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가 천문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퍼스펙티비즘이 17세기 광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라는 것도 데스콜라가 주장한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천체물리학과 대질시킨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지난 2018610일 일본 도쿄대학에서는 칸트를 넘어선 새로운 실재론을 주창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과 천체물리학자의 강연과 대담이 있었고, 《현대사상》 201810월 임시증간호 마르쿠스 가브리엘 특집편에서는 이 강연록과 대담록을 실었다. 각각의 강연록과 대담록을 차례로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그 첫 번째로 일본의 천체물리학자인 노무라 야스노리의 강연록을 번역해서 올린다.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

 

 

노무라 야스노리(野村泰紀)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라는 테마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우주에 대해 사람들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우주라고 말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큰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중우주’(multiverse)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 다른 곳에서 들은 분도 계실 테지만, 저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 적어도 몇몇은 어렸을 때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든지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어른이 되면 바쁜 일상 속에서 잊히게 되는 의문인데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언티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의문 자체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할 때 우주가 무엇인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주의 가장자리에 벽과 같은 이 있고 그 바깥에 무언가 젤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지금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해서 우주라고 하겠다고 하면, 말뜻 자체로 볼 때 우주의 끝이나 바깥 등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의 끝을 이야기하려 할 때 우선 우주란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겠습니다. 바깥이나 이전이라고 할 때 바깥은 공간적인 바깥이고 이전이란 시간적인 이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나 공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보통 시간은 시간이고 공간은 공간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질문의 경우 우주가 시작한 순간 등의 극한의 상황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때 시간이나 공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보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중우주의 이야기는 철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오늘 드디어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상과 전혀 다른 우주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중우주의 단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중우주와 같이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할 때 우리의 우주란 무엇인지를 정해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우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소립자 이론 표준모형으로 기술됩니다. 그것은 소립자의 쿼크가 있고 전자가 있고 질량이 얼마이고등등이 됩니다. 작금에 이르러 실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원자핵의 이론 내지는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생명이 된다는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소립자 이론은 지구에서든 안드로메다에서든 그 외의 다른 곳에서든 같다는 것이고, 모든 관측에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며 우주는 빅뱅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팽창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은 말로만 그렇다는 거 아님?’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의 팽창은 직접 관찰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저 멀리 있던 은하가 더욱 급속히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이상의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빅뱅 자체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현재 커지는 중이라면, 예전에는 그 속에 물질이 꾹꾹 담겨 있어서 고온고밀하기 때문에 번쩍번쩍 빛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지금 일만 년 전의 은하를 본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가 유한하므로 일만 년 전에 나온 은하의 빛에 의해 일만 년 전의 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100억 광년 떨어진 은하를 본다면, 100억 년 전에 나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며 100억 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는 먼 옛날에는 빅뱅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배경은 온통 빛으로 빛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밤하늘은 어둡습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에서 나온 빛은 도플러 효과에 의해 희미해집니다. 이 효과에 의해 빅뱅 시대의 빛은 가시광의 영역에서 벗어나 전파영역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전파의 차원에서 밤하늘을 본다면 밤하늘은 전면에서 반짝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습니다.

 

우주는 현재 138억 살 정도인데, 우리는 전파영역의 빛까지 해서 38만 살 정도의 젊은 시절의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의 우주의 가장자리는 밀도가 너무 높아서 빛이 통과할 수 없고, 위의 방법으로는 보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오는 빛의 전파를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연령이 현재의 0.003%였을 무렵의 전체의 상세한 지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았습니다. 밀도가 거의 동일한, 이를테면 수프 같은 상태였지요. 10만분의 1 정도 외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0만분의 1 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으로, 예를 들어 옥수수 수프를 아무리 저어도 1%는 덩어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것은 왜 현재 우리가 보는 우주가 항성도 있고 은하도 있으며 물질의 밀도가 일정하지 않은 우주인지를 말해줍니다. 이 초기의 10만분의 1의 흔들림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력은 인력이므로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더 강한 중력이 작용하고 점점 사물이 모이게 되며, 밀도가 낮은 곳에서는 점점 사물이 흩어지게 됩니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순식간에 물질이 모여 은하가 생기고. 이는 38만 살 무렵의 우주의 전체지도가 있으므로 그것을 컴퓨터에 넣어서 시뮬레이션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은하가 생기고 필라멘트가 생기고해서 현재의 관측과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고르게 펼치면 현재의 우주와 거의 같은 모양을 이루게 됩니다. 즉 우주는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과학자가 즐겨 그리는 그림으로 나타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그림 1). 이것은 시간을 세로축으로, 공간을 가로축으로 한 시공도’(時空圖)로서, 물리학자들이 자주 그리는 그림입니다. 빛의 경로는 반드시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것이 룰입니다. 이 그림에서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가로 방향(공간 방향)의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빅뱅은 밀도가 매우 높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그림 1에서 가로 방향으로의 단계적 차이(gradation)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앞서 말했다시피 우주가 38만 살 때 나온 빛(우주배경복사라고 합니다.)을 약 138억 년 후의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은 45도 사선으로 기울어진 두 개의 화살로 나타납니다.

그림 1. 우주의 시공도

만약 이 그림상이 정말 맞다면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기 때문에 우주의 밖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관해 거의 완전히 알았다. 어디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 물리를 적용할 수 있다.’가 되겠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요?

 

실제로 관측결과는 그림 1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여러 번 경험했다시피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예가 있습니다. 지구입니다. 대지는 구()로 보이지 않습니다. 10킬로미터 사방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지구가 둥글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는 하나의 예입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개념이 나왔을 당시 최첨단 과학자들의 반론은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떨어져 버릴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힘 덕분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일본)과 이곳의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에서 각각 상하반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물론 지구는 둥글다는 것에 대한 당시 반론의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래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모두에게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래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아래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는 만유인력에 의해 지구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물을 떨어뜨리면 아래로 가기 때문에 아래는 아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 개념적 변경을 수반할 때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맥락에 맞춰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개념적 변경을 수반하면 그때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겉으로 보이는 픽처우주는 무한히 확장한다가 틀릴 가능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림 1과 같은 의미에서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다중우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요구되는 개념적 변경이란 무엇일까요? 그 하나가 시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은 빛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맥스웰이라는 사람이 전기와 자기의 방정식을 완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석, 즉 자기가 움직이며 전기가 생깁니다. 실제로 이것을 사용해서 수차나 터빈으로 자석을 움직이게 해서 발전(發電)을 합니다. 또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긴다는 것도 압니다. 좋은 예가 전자석입니다.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기고 자기가 생기면 전기가 생기며, 이를 통해 계속해서 파()와 같이 전달되는 해()가 방정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 파()는 어째서인지 빛가시광에 한정되지 않고 X, 자외선, 적외선, 전파 등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빛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이 파()의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일 때, 내 자신이 시속 30킬로미터로 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고 하면 저 차의 속도는 내게 시속 70킬로미터로 보이게 됩니다. 더군다나 지구 자체가 자전하고 있기 때문에 시속 100킬로미터의 차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구의 중심을 돌게 됩니다. 나아가 지구 자체도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즉 속도는 누구에 대한 속도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라고 말할 때는 땅에 대한 속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빛의 경우는 무엇에 대한 속도인지를 지정하지 않고서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습니다. 즉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갑니다. 당초 이 속도는 우주에 대한 속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가 우주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면, 빛의 속도는 이 수치에서 미미하지만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대단한 것은 계산으로 그 속도가 나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부분, 예를 들어 시간이라든가 공간이라고 했던 부분에서 우리의 개념을 변경할 필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전차에 타고 있고, 빛을 위에서 아래로 쏘아서 바닥에서 튕겨내는 실험을 한다고 칩시다. 전차의 높이는 1미터입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만들기 위해 빛의 속도를 매초 2미터로 잡읍시다. 1미터의 높이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튕겨 되돌아오면 2미터이기 때문에 1초 사이에 빛은 전차의 위아래를 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차 밖에 있는 사람이 보면, 이것은 달리는 전차의 이야기이므로, 위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되돌아오기까지의 거리는 2미터가 아닙니다. 빛은 수직 방향이 아니라 사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거리[밖에 있는 사람에게 보인 빛의 거리]4미터였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는 누가 보아도 매초 2미터로 같기 때문에 빛이 아래로 튕겨서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전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1초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2초가 됩니다. 즉 시간은 보는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측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의 실험에서 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험결과와 전혀 맞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 위에서 소립자가 생겨서 내려온 것을 지상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한 소립자 속에는 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의 수명을 가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 위에서 내려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소립자 측에서 보면 마이크로초의 수명을 갖는 것이 지상의 인간 측에서 보면 소립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현상이 이와 같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것이 아니며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그림 2. 시간에 의한 우주의 공간

여기에 중력까지 고려하면 시간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밀고 나가면 최종적으로 다중우주에 이르게 되고, 빛의 경로가 45도 기울어져 그림 1이 아닌 그림 2와 같은 우주의 묘상(描像)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새로운 그림에서 우리의 지구는 중앙 윗부분의 작은 역삼각형 안쪽의 야구장과 같은 영역에 대응합니다. 지금 이 우주를 바깥에서, 다시 말해 큰 역삼각형의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수평으로 묘사되는 점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거품처럼 생겨나서 보글보글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1, 2, 3, 4의 우주의 사이즈는 이러한 점선 속에 역삼각형의 안쪽에 있는 부분의 길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주는 작게 태어났고 거의 빛의 속도로 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안쪽, 즉 그림 속 큰 역삼각형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그림 속의 켜켜이 쌓인 곡선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생긴 순간부터 무한히 크며 어디 가도 똑같이 보인다는, 즉 곡선의 어디라도 똑같은 밀도의 영역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보통 우주가 거품처럼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품이라면 벽이 있으며, 중심이라는 개념 또한 있으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밖에서 보면 거품이고 크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한결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지구가 실제로는 둥글지만 아래를 오로지 아래라고 생각해서는 둥근 지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의 성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끝의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은 이 역삼각형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것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영역은 시간 제로 이전이 되므로,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물음이 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가 시작하기 전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거품의 밖과 완전히 같은 영역이고, 그러므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를 묻는 질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주의 바깥이나 시작 이전이라는 것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지 않으면 탐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누가 보았을 때인지를 지정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의미를 잃고 맙니다.

