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구조주의, 토테미즘과 공의, 신화의 신화학 등에 관한 논의를 알지 못하면 이 글을 독해해내기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생성' 개념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와 연결되는지(즉 '결연'과 '생성'의 개념적 결합)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끈기있게 읽어나간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말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리라 본다. 

그것은 근대의 개념적 기초의 핵심을 뒤집고 파헤쳐서 새로운 형이상학의 장을 펼쳐보이는 것인데, 당연히 이 과정에서 '호혜성', '교환', '사회', '연대' 등 근대의 '희망적인 실천 조작'은 허구로 판명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참된 '강도적인 조건'(카스트로의 이 용어는 '생성의 결연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잠정적으로^^;;;)을 탐구할 수 있을까? 그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겠다. 적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안내자의 본분을 충실히 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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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이 모든 것은 아니다—생성

 

 

 

1.

 

앞서 지적한 대로 『안티 오이디푸스』의 두 저자는 원시적인 에너지가 출자의 에너지라는 사실이 ‘단 하나의 문제도’ 변화시키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우연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차 에너지가 ‘결연의 에너지’인 것처럼 다른 내재적인 영역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자문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연의 개념을 이접적 총합으로 구성하는 조건을 결정짓는 것이 문제이다.

 

결연의 강도적인 해석 가능성은 『천 개의 고원』의 생성에 관한 긴 글에서 처음으로 명확해졌다. 생성 개념은 베르그송과 니체에 관한 연구 이후 들뢰즈의 중심적 관심사였으며, 『의미의 논리학』에 대한 관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에 대한 공저(들뢰즈&가타리 1975) 이후 생성 개념은 특이한 개념적 굴절과 강도를 갖기 시작했고, 1980년의 책(『천 개의 고원』)의 「1730년: 강도가 되는 것, 동물이 되는 것, 지각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의 고원에서 도주의 속도에 도달했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미메시스—모방이든 재생산이든—에서 비껴나(“미메시스주의는 매우 나쁜 개념이다…”) ‘메메시스’—기억이든 역사든—마저 피해 도주하고 질주한다. 생성은 건망증적이며 전(前)역사적이며 반아이콘적이며 불모이다. 그것은 실천에서의 차이이다.

 

 

 

2.

 

『천 개의 고원』의 제10장은 레비-스트로스가 확립한 계열적-공의적인 이론과 토템적-구조적인 이론의 대립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즉 한편에서는 인간과 동물과의 상상적 동일화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차이와 자연적 차이와의 상징적 상관관계라는 대립이 있다. 계열과 구조라는 이 두 아날로지적인 모델 사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성이라는 베르그송적인 모티브를, 즉 계열적 유사함으로도 구조적 유사함으로도 환원불가능한 종의 관계를 도입한다. 생성이라는 개념은 얼핏 보면 구조주의의 분석틀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관계를 지시한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분석틀에서 관계는 몰적이고 논리적인 대상으로서 기능하며 본질적으로는 외연화된 것(대립, 모순, 매개)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생성은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이며 분자적이고 강도적이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형태학을 가로지르는 관계성과는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생성의 이접적 총합은 형식적인 구조의 편성 규칙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평균상태와는 멀리 떨어진 실재적인 다양체에서 작동한다(DeLanda 2002: 75).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한 것이며 같은 것이다.”

 

계열적 유사함은 상상적인 것이고 구조적 상관은 상징적인 것인 반면, 생성은 실재적인 것이다. 은유도 형태변화도 아닌 생성은 스스로 만들어낸 두 개의 관계항을 탈영토화하는 운동이며 새로운 ‘부분적인 연결’의 수단에 의해 그것들을 관련짓도록 규정하는 관계성으로부터 그것들[두 개의 관계항]을 떼어낸다. 생성이라는 동사는 이 의미에서 술어적 조작이나 타동사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재규어로 생성한다(devenir-jaguar)는 것의 함의는 재규어가 되는 것(devenir in jaguar)과 같지 않다. ‘토템적’인 재규어는 인간이 ‘공의적’으로 변용하는 것이자 상상적인 것인데, 그 변용은 실재적이다. 고양이과 동물이 생성 그 자체이다. 즉 재규어가 되는 것에서 ‘재규어’란 행위의 내재적 측면이며, 그 초월론적인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성이라는 것은 자동사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한 마리의 재규어가 되는 순간 재규어는 없다(따라서 우리는 앞서 생성의 이접적인 다양체를 가리키기 위해 ‘인간-재규어’라는 형식을 사용했다). 저자들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를 시사적으로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화 연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동물로 생성함과 동시에 그 동물이…로 생성한다는 민첩한 행동과 계속해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으로 생성하는가? 인간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되는가?) (들뢰즈&가타리 1980: 290)

 

이어서 저자들은 생성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일관성을 가진 동사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모방하는 것도, 외관을 치장하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놀랍게도—생성은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출자를 생산하는 것도, 출자를 통해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op.cit., 292). 생산도 출자도 아니다. 도로시가 토토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안티 오이디푸스』 속에 없다‘는 인상을 품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강도적인 사고란 생산에 관한 사고이다”라고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는 말한다(2003: 15). 그러나 사태는 이 정도로 일반적이지는 않다. 『천 개의 고원』에서 생성의 개념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주론에서 중축의 역할을 맡는다. 그것은 ‘모든 것은 생성하기’ 때문도 아니고—거기서는 개념적으로 파탄을 맞이하고 있다—, 생성 이외의 중요한 사고가 이 책에 없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천 개의 고원』의 가장 뛰어난 반-표상적 장치가 표상작용을 무효로 만드는 장치라는 의미에서 생성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생산이 딱 반-표상적인 장치인 것과 같다. 생산과 생성, 이 둘은 다른 운동이다. 이 둘은 모두 자연을 포함하며 강도적이고 전표상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하나의 운동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이다. 생성은 욕망의 프로세스이며, 욕망은 실재적인 것의 생산이며, 생성과 다양체는 유일하면서도 같은 것이며, 생성은 리좀이며, 리좀은 무의식의 생산과정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방향에서 그것들은 결코 같은 운동이 아니다. 생산과 생성은 “두 개의 의미=방향에서 같은 궤도를 그리지 않는다”. 생산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그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이 실현되며 자연이 생산과정으로서 나타난다(“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그것의 본성상 생산 혹은 산업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것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10)). 반대로 생성은 인간과 자연의 ‘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이다. 즉 포획의 순간이며 공생이며 이질성 간의 횡단적인 결합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294, 296). “자연은 이렇게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출자의 생산이나 유전적인 재생산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같은 책: 296). 생성은 생산이라는 거울의 반대측에 있다. 투피남바 족이 적을 가리키는 용어를 상기해보면, 이것은 ‘역방향의’ 동일성이다.

 

우주는 출자에 의해 기능하지 않는다”(같은 책). 이것이 언외(言外)로 암시하는 것은 우주가 외연적-현실적임과 동시에 그 모든 상태에서 강도적-잠재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주가 출자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면—다른 무언가에 의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결연에 의해 작동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의 첫 번째 고원에서 우리는 이미 “수목은 출자인 반면, 리좀은 결연이며 다름 아닌 다만 결연이다”(같은 책: 36)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생성은 진화가 아니다. 적어도 혈연이나 출자에 의한 진화가 아니다. 생성은 출자로부터 그 무엇도 생산하지 않으며, 모든 출자는 상상적인 것이다. 생성은 항상 출자와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결연과 관계한다. (같은 책: 291)

 

좋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도곤 신화의 강도적이고 모호하고 야행성의 출자를 주장하는 분석으로부터 『천 개의 고원』에서 이러한 관계의 양식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부인하기까지 무엇이 변화한 것일까? 강도적인 결연은 어떻게 상상적인 것으로 생성될 수 있을까?

 

이 변화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시선이 동일종내의 지평으로부터 종간의 지평으로 크게 방향전환을 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즉 욕망의 인간적인 이코노미로부터—그것은 역사-세계적ㆍ인종적ㆍ사회정치적인 욕망이며, 가족적ㆍ인격주의적ㆍ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적인 욕망이다—, 종을 횡단하는 정동(情動)의 이코노미로의 변환이다. 그것은 종이라는 자연의 영역, 그리고 그 한정적인 총합을 무시하며 우리를 내재평면에 포함된 이접을 통해 연결짓는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욕망의 이코노미라는 관점에서 외연적인 결연은 강도적이고 분자적인 출자를 제한하는 움직임, 그것을 출자집단이라는 몰적인 형태 하에 현실화한다. 그러나 정동의 우주적인 이코노미—비인간적인 힘으로서의 욕망—라는 관점에서는 비로소 출자야말로 그 상상적 동일화의 방법에 의해 이질적인 존재 사이에 있다는 반-자연적인 만큼 더더욱 실재적인 결연을 제한하게 된다. “만약 진화가 참된 생성을 포함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등급이나 세계에 속하는 존재를 활용하는 공생의 영역에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출자는 있을 수 없다”(들뢰즈&가타리 1980: 291).

 

덧붙여 들뢰즈가 유념하는 꿀벌과 난초의 예를 보면, “어떤 꿀벌-난초도 그로부터 결코 태어날 수 없는” 하나의 배열(arrangement)—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꿀벌이나 어떤 난초도 그것 없이는 자손을 남길 수 없는 것처럼 그러한 하나의 배열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종의 자연적인 출자는 두 종 간의 반-자연적인 결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개시된 섹슈얼리티의 탈영토화가 여기서 실현된다. 성에 관한 이항논리적인 조직화는 바이섹슈얼리트도 포함하며(‘젠더의 원자’를 참조), ‘n개의 종(種)’과 분자적인 레벨에서 연결되는 ‘n개의 성(性)’으로의 도정을 과시하게 된다. “섹슈얼리티는 남자가 여자로 생성하는 것, 인간이 동물로 생성하는 것을 경유하여 진행된다. 즉 입자(粒子)의 방출이다”(들뢰즈&가타리 1980: 341). 만일 동물로의 생성에 포함된 모든 동물이 하나의 다양체라면(“모든 동물은 무엇보다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군집이다”(같은 책: 293)), 그것은 인간의 사회성을 어떤 보편적인 악마적 환유로 이끌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다양이며 부수적이며 이질적이며 출자의 밖에 있는 비재생산적인 사회성을 그 다양체가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병을 출자와, 감염증을 유전과, 오염에 의한 군생을 성적 재생산이나 성적 생산과 대립시킨다…자연에 반하는 참여(participation) 내지는 혼인은 자연계를 횡단하는 참된 자연이다. (같은 책: 295)

 

그래서 결연이다. 그러나 어떤 결연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와 분열증』 제1권은 두 개의 출자를 제창했다. 하나는 강도적이고 배아종적이다. 또 하나는 외연적이고 체세포적이다. 이 후자는 배아종적인 유입이라는 욕망을 대리하는 ‘억압적인 표상’의 역할을 행하는 외연적인 원리이며, 결연에 의해 반-정립된다. 이제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는 두 개의 결연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논한 사회체로서 남성이라는 젠더에게조차 내적인 결연(최초의 집단적인 호모섹슈얼리티)인 것이다. 또 하나는 생성에 내재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형태변화(신화적 계보, 동물을 출자하는 것)로는 환원될 수 없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교환이나 상징적 분류(외혼, 토테미즘)로도 환원될 수 없다.

 

모든 생성은 하나의 결연이다. 이것은 반복해서 말하자면 모든 결연이 하나의 생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적이고 사회정치적인 외연적인 결연이 있고, 그리고 반-자연적이고 코스모폴리틱하고 강도적인 결연이 있다. 외연적 결연이 출자를 구별하는 것에 비해 강도적 결연은 종을 교란한다. 혹은 오히려 비연속적인 종별화라는 제한적인 총합에 의해 반-실현된다. 샤먼이 재규어로 생성될 때, 그가 재규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면 재규어의 자손에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재규어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재규어가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재규어와 결연을 맺는다.

 

오히려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무차별성은 식별불가능성, 모호성이라는 하나의 구역이 두 개의 항 간에 설정된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항이 각각의 분화에 선행하는 점을 직접 실현한 것과 같다. 유사하지 않으며 미끄러지고 극단적인 근접, 절대적인 접근이다. 자연적인 출자가 아니라 반-자연적인 결연이다. (들뢰즈&가타리 1993: 100)

 

생성에 대한 이 정의가(왜냐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범형적인 이원론을 횡단하는 방법임을 주의해야한다. 즉 {출자, 환유적인 연속성, 계열적 유사함} 대 {결연, 은유적 불연속성, 대립적 차이}이다. 자연에 반하는 결연에 의해 정립된 접선적-미분적인 ‘절대적인 접근’은 상징적-문화적 결연(외혼)에 의해 정립된 출자의 리니지 간의 절대적인 ‘비접근’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두말할 것도 없이(들뢰즈&가타리 1972: 131), 그러한 접근은 ‘두 개의 항’ 사이에 어떤 동일화나 상상적 미분화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고전적인 구조주의처럼 자연적 출자와 문화적 결연이 대립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도적 결연이 자연에 반한다는 것은 그것이 문화에도 사회에도 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함된 제3항, 타의 관계성, 즉 ‘새로운 결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연’은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나쁜 말이기도 하다. 인격과 사물 간의 경계를 횡당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러한 단어는 모두 좋은 말이다. 따라서 만일 그것을 미생물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면 결연은 좋은 말이다. 힘(Force)은 인간에 대해 사용할 수 있다면 좋은 말이다. (라투르 1993)

 

 

 

3.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는 결연, 즉 인간과 비인간 간의 유연관계(類緣關係 affinté란 ad-finis와 관련한다)의 기본적인 예를 발견하기 위해 아프리카 연구의 맥락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다. 열 번째 고원의 ‘어떤 마술사의 추억, 그 두 가지’라는 제목의 절에서 저자들이 환기하는 것은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연구한 ‘성스러운 사춘기’인 인간-동물, 혹은 마르셀 그리올(Marcel Griaule)이 기술한 수단의 몇몇 전승에서 인간-하이에나이다.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생각되는 주석이 덧붙여져 있다.

 

하이에나-인간은 마을을 벗어나 혹은 두 마을 사이에 서식하며 양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다. 한 영웅, 혹은 상호 다른 쪽 마을의 약혼자를 동반한 두 사람의 영웅이 인간-동물에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마치 결연의 완전히 다른 두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즉 하나는 악마적인 결연이며, 그것을 밖에서 강제된 결연, 그 법을 모든 출자에 강제하는 결연(괴물, 인간-동물과의 강제된 결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허락 받은 결연이며, 그것은 반대로 출자의 법과 일치하는 결연, 마을의 인간이 괴물을 물리치고 그들 자신의 관계를 조직화한 후에 정해진 결연이다. 이것은 인세스트의 문제로 변용된다. 왜냐하면 인세스트 금지가 결연 일반의 적극적인 요구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출자에 대해 완전히 이질적이고 완전히 적대적인 어떤 종의 결연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세스트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인간-동물은 항상 인세스트에 대해 하나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제2종의 결연이 인세스트를 금지하는 것은 오직 두 개의 다른 출자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만 출자의 권리 하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인세스트는 두 번 나타난다. 우선은 결연이 출자를 숨길 때, 결연의 괴물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출자가 결연을 하위에 종속시키며 그것을 다른 리니지로 배분할 때 출자의 금지된 힘으로 나타난다. (들뢰즈&가타리 1980: 303, n.15)

 

“인세스트의 질문은 변용될 것이다”…. 저자들은 여기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이론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고찰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인세스트]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제 결연이야말로 이중의 파급효과를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출자의 프로세스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시인할 수 없는 성교나 꺼림칙한 애정을 격려하는 결연의 힘’이기도 하다. 그 목적은 관리뿐만 아니라 ‘출산을 방해하는 것’(같은 책: 301)이다. 즉 반-출자적인 결연,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교환론적이고 억압적이고 출자를 생산하는 결연 또한 여기서 어떤 야생적이고 숨겨진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마치 다른 결연, ‘악마적’ 결연에 오염된 것처럼. “결연과 출자가 결혼의 법에 의해 규제되는 것은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연은 위험한 감염력을 보유한다. [에드먼드] 리치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loc. cit.). 『천 개의 고원』의 열쇠가 되는 이 장에서 ‘힘’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제도—하나의 구조—를 지시하기를 멈추고, 하나의 힘, 하나의 잠세력—하나의 생성—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형식으로서의 결연에서 실체로서의 출자를 뛰어넘어 힘으로서의 결연이 된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공의(供儀)의 신비적-계열적인 요소 속에도, 토테미즘의 신화적-구조적인 요소 속에도 없다. 우리는 생성의 마술적-실재적인 요소 속에 있다.

 

우리는 사회계약의 요소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교환을 모른다. 그것이 아는 것은 다만 도둑질과 증여뿐이다”(들뢰즈&가타리 1972: 219). 그러나 결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환과 [또 다른] 교환이 있다. 이 말은 자본가-상인의 의미에서 ‘교환론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하나의 교환이며 도둑질과 증여의 범주에 속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증여교환’에 의해 확립되는 결연이며, 이중의 포획을 끊임없이 상호 행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가시적인 사물의 흐름을 횡단하고 비가시적인 퍼스펙티브를 교체한다(반-양도한다). 주고받고 되돌려준다는 ‘세 계기’의 직접적인 이접적 총합을 현실화하는 것은 ‘도둑질’이다. 증여는 상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덜 폭력적인 교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증여행위의 목적은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며 타자로부터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반응[답례]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상대에게서 혼을 뺏는 것이다(서로가 서로의 혼을 뺏는 것으로서의 결연). ‘증여의 교환’이 아닌 사회적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가 어떤 행위에 말 거는 행위이며 어떤 반응에 대한 반응인 한에서 그때 비로소 사회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상호성은 단지 회귀성일 뿐이기에 사회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타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삶이란 강탈이다.

 

 

 

4.

 

아프리카의 주술사를 다루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한편으로 신화와 토테미즘 제도의 명석 판명한 세계와, 다른 한편으로 사제와 공의의 기술이라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대립시키면서, 생성을 실천과 담론(주술의 소설)으로서 주술사와 연결시킨다. 관찰이 가장 중요하다(Goldman 2005). 왜냐하면 아마존의 횡단적인 샤머니즘은 주술, 요술, 생성의 [판명하고 모호한]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로부터 숙려해야하는 주제가 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골드만의 논문에서 착상한 몇몇 단서만을 보여주려 한다. 모스의 작업에 대해 말하자면, 샤머니즘을 생각하기 위해 되돌아볼만한 것은 공의에 관한 문장이 아니라 주술에 관한 연구이다. 위베르와의 공저인 그것은 이제까지 고루하다고 경시되어왔지만 그 유명한 『증여론』의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증여론』의 하우는 『친족의 기본구조』의 ‘호혜제의 원리’의 기원인데 그것은 『주술의 일반이론의 소묘』에서 마나의 교환론적인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유하는 시니피앙’(레비-스트로스 1950)의 이전 단계의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는 것은 ‘주술자와 그의 주술’이 아니라 『신화학』제3권에 있는 매우 신비한 코멘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M60신화를 요약한 데 이어서 다룬 것은 대중소설 장르의 계열의 형식을 채용한 신화서사의 존재이며, 이 서사 특유의 몽상적인 분위기이며—이 속에서 허구의 정신과의 만남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그것이 개념적인 왜곡이나 지각의 불명료함을 일으킨다—, 주술사의 실천에 대한 비밀스런 암시이다. 그것은 동물과의 ‘일체화’의 과정을 선도하도록 환각제를 섭취하는 의례와 연결된다.

 

이 코멘트에서 엿보이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전혀 다른 신화실천이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특별하게 다룬 기원신화와 함께 흘러가는데, 이 흐름에 반하기도 한다(마치 이 둘 의미=방향을 가진 흐름이 같은 책 속에서 상기되듯이). 변용의 서사와 ‘주술사의 소설’의 장르—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렇게 부른다—에서는 인격에 관한 퍼스펙티브의 변이—그 민첩한 행동—가 서사에 대한 강한 언어적 조작의 목적이 된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시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 나타나는 주술자로의 생성으로 직접 되돌려진다.

 

레비-스트로스가 『식탁작법의 기원』의 이 장에서 고안한 것처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 속 신화의 단조로운 역사적 퇴행이 아니라 신화에 내적인 측방적인 생성이다. 그것은 준-사건 위에 뿔뿔이 흩어진 조각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조각조각 분열시키면서 생성을 다양체의 체제 속으로 들여온다. 우화, 소문, 험담, 가족과 마을의 민속학—로버트 레드필드의 ‘작은 전통’—, 우스꽝스러운 역사, 수렵의 삽입절, 정령의 방문, 악몽, 급작스런 불안, 전조…이러한 것들은 마이너 신화의 요소이다. 즉 시뮬라크르, 환각, 거짓에 대한 기억과 도구로서의 신화이다. ‘거대한 전통’에 대한 신화, 즉 세계 속의 철학이나 종교가 주로 사용하는 신화(리쾨르류의 근동 신화)가 ‘부조리하다 고로 나는 믿는다’는 교의나 신념을 일으킨다면, 레비-스트로스의 마이너 신화(주술사로 이야기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는 앙리 미쇼(Henri Michaux)의 격언을 이중으로 뒤집는 설명이다. “만일 옳은 것이라고 한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이언스 워즈(Science Wars)에서 변함없이 나타나듯이 종교와 주술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간극보다 훨씬 크다.

 

요컨대 공의도 아니고 토테미즘도 아니다. “두 개의 일을 한 번에 말하는 것. 그것은 항상 제3의 일이다…”(레비-스트로스 1988: 176). 실제로 『야생의 사고』에서 공의의 개념은 두 개의 조작을 하나로 합침으로써 두 개의 ‘허구의 친구’ 즉 간계열적인 유사성과 외계열적인 생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야생의 계열상의 다른 조작, 즉 토테미즘은 결국 차이에 대한 최선의 모델이 아니라고 결론내려야 한다. 오히려 그 조작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의 모델이며, 우리에게 차이의 모든 프로세스를 지시하지 않는다. 클라인의 사원군과 순열의 타블로라는 균형 잡힌 아날로지에 매료되어서는 안된다. 상관하는 상동성으로부터 변용하는 어긋남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Maniglier 2000: n.26).

 

1962년의 이 책에서 논한 토테미즘은 분류에 관한 관계 시스템이며 상관하는 계열 사이에서 그 무엇도 생겨나지 않는다. 즉 그 모델은 완전히 균형 잡힌 모델과 같다. 토테미즘의 ‘잠세력의 차이’는 각각의 계열에 내적이며 다른 계열에 대해 무언가 영향을 줄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생성이 명시하는 것은 순수한 외재성으로서의 관계성, 항들이 속한 계열로부터 항들을 추출하는 것으로의 관계성, 즉 리좀이 되는 것이다. 생성이 구하는 것은 항들에 닫힌 관계성의 이론이 아니라 관계성에 대해 열린 항들의 이론이다. 따라서 여하간 생성은 관계성의 제3의 타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고, 앞서 논한 대로 오히려 관계성에 대한 제3의 개념이다. 이것을 매개로 토테미즘을 공의와 함께 읽어내야 한다. 관계론적인 차이의 일차성에 대해 재영토화의 이차성. 보편적인 강도의 다양체로서의 생성의 또 다른 현실화. 생성은 토테미즘의 분리와 공의의 혼합(순화와 매개—라투르) 속에서 동시에 현실화하며 공의의 장치의 여백과 토테미즘의 분류 사이에서, 나아가 ‘종교’의 주변과 ‘과학’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반-실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 토테미즘의 아날로지적인 도식은 자연적인 차이와 사회적인 차이 사이의 대칭성뿐만 아니라 그 존재이유로서 비대칭성을 기초로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토테믹한 종은 내적인 실천—곰은 곰과 결혼하고 살쾡이는 살쾡이와 결혼한다—이며, 그 실천을 통해 토테믹한 종은 외적인 실천을 행하는 사회적인 종을 의미하게 된다—곰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은 살쾡이의 클랜에 속하는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이다. 외적인 차이는 내적인 차이가 되며, 구별은 관계성이 되며, 항들은 기능들이 된다. 토테미즘의 배후에는 기본정식이 갖춰져 있다. 『야생의 사고』의 제4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토테미즘 장치를 카스트 장치로 변용시킨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때 레비-스트로스가 내혼기능의 특수성과 외혼클랜의 기능적인 등질성 사이에 있는 대칭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토테미즘에 ‘상상적’, ‘환상’, ‘공허한 형식’, ‘허구의 횡령(橫領)’이라는 어휘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토테미즘은 허구의 순수한 힘인 공의와는 대조적으로 근본적인 진실이 되는데, 여기서 카스트를 다룸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게 분류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카스트는 참된 문화를 잘못 자연화한다. 토테미즘 집단은 자연을 참된 문화로 잘못 삼는다”(169). 즉 자연과 문화가 영속적인 불균형 상태에 있다는 것은 이러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 사이에 동등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계열에서 ‘진실’인 것이 어떤 계열에서는 ‘환상’에 대응한다. 이 모티브—‘의미의 상보성의 원리’라 말할 수 있다—는 ‘마르셀 모스의 업적에 대한 서론’으로부터 『살쾡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에 나타난다.

 

요컨대 겸손하게 말한다 해도 인류학의 주요한 개념—관계성의 개념—의 미래는 인류학이 차이와 다양체, 생성과 이접적 총합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두는가에 달려있다. 관계성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은 구조주의와 관계론적인 존재론과의, ‘기초를 닦지 않는’ 행보를 존중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질 들뢰즈의 철학이 만들어낸 계열—즉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흄, 니체, 버틀러, 호르크하이머, 베르그송, 그리고 타르도[각주:1] 등의 인물들, 그리고 퍼스펙티브, 힘, 정동, 습관, 사건, 과정, 파악, 횡단성, 생성, 차이라는 이념으로 넘쳐나는 풍경—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마이너 구조주의의 계보인데, 그로부터 본질적인 분절화와 매개물이 도출된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칸트주의자에게서 물리친 저 기념비적인 초월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전략적인 직무이다. 작은 것들과 함께 하는 구조주의. 진중히 말해야한다. 그것은 칸트에 얽매인 구조주의가 아니다.

 

진중하게 분명한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원론(이른바 ‘이원론’)이든 말든 다시금 후진하면 ‘데카르트주의적 인류학’의 양팔에 의지하기 위해 칸트주의 인류학을 방기한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를 (유연성이 있든 말든 인지적 생득설에 의거하는) 경험적 주체를 가진 ‘칸트주의’로 대체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투영적 접선을 받아들이면서 타(他)의 전(前)구조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때로 인류학의 미래인 것처럼 등장하는 이 전구조주의는 동일성과 실체, 본질과 초월성, 행위주체성과 의식을 다시금 산출하는 것을 상찬하는, 관계성에 대한 기묘한 반동이다. 신체와 기호의 ‘물질성’ 또한 구현화라는 수수께끼를 재구현화하거나 행위주체성의 기적을 상찬하거나 하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조작인 탓에 여기저기 동원되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친족에 대해 프랑스 인류학이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체’로의 일직선으로 향하지도 않으면서 지난 20년간 구조주의적인—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관계론적인—교환론의 기초를 파헤쳐 붕괴시키는 데에 의기양양할 따름이다. 신체의 흐름에 가닿는 생득적인 이념을 확립하려는 역사. 그것은 실체에 대한 실체에 다름 아니다.

 

 

 

  1. 타르도(Jean Gabriel de Tarde), 1843-1904, 사회학에 심리학 개념을 도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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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강도적(强度的) 조건

 

 

1.

 

이 책에서 몇 번이나 인용했던 레비-스트로스의 문장을 한 번 더 살펴보자. 이 아메리카 중진 연구자는 브라질의 민족지학자들이 유연관계(類緣關係)의 개념에 대해 행했던 ‘비판적 분석’을 명확하게 선주민의 철학적 문제와 연결시켰다. 그것은 모두 최종적으로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제기한 것인데, 내 생각에 그는 이 일련의 문제계를 완전히 이해했다. 남아메리카 선주민의 유연관계는 실제로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철학적인 이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최초의 작업 속에서 예언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우주론적인 이성이라는 이념을 사회학적인 이해범주, 친족의 원-도식—이 속에서 이념의 탈영토화하는 힘은 프로세스에 보존유지된다—에 귀착시킨 것이다. 『미국 인류학(American Anthropology)』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그는 투피남바 족을, 수년전부터 알고 있었던 남비콰라 족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친족의 특정한 유대, 의리의 형제간의 관계성은 남아메리카의 많은 부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친족(관계성)의 단순한 표현을 훨씬 더 초월한다(1943: 398).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다.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이러한 단어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아메리칸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틱한 유연관계가 가진 의미, 그 내적인 외재성의 차원이다.

 

 

 

2.

 

남아메리카(연구)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어 아메리카 선주민의 풍경 속으로 옮겨서 생각해보면, 『천 개의 고원』에서 제기한 두 개의 결연의 차이는 민족지적인 관점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차이는 아메리카 선주민에 관해 민족지학자가 행한 비교와 정확하게 합치한다. 즉 한편에서 사람들이 분명 ‘모호, 이접적, 야행성, 악마적’이라고 말할 강도적 혹은 ‘잠세적(潛勢的)’, 우주론적, 신화-의례적인 유연관계와, 다른 한편에서 혈연관계에 종속된 외연적이고 현실적인 유연관계와의 구별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주제에 대해 나는 이미 아마존의 친족에 관한 많은 작업에서 논해왔는데, 여기서는 그것을 간략하게 언급해두겠다.

