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와 마사치의 『自由という牢獄』[자유라는 감옥] 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발표한 세 편의 논문과 책을 펴내면서 새롭게 쓴 한 편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20세기의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본질을 탐색하고 '자유'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본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행보"라는 전세계적인 흐름에 '자유주의'에 관한 오사와 마사치의 비판적 탐구가 다시금 주목받을만하기 때문이리라. 자유, 책임, 공공성, 진보 각각을 키워드로 하여 구성된 네 개의 장 중에서 '자유'를 논한 1장의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냉전체제를 종결지었다.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따르면, 냉전체제의 종결은 자유주의의 인류사적 승리를 뜻한다. 월러스틴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의해 상징되는 인류사의 전환점으로서 '근대'가 세 개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고 말한다. '근대사회'란 정상성으로부터 일정한 일탈을 통해 정상성을 유지하는 사회를 말하며, 이 정상성과 일탈―'변화의 상태화(常態化)'로 규정되는― 가운데 세 개의 대척점으로서 보수주의, 사회주의, 리버럴리즘이 탄생했다. 사회주의가 이 변화를 의식적으로 촉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보수주의는 그 제동을 거는 이데올로기이다. 리버릴리즘은 변화를 억제하지도 않으면서 설계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이다. 프랑스혁명이 주창했던 '근대'의 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 간의 평등이었다. 월러스틴은 '근대'의 인류사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리버럴리즘으로 흡수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 즉 리버럴한 보수주의로 변모해왔으며, 사회주의는 의회를 통해 개혁을 달성하는 리버럴한 사회주의로 정리되어왔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냉전체제가 종결됨으로써 이 세 이데올로기 중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유'의 개념을 논한다.

  오사와 마사치는 근대의 인류사에서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자유'의 개념의 곤란함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1990년대 이후 '애프터 리버럴리즘'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그의 진단은 인류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자유 그 자체에서 자유를 규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음을 말해준다. 

  오사와에 따르면, 근대의 인류사에서 자유의 이념은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성(아이덴티티)을 환원·해소해버리는 상태―원시상태―에서 각 구성원들이 사회의 역할을 선택하고 배분하는 궁극의 메타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이제까지 확고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것은 에스노 내셔널리즘(민족주의·민족공동체)과 그에 깊이 연동된 종교적 원리주의에 의해 지지되어왔다. 다시 말해, 리버럴리즘은 개인 간의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며 그 무관심으로부터 각 개인 간의 평등한 추상적 자유를 이끌어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초기상태'에서 선택의 전제로서 공통의 가치를 지닌 공동체가 상정될 수 있는 것은 그 공동체들 간의 가치와 목표의 차이를 승인하는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상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리버럴리즘으로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태도를 요청한다. 

  한편 오사와는 6,70년대에 제기된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에 주목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등에 의한 지구온난화, 공해, 오염문제의 전인류적 제기는 무한한 자유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지구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광의의 리버럴리즘의 결과이다. 그리고 1990년대 지구환경문제의 급부상은 생태주의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후 사회주의의 공석을 차지하며 리버럴리즘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자유'가 자신의 외부에 '속박'을 두는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속박을 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존 로크에 따르면, 노동의 산물에 대한 소유권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 노동하는 신체가 개인에 속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 신체의 소유자로서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을 행할 수 있다. 신체야말로 개인의 소유물이다. 신체가 사적으로 소유된다면, 그 신체의 죽음 역시 자기결정권 내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기매매와 성매매, 자살 등과 같은 자기결정권이 수반된 신체의 '사용'에 대해 공리적인 전제를 단서로 달아두고자 한다. 이때 자기의 신체는 자기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을 뿐더러 '타자'의 시선―공리적인 전체―으로 응시된다. 이 역설을 오사와 마사치는 '제3자의 심급'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제3자의 심급'이란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승인이 불가피함을 가리킨다. 인간은 어떻게 책임을 지는 주체로 성숙해가는가? 한 인간이 인생의 시발점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는 책임이 없다'는 "이노센스"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그 후의 인과적 조건으로 부여되는 후속의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없다. 나의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닌데 나의 탄생의 후속적 행위가 나의 선택일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인간은 본원적으로 수동적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책임지는 주체로 역전되어야 한다.  

