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維新の精神」을 번역한 것이다. 저작집의 해제에 따르면, 이 논문의 1장과 2장은 잡지 『みすず』 1965년 3월호에, 3장은 1965년 5월호에, 4장은 1966년 7월호에 실렸다. 이것을 1997년 발간한 저작집 4권에 모아 실었다. 각주는 본문의 이해를 돕고자 번역자가 일본위키피디아를 참조하여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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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の精神」[유신의 정신]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1.
세월 참 빠르다. 이미 ‘메이지’가 끝난 지 50여년이 흘렀다. 일본의 역사적 과정도 이윽고 유신 후 백년의 이정표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일본의 각계에서는 유신백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 ‘행사’들이 어떻게 치러질지는 몰라도, 거기서 울려 퍼질 선율의 한두 개는 이미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해양국 일본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 가운에 어떤 사람들은 백년 전의 ‘해방책’(海防策)과 동일한 모티브를 가지고 노래할 것이다. ‘천황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티브는 ‘조적정벌(朝適征伐)하라’는 예의 목가적인 태평함으로 느긋하게 나아갈 자유를 향한 도전일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개국의 로쿠메이칸(鹿鳴舘) 1 전통’에 도취한 사람들이 현대적인 정장을 하고 아메리칸 잉글리시를 토해내며 오로지 ‘서양인과의 교제’의 욕구를 충족하려할 것이다. 2
이 여러 모티브들이 함께 구성하는 테마는 유신을 재현하는 ‘명곡’을 이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분명 있겠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터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결합하고 ‘민족의 상징’을 분명히 하면서 ‘국가독립’의 장비를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유신의 테마를 현대에 재현하는 ‘명곡’ 아니던가? 일본의 ‘음악평론가’도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작곡의 기술적 규칙은 넘쳐나고 곡조는 더할 나위 없다. ‘해방책’(海防策)은 ‘건강한 마음’으로 표현되며, ‘로쿠메이칸(鹿鳴舘)적 개국’은 ‘로코코풍의 화려함?’으로 반복출현하고, ‘천황’의 모티브는 ‘상민풍의 토착성’의 ‘민요가’를 덧붙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신의 주제는 그러한 모티브들로 짜 맞춰진 테마일까? 우리는 여기서 ‘유신의 노래’의 모티브를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유신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2.
유신은 무엇으로 유신일 수 있는가? 그리하여 서두의 ‘노래’의 주제를 구성하는 제1동기는 유신에서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물론 다양한 각도에서 유신의 원리이든 사태이든지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이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신을 일으켰는가? 라고 사람들이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해방책’을 둘러싼 사태의 변천을 개관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해방책’의 대량발생의 계기는 외국선의 도래였다. 특히 막부말기 외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일본국 내의 ‘학자선생’들 대부분은 ‘해방책’을 열렬히 논했다. “토우진”(唐人)들은 방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이는 해안에 “다이바”(台場 에도시대 말기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포대)를 설치하고 대포를 일렬로 배치함’과 동시에 나무 덩굴에 ‘소포’를 숨겨야 한다고 제안했고, 어떤 이는 “토우진”은 대륙전에 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륙시켜서 창이나 검으로 찔러죽이자 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겐코우”(元寇 1274년과 1281년 원군이 일본을 침공한 사건)의 선례와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토우진”의 군함까지 밀어붙이고 군함에 직접 뛰어올라 ‘적’을 전멸시키자고 딴에는 진지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 모습은 광신적인 옛 군부지도자와 같고 또 오늘날의 ‘재군비론자’와 같으며 말하자면 황당무계하여 손톱만큼의 리얼리즘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막부가 가장 정통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막부의 전쟁과 군대에 관한 지식은 저 멀리 여러 번주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3
그러나 ‘해방책’(海防策)을 둘러싼 이 엉망진창의 갖가지 비난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막번체제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백 가지 천 가지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의 사태가 여기저기서 발생한 것이다. 막부에 의한 ‘국론의 통일’은 덧없이 사라졌다. ‘통일적 해방책’이 붕괴하고 제멋대로의 다양한 ‘해방책’이 분출했다. 즉 ‘해방책’이 활황을 맞이할수록 실제의 ‘해방’(海防)은 가장 취약해지고 불안정해졌다. 이미 그것은 체계적 통일성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방비 계획일 뿐 실제로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막번체제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외적인 무방비는 외부로부터 충격을 더욱 세게 직접적으로 받게 한다. 이미 막부체제의 쇄국은 시행할 것까지도 없었다. 나아가 ‘해방책’ 논의의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제멋대로의 논리가 회자되는 속에서 막번체제가 세운 의견의 유통체계는 붕괴되었다. 위에서 위로 의견을 올려 보내면 번주와 막번의 중간관료의 결정을 통해서만 주변으로 전달된다는 이른바 정점을 공유하는 무수한 삼각형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모두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 해체되었다. 당연히 제멋대로의 논의는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삼각형을 더 큰 삼각형으로 통합해가던 막번체제의 의견체계 역시 그에 따라 해체된 것이다. ‘처사횡의’(処士横議)의 금지는 가련하게도 ‘팻말’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횡단적 논의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외의 온갖 경우와 마찬가지로 횡적인 논의의 전개는 횡적인 행동의 전개를 동반한다. ‘횡의’(橫議)의 발생은 ‘횡행’(橫行)의 발생을 도모한다. 번의 경계를 허물고 전국을 '횡행'해갔다. 즉 ‘탈막번’의 낭인이 ‘부랑’을 시작했다. 이제 낭인(浪人)이란 불쌍한 실업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논하고 논쟁하며 연락하며 날뛰었다. 아니, 그들은 그러려고 ‘탈막번’한 것이다. 이른바 그들은 의식적이며 적극적으로 낭인이고자 했다. 옛 낭인처럼 사회체제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구사회를 스스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들에게 낭인이란 이미 불쌍한 존재가 아니며 자랑스러워할 존재였다. 낭인은 막부를 대신해서 ‘천하국가’를 짊어져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분’이 아닌 ‘뜻’만으로 상호 판단하여 결집하는 ‘지사’(志士)가 생겨나고 그들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네이션 와이드의 연결망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었다. 