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은 시대와 공명해야 그 의의를 갖는다. 이 글은 오늘날 고현학이 다시금 환기되는 것은 21세기 인간-비인간-사물 세계와 공명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 글은 다수성(multiplicity) 혹은 다중심성(multi-centrism)은 주변성에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성의 생활적(신체적) 감각에 의해 지지되며 그것과 병렬적으로 놓인다는 것을 주장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고현학 연구자의 과제로 남는다.

 


 

 

다양성으로부터의 비판 정신: 곤 와지로의 도시 관찰에 관한 고찰

 

 

오노데라 켄타(小野寺研太)

 

 

서론

 

10여 년 전 장마철에 가마쿠라(鎌倉)의 수국[紫陽花]를 보러 갔을 때, 처음으로 쿠사리토이(鎖樋)”라는 것을 알았다. “쿠사리토이란 지붕의 배수홈통을 따라 흐른 빗물을 지면에 흘러내리게 하는 빗물통의 일종이다. 빗물은 꽃잎이나 바퀴 등의 다양한 모티브를 연상시키는 쇠사슬 모양의 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내리는 비와는 다른 속도로 리드미컬하게 혹은 무작위적으로 지면에 떨어진다. 태어나서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온 나는 이런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신선했다.

쿠사리토이를 알게 된 것은 민가를 개축한 과자가게[甘味処]의 현관이었다. 주변을 잘 살펴보면, 쿠사리토이가 있는 몇몇 집을 찾을 수 있다. 곤 와지로가 같은 장소에 있었다면, 집집마다 앞에 서서 지붕에 매달린 쿠사리토이를 상세하게 스케치했을까? 그라면 채집의 시작은 쿠사리토이가 아니라 보통의 빗물통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보통의 빗물통만 채집한 기록을 남겼다. ‘멋진 빗물통따위가 아니라 실용적이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물건에 대해 그 사소한 차이나 틈, 결손까지도 흘려버리지 않고 모았다. 그렇게 해서 당연한형용이 의미를 이룰 만큼의 다양한 현실을 기록했다. 이것이 곤 와지로의 고현학이 가진 매력 중 하나일 것이다.

곤 와지로의 고현학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사상적(思想的) 의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다루려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것이 그렇게 명시적으로 쓰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곤 와지로는 단편 채집은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를 분명히 드러내고 발전의 레일을 깔기 위한 침목의 역할을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도 충분한다고 말한다. 곤 와지로 본인의 글에서 고현학의 의의를 미루어 생각해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생활의 단편 단편을 중시한다는 곤 와지로의 자세에 주목하고 그 자세를 공유하는 논고의 취지 하에서 곤 와지로의 사상적 측면을 간접적으로 추출하고자 한다. 두 번째 이유는 생활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것의 가능성을 고찰하고 싶기 때문이다. 곤 와지로의 고현학은 학문으로서는 발육 불량의 상태에 멈췄다고 말해도 무방하다라고들 말한다. 그 의미에서 고현학이란 미완의 학문’, 이른바 하나의 가능성이다. 어떤 가능성일까? 나는 고현학이 생활에 대한 비판 정신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논의를 위해 필요한 논점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는 고현학의 방법적 특징의 검토, 둘째는 1925년에 실시된 대조적인 도시풍속관찰의 비교, 셋째는 도시(에도/도쿄)의 주변부에 주목한 이치무라 히로마사(巿村弘正, 1945~ 사상사)의 논고와의 사상적인 관계성이다.

 

1. 고현학의 방법적 특징

 

곤 와지로 자신이 고현학의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는 고현학이란 무엇인가(1928)고현학 총론(1931) 등의 글에서 찾아낼 수 있다. 정리하면 다음의 세 지점을 들 수 있다.

첫째로 곤 와지로는 고현학의 객관성을 중시했다. 고현학은 그 대상의 신변잡기성으로 인해 학문이라기보다는 저널리즘에 가까우며 독특한 취향으로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는 것은 그 자신 또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과 대비되는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고고학이 고대의 유물을 관찰하듯이 고현학은 객관적으로 현대인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세간에 대한 선망도 동정도 이른바 보통의 형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며, “동물학자나 식물학자가 동물이나 식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우리가 우리의 대상인 문화인을 향해있는 것과는 차이가 없다고 곤 와지로는 말한다.