  자, 이 역전의 순간은 부모-자식관계에서 포착되고, 양부모-자식관계에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오사와는 독일의 어느 정신과 의사의 정신분석집에서 읽고 쓰지를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온 "프레드릭"이라는 일곱살 된 아이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아이는 입양된 후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입양되기 전의 자신의 이름 그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에 대고 혹은 책상 밑에 대고 아이의 입양되기 전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르만, 아르만.." 그러자 그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입양되기 전 이름의 호명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이가 자신의 외부로부터 자신이 승인됨에 따라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닌 허공에서 불리는 이름에 반응한 것은 자신을 승인하는 타자가 마치 영화 밖에서 들려오는 나레이션처럼 자신의 시공간 밖에 있는 타자이어야했기 때문이다. 오사와는 주체의 승인은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제3자의 심급'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이 '제3자의 심급'은 '자신'의 경험적인 공간 어디에도 존재의 장을 확보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하며, 이에 따라 '자기' 그 자체의 내적인 계기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한다. 즉 '제3자의 심급'은 '자기'의 내적인 타자성을 탈환함으로써 존립하며, '제3자의 심급'에 의해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주체로 성숙한다.  

  이와 같이 자유는 타자로부터의 구속을 조건으로 한다. 구속 없는 상태야말로―즉 완전한 자유야말로―자유의 부정이다. 인간은 자유의 무한한 확장에서 참을 수 없는 구속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면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순수한 자유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구속을 초래한다. 리버럴리즘은 초월적 타자(신)에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인 의지를 지향하지만, 그 지향은 언제나 해방의 수단으로서 에스노 내셔널리즘 혹은 생태주의로 귀속된다.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리버럴리즘에 의해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감각되는 것은 그것이 주체의 승인처로서 선택되어야 할 대상이자 선택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버럴리즘은 언제나 자신의 라이벌을 필요로 하며, 그 라이벌을 불가결한 동지로 전환한다. 

 

大澤真幸『自由という牢獄』岩波書店、2015年3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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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쓴다는 행위 그 논리와 윤리

노에 케이이치(野家啓一)

   

지금, 내 안에는 죽은 자와 산자의 구별이 없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섞여 내 마음을 휘젓는다츠루미 슌스케(鶴見俊輔)

 

  1. 문제 상황

  사람이 밥만으로 살 수 없듯이 현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과거의 추억에 몸을 맡기고 때로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설레면서 인간은 현재라는 순간을 살아간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만년필을 보아도, 오랜 세월의 영광과 함께 그 세월의 흔적과 때가 묻은 이 만년필이야말로 돌아올 새해 연하장을 예비한다. 이처럼 현재라는 시점에는 과거와 미래가 몇 겹씩 중첩되어 있다. 여기에는 흘러간 물리학적 시간뿐만 아니라 기억과 상상에 의해 쌓아올려진 지질학적 시간도 담겨있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는 비대칭적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덧없이 사라지지만, 과거의 내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현재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불가결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개인과 공동체, 국가의 아이덴티티, 자기란 타자인가라는 물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물론 아이덴티티의 주장은 내셔널리즘의 문제 권역과 맞닿아있으며, 그 이면에 배제와 억압과 차별이라는 네거티브의 측면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기술은 아이덴티티 폴리틱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정치성을 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자기의 존재증명과 그 부정을 둘러싸고 제기된 역사수정주의논쟁을 비롯한 몇몇 논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청년기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예리한 고찰을 행한 E. H. 에릭슨은 아이덴티티를 자기의 일관성연속성, 그리고 타자에 의한 자기의 공유승인이라는 양 측면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역사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관성과 연속성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논리적으로 파탄날 수밖에 없으며, 타자에 의한 공유승인을 결여한 역사기술은 윤리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거만한 자[夜郎自大]의 독백으로 화할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기술은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또 윤리적 정당성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논리와 윤리라는 두 초점의 타원형의 서사’[物語]이. (역사기술의 논리적 측면에 대해, 무엇보다 인과성법칙성에 대해서는 본권의 이세다 테츠지(伊勢田哲治)의 논문을 참고하시오.)