구사회의 체제 내에 신국가의 핵이 생겨난 것이다. 유신의 정치적 한 측면이 이때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러한 횡적인 결집이 결코 ‘존황도막’(尊皇倒幕)의 ‘지사’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바쿠하”(佐幕派 에도막부 말기 막부를 돕자는 일파)의 ‘지사’ 역시 마찬가지의 양태로 사회적 과제를 실현해갔다. 여하간 ‘봉건의 범위를 초월해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행동했다. 막부 말기 유신의 ‘진짜’ 싸움은 이렇게 ‘구태여 봉건군주의 명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양 파벌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쇼우기타이”(彰義隊) 4이든 “하코다테”(函館)의 군(軍)이든 그들 모두는 ‘지사’들의 집합이었다. 그들은 ‘상경’을 번주에게 제지당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며, ‘일을 성사시키려면 군주를 떠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번 정부는 우리를 도망자라고 보아도 좋다’고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토사(土佐:高知県의 일부지방의 옛 지명)를 출발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1837-1919)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출현한 ‘낭인’과 ‘지사’의 정신형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일단 ‘신분’ㆍ‘격식’ㆍ‘문벌’의 원리를 버리고 ‘뜻’에 따른 결합의 원리를 세우고 나면 횡적인 연결은 다만 사족 사이의 연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기병대’가 생겨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기병대’뿐만 아니다. “보신”(戊辰) 5에서 초우슈(長州)의 본진(本陣)의 이름도 ‘중의소’(衆議所)였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코뮌’의 이름을, ‘소비에트’의 이름을, ‘인민회의’의 이름을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유신에서 횡적인 결합은 이미 이야기되어온 것처럼 하층무사 이하 민중으로 넓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앞서의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고 각처로 진행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 없이는 ‘사민평등’의 슬로건이 제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뜻’ 곧 이념이야말로 ‘신분’에 대항하여 평등에 복무한다. 6
이렇게 보면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답게 만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신을 일으킨 것은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와 ‘낭인횡행’(浪人橫行)과 ‘지사’의 횡단적 결합이다. 바꿔 말하면, ‘해방책’을 포함한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횡단적 논의와 횡단적 행동, 그리고 현세적 지위(status)가 아닌 ‘뜻’을 가지고 모여든 횡단적 연대가 출현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유신은 유신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을 보아도 ‘해방책’ 논의가 비등하기 전부터 이미 앞서와 같은 여러 계기가 점차 성장했고 막번체제의 내적위기는 심화되어갔다. 아니, 본래의 막번체제 자체가 전국의 다이묘(大名) 분국제(分國制)에서 엄청나게 전개된 ‘횡행시대’에서 ‘횡행’의 계기를 모조리 탈각시키고 ‘다이묘 분국제’의 계기만을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횡행’의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상 막번체제는 그 처음부터 어떤 역사적 무리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부체제가 종종 직면한 문제에는 그 역사적 무리수가 전반적으로 크든 작든 노정해왔던 것이다. 그 내포적 위기의 증대의 극치에서 ‘해방책’의 논의가 일어났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횡의’(橫議)ㆍ‘횡행’(橫行)ㆍ‘횡결’(橫結)이 발전할 때만이 유신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본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20세기 후반에 이른 지금, ‘횡’의 토론과 ‘횡’의 행동 형태와 ‘횡’의 연대가 달성되었다고 하면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이룬 것일까? 세상은 이미 자국(自國)만의 세상이 아니다. 자번(自藩)만의 세상이 아닌 것처럼. 유신의 원리를 ‘오늘의 과제’로 살려내고자 한다면, ‘해방책’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본의 상태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소련을 비롯해서 많은 이웃의 국민들과의 ‘횡’의 교류와 연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행동 그대로 시무를 시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말잔치로 끝날 소지가 다분하다. 현재 유신의 ‘해방책’을 답습하는 것은 오히려 유신의 원리를 방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신의 원리를 오늘날의 세계에 살려내는 길은 ‘해방책’의 고사(古事)를 방기해서 ‘비무장’을 관철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 과연 유신에서 오늘날의 ‘비무장’으로 이어지는 방책이 어떻게 제출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그 방책이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 풀어놓은 유신의 원리에 더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원리를 오늘날에 살려내는 길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행한 자가 있다. 게다가 그는 유신최대의 지도자였다. 그 사람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이다. 그는 소란을 피우던 ‘해방책’의 논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생각하라’고. 그는 그렇게 ‘세계보편의 진리’가 왜 중요한지를 설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해보게, 제군. 제군의 큰 소동은 마치 끝나지 않은 전쟁의 휴전상태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강도를 생각하는 고로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경계심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분 나는 대로 공사에 임하면 될까? 국제적 교제에서도 그러한 처방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매한 것이 아닌가. 즉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해와 이득을 따졌을 때 불이익에 큰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상대방이 상대방을 밟으려는 ‘예의’를 행한다 해도 이쪽에서는 그와 똑같이 행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외국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일단 ‘예의’를 실행해본다. 그렇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 ‘격의 없이’ 솔직하게 교섭해봐야 한다. 이쪽이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감에도 불구하고 저쪽이 겉으로만 그런 척을 하고 실제로는 일본을 빼앗으려는 ‘발칙한 행동’을 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의 진리에 등지는 세계 속의 죄인’이기 때문에 그때야말로 ‘진리를 수립하고 일본국의 위력을 떨쳐보여야’하는 것이다(福沢諭吉, 『唐人往來』).
