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읽기

독서일기 2015. 3. 15. 23:47

문해력이 부족해서인지 나는 책을 한번 읽어서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모른다. 책을 끝까지 읽고 저자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다음, 그 문제의식으로 다시 처음부터 읽은 후에야 책이 이해된다. 어떤 책이든 처음 붙잡을 때에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따라가지 못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책을 읽으면서도 딴 생각을 하게 되어 집중력도 생기지 않는다. 두번째 읽을 때 비로소 집중력있게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첫번째 독서는 두번째 독서를 위한 것이다.  

 

앤드루 고든(Andrew Gordon)의 『현대일본의 역사』(이산, 2005[2002])는 7,8년전에 읽은 것인데, 어쩌다 책장을 한두장 넘기다 끝까지 다시 읽게 되었다. 분명히 줄이 쳐져 있고 나름 책과의 대화를 시도한 흔적이 곳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연대기적 역사서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연대기적 역사서야말로 연대기적 사실에 밝아야 행간에 감춰진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7,8년 동안 전후 일본의 사상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일본인' 연구를 해온 덕에 이제야 나는 앤드루 고든의 문제의식을 접수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 그렇게 무지해놓고서 제국-식민지의 삶을 연구하겠다고 했으니.. 인터뷰 조사를 하면서 얻어들은 시대상황의 파편들은 어디서부터 파고들어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일례로 1927년 스즈키상사의 파산은 1929년 일본제국에서 일어난 경제공황의 신호탄이었으며 1930년 이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정치질서의 초석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스즈키상사에 입사하여 조선으로 건너간 어느 '일본인', 그 후손의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인데, 스즈키상사의 도산과 1929년의 공항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스즈키상사의 도산으로 인해 타이완을 비롯한 일본제국의 '외지'의 수십군데의 은행들이 연쇄파산하기에 이르렀고 일본제국은 산업부문을 재편하면서 "국가공동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질서를 잡아가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어려웠지" "그때는 살기 괜찮았지"라는 이야기들이 연대기적 역사서의 사건들과 맞아떨어질 때, 특정한 사건에 몰입하면서도 그 무게감을 공정하게 책정하는 '역사'에 놀라움을 느낀다.      

"도쿠가와 시대에서 2001년까지"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에도시대인 1800년 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의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훑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현대일본의 역사는 한마디로 '일본'이 '서양'과 대립하면서 '서양'을 받아들이며 '아시아'를 구축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과 '아시아'가 교착되는 이유는 근대 바로 그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일본의 근대라는 수수께끼의 풀이과정이다. 그러나 근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풀이과정은 진행중이다. 

 

두번 읽은 또 하나의 책은 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의 『전후 일본의 사상공간』(어문학사, 2010[1998])이다. 어느 시민강좌에서 강연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전후 일본의 사상'에 관한 그 어떤 책보다 이해하기 쉽다. 오사와 마사치가 깊게 이해하고 쉽게 설명하는 '지식인'이기도 하고.

역자해제에서도 밝혔듯이, 오사와 마사치는 순환론적인 역사관으로 전후 일본을 다루고 있다. 즉 1945년 패전을 기점으로 이전의 60년('전전/전간')이 이후의 60년('전후')으로 반복된다는 기본적인 틀을 설정해놓고 있다. 사회시스템의 이론이 순환론적인 역사관과 친화적인 이유는 내가 보기에 시스템 그 자체가 반복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60년을 단위로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예시하며 '전후에 반복되는 전전론'을 전개하고 있고, 그 근저에 '자본주의'라는 사회시스템을 깔아놓고 있다. 

내가 이 책을 두번 읽은 것은, 오사와 마사치가 이 책에서 6,70년대를 '다이쇼데모크라시'에 빗대어 중심이 없으면서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결여된 상태로 분석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오사와 마사치는 이러한 자기부정이, '근대의 초극'이 일본제국을 보편성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기억의 억압과 배제("기억상실")라는 표현의 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신체는 이탈되고 참된 자아는 형이상학으로 회귀하는 '일본인론', 어째서 '일본인론'은 늘 이렇게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다카하시 테츠야(高橋哲哉)의 『国家と犠牲』(NHKBOOKs, 2005)과 『歴史/修正主義』(岩波書店, 2001)를 두번 읽었다. 전자가 후자보다 나중에 나온 책인데, 전자를 먼저 읽었다. 다카하시의 책들을 두번 읽은 이유는 '일본인' 연구의 나의 입장을 좀더 정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테츠야는 일본에서 '전쟁책임론'을 주창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歴史/修正主義』는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의 『패전후론』(1997년) 이후 일본에서 전개된 역사수정주의 논쟁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책 말미에는 역사수정주의와 전후일본의 역사관 논쟁에 관한 문헌목록과 더불어 다카하시 본인도 참여한 "일본군위안부"의 법정소송과정이 덧붙여져 있다. 『国家と犠牲』은 역사관 논쟁에서 제출된 몇가지 논점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책이다. 18,19세기 유럽(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 형성된 내셔널리즘에서 시작되어 데리다의 국가론으로 마무리짓는 이 책에서 저자는 과연 '전쟁 없는 국가'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질문한다. 저자 자신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만큼 가능하다'고 답한 것처럼, 역사적 입장이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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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의 글은 요약가능하지 않다. 그의 글은 어떤 논제를 풀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논제를 풀어내는 장--번역을 포괄하는 언어의 장--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 어떤 문장보다 더 핵심적이거나 핵심적이지 않은 문장이 없다. 그의 글에서 각각의 문장들은 균등하게 논제를 나눠가진다.

왜 그러한가, 왜 그러할 수 있는가는 바로 그의 글이 말해준다. 니콜라이 레스코프라는 러시아 작가에 관해 비평한 「이야기꾼」이라는 글에서 그는 소설과 이야기를 구분하면서 이야기가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반해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질은 공유될 수 없는 고유한 경험에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라는 서사예술은 대를 이어 구전되며 사람들에게 지혜를 선사하는 반면, 소설은 고독한 개인에 기반하며 자신을 고립시킨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설의 등장은 이야기의 몰락을 뜻한다. "요컨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사적인 것"이 뻔뻔스럽게 영역을 확장해가는 현상이야말로 이야기의 정신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주범이다."(482쪽) 

이렇듯 벤야민이 이야기와 소설을 대비시켜가며 소설을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가 진리의 서사적 측면으로서 지혜를 공유하는 언어의 개방성을 점차 잃어가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통풍상태가 열악하다"고 말한다.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이야기, 그러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자유로움을 인류는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밀하고 관례적이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토론"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며 그 속에서 자유로움을 구현하는 서사능력의 일깨움으로서 "언어" 능력 자체를 빼앗아간다.

그러하기에 그의 글은 "언어" 능력을 어떻게 구사해야하는가의 범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리의 서사적 측면으로서 인류의 지혜를 어떻게 언표해야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그 자체로 이해가능하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정보" 대신 이야기하는 기술을 시전하는 것이다. 그가 예시한 두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나는 헤벨의 「뜻밖의 재회」라는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 스웨덴의 팔룬 지방에 젊은 광부와 그의 아름다운 약혼녀가 살았다. 젊은 광부는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무너진 광산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로부터 50년후 1809년 팔룬지방의 광부들은 광산 속 흙과 황산염에 파묻힌 그 젊은 광부를 발견한다. 황산염에 파묻힌 덕에 그 젊은 광부의 모습은 마치 조금전까지도 살아있었던 것처럼 50년전 그대로이다. 그의 가족, 친지는 모두 죽어 없고, 백발의 약혼녀만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슬퍼하기보다는 기쁨에 차서 젊은 광부임을 알아본다. 그녀는 젊은 광부의 유일한 연고자로서 젊은 광부를 자신의 침실에 들인 뒤 하루밤을 보내고 그 다음날 교회에 안치시킨다.

또 하나는 헤르도토스의 『역사』에 있는 사메니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투스는 페르시아가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포로로 잡혔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사메니투스를 모욕하기 위해 이집트의 포로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사메니투스를 세워두었다. 자신의 딸이 하녀의 모습으로 물을 긷는 모습, 사형대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아도 아무 미동도 않던 사메니투스가 그의 늙은 시종을 보고서 비로소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깊은 슬픔을 드러내었다. 