  지금 서사’[物語](narrative)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는 말에 의해 전승되며 남겨진 기록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해놓고자 한 때문이다. 문자가 없는 곳에서는 구전에 의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지만, 말이 없는 곳에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돌덩이는 세계상실적(weltlos)이며, 동물은 세계궁핍적(weltarm)이며, 인간은 세계형성적(weltbildend)이다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이를 인용하면, 동물은 말을 갖지 않는 고로 역사궁핍적인 것에 비해, 로고스를 가진 동물로서의 인간만이 역사형성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언어로 말해진다는 자명한 사실이야말로 20세기의 역사학과 역사철학이 직면해야 했던 아포리아이다. 언어론적 전회이다. (이것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와 그 귀결에 대해서는 본권의 오다나카 나오키(小田中直樹)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런데 역사가 언어로 쓰인다 해도 역사기술이 모든 사건을 말할 수는 없고 쓸 수도 없다. 그것은 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자신의 이해관심과 동기에 따라 말하고 싶은 말할 만큼 가치 있는 것’, 즉 그 시대의 의미가치있는 사건을 선택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점내지는 퍼스펙티브이며, 이 속에는 이미 일종의 가치판단이 작동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그의 퍼스펙티브에 포착되지 않은 사건은 망각되어 역사의 지층에 침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화(顯在化)된 역사기술의 배후에서는 망각된 사건들이 신음소리 내지는 침묵을 강요받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 이야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가 되지 못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앉아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묻힌 사료를 발굴하여 실증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레토릭으로 재현하는 말하는 손의 능동적 관여가 필요하다. 기술(記述)이 만들어내는 역사가 역사가의 시점과 퍼스펙티브에 의해 선택된 것이라면, 망각되고 은폐된 목소리를 현재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 요구된다. 20세기 후반의 역사학에서 그러한 시좌의 전화을 가져온 것은 오리엔탈리즘 비판, 젠더사,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라는 새로운 개념장치의 도입이었다. 그것들을 통해 이제까지 공적인 역사에의 등장을 거부당한 마이너리티에 속한 사람들의 침묵에 말을 돌려주었던 것이다. (상세한 것은 본권의 모리 아키코(森明子)의 논문을 참조하시오.) 그리고 시좌의 전환은 동시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윤리적 태도의 변경을 부가한다.

 

  2. 언어론적 전회의 귀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역사학이 역사는 언어로 말한다는 간명한 사실을 다시금 자각해야 하는 것은 언어론적 전회라 불리는 사건 때문이다. 다만 언어론적 전회에서 20세기 초두 철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과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과 인류학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언어론에서 말하자면, 전자의 기반이 된 것은 G.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B. 러셀에 의해 체계화된 기호논리학이며, 후자의 기반은 F. 소쉬르에 연원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이론이다.

  본래 언어론적 전회’(the linguistic turn)G. 베르그만이 만든 용어이며R. 로티가 자신이 편찬한 분석철학의 선집(anthology)의 제목으로 붙인 이후 인구에 회자된 개념이다. 그 장대한 서문에서 로티는 언어철학자들의 공통의 지향을 언어를 개량함으로써 혹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를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결(혹은 해소)하고자 하는 견해로 요약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이 의식과 세계의 관계를 내성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고자 한 것이었음에 비해, 현대의 철학은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언어분석적 방법에 의해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전환은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에 의해 단적으로 표명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명제와 사태, 말과 사물[대상] 간의 지시 관계가 자명한 전제로서 의심되지 않는다. 이른바 언어와 세계란 예정조화적인 대응관계(寫像關係)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레게와 러셀을 포함해서 제1의 언어론적 전회를 이끌었던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현재를 지시하는 투명한 매체로서 다루는 실재론적 언어관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2의 언어론적 전회에서는 언어와 실재의 관계가 현저하게 불투명한 것이다.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자에 따르면, 언어는 실체적인 지시 관계를 갖지 않는 차이의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즉 언어의 본질은 언어가 세계의 존재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의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이 래디컬한 귀결로서 포스트구조주의가 발흥했고, J. 데리다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경계를 유동화하고 텍스트에 외부는 없다고 단언했으며, R. 바르트는 의미작용에 있어서 작가의 특권성을 부인하는 작가의 죽음을 선고했다.

