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政事の構造:政治意識の執拗低音」[정사의 구조: 정치의식의 집요저음]

이 논문은 『현대사상』마루야마 특집호 맨 마지막에 실린 것으로 1984년 11월에 행한 마루야마의 강연록이다. 이 강연은 강연에 앞서 출간한 『日本文化のかくれた形』[일본의 숨은 형](1995년 국역본 출간)이라는 책의 보론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일본의 정치구조와 정치사상사의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블로그에는 논문의 번역본 전체를 올리지는 않겠고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다.

-----------------------------------------------------------------

1.

정사(政事)는 일본어로 “마츠리고토”라 읽는다. 일본어의 한자에는 음독과 훈독이 있다. 음독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한자음에서 차용한 것이고, 훈독은 한자로 표기하되 그 일본어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가령 “形”이라는 한자를 한국어에서는 “형”이라 읽는데, 그것은 “모양”을 뜻한다. 그런데 “모양”은 “形”의 기의가 아니라 한국어의 기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자의 훈’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한자의 한국어 기표인 것이다. 즉 일본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되 “かた”[카타]로 읽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고 중국어의 한자발음을 차용한 “형”이라 읽는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한자어 훈독은 ‘중화문화’의 유래와 일본문화와의 습합과정을 밝히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아니,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유발해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시기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번역’에 집착했던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에도시대 중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중국의 한자어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일본주의 혹은 일본정신을 강조하며 “漢心”(카라고코로: 중국식 사고방식)을 배격하려했던 것도 일본의 한자어 훈독이 일본에 유입된 ‘외래사상’을 끊임없기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모토오리 노리나가뿐만 아니라 일본주의 혹은 일본사상을 견지하고자 했던 일본의 사상가들은 모두 그러한 프로젝트에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사상은 ‘진짜는 밖에 있다’는 ‘밖’을 전제하는 사상으로 일본의 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왜곡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 즉 일본정치사상의 ‘집요저음’(*)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집요저음’은 음악학의 용어로 집요하게 반복되는 저음의 음형을 가리키는 basso ostinato의 번역어이다.)

2.

먼저 마루야마는 일본에서 천황제 국가, 곧 야마토 국가(大和国家)가 확립된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율령체제를 받아들이고 당제의 법과 정치의 용어를 유입하면서도 몇몇 용어는 ‘훈독’으로 남겨두었다. 그중의 하나인 “마츠리고토”는 메이지유신까지 “정치(政治)”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마츠리고토”(政事)는 발음이 “祭事”와 같다는 것으로 일본고대의 제정일치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간주되어왔으며 일본의 “국체”가 예부터 존재해왔다는 준거로 제시되어왔다. 그런데 제정일치설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게다가 政事=祭事라면 일찍부터 일본의 고문헌에 “祭事”가 등장했을 터인데 “祭事”가 일본역사에 등장한 것은 헤이안시대 이후이다. 마루야마는 政事를 “마츠리고토”로 훈독한 유래는 “奉仕事”에 있다고 주장한다. 천하의 신하는 천황의 명을 받아 각자의 직무를 다하는 것, 이것은 천하의 “마츠리고토”였다는 것이다. 즉 “마츠리고토”(政事)를 할 때의 주어는 군주가 아니라 군에게 소임을 다하는 신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치구조에서는 정통성의 소재와 정책결정의 소재가 분리되어 이원화된다. “마츠리고토”는 이와 같은 이원화를 보여준다. 정통성은 천신으로부터 이어져온에서 천황에서 주어지되, 결정은 신하의 직무에서 행해진다. 당의 율령제부터 서구의 절대군주제에 이르기까지 최고정치기구는 황제로 표상되어왔다. 여기서 황제를 넘어서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는 행정기구를 직접적으로 예속하며, 예속된 행정기구는 관료제로서의 신하를 말한다. 반면 일본의 천황은 정통성의 층위에는 존재하지만 결정의 층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본정치구조에서 신하는 관료제가 아니라 결정권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에 위치한다. 당의 율령제와 서구의 절대군주제에서 ‘신’은 ‘民’과 구별되며 ‘君’에 엮여 ‘군신’으로 말해지는 반면, 일본에서는 ‘황국신민’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 ‘신’은 ‘민’과 엮인다.

그런데 “마츠리고토”는 상급자에 대한 직무의 헌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정치적 직무를 마친 후의 보고로 행해진다. “마츠리고토”는 야마토로 돌아와 무사평정을 대군에게 보고하는 것이며 그러한 순환의 일단의 완결을 가리킨다. 이때 천황은 “마츠리고토”의 결과를 다만 수리하는 지위에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마츠리고토”는 천황과 신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신과 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치자와 피치자는 →←라는 대립과 지배의 관계로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동방향적으로 직무하는 관계에 놓인다.

