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丸山眞男セレクション』[마루야마 마사오 셀렉션](2010년 4월, 平凡社)에 실린 「二十世紀最大のパラドックス」[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라는 제목의 강연록을 번역한 것이다. 이 강연록은『전집』 9권에도 실려 있고, 최초의 출처는 본 글의 끝에 기재해두었다. 한국에 번역된 마루야마의 단행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아, 예전에 <마루야마 강독회>를 하면서 번역해두었던 것을 올려둔다. 

  강연록은 글의 내용을 보건대 8.15 패전의 날을 기념하여 행해진 것 같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그의 '전후 민주주의'론을 이해해볼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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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오늘 이 집회에 오기 전에 다마묘지(多摩墓地)에 다녀왔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기 죄송한데, 8월 15일은 제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제 어머니는 쇼와 20년(1945) 8월 15일 패전의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군인으로 히로시마시의 우지나(宇品)에 있었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매년 8월 15일이라는 날은 매우 복잡한 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날은 조용히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실은 저는 개인적인 체험이나 실감을 공공의 장소에서 말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8월 15일에 대해서 무언가 말해야 한다면 그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빼놓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전후 어느 때에 ‘아, 나는 살아있는 건가’라고 문득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제가 아슬아슬한 우연에 의해 전후에까지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 가혹한 전쟁을 빠져나온 국민들 중에서 어쩌면 저와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의 경우 특히 그 실감을 지탱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패전 직전의 원폭입니다. 제가 있었던 히로시마시의 우지나 마을은 바로 원폭투하 지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또 그 직후에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광경을 여기서 말할 기분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매우 많은 ‘만약’—만약이었다면 나의 생명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전후에 없었다 라고 느낍니다. 말하자면, 무수한 ‘만약(가정)’의 사이를 메워 오늘날 살아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지나 마을은 히로시마시의 남단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해상에서 침입해오는 B29의 원폭탑재기에 타있던 아메리카 병사가 1분 일찍 버튼을 눌렀더라면, 그 순간에 저의 몸은 증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 시각은 매일 아침 점호할 때였고, 우리 부대에는 사령부의 매우 높은 탑이 있었고, 버섯구름은 마치 그 탑의 바로 뒤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희는 그 높은 탑이 열의 직사 혹은 맹렬한 폭풍을 상당부분 차단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만약 실내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 방을 그 직후에 들어가 보았는데, 참담한 광경이었습니다. 창유리는 모두 파편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었고, 입구의 문은 경첩이 부서져서 실내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탁자는 뒤집혀져 서류는 마루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당번으로 혼자서 실내에 남아있던 장교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다음다음날, 제가 우지나 마을로 외출했을 때 우지나 마을에도 사상자가 많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저는 방사능 같은 것에 무지하기도 했거니와, 그 날 하루 종일 원폭 중심지 부근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외, 그 외의 ‘만약’을 생각하면, 저는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로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요즘 허망이라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실은 저의 자연적 생명 자체가 무언가 허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살아있습니다. 아, 나는 살아있구나 라는 돌연한 생각과 더불어,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남은 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은 전우에 대하여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저기서 말해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신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좀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몇몇 노래를 지었습니다. 아가씨시절의 수십 년 외에는 노래를 짓지 않았지만, 죽음 직전에 무슨 영문인지 그러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그 노래들에는 출정하는 저를 배웅하는 노래가 한두 개 있습니다. 매우 죄송스럽지만, 그중 일부를 여기에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름을 받아 떠나간 아들을 병상에서 울며 그리워하는 불충의 엄마야.” 저는 이 가사가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병상에서 천황각하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가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이지에 길들여진 어머니의 규범의식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정의 날 아침의 이별을 떠올리며 우는 자신—자신은 불충의 엄마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라는 마음, 그래도 자신은 불충이라도 이 끊을 수 없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분열된 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에 길들여진, 자식을 전쟁에 보낸 수많은 어머니의 공통된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쇼와 초기에 소년시대를 보낸 제게 천황제에 대한 느낌은 이미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생 때부터 우선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당시의 실천운동에 관계하는 대체성에도 맞지 않았으며, 겁이 많은 저는 그러한 생각에 도무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봄 <유물론연구회>라는 단체의 집회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고등학생이 딱 둘뿐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대학생이나 사회인이어서, 제가 상당히 운동의 대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이 실은 나중에까지 특고(特高)[각주:1]와 헌병대와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맨 처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특고가 제게서 몰래 가져간 일기를 앞에 두고 취조를 받았습니다. 