 

덧붙여 이 그림은 항상 빛의 속도를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룰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갈 수 있는 부분은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을 정점으로 한 역삼각형의 부분뿐입니다. 왜냐하면 45도 보다 옆으로 더 달려나가는 순간 빛은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중우주론을 논할 때 원칙적으로 갈 수 없는 영역을 논하는 것은 과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우주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는지를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습니다.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까요. 누구도 과거로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사이언스가 아니라면 공룡시대나 고고학은 전부 사이언스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거로 갈 수 없다 해도 과거에서 시그널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정밀한 측정을 하거나 이론의 여타 예언을 찾아보거나 해서 무슨 일인지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중우주는 볼 수 없고 갈 수 없기 때문에라고 되묻는다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갈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거품 우주의 바깥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를 생각해보기 위한 힌트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가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면,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데 그 팽창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1998년의 일로, 2011년에 나의 동료인 솔 펄머터(Saul Perlmutter) 등이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발견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을 때 중력은 반드시 인력이므로 팽창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빅뱅에 의해 은하들끼리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면 그 속도는 중력으로 인해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펄머터 등이 측정하고자 했던 것은 감속 매개변수(parameter)라는 것으로 팽창 속도가 얼마나 느려지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가 마이너스로 나타납니다. 즉 팽창이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보통의 물질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쿼크라거나 다크매터(dark matter)라거나 했다면 이렇게는 안됩니다.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물질 이외의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 무엇이 우주의 주요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체가 바로 진공에너지’(vacuum energy)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팽창이 가속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 시대에서부터 이미 알려져 왔습니다. 진공에너지란 물질이 전부 사라져도 남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이 에너지는 부호에 따라 척력 같은 것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부호가 반대면 인력이 작용해서 우주가 으스러지고 맙니다). 펄머터 등은 이 진공에너지의 대부분이 non-zero로 측정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사이즈가 기적적인 사이즈였다는 것입니다. 진공에너지는 이론적으로 대략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되어야 하는지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측정한 사이즈는 이 이론적인 평가치보다 120자리 배나 작았습니다. [진공에너지가 우주팽창의 가속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상의 수치가 있는데, 실제 측정치는 그보다 120자리 배나 작게 나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이론물리학 사상 가장 엇나간 예언 중 하나일까요? 게다가 불가사의하게도 우주에는 은하나 기타 물질도 있는데, 물질에너지 밀도와 진공에너지 밀도가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두 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100자리 배 정도 컸으면 좋으련만, 두 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불가사의하냐면 물질에너지 밀도는 질량÷부피로 주어지는데, 우주의 팽창에 의해 부피가 점점 커지기 때문에 물질에너지 밀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낮아집니다. 그런데 진공에 대해서는 아무리 팽창해도 진공은 어디까지나 진공이므로 진공에너지 밀도는 일정합니다. 그것이 지금 딱 두 배 정도라는 것입니다. 즉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먼 옛날에는 진공에너지가 물질에너지보다 몇 십 자리 배 작은 먼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거의 같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면 진공에너지만이 남겠죠. 만약 우리의 우주가 한개 뿐이라면, 빅뱅의 때에 우주나 이론이 진공에너지를, 즉 은하가 생겨나고 생명체가 생겨나고 위성(satellite)을 쏘아 올려 진공에너지를 관측할 때쯤 물질에너지와 거의 같게 될 정도의 수치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측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진공에너지가 1998년에 발견되기 전에,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론의 예언보다 110자리 이상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점차 정밀도가 높아지면서 1998년 무렵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10자리 배나 작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론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110자리 이상 작은 것이라면 진공에너지는 아마도 제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메카니즘이 있어서 제로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그에 대해 이론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표준모형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이고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라는 사람은 메카니즘이 없기 때문에 사고방식을 바꿔서 진공에너지가 상이한 우주가 있다면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87년의 일입니다. 그 결과 진공에너지가 지금의 수치보다 조금 크다면, 은하나 모든 것이 탄생하기 전에 진공에너지가 지배적이었던 우주는 척력으로 팽창했으며 그 속에는 무엇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하도 혹성도 인간도 무엇도 없는 것이지요. 진공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한다면, 그 대부분에서 진공에너지가 너무 커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어쩌다 딱 맞는 크기의 우주에만, 말하자면 딱 맞는 크기에 들어간 우주에만 은하나 인간 등의 복잡한 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 우주를 관측할 때에 진공에너지는 반드시 딱 그만큼의 수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우주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우주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구는 숲도 있고 호수도 있으며 매우 아름답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기본방정식은 매우 간단한데, 왜 이렇게 풍부한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사막이나 얼음 혹성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아니 실제로는 사막이나 얼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때마침 체액의 물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딱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혹성이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소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때마침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없었을 것이기에 우리가 있는 곳을 발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두가 진공에너지를 제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러한 이론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약 우주가 무수히 많다면 진공에너지가 제로에 가까운 수치일 것이라는 이론은 우리의 우주 아닌 어딘가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와인버그는 만약 진공에너지가 그러한 이유에서 작다고 한다면, 때마침 딱 좋은 범위에 들어앉은 우주의 진공에너지가 제로는 아니기 때문에 관측의 정밀도가 높아지면 언젠가는 진공에너지가 발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제로라고 생각할 때 말이죠. 그리고 11년 후에 발견됩니다. 현재 수많은 우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공에너지의 사이즈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것이 맞다는 증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게 호소하지 않고서도 신의 세계처럼 인간에 딱 알맞은 이곳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가설입니다. 그리고 물론 거대한 가설에는 증거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증거는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실은 이론물리의 법칙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찍부터 드러내 왔습니다. 늦어도 198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감지했고 돌이켜보면 그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전부 무시되었지만 말입니다.

 

그중 하나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력과 전자역학을 통합한 이론의 거의 유일한 후보입니다. 공간의 한 점은 통상 가로, 세로, 높이를 지정받습니다. 공간이 가진 차원이 세 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초끈이론에 따르면, 수학적으로 공간의 차원은 아홉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떻게 보아도 3차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남은 여섯 개는 없다고 해도 될 만큼의 작은 것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실은 이런 일은 물리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얇은 종이를 생각해봅시다. 통상 우리는 종이를 2차원의 물체로서 다룹니다. X축과 Y축 각각의 수로 지면 위의 점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면 위에 사는 작은 세균의 입장에서 보면 두께라는 세 번째 차원이 열립니다. 종이는 큰 스케일에서 보면 2차원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2차원의 모든 곳에서 작은 두께 방향의 차원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3차원의 공간에서도 모든 곳에서 6차원의 공간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잊을 수 있다는 것이 8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6차원 공간이라는 것은 꽤 복잡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기본방정식은 간단해도 매우 복잡한 수의 해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의 DNA 등의 유기질의 경우에 탄소와 질소와 산소만을 가지고 슈뢰딩거 방정식 하나에 넣어도 무수한 가능성이 나옵니다. 6차원 공간 또한 이와 같아서, 6차원의 모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무수히 많은 종류가 나옵니다. 우리의 우주는 6차원을 평균화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6차원의 모습이 다르면 전혀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6차원 공간의 모습에 의해 3차원 방향의 우리 물질의 소립자의 질량이나 성질, 진공에너지 등이 전부 달라집니다. 즉 초끈이론에는 와인버그의 논의에 필요한 수많은 종류의 우주라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들어있습니다. 80년대의 사람들은 앞서간 6차원이 나왔다는 것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공간의 차원이, 이론이 예언하는 그것과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6차원의 모습을 가진 우주가 방정식의 해로서 존재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러한 우주가 실제로 생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겼습니다. 우주가 하나 시작했다는 것은 양자 터널링이라는 효과에 의해 또 다른 6차원의 모습을 한 영역이 보글보글 거품처럼 생겨나서 그것이 커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라고 불리는 현상의 일종으로 그것 자체는 희귀하지 않습니다. 물이 끓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물이 끓으면 증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그 거품이 커져서 묶이고 마지막에는 물이 전부 수증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주의 경우에는 항상 거품이 생기고 커지지만 거품과 거품 사이의 공간 또한 넓어지기 때문에 거품들끼리 전부 묶이지는 않는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우주는 확률적으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의 거품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거품, 거품, 거품이 생겨나서 다양한 우주가 차츰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이 성질, 즉 거품의 상전이(相轉移)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론이 가진 난감한 성질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와인버그의 설명에 필요한 다양한 우주를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주는 자동적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시사적입니다. 인간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난감한 성질에 당면하면 방정식을 믿고 앞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을 숨겨버립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실은 난감한 성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난감한 성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필요한 성질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거품이 생기는 과정은 수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보면실제로 풀린 것은 1970년대입니다, 우리가 전우주(全宇宙)라고 말하는 곳은 가장 크게 보글보글 생긴 거품의 내부라고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품의 내부에는 6차원 공간이 때마침 있는 특징의 모습을 취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가 생기고 진공에너지 또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거품이 보글보글 계속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서 그림 2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거품은 밖에서 보면 작게 태어나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많은 거품 속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0.0000……1 정도의 매우 작은 확률로 때마침 진공에너지가 작게 되어서 인간이 생기는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인간, 이랄까 여하간 생명체 같은 복잡한 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럭키한 우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역으로 고등생명 같은 것이 생겨서 우주를 관측했다고 한다면, 그때 우주는 그러한 고등생명에 딱 맞는 우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중우주라고 불리는 빅픽처로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3과 같습니다.