3.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주목된 바와 같이 정통성의 층위와 결정권의 층위가 분리되는 패턴은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출현하는데, ‘천황친정’의 외형은 섭정(攝政)과 관백(關白: 天皇를 보좌하여 정무를 총리하던 太政大臣의 중직)이라는 섭관제(攝關制)를 등장시킨다. 섭관제는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츠리고토”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통치자의 배후에는 늘 ‘후견’이 있었다. 이처럼 비공식화 혹은 ‘身内’(“미우치”)화(**)는 결정과정의 복잡한 사태로 이어진다. ‘후견’에게도 ‘후견’이 있다. 이러한 ‘후견’의 존재로 인해 공적지위라 해도 내실은 사적인 가정(家政)기관인 것이다. (**“미우치”(身内)는 일본어에서 자신과 가까운 쪽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측근’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패턴은 무가(武家) 정치에서도 완전히 재생산되어왔다. 막부라는 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치형태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인데, 일본에서만 공가(公家)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무가정권이 발생했다. 물론 일본국 통치의 정통성의 소재는 쇼군이라는 칭호가 조정에서 수여되는 것이 상징하는 것과 같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공가에 있다. 그러나 통치의 실권은 막부에게 있으며 게다가 그 실권은 점점 확대되어 그 반대급부의 효과로 율령제는 명목화된다. 그럼에도 그 막부는 겉으로는 조정에 대해 ‘후견’할 뿐이라고 말한다. 막부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쇼군의 ‘후견’이 존재하며 ‘후견’이 현실의 결정권을 갖는다. 이처럼 결정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집권의 지위 자체는 형식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후견’ 자체가 사화(私化)(***)되는 과정과 같다. (*** 사화(私化)는 결사형성적/비결사형성적의 횡축과 정치적 권위에 대한 구심적/원심적의 종축의 좌표에서 비결사형성적이며 정치적 권위에 대해 원심적인 좌표에 위치하는 개인의 출현패턴을 가리킨다.)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정통성과 결정권의 이원화 경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실권의 하강화 경향과, 또 한편으로는 실권의 “미우치”화 경향이 또 다른 파생적 패턴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사에서 ‘혁명’이 부재한 것을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혁명의 대역을 맡아온 것은 실질적 결정자의 부단한 하강하 경향이며 이러한 권력이 자연적 경향성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통성의 소재와 결정권이라는 의식적 분리 및 그것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하강경향과 “미우치”화경향이라는 일본정치의 ‘집요저음’은 병리현상으로서 결정의 무책임체제로 이어져왔다. 아래에서 위로 규정되는 “마츠리고토”는 결정이 신하에게로, 또 그 신하의 신하에게로 하강해가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불특정의 상급자에게로 무한히 역급(逆及)되는 곳에서 ‘궁극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마츠리고토”의 완료란 존재할 수 없다.

Posted by Sarantoya
,

  본서의 저자, 다케우치 요우(竹内洋)는 1942년생으로 역사사회학 및 교육사회학 분야의 연구자이다. 그는 2003년『教養主義の没落』[교양주의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낸 후 마루야마 마사오를 중심으로 한 戰後일본사회론과 '범형지식인'[규범형 지식인]의 관계를 그려내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본서라고 한다. 그래서 [교양주의의 몰락]을 함께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무엇보다 본서는 읽기 쉽다. 다케우치의 주장에 따려면, 어렵게 쓰인 책들의 상당수는 책의 저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케우치 본인 또한 그렇게 많이 당해왔다면서.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케우치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서를 읽은 후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시대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끊임없이 교감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론을 소개하거나 그 이론을 디뎌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할 때에 시대적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이론이거나 이론을 사체화하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론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야말로 시대적 공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가 생성("なる")이 아닌 제작("つくる")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본서의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한편, 여러 변수를 엮어내어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낸다. 우선 다케우치에 따르면, 다이쇼 시대의 구제고교(5년제의 중학교 과정 이후 대학진학을 위한 2년제의 고등교육과정)에서 탄생한 교양주의는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인격의 고양과 사회변혁을 꾀하는 인생관을 가리킨다.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학사회에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사회에 대한 사상적(좌익 혹은 우익의) 개입으로 실천된다. 그리고 저자는 그 바로미터에 마루야마 마사오를 위치짓는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법학부적인 실천활동의 여지도 있으면서 문학부적인 아카데미즘의 향기도 나는 절표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다케우치는 대학장(大學場)의 기능적 측면을 권력장의 지향과 순수아카데미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법학부와 문학부가 각각 전자와 후자를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제국대학"의 역사적 특수성일 터인데, 어쨌거나 테크노그라시를 양산한 법학부와 인문지식인을 배출한 문학부는 각각 대학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양자를 횡단하는 "상징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활력을 얻고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오가며 이상주의=정치주의의 현실화라는 실험을 감행해왔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33세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정치사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저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이 시대적 힘을 얻은 것은 과거에 대한 비평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의 예감에서이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이후 몇년간 이렇다할 논문이 없었고, 마루야마의 첫 저서인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년)의 판매고는 1000부에 그쳤다. 실제로 이 기간동안 마루야마는 폐결핵으로 폐의 한쪽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년)의 출간 이후이다. 이 시기 일본의 대학사회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두고 전학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이 점차 세를 키워갈 때였다. 이들 학생운동세력이 마루야마의 저술을 돌려읽으면서 인텔리의 교양으로서 마루야마가 위치짓게 되었던 것이다. 마루야마는 지식인을 본래의 인텔리와 유사인텔리의 두 층위로 나누고 후자의 유사인텔리가 파시즘의 선봉이 되어왔음을 비판하며 본래의 인텔리로서 지식인에게 대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의 "계몽"의 방식은 지식인의 대중에 대한 교화가 아니라 대중의 스스로 지식인 되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루야마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정치를 말하는 그의 화법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은 미래에 그래야한다라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의 "새로운 정치주체로서의 국민을 그려내는 계몽활동"이며 "대중의 시민화"에 대한 예감이다.

