다. ‘세속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후쿠자와는 그 반대로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신란’(親鸞)[각주:13]이 스스로 육식하고 육식의 남녀를 교화했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 문체상에서 오로지 세속의 속문을 철저히 사용했으며, 그 다음에 그의 과제에 반하는 전통적 심성을 단호히 철폐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고귀한’ 단어를 사용하면 그로부터 사회가 고귀하게 된다는 기호의 정신병리는 여기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루하고 속된’ 세속의 문장법에 응함으로써 ‘세속과 함께 문명의 가경(佳境)에 도달하려는 본령’에는 정말로 그가 자신했던 것처럼 카마쿠라 종교개혁의 혁명적 정신이 관철되고 있다. 종교성과는 아무 연고 없는 현세적 인물로 간주되는 후쿠자와의 행동강령의 깊은 곳에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실은 과학의 시대의 신란(親鸞)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 가치의 현세로의 투입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대중종교성’에 대항하는 ‘지성의 대중화’와 ‘대중의 지성화’가 발생된 것이다. 유신을 유신답게 한 것은 ‘황국’ 심볼의 가치의 앙등이 아닌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글을 중단한지 일 년이 지났다. 전술한 것과 같이 유신의 정신은 ‘해방책’이나 군비증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단순한 진통촉진제로 하여 생겨난 바로 ‘횡의’ㆍ‘횡행’ㆍ‘횡결’의 관계에 있었다. 이로써 막번 체제의 사회적 맥락(커뮤니케이션 양식)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적 연결의 구조가 맹아로서 탄생했다. 또한 그러한 횡적인 교류를 그럭저럭 통합해서 국민국가를 건축해낸 것은, ‘횡결’의 지사가 ‘천황’의 상징적 가치를 신앙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유신국가의 스테이트맨이 전통적 가치로서의 ‘천황’ 심볼로부터 내면적으로 해방되었던 까닭에 이 전통적 가치 곧 ‘옥’(玉)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그로부터 국가건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적 근대국가로서의 ‘천황제국가’야말로 실은 ‘천황’에의 신앙으로부터 해방된 자에 의해 처음으로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패러독스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유신의 원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신이 사회에 일정한 변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이 스테이트맨의 원대한 건축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보다도 ‘사람에 다스려지는 소인’의 문명을 중요시함으로써 처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소민’(小民)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야말로 유신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였고, 여기서 ‘정부’와 ‘공무원’[役人]에 위탁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심으로 ‘사회’의 변혁에 노력하는 ‘사회의 스테이트맨’이 탄생하여 초월적 보편가치로서의 ‘문명’이 현세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앞 절에서 논한 ‘줄거리’는 이상과 같다.

  이제 ‘서두’의 제3모티브에 대해 논해야 할 단계에 왔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것을 장황하게 논할 생각은 없다. 사회변혁으로서 유신의 ‘정신’은 군사적 ‘양이’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존황’의 신념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살펴본 지금에 와서는 제3의 모티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음이 이미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권위를 가진 외국’에 대해 단지 ‘환대’(好遇)할 뿐만 아니라 ‘약삭빠름’이 일본사회를 관철하고 있다. 어떤 아메리카의 학자가 말한 것에 따르면,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의 호의적 태도와 일본정부의 약삭빠름’이 서양인과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선의’와 ‘옵티미즘’(optimism)의 시대를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메리카 잡지 『Show Magazine』 1963년 5월호에는 ‘새로운 극서(極西)의 나라 일본’(Japan the New Far West)이란 제목의 특집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과 더불어 그와 나란히 ‘일본정부의 정책’이 일본의 이미지를 ‘극동’으로부터 ‘극서’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이미지의 전환을 아메리카의 『Show Magazine』이라는 잡지가 포착했다는 것은 로쿠메이칸(鹿鳴舘)의 현대판을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극서’(極西)라는 대문자로 쓰인 말에도 일본의 당사자들의 과잉 서비스가 조금씩 스며 나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메이지의 로쿠메이칸(鹿鳴舘)은 실은 이 현대판과는 크게 다르다. 첫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의 교태정책은 현대판처럼 간단하게 성공을 접수할 수가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갈수록 엄중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상황이 곤란해진 탓에 궁여지책으로서 교태정책이 실행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안이한 ‘행복’의 꿈에 부푸는 현대판과는 아무리 닮으려 해도 닮을 수가 없다. 즉 ‘일찍이 조약개정으로 노저어가는 유신이 목적한 대외독립을 어떻게 해서든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어떠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빨리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서는…’이라는 구절에는 어떤 비장하고 초조한 빛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은 국가형성을 짊어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의 결단과 리더쉽 하에 전개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곳에 참가한 일본의 ‘걸’도 그 ‘목표’에 ‘혼신을 다해’ 협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판에서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은 그러한 ‘퍼블릭’한 의식을 가지고 일본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부도 각별의 결단을 가지고 ‘지도성’을 발휘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발의권의 소재를 굳이 묻는다면, 그것은 ‘프라이베이트’한 이해에 의해 구성된 어떤 하나의 ‘풍속’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약삭빠르지 않은’ 정책은 오히려 그 ‘풍속’의 뒷를 쫓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세 번째의 차이점에 도달한다. 즉 로쿠메이칸(鹿鳴舘)에서 메이지 정부의 리더들은 그들이 교태를 부리는 상대에 대해 독립과 대결의 정신을 비록 왜소한 형태로나마 비밀리에 갖고 있었다. 거기서 교태는 자각된 정책이었다. 따라서 그 정책의 기저에는 분명하게 ‘전술’의 의식이 존재했다. 어떤 외국의 역사가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와중에도 유신 이후의 ‘메이지 정신의 특징’인 서양에의 ‘숭배’와 서양에 대한 ‘전술’의 교착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찰은 어떤 측면에서 정곡을 찌른다. 교태의 기저에 전술의 의식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형적인 일본형 부르조아이자 로쿠메이칸(鹿鳴舘)의 당사자의 한사람이었던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각주:14]가 로쿠메이칸(鹿鳴舘) 정치를 에도의 가부키의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각주:15]와 47인의 지사’라는 방탕전술로 덧씌울 수 있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전술의식의 무대를 천박하게 보여준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판 로쿠메이칸의 당사자의 누가 이러한 전술의 전설로서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큰 ‘숭배’가 없다면 또한 ‘전술’의 의식도 없다.

  현대판 아메리카니즘과 로쿠메이칸과의 격차는 이와 같다. 하물며 [아메리카니즘과] 유신과의 격차는 말해 뭐하리. ‘하물며’라는 말은 물론 로쿠메이칸과 유신과의 사이에 어떤 원리적인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이 양자는 어떻게 다른가? 로쿠메이칸 속에 서양에의 ‘찬탄’의 의식과 서양에 대한 ‘독립’의 의식이 교착하고 있다는 그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로쿠메이칸이 어찌되었든 메이지 건설기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그 교착에 있다. 이 교착은 오히려 로쿠메이칸을 유신과 연속시키는 한 측면이다. 유신과의 차이는 이 두 의식의 교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의식의 관계의 방식에 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차이는 한층 내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의 지도적 정신에서 서양에의 ‘숭배’ㆍ‘찬탄’ㆍ‘존경’은 분명히 세상 어느 곳에나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문명의 정신(무형의 문명)이다. 그리하여 ‘독립’ㆍ‘동등’ㆍ‘대결’의 의식은 만국의 ‘권의’에 기초하여 서양열강의 권력성에 대항하며 자각되어왔다. 따라서 거기에는 ‘강적을 염려하면서도 그 나라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태도가 발생한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히 ‘경모’(敬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서양제국의 부강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한 나라의 권위는 추호의 경중함도 없이. 도리를 다하며 꿈꿔왔던 그날에 이르러서는 온 세계를 적으로 두어도 두렵지 않는’ 것이다. 후자의 계기는 문명에 대한 존경을 접는 데에 있지 않고, 전자의 계기는 ‘동등의 권리’를 맹목적으로 자각하는 데에 있지 않다. 따라서 ‘권리’와 ‘상태’의 구별이 적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상태’를 깨달은 자기비판이 성립한다. ‘존경’은 존경할 수밖에 없고 ‘대항’은 대항할 수밖에 없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들의 각 계기는 상호 ‘도리’에 기초하여 각각의 레벨에 위치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은 정신의 제 차원에서 내적긴장을 가지고 공존한다.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정기(正氣)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는 부분의 부당한 확대와 전체의 제 부분으로의 분해라는 이상정신의 특징은 없다. 유신을 이끌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정기의 정신이었다. 정말로 거대한 변혁기에는 거대한 정기가 출현하다. 그것이 없다면, 파괴는 가능할지라도 사회의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

  이윽고 우리는 유신의 정신의 한 측면이 ‘존경’과 ‘적의’를 각각 양립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차원적 사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막부 말기 ‘횡의’ㆍ‘횡행’ㆍ‘횡결’을 만들어낸 정신도 그러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횡의ㆍ횡행을 개시하고 여러 나라의 자발적 결사와 그 중심인물들을 횡적으로 연결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운동가 요시다 쇼우인(吉田松陰, 1830-1859, 에도 시대의 지사이자 교육가)이 ‘자연표류’를 가장해서 그 횡행과정을 세계에까지 확대하고자 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관념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적(敵)의 ‘실체를 알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경우에 그 정신은 전투자의 ‘병학’(兵學)적 고려에 근거했다. 진지한 전투자가 탁월한 ‘적’을 발견했을 때 ‘적’과 자신에 대한 리얼한 인식으로서 적을 존경하면서 적과 대결한다는 태도가 요시다 쇼우인의 마음가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리분별 없이 폭주하는 ‘양이낭인’(攘夷浪人)과도 이질적이며, 이와 더불어 ‘흑선’(黑船)을 보는 즉시 ‘화속’(花束) 등을 선물했던 정신의 ‘쇄국’(鎖國)의 선택과도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말할 것도 없이 요시다 쇼우인에게서 유신의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신의 사회변혁을 지도했던 정기의 정신은 한 측면에서는 분명히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병학적 레벨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전투자의 비체계적인 지혜에 멈춰선 것이 아니다. 사회의 의식적 형성은 여러 종류의 일상의 제 영역에 걸쳐 관철되는 일정한 방법적 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존경’과 ‘적의’가 차원적으로 양립하는 사고는 후쿠자와에게 단계를 상승하여 체계화하면서 문명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앞서 서술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정신은 여기서 결실을 맺는다.