 

아마존 사회에서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혼인에 의한 인척관계는 그 형용사의 모든 의미에서 유난히 섬세한 관계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위험하며 부서지기 쉽고 번거롭고 귀찮고 중요하기도 하다. 또 도덕적인 양의성을 가지며, 감정적으로 긴박하고 정치적인 전략이자 경제적인 기초이다. 결과적으로 인척관계의 유대는 탈비급(脫備給)의 집합적인 노력의 대상이 되며, 혈연관계(유연성(類緣性)과 출자(出自))에 의해 은폐된다. 술어로서 인척관계(『친족의 기본구조』를 규정하는 아프리오리한 인척관계)는 인척관계 그 자체보다 오히려 혈족의 유형(이를테면 교차하는 조카와 숙부)으로 이해된다. 실제 인척관계는 지시와 참조를 통해 혈연화된다(‘나의 의리의 아버지[시아버지, 장인]’가 ‘나의 어머니쪽 삼촌’이라는 등). 인척관계의 특정한 용어는 동일한 혈족관계의 완곡어법 혹은 혈족관계의 추이(‘의리의 형제[처남, 매형]’보다도 ‘나의 아들의 어머니쪽 삼촌’이라고 부르는 등)를 표현하는 테크노니미(teknonymy)[각주:1]를 우선하는 탓에 경원시된다. 배우자는 성교와 식사를 함께 하는 일상의 친교를 통해 우나 카로(una caro), 즉 유일한 육체가 된다. 피터 리비에르(Peter Rivière)는 마을의 내혼제와 혈족 사이라는 환경이 널리 분포하는 기아나(Guiana)[각주:2]의 전형적인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1984: 70). “이념적인 집락에는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념적인 촌락에 유연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 우선은 실재하는 촌락의 내부에 있겠지만, 특히 이념적인 집락의 외부, 즉 현실의 촌락의 이념적인 외부에서는 이념적인 유연관계로서—달리 말하면 강도적, 잠재적인 유연관계로서—존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실재적이건 이념적이건 촌락을 떠나자마자 위장은 반전하며 유연관계는—총칭적인 만큼 강력하게, 현실적이지 않는 만큼 명백하게—지표를 가지지 않은 사회관계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의리의 형제는 나와 결혼하지 않은 자매와 형제관계이거나 나의 자매와 결혼하지 않은 자이다. 유연자(類緣者)는 적이며 따라서 적은 유연자에 대한 것이다. 유연자가 적이 아닌 경우, 즉 양친이나 동거인인 경우—‘이념적’인 경우—, 유연자로서 대해서는 안된다. 적이 유연자가 아닌 것은 그들이 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유연자로서 다뤄져야 한다.

 

그리하여 아마존의 매우 로칼한 관계성은 유연관계에 의한 강한 공시적 의미를 가지는 경향을 띤다. 결연은 로칼적으로 외혼제이며 드물지는 않다. 또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전략적이다. 즉 우정이나 사업상의 파트너인, 언제나 의례화된 유대이며, 물리적 혹은 정신적인 전쟁상태 혹은 은폐되거나 분명한 전쟁상태가 로칼 집단 간에 영속적인 이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공동체 간의 모호한 의례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강도적인 유연관계는 종의 경계에 걸쳐있다. 예를 들어, 동물, 식물, 정령 그리고 그 외의 인간성이 의문시되는 군생은 모든 인간과의 총합적-이접적인 관계를 함의한다. 타자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연자에 관한 것이며, 강탈과 증여—혹은 강탈이나 증여의 특수한 사례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교환’—의 우주론적인 게임을 의미지우는 파트너이다. 그 속에서 파트너들 간의 잠세력의 차이는 제로로 향한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무효화 되지 않는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자매는 항상 결혼할 수 없는 상태로서 어떤 일정한 비율로 모계집단의 파트너들 간의 타자성을 필요로 한다. 자매 가운데 자신의 딸이 있는 남자 집단은 이러한 인세스트의 이념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모계의 조카딸 집단은 아마존의 많은 부족에서 결혼의 우선적인 대상이 된다). 즉 이 분석을 이념적인 촌락에서도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밀고 나가면 이러한 유연관계는 ‘실재하지 않게’ 된다. 여하간 주지하다시피 인세스트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현실적인 내혼제는 잠재적인 외혼제의 하한이다.

 

순수하고 잠재적인 유연관계 혹은 메타 유연관계는 아마존에서 타자성의 총칭을 이루는 도식인 것인데, 그것은 확실하게 『천 개의 고원』의 ‘이종(二種)의 결연’에 속한다. 그것이 출자(出自)에 적대하는 것은 혼인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지 않는 경우에 그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며, 혼인이 현실이 되는 장소에서 모습을 감추고 출산에 관한 생산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인 출산력을 모두 외부와의 악마적인 결연에 의존한다. 생산의 모드(등질적인 출자)가 아니라 포식의 모드(이질발생적인 간취)이다. 그것은 공생관계 간의 포획, 존재론적인 ‘재포식’에 의한 ‘재생산’이다. 자기를 외재화하는 조건으로서의 식인에 의한 타자의 내재화이며, 적—적으로서 행동하는 자—에 의해 ‘자기 규정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종의 자기이다. 이것이 아마존의 우주론적인 실천에 고유한, 타자로의 생성이다. 잠재적인 유연관계는 친척보다도 전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친족에 선행하며 그 외부에서 전쟁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출자에 저항하는 결연이다. 그것은 이 결연이 선행하는 강도적인 출자를 억압하는 표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출자가 초월성(신화적 기원, 선조, 동일한 출자집단)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것을 방어하기 때문이다.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모든 출자가 상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모든 출자는 국가를 기도한다. 그것은 국가의 출자인 것이다. 아마존의 강도적 결연은 국가에 저항하는 결연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오마주…).

 

강도적인 혹은 일의적(一義的)인 유연관계는 아마존 사회, 그리고 아마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변별하는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화의 ‘기저’(레비-스트로스 1991: 295)를 다루고 있다. 『신화학』에서 분석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있는 신화의 복합체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군을 우리 문화에 고유한 신화와 비교해보면, 전자에서는 모계적인 결연관계가 우위에 있으며 후자에서는 부모인 자가 우위에 있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중심적인 등장인물은 [변용의] 공식상에서 유연자로서 관계 지어진다. 이 신화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을 하나 예로 들면, 그것은 식인적인 의리의 아버지[양아버지], 모든 문화재의 비-인간적인 소유자이다. 그는 의리의 아들[양아들]을 죽이고자 일련의 시련을 부여하는데, 그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다(대체로 그것은 그를 동정하는 다른 비-인간들 덕분이다). 그리고 그는 수련의 귀중한 성과를 가지고 동료 인간들 곁으로 돌아온다. 이 원신화의 내용(레비-스트로스 1971: 503 et s.)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시나리오와 다르지 않다. 하늘과 땅이 있으며, 그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영웅이 있다. 그리고 문명의 불, 여성의 ‘증여’, 인간의 죽음의 기원이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대항적인 영웅은 의리의 아버지이거나 의리의 형제이며, 그리스적, 근동적, 서아프리카적 혹은 프로이트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구세계의 신화에 항상 따라다니는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구세계에서 인간은 신에게서 ‘불’을 훔쳐야 하는 것에 반해, 아메리카 선주민은 의리의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훔쳐야 하며, 의미의 형제에게서 그것을 증여로 받아내야 한다. 여하간 그들은 동물이다.

 

우리가 ‘신화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증여에 대한 하나의 담론—일반적인 규범으로서 타자에 관한 담론—이다(Wagner 1978). 그것은 신화 속에서 단 한번 증여되며 그 이후는 소여(所與)된다[주어진다]. 즉 인간이 그로부터, 또 그에 대항하여 자신을 정의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다. 이 담론은 존재론적인 부채의 기한이나 한계(인간은 그 속에서 존재한다)를 정립한다. 만일 그러하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부채는 출자 혹은 부모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기초가 되는 계보적인 소여’—, 혼인이나 결연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타자란 무엇보다도 하나의 유연자이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선주민의 신화가 유연관계를 항상 거기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는 사소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신화는 혈연관계와 같다든가 신화가 상상하는 세계에서 전(前)-인간은 혼인의 금지를 무시한다는 등—, 유연관계가 신화의 ‘틀’(『신화학』의 의미에서)을 구성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그러한 틀 내지는 조건설정은 다양한 존재자를 포함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동물의 유연자로 넘쳐난다. 유연자는 동물,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인간이어야 한다. 즉 식물, 별, 기상, 인공물…(미래의 비-인간이다—진정으로 신화에서는 현재 인간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이다. 그러나 길은 두 갈래로[비-인간으로 향하는 길과 인간으로 향하는 길] 같지 않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 비-인간과의 결연이 아마존에서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를 포함한다. 『질투심 많은 여 도공』의 의도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바로의 토템과 터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신화, 특히 문화의 기원을 다루는 신화는 유연관계와 교환에 관한 것이며, 친자관계와 출산에 관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에게 특징적인 인세스트에 대해서도 완전히 동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친족의 기본구조』의 기초와 동일하게 위치 지었다. 즉 ‘출자의 인세스트’나 부모와 자식 간의 프로이트적인 인세스트라기보다는 오히려 형제와 자매 혹은 ‘결연의 인세스트’로서 문제시된다. 신세계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신화에서는 형제와 자매간의 인세스트의 결과로서 태양과 달의 기원이 설명된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저자가 ‘아메리카의 불가타(Vulgata)[각주:3]’라고 부르며 M1의 기초로 삼는 것이 이 이야기이다. 이 보로로의 기준신화에서 어머니와 아들 간의 원오이디푸스적인 인세스트나 아버지가 일으키는 사투가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다시 쓰이면서—구조인류학의 유머로서—, ‘사촌’들 간의 인세스트나 ‘유연자’들 간의 다툼이 된다. 보로로 사회는 외혼제의 모계씨족에 의해 조직되며, 그 속에서 모든 개인은 모변의 씨족에 속한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한 사람의 유연자이며, 혼인에 의해 결합되는 씨족의 구성원이다. 아버지의 시점에서 보면, 아들은 아내의 형제가 된다. 인세스트의 문제성을 이동시키는 레비-스트로스의 이 방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도곤 신화에 대한 코멘트로 유효하게 활용된다. 즉 “자매와의 인세스트는 어머니와의 인세스트로 대체되지 않지만, 반대로 생식에 의한 혈연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세스트의 강도적인 모델이 된다”(들뢰즈&가타리 1972: 187)

 

 

 

3.

 

그러나 엄밀하게는 이 내재평면에는 결연과 출자의 대립적인 구별—필연적으로 외연적인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만약 두 결연이 있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두 출자가 있다. 만일 모든 생산이 출자적이라고 해도 모든 출자가 필연적으로 (재)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만일 재생산적이며 행정적인 (표상적이고 국가적인) 출자가 존재한다 해도 그와 마찬가지로 전염성의 괴물적인 출자가 있으며 그것들은 자연에 반하는 결연과 생성, 인세스트적 혹은 종을 넘어서는 연결로부터 귀결한다.

 

내혼과 외출자. 그것이 반-친족관계의 기본구조이다. 기아나의 이념적인 촌락에서 외혼의 인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른 아메리카 선주민의 이념적인 촌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내-출자에 의한 혈연관계이다. 왜냐하면 이 집단의 많은 아이들은 『슬픈 열대』에서 묘사된 카두베오 족의 이념적인 사례처럼 본래 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우리가 자연으로 여기는 감각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출산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담고 있다. 낙태와 영아살해는 대체로 보통의 실천이며, 따라서 집단의 보존은 생식보다는 양자(養子)결연에 의해 이뤄진다. 전쟁원정의 주요한 목적은 아이들을 손에 넣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55: 205-208)

 

그 외의 구조주의의 교의를 전도시키는 일탈적인 예는 투피남바 족이다. 그들은 자매의 딸과의 결혼을 선호하며, 그와 동시에 어떻게든 외부에 의리의 형제를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의례적으로 죽임당하거나 먹혀버리기 전의 적에게 일시적인 배우자로서 자기 자신의 자매를 제공한다. 인세스트와 거의 유사한 지나친 내혼은 식인적인 지나친 외혼이기도 하다. 신화의 과장된 도식 속에서 그것은 자매와의 성교이며, 작은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앞선 도식의 이중의 뒤틀림 속에서 그것은 어떤 별(星)과의 결혼, 특정의 자매를 위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된다.

 

요컨대 인세스트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결정한다는 것과 비교하자면, 하나든 둘이든 결연이 있으며 하나든 둘이든 출자가 있는 것인가, 신화는 원초적인 출자를 표하는가 등은 그다지 알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결국 질문은 외부가 내부에서 생겨나는가—결연은 출자의 하위에 있으며 그에 의존하는가—, 혹은 그 반대로 내부는 외부의 반복인가—출자나 혈연관계는 결연이나 유연관계의 특수한 경우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때 강도적인 이접으로서의 차이는 물론 제로로 향한다….

 

이 유연관계와 혈연관계 간의 ‘구별 없고 식별불가능한 모호한 영역’—그것들은 미분화된 것이 아니고 결국 그 속에 무한의 반향, 내적인 전개, 프랙탈적인 내포가 끌려 들어온다—이야말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서 쌍둥이 인물이 중요하다는 것에 의해 강조된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구조’에서 간략하게 언급되며 『신화학』의 전개를 통해(특히 태양과 달의 신화를 매개로) 구체화하며 『살쾡이 이야기』에서 ‘모든 시스템의 열쇠’로 변용된다(레비-스트로스 1991: 295). 왜냐하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쌍둥이성은—일시적이고 미완성이며 준-매개적이며 분산되며 불균형하며 적대적인 인세스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유사성의 원형이나 혈연의 동일성을 표상하지 않고 잠세적인 유연관계를 내적으로 반복한다. 불균형한 쌍둥이는 ‘피하기 어려운 비대칭성’의 신화적 인격화이며, 그것이 세계의 조건을 형상화한다. 유연자의 환유로서 혈연관계이며, 차이의 은유로서 쌍둥이성이다. 이 살과 피를 맛보기 위해서 여기서 잠시 라이프니츠주의를 몸에 둘러야 할 것이다.

 

차이로서 쌍둥이성은 자신의 인격을 분할하여 그로부터 강도적인 범주가 출현함으로써 시작된다. 『살쾡이 이야기』의 ‘숙명적인 분할’의 장에서 매우 명확하게 설명된 것처럼(“내가 키운 딸/아들이든 내가 죽인 아들/딸이든”) 모친의 은혜 속에 있는 한 아이가 ‘그 자신의 쌍둥이’인 것이다(레비-스트로스 1991: 87 et s.). 왜냐하면 그는 대립하는 성(性)의 이중의 잠재성을 갖춘 것인데, 그것은 단일성을 가진 새로운 개인이 태어날 때에 최종적으로 상실된다(‘슈뢰딩거의 고양이’의 패러독스는 이 신화적인 주제의 하나의 변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살쾡이 이야기』 10쪽에서 언급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아마도 양자(量子)의 고양이 그 자체의 형식이 가시적인 것이리라). 이 책이 아메리카 신화에서 일반적인 남성의 쌍둥이 한 쌍만을 생각한다는 것에 주의하자(디오스쿠로이(Dioskuroi)[각주:4]와의 대비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벌거벗은 인간』에서 저자는 동성의 쌍둥이는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인세스트)가 만들어내는 틀의 ‘파생적’이며 ‘보족적’인 변용 상태라고 주장한다(레비-스트로스 1971: 190-192). 즉 아메리카 선주민의 동성의 쌍둥이의 차이는 무엇보다 대립적인 성(性)의 쌍둥이 한 쌍이라는 ‘기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제기하는 것은 일찍이 프랑수아즈 에리티에(Francoise Heritier, 1933~ 프랑스의 인류학자)(1981: 39)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차이가 성적인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즉 모든 성(性)은 차이적이라는 것이다—모든 시스템이 기호적인 것이기도 하다(Manigler 2000: Viveiros de Castro 1990). 왜냐하면 한 번 더 레비-스트로스를 거론하면 친족의 본질적인 경험은 성(性)의 대립이라는 경험이 아니라 대립으로서 이해되는 다른 성(性)에 대한 경험이다. 이 구조주의의 근원적인 직관에 대한 스트라샌의 해석은 앞서 살펴보았다.

 

 

 

4.

 

아마존 선주민의 근저에 흐르는 우주론적인 범주로서 잠세적인 유연자라는 관념은 이제까지 참고한 이론이나 민족지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체의 ‘교환론’의 이미지와의 단절을 산출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재인식하면서 간소하게 그 논의의 결론을 이끌어내겠다. 즉 포식이나 포착이라는 관념—강탈과 증여, 카니발리즘과 적이 되는 것—이 그것들을 항상 연결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들은 결연의 힘의 움직임을 선주민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는 근원적인 상태로서 이해된다. 그것은 구조기능주의든 구조주의든 마르크스주의든, 친족의 고전적인 이론(‘가족의 영역’, ‘공공의 영역’)에서 보이는 가(家)-공(公)의 유연자로 환원될 수 없는 우주론적인 힘이다. 강탈, 증여, 감염, 소비 그리고 생성. 문제는 이 교환이다. 잠세적인 결연은 타자로의 생성이며, 그것이 아마존의 친족관계를 휘감으며 위치짓는다. 이러한 친족관계를 통해 그들에 대한 민족학—『친족의 기본구조』에 충실하기 이전에(충실하기 위해서) 『신화학』에 충실하다—은 철학자 파트리에 마니글리에의 고찰을 선취했다.

 

친족관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상호관계의 조정이나 규정은 친족을 통해 배타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그렇다면 친족을 매개로 원초적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것, 우리가 그 일부를 이루는 세계의 사상(事象)의 순환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Maniglier 2005b: 768)

 

 

 

 

 

 

  1. 에드워드 타일러가 만든 조어. 그리스어의 자식을 뜻하는 teknon과 이름을 뜻하는 onoma를 합성한 것이다. 아이를 둔 부부가 자신의 고유명 대신에 아이의 이름과 연결지어 불리는 관행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남아메리카 대륙북부의 베테수엘라와 브라질 사이의 대서양 연안지방. [본문으로]
  3. 가톨릭교회 공인의 라틴어 번역 성서. [본문으로]
  4. ‘제우스의 자식들’이란 뜻. 그리스 신화중 제우스와 레다 사이에 출생한 쌍생아, 카스토르(Kastor)와 폴리데우케스(Polydeukes)를 말함.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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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 1장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러다가 이 책을 다 번역할 것 같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글은 너무나도 멋지다. 글은 이렇게 써야하는데, 글이 언제부터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는지, 그리하여 읽으나마나한 글이 되었는지 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정신의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글에서 그뿐만 아니라 학문과 지식 그 자체를 건전한 방식으로 이끌어나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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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1.

나는 예전부터 내 분야의 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오마주로서 책을 쓰고 싶었다. 『안티 나르시스—마이너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라 이름 붙여질 책이 그것이다. 동시대의 인류학을 관통하는 개념적 긴장을 특징짓는 것이 그 책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곧 이 프로젝트에 모순이 있음을 알았다. 즉 제대로 다룰 수 없다면 안티 나르시스라는 주제의 탁월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세일 뿐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허구 속 작품 혹은 보이지 않는 작품—그 최적의 해설자는 보르헤스이다—으로 남겨두자고 결정했다. 많은 경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책 그 자체보다 더욱 흥미롭다. 왜냐하면 맹목적인 독자의 뛰어난 해석을 읽어가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을 쓰기보다 마치 타인이 그것을 쓴 것처럼 여기고 그 책에 대해 비평하는 편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 책, 『식인의 형이상학』은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책에 대한 소개서이다. 이 책은 몇 번이나 구상해왔던 것인데, 이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지면에서 그것이 나타날 수도 있다.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나의 전문분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민족지적’ 현재—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인류학이 연구대상으로 삼은 민족에게 개념적으로 인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의 함의는 정반대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인류학 이론의 내부에 있는 차이[相違]나 변동은 대개 (오로지 역사-비판적인 관점에서) 인류학자가 속한 사회형태, 이데올로기논쟁, 지적세계, 학문적인 맥락의 차이와 국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까? 그것이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일까? 인류학 이론에 의해 도입된 가장 흥미로운 개념, 질문, 실체, 행위자(agent)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회(혹은 민족, 집합체)의 상상력에서 그 원천을 찾아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퍼스펙티브를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류학의 동요하는 오리지널리티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주체’의 세계와 ‘객체’의 세계에서 산출된 개념과 실천 간의 결합—항상 다의적이지만 종종 다산적이기도 하다—에야말로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질문은 인식론적인, 즉 정치적인 질문이다. 식민주의는 인류학을 하나의 역사적인 아프리오리로서 구축할 수 있는데, 오늘날 인류학이 그 인과응보의 순환을 닫아놓고 있음을 우리가 다소간 찬성한다면, 이 프로젝트를 마지막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이제야 그 학문분야를 재구축하는 프로세스를 급진화할 때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인류학은 그 새로운 사명, 즉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이론-실천을 전면적으로 떠안을 용의가 있다.

아마도 우리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학은 당연히 사회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것은 인류학자가 연구하는 사회에 대한 것이 아닌—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그 무엇에 대해서든)—인류학의 지적 프로젝트가 그것에서 산출한 사회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일부의 범위에서는 다음의 설을 받아들여 왔다. 즉 인류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이국취향이고 미개주의이며 서양의 야비한 흥미와 관심에 따라 ‘타자’가 항상 ‘표상되거나’ ‘발명된’ 도착적인 무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이든 사회학이든 이러한 자만에 가득한 온정주의를 두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상에는 발언권을 주지 않으면서 이른바 타자를 변모시키고 만다. 주체적 환상이라고도 하는 것을 이중화하고 식민주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라는 객체적 생산물의 변증법에 호소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욕에 모멸을 덧붙이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비서양적이고 전통적인 민족에 대해 ‘서양적인’ 언설을 밀어붙인다 해도 우리의 ‘타자의 표상’을 미화할 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이론적인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자민족중심주의의 최종단계이다. 다름[他]에 대해서도 같음[同]을 보기 위해—즉 타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어도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은 ‘우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결국 우리는 목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여정을 단축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우리의 관심을 모으는 것’, 즉 우리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인류학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로 자신을 돌려 세운다’(Maniglier 2005b: 773-774). 왜냐하면 모든 이문화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에 대한 어떤 실험을 감행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상 속의 변화이지만, 우리의 상상력을 변화시킨다.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문화는 그 연구에 기초해서 정식화되는 사회와 문화의 이론에 영향을 주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공생산(共生産)하는 사고로부터 온갖 귀결을 떠안아야 한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기묘한 구축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자기-내파하지 않도록 그 흔한 ‘작은 서사’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판적인 고발을 하는 필자가 쓴 그대로 인류학은 항상 대상을 잘못 구축하는데, 비판에 직면한 그때부터 광명을 비추고 대상을 정직하게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간과 타자』(Fabian 1983)나 그와 비슷한 그 외의 많은 논의로 경도되는 곳에서 우리가 인지적인 절망이라는 정체에 새롭게 직면하는 것은 사물 자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탓이거나 그도 아니면 타자가 보편적인 이성을 체현해서 미신(迷信)을 퍼뜨리는 케케묵은 신비주의적인 마술 탓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선주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전의 저자들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선주민을 이국적인 대상으로 보고 보지 못하는 것에 의해—그들은 그렇게 먼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먼 과거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든 간에 인류학의 지나친 이국취향이 그 반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프루스트는 시간과 타자에 대해 조금은 숙지하고 있었으며 바로 직전의 그렇게 지나친 과거만큼 오래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인지-정치의 재귀적인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맹종하는 것 같은 관계성 속에 인류학을 끌어들이는 것, 즉 아첨하는 대항의식을 포함해서 이 두 과학이 설파하는 근대의 메타서사를 떠안는 것이다(England et Leach 2000). 이 과학들은 세계의 모든 집합체의 실존에 관한 실험을 분석자의 ‘사고의 집합체’라는 관점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재맥락화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삼는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서 지지해야 하는 것은 인류학은 자유로운 환경에 계속해서 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류학은 거리의 기법에 계속해서 거해야 하며, 서양적인 혼에 감추어진 아이러니로부터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서양이 하나의 추상이라고 한다면, 그 혼도 결국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밀어붙여온, 이성을 외재화하는 프로젝트에는 당연히 충실해야 하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 멈출 수가 없는, 동일성이라는 갑갑한 개인실 너머의 이야기이다. 진정한 내(內 endo)-인류학은 오늘날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이 분야의 절망적인 논제인데, 그것은 훨씬 이전부터 외(外 exo)-인류학—현실적인 중요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필드의 과학’—에 의해 촉발되어온 이론적인 환기장치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의 목적은 중요한 인류학 이론이 모두 선주민의 지적실천의 번역이라는 주장을 예증하는 데에 있다. 이 이론은 학문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대상의 위치’에 있는 집합체의 지적인 실천과 강한 구조적 연속성을 가진다. 인류학 담론의 변용을 퍼포머티브하게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학 담론은 본래 학문분야를 변용하는 조건을 내화한다. 즉 인류학에서 사실이란 (물론 이론적으로는)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에 대한 민족-인류학적 담론의 왜곡이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이런 길을 가는 필자는 아메리카 연구를 하는 민족학자이다)라는 아마존 사람들의 관념을 예로 들어—이른바 손에 쥐고—봄으로써 『안티 나르시스』는 우리가 연구하는 집합체의 고유한 사고스타일이 이 분야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스타일과 그 함의를 파헤쳐 검토함으로써 특히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드러낼 것이다. 개념의 새로운 인류학, 그것은 결국 인류학의 어떤 새로운 개념을 반(反)-실현하는 것인데, 그에 따라 연구대상이 되는 집합체의 존재론적인 자기규정의 조건을 기술하는 것은 인간(그리고 비인간)의 사고를 인식의 장치들—분류, 서술, 판단, 표상…—로 환원한다기보다 훨씬 더 우선시된다. ‘비교존재론’(Holbraad 2003)으로서의 인류학—그것이 진정한 내재라는 관점이다. 사고에 대해 다른 사고를 한다는 이러한 작업의 기회와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개념적인 상상력—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모든 집합체의 삶에 고유한 창조성과 성찰성에 의해 감지될 수 있다—에 대한 인류학 이론을 정성스레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에 관한 것이다.

 

2.

이 책의 제목이 의도하는 것은 인류학이 이 분야에서 『안티 나르시스』에 걸맞는 위대한 책의 최초의 장들을 쓰기 시작했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오이디푸스가 정신분석의 창설신화에서 중심인물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인류학의 성스러운 수호자 혹은 악마적인 후견인의 후보자를 나르키소스로 제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인 혹은 악마는 (특히 ‘철학적’이라고 말해지는 버전에서는) 인류학적 담론의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그들(우리이기도 하다), 비-서양, 비-근대, 비-인간—을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징과 기준을 결정한다는 망상에 항상 지나치게 사로잡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비-서양적이며 비-근대적인 것으로서 타자를 구축하는 속에서 타자를 ‘가지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자본주의와 합리성, 개인주의와 기독교는 타자를 가지지 않을까? (아마도 잭 구디에 대해서는 덜 조심해도 될 것 같다. 즉 알파벳의 에크리튀르와 혼자(婚資: 신부대와 지참금)에는 타자성이 없을까? 나아가 그러한 타자를 비-인간(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타자로서의 비-인간)으로 자아내는 속에서 당연히 크게 결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사의 혼, 랑가주, 노동, 열림, 금지, 니오터니(neoteny)[각주:1], 메타 지향성일까?

이것들의 결여는 모두 상통한다. 왜냐하면 실제는 어느 것도 같기 때문이며, 문제는 바로 답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분할의 형식, 혹은 그와 마찬가지의 배제의 형식이 인종을 인류학적인 의미에서의 서양의 생물학적인 유사관계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한 형식이 온갖 타종(他種)과 타민족을 일반적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타자성으로 혼합해버린다.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타자와 다른 존재로 만드는가를 자문하는 것은—타의 종, 타의 문화,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이다—이미 하나의 응답이다.

따라서 ‘인간(에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하면서 ‘인간’을 본질을 가지지 않는다거나 그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거나 인간존재는 자유로우며 불확정하다는 등은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명백히 역사적 이유를 갖지 않으며 은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응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고유성은 고유성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반복하거나 그에 응답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타자의 모든 고유성에 대한 무한의 권리를 부여했으리라. ‘우리’의 지적전통에서 천년을 이어져온 것, 바로 그것이 이러한 인간의 고유성 없음에 의한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한다. 결여, 유한성, 부재는 남은 생명을 위해 종(種)이 품도록 운명지어진 구별이다(마치 우리에게 그것을 믿게 하고 싶은 것처럼). 인간의 무거운 짐, 그것은 보편적인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인간은 주지하다시피(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세계빈곤적’이다. 종달새는 말할 것도 없다…. 비서양의 인간에 대해서도 그것들에게는 세계 속에서 얼마 안되는 몫만이 할당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양으로서 우리만이 완성된 인간, 혹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장대한 미완성이며 세계의 억만장자이며, 세계의 저축가이며, ‘세계를 본뜨는 자들’이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바로 모든 식민주의의 기원이다.