  1960년대 이후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비판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식인 세대의 등장은 바로 마루야마가 예감한 "대중 인텔리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계에 있어서 세대투쟁"은 사회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학이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의 출세를 보장하지 않으며, 대졸인구의 팽창이 대졸 학력자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1960년대 이후 학원투쟁의 중심세력은 대학지식인을 범형으로 하는 문화적 쁘띠부르조아에 동일시하지 않고, 문화부르조아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요시모토 다카하키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대학해체론"과 같이 제도론을 기피하고 정신론을 고집하는 전공투의 대학론과 그 좌익적 언설에서 전전(戰前)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의 일본국가주의로의 회귀를 읽어낸다. 마루야마는 전전 자신이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국가주의"가 전후 정치적 교양주의의 새로운 유행으로 재등장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공투의 파국을 예감했다. 마루야마는 정년 5년을 앞두고 1971년 교수직을 사직한 이후 더이상 "계몽"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만년의 마루야마는 생리적 혐오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전의 "원리일본사"(原理日本社)적인 것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일본정치사상의 고층(古層), 즉 '집요저음'이며, 전후의 좌익학생세력에게서 또 다시 나타나는 파시즘의 원류이기도 하다.  

  다케우치는 교양주의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정치적 교양주의의 신층, 인격적 교양주의=다이쇼 교양주의의 중층, 인생론적 교양주의=번민문화의 고층. 그런데 이 교양주의의 실현의 장으로서 대학은 1990년대 이후 점차 문화자본의 총량을 잃어감에 따라 제 역할을 더이상 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이제 대학은 학생의 프롤레타리아를 넘어서 지식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에 이르렀다. 마루야마라면 이 시대의 대학에 대해 무엇을 말했을까. 그리고 "대학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丸山眞男の時代―大学・知識人・ジャーナリズム』, 中公新書,  2005년 11월.

 

 

 

Posted by Sarantoya
,

<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에 실린 논문 한편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다. 이 논문은 1960년대 후반 '대학분쟁'의 와중에 일어난 마루야마 마사오와 전공투(전학공투회의) 간의 갈등과 논쟁을 다룬다.

 

「銀杏並木の向こうのジャングル」

시미즈 야스히자(清水靖久)

----------------------------------------------------------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마루야마니까 당시 학생운동세력과 대면하고 이 정도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대학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의 대부분은 대학의 모순과 그 표면화에 대해 회피하거나 '뒷담화'로만 즐길 뿐 시대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역사의 장에 기록하지 못하며 후대의 누군가의 손을 거쳐 그들의 삶을 설명해내는 에피소드로서 발굴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스스로가 역사의 장을 구성하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비로소 스스로의 삶이 역사의 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특히 사상가가 역사의 장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마루야마는 바로 그런 사상가를 예시한다. 

