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읽었던 세 권의 책에 관한 짧은 감상문을 쓴다. 코 앞에 닥친 일을 마무리하고 느긋하게 쓰려고 마음 먹었지만, 일은 조기 두름 엮이듯이 끊이지 않아 이러다 읽은 기억마저 잊을까 싶어 써두려고 한다. 

 

  『갱부(坑夫)』는 나츠메 소세키가 전업작가로 명성을 얻은 후 도쿄의 일명 "소세키산방"(漱石山屋)이라고 불린 집으로 이사한 그 이듬해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소세키의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이 줄거리는 단순하다. 도쿄의 평범한 서생이었던 어느 젊은 청년이 어느날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번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며 집을 나온다. 그 가출길에 우연히 갱부를 모집하는 브로커를 만나 함께 광산으로 떠난다. 기차를 타고 강을 건너 산을 넘는 내용이 전반부. 후반부는 광산의 "함바"(飯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단 한번의 갱의 체험담으로 채워진다. 서생은 결국 갱부는 되지 못하고 경리로 5개월간 일하다 도쿄의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나는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몰입할 수가 없다. 가령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의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느낀다. 이와 반대로 소세키는 마치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지 말 것을 끊임없이 주문하는 것 같다. 소설의 어느 등장인물에게도 감정이입을 허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서술기법은 참으로 묘하다. 언제나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가 서로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러나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웃긴 것이고, 서로에게 웃긴 서로가 지나고 나면 스스로에게 웃긴 것이다. 이렇듯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특유의 웃음은 삶이 갖는 진지함 그 자체의 웃음이다. 바보 이반만큼 진지한 이가 또 있겠는가. 

  이 소설은 나츠메 소세키의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소세키가 도쿄제일고의 교사 시절 그의 제자였던 후지무라 마사오가 자살한 사건이 있다. 후지무라 마사오의 자살은 메이지 시기 일본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으로, 게곤폭포에서 투신하기 직전 남긴 그의 유서는 지금도 유명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끝에 죽음을 결정했다고 하는 내용. "커다란 비관과 커다란 낙관이 서로 같다는 것"이라는 유서의 마지막 문장. 

 『갱부』는 나츠메 소세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젊은 제자 후지무라 마사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후지무라 마사오에 보내는 편지이다.  소세키는 자살을 결심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던 『갱부』의 젊은 서생에게 번민과 고독과 무상의 틈새를 비집는 바보이반의 웃음을 선사한다.  

  이 책은 현암사에서 출간 중인 나츠메 소세키의 전집을 얻은 후 읽었다. 아니었으면 평생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책이 아니고 그의 소설을 모조리 섭렵할 만큼 그의 소설세계에 빠진 것도 아니니까. 돌이켜보면 책이란 우연을 가장한 인연인 것 같다.

 

  인연으로 읽은 두번째 책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다. 저자의 친필싸인이 담긴 이 책 역시 저자와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읽을 일은 없었을 책이다. 내게 "문학소년"으로 기억되는 저자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지만 그의 책에서는 여전히 "철학소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책에서 그를 기억해낼만큼의 인연은 책의 주인공과의 대면을 가로막는다. 나는 라이프니츠를 읽은 것인가, 박제철을 읽은 것인가. 내가 알게 된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인가 박제철인가.

  책은 너무 좋다. 철학이 이렇게 쉽고 재밌는 줄은 처음 알았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어렵고 지루하지 않다. 시간, 공간, 물질은 서로가 서로에 의해 존재하고 의식된다. 그러면서도 시간, 공간, 물질은 개체적 실체의 직관에 의해 서로를 지속시킨다. 이 책은 친절하게 수학의 가장 쉬운 도식으로 하나하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과 진리론과 시간론을 풀어놓는다. (이 책에 관해서는 프로젝트 일이 마무리되면, 라이프니츠 특집으로 다루련다!)

