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출판된 학사 개설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본서 역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개념과 이론을 구성원의 생애와 그 생애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잘 설명해내었다. 학문에 대한 시대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학사'의 본래적 의미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에서 21세기의「비판이론」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20세기 유럽의 비판적 지성으로 자리매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서들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한 개설서이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사회연구소의 창설과 초기 호르크하이머의 사상

제2장. 「비판이론」의 성립 - 초기의 프롬과 호르크하이머

제3장. 망명 속에서 빚어진 사상 - 벤야민

제4장. 『계몽의 변증법』의 세계 -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제5장.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도르노와 전후독일

제6장. 「비판이론」의 새로운 전개 - 하버마스

제7장. 미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찾아서

 

  알려진 것과 같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들로 구성된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연구소>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유대계 부호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자적이며 전문적인 마르크스주의 연구기관으로 창설되었으며, 호르크하이머가 1930년 소장으로 취임한 후 1932년 『사회연구지』를 창간하면서 '비판이론'의 발상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당시 실증주의적인 개별과학이 헤겔적인 전체성의 관점을 상실하는 경향에 비판적이었고, "철학적인 이론과 전문화된 과학적 실천의 부단한 변증법적인 상호침투와 전개'를 주창했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처음부터 정신분석학, 문화학, 경제학, 문학, 음악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총체적인 관점의 학문을 지향했음을 말해준다. 

  한편 당시 독일에서는 1919년 세계최초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된 이래 좌우익의 정치세력의 대립이 격화일로에 있었다. 유럽에서는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민중생활이 더욱 궁핍한 가운데 위기일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이러한 정황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불러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문명적 비판에서 학파 고유의 사상을 구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창기 멤버였던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를 상대화하는 사상적 도구로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초기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통합하여 사회심리학을 구상하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다. 프롬은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리비도의 발산양상으로서 사회의 리비도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문명에 숨겨진 인간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프롬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의 대립 끝에 <사회연구소>와 결별했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사상적으로 통합하려 했던 그의 시도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만한 것이 아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라는 이름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데카르트 이후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는 이원론을 "전통적 이론"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따라 (대상을 수용하는) 감성의 수동성과 (개념을 파악하는) 오성의 능동성을 통합하는 '구상력'을 "비판적 이론"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비판적 이론"은 사회전체가 가진 분열적 성격에 대해 주체의 비판적 태도와 행동을 통해 그 모순을 자각함으로써 성립하는 이론이다. 이 "비판적 이론"이 전후 독일에서 소문자에서 대문자로 바뀌어 '비판이론'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1932년 독일 총선거에서 히틀러의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히틀러가 합법적인 권력을 획득한 이래 유대인의 배제와 추방이 공식화되었고 1933년 3월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연구소>는 폐쇄되었다. 호르크하이머, 프롬, 아도르노 등은 <사회연구소>의 뉴욕이전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비판이론'은 이처럼 망명자의 자기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1941년 뉴욕에서 초판발행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이자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유럽에서 자행되는 야만적인 살상이 고도의 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는 통찰로부터 기획된 것이다. "야만은 계몽이라는 인간의 기획에서 우연히 일탈한 것이 아니라 계몽 혹은 문명화라는 개념 자체 속에 처음부터 배태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이 의문은 '자연과 문명의 유화(宥和)'라는 테제로 이어졌다. 즉 외부에 있는 자연의 지배는 쾌락에 기우는 내부의 자연(욕망)의 억압을 댓가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연지배라는 문명의 역사, 계몽의 과정은 동시에 체념의 역사에 다름아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행하는 자연지배는 보존해야 하는 자기(내적자연)을 상실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자연을 억압함으로써 확립한 '자기'란 보존해야만 했던 자기 그 자체를 상실한 이른바 공허한 자기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억압하는 10년간의 고행 끝에 '고향'에서 저지른 것은 아내의 구혼자들과 이를 묵과한 하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새로운 야만'이었다. 이처럼 억압된 힘을 빼앗긴 자연(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자연)은 '새로운 야만'으로 부활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지배'와는 다른 자연과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아도르노에 의해 "예술의 원사(原史)"로 말해진다. 

  1969년 독일의 신좌익운동의 발흥 속에서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소>를 점거한 학생운동세력과 대립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간접적으로 협력했던 마르쿠제가 전후 독일의 신좌익 학생운동의 지지를 얻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도르노는 신좌익학생운동 세력과 적대적이었고, 아도르노 자신 또한 신좌익운동과 파시즘의 친화성을 읽어내었다. 결국 1969년 아도르노는 심장발작으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신좌익계 과격파의 이론적 지주라는 위치를 부여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과 유희가 일치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의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설파한 마루쿠제와 국민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 노이만에 한한 것이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이 전후 독일에서 재판된 것은 1969년 4월이다. 

  아도르노는 1951년 전후 독일에서 재건된 <사회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1958년 소장에 취임한 이래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기만족적인 관점에 머물러서는 비판적 정신은 절대적인 물상화에 대항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이데올로기의 체현 그 자체를 거부했다. 아도르노는 '동일화'가 언제나 그 외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에, 미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놓아두는 능력으로서 '비동일화'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타자와 이화(異化)하는 '비동일적인 것'의 인식을 지향했다. 

  '비판이론'의 제2세대인 하버마스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자연과 문명의 유화' 테제는 이질적인 능력을 통합하는 능력으로 발휘되었다. 포퍼, 루만, 푸코, 데리다 등과의 논쟁을 이끌며 그들의 이론을 흡수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총합해왔던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비판적 태도 그 자체를 실천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라는 이질적인 사상사의 통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대표작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유화'라는 과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과 문명의 유화'를 생활세계와 시스템이라는 관계로 풀어내고자 했다.  

  최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3세대"에서는 푸코의 권력론을 사회적인 승인관계의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와 사회정의를 분배와 재분배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문제로 나아가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호소미 카스유키(細見和之), 『フランクフルト学派 ホルクハイマー、アドルノから21世紀の「批判理論」へ』, 中公新書, 2014년 10월 25일.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