후쿠자와는 위와 같이 설파했던 것이다. 최근 ‘해양국가’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만약 저 때에 있었더라면 ‘후쿠자와는 파워ㆍ폴리틱스의 실태를 모르는 단순한 도덕주의자다’ 라는 식의 발언을 뽐내듯이 좌담회나 어디서 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후쿠자와는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러한 초보적 개념에 꼼짝 못할 인물이 절대 아니다. 반대로 후쿠자와는 파워로 기능하는 것은 물리적 힘만이 아니고, 윤리와 제 개념과 경제력 등도 큰 파워로 작동된다는 점을 충분히 방법적으로 자각하고 주목했던 선구자였다. 물론 위의 문장에서도 그러한 점이 충분히 고려되고 있다. “분큐”(文久 1861-4년간의 연호)의 상황이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고불역(萬古不易)의 격률(格律)을 제출한다. “세상을 다스릴 때에도 난을 일으킬 때에도 지켜야 하는 것은 세계보편의 진리”라고. 그렇게 “유일의 진리를 지키면서 움직인다면 아무리 적이 대국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함부로 타인의 모욕을 받지 않으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의’가 ‘폭력’에 압도되었던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수많은 예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베트남 하나의 사례만 보아도 분명하다. 아니, 우리들은 중일전쟁의 예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통감의 경험을 가지도 있으면서도 결단의 순간에 감히 전자의 예만을 방패삼아 군사적 폭력을 자국에 허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무능력자라 놀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 정신적 임포텐츠가 어떻게 유신의 전통을 독점할 수 있을까? 보여 달라.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을 다한다”고 했던 후쿠자와의 말은 뜻밖에도 일본국 헌법 전문의 한 구절에 완전히 부합한다. 헌법의 이 원리는 이미 백년 전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에 의해 ‘자주성’으로서 제출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 전통에 영광 있으라, 라고 기원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3.
서두의 ‘유신의 노래’의 제2모티브인 ‘천황’에 대해서 말해보자. 두말할 필요 없이, 유신에서 ‘천황’의 의미이든 유신의 결과로 태어난 ‘천황제’이든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즉 다각적인 관련 하에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파고드는 분석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다 다룰 수가 없다. 또 여기서의 과제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하려는 것은 유신을 사회변혁으로서의 유신으로 만드는 원리가 ‘천황’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을 검토하는 것이다. 유신에 의한 일본의 신생(新生)이 그것[천황제]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질문에 관해 ‘천황’ 심볼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한 한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앞서 대략적으로 개관하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천황이 있기 때문에 유신의 변혁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천황’은 고대 이래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전통적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 전통적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가치’가 막부 말기와 유신에서 부각된 것일까? 이것 역시 잡다한 질문 중 하나이지만, 한마디로 답한다면 새로운 가치체계의 제시와 ‘전도’(傳道)를 행하는 ‘예언적 리더쉽’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앞서 서술한 ‘낭인’의 ‘횡의(橫議)ㆍ횡행(橫行)’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 새로운 질서로의 통합을 가져야만 하는 ‘지도’가 보편적 가치나 초월적 가치의 ‘예언’을 통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가치의 ‘예언’은 당연히 무엇보다 사람의 내면에 호소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예언의 지도’ 하에 사회적 운동이 전개될 때에 그 운동은 사람들의 ‘회심’을 동반하며 그 ‘회심’을 기축으로 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내면에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면 그 외적 구체화로서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나아가, 바꿔 말해서 이 경우에 사회질서의 변혁은 사회의 가치체계 그 자체의 변혁을 동반한다. 이때 사회질서는 가장 깊은 지점에서 근저적으로 재생한다. ‘막말로우시’(幕末浪士)는 일반적으로 보아 그러한 ‘회심’을 거쳤는가? 노-이다. ‘횡의(橫議)ㆍ횡행(橫行)’은 신분의 해체를 일으켰고 신분사회의 해체는 그들 ‘낭인’에 충성의 대상을 제거했다. 주군에의 인격적인 헌신은 그 대상을 상실하고 헤매었다. 이 내면적 공허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로우시’(浪士) 중에는 그 정신적 공허의 지점에 히라테 미키(平手造酒) 7나 “신센구미”(新撰組) 8와 같이, 전략적인 퍼스펙티브를 내던지고 단지 전투만을 전문으로 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탄생시켰다. 또 그들은 그 내면적 공허를 운명으로 체념하고 ‘어쨌거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정신적으로 소극적인 사생활주의도 대량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자포자기의 길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충성대상을 원했다. 그렇게 문제는 이 선택의 기회에서 발생했다. 예를 들어 니이지마 죠(新島襄 1843-1890 교육가 종교가)의 도(途)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 ‘회심’을 거쳐 광대한 세계로 재생하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도(途)는 우주와 세계의 법칙을 파악하고 세계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나와 달리 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강렬한 애국심은 결코 ‘나라’(國)에 얽매이지 않았다. 니이지마 죠에게 충성의 궁극적 대상은 보편신으로 일원화되었으며, 후쿠자와에게는 지성의 우위가 범할 수 없는 수준에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예언’이 되어 전일본의 ‘로우시’(浪士)의 내면에 스며들었던가? 그들의 심리적 욕구에 재빨리 응했던 것은 오히려 눈앞에 있는 전통적인 가치로서 ‘천황’이었다. 9
만약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조금이라도 ‘교토’와 밀접하게 연결된 체제였다면 ‘천황’ 심볼이 ‘낭인’의 심리적 욕구에 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번(藩)과 막부에 대한 충성의 소멸은 연쇄적으로 조정에 미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막번체제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즉시 조정에도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또 반대로 막번 체제가 조정을 권위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출하는 체제였다면, ‘낭인’의 충성일반으로의 심리적 결핍은 그렇게까지 경박하게 ‘천황’에 흡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천황’ 심볼은 사회적 가치로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낭인’의 충성에의 심리적 욕구는 간단하게 즉석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생의 충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충성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는, 이른바 내면적 노동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혁명의 이름에 값하는 사회적 ‘회심’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점을 고려하면, 막번체제와 조정의 관계는 ‘낭인’의 심리적 욕구가 기성의 심볼로서 이미 만들어진 ‘천황’을 재빠르게 수렴할 수 있도록 알맞게 기능했던 것이다. ‘천황’ 심볼은 ‘막번’과 함께 무너지기에는 너무 ‘막번’과 떨어져 있었던 데다 당시 그 어떤 ‘낭인’에게도 ‘막번’보다 높고 큰 충성대상으로 바로 떠오를 정도로 유통되고 삼투되었던 것이다. 