  이제, 앞에서 전술한 구조와 과정을 거친 유신의 정신에 견주어볼 때 로쿠메이칸은 어떻게 ‘타락’했다는 것인가? 이미 밝힌 것처럼 거기에는 ‘숭배’ㆍ‘존경’의 계열과 ‘독립’ㆍ‘대결’ㆍ‘전술’의 계열이 차원의 구별을 잃고 동일차원에서 융합되고 말았다. 바로 그 혼합물이 교태정책이다. 여기에서 ‘숭배’와 ‘존경’의 대상은 이미 추상화된 문명의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유형의 문명’에 불과하다. ‘부강’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동시에 ‘대결’과 ‘전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은 ‘특수 구체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 이미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경’과 ‘적의’도 같은 레벨에서 작용한다. ‘부강’에 ‘존경’과 ‘대결’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전술’의 의식과 뒤섞인 교태였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전술적인 뇌살자의 교태가 아니며, 그렇다고 철저한 연정도 아니다. 앞서 거론했던 ‘외국의 역사가’—로쿠메이칸의 ‘숭배’와 ‘전술’의 교착을 지적했던 역사가—도 로쿠메이칸의 정신적 융합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쿠메이칸의 내면적 구조에서 유신정신의 깊은 그리고 미세한 변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 변질은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의 분리가 완전히 상실될 때, 어떻게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의 입장으로부터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상황을 변혁하고자 하는 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 지점에 민감하지 않은 역사가는 멋진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변질과 그 역동성을 간과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예시한 ‘역사가’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메이지유신』 등에서 자신의 예민한 역사 감각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주목받은 M. 얀센(Jensen)이다. 그의 ‘인간사’에 관한 감각의 예민함에서 세련된 비유는 실제로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물리지 않는 ‘경험적 인간’에 대한 방관적 흥미는 종종 의도하지 않게 초월적 가치로의 무관심을 만든다. 그렇게 초월적 목적으로의 무관심은 역사의 정신적 기저에 있는 어떤 중요한 역동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확실히 초월적 가치로의 경도한 자는 그것만으로도 현실부정의 실천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힘을 결여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적 인간사’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는 실천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식’ 그 자체에서도 중요한 측면을 놓치기 쉽다. 얀센의 예는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얀센이 포착하지 못한, 로쿠메이칸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구별이 상실되었음을 알아채는 순간, 또 하나의 정신적 융합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로쿠메이칸의 지도자에게 ‘공적정책의 선택’이 어느 새인가 ‘사적향락’과 유착되어 본인 스스로도 무서우리만치 무엇인가 구별할 수 없는 조연(躁宴 비의적이며 향락적인 연회)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다. ‘전술’의 자각을 가지고 시작된 교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자체가 ‘결코 재미없지 않기 때문에 다소 당면의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大倉喜八郞). 조약개정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광태가 반대로 당사자에게 ‘재미를 준’ 탓에 어느 새인가 목적이 되어버려 조약개정은 향락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빛깔 좋은 대의명분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무념극한의 것이기에 자기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말았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이다. 문제는 ‘방탕’이 ‘재밌어’지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정신적 처리 상태에 있다. 한 나라의 형성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서는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수단을 자기 목적화하는 것은 셀프-컨트롤의 불완전함에 대한 무념이며, 이를 절치부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도착(倒着)이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해도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원죄 그 자체는 인간의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죄로 의식하는 지점에서 인간적인 태도가 발생한다. 하물며 그들은 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형성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어째서 ‘대중적’ 오르지아시틱(orgiastic)(躁宴)에 도취하여 현실을 잊고만 것일까? 메이지의 정치적 지도자의 정신적 성숙이 이 정도라는 것이 확실히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음주가무’[盆踊り]의 도취를 잊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수염 기른 위인이 소박한 촌사람의 ‘음주가무’에 동참하는 것처럼 풀어내지도 않고 그래서 ‘향락의 연회’에 대한 향수에 대의명분을 주고 현대인의 복장을 하고 만족하는 꼴을 하고 있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에 있어서 ‘공’과 ‘사’의 유착은 그와 동시에 ‘리더’의 ‘대중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에 과욕을 부린 것일까? 그들은 ‘화족제도’를 신설하기까지 ‘노블’이 되고자 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리더’이고자 했고 그와 동시에 ‘대중적 방탕’에도 가담하여 그 즐거움을 향유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에게 요구되는 희생(비용)의 의식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비용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라는 선택의 엄격함에 대한 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의 선택은 동시에 비용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기의 ‘방법’이 자기에 부과하는 비용을 받아들이고 참아내는 자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쿠메이칸에서 아무리 ‘평등조약실현’의 과제를 짊어진 비장한 선택이 작동되고 또 세론의 욕설과 조소와 분개를 참아내는 대외적 용감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유신의 정신이 아니다. 첫째 거기서 요구되는 국제적 평등함은 열강과의 평등에 지나지 않으며 약소국에 대해서는 조금도 ‘권리의 평등’을 자각하지 않았다. 유신의 정신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강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천리인도(天理人道)에 따라 상호 교류를 맺으며, 도의상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도 두려워하며, 도를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평등의식이지 않는가.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식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것과 특수구체적인 사적 욕구 간의 긴장을 스스로의 내면에 내장하고 있다. 따라서 유신의 정신에서는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유착도 공과 사의 정신적 융합도 지도자의 ‘대중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바로 깊은 자기비판에 처해진다. 즉 정신적 융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유신의 처음부터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혼효(混淆)는 존재했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에는 지금까지 서술한 보편적 가치 관념이 한 점으로 존재했으며, 그리하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유신은 사회변혁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지금까지 서술한 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의 교태와 미묘하게 변질된 ‘유신’이 ‘반로쿠메이칸’의 슬로건 하에 정신적 쇄국 무드를 수반한 ‘유신’관을 불러일으켰고 그것들의 교착의 가운데에서 ‘유신’은 점차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변해갔다. 오늘날 ‘유신’ ‘유신’이라고 부르는 목소리 가운데에는 이때 생겨난 이래 반복되고 증폭되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유신’이 잠복해있다.

  그렇다면 만약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가 오늘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보편적 가치로의 ‘존경’과 권력과의 ‘대결’, ‘권리’의 평등과 ‘상태’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늘 긴장하는 정신. 이 정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몸에 익히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계기의 각각은 전후 일본국 헌법이 제도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보증을 다양한 압박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는 나타날 것이다.

 

 

