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쓴다는 행위 ― 그 논리와 윤리
노에 케이이치(野家啓一)
지금, 내 안에는 죽은 자와 산자의 구별이 없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섞여 내 마음을 휘젓는다. ― 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1. 문제 상황
사람이 밥만으로 살 수 없듯이 현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과거의 추억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설레면서 인간은 현재라는 순간을 살아간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을 보아도, 오랜 세월의 영광과 함께 그 세월의 흔적과 때가 묻은 이 만년필이야말로 돌아올 새해 연하장을 예비한다. 이처럼 현재라는 시점에는 과거와 미래가 몇 겹씩 중첩되어 있다. 여기에는 흘러간 물리학적 시간뿐만 아니라 기억과 상상에 의해 쌓아올려진 지질학적 시간도 담겨있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는 비대칭적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덧없이 사라지지만, 과거의 내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현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아이덴티티, 즉 ‘자기란 타자인가’라는 물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론 아이덴티티의 주장은 내셔널리즘의 문제 권역과 맞닿아있으며, 그 이면에 배제와 억압과 차별이라는 네거티브의 측면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기술은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성을 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의 존재증명과 그 부정을 둘러싸고 제기된 역사수정주의논쟁을 비롯한 몇몇 논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청년기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예리한 고찰을 행한 E. H. 에릭슨은 아이덴티티를 자기의 일관성ㆍ연속성, 그리고 타자에 의한 자기의 공유ㆍ승인이라는 양 측면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역사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관성과 연속성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논리적으로 파탄날 수밖에 없으며, 타자에 의한 공유ㆍ승인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윤리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거만한 자[夜郎自大]의 독백으로 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또 윤리적 정당성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와 윤리라는 두 초점의 타원형의 ‘서사’[物語り]이다. (역사기술의 논리적 측면에 대해, 무엇보다 ‘인과성’과 ‘법칙성’에 대해서는 본권의 이세다 테츠지(伊勢田哲治)의 논문을 참고하시오.)
지금 ‘서사’[物語り](narrative)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는 말에 의해 전승되며 남겨진 기록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해놓고자 한 때문이다. 문자가 없는 곳에서는 구전에 의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지만, 말이 없는 곳에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돌덩이는 세계상실적(weltlos)이며, 동물은 세계궁핍적(weltarm)이며, 인간은 세계형성적(weltbildend)이다”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를 인용하면, 동물은 말을 갖지 않는 고로 ‘역사궁핍적’인 것에 비해, 로고스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만이 ‘역사형성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언어로 말해진다는 자명한 사실이야말로 20세기의 역사학과 역사철학이 직면해야 했던 아포리아이다. 즉 ‘언어론적 전회’이다. (이것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와 그 귀결에 대해서는 본권의 오다나카 나오키(小田中直樹)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런데 역사가 언어로 쓰인다 해도 역사기술이 모든 사건을 말할 수는 없고 쓸 수도 없다. 그것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자신의 이해관심과 동기에 따라 말하고 싶은 ‘말할 만큼 가치 있는 것’, 즉 그 시대의 ‘의미’와 ‘가치’있는 사건을 선택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점’ 내지는 ‘퍼스펙티브’이며, 이 속에는 이미 일종의 가치판단이 작동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의 ‘퍼스펙티브에 포착되지 않은 사건은 망각되어 역사의 지층에 침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화(顯在化)된 역사기술의 배후에서는 망각된 사건들이 신음소리 내지는 침묵을 강요받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 ‘이야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묻힌 사료를 발굴하여 실증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레토릭으로 재현하는 ‘말하는 손’의 능동적 관여가 필요하다. 기술(記述)이 만들어내는 역사가 역사가의 시점과 퍼스펙티브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면, 망각되고 은폐된 목소리를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 요구된다. 20세기 후반의 역사학에서 그러한 ‘시좌의 전화’을 가져온 것은 오리엔탈리즘 비판, 젠더사,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라는 새로운 개념장치의 도입이었다. 그것들을 통해 이제까지 공적인 역사에의 등장을 거부당한 마이너리티에 속한 사람들의 침묵에 말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상세한 것은 본권의 모리 아키코(森明子)의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리고 ‘시좌의 전환’은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변경을 부가한다.