일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종이가 끼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빼내면 안되는데, 그 중에 1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자신의 신앙을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국체(國體)는—국체란 것은 젊은 여러분을 위해 한마디 말씀드리면, 체육에서의 국체가 아니고 오늘날의 단어로 말하면 천황제입니다—일본의 국체는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되고 있는 것일까’. 저는 단지 의문형으로 썼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패전할 때까지 혹은 패전의 직후에까지 천황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준열히 취조했던 특고가 빨간 종이의 군데군데를 가리키며 너는 천황제를—아니 천황제라고 말하지 않고 군주제라고 했습니다—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때부터 갑자기 맹렬한 욕설과 철권이 나를 엄습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고자이 요시시게(古在由重 1901-1990, 일본의 철학자) 선생 등이 말했던 어마어마한 체험과 비교하면, 그 시절의 저의 체험 따위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전전(戰前)의 일본 체제를 특징짓는 하나의 사상적 의미를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고가 회의와 부정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반드시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뭐라 해도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의심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의 ‘지지’이며,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선택할 기회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선택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그러한 성질의 ‘지지’인 것입니다. 무릇 부정을 피해가는 긍정입니다. 그것은 결코 전쟁 중의 군국주의 시대만의 것이 아닙니다.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가 본래 그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의 다수가 전후의 천황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것에는 그 ‘지지’의 사상적 의미가 전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언제라도 부정할 권리가 보증된 하에서의, 일정한 정치형태의 ‘지지’입니다. 이것이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민주권의 원칙의 채용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전회의 사상적 의미입니다. 그 두 개의 ‘지지’ 사이에 가로놓인 논리적인 단절과 그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전전에도 전후에도 어떤 말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민주주의는 허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는 논의가 무성합니다. 저는 안락한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 전후의 민주주의는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거나 평화헌법은 정말 실없는 소리이다 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뭐 좀 안다는 사람의 어조를 매스컴에서 보면 솔직하게 말해서 혼자 들떠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전후 민주주의나 일본국 헌법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가 제출되는 그 자체는 대단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전(戰前)에 대일본제국 헌법은 허망한 것이다 라고 떠들어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잠깐 잡혔다 풀려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일생, 국가권력에 의해 어디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줄곧 감시당하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겠지요. 전후 민주주의가 허망하다라든지 평화헌법은 별거 없다 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전후 민주주의가 무엇보다도 대일본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에서는 역설이라고 할까요, 파라독스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극한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한상황에서는 역설적 진리가 종종 출현합니다. 아시다시피, 논어나 성서라는 고전의 곳곳에는 파라독스의 형태로 인생의 가르침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는 극한상황에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가, ‘최후의 것이 최초가 될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명제입니다.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그러한 ‘이상’(異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이로하가루타(イロハガルタ) [각주:2]속에서도 ‘급하면 돌아가라’라든가 ‘거짓말에서 나온 진실’이라든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처럼 역설적인(paradoxical) 명제가 다양하게 있습니다.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것은, 두 지점 간의 최단거리는 두 지점 간을 연결하는 직선에 있다는 기하학의 명제에서 보면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역설의 진리를 인정하는 기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만 보통의 형식논리만을 가지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지는 것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저는 8․15가 가진 의미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에 있었던 일본, 즉 가장 늦게 구미의 제국주의를 추종했다는 의미에서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이었던 일본이, 패전을 계기로 평화주의의 최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였다—그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世界』1965년 10월호, 岩波書店)

 

  1. 특별고등경찰의 줄임말.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천황암살계획인 대역사건을 받아, 1911년 경찰청에 종래 있었던 정치운동대상의 고등경찰에서 갈라져, 사회운동대상의 특별고등경찰과를 설치했다. 이것이 특별고등경찰의 시작이다. 1945년 10월 4일, 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2. イロハガルタ(伊呂波歌留多) 이로는 47자(히라가나 47자)를 한자씩만 넣어서 읊은 7․5조의 노래와 경(京)을 첫 글자로 한 속담을 적은 48장의 딱지와 그 내용을 그린 그림딱지 48장으로 된 딱지놀이를 말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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