 

  마지막으로 『일본전후정치사』를 짧게 언급하련다. 이 책과의 인연이라고 한다면, 어거지로 붙이는 것으로다, 위의 저자와의 약속장소가 이 책의 출판사가 운영하는 책다방이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초판이 나왔을 당시, 일본인의 인명 표기가 상당부분 잘못되어서 초판 1쇄를 회수하고 다시 찍었다는 이야기를 그 전에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 번역을 했다는데 왜 그런 실수가 나왔을까 의아해했더랬다. 그런데 책을 보니 한 줄 건너 인명이 나온다. 그럴만한다. 전후 일본의 웬만한 정치인들은 다 거론된 것 같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하면 정치부 기자가 정리한 선거와 정당에 관한 '통계적 기록'이다. 사실관계를 위해 참조하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 하나는 정당이 있고 선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가 있고 정당이 있다는 것. 보통선거의 실시 이후 인류의 정치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느낀 점 또 하나는 대권-지도자는 정말 우연히 탄생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누가 대권의 정치인이 될지를 모른다. 시대만이 안다. 

 

  일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은데 지난주는 이렇게 읽어버렸다, 인연에 따라. 이제 나는 죽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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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권용선, 역사비평사, 2014년)은 학생들에게 기말과제로 읽힐만한 책인지 알기 위해 먼저 읽어본 것이다. 이 책은 벤야민의 몇 가지 이론적 테마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고찰한 일종의 전기문이다. 쉽게 쓰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벤야민의 사유 자체가 쉽지가 않아서, 아무리 풀어쓴 책이라 해도 과연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또 책 중간중간에 맥락 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데리다니 들뢰즈니 가라티니 고진 등의 이야기는 저자 자신의 수유-너머의 고유한 경험들에서 비롯된 것이라 오히려 벤야민의 사유에 대한 접근을 흩트려놓는다. 결정적으로 벤야민의 공부법이라고 소개한 '수집', '인용', '배치' 등의 탈역사적 역사화의 글쓰기 부분이 쉽게 이해되기는 하는데,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오히려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조금 의심스럽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아도르노가 "인간학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한 것과 같이, 산업자본주의 이후 출현한 인위적인 '자연'으로서의 산업기술로부터의 공동체적 지양에 있다. 그것은 아카이브 구축의 방법론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을 이 책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벤야민을 단순화한 책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이라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니까. 

 

 또 하나 오늘 읽은 것은 『朝鮮総督府官吏: 最後の証言』[조선총독부 관리: 최후의 증언](2014)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1915년생으로 1933년 조선으로 건너가 1946년 일본으로 귀환할 때까지 강원도의 관리직을 역임했던 어느 일본인의 생애구술록이다. 이 분은 현재 살아있고 사진으로 봤을 때는 10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 정정하다. 새로운 내용이 있을까 했는데, 내가 한 조사인터뷰에서 귀에 딱정이 앉을 정도로 들었던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담론적 분석은 박사논문에서 이미 다 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일본의 극우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이다. 조선 출신의 '히키아게샤'(引揚者 귀환자)의 경험담이 현재 일본사회 내의 정치적 지형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읽은 것이다. 나는 "조선인과 잘 지냈다"고 하는 그들의 강변이 일본의 국민적 동일성 내의 내적 구획화에 대한 저항으로 분석했는데, 이 책에서는 '서구(戰後는 미국)중심주의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맹주로서 일본'이라는 서사로 구축되고 있다. 토 나올 것 같았지만, 연구를 위해서 끝까지 참고 읽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첨예한 주제와 영역을 다루면서도 탈정치적인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은 허위의식의 우익적 이데올로기에 안착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좌파적으로 전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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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것은 아니고, 서장과 본론의 부분부분 읽으면서 생각난 것들을 적어둔다. 

너무 재밌어서 계속 읽고 싶지만, 새벽에 나가봐야해서 메모만 남기고 자야겠다.