이 두 이야기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각자의 삶에 녹여 자기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한다. 벤야민은, 정보는 이야기가 갖는 이러한 진폭을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팔룬 지방의 젊은 광부가 광산 속에 파묻혀있던 50년동안 유럽 각국은 전쟁을 하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헤벨의 「뜻밖의 재회」에서 젊은 광부와 그의 늙은 약혼녀의 50년만의 재회는 이러한 연대기적 사건의 나열과 대비되는 "자연사"로서 빛을 발한다. 

이야기가 인간의 삶과 맺는 방식은 수많은 기억들을 이어주며 그 기억 속의 삶에 영속성을 불어넣어준다. 반면 소설은 죽음에 의해 비로소 하나의 기억이 "삶의 의미"를 얻는다. 소설은 실제적 삶을 살지 못한 "선험적 고향상실성의 형식"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은 교환불가능한 고립된 운명의 불꽃을 태움으로써 역시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립된 운명의 독자들을 데운다. 죽음이 삶을 데우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서 삶의 불꽃을 태우는 이야기꾼과 대비된다.

벤야민이 이 글을 썼던 1930년대 소설은 아마도 장르의 시대적 성격이 지금의 소설과는 다른 것 같다. 왜냐하면 벤야민의 글에서 대비되는 이야기와 소설 각각의 장르적 성격은 지금에 와서는 중첩되기도 하고 반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기억의 뮤즈로서 이야기가 공동체의 언어의 장으로 더이상 작동되지 못한다는 점이며, 인간과 인간을 자유롭게 통풍하는 언어적 능력이 "정보"의 능력에 밀려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신즉물주의"를 그토록 경계하고 비판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벤야민이 경고한 대로 지금의 시대는 '작품을 보는 법, 즉 작품의 사실내용과 진리내용이 어떻게 삼투하는지를 해명하는 법'(575쪽)을 모르고 그저 출세를 위한 기회주의적 글쓰기만이 만연하다. 요약되지 않는 그의 글쓰기 방식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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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문예』 2010년 봄호부터 2012년 여름호까지 연재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카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라는 출판사에서 2012년 7월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2014년 7월 문고판으로 재출간했다. 

1964년생인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소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戰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역사화할 수 있는가를 과거와 현재의 소통의 장으로서 신화의 세계를 빌어 풀어보고자 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1980년의 16세의 마리와 2009년의 45세의 마리가 전화로 연결된다. 16세의 마리는 영문도 모른채 미국 북동부로 보내져 고등학교 9학년에 재학중이며 이방인으로서 힘겹게 살고 있다. 45세의 마리는 자식도 없고 세금 내는 법도 몇년째 잊을 정도로 수입도 변변찮은 그저 그런 소설을 쓰며 지낸다. 16세의 마리는 45세의 마리가 엄마인 줄 알고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묻는다. 그러나 45세의 마리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여전히 모른다. 45세의 마리는 '엄마'라고 부르는 16세의 마리를 도와주고 싶다. 자신을 돕기 위해. 

이렇게 45세의 마리는 16세의 마리를 "말하기" 시작한다. 

1980년, 미국의 고등학교로 보내져 한 학년이 유급된 마리에게 학교측은 본래의 나이에 맞는 11학년으로 올려주는 대신 '공개모의토론'을 제의한다. 그것은 1946년 1월 도쿄에서 치뤄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A,B,C급 전범을 국제사법처리한 '도쿄재판'을 재현하는 것이다. 마리는 도쿄의 자신의 집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도쿄재판'에 대해 물어보는 중에 자신의 엄마가 도쿄재판에서 통역을 맡았음을 할머니로부터 알게 된다. 그러나 마리의 엄마는 '아는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것은 마리에게 '부인'이 아니라 '거절'로 받아들여진다. 즉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전쟁에 대한 '침묵'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완고한 '거절'과 같다. "우리집에는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침묵이라는 거절. 그 대가로 16세의 마리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다수가 희생한 일본인들이 미국을 증오할 것이다'라는 말의 역사적 감각을 느낄 수 없다.   

45세의 마리는 패전 이후 30년동안 일본은 전쟁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급속한 경제발전은 '군국주의'라는 간판을 내리고 평화의 미명 하에 경제전쟁에 집중했던 "시대극"에 다름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라는 거짓투성이의 "시대극"은 버블경제로 막을 내린다. 그래서 45세의 마리가 보기에 일본의 잃어버린 세대는 버블경제 후의 10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시대극"이 걷힌 후에 비로소 말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16세의 마리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주제로 '공개모의토론'을 준비하면서, 전후 일본에서의 천황의 논리를 간파해간다. 일본 정치의 정통성과 결정권의 분리 구조, 그래서 어떤 결정권도 가지지 않았다는 '상징으로서의 천황'이라는 '면죄부'로 천황은 전범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천황이 모든 통수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정(GHQ)과의 공모로 천황에 내려진 면죄부는 전후일본사회를 은폐의 나라로 내몰리게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전후 일본의 '상징천황'과 도쿄재판의 논리만을 따져들었다면 그 반대의 논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저 소설을 가장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도쿄재판에서 재판 자체를 무효로 선언한 판사가 있었다고 한다. 인도인인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제정된 법으로 전쟁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은 법의 본질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오히려 소설에서는 '상징천황이므로 도쿄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천황은 "평화에 대한 죄"를 범한 A급 전범임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평화에 대한 죄"는 16세의 마리가 미국의 친구들과 '사슴사냥'을 하면서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어린 사슴을 포획한 친구들은 포획이 금지된 어린 사슴을 사냥에 참가한 사람수만큼 나누어 각자의 집에 묻기로 한다. 사냥이 끝난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마리는 17세의 미국인 남자에게 성교를 '당한다'. 16세의 마리는 배를 위로 향하고 사지를 사방으로 벌려 죽은 어린 사슴과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는 자신의 모습을 교차시키며 비로소 어린 사슴에 대한 자신의 "죄"를 묻는다. 

또 '상징천황'이기에 천황은 이미 개인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인민의 상징으로서 천황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인민이 일본이라는 바람과 땅과 하늘의 소산인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와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전쟁의 참상은 일본이라는 나라의 "죄"이며 일본을 상징하는 천황의 "죄"이며 일본이라는 인민의 "죄"이다. 16세의 마리는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I"의 천황을 재현하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