2. 언어론적 전회의 귀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역사학이 ‘역사는 언어로 말한다’는 간명한 사실을 다시금 자각해야 하는 것은 ‘언어론적 전회’라 불리는 사건 때문이다. 다만 언어론적 전회에서 20세기 초두 철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과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과 인류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언어론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기반이 된 것은 G.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와 B. 러셀에 의해 체계화된 기호논리학이며, 후자의 기반은 F. 소쉬르에 연원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이론이다.
본래 ‘언어론적 전회’(the linguistic turn)란 G. 베르그만이 만든 용어이며, R. 로티가 자신이 편찬한 분석철학의 선집(anthology)의 제목으로 붙인 이후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그 장대한 서문에서 로티는 언어철학자들의 공통의 지향을 ‘언어를 개량함으로써 혹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결(혹은 해소)하고자 하는 견해’로 요약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이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내성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고자 한 것이었음에 비해, 현대의 철학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언어분석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의해 단적으로 표명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제와 사태, 말과 사물[대상] 간의 지시 관계가 자명한 전제로서 의심되지 않는다. 이른바 언어와 세계란 예정조화적인 대응관계(寫像關係)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게와 러셀을 포함해서 제1의 언어론적 전회를 이끌었던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현재를 지시하는 투명한 매체로서 다루는 실재론적 언어관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제2의 언어론적 전회에서는 언어와 실재의 관계가 현저하게 불투명한 것이다.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자에 따르면, 언어는 실체적인 지시 관계를 갖지 않는 ‘차이의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즉 언어의 본질은 언어가 세계의 존재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의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이 래디컬한 귀결로서 포스트구조주의가 발흥했고, J. 데리다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경계를 유동화하고 ‘텍스트에 외부는 없다’고 단언했으며, R. 바르트는 의미작용에 있어서 작가의 특권성을 부인하는 ‘작가의 죽음’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조류를 배경으로 하는 언어론적 전회의 경향은 역사기술의 방법론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비판과 실증적 절차에 기반한 과거의 사건과 객관적 복원이라는 L. 랑케 이후의 근대역사학의 근본전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로 기술된 사료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에 불과하여, 그 외부에 있는 역사적 현실 간에 일의적(一義的)인 지시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과거의 복원이라는 역사가의 작업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론적 전회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 사이에 견인되어야 하는 명확한 경계선을 애매하게 만들고 역사학의 목표를 ‘사실’의 탐구로부터 ‘의미’와 ‘표상’의 탐구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역사학의 위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중세역사가인 가브리엘 슈피겔(Gabrielle Spiegel)은 이를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ㆍ역사주의ㆍ중세 텍스트의 사회이론」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를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조사한다면 역사의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인간중심주의의 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논쟁에서 통렬한 공격을 받아왔다. [중략] 역사가의 입장에서 현재의 비평의 진행과정을 바라보면서 받은 인상은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 즉 ‘현실’과 유리되어 언어로 돌진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주체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추세이다. "
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로렌스 스톤은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 「역사학과 포스트모던」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기고하면서, ‘역사학자는 역사학이란 무엇을 하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자신감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고 호소했다. 그에 따르면, 작금의 위기의 진원은 소쉬르로 시작해서 데리다에 이르는 언어학, 상징인류학의 영향, 거기에 뉴히스토리즘의 세 조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가 이 피난처 없는 올가미에서 탈출하여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며 앞서 슈피겔의 논문을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는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둘러싼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스톤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에서 또 하나의 위기의 연원으로서 잊어서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헤이튼 호와이트에 의한 ‘역사의 시학’의 제창이다. 호와이트는 『메타히스토리』(1973년)에서 19세기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참조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의 심층구조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기술이란 ‘서사적인 산문적 언설의 형태를 취하는 언어구조체’이며, 메타포(은유)와 메토니미(환유) 등의 비유표현을 채용하여 플롯의 구성을 행하는 시적행위에 다름 아니다.
즉 역사기술에는 수사적 요소가 불가결하며, 대립하는 해석전략의 경합 속에서 ‘역사에 관해 동일한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취사선택하는 최선의 기반은 인식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호와이트의 논의에 대해서는 ‘아우슈비츠와 표상의 한계’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카를로 긴스부르그가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역사의 시학’에 의한 문제제기의 의미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역사기술이 이윽고 소박한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의 지점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역사기술]이 상상력과 레토릭이 관여하는 언어행위인 것은 이미 공통적인 이해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언어론적 전회와 역사의 시학의 세례를 통해 역사학은 인류학과 함께 자기의 학문적 기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재귀적 자기반성의 학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
3.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역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 선택과 결단을 지탱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좌’임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좌가 광범위한 사료 속에서 특정의 사건을 취사선택하여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서술하게 한다. 그런데 사료 그 자체의 존재가 우발성과 자의성을 낳는다는 것에 대해 미세 토시유키(三瀬利之)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건의 기억과 사실이 기록자의 취사선택과 ‘쓰인 것’ 자체의 가공과 구조화를 거쳐 ‘문서’로서 기록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의 ‘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문서’가 물리적으로 잔존하여 역사가에게 입수되어야 한다. 그리고 ‘쓰인 것’에도 선별이 있는 것처럼 ‘잔존하는 것’ ‘입수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선별이 있다."