그에 따라 문제는 변화하며 그에 답하는 방법도 변화한다. 즉 마이너인류학은 거대한 분할에 저항하고 작은 다양체를 증식시킨다.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연속한 변이의 안티 나르시시즘이다. 완성되고 마무리된 휴머니즘에 저항하는, ‘제한 없는 휴머니즘’(Manigler 2000)이며, 그것은 인간성을 예외적인 영역으로 두지 않는다. 다양체를 증식시켜야 함을 강조해 두겠다. 왜냐하면 여기서 데리다(2006)를 상기하는 것이 좋은데, 문제는 기호와 세계, 인격과 사물, ‘우리’와 ‘그들’, ‘인간’과 ‘비인간’을 통합-분할하는 경계를 파기해야 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안이함이나 일원론의 가벼움이라는 것은 융합주의의 곡선으로 구부러지며, 그것들을 ‘환원하지 않는’(라투르) 것, 규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윤곽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접어서 조밀화하고 무지개빛으로 빛나게 하며 구부려 꺾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일반화한 연속색채주의…”(Deleuze et Guatari 1980: 123). 연속색채주의, 이 구조주의적인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구조주의의 흐름과 얽혀있는 프로젝트가 작성된다.

 

3.

『안티 나르시스』 초고는 인류학의 학문분야를 근저에서부터 재생하는 책무를 짊어진 몇몇 인류학자들에 의해 정성스레 개시되었다. 잘 알려진 저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의 작업은 미숙한 평가를 받지도 않았고 널리 알려진 것도 아니다—그것은 그들의 출신국에서 특히 현저하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하는 것은 우선 미국인 로이 와그너이다. 그의 공적은 ‘반전(reverse) 인류학’에 대한 풍부한 착상과 함께 ‘발명’과 ‘관습’에 관한 훌륭한 기호론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 개념의 비전을 그려낸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를린 스트래선은 페미니즘과 인류학을 교착시킨 탈구축-잠세화에 공헌했다. 그것은 바로 ‘선주민의 감성론’과 ‘선주민의 분석’이라는 발상-력을 제시한 것이며, 그것이 서양적 이성에 의한 멜라네시아적인 반(反)-비판이라는 이른바 두 개의 면을 형성하고 있다. 확실히 포스트-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적 기술의 방식을 발명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고뉴(Bourgogne)[각주:2] 출신의 브루노 라투르는 집합체와 ANT(행위자네트워크론)의 초존재론적 개념을 제출하고 ‘지금(근대)인 적이 없다’는 역설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었으며 과학실험에 대한 인류학에 다시금 매력을 불어넣었다. 부작위 혹은 작위에 의한 오류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최근에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그 외의 많은 연구자들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러나 인용되든 말든 그들 앞에는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 분야의 과거에 눈을 돌려 과거를 칭송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로 시선을 향하고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바에 따라 루소를 창시자로 봐야 한다면,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구조주의에 의해 인간과학을 재구축하려한 것이 아니라 내재성의 인류학으로 이르는 도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잠재적으로 ‘무근거화했다’고 말해야 한다. 게다가 이 도정은 ‘모세가 결코 그 훌륭함을 알지 못한 약속의 땅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며, 아마도 그가 실제로는 나아가지 않은 도정이다. 인류학적인 지(知)는 선주민의 실천의 하나의 변용으로 간주되고 ‘인류학은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탐구이다’(레비-스트로스 1958/1954: 397). 그리고 그 10년 후에는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 정의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올 수밖에 없는 철학’(Hamberger 2004: 345)의 안내자를 설정했다. 그것은 무제한성과 잠재성이라는 표지에 의해 긍정적으로 드러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창시자로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친족연구에 관한 구조주의자의 유산을 총결산한 잡지 『인간』의 어느 권호의 후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강렬하고도 결정적인 다음의 코멘트를 남겨두었다.

 

사람과 신, 친구와 적, 내부자와 외부자라는 대립의 중립으로서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착상한 유연관계(類緣關係)의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브라질의 동료들이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만한 사태를 끌어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 이 개념의 경향으로부터 어떤 결말을 가진 인상이 분명해졌다. 기쁘든 슬프든 어느 쪽이든 철학은 다시금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이국의 민족에 기대어 산발적으로 도움을 얻은 우리의 철학이 아니라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 즉 그들의 철학이다. (레비-스트로스 2000: 720)

 

후술하겠지만, 여기서는 브라질의 동료들에 의해 정확하게 기술된 논고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실제로 우리는 남아메리카의 선주민이 유연관계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고유한 형이상학적 관습을 민족지의 한 축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레비-스트로스가 비-관계성의 양상에 대해 환기한 두 개의 철학—‘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구동시킨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사이에서 보이는 관계성이라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기 위한 개략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기쁘든 슬프든 여하간 문제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혹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의 모호한 경계의 양측에 구성된 초영역적인 문제를 새롭게 검토함으로써 인류학과 철학 간에 다시금 확실한 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수주의자의 혁명은 이 수십년 간 생태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세계를 완전히 고난의 장소로 변형시키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 직전에 일어난 사고의 열광과 풍요의 그 짧은 시기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길이 있다. 인류학과 철학을 교차시키는 독해방식에는 한편으로는 아마존의 사고에 기대는 것—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초’(Taylor 2004: 97)를 다시금 상기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다—이며, 다른 한편으로 질 들뢰즈에 의한 ‘이단의’ 구조주의(Lapoujade 2006)에 기대는 것이다. 목적도 둘이다.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의 운동으로서 인류학이라는 이념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개념창조의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인류학이 문제이다. 조금 전 과거를 되돌아본 탐구의 의도는 회고적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있다. 어떤 가능성을 불러내는 것, 어떤 구름의 열린 틈을 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학문분야가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지적인 프로젝트로서, 정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는 다른 결말—다소 과장되게 말하면—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1. 형태는 유생(幼生)인 채 성적으로 성숙(成熟)해지는 일. 유형 성숙(幼形成熟). [본문으로]
  2. 프랑스 중부의 손(Saône) 강 우안의 지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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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펙티브주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으로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조금 어렵지만 여러 번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될 것이고 그의 사상의 심오함에 매료될 것이다. 그의 논리가 명쾌하기도 하거니와, 서구중심주의의 근대사상보다 그의 시야가 훨씬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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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펙티브주의

 

1.

 

타니아 스톨츠 리마(Tânia Stolze Lima)와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라는 관념을 제안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류학의 행적을 재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개념은 이념과 현실의 복잡한 관계를 재형상화하는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는 이 지적혼란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이 표현이야말로 적절하다). 그 속에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적인 개념이 덧붙여지는데, 이 개념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현대철학의 어떤 프로그램의 의외의 파트너—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암약하는 선구자—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가능세계의 이론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것, 근대성의 엄청난 이항대립의 외부에서 일거에 만들어진 것, 혹은 모든 존재론적인 물음에 인식론적인 회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비판주의의 헤게모니의 종언을 확실히 고하며 ‘초월론적 경험론’과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깃발 하에서 조금씩 새로운 사고의 도주선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 두 개념[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은 우리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포식의 형이상학’을 우주론적으로 상정한 분석을 통해 명확해진다. 레비-스트로스의 요약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이 형이상학은 결연관계를 보여주는 선주민의 범주의 강력한 사변적 생산성에서 그 가장 높은 표현력을 획득한다. 우리는 이 현상을 다른 개념, 즉 잠재적인 결연관계라는 개념으로 번역했다. 잠재적인 결연관계란 들뢰즈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의 ‘타자의 구조’라고 불렀던 특징적인 도식주의를 뜻한다. 즉 그것은 카니발리즘=식인이라는 기호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며, 이 세계의 주민을 상상할 때에 늘 따라다니는 모티브이다. 그리하여 종들 간의 퍼스펙티브주의, 존재론적인 다자연주의, 식인의 타자성이 선주민의 또 하나의 인류학의 세 측면을 형상화한다. 그것은 서양의 인류학과 대칭적인 반대방향의 변용이다—여기서 대칭적이라는 것은 라투르의 의미에서이며, 반대방향이라는 것은 와그너의 반전(reverse)의 인류학의 의미에서이다. 이 삼각형을 그려냄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우리[의 철학]’의 대극에 있는 ‘이국적인 사람들’의 철학의 윤곽을 분명히 묘사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들뢰즈&가타리 1991)의 제4장(「철학지리학」)에서 착수한 압도적인 프로그램을 현실적인 것으로 시도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사례에서 가령 방법론적인 모호함이나 의도적인 다의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해도—언제든 그러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우리는 그 모험을 시작할 수 있다.

 

 

2.

 

이 작업은 완전히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즉 현실에 내재하는 퍼스펙티브라는 다양체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아마존의 코스모폴리탄성에 관해 우리가 행한 탐구의 결과와 레비-스트로스가 『인종과 역사』에서 보고한 아메리카 대륙정복의 주제로 잘 알려진 우화 사이에서 어떤 공명이 인다는 것을 불현듯 간취했던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몇 년 후 앤틸리스 제도에서 스페인인이 선주민들에게 혼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물에 담가놓으려 했다. (레비-스트로스 1973/1952: 384)

 

이 저자는 이 인류학적인 갈등 속에서 어떤 바로크적인 알레고리를 찾아내었다. 즉 인간본성의 전형적인 출현이란 그들 자신의 일반성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선천적인 탐욕은 인간성이라는 속성을 하나의 전체의 종(種)으로 확장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인데, 그러한 탐욕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인간성이라는] 속성 중 하나이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란 상식(필시 그것은 단지 통각이라는 계기에 불과하지만)과 같은 것이며 더 잘 분할된 세계의 문제이다. 교훈이 친숙하다고 해서 교훈의 엄숙함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희생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과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왜냐하면 (서양의) 같음에게서 다름은 (선주민의) 다름에게서 다름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나타나며, 같음은 부지불식간에 다름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분명 이 우화에 매료되었고 『슬픈 열대』에서 이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보족적으로 짓궂은 주름을 삽입한다. 양자 간의 유사성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며, 타자의 인간성에 관한 조사에서 서양인은 사회과학을 채용하는 반면 선주민은 오히려 자연과학을 신용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선주민이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전자의 주장에 반해, 후자는 서양인이 신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남기며 끝낸다. “나의 결론은 [양자가] 모두 무지하다는 것이다. 물론 후자[선주민]의 행동이 더 인간에 적합하다”(1955: 81-83). 만약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례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타자에 관해 마찬가지로 무지하다 해도, 다름의 다름은 같음의 다름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참은 그 반대일 것이다. 실제로 선주민의 세계에서 인간성에 관한 두 타자—동물성과 신성(神性)—간의 관계성은 우리가 기독교로부터 승계받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 레비-스트로스의 수사적인 대비는 타이노의 우주론적인 위계보다 오히려 우리의 그것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다.

 

여하간 이것은 불균형에 대한 하나의 매개(중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이끌어내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존재론의 체제는 서양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체제와 다르다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신체와 마음에 대해 역전의 기호작용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앤틸리스 제도[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있는 제도]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스페인인에게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은 마음의 차원이지만, 선주민에게 그것은 신체이다. 서양인은 선주민이 신체를 가진 것을 (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한편, 선주민은 서양인이 마음을 가진 것을 (동물이나 죽은 자의 영도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서양인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가 마음을 포함하며 그것이 형식상 그들 자신의 신체에 머무는 마음과 유사한지를 의심한다. 반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나 정신이 선주민의 신체와 유사한 물질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심한다.

 

 

3.

 

로이 와그너(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이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매개가 된 멜라네시아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신체는 생득적인 것 혹은 서양적인 존재론에서 자연발생적인 것(‘자연’)의 차원에 속하며, 그러한 차원은 ‘관습적’인 기호화조작의 반(反)-발명적인 결과이다. 그에 반해 마음은 구축되는 차원에 있다. 그것은 ‘분화하는’ 기호화의 산물이며 “근본적인 구별을 넘어서거나 이 세계의 특이한 개체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관습적인 세계를 명시하거나 구체화한다”(Wagner 1981: 42). 한편 선주민의 세계에서 혼은 “모든 사태에 관한 암묵의 습관적인 질서의 출현…으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혼을 가진 자가 타자(존재)와 비슷한 양태를 총합하며 나아가 그 양태의 피안에서 혼을 가진 자는 그들[타자]을 차이화한다”(같은 책 94). 반대로 신체는 행위자(agent)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생득적인 기반이나 ‘내재적인 인간성’의 보편성에 대항해서 만들어 내야하는 근본적인 형상이다(같은 책 86-89). 첨언하면, 서양인들의 실천은 소여의 신체-물체(자연)의 기반으로부터 ‘혼을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문화를 분화하는 것)에 있다. 그에 비해 선주민의 실천은 소여의 사회-정신의 연속성으로부터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공간을 분화하는 것)에 있다. 후에 살펴보듯이 그것은 신화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된다.

 

와그너의 이론시스템은 개념적으로 치밀하고 매우 독창적이며 계몽적인 요약을 거부한다. 독자들에게 『문화의 발명』(Wagner 1981)의 일독을 권한다. 그 책의 설명은 매우 세밀한 동시에 성공적이다. 거칠게 말하면, 와그너의 기호론은 (인간 그리고 아마도 비인간에 관한) 실천의 이론이다. 그것은 상징화의 두 양태를 상호 재귀적으로 조작하면서 실천을 철저하게 일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실천이란 ⑴ 습관적 내지는 집합적인 (문자기호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그 속에서 기호는 ‘제시 대상’의 이질적인 평면으로 거슬러가는 한에서, 즉 기호가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고 간주되는 한에서 표준화된 맥락(의미론, 형식언어의 영역)에서 조직된다. 그리고 ⑵ 차이화하는 혹은 발명적인 (구체적이기도 한) 상징체계이며, 습관적인 상징화에 의해 표상되는 현상의 세계는 관습적인 대립을 소멸하면서 ‘그 자신에 의해 표상되는 상징’, 즉 상징과 제시 대상으로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우선 주시해야 하는 것은 제시 대상의 세계—‘실재’—가 여기서는 기호론적인 효과로서 제시된다는 것이다. 기호의 타자란 ‘스스로를 표상하는’ 특이한 능력을 갖춘 다른 기호이다. 사건 내지는 기회로서의 현세적(現勢的)인 존재자의 존재양태는 토테고리(tautégorie)[각주:1]이다. 나아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양태 간의 대비는 그 자체가 관습화한 조작(그리고 지각)의 결과라는 것이다. 발명과 관습의 구별은 그 자체가 관습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관습은 반(反)-관습으로부터 산출된다. 이 대비는 따라서 내재적으로 재귀적이다. 특히 인간문화는 근본적으로 상징화의 양태와 대립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인간문화는 ‘소여’의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행위와 발명에 대해 획득된 요소를 (습관적으로) 중시한다. 문화(관습에 대한 인간의 마이크로한 체계)는 행위자(agent)의 책임영역(‘구축된’ 세계)에 속한다고 정의됨으로써 상징되며, 나아가 ‘소여’인 비-구축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 그것은 귀속으로서의 반(反)-구축이다)에 의해 상징된다.

 

문화적인 관습의 모든 총체의 핵심은 어떤 단순한 구별 속에 있다. 즉 비-관습화되거나 관습 그 자체의 비-관습화인 맥락의 타입—이것들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연히 분절화된다—, 그리고 ‘소여’ 내지는 ‘생득’이라는 관습적인 겉치레 하에서 ‘동기’로서 반(反)-발명되어야 하는 맥락의 타입 간의 구별이다. 본질적으로는 […] 두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동기 지어진 집합체(사회와 그 관습)를 ‘생득’으로서 항상 반(反)-발명하는 분화하는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사람들, 그리고 분화하는 동기를 반(反)-발명하는 집합적인 행위의 형식을 결연히 실천하는 자들이다. (Wagner 1981: 51)

 

 

4.

 

앤틸리스 제도의 사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인류학의 교차배열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구별되기 시작하는 두 특징과 분명하게 일치한다. 첫째, 그는 예상외의 방법으로 애니미스트로서 새로운 (조금은 일방적이라고도 생각되는 방법으로) 정의된 존재론의 중심에 신체성의 이코노미의 중요성을 확인했다. 확인했다는 것은 이미 『신화학』에서 풍부하게 명시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 그대로, 즉 신화들의 변용의 어떤 신화적 변용이야말로 목적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여기서 묘사하는 것은 엄격한 데카르트주의자와 변덕스러운 라블레주의자[각주:2]를 연결하는 하나의 산문이다. 그것은 비교에 의한 법신학적인 음울함(우리 분야를 만들어내는 권리와 의무, 질서와 원리, 범주와 ‘도덕적 인격’을 떠올려보자)에 의해 고통 받았던 우리 자신의 인류학의 망령과 같은 용어로 설명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器官)의 흐름과 물질적인 코드, 지각의 다양성과 동물로의 생성 등의 관점으로부터 형상되는 선주민의 인류학이다. 둘째, 그 덕분에 존재자의 잠재적인 차원(‘마음’)의 흔적 혹은 총칭 없는 지위에 관한 이론적 함의가 일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선주민의 지(知)의 구조적인 힘에 관한 주요한 전제로서 서양 인류학에 의해 묘사된 그 자신의 이미지를 제대로 다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놓쳐버린 이미지를 쫓아내었다’. 이 이중의 비틀림, 즉 일상적인 실천에 부착된 물질주의와 사변적인 것, 애니미즘에 관한 심리주의자와 실증주의자라는 이중의 비틀림이야말로 라이프니츠, 니체, 화이트헤드, 들뢰즈에서 볼 수 있는 이러저러한 이름표와 연결된 철학적 명제와의 (적어도 증명됨과 동시에 구축되는) 유사함의 명목으로 우리가 ‘퍼스펙티브주의’라 부른 것이다.

 

 

5.

 

다양한 민족지학자가 이미 지적한 대로—거의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지적했을 뿐이지만—, 신세계의 많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세계란 시점(視點)의 다양성에서 구축된 것이라는 개념을 공유한다. 모든 존재자는 지향성의 중심이며, 그들은 다른 존재자를 그들의 특성과 각각의 능력에 의해 이해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제와 귀결은 가장 먼저 떠올릴 상대주의의 잘 알려진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은 상대주의와 보편주의 간의 대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평면으로 정리된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관점에서 본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러한 저항은 한창 논쟁중인 존재론적 분할의 이식가능성을 의문시한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는 서로 달라도)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 간의 분할—학문에서 마치 헌법의 제1조와 같으며, 그 속에서 서양의 형이상학의 오래된 모습에 충실을 기하는 것이다—을 비서양의 우주론의 특정한 차원과 내재적인 영역을 기술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한다면, 엄격한 민족학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자연’과 ‘문화’라는 두 범형과 나란한 속성, 즉 보편과 특수, 객체와 주체, 물리현상과 도덕, 사실과 가치, 소여와 창설된 것, 필연과 우연,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지도의 상황 때문에 우리는 근대의 ‘다문화주의’의 우주론에 대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 특유한 표현을 지시하기 위한 ‘다자연주의’라는 표현을 활용하자고 제안하게 되었다. 전자는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간의 상호 함의를 근거로 삼는다—한편으로는 신체와 실체의 객체적 보편성에 의해 보증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과 시니피에(記意)의 주체적 고유성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인데, 아메리카 선주민의 개념은 그 반대로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양성을 상정한다. ‘문화’ 내지는 주체가 보편성의 형식을 그려내고 ‘자연’ 혹은 객체가 개별의 형식을 그려낸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민족지에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이러한 다양한 타입의 액터(actor)와 주체적인 행위자(agent)—신, 동물, 죽은 자, 식물, 기후학적인 현상, 많은 경우에 대상, 그리고 인공물—가 정착한 세계를 기술하는 코스모폴리틱한 이론에 대한 참조로 넘쳐난다. 이것들 모두가 퍼스펙티브, 욕구, 인지를 배치하는 전반적인 총체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혼’과 유사한 것을 부여한다. 이 유사함은 거의 수행적인 통각의 동일한 양태를 포함한다. 즉 마음을 가진 동물과 그 외의 비인간은 ‘자신을 인격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이다’. 즉 지향적인 대상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두 측면을 가진 대상의 구성은 사회와 실재의 관계성에 의하며, 그것들은 재귀적이고 상호적으로, 즉 집합적인 대명사의 이중의 양태 하에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인간이 보는 것—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되는 것—은 바로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또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 제기된 철학적인 문제이다.

 

혼의 유사성은 이 혼이 표현하거나 지각하는 것과의 대립을 포함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 정령, 그 외의 우주적인 액터를 보는 방법은 이러한 존재자가 인간을 보거나 스스로를 보는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이 토톨로지(Tautologie 동어반복)는 퍼스펙티브의 영도(零度)이다. 전형적인 인간, 그것도 규범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며 동물을 동물로서 이해한다. 정령에 관해 말하면,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자를 보는 것은 그 ‘상태’가 규범적이지 않다—병에 걸렸다거나 트랜스상태이거나 다른 부차적인 상태이다—는 것을 분명히 뜻한다. 사냥감은 인간을 정령이나 포식자로 보지만, 포식동물과 정령 측에서 보면 인간은 사냥감이다.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인간을 맥[각주:3]이나 멧돼지로 보고 죽인다’(Baer 1991: 224). 우리가 비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은 바로 그 자체로(그 각각의 동종의) 동물이나 정령이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들은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서 자신을 간취한다(혹은 생성한다). 그리고 그 버릇이나 특징은 문화적인 겉모습에 의해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신의 음식을 인간의 음식과 같이 이해한다(재규어는 피를 옥수수 술로 보며,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는 등). 그것들은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식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으로 조직된다(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

 

조금 더 밀고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동물(대개의 경우 타자를 포함한 모든 것이며, 적어도 죽은 자를 포함한다)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비주의는 대개 재규어, 아나콘다, 독수리, 혹은 남미수리와 같은 대형의 포식자나 썩은 고기에 몰려드는 동물들이다. 또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들이다. 실제로 퍼스펙티브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이고 관계론적인 입장과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형이상학은 퍼스펙티브주의에 매우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그렇지만 그 상대적인 입장의 관계성 속에서 포식자의 힘의 서열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자가 필연적으로 사실상의 인격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근본적인 논점은 모든 동물종이나 존재의 모드가 그러하다는 것을 (권리상)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분류학(taxonomy), 분류, ‘민족-과학’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동물이나 그 외의 우주의 구성요소는 강도적(强度的)으로 인간이며, 잠재적으로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자신이 어떤 인간존재라는 것을 보여줄(인간존재로 변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잠세력이 문제이다. ‘인간인 것’ 그리고 ‘퍼스펙티브를 가진 것’, 그것은 정도, 맥락, 서 있는 위치의 문제이며, 어떤 종(種)인가라는 두드러진 고유성이 문제는 아니다. 어떤 비인간적인 존재는 다른 것보다도 더 완전한 방식으로 이 잠세력을 현실화하며, 나아가 그 가운데 특정한 존재자가 우리 종이 가진 잠세력보다도 더 우월한 강도를 가지고 그 잠세력을 보여준다. 이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이라기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이다(Hollowell 1960: 69). 게다가 이 문제에는 본질적으로 아포스테리오리(aposteriori)한 (경험적인) 성질이 관련된다. 하찮은 존재자가 인간처럼 꾸밀 수 있는 더 적합한 행위자(agent)로서 (환상, 병마, 샤먼에 의해) 나타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어떤 존재가 인격을 갖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어떤 우주론적인 도그마 이상으로, 무엇보다 ‘인격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존재자를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데에 방해하는 것이 그 무엇도 없다면—즉 생사회(生社會)의 다양체라는 점에서—, 다른 인간집단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규범이다. 즉 완전히 기묘한 것인데, 아마존 사람들은 무릇 있을 법하지 않은 형식으로 숨은 인간을 본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있을법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으로 보인다거나, 같은 종족이나 때로는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항상 가까지 있는 이웃에 대해 인간성을 부정한다거나 하는, 잘 알려진 자민족중심주의를 수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조건에 관한 우주론적인 독아론을 감수해왔던 옛 유럽(확실히 종(種)들 간의 간주체성이라는 위로를 통해 완화되고 있다)을 과감하게 탈마술화하는 고려로 향하면 우리가 다루는 이국적인 민족은 두 개의 유치한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게 된다. 즉 동족 간에 종종 매우 유사한 작은 차이와 완전히 다른 종들 간에 보이는 큰 유사함이라는 두 개의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그 속에서 타자는 무엇에도 이를 수 없다. 자민족중심주의와 애니미즘은 과대하든 과소하든 극단적인 것이다.

 

인격의 조건(인간의 형식이란 보편적인 통각의 형식에 관한 것이다)은 아마도 우리 종과 다른 집단을 ‘거절하는’ 바로 그 때에 다른 종에게 ‘확장된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격이라는 개념—내재적인 잠세력의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선행하고, 논리적으로 그 상위에 있다. 인간성이란 동족이라는 입장에 관한 것이며, 집단의 재귀적인 모드에 관한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인간성은 포식자 혹은 먹이의 원초적인 입장과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퍼스펙티브의 타성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른 집단, 다른 인간적인 다양체를 휘감게 된다. 이 유사성과 동족성은 사회적으로 생산되며, 어떤 특정한 포식자의 차이라는 단호한 미결정성으로서 생성되고 그에 선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친족관계의 프로세스는 바로 이렇게 구성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착상을 주었던 것은 포식자의 내재적인 안정화로서의 ‘재생산’이며, 그 단호한 미완성이며, 베이트슨(혹은 발리사람)이 말한 것처럼 ‘강도(强度)가 지속하는 평면’을 상찬하는 방식이다. 카니발리즘을 다루는 다른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추산한 동일성이라는 발상을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의거해서 완전히 정식화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카니발리즘의 문제성은 … 습관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적인 삶이 정착하게 될 포식의 하한선이 어떻게 생성되는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 1984: 144; 1971: 617 참조)

 

이것은 바로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교훈을 응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유사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이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 불과하며, 그 속에서 차이는 제로로 향해간다”(레비-스트로스 1971: 32). 주지하다시피 ‘향해간다’는 동사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타자를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는 ‘무엇도 무효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그 개념의 힘을 완전히 개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극한까지 최소화될 때뿐이다. 예를 들어 쌍둥이 간의 차이가 그러하다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철학자들은 말한다(레비-스트로스 1991).

 

 

6.

 

실제 비인간이 한편으로 비가시의 얼굴 형태를 한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의 다양한 차원에서 근저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한 맥락, 즉 샤머니즘에서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 종들 간의 신체적인 장벽을 횡단하거나 이질적인 주체성의 퍼스펙티브를 자신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정하는 숙련된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이 자신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해내는 방식으로 샤먼이 그들[비인간적인 존재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낼 때, 샤먼은 종을 넘어선 대화에서 강력한 대화자의 역할을 확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서사를 말하기 위해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데, 그것은 속인(俗人)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접촉 혹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정치적 수완, 즉 일종의 외교를 요한다. 서양의 상대주의가 공적인 정치로서 다문화주의를 채용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먼적인 퍼스펙티브주의가 채용하는 것은 우주론적인 정치로서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어떤 인식의 모드를 함의한 행동의 모드이며, 혹은 오히려 인식의 어떤 특정한 이상(理想)이다. 그러한 이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양근대가 촉진한 객체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에 있다. 이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에게는 대상의 범주가 텔로스를 부여한다. 즉 인식하는 것은 ‘객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대상에 내재하는 것과 인식주체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힘이며, 그리고 그러함으로써 부당하게 혹은 피하기 어려운 대상에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인식한다는 것은 탈주체화하는 것이며, 주체의 일부를 이상적인 최소상태로 감축하기 위해 객체 속에 나타나는 주체의 일부를 명시하는 것이다(혹은 이목을 끄는 비판효과를 확보하기 위해 주체의 일부를 확대하는 것이다). 주체는 객체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객체화의 프로세스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는 자신이 만들어낸 객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하고 자신을 재인식한다. 그리고 주체는 ‘그것’이라고 하듯이 ‘외부로부터’ 자신을 생각해내는 데 성공할 때에 자신이 객체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추상적인 상태에 머문다. 타자의 형식은 사상(事象)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완전히 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린다. 즉 인식하는 것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려져야만 하는 것의 시점(視點)을 입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상(事象) 속의 누구’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없다면, ‘왜’라는 물음에 지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 타자의 형식은 인격이다. 유행의 어휘를 사용해서 표현하면, 인격화 내지는 샤머닉한 주체화란 정신에 관한 현대철학자(내지는 현대정신에 관한 철학자)의 표현을 빌면 ‘지향적인 태도’를 보편화하는 경향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주민은 일상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물리적’이고 ‘함수적’(Dennett 1978)인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이상(理想)의 인식론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의 완전한 객체적 표상에 이르기 위해 ‘주위의 지향성’을 영도(零度)로 감축하고자 하는 탐구를 저 멀리 하고, 완전히 그와 정반대에 거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인식은 시스템적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행위자(agent)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통해, 지향성이 최대화된 상태에서 번득임을 조준한다. 샤머니즘은 정치의 기술이라고 우리는 주창한다. 오히려 이제는 정치의 기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샤머니즘적인 기술은 진정 각각의 사건을 행위로서, 즉 상태 혹은 무엇인가의 행위주체의 지향적인 속성의 표출로서 보는 데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의 성공은 대상이나 노에마(noema)[각주:4]에 속할 수 있는 지향성의 질서와 정비례한다. 하나의 실체 내지는 하나의 사상의 상태는 주체화, 즉 그것들을 인식하는 인간과의 사회관계의 현실화로 지연되지 않는다. 그것은 샤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다—즉 인식의 잔류물, 정확한 인식을 거스르는 ‘비인격적 요인’이다. 반복할 것까지도 없지만, 우리의 객체주의적인 인식론은 반대의 의미=방향을 갖고 있다. 즉 우리의 인식론에서는 상식의 지향적인 태도를 편리한 허구로서, 표적으로 삼는 대상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요소를 물리적인 프로세스로 분해할 수 없을 때 채용하는 무언가로 생각한다. 모든 작용을 사건의 인과연쇄로 환원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으로 농밀한 상호작용(특히 원격 ‘작용’)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근대의 자연주의적인 세계에서 주체가 불충분하게 분석될 수밖에 없는 객체라고 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인식론적인 습관이 따르는 것은 그 반대의 원리이다. 즉 객체란 불충분하게 이해되지 않는 주체이다. 여기서는 인격화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기 위해서는 인격화해야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객체는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후자에서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식—하나의 정신의 형식, 인간의 얼굴을 한 동물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주체와 분명한 관계성을 가지든지—즉 행위자의 ‘가까이’ 존재하는 무언가(Gell 1998)로서 규정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두 선택지에서 비인간적인 행위주체가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식 하에서 지각한다는 이념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초인간적인 주체성의 세계에 있는 ‘문화’의 해석 속에서 다양한 사건이나 ‘자연’의 대상을 사회의 행위주체성이 이끌어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무언가의 변용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다만 야만적인 사실이지만,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기술의 산물이며 고도로 세련된 행위이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에게는 ‘맥주’이며, 우리가 진흙이라고 보는 것을 맥은 멋진 의례의 장으로 경험한다, 라는 경우가 그러하다. 인공물은 이러한 모호한 존재론을 구비한다. 그것은 객체이지만, 필연적으로 주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응고된 행위와 같은 것이며, 비물질적인 지향성이 물질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떤 것들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 타자에게는 ‘문화’이다.

