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와 마사치의 『自由という牢獄』[자유라는 감옥] 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발표한 세 편의 논문과 책을 펴내면서 새롭게 쓴 한 편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20세기의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본질을 탐색하고 '자유'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본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행보"라는 전세계적인 흐름에 '자유주의'에 관한 오사와 마사치의 비판적 탐구가 다시금 주목받을만하기 때문이리라. 자유, 책임, 공공성, 진보 각각을 키워드로 하여 구성된 네 개의 장 중에서 '자유'를 논한 1장의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냉전체제를 종결지었다.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따르면, 냉전체제의 종결은 자유주의의 인류사적 승리를 뜻한다. 월러스틴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의해 상징되는 인류사의 전환점으로서 '근대'가 세 개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고 말한다. '근대사회'란 정상성으로부터 일정한 일탈을 통해 정상성을 유지하는 사회를 말하며, 이 정상성과 일탈―'변화의 상태화(常態化)'로 규정되는― 가운데 세 개의 대척점으로서 보수주의, 사회주의, 리버럴리즘이 탄생했다. 사회주의가 이 변화를 의식적으로 촉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보수주의는 그 제동을 거는 이데올로기이다. 리버릴리즘은 변화를 억제하지도 않으면서 설계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이다. 프랑스혁명이 주창했던 '근대'의 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 간의 평등이었다. 월러스틴은 '근대'의 인류사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리버럴리즘으로 흡수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 즉 리버럴한 보수주의로 변모해왔으며, 사회주의는 의회를 통해 개혁을 달성하는 리버럴한 사회주의로 정리되어왔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냉전체제가 종결됨으로써 이 세 이데올로기 중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유'의 개념을 논한다.

  오사와 마사치는 근대의 인류사에서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자유'의 개념의 곤란함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1990년대 이후 '애프터 리버럴리즘'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그의 진단은 인류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자유 그 자체에서 자유를 규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음을 말해준다. 

  오사와에 따르면, 근대의 인류사에서 자유의 이념은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성(아이덴티티)을 환원·해소해버리는 상태―원시상태―에서 각 구성원들이 사회의 역할을 선택하고 배분하는 궁극의 메타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이제까지 확고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것은 에스노 내셔널리즘(민족주의·민족공동체)과 그에 깊이 연동된 종교적 원리주의에 의해 지지되어왔다. 다시 말해, 리버럴리즘은 개인 간의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며 그 무관심으로부터 각 개인 간의 평등한 추상적 자유를 이끌어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초기상태'에서 선택의 전제로서 공통의 가치를 지닌 공동체가 상정될 수 있는 것은 그 공동체들 간의 가치와 목표의 차이를 승인하는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상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리버럴리즘으로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태도를 요청한다. 

  한편 오사와는 6,70년대에 제기된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에 주목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등에 의한 지구온난화, 공해, 오염문제의 전인류적 제기는 무한한 자유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지구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광의의 리버럴리즘의 결과이다. 그리고 1990년대 지구환경문제의 급부상은 생태주의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후 사회주의의 공석을 차지하며 리버럴리즘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자유'가 자신의 외부에 '속박'을 두는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속박을 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존 로크에 따르면, 노동의 산물에 대한 소유권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 노동하는 신체가 개인에 속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 신체의 소유자로서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을 행할 수 있다. 신체야말로 개인의 소유물이다. 신체가 사적으로 소유된다면, 그 신체의 죽음 역시 자기결정권 내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기매매와 성매매, 자살 등과 같은 자기결정권이 수반된 신체의 '사용'에 대해 공리적인 전제를 단서로 달아두고자 한다. 이때 자기의 신체는 자기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을 뿐더러 '타자'의 시선―공리적인 전체―으로 응시된다. 이 역설을 오사와 마사치는 '제3자의 심급'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제3자의 심급'이란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승인이 불가피함을 가리킨다. 인간은 어떻게 책임을 지는 주체로 성숙해가는가? 한 인간이 인생의 시발점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는 책임이 없다'는 "이노센스"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그 후의 인과적 조건으로 부여되는 후속의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없다. 나의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닌데 나의 탄생의 후속적 행위가 나의 선택일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인간은 본원적으로 수동적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책임지는 주체로 역전되어야 한다.  

  자, 이 역전의 순간은 부모-자식관계에서 포착되고, 양부모-자식관계에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오사와는 독일의 어느 정신과 의사의 정신분석집에서 읽고 쓰지를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온 "프레드릭"이라는 일곱살 된 아이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아이는 입양된 후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입양되기 전의 자신의 이름 그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에 대고 혹은 책상 밑에 대고 아이의 입양되기 전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르만, 아르만.." 그러자 그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입양되기 전 이름의 호명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이가 자신의 외부로부터 자신이 승인됨에 따라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닌 허공에서 불리는 이름에 반응한 것은 자신을 승인하는 타자가 마치 영화 밖에서 들려오는 나레이션처럼 자신의 시공간 밖에 있는 타자이어야했기 때문이다. 오사와는 주체의 승인은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제3자의 심급'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이 '제3자의 심급'은 '자신'의 경험적인 공간 어디에도 존재의 장을 확보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하며, 이에 따라 '자기' 그 자체의 내적인 계기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한다. 즉 '제3자의 심급'은 '자기'의 내적인 타자성을 탈환함으로써 존립하며, '제3자의 심급'에 의해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주체로 성숙한다.  

  이와 같이 자유는 타자로부터의 구속을 조건으로 한다. 구속 없는 상태야말로―즉 완전한 자유야말로―자유의 부정이다. 인간은 자유의 무한한 확장에서 참을 수 없는 구속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면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순수한 자유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구속을 초래한다. 리버럴리즘은 초월적 타자(신)에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인 의지를 지향하지만, 그 지향은 언제나 해방의 수단으로서 에스노 내셔널리즘 혹은 생태주의로 귀속된다.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리버럴리즘에 의해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감각되는 것은 그것이 주체의 승인처로서 선택되어야 할 대상이자 선택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버럴리즘은 언제나 자신의 라이벌을 필요로 하며, 그 라이벌을 불가결한 동지로 전환한다. 

 

大澤真幸『自由という牢獄』岩波書店、2015年3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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