역사는 물론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아니,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사실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이유도 없거니와 역사를 논할 이유도 없다. 우리가 역사라고 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서 전달되는 생물학적 유전자로 환원되지 않는 삶과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죽은 자에게서 삶을 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해 죽은 자와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은 자가 살고 있는 신화의 세계에 역사는 빚을 지고 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내가 먹은 것을 감추면서 남에게 먹히는 것을 가려낼 수 있을까. 45세의 마리는 번역불가능한 "천황"의 신화로부터 전후 일본의 '상징천황'이라는 은폐와 기만의 역사를 들추어낸다. 그것은 신[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먹고 먹히는 인간의 연약함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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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상』2015년 1월 증간호 <総特集=柄谷行人の思想>[총특집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에 실린 두 개의 대담록을 요약정리했다. 하나는 일본의 사회평론가인 사토우 마사루(佐藤優)와 가라타니 고진이 제국의 구조국가론과 칼 바르트의 신학을 중심으로 코뮌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논한 것이고, 또 하나는 동아시아의 문명론을 주제로 가라타니 고진과 김우창이 한국과 일본 각각의 문명소에 관한 의견을 나눈 것이다. 특히 전자의 대담은 『트랜스크리틱』과 『제국의 구조』에서 제기된 몇 가지의 논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두 대담록은 최근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지적 토양을 신학적 실천론과 동아시아의 문명론의 관점에서 검토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사상의 행적이 『트랜스크리틱』(2003)을 전후로 구분된다고 명확히 말한다. 『현대사상』의 이번 특집호는 그 이후의 사상에 관해서만 집중 조명했다. 가라타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대상에 대해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태도를 가집니다. 하나는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 또 하나는 그것을 선악으로 보는 도덕적인 태도, 마지막 하나는 그것을 미적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흔히들 '진선미'라고 하지요. 이 세 가지 태도가 진선미에 대응한다는 것이지요. 지적, 윤리적, 감정적 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됩니다. 누구라도 이 세 가지의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 세 가지는 동격으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지적인 것, 윤리적인 것과 비교해서 '미' 즉 대상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낮게 봅니다. 이것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서양도 그러했고 중국이나 인도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헤이안문학 등을 보면 미적 태도가 처음부터 상위에 위치합니다. 거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식적, 윤리적인 것을 낮게 보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감정이나 상상력을 중시하게 된 것은 낭만주의 이후입니다. 낭만주의 바로 전에 칸트가 있습니다. 칸트는 진과 선에 대해 미를 동격으로 다루고자 했습니다. 바꿔말하면, 그때까지 하등한 능력으로 간주되었던 상상력을 오히려 진과 선을 매개하는 것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이지요. 칸트의 『비판은 세 능력을 음미하고자 했습니다. 그 후에 낭만파가 나타난 것입니다. 낭만파는 오히려 감정이나 상상력을 우위에 놓고자 했습니다. 그 후, 인식적인 요소가 강조되면 리얼리즘문학이 되고, 도덕적인 요소가 강조되면 사회주의적인 문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세 요소는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서로 대항하며 보족해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역사적으로 문학의 지위가 서양과는 달리 낮았지만, 19세기 말부터는 서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과 같은 지위를 누려왔습니다. 이례로 근대문학은 인식적 및 도덕적인 것이 우위에 있는 시대에 대항해왔습니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19세기 이전에는 종교적인 것으로 다뤄졌으며 오늘날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다뤄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것이 강할 때 그에 비판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문학이었습니다. 이 의미에서 문학은 매우 중요하며 힘을 가집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사라지면 문학은 단지 오락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나는 일본에서 문학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문학이 끝났다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인 것, 도덕적인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탈정치화가 진행된 결과 문학의 의미도 그 지위가 저하된 것이지요. 사람들은 문학이 정치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학이 정치로부터 해방되면 오히려 문학은 무력해집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러했습니다. 일본의 문학에서는 본래부터 지적, 윤리적인 요소를 낮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이상 그러한 것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39쪽)

  문학비평가로서 자신의 시대적 소임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지적이고 윤리적(정치적) 인 것을 지향함으로써 자신의 길을 새롭게 모색하는 가라타니 고진의 행보는 사토우 마사루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자의 길을 중도포기하지 않은 강인한 정신력을 웅변한다. 사토우 마사루는 일본의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만년에 '일본'으로 회귀하여 천황주의에 포섭되거나 미래를 선취하는 목적론으로서 공산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고 말한다. 세상을 '뜻'에 따라 변혁하기 위해서는 그 '뜻'을 옮길만한 힘에 대한 주도면밀한 고찰이 요구됨에도, 이제까지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에 대한 재검토와 재이론화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국가를 넘어서는 '코뮌'의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면 '국가'를 정면에서 다뤄야 하고, 18세기 이후 유럽의 내셔널리즘이 전 세계를 재편하기 전에는 '제국'이 '국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그리고 가라타니는 이러한 '제국'에서 코뮌의 가능성을 추출하고자 했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제국'과 제국주의를 구별할 것을 주장한다. 인류역사상 '제국'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페르시아 제국, 몽골제국 등이고, 로마제국이 제국일 수 있었더 것은 그리스(닫힌 도시국가)를 계승해서가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제도들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중심주의의 사고(마르크스주의자도 벗어나지 못하는)가 로마제국을 그리스와 합치해버렸다. 또 이슬람제국은 몽골제국 내에서 중동지역의 이슬람 엘리트계층의 제국적 훈육의 결과 성립가능했으면서도, 그 종교적 편향(혹은 불관용)으로 인해 몽골제국의 보편성을 담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라타니의 '제국'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세계공동체를 핵으로 하는 개념이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위에서 언급한 제국들은 이러한 보편성을 담지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제국을 표방한 국가들은 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신 19세기 이후 '제국'은 세계의 보편종교 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일어난 '천년왕국운동'과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종교사회주의운동이 그것이다. 19세기의 일군의 공산주의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사회주의운동에 종교성을 제거하려했지만, 인류의 코뮌적 공동체 운동은 언제나 종교성을 띠었으며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사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러한 세계보편을 지향하는 운동이 왜 일어나며, 그것이 어떻게 인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가라타니는 '교환양식론'을 통해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가라타니가 『세계사의 구조』와 『제국의 구조』에서 정초했다시피, 그의 '교환양식론'은 호수성[씨족사회 내의 의무로 강제된 상호호혜성]의 교환양식 A, 국가에 의한 폭력적 재분배라는 교환양식 B,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교환양식 C, 그리고 교환양식 A의 강박적 회귀로 도래하는 교환양식 D로 요약된다. 교환양식 D는 더 자세히 말하면, 정주민(유목민은 역사적으로 정주민과 동반출현한다는 점에서 유목민은 정주민의 파트너이다)이 출현하기 이전 인류의 原유동성의 강박적 회귀로 도래하는 것이다. 이 각각의 교환양식은 인류의 문명사를 시대적으로 분절하면서 사회의 주요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아마도 『트랜스크리틱』 이후, 더 가깝게는 『세계사의 구조』 이후, 문학비평가로서의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력과 통찰력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의 교환양식론에 적잖이 실망했을 것도 같다. 이제까지 원시공산제로는 구분되지 못한 씨족사회의 호수제와 인류의 原유동성 밴드의 자유로운 상태를 구분하기 위해서 가라타니는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을 분석적 도구로 개념화했고, '제국'의 문명사를 통해 보편성의 공동체가 이미 인류의 문명사에 존재함을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교환양식론과 제국론은 곳곳에 지뢰같은 난제가 존재한다. 태곳적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사회의 전체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은 현 인류의 지적 능력으로는 아직 이루기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그럼에도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것과 같이, 인류의 미래사회는 현실을 지양하는 운동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것은 인류의 흔적을 남김없이 개어낸다. 우리가 그것을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 이념이 현실의 운동 속에서 발생되는 것이라면, 미래로의 지향은 인류사의 총체적인 조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문명론을 주제로 한 가라타니 고진과 김우창의 대담은 주로 한일간 문화 및 정치구조에 대한 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조선)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앙관료제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민의(민심: 天命)라는 관념을 통해 정치권력을 통제했다면, 일본의 경우 '중국화'는 표층적이었으며 지방분권의 무사도에 의한 공론 없는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공개적인 논의를 꺼려하고 "네마와시"(

  『현대사상』 가라타니 특집호에는 그 외 외국의 학자들로부터 가라타니의 이론에 대한 각가지 논점을 다룬 글들이 다수 실려 있다. 강한 시차를 두고 늘 나타나는 초월적 타자 X에 대한 논의도 지젝을 비롯해서 몇몇 학자가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내 연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아 나중에 여유가 되면 정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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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는 1997년의 초판발행본을 2014년 <東京国際ブックフェア>[도쿄국제북페어] 기념으로 개정하여 출간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본이 재출간되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은 일본어 원서와 논문구성이 많이 다르다. 일본어 원서가 1980년대에 발표한 논문에 한정해서 후지타 쇼우조우의 전체주의론과 '경험'론을 아우른 반면, 한국어 번역본은 196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이러저러하게 발표한 것까지 쓸어담았다. 한국어 번역본에서 1부와 2부, 5부의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라는 논문만이 일본어 원서에 있다. 2014년 재출간한 일본어 원서를 보면,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논문 한편을 더 넣은 것에 대해 상세하게 부가설명하고 있듯이, 책을 재구성하는 것은, 특히 저자 사후에는 매우 조심스럽고 유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전체 주제와 무관한 이런저런 논문을 벼룩시장의 물건마냥 모아놓는 것은 독자들에게도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나아가 후지타 쇼우조우의 『저작집』(みすず書房, 1997-8년, 총 10권)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방대하고 그 궤적을 하나의 주제로 말하기 어렵다. 일본어 원서의 해제에서와 같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이후 사상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론에서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으로 이론적 틀이 변화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지타 쇼우조우는 1980년대 일본의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 그런데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그의 저술 활동 전반의 글들을 모아놓아 출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작집을 출간하든지, 아니면 다른 제목의 책으로 재구성을 하든지. 창비라는 나름 공신력 있는 출판사에서 "시정잡배"나 하는 짓을 하다니...  