 

이것이 선주민의 교훈이며, 인류학은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임시방편의 교환—문제가 된 어휘에 손대지 못하는 단순한 기호 변화—을 위해 소여나 구축된 것의 미분/차이적인 배치를 빼앗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온전한 차이’(Wagner 1981: 51)라는 것이 있다. 노골적인 초월성으로서 실천, 반인류학적인 순수한 타자성—구축될 수 없는 것, 정착하지 않는 것, 관습이나 담론에 반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세계와, 인간의 형식을 몸에 걸치는 것이 제일의적(第一義的)인, 내재적인 인간성의 세계와의 차이이다. 이러한 선주민의 세계의 의인화된 가설과 근본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소여가 아닌 것으로서 소여가 아닌 존재로서 인간을 ‘구축한다’는 집요한 인간중심주의적 노력이다. 그것은 가장 래디컬한 것까지 포함해서 서양의 철학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이국적인 민족의 나르시시즘의 천국(혹은 디즈니판 인류학)이라는 판타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인간을 전제로 삼는다는 것은 선주민의 세계를 가까이에 두는 것도 아니고 활기를 부여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해두어야겠다. 모든 것이 인간인 장소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자이다.

 

우리의 인류학이 꿈꾸는 더 많은 세계는 하늘 위와 땅 밑에 있다. 모든 차이는 정치적이며 모든 관계성은 사회적인 것처럼 이 다방향성을 우리 세계의 환상처럼 기술하는 것, 그 첫 번째 발명을 두 번째 습관으로 환원함으로써 이 둘을 통일하는 것, 그것은 양자 간의 관계성의 매우 단순한—그리고 정치적으로는 하찮은—형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용이함은 결국 모든 종류의 복잡함을 산출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론적인 일원론은 최종적으로는 인식론적인 이원론—에믹과 에틱, 은유적과 자의적, 의식과 무의식, 표상과 현실, 환상과 진리 등—을 비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이원론이 의심스러운 것은 모든 개념적 이분법이 원리적으로 유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특히 두 양상을 통일된 상태로서 각각의 주민 간에 하나의 변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분할은 단일자연주의적이다.

 

 

 

 

  1. ‘같음’을 의미하는 taut와 allegory를 합쳐서 만든 용어로 셸링(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이 신화해석에서 사용했다. 알레고리가 다른 주제를 유사에 의해 표현하는 반면, 토테고리는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다. [본문으로]
  2. 라블레(François Rabelais 1494?-1553?)는 프랑스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이야기 작가이다. ‘가르강튀아 이야기’ ‘팡타그뤼엘 이야기’를 발표하여 그 독특한 요설(饒舌)과 풍자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제자로서 온화한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서 본능과 자연에 입각한 낙천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역설했다. [본문으로]
  3. 맥(獏ㆍ貘)은 포유동물로 모양은 물소를 닮고 흑갈색이며, 남태평양ㆍ남미 등지의 밀림의 물가에 산다. [본문으로]
  4. 노에마는 후설의 현상학에서 지향적 객관 혹은 지향적 대상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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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의 마지막 장인 <13장 구조주의의 생성>의 번역본을 올린다. 한 번 더 손을 봐야하는데, 일단 올려두고 차차 고치겠다. 또 『식인의 형이상학』 독서평도 조만간 올리겠다.

 

이제야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의 재평가의 이론적 맥락을 어렴풋이 알겠다. 몇가지 세부적인 논점에 대해서는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아니 그보다 무엇보다 그것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는('안티 나르시스'로 언명되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닌가 한다. 이에 대해서도 독서평에 언급하겠다. (당장 써야할 다른 글들이 있어서.. 여하간 흥미진진한 지적탐구였다.)

 

이 글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다른 번역글들을 읽은 후에 읽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의 반 정도만 번역한 것이기에 이 글에서 이해안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특히 '강도(强度)'라는 개념이 걸리는데 '실천'과 관련된 개념이기도 해서 그 개념을 다룬 <11장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을 조만간 번역해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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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의 생성

 

 

1.

 

이 책에서는 구조주의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의 하나의 구조변용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로 인해—그것[구조주의]이 서양적인 로고스적 포이에시스의 특징적인 문제와 개념(같음과 다름, 연속과 이산,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자연과 문화 ……)에 침투되면서도 억제된 다의적인 운동을 갖추고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고 늘 왜곡과 수정을 포함하는 한에서는—변화된 결과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제기한 다음의 주장을 다시금 반복해둔다. 인류학이란 번역을 그 내적인 조건으로 삼으며, 스스로가 논한 담론에 의해 규정되는 담론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소쉬르의 언어학 혹은 톰프슨(D’Arcy Wentworth Thompson 1860~1948, 영국의 생물학자)의 형태학과 접촉함으로써 형성되었음을 고려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아메리카 선주민의 바로 가까이에 있었기에—필드에서도 도서관에서도—획득된, 생생하고 창조적인 경험의 산물임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테일러(Anne-Christine Taylor)의 말을 빌려 말하면 ‘구조주의의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기반’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측면이며 그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제기한 문제와 개념의 유효성이 ‘문화현상’—얼마만큼 광범위하든—에 한정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가 그 주사위를 흔들어 던지는[사고 그 자체가 움직이는] 순간이다. 즉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위대한 개념적 매개에 힘입어 그 자신의 ‘맥락’에서 불거진 것이며, 페르시아사람이든 브라질사람이든 무언가를 사고하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타자를 사고하게 만들었다. 타자를 사고하게 만드는 것은 무언가를 넘어서 그 건너편을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유산에 관한 재평가가 진행되는 가운데 오늘날 이목을 끄는 질문은 구조주의가 하나인가 다양한가, 혹은 레비-스트로스가 이용한 두 개의 대극적인 방법을 연속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단절적으로 이해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레비-스트로스 본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의 발상과 방법이 어떤 근본적인 통일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하는 해석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구조주의가 요청하는 이론적인 인격성과 그 자신이 분열하고 있었음—그러나 대립하지는 않았다—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이 이자(二者)는 영원히 등가에 놓일 수 없는 쌍생아이며, 문화적 영웅과 배신자, 중재하는 인물(신중하게 질서를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과 분단시키는 반인격(연속색채주의와 무질서의 달인이기도 하다)이다. 여기서 전혀 다른 두 개의 구조주의가 찾아지는데,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보여준 것처럼 그 둘은 항상 둘 이상의 어떤 것이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은 그 초기에 이미 나중에 스스로가 뒤집을 내용도 함께 적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구조인류학이 ‘어떤 방법…유체법(流體法)이 아닌 변용’(Lévi-strauss 1973/1960: 28)을 이용한다고 기술하고 있음을 살펴보자. 변용이라는 중요한 개념은 그 자체가 점진적으로 변환해간다는 마땅한 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범하게 말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전체를 통해 중요한 개념임이 분명하다. 그의 작업은 우선 구조의 개념을 넘어서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아날로지적인 방식으로 대수적(代數的)인 치환보다는 역학적인 유체법에 접근해간다. 이러한 개념의 변천은 그 자체가 연속색채적이며 적잖이 전위적이며 약간의 퇴행을 보여준다 해도 그 가고자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신화학』의 1권과 2권 사이에서의 일이다. 『꿀에서 재로』(신화학 2권)에서 다음의 흥미로운 각주는 아마도 이러한 변화의 가장 명시적인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에드먼드] 리치가 비난한 것은 …… [내가] 이항도식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변용이라는 개념을 톰프슨(D’Arcy Wentworth Thompson)에서 차용하여 쭉 이용해왔는데, 그 개념 자체가 완전히 아날로지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Lévi-strauss 1966: 4, n.1)

 

레비-스트로스는 이 생각을 20년 후에 다시 강조한다. 그에게 변용의 개념은 논리학이나 언어학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박물학자인 톰프슨 혹은 그 배후에 있는 괴테와 뒤러(Albrecht Dürer)에서 유래한다(Lévi-strauss et Éribon 1988: 158-9). 그 속에서 변용이란 논리학과 대수학에 속한 것이 아니라 감성론적 혹은 역학적인 조작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구조주의의 고전적인 국면에서 나타나는 중심적인 대립적 개념패러다임—{토테미즘, 신화, 비연속성} vs {공의, 의례, 연속성}—은 레비-스트로스가 조금 더 후년에 그려내는 것처럼—예를 들어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 보이는 유명한 신화와 의례의 대립에서 보이는 것처럼—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훨씬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명확한 분수령은 친족관계를 묘사하기에 적당한 유한의 대수(代數)와 신화의 강도의 형식 간에 존재한다.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문제는 대수와 치환군의 이론에 직접 관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화의 문제는 그것들을 객관화하는 감성적 형식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었다. 한편, 이 감성적 형식은 연속적인 것과 비연속적인 것에 동시에 속한다. (Lévi-strauss et Éribon 1988: 192)

 

여기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변용에 대한 구조주의의 관념에는 구조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의 이중의 변용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것은 단 하나의 복합적인 변용이며 그 속의 이중의 뒤틀림은 동시에 ‘역사적’이기도 하고 ‘구조적’이기도 한 조작에 의해 변용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새로운 수학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Petitot Thom). 그러나 나는 이 변화가 무엇보다도 그의 인류학의 특권적인 대상의 타입이 변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용은 초기에는 주로 대수-조합적인 도식에 기초했으나 이후 그것은 모습을 바꾸어 다른 위상으로 이행해간다. 그리고 뒤이어 처음의 모습과 비교하면 훨씬 토폴로지적이고 역학적인 특징을 갖춘 도식이 만들어진다. 통사론적인 교체와 의미론적인 창출, 논리적인 치환과 형태발생학적인 압축 간의 경계선은 더욱 비틀리고 이론(異論)이 많아지며 복잡한 것, 즉 프랙탈적인 것이 된다. 형식과 힘(변환과 흐름)의 대립은 그 윤곽을 잃고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되어 간다.

 

그렇다고 해서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주의의 방법론이 다룬 다양한 문제에 관한 고찰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변화를 특히 강조한다거나 그 변화에 구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레비-스트로스는 “내가 『친족의 기본구조』 이후 구상한 계획은 방법론적으로 연속한다”(1964: 17)라고 늘 강조했다. 연속성—구조주의의 어휘 속에 양의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연속성일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옳다. 그것은 자명하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사고를 해석자가 수정하려드는 것은 다소간 이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프랑스의 대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그 발상의 통일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건전한 구조주의자인 우리는 그의 작업을 독해하는 열쇠는 비연속성에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것은 명확한 단절을 주장하기보다는 구조적인 담론의 ‘상태’가 복잡한 공존과 강도적인 중첩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인 기획의 비연속성은 두 개의 고전적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계기성(繼起性)의 축이 있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다양한 국면에서 나타난다. 또 하나는 공존의 축이다. 이것은 작품이 두 개의 담론을 갖고 있다거나 두 개의 운동을 기술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이 두 비연속성은 작품의 계기가 이 두 개의 운동—작품 전체 속에서 대위법에 의해 대립하는 운동—각각이 부여하는 중요성에 의해 구별되는 한에서 공존한다.

 

 

2.

 

통시성에서 시작해보자. 이 관점에서 보면, 구조주의는 토테미즘과 같다. 즉 그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로 토테미즘처럼, 그 존재양식이 실체적이지 않고 차이적이다. 이 경우에서 『친족의 기본구조』(1967/1949)로 대표되는 전(前)-구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초기 위상과 『신화학』(1964-1971) 혹은 그에 뒤이은 『가면의 길』(1979), 『질투심 많은 여 도공』(1985년), 『살쾡이 이야기』(1991년)이라는 세 작품과 연관된 포스트구조조의적인 두 번째 위상 사이에 차이선이 그어진다는 것은 몇몇 해석자에 의해 종종 지적되어왔다.

 

나는 두 번째 위상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 위상 직전에 분명히 ‘구조주의적’인 작업이 행해진 짧은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토테미즘의 문제에 관한 두 연구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며, 저자 자신이 그것을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 간의 휴지기(비연속성)이라고 적어놓았다. 실제로 1962년의 바로 이 작품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달리 말해 인간적 기호과정의 구체적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를 질서지우는 광대하고 체계적인 기획을 행했다. 그리고 토테미즘을 원시적인 비이성의 상징으로까지 고양하여 모든 이성적인 활동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의 작업의 이 순간이야말로 들뢰즈&가타리의 악의적인 평가(1980: 289)가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즉 “구조주의는 위대한 혁명이며 거기서 세계전체는 더 이성적인 것이 되었다”.

 

들뢰즈가 [칸트적인] 비판철학에 겨눈 것과 동일한 이론(異論)을 『야생의 사고』에 겨누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다. 들뢰즈는 칸트적인 초월론적 영역이란 표상의 경험적 형식의 ‘전사(轉寫)’이며, 조건 그 자체에 조건지운 것을 회고적으로 투사함으로써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 야생의 사고는 길들여진 사고의 가장 이성화된 형식, 즉 과학(‘과학적 사고에는 두 개의 다른 양태가 있다’(Lévi-strauss 1962b: 24))으로 전사(轉寫)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반대로 길들여진 사고와는 전혀 유사하지 않은, 본래적인 야생의 사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어떤 수확고를 확보하기’ 위해 길들이는 것을 상기해보자(앞의 책 28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좀 더 화해적인 정신으로 생각해서 다음과 같이 어울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구조주의에서 세계가 더 이성적인 것이 될 때에는 반드시 이성은 다른 무언가…아마도 더 세계내적이고 좀 더 통속적으로 말하면 더 세속적인 무언가가 된다. 그렇지만 그 이성은 더 예술적이면서 공리주의적이지도 않고 채산주의적이지도 않다.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가 전(前)구조주의적인 책이라는 것은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후기 작업과의 대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것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하간 데이비드 슈나이더와 루이 뒤몽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이 1949년의 이 저작을, 인문과학을 구성하는 이항을 축으로 형성된 것으로 분류한 것은 정당하다. 즉 한편으로는 개인과 사회—사회적인 동화와 통합이라는 문제—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과 문화—본능과 제도라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홉스와 헤르더, 혹은 더 최근의 이름을 들자면, 뒤르켐과 보아스의 이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최초의 대작에서 논한 것은 무엇보다 ‘인류학적’인 문제, 즉 인간화의 문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문화적인 통합의 출현을 다룬다. 그 속에서 ‘집단’, 즉 사회가 초월론적인 주체와 분석되는 모든 현상의 최종원인으로 유지된다. 특히 파트리스 마니그리에((Patrice Maniglier 2005a)가 강조하듯이, 이 책의 마지막 장이 되면 돌연 모든 것이 우연 속으로 해소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특정한 타입의 배우자를 금지하거나 규정하는 다양한 규제, 그것들 모두를 집약하는 인세스트(근친상간) 금기는 사회성이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가정한 순간으로부터 이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회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Lévi-strauss 1967/1949: 561)

 

그리고 뒤이어 눈이 번쩍 뜨이는 결론이 전개된다. 사회성은 상징적인 사고와 공통의 외연을 갖지만 그것[상징적인 사고]에 앞서지도 않고 그것의 존재이유도 아니라는 것, 친족의 사회학이란 기호학(모든 교환은 기호의 교환이며, 즉 퍼스펙티브의 교환이다)의 하위구분의 하나라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질서는 모드 속에서 반질서의 영속적인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그는 이것들을 동시에 논한다. 이 마지막 주장의 화음은 여전히 울려 퍼지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적 기술의 제2의 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개시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친족의 사회학은 ‘반(反)-사회학’, 즉 세계적인 경제학에 장(場)을 양도하기 시작한다—바꿔 말하면 [세계적인 경제학은] 『신화학』에서 그려지는 아메리카선주민의 내재평면에 대신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학』에서 바로 음의 질서의 역전이 완료하기—혹은 거의 완료하기— 때문이다. 더 앞으로 나아갈 필연성[사회의 존재필연성]은 전혀 없다. 즉 모세와 대지가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사회라는 개념은 간(間)사회적인 서사의 변천에 시스테마틱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무용한 것이 된다. 자연/문화라는 대립은 선주민의 사고에 내재하는 신화의 주제가 되기 위한 (객체적이든 주체적이든) 보편적인 인류학의 조건이 아니다. 이 테마는, 그것을 사고하는 것은 양의적이지만, 일련의 신화이론의 전개 속에서 점차 증대한다. 그리고 ‘구조’라 불린 대수적인 형식의 대상은 점차 유동적인 윤곽을 그리게 되고, 이미 서술한 것과 같이 변용의 아날로지적인 사고로 변화해간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서사를 구성하는 관계성은 사회민족지적인 현실성을 갖춘 표상적인 경향, 공기적(共起的)인 비전, 차이의 분배로 성립되는 조합의 전체라기보다도 오히려 ‘접속과 이질성’, ‘다종다양성’, ‘비시니피앙의 절단’, ‘지도제작법’이라는 원리를 더욱 모범적으로 제시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것들을 ‘리좀’이라는 개념의 이름 하에서 구조의 모델과 대치시켰다—‘리좀’의 개념은 반-구조의 고유명으로 제기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슬로건이 되었다.

 

『신화학』이 제시한 방향성이란 실제로 일반화된 이질적인 횡단성이다. 그래서 한 민족의 신화는 그 다음의 두 번째 민족의 의례를 변용시키고, 나아가 세 번째 민족의 기술을 변용시킨다. 그리하여 한 민족의 사회조직은 다른 민족의 신체장식(정치적이면서 우주론(코스몰로지)과 화장(化粧 코스메톨로지) 사이를 왕복하는 방식)이다. 그 속에서 신화의 대지가 기하학적으로 둥글다는 사실은 지질학적인 다공성(多孔性)에 의해 항상 숏컷된다. 그 덕분에 변환은 해저의 마그마가 뿜어대는 것처럼 여기저기 분출하며 아메리카 대륙의 양단을 넘나들게 된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구조주의란 ‘사회 없는 사회학’이라고 말했다. 만약 이것이 정확하다면—클라스트르는 구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신화학』과 함께 우리는 구조 없는 구조주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클라스트르와는 반대로] 칭찬하고 싶다. 『날 것과 익힌 것』과 『살쾡이 이야기』 사이를 순회해보면, 연속하는 계열(série)로서 형성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화는 수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리좀을 작성한다. 즉 그것은 중심도 기원도 없는 거대한 캔퍼스이며, ‘하이퍼스페이스’(Lévi-strauss 1967: 84) 위에 배치된 담론의 태고로 거슬러가는 집합적으로 거대한 배열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기호의 흐름, 물질의 흐름, 사회적인 것의 흐름’(들뢰즈&가타리 1980: 33-34)에 의해 횡단된다. 리좀 모양(狀)의 네트워크에서는 다양한 구조화의 역선(力線)이 경주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제한 없는 다양성과 근원적인 역사적 우연성 탓에 하나의 법으로 환원할 수 없으며, 수목 모양(狀)의 구조에 의해 표상될 수도 없다. 무수한 구조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정신 속에 존재하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구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즉 신화의 기본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는 결국 열려진 다양체, n-1의 다양체이다. 혹은 기준신화 M1에 경의를 표하고, 오히려 <m-1>로 말해야 할까? 이 보로로족의 신화는 『날 것과 익힌 것』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데, 후에 (M7-12)로 등장하는 제족(Gê族) 신화의 반전적(反轉的)ㆍ소실적(消失的)인 비전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준신화란 임의의 신화이며, 모든 신화와 마찬가지로 ‘기준 없는’ 신화, 즉 m-1의 신화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화는 다른 신화의 하나의 비전이며 다른 신화는 모두 제3, 제4의 신화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n-1의 신화는 기원을 표현하지 않으며, 운명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기준을 가지지 않는다. 기원에 대한 담론인 신화는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회피된다. 기준 ‘신화’는 신화의 의미에, 즉 의미의 기능으로서의 신화에 자리를 양도한다. 즉 그것들은 하나의 코드를 다른 코드로 전환하며, 어떤 문제를 유사한 문제에 투영시키고 (라투르가 말했던 것처럼) ‘참조=기존의 순환’이 되어 애너그램(anagram, 단어의 철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로 만들기)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반(反)-실현시킨다.

 

이 책은 번역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개념을 처음으로 다룰 때에 그 총체적인 번역가능성을 중시했다. 즉 “신화를 이러한 담론의 모드로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번역자란 배신자라는 정식[이탈리아 속담]은 실상 제로에 가깝다”(Lévi-strauss 1958/1955: 232). 『벌거벗은 인간』에서 이 정의는 확장되어 의미론적인 평면에서 실천론적인 평면으로 유영한다. 우리는 다만 번역 가능한 것 이상을 [신화로부터] 배우지만, 신화는 무엇보다도 번역이다.

 

모든 신화는 본질적으로 번역이다. […] 신화는 하나의 언어 또는 하나의 문화나 하위문화 속에서가 아니라, 자언어와 타언어, 자문화와 타문화와의 결절점에 위치지어지는 존재이다. 고로 신화는 결코 자신의 언어에 속하지 않고 다른 언어에 대한 하나의 퍼스펙티브이다…… (Lévi-strauss 1971: 575-577)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에서 바흐친이 보이는 것이리라. 『천 개의 고원』의 두 저자[들뢰즈&가타리]는 이 논의를 매우 특징적인 방식으로 일반화시킨다. “만약 언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같은 언어를 말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야말로 존재한다. 언어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즉 번역이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 1980: 536).

 

『벌거벗은 인간』에서 보여준 이 신화의 퍼스펙티브적인 정의는 인류학 그 자체에, 즉 레비-스트로스가 이미 1954년에 ‘관찰된 것의 사회과학’으로서 제시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는 또한 『신화학』이 ‘신화학의 신화’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두 정의는 수렴된다. 구조주의적인 신화의 담론은 온갖 인류학의 모든 조건를 설정한다. 온갖 인류학은 인류학의 변용이며, 그 자체가 대상이다. 그것[온갖 인류학]은 모두 항상 ‘어떤 문화를 다른 문화의 분절점’에 위치짓는다. 하나의 신화에서 다른 신화로,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이동하려는 것은 신화에서 신화의 과학으로, 문화에서 문화의 과학으로 이동하려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나는 여기서 마니그리에(Maniglier 2000)의 근저에 있는 주장을 일반화한다). 횡단성과 대칭성이 문제이다. 이와 같이 『신화학』의 구상과 브루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탠저스(Isabelle Stengers)의 일반화된 대칭성 원리와의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련을 찾아낼 수 있다.

 

만약 신화가 번역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신화가 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번역은 표상이 아니라 변용이기 때문이다. “가면은 우선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변용하는 것이다. 즉 표상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Lévi-strauss 1979: 144). 『신화학』이 메타대상에, 바로 홀로그램적인 특징을 부여한다. 그것은 정말로 신화적인 리좀이며, 그것과 함께 리좀적인 것이 형성되며 각각의 신화 속에서 범아메리카적인 신화시스템의 축도(縮圖)(‘단 하나의’ 신화)를 포함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것은 확실히 구조가 변용의 시스템으로서 더욱더 엄밀하게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의 표상을 자기의 일부로 삼지 않고서는 표상될 수 없다”(Maniglier 2000: 238). 이렇게 우리는 구조를 ‘변용주의’로서 혹은 변용주의자적으로 개재념화할 수 있다. 그것은 [구조주의의 대표인 듯한] 프롭(prop)적인 형식주의와도 촘스키적인 변형주의와도 다르다.

 

따라서 한 구조는 항상 둘 사이에 있다. 즉 두 개의 변이 사이, 동일한 신화의 두 개의 시퀀스 사이, 혹은 동일한 텍스트 내부에 있는 두 개의 수준 사이에 있다…. 따라서 통일성이라는 것은 다양한 변이 속에서 자기동일적으로 반복하는 형식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하나의 것이 다른 것으로의 당연한 변용을 보여줄 수 있는 모형(母型)=매트릭스를 말한다. … 그리고 구조는 엄밀하게 그 현실화와 외연을 같게 만든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집요하게 무시되곤 하는, 구조주의와 형식주의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Maniglier 2000: 234-235)

 

구조 없는 구조주의인가? 적어도 구조와는 다른 관념에 의해 작동하는 구조주의. 그것은 구조라기보다도 구조에 대한 대립개념인 『천 개의 고원』의 리좀에 더 가까운 개념일 것이다. 이렇게 구조와는 다른 개념을 레비-스트로스의 저작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혹은 아마도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에는 구조라는 개념에 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사용법이 있다고 말해야 하겠다. 그 하나는 통일적인 초월론적 원리이며, 불변적이고 형식적인 법칙이다. 또 하나는 발산의 조작자, 연속적인 변이의 변조기(변이의 변이)이다. 그것들은 닫힌 문법적인 조합으로서의 구조와 열린 미분적 다양성으로서의 구조이다.

 

『신화학』 시리즈의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모티브를 빌려 그 속의 ‘열린 것과 닫힌 것과의 분석적인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자세히 검토하는 것이 여기서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서 자연과 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문제의 하나의 비전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가 신화에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열린 것과 닫힌 것과의 변증법은 인류학의 메타신화학의 평면상에서도 기능하지 않을까라고 역으로 반론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신화학』이 ‘신화학의 신화’라면 그것은 그 자체가 그 구조변용인 것처럼 신화 속에서 전개하는 테마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 변용은 내용에서 형식으로, 또 그 반대로 이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분석한 신화가 ‘닫힌 그룹’을 형성한다는 것에 종종 주의를 기울이고자 했다. 닫혀 있다는 이념은 종종 구조분석과 불가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항상 ‘그룹은 닫혀있다’는 것, 즉 신화의 연쇄의 최후의 변용을 다루어가면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룹’은 다양한 축을 둘러싸고 닫혀 있다. 이러한 강조는 신화의 언어가 반드시 장황하다는 테마, 즉 신화의 ‘문법’을 설정한다는 조건과 결부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그러한 기획을 기꺼이 상상했던 것 같다. 그가 ‘열린 작품’이라는 관념에 매우 반발했음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닫힌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는 결국 닫힌 구조의 수는 이론적으로 무한하다는, 즉 열린 상태가 펼쳐진다는 일견 역설적인 인상을 준다. 구조는 닫혀있다. 그러나 구조의 수 그리고 구조를 가두는 길은 열려 있다. 즉 구조적인 전체화의 마지막 레벨이라는 의미에서, 또 구조에서 이동하는 의미론적 축의 아포리아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 구조의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신화 ‘그룹’은 결국 다른 그룹의 수많은 교차점에서 다시금 발견된다. 그리고 각각의 그룹에서 각각의 ‘신화’는 또한 상호연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아가 각각의 신화에서는…. 그룹은 스스로 닫힌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분석은 닫힌 채로 있을 수 없다.

 

어떤 신화도 닫혀 있음을 금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이 분석의 한가운데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석 속에 흔적을 남긴 영역의 외부로 어쩔 수 없이 내디뎌야 한다. (Lévi-strauss 1971: 538)

 

나아가 특히 닫힌 명법에 부여된 중요성은 저작의 다양한 부분에서 분명하게 상대화되어 있다. 그 구절들은 반대의 의미에서 분석의 무제한, 변용의 나선모양의 진행, 동적인 불균형, 비대칭성, 구조의 측면적인 상호접수, 이야기가 전개되는 수준의 복수성, 보족적인 영역들, 신화를 질서지우기 위해 필요한 축의 복수성과 다양성, 이것들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불균형에 다름 아니다.