1. 정말 재밌다. 그리고 쉽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이 재밌고 쉬울 수 있는지. 그는 독자의 어렴풋한 의문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서 논리를 끌어낸다. 독자는 자신의 의문이 무언지 집어주고 풀어주니 재밌을 수밖에.

2. 적어도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세대교체가 시급하다. 486을 포함하여 썩은 머리들이 인문학을 독점해왔다. 학계는 학계대로 삭민주의가 판을 치고, '대중인문계'에는 약장수들이 판을 치고 있다. IMF이후 신자유주의의 직격탄을 맞은, 그래서 한국사회의 폐부를 누구보다도 온몸으로 느끼며 위선에 길들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자유로이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게끔 썩은 머리들이 비켜줬으면 좋겠다. 내 주위에는 정말 똑똑한 젊은 연구자들이 많은데, 기성학계의 권력에 눌리고 밀려 소질과 재능을 소진하고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 

3.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비평은 눈이 부시도록 뛰어나다. 하루키가 일본사회의 무엇을 보여주는지, 그래서 하루키의 한계와 문제는 무엇인지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데,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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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가을 그녀에게서 이 책을 받았으니 내 손에 들어온지 3년만에 읽은 것이 된다. 그녀는 니이가타(新潟)의 시바타(新発田)로 인터뷰 조사를 하러 온 내게 '뭐하러 제국주의자의 반동분자를 만나느냐'고 질타했더랬다. 니이가타는 재일코리안의 북송사업의 송환항구가 있었던 곳이며(주*), 일본제국의 패전 후 '외지'로부터 귀환한 일본인의 정착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니이가타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과도할 만치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이 아주 드물게 있는데,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내게 준 책이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이라는 책이다. (주* 1959~1984년에 걸쳐 186차례 약 9만4천명의 재일코리안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かぞくのくに>[가족의 나라](2012년, 양영희 감독)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실상과 아픔을 알 수 있다. ) 

이 책의 저자인 이소가와 수에지는 1907년 시즈오카(静岡) 출생으로 1928년 보병으로 입대하면서 조선의 나남(羅南)으로 건너가 1930년 소집해제된 후 흥남공장의 노동자로서 <태평양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약 10년간 복역하고 1947년 귀환한 일본인이다. 저자는 '귀환 후 소학교의 야간수위 일 등을 하다 현재는 무직'이라고 밝히고 있다(책이 출간된 1984년 시점에서). 무산자의 당당함이란!

전후 일본사회에서 패전 후 '외지'에서 귀환한 일본인은 "히키아게샤"(引揚者)로 통칭된다. 히키아게샤의 '고난의 귀환'의 자서전적 수기는 차고 넘친다. 이는 1968년 알제리의 독립 후 프랑스로 귀환한 "피에누아르"(주**)의 수필, 소설, 자서전 등의 수기가 1000편이 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은 그것들과는 아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조선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한 일본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주** pied-noir, 독립 이전의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을 이르는 말, 알베르 카뮈, 데리다 등이 있다)