  이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조류를 배경으로 하는 언어론적 전회의 경향은 역사기술의 방법론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료비판과 실증적 절차에 기반한 과거의 사건과 객관적 복원이라는 L. 랑케 이후의 근대역사학의 근본전제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로 기술된 사료가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텍스트에 불과하여, 그 외부에 있는 역사적 현실 간에 일의적(一義的)인 지시 관계를 갖지 못한다면, 과거의 복원이라는 역사가의 작업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론적 전회는 역사적 사실과 픽션 사이에 견인되어야 하는 명확한 경계선을 애매하게 만들고 역사학의 목표를 사실의 탐구로부터 의미표상의 탐구로 전환시킨다. 이것이 역사학의 위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중세역사가인 가브리엘 슈피겔(Gabrielle Spiegel)은 이를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역사역사주의중세 텍스트의 사회이론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를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조사한다면 역사의 텍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흔들림 없는 인간중심주의의 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논쟁에서 통렬한 공격을 받아왔다. [중략] 역사가의 입장에서 현재의 비평의 진행과정을 바라보면서 받은 인상은 역사를 해체하는 움직임, 현실과 유리되어 언어로 돌진하는, 언어야말로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주체이며 사회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파악하는 추세이다. "

  이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로렌스 스톤은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 역사학과 포스트모던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기고하면서, ‘역사학자는 역사학이란 무엇을 하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자신감을 잃을 위기에 직면했다고 호소했다. 그에 따르면, 작금의 위기의 진원은 소쉬르로 시작해서 데리다에 이르는 언어학, 상징인류학의 영향, 거기에 뉴히스토리즘의 세 조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가 이 피난처 없는 올가미에서 탈출하여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며 앞서 슈피겔의 논문을 추천했다. 이를 계기로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지에는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둘러싼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스톤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에서 또 하나의 위기의 연원으로서 잊어서 안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헤이튼 호와이트에 의한 역사의 시학의 제창이다. 호와이트는 메타히스토리(1973)에서 19세기의 대표적인 역사서를 참조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의 심층구조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기술이란 서사적인 산문적 언설의 형태를 취하는 언어구조체이며, 메타포(은유)와 메토니미(환유) 등의 비유표현을 채용하여 플롯의 구성을 행하는 시적행위에 다름 아니다.

  즉 역사기술에는 수사적 요소가 불가결하며, 대립하는 해석전략의 경합 속에서 역사에 관해 동일한 하나의 퍼스펙티브를 취사선택하는 최선의 기반은 인식론적인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미학적 혹은 도덕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호와이트의 논의에 대해서는 아우슈비츠와 표상의 한계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카를로 긴스부르그가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역사의 시학에 의한 문제제기의 의미가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역사기술이 이윽고 소박한 실증주의와 경험주의의 지점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역사기술]이 상상력과 레토릭이 관여하는 언어행위인 것은 이미 공통적인 이해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언어론적 전회와 역사의 시학의 세례를 통해 역사학은 인류학과 함께 자기의 학문적 기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재귀적 자기반성의 학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해나간다고 할 수 있다.

 

  3.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역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으며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만을 선택해서 서술하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그 선택과 결단을 지탱하는 것은 역사가의 시좌임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좌가 광범위한 사료 속에서 특정의 사건을 취사선택하여 그것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서술하게 한다. 그런데 사료 그 자체의 존재가 우발성과 자의성을 낳는다는 것에 대해 미세 토시유키(三瀬利之)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사건의 기억과 사실이 기록자의 취사선택과 쓰인 것자체의 가공과 구조화를 거쳐 문서로서 기록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대로 역사가의 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문서가 물리적으로 잔존하여 역사가에게 입수되어야 한다. 그리고 쓰인 것에도 선별이 있는 것처럼 잔존하는 것’ ‘입수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로 선별이 있다."