둘째로 관찰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현학은 물질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가령 관찰자가 달라져도 공통으로 관찰 가능한 생활의 표층적 측면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걷는 모양이나 거리의 사람들, 일하는 모습, 습관 등의 사람의 행동’, 주거에 관한 것, 의복에 관한 것이다. 고현학은 그러한 대상물을 관찰하거나 스케치하면서 현대생활의 물질적인 표현을 채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곤 와지로는 생산된 재화를 단순히 가치(교환가치) 대상물로 취급하는상품학과 고현학을 비교하면서 고현학은 재화를 사용대상물로서 다루며 그 물건의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고현학은 원칙적으로 사물이 사용되는 장소에서 조사하고, 그렇게 해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며그에 따라 재화 자체에 포함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셋째로 그렇게 채집된 결과를 고현학에서는 통계로 표현하고 그와 동시에 그러한 통계 결과를 비교해서 표층적인 관찰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상(事象)의 모습을 부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도쿄ㆍ긴자에서는 여성의 쪽진머리 양식이 일본머리 3, 서양머리 4’인 것에 반해 오사카ㆍ신사이바이(心斎橋)에서는 비율이 반대가 된다. 이 결과는 도쿄에 사는 아녀자들은 그 숫자가 보여주는 만큼 전통적인 생활과 떨어져 있다고 우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가설로 이어진다. 혹은 와세다 대학 주변에 최근 수년간 찻집이 1.5배 가까이 증가한 현상으로부터 도쿄의 다른 장소는 어떨까, 지방 도시는 어떨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왜 증가할까등등의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고현학이 모으는 관찰은 아직 단편적이고 계속해서 데이터의 충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곤 와지로 또한 자각했다. 그러나 경험 가능한 관찰 기록의 통계를 근거로 해서 그로부터 숨겨진 사상(事象)의 측면을 밝히려는 방법적 태도는 분명 과학적이다.

이처럼 곤 와지로가 고현학의 학문적 성격을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일종의 과학으로 위치 지은 배경에는 연관 학문, 특히 민속학이나 인류학과의 긴장 관계가 놓여 있다. 잘 알려진 바, 곤 와지로는 야나기타 구니오로부터 사사받았고 민속학적 연구에서 학문 활동을 시작했다.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도시에까지 관심사가 확대되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생활의 실상을 파악해간다는 점에서 민속학과 고현학은 중첩된다. 즉 관찰대상인 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민속학(혹은 인류학)과 고현학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고현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불가결한 작업이었다. 그렇다면 고현학과 민속학의 학문적 차이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생활 관찰에 의해 추출하고자 하는 시대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곤 와지로는 사회의 역사적 도정을 미신적인 생활상태, 바꿔 말하면 관습적[]인 생활상태로부터 지식적인 생활상태, 바꿔 말하면 과학에 기초한 생활상태로 점차 이행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도정을 세 단계로 나누고, 한쪽 극을 가상의 원시사회에서의 미신 100%에서 지식적 요소는 제로”(이것을 단계 로 가정한다)인 것으로 하고, 또 한쪽 극을 가상의 성장사회에서의 지식 100%에서 미신적 요소는 제로”(이것을 단계 로 가정한다)인 것으로 하며, 그 사이의 사회()전자와 후자의 혼합시대, 한쪽은 점차 점차 줄어들고 다른 한쪽은 점차 늘어나는 시대로 나아가는것으로 가정한다. 곤 와지로에 의하면, 현대는 의 시대이며, 고현학은 이 혼합시대의 특징을 추출하는 학문이다. 이에 반해 민속학이나 인류학은 이전의 시대(곤 와지로의 말을 빌리면 봉건시대와 원시시대)를 대상으로 한다.