즉 역사화의 시좌가 스크리닝을 행하기 이전에 사료의 존재 그 자체가 스크리닝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선별의 기제가 작동된다. 덧붙여 말하면, 역사가의 사좌가 시대정신과 이해관심에 의해 채색되어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성을 띠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기술하는 주체의 ‘선 위치’(포지셔널리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학자가 샬레 속에서 임의의 체험을 핀센트로 집어내는 것처럼, 역사적 사건을 사료 속에서 무작위로 샘플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선택에는 이른바 역사가의 학문적 실존이 달려있다. 당연하게도 특정의 ‘시좌’에 의해 열려진 역사의 시공(時空)은 동방향 동질이 아니라 관심의 원근법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상기된 시공이 퍼스펙티브성을 가지고 어떤 장면은 선명히 클로즈업하고 관계없는 사상(事象)은 새벽녘의 회색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술(記述)에 의해 현전(現前)하는 역사적 공간은 비-유클리트적이다. 역사적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크로노스(연속적ㆍ수량적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好機, 適時)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W.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 Ⅳ에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순간을 말한다.
"지나가버린 사태를 역사적인 것으로 명확히 언표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있었던 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잠시 열린 기억[想起]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그와 같은 과거의 이미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열린 과거의 이미지는 지속되지 않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과 같이,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반드시 스쳐지나간다. 과거는 그것이 인식 가능한 찰나의 일순간을 열어두고,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이로스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여 엿처럼 늘어진’ 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호기(好機)로서 나타나는 이산적(離散的) 시간인 이상 그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그 순간을 기억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건과 연결하여 형상화하기 위해 ‘서사’(narrative)를 직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사’란 카이로스의 도래에 의해 왜곡된 시공간에 못을 박고 고리를 걸고 자일을 걸쳐 나아가는 역사가의 암벽등반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서사’가 특정한 시좌에서 행하는 언어행위인 이상, 거기에는 망각과 억압과 은폐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서사’로부터 배제된 사건들이 침묵의 함성을 지르고 이의를 신청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을 역사의 ‘외부’라 부르자. 역사의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현재화(顯在化)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다. 그와 같이 시좌의 전환이 자각된 사례가 20세기 후반의 역사학과 만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과 ‘젠더’이다.
4. 시좌의 전환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옥시덴트)의 사고 및 표상의 양식이며, 그와 동시에 그것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정치적ㆍ문화적 지배의 양식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개념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제기한 E. 사이드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를 지배하고 재구성하여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양식’이다. 그리고 그는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오리엔트는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양의 제국지배영역 속으로 오리엔트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련의 힘의 조합의 총체에 의해 틀지어지는 표상의 체계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사이드는 ‘심상지리’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사이드의 문제제기는 이른바 양의도형을 보는 것처럼 역사를 보는 시각차를 반영한다. 그에 의해 이제까지 억압되고 은폐된, 일정한 패턴을 강요받은 오리엔트의 이미지가 일신됨과 더불어 거기에 들러붙은 정치적ㆍ문화적 헤게모니의 역학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 ‘시좌의 전환’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뿌리 깊고 진부한 이항대립을 무효화하고 파산시켰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단지 서양과 동양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일반적으로 ‘타자’를 표상할 때의 <지>의 존재방식과 배치에 심각한 반성을 요구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명한 구별 또한 ‘자연계의 사실 보다는 인위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부각한 것이 ‘젠더’라는 개념이다. 젠더는 본래 문법상의 성별을 가리키는 언어학 용어였지만, 1970년대 제2차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생물학적 성차를 가리키는 ‘섹스’에 대해 사회적ㆍ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성차를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젠더 개념을 역사학에 도입했던 존 스콧에 의하면 ‘젠더란 생물학적 성을 가진 신체 속에 강요된 사회적 범주’에 다름 아니며 ‘육체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知)’이다. 그래서 그녀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학이론의 ‘텍스트’와 ‘의미’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젠더 개념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젠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 분야의 전형적인 테마를 다시금 읽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이한 종류의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략] 이 관점에 따르면, 긍정적인 정의란 언제나 그 대립물을 부정 혹은 억압하는 속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범주 간의 대립은 어떤 범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애매함을 억압한다. 