  1. 해방론(海防論)은 에도막부 말기 서방의 일본진출로부터 일본을 보호하자는 국방론을 총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로쿠메이칸(鹿鳴舘)은 1883년 동경에 서방과의 조약 교섭을 위한 사교장으로 건립한 양옥의 이름. [본문으로]
  3. “토우진”(唐人)은 “카라비토”라고도 읽는다. 이 말은 유신시대 때까지 중국과 조선인을 의미했으며, 넓게는 외국인 일반을 가리켰다. [본문으로]
  4. 처사횡의(処士横議 "쇼시오우기")는 제멋대로 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5. 쇼우기타이(彰義隊) 1868년에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쇼군의 경호 등을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 메이지친정부군에 의해 패배 해산했다. [본문으로]
  6. 보신전쟁(戊辰戦争)은 1868년에서 69년에 걸쳐 16개월간 왕정복고를 거쳐 메이지유신을 수립했던 초우슈(長州) 번주 등을 중핵으로는 신정부군과 구 막부세력의 동맹세력간의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보신”(戊辰)은 1968년이 무진년(戊辰年)인 것에서 유래한다. (일본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7. 섬길 영주를 잃은 사무라이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8. 히라테 미키(平手造酒) 에도 시대 막부 말기의 검객. 낭인의 대표적 캐릭터로 가공되어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본문으로]
  9. “신센구미”(新撰組) 에도시대 말기 막부 반대파를 진압하던 사무라이 패거리를 가리키는 말. [본문으로]
  10. 『甲子夜話』(“캇시야와”)는 에도시대 후기 “히젠노쿠니”(肥前国 현재 사가현과 나가사키현에 해당하는 옛 율령국의 하나)의 9대 번주인 마츠라 키요시(松浦清)가 쓴 수필집. 서명의 유래는 마츠라 키요시가 은퇴 은거한 후인 1821년의 갑자년의 밤에 기술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11.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 1833-1877년. 일본의 무사, 정치가. ‘유신의 삼걸’ 중 1인. [본문으로]
  12. 에도 시대에 막부가 만든 양학(洋學) 학교. 동경대학의 전신. [본문으로]
  13. “신란”(親鸞) 1173-1262년. 카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승려.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시조. [본문으로]
  14.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 1837-1928. 메이지, 다이쇼기에 무역, 건설, 화학, 제철, 식품 등의 다수의 기업을 운영했던 실업가. 로쿠메이칸(鹿鳴館), 제국호텔, 제국극장 등을 건설. 도쿄경제대학의 전신인 오오쿠라상업학교의 창설자. [본문으로]
  15.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는 에도시대 전기의 무사. 겐로쿠아코우(元禄赤穂) 사건으로 인해 이름이 알려짐. *겐로쿠아코우 사건은 겐로쿠(元禄)14年(1701年)에 아코우 번주가 에도성의 성주에게서 자상을 입은 후 아코우 번주의 낭인 47명이 심야에 에도성으로 잠입해 에도성의 성주와 단판을 벌인 사건. 오오이시는 그 47인 중의 한 사람. 이 사건은 후에 인형극과 가부키로 유명해졌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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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의 마지막에 실린 마루야마 마사오의 강연록을 번역했다. 일본정치사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지라 번역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일본정치사(사상사가 아니라)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인 것 같다. 독자가 일본어를 몰라도 한자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이 되도록 노력했다. 한번에 쓰윽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장의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글은 전혀 난해하지 않다) 사전지식의 불충분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내려간다면, 마루야마의 논지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연록은 『전집』에도 실려있지 않다. 1984년 11월 마루야마가 행한 심포지엄 <일본사상사를 둘러싼 제문제>에서의 강연을 『百華』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현대사상』1994년 1월호에 다시 실었고 본 특집호에 또 다시 실었다. 마루야마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글이라 판단되고 번역서가 없어 번역해서 올린다. 중간에 빠진 몇 문단이 있다. 추후에 채워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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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事の構造: 政治意識の執拗低音[정사의 구조: 정치의식의 집요저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나는 일본정치사상사라는 분야를 대학 때부터 공부해왔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도 이 분야에 관한 것인데, 오늘의 테마는 비교적 최근에—라고 해도 벌써 10년도 더 지난 것입니다—생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도식 같은 표가 그려진 인쇄물이 배포되었을 겁니다. (도표 A, B) 이 도식들은 “마츠리고토”(政事)[정치]에 관한 일종의 패러다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도식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또 일본사상사의 방법론으로서 이러한 접근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까 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므로 오늘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광고처럼 들릴까봐 심히 우려스럽지만,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와 극작가 기노시타 쥰지(木下順二)와 저 3인이 수년전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좌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같은 대학의 다케다 키요코(武田清子) 씨가 정리해서 <일본문화의 숨은 형(形)>이라는 제목으로 이와나미서점에서 2,3개월 전에 출간했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대학에 있을 때의 강의에서 현재의 사유체계에 이르기까지, 유래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러한 발자취를 서술해놓았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그것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말하자면 거기서 언급했던 문제를 전제로 하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다만 아주 간단하게 그 전제를 요약하면, 넓게 말해서 일본사상사, 협의의 의미에서는 일본정치사상사의 역사적 발전에는 무언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가 있다는 가설입니다. 그 형태를 넓게는 세계상, 더욱 세분하면 역사의식이라든가 윤리의식과 같은 것을 통해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며, 그 하나의 분야로서 정치의식에 대한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강연의 테마입니다. 일본사상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왜 문제로 삼느냐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상 온갖 교의나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등장하는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거의 외래사상입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 메이지 이후에는 리버럴리즘, 데모크라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일본 ‘밖에서’ 들어온 외래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일종의 외래사상 콤플렉스를 갖고 있고, 그 반응으로서 그러한 ‘외래’ 사상에 대항하는 일본적인 세계관 혹은 토착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중 매우 분명한 것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의 이른바 국학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카라고코로”(漢心)를 배격한다 혹은 “호토케고코로”(佛心)를 배격한다는 미명하에 이제까지 외래사상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된, 순수하게 일본적인 사상을 구하고 그것을 국학이라고 말하는 하나의 사상운동입니다. 그것은 학문적으로 특히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등의 일본고전연구 분야에서 매우 큰 성과를 올렸는데, 학문적 성과를 별도로 하고 사상의 족적을 보면 적어도 그것과 비슷한 사유체계는 일본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로 정리되는 교의 내지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말하면, 일본의 사상은 발생학적으로 전부 외국산입니다. 외국산이라고 해서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또 거기에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본이 지리적으로 대륙과 떨어진 섬이고 고대로부터 언어, 인종, 생활의식 등에서 상대적으로 큰 통합을 해왔다는 것과 같은,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정으로 인해 ‘안’과 ‘밖’의 구별에 매우 민감한 의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외래사상 콤플렉스도 그 나름의 역사적 사정이 있는 것인데, 1930년대부터 급격이 흥해왔던 일본주의나 일본정신 등을 강조하는 경향도 역시 그 하나의 변종입니다. 근대일본에 독이 되는 구미사상을 배격한다는 형태로,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영역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일본정신’론이 전쟁 중에 쇠퇴한 것은, 아무래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의 결과인 것 같은데,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이뿐만이 아닙니다. 유교나 불교 혹은 유럽에서 온 기독교, 정치사상으로 말하면 리버럴리즘이나 입헌주의나 데모크라시 등의 갖가지의 보편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항하며 일본적인 세계관이라든가 일본적 정신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하나의 교의로서 구하려는 시도는 에도시대의 국학운동을 포함해서 모조리 실패로 끝났습니다. 국학 또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이데올로기’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국학은 잠시 메이지유신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되었지만 히라타파(平田派) 국학의 운명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일본의 사상사라는 것은 외래사상의 유입사에 불과한 것인가 라고 하면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유학 전공자는 중국의 주자학이 일본에 들어오면 ‘진짜’와 달라지며 일본의 유학자에 의해 왜곡된다고 지적합니다. 혹은 유럽의 리버럴리즘이나 데모크라시가 근대일본에 이식되면 이상하게 변형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일본과 중국의 유학사의 비교연구나 메이지 이후의 밀, 스펜서, 진화론과 사회주의의 이식사에 관한 연구는 그 자체로 큰 테마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교의와 체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일본의 사상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외래사상이므로 ‘진짜’는 ‘밖’에 있다는 전제를 세우고 나면 일본의 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왜곡의 역사에 불과하고 맙니다. 한편에서는 그러한 외래사상에 대항하여 ‘순일본적’인 세계관을 구하려는 노력이 매우 어렵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사상사를 외래사상의 ‘진짜’의 일탈의 역사로 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것들이 그다지 생산적인 포착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령 음악에 비유하자면 주 선율은 거의 전부 외래사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 이식되었을 때 그대로 울리지 않습니다. 매우 같잖은 비유로 들릴까 염려스럽지만, 음악에서는 basso ostinato, 영어로 말하면 바소오스티나토 즉 집요에 반복되는 저음의 음형이 있습니다. 바소오스티나토가 밖에서 들어온 주 선율과 서로 어우러지기 때문에, 음악은 단지 주 선율이 화음을 만들어서 울리는 것과는 다른 울림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수정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곡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띠지만 ‘수정’은 그 자체의 결과로 생각되거나 괘씸하다는 등의 가치판단은 없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세계관이나 교의를 ‘수정’해서 썸 타는... 그렇게 집요에 반복되는 음형이라는 의미에서 ‘바소오스티나토’를 가령의 예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고대로부터 정치의식에 대해 어떠한 ‘집요저음’이 있음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관계상 논리를 비약했고 또 역사적 사례를 충분히 보여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그마틱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여기서 나눠드린 ‘정사(政事)의 도식’(도표 A)을 참조해주세요. 우선 ‘마츠리고토’라는 단어는 ‘정사’(政事)라는 한자에 대응합니다. 이것은 메이지유신 직후까지 대체로 이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현재에는 아시다시피 ‘정치’라는 글자를 사용하지만, 유신 전까지만 해도 ‘마츠리고토’에는 ‘정사’(政事)라는 한자어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정사의 패러다임이 보시는 바와 같이 도표 A인데, 이 패러다임의 기초가 된 것이 율령체제의 확립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띤 일본고대 천황제국가입니다. 5세기경부터 이러한 형태를 갖추었고 대체로 7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확립된 야마토(大和)국가입니다. 어째서 이 시기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율령제의 형성기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의 근대국가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로 외국의 법, 정치, 경제의 체계를 섭취해서 국가의 체제의 대개조를 시행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대화개신(大化改新)[각주:1]과 메이지유신은 일본사에서 가장 큰 양대 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확히 메이지 이후의 정치체제가 유럽의 체제를 모델로 했던 것처럼 율령제는 중국의 당제(唐制)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충실히 모방한 것인데, 반대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잡으면 일본사에서 ‘정치문화’의 변화패턴이 오히려 잘 드러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자는 포네틱(phonetic 음성)으로 사용됨과 동시에 이디어그래픽(ideographic), 즉 표의어로 사용됩니다. 후자는 온갖 훈독을 이릅니다. 훈독은 처음부터 야마토의 언어를 대략 비슷한 한자어에 끼어 맞춘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한자어가 그대로 음독되어 표의문자로서 일본어화하는 경우도 있으며 추상어에는 오히려 그 방식이 많습니다. 여하튼 정치용어에 한해서는 대규모로 한자어를 표의문화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대규모로 당제의 법ㆍ정치의 용어가 유입되었을 때 이것들을 ‘훈독’함에 의해 앞서 말씀드렸던 바소오스티나토도 이 단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즉 정치의 세계에서 문화변용[문화접변]의 일종의 실험장으로서 율령체제의 확립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우리에게 공히 알려져 있는 일본사의 고대문헌을 기초문헌으로 삼아 ‘키워드’를 골라내었습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 『풍토기』, 「祝詞」[각주:2](연희식(延喜式)[각주:3]에 있습니다), 『고어습유(古語拾遺)』, 『만엽집(萬葉集)』 등입니다. 이것들에서 한자는 표음문자(이른바 “만요우가나”(萬葉假名)[각주:4])나 표의문자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사기』와 『서기』를 비교하면, 『서기』 쪽이 좀더 정식의 한문체로 쓰여 있는데, 그래도 표음문자로서 한자어가 원일본어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고 편찬자가 판단하는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한자를 표음문자로 사용하거나 본래의 중국어와는 맞지 않을 것 같은 한어적 표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러한 몇몇 군데는 집요저음을 찾아내는 데에 특히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속일본기』도 전체적으로는 한문체로 쓰여 있지만, 그 속의 「宣命」[각주:5][詔勅]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宣命」는 “미코토노리”(詔)[조칙]의 일종인데, 통상의 조칙은 한문체로 쓰지만, 宣命는 한자를 사용하면서 전체적으로 야마토의 언어로 쓰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고문헌의 읽는 방법입니다. 모토노리 오리나가는 『고사기』쪽이 한자를 표음문자로서 자유롭게 사용했고 변태 한문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카라고코로”에 오염되지 않은 고대일본인적인 사유방식이 『서기』보다 순수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입장에서 그는 『고사전기』(古事傳記)를 일생의 작업으로 완성했습니다. 오리나가의 ‘훈독’은 지금에 와서 여러 비판을 받지만, 뭐라 해도 그의 연구는 획기적인 것이며, 오늘날의 학자도 『고사전기』와 『歷朝詔詞解』(이것은 宣命의 주석서입니다)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연혁으로 말하면, 오히려 『고사기』는 오리나가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간과되었고, 그에 비해 『서기』는 예부터 궁중강독의 전통 속에서 이어져왔으며 교양신도의 바이블이 오로지 『서기』뿐이었던 탓에 주석서도 많습니다. 그런데 『서기』는 오리나가의 『고사전기』처럼 ‘결정타’가 없어서 그 한문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적어도 『서기』의 편찬자들은 어떠한 ‘훈독’을 기대했던 것일까—에 대해, 이설(異說)의 여지가 많습니다. 게다가 내용적으로도 『고사기』가 『서기』와 『속기』의 본문보다도 “카라고코로”(漢心)에 오염된 정도가 좀 더 적습니다, 라고 오리나가가 어떻게 단언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카라고코로에 오염된다’는 것은 현대어로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좀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데올로기성의 존재방식이 두 서적에서 달리 나타난다고 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의 정통성을 변증하는 계기가 강하고, 『서기』는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야마토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보다 전면에 부각됩니다. 이데올로기성이라고 하면 양쪽에 모두 존재하고, 역사서라고 하면 양쪽 다 역사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학적인 것을 오늘 강연의 인용서와 관련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또 ‘훈독’에 대해서도 물론 저는 일본어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략적인 통설만 말해두고자 합니다. 다만 중국 고전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생각될 ‘훈독’ 방식과 문체의 구성에 착목해서 집요저음의 단서를 추출해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서설이 길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잡아먹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정사’(政事)의 어의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본에서 “마츠리고토”(政事)는 “마츠리고토”(祭事)입니다. 제사(祭事)와 정사(政事)의 훈독이 일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국체’는 제정일치다 라는 설명이 예부터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전전(戰前)에 받았던 교육은 물론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훈독’에 근거한 정사=제사라는 논리는 에도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만약 정사=제사라면 제가 앞에서 열거한 고문헌의 어딘가에 ‘祭事’라는 한자어가 빈번하게 나와야하지만, 제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祭事’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것, 즉 후세의 표현으로 말하는 종교적인 제사(祭事)는 처음에 어떤 단어로 표현되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이하이고토”(イハイゴト), “이미고토”(イミゴト), “이츠키고토”(イツキゴト)를 한자로 표현하면 ‘제사’(齊事), ‘기사’(忌事) 등이며, ‘제사’(祭事)가 아닙니다. ‘제’(祭)가 단독으로 동사로서 등장해도 훈독은 “이하이마츠루”(イハイマツル) 또는 “이츠키마츠루”(イツキマツル)입니다. “이하이마츠루”(イハイマツル), “이츠키마츠루”(イツキマツル)와 같은 말은 종종 등장하지만, 그 경우에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하후”(イハフ), “이츠쿠”(イツク), “이무”(イム)의 레벨에 있는 것이지 “마츠루”(マツル)의 레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츠키고토”(イツキゴト)든 “이미고토”(イミゴト)든 정사(政事)(“마츠리고토”)와 훈독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츠쿠”(イツク)라는 것이 고래의 야마토의 언어이며 한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편찬자가 생각했다는 것은 『고사기』의 초출의 몇 군데에 ‘伊都久’의 음독으로 일부러 주석을 붙여 넣은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마츠루”(マツル)라는 야마토의 언어용법은 반드시 종교적 행사에 한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만요우(万葉)의 노래에 자주 나오는 ‘豊御酒祭’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송별연 등 통상의 세속행사의 연회 등에서도 사용되며 술 한 잔을 바친다는 단순한 의미입니다.