그림 3. 다중우주

다중우주라고 하면 우주는 무수히 많다는 것만을 어렴풋하게 말할 뿐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이미 수천 년 전에 인도에서 명상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묘상(描像)을 사이언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할 수 있냐고 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영역은 일종의 과거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그널이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끼리 부딪혔다고 한다면, 그 시그널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이론즉 초끈이론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보글보글 거품이 생긴다는 것이 정해지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 외에도 다른 귀결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귀결 중 몇 가지는 우리 우주 속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를 설명하겠습니다. 만약 그림 2가 맞고 우리의 우주가 거품이라고 한다면, 우주의 곡률이 음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우주의 곡률이란 무엇일까요? 삼각형으로 생각해봅시다. 삼격형이란 세 점을 찍고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연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각도가 세 개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하면 180도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경우에만 맞습니다.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닌 공간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의 표면을 생각해봅시다. 그 위에 삼각형의 세 점을 찍어서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이어봅시다. 그렇다면 부푼 삼각형과 같은 것이 되고 내각의 합은 분명 180도보다 큽니다. 이러한 공간을 양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 양의 곡률을 가진 2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으로 눌린 공간이면 이때 합은 180도보다 작게 됩니다. 이것을 음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2차원 면의 경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차원을 하나 높여서 3차원의 공간이라 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에 세 점을 찍어 최단거리로 묶고 그 내각의 합을 측정함으로써 우주의 곡률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다중우주론은 이 합이 반드시 180도보다 작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그것이 180도 보다 어느 정도로 작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179.999……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험적으로는 그러한 작은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우주에 실험상의 대삼각형을 만들어서 지금의 정밀도로 측정하면 180 플러스마이너스 1도 정도로 나옵니다. 앞으로 정밀도가 더 높아지고 그러한 정밀도로 측정해서 180도와 같게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중우주론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1 플러스마이너스 0.01도가 되면 곡률이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오늘 이야기한 것은 전부 묻히게 될 것이고 사이언스로서 퇴출되겠지요. 곡률에 대한 관측의 정밀도는 앞으로 20~30년 사이에 2자리 배 정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그때 측정치가 양으로 나온다면 볼 장 다 본 것이지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다중우주는 끝장납니다. 이 이야기는 앨런 구스(Alan Harvey Guth)라는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다중우주는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간과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론의 귀결을 내기 위한 수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직접 다른 우주에 갈 수 없다고 해서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판단한 후에 사고를 밀고 나간다면, 이러한 수단은 발견될 수 없습니다. 나와야 하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서 사이언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앞으로 관측적으로 지금 이상의 증거가 모인다는 보증은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이야기한 곡률과 같은 예언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가 다중우주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로 공간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중우주론의] 연구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조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중우주의 관점에서도 우리가 공간ㆍ시간이라고 하는 것은이미 시간이 보는 사람에 의해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아도 이 말은 이상하지만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앞서와 같이 모두가 동의하는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나 자신의 사색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부 사이언티스트들 사이에서 조금씩 동의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에게서 미친놈 소리를 들은 이야기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만큼의 동의는 얻지 못할 것이며 나의 주관 또한 개입되어 있지만, 즐거운 이야기이므로 해보겠습니다.

 

다중우주를 생각하면 진공에너지의 이론적인 크기가 설명될 수 있고 초끈이론이나 다양한 것들이 무모순적이어서 기쁘기는 하지만, 다중우주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의미에서 존재하게 된다면 실은 조금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중우주에서 거품 우주가 보글보글 생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무한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우주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한히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일본미래과학관에서 강연하고 있는데요, [] 어제 싸운 우주, 싫어하는 것이 있는 우주, 좋은 것이 있는 우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른 우주들 중 어느 것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생각해봅시다. 보통 확률의 계산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주사위를 흔들어 몇 번 던져서 어느 눈이 몇 번 나오는지와 같이, A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고 B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는지의 비율을 말합니다. B 쪽이 A 쪽의 3배로 일어난다면, A25%, B75%가 됩니다. 그런데 다중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히 일어나기 때문에, AB도 무한히 일어납니다. 요컨대 확률의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무한÷무한을 약분해서 1로 해도 소용없고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의 예언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 자체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을 해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앞으로 쭉 무한히 계속된다는 데에서 무한이라는 것이 나온 것이듯이, ‘시간에는 단락이 있고 한 시간보다 앞선 것은 없다등등으로 해명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주장은 실은 이 답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미로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중우주일 때와 같이 물리학의 법칙은 그 해답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인데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과 블랙홀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즘 잊고 있었던 호킹의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블랙홀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지구에서 물체를 탈출시킨다고 해봅시다. 물체를 위로 던지는 정도로는 택도 없습니다. 비행기도 소용없습니다. 로켓에 실어 로켓과 함께 대기 밖으로 내보냅니다. 일정 속도보다 빠르면 지구의 중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처럼 지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곳에서는 초속(初速)을 더 키우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곳이 꽉꽉 차 있다면 그곳에서 물체를 빛의 속도로 던져도 그곳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블랙홀입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블랙홀에서 지평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측에서 빛을 확 던져보았을 때 일정 높이 이상을 갈 수 없다고 하는, 빛이 최대로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말합니다. 이 내측으로부터 어떤 시그널도 올 수 없습니다. 지평면이라고 해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러한 경계의 이름일 뿐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블랙홀입니다.

 

그 블랙홀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블랙홀에 책 A를 떨어뜨려 봅시다. 지평면에 가까워지면 중력의 효과로 인해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책은 블랙홀의 표면으로 자근자근 흡수되고 블랙홀 본래의 무게+A의 무게의 새로운 블랙홀이 생겨납니다. 호킹이 발견한 것은 블랙홀이 그 자체의 어떤 것이 아니라 증발해가는, 그것이 우리의 우주라면 빛의 알갱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긴 블랙홀도 마지막에는 증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책 A가 아니라 무게는 같지만 B라는 다른 책을 떨어뜨려 봅시다. B는 마찬가지로 블랙홀로 흡수될 것이며 조금 무거운 블랙홀이 생겨날 것이고, 그다음에 그것은 증발할 것입니다. 같은 무게의 책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블랙홀은 AB의 경우에서 같은 무게를 가집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호킹의 복사(輻射)도 계산하면 똑같은 것이 됩니다. 이것을 호킹의 블랙홀 정보문제라고 합니다. 원래 책이 A였는지 B였는지의 정보를 완전히 잃고 완전히 똑같은 최종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서 뭐?’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시간 발전이 11이 아니게 됩니다.

 

도대체 왜 물리는 가능할까요? 우리가 현재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뉴턴 방정식을 풀고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을 날려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예언될 수 있습니다. 한편 시간에 대해 반대로 풀어보면, 지금 이 장소를 이러한 속도로 공이 움직이고 있다면, 어디에서 얼마의 초속(初速)으로 던져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이언스가 시스템의 시간 발전을 해명해서 예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양자역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도 시간을 앞에서 풀거나 뒤에서 풀어서 과거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블랙홀의 정보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를 풀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초기 상태에 대응하는 최종상태가 완전히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생각하면 같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간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이언스가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블랙홀의 패러독스입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발전이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킹의 계산은 근사값을 사용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와 책 B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 다르기 때문에 시간을 반대로 풀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A를 재현하고 책 B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B를 재현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우리네 일상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보는 실천적으로(pragmatically) 거의 항상 소실됩니다. 예를 들어 책 A를 태워도 책 B를 태워도 최종상태에서는 거의 같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재가 됩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는 최후의 공기와 재 전부의 분자의 위치와 속도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서 시간에 대해 방정식을 역으로 풀 때 한쪽의 경우에는 책 A가 되며 다른 한쪽의 경우에는 책 B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킹이 최초에 말한 의미에서의 정보문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중력이 재밌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앞서 행한 책을 떨어뜨리는 실험에서 떨어지는 책을 책과 함께 자유낙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해봅시다. 자유낙하하고 있으면,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든 엘리베이터의 예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창이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고 사과가 있다고 해봅시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매단 줄을 끊으면 사과도 인간도 엘리베이터 자체도 전부 같은 속도로 떨어집니다. 따라서 자유낙하하고 있는 사람은 중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주비행사는 이것을 사용해서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자유낙하함으로써 무중력의 훈련을 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떨어지는 책을 보면 책은 지평면으로 흡수되어 호킹 복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뚝 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블랙홀의 지평면은 별도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낙하하는 책과 함께 그대로 떨어지게 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AB도 그대로 그 속에 있게 됩니다.

