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러느라 몸이 나태해졌다. 공부하는 사람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일상의 몸으로 되돌리기 위해 ‘예열’의 독서를 하기로 했다. 읽고 싶어서 샀으나 모셔놓기만 한 책들을 몇 권 일부러 몰아 읽었다. 그 짧은 감상을 남겨놓는다.
먼저 『속삭이는 사회』 2권 (올랜도 파이지스 저, 김남섭 역, 2013년[2007년], 교양인)이다.
이 책 1권은 몇 년 전에 재밌게 읽어놓고 2권을 이번에 읽었다. 이 책은 영국의 역사학자가 소련의 스탈린 체제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의 가족사를 구술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알다시피 스탈린은 1928년부터 1953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의 독재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총살하거나 수용소로 내몰았다. 그 수는 약 2500만 명에 달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수는 1941년에 약 2억 명에 달하는 소련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한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숙청당하고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저자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위 ‘소비에트 정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71년 파리코뮌의 최후의 정경을 노래한 〈바리케이드 위에서〉라는 시에서 정부군의 총살을 기꺼이 받아들인 한 소년의 공동체를 향한 무한한 헌신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포정치의 시발이 된다.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수립한 소비에트 연방은 적어도 20세기 전반기에는 ‘혁명적 대의’라는 도덕률로 작동된 사회다. 그에 따라 소련 당국이 1920년대 후반 집단농장화 작업 가운데 부유한 자작농을 일컫는 ‘쿨라크(kulak)’를 ‘계급의 적’으로 낙인찍어 탄압할 때에도 탄압당하는 측에서조차 자신의 수치스러운 출신 성분을 탓하며 당연한 조치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공포정치는 엔카베데(NKVD, 내무인민위원회)의 창설과 더불어 1937~38년의 대숙청을 거치며 밀고와 숙청이 인민의 일상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열렬한 볼셰비키였어도 당내 투쟁에서 밀려나거나 비판적인 언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쳤다가는 수용소로 끌려가 바로 총살당하거나 노역을 견디지 못해 병사하고 그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아이들,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생애사를 다루고 있다.
나는 〈바리케이드 위에서〉라는 시에 나오는 열세 살 소년이 그 후에 어떻게 살았을지가 궁금했다. 역시나 『속삭이는 사회』 1권에서는 그 놀라운 헌신성이 자세히 묘사된다. 그리고 그 헌신성의 궁극적 증명은 가족의 소멸로 나아간다. 소비에트의 새로운 정체성은 가족과의 단절에서부터 시작되고 가족을 버림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1938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2권에서는 그러한 소비에트 정신이 인간 본연의 연대와 정서를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내밀한 소통이 불가한 자들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추방〉이라는 러시아 영화에서 느낀 그 소통 불가능성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부 사이에는 소통이 단절돼 있다. 임신한 아내는 소통할 수 없음에 절망하고 자신의 뱃속 아이가 이 절망 속에서 태어난들 사랑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남편에게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은 낙태를 시키고 불륜으로 의심되는 남자를 찾아가 응징하려 하지만, 아내는 죽고 그 모든 것은 소통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과 대비되며 이 부부의 절망이 고요한 우울함 속에서 전개되는데, 이 독특한 우울함이 최근 러시아 영화의 특색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책의 원제 ‘속삭이는 사람들(The Whisperers)’은 러시아의 용법에서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국에 몰래 고자질하는 사람’이다. 정치적 이념은 결코 친밀한 소통과 연대를 만들지 못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소비에트 사회는 무를 수 없는 희생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저, 정지인 역, 2021년[2020년], 곰출판)이다.