  제사(祭事)(“마츠리고토”)=정사(政事)(“마츠리고토”)는 ‘훈독’에서 기초한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은 제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이미 모토노리 오리나가가 『고사전기』에서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마츠루”(マツル)의 어원에 대해 오리나가가 말했던 모든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정사=제사라는 통설적인 등식을 부정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그렇게 “카라고코로”를 배격했던 오리나가가, 유교의 덕치주의에 대해 일본 황실의 혈통에 의한 통치의 전통을 그렇게 높이 삼았던 오리나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 정사(政事)의 “마츠리고토”는 ‘제사’(祭事)에서 온 것이라고 누군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카미즈카사(神祇)의 제사(祭祀)는 오호키미(大君)의 통치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숙려해보면, 정사(政事)(“마츠리고토”)라는 언어의 유래는 제사(祭事)(“마츠리고토”)가 아니고 봉임사(奉任事)(“마츠리고토”)이다. 천하의 신(臣)ㆍ연(連)(“무라지”)[각주:6]가 천황의 명을 받들어 각자 그 직무에 봉임하는 것이 곧 천하의 정치이다. 물론 천황이 신(神)에 봉임하는 것도 “마츠리고토”이며 그 근본은 같다. — 즉 정사(政事)를 한다고 할 때에 주어는 군(君)이 아니라 군에 봉임하는 신(臣)ㆍ연(連)이라는 것이 오리나가의 해석입니다. 과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문헌을 정독한 이는 오리나가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국학이 나중에서야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 에도시대의 국학자ㆍ신학자ㆍ사상가ㆍ의사) 등에 의해 신학으로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을 때, 제사=정사설이 부상한 것인데, 오리나가의 사유방식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고어의 용법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학문상의 방법론으로 일관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의 설명의 신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사(政事)(“마츠리고토”)란 제사(祭事)(“마츠리고토”)이다 라는 어원적 근거에서 제정일치를 일본의 정치적 전통을 말하는 사고는, 제가 보기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의 『神皇正統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설의 발생 시기는 아마도 이세신도(伊勢神道)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세신도 또는 와타라이신도(度会神道)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카마쿠라(鎌倉) 초기에 이세의 외관(外官)의 신관이었던 와타라이(度会) 씨가 내관(內官)에 대해 외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한 동기에서 일종의 ‘신학’을 편찬했습니다. 카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의 신도는 교의상으로는 이세신도의 계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 교의신도는 결국 이데올로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 흐름에서 정사=제사설이 나왔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신들의 제사는 행사가 중심이며 본래 ‘경전’에 준한 것이 아니므로 신도의 ‘교의’를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도 불교나 유교의 세계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외래 이데올로기와의 ‘습합’을 배제하는 오리나가는 당연히 교의신도의 일체의 입장을 부정했고 ‘신도’의 ‘도’라고 말하는 방식 자체도 유ㆍ불의 ‘도’에 대항하면서 후세로 이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리나가가 ‘정사’(政事)에 대해서도 교의신도와 같은 어의적 해석을 배격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제가 오리나가의 주장도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마츠리고토’의 본래의 뜻이 ‘봉임사’(奉任事)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헌납한다라는 의미에서 ‘헌상사’(獻上事)가 ‘마츠리고토’의 더 오래된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豊御酒祭’의 예를 들었는데, 또 하나 만요우집에서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あきつはに にほへる衣 君に奉らば 夜も着るがね”

  이것은 일종의 러브송입니다. 대략의 뜻은 자신이 이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고 당신에게 바친다는, 꼭 밤에도 당신이 이 옷을 입고 잤으면 한다는… 것인데, 이 “마츠루”(‘奉る’)에는 물론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없으며, 봉임한다는 의미뿐입니다. 단순히 옷을 연인에게 ‘바친다’는 것이 “마츠루”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보다 깊은 언어로 말하면 “타테마츠루”(タテマツル)[받들다, 모시다]와 같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행사에 대해 “이츠키마츠루”(斎祭)라는 표현이 사용될 때에도 ‘성스러운 것’의 의미는 ‘이츠쿠’(斎く)[각주:7]라든가 ‘이하후’(祝う)라든가 ‘이무’(忌む)라는 말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행사에서는 아시다시피 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 그것이 ‘이츠키마츠루’의 ‘마츠루’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공물을 헌상하는 것도 ‘마츠루’이며 연인이나 군주에게 헌상하는 것도 ‘마츠루’이며 헌상하는 것 자체에 종교적 의미는 없습니다. 종교적 행사의 주재자를 ‘제주’(斎主) 혹은 ‘신주’(神主)라고 표현하고, 이것을 “이하히누시”나 “카무누시”라고 훈독합니다. (제주라는 한자어도 드물게 나오지만 이 경우에도 통설의 훈독은 “이하히누시” 혹은 “이츠키누시”입니다.) 신들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헌상하는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것’을 한 단계 추상화하면 헌상물, 곧 봉임사(奉任事)가 됩니다. 봉임사를 동사로 훈독하면 “츠카에마츠루”입니다. 그러므로 “마츠르고토”는 ‘봉임사’(奉任事)이다 라는 오리나가설도 ‘마츠루’의 제2의 뜻으로 제출된 의미로 보면,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서비스라든가 서번트라는 어휘에는 “웨이트”(待つ)라는 함의가 있으며 요리를 서브하는 사람을 “웨이터”라고 하는 것도 재밌는 부합입니다. 그러므로 제2의 뜻이라 해도, 봉임을 ‘헌상’한다는 것을 “마츠루”라고 말하며 “마츠루”가 “츠카에마츠루”(任奉)의 약어가 된 것은 그렇게 후대가 아닌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시대에 이미 그러했던 것이지요. 다만 앞서 인용한 만요우의 노래의 경우에서와 같이, 옷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을 헌상하는 의미에서의 “마츠루”가 발생학적으로 더 오래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패러다임을 보면, 여기서는 정통성과 결정이라는 두 가지의 레벨을 구별합니다(도표 A 참조). 도표 A의 어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정통성(Legitimacy)이라는 것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의 정통의 하나의 형태입니다. 즉 통치라는 것을 단순히 발가벗겨진 폭력관계—이것은 영속성이 없습니다—를 넘어서 통치의 대상으로서 신하 혹은 인민에 대한 어떤 사리분별을 갖는 힘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것에 의해 권력으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관념적 근거가 정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스베버의 저 유명한 지배의 정통성의 세 유형—카리스마적 지배ㆍ전통적 지배ㆍ합리적 지배—에서 예의 Legitimitat가 여기서 말하는 정통성입니다. ‘통’(統)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정당성’이라는 번역어를 피했던 것은 정당성과 윤리적인 올바름(Richitigkeit)이 헷갈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복종자가 가치판단으로서 올바른 통치가 아닌데도 통치자의 권력을 조폭이 행사하는 권력이나 폭력과는 다른 무언가의 '사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복종한다는 현실이 있는 한 그러한 현실에 정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결정(decision-making)은 설명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책결정에도 위아래의 다양한 레벨이 있기 마련이고, 한번 최고레벨에서 정책결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정통성의 소재와 정책결정의 소재는 확연히 분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정사’(政事)의 집요저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로 나누어 그 사이의 상호관계를 도식화한 것입니다.