무가(武家) 체제에 있어서 ⑴ ‘공가’(公家) 세계와 ‘무가’(武家) 세계와의 엄격한 분리 ⑵ ‘무가’와 그의 전통적인 명목상의 ‘존황’(尊皇) 이라는 두 계기의 결합은 해체기에 이르러서 ‘낭인’의 존황열(尊皇熱) 상승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때 막번체제의 전통적 ‘존황’이 극도로 ‘명목화’되어 종종 『甲子夜話』가 말해주는 것처럼 은근히 천황을 깔보았던 막번체제에 애정을 소진한 ‘낭인’이 도리어 존항에게 진심을 다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막번에 분개하고 껍데기만 남은 존황을 공격함으로써, 존황은 진정한 존황이 되었다. 또 이름만의 존황을 추구했던 막부에 대한 도막주의(倒幕主義)가 성립되었다. 이 과정은 막번체제의 가치 시스템이 마침내 역회전을 시작한 것이며, 결코 가치체계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번 체제는 본래 카마쿠라(鎌倉)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스스로의 손으로 실증해가는 자주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요령 좋게 고대의 권위에 편승하여 ‘往夷大將軍에 부임’ 받는 것으로 자기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 결과 이번에는 반대로 고대의 망령이 반역자에 편승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10
이와 같이 막부제도가 명목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고대의 망령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황열이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번 말기에 이르러 ‘천황’ 심볼의 가치상승이라는 현상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보다 포지티브한 계기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거국(擧國)[闔国]의 상징이라는 계기가 거기에 있다. 물론 그것은 흑선도래의 ‘위기’로 인해 긴급히 요구되었다. 그 시기에 딱 맞는 상징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황국’의 설파는 고대 이래의 시간적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막부체제를 일시적으로 경과하는 역사적 상대화를 꾀했고, 그와 동시에 공간적으로도 번국할거(藩國割據)의 다이묘령국제(領國制)를 넘어설 수 있음을 의미했다. 효과적이라는 측면만을 말하면, 이 정도로 즉효작용을 가진 심볼은 아무리 초근대적인 ‘정신분석학’적 기술이나 ‘사회심리학’적 테크닉을 구사한다 해도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를 대체하고 나아가 훨씬 강인한 내면적 정착성을 가진 사회적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세계와 국민에 의해 반복적으로 점검되고 검증되는 보편주의적 가치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황국’이 거국(擧國)[闔国]을 상징한다는 말은 무엇보다 성구가 맞는다. (‘皇国’과 ‘闔国’의 일본어 발음이 “코우코구”로 같음) 그런데 어조가 지나치게 맞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군에 대한 퍼스널한 충성밖에 모르는 사무라이들은 ‘황국’ 심볼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國) 그 자체에 대한 책임과 충성을 알게 된 반면, 이때 괄호에 넣어진 ‘근대로의 대전환’은 정신구조의 자기변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퍼스널한 충성은 의연하게 퍼스널한 충성 그 자체로 좋았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확대하는 일뿐이었다. 막부 말기의 근왕가(勤王家)는 ‘제 다이묘는 소군이었고 조정은 대군이었다’로 말해지는 종래의 소충(小忠)을 대충(大忠)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메이지가 되었을 때도 정부는 ‘소충소의’의 관행을 타파하여 ‘대충대의’를 만들어낼 것을 선전했다. 이 번드르르한 어조는 그러나 매우 실현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한 충성은 특정의 가문의 특정의 사람에게 향해있을 때야말로 퍼스널한 충성인 것이기 때문에 원래 자유로이 신축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매우 곤란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정부가 되자마자 ‘대교선포’(大敎宣布)하며 일본 중의 신관ㆍ승려를 동원하여 ‘교도직’에 앉히고 ‘기대되는 인간상’의 선전선동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막부 말기 “로우시”에 관한 한 모두 ‘황국’에의 ‘대충주의’가 풍미했고, 현실가능하기 어려운 일이 비교적 간단하게 가능했던 것은 어떤 역사적 전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했던 명목적 존황의 전통 외에 실은 도쿠가와 시대에 ‘주군에의 퍼스널한 헌신’이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이미 순수하게 특정인격에 대한 퍼스널한 헌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주군이란 이미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고 ‘주가’의 ‘상속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번주의 우두머리도 ‘나라 바꿈’에 의해 바뀌었고 이에 따라 낭인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전근’했으며 교설(敎說)도 유교에 의해 ‘율법화’되었으므로 중세무사의 ‘퍼스널한 충성’이 완전히 합리화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적인 제도로 변하여 이동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화된 충성이 ‘법’에의 충성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als ob’(가정)된 ‘퍼스널에의 충’이며 동시에 ‘als ob’(가정)된 ‘법에의 충’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역설적으로 퍼스널한 충의 ‘제도화’ 혹은 ‘율법화’ 혹은 ‘보편화’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충성의 감각은 정부(貞婦)의 서방에 대한 것처럼 특정자에 대한 철저한 충이 결코 아니다. 물론 추상적인 ‘법’에의 헌신은 있을 수 없다. 그냥 딱 ‘황국’에 맞춰진 것이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천황’ 개인에 대한 연정도 아니고, 그러한 탓에 어디에도 편승되는 ‘충성’!?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신상태로 유신을 목표로 하여 시대를 선도했던 지도적 “로우시”(浪士)는 ‘황국’을 확실히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심볼로 자각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는 ‘천하’와 ‘총체’[惣体]가 진정한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의미에서 지도적인 “로우시”에게는 분명 ‘나라’의 의식이 독립적으로 생겨났다. 이 “로우시”는 앞 절에서 논했던 자발적 ‘낭인’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충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심리적 욕구불만의 ‘낭인’은 정신구조에 있어서 전통적인 룸펜적 낭인에 속한다. 여기서 전자[“로우시”]는 후자[‘낭인’]에 충의 대상을 부여함으로써 이것[충]을 조직화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이 ‘지사’들은 충의 대상에 걸맞는 ‘옥’(玉)을 자유로이 조작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천황’은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고 ‘천하’ 그 자체가 아니라면 거국(擧國)[闔国] 그 자신도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가 ‘조정이 진력을 다해 각번각심(各藩各心) 혹은 양이(攘夷)라 말하고 혹은 거국(擧國)[闔国]이라 말하고 혹은 개국(開國)이라 말한다. 오늘날 이를 통일하지 않고서는 천하의 와해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 따라서 하나의 모략을 설계하자. 