  본 글은 2014년 7월에 출간한 일본어판의 『全体主義の時代経験』의 소개글이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1927년생으로 1953년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마루야마 마사오 문하에서 사상사를 공부했으며, 마루야마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마루야마가 전공투와의 갈등 이후 도쿄대 교수를 사직한 이후에도 마루야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후지타 쇼우조우는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않았다. 본서의 서두(1994년 작성)에서 후지타는 대학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학사회라는 "학자의 세계"는 실제로는 "직업적인 대학교수의 세계"라고 하면서, 사제지간이라는 협소한 인간관계에 갇혀 "존경에 넘치는 내재적 이해"만을 추구할 뿐 이성과 비판이 살아숨쉬는 "학문"이 불가능한 세계라고 말이다. 그리고 저자소개란에는 "법정대학 근무"라고만 되어 있어서, 나는 그가 법정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생계를 이으며 학문활동을 수행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법정대학에서 1953년에서 71년까지, 80년에서 93년까지 조수직과 교수직을 역임했다. 그러고도 자신은 제도화되어 경직화되는 "학계" 속에서 위치를 점하고 싶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학자"의 사교계를 경멸했다고, 젊은 시절 처음부터 그랬다고 말하다니! 물론 1971년 법정대학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약 9년간 재야의 학자로 지낸 바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를 비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몸담기 전부터 혐오했다는 세계에 발들여놓은 자기자신에 대한 비판은 본서의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타자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사상의 이단아"로서 그가 자신이 비판한 일본사회와 학계의 당사자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다. 그의 다른 글에 있을지도.

  후지타의 글은 매우 박력있다. 문체에 힘이 넘친다. 그는 처음부터 정면을 파고든다. 이러저러한 도입부가 없다. 이론적 배경이라든지 시대상황이라든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그의 글을 처음 접할 때에는 낯설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읽다보면, 그의 힘에 끌리고 그의 논지에 설득된다. 문체의 힘으로 독자를 필자의 논리로 끌고가는 이 독서'경험'은 그가 말한 '경험'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지타는 전후일본, 더 나아가 근대의 시대가 '경험'을 결여한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세계를 경험하는데, 왜 경험이 없다고 말할까? 그는 '경험'과 '시험'을 구분한다. '시험'은 해답이 있다. 오답 또한 해답이 아니기에 오답으로 정해진다는 점에서, '시험'은 예측불가능성을 배제한다. 현대사회는 '시험'의 연속이다. 통과의례와 같이 학교라는 '시험'을 통과한 후 취직이라는 '시험'을 맞이한다. 취직한 후에도 관료기구의 문서주의에 의해 주어진 메뉴얼을 따른다. 이와 같은 현대사회는 후지타에 따르면, '선험주의'의 온상이다. 후지타는 경험이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예측불가능한 것으로서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로운 경험"이란 자신을 흔드는 사물, 곧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놓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향한 개방적 태도이다. 이에 따라 경험은 정신적 현상이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타자는 단지 경쟁적 대립항일뿐이며, 이러한 타자를 불안해하고 무서워한다. 그렇게 타자와의 개방적 관계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망상과 허위의식을 제작한다. 이것이 후지타가 말하는 '경험의 소멸'이며, '경험'을 배제하는 전체주의의 인간형이다. 경험의 소멸은 인류를 '무사회상황'에 빠뜨리며, 이 속에서 인간은 사교가 소멸된 무사회적 독립자가 된다.

  그런데 실은 20세기의 야만적인 '전체주의'는 서구 근대의 빛나는 지적혁명의 연속적 성과 위에 나타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논의를 빌어 '난민'(displaced persons)의 생산과 확대재생산, 그리고 그러한 난민을 규정하고 추방함으로써 확보되는 '시민권'은 19세기 이후 서구 근대의 정치체제의 세속화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16,17세기의 '인문주의의 시대'를 지나 18세기의 '철학, 이성의 세기'를 거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승리 위에 보다 광범위한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출현했고, 이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공존과 공생의 문화체계에서 탈각해 정치적 도구로 변질된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본래 이데올로지(관념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치사회의 근본특질을 규정하는 개념 자체였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이데올로기가 정치적 도구로 변질되면서 '신칸트주의' 또는 '신헤겔주의'와 같이 고유명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할 뿐인 사상적 무능을 드러내는 한편, 베버의 '문화인'과 같이 '몰가치성'의 과학주의적 문명인간의 "정치적 사무원"의 위치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는 이 과정을 "'이데올로기'의 저항적 일면→'강령화'→그 내부의 '사상'과 '스케줄'의 분화→'스케줄의 우위'와 '사상의 구실화'"로 도식화한다. 무사회상황이 만들어낸 역설적인 '제도화'는 이데올로기를 형애화하여 부정적 말살의 강령적 도구를 만들어내었다.  

  후지타는 아렌트의 정치적 전체주의에서 더 나아가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를 논한다. 아렌트가 이데올로기의 과잉으로서 정치적 전체주의를 논했다면, 후지타는 오히려 20세기에 이르러 이데올로기의 지배의 시대가 실질적 종언을 고한 후 그 후에 남겨진 형애화된 이데올로기가 강령적 도구가 되어 정치적 전체주의를 구축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상적 형애화로부터 출현한 기술관료(테크노그라트), 그리고 화폐, 토지, 노동의 상품화라는 특수한 사회적 실존, 복제기술과 모방행위가 전체성으로 이어지는 사회관계의 '전국면'과 연결된다. 후지타는 이러한 20세기의 소비사회에 당면하여 정치적 전체주의가 개인을 '안락에의 예속상태'로 분절시킨다고 말한다. 쓰고버리는 1회용의 '향유'는 시간을 분절하고, 분설된 시간은 인간의 자연에의 귀속을 막는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욕구불만족은 당연한 것인데, '정치적 전체주의'는 불쾌를 회피하는, 즉 불쾌를 일으키는 사물(타자) 그 자체를 소거시키는 자연적인 반응의 결여태로서 '안락'을 추구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구비한다. 후지타는 리처드 세넷의 '안락에의 자발적 종속'을 기본범주로 하여 1980년대의 '고도성장'의 일본사회의 상황을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로 분석한 것이다.   

  '경험'이 결여된 '생활양식의 전체주의'는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후지타가 인류의 문명사, 20세기론, 현대일본사회론의 문제군을 제기하는 것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다는 것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독자에게 '경험'의 '시련'을 통해 '정신적 성숙'을 요구하는 보다 근본적인 실천의 문제를 제기한다. 후지타의 전체주의론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그것은 21세기 '신자유주의'로 통칭되는 '무사회적상황'에서 '타자성'의 상실을 우리가 어떻게 진단하고 윤리적인 문제로 삼아야하는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藤田省三,『全体主義の時代経験』(1997년 초판개정), みすず書屋,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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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권의 책으로 2014년을 마감했다. 한권은 지난해 12월 20일 오사카대학에서 열린 <グローバル冷戦と1950年代日本の文化/運動>[글로벌냉전과 1950년대 일본의 문화/운동]이라는 심포지엄에서 받아온 『時代に抗する―ある「活動者」の戦後期』[시대에 저항하다: 어느 "활동가"의 전후]라는 책이고, 또 한권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와의 대담집인 『作家自身を語る』[작가 자신을 말하다]라는 책이다. 두권 모두 별도의 집필자가 인터뷰를 정리, 재구성했다.