  이 두 레벨의 확연한 분리는 중국과 매우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기까지 ‘절대군주제’와도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령제는 매우 큰 규모로 중화제국을 모델로 하면서, 아시다시피 천황 아래의 “다이죠우칸”(太政官)이라는 최고정책결정기관을 설치했습니다(近江令[각주:8] 이후). 이것은 메이지유신 때에 긴 막부정치가 끝난 후 부활되었는데,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메이지유신의 경우에 역사가들은 “다죠우칸”이라고 훈독하는 것에 반해 옛 율령제 때에는 “다이죠우칸”이라고 훈독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다이죠우칸”이 “카미즈카사칸”(神祇官)과 나란히 천황 아래에 설치되었고, 나아가 그 아래에 관내성(官內省)ㆍ대장성(大藏省) 이하 여덟 개의 성(省)이 설치됩니다. 이 자체가 매우 재밌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당제의 경우에는 황제가 만기(万機)를 통솔하고, 그 밑에 상서성(尙書省)과 문하성(門下省)과 중서성(中書省)이라는 삼성(三省)을 직접 예속합니다. 이 세 성(省)이 각각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므로 넘어가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세 성은 황제에 예속되었고, 각 성을 총괄하는 “다이죠우칸”에 해당하는 직제가 중국에는 없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황제가 천하의 대정(大政)을 총괄한다는 것이 제도상으로도 분명히 표명됩니다. “다이죠우”(太政)에 임하는 관제를 설치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각제도로 말하면 소위 ‘내각’에 해당하는 통합기관이 없고, 황제에 직접행정의 각 성이 예속됩니다. 게다가 중국의 삼성(三省)은 황제의 자문기관이었고, 결정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최고결정의 소재는 어디까지나 황제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도상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최고 정책결정을 언제나 황제가 내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도상의 표명은 어디까지나 ‘일군만민’이며, 모나키(monarchy 단독통치)였습니다. 그런데 야마토의 조정 하에서 중앙집중화를 행했던 일본의 경우, “다이죠우”(太政)에 해당하는 관을 천황(황실)과 각 성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정통성의 원천인 군주와 실질상의 최고결정기관을 제도적으로 분리한다는 하나의 사유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규모로 당제를 모방했지만서도 이 양자의 차이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이원적 분리에 기초한 도식이 만들어집니다. 다음으로 간단히 이 도식의 훈독에 대해 주석을 달아보겠습니다.

  다양한 어휘가 점선과 직선에 따라붙습니다. 직선은 고대의 문서 중에 어떻게 문장이 연결되는가—주어와 술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자동사ㆍ타동사의 용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에 비해 점선은 통치구조의 실질적인 관계와 역할을 나타냅니다. 우선 결정의 레벨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 대신 이하 경(卿)ㆍ군경(群卿)ㆍ대부(大夫) 등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예시적인 것이고 또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만, 여하튼 이들은 ‘정사’(政事)를 하는 주체, 곧 정책결정의 주체입니다. 이들을 통칭해서 “마헤츠키미”(まへつきみ)로 부릅니다. 복수의 군경(群卿)(군신(群臣))도 일반적으로 “마헤츠키미타치”(まへつきみたち)로 훈독합니다. 대신은 보통 “오호오미”(おほおみ)로 읽는데, 좀더 정식의 옛 훈독으로는 “오호마헤츠키미”(おほまつきみ)입니다. 대신에는 아시다시피 좌우의 대신이 있는데, 태정대신(太政大臣)이라는 것은 상설의 관직이 아닙니다. 이 점은 중국의 당제에서 황제의 사전(師傳)의 직을 본뜬 ‘칙투(則鬪)의 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안되”(その人なければすなわち欠く)는 것입니다. 태정대신을 야마도의 언어로 읽으면 “오호마츠리고토노오호마헤츠키미”(おほまつりごとのおほまへつきみ)라고 하는데, 아무리 고대의 정치의 일이 간단했다 해도 태정대신을 일일이 “오호마츠리고토노오호마헤츠키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길고 번잡했으므로 “다이죠우다이신”(太政大臣)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여하튼 대신 이하 모두는 결정의 레벨에 위치하고, 이는 태정관이 “마츠리고토”(政事)의 주체가 되는 이유입니다.

  자, ‘정사’(政事)를 목적어로 해서 어떻게 동사가 이어지는가에 대해서 열거해보겠습니다. 이것도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은 아닌데, 고문헌에서 주요 사례를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a는 “마츠리고토ㆍ츠카헤마츠루”가 됩니다. “츠카헤마츠루”를 표현하는데 어떤 한자어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바로 아래의 괄호 안에 적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동사와 목적어(정사)와의 문장상의 접속관계이기 때문에 직선으로 표시해놓았습니다. “마츠리고토”라고 하면 동사로서 “츠카헤마츠루”와 중복으로 표현되는데, 일본의 고어에서는 이렇게 중복되는 용법이 적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b가 ‘정치를 한다’ 혹은 ‘정사를 행한다’입니다. 이 경우의 동사에는 괄호에서 쓴 것처럼 한자어를 사용합니다. 이것도 “마오수”(まをす)[각주:9]의 동류(同類)를 망라한 한자어는 아니고 몇몇 주요한 것을 뽑아놓았을 뿐입니다. “츠카헤마츠루”나 “마오수”가 실질적으로는 정사를 목적어로 하는 타동사가 되는 의미는 후에 서술합니다.

  c가 ‘마츠리고토를 행한다’입니다. 이 한자에서 쓰인 ‘치봉’(治奉) 등에 대한 어휘는 일본에서 만든 말인데, 제가 보기에, 중국고전에 ‘치봉’에 해당하는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미묘한 조어가 사용되는 것도 후에 서술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마츠리고토”가 기본적으로 헌상사(獻上事)—상급자에 대한 봉임의 헌상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미묘한 한자어가 가능한 것이지요.

  d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통용되기 쉬운 용법입니다. 마츠리고토를 이룬다, 정사를 행한다, 정사를 취한다—이것들은 그대로 현대에도 이해됩니다.

  그런데 e가 현대의 감각에서 이해되는 한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츠리고토를 장악하다’의 내용에 대해서도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f의 ‘마츠리고토에 향한다’(政ことむく) 라든가 ‘정사를 취해 화해를 이룬다’(政事ことむけやはす)는 것은 일반적인 정사(政事)의 집행보다도 조금 특수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지방에서 야마토 조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을 평정한다고 할 때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 바로 밑의 괄호에는 ‘言向’ ‘言趣’ 등이 쓰여 있는데, 이것 또한 중국고전이나 사기의 한문에는 나오지 않는 조어입니다. 물론 ‘화평’(和平)이라는 말이 있지만, ‘언향화평’(言向和平)과 같은 숙어는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어구입니다. 즉 오늘날 “갸루”(ギャル)(걸(girl)의 일본외래어)나 “나이타-”(ナイター)(나이트게임(night game)의 일본외래어) 등의 일본제 영어와 같이 아주 자유롭게 한자어를 구사해서 야마토의 언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설명하면 긴데, “고토무쿠”(ことむく)에서 “고토”(こと)는 그다지 의미가 없으며 접두어 같은 것으로 중요한 것은 “무쿠”(むく)쪽입니다. “무쿠”(むく)라는 것은 “오모무쿠”(おもむく)의 “무쿠”(むく)와 같은 말로,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모무쿠”(おもむく)의 반대가 “소무쿠”(そむく)가 됩니다. “소무쿠”(そむく)라는 것은 “등을 향한다”—즉 얼굴을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토무쿠”(ことむく)가 평정을 의미하는 것은 반란을 일으켜 “소무이타”(そむいた)[등을 보였던] 자를 조정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그 유래가 있습니다. “소무쿠”(そむく)는 자동사이고 “고토무쿠”(ことむく)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주어가 다르게 옵니다(“오모무쿠”(おもむく)는 자동사, 타동사 둘 다 쓰입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는 뿌리가 같습니다. 등을 보였던 자를 “오모무케”(おもむけ) 혹은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하는 것이 천황으로부터 토벌을 명받은 신하관료의 임무가 됩니다.

  f 아래의 참조에 “오모무케”(おもむけ)(風化)라고 쓰인 것은 “오모무케”(おもむけ)라고 할 때에 ‘풍화’(風化)라든가 ‘교화’(敎化)라는 한자어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한자어의 경우, 풍화, 교화에는 매우 윤리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왕자의 덕으로 감화시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모무케”에는 윤리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희박합니다. 오히려 얼굴을 다른 신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는 동방향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구나 구체적으로는 무력토벌이기 때문에 왕자의 덕으로 감화한다 라는 것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격차가 있습니다. 군사력의 행사를 ‘풍화’라는 한자어로 표현한 것은 재밌는 점입니다.

  등 돌린 자를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가 “쿠마소”(熊襲)[각주:10]를 정벌하는 것은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의 전형적인 한 예인데, 평정을 끝내면 야마토 조정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점선으로 표시된 “마이리노부루”(まゐりのぼる)가 됩니다. 더 높은 상급자에게 가까이 간다는 의미가 특히 “노보루”(のぼる)라는 위로 향하는 동사 속에 암시되고 있으며, “마이루”(まゐる)는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가 후세의 속어로 항복한다는 뜻을 ‘参った’(마이따)로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官まいり’의 ‘まいる’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그리하여 관에 참내해서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의 순서가 됩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는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복주(復奏), 복명(復命), 보명(報命)이라는 한자어로 사용됩니다. 이것들은 본래의 한자어로, 일본인이 조어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리나가는 어떤 의미에서 조금 지나치게 엄밀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자어에서 ‘복주’(復奏)라고 할 때에는 황제로부터 무언가의 명을 받아 그에 대해 리플라이—반답(返答)을 주상(奏上)한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고어에서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야마토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한다 라는 구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으로 반답(返答)을 아뢴다는 뉘앙스와는 다른 것이다 라고. 일본과 중국의 언어의 의미의 차이를 아무리 지나치게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고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방에서 지방의 반란을 평정한 후 야마토에 돌아와서 무사평정을 대군에게 보고하는 것이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인 것입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에서 ‘정사’의 사이클의 일단이 완결되는 것입니다.

  ‘정사’의 결정 레벨에 있는 대신이나 경(卿)들이 정치를 “츠카헤마츠”하거나 “마오”했던 것은 모두 보통의 정책결정과 그 집행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해 정통성의 레벨에 있는 천황, 대군, 황제는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경(卿)들이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키코시메수”(きこしめす)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가 천황인 경우에는 정사를 “키코시메수”한다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시로시메수”는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키쿠”(聞く)라든가 “시루”(知る)라는 것은 어찌되었든 감각적으로 외계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작용이며, 거기에서는 수동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정사를 보는 직업의 주체는 대신이나 군경(群卿)들이며, 정사를 보는 대로 그 결과를 “키코시메루” 내지는 “시루시메루”하는 지위에 있는 것이 천황입니다. (세부적인 것을 말하면, 본래 일본에서 정통성을 가진 것은 천황 개인보다도 황실이라는 혈연집단이었고, 언어에서도 ‘천황’이라는 한자어적인 표현은 반드시 지금 직위하는 천황만이 아니라 그 외의 상황(上皇)이나 황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그 용법은 실로 복잡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황제’가 문자 그대로 일군(一君)을 가리키며 복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과도 다릅니다.)