동경대학에서는 1968년부터 부당처분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해왔다. 1969년 2월 학교당국에서는 "수업재개"를 결정했고 "기동대"의 공권력을 허용하여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탄압했으며, 전공투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수업분쇄"에 돌입했다. "수업분쇄"는 강의실을 봉쇄하는 물리적인 분쇄뿐만 아니라 전공투가 강의에 직업 참여하여 교수에게 질문하고 논쟁함으로써 강의를 분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강의는 "수업분쇄"의 주요 대상의 하나였다. 그것은 마루야마의 『日本の思想』[일본의 사상]이 60년대 동경대 수험생의 필독서였으며 마루야마의 강의가 법대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이다. 또 주요일간지가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를 주목했던 터라 전공투는 마루야마의 강의를 "분쇄커리큘럼"의 시간표의 주요과목으로 선정했다.

1969년 2월 21일부터 3월 7일까지 5회 진행된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마루야마의 사상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경험이었고, 이 경험에서 대학과 폭력, 학문과 형식, 자유와 타자 등을 둘러싸고 마루야마 자신도 사상적 전기를 맞이했다.  

1969년 2월 21일, 수업재개된 마루야마의 강의실에는 200여명의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마루야마는 수업재개의 객관적 역할, '동대분쟁'의 책임 등을 묻는 전공투의 질문에 '나는 동대분쟁 전체에 중대한 책임을 느낀다', '양심은 강요할 수 없다' 등의 입장을 피력하며 학생들의 논리적 근거를 되묻고 그 주장의 근거없음을 논파했다. 그리고 110분의 수업을 채운 후 '여하튼 강의는 시작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수업을 끝냈다. 

이에 법투위(법대투쟁위원회) 측에서는 "수업재개를 강행한 마루야마 교수의 추궁집회 개최"를 결정했다. 2월 24일 두번째 수업을 위해 법학부 강의실로 들어가는 마루야마를 4,50명의 학생들이 문학부의 대형강의실로 끌고갔다. 이 학생들은 "혁마르"(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와 "프론트"(사회주의학생전선)과 "SFL"(학생해방전선)의 학생들이었다. 마루야마와 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매우 격렬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어느 학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루야마 교수는 형식적 원칙을 고집하여 우리들의 추궁의 실질적 대답을 회피한다!"는 학생의 추궁에 마루야마는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답했고, "형식주의자!"라는 고성에 마루야마 역시 목소리를 높여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응했다. 그의 목소리는 대형강의실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일순 정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마루야마가 형식주의로 전공투에 맞선 것에는 그 유래가 있다. 마루야마는 1930년대 일본제국의 파시즘의 발흥을 지켜보면서 파시즘의 진행에 기여한 비합리적 생명주의, 즉 짐멜이 말한 '생명의 형식에 반하는 반역'을 경계했다. 전후 개인의 자유를 국가권력의 '형식적 타당성'으로 의식하는 입장에서 일본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했던 마루야마는 생명전체를 기획하는 '실질적 자유'보다도 사상언론의 자유 등의 '형식적 자유'를 존중했다. 나아가 그는 1960년대 '비근대적'이면서도 '과근대적'인 일본의 '미성숙한 민주주의'가 '생명주의'와 상통하는 '내용주의'에 의해 이끌리고 있으며, 1930년대와 같이 생의 철학이 다시금 유행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수업재개를 '정상화'가 아닌 '일상화'로 의식했고, 대학의 형식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제도로서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던 마루야마의 수업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2월 24일의 수업 다음날 마루야마를 비난하는 전공투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2월 28일 세 번째 수업에서 마루야마는 전공투 학생에게 '2월 25일 강제납치'의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고, 전공투 학생은 마루야마의 '자유주의적 대학관'의 입장을 비판했다.   

당시 동경대에는 "기동대"의 공권력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세력의 각 분파 간에 폭력이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으로 1968년 11월 일공계(일본공산당계열)과 반일공계 간에 벌어진 "격돌"은 1000여명의 규모에 500여명 이상의 부상자를 낼 정도였다. 이러한 대학 내 폭력에 대해 마루야마는 '자살적 행동'으로 맹비난했고, "수업분쇄" 또한 그 폭력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   

3월 3일 수업재개 후 네 번째 수업이 진행될 예정의 강의실은 100여명의 법학부 학생들에 의해 봉쇄되었고 마루야마는 급히 메이지문고로 강의실을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했다. 3월 7일 다섯 번째 수업에서도 전공투 학생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수업 후 마루야마는 심전도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로써 그의 "수업재개"는 중단되었다.

4월 18일 마루야마는 병실에서 "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동경대 분쟁 외에는 생각나는 꿈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1969년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형식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마루야마의 사상을 몰고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한편, 마루야마에게 사상적 단층을 남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마루야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7월 NHK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民主主義を求めて 政治学者丸山真男」에서 "동대분쟁"에 관한 몇 가지의 사진을 올려놓는다.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