오늘날의 제후의 봉토는 모두 조적(朝敵) 도쿠가와가 수여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으며 천자(天子)의 옥새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크게 명분을 올바로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천하를 세운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하’의 ‘통일’이 목적이고, 다른 ‘명분’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구사되어야 하는 수단이다. ‘조적’이라는 것도 ‘천하의 옥새’라는 것도 장기의 말처럼 조정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황국’을 가장 많이 휘두른 그들이야말로 천황에 대해 가장 충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의 변혁의 정치적 측면을 짊어진 자가 실은 천황에 충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불충으로 ‘모략의 수단’으로서 ‘옥’(玉)을 조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배신의 마키아벨리즘이 탄생함과 동시에 ‘국가’(스테이트)가 전통적 가치와 세간의 권위의 포위로부터 독립하는 사고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열강에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전진하며 대외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권위에의 심리적 연결에서 벗어나 ‘국가’의 이해상황을 리얼하게 판단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의 대외독립은 ‘국가’ 관념의 대내독립 특히 전통적 신조체계로부터의 독립과 분리로 이어진다. “스테이트맨”(Statesman)이란 실은 이러한 사고로 ‘국가’(스테이트)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의 전통적 가치체계에 매달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거의 모든 사고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 유신의 정치적 지도자에서 “스테이트맨”이 탄생했다는 것은 앞서와 같은 내적과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본에서 ‘현실주의’라는 이즘을 물건으로 내다파는 많은 지식인들은 이 ‘정치적 리얼리즘의 정신적 기초’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도리어 종종 정치적 리얼리즘을 상실하고 있다. 리얼리즘 없는 ‘현실주의’라는 골계의 모습은 유신의 정신과는 관련이 없다. 이른바 열광적인 ‘존황’에 유신의 유신다운 근거를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가련하게도 초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11
“스테이트맨”의 탄생이 정치적 측면에서 유신의 원리를 표현했던 것인데, ‘정치가’(政治家)에서 ‘정치적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해도 그에 따라 사회의 가치 시스템이 ‘민주화’로 향하여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스테이트맨”의 정치적 리얼리즘은 전통적 가치를 통합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써 그 결과 그것을 온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의 정신구조라는 국면에서 유신은 “스테이트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기구 밖에서, 즉 ‘정치외의’ 영역에서 거국(擧國)[闔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짊어져왔다. 극도로 목적의식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선택하여 탐구했던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막부 말기의 동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정치적’으로 과열하지 않고 냉정하게 정치사회의 침착함으로 선두에 서서 어쨌든 곧 도래할 유신을 맞이하여 앞서 논했던 이른바 새로운 사회의 “스테이트맨”다운 직분을 맡음으로서 그 준비에만 전념했던 자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정말로 얄미울 정도의 전망과 선택이었다. 당연히 유신의 사회변혁의 큰 부분이 그와 그의 동지에 의해 짊어지게 되었다.
그 후쿠자와에게 우리의 신성한 거국(擧國)[闔国]의 심볼이 어떻게 다뤄졌는가. 심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황국’이라든지 ‘조정’이라든지 ‘본조’(本朝)라든지 ‘본나’(本那)라는 문자에 궐자(闕字)하는 것을 폐했던 이가 후쿠자와였다. 궐자, 즉 문장 중에 ‘존경하는 심볼’이 나올 경우 문장이 끝나지 않아도 그 앞에 한 글자를 띄어쓰기 하여 그 “존경하는 심볼” 앞에 “천한 심볼”이 위치하지 않게 하는 습성은 전후 일본에서 마침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즉 그전까지 궐자 있는 문장이 범람했던 것이다. 이것은 명목론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결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당연히 막부 말기, 유신 당시에 있었던 궐자는 일반적 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궐자를 행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당할지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관습의 노예’를 거부했던 후쿠자와는 그 궐자를 폐해버렸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궐자가 ‘국법’의 명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국법’이 정해주지 않은 것인데 단지 ‘세간의 선례’라는 것만으로 그것에 ‘따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에 찾아가 궐자가 ‘국법’의 규칙인지 아닌지를 묻고 정중하게 절차를 밟아 폐해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기화(奇禍)’를 지혜롭게 막고자 한 후쿠자와의 정 떨어질 만큼 신중한 이른바 비무장방어법을 엿볼 수 있는데, 이와 동시에 ‘법’ 이외의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정신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유신 이후의 그의 후기 저작에 나타난 사유방식이 명료하게 관철되고 있다. 앞서의 구관을 깨는 대범한 지적모험이 극도로 진중한 절차를 거쳐 단행되는 것에도 후쿠자와의 하나의 정신을 볼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나라’의 강제력이 ‘법’ 이외의 어떠한 전통적 권위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거국(擧國)[闔国]은 이미 ‘법’에의 충실을 통해서만이 통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황국’이 반드시 거국(擧國)[闔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황’(皇)의 글자에 궐자를 동반하는 것과 같은 정신에 의해 나라가 통합되는 것은 거국(擧國)[闔国]이 아니었다. 12
‘국가인’(Statesman)에게 거국(擧國)[闔国] 개념은 ‘천황’ 심볼의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가 보기에 이 전통적 심볼이 통합수단으로 남용되었고 그 결과 온존되었던 것이다. ‘세속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후쿠자와는 그 반대로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신란’(親鸞)이 스스로 육식하고 육식의 남녀를 교화했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 문체상에서 오로지 세속의 속문을 철저히 사용했으며, 그 다음에 그의 과제에 반하는 전통적 심성을 단호히 철폐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고귀한’ 단어를 사용하면 그로부터 사회가 고귀하게 된다는 기호의 정신병리는 여기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루하고 속된’ 세속의 문장법에 응함으로써 ‘세속과 함께 문명의 가경(佳境)에 도달하려는 본령’에는 정말로 그가 자신했던 것처럼 카마쿠라 종교개혁의 혁명적 정신이 관철되고 있다. 종교성과는 아무 연고 없는 현세적 인물로 간주되는 후쿠자와의 행동강령의 깊은 곳에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실은 과학의 시대의 신란(親鸞)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 가치의 현세로의 투입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대중종교성’에 대항하는 ‘지성의 대중화’와 ‘대중의 지성화’가 발생된 것이다. 유신을 유신답게 한 것은 ‘황국’ 심볼의 가치의 앙등이 아닌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3
4.