  즉 역사화의 시좌가 스크리닝을 행하기 이전에 사료의 존재 그 자체가 스크리닝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선별의 기제가 작동된다. 덧붙여 말하면, 역사가의 사좌가 시대정신과 이해관심에 의해 채색되어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성을 띠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기술하는 주체의 선 위치’(포지셔널리티)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학자가 샬레 속에서 임의의 체험을 핀센트로 집어내는 것처럼, 역사적 사건을 사료 속에서 무작위로 샘플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선택에는 이른바 역사가의 학문적 실존이 달려있다. 당연하게도 특정의 시좌에 의해 열려진 역사의 시공(時空)은 동방향 동질이 아니라 관심의 원근법에 따라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상기된 시공이 퍼스펙티브성을 가지고 어떤 장면은 선명히 클로즈업하고 관계없는 사상(事象)은 새벽녘의 회색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술(記述)에 의해 현전(現前)하는 역사적 공간은 비-유클리트적이다. 역사적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크로노스(연속적수량적 시간)가 아니라 카이로스(好機, 適時)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서 카이로스란 W.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 에서 말했던 다음과 같은 순간을 말한다.

"지나가버린 사태를 역사적인 것으로 명확히 언표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있었던 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잠시 열린 기억[想起]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유물론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그와 같은 과거의 이미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열린 과거의 이미지는 지속되지 않는다. 벤야민이 말한 것과 같이,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반드시 스쳐지나간다. 과거는 그것이 인식 가능한 찰나의 일순간을 열어두고,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이로스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여 엿처럼 늘어진연속적 시간이 아니라 호기(好機)로서 나타나는 이산적(離散的) 시간인 이상 그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그 순간을 기억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건과 연결하여 형상화하기 위해 서사’(narrative)를 직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사란 카이로스의 도래에 의해 왜곡된 시공간에 못을 박고 고리를 걸고 자일을 걸쳐 나아가는 역사가의 암벽등반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서사가 특정한 시좌에서 행하는 언어행위인 이상, 거기에는 망각과 억압과 은폐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서사로부터 배제된 사건들이 침묵의 함성을 지르고 이의를 신청할 것임은 분명하다. 그것을 역사의 외부라 부르자. 역사의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현재화(顯在化)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시좌의 전환이다. 그와 같이 시좌의 전환이 자각된 사례가 20세기 후반의 역사학과 만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젠더이다.

  

  4. 시좌의 전환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옥시덴트)사고 및 표상의 양식이며, 그와 동시에 그것이 서양의 동양에 대한 정치적문화적 지배의 양식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개념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제기한 E. 사이드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를 지배하고 재구성하여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양식이다. 그리고 그는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오리엔트는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서양의 제국지배영역 속으로 오리엔트를 억지로 끌어들이는 일련의 힘의 조합의 총체에 의해 틀지어지는 표상의 체계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사이드는 심상지리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사이드의 문제제기는 이른바 양의도형을 보는 것처럼 역사를 보는 시각차를 반영한다. 그에 의해 이제까지 억압되고 은폐된, 일정한 패턴을 강요받은 오리엔트의 이미지가 일신됨과 더불어 거기에 들러붙은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의 역학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시좌의 전환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뿌리 깊고 진부한 이항대립을 무효화하고 파산시켰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비판은 단지 서양과 동양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일반적으로 타자를 표상할 때의 <>의 존재방식과 배치에 심각한 반성을 요구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명한 구별 또한 자연계의 사실 보다는 인위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부각한 것이 젠더라는 개념이다. 젠더는 본래 문법상의 성별을 가리키는 언어학 용어였지만, 1970년대 제2차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생물학적 성차를 가리키는 섹스에 대해 사회적문화적으로 형성되는 성차를 표현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젠더 개념을 역사학에 도입했던 존 스콧에 의하면 젠더란 생물학적 성을 가진 신체 속에 강요된 사회적 범주에 다름 아니며 육체적 차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지()’이다. 그래서 그녀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학이론의 텍스트의미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젠더 개념이 역사학에 주었던 임팩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 젠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 분야의 전형적인 테마를 다시금 읽어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이한 종류의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략] 이 관점에 따르면, 긍정적인 정의란 언제나 그 대립물을 부정 혹은 억압하는 속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범주 간의 대립은 어떤 범주의 내부에 존재하는 애매함을 억압한다. 어떠한 통일된 개념도 억압 내지는 부정의 요소를 포함하고, 그 속에서 성립되는 고로 불안정하며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 [중략] 의미를 둘러싼 항쟁은 새로운 대립의 도입과 위계의 역전, 억압된 용어를 양지로 끌고나와 이분된 것처럼 보이는 것의 자연스러운 지위에 도전하며, 그것들의 상호의존성과 각각의 내부의 불안정성을 밝히고자 시도한다."