  한국에서 인터뷰록의 출판은 일본에서만큼 활발하지 않다. 한국의 출판시장의 다양성이 일본에 비해 협소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시대적 성찰의 가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되어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리타 류우이치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역사에 대한 "카타리카타"(語り方: 말하는 방식) 그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는 존재양식에 그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정치영역으로 환원되지 않을 뿐더러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저 역사가 주어진 것이라고, 그 "주어진 역사"를 학습할 뿐이다.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에 앞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말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시대와 시대의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시대적 성찰을 통해 인류가 더 나은 인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먼저 『時代に抗する―ある「活動者」の戦後期』[시대에 저항하다: 어느 "활동가"의 전후]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이 책은 스기모토 아키노리(杉本昭典)라는 인물의 전후 일본공산당 활동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는 1928년생으로 1946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한다. 효고현(兵庫県)의 어느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금속제조회사에서 근무한 그는 일본공산당의 "경영공작자"로서 노동운동을 이끈다. 그가 공산당원이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패전 후 비로소 자신이 "군국소년"으로 길들여져왔음을 자각하고,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1946년 6월 치러진 총선거에서 18년간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어느 공산당 후보의 연설만으로 공산당이 스스로의 역사를 열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정신이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응당 그 시대정신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서 다음의 시대를 말한다. 지금은 과거에서 미래를 말하지 못하는 시대, 더 정확하게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시대이지만, 당시 일본은 저항하는 삶에게서 역사의 희망을 읽어내는 시대였나보다. 

  일본공산당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본공산당은 패전 직후 진주한 미군을 "해방군"이라 칭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赤旗』복간제1호(1945년 10월)에는 미점령군을 "해방군"으로 평가하고 감사와 협력의 희망을 표명했다. 실제로 미국의 일본점령 초기정책은 '비군사화'(육군의 해체, 산업의 비군사화 등)와 '민주화'(정치적 민주화, 재벌해체, "이에"(家) 제도의 폐지, 노동제도의 개혁 등)였다. 그런데 1946년 6월 포츠담 칙령 이후 미국의 태도가 돌변하여 '점령목적에 유해한 행위'는 모두 탄압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에 일본공산당은 합법과 비합법이라는 이중적 구조로 조직을 운영했다. 한편 1947년 3월 트루만 독트린 연설, 6월 마샬플랜 공표, 10월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의 연합인 코민포름의 설치 등 냉전기가 개시되면서, 일본공산당은 국제사회주의 연대를 표방하는 '국제파'와 일본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자는 '소감파'로 갈리게 된다. 이 의견의 대립은 다수파인 '소감파'가 소수파인 '국제파'를 '분파활동"을 이유로 제명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공산당의 분열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공산당의 다수파는 군사노선을 취하면서 당내에 '군사위원회'--"Y"라는 별칭의 중핵자위대: 이것이 1960년대 학생운동의 폭력투쟁을 선도했던 "중핵파"로 이어진다--를 설치하여 폭력투쟁을 이끈다. 이것이 일본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1960년대 학생운동 내의 만연한 "린치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스기모토 아키노리는 당내 소수파인 '국제파'의 일원으로 1950년 한반도의 반전운동을 주도했고,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61년 공산당원에서 제명되었고, 그후 "사회주의혁신운동"의 전국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지금까지 의료생협협동조합과 시민운동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일본공산당은 1922년 창립된 후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내가 만난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공산당의 노선에 찬성하지 않다 하더라고 그 역사의 유구함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일본공산당은 갖가지 선거에서 후보를 내며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으로 자리하고 있다. 1946년 공산당원으로 입당한 후 1961년 제명되기까지의 어느 공산당원이자 노동운동가의 회고담을 정리한 이 책은 사실상 이념지향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으로의 역사를 기획하고 다양한 지층의 삶을 발굴하여 미래의 인류의 자산으로 삼고자 할 때에, 살아있는 역사로서 그의 공산당 활동의 이력을 담은 이책의 의미와 가치는 충분하다.

 

  다음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作家自身を語る』[작가 자신을 말하다]를 소개하겠다. 이 책은 2012년 한국에 번역되었다. 그런데 내가 읽은 것은 2013년 12월에 발간한 것이고, 한국에 번역된 것은 2007년 5월에 출간한 것이다. 오에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2011년 3.11 이후 그의 삶은 크게 변화한다. 오에는 2005년 인터뷰 이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앞으로 소설은 쓰지 않고 삶을 정리해나가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3.11 이후 일본의 "애매함"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결심한다. 실제로 오에는 반핵, 반전, 반우경화의 각종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나머지 과로로 쓰러지기까지 한다. 내가 읽은 2013년 12월본은 3.11 이후의 인터뷰를 더해서 출간한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나는 <만연원년의 풋볼>까지만 읽었는데,  『作家自身を語る』을 읽고나서 그 후의 책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가장 최근작인 『晩年様式集』은 꼭 읽어보고 싶다. 그의 후기작은 초기작과 중기작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힘으로 계속 성장하여 그들 간의 새로운 인연으로 엮이며 또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시대의 어느 국면의 집점을 연결하는 역할을 전신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晩年様式集』에 이르러 그 삶들을 성찰하여 "신화와 토착"의 어떠한 양식을 만들어내었다고 하니, 8,90년대의 "낡은" 시대의 감각을 버리지 못해 오는 시대와 협의할 수밖에 없는 나와 같은 "중년"의 삶에 필요한 책이 아닐까 한다. 

  그 외 이 책은 감동적인 교훈을 던져주는 말들로 빼곡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샤르트르와의 교류,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우정, 스승인 와타나베 카즈오(渡辺一夫)에 대한 평생에 걸친 존경과 신뢰는 내가 스스로 신뢰를 저버린 관계들과 인연들을 아프게 되돌아보게 한다. 오에가 말한 "자유검토의 정신"은 관계들을 비판적으로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신뢰를 이어가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는 것인데, 나는 불신함으로써 내가 자유로와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또 소설가로서 오에의 근면함은 단지 맹목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을 인용하며 근면함이란 세상의 변혁에 투신하되 자신의 일을 놓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집회에 참여한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평소와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처럼. 자동차를 타지 않고 전철을 이용하는 이유를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나는 근면함을 배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자질로 말해지는 것들이 결코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에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 장남인 "히카리"와의 50년이 넘는 삶은 매우 구체적이다. 오에는 50년을 매일밤 자정무렵 손을 씻기 위해 자다가 일어나는 "히카리"를 살펴주고 스스로 이불을 덮지 못하는 "히카리"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오에는 어느날 '이것이 나의 "영원"인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정황들 속에서 '인간'을 묻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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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출판된 학사 개설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본서 역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개념과 이론을 구성원의 생애와 그 생애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잘 설명해내었다. 학문에 대한 시대적 이해를 도모한다는 '학사'의 본래적 의미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에서 21세기의「비판이론」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20세기 유럽의 비판적 지성으로 자리매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서들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한 개설서이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1장. 사회연구소의 창설과 초기 호르크하이머의 사상

제2장. 「비판이론」의 성립 - 초기의 프롬과 호르크하이머

제3장. 망명 속에서 빚어진 사상 - 벤야민

제4장. 『계몽의 변증법』의 세계 -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제5장.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도르노와 전후독일

제6장. 「비판이론」의 새로운 전개 - 하버마스

제7장. 미지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찾아서

 

  알려진 것과 같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독일의 유대계 사회학자들로 구성된 <사회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연구소>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유대계 부호의 재정지원을 받아 독자적이며 전문적인 마르크스주의 연구기관으로 창설되었으며, 호르크하이머가 1930년 소장으로 취임한 후 1932년 『사회연구지』를 창간하면서 '비판이론'의 발상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호르크하이머는 당시 실증주의적인 개별과학이 헤겔적인 전체성의 관점을 상실하는 경향에 비판적이었고, "철학적인 이론과 전문화된 과학적 실천의 부단한 변증법적인 상호침투와 전개'를 주창했다. 이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처음부터 정신분석학, 문화학, 경제학, 문학, 음악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는 총체적인 관점의 학문을 지향했음을 말해준다. 