 

여기서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앞서 책이 우선 자근자근 지평면에 흡수되어 마지막에는 그 정보가 전부 밖으로 복사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의 정보랄까 책 그 자체는 전부 내측에 도달해서 그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느 쪽이 맞을까요? 바로 떠오르는 것은 정보가 둘로 복사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정리(定理)가 있어서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복사기에서 복사가 가능한 이유는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극히 일부의 정보만이 복사되기 때문이며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패러독스입니다. 게다가 이 강론에서는 초끈이론 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초끈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것, 자유낙하 중에는 중력이 없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기본적 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성질 외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중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틀렸을까요?

 

이 패러독스의 해답은 아직 암시(suggestion)에 불과하지만 제안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묘상과 두 번째의 묘상 둘 다 맞지만 동시에 맞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블랙홀을 밖에서 보면, 책이 지평면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고 나중에 그 완전한 정보가 외측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평면의 내측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홀인 것이고, 밖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책이 표면에 도달해서 정보가 되돌아올 뿐입니다.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간주해서 정보를 복사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원리적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빛의 속도로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말해도 떨어지고 있다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떨어지는 사람으로서는 떨어지면 확실히 책은 내측이 있어서 내측에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서는 자신 또한 내측에 있기 때문에 지평면으로부터 밖을 향해서 나오는 호킹의 복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도 복사는 없습니다.

 

요컨대 밖에서 볼 때 블랙홀의 내측은 없고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사람에서 보면 확실히 블랙홀의 내측에 공간이 있지만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것은 누구 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공간으로 보이고 어떤 때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며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기술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이거나 공간이 아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블랙홀의 지평면과 같이 원리적으로 정보가 파악되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이중적으로 카운팅되기 때문에. 호킹의 복사가 있다고 하니까 블랙홀의 내측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하나뿐인 정보를 두 번 카운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 4. 우주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이 다중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가상적인 관측장치가 그림 4의 선이라고 해봅시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우주가 변하면 으깨져 죽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 합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 발하는 각도는 45도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관측기에서 점선으로 그려진 삼각형의 바깥 영역에서는 어떤 신호도 도달하지 않게 됩니다. 즉 이 영역은 블랙홀의 내측 같은 것으로 느껴지고 원리적으로 관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블랙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떻게 될까요? 그림 3과 같이 다양한 우주가 무수히 많은 탓에 진공에너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해답은 양자역학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전부가 확률의 문제입니다. 소립자 실험 등을 하면, 예를 들어 가속기에서 전자와 그 반입자인 양전자를 부딪히게 합니다. 그러면 최종상태는 확률적으로 뮤(미크론) 입자가 되거나 다른 입자가 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확률의 평행세계(parallel worlds)로 분기된다는 식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적인 다세계(多世界)라고 말이죠. 거품 우주가 생기는 과정도, 양자역학의 과정도 말입니다. 이런 거품이 생긴다, 저런 거품이 생긴다……라고 전부 확률적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거품의 생성이 확률적인 것이고, 관측기에 대해 어떤 장소에 거품이 생기거나 조금 어긋난 다른 곳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다른 거품이 생기거나……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한 각각의 평행세계를 편의상 전부 하나의 그림에 겹쳐서 집어넣은 것이 그림 3의 다중우주의 빅피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으로 분기된 양자역학적인 세계에는 무한이 없습니다. 앞서 말했던 무한히 A가 나오고 무한히 B가 나오는 문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의 다중우주라는 것은 원래 확률공간 외에는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1%, 이것이 5%, 2%, 4% 등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률이기 때문에 무한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에 다중우주 전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한이 나옵니다. 2, 3, 4중으로 카운팅되니까 무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의 블랙홀로 말하면, 내측의 공간도 있으며 동시에 외측의 공간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블카운팅하게 됩니다. 그러한 구조는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합의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하나의 세계에는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세계에는 다른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확률적으로 이것들을 전부 겹쳐서 그리면 이른바 일반상대성이론적인 다중우주의 묘상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앞서의 무한대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양자역학은 이유를 모르는 세계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엄청난 정밀도로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거대한 세계로 확장해보면 위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간ㆍ시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는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 또한 관측계에 의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물이 있고 파()의 이러저러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조사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분자가 어떤 관측적인 움직임을 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이나 시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의 연구는 최근 크게 진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인 연구자 또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 또한 지금까지 해온 연구입니다. 다중우주를 해왔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시간이나 공간의 성질을 깊이 배워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대지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틀렸고,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념의 변경이 수반되었습니다. 나아가 지구도 태양계에 있는 8개의 혹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들어와서 분란이 일어났고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손에 잡힌 것은 태양계라는 모델이며 태양계는 은하계에 엄청나게 많은 혹성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우리의 은하계조차 우주에 엄청나게 많은 은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때마침 21세기에 우주라고 말하는, 표준모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우주의 전부라고 말하기가 낯설어집니다. 다중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도 무수한 거품 우주 중 하나입니다. 더욱 다양한 구조나 성질이 있습니다. 또 다중우주의 정의상 무언가가 일어나도 다중우주로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어쨌든 다중우주론이 마지막은 마지막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그때마다 얻은 깨달음은 우리가 정말로 하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표면의 극히 얇은 곳에 살고 있을 뿐이지만, 실은 그 지구 자체가 밤톨만하고 태양계 또한 밤톨만하고 은하계 또한 밤톨만하고 우주 또한 밤톨만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이언스를 통해 배워왔던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은 부분의 일부 표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위의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언스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여기저기 글을 써왔지만, 다중우주가 맞다면 그것들 대부분이 틀렸습니다. 우선 우리의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성운과 서로를 끌어당겨서 40억년 정도 지나면 하나의 은하로 합체됩니다. 다른 은하는 가속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40억년 이후에는 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우주라는 것은 은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되묻는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 은하 하나도 중력 때문에 10의 22승 억년 후에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 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천문학자가 있다면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블랙홀이라는 거군요라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블랙홀도 호킹에 의하면 점차 증발해갑니다. 10의 100승 년 후에는 증발해서 부슬부슬 가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어딘가의 시점에서 우리의 우주 자체도 그 속에서 태어난 거품 우주에 잡아먹혀 다른 우주가 될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그것이 어떤 우주인지를 확률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이론의 힘으로는 그 확률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웃음).

 

 

 

 

 

野村泰紀、「々の宇宙えて」『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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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만 조금 건드렸다가 추석연휴에 읽자고 미뤄두었던 집중과 영혼을 완독했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눈물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 선사하곤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경지를 맛보았을 때의 감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천하고 지질하고 악다구니로 남을 속여 제 잇속을 챙기는 범속한 인간들의 삶을 헤집은 후에 비로소 나타나는 야트막한 나무 등걸에 앉아 숨을 고르는 것이야말로 공부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오만가지의 감정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안그래도 요즘의 나는 내 공부의 전환을 맞이하고 싶었고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요 몇 년간 내 공부는 내 글을 생산할 정도의 힘을 갖지 못했고 다만 남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작업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나태한 생활방식이 결국 나약한 몸으로 증상화된 탓도 있지만, 갖가지 갈래의 공부가 제도권의 논리로 귀착되는 세태 속에서 그러나 그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내 공부가 길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 돌이켜보니 한국의 저명한 학자들의 글이 외국 학자들의 글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다. 한국 학자들의 글은 내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알짤 없이 건드려서 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내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게 만든다. 그들의 글은 구성적인 관념에 머무를 수가 없다. 이제는 거꾸로 생각이 된다. 한국어로 쓰였는데도 아프지 않은 글은 상도를 모르는 장사치들의 상술에 불과하다고.