  조금 추상적으로 말하면, 젠더 개념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여성과 같은 자명한 이항대립 속에 잠재된 억압적 요소를 폭로하고 기존의 범주의 안정성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이제까지 서술한 시좌의 전환의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라는 기존의 제 분야에 여성사젠더사라는 새로운 영역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에 젠더의 시점을 도입하는 것은 그 영역을 보편적으로 젠더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에노 치즈코의 젠더사는 정사(正史)에 대해 여성이라는 간과해온 영역’(missing perspective)을 부가함으로써 정사의 진리성을 높이는 것에 공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향을 인정함으로써 전방위적으로 정사를 참칭하는 것에 대해 너는 단지 남성사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라는 지적은 정곡을 지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 인종, 민족, 계급, 인종이라는 개념도 역시 젠더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오리엔탈리즘젠더의 개념에 의해 일어난 시좌의 전환은 이제까지의 역사기술에서 망각되고 은폐되어 왔던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발굴하여 현재화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수정주의 논쟁 속에서 기존에 필요악으로 간주해왔던 <종군위안부>의 존재가 다시금 전쟁에서의 성폭력의 문제로 제기된 것도 그러한 시좌의 전환의 일례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시좌의 전환은 역사의 다시쓰기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이란 마스터 내러티브(지배적 서사)에 대한 끊임없는 수정의 운동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역사가 미래의 재심에 열려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5. 역사의 세대 간 윤리

  이미 인구에 회자되어 온 바, T.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은 지금에 이르러 20세기를 흔든 정문일침[頂門一針]으로 계속된다. 게다가 그가 다른 곳에서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의 생존이 긍정적인 것이라는 어떠한 주장도 단순한 진술에 불과하며 그러한 주장은 희생자들의 행위가 부당한 것인가라는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앞서의 말에서 시를 쓰는 것이라는 표현보다 역사를 쓰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이리라. 역사를 쓰는 자는 그 기술이 과거의 죽은 자에 대한 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 라는 끊임없는 회의와 망설임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역사가는 말하기에 가치 있는 것의 선별을 행한다. 따라서 쓰인 것의 배후에는 선별에 누락된 쓰이지 않은이름 없는 죽은 자들의 행위와 사적이 산을 이루며 북적거리고 있다. 물론 그/그녀들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오오하시 료우스케(大橋良介)의 말을 빌리면, “가령 죽은 자가 무명인 채로 잊혀 진다 해도, 그들은 현재 세계의 발밑에서 침묵하는 과거 세계를보통의 말로 하면 전통형성한 자로서 무명인 채로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흔적을 찾아내어 서사화하는것은 역사가의 책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의 선별이 [역사가의] 현재적 관심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그 선별의 정당성(‘부당한 행위인가 아닌가)은 죽은 자의 시선에 의해 뒷받침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 반대의 의미로 세대 간 윤리라고 부를 수 있다. 통상의 세대 간 윤리는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 관점에서 논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사료를 통해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다성성이다. 그로부터 이해가능성과 수용가능성을 가진 어떠한 서사가 직조되는가는 역사가의 기량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약 거기서 무언가의 통제적 이념이 움직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름 없는 죽은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과거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역사기술은 현재 세대 혹은 미래 세대를 향해 기억하시오!”라는 말을 거는 언어행위이기도 하다. 기억에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해내고 이야기하는 행위는 죽은 자의 시선과 함께 현재 및 미래의 타자의 시선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세대 간 윤리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역사기술에 윤리를 말할 여지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쌍방향으로 향하는 세대 간 윤리라는 장소일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유명한 정의를 빌면, 역사를 쓴다는 행위는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그리고 미생한 자들과의 사이를 채우는 알 수 없는 대화인 것이다 