이 책은 흥남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노동운동의 초기 역사를 아주 소상하게 기술해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이 가진 가치는 분명하다. 1927년 부임한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는 산업개발정치를 표방하며 특히 북조선에서의 공장 건설과 발전소 개발을 주요 식민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30년 흥남공장에서는 약 6천명의 노동자가 있었고 흥남의 인구는 약 3만명에 달했으며, 1945년 패전 시 공장종업원은 4만5천여명, 흥남의 인구는 18만여명에 이르렀다. 1931년 상해에 본부를 둔 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를 발기로 아시아 전역에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중심은 흥남의 노동자들이었다. 또 1927년 일본 본토에서 보통선거로 실시된 중의원선거에서 비밀조직으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이 출마 대패한 후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맞이했을 때 일본공산당원의 다수가 조선의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잠입한 일본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립--, 그리고 자발적인 흥남의 노동자들이 국제적 노동조합운동의 기치로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 '태평양노동조합'이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32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 검거되었고 그 후 10년간 흥남교도소와 경성교도소에 복역했다. 경성교도소에서 정치범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는 날에는 반드시 "적기의 노래"와 "공산당 만세"를 한번은 조선어로 또 한번은 일본어로 부르고 외쳤다고 한다. 그것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동지를 위한 배려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의 노동운동과 공산당의 초기 역사는 네이션의 시야를 넘어서는데, 네이션을 넘어선 아시아의 시야에서 그것을 해명한 논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시 그들이 추구했던 노동운동과 코뮌의 가치가 일국의 사회주의 혹은 아나키즘 혹은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이것은 시야를 갖추지 않으면 역사를 발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분야의 연구자들의 몫이고,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45년 8월 15일 전쟁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옥음"을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과 함께 들은 직후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방송이 끝난 후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들의 표정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안심하고, 어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뻐했다. 그들 중 누구도 슬픔하거나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나는 돌연 패전국의 국민이 되었다. ... 전형적인 침략전쟁의 귀결이며 자업자득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 그런데 나의 상념에 스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의 총결산을 행해야 하는 날이 구체적 일정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pp.232-3)

제국주의에 맞섰던 코뮌주의 혁명가가 제국의 성원으로서 식민지배의 청산을 책임지는 위치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청산의 과제란 사상의 이념이 무엇이었든지간에 '외지'에 남겨진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군국주의 국가 일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동시에 이방의 땅에 버려진 패전 일본인이 지금이야말로 힘을 합쳐야만 하는 혼돈의 현실에의 항전이다."(p.258)

주지하다시피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귀환'이 아닌 '억류'의 조치를 취했으며, 10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북한의 공산주의 입장에 따라 식민지배자의 역사적 처벌을 감내할 것인가 동포의 구제를 모색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의 협력을 얻어 야밤탈주를 감행한다. 그 또한 1947년 1월, 북조선에서 추위와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9백여명의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다.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에게 "기곡"(キコク)으로 불렸던 이소가와(磯谷)의 코뮌적 지향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국가권력을 상실한 구식민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 이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정치적 이해"에 충실했던 그의 행보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그러한 그의 행보를 이끌어내었던 시대의 사상적 구조는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기곡"와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사상적 구조에 놓인 "제국주의의 반동적 분자"의 이야기도 놓칠 수 없다.

니이가타에서 소식이 왔다. 1918년생인 나의 가장 최고령의 제보자가 위독하다고 한다. 그가 내게 빌려준 자료를 돌려받고 싶다고 하고, 나는 그의 방 한가득한 자료를 얻고 싶다. 담판을 지러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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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주일간 가라타니 고진의 『帝国の構造 中心・周辺・亜周辺』[제국의 구조: 중심, 주변, 아주변](青土社, 2014년 8월)과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b, 2013년 10월)을 읽었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길들여진 속독 때문인지, 찬찬히 읽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놓친 논의가 적지 않다. [제국의 구조]는 강독세미나가 계획되어 있어 다시 읽게 되겠지만, [트랜스크리틱]은 아무래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또 [제국의 구조]는 일본어판으로 읽어서 원전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은 읽으면서 의심되는 번역어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원서를 구입할 생각이다.

[제국의 구조]는 가라카니 고진의 가장 최근의 저작으로서, [세계사의 구조]를 수정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2012년 9월부터 두달간 [세계사의 구조]를 가지고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순회강연한 강연록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계사의 구조]를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내용이 수정보완됐는지는 모른다. 