곤 와지로의 말을 빌면, 민속학을 지탱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사상(事象)을 현재 속에 남기고자 하는 정열이다. 민속학은 이미 문명화된 국가 안에 남겨져 있는 과거의(봉건시대의) 평민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봉건시대적 색채가 상당 부분 잔존하고 있는 시골에서 자료 채집에 종사하는 경향이 있으며 특히 산간지 혹은 섬에 그 시선을 둔다”. 곤 와지로는 민속학자를 가리켜 현존 사상(事象)을 매체로 해서 봉건사회의 생활을 연구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이에 반해 고현학이 주시하는 것은 미신과 지식 혹은 습관과 과학이 교차하는 시대의 존재 양식, 그러한 현대의 사상(事象) 전반이다. 민속학이 관찰대상의 옛 그대로의 모습을 연구한다고 한다면, 고현학은 대상의 변해가는 모습을 파악하고자 한다. 왜 고현학은 대도시에 에너지를 집중시키는가에 대해 곤 와지로는 고현학 총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곳[대도시]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른바 문화의 중심핵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막연한 인식뿐만 아니라 그곳의 정경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로서 주민의 계급 격차, 직업의 다양한 종류, 물자의 종류 및 양의 풍부함 등등 풍속상의 당연한 착종 상태를 대상으로 한다는 어려움에서 기인하는 긴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 핵심의 결과로서 민속학이 촌락을 중심으로 하고 고현학이 도시를 중심으로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양자의 차이는 동시대의 농촌을 선택하거나 도시를 선택한다는 단순한 영역선택의 차이로 환원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함의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관동대지진 이후 부흥하는 도쿄의 모습을 다룬다는 관심사로부터 시작한 그의 연구 서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곤 와지로의 고현학은 사회의 동태성 파악을 목표로 하며 그 결과로서 당시 도쿄의 다양함을 기술하게 된 것이다.

 

2. 1925년의 도시관찰기록

 

그렇다면 고현학이 1920년대 도쿄를 어떻게 다루었을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료로 삼은 것은 1925년 잡지 부인공론에 발표한 도쿄 긴자 거리 풍속기록(이하 긴자 기록)혼죠후카가와 빈민굴 부근 풍속채집(이하 혼죠후카가와 기록)이라는 두 기록물이다.

긴자 기록19255월에 나흘간 행해진 노상관찰의 기록물이다. “쿄바시(京橋)에서 신바시(新橋)까지의 도보를 대상으로 하며” “조사구간을 정해진 속도로 걸으며, 전방에서 걸어오는 사람만을 조사한다는 상세한 조사규정을 설정하고 부인공론편집부와 친구들을 조사원으로 동원해서 만든 매우 두툼한 분량의 기록물이다. 시간대에 따른 인파의 동태나 신분, 성별, 직업구성의 구별을 시작으로 긴자를 걷는 사람들의 풍속(주로 의복)을 문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라해서 채집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 일본의 전통복장과 양장의 비율, 옷의 색깔, 양복의 디테일(코트나 깃, 넥타이, 시계줄, 장갑, 구두의 색깔과 모양), 전통복장의 디테일(기모노의 무늬, 신발의 종류), 기타(수염, 안경, 모자) 등에 대한 각각의 관측된 실수(實數)를 보여준다. 여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전통복장에서는 기모노나 하오리(羽織)”의 옷감과 무늬, 깃이 맞물리는 방식, 허리띠와 버클, 신발을 다루고, 양장에서는 모자의 종류와 소매 길이, 양말과 구두에 대해 기록하고, 나아가 머리 묶는 모양과 머리핀, 화장, 안경, 그 외 각종 소지품을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학생이나 노동자의 복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한편 혼죠후카가와 기록은 같은 해 10월 일주일간 행해진 조사기록물이다. 조사지역은 현재 스미다구(黒田区)와 고토구(江東区)에 걸쳐 있는 구간(긴시초(錦糸町)~스미요시(住吉))인데, 긴자 기록과 비교하면 규모가 다분히 축소되어서 조사된 사람 수는 3명에 불과하다. 주요 통계기록 대상은 긴자 기록과 마찬가지로 복장이며, 통행인의 기모노나 신발의 종류, 여성의 머리 모양 혹은 앞치마의 유형 등이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적으로 망라하는 긴자 기록과 비교하면 혼죠후카가와 기록이 다루는 양과 종류가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곤 와지로 또한 이 점에 대해 이러한 채집에서는 [] 거리를 걷는 사람의 풍속 내지는 복장의 각 부분을 통계 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몇몇을 다루는 정도로 마무리지었다고 인정한다. 긴자에서의 조사방식을 혼죠후카가와에서는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 긴자에서는 할 수 있었던 방식이 혼죠후카가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우선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긴자와 혼죠후카가와는 생활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곤 와지로는 모든 통행인 중에 슈트를 입은 사람(‘신사’)의 수를 지표로 삼고 도내에서의 풍속 권역의 차이를 강조한다. 시부자와와 긴자를 중심으로 하는 풍속 권역에서는 신사의 수가 최다를 이루는 것에 비해 혼죠후카가와에서는 그것이 최저를 이룬다. 곤 와지로는 혼죠후카가와는 도쿄의 중심부 및 야마노테 사람들에게는 다른 풍속의 나라이며, “현대문화인 풍속의 나라는 아니고” “실로 현대 영세민 풍속의 나라라고 서술한다.