 

野家啓一2009、「歴史くという行為」、『歴史物語哲学』、岩波書店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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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히토츠바시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시라이 사토시의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괴물같은 책"이라면서.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말 그대로 '훑어보았다". 괴물은 무슨..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 나 대학 때 이골이 나도록 듣고 보았던 것들이다. 2학년이 끝나갈 즈음, 선배들은 학생회활동과 시위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 조직운동을 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합숙세미나를 했다. 레닌의 혁명론과 국가론은 운동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임과 동시에 조직운동원의 이념적 잣대였다. 그래서 레닌의 책들은 조직운동을 정리하고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처분대상 1호이기도 했다 . 내게 레닌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내게 레닌은 지리멸렬한 날들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없는 부채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레닌을 다시 마주할 이유가 무언가. 책의 서두와 1부를 읽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레닌의 표상 그리고 레닌론에 관한 선행연구를 논한다.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익숙한 레닌.. 재밌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최근 페친의 권유로 가입한 "소련 역사 공부 모임"이라는 페이지에 레닌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글이 올라왔다. 이 책을 권했다. 이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댓글로 말이 오가는 중에 권유한 자의 책임의식때문인지 괜한 오지랖이 발동해서인지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아니 끝까지 읽었다.

  시라이 사토시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이 책은 2007년도에 나온 것이다. 아무도 레닌을 돌아보지 않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리고 2013년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의 사회사상계를 평정했다, 『永続敗戦論戦後日本核心』[영속패전론: 전후일본의 핵심]이라는 단 한권의 저술로. 괴물이군.

  <미완의 레닌>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개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이고, 2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규명해낸다. 레닌이라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인류사의 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3부는 <국가와 혁명>을 통해 '힘'의 정치를 논한다. 이제서야 나는 이 책에 놀란다. "괴물같은 책"이군.

  아시다시피 레닌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할 것'을 주창하며, 잘 나가던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을 분열시킨다(맨셰비키와 볼셰비키). 농민과 노동자 등의 약자의 편에 섰던 러시아의 '양심적이고 전통적인' 인텔리겐차들을 떨구어내고 경제주의자, 조합주의자 등의 개량주의자들을 축출한다. 이 와중에 당 내부의 분란에 진저리치던 유대인 분트가 집단 탈당한다. 예전에 나는 러시아혁명사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선배들은 지식인의 브나르도 운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개량주의의 비과학성을 논했을 것이다. 이를 준거로 레닌의 당내투쟁의 정당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1905년 당내 투쟁에서 마키아벨리즘의 화신과도 같았던 볼셰비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글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은 '계급의식의 외부주입설'이다.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조직원리를 갖는 전위정당이 필요하다.

  시라이 사토시는 이 '사상의 외부성'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해낸다. 레닌(1870~1924)과 프로이트(1856~1939)는 개인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르다. 다만 이 둘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통해 레닌을 분석하고 다시 분석해낸 레닌에 의해 프로이트를 해석하는 이 방법론적 비교연구는 누구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등의 지성사의 재구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 시대의 인류사, 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어본 사상가로서 레닌과 프로이트를 위치지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근대'를 논파해내는 것이다.