  한편 당시 독일에서는 1919년 세계최초의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된 이래 좌우익의 정치세력의 대립이 격화일로에 있었다. 유럽에서는 제1차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여파로 민중생활이 더욱 궁핍한 가운데 위기일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이러한 정황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불러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역시 자본주의에 대한 문명적 비판에서 학파 고유의 사상을 구축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초창기 멤버였던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를 상대화하는 사상적 도구로서 마르크스의 소외론(초기사상)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통합하여 사회심리학을 구상하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했다. 프롬은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리비도의 발산양상으로서 사회의 리비도의 구조를 분석하고자 했고, 이를 통해 문명에 숨겨진 인간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프롬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의 대립 끝에 <사회연구소>와 결별했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사상적으로 통합하려 했던 그의 시도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끼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만한 것이 아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라는 이름은 1937년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전통적 이론과 비판적 이론"에서 비롯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데카르트 이후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는 이원론을 "전통적 이론"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따라 (대상을 수용하는) 감성의 수동성과 (개념을 파악하는) 오성의 능동성을 통합하는 '구상력'을 "비판적 이론"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 "비판적 이론"은 사회전체가 가진 분열적 성격에 대해 주체의 비판적 태도와 행동을 통해 그 모순을 자각함으로써 성립하는 이론이다. 이 "비판적 이론"이 전후 독일에서 소문자에서 대문자로 바뀌어 '비판이론'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1932년 독일 총선거에서 히틀러의 사회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히틀러가 합법적인 권력을 획득한 이래 유대인의 배제와 추방이 공식화되었고 1933년 3월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연구소>는 폐쇄되었다. 호르크하이머, 프롬, 아도르노 등은 <사회연구소>의 뉴욕이전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비판이론'은 이처럼 망명자의 자기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1941년 뉴욕에서 초판발행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공저이자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유럽에서 자행되는 야만적인 살상이 고도의 지에 의해 매개된 것이라는 통찰로부터 기획된 것이다. "야만은 계몽이라는 인간의 기획에서 우연히 일탈한 것이 아니라 계몽 혹은 문명화라는 개념 자체 속에 처음부터 배태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이 의문은 '자연과 문명의 유화(宥和)'라는 테제로 이어졌다. 즉 외부에 있는 자연의 지배는 쾌락에 기우는 내부의 자연(욕망)의 억압을 댓가로 관철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연지배라는 문명의 역사, 계몽의 과정은 동시에 체념의 역사에 다름아니다. 자기보존을 위해 행하는 자연지배는 보존해야 하는 자기(내적자연)을 상실하는 것이며, 따라서 내적자연을 억압함으로써 확립한 '자기'란 보존해야만 했던 자기 그 자체를 상실한 이른바 공허한 자기이다. 그런데 오디세우스가 '자기'를 억압하는 10년간의 고행 끝에 '고향'에서 저지른 것은 아내의 구혼자들과 이를 묵과한 하녀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새로운 야만'이었다. 이처럼 억압된 힘을 빼앗긴 자연(외적인 자연과 내적인 자연)은 '새로운 야만'으로 부활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지배'와는 다른 자연과의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아도르노에 의해 "예술의 원사(原史)"로 말해진다. 

  1969년 독일의 신좌익운동의 발흥 속에서 아도르노는 <사회연구소>를 점거한 학생운동세력과 대립했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간접적으로 협력했던 마르쿠제가 전후 독일의 신좌익 학생운동의 지지를 얻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아도르노는 신좌익학생운동 세력과 적대적이었고, 아도르노 자신 또한 신좌익운동과 파시즘의 친화성을 읽어내었다. 결국 1969년 아도르노는 심장발작으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신좌익계 과격파의 이론적 지주라는 위치를 부여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과 유희가 일치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의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설파한 마루쿠제와 국민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한 노이만에 한한 것이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계몽의 변증법』이 전후 독일에서 재판된 것은 1969년 4월이다. 

  아도르노는 1951년 전후 독일에서 재건된 <사회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으며 1958년 소장에 취임한 이래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자기만족적인 관점에 머물러서는 비판적 정신은 절대적인 물상화에 대항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이데올로기의 체현 그 자체를 거부했다. 아도르노는 '동일화'가 언제나 그 외부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에, 미지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놓아두는 능력으로서 '비동일화'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타자와 이화(異化)하는 '비동일적인 것'의 인식을 지향했다. 

  '비판이론'의 제2세대인 하버마스에 의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자연과 문명의 유화' 테제는 이질적인 능력을 통합하는 능력으로 발휘되었다. 포퍼, 루만, 푸코, 데리다 등과의 논쟁을 이끌며 그들의 이론을 흡수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총합해왔던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의 비판적 태도 그 자체를 실천한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라는 이질적인 사상사의 통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대표작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유화'라는 과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하버마스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과 문명의 유화'를 생활세계와 시스템이라는 관계로 풀어내고자 했다.  

  최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제3세대"에서는 푸코의 권력론을 사회적인 승인관계의 차원에서 재조명하는 연구와 사회정의를 분배와 재분배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문제로 나아가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호소미 카스유키(細見和之), 『フランクフルト学派 ホルクハイマー、アドルノから21世紀の「批判理論」へ』, 中公新書, 2014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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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의 저자, 다케우치 요우(竹内洋)는 1942년생으로 역사사회학 및 교육사회학 분야의 연구자이다. 그는 2003년『教養主義の没落』[교양주의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낸 후 마루야마 마사오를 중심으로 한 戰後일본사회론과 '범형지식인'[규범형 지식인]의 관계를 그려내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본서라고 한다. 그래서 [교양주의의 몰락]을 함께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무엇보다 본서는 읽기 쉽다. 다케우치의 주장에 따려면, 어렵게 쓰인 책들의 상당수는 책의 저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케우치 본인 또한 그렇게 많이 당해왔다면서.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케우치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서를 읽은 후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시대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끊임없이 교감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론을 소개하거나 그 이론을 디뎌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할 때에 시대적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이론이거나 이론을 사체화하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론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야말로 시대적 공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가 생성("なる")이 아닌 제작("つくる")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본서의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한편, 여러 변수를 엮어내어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낸다. 우선 다케우치에 따르면, 다이쇼 시대의 구제고교(5년제의 중학교 과정 이후 대학진학을 위한 2년제의 고등교육과정)에서 탄생한 교양주의는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인격의 고양과 사회변혁을 꾀하는 인생관을 가리킨다.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학사회에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사회에 대한 사상적(좌익 혹은 우익의) 개입으로 실천된다. 그리고 저자는 그 바로미터에 마루야마 마사오를 위치짓는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법학부적인 실천활동의 여지도 있으면서 문학부적인 아카데미즘의 향기도 나는 절표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다케우치는 대학장(大學場)의 기능적 측면을 권력장의 지향과 순수아카데미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법학부와 문학부가 각각 전자와 후자를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제국대학"의 역사적 특수성일 터인데, 어쨌거나 테크노그라시를 양산한 법학부와 인문지식인을 배출한 문학부는 각각 대학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양자를 횡단하는 "상징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활력을 얻고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오가며 이상주의=정치주의의 현실화라는 실험을 감행해왔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33세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정치사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저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이 시대적 힘을 얻은 것은 과거에 대한 비평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의 예감에서이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이후 몇년간 이렇다할 논문이 없었고, 마루야마의 첫 저서인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년)의 판매고는 1000부에 그쳤다. 실제로 이 기간동안 마루야마는 폐결핵으로 폐의 한쪽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년)의 출간 이후이다. 이 시기 일본의 대학사회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두고 전학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이 점차 세를 키워갈 때였다. 이들 학생운동세력이 마루야마의 저술을 돌려읽으면서 인텔리의 교양으로서 마루야마가 위치짓게 되었던 것이다. 마루야마는 지식인을 본래의 인텔리와 유사인텔리의 두 층위로 나누고 후자의 유사인텔리가 파시즘의 선봉이 되어왔음을 비판하며 본래의 인텔리로서 지식인에게 대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의 "계몽"의 방식은 지식인의 대중에 대한 교화가 아니라 대중의 스스로 지식인 되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루야마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정치를 말하는 그의 화법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은 미래에 그래야한다라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의 "새로운 정치주체로서의 국민을 그려내는 계몽활동"이며 "대중의 시민화"에 대한 예감이다.