이 책은 워낙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서 오히려 별 기대를 안 했다가 엄청 재밌게 읽었다. ‘아, 이래서, 이래야 베스트셀러구나!’ 감탄하면서. 무엇보다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전혀 몰랐고, 한국어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뭐 그런 건가? 그런데 원제가 “Why Fish Don’t Exist”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원제에서 fish가 ‘물고기’보다는 ‘어류’의 뜻으로 해석되고, 직역하면 ‘어류(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이 책에 따르면, 범주라는 세계의 질서 짓기는 무의미한 세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궁여지책인데, 그것이 고착되는 순간 가장 나쁜 인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나쁜 인식이란 타자(비인간을 포함해서)와 그 삶에 대한 일방적 가치 판단을 뜻한다. 세계의 의미란 그물망처럼 얽힌 다양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 누군가의 범주화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좋은 책은 거창한 진리를 말하기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기학(氣學): 19세기 한 조선인의 우주론』(최한기 처, 손병욱 역주 및 해제, 2004년, 통나무)이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19세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1857년 저서 『기학』의 한글 번역본이다. 내 연구 분야가 아니고 해서 꼼꼼하게 읽지는 않고 훑어 읽었다. 사실 잘 읽히지 않았다. 원서의 한문을 어련히 잘 번역했겠지만, 외국어 번역하는 것 이상으로 오역의 여지가 많은 것이 한문인 데다가 또 한문 그 자체가 다의적인 해석을 허용하는 언어라서 이 책에서 잘 이해되지 않을 때 한글 번역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예전에도 읽다 만 것인데, 이번에는 건성으로라도 끝까지 읽었다. (물론 이렇게 번역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내가 이해한 바로 최한기의 기학에서 ‘기(氣)’는 천지 만물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일종의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다. 최한기는 이를 ‘운화(運化)’로 표현했다. 그 흐름은 항상 어디나 똑같기에, 달리 말해 심기(心氣)는 천기(天氣)와 통하기에, 인간은 천지의 운하를 파악해서 그 운화를 따라 자신과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신과 물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인문과학), 자연과 문화 등의 모든 이원론을 기(氣)로 꿰어내는 최한기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은 솔직히 말해 그 논리가 내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한 것은 최한기가 하필 기(氣)로써 일원론을 구축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다. 천지 만물 인간 사회는 기(氣)가 질(質)을 만나 각각의 형체를 이룬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불교 및 인도철학의 다르민[基體]과 다르마[屬性]가 떠오른다. 이를테면 불, 물, 바람, 흙 등은 다르민에 해당하고 뜨거운, 차가움, 습함, 건조함 등은 다르마에 해당한다. 불은 뜨겁거나 건조하고, 바람은 뜨겁거나 차갑다. 또 물은 차갑거나 습하고, 흙은 건조하거나 습하다. 이렇듯 불과 바람의 이항대립은 뜨거움이라는 매개로 조정되고, 물과 흙은 습함이라는 매개로 조정된다. (세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항대립과 제3항을 통해 그 이항대립을 조정한다는 이 존재의 논리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논한 바다. 그것의 궁극적인 논리가 중론(中論)의 사구분별(四句分別)이며, 이를 통해 세계를 적멸해나가는 것이 대승불교의 지향이라고.) 그렇지만 최학기의 기학에서 기(氣)와 질(質)은 다르마와 다르민에 대응되지 않는다. 게다가 기학은 불교와 달리 현세적이다. 이 책 뒷부분에 손병욱의 해제에 따르면, 최한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난세에 맞서 서양의 근대과학과 동양의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기학인 걸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쿠우카이(空海)의 『삼교지귀(三敎指歸)』(정천구 역, 2012년, 도서출판 씨·아이·알)를 읽었다.
쿠우카이(空海, 774~835)는 일본의 밀교 전통의 진언종(眞言宗)을 확립한 승려다. 그런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797년에 쓴 책이 『삼교지귀』다. 여기서 삼교란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가리키고 각각을 대표하는 구모(龜毛) 선생, 허망(虛亡) 은사, 가명(假名) 걸아가 토각공(兎角公)과 그의 조카 질아(蛭牙)를 상대로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설파한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엔 가명 걸아의 불교가 가장 광대하고 심오함을 드러내며 유교와 불교를 아우른다. 우화 형식이라 어렵지 않다.
이 책에는 『삼교지교』뿐만 아니라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비교하는 『변현밀이교론(辯顯密二敎論)』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불교가 밀교에 뿌리를 둔 것은 순전히 쿠우카이(空海)의 공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당시 일본에서 현교를 밀어내고 밀교를 확립하게 된 근거와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 불교의 존재론은 최신 인류학으로 말하자면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 및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에 가깝다. 이를 주창한 브라질의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인간에게 피인 것이 독수리에게는 술’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는 “똑같은 물을 보더라도 천인은 유리로 된 대지로 보지만 귀신은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는 것과 같고, 똑같은 밤을 사람은 어둡다고만 여기는데 새는 밝게 보는 것과 같다.”(위의 책, 165쪽)라고 말한다. 현교는 이러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인식에 안주한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현교는 화신(化身)이나 응신(應身)에 머무는 설법이다. 그것을 초월한 진리로서의 법신(法身)의 존재와 인식은 밀교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화신(化身)을 넘어선 언어 너머의 깨달음으로서 밀교를 이야기한다.
그 외 『파리코뮌』(가쓰라 아키오 저, 정명희 역, 2007년[1971년], 고려대학교 출판부)을 읽었는데, 파리코뮌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이 책에서 저자는 파리코뮌을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규정하며 그 혁명성을 계승하자고 주창한다. 나는 사실 파리코뮌의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그 숭고한 인간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혁명이란 정말로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이 가능한 메시아적 순간”에서 억압받는 메시아에서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모셔두기만 한 책들이 더 있지만, 그건 또 나중에 한 뭉텅이로 몰아 읽어보자. 최한기는 학자에 대해 ‘공부를 남보다 많이 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라고 정의했다. 공부해서 글을 쓰자.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야생의 진리』에 관한 짧은 메모 (0) | 2022.04.19 |
|---|---|
| 하시모토 겐지의 『계급도시: 격차가 거리를 잠식한다』를 읽고 (0) | 2020.08.16 |
| 김영민의 『집중과 영혼』을 읽고 (4) | 2018.09.27 |
| 책소개_『Lexicon 現代人類学』 (0) | 2018.07.07 |
| 『식인의 형이상학』의 형이상학 (3) | 2016.10.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