 

불균형은 항상 주어진다. (Lévi-strauss 1966: 222)

 

각각의 구조는 다른 구조로부터 분리됨으로써 그 불균형을 은폐한다. 그런데 그것[구조]은 인접한 다른 구조로부터 차용한 항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벌충할 수 없다. (Lévi-strauss 1967: 294)

 

불균형을 넘어서기 위해 구조가 변화 혹은 강화될 때조차 다른 평면상에 나타날 때에는 새로운 불균형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구조는 피하고 싶은 비대칭성에 신화를 찾아내는 능력을 부담한다. 신화를 찾아내는 것은 신화를 구성하는 불균형을 만회하면서도 숨기는 노력 그 자체이다. (같은 책 406)

 

남아메리카에서와 같이 동적인 불균형은 바로 그 때문에 일군의 변용이 한창 진행될 때 나타난다. (1971: 89)

 

그런데 이러한 불균형은 신화의 변용가능성과 번역가능성에 부응하는 신화학의 형식적인 특성인 것만은 아니다. 바로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것은 그 내용의 근본적인 요소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신화는 자신 속에서 사고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러한 불균형을 횡단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한다는 것은 불균형 그 자체이며, ‘세계의 존재’(1971: 539)의 불일치성 그 자체이다. 신화는 그 자신의 신화학, 혹은 ‘내재적’인 이론(1964: 20)을 포함한다. 그 이론은 다음과 같다.

 

…원시적인 비대칭성은 그것을 파악하는 시점(視點)에 의해 높음과 낮음,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가까움과 멈, 왼쪽과 오른쪽, 수컷과 암컷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재적인 것에 고유한 이 불균형에 의해 신화적인 사변=투기는 개시된다. 왜냐하면 이도저도 인간의 사고대상의 모든 존재는 그러한 사고를 앞에 두고 이 불균형으로 조건 지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책 1971: 539)

 

 

3.

 

영속적인 불균형이 신화를 횡단한다. 그리고 모든 구조주의에 반향하는 신화학의 신화가 나타난다. 우리는 닫힌 문법의 조합으로서의 구조의 관념과 열린 미분적 다양체로서의 구조의 관념 간의 이 이원성이 그의 만년의 저작에서도 마찬가지로 출현한다는 것을 이미 검토했다. 실제로 이 이원성은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저작을 횡단한다. 그것은 변화해가는 개념—그 처음은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중요하고 그 다음은 『신화학』에서 두드러진다—의 각각을 상대적으로 지지한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 보자. 혹은 이 통시적인 행적을, 이미 논한 공시적인 비연속성과 결부시켜보자. 아주 초기부터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에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하위의 텍스트 혹은 반(反)-텍스트가 숨겨져 있는데,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최후의 전(前)구조주의자가 아니라면—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최초의 포스트구조주의자도 아니다). (고전적인 토테미즘의 도식과 같이) 대칭적인 대립, 동등성, 이원성, 비연속과 가역성을 구조주의가 특히 편애한다는 상정은 무엇보다 오늘날에도 놀라우리만치 수준 높은 1956년의 논문에서 행한 쌍분조직의 개념에 대한 비판에 의해 전복된다. 그 속에서 이항대립, 대칭성, 비연속의 이전 상태로서 삼항, 비대칭성, 그리고 연속성이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신화의 기본정식’에 의해서도—그것은 고전적이기도 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전복된다. 대칭성과 가역성을 제외하면 탐구될만한 것은 모두 찾을 수 있다.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의 두 국면(『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와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신화에서 생겨나는 변용을 설명하는 외연적 이론의 어휘의 한정에 유보적이었다는 점에도 착목해야 한다(Lévi-strauss 1971: 567-568; 1991: 249).

 

특히 『신화학』의 마지막 두 권이 안정적이지 않은 이원론을 상기시키는 두 형상의 전개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질투심 많은 여 도공』(1985년)에서 신화의 기본정식을 충분히 예시하고 있지만,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사회학적인 이원성의 동적 불균형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그 속의 ‘영속적인 불균형’이라는 표현은 투피족의 숙부와 조카의 결혼을 기술하기 위해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최초의 직감과 동일한 것(굳이 말하자면 같은 잠재적 구조)으로 행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A:B::C:D라는 타입의 토템적인 아날로지를 사전에 붕괴해버리는 기본정식과, 이항대립의 정적인 균형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동적인 이원론은 두 개의 특권적인 표현(혹은 현실화)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 한편은 다른 편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어슴푸레하고 푸르스름하거나 보이지 않는 달’이며, 또 다른 한편에서 구조를 지지하는 것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더 유동적이며 파장상태로 진동하고 다층구조적이며 구조주의에 이른바 하위양자(量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하간 인류학자는 항상 유대의 이론—관계성이라고 해도 좋다—을 실천한다.

 

우선 기본정식이 있다. 그것은 수학적인 도착의 일그러진 기념비(monument)이다. 기본정식을 사용하면 우리는 토템적인 은유와 공의적인 환유와의 단순한 대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단숨에 은유의 관계와 환유의 관계가 등가라는 입장에 놓인다. 거기에는 은유에서 환유로, 혹은 그 반대로 항상 뒤틀림이 생긴다(Lévi-strauss 1966: 211). ‘이중의 뒤틀림’, ‘정원 외의 수의 뒤틀림’은 실제로는 순연한 (오히려 하이브리디티하고 복잡한) 구조변용과 완전히 똑같다. “불균형한 관계…… [그것은] 신화의 변천에 고유한 특성이다”(Lévi-strauss 1984: 13). 자의적인 의미와 비유적인 의미, 어휘와 기능, 외관과 내용, 연속성과 비연속성, 시스템과 그 외부, 이것들의 비대칭적인 변환—여기에서는 레비-스트로스적인 신화분석의 모든 것을 관통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주제가 엿보인다(2001). 앞서의 몇몇 곳에서(10장) 논한 들뢰즈의 생성의 개념에 대해, 만약 그것이 고전적인 구조주의의 개념의 장치에 반해서(즉 횡단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를 알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야 ‘신화의 기본정식’이 근사치의 번역이라는 것—그것은 외국어의 기묘한 악센트와 왜곡을 행하면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적인 담론의 거의 모든 차원으로 침투한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혹은 오히려 들뢰즈가 생성이라고 부른 이 순간적인 운동일반을 앞서 예감시킨 것임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생성이란 이중의 뒤틀림이다.

 

이어서 『살쾡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동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는 이원론’ 혹은 ‘영속적인 불균형[에 있는 이원론]’을 통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가 정말로 사변=투기적인 계기에 접근해간다는 개념적인 운동을 살펴보자. 레비-스트로스는 실제로 형식으로서의 불균형이 어떻게 해서 신화적 담론의 내용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바꿔 말하면 조건이었던 불균형이 어떻게 해서 주제로서의 불균형이 되는지, 또 무의식의 도식이 어떻게 해서 ‘깊은 착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 신화의 깊은 착상은 무엇일까? […] 이것들의 신화는 이항적인 계열의 형식을 취해서 세계의 전진적인 조직화를 표상한다. 그러나 각각의 단계를 만들어내는 부분 사이[의 대립]가 없다면, 참된 등가성이 출현하지 않는 […] 시스템의 우수한 기능은 동적인 불균형에 의거하며, 그것이 없다면 시스템은 항상 움직임 없는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 신화가 침묵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연현상과 사회생활이 배치되는 두 극에 관해서가 아니다. 즉 하늘과 대지, 불과 물, 위와 아래, 가까움과 멈, 선주민과 비선주민, 동향인과 이방인 등은 쌍생아가 아니다. 정신은 그것들을 연결지으려고 하지만, 그것들 간에 균형을 맞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사고가 구상하는 것처럼 연속적이고 미분적인 거리야말로 세계의 기계를 흔들어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Lévi-strauss 1991: 90-91)

 

신화는 신화들 사이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그 자신으로서 사고하다[스스로를 사고한다]. 그것은 어떤 운동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만약 그것이 ‘반성=굴절’한다면, 즉 스스로를 변용시킨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불균형으로 향해 반성-굴절하는 것에서 피해갈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의 최후의 위대한 분석이 다루는 이 불완전한 이원성은 ‘모든 시스템의 열쇠’가 되는 쌍둥이이며 자기발동적인 비대칭성의, 완성된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살쾡이 이야기』에서 동적인 불균형으로부터 구조주의에 관련된 참된 이원성이란 자연과 문화의 변증법적인 투쟁이 아니라 고르지 않은 쌍둥이 사이의 강도적이며 끝없는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의 쌍둥이는 열쇠이며 암호=숫자이며 신화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학의 합(合)언어이다. 암호=숫자, 그것은 두 원리의 근본적인 불일치성, 차이의 내적한계로서의 대립, 다수성 속에 있는 개별의 사례로서의 둘이다.

 

마니그리에는 구조주의적인 기획의 두 가지 주요한 국면 사이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첫 번째 계기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이행한다는 문제와, 그 두 가지의 질서의 비연속성을 깊이 탐구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로서는 그러한 탐구야말로 유일하게 자연인류학에 대한 사회인류학의 특이성을 보증한다. 두 번째 계기는 인간의 별도의 영역에서 구성되는 것을 집요하게 고발함으로써 특징지어진다. (Maniglier 2000: 7)

 

실제로 『친족의 기본구조』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이 책에서 앞서 언급했다시피, 저자는 절대적인 행복을 ‘사회적인 인간에게는 영구히 거절되는 것이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극히 프로이트적인 언명을 이전에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다른 문장과 비교해보자. 거기서 저자는 신화를 ‘인간과 동물이 다른 존재이지 않았던 시대의 이야기=역사’라고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다른 종과의 커뮤니케이션의 결여에 결코 체념하지 않고 마주했음을 덧붙인다. 그런데 모든 종(種) 간의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간종적(間種的)인 연속성)이라는 이 노스탤지어는 사후(死後)의 인세스트(근친상간)에 응한 ‘자기들 사이’의 삶(간종적인 비연속성)이라는 노르탤지어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즉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적인 반(反)-담론으로 생각한 사태의 강조점과 의미가 변한 것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구조주의적 인류학의 제2의 담론의 수준이 출현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 포함된 불협화음, 혹은 ‘두 구조주의’ 간의 창조적인 긴장은 『신화학』 속에 특히 복잡한 방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우리는 훨씬 앞부분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연속성과 비연속 간의 신화의 변증법을 통해 『친족의 기본구조』의 친족의 대수학—그것은 이산적인 측에 있는데—에 이의(異議)를 제기했음을 보았다. 이 차이는 단지 형식적인 것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섞여서 나타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의 감성론적인 형식일 뿐만 아니라 그 철학적인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제한 후에 어떻게 참된 구조주의자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즉 『신화학』은 저자가 『주어진 말』(1984)에서 소극적으로 기술한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에 대한 신화적 표상의 연구’의 중심적인 기획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마니그리에가 지적한 것처럼, 바로 『신화학』을 집필하면서 이 저자는 자연과 문화의 근원적인 대립의 타당성에 이의(異議)를 주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로 레비-스트로스가 서양의 숙명적인 결함이라고 진단한 정신적 착란을 선주민에게 이행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실제로 『신화학』은 자연과 문화 간의 순수하고 일의적인 이행을 그려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레비-스트로스가 거기서 스스로에게 과제로 부여한 것은 횡단적인 회로, 좁은 길, 막다른 어두운 길, 두 방향으로 동시에 흐르는 강 등 구부러진 미로의 지도를 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부작의 최초의 1권의 전반부 이래로 어떤 의미에서 자연에서 문화로 향하는 일방통행을 그리려했던 것이 아니다. 이후 하나의 시리즈로 모이는 7권의 책들이 그려내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모호함의 신화학’(『꿀에서 재로』(신화학 2권), ‘흐름의 신화학’(『식사법의 기원』신화학 3권), 문화에서 자연으로 퇴행하는 길 혹은 역행하는 행적, 이 두 질서 간의 상호 침투하는 영역, 짧은 휴지기, 짧은 주기성, 랩소디의 반복, 아날로지에 기초한 모델, 연속하는 왜곡, 영속적인 불균형, 준-삼항의 이중화하는 이원론, 그리고 변환을 횡단하는 다수의 축에 의해 상정외의 방식으로 분기하는 이원성…. 꿀과 성적인 매력, 연속색채주의와 독물, 달과 양성구유, 부산함과 악취, 일식(日食)과 클라인의 항아리, 가까이 보면 무수하게 복잡한 프랙탈인 코흐곡선에 변형하는 요리의 삼각형…. 신화학이 기능적으로 사고하며 노르탤지어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의 내용은 신화 그 자체가 산출되는 추진력을 부정함으로써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으로는 어떤 연속체에서는 부정이 사고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가 어떤 측면과 그 이면, 전진하거나 퇴행하는 방향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것이야말로 구조주의적인 담론의 두 방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역도 참이다).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 보이는, 신화와 의례 간의 논쟁적인 구별은 결국 신화 그 자체의 메시지를 내면화하는 재귀적인 운동으로서 나타난다. 즉 『살쾡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투피족의 위대한 신화는, 모든 의례의 본질(물론 의례이고 신화는 아니다)과 동일한 궤적을 그려내는데, 그에 따라 정의되는 것은 감퇴하는 경향에 놓인 대립의 점차적인 연쇄이며, 현실의 최종적인 비대칭성을 파악하기 위한 ‘절망적인’ 노력에 의한 징후 없는 수렴이다. 마치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로서 이론(異論) 없이 기능하는 신화만이 ‘신화론의 신화’, 즉 『신화학』인 것처럼. 그렇지 않을까? 이것은 분명 다시 한 번 다뤄야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벌거벗은 인간』의 마지막 문장에 주목해보자. 그것은 하늘과 불을 획득하는 북아메리카 신화와 연관된 것인데, (불을 획득하기 위해) 화살로 만든 사다리를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부수어 하늘과 땅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날 것과 익힌 것』을 시작할 때는 원초적인 연속성을 감소시키고 이산시키는 이론을 강조했음을 상기해보자. 그러나 반복컨대 그제야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결론짓는다.

 

따라서 이 불가역적인 매개행위가 다음과 같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자연의 영역에서 양적인 빈곤화—시간적으로는 인간의 삶이 넘쳐난 [유한한] 기간, 공간적으로는 하늘에서 펼쳐진 비참한 모험 후에 동물종의 수가 감소한 것이 그 대가이다. 그리고 또 질적인 빈곤화라는 대가도 있다. 딱따구리가 불을 획득하기 위해 그 붉은 깃털의 아름다운 장식의 대부분을 잃게 되면서(M729) 반대로 개똥지빠귀가 붉은 앞가슴을 획득한다 해도, 그것은 불을 획득할 때 자신의 실패에 기원한 해부학적인 상해를 받은 것이다. 따라서 인류학의 문화로의 이행이란 원초의 조화의 파괴에 의해 혹은 그렇게 변질을 일으키는 미분적인 거리의 도입에 의해 자연의 평면에서 자연을 연속적인 것에서 비연속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 일종의 열화(劣化)를 수반한다. (Lévi-strauss 1971: 448)

 

『신화학』의 단순함 속에서 방향을 놓치기 쉬운 통로의 하나가 여기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돌연 극히 중요해진다. 이때 구조주의의 두 담론 간의 모호함, 즉 『친족의 기본구조』의 빛나는 인간화라는 담론과 인간성의 자진분리를 고발하는 담론 간의 모호함은 분석적인 방법에 의해 ‘내면화되며’ 그 신화의 내재적 반성=굴절 속에 놓인다. 두 이야기=역사를 말하는 것이 신화이며, 그 속에서는 퇴행적인 행적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 적어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의 기원이란 가치저하적인 것일까? 이때 퇴행적인 행적이란 재생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 것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일까? 더 비참한 것일까? 왜냐하면 레비-스트로스에서 연속성에 대한 노스텔지어는 단순한 환상이나 제멋대로의 상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비연속성을 제약할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병의 징후로 보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지구규모로 다시금 열기를 띠는 것, 차가운 역사의 종말, 그것은 자연의 종말이기도 하다.

 

여하간 레비-스트로스가 몇 번이나 강조한 것처럼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에 어떤 측면과 그 이면, (토테미즘적인) 전진하는 방향과 (공의적인) 퇴행하는 방향—그것들은 구조주의적인 담론 그 자체의 두 방향이다—이 포함되어 있다면, 아마존의 샤머니즘과 퍼스펙티브주의는 분명히 그 이면, 즉 퇴행하는 방향의 세계에 속한다. 요리의 불의 기원에 관한 복잡한 문명화 과정은 이 도식을 전제한다는 것을 상기해두자. 즉 하늘과 땅의 이접적(離接的 disjunction) 연결, 계절의 주기성의 창출, 자연종의 차이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브주의자인 샤머니즘은 이와는 반대로 퇴행적인 원리에서 작동한다. 천지의 해질녘의 연속색채성(샤머닉한 여행)이라는 원리, 모든 존재가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기저를 가지고 있다는 원리, ‘초자연’의 영역을 정의하면서 자연과 문화 간의 구별을 근본적으로 교란시키는 환각제(담배)의 테크놀로지의 원리, 즉 문화로서 사고되는 자연의 원리이다—초자연. 이 개념은 구조주의적인 방법의 반(反)샤르트르적으로 빈정거리는 정의(Lévi-strauss 1962b: 9장)임을 상기해두자. 이 방법은 정말로 신화에 의해 더욱 건전하게 실천된다. 그것은 방법이라는 신화에 저항한, 신화라는 방법이다.

 

 

4.

 

이 책에서는 결국 신체에 대한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의 작업의 만년의 위상은 인간정신의 통일성과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체의 다양성과의 긴밀한 투쟁의 무대에 놓인다. 『날 것과 익힌 것』의 서장에서 그는 무엇보다 정신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나 점차 신체가 투쟁을 지배하기 시작하여 이후로는 명확하게 우위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분명하게 강조된다. 작은 굴절이 우위에 놓인다. 인간정신의 심리학은 선주민의 신체의 반(反)-사회학에 그 장소를 양도한 것이다.

 

이렇게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신화학의 행적의 종반에서 그가 자신의 야심을 더욱 온건한 범위에 머물렀다는 인상을 준 바로 그 순간에 그의 이론적인 기획 속에서 가장 고도의 숙명으로 불리는 것이 현실로 드러난다. 그것은 타자의 사고를 그 자신의 말로 되돌리고 그러한 ‘타자로의 열림’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학이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를 통해 발견한 태도이며 그 자체가 자신이 연구한 타자를 특징짓는다. 인류학은 그 이전에는 타자를 자신의 껍질 속에 가두는 자민족중심주의자임을 상상함으로써 기쁨을 찾아내었다. 『살쾡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보이는 당혹스러운 메시지란 타자의 타자는 그 또한 타자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장소는 이미 타자성에 의해 규정된다. 더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인류학 자신이 취한 입장은 바로 야생의 사고, 즉 자신의 대상과 공통하는 내재평면의 흔적과 공재적(共在的) 수준에 있다는 원리를 설정하는 것이다. 『신화학』을 신화학의 신화로서 정의하고 인류학적인 지(知)를 선주민의 실천의 변환으로서 정의하면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투영하는 것은 올 수밖에 없는 철학, 즉 안티 나르시스이다.

 

 

5.

 

1960년대에 우세를 점한 결혼의 결연조직에 대한 구조주의적 이론은 20세기 최후의 사반세기가 되어 점차 많은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앞장서서 강력하게 효과적인 문체로 사회체의 ‘교환주의’라는 개념전반을 완고하게 거부했고, 이러한 [구조주의적 이론의] 전락을 이끌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태도가 『천의 고원』을 견인했다는 데에 재론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질문한 사항은 근본적으로 변했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는 행위의 일반적인 모델로서 생산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교환은 경시된다. 그리고 순환(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모스적인 의미에서의 일방적인 교환에 비긴다)은 그 속에서 각인보다 하위의 위상에 놓인다. 『천의 고원』에서는,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생산을 다른 비표상적인 관계, 즉 생성에 그 장소를 양도한다. 만약 생산이 출자에 관련한다면 생성은 결연과 친화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생산에서 생성으로 이행할 때에 반(反)-교환주의의 입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대체로 때마침 잊혀졌지만,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은 마르크스주의의 개념과 엄밀하게 동일하지 않다. 들뢰즈&가타리의 ‘욕망하는 생산’은 부족과 충족이라는 사고방식이 우위에 있는 헤겔-마르크스주의적인 ‘필요성의 생산’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들뢰즈&가타리 1972: 33 et s.). 이 차이는 몇 번이나 강조되었다. 즉 “우리의 문제는 마르크스로 돌아가서는 결코 안되었다. 문제는 망각이며, 그곳에는 마르크스의 망각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망각에는 잔존하는 작은 파편이 부상한다…”(들뢰즈 1973).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절단이라는 시스템이 일반화된 순환의 프로세스와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도 덧붙여놓겠다. 이 점에 대해 리오타르는 조금은 악의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1977: 15). “이러한 자본의 배치, 흐름의 순환은 순환이라는 시점(視點)이 생산이라는 시점(視點)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에 의해 필요하게 된다…”.

 

생산의 유한주의적(혹은 무한적인 대화로서 유한적인 것일 수도 있는) 그리고 필요주의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인류학의 영역에서 현재 유통되는 생각이다. ‘교환주의’의 입장이 일반적으로 인류학에서 비판되는 것은 이 이름 하에서 혹은 이 이름을 띠는 사태—지배, 허위의식, 이데올로기—에서이다. 그러나 만약 경제학이 필요로 하는 생산과 기계상(狀)의 경제의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 생산-노동과 생산-기능 사이에 이러한 구별을 설정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 필요하다면, 그것과의 아날로지에서 결연-구조와 결연-생성변화, 교환-계약과 교환-변화 사이에 구별을 설정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관심을 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우주론에서 강도적인 결연과, 구조주의를 포함한 친족의 고전적인 이론의 외연적인 결연과의 모호한 동음이의성에서 이러한 구별을 의도적으로 설정함으로써, 결연의 계약주의자적인 개념을 분리해낼 수 있다. 당연히 이 두 사례에서 동음이의적인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그것이 재생산이라기보다는 괴물적인 것이라고 해도 이 상호 엮여있는 대립적 개념 간에 어떤 출자(出自)가 주어진다.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생산이란 가령 생산개념을 전복시킨다 해도 경제학의 생산개념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마존에서 잠세적인 결연이 레비-스트로스의 작업 속에 침투되었고 역광 속에서 (이른바 잠재적으로) 나타난다. 그 안티ㆍ오이디푸스적이고, 따라서 자기전복적인 잠세력은 충분히 해방되어야 한다.

 

결국 문제는 비계약주의적이고 비변증법적인 교환의 개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이익도, 증여의 아포리아적인 총합도, 무의식의 목적론도, 시니피앙의 움직임도, 포함적인 합치도, 타자의 욕망의 욕망도, 계약도, 저항도 아닌 교환개념이며, 오히려 타자로의 생성이라는 방식으로서의 교환개념이다. 결연이란 친족의 고유한, 타자로의 생성이다.

 

결연의 기계적이고 리좀적인 잠재성이란 결국 출자의 유기체적이고 수목형의 수직성보다는 들뢰즈의 철학에 더욱 가깝다. 따라서 극복해야 하는 것은 결연을 출자의 거동으로부터 해방하고 그것과는 반대로 출자에 의한 결연의 조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연의 ‘괴물적’인 힘, 즉 창조적인 힘은 해방된다. 결연의 쌍생아의 개념, 즉 교환의 개념에 대해 말하면 오늘날 하나는 분명하다. 즉 교환의 개념은 통설에 반해서 결코 생산을 다른 것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인류학에서 교환은 항상 생산 하에서 드러나는 형식으로서 다루어져 왔다. 즉 사회성의 생산이다. 고로 문제는 교환과 호혜성이라는 위선적인 위장으로 은폐된 생산의 벌거벗은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개념을 (反-)자연적인 요소, 생성의 요소로 되돌려놓으면서 출자적이고 주체적인 생산기계 속에서 그 양의적인 기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교환 혹은 퍼스펙티브의 무한한 순환—교환의 교환, 변신의 변신, 시점의 시점, 이것들이 곧 생성이다.

이중의 운동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괴물적인 결연에 입각한, 자연에 저항한 혼인이라는 이중의 유산으로 향한다. 즉 들뢰즈와 함께 하는 레비-스트로스이다. 그 고유명은 강도(强度)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강도에 의해서만 찾아지는 것, 우리가 그곳에 강도를 남겨두었던 잠재적인 유보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안티 나르시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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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앙리 위베르와 마르셀 모스의 '희생'에 관한 논의를 접수해야 하는데, 한국어번역본으로 출간된 마르셀 모스의 저작은 『증여론』뿐이라 한국어로 그 논의를 접할 수가 없다. 영어번역본으로는 『Sacrifice: its nature and function』을 참조할 수 있다.

 

모스의 '희생'에 관한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먼저 모스의 '증여론'에서 '증여'는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로서 사회적인 관계를 순환한다. 그 순환의 힘은 '마나(mana)', 즉 혼에 의한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마나'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희생제의('공의')를 통한 신과 인간 간의 '증여'에서 나온다. 앞서의 번역글인 「포식의 형이상학」에서도 잠깐 언급되다시피, 아마존의 카니발리즘 또한 이제까지 이 도식으로 설명되어왔다. 아마존의 식인행위는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게 인간을 바치는 의례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식인행위를 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 개념화하고 모스식의 '증여'의 원천으로서 희생제의의 초월성을 전쟁과 카니발리즘의 내재성으로 반박한다. 다음의 글 또한 그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수직적인 샤머니즘과 수평적인 샤머니즘의 대조는 모스식의 초월성과 비베이로스의 내재성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자신의 주장의 철학적인 토대로서 들뢰즈&가타리를 삼는 한편, 인류학적 토대로서 피에르 클라스트르를 적극적으로 포섭한다(들뢰즈&가타리가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특히 11장)를 참조하면 카스트로의 정치인류학적 논의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우에서 덧붙여 설명하자면, 인류학적으로 '수평성'은 '평등성'을 뜻하고 '수직성'은 '위계성'을 뜻한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가 버마의 카친족을 연구하면서 '굼사/굼라오' 체계를 정식화한 이래로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굼라오는 카친족 내의 여러 부족의 평등한 상태일 때의 친족·정치 체계를 가리킨다. 계곡 깊은 곳에 자리한 카친족은 화전을 주요생계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그곳의 생산성은 기후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뭄이 계속되어 생산량이 낮은 해에는 각 부족들은 각자도생으로, 즉 관계하지 않는 평등상태에 돌입한다. 반면 적정의 강우량으로 생산량이 높은 해에는 각 부족들은 서로 적극적으로 관계하면서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 상태의 체계가 굼사이다. 우리가 보통 예상하기로는 평화는 평등과 관련되지만, 카친족 사회에서 평화는 위계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때 실현된다. 각 부족들 간의 위계가 깨지는 순간, 즉 평등한 상태로 진입하는 순간 평화 또한 깨진다.

이러한 굼사/굼라오의 도식을 수직적인 샤머니즘과 수평적인 샤머니즘에 적용해서 이해해볼 수 있을텐데,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하고 퍼스펙티브적인 코스모폴리탄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그 점을 유의하기 위해 마지막에 내재성과 평등성을 혼동하지 말기를 당부한 것이다.

 

앞서의 번역글과 마찬가지로 글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소절을 나누었다.

 

이제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번역하기로 한 장들 중에서 마지막 장인 '구조주의의 생성'만이 남았다. 이 장은 조금 기일을 두고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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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하는 샤머니즘

 

 

1.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론을 소묘하면서 언급했던 샤머니즘의 문제를 다시 다루어보겠다. 아마존의 샤먼들은 다른 종(種)을, 그들이 자신을 마음속에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인간과 마찬가지로—보기 때문에, 자연사회의 다양한 이해가 대립하는 아레나[고대 로마의 원형 투기장]에서 코스모폴리탄적인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의미에서 샤먼의 기능은 전사(戰士)의 기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퍼스펙티브의 변환기(變換機)이자 조작계(操作係)이다. 전자[샤먼]는 종 사이에서 기능하고, 후자[전사]는 인간 동료들 사이에서 내지는 사회들 사이에서 기능한다. 그들의 영역은 외연적으로 수평적인 인접관계 혹은 수직적인 포괄관계로 배열된다기보다 그보다 훨씬 강도적으로 중첩된다. 종종 지적되듯이, 아마존의 샤머니즘은 다른 수단에 의해 행해지는 전쟁의 연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성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샤먼]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는 것들 간의 횡단적인 커뮤니케이션이며, 인간의 지위를 놓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퍼스펙티브 간의 위험하고도 미세한 비교이다. 여기서 인간의 지위는 어디에 속하는가? 한 개인이 다른 종족의 일련의 정동(情動)과 행위주체성(agency性)에 직면했을 때 이것이 항상 문제시된다. 즉 숲속에서 만나는 동물과 미지의 생물, 오랫동안 마을을 떠나있다 돌아온 혈육, 꿈속에 나타나는 죽은 자의 이미지로 말했던 것이 중요하다. 존재자들의 보편적인 인간성—기저에 놓인 우주론적인 인간성이 모든 존재종(種)을 반성적으로 인간종으로 삼는다—은 상보적인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즉 두 개의 다른 종은 각각 자신의 시선에서 틀림없이 인간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의 시선에서 보면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성립되는 샤머니즘의 연장이다. 아마존에서는 전쟁이 초자연적인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샤머니즘 또한 폭력적이다. 이 둘은 위험에 대한 형이상학(Rodgers 2002)의 매혹적인 힘을 보여주며, 모든 삶의 활동이 포식자의 확장형식이라는 깊은 확신에 의해 의연히 특징지어지는 초인간적 존재에 대한 행동목록을 작성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의 투쟁모델로서 사냥과 연계를 유지한다.