이것이 긴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혼죠후카가와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이유일까?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대상이 바뀌어도 같은 방법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곤 와지로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풍속 내지는 복장의 각 부분의 통계가 허사라고 생각한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혼죠후카가와 쪽이야말로 긴자 이상으로 심한 물질적인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곤 와지로의 다음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혼죠후카가와의 채집결과에서는 여유 있는 도시에서 볼 수 있으리라 예상되는 어떤 유형도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단지 편의를 위해 값싸고 또 실제적인 것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기 때문에, 실제로 세세한 변화가 너무 많지만 대략의 통계상으로는 확실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연구 성과물의 질적인 혹은 양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혼죠후카가와 기록보다도 긴자 기록이 충실한 것은 분명하다. 긴자 기록에 수록된 방대한 통계와 스케치의 면면을 살펴보면, 긴자라는 일본 유수의 번화가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양하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은 혼죠후카가와 같은 장소야말로 사물의 사용이라는 점에서 긴자보다도 훨씬 다양하다는 것을, 기록상으로 빈약한 혼죠후카가와 기록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꿔 말하면 긴자를 걷는 사람들은 다양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형화가 가능한 만큼의 다양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계적인 기록이 가능했다.) 그에 반해 혼죠후카가와의 사람들은 그러한 유형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각각의 생활에 밀착된 사물의 사용에 둘러싸여 있다. 긴자를 걷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다양한, 그러면서도 실은 제공된 선택지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품을 몸에 두르고 있다. 혼죠후카가와의 경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복장에는 목재, 진흙, , 흙탕물에 친숙한 것의 필연적인 형태”, “각종 작업에 잘 적응되어 있는, 전통복장의 개념 차별도 없고 일꾼의 복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다양한 형태”, 이른바 각각의 생활 환경에 적응된 무수한 사용형태가 있다. 게다가 그것들은 어딘가가 헤지거나 흐트러지거나 파손되는 등 여기저기 결손과 파괴를 동반하고 있다. 여기서 사물은 상품이상의 다양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이렇게 읽어 들이면 혼죠후카가와 기록이 긴자의 그것과 비교해서 실패로 끝난 것은 결과적으로 혼죠후카가와라는 빈곤 지역이 만들어낸 생활의 다양성을 나타낸 것이다.

즉 진재로부터 부흥해가는 도쿄를 관찰한 두 기록물의 차이는 그 내부에 내포된 압도적인 현격을 시사한다. 혼죠후카가와와 비교하면 긴자를 걷는 사람들은 미적지근한 물속 금붕어와 같은 것이라고 곤 와지로는 말한다.

 

나는 여기서 현대문화인 모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세민 풍속 권역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의 표준에서 경솔하게 판단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요. 메트로와 일본 간의 차이 이상으로 다릅니다. 계획하기 전에, 동정하기 전에, 얽매이지 않는 연구가 더더욱 필요하다고, 여기서 잠깐 선언해두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채집한 뒤에는 어떤 사고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까? 생활의 다양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현학의 정신은 무엇일까?

 

3. ‘도시의 주변의 정신

 

곤 와지로는 이미 고현학의 존재 방식을 언급했지만,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변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이상, 즉 고현학의 정신에 접근하기 위한 힌트를 다른 인물의 저작에서 찾아보겠다. 그 저작이란 이치무라 히로마사(巿村弘正)명명(命名)’의 정신사[づけ精神史](1987)이다.

반세기 정도 발표 시기가 차이나는 곤 와지로와 이치무라 히로마사의 저작 사이에는 물론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러나 사물에의 조사(弔辭)[への弔辞]라는 제목의 논고에서 다음의 문단은 곤 와지로가 관찰한 혼죠후카가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폐물(廢物)’, 즉 상품 세계의 폐잔물(廢殘物)이나 탈락물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바라크(baraque 가건물)가 매매주택에는 없는 재질감과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획득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삶의 질펀한 경험은 매끈한 쾌적함과 반비례한다. 이 사실은 현재의 가능한 경험이 실패나 일탈을 하나의 핵으로서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과 동시에 상품 세계로부터의 소외물과의 접촉 교섭이 우리 삶의 소외 형태를 인식시키며, 게다가 잠시 잠깐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는 것 또한 드러낸다.