  1960년대 이후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비판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식인 세대의 등장은 바로 마루야마가 예감한 "대중 인텔리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계에 있어서 세대투쟁"은 사회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학이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의 출세를 보장하지 않으며, 대졸인구의 팽창이 대졸 학력자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1960년대 이후 학원투쟁의 중심세력은 대학지식인을 범형으로 하는 문화적 쁘띠부르조아에 동일시하지 않고, 문화부르조아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요시모토 다카하키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대학해체론"과 같이 제도론을 기피하고 정신론을 고집하는 전공투의 대학론과 그 좌익적 언설에서 전전(戰前)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의 일본국가주의로의 회귀를 읽어낸다. 마루야마는 전전 자신이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국가주의"가 전후 정치적 교양주의의 새로운 유행으로 재등장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공투의 파국을 예감했다. 마루야마는 정년 5년을 앞두고 1971년 교수직을 사직한 이후 더이상 "계몽"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만년의 마루야마는 생리적 혐오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전의 "원리일본사"(原理日本社)적인 것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일본정치사상의 고층(古層), 즉 '집요저음'이며, 전후의 좌익학생세력에게서 또 다시 나타나는 파시즘의 원류이기도 하다.  

  다케우치는 교양주의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정치적 교양주의의 신층, 인격적 교양주의=다이쇼 교양주의의 중층, 인생론적 교양주의=번민문화의 고층. 그런데 이 교양주의의 실현의 장으로서 대학은 1990년대 이후 점차 문화자본의 총량을 잃어감에 따라 제 역할을 더이상 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이제 대학은 학생의 프롤레타리아를 넘어서 지식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에 이르렀다. 마루야마라면 이 시대의 대학에 대해 무엇을 말했을까. 그리고 "대학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丸山眞男の時代―大学・知識人・ジャーナリズム』, 中公新書,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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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에 실린 논문 한편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다. 이 논문은 1960년대 후반 '대학분쟁'의 와중에 일어난 마루야마 마사오와 전공투(전학공투회의) 간의 갈등과 논쟁을 다룬다.

 

「銀杏並木の向こうのジャングル」

시미즈 야스히자(清水靖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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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마루야마니까 당시 학생운동세력과 대면하고 이 정도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대학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의 대부분은 대학의 모순과 그 표면화에 대해 회피하거나 '뒷담화'로만 즐길 뿐 시대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역사의 장에 기록하지 못하며 후대의 누군가의 손을 거쳐 그들의 삶을 설명해내는 에피소드로서 발굴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스스로가 역사의 장을 구성하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비로소 스스로의 삶이 역사의 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특히 사상가가 역사의 장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마루야마는 바로 그런 사상가를 예시한다. 

동경대학에서는 1968년부터 부당처분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해왔다. 1969년 2월 학교당국에서는 "수업재개"를 결정했고 "기동대"의 공권력을 허용하여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탄압했으며, 전공투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수업분쇄"에 돌입했다. "수업분쇄"는 강의실을 봉쇄하는 물리적인 분쇄뿐만 아니라 전공투가 강의에 직업 참여하여 교수에게 질문하고 논쟁함으로써 강의를 분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강의는 "수업분쇄"의 주요 대상의 하나였다. 그것은 마루야마의 『日本の思想』[일본의 사상]이 60년대 동경대 수험생의 필독서였으며 마루야마의 강의가 법대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이다. 또 주요일간지가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를 주목했던 터라 전공투는 마루야마의 강의를 "분쇄커리큘럼"의 시간표의 주요과목으로 선정했다.

1969년 2월 21일부터 3월 7일까지 5회 진행된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마루야마의 사상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경험이었고, 이 경험에서 대학과 폭력, 학문과 형식, 자유와 타자 등을 둘러싸고 마루야마 자신도 사상적 전기를 맞이했다.  

1969년 2월 21일, 수업재개된 마루야마의 강의실에는 200여명의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마루야마는 수업재개의 객관적 역할, '동대분쟁'의 책임 등을 묻는 전공투의 질문에 '나는 동대분쟁 전체에 중대한 책임을 느낀다', '양심은 강요할 수 없다' 등의 입장을 피력하며 학생들의 논리적 근거를 되묻고 그 주장의 근거없음을 논파했다. 그리고 110분의 수업을 채운 후 '여하튼 강의는 시작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수업을 끝냈다. 

이에 법투위(법대투쟁위원회) 측에서는 "수업재개를 강행한 마루야마 교수의 추궁집회 개최"를 결정했다. 2월 24일 두번째 수업을 위해 법학부 강의실로 들어가는 마루야마를 4,50명의 학생들이 문학부의 대형강의실로 끌고갔다. 이 학생들은 "혁마르"(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와 "프론트"(사회주의학생전선)과 "SFL"(학생해방전선)의 학생들이었다. 마루야마와 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매우 격렬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어느 학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루야마 교수는 형식적 원칙을 고집하여 우리들의 추궁의 실질적 대답을 회피한다!"는 학생의 추궁에 마루야마는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답했고, "형식주의자!"라는 고성에 마루야마 역시 목소리를 높여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응했다. 그의 목소리는 대형강의실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일순 정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마루야마가 형식주의로 전공투에 맞선 것에는 그 유래가 있다. 마루야마는 1930년대 일본제국의 파시즘의 발흥을 지켜보면서 파시즘의 진행에 기여한 비합리적 생명주의, 즉 짐멜이 말한 '생명의 형식에 반하는 반역'을 경계했다. 전후 개인의 자유를 국가권력의 '형식적 타당성'으로 의식하는 입장에서 일본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했던 마루야마는 생명전체를 기획하는 '실질적 자유'보다도 사상언론의 자유 등의 '형식적 자유'를 존중했다. 나아가 그는 1960년대 '비근대적'이면서도 '과근대적'인 일본의 '미성숙한 민주주의'가 '생명주의'와 상통하는 '내용주의'에 의해 이끌리고 있으며, 1930년대와 같이 생의 철학이 다시금 유행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수업재개를 '정상화'가 아닌 '일상화'로 의식했고, 대학의 형식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제도로서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던 마루야마의 수업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2월 24일의 수업 다음날 마루야마를 비난하는 전공투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2월 28일 세 번째 수업에서 마루야마는 전공투 학생에게 '2월 25일 강제납치'의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고, 전공투 학생은 마루야마의 '자유주의적 대학관'의 입장을 비판했다.   

당시 동경대에는 "기동대"의 공권력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세력의 각 분파 간에 폭력이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으로 1968년 11월 일공계(일본공산당계열)과 반일공계 간에 벌어진 "격돌"은 1000여명의 규모에 500여명 이상의 부상자를 낼 정도였다. 이러한 대학 내 폭력에 대해 마루야마는 '자살적 행동'으로 맹비난했고, "수업분쇄" 또한 그 폭력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   

3월 3일 수업재개 후 네 번째 수업이 진행될 예정의 강의실은 100여명의 법학부 학생들에 의해 봉쇄되었고 마루야마는 급히 메이지문고로 강의실을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했다. 3월 7일 다섯 번째 수업에서도 전공투 학생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수업 후 마루야마는 심전도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로써 그의 "수업재개"는 중단되었다.

4월 18일 마루야마는 병실에서 "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동경대 분쟁 외에는 생각나는 꿈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1969년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형식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마루야마의 사상을 몰고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한편, 마루야마에게 사상적 단층을 남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마루야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7월 NHK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民主主義を求めて 政治学者丸山真男」에서 "동대분쟁"에 관한 몇 가지의 사진을 올려놓는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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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전 나의 페친이 본 블로그에 올린 김항 논문의 번역글을 읽고 페북에 감상문을 적어올렸다. 김항의 마루야마 독해에 대한 정리글이었는데, 거기서 나의 페친은 슈미트의 '결단주의'와 관련하여 김항이 논하는 마루야마의 '결단'과 그 한계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 또한 그 부분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던 터라 학기가 끝난 후 읽으려고 미뤄두었던 김항의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을 서둘러 읽었다. 본 글은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에서 김항의 마루야마의 '결단'과 그 한계에 대한 부분만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

김항의 『帝国日本の閾』[제국일본의 문턱]은 2008년 동경대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을 2010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이 밝히듯이 일본의 근대국가론의 모순과 한계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며 이 모순과 한계가 (전전과) 전후의 일본정치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등에게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혹은 주조되는가를 고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순과 한계를 제국의 타자에 대한 그들의 사유로 집약하고자 했다. 여기서 제국일본의 타자는 식민지 조선(인)이다.