 

레비-스트로스적인 대비의 관점에서 보면, 샤머니즘은 확실히 공의(共儀) 쪽에 위치한다. 샤먼의 활동은 상호 대립하는 관점의 차이 간의 능동적인 상동성과 등가성을 탐구함으로써 각각의 자연종이 갖는 세계 간의 상호관계 혹은 번역을 설정한다(Carnerio da Cunha 1998). 그러나 샤먼 자신은 실재적인 ‘관여자’이며 형식적인 ‘상관항’이 아니다. 하나의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변화해야 하고 동물을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동물로 변용해야 하며 그 반대 또한 그러하다. 샤먼은 우주를 구성하는 퍼스펙티브의 다양성에 내재한 잠세력의 차이를 이용한다(‘물질’과 육체를 이용해서 관계성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샤먼의 힘은 그러한 차이에서 유래하는 힘의 한계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의의 모스적 이론이 가진 특정한 산출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포화하여 완전해진 매개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공의의 도식, 공의를 행하는 자(공의의 집행자)와 희생자의 이중의 중계에 의해 예배하는 자([누가] 희생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연결하는 공의의 도식을 상상해보자. 아마존의 ‘공의’의 두 형상, 즉 의례적인 카니발리즘과 샤머니즘을, 한정교환이 일반교환의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퇴화라고 논한 레비-스트로스의 견해와 같은 의미로 모스의 도식에서 후퇴한 것으로 상상해보자.

 

아마존의 샤머니즘의 독특한 성격은, 샤먼이 공의의 집행자임과 동시에 매개자라는 것이다. 샤먼이야말로 ‘근접성의 결여’—신체와 혼의 분리에 의해 산출된 공백이며, 샤먼의 인격의 몇몇 부분을 끌어내어 외재화하는 것—를 실현화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효과적인 기호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울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샤먼 자신이다. 그는 희생의 형식을 취한 대리인 혹은 대표자를 보내지 않는다. 바로 그가 희생자이다. 예기된 죽은 자는 아라우에테의 샤먼과 완전히 똑같이 천공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의 미래의 음식’으로서 아라우에테 민족의 식인의 신성(神性)에 의해 불려나온다. 이것은 투피남바가 5세기도 전에 자신들의 전쟁의 능력을 시시덕거리면서 사용한 표현과 같다. 샤먼이 타자의 공의집행인이 될 때, 우리는 우주사회의 다른 체제의 문턱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샤먼은 인간의 희생을 받드는 자이며, 다양한 힘에 의해 주어진 공의의 관리자이며, 움직임의 확인만으로 그것을 승인하는 자이다. 여기서 샤먼의 형상의 배후에 사제의 그림자의 윤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주지하다시피 절대적인 대립이 문제는 아니다. 휴-존스 스테판(Huge-Jones Stephen 1996)이 지적한 것인데,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이 의미하는 것은 ‘수평적인’ 샤머니즘과 ‘수직적인’ 샤머니즘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대비는 중앙브라질의 보로로족, 리오네그로(Rio Negro)의 투카노족, 아라와크족(Arawak族)과 같은 민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거기서는 신비적(神秘的)인 매개자에 관한 명확한 두 개의 범주가 있다. 휴-존스가 수평적인 것으로 분류한 샤먼은 영감과 카리스마적인 힘을 만들어내고 사회체의 외부를 향해 공격성와 모랄의 모호함을 피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타입의 전문가이다. 그들의 전형적인 대화상대는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가장 빈번하게 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동물의 영이다(병은 종종 먹힌 동물 측에서 식인적인 보복이 행해지는 경우로 해석된다). 한편 수직적인 샤머니즘으로 분류되는 것은 노래하는 자들의 지도자이며 의식의 전문가이며 집단 내부의 관계성을 재생산하는 프로세스—즉 출산, 통과의례, 명명(命名), 장의(葬儀)—를 능숙하게 주도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신비적인 지식을 평화 속에서 보존하는 자이다.

 

내가 ‘공의의 집행인-희생자’로 부르는 샤먼은 수평적인 샤먼이다. 이 전문가는 휴-존스의 지적에 의하면 평등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에토스를 가진 아마존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에 비해 수직적인 샤먼은 보다 위계화된 평화적인 사회에서만 나타나며, 오히려 사제의 형상과 닮아있다. 그런데 수직적인 샤먼만이 의례를 행하는 아마존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아마존에는 샤먼으로 간주되는 단 하나의 유형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보로로족과 투카노족에 의해 알려진 샤먼의 두 개의 기능을 가진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수평적인 샤머니즘의 특성과 책임이 확실히 우위에 있긴 하지만.

 

휴-존스가 설정한 대비는 명백히 관념적인 유형이라는 관점에서 고안된 것이며 극히 단순하고 도식적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이 완전하게 민족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고, 샤머니즘 간의 차이에 관한 그의 분석의 타당성을 다시금 문제로 삼고 싶지 않다. 두 타입의 샤먼 간의 코스모폴리틱한 매개의 분업에 대해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의 구조’에서 열거했던 매개의 이중성이라는 계열(série)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중요한 대비의 의미=방향을 가지게 된다. 즉 메시아>디오스쿠로이(Dioskuroi)[각주:1]>트릭스타(trickster)[각주:2]>양성구유>교차사촌[각주:3]>부부>삼항이다(Lévi-strauss 1958/1955: 251). 이러한 이유로 샤먼의 비대칭적인 이중성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적 구조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살쾡이 이야기(Histoire de Lynx)』(1991)에서 ‘영속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는 이원론’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위에서 열거한 최초의 항인 메시아니즘은 실질적으로는 휴-존스가 두 샤먼을 구별하면서 만들어낸 문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북서아마존의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확장해온 천년왕국운동은 모두 ‘수평적’인 특징을 갖는 샤먼-예언자에 의해 선도되어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별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가의 두 유형—협의의 샤먼(혹은 ‘샤먼-전사’)과 샤먼-사제—가 아니라 샤먼적인 기능에 관한 가능한 두 방향성이다. 즉 사제로 변용하는 것과 예언자로 변용하는 것과의 구별이다. 이때 예언은 샤머니즘의 역사적인 재연(再燃) 프로세스의 결과인 반면, 사제의 기능의 발생은 정치적으로 다시 냉정해지는 것, 즉 사회적인 권력에 의해 포섭되는 것에서 유래한다.

 

가설을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제로 변용하는 것(기본적인 샤먼의 기능에 기초한 차이화)이 사회의 내부를 구성하는 프로세스, 즉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변증법적 연속성을 나타내는 선조(先祖)라는 가치 그리고 산 자들 간의 공시적인 불연속성을 설정하고 시인하는 정치적 위계(hierarchy)라는 가치의 발생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평적인 샤먼과 대면하는 원형적인 타자는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 반해, 수직적인 샤머니즘의 타자는 선조의 의인적인 모습을 떠안는 경향이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우주론적인 경제 속에 위치하는데, 그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간의 차이는 적어도 죽은 인간과 살아있는 비인간 간의 유사성만큼 중요하다. 콘크린(Beth A. Conklin)(2001)이 서부아마존의 와리족의 생사관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죽은 자의 세계에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자 자신이 동물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사냥감으로서 동물 그 자체이다. 그들은 고기의 본질이며, 고로 참된 음식인 야생의 멧돼지로 변용한다. 그 외의 죽은 자들, 그 외의 인간들은 사냥꾼 혹은 카니발(사육사)로서 동물성의 반대방향의 극인 샤먼으로 생성된다. 동물인 것 같은 존재는 모두 처음부터 인간이며, 인간은 마지막에는 동물이 된다. (탈)개체화라는 생사관은 다시금 전종화(前種化)의 신화와 함께 한다. 동물이 계통발생의 영역에 속하듯이, 죽은 자의 망령은 개체발생의 영역에 속한다. “처음에는 모든 동물은 인간이었다….” 죽은 자는 인간의 신체에서 이접(離接 disjunction)하여 그 이접이 규정한 이미지로서 동물의 신체로 이끌린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아마존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동물로 변용하는 것이다. 만약 동물의 혼이 원초적인 인간의 신체의 형식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혼이 사후(死後)에 동물의 신체를 갖는다거나 산 자에 의해 우연히 죽임을 당해 잡아먹힌 동물의 신체에 스며든다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직적인 샤머니즘의 출현은 타성의 두 위치—죽은 자와 동물—간의 경계와 결부된다. 어떤 특정 순간으로부터—도무지 확정할 수 없는 순간이라고 말해야겠다—인간의 죽은 자는 죽은 자라기보다는 인간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비인간의 완전한 ‘객체화’라는 대칭적인 가능성이 초래된다. 즉 인간과 비인간 간에 경계를 설정하는 것, 동물전반의 형상을 인간성의 타자로 사고하는 것은 죽은 자와 동물 간에 미리 경계선을 긋는 것이며, 선조의 모습을 취해 객체화된 인간성의 전반적인 형상이 돌연 발생하는 것과 연관된다. 죽은 자는 동물로 생성된다는 기본적인 생사관의 사실은 일거에 동물을 인간화해서 죽은 자를 변질시키는 어떤 것이 된다. 즉 죽은 자와 동물이 이혼하면 죽은 자는 인간에 머물거나 초인이 되며 동물은 존재자이기를 그만두고 인간 이하 혹은 인간에 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간다.

 

휴-존스가 검토한 구별의 몇몇 측면을 정리하면,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외적인 실천인 반면 수직적인 샤머니즘은 내적인 실천이다.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외적인 실천은 (논리적으로, 시계열적으로, 우주론적으로) 내적인 실천에 앞선다. 그리고 외적인 실천은 완전한 형이상학적 내면성을 갖춘 추장제나 국가의 산출을 저지하는 잔여로서 항상 조작적인 상태에 머물며, 그 결과 북서아마존의 집단과 같은 더욱 계층적인 형식에도 적용된다. 죽은 자는 부분적으로 동물이기를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죽은 자는 신체를 소유하는 한 망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에서 귀족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해도 그 누구도 선조를 지워버릴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내부의 시공간, 즉 신화의 전(前)우주론적이고 전(前)신체적인 평면에 있지 않다면, 순수한 선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과 동물은 상호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다른 장소에서 동물, 식물, 그리고 존재에 대한 다른 아마존의 범주는 완전한 인간적 상태이기를 끊이지 않고 계속한다. 그들이 포스트신화적으로 동물로 변용하는 것은 원초의 인간성, 즉 그들의 현실역동적인 표상을 향유하는 샤먼적인 언어실천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기초를 반(反)-실현한다는 것이다. 모든 죽은 자는 어떤 종(種)의 동물적인 존재이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모든 동물은 어떤 종의 인간적 존재이기를 이어간다. 아마존의 사회체라는 밀집하고 다양하고 풍부하며 드넓은 숲속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초월성의 발생원에 푹 담금으로써 인간성은 여전히 강도적이기를 계속한다.

 

아마존의 수평적인 샤먼은 이 지역에 편재하며, 정치적 권력과 우주적인 힘이 동시 발생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고전적인 타입의 공의의 시스템의 산출을 매우 곤란해한다. 아마존이나 중앙아메리카의 이른바 ‘위계(hierarchy)’에 의한 공의(共儀) 제도는 마치 국가가 샤머니즘을 포획한 것 같다. 샤먼의 우주론적인 브리콜라쥬의 끝이자 사제의 신화적 엔지니어링의 시작이다.

 

 

3.

 

수직적 샤머니즘과 수평적 샤머니즘의 대립은 여러 차례 초월성과 내재성 간의 대비와 관련지어지기도 했다(Pedeerson 2001; Holbraad et Willerslev 2007). 아마존의 샤머니즘은 그 배경이 되는 퍼스펙티브주의와 완전히 똑같이 실질적으로는 내재적인 실천이다. 이것은 샤머니즘을 통해 결부되는 인간과 초인간 간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라고 나는 단적으로 지적하겠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내재성과 평등성을 혼동하는 것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종종 나타난다). 그렇다고 존재들 간의 시점에서 고정화된 계층구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존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존재론적인 존엄한 연쇄를 낀 점진적으로 포섭하는 퍼스펙티브의 척도로 해석될 수 없으며, 하물며 어쩐 일인지 ‘모든 것의 시점’을 투영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존재자들 간의 변용하는 잠세력의 차이는 샤머니즘의 존재이유이며, 여러 방향의 방식으로 타자의 시점을 포함하지 않는 시점도 아니다. 모든 시점은 ‘전체적’이며, 어떤 시점도 평등하지 않다면 유사하지도 한다. 즉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횡단적인 것이다. 시점들 간의 관계성(다양체로서의 시점이라는 관계성)은 이접적(離接的) 총합 혹은 내재적인 배타성의 영역이며, 초월적인 포섭의 영역이 아니다. 결국 퍼스펙티브주의자의 시스템은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에 대해 논한 표현을 다시금 빌려 말한다면 영속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다면, 모스적인 도식의 구조적 환원인 아마존의 (수평적) 샤머니즘의 해석은 결국 부적절하게 된다. 샤머니즘은 토테믹한 논리와 공의적인 실천 간에 역력히 존재하는 것과 같은 대립을 회피한다. 샤먼은 미숙하고 미발달한 사제가 아니다. 샤머니즘은 준-성직자의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임팩트를 가진 예언이다. 샤머닉한 조작은, 그것이 토테믹한 분류의 상징적인 사례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공의의 상상적인 상호-계열성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융합의 연속체를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제3의 관계성의 전형으로서 그것은 전(前)-개인적, 강도적, 리좀적인 다양체에 의해 구성되는 이질적인 항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 우리의 사례로 되돌아오면, 피/맥주는 재규어가 되는 것을 함의한다.

 

여기서—생성을 논하고자 한다면—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천의 고원』으로, 즉 그들이 토테미즘과 공의의 대립을 말하면서 그러했던 바로 그 장소로.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신화에서 쌍둥이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를 가리킨다. 항해의 보호자로서 호메로스는 이들을 사람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 신화나 민화에 등장하는 ‘장난꾸러기’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그저 장난을 일삼고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반사회적인 존재이면서 인간에게 불이나 문명을 가져다준 영웅으로 묘사된다. [본문으로]
  3. 부모와 성(性)이 다른, 부모의 형제의 자식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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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세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맞부딪혀야 하기 때문에 타자의 개념은 '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친구'보다 '적'에 더욱 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마련이다. … 그런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음미해볼만한 좋은 글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인류학(의 민족지적인 방법론)에 시사하는 것은 깊다. 다른 인류학자들이 이 글을 어떻게 독해하고 받아들일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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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속의 적

 

 

1.

 

『안티 나르시스』, 이것이 내가 쓰려했던 책 제목이다. 여기서는 몇몇 장에서 그 계획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고의 경험이며 인류학적인 픽션의 훈련이다. ‘사고의 경험’은 보통의 의미에서 경험 속으로 (상상적인) 사고의 침입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 속으로 (실재적인) 경험의 침입이다. 어떤 경험을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상상을 경험하는 것 혹은 ‘사고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의 사례에서 경험이란 아마존의 선주민에 관한 민족지학자의 동시대적인 경험이며, 시도된 경험이란 그러한 경험에 의해 조정된 픽션이다. 따라서 픽션은 인류학적이지만, 그러한 인류학이 픽션은 아니다.

 

픽션이란 선주민의 이념을 개념으로서 다루고, 그러한 결정으로부터의 귀결을 그려내는 것이다. 즉 그로부터의 개념이 전제로 삼는 전(前)개념적인 토양 혹은 내재평면을, 개념이 존재하도록 불러내게 하는 개념적 인물을, 개념이 설정한 실재적인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이념들을 개념으로서 다루는 것은 개념이 다른 것으로서, 현실적 대상의 다른 타입으로서, 대상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개인적인 인지, 집합표상, 명제적 태도, 우주론적 신념, 무의식의 스키마(schema 인간의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의 구조), 텍스트의 복합, 구체화된 성향, 그러한 다양한 것들로 다루는 것은 그로부터 이론적인 픽션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티 나르시스』란 선주민의 ‘원시심성’에 관한 연구도 아니고 ‘인지과정’의 분석도 아니다. 그 대상은 선주민이 사고방식이라기보다 사고의 대상이며 그 개념이 투영하는 가능세계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세계관에 대한 민족-사회적인 시도가 문제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첫째] 보이도록 준비된 세계, 시각에 앞서는 세계가 아니기에, 사고의 지평이 설정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간의 분할에 앞서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둘째] 이념을 개념으로 다루는 것은 그 설명들을 상황의 (생태학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등의) 초월적 관념의 말에 의거하는 것이며, 문제의 내재적 관념을 특권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셋째] 그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의 해석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고를 실험하는 시도이며, 따라서 우리의 사고를 실험하는 시도이다. “모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는 자기 자신의 문화의 실험이다”(와그너).

 

조금 더 설명해보자. 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인간들의 정신과도 다른 ‘인지과정’의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주민이 다양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특별한 신경생리를 갖추었다고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정확하게 ‘우리처럼’ 사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들이 사고하는 것, 즉 그들에게 주어지는 개념은 우리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에 의해 묘사되는 세계란 우리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선주민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인간과 인간을 초월한 존재, 인간이 아닌 많은 주체가 완전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사고한다고 생각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참조의 수렴점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퍼스펙티브의 분산화라는 의미에서 이성(理性)인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가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는 실제에 대한 선주민의 지(知)와 적잖이 다른 그 표상, 즉 오늘날 표상의 글로벌 시장이 부당하게 취급하는 ‘전통적인 지(知)’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또 그 심적인 범주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표상성에 관해 종(種)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의 과학은 끊임없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 개인적이든 집합적이든 이성적이든 약간의 이성을 결여한 것이든 그 자체에 앞서는 외재적 사물의 상태를 부분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표상이 아니다. 보편적이든 개별적이든 생득적이든 획득적이든 세계의 사물—정신이든 사회성이든—의 특성을 표시하는 것은 범주도 아니고 인지과정도 아니다. 여기서 그 존재가 조장하는 대상이란 선주민의 개념의 대상이며, 그것들이 구성하는 세계이며(세계는 그리하여 정신을 표상한다), 그것이 출현해왔던 잠재적인 기저이다.

 

선주민의 이념을 개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그것들을 철학적인 의미가 갖춰진 것으로서 혹은 잠세적으로 철학적인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서 고찰한다는 것을 뜻한다. 선주민이 그 서사 속에서 철학자가 아닌 유일자라는 이유를 대지 않는 이상, 그것은 무책임을 결정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부러 강조하자면, 필자 또한 철학자가 아니다. 개념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가령 언뜻 보면 사고 그 자체에 관련된 필연성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고에, 혹은 개념적 이성의 엄밀한 건축학이라기보다 표상의, 형상의, 집합적 표상의 유창하고 얼룩진 도식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사고에 적용할 수 있을까? 그 속에 잘 알려진 역사적이고 심리학적인 심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즉 브리콜라쥬를 이루는 것과 그 기호 사이에, 엔지니어와 그 개념 사이에(Lévi-strauss 1962b) 창설적인 인간의 신화시학과 서양적 합리성의 특정한 세계 사이에(Vernant 1966: 229), 형상의 범형론적인 초월성과 개념의 통사론적인 내재 사이에(들뢰즈&가타리 1991), 그 사이에 ‘결정적인 균열’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다소간 직접적으로 헤겔에게서 발단이 시작되는 이러한 대비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내게는 개념에 대해 (비철학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선주민의 이념을 인류학자의 이념과 같은 평면 위에 위치지어서 파악한다는 결정에서 찾아진다.

 

우리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인류학적인 이념은 그것이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의 집합성의 지성적인 실천론과 엄밀하게 연속한 것으로서 위치 지어진다고 서술했다. 따라서 제시된 실천론은 인류학자의 담론과 선주민의 담론 간의 권리상의 등가성을 주장한다. 모든 것은 마치 그 담론들의 ‘상호적인 전제’라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지식과의 관계에서일 뿐이다. 인류학적인 개념은 이 관계를 현실화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양자는 그 표현에서도 내용에서도 온전하게 연관된다. 그것들은 선주민의 문화의 참된 반사(反射)(실증주의자의 꿈)도 아니며, 인류학자의 문화의 환영적인 투영(구축주의자의 악몽)도 아니다. 그 개념들이 ‘반사’하는 것은 두 문화 간의 이해가능한 관계이며, 그것들이 투영하는 것은 그것들 자신의 전제로서 두 문화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두 근거를 상실한다. 그것들은 항상 반대쪽을 가리키는 벡터이며, 트랜스텍스트적인 인터페이스이다. 그 기능이란 원형 그대로의 의미에서 같음 안의 다름이며, 그곳의 것을 표상한다.

 

인류학적인 개념의 관계적인 기능과 기원은 보통은 이국적인 언어로 드러난다. 즉 마나, 토템, 쿨라, 포틀래치, 터부, 굼사/굼라오 등이다. 조금 더 중요성이 낮은 다른 개념은 이 학문의 기원의 전통과 그것들의 대상인 전통 사이의 아날로지가 이끌었던 어원학적인 기호성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증여, 공의, 친족, 인격 등이다. 다른 한편, 마지막으로 탐구의 대상이 되는 민족들의 개념적인 장치를 일반화해서 만든 신조어가 있다. 애니미즘, 분할적 대립, 한정교환, 분열생성…… 또 그 반대로 혹은 더 문제적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분산되어 특수한 이론적 구조의 내부로 이탈하는 단어가 있다. 근친상간(incest)의 금기, 젠더, 상징, 문화 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들은 보편화된다.

 

결국 인류학의 오리지널리티란 ‘주체’와 ‘대상’의 세계로부터 가능한 개념과 실천 간의 관계적인 공진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강고한’ 과학에 대한 우리의 열등컴플렉스를 분쇄시켜준다. 라투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쿨라의 기호는 프랙탈의 기호와 등가이다. 결연의 복합시스템은 상상적이지만, 그것은 이기적인 유전자가 제시하는 퇴행적인 시나리오와 마찬가지로 상상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바다의 거대한 균열을 지도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트로브리안드 섬의 재산소유시스템은 극지의 빙모[산의 정상부분을 덮은 빙하]의 탐색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탐구에서 흥미롭다. 만약 과학을 규정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즉 우리의 세계에 정착한 행위주체(agency)와 관련되는 한에서 발명의 능력이 문제시된다면—, 그때 인류학은 학문적 위계(hierarchy)의 정점 가까이에 위치할 것이다(1996a: 5).

 

이 문장에서 아날로지는 선주민의 개념과 자연과학의 대상 사이에 설정된다. 그것은 가능한 퍼스펙티브이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대상에 관여하듯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계의 사상(事象)을 위해 사람은 이념과 선주민의 실천에 대한 과학적 기술을 산출해야 한다(라투르에 따르면, 과학적인 객체는 무관계한 실체를 제외하면 기술(記述)되기를 참고 기다린다). 다른 존재전략은 존 호턴 콘웨이(John Horton Conway 1937~, 영국의 수학자)가 고안해내었듯이 선주민의 개념을 과학적인 이론과 그의 ‘유사성의 테제’에 따라 비교하는 것이다(1993: 348-354). 게다가 다른 전략이야말로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인류학이 늘 지나치게 ‘과학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것은 과학 그 자체와의 관계에서—즉 인류학이 과학인가 아닌가, 과학일 수 있는가 아닌가, 과학이어야 하는가 아닌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짜 문제인데, 인류학은 탐구하는 사람들의 개념과의 관계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선주민의 개념을 착오, 꿈, 환상으로 낮게 평가하기 위해서든, 다음으로 어떻게 그리고 왜 ‘타자’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든, 혹은 그것들을 많든 적든 과학에, 즉 인류학에게 같은 실질을 가진 지(知)의 의지의 성과와 유사한 것으로서 활성화시키는 것이든 여하간 지나치게 과학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호턴의 유사성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체의 과학을 손에 넣었는지 모른다(Latour 1991: 133-134). 과학의 이마주. 그러나 이런 사고의 금괴는 서양적인 전통과 다른 사람들의 지적활동과 연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지반은 아니다.

 

라투르의 아날로지와 다른 아날로지를, 호턴의 유사성과 다른 유사성을 상상해보자. 즉 선주민의 개념을 프랙탈과 판구조 이론(plate tectonics)과 유사한 실체로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코기토와 모나도와 같은 영역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아날로지를 상상해보자. 그 속에서 우리는 앞서의 인용을 차용하면서 ‘분할’로서의 인격이라는 멜라네시아적 개념(Strathern 1988)이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와 똑같이 상상적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선주민의 지배영역의 철학’(Clastre 1974/1962)을 국가의 헤겔적인 학설과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마오리의 우주진화론을 엘리아류의 패러독스와 칸트적인 안티노미(antinomie 이율배반)와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해보자(Schrempp 1992). 아마존적인 퍼스펙티브주의를 라이프니츠의 시스템과 똑같이 흥미로운 철학적 대상으로서 이해해보자. … 그리고 만약 문제가 철학적인 가치로서 중요한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라면, 즉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라면, 그때 인류학은 철학을 대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강력한 철학적 도구로 등장하는 것이며, [우리의] 철학의 과잉의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지평이 조금씩 확대되는 것이며, 다음으로 우리를 ‘철학적’이라고 일컫는 인류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팀 잉골드의 깊은 정의를 떠올려보자(1992: 696). 그것을 원문 그래도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인류학은 그 안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철학이다 Anthropology is the philosophy with people in”. 이 정의에서 잉골드는 ‘사람들 people’이란 ‘보통의 사람들 ordinary people’이고 죽은 자의 공동체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서의 the people과 ‘민족’으로서의 the people 사이에서 말장난을 한다. 그것은 내부의 다른 사람, 다른 사람들과의 철학이다. 즉 우리와 관계를 맺는 이상으로 이 혹성의 다른 민족의 ‘비철학’—삶—과의 관계와 맞부딪히는 철학적 활동이다. 즉 ‘코뮌이 아닌’ 민족이라는 것은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만약 실재하는 철학이 상상적인 야생으로 넘쳐난다면, 인류학이 목표로 삼는 철학지리학은 실재적인 야생과 함께 하는 상상적인 철학을 만들어낼 것이다. 실재하는 두꺼비가 그 안에 있는 상상적인 정원(메리앤 무어(Marianne Moore 1887-1972, 미국의 시인, 그녀의 시 세계는 이미지즘에서 출발해 사물주의로 나아간다). 그리고 두꺼비들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종종 왕자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들과 키스할 수 있어야 한다.

 

위의 차용한 내용에서 중요한 위치변환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윽고 (사회의 멜라네시아적인 형식으로서의) 쿨라의 인류학적 기술만이 문제가 아니다. (인류학적 형식으로서의 ‘사회성’의) 멜라네시아적인 기술인 쿨라가 문제이다. 혹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여기서는 그 자체로 이해의 장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하여 결연과 토지소유의 복합시스템은 선주민의 사회적 상상력으로부터 생겨나는 발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쿨라를 항상 하나의 기술(記述)로서 기술(記述)하는 것이 필요하며, 선주민의 종교를 항상 하나의 이해로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선주민의 상상력을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념성을 개념으로 변용시켜야 한다. 후자를 전자로부터 끌어내고, 전자로 돌아가야 한다. 개념이란 개념성 간의 복합관계, 전(前)개념적인 장치와의 배열(arrangement)이다. 인류학의 경우, 관계 속에 있는 개념성은 무엇보다 특히 인류학자의 개념성과 선주민의 개념성—관계의 관계—을 포함한다. 선주민의 개념은 인류학자의 개념이다. 그것은 물론 구축에 의한 개념이다.

 

 

2.

 

사고의 이마주로서 카니발리즘. 개념적 인물로서 적. 이에 대해 질문한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지리학에 한 개 장 정도를 할애해야 할 것이다. 서양적인 전통에서 타자의 프로토타입적인 표현은 친구라는 형상이다. 친구야말로 타자인데, 다만 그것은 자기의 ‘계기’로서의 타자이다. 만약 나를 친구의 친구로 자기규정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잘 알려진 정의 속에서 친구가 다른 자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존재한다. 친구는 주체를 조건지운 형식에 회고적으로 투영되는 타자의 조건이다. 프란스시 울프(Francis Wolff)가 말한 것처럼(2000: 169), 이 정의는 다음의 이론을 포함한다. 즉 ‘타자에 대한 모든 관계는, 고로 모든 우성(友性)의 형식은 그 근거를 인간의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찾아낸다’. 사회적 관계는 자기에 대한 관계를 기원 혹은 모델로 전제한다.

 

그러나 친구는 다만 ‘인류학’만을 근거 짓지 않는다. 만약 그리스철학의 구성의 역사정치학적인 조건을 고찰한다면, 친구는 진리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불가결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고에 내재하는 현전(現前), 사고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 살아있는 범주, 초월적인 살아있는 것’(들뢰즈&가타리 1991: 9)이다. 친구는 결국 타자가 개념적 인물로서 불린 것이며, 개념에 고유한 타자의 도식이다. 철학은 친구를 요구한다. 사랑은 지(知)의 요소이다.

 

그런데 아메리카 선주민과 ‘우리’의 철학과의 가치의 동일시라는 서두의 문제는 초월론적인 규정으로서 적에 의해 구성된 세계를 사고하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의 라이벌로서의 친구가 아니라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실천적인 적의 내재이다. 그 속에서 적의(敵意)란 우성(友性)의 결여적인 보완물도 아니고 부정적인 사실도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권리의 구조이다. 그것이 지(知)와의 다른 관계, 다른 진리의 영역과의 관계를—즉 카니발리즘, 퍼스펙티브주의, 다자연주의와의 관계를—규정한다. 만약 들뢰즈적인 타자가 시점의 개념 그 자체라고 한다면, 초월론적인 규정으로서의 적이라는 시점에서 구성되는 세계란 무엇일까? 단지 선주민만이 알고 있는 궁극의 귀결로 밀고 나아가는 애니미즘은 퍼스펙티브주의적일뿐만 아니라 적대주의적이기도 하다.