 

아날로지컬하게 생각하면, 이치무라가 반비례한다고 서술한 매끈한 쾌적함삶의 질펀한 경험은 곤 와지로가 조사를 행한 긴자와 혼죠후카가와의 대비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상품 세계로부터의 소외물과의 접촉 교섭이 우리 삶의 소외 형태를 넘어서고자하는 것이라면, 우선 소외 자체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중요한 사상적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치무라는 그러한 인식을 위한 입장으로서 주변을 중시한다. 후지타 쇼조(藤田省三 19272003)정신사적 고찰(1982)에서도 극히 인상적으로 언급한 도시의 주변이라는 논고를 살펴보자. 그 논고에서 이치무라는 도쿠가와 체제에서 메이지 국가로 시대가 이행하는 와중에 에도=도쿄의 외곽, ‘주변에 위치하게 된 하층사회를 바라보는 몇몇 시선을 세밀하게 교차시킨다.

예를 들어 테라카도 세이켄(寺門静軒 1796~1868, 에도시대의 유학자)이 그린 뒷골목 셋집[裏店借]’, 나가야(長屋)”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에는 확실히 빈곤의 색채가 농후한 한편으로 그곳은 기존의 가치 질서가 전도된 공간이라고 이치무라는 말한다. 안마사들끼리 농담을 주고받고, 아녀자들은 우물가에서 술을 마시며 세도가나 부잣집 사람들을 깎아내린다. 집세도 내기 힘든 한량들은 자신의 뜻을 적은 문장을 읽어가면서 주인집을 질리게 만든다. 이러한 난잡하고 떠들썩한 공간에서는 막부의 정부도 겐교(検校 사찰을 감독하는 직책)나 나누시(名主 에도시대 막부 관할 지역의 이장)의 지위도 유학자의 권위주의도 모두 웃음거리일 뿐이다”.

한편 곤궁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그 연장선상에 민중봉기나 폭동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체제의 악역(悪逆)’으로만 도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이치무라는 말한다.

 

곤궁인은 결코 봉기주의의 담당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 속에서만 혁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이켄이 본 골목길을 지나가야 한다. “유생, , 기술자, 상인이 어수선하게 뒤섞여서 세 들어 사는[儒釈工商, 紛雑賃居]” 뒷골목 셋집은 도쿠가와의 계층질서에도 곤궁에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교제가 가능한 장으로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 거기에는 막번 질서가 요청하는 세계상과는 다른, 허실을 뒤섞어놓은 중층적인 구성 공간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악역(悪逆)’이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의 성립과 더불어 에도에서 도쿄로의 변화는 사회 전체를 일종의 상승운동으로 이끌었다. 이치무라는 그러한 상승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둔 자들의 사고로부터, 세이켄이 묘사한 뒷골목 셋집의 골목길을 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과열하는 정치 지향으로부터 자각적으로 거리를 둔 나루시마 류호쿠(成島柳北 1837~1884, 에도시대 말기의 유학자 및 문학자)소우시(壮士)”라 불리는 행동파 청년들의 모습을 이념형으로 묘사함으로써 상승 지향에 휩쓸리는 현황을 비판한 나카에 쵸민(中江兆民 1847~1901, 일본의 사상가 및 저널리스트)의 저작과 상통한다.

나아가 시대를 거슬러 내려오면 이번에는 저널리즘과 사회개혁가들이 도시의 주변부로 향하는 시선과 만난다. 메이지 20년대 이후 빈민굴의 존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몇몇 채방 기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치무라에 의하면 그것은 탐험기였기 때문에 “‘사회문제로 불리는, 이러한 문제 관심의 양상은 이른바 문제로서의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색출력을 요청하기에는 미흡했다”. 그러한 경향은 일본의 하층사회(1899)을 쓴 요코야마 겐노스케(横山源之助 1871~1915, 저널리스트) 역시 대체로 마찬가지라고 이치무라는 평가한다.

 

전통적인 주변 존재자들의 대부분이 모이는 키친야도(木賃宿)”는 그러나 요코야마의 하층사회론 속에서 어떤 변혁성을 갖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실정에 압도되어 오로지 동정을 구하고 여인숙 개조론을 주창하는 방향으로 나갈 뿐이었다. [] 거기에는 낙오자라는 열위성(劣位性)이 존재하는데,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패하면서도 개척해가는 세계는 완전히 상상 밖 세계였다. [] 그것은 문명사회에 어울리는 박애의 단조로운 색채에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동정과 박애에서 시작된 주변부에의 대응은 국가에 의한 사회정책이 짊어지게 되었고, 하층사회는 격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과 병렬적으로 메이지 사회에 범람한 것이 안전확실하게 입신출세를 수행하기 위한 몇몇 처세술이었다. 여기서는 현실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주어진 현실의 조건을 어떻게 잘 이용해서 편승할 것인가가 과제이며 사회공간은 통제되고 균질화된다. 도시의 주변부가 에도의 뒷골목 셋집에 존재하는 난잡하고 고유한 공간을 외부(중심)로부터의 개입을 통해 잃어가는 과정과 사람들의 사고 양식이 획일적으로 되어가는 과정은 병렬에 놓인다.