  오리나라가 정사(政事)의 직접적인 주어는 신(臣)과 연(連)(“무라지”)이라고 말했던 것은 지금까지 서술한 바입니다. 경(卿), 대부(大夫)가 행한 정사(政事)를 “키코시메시” “시루시메수”하는 것이 천황(황실)이고 그에 의해 ‘정사’(政事)적 결정권은 정통성을 갖게 됩니다.

  ‘정사’적 결정 레벨과 정통성의 레벨의 차이를 역투사[逆照射]해서 말하면, 앞서 서술했던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가 됩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復奏)는 말할 것도 없이 “마오수”(まをす)(奏ㆍ申)의 하나의 특수적 형태입니다. 그런데 『朝日古典叢書』에서 『고사기』의 주석을 행했던 칸다 히데오(神田秀夫)ㆍ오오타 요시마루(太田善麿)가 찾아낸 것을 보면, 『고사기』에서 “마오수”(奏)라는 글자의 용례 23개 중 14개가 ‘복주’(復奏) 내지는 ‘복주’(覆奏)—즉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입니다. 특히 상권ㆍ중권만을 보면, “마오수”(奏)의 14개의 용례 중 12개가 ‘복주’(覆奏)입니다. 어떻게 ‘복주’(覆奏)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 유명한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 일본신화 속 고대국)의 평정신화에서 고천원(高天原 일본신화 속 하늘신이 사는 곳)에서 먼저 파견된 사자 “아메노호히노카미”(天菩比神), 그리고 뒤이어 파견된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가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의 지배자인 대국주신에 ‘빌붙어’ “카헤리고토마오사즈”(かへりことまをさず)(不復奏)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망명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사자가 파견되었고 드디어 대국주신이 일정한 조건 하에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즉 일본국—의 통치를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서 평화적으로 위탁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만이 아니라 “카헤리고토마오사즈”가 단적으로 불복종 혹은 반역을 의미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카헤리고토마오시”에서 처음으로 ‘정사’(政事)의 사이클이 완료된다고 앞서 말했던 것은 그에 의해 ‘정사’적 집행이 처음으로 정통화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등 돌렸던 자가 조정에 복종하면, 그것을 “마츠로우”(まつろふ)라고 말합니다. 도표 A의 글자 밑에 쓰인 것처럼 귀복(歸復), 귀순(歸順)이라는 한자어가 있는데, 이 경우 한자어의 본래의 의미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마츠로우”(まつろふ)는 “마츠로”(まつろ)와 어원이 같다고 오리나가는 말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국어학상에서는 이론(異論)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고사기』의 “令和平麻都漏波奴人等”에서 麻 이하의 다섯 글자를 읽어보면 주기(注記)한 것과 같이 “마츠로후”(まつろふ) “마츠로하누”(まつろはぬ)라는 특수한 야마토의 단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로 적어도 반란한 자가 귀순하면 결과적으로 대군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것이 됩니다. 즉 귀순해서 중앙정부에 봉임하게 되면, 다른 신하와 관료와 같은 레벨에 서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해서 대군의 명을 받들어 밑에서부터 움직인 ‘정사’를 대군은 “키코시메루” “시루시메수”하고, 이로써 정사는 하나의 사이클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이제 도표 밑에 신하관료가 아닌 일반인민에 관해 보면, “오호미타카라” 혹은 “오호무타카라”, “히토쿠사”, “아오히토쿠사”라고 하는데, 그것은 여기서 예시한 것과 같은 한자어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인민은 중앙의 대군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에 대해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한 관계에 있습니다. 대신, 경들이 천황에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한다면, 이와 마찬가지의 패턴으로 일반인민이 지방 내지는 중앙의 관료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가 →←의 대립ㆍ지배의 관계로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위’로 향하는, 동방향적으로 봉임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지배관계가 없을 리가 없다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어휘관계를 통해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의 레벨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중국사나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인데, ‘신민’(臣民)이라는 숙어는 중국의 문헌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신’(臣)과 ‘민’(民)이라는 말은 각각 존재하지만, 신과 민은 확실히 구분된다고 합니다. 대일본제국신민이라고 할 때에 ‘신민’이 하나의 단어로서 관념되고 있는 반면, 중화제국에서 신(臣)은 군주에 직속된 관료를 의미합니다. 즉 신(臣)은 민으로부터 구별되어 ‘군신’(君臣)으로서 군과 묶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의 오륜에서 ‘군신의 의’는 군과 그에 직속된 관료와의 관계의 규범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군신의 의’라고 할 때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일반인민도 포함해서 군신과 군민 간의 양방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본래 에도시대의 막번(幕藩) 체제에서는 주군이란 직접적으로 번주를 의미하는데, 기본적으로 군과 신 사이에 보호ㆍ충성의 상호윤리가 번주와 일반가신 사이에 통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막번체제가 붕괴하고 메이지에 ‘천황친정’이 부활하면서 율령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료가 대군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패턴으로 일반국민이 황실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동방향성의 원칙이 관철되어 그로부터 '황국신민'이라는 표현이 일반화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므로 이 도표가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중요한 두세 가지의 문제만 말하겠습니다.

  전술했던 것처럼, abcde는 정사(政事)를 목적어로 하는 타동사용법입니다. 예를 들어 b의 “마오수”를 보면, “마츠리고토마오수”라는 표현은 지금의 어감으로 말하면 정사를 누군가가 윗사람에게 아뢴다 라는 의미로 한정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c나 d와 마찬가지로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넓은 의미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주상’(奏上)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중요한 것은 정사의 ‘아래에 대한’ 행동이 “마츠리고토마오수”로서—즉 ‘밑에서 위로’의 주상과 같은 의미로—사용되는 것입니다. ‘신정사’(申政事)라는 표현은 중국의 고전한문에 나오긴 하지만 결코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치봉’(治奉)이라는 표현도 “센묘우”(宣命) 등에 자주 나옵니다. 이것도 실질적으로는 ‘치’(治)와 동일한 뜻을 갖는데, 전술한 대로 중국의 문헌에서 ‘치봉’(治奉)과 같은 단어는 사고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예들은 일본의 경우 정사적 통치는 위에서 아래로의 지배보다는 아래에서 위로의 ‘봉임의 헌상’이라는 측면이 강조됨을 표상하며, 이 속에서 정사의 ‘집요저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마츠리고토ㆍ마오수”의 레벨과 “키코시메수”의 레벨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센묘우”(宣命)의 하나를 예시해보겠습니다. 고닌천황(光仁天皇, 709-782)의 호키(宝亀 일본의 연호 770-780) 2년 2월의 “센묘우”(宣命)로, 『속일본기』에 있습니다. 그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今日よりは大臣の奏したまひし政事はきこしめさずやならむ”

  이것은 좌대신인 후지와라 노나가테(藤原永手)라는 사람이 훙거(薨去)했을 때에 천황이 그것을 매우 슬퍼해서 한 말입니다. “오늘부터는 후지와라의 좌대신이 다녀와서 아뢰던 정사를 천황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입니다. “키코시메사즈”[듣지 못한다]의 주체는 천황이며, “마오수”[아뢰다]의 주체는 좌대신 후지와라입니다. 정사에 대해 이렇듯 “마오수”의 레벨과 “키코시메수”의 레벨의 차이가 짧은 문장 속에서도 매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한가지의 예를 들면, …(중략)…^^;;;

  여기서 나눠드린 종이의 도표 B를 보아주십시오. 이것은 율령제 후의 역사적인 변질과정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이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분리의 패턴이 율령제가 붕괴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마치 결정체를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같은 모양을 하는 것처럼 겹겹이 세분화되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대화개신에 의한 ‘천황친정’의 원칙의 변절은 우선 섭관제의 등장으로 나타납니다. 섭정과 관백(關白)은 이름과 제도 모두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천자가 어릴 때나 병약할 때에 임시로 두는 관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이윽고 사실상의 상설 관직이 되어 후지와라(藤原永手)가 그 자리를 독점했던 것과 같은 실태로 이어졌습니다. 섭관 자신이 “료우게노칸”(令外官), 즉 율령제의 정식의 관직 밖의 관직이 된 것인데, 대체로 율령제의 변질과정은 “료우게노칸”(令外官)이 점점 늘어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내대신(內大臣), 쿠로우도도코로(蔵人所)[각주:11], 참의(參議), 검비위사(檢非違使), 헤이안 시대 이후는 율령제 하의 실권의 소재는 거의 “료우게노칸”(令外官)에게 있었습니다. 좌대신, 우대신이라는 정식의 고관은 이름뿐이었고 정치적 의미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천황친정에서 율령제를 모델로 해서 신체제를 만들었던 메이지 유신의 경우에도 그렇고 참의 등이 태정대관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결정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공식화(informalization)의 경향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당면한 과제로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섭관제가 등장했어도 정통성의 레벨은 여전히 황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섭관을 비롯한 “료우게노칸”(令外官)은 결정의 레벨에 있습니다. 게다가 최고의 결정자였던 섭정백관은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후지와라(藤原永手) 씨는 황실의 외척으로서 섭정의 지위를 독점했는데, 원칙으로는 정통성의 보유자인 천황의 ‘후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후의 일본의 정치과정의 큰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즉 정사(政事)의 정통성을 가진 최고통치자의 배후에는 언제나 ‘후견’이 있었고 리모콘이 있었습니다. 황실의 내부에서는 드디어 ‘원정’(院政)이 등장하는데, 이 원정도 역시 ‘후견’이라 불렸습니다. 원(院)은 상황(上皇)으로, 별명으로는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황’은 결코 단독의 별칭이 아닙니다. 황자나 황녀도 ‘천황’이라 부르는 예가 있습니다. 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상황의 원정(院政)시대에는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현 천황에 있으며 직위를 이양했던 전 천황은 ‘후견’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마치 섭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중에까지 남는 재미있는 또 하나의 집요저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섭관제의 경우에도 원정(院政)의 경우에도 현실에서 실제의 결정자는 섭정, 관백 내지는 원(院) 자신이 아니라는 것, 마치 “료우게노칸”(令外官)에 해당하는 비공식화 혹은 “미우치”(身内)화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비공식화 혹은 “미우치”화는 원(院)의 경우에도 원(院)의 근신(近臣), 즉 측근이 ‘원사’(院司)가 되어 관위가 낮아져도 원의 정사(政事)의 광범위한 실권을 장악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어느 원사는 ‘밤의 관백’이라 할 정도로 실권을 가졌습니다. 섭관의 경우에는 역시 후지와라(藤原永手) 씨의 가정기관인 ‘가사’(家司)가 실질적인 섭관의 이름으로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에 결정과정의 실태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섭관도 원(院)도 천황에 대한 ‘후견’의 지위에 있는 것인데, 그 ‘후견’에도 ‘후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공적지위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사적인 가정기관인 것이지요.