글을 중단한지 일 년이 지났다. 전술한 것과 같이 유신의 정신은 ‘해방책’이나 군비증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단순한 진통촉진제로 하여 생겨난 바로 ‘횡의’ㆍ‘횡행’ㆍ‘횡결’의 관계에 있었다. 이로써 막번 체제의 사회적 맥락(커뮤니케이션 양식)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적 연결의 구조가 맹아로서 탄생했다. 또한 그러한 횡적인 교류를 그럭저럭 통합해서 국민국가를 건축해낸 것은, ‘횡결’의 지사가 ‘천황’의 상징적 가치를 신앙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유신국가의 스테이트맨이 전통적 가치로서의 ‘천황’ 심볼로부터 내면적으로 해방되었던 까닭에 이 전통적 가치 곧 ‘옥’(玉)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그로부터 국가건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적 근대국가로서의 ‘천황제국가’야말로 실은 ‘천황’에의 신앙으로부터 해방된 자에 의해 처음으로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패러독스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유신의 원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신이 사회에 일정한 변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이 스테이트맨의 원대한 건축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보다도 ‘사람에 다스려지는 소인’의 문명을 중요시함으로써 처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소민’(小民)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야말로 유신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였고, 여기서 ‘정부’와 ‘공무원’[役人]에 위탁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심으로 ‘사회’의 변혁에 노력하는 ‘사회의 스테이트맨’이 탄생하여 초월적 보편가치로서의 ‘문명’이 현세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앞 절에서 논한 ‘줄거리’는 이상과 같다.
이제 ‘서두’의 제3모티브에 대해 논해야 할 단계에 왔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것을 장황하게 논할 생각은 없다. 사회변혁으로서 유신의 ‘정신’은 군사적 ‘양이’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존황’의 신념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살펴본 지금에 와서는 제3의 모티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음이 이미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권위를 가진 외국’에 대해 단지 ‘환대’(好遇)할 뿐만 아니라 ‘약삭빠름’이 일본사회를 관철하고 있다. 어떤 아메리카의 학자가 말한 것에 따르면,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의 호의적 태도와 일본정부의 약삭빠름’이 서양인과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선의’와 ‘옵티미즘’(optimism)의 시대를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메리카 잡지 『Show Magazine』 1963년 5월호에는 ‘새로운 극서(極西)의 나라 일본’(Japan the New Far West)이란 제목의 특집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과 더불어 그와 나란히 ‘일본정부의 정책’이 일본의 이미지를 ‘극동’으로부터 ‘극서’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이미지의 전환을 아메리카의 『Show Magazine』이라는 잡지가 포착했다는 것은 로쿠메이칸(鹿鳴舘)의 현대판을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극서’(極西)라는 대문자로 쓰인 말에도 일본의 당사자들의 과잉 서비스가 조금씩 스며 나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메이지의 로쿠메이칸(鹿鳴舘)은 실은 이 현대판과는 크게 다르다. 첫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의 교태정책은 현대판처럼 간단하게 성공을 접수할 수가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갈수록 엄중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상황이 곤란해진 탓에 궁여지책으로서 교태정책이 실행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안이한 ‘행복’의 꿈에 부푸는 현대판과는 아무리 닮으려 해도 닮을 수가 없다. 즉 ‘일찍이 조약개정으로 노저어가는 유신이 목적한 대외독립을 어떻게 해서든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어떠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빨리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서는…’이라는 구절에는 어떤 비장하고 초조한 빛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은 국가형성을 짊어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의 결단과 리더쉽 하에 전개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곳에 참가한 일본의 ‘걸’도 그 ‘목표’에 ‘혼신을 다해’ 협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판에서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은 그러한 ‘퍼블릭’한 의식을 가지고 일본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부도 각별의 결단을 가지고 ‘지도성’을 발휘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발의권의 소재를 굳이 묻는다면, 그것은 ‘프라이베이트’한 이해에 의해 구성된 어떤 하나의 ‘풍속’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약삭빠르지 않은’ 정책은 오히려 그 ‘풍속’의 뒷를 쫓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세 번째의 차이점에 도달한다. 즉 로쿠메이칸(鹿鳴舘)에서 메이지 정부의 리더들은 그들이 교태를 부리는 상대에 대해 독립과 대결의 정신을 비록 왜소한 형태로나마 비밀리에 갖고 있었다. 거기서 교태는 자각된 정책이었다. 따라서 그 정책의 기저에는 분명하게 ‘전술’의 의식이 존재했다. 어떤 외국의 역사가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와중에도 유신 이후의 ‘메이지 정신의 특징’인 서양에의 ‘숭배’와 서양에 대한 ‘전술’의 교착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찰은 어떤 측면에서 정곡을 찌른다. 교태의 기저에 전술의 의식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형적인 일본형 부르조아이자 로쿠메이칸(鹿鳴舘)의 당사자의 한사람이었던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가 로쿠메이칸(鹿鳴舘) 정치를 에도의 가부키의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 14와 47인의 지사’라는 방탕전술로 덧씌울 수 있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전술의식의 무대를 천박하게 보여준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판 로쿠메이칸의 당사자의 누가 이러한 전술의 전설로서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큰 ‘숭배’가 없다면 또한 ‘전술’의 의식도 없다. 15
현대판 아메리카니즘과 로쿠메이칸과의 격차는 이와 같다. 하물며 [아메리카니즘과] 유신과의 격차는 말해 뭐하리. ‘하물며’라는 말은 물론 로쿠메이칸과 유신과의 사이에 어떤 원리적인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이 양자는 어떻게 다른가? 로쿠메이칸 속에 서양에의 ‘찬탄’의 의식과 서양에 대한 ‘독립’의 의식이 교착하고 있다는 그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로쿠메이칸이 어찌되었든 메이지 건설기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그 교착에 있다. 이 교착은 오히려 로쿠메이칸을 유신과 연속시키는 한 측면이다. 유신과의 차이는 이 두 의식의 교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의식의 관계의 방식에 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차이는 한층 내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의 지도적 정신에서 서양에의 ‘숭배’ㆍ‘찬탄’ㆍ‘존경’은 분명히 세상 어느 곳에나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문명의 정신(무형의 문명)이다. 그리하여 ‘독립’ㆍ‘동등’ㆍ‘대결’의 의식은 만국의 ‘권의’에 기초하여 서양열강의 권력성에 대항하며 자각되어왔다. 