이 논고에서 이치무라가 누차 강조한 것은 실제 역사에서는 점차 사라지는 가능성으로서의 주변성이 열어가는 사고의 존재 방식이다.

 

주변부는 오직 성공을 목표로 해서 중심부로 향해가는 장도 아니며, 애모(愛慕)’의 땅으로 탈락하는 장도 아니다. 주변부는 중심과의 거리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는 저항감각과, 그 감각이 지지하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위치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 위치가 결실을 맺게 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주변성은 그러한 정신 태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위치한다.

 

여기서 이치무라가 말하는 주변성은 구체적인 무엇이라기보다는 균질화되고 통제된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필요한 사고의 촉매로 파악된다. 그것이 구체적인 무엇이 아니기에, ‘도시의 주변자체가 에도부터 도쿄로 변모하는 도중에 사라진다 해도, ‘주변성은 사고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치무라가 사물에의 조사(弔辭)[への弔辞], 즉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라는 경험의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려 한다는 정신 태도는 주변성으로부터의 사고 방식이 보여주듯이 미래지향의 합리주의도 아닐뿐더러 낭만주의도 아니다.

 

결론생활에의 비판 정신

 

곤 와지로의 고현학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혼죠후카가와 기록에서 곤 와지로가 만난 생활의 다양성, 즉 긴자의 미적지근한상품 세계를 능가하기 때문에 관찰과 채집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혼죠후카가와의 카오틱한 생활세계는 이치무라가 중시한 주변성과 겹친다고 생각한다.

물론 겹치지 않는 부분도 많다. 본래 혼죠후카가와 기록은 생활세계의 다양함을 파악하지 못했으며, 간신히 채집한 기록도 테라카도 세이켄이 묘사한 떠들썩함이나 난잡함을 동반한 저항감각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혼죠후카가와 기록이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천착이 결과적으로 유형화상식에 대한 위화감과 연결될 수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긴자 조사에서와 같은 방식과 발상으로는 혼죠후카가와의 현실을 다룰 수 없었다. 곤 와지로가 영세민 풍속 권역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의 표준에서 경솔하게 판단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쓴 것은 건축학자로서 그가 다룬 민가 연구의 성과와도 호응하면서 유형화나 일반화를 거절하는, 생활세계의 다양성과 중층성의 의의를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년, 가정학 비판을 염두에 둔 생활학을 제창한 곤 와지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멋대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생활학의 초심자와 숙련자 간의 차이는 현실 생활을 운영하는 소비행위 또는 소비물건으로서 사교(社交), 의식주 등에 대한 분석적인 사고 능력의 유무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생활학 초심자는 사교, 의식주 등의 작금의 형태를 결국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듯한 느낌이다. 숙련자라고 한다면 그것들의 작금의 형태, 즉 오늘날의 관습으로 간주되는 것들에 의구심을 가지고 생활 형태, 즉 양식 자체를 연구하려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곤 와지로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의 일상성이나 생활에 대한 천착은 상식을 파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의심하고 우리의 인식을 흔들어보는 그 안목에 있다. 때로는 너무나 사소한 물건의 사용에까지 인식의 망을 확장함으로써, 우리는 거기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삶의 다양성을 접촉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접촉한 구체적인 다양성을 어떻게 사고로 살려내는가이다.

이치무라의 주변성에 관한 인식을 참조한다면, 상세한 생활의 기록으로부터 얻어지는 다양성 인식의 의의는 결국 비판에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인간들에게는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식이나 유형화의 경향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의 다양함에 구체적으로 접촉하면서 상상력의 폭을 넓혀야 한다. 고현학이라는 미완의 학문은 그러한 비판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

 

출처 표기의 원주 생략

 

 

오노데라 켄타 일본사회사상사

 

「「多様性からの批判精神今和次郎都市観察する考察」 『現代思想』』 47(9): 166-175, 20197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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