 

 

3.

 

이것들 모두는 ‘불가능한’ 물음을 정식화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선주민의 사고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때] 인류학자의 목적은 이러한 사고를 설명하고 해석하고 맥락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될 수 없고, 그것[선주민의 사고]이 우리의 사고에 맞는 효과를 이용하여 그로부터 귀결을 이끌어내고 검증하게 될까? 선주민의 사고를 사고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즉 우리가 사고하는 것(다른 사고)이 ‘언뜻 보면 비합리’인가 아닌가, 나아가 나쁘게 말하면 타당 이성적인가 아닌가를 사고하지 않고 사고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이 다른 사고를 이러한 양자택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로서, 이러한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서 사고하는 것, 이라고.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선 중성화하지 않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이 타자에 대한 사고의 중성화라는 이런저런 형태에 관한 물음을 괄호 안에 넣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사고가 인류의 인지적 보편을 밝혀줄까? 그것은 어떻게 그러할까? 그것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지식의 어떤 전달양식에 의해 설명될까? 그것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세계의 비전을 표현할까? 그것은 기능적으로 정치적인 권력의 배분을 유효화할까? 등등. 이 질문들을 매달아 놓는 것, 혹은 적어도 그 질문들 속으로 인류학을 집어넣고 닫지 않는 것 등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다른 사고를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단지 사고를 의심하지 않는 잠재성의 현실화로서 사고하도록 결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주민이 말한 것을 ‘믿는’ 것, 그들의 사고를 세계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여기서 전형적으로 질 낮은 방식으로 설정된 문제가 보인다. 어떤 사고를 믿는다거나 혹은 믿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신념의 체계로서 사고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 인류학적인 문제란 신념의 심리학적인 용어로도 진리치라는 논리학적인 용어로도 결코 제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를 신념 혹은 불신앙의 가능한 유일대상으로서 억견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또 진리판단의 가능한 유일대상으로 또 명제집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그들의 사고를, 신념에 관한 그들의 담론과 관련짓고 규정할 때 일어나는 나쁜 문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때 문화는 일종의 도그마적인 신학이 되고 만다. 혹은 인류학이 이러한 담론을 억견 혹은 명제집합으로 받아들일 때 문화는 인식론적인 기형학이 된다. 착오, 광기, 환상, 이데올로기. 라투르가 말한 것처럼 “신념이란 심적 상태가 아니다. 몽테뉴 이래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의 결과이다”(1996b: 15).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를 신념에서 기술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신념이라는 양태 하에서 [그들의 사고와] 관계를 가질 수는 없다. 그 알레고리적인 (뒤르켐에게서는 사회적인 알레고리이며, ‘문화유물론’의 아메리카학파에게서는 자연적인 알레고리이다) ‘진리의 기저’를 주의 깊게 암시하든, 더 나쁘게는 그들의 사고가 사물의 내적인 궁극의 본질에 접근한다고 상상하든, 그 어느 쪽도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러하다면 그들이 천성적으로 신비적(神秘的)인 지(知)를 견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미의 신념으로, 도그마로, 확실성으로 환원하는 인류학은 반드시 신념의 의무라는 덫에 걸린다. 선주민의 의미일까, 그들 자신의 의미일까?”(Wagner 1981: 30). 의미의 평면은, 의미, 의미작용, 의미생성은, 심리적인 신념이나 논리적인 명제로 넘쳐나지 않으며, 그 ‘기저’는 진리와는 다른 것을 포함한다. 선주민의 사고가 만약 그것[신념]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억견의 형식 또한 논리의 형상이 아닌 의미의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개념산출의 자기 참조적인 장치로서 ‘그것 자체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념에 의해 질문을 설정하지 않는 것은 인류학적인 결정으로서는 중대한 갈림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인 타자를 다뤄보자(들뢰즈&가타리 1969a; 1991). 타자는 가능세계의 표출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항상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관습적인 흐름 속에서 나에 의해 현실화된다. 타자 속에 포함된 가능성은 나에 의해 전개된다. 가능성이란 검증의 프로세스를 거치는 것이며, 엔트로피적인 방식으로 그 구조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내가 타자에 의해 표현된 세계를 전개할 때, 그것은 타자의 가능세계를 실재적인 것으로 검증하는 것이며, 그 속에 진입하는 것이며, 혹은 그것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전개’는 이러한 신념의 요소를 도입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기술하면서 들뢰즈는 타자의 개념설정의 한계조건을 제시한다.

 

전개의 이러한 관계성은 우리와 타자와의 공동성도 대립도 형성하며 그 구조를 해소해버린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타자를 대상의 상태로 환원하고 다른 경우에는 주체의 상태로 귀착시키고 만다. 따라서 타자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공적인 것이든 우리에게는 특정의 경험의 조건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표현된 것이 아직 우리에게 그것을 표현하는 것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기이다. 하나의 가능적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타자(들뢰즈&가타리 1968: 335).

 

그리고 결론으로 이러한 고찰의 근원적인 격언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전에 인용한 규정은 너무 많이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자와 함께 자기를 지나치게 전개한 것이며, 타자를 지나치게 전개한 것이며, 그 불명료한 가치들을 유지하여 스스로의 표현 밖에는 현실존재하지 않는 표현된 모든 것들로 우리의 세계를 채우며, 우리의 세계를 다수화하는 것이다.

 

인류학자는 이 교훈에 담긴 이점을 끌어내는 자이다. 타자의 가치를 불명료한 채로 남겨두는 것은 그것이 가둔 무언가의 초월론적인 비밀을 칭송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선주민의 사고에 의해 표현된 가능성을 현실화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을 무한히 가능한 채로 남겨두도록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공상으로 탈현실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현실적인 것으로 공상화하는 것도 아니다. 인류학적인 경험은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특수한 인공적인 조건’의 형식적인 내화에 의존한다. 타자의 세계가 그 표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계기야말로 영원의 조건으로 자기변용하는 것이다. 즉 인류학적인 관계에 내적으로 잠재하는 것으로서 이 가능적인 것을 실재화하는 영원의 조건으로 자기변용하는 것이다. 만약 그 권리상, 인류학에 무언가가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타자의 세계를 전개=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양화하는 것이며, ‘타자의 표현 밖에는 현실존재하지 않는 표현된 모든 것들로 넘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주민처럼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그 이상으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바로 순간적으로 ‘그들처럼’ 사고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에—, 만약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어떤 명석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세계를 타자의 시선 하에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이 현실화하려고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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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에서 안티나르시스를 통해 포스트구조주의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이다. 즉 '공의'와 토테미즘의 차이에 주목해서 '공의'의 타자개념을 이해하면, '적'이 왜 포스트구조주의 인류학의 생성에서 핵심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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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의 형이상학

 

 

 

1.

 

상식에 반하는 구조주의의 독해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약간 돌아가는 길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민족지학자로서의 나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1962년이라는 전환기에 출간된 두 권의 책, 『오늘날의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전(前)구조주의’는 『신화학』의 ‘포스트구조주의’로 대체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두 권의 책에서 ‘토테미즘’과 ‘공의(供儀)’의 전형적인 대비를 설정하고 바로 신화적인 것으로서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 덕분에 구조인류학의 한계로 어렴풋하게 느낀 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술어의 지리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레비-스트로스의 방법론의 영역의 한계—, 그것은 수학적-역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이며, 그 한계의 방향으로 이 방법론의 어떤 잠재성을 이끈다. 이 대비는 특히 아마존 동쪽의 투피어족(Tupi語族)으로 분류되는 아라우에테(Araueté)에서 행한 나의 연구를 되돌아보고 아마존의 민족지를 재독하기 위해 중요하다. 그것은 내게 호전적인 카니발리즘과 샤머니즘의 의미, 즉 투피와 그 외 아메리카 선주민 사회의 중심(혹은 ‘탈-중심’)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체제를 재고하고자 할 때의 기점이 된다.

 

 

2.

 

아마존 선주민 사이에서 ‘공의’에 관한 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아메리카 저지대의 문화와 안데스나 중부아메리카의 국가체제 간의 역사적ㆍ유형적인 관계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아마존 선주민에게 공의는 극히 중요한 신학정치적인 장치이다. 이 문제의 배후에는 미개로 일컬어지는 사회에서 국가의 발생이라는 더 큰 문제가 놓여있다. 일단 샤먼은 초월적인 것을 위탁받은 원-사제의 모습을 떠안는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는 샤머니즘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아메리카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공의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프랑스사회학(Hubert et Mauss, 1950/1899)에서 주어지는데, 이것은 여전히 이 분야에서 일반적인 참조문헌으로 자리하지만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샤머니즘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와 공의 개념 간의 연결은 그들의 샤머니즘 실천으로부터 내가 직접 받은 인상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생사관에 관한 담론으로부터 그 연결을 이해했다. 아라우에테의 우주론에서는 사후(死後)의 카니발리즘에 의례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하늘의 신들(les Maï)은 마침내 천국에 입성한 죽은 자의 혼을 먹어치우는데, 그것은 죽은 자가 먹어치우는 자와 동일한 불사의 상태로 변신(metamorfose)하기 위한 서곡이다. 내가 민족지에 논했던 것처럼, 이 신비적인 장례의 카니발리즘은 투피남바족(Tupinamba族)(16세기 브라질의 남단 끝에 살았고, 지금은 투피어족의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리오데자네이루와 바히라에 정주하고 있다)의 호전적 사회학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한 구조변형이다.

 

우선 투피남바족의 카니발리즘의 일반적인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을 포획하고 쏘아죽이고 의례적으로 먹는 일련의 과정에 공들이는 시스템이 문제이다. 전쟁포로는 같은 언어와 관습을 가진 민족에 의해 포획되는데,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 엄중하게 의례가 집행될 때까지 포획자들 옆에서 충분히 오랜 기간 살아간다. 그들은 대체로 자상한 돌봄을 받고 중후한 집행의례를 위해 길게 이어지는 준비기간 동안 감시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생활한다. 이것은 [포획자의] 집단의 여성을 처로 받아들이는 관습을 포함한다—따라서 포로는 의리의 형제[처남]로 변용된다(예전에는 투피어(Tupi語)에서 ‘적’과 ‘의리의 형제’의 호칭이 같았다. 토바자(tovajar)는 문자 그대로 ‘적대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이미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포식이 친척관계를 얼마만큼 함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례적인 사이클은 포로를 죽일 때 최고점에 달한다. 그것은 사제자에게 통과의례의 가치를 가진 행위이다(그는 이때 새로운 이름을 획득하고 기념으로 신체를 상처 입히고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낙원으로 통하는 권리를 얻는다 등등). 그 의례 가운데 모든 협력자, 즉 방문객과 이웃마을의 초대 손님들이 포로의 신체를 먹는다. 예외는 살해에 가담한 사제이다. 그는 포로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례를 위해 격리된다. 즉 상을 당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죽임을 당한 ‘적대자’와 동일화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투피남바족의 식인은 종종 ‘인신공양’의 한 형태로 해석되어왔는데, 그것은 초기의 [식민지] 연대기 제작자들 몇몇이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고 브라질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플로레스탕 페르낭지스(Florestan Fernandes 1920~1995)(1970/1952)가 만들어낸 정치한 개념(그는 앙리 위베르(Henri Hubert)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도식을 16세기 브라질에 관한 자료에 적용했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때 페르낭지스는 원전에는 기재되지 않은 정보, 즉 공의의 받는 측, ‘초자연적인 실체’를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공의란 그룹의 죽은 자의 혼을 위해 행하는 것이며, 전쟁의 포로를 죽거나 먹음으로써 복수 혹은 축복을 행하는 것이다.

 

아라우에테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투피의 카니발리즘에 초자연적인 실체가 관여하며 그들이 의례적인 이성(理性)을 통해 죄를 면할 수 있다’는 사고에 이론(異論)을 주장했다. 아라우에테의 경우, ‘초자연적인 실체’가 식인관계의 능동적인 극(極)의 역할을 맡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식인에 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조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투피남바족의 사회학을 통한, 이 민족의 생사관에 관한 나의 해석이다. 아라우에테의 하늘의 신들(les Maï)은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주체가 되는 집단이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즉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살해하는 그룹과 그 동맹자가 포로를 먹는다. 그러나 공의의 객체(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포로)는 아라우에테의 죽은 자가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아라우에테에서 산 자는 결국 공(共)-주체의 위치를 점하며, 그것은 아라우에테에게 적의 그룹이 점하는 위치이며 희생자는 그로부터 유래한다. 요컨대 아라우에테의 신성한 카니발리즘으로부터 투피남바족의 식인적 카니발리즘으로의 변용은 이러한 실천의 상징적 내용과 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라그마틱한 변화, 아니 혹은 퍼스펙티브의 번역이다. 그것은 가치들과 주체-객체의 기능, 방법-목적의 기능, 자기-타자의 기능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나는 시점(視點)에 의한 교환의 이념이 식인에 관한 아라우에테와 투피남바족의 모티브를 기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교환은 행위자(actant)의 도식에서는 투피의 카니발리즘 그 자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나는 이 교환을 퍼스펙티브를 교환하는 프로세스라고 정의했다. 그 속에서 ‘나’는, 타자가 ‘나’에게 빙의함으로써 ‘타자’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타자가 ‘나’가 된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타자 속의 나이다. 문자 그대로 ‘타자를 횡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단순하면서도 반복되어왔던 하나의 물음에 답을 준다. 즉 도대체 누가 실제로 적을 먹을까 라는 물음이다. 의례적 카니발리즘에서는 질(質)적인 의미에서 희생자의 고기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 문제는 물질적인 측면이나 ‘실체’일 수 없다. 나아가 우리가 아는 자료에 한에서는 적의 신체에 어떤 물질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효과가 머물고 있다는 증언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없다. 먹히는 ‘물질’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체라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하나의 기호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타(他)의 기호와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먹히는 것은, 적과 먹는 자와의 관계이며 달리 말하면 적의 조건이다. 희생자로부터 흡수되는 것은 타성의 기호이며, 그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시점으로서의 타성이다. 카니발리즘과 선주민의 전쟁의 타입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적의 시점에 의한 상호적인 자동결정이라는 역설적인 운동을 함의한다.

 

내가 전개한 이 주제는 분명히 이 분야의 어떤 고전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해석이다. 서양의 다문화주의적인 인류학의 목적은 현지인의 시점에서 경험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선주민의 다자연주의적 인류학은 적의 시점에서 서서 ‘기호물리적’인 포획(죽이고 먹는 것)을 자기기술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간주한다. 인류학으로서의 안토르포파지(anthropophagy 식인풍습)이다.

 

내가 이 착상을 품은 것은 아라우에테의 싸움의 노래를 들을 때였다. 그 노래 속에서 전사(戰士)는 부름과 답함이 복잡하게 엮인 놀이를 통해 죽은 적의 시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말한다. 그 노래의 (두 가지 의미에서) 주체=주제인 희생자는 그가 죽인 아라우에테의 자를, 그리고 그를 죽인 자—‘화자(話者)’ 자신으로 요컨대 죽은 적의 말(파롤)을 노래하는 자—를 식인적인 적으로 이야기한다(무엇보다도 아라우에테는 말 외에는 먹을 수 없다). 아라우에테의 살육자들은 그 적을 통해 스스로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과 같은 상태가 된다. 즉 ‘적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희생자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 순간부터, 혹은 오히려 희생자의 목소리에 의해 스스로의 특이성을 표명한 순간부터 스스로를 주체로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퍼스펙티브주의이다.

 

투피의 호전적인 기호론적 식인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코뮌 밖에서는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선주민의 정치철학이 존재한다는 이 테마는 그와 동시에 정치에 관한 식인적인 철학이기도 한데, 전쟁에 관한 클라스트르의 이론에서 그 개략이 묘사된다(Clastre 1977, 선구적인 논문으로서 Clastre 1968과 1972 참조). 그러나 몇몇 아마존 연구자의 노력 덕분에 그의 민족지의 일반성과 복잡성은 내가 투피의 연구테마로 삼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마침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업이 조준한 것은 아마존 사회의 기초적인 제도로서 포식자의 타성(他性)의 체제이다. 이 사고방식에 의하면, 사회체제의 ‘내면성’은 외계의 상징적인 자원—이름과 혼, 인격과 전리품, 말과 기억—을 포획함으로써 남김없이 구성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는 적이 가져온 특성을 거두어들이는 움직임의 원리를 삼음으로써 그와 동일한 특성에 의해 ‘규정’되도록 작용한다. 이것은 투피남바족의 생활에서 중대한 의례의 순간, 즉 포로를 죽일 때 나타나며 그때 의례의 장(場)은 살해자와 그 희생이 되는 자의 쌍방의 형상에 걸쳐 배분된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은 무한하게 반사(反射), 반향(反響)된다. 결국 여기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포식의 형이상학’의 핵심이 있다. 내부 없는 사회로서의 미개사회는 그 외부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 내재성은 그 초월성과 호응한다.

 

이와 같이 나는 샤머니즘이 아닌 전쟁과 카니발리즘에 의해 처음으로 공의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모스의 정의가 적절하지 않다면—받는 사람도 성스러운 물건도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토테미즘의 논의에서 제기한 관념은 [모스의 정의와] 반대로 투피의 식인풍습[인류학으로서의 안트로포파지]을 새롭게 밝혀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3.

 

토테미즘과 공의의 대비는 처음부터 오지브와족(Ojibwa族, 북미인디언의 한 부족)의 토템과 마니도(Manido)[오지브와족의 홍수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시스템 사이에 놓인 직각적인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토테미즘』 1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Lévi-strauss 1962a: 32). 『야생의 사고』 7장에서 이 대립은 일반화되어 묘사되며(1962b: 298), 다음과 같이 시스템화된다.

 

  1. 토테미즘은 전체로서 동형의 두 차이의 시스템 간에 형식적 및 가역적인 상관관계를 정함으로써 두 병렬적인 계열(série)(자연종과 사회집단) 간의 상동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립한다.

  2. 공의는 연속적으로 방향 지어진 단 하나의 계열의 존재를 정립한다. 그 계열 속에는 양극단에서 비상동적인 두 개의 항(인간과 신) 사이를 하나의 실재적이고 불가역적인 매개가 움직인다. 그 속에서 유사성은 동일성 혹은 연속하는 아날로지적인 근접성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3. 토테미즘은 은유적이며 공의는 환유적이다. 즉 토테미즘은 ‘참조항의 해석체계’이며 공의는 ‘조작자의 기술체계’이다. 전자는 랑그의 영역이며, 후자는 파롤의 영역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공의는 언뜻 보면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분석되는 또 하나의 ‘변용의 체계’에서 비율의 균형에 관한 다른 타입의 프로세스를 현실화한다. 토테미즘의 논리변용은 상호적인 입장을 치환, 전치, 교차 혹은 그 밖의 조합적이고 외연적인 재분배로 간주하도록 항들 사이를 설정된다. 즉 토테미즘은 비연속성의 유형이다. 그와 반대로 공의적인 변용은 자연을 자신의 술어로 개변하도록 내재적인 관계성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공의적인 변용은 그것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용은 조합이라기보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이 말한 의미에서의 전도(轉導 transduction)이다. 그것은 연속성의 에너지의 도움을 받는다. 토테미즘의 목적은 각각의 극에 있는 차이의 두 계열 간에 유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의의 목적은 자기동일화한다고 가정되는 두 극 사이에 하나의 장면 혹은 식별불가능한 어떤 계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차이를 이룬다(외부를 통한 것이 아니라 내부를 통해). 수학적인 알레고리를 빌어 말하면, 토테미즘에서 구조변용의 모델은 조합의 분석이다. 그때 공의의 강도적인 형태변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왕국’(레비-스트로스)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오히려 미분적인 계산의 어떤 영역으로 향한다. 희생자의 죽음이 접선 즉 신성(神性)의 곡선에 대한 최적의 근사치라고 상상해보자….

 

이와 같이 레비-스트로스류의 정의에서 토테미즘은 형식의 시스템으로서 이해되며, 그 한편으로 공의에 대해서는 힘의 시스템이 현존하는 것을 시사하도록 형식화에 호소한다. 유동하는 진짜 기계. 레비-스트로스는 예를 들어 ‘저장고’ 간의 ‘연속성의 해결’, ‘자동적으로’ 보충하는 ‘유사성의 결여’ 등이라는 표현을 증거로 삼으면서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는 용기라는 완전한 도식주의를 활용했다. 이 사고로부터 공의의 원리로서 잠세성(潛勢性)의 차이라는 단서의 이념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4.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는 축적된 상징 에너지를 경감시키는 것으로서 웃음과 미적인 감정을 분석하면서 물(水)-에너지적인 언어가 다시 나타난다. 레비-스트로스는 ‘뜨거운’ 역사를 가진 사회를 언급할 때에도 그렇게 다룬다. 집단의 불평등성 혹은 타자들의 착취에 포함된 잠세성의 차이를 사용해서 생성이나 에너지를 산출하기 위해 엔트로피에 저항한다는 것이다(Lévi-strauss et Charbonnier 1961: 44-48).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은 거의 주목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주술의 일반원리의 소묘』에서 마나의 개념을 만들어낼 때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위베르와 모스는 마나가 사상(事象)과 존재물을 차이/미분화하는 가치의 이념이라는 것(“주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속에서 인정되는 각각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계층적인 배열(arrangement)의 이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계층적인 차이(니체와 함께 하는 모스!)는 휴이트에 의해 ‘주술적인 잠세성’이 된 마나(mana)와 오렌다(orenda)라는 개념의 번역과 정합하는 것임이 강조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사상(事象)의 상대적인 지위와 상호적인 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잠세성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事象)이 상호 작용하려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마나의 개념이란 그러한 가치들의 관념이며, 이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에 다름 아니다. 주술적인 사고와 주술에 관한 사고방식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Hurbert et Mauss 1950/1902-1903: 114).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틈으로서의 마나라는 레비-스트로스류의 해석은 그러한 이유로 시니피앙의 계열과 시니피에의 계열 간의 상관적인 차이의 모델을 끌어오며, 그때 그 모델은 토테미즘형의 설명 그리고 이 두 계열 간의 끝없는 변조(‘조정’의 결여)상태에 지지되는 위베르와 모스의 ‘잠체성의 차이’와 아주 유사한 불균형으로서의 공의형의 설명, 이 두 설명 사이의 하나의 타협이다.

 

 

5.

 

결국 차이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이미지, 외연적인 이미지와 강도적인 이미지가 있다. 즉 형식과 힘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양립불가능’(1962b: 295)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두 이미지를 나는 (레비-스트로스가 종종 인용한)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덴마크의 물리학자)의 의미에서의 상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겠다. 이 경우 토테미즘과 공의는 두 개의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시에 필요로 하면서도 동일한 일반적 현상에 관해서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기술, 즉 이질적인 계열의 분절화 작용만큼의 의미 혹은 기호작용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적어도 레비-스트로스로 말하자면, 이러한 상보성은 분명 비대칭적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열린 강의에서 그는 구조인류학이 역사에 저항하는 ‘유체(流體)라기보다는 변용에 관한 어떤 방법’(1973/1960: 28)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동시에 차이/미분화하는 역학보다도 오히려 집단의 대수학을 제안한다. ‘유체의 방법론’은 뉴턴이 미분법에서 명명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대로 인류학에서 구조의 방법론은—아마도 이 방법의 관습적인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힘이라기보다는 형태를, 차이보다는 조합을, 물결모양보다는 다루기 쉬운 입자상태를, 파롤을 밀어내서 랑그를, 행위보다는 유형화를, 각각을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따라서 구조의 방법론을 다소 거스르는 [유체의 방법론의] 이러한 측면은 통상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비주류의 기호학(혹은 존재론)의 양태로서 다뤄진다. 이 책이 서두에서부터, 사고 가능한 것의 한계에 대한 증언이든 의미의 결여의 재평가이든 아니면 착오의 힘의 표현이든 비주류의 인류학에 대해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공의는 상상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위해 끌어온 것이며, 토테미즘은 객관적인 것과 참됨을 높게 평가한다(같은 책 301-302). 이러한 판단은 『벌거벗은 인간』(1971: 596-603)에서 전개된 신화와 의례 간의 중대한 대립에서 되풀이되고 일반화된다. 즉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판단은 그가 연구한 민족의 우주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우주론의 특정한 측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토테미즘은 오늘날 야생의 사고 속의 일반적인 분류행위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공의는 항상 [토테미즘과] 잘 어울리는 구성적 해체를 바라고 있다. 토테미즘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해체되는지는 주지한 대로이다.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기를 멈추고 분류의 방법과 의미작용의 시스템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연종의 계열에 대한 참조는 부차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의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즉 공의적인 관계성의 표현으로 기능하는 신성(神性)을 토테미즘의 자연종과 마찬가지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제도적 결정화가 특수사례의 하나에 불과할 때, 공의의 일반적 도식은 무엇과 유사한 것일까? 혹은 토테미즘과 비교해서 더 공의적인 언어로 문제를 형식화하기 위해 공의를 특이성의 현실화로 만드는 역동적인 잠재성의 영역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의는 얼마만큼의 힘을 일으킬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의 가치판단과 거리를 두었을 때, 은유적인 불연속성과 환유적인 연속성, 위치적인 양과 방향을 가진 질(質), 범형론(範型論 paradigm)의 참조와 통어론(統語論 syntax)의 조작 간의 대비가 내게는 완전히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나는 투피의 의례적인 카니발리즘을 공의 속에(범형!)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반(反)-토테미즘의 참된 조작으로서 카니발리즘은 잠재적으로는 상호적인 변환으로 나타난다(투피남바족의 사회에서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보복의 명령이다)는 것인데, 실재적으로 말하면 연결된 같은 부류의 항들은 불가역적이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은 고도의 유사성과 ‘비유사성’(희생자의 신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해체하고 먹는다는 난폭한 물리적인 접촉)이며, 그것은 살해자와 희생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에 비규정적이고 식별불가능한 영역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있음을 함의한다. 사람이 공의의 요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실체의 존재를 정립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가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에서 행한 투피남바족의 의례의 삼중의 해석에서 행위자(actant)는 먹는 자의 집단, 죽임을 당해 희생당한 인물, 그리고 적의 집단이다. ‘죽음’은 의례의 세 축에 의해 교대로 바뀌고 바뀌는 가정된 보상 기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순환하는 힘을 조정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에 다름 아니다.

 

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공의’의 개념을 이 새로운 레비-스트로스류의 의미에서 정말로 식인의 의례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투피의 카니발리즘에는 상상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보복은 ‘불가능’할 수 있지만 상상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사회적인 포이에스의 도식이며, 적의 집단과의 영속적인 불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집단적인 시간을 의례적인 것으로 산출하는 기구(제한없는 보복의 순환)이다. 여하간 만약 항상 적을 상상해야한다면—타자를 그러한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 목적은 실제로 적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를 타자로서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가령 토테미즘의 개념보다 더 많은 것이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난다 해도,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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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는 번역자주임.

* 소절의 구성은 독해의 편의를 위해 번역자가 임의로 한 것임.

* 이 글의 이해를 위해 필리페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을 알아야 하는데, 한국어로 전혀 소개된 바가 없으므로 그나마 다음의 글(http://sarantoya12.tistory.com/45)을 참조할 수 있다고 봄.

* 다음 글의 논지는 퍼스펙티브주의가 다만 아메리카 선주민의 세계관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의 새로운 퍼스펙티브로서, 나아가 새로운 세계의 사고방식으로서 확장가능하다(확장해야한다)는 것임.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각주:1]

 

 

 

1.

 

우리는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를 선주민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이론으로서 논했다. 나는 ‘여기서’ ‘이론’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십수년간 인류학에서는 야생의 사고 이후 참된 이론적 상상력이라는 성격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내게 이러한 경향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 인류학자 당사자의 이론적 상상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그러한 경향에 대해 외재적인 이론으로서 가능한 대상이라기보다—예를 들어, 일차적인 애니미즘적 존재론의 이차적인 인식론으로 상정되거나(Descola 2005), 수렵민의 ‘모방적’ 문화에서 출현한 현상학적인 프래그머티즘(Willerslev 2004)으로 규정되는 이론의 대상이라기보다—, 바로 우리에게 이론에 관한 또 다른 이론적 이마주를 구성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지인의 시점(視点)’을 미세하게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말리노프스키), 비가시의 맹점을 지적하며 나아가 탁월한 비판적 전통에서 관찰자의 시점 속으로 현지인의 시점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럴지라도 퍼스펙티브주의가 이러한 전통과 대립해서 이뤄내는 작업은 그것과 ‘대칭적’인 작업, 즉 현지인으로서의 시점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 아메리카 선주민의 문화에서 현재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이며 시점의 인류학에서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확실히 시점의 선주민적 개념은 선주민의 시점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류학자의 시점은 선주민의 시점이 될 수 없다(그것은 지평의 융합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후자[선주민의 관점]와의 (퍼스펙티브적인) 관계의 개념이다. 그것은 반성적인 탈장소화적 관계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성적인 구조이며, 인류학자에 의한 퍼스펙티브주의 자체의 기술(記述)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인류학을 통과한 또 다른 인류학이기 때문이다. 고로 퍼스펙티브주의는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서브타입적인 애니미즘도 아니고 인류학자의 이성만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성이 소유하는 ‘실천의 도식’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입의 타입이 아니라 개념의 개념이다. 그 가장 흥미로운 사용법은 우리에게 이국적으로 비쳐지는 우주론을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오염된 우리 인류학에 대한 저항-분석을 행하는 것이다.

 

 

2.