 

집중과 영혼을 읽으면서 내 삶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어서 괴로웠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흐지부지 끝나버리거나 내게 남는 것을 따지면서 서로를 아카데미즘(참으로 볼품없는 한국의 아카데미즘이라도)으로의 진입 혹은 활개의 발판으로 수단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동료들을 의심하고 그만큼 나를 의심하는 중에 공부가 번민이 되어버린 이런 저런 공부모임들이 떠올라 마음이 부대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영민 선생에 비하면 나는 줄 것도 없고 그러한 경험도 미천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내 공부의 길을 찾는 것은, 얼마나 지리멸렬한지 스스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꽤나 되는 줄 알 정도로 지리멸렬한 한국 아카데미즘을 바로 잡아야할 우리의 공부론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치 일본의 (정치)사상사가 외래사상과 국학의 때로는 맞대결 속에서 또 때로는 상부상조 속에서 생성되는 지()의 연대기이듯이, 우리의 공부론은 한국 학자들에게서 젖줄을 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서경덕, 정약용, 이능화, 이덕무 등의 공부론을 논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내 공부가 정말 얕다’(‘아는 것이 없구나’)는 자각에 더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구잡이로 공부해서는 승산이 없다. 내 공부를 선학들의 공부에 비추어 벼리고 벼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과하게 느꼈던 부분, ‘학인’(學人)으로서의 정체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부분은 한국 아카데미즘 체제에서 포지션을 찾을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자기단속으로 비춰지면서도 그렇게 과하게 읽어 들이는 나 자신의 비틀린 자의식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또 책 말미에 언급한 장소성’, 즉 장소의 의미화는 사람의 무늬로서의 인문’(人紋)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에게서 안주시킬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인문학의 보루 같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마무리에 안도할 수 있었다. 어차피 사물의 존재론(이를테면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객체-지향적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단념한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위의 것들은 이 책의 흠으로 잡힌다 해도 이 책의 깊이는 그 흠마저 아우른다. 그 깊이는 하루하루를 번민으로 힘겨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김영민, 집중과 영혼 - 영도零度의 인문학과 공부의 미래, 글항아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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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덴마크의 인류학자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영혼 사냥꾼(Soul Hunters)(2007)4종과 인격성의 관념의 번역본이다. 필자가 덴마크 학자인데다가 시베리아 동북부지역의 수렵민인 유카기르족의 우주론을 다룬 책이다 보니,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핵심을 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뒤늦게 주목받았다. 그렇지만 콘과 카스트루 등이 다룬 아마존 인디오의 우주론과 상당부분 공명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애니미즘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앞으로 한 장씩 이 책을 번역해 올리겠다.

 

 

 

4. ()과 인격성의 관념

 

인격의 카테고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카기르족(Yukaghir)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생명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아이비, 즉 영혼 혹은 생의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된다. 유카기르족에게 세계전체는 이처럼 타일러적인 애니미즘의 의미에서 살아있는 영혼에 의해 활성화된다.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이해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식 있는 존재와 의식 없는 존재를 구별한다. 개념적인 수준에서 이 구분은 적어도 대체로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우리의 범주에 대응한다. 연로한 유카기르족 사냥꾼인 와시리 샤루긴은 동물과 수목과 하천은 움직이고 성장하며 호흡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lyudi kak my)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들은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돌과 스키와 식료 등의 생명 없는 것과 구별된다. 그는 이어서 정적인 것은 단 하나의 영혼, 즉 그림자의 아이비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반면 동적인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림자에 더해 두 개의 혼령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두 개의 혼령이란 움직이게 하고성장시키는마음의 아이비호흡시키는머리의 아이비. 사냥꾼은 그것들[두 개의 혼령]이 인간으로 인정한 생명 있는 존재자들과의 사회적인 공유관계에 그저 얽혀있을 뿐이라고 귀띔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것만이 [꿈속에서] 우리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선물을 준다.”고 말하며 그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것과 살아있으면서그와 동시에 인간인것에 대한 샤루긴의 구별이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들이 인식하는 인격의 카테고리는 인간 종에만 결코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생명 있는 존재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격성의 연속체가 끊어지는 특정 포인트가 있다(Descola 1996: 324). 우선은 인격의 지위가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이 분류를 곰, 늑대, 울버린, 여우를 포함한 육식의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엘크와 순록을 포함한 사냥감의 주요 종들에 대해서도 할당하는 것 같다. 조류의 어떤 종, 특히 큰까마귀 또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곤충, 물고기, 식물을 포함한 그 외의 생명 있는 존재들은 언어와 의지능력을 갖춘 의식 있는 존재로 이야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기계적이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은 유카기리족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합적이고 단일한 영역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방식에서 고도로 인격화된 세계의 여기저기서 조우하는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의 연속으로 지각된다(Pedersen 2001: 416).

나아가 특정한 동물 종이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인간 종과 동물 사이에는 인격이 감지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잉골드가 지적한 것처럼 북방수렵민은 인간 종에 대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고유명[이름]을 사용해서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물은 개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 간주된다. 즉 동물의 인격화되는 것은 그 현현이라기보다 오히려 타입”(Ingold 1986a: 247 강조는 잉골드)이다. 유카기르족 신화에서 이러한 출현은 식별가능하다. 신화적인 인간 종의 등장인물들이 개개의 이름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물들은 -남자’. ‘산토끼-남자혹은 여우-여자와 같이 종종 남자여자라는 접속사를 수반해서 자신의 종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북방수렵민이 동물 그 자체가 아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영적인 소유자만을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1986a: 247). 그러나 그의 논의는 유카기르족과는 맞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한 동물과 그것과 연결된 영적인 존재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냥꾼들은 동물이 항상 단지 그 주재자의 영(master spirit)으로부터 인격성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양자가 공히 그 자체로 인간임을 주장했다. 요헤르손 또한 유카기르족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이를 유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카기르족의 견해에서 사냥의 행운은 동물의 수호령의 선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동물 자신의 그것에도 의존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만약 순록이 사냥꾼이 하는 일을 탐탁치 않아하면 그는 순록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Jochelson 1926: 146).

따라서 동물의 인격은 단지 그 주재자의 영의 인격의 연장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동물들은 그 자신이 인격이다. 다음 장에서 유카기르족에서 동물의 인격성 개념개별의 속성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서은 사냥꾼이 모방의 실천을 통해 사냥감과 관계하는 경향 속에 있는 그 특유의 방식에 상당부분 유래함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 종이라는 카테고리를 제외하면 인격으로서의 실체가 갖는 지위는 유한하지도 않으며 고유하지도 않다는 것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사냥꾼의 일상생활에서 실체는 상황에 따라 인격성을 들락거리며 움직인다. 이것은 인간 다음으로 전형적인 생명 있는 존재로 인정되는 대형 포유류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지에서 나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마을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피리돈 노인에게 엘크와 곰과 순록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그는 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아들아,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런데 다른 기회에 내가 그와 사냥에 나갔을 때 못보던 엘크의 발자국을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오호, 이 동물을 궁지로 몰아 숨통을 끊는 데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겠군.”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피리돈 노인은 스키 막대로 나를 세게 후려치며 엄숙한 목소리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들[엘크들]은 서로 대화를 나눠. 만약 누가 한 마리라도 자네 말을 들었다면 나머지 것들에게 전해주어 모두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고!”

왜 사냥꾼이 어떤 상황에서는 동물을 의식 있는 존재로 보고 또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은가라는 난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겠다. 여기서는 인간으로서의 동물이라는 유카기르족의 관념을 그들의 경제 및 영적인 신념에서 가장 중요한 종과의 관계에 기초해서 묘사한 후에 그 속에서 인격성에 관한 그들의 사고가 의거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은 곰과 순록, 엘크를 포함한 몇몇 동물을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자신들과 매우 닮았다고 본다. 그들의 신화는 엘크를 항상 빈틈없고 동료들 간의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성격의 특징은 단지 신화적 사고의 표현만이 아니라 그 동물의 행동특성에 관한 경험적 지식의 반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냥꾼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여우, 검은담비, 울버린은 더럽고 냄새나는 장소에 꼬이고 그래서 그것들의 소굴은 냄새가 심하지만, 그와 달리 엘크는 그런 장소에서는 살 수 없다. 만약 버려진 기름통으로 인해 강물이 오염된다거나 악취가 생기면 엘크는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그는 또한 한 엘크가 포식자에게 쫓겨 지치게 되면 종종 동료 엘크의 큰 무리 속으로 뛰어들고 그 무리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짐으로써 그 엘크가 도망치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포식자는 지친 엘크의 발자국이 어떤 것인지를 찾기 어려워진다. 마찬가지로 눈이 두껍게 쌓일 때에 엘크는 교대로 길을 만들어 약한 것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각의 엘크에는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멍청한 것도 있고 똑똑한 것도 있고 신경질적인 것도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있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언제나 서로를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것 같아.” 이러한 이상적인 모습은 젠더의 관점으로 관념화된다. 즉 대체로 엘크는 남성 사냥꾼에 대한 성적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바치는여성으로 지각된다. 후에 살펴볼 것처럼 사냥꾼들의 언어는 엘크사냥과 성적유혹 간의 상징적인 유사함으로 넘쳐난다.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인격과 확실히 구별된다. 개는 유카기르족에서 유일하게 기르는 동물이며 이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사이에서 기묘한 위치를 점한다. 어떤 점에서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생명체보다 인간존재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냥꾼은 종종 자신의 개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개들은 주인인 인간에게 경고하고 인간을 보호한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곰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캠프에 접근하는데, 그때 개들은 심하게 짖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모은다. 나아가 사냥꾼은 사냥뿐만 아니라 운송에서도 개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 지금은 스노모빌이 월등해서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부상했지만 썰매 끄는 개 무리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스노모빌의 구입과 유지, 연료보급에 드는 고비용이 소련 붕괴 이후 사냥꾼들이 연달아 현금부족에 빠진 것과 맞물려 최근 10년간 개 무리의 부활을 촉진했다. 개는 충실한 근무태도와 위험한 상황에서의 유용성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들조차 더럽다고 간주된다. 개들과 같이 있으면 깨끗한 사냥감 동물들도 곧 더러워진다. 또 개들에게 엘크, 순록, 곰의 중요한 장기(심장과 장)를 먹이는 것은 터부시된다. 사냥꾼들은 개의 부정함, 성적난교를 즐기는 것, 배설물 따위를 먹는 기호성, 그리고 불쾌하고 강렬한 체취 등등의 점에서 개를 엘크의 멋진 행태 및 편안하고 온화한 몸 냄새와 대비한다.