그런데 본 발제를 전개하기에 앞서 책의 전체적인 감상을 간단하게 추려 말하면, 본론의 패기만만한 전개에 비해 결론은 참으로 소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위대한 사상가"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자신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의 재능과 노력을 요한다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 김항은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칼 만하임과 칼 슈미트, 칸트와 마루야마 마사오 사상의 연관성,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일본 평론가 및 사상가들의 시대성을 러일전쟁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엮어가는 그의 탁월한 구성력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할말이 없다. 그러나 후자에 있어서 특히 제국일본의 타자로서 식민지의 문제에 이르러 그는 그저 주저앉고 만다는 인상이다. 이것은 그가 이 책의 후기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지적받은 것에 대한 변론으로서 "국가라는 구성물의 <동일화불가능한 문턱>을 억압하는" 동일의 근원인 식민지를 문턱으로 열어놓은 것에 논문의 의의를 구하며 공동체의 차원에서(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와 공동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열려진 문턱'을 향후 과제로 삼겠다고 말했음에도, 그 이후 아직까지 전작을 넘어서는 뚜렷한 연구물이 나오지 않는 것과 관련지을 수 있겠다. 

또 하나는 일본의 연구지형에서 그에게 요구되는 과제와 한국의 학계가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정말로 제국일본의 식민지적 타자에 관심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러한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학계에서는, 그가 이룩한 탁월한 연구성과임은 분명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자양분이었을 따름인 근대일본의 정치사상의 형성과 궤적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 자체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 이후에 더 밀고나갔어야 할 그의 사유가 정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종주국'에서는 '식민지'에 대해, '종주국'과의 특수한 관계로서 '식민지'에 대해 말할 것을 요청받는 반면, '식민지'인 '모국'에서는 그 관계를 거세한 채 보편성으로서 '종주국'을 말할 것을 요청받는 '식민지적 연구자'의 학문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김항을 응원하고 싶고, 더 기다려보련다.

 

3.

우선 마루야마의 내셔널리즘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한편으로는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로 대표되는 '문화사'를 비판하며,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며 내셔널리즘을 구축하려했던 마루야마는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칼 만하임에게서 인식론적 토대를 마련한다. 만하임의 지식사회학에서 개인은 일정의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며 구속되고, 개인의 사회구조에 대한 지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그 사회는 개인이 획득한 시야에 의해 구성된다. 이와 같은 개인과 사회의 상호 독자성은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픽션성'에 의해 그 주체를 존립시킨다. 마루야마는 소라이론(徂徠論)을 통해 일절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개인을 홉스-슈미트의 주권자와 중첩시키고, 개인의 사적인 영역, 다시말해 법적인 영역에 주권자로 들어온 개인의 소여를 정치화한다. 이때 개인의 정치화는 위기의식에서 발로된 결단을 말한다. 마루야마는 이렇게 개인이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창출하는 것이 정치이며 그 정치적인 것을 위기의 사상에서 추출한다. 

본래 근대일본정치사상사에서 개인이 처음 등장한 것은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이 아니라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에서이다. 후쿠자와는 '개국'의 위기에서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주권국가에게서 구했다. 김항에 따르면, 슈미트는 <대지의 노모스>에서 15세기 유럽공법이 "신대륙 발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신대륙 발견"은 유럽세계를 개방함과 동시에 지구가 닫힌 세계임을 인식하는 과정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개국'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상징적 사태임과 동시에 더 큰 '닫힌 사회'로서 '국제사회'를 인식하는 계기였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일본의 '주권국가'로의 변모를 '개국'에 의한 역사적 과정으로 보고, '주권국가'라는 역사적 구축물과 '개인'이라는 보편적인 근대성의 담지자를 결합하고자 했다. 그런데 후쿠자와의 '개인'이 국가에 의해 매개되는 보편성의 담지자라고 한다면, 마루야마의 '개인'은 (자연화에 지지되는)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상대화하고 대치한다.

마루야마가 결단하는 '개인'을 '초인'이나 '주권자'나 '단독자'가 아닌 '국민'으로 이름지은 것은 아시아에서 개인의 주체적 의식인 내셔널리즘이 수동적인 '결단'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결단'은 현재형이지만-개인에서 내셔널리즘으로-, 아시아에서 '결단'은 수동적이다. 그래서 막부말기와 메이지초기 '결단'은 공간적으로 밖과 안을,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분할하고 단절한다. 개인주의와 국가주의, 국가주의와 국제주의는 시공간을 단절하고 분할하고, 이 단절과 분할은 '결단'이라는 한 점으로 집약된다. 내외를 분할하면서 통합하고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면서도 접속시키는 '결단'은 한 눈으로는 행해지고 한 눈으로는 보여진다. 마루야마의 내셔널리즘이란 이 '결단'이 무한히 반복됨을 말하며, 근대성이란 이 결단을 행하는 절대고독의 개인의 실천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마루야마의 '개인'은 역사적 산물이자 유일한 실재이면서도 소여로서 타자를 갖지 못한다. 개인의 타자는 다만 외부에서 부여된 외적 질서로서 그 질서를 구축하는 개인의 지적 작업에 의해 이해될 뿐이다. 이 속에서 에스닉이나 젠더는 범주로 성립되기 전에는, 어떠한 이성이나 지에 의해 분류되기 전에는, 완전한 타자로 성립될 수 없다. 개인은 완전한 무-관계성으로 타자를 만나고 이러한 타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동일성에서 분류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김항은 마루야마의 타자가 안고 있는 문제가 내셔널리즘의 배제에 의한 이질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의 결단의 틈새에서 언어도 이성도 관계도 없는 다만 육체로 남아있는 자기의 문제이다.

김항에 따르면, 이것은 마루야마의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마루야마의 육체에 새겨진 제국일본의 '치명적 유산'이다. 후쿠자와가 '개국'의 위기에서 관습적 윤리의 인간관계를 끊어내고 '일본인'이라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구축하고자 했을 때 개인은 다만 '국체'에 매개될 뿐이며 '국체'의 운명공동체에 귀속될 뿐이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개인'을 유일의 실재로 지양하며 '국체'에서 구해내고자 했지만, 그 위기의식을 '개인'의 성립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한에서 개인을 엄습하는 공포로부터 온갖 관계성을 박탈당한 육체의 자기로 잔존될 뿐이다.  

 

4. 

여기까지가 1부의 대략의 줄거리이다. 본서는 결론을 제외하고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2부는 국민국가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제목으로 러일전쟁 이후의 국민국가론을, 3부는 전후의 제국의식과 일본인론을 다루고 있다. 마루야마의 '결단'은 본서의 핵심적인 모티브로 1,2,3부 각각을 이끌고 있다. 1부에서 마루야마의 '결단'의 임계점을 제시했다면, 2부와 3부는 그것의 역사성과 원리를 검토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

일전에 번역한 김항의 논문에서 마루야마가 슈미트의 '결단주의'에서 '결단'의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조금 더 면밀하게 상술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본서에서는 마루야마가 슈미트의 '결단주의'를 '개인'의 결단으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소라이론의 '결단'의 논리로 가져온 것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마루야마의 개인의 '결단'은 오규 소라이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로 후쿠자와 유키치로 이어지는 '결단'의 계보를 구축한 '결단'이다.  

마루야마에게 네이션은 (낭만적인) 민족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결단에 의한 지양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마루야마의 개인의 '결단'의 성격은 루소의 일반의지와 다르다. 과거의 작위성(자연화된 작위성)의 민족공동체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다. 마루야마의 '개인'은 유일한 실재로서 사회의 지를 창출하는 주체이며 그렇게 창출된 지를 지양하는 주체이다. 다시 말해 작위성을 창출하면서도 지양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마루야마는 '픽션성'이라고 한 것이다.

 

정리해보니 정리가 덜 되었다. 2부와 3부를 틈나는 대로 정리하면서 논의를 심화시키고 싶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관련해서도.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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