  가사(家司)의 근무지는 “만도코로”(政所)라고 칭했습니다. “만도코로”(政所)라는 명칭은 무가(武家)정치에도 계승되는데, ‘정사’의 구조를 실로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정권의 하강경향을, 또 한편에서는 정권의 “미우치”화, 사화경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턴이 무가(武家)정치에서 완전히 재생산됩니다. 카마쿠라막부가 생겨났을 때, 막부를 『愚管抄』(구칸쇼우)에서는 ‘후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섭정ㆍ백관의 경우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막부는 물론 교토의 조정에 대한 후견자는 그 무엇도 아닌 거의 독립의 권력체였습니다. 특히 본소(本所)ㆍ영가(領家)의 장원령을 제외하고 막부의 가인(家人)과의 관계에서는 교토의 공가(公家)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던 권력입니다. 막부라는 것은 동아시아 지방의 그 어디에서든 볼 수 없는 정치형태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였는데, 일본만이 공가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무가권력이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일본국 통치의 정통성의 소재는, “세이이타이쇼우칸”(征夷大将軍)이라는 장군의 호칭이 조정으로부터 수여되었던 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공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의 실권은 막부에 있으며 게다가 그 실권은 점점 확대되어 역으로 율령제는 명목화해갑니다. 그런데도 그 막부가 원칙적으로 조정에 대해 ‘후견’을 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재밌는 점입니다.

  나아가 이번에는 카마쿠라 막부의 내부구조에 눈을 돌리면, 여기에도 역시 모두들 아시다시피 동일한 정통성과 결정권의 이원적 분리의 패턴이 재생산됩니다. 막부의 ‘쇼군’은 막부레벨에서 정통성의 원천입니다. 그리하여 호조씨(北条氏)가 ‘집권’을 합니다. 집권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기에서 “주재하는”[とりもつ] 관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집권의 직접적 의미는 물론 실권을 ‘잡은’ 자라는 것이지만, 호조집권은 한편으로는 쇼군과 카마쿠라의 가인(家人) 사이에 개입하여 그 ‘사이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고, 또 한편으로는 무가를 대표하여 교토의 공가와의 매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막부는 공가에 대해 ‘후견’의 관계에 있지만, 막부의 내부를 보면 집권은 장군의 ‘후견’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패턴이 겹겹이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쇼군 자신이 명목의 실권자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후지와라(藤原永手) 가문에서 쇼군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권’이라는 공공의 결정자 자신의 역할이 점차 변질되어 갑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고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호조씨(北条氏)의 승계자[家督]를 “토쿠소우”(得宗)라고 합니다. 이것은 호조씨(北条氏)의 이른바 자부심 넘치는 ‘가문’의 통솔자를 가리키는데, 집권정치의 실태는 토쿠소우정치이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집권의 직을 떠났던 전 집권이 현 집권의 ‘후견’으로서 자주 큰 역할을 맡습니다. 마치 상황(上皇) 즉 ‘태상천황’의 경우와 같이, 정식으로는 양위했음에도 불구하고 ‘후견’으로서 현실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패턴과 동일합니다.

  그렇게 “토쿠소우”(得宗)의 가정기관을 ‘내관령’(內官領)이라고 말하는데, 집권에서 토쿠소우정치로의 전화로 말해지는 것의 실체를 보면, 토쿠소우 밑의 ‘내관령’이 점차 막부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즉 권력의 하강화가 여기에서도 “미우치”(身内)화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도표 B에도 써져 있는 것처럼 “미우치”(御内), “미우치가타”(御内方)라는 호칭으로 이어집니다. “미우치”, “미우치가타”는 토쿠소우의 부하이며 토쿠소우의 ‘피관’(被官)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집권의 지위 자체가 원칙화되는 것인데, 그 토쿠소우 정치에서 토쿠소우 또는 전 토쿠소우의 “미우치”, “미우치가타”가 매우 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이지만, 호조씨(北条氏) 시대에 나가사키 타카스케(長崎高資)라는 자가 ‘내관령’(內官領)으로서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增鏡』에는 타카스케의 아버지인 나가사키 엔키(長崎入道円喜)에 대해 ‘우리들의 후견’이라고 하며 ‘이 세상의 대소사가 엔키에 손에 주재되어 계획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견’ 자체가 사화(私化)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가 되면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 있으므로 관동에 ‘관령’(管領)을 둡니다. 타카우지(尊氏)의 아들, 모토우지(基氏)가 관동관령이 되었는데, 그는 ‘관동공방’(關東公方)이라고 합니다. ‘공방’이라는 이름은 막부 중앙에서 한 단계 낮은 직위입니다. 그런데 이 관동공방의 내부에 또 정통성과 결정권의 두 레벨이 분화합니다. 관동공방이 정통성의 레벨에 위치한다면, ‘집권’이라는 관동공방의 부하가 실권자로서 등장합니다. ‘집권’이라는 어휘는 역시 앞서 언급한 ‘주재하다’와 관련됩니다. ‘관령’(管領)은 교토의 막부의 집권에 해당하는 역할명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관령’(管領)의 ‘피관’(被官)의 ‘봉행인’(奉行人)이 큰 권력을 잡게 됩니다. 앞서 서술했던 명령으로서의 교서(敎書)가 ‘봉서’(奉書)인 것과 마찬가지로, ‘봉행’(奉行)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던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任奉)와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습니다. ‘관령’(管領)의 실권이 ‘내관령’(內官領)으로 이행하는 것은 앞서 서술했던 공가(公家)의 내부에서 원정(院政)의 경우에 ‘원사’(院司)가, 섭관의 경우에 ‘가사’(家司)가 실질적인 결정의 역할을 점하는 것과 평행을 이룹니다.

  매우 긴 역사적 과정, 게다가 다양한 사례를 단시간에 급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적 설명으로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염려가 됩니다. 굳이 단순화하면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분리라는 기본적 패턴에서 한편으로는 실권의 하강화 경향이, 또 한편으로는 실권의 “미우치”(身内)화 경향이 파생적인 패턴으로 발생하여, 그것이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도, 막부정치의 변질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겹겹이 재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연적인 경향성을 띠며 일본정치의 집요저음을 이룬다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이 하강한다 해도 정통성의 소재지(locus)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통성 자체의 레벨은 관점에 따라 겹겹이 설정됩니다. 일본전체를 보면 실권이 공허화된다 해도 최고의 정통성은 황실에 있습니다.

  무가정치(막부정치)를 그 자체의 하나의 통치구조로 보면, 정통성의 소재지는 쇼군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통성의 소재를 움직이지 않는 채로 실권이 한편에서는 하강하고 또 한편에서는 “미우치”(身内)화하는 것입니다. 일본사에는 ‘혁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혁명’을 정치적 정통성의 변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혁명의 부재의 대역에 복무했던 것이 실질적 결정자의 부단한 하강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권력의 하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권력의 하강을 방지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연적 경향성은 더욱 강해져왔습니다.

  무라마치(室町) 시대의 중기 이후 ‘하극상’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전국(戰國) 시대는 이른바 하극상의 하나의 극점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오와리”(尾張 옛 지방이름, 현 아이치현의 서부 지역)의 토백성의 신분에서 관백태정대신이 된 것은 ‘하극상’의 극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관백태정대신이 조정에서 내린 칭호라는 것는 ‘하극상’이 진정 정통성의 변혁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1930년대 군부의 내부에서 청년장교들이 들고 일어섰을 때, 이때의 현상을 하극상이라고 부릅니다. 2.26사건은 쇼와 초기 군부의 하극상의 이른바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2.26사건은 일본의 혁명인가? 군부의 조직자체를 변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단지 이 하극상은 ‘올바른 것’을 구실로 군부 전체의 발언권을 강화했을 뿐입니다.

  무라마치(室町)→전국(戰國)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세를 바르게 하고 ‘천황태평’을 이룬다는 깃발 하에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도막부는 ‘하극상’의 경향을 막으면서도 정통성의 최고의 소재인 황실(공가)에는 조금도 손대지 않고 그 대로 그 실권을 거의 기하학상의 ‘점’에 비교될 만큼 극소화했습니다. 에도막부의 역사의 경우는 오늘 생략하지만, 에도막부는 권력의 하강경향을 막기 위해 실로 교묘한 장치와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미우치화”(身内化) 혹은 사화(私化)의 경향은 오히려 친번(親藩)ㆍ보대(譜代)와 외양의 구별에서 보이는 것처럼 권력하강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엄중한 통치의 메커니즘과 신분제도 하에서도 “소바요우닌”(側用人)[각주:12]의 대두와 같은 하강화현상이 권력의 비공식화와 함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에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통성의 소재와 결정권의 의식적 분리, 그리고 거기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하강화 경향과 “미우치화”(身内化) 경향—이 경향은 당연히 정기적으로 제도적 ‘시정’이 행해지는데—이라는 일본의 정치의 ‘집요저음’이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던 “마츠리고토”(政事)라는 말에 관한 도표 A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요약하고자 합니다.