따라서 거기에는 ‘강적을 염려하면서도 그 나라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태도가 발생한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히 ‘경모’(敬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서양제국의 부강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한 나라의 권위는 추호의 경중함도 없이. 도리를 다하며 꿈꿔왔던 그날에 이르러서는 온 세계를 적으로 두어도 두렵지 않는’ 것이다. 후자의 계기는 문명에 대한 존경을 접는 데에 있지 않고, 전자의 계기는 ‘동등의 권리’를 맹목적으로 자각하는 데에 있지 않다. 따라서 ‘권리’와 ‘상태’의 구별이 적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상태’를 깨달은 자기비판이 성립한다. ‘존경’은 존경할 수밖에 없고 ‘대항’은 대항할 수밖에 없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들의 각 계기는 상호 ‘도리’에 기초하여 각각의 레벨에 위치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은 정신의 제 차원에서 내적긴장을 가지고 공존한다.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정기(正氣)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는 부분의 부당한 확대와 전체의 제 부분으로의 분해라는 이상정신의 특징은 없다. 유신을 이끌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정기의 정신이었다. 정말로 거대한 변혁기에는 거대한 정기가 출현하다. 그것이 없다면, 파괴는 가능할지라도 사회의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
이윽고 우리는 유신의 정신의 한 측면이 ‘존경’과 ‘적의’를 각각 양립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차원적 사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막부 말기 ‘횡의’ㆍ‘횡행’ㆍ‘횡결’을 만들어낸 정신도 그러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횡의ㆍ횡행을 개시하고 여러 나라의 자발적 결사와 그 중심인물들을 횡적으로 연결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운동가 요시다 쇼우인(吉田松陰, 1830-1859, 에도 시대의 지사이자 교육가)이 ‘자연표류’를 가장해서 그 횡행과정을 세계에까지 확대하고자 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관념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적(敵)의 ‘실체를 알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경우에 그 정신은 전투자의 ‘병학’(兵學)적 고려에 근거했다. 진지한 전투자가 탁월한 ‘적’을 발견했을 때 ‘적’과 자신에 대한 리얼한 인식으로서 적을 존경하면서 적과 대결한다는 태도가 요시다 쇼우인의 마음가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리분별 없이 폭주하는 ‘양이낭인’(攘夷浪人)과도 이질적이며, 이와 더불어 ‘흑선’(黑船)을 보는 즉시 ‘화속’(花束) 등을 선물했던 정신의 ‘쇄국’(鎖國)의 선택과도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말할 것도 없이 요시다 쇼우인에게서 유신의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신의 사회변혁을 지도했던 정기의 정신은 한 측면에서는 분명히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병학적 레벨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전투자의 비체계적인 지혜에 멈춰선 것이 아니다. 사회의 의식적 형성은 여러 종류의 일상의 제 영역에 걸쳐 관철되는 일정한 방법적 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존경’과 ‘적의’가 차원적으로 양립하는 사고는 후쿠자와에게 단계를 상승하여 체계화하면서 문명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앞서 서술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정신은 여기서 결실을 맺는다.
이제, 앞에서 전술한 구조와 과정을 거친 유신의 정신에 견주어볼 때 로쿠메이칸은 어떻게 ‘타락’했다는 것인가? 이미 밝힌 것처럼 거기에는 ‘숭배’ㆍ‘존경’의 계열과 ‘독립’ㆍ‘대결’ㆍ‘전술’의 계열이 차원의 구별을 잃고 동일차원에서 융합되고 말았다. 바로 그 혼합물이 교태정책이다. 여기에서 ‘숭배’와 ‘존경’의 대상은 이미 추상화된 문명의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유형의 문명’에 불과하다. ‘부강’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동시에 ‘대결’과 ‘전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은 ‘특수 구체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 이미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경’과 ‘적의’도 같은 레벨에서 작용한다. ‘부강’에 ‘존경’과 ‘대결’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전술’의 의식과 뒤섞인 교태였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전술적인 뇌살자의 교태가 아니며, 그렇다고 철저한 연정도 아니다. 앞서 거론했던 ‘외국의 역사가’—로쿠메이칸의 ‘숭배’와 ‘전술’의 교착을 지적했던 역사가—도 로쿠메이칸의 정신적 융합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쿠메이칸의 내면적 구조에서 유신정신의 깊은 그리고 미세한 변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 변질은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의 분리가 완전히 상실될 때, 어떻게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의 입장으로부터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상황을 변혁하고자 하는 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 지점에 민감하지 않은 역사가는 멋진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변질과 그 역동성을 간과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예시한 ‘역사가’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메이지유신』 등에서 자신의 예민한 역사 감각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주목받은 M. 얀센(Jensen)이다. 그의 ‘인간사’에 관한 감각의 예민함에서 세련된 비유는 실제로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물리지 않는 ‘경험적 인간’에 대한 방관적 흥미는 종종 의도하지 않게 초월적 가치로의 무관심을 만든다. 그렇게 초월적 목적으로의 무관심은 역사의 정신적 기저에 있는 어떤 중요한 역동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확실히 초월적 가치로의 경도한 자는 그것만으로도 현실부정의 실천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힘을 결여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적 인간사’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는 실천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식’ 그 자체에서도 중요한 측면을 놓치기 쉽다. 얀센의 예는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얀센이 포착하지 못한, 로쿠메이칸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구별이 상실되었음을 알아채는 순간, 또 하나의 정신적 융합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로쿠메이칸의 지도자에게 ‘공적정책의 선택’이 어느 새인가 ‘사적향락’과 유착되어 본인 스스로도 무서우리만치 무엇인가 구별할 수 없는 조연(躁宴 비의적이며 향락적인 연회)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다. ‘전술’의 자각을 가지고 시작된 교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자체가 ‘결코 재미없지 않기 때문에 다소 당면의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大倉喜八郞). 조약개정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광태가 반대로 당사자에게 ‘재미를 준’ 탓에 어느 새인가 목적이 되어버려 조약개정은 향락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빛깔 좋은 대의명분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무념극한의 것이기에 자기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말았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이다. 문제는 ‘방탕’이 ‘재밌어’지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정신적 처리 상태에 있다. 