늑대, 검은담비, 여우, 울버린 등 포식성의 동물 또한 더럽다고 간주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사냥꾼들은 이 동물들의 부정함을 그것들이 가진 억제되지 않는 살생의 즐거움과 살해된 먹잇감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 사냥꾼은 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놈들이 엘크를 죽여서 몸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부끄러워. 고기를 나눠먹을 때 특히 가장 강한 놈이 가장 먼저 먹고 최고로 좋은 부분을 모두 제 것으로 취하거든.” 그러나 반사회적인 것의 권력화로 간주되는 놈은 따로 있다. 울버린은 모든 비인간적 인격 중에서 가장 탐욕이 세고 쩨쩨하며, 다른 놈으로부터 빼앗은 먹잇감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죽은 동물을 발견하면 사체에 구석구석 오줌을 뿌려놓아 다른 포식자들이 건들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내게 울버린과 맞닥뜨리면 반드시 죽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왜냐하면 울버린은 아나키스트라서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야.”라고 어느 사냥꾼은 말했다.

그런데 유카기르족에게 중요한 것은 계층의 사고가 아니라 차이의 사고이며, 또 지위적인 계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울버린이 내가 숨통을 끊어놓은 엘크의 사체를 끌고 가버렸을 때였다. 고기를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내가 스피리돈과 함께 살해현장에 도착했을 때 동물의 사체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울버린의 오줌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이런 빌어먹을 도둑놈!”이라고 나는 욕을 내뱉었다. 스피리돈이 응대했다. “, 그런 식으로 울버린을 보지 말게. 우리가 먹는 고기는 선물과 다를 바 없듯이 울버린 또한 자기가 찾은 고기를 하지아인[영적인 주재자]에게서 받은 선물로 본다네. 누가 먹어버리든 하지아인은 모든 아이들과 똑같이 울버린에게도 먹을 것을 준다네. 그러니까 울버린은 자기가 하는 짓을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걸세. 그러기는커녕 울버린의 마음속에는 훔쳤다는 이유로 울버린을 죽이려는 우리야말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걸세.”

스피리돈이 지적한 것은 유카기르족의 세계에서 선한행동과 악한행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채택된 퍼스펙티브에 의거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후에 퍼스펙티브주의’(Viveiros de Castro 1998)라고 불리는 관점으로 이 관념을 논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이해 가능한 중요 지점은 사냥꾼은 일반적으로 울버린을 적으로 보고 일 있을 때마다 죽이려 하면서도 울버린이 본질적인 선한다른 종과 대조되는 사악한 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종은 각각에 고유한 독자의 사회적 및 도덕적인 코드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울버린은 자신의 종의 습관에 따를 뿐이며, 사냥꾼에게서 도둑질을 한다 해도 반드시 사악한 의지로 그리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카테고리에는 자연의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물의 지도령(spirit guide), 인간의 혼을 먹는 식인령(cannibal spirit)(유카기르어에서는 ku’lku’l인데, 사람들은 대개 사하어에서 채용한 아바쉬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및 다른 수많은 정령 등 우리로 치면 초자연적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존재까지 포함된다. 이 존재들은 보통 깨어있을 때에는 눈에 지각되지 않고, 냄새, 소리, 감각만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에서 분리된 현실성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신비한 존재들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물리세계의 주인이며, 그것들은 적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는 즉각 현실에서 존재하는 자들로 경험된다.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불안

 

사냥감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유카기르족에게는 생의 본질이다. 1930년대에 소규모의 온실재배가 도입되었는데 짧은 여름철을 이용해서 감자, 토마토, 오이 들을 재배한 이들은 네렘노예(Nelemnoye)의 러시아인들이다. 많은 유카기르인들, 특히 옛날 세대의 사람들은 야채에서 나무같은 맛이 난다며 야채 먹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의 정열은 고기로 향한다. 특히 빨갛고 지방이 많은 고기는 그 어떤 음식물보다 중요시되고 그런 고기 없는 식사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한다. 고기는 가장 열띤 교환의 대상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족은 친족관계의 유대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고기를 나눈다. 또 남자들은 고기를 연인에게서 성적인 봉사를 확실히 받기 위한 선물로서 활용하거나 지방소재지인 지리안카에서 연료와 교환된다.

그런데 고기가 아주 중요한 한편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과 먹는 것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식재료로 가장 선호되는 동물인 엘크, 순록, 곰이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고 이해된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어느 젊은 사냥꾼이 말했다시피 엘크나 곰을 죽였을 때 인간 누군가를 죽인 것처럼 느낀 적이 있어.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쫓아내야해. 그렇지 않으면 수치심으로 이상해진다고.” 동물들을 죽이는 것에서 유래하는 이 도덕적 딜레마는 사냥과정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된다. 후에 사냥꾼이 어떻게 해서 사냥감에게 위험한 사랑의 감정을 발전시켜 그로 인해 사냥감을 죽이지 못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겠다. 나아가 살해 후에 이어지는 의례에서 사냥꾼은 자신이 그 동물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기가 마을에서 나눠질 때 샤먼의 주술이 사용될 만큼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였다고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각자 할당된 몫을 거부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곰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로 곰을 먹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까 곰을 먹는 것은 일종의 식인에 관여하는 것이다.

아마존의 일부 민족 집단에서 샤먼은 주술을 통해 원래는 문제 있던 고기를 문제가 되지 않는 음식물로 바꿀 수 있다(Hugh-Jones 1996; Descola 1996: 91-92; Fausto 2007). 그러나 유카기르인은 그와 달리 사냥감을 죽여서 먹음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관점에서 동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동물이 정확히 인간처럼 독자의 마음과 사고를 가진 것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상정된다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죽임을 당한 동물의 영혼이 환생한다는 유카기르의 사고 또한 죄의 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렇지만 사냥꾼이 사냥감을 죽일 때 종종 현실적인 도덕적 불안을 자각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유카기르족은 평상시에는 육식을 즐기고 육식할 때에 죄 혹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분명한 징후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인의 문제는 그들 사냥의 우주론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도덕적 패러독스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바쉬랄이 식인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냥감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식인자라고 유카기르인들은 말한다.

 

 

신체와 냄새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성은 정신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특성까지 포괄한다. 신체와 냄새는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의 관념의 일부이며 지금 당장 그들 자신이 어떤 부류의 종과 왕래하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데에 중요하다. 냄새에 관해 가장 중요한 구분은 이레예(ile’ye)페이옐(pe’yel)이다. 부패, 질병, 죽음을 의미하는 후자는 다양한 악의 속성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의 영은 언제든지 눈에 보인다고는 할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는 다만 그 불쾌한 냄새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바쉬랄이 사냥감을 찾는 동안에는 언제나 냄새가 나지.”라고 어느 늙은 여인네가 말해주었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악취를 풍긴다네.”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유체는 페이옐이 되어 가까운 친척을 오염시킨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이것은 친척 남성이 그 후로 일 년이 지날 때까지 동물을 잡는 데 순탄치 못할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몸에 두르게 되어 그것이 사냥감 동물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겁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레예는 달콤함, 즐거움, 기쁨을 의미하고 특히 맛있는 음식의 냄새, 아이나 여성의 냄새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에 대한 애정은 입맞춤보다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아주 좋은 냄새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목덜미나 턱의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여성의 성적매력은 겉모습보다 냄새의 문제이며, ‘딸기꽃이나 산초냄새가 나면 좋다고 말한다.

예로부터 냄새는 한 인물이 어떤 민족에 귀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로 간주되어왔다. 요헤르손은 유카기르인이 에벤인을 그들이 내뿜는 다람쥐와 썩은 순록고기 냄새로 식별하고 또 사하인을 그들이 내뿜는 썩은 생선 간과 소똥 냄새로 식별한다고 했다(Jochelson 1926: 23). “그렇지만 지금은...”이라고 어느 연로한 여성은 말했다. “누구에게라도 많던 적던 똑같은 냄새가 나.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고 같은 것을 먹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 특히 사하인이 러시아인의 냄새에 대해 드러내는 강한 혐오감에 놀란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러시아여성과 결혼한 네렘노예(Nelemnoye) 출신의 사하 여성과 함께 저녁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은 적이 있다. 아들이 자신의 아이를 모친에게 안아보라고 건네주었을 때 러시아인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 아이를 안는 것을 거부했다.