어떠한 통일된 개념도 억압 내지는 부정의 요소를 포함하고, 그 속에서 성립되는 고로 불안정하며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중략] 의미를 둘러싼 항쟁은 새로운 대립의 도입과 위계의 역전, 억압된 용어를 양지로 끌고나와 이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의 자연스러운 지위에 도전하며, 그것들의 상호의존성과 각각의 내부의 불안정성을 밝히고자 시도한다."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면, 젠더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여성과 같은 자명한 이항대립 속에 잠재된 억압적 요소를 폭로하고 기존의 범주의 안정성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제까지 서술한 ‘시좌의 전환’의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라는 기존의 제 분야에 ‘여성사’와 ‘젠더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에 젠더의 시점을 도입하는 것은 그 영역을 보편적으로 ‘젠더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에노 치즈코의 “젠더사는 정사(正史)에 대해 ‘여성’이라는 ‘간과해온 영역’(missing perspective)을 부가함으로써 정사의 ‘진리성’을 높이는 것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을 인정함으로써 전방위적으로 정사를 참칭하는 것에 대해 ‘너는 단지 남성사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은 정곡을 지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 인종, 민족, 계급, 인종이라는 개념도 역시 젠더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과 ‘젠더’의 개념에 의해 일어난 시좌의 전환은 이제까지의 역사기술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왔던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발굴하여 현재화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기존에 필요악으로 간주해왔던 <종군위안부>의 존재가 다시금 전쟁에서의 성폭력의 문제로 제기된 것도 그러한 시좌의 전환의 일례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좌의 전환은 역사의 다시쓰기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이란 마스터 내러티브(지배적 서사)에 대한 끊임없는 ‘수정’의 운동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역사가 미래의 재심에 열려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5. 역사의 세대 간 윤리
이미 인구에 회자되어 온 바, T.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은 지금에 이르러 20세기를 흔든 정문일침[頂門の一針]으로 계속된다. 게다가 그가 다른 곳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의 생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어떠한 주장도 단순한 진술에 불과하며 그러한 주장은 희생자들의 행위가 부당한 것인가라는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앞서의 말에서 ‘시를 쓰는 것’이라는 표현보다 ‘역사를 쓰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리라. 역사를 쓰는 자는 그 기술이 과거의 죽은 자에 대한 ‘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 라는 끊임없는 회의와 망설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역사가는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의 선별을 행한다. 따라서 ‘쓰인 것’의 배후에는 선별에 누락된 ‘쓰이지 않은’ 이름 없는 죽은 자들의 행위와 사적이 산을 이루며 북적거리고 있다. 물론 그/그녀들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오오하시 료우스케(大橋良介)의 말을 빌리면, “가령 죽은 자가 무명인 채로 잊혀 진다 해도, 그들은 현재 세계의 발밑에서 침묵하는 과거 세계를―보통의 말로 하면 ‘전통’을―형성한 자로서 무명인 채로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흔적을 찾아내어 ‘서사화하는’ 것은 역사가의 책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의 선별이 [역사가의] 현재적 관심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그 선별의 정당성(‘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은 죽은 자의 시선에 의해 뒷받침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 반대의 의미로 ‘세대 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 통상의 세대 간 윤리는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 관점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사료를 통해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다성성이다. 그로부터 이해가능성과 수용가능성을 가진 어떠한 ‘서사’가 직조되는가는 역사가의 기량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약 거기서 무언가의 통제적 이념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름 없는 죽은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과거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역사기술은 현재 세대 혹은 미래 세대를 향해 “기억하시오!”라는 말을 거는 언어행위이기도 하다. 기억에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해내고 이야기하는 행위는 죽은 자의 시선과 함께 현재 및 미래의 ‘타자의 시선’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세대 간 윤리’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에 윤리를 말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쌍방향으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라는 장소일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유명한 정의를 빌면, 역사를 쓴다는 행위는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그리고 미생한 자들과의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인 것이다.
野家啓一、2009、「歴史を書くという行為」、『歴史/物語の哲学』、岩波書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