한 나라의 형성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서는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수단을 자기 목적화하는 것은 셀프-컨트롤의 불완전함에 대한 무념이며, 이를 절치부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도착(倒着)이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해도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원죄 그 자체는 인간의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죄로 의식하는 지점에서 인간적인 태도가 발생한다. 하물며 그들은 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형성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어째서 ‘대중적’ 오르지아시틱(orgiastic)(躁宴)에 도취하여 현실을 잊고만 것일까? 메이지의 정치적 지도자의 정신적 성숙이 이 정도라는 것이 확실히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음주가무’[盆踊り]의 도취를 잊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수염 기른 위인이 소박한 촌사람의 ‘음주가무’에 동참하는 것처럼 풀어내지도 않고 그래서 ‘향락의 연회’에 대한 향수에 대의명분을 주고 현대인의 복장을 하고 만족하는 꼴을 하고 있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에 있어서 ‘공’과 ‘사’의 유착은 그와 동시에 ‘리더’의 ‘대중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에 과욕을 부린 것일까? 그들은 ‘화족제도’를 신설하기까지 ‘노블’이 되고자 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리더’이고자 했고 그와 동시에 ‘대중적 방탕’에도 가담하여 그 즐거움을 향유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에게 요구되는 희생(비용)의 의식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비용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라는 선택의 엄격함에 대한 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의 선택은 동시에 비용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기의 ‘방법’이 자기에 부과하는 비용을 받아들이고 참아내는 자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쿠메이칸에서 아무리 ‘평등조약실현’의 과제를 짊어진 비장한 선택이 작동되고 또 세론의 욕설과 조소와 분개를 참아내는 대외적 용감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유신의 정신이 아니다. 첫째 거기서 요구되는 국제적 평등함은 열강과의 평등에 지나지 않으며 약소국에 대해서는 조금도 ‘권리의 평등’을 자각하지 않았다. 유신의 정신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강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천리인도(天理人道)에 따라 상호 교류를 맺으며, 도의상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도 두려워하며, 도를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평등의식이지 않는가.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식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것과 특수구체적인 사적 욕구 간의 긴장을 스스로의 내면에 내장하고 있다. 따라서 유신의 정신에서는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유착도 공과 사의 정신적 융합도 지도자의 ‘대중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바로 깊은 자기비판에 처해진다. 즉 정신적 융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유신의 처음부터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혼효(混淆)는 존재했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에는 지금까지 서술한 보편적 가치 관념이 한 점으로 존재했으며, 그리하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유신은 사회변혁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지금까지 서술한 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의 교태와 미묘하게 변질된 ‘유신’이 ‘반로쿠메이칸’의 슬로건 하에 정신적 쇄국 무드를 수반한 ‘유신’관을 불러일으켰고 그것들의 교착의 가운데에서 ‘유신’은 점차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변해갔다. 오늘날 ‘유신’ ‘유신’이라고 부르는 목소리 가운데에는 이때 생겨난 이래 반복되고 증폭되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유신’이 잠복해있다.
그렇다면 만약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가 오늘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보편적 가치로의 ‘존경’과 권력과의 ‘대결’, ‘권리’의 평등과 ‘상태’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늘 긴장하는 정신. 이 정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몸에 익히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계기의 각각은 전후 일본국 헌법이 제도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보증을 다양한 압박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는 나타날 것이다.
- 해방론(海防論)은 에도막부 말기 서방의 일본진출로부터 일본을 보호하자는 국방론을 총칭하는 말. [본문으로]
- 로쿠메이칸(鹿鳴舘)은 1883년 동경에 서방과의 조약 교섭을 위한 사교장으로 건립한 양옥의 이름. [본문으로]
- “토우진”(唐人)은 “카라비토”라고도 읽는다. 이 말은 유신시대 때까지 중국과 조선인을 의미했으며, 넓게는 외국인 일반을 가리켰다. [본문으로]
- 처사횡의(処士横議 "쇼시오우기")는 제멋대로 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 쇼우기타이(彰義隊) 1868년에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쇼군의 경호 등을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 메이지친정부군에 의해 패배 해산했다. [본문으로]
- 보신전쟁(戊辰戦争)은 1868년에서 69년에 걸쳐 16개월간 왕정복고를 거쳐 메이지유신을 수립했던 초우슈(長州) 번주 등을 중핵으로는 신정부군과 구 막부세력의 동맹세력간의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보신”(戊辰)은 1968년이 무진년(戊辰年)인 것에서 유래한다. (일본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 섬길 영주를 잃은 사무라이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 히라테 미키(平手造酒) 에도 시대 막부 말기의 검객. 낭인의 대표적 캐릭터로 가공되어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본문으로]
- “신센구미”(新撰組) 에도시대 말기 막부 반대파를 진압하던 사무라이 패거리를 가리키는 말. [본문으로]
- 『甲子夜話』(“캇시야와”)는 에도시대 후기 “히젠노쿠니”(肥前国 현재 사가현과 나가사키현에 해당하는 옛 율령국의 하나)의 9대 번주인 마츠라 키요시(松浦清)가 쓴 수필집. 서명의 유래는 마츠라 키요시가 은퇴 은거한 후인 1821년의 갑자년의 밤에 기술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 1833-1877년. 일본의 무사, 정치가. ‘유신의 삼걸’ 중 1인. [본문으로]
- 에도 시대에 막부가 만든 양학(洋學) 학교. 동경대학의 전신. [본문으로]
- “신란”(親鸞) 1173-1262년. 카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승려.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시조. [본문으로]
-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 1837-1928. 메이지, 다이쇼기에 무역, 건설, 화학, 제철, 식품 등의 다수의 기업을 운영했던 실업가. 로쿠메이칸(鹿鳴館), 제국호텔, 제국극장 등을 건설. 도쿄경제대학의 전신인 오오쿠라상업학교의 창설자. [본문으로]
-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는 에도시대 전기의 무사. 겐로쿠아코우(元禄赤穂) 사건으로 인해 이름이 알려짐. *겐로쿠아코우 사건은 겐로쿠(元禄)14年(1701年)에 아코우 번주가 에도성의 성주에게서 자상을 입은 후 아코우 번주의 낭인 47명이 심야에 에도성으로 잠입해 에도성의 성주와 단판을 벌인 사건. 오오이시는 그 47인 중의 한 사람. 이 사건은 후에 인형극과 가부키로 유명해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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