비인간의 인격이 내뿜는 냄새는 유카기르어에서는 별도의 어휘, “코에 관계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요로라(yo’rola)에 의해 지시된다. 이 말은 강한 향기를 발산하는 포유동물에 대해 특히 사용된다. 즉 여우, 울버린, 엘크, (특히 발정기의) 순록 수컷 및 유럽족제비를 말하며, 이 중에서도 유럽족제비는 유달리 강한 냄새를 풍긴다. 나는 사냥꾼들이 울창한 타이가 숲에 숨어 지내는 엘크와 곰을 냄새만으로 찾아내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똥은 사냥감 동물의 은신처를 드러내는데, 그 냄새로 알아챌 수 있다. 많은 사냥꾼이 이 일에 숙련되어 있으며, 똥의 강도나 냄새를 기초로 그 동물의 성별, 연령, 건강상태까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다. 또 사냥꾼이 말하기를 각각의 장소의 영적인 지배자는 자신의 영역을 냄새의 흔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물이 냄새자국과 영역표시의 지점을 확정해서 활동영역을 나타내는 것과 거의 유사한 행동방식이다. 실제로 어느 사냥꾼은 한 정령의 영역을 통과해서 다른 정령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냄새만으로 알 수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강조해야하는 것은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이 후각을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시각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냥꾼이 엘크의 냄새를 몸에 묻히고 그 몸짓을 모방해서 엘크를 흉내 낼 때 그들의 목적은 그 동물을 가시화해서 공격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으로 불러내는 데에 있다. 뉴기니 숲의 우메다족(Umeda)(Gell 1996: 233-54)이나 아마존의 수야족(Suya)(Classen 1993: 8-9)처럼 시각을 경시하고 억압한다고 보고된 문화에서조차 그들의 생업활동에서 특히 사냥감을 공격하는 순간에는 확실히 시력에 의존하려 한다. 실제로 나는 무문자사회를 반시각적으로 정형화하는 경향을 조금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유카기르에서 나 자신의 경험은 스미스의 경험(Smith 1998: 412)과 공명한다. 그는 치페완족(Chipewan)의 사냥꾼들(데네족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숲의 감성이 강조하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감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 그리고 나아가 한층 강력하게 그것들의 감각이 상호작용하고 독자의 의식수준을 만들어내듯이 그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일 것, 이다.” 이 언명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즉 여러 감각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감각의 명확한 계층구조를 구축하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수렵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냥에 나설 때에는 사람의 모든 감각이 가동되어야 하고 지각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각각의 감각이 협동해서 투입되어 분리가 거의 불가능한 채로 뒤섞여야 한다.

사례를 들어보면, 사냥꾼의 머리는 그의 시각, 청각 및 후각에게 공통의 장이다. 사냥꾼이 사냥감 동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면 필연적으로 눈과 코를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돌리게 되며, 그러한 행동은 동일한 정보원에 대해 방향지어진다. 따라서 분리된 지각의 회로를 통해 사냥감을 감지한다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다라기보다, 이러한 각기 다른 감각들은 기능에 따라 그 겹쳐짐을 현시하는 것이며 신체적인 방향지움이라는 전체시스템 하에서 편성되는 것이다(Merleau-Ponty 1998: 317-18; Ingold 2000: 262). 랑거(Langer 1989: 49)가 제시한 사례도 이와 같다. “예를 들어 만약 나의 시선이 책상 위 꽃병에 꽂히면, 나의 눈이 그것을 훑어서 움직이는 방식은 내 손가락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을 미리 지시한다.” 그녀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대상을 느끼는 이상으로 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느끼고 손으로 대상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각기 다른 감각들의 현시는 단 하나의 것으로서, 감지하는 신체 그 자체로 상승작용 하는 시스템 속으로 휘감긴다. 그 때문에 그 감각들을 지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된다.

유카기르족 언어에는 신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정신에 해당하는 말이 없지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냥꾼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와시리 샤루긴에게 물었을 때, 그는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머릿속 아이비의 움직임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그 어느 쪽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다른 부류의 인격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고도 주장했다. “물론 인간과 엘크, 곰은 다른 사고를 하지. 그것들은 각각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야.”라고 그는 논했다. 이처럼 아이비와 생각하는 능력 사이에는 분명히 연결되고, 그것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비인간의 인격에서도 형태상으로는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한다. 이 차이의 근원은 내게는 신체의 특이성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이비가 이성의 능력을 일으키는 것에 반해, 신체는 사고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매개점이 된다. 바꿔 말하면, 비인간의 인격이 인간이나 다른 비인간의 인격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비 혹은 영혼 때문이 아니다. 아이비가 동일한 이성적 능력을 인간과 비인간에 부여하는데도 그것들의 인격이 다른 모습으로 사고하는 것은 각각의 종이 특정한 신체적 존재이며, 세계에 대한 지향성을 일으키는 독자의 육체적 자연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면 특정한 신체의식’(1998: 317-8)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유의 신체를 가진 결과로서 각각의 종은 세계를 독자의 방식으로 지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와시리 샤루긴은 인간의 포식행위와 아바쉬랄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해주었다. “우리 사냥꾼들이 엘크사냥에 나가는 것처럼 아바쉬랄도 사냥을 한다. 그러나 아바쉬랄들에게는 우리의 아이비가 엘크다. 여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암컷 엘크가 보인다. 남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수컷 엘크가 보인다. 그리고 아이의 아이비를 볼 때 정말이지 작은 엘크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들, 마른 사람들, 늙은 사람들 혹은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아바쉬랄에는 그것들이 각기 다른 크기와 연령의 엘크로 보일 것이다. 아바쉬랄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냥꾼이지만 무엇이 엘크로 보이는지는 우리와 다르다.”

아바시(abasy)가 인간 종의 아이비를 죽이고 먹는 것에 성공하면 해당 인간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루긴은 내게 아바쉬랄은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는 당연히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힘겹게 설명해주었다. 그것들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캠프를 가지고 있으며 개썰매로 여행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아바쉬랄은 그 자체로 사악한 생명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보는 한에서 인간의 아이비를 죽여서 먹는 것은 나쁜 행위가 된다. 인간 또한 사냥감이 되는 동물의 눈에서 보면 아바쉬랄이다. 내가 이를 깨달은 것은 사냥감 동물이 인간 사냥꾼을 무서워하는지 니콜라이 리하체프에게 물었을 때였다. “물론 무서워하지라고 그는 답했다. “우리는 그 몸을 먹어. 그래서 동물에게 우리는 악마야.” 그리고 그는 그래서 동물은 우리에게 질병이나 그 외의 액을 보내지. 죽여서 먹는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 말야.”라고 덧붙였다.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성의 동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후술하기로 하고,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유카기르인에게 아이비는 다양한 존재를 연결하고, 그것들을 잠재적인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한편으로 이러한 존재의 각기 다른 부류의 인격으로서의 독자성은 각각이 가진 신체의 특이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형상이나 움직임, 냄새를 풍기는 신체의 육체적 특질이란 바로 종별의 각기 다른 정체성이 창발하는 장이다. 사냥꾼이 자기를 인간 종의 사회적도덕적인 척도에 맞추어 사고하는 인간의 인격으로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그의 신체가 인간존재의 신체이기 때문이며, 순록이나 아바시 또는 그 외 비인간적인 인격의 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종의 공동체 내부에서 사냥꾼에게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 자의 신체가 아니라 아이비. 한편 종들 사이에 걸친 관계에서 그것은 역전한다. 이 관계에서 어떤 부류의 인격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다. 한 인격의 종으로서 정체성은 신체에 귀속되거나 혹은 신체에 접합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며 구축하는지는 당신이 가진 신체의 종류에 의한다.

 

 

상황으로서의 인간성

 

유카기르족에서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성을 해명하는 것으로서 포괄적 및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창조신화는 요헤르손도 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카기르인이 성서의 창조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출현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내게 연로한 여성 아크리나 샤루기나는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먼 옛날,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세계는 매우 더웠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매우 작아서 다람쥐 모피로 한사람분의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부른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날고기를 먹었으며 불 피우는 법을 몰랐다. 세계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작은 사람들은 다람쥐를 죽여 그 모피를 입었다. 그래도 너무 추웠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횃불을 들고 강림했다. 예수는 그것을 작은 사람들에게 내려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불 연기가 작은 사람들을 키 크게 만들었고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

 