  정사(政事)가 상급자에게 봉임의 헌상사를 의미한다는 것은 정사(政事)가 이른바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서양이나 중국의 경우와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버먼트(government), 지배자(ruler)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성을 가지는 표현입니다. 중국의 고전에서 ‘정’(政)의 용법은 한두 개 예시하면, …(중략)…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성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에서 ‘정사’(政事)는 “마츠루”=헌상한다 로써 신(臣)의 레벨에 있으며, 신(臣)의 경(卿)이 행하는 헌상사를 군(君)이 “키코시메수”=받아들인다 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일견 역설적인 것은 정사(政事)가 ‘아래로부터’ 정의된다는 것이고, 결정이 신하에게로, 또 그 신하에게로 하강해가는 경향과 무관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리현상으로서 결정의 무책임체제가 되며, 감히 말하면 전형적인 ‘독재’ 체제의 성립을 곤란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 도식은 정사(政事)를 하나의 사이클로 묘사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니지만, 천황자신도 실은 황조신에 대해 “마츠루”라는 봉임=헌상관계에 있어 아래로부터 위까지 “마츠리고토”(政事)가 동방향적으로 상승하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절대적 시점(최고통치자)으로서의 ‘주’(主)는 엄밀히 말해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서기』의 한 구절에는 국조(國造)를 끝낸 “이사나키노미코토”(イサナキノミコト)가 ‘하늘에 올라 “카에리고토마에수”’한다고 써 있습니다. “이사나키”가 천신의 누구에게 “카에리고토마에시”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일단의 사이클의 ‘완료’로서 설명해드렸지만, 엄밀히 말해 사이클의 완료는 없습니다. 무한의 불특성의 상급자에게 소급될 뿐이며, ‘궁극의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덧붙여놓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대화개신은 아수카(飛鳥)시대 코우도쿠텐노(孝徳天皇) 2년(646년)이 발포한 “카이신노미코토노리”(改新の詔)에 기초하여 시행된 정치적 개혁을 말한다. 호족(豪族)과 사민(私民)의 토지를 걷어 들여 천황의 공지(公地)로 하고, 지방행정구역을 군과 현으로 정비하고, 호적(戶籍)과 계첩(計帖)을 작성하여 공지를 공민(公民)에게 대여하고, 공민에게 세와 노역을 부담하게 하는 제도로 개혁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2. “노리토”(祝詞)는 제사의식을 할 때 소리 내어 읽는 말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헤이안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4. 고대에 일본어를 표기하게 위해 한자를 차용해서 만든 글자. [본문으로]
  5. 고대 일본어의 이두체로 쓰인 조칙. [본문으로]
  6. 고대 일본에서 신(臣)과 함께 정치에 참여한 명가(名家)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7. 목욕재계하고 신을 받든다는 고대 일본어. [본문으로]
  8. 오우미료우(近江令)는 아수카(飛鳥) 시대(592-710)에 제정된 법령체계. [본문으로]
  9. “まをす”[申す]는 정사에 종사하다는 뜻. [본문으로]
  10. 고대 야마토 정권에 저항했던 규슈 남부의 부족명. [본문으로]
  11. “쿠로우도”(蔵人)가 집무하던 관청. “쿠로우도”(蔵人)는 일본의 율령제 하의 “료우게노칸”(令外官)의 하나. 천황의 비서역할을 맡았다. [본문으로]
  12.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직명의 하나. 쇼군(将軍)의 근시(近侍)로서 노중(老中)과 쇼군(将軍) 사이를 중개하는 소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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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丸山眞男セレクション』[마루야마 마사오 셀렉션](2010년 4월, 平凡社)에 실린 「二十世紀最大のパラドックス」[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라는 제목의 강연록을 번역한 것이다. 이 강연록은『전집』 9권에도 실려 있고, 최초의 출처는 본 글의 끝에 기재해두었다. 한국에 번역된 마루야마의 단행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아, 예전에 <마루야마 강독회>를 하면서 번역해두었던 것을 올려둔다. 

  강연록은 글의 내용을 보건대 8.15 패전의 날을 기념하여 행해진 것 같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그의 '전후 민주주의'론을 이해해볼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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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오늘 이 집회에 오기 전에 다마묘지(多摩墓地)에 다녀왔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기 죄송한데, 8월 15일은 제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제 어머니는 쇼와 20년(1945) 8월 15일 패전의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군인으로 히로시마시의 우지나(宇品)에 있었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매년 8월 15일이라는 날은 매우 복잡한 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날은 조용히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실은 저는 개인적인 체험이나 실감을 공공의 장소에서 말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8월 15일에 대해서 무언가 말해야 한다면 그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빼놓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전후 어느 때에 ‘아, 나는 살아있는 건가’라고 문득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제가 아슬아슬한 우연에 의해 전후에까지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 가혹한 전쟁을 빠져나온 국민들 중에서 어쩌면 저와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의 경우 특히 그 실감을 지탱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패전 직전의 원폭입니다. 제가 있었던 히로시마시의 우지나 마을은 바로 원폭투하 지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또 그 직후에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광경을 여기서 말할 기분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매우 많은 ‘만약’—만약이었다면 나의 생명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전후에 없었다 라고 느낍니다. 말하자면, 무수한 ‘만약(가정)’의 사이를 메워 오늘날 살아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지나 마을은 히로시마시의 남단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해상에서 침입해오는 B29의 원폭탑재기에 타있던 아메리카 병사가 1분 일찍 버튼을 눌렀더라면, 그 순간에 저의 몸은 증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 시각은 매일 아침 점호할 때였고, 우리 부대에는 사령부의 매우 높은 탑이 있었고, 버섯구름은 마치 그 탑의 바로 뒤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희는 그 높은 탑이 열의 직사 혹은 맹렬한 폭풍을 상당부분 차단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만약 실내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 방을 그 직후에 들어가 보았는데, 참담한 광경이었습니다. 창유리는 모두 파편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었고, 입구의 문은 경첩이 부서져서 실내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탁자는 뒤집혀져 서류는 마루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당번으로 혼자서 실내에 남아있던 장교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다음다음날, 제가 우지나 마을로 외출했을 때 우지나 마을에도 사상자가 많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저는 방사능 같은 것에 무지하기도 했거니와, 그 날 하루 종일 원폭 중심지 부근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외, 그 외의 ‘만약’을 생각하면, 저는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로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요즘 허망이라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실은 저의 자연적 생명 자체가 무언가 허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살아있습니다. 아, 나는 살아있구나 라는 돌연한 생각과 더불어,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남은 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은 전우에 대하여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저기서 말해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신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좀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몇몇 노래를 지었습니다. 아가씨시절의 수십 년 외에는 노래를 짓지 않았지만, 죽음 직전에 무슨 영문인지 그러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그 노래들에는 출정하는 저를 배웅하는 노래가 한두 개 있습니다. 매우 죄송스럽지만, 그중 일부를 여기에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름을 받아 떠나간 아들을 병상에서 울며 그리워하는 불충의 엄마야.” 저는 이 가사가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병상에서 천황각하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가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이지에 길들여진 어머니의 규범의식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정의 날 아침의 이별을 떠올리며 우는 자신—자신은 불충의 엄마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라는 마음, 그래도 자신은 불충이라도 이 끊을 수 없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분열된 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에 길들여진, 자식을 전쟁에 보낸 수많은 어머니의 공통된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쇼와 초기에 소년시대를 보낸 제게 천황제에 대한 느낌은 이미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생 때부터 우선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당시의 실천운동에 관계하는 대체성에도 맞지 않았으며, 겁이 많은 저는 그러한 생각에 도무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봄 <유물론연구회>라는 단체의 집회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고등학생이 딱 둘뿐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대학생이나 사회인이어서, 제가 상당히 운동의 대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이 실은 나중에까지 특고(特高)[각주:1]와 헌병대와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맨 처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특고가 제게서 몰래 가져간 일기를 앞에 두고 취조를 받았습니다. 일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종이가 끼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빼내면 안되는데, 그 중에 1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자신의 신앙을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국체(國體)는—국체란 것은 젊은 여러분을 위해 한마디 말씀드리면, 체육에서의 국체가 아니고 오늘날의 단어로 말하면 천황제입니다—일본의 국체는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되고 있는 것일까’. 저는 단지 의문형으로 썼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패전할 때까지 혹은 패전의 직후에까지 천황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준열히 취조했던 특고가 빨간 종이의 군데군데를 가리키며 너는 천황제를—아니 천황제라고 말하지 않고 군주제라고 했습니다—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때부터 갑자기 맹렬한 욕설과 철권이 나를 엄습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고자이 요시시게(古在由重 1901-1990, 일본의 철학자) 선생 등이 말했던 어마어마한 체험과 비교하면, 그 시절의 저의 체험 따위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전전(戰前)의 일본 체제를 특징짓는 하나의 사상적 의미를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고가 회의와 부정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반드시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뭐라 해도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의심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의 ‘지지’이며,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선택할 기회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선택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그러한 성질의 ‘지지’인 것입니다. 무릇 부정을 피해가는 긍정입니다. 그것은 결코 전쟁 중의 군국주의 시대만의 것이 아닙니다.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가 본래 그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의 다수가 전후의 천황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것에는 그 ‘지지’의 사상적 의미가 전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언제라도 부정할 권리가 보증된 하에서의, 일정한 정치형태의 ‘지지’입니다. 이것이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민주권의 원칙의 채용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전회의 사상적 의미입니다. 그 두 개의 ‘지지’ 사이에 가로놓인 논리적인 단절과 그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전전에도 전후에도 어떤 말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민주주의는 허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는 논의가 무성합니다. 저는 안락한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 전후의 민주주의는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거나 평화헌법은 정말 실없는 소리이다 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뭐 좀 안다는 사람의 어조를 매스컴에서 보면 솔직하게 말해서 혼자 들떠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전후 민주주의나 일본국 헌법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가 제출되는 그 자체는 대단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전(戰前)에 대일본제국 헌법은 허망한 것이다 라고 떠들어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잠깐 잡혔다 풀려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일생, 국가권력에 의해 어디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줄곧 감시당하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겠지요. 전후 민주주의가 허망하다라든지 평화헌법은 별거 없다 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전후 민주주의가 무엇보다도 대일본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에서는 역설이라고 할까요, 파라독스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극한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한상황에서는 역설적 진리가 종종 출현합니다. 아시다시피, 논어나 성서라는 고전의 곳곳에는 파라독스의 형태로 인생의 가르침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는 극한상황에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가, ‘최후의 것이 최초가 될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명제입니다.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그러한 ‘이상’(異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이로하가루타(イロハガルタ) [각주:2]속에서도 ‘급하면 돌아가라’라든가 ‘거짓말에서 나온 진실’이라든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처럼 역설적인(paradoxical) 명제가 다양하게 있습니다.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것은, 두 지점 간의 최단거리는 두 지점 간을 연결하는 직선에 있다는 기하학의 명제에서 보면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역설의 진리를 인정하는 기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만 보통의 형식논리만을 가지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지는 것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저는 8․15가 가진 의미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에 있었던 일본, 즉 가장 늦게 구미의 제국주의를 추종했다는 의미에서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이었던 일본이, 패전을 계기로 평화주의의 최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였다—그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世界』1965년 10월호, 岩波書店)

 

  1. 특별고등경찰의 줄임말.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천황암살계획인 대역사건을 받아, 1911년 경찰청에 종래 있었던 정치운동대상의 고등경찰에서 갈라져, 사회운동대상의 특별고등경찰과를 설치했다. 이것이 특별고등경찰의 시작이다. 1945년 10월 4일, 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2. イロハガルタ(伊呂波歌留多) 이로는 47자(히라가나 47자)를 한자씩만 넣어서 읊은 7․5조의 노래와 경(京)을 첫 글자로 한 속담을 적은 48장의 딱지와 그 내용을 그린 그림딱지 48장으로 된 딱지놀이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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