내가 [제국의 구조]를 읽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어느 지인 때문이기도 하고, '식민지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과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제국" 그 자체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1910년(한말의 역사를 '대한제국기'와 '보호국기'로 세분화하면 1905년 '보호국기')부터 1945년까지가 '일제강점기'로 시기구분되며 '식민지의 역사'로 통칭되면서 "제국"의 경험이 사상되어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제국"은 "식민통치"와 동일시되고, 이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문화적 실천의 양상은 협력/(회색지대)/저항으로 도식화되어 당시의 시대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만주제국'(1932~1945)의 건설 이후, 특히 1938년 총동원체제 이후 조선의 지식계를 휩쓸었던 지식인 및 사회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상적 전향에 대해 제대로 규명해낸 논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제까지 본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사상적 변절로 치부하거나 거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라면 근대적 식민지 경영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로부터 해소되는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식민지적 근대 담론으로 대체하는 논의 정도이다. 가라타니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나 노동자가 전쟁지지로 돌아서고 제2인터내셔널이 와해된 것은 국가에 의한 잉여 가치의 재분배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외에서 얻어지는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자본도 임노동자도 공통의 이해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만 착취를 찾아내고 그것을 국가권력에 의해 해소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트랜스크리틱, pp.439-40). 일본제국이 아시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을 때--『「大東亜共栄圏」の経済構想─圏内産業と大東亜建設班審議会─』(安達宏昭、吉川弘文館、2013)  참조--, 조선인은 그 잉여가치의 직접적 수혜자가 될 수 있었고 되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가와 임노동자를 자본(화폐)과 노동력(상품)이라는 경제적 범주의 '담지자'로서만 발견하고 주체적인 실천의 계기를 찾지 못할 때, 가라타니는 그것은 전혀 [자본]의 결함이 아니며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제 경제를 '이론적' 시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노 고조의 말을 인용하여 [자본]이 공황의 필연성을 말한 것이지 혁명의 필연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혁명이 '실천적' 문제라고 했을 때 이 '실천적'인 것을 칸트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트랜스크리틱, pp.440-1). 

그래서 그는 맑스의 [자본]에서 혁명운동--이제까지의 혁명운동이 폭력을 동반했다면 앞으로의 '혁명운동'은 비폭력적이기 때문에 "대항운동"이라고 한다--의 계기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추출해내는 한편, 그 실천의 윤리를 칸트로부터 정초한다. [트랜스크리틱]이 그 인식론적 토대를 다루었다면, [제국의 구조]는 그러한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하고 인류의 대안을 제출한다.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교환양식'과 칸트의 윤리는 "타자의 문제"로 집중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론적 통각X"로 넘어서고자 했고, "초월론적 통각X"는 타자의 타자성에서 주어진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보는 나의 얼굴은 나에게 '강한 시차'--역겨움으로 다가오는 이율배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타자의 타자성은 마치 죽은 자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듯이, 미래의 타자에 대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듯이 이질적인 '객관성'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타자를 넘어설 수 없고 타자는 내게 언제나 '초월론적 주관'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가 칸트의 '전회'이다. 가라타니는 '초월론적'이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인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정신분석적이거나 구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나는 타자의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끊임없이 회의되고 자성된다'--라는 점에서 그는 칸트의 '전회'야말로 관계의 장을 펼쳐보이는 트랜스크리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제국의 구조]에서 그와 같은 트랜스크리틱의 인식의 방법론을 통해 맑스의 [자본]의 이론에 기초하여 교환양식의 세계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교환형태"가 [제국의 구조]에서 "교환양식"으로 용어가 바뀐 것인지 아니면 번역어의 문제인지는 찾아볼 일이고, 가라타니의 "교환양식"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씨족사회의 호수제(증여의 의무), 재분배와 수탈, 상품교환을 각각 교환양식 A, B, C로 도식화하고, 교환양식 A의 '강박적 회귀'를 교환양식 D로 규정했다. 여기서 '강박적 회귀'란 프로이드의 '죽음의 충동'과 같이 과거의 어떤 기억이 강박적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A, B, C가 그 자신의 세계사적 실현을 통해 스스로 지양하고 그 결과 교환양식 D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제국"의 경험에서 문뜩 헤아릴 수 없는 관용의 깊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혹시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그리고 개인들을 조건짓는 다차원의 사회적 관계들"이라고 하는 교환양식D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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