  이 두 사상가의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고자 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억압을 논했다. 이 두 사상가는 궁극적으로 '억압된 자의 해방'을 겨냥한다. 여기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독해해보자. 레닌은 '자연발생적인' 노동자투쟁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자본주의라는 '근대'는 정치로부터 경제를 분리해내며, 계급적·정치적 의식을 경제투쟁의 외부로 밀어낸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내발적 투쟁은 경제주의·조합주의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착취를 완화하는 투쟁으로 귀결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현실화')해야 하는데, 이 '객관화'는 경제투쟁으로 해소되는 욕망에 의거해서는 다다를 수 없고 의식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외부성으로 주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라이 사토시가 여기서 논의를 멈추었다면, 그의 논의는 근대정당론의 저차원적인 아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객관화'를 '죽음의 충동'으로 밀어붙인다.

  막스 베버가 즉물적인 다신교에 비해 일신교인 유대교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외부성을  강하게 견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일신교가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즉 '원부'(原父)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금기하여 족외혼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내고 '원부'와 동일시된 토템동물을 숭배함으로써 다시는 원부살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욕망을 단념한 인류의 다신교적 신앙으로는 그 살해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다. 다만 무의식적인 '죽음의 충동'(공격충동)으로 억압될 뿐이며 신경증적인 강박반복으로 회귀될 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아들의 욕망의 재현이며, 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들을 또 다시 살해함으로써 성립된 기독교는 원부살해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일신교에서 토테미즘으로의 퇴행을 뜻한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의식이 아니라 다만 의식으로는 예측되지 않는 부지불식간 분출하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의식의 외부에 있다. 그리고 일신교는 이 충동의 에너지를 신경증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이다. 다시 말해 일신교는 '죽음의 충동'의 방향을 전환시킨다. 

  레닌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외부에서 주입한 '죽음의 충동'(일상적 착취에 의한 보편적 트라우마)을 밖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위해 우상(토템이라는 다신교: 경제주의적 보상) 숭배를 금한다. 우리가 타자의 사랑을 상실할 때 느끼는 불안은 우리앞에 세워둔, 우리와 동일시된 토템에 대한 심성에 다름 아니다. 그 토템은 우월한 타자이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초자아에 대한 자아 자신의 공격충동의 대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토템의 심성에서 사랑은 죽음과 양면을 이룬다. 이 주체화의 문제에서 레닌은 일신교의 이미지, 즉 강박적으로 '죽음의 충동'을 '쾌감원칙의 피안'으로 밀어내는 일신교의 이미지를 빌어 '죽음의 충동'의 반전을 개시한다.

  시라이 사토시는 3부에서 <국가와 혁명>을 통해 '죽음의 충동'을 둘러싼 힘의 동학을 논한다. 자본주의의 계급 간의 직접적인 대립과 그 모순을 은폐하는 국가(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법치국가를 지향하는 '중성국가'이다), 그러나 그 근대국가는 계급적 대립의 힘의 총량과 방향에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의 법치는 부르조아 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면서도, 사유재산의 보호와 시장경제의 원리의 보장이라는 부르조아의 계급적 이해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힘―"공권력"―은 계급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힘'이다. 레닌은 다수에 의한 다수의 무장에 이르러서야 '보편적 힘'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근대국가가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국민국가라는 개념적 규정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제국주의화로 나아갈 때에 그와 동시에 전인민을 무장시킨다("총동원체제"). 레닌이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하자고 한 것은 '특수한 힘'에서 '보편적 힘'으로 양질변화를 두고 한 말이다. 레닌에게 혁명의 힘―'죽음의 충동'이라는 에너지―은 이미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현실성"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레닌 사상의 핵심이다.      

  레닌의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지구상에 없다. 이제 자본주의는, 시라이 사토시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지표면을 장악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전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외부성, 즉 또 다른 사회구축의 원리가 강박적으로 도래한다면, 레닌의 "혁명의 현실성"은 '죽음의 충동'처럼, 현재에 투사된 미래처럼 강박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충동'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정치가 품고있는 거대한 비밀은 인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인류는 "말과 사물의 일치"라는 자연상태―"자유"―를 진짜 현실로 늘 탐구하는 것이다. 

 

白井聡, 2007,未完のレーニン<>思想』,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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