불이 자연의 물질을 문화적 용도로 전화시키는 원형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틀에 박힌 양식 중 하나이다. 요리란 그 가장 명백한 사례다. 그러나 유카기르인에게 불은 또한 사람들을 변용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캠프파이어 연기에 쐼으로써 한 인격의 종으로부터 다른 인격의 종으로 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해보자. 유카기르인에게 좋은 사냥꾼은 자신의 인간 냄새를 억누르는 기술에 숙달된 자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사냥꾼이 숙련된 탈인간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들의 일반이론이다. 즉 한 인간이 가진 인간 신체의 성질을 사냥감 동물의 신체의 그것으로 바꿔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냥꾼은 숲에 나가기 전날 밤에 바냐(banya 사우나)를 하러 간다. 그들은 비누를 사용하는 대신 마른 자작나무의 묶음으로 온몸을 문지른다. 엘크는 자작나무 잎의 향기를 맡으면 도망가지 않고 사냥꾼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아가 특히 강한 인간의 냄새가 난다는 아이는 사냥꾼에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집 안에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부모는 아이들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사냥꾼이 숲으로 출발할 때에는 아이의 냄새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식이나 손자를 안아서도 안된다.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전제조건은 성적인 절제다. 적어도 사냥에 나가기 전날 사냥꾼은 성교를 참아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냥꾼이 성교를 참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성적인 관심이 사냥감 동물 및 그것과 결부되는 영적 존재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성적접촉이 그의 신체에 명명백백한 인간의 악취를 남기는 때문이기도 하다. 사냥꾼들은 내게 사냥감 동물을 매료하는 이들은 오직 인간 체액의 냄새가 없는 이들뿐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사냥하는 동안 숲의 세계나 잡힌 동물들에게 이질적인 외부자의 신체이기를 정지시킨다. 그들에게 사냥의 본질은 사냥감 신체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함으로써 사냥감과 동일화하고 그 지각과 행동 모드를 알아내려는 시도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캠프가 있는 땅은 인간의 냄새, 특히 나무연기 냄새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담배든 캠프파이어든 연기야말로 동물의 냄새를 중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숲과 캠프의 경계는 어떤 물리적인 표지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파이어의 연기가 도달하지 않는 곳의 위치로 그어진다. 따라서 나무연기는 인간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냥꾼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그에게서 타자성을 쫓아내고 그를 인간화한다는 현실적인 감각을 준다. 유카기르족에게 나무연기와 인간성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간성이라는 상태가 인간존재에만 귀속되지 않고 모든 인격 종에 머문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은 인간의 삶과 유사한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숲을 돌아다닐 때 혹은 강을 헤엄칠 때 물고기나 사냥감 동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숲의 어딘가 혹은 강과 호수 깊은 곳에 있는 그 자신의 땅에 들어갈 때 그것들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산다고 한다. 비인간의 집은 인간의 집과 완전히 똑같다. 집 한가운데에 난로가 있고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숲에서 돌아오는 그것들을 인간화한다. 다만 그 변용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변용한 상태가 되어도 동물이나 다른 비인간은 변용 전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고 하며, 이러한 특징에 의해 그것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특별한 집단의 존재로서 부류가 결정된다. 다음 장에서 언급할 이야기에는 한 사냥꾼이 순록인간과 만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천막에 머무는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신음소리를 내고 고기 내신 이끼를 먹는다. 마찬가지로 여우인간은 강렬한 냄새를 풍기고 교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더러운 집에 산다. ‘엘크인간은 일반적으로 우호적이고 배려심이 있으며 집을 깨끗이 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거나 이전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행동들은 다음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동물은 인간 종의 사냥꾼과 만날 때가 아니라 자신의 땅에 있을 때만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숲속에서 그것들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문화적인 속성을 잃는데, 이 과정을 통해 카니발리즘을 범하리라는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동물을 죽여서 소비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크리족(Cree)에 대해 탄너(Tanner 1979)가 제시한 해석이다. 사냥감 동물이 동물의 눈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외견을 띠고 있는지는 숲을 돌아다니는지 자기 집에 머무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고방식은 크리족과 유카기르족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다. 크리족에게 사냥감 동물은 두 수준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한다. 하나는 자연적 수준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수준이다.”(Tanner 1979: 137)라고 탄너는 주장한다. 자연적 수준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죽임을 당해 소비되는 단지 물질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화적 수준에서는 사회적문화적 조직에 대한 전통적인 크리족의 양식을 모델로 하는”(1979: 137) 영역에 참여하는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재-해석된다.

그러나 이미 잉골드(Ingold 2000: 48-52)와 브라이트만(Brightman 1993: 176-77) 등의 논자가 지적했듯이, 동물의 출현을 한편으로는 영적/문화적’,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자연적으로 나눠서 사고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 첫째,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으로서의 사냥감의 지위는 실제 사냥 전후에 이뤄지는 이야기로서 인류학자가 상징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만 표명되지 않는다. 사냥꾼이 숲에 있는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행동에서 사냥감의 지위는 인격으로서 언급된다. 잡힌 동물의 인격은 단지 이야기하는 중에 부가되는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의 실천적인 행위에 침투한다. 유카기르인이 사냥의 성공을 종종 사냥꾼에 대한 동물의 사랑으로 되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고방식은 상호 응답하는 <타자>를 전제로 하는”(Brightman 1993: 177)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짜여진행동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잡힌 동물은 단순한 사물로 환원되지 않고, 사냥꾼은 그것을 마음 없는 고기 이상으로 본다.

나아가 유카기르족은 동물을 그들 자신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할 뿐만 아니라 사냥꾼 자신을 사냥감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것은 잡힌 동물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대화를 절제하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일련의 덫을 점검할 때 사냥꾼은 홀로 잘 다닌다. 그런데 가령 엘크나 곰을 사냥하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할 때도 무엇보다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소리를 내는 경우 그 소리는 동물을 유혹하려고 동물의 소리를 모방할 때뿐이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동물의 소리나 신체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문화적인 것에 대치되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유카기르어에는 우리의 자연에 대응하는 말이 없으며 인간고유의 속성으로서의 문화에 상당하는 말도 없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냥꾼이 사냥감과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때, 그 동물의 기분과 감각 및 감수성과 어떤 형태로든 공명하는 퍼포먼스를 만들어냄으로써 동물을 유혹하고 동물이 자신을 바치도록유도한다. 따라서 동물의 정체성을 몸에 두르는 것은 탈주체화의 프로세스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화의 프로세스로 생각할 수 있다. 사냥꾼은 동물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적 경험 혹은 네겔이 말한 경험의 주관적 성격’(Nagel 1997: 166)을 도입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personhood)은 인간 종의 증거가 되는 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란 인격의 수많은 외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엘크나 순록이 자신의 집에 돌아갈 때 인간의 겉모습을 띤다고 유카기르인이 주장할 때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영역[문화와 자연]을 횡단해서 비유적인 유사함을 끌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화의 전제가 되는 참된 단일성을 지시하는 것이다”(Ingold 2000: 50). 나는 이 단일성을 상황으로서의 인간성’(Descola 1986: 120)으로 제시하겠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의 인격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인다 해도 인간의 행동과 유사하거나 완전히 동일한 행동양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유카기르인은 믿는다.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Viveiros de Castro 1998)가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논문에서 퍼스펙티브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 사고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으로부터 다양한 부류의 인격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현실을 지각한다”(1998: 469). 이것들은 동일한 세계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이 아니라 동일한 관점을 각기 다른 현실에 들여온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부류의 종은 각각 독자의 영역에 있으며 세계를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각각이 무엇을 보는지는 그 신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인간 종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동물을 동물로서, 또 정령을 (만약 보인다면) 정령으로서 본다. 그렇지만 (포식) 동물과 정령은 인간을 동물(사냥감)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사냥감으로서의)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서 아니면 (포식) 동물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동물과 정령은 자신을 인간으로서 본다. 그것들은 자신의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혹은 의인적 존재가 된다고) 지각하며, 자신의 관습과 특징을 문화의 형식으로 경험한다”(Viveiros de Castro 1998: 470).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대략적으로 유카기르의 사고와 공명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종의 존재자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지각경험을 하는지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아바쉬랄이 인간의 아이비를 엘크로서 보는 반면, 인간존재는 아이비를 영혼 혹은 생명의 본질로 본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엘크를 사냥감으로 보는 반면, 엘크는 인간을 아바쉬랄로 본다. 따라서 정령과 인간 양자 모두는 사냥감을 보고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나서지만 무엇을 사냥감으로 지각하지는 다르다. 그리고 누구를 악령으로 생각하는지는 어떤 신체의 퍼스펙티브를 채택하는지에 달려있다.

덧붙이면 특정한 종이 다른 종에 대해 가지는 퍼스펙티브는 그것이 자신의 양식과 실천을 지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냥꾼은 울버린을 탐욕이 강하고 부도덕하다고 보지만, 울버린의 퍼스펙티브에서 보면 그 반대다. 스피리돈이 지적했듯이 울버린은 자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반면, 인간 사냥꾼이 울버린을 죽이려 할 때에는 부도덕한 행동규칙을 시인하는 자로서 울버린을 본다. 이처럼 다양한 인격의 종들 각각은 말을 사육하고 불을 소유하며 발화능력을 활용하고 도덕규범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인간주체로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일한 조건에서 자신을 지각한다.

나의 이 관찰에 비춰보면, 유카기르족에게 인간성의 유래를 설명하는 포괄적인 기원신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기묘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인간성이란 모든 종의 인격이 제각기 고유한 자연을 경험하는 형식이다(Viveiros de Castro 1998: 477). 다양한 부류의 종의 인격의 차이는 주로 개별의 퍼스펙티브의 처소인 특유의 외적특징 혹은 신체에 존재한다. 따라서 동물의 기원에 얽힌 유카기르족의 무수한 신화가 바로 이 점다른 부류의 동물들이 어떻게 각각의 신체적인 외견을 입수했는가에 관련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Jochelson 1926: 241-98: 1900; Zokova, Nikolaeva, and Demila 1989; Spindonov 1996[1930]: 46-57).

그러나 조금 불가사의한 것은 동물이 자신의 땅에 있을 때조차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지 않고 동물의 특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실제로 모든 종의 인격이 해부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이 자신을 보듯이 자신을 본다고 한다면, 동물들이 자신의 숨겨진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데도 자신을 동물의 생리적 및 행동적 특질까지 갖춘 것으로 본다는 패러독스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신체의 문제 그리고 동일성과 타자성의 동태에 대해 신체가 맺는 관계의 문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Rane Willerslev (2007) “Chapter 4. Ideas of Species and Personhood”, Soul Hunters: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h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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