 

상상력의 결여를 논외로 한다 해도—그것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비근대적인 사람들에 대해 이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상찬하거나 혹은 이론적으로 무능하다고 비난하는 이중 잣대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약간의 모순이 포함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한편에서는 선주민의 실천의 본질을 하이데거적인 도구존재자(das Zuhandenes)라는 술어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준-명제적 표상’[각주:2](스페르베르 Dan Sperber 1942~, 프랑스의 인류학자)에 대한 참된 인식의 모든 기능을 거절한다. 그러한 ‘표상’은 백과사전이나 범주화의 온당하고 분명한 경계로서 나타날 때에는 야생의 사고를 구속해버리고 만다.

 

실제 문제의 소재는 사고의 능력과 ‘판단의 시스템’과의 특권적인 동일시, 그리고 인식과 명제 모델과의 특권적인 동일시에 있다. 동시대적인 인류학은 현상학적이고 구성주의적인 경향과 인식론적으로 도구론적인 경향을 갖고 있는데, 최근 비서양적인(혹은 비근현대적인, 비문학적인, 비학문적인, 그밖에 ‘구성하는 것’이 부재한) 지성을 구성하기에는 이 모델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변명들을 한다. 바꿔 말하면 인류학적 담론은 패러독스적인 시도에 열중한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를 타자의 담론의 비명제적인 본질에 관한 명제와 중첩시킨다. 그것은 이른바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수다와 같다. 선주민이 자기해석이라는 실천에 대해서는 숭고한 모멸을 보이면서 우주론이나 시스템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이론적으로) 만족스러울까? 선주민에게 있어서 해석의 부재는 이러한 부재에 관한 인류학자에 의한 해석을 증대시킬 수 있는 큰 이점을 갖고 있으며, 우주론적인 [개념적인] 건축물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인류학자에 의한 장대한 대성당(cathédrale)[의 구성]—이 장대한 대성당에서 사회는 그 장치에 따라 조금이라도 발전하고 시스템적인 것으로 조직화된다—을 가능하게 만든다. 요컨대 선주민이 보다 실천적이라면 인류학자는 보다 이론적이다. 나아가 명제적이지 않은 양상이란 이동과 순환의 ‘맥락’에 강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바로 그것[‘맥락’]이 이 양상을 과학의 담론과 그 놀라운 보편화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의 대극에 놓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누구라도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관계적인 배치’에 의해 한정되는데, 그러나 우리의 그것[‘맥락’]이 선주민의 그것과 비교해서 대체 얼마나 더 시스템에 한정되고 더 상황과 결부되며 더 배치되고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여기서는 우선 비지배적인 사고에 내재하는 전(前)명제성이라는 테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면서, 지금까지 요구하지 못한 타자의 ‘합리성’에 대한 권리의 재확립를 중요하게 다루겠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깊은 사고는 다른 사고의 이마주의 투영이지, 다른 야생의 이마주의 투영이 아니다. 명제야말로 이성적인 언명의, 그리고 또 이론적인 담론의 원자의 프로토타입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한다. 즉 명제 스스로가 명료하지 않은 사고에 대항해야 한다. 비명제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원초적인 것으로서 비개념적인 것 나아가 반개념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만다. 이것은 물론 개념 없는 타자에 ‘찬성’하기 위해, 혹은 ‘반대’하기 위해 주장된다. 이성적 개념의 부재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성과 행동, 사고와 감정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민족이 실존적으로는 소외되지 않음의 표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찬성하든지 반대하든지 이것들 모두는 명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이며 관념의 극히 고풍스러운 개념을 재인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잇단 개념을, 개별적인 것을 보편으로 포섭하는 조작으로서, 본질적으로 분류적이고 추상적인 운동으로서 파악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개념의 거부가 아니라 개념 속에서 미세화철학(infra-philosophy)을 집어내고 그와 상호적으로 미세화철학 속에서 잠재적인 개념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개념의 인류학적인 개념에 다다라야 한다. 그것은 모든 창조적인 (‘야생의’) 사고의 명제외부성을 그 적극성 자체로 떠안는 (생득적인 것이든 획득된 것이든) 범주라는 전통적인 개념과 (명제적이든 준명제적이든) 표상이라는 전통적 개념과 (꽃에 대한 것이든 홑꽃이든 겹꽃이든) 신념이라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 혹은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는 개념의 개념에 관한 인류학적인 주장의 하나이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에 그것은 어떤 아카데믹한 환경에도 수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이러한 담론에 관한 어떤 구조적인 결과도 낳을 수 없는 인류학적 담론으로서 근원적으로 외재적으로 위치 지어진 담론-대상에 포함된 내용의 특성과 관련된 서술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보로로족과 쿠나족이 ‘퍼스펙티브주의자’였는지를 묻는 질문이 어느 정도 토론의 장에 열기를 가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인류학자는 숲 속을 어슬렁거리면서 여기저기 ‘퍼스펙티브주의자’를 가리키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술 더 떠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잘 표현된 정신을 들고 와서 ‘어떻게 하면 퍼스펙티브주의자일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이도 있었다. 반대로 회의주의자들은 냉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심중을 애써 드러내려했다. 즉 퍼스펙티브주의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떠들썩한 소란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을 둘러싸고,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학의, 어찌 되어도 상관없을 세부에 집착할 뿐이었다. 여하간 그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히려 특정하게 제약된 프래그머티즘에 의해 산출된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특수효과와 관련될 뿐이었다. 그러한 프래그머티즘의 원리는 원리이고, 관계자—관계자가 재규어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들이 재규어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재규어가 말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말의 병(病)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수용의 맥락에서 보면, 이 모든 사태는 인류학자의 이론으로서 퍼스펙티브주의의 귀결에 관한 진지한 검토가능성을—그것[퍼스펙티브주의]은 인류학에서 모든 개념의 실체에 부과하는 변용이다—단숨에 막아버린다. 결국 [퍼스펙티브주의라는] 사고에 곁붙는 암호로 표시되는 사고는 인류학의 수많은 대상 중 하나를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야말로 인류학의 또 다른 사고를 기획한다. 그것은 서양적인 ‘인류학적 인류학’에 대항하는 또 다른 인류학으로서, 그것을 근저에서 뒤집는다.

 

 

3.

 

부분적으로 말하면, 퍼스펙티브주의의 자연주의자적 (아날로지주의자적) 해석이란 퍼스펙티브주의를 어느 한 세계의 대상화의 도식의 하나, 즉 애니미즘의 하나, 수많은 특성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인류학이라는 국지적인 장소에서 필리페 데스콜라의 대작인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2005)에서 제시한 개념을 잇는 길을 닦는다. 나는 여기서 이 기념비적인 저작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래서는 나의 작업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나와 데스콜라의] 차이점이 오랜 세월에 걸쳐 상호 내실 있는 대화를 기반으로 표명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학이라는] 우리 학문이 다루는 그 외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깊은 동의를 전제로 한 것이다.

 

 

4.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서 설정된 파노라마를 재검토하며 수정하고 완성시키는 작업이다. 이 속에서 데스콜라는 토테미즘이라는 관념을 세 개의 ‘존재론’ 혹은 ‘동일화의 양식’—이 동의어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재-종별화한다. 이 세 개의 존재론이란 애니미즘, 아날로지주의, 자연주의이다. 그렇게 데스콜라는 사각형의 매트릭스를 구성한다. 그 매트릭스에서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이, 서로 다른 존재의 종(種)들의, 신체적 및 정신적인 차원(「데스콜라의」 신조어로는 ‘물리성’과 ‘내부성’)의 연속성 혹은 비연속성의 관계에 따라 배분된다. 이 매트릭스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관한 졸고(1998/1996)에서 내가 제시한 도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데스콜라는 고맙게도 다른 곳에서 그에 관해 주기(注記)해 주었다. 앞서도 일부를 참조했지만, 나는 이 텍스트에서 두 개의 ‘교착하는’ 존재론적 도식 간에 간결한 대비를 설정했다. 그것은 존재하는 종(種)들 간에 형이상학적인 연속성(종(種)으로서의 혼)과 물리적인 비연속성(특정의 신체)의 조합이다. 이러한 조합은 선주민의 심리형질적인 다자연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물질적인 연속성과 형이상학적인 비연속성의 조합이야말로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인 다문화주의에 전형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창조물의 모든 잔여와 정신적 실질에 의해 (그 동시대적인 변화에 의해) 절대적으로 분리되면서도 신체적 물질을 통해 소통한다. 이렇게 드러난 대비는 개략적으로 말하면 데스콜라의 애니미즘주의자와 자연주의자의 도식을 그려낸다. 다른 두 개의 도식인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형상, 즉 물리적 차원과 형이상학적 차원 간에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평행한’ 관계가 그려내는 형상을 덧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준 최초의 충격은 우리 세대의 많은 인류학자들(혹은 철학자들)을 이끈 충동과 거의 같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야생의 사고의 비연속적이고 분류적인,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토테미즘적이고 신화론적인 경향의 측면에는 관심을 보인 반면, 연속적이고 ‘초범주적(trans-category)’인, 환유적이고 우발적인, 범형적이고 의례적인 양상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결국 우리는 수년간, 레비-스트로스 쪽으로 나아가기를 권유하면서도 오히려 레비-브륄 쪽을 재검토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메제글리즈와 게르망토[각주:3]라는 갈래길과 마찬가지로 이 방향으로 향하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하간 이 방향들은 화자의 시점을 믿어야할 만큼 먼 것은 아니다.) 데스콜라가 제1의 형이상학으로 제시한 애니미즘은 그 자신의 아마존 경험에서 출발하여 바로 이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애니미즘은 인간 이외의 존재자도 인격이며 사회적 관계의 항이라는 발상을 근본적인 전제로 삼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토테미즘과 반대로 애니미즘은 인간 내적인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 자연의 다수성(多數性)을 사용하는 분류체계이며,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범주를 사용한다. 그리하여 두 개의 계열(série)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열—인격의 계열—이 존재하게 되며 ‘자연’과 ‘문화’ 간의 관계는 은유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환유적인 인접성에 속하게 된다.

 

나로 말하자면, 야생의 사고와 지나치게 결부된 관념을 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야생의 사고』에 포함된 토테미즘과 공희(供犧)의 (이 책의 8장 및 9장을 참조할 것) 극히 문제적인 대립이라는 ‘마이너’한 극을 논했다. 내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샤머니즘과 카니발리즘을 분석할 때 공희의 축에 놓은 것(레비-스트로스의 의미에서)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 쪽에 두었다. 그리고 대략 이러한 개념상의 ‘동의어’ 덕분에 우리 작업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공희의 환유로 향했다. 이 방향에서 분류적인 이성과는 ‘다른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조주의의 중심적 개념의 조합적인 것도 아날로지적인 것도 아닌 해석을, 변용이라는 해석을 지향했다. 그렇게 나는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저자와는 다른 궤도를 밟아갔다. 데스콜라는 『야생의 사고』의 프로젝트를 확장하고 더 풍부하게 만들고자 했다. 토테미즘의 관념을 레비-스트로스가 받아들인 종적(種的)인 의미에 한정하면서 (레비-스트로스에게 이 관념은 결국 의미작용의 활동성의 동의어에 불과했다) 그것을 존재론의 하나의 타입으로 변용해버렸기 때문에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의 근본적인 네 개의 존재론의 연역절차는 명확하게 ‘공희적인 것’이 아니라 ‘토테미즘적인 것’(레비-스트로스의 본래의 의미에서)으로부터 촉발되고 있다. 데스콜라는 그의 대상을 닫힌 조합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목적은 실천의 도식의 유형학을—세계와 타자와의 대상화의 형식을—유한의 구성요소의 규칙에 따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날로지주의자적’임과 동시에 ‘토템주의자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가 고전적인 구조주의적 우주론에 기여한 공헌의 특수성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을 두 개의 하위타입으로 분할한 것, 즉 데스콜라가 말한 의미에서의 토테미즘과 아날로지주의의 토테미즘으로 분할한 것에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지주의의 정의는 일련의 문명화된 현상과 스타일에 (특히 일찍이 ‘야만적’이라고 불려왔던 민족의 그것에) 매우 적합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아날로지주의는 무엇보다 『자연과 문화의 저편에』에서 주장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 책은 엄청난 고증학적 지식과 섬세한 분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론과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아날로지주의자적인 것이다. 그는 전체적 분류로 기울어져 있고, 동일화로, 대응시스템으로, 성질로, 미크로코스모스-매크로코스모스적인 투영의 도식을 편향적으로 선호한다. 실제로 [책의] 구성을 보면 데스콜라의 시스템이, 그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네 개의 존재론에서 하나를 우세하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동일화시키는 사고 자체가 아날로지주의자의 사고인 것이다. 애니미즘주의자적인 정신 혹은 자연주의자의 뇌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령 퍼스펙티브주의적 사고이며, 바로 이 책이 그 하나의 비전이다.

 

내가 이 책에서 설정한 문제는 구조주의를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강도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며,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스콜라가 해명하고 넘어선 도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야생의 사고』를 『말과 사물』과 동일시한 후에 그것[『야생의 사고』]을 다시 쓴 것이다. 반면, 내가 최근에 시도한 도전은 『천의 고원』을 통해 그동안 인류학에서 잊혀져왔던 모든 것들을 되새기면서 그것들을 토대로 『신화학』을 재독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분류가 가진 문제성에 알레르기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필연적인 로고스중심주의성과 그만큼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우리 인류학자는 기분상으로는 모두 아날로지주의자이다.… 이 의미에서 퍼스펙티브주의자는 분류적인 리비도의 재중복화 혹은 ‘강도화’이다. 이 특징적인 문제는 분류된 것이 분류하는 것이 될 때 무엇이 생성되는지를 정식화하는 만큼 그러하다. 문제는 자연이 그 속에서 분할되는 종을 질서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 종들이 스스로 이러한[질서화] 작업을 하는지를 알 게 될 때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있다. 이에 대해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그 종들은 어떠한 본성을 가졌을까?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정확하게는 같은 의미인데—우리가 선주민에게 인류학자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때 무슨 일이 생길까?

 

 

5.

 

그리하여 ‘사회’ 혹은 ‘문화’ 인류학은 ‘형질’ 혹은 ‘자연’ 인류학과 대비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류학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는 인류학이 연구하고 있는 민족에게 ‘사회’ 혹은 ‘문화’의 위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민족에게 인류학이란 어떤 것인가—그 민족이 행위자이고 이론적인 수동자[피관찰자]는 아니라고 말하는 인류학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학을 만드는 것이 인류학을 비교하는 것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뜻한다. 물론 비교만이 우리의 분석의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비교는 우리의 최초의 수단이자 최후의 지평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교하는 것은 항상 이미 반드시 구조적인 방법과 같은 의미에서의 비교였고(『신화학』에서 적용된 것과 같은 비교), 모든 변용의 대상은 반드시 다른 것의 변용일 뿐이었고, 오리지널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가 모두 변용에 이른다면, 비교란 변용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문화가 스트라샌의 화려한 과정적 정의(1992c: 47)처럼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의 다른 영역 사이에서 아날로지를 그려내는 방식에 있다’면, 모든 문화는 거대하고 다차원적인 비교장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인류학이 와그너가 말한 것처럼(1981: 35), ‘문화를 문화의 통역에 의해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때 ‘우리의 탐구를 특징짓는 조작이란 어떤 것이든 문화의 일반적 성질이어야 한다’. 결국 인류학자와 선주민은 ‘직접적으로 비교가능한 지성의 조작’ 속에서 서로에게 관여한다(Herzfeld 2001: 7). 그러한 조작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비교이다. 문화 내부의 관계 혹은 내적인 비교(스트라샌이 말한 ‘영역 사이에서의 아날로지’)와 문화 간의 관계 혹은 외적인 비교(와그너가 말한 ‘문화의 발명’)은 엄밀하게 존재론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비교가능성은 반드시 직접적인 번역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존재론적인 연속성은 인식론적인 투명성을 함의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하면 아마존의 민족들이 탐지하는 아날로지를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에서 재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아날로지를 원주민의 비교와 비교할 때에 우리의 비교에 무엇이 생성될까?

 

우리는 여기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적인 인류학을 원용함으로써, 다의성(多義性)의 관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비교라는 우리의 아카데믹한 인류학에서 상징적인 절차를 재개념화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는 조작이란 관찰자에 의해 이뤄지는 동등하게 외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둘 이상의 복수의 실체들 간의 명확한 비교는 아니다. 그것은 정수를 찾아낸다거나 입법적인 가치를 갖는 변이(variation)를 동일시하는 것일 뿐이다. 분명히 이것은 인류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절차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장치에서 다수 가운에 하나, 즉 인류학적 방법에서 하나의 ‘통제적 규칙’에 불과하다. 반대로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비교는 방법의 ‘구성적 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개념적 장치와의 연관에서 ‘관찰되는 것’의 실천적이고 담론적인 개념의 번역이 포함된 절차이다. 따라서 비교에 대해 말할 때에 우선 다뤄지는 비교란 종종 불명료하고 자동적인—그 설명 혹은 논점화는 방법의 중요한 계기이다—비교이며, 그 속에서 인류학자의 담론이 그 하나의 항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으며 필드워크나 민족지적인 모노그래프의 독해가 처음부터 기능하는 그러한 비교이다.

 

비교의 이 두 개의 양상은 등가적인 것도 별개의 것도 아니다. 그 제1의 조작은 통상 권장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와 타자의 대립적인(그것은 제2의 조작을 부각시킨다) 대상화적 삼각형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며, 관찰된 자에게 충분한 속성적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만큼은 알차다. 여기서 추려진 삼각형은 참된 삼각형이 아니다. 2 더하기 1이 필연적으로 3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인류학자(‘1’이다)가 자신의 문화와 다른 둘 이상의 복수의 문화—그것들은 서로 다르다—의 관계항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카친족과 누어족을 비교할 때, 그는 항상 카친족과 누어족의 요구에 따라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는 비교의 무대에서 사라져 그 자신이 카친족 혹은 누어족으로부터 [누구인가를] 문제제기를 받는(부여받는) 것을 비가시하고 마치 이 양자가 스스로 비교를 행하는 것처럼 하는…그러한 관점을 행한다. 이와 같이 카친족과 누어족은 인류학적인 담론 내부에서 발생한다. [인류학자들이라는] 다른 사회문화적 실체로부터 제기된 문제의 의해, 그들이 비교가능해진 사회문화적 실체라는 공통의 대상성을 부여된다. 그러한 타(他)의 실체는 비교라는 움직임의 규칙을 규정하면서 유비 없이 이 움직임의 외부에서 출현하고 만다. 만약 이 논의가 아감벤의 ‘예외상태’라는 발상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면, 그것은 나의 논의가 바로 그 발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의 억견(臆見 doxa)과는 반대로 비교에 의해 복수화가 산출한, 대상에 내재한 대칭성이란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의 대칭성에 관한 마법의 힘을 가진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주체는 비교의 순수정신이 될 수 없다. 나아가 숨겨진 타(他)의 비교—앞서 언급했다시피 관찰자가 관찰되는 자와의 관계에 포함되는 비교—는 그 자체로 판명될 수 없다.

 

이러한 포함이야말로 ‘번역’이라 불린다. 오늘날 문화적인 번역을 인류학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투적이다. 물어야 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이 번역이며 번역일 수 있으며 번역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조작은 어떻게 실현하는가? 이다. 이 속에서 바로 타랄 아사드(Talal Asad 1986)가 제시했듯이, 내가 책임을 진(번역한) 말에서 사태는 복수가 된다. 인류학에서 비교는 번역의 역할을 맡는다. 그 역은 옳지 않다. 인류학은 번역을 위해 비교를 행한다. 인류학은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일반화하고 해석하고 맥락화하고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 비교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어느 속담처럼 번역이 언제나 배신이라면, 그 이름을 고치는 번역은—여기서는 발터 벤야민(혹은 오히려 루돌프 판비츠(Rudolf Pannwitz))을 차용한다—도래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며, 출발하는 말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번역이란 버려진 개념이 번역자의 개념적인 장치를 뒤틀고(déformer) 전복시키는 번역이다. 원 장치의 의도는 그 속에서 해명되며, 그리하여 도래하는 말은 변용된다. 번역, 배신, 변용. 구조인류학의 이 과정은 주지하다시피 ‘신화’라고 불린다. 그것[‘신화’]은 ‘구조인류학’의 동의어이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를 번역하는 것은 우선 그것이 포함하는 번역의 이마주를 번역하는 것이다. 억제된 다의성의 이동이라는 이마주가 그에 해당한다. 여기서 ‘억제된’이란 걷기를 억제된 낙하로 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의성에 대한 주장이며, 즉 동의어적인 개념 사이에서 타성(他性)을 참조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다의성은 무엇보다 다른 퍼스펙티브적인 위치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서, 인류학적인 시도의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로서 나타난다.

 

퍼스펙티브주의의 선주민적인 이론은 다양한 양식의 신체성이 ‘자연적으로’ 세계를 정동적인 다양성으로 경험하는 방식 속에서 암묵적인 비교로 이뤄진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이론은 우리에게 역립(逆立)된 인류학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타입의 심성이 ‘문화적으로’ 세계를 표상하며 그러한 세계가 그 다양한 개념적인 비전의 유일한 기원으로 정립되는 방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민족인류학이 명석한 비교에 의한 절차에 따르는 한. 이제 퍼스펙티브주의적인 문화주의자의 기술(記述)이 부인하고 탈정당화는 것은 인류학적 이성이 자신의 대상을 원초적 혹은 물신화된 형태로서 회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반(反)- 혹은 전(前)- 인류학이다.

 

퍼스펙티브주의의 개념은 이러한 역립의 역립을 주장한다. 이제야 그것은 선주민의 주변을 에워싼다. 선주민의 전회. [이것은 물론] 아담 쿠퍼(Adam Kuper 2003)가 거대한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운동—그것은 ‘근대의 선주민화’(Sahlins 2000)가 말했던 반성적인 위치의 이동을 뒤집는 것인데—에 대해 비꼬는 투로 말한 ‘선주민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그것은 전회(turn)이며 거스르는 것, 카이로스[각주:4], 덫, 우회, 예기치 않은 전회이다. 토마스 하디가 아닌 퍼스펙티브의 예술을 소비한다. 천재 헨리 제임스가 중요하다. 선주민의 전회란 (우리 중 몇몇 동료가 가끔씩 즐기는 선주민 헐뜯기가 아닌) 나선형의 전회여야 한다. 아담 쿠퍼의 퍼스펙티브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역사는 실제로는 괴담이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주의적이고 인지적인 인류학 혹은 (어느 날 내가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르(Patrice Maniglier)에게서 들은 말로) ‘또 다른 인지주의’ ……

 

 

6.

 

그러나 최후에 남는 문제는 레비-스트로스가 이야기한 앤틸리스(Antilles) 제도의 우화이다. 그것은 다만 퍼스펙티브주의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서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이 퍼스펙티브주의자이다. 그것은 간종적(間種的)인 퍼스펙티브주의를 주제화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복수(複數)의 신화에 대한 (하나로 수용되지 않는) 역사적 수용으로 읽힌다. 나는 이 서사를 다음과 같이 몽상했다. 즉 주인공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어느 낯선 마을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주민들은 그를 환영해주었고, 그에게 호리병에 든 ‘카사바의 술’을 마시고 다시 젊어지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권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민들이 그에게 건넨 호리병 안에는 인간의 피가 들어있었다. 그의 결론은 이 무리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우화는 커뮤니케이션의 분리=이탈의 주변을 순회하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화자들은 동일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그것을 알지 못한다(푸에르토리코의 우화의 경우에서 ‘대화’는 상호적인 자민족중심주의에 대한, 레비-스트로스가 세운 비교추론의 평면과 관련된다). 모든 것은 마치 재규어와 인간이 다른 사물에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같고 서양인과 선주민 또한 같은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에 따라 [‘대화’란] 자기기술적인 개념이 타자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자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서양인과 선주민이 개념을 규정하는 기준(의도)으로서 이해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국 레비-스트로스의 역사도 신화와 마찬가지로 다의성의 주변을 맴돈다.

 

잘 생각해보면, 앤틸리스 제도의 우화는 민족지적인 문화 혹은 우리 자신의 필드워크의 메모에서 보이는 수다한 우화와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그것들은 무엇보다 인류학적인 시추에이션 혹은 사건을 다룬다. 예를 들어 쿡 선장의 그 유명한 최초의 에피소드에서 마샬 살린스가 분석했듯이(1985), 푸에르토리코의 교착된 경험의 구조적 변용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두 개의 프로토타입과 관련된다. 아마존의 선주민에게서 보면, 간(間)문화적인 것이란 간종적(間種的)인 것의 특수한 일례일 뿐이며, 역사란 신화의 일례일 뿐이다.

 

강조해두겠다. 다의성이란 인류학자와 선주민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협하는 수많은 병리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적인 무능력, 맥락에 대한 무지, 공감의 결여, 부작법(不作法), 순진무구, 악의, 망각 등의 인류학적인 언명화를 경험적으로 헤매는 모든 뒤틀림(déformer)과 태만이 아니다. 이러한 우화적인 병리와는 반대로 다의성이란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범주이며, 인류학에 고유한 문화적 번역이라는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차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정적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인류학적인 담론의 가능성의 조건이며, 그 실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즉 권리상의 의문이다). 번역이란 다의성의 공간으로 자신을 던져 놓고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다의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번역의 전제는 다의성이 결코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정반대로 번역은 다의성에 가치를 부여하고 잠성화(潛性化)시키기 위해, 즉 접촉하는 ‘언어’의 실재하지 않는다고 상상된 공간을, 즉 다의성에 의해 은폐된 공간을 개방하고 확장하기 위해 행해진다. 다의성은 관계를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근거를 마련하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퍼스펙티브의 차이이다. 번역이란 언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다의성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며, 근원적인 일성성(一聲性)과 궁극적인 장황성(冗長性 redundancy)을 상정함으로써 타자를 침묵 하에 보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있는 곳의 것과 우리가 ‘그렇게 서술하고자 했던’ 것 간의 본질적인 유사성이다.

 

허츠펠드(Michael Herzfeld) 씨는 최근 다음과 같이 논했다. “인류학은 다의성(무이해)에만 전념한다. 인류학자인 우리의, 우리 자신에 대한 다의성도 포함해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의성이란 일반적으로는 공통하는 의미를 가진 다양한 관념 간의 상호적인 통약불가능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공통의 의미를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2003: 2)라고. 나는 이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인류학자가 (권리상)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허츠펠드가 ‘공통하는 의미’라고 말한 것이 바로 공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 의한 것뿐이라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나는 또한 문제로 삼는 ‘관념’의 통약불가능성은 통약불가능성을 방해하기는커녕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화한다고 주장하겠다(람벡(Michael Lambek)이 제기한 것처럼). 왜냐하면 통약불가능성만이 구태여 비교되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통약가능한 것을 비교하는 것은 상호 가능한 것으로 귀환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결국 무이해는 퍼스펙티브적인 다자연주의가 찾아내어 다의성의 의미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다의성은 (결여라는 의미에서의) ‘해석의 결여’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해석의 ‘과잉’이다. 그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해석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이 해석들은 필연적으로 다수적이며, 세계를 보는 상상적인 방식이 아닌 보이는 실재의 세계와 관련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실제로 다른 종의 실재적 세계는 각각의 시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세계’는 이렇듯 다양한 종(種)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점으로서 각각의 종의 다수성의 추상공간이다.

 

그리하여 인류학은 다의성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inter/esse라는 간(間)존재, 간(間)실재라는 자의적인 의미에 놓인다. 그러나 로이 와그너(1981: 20)가 말했듯이, 뉴기니의 다리비 족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이해하지 않는 그들의 방식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지 않는 방식과 같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이제까지 제시한 인류학의 정의들 중 가장 적합한 정의일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포인트는 무이해라는 경험적 사실이 아니라 쌍방의 무이해가 같지 않다는 ‘초월론적 사실’에 있다. 따라서 누가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누가 누구를 오해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도 중요치 않다. 다의성은 착오가 아니며 멸시도 아니며 오진도 아니다. 그것은 다의성을 포함하는 관계성의 근거 그 자체이며, 외부와의 관련 속에 늘 있다. 착오와 멸시가 그 자신으로서 구성되는 것은 주어진 ‘언어의 움직임’일 따름이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언어의 다른 움직임들 간의 간극 속에서 생성된다. 착오와 멸시는 다시금 구성되는 전제를 상정하며, 등질적으로 구성된다. 그에 비해 다의성은 문제를 일으키는 전제의 이질성을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고 전제로서 이질성을 상정한다. 다의성은 전제를 규정한다. 왜냐하면 전제가 다의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다의성은 변증법적인 모순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다의성의] 총합은 이접적이며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전의 더 다른 다의성을 규정해야 한다.

 

다의성이란 결국 주체적인 실패가 아닌 객체화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착오도 환상도 아니다. 그것은 물상화된 혹은 물신화된 언어에서 객체화의 상상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이 아닌 다의성은 모든 사회관계의 경계이며, 그리하여 언어의 움직임이 최대한 다수화하는 ‘간문화적(間文化的)’인 관계의 경계의 사례에서 초객체화된 조건이다. 이러한 다수화는 말할 것도 없이 인류학자의 담론과 선주민의 담론과의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문화에 관한 인류학자의 개념은 와그너가 논한 것처럼 다의적이다. 그것은 지적인 다의성의 해결의 시도로서 나타난다. 다의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사람이 어떤 문화를, 그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으로 상상할 때 산출되는 패러독스”(1981: 27)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고로 ‘오해’가 ‘이해’로 자기변용할 때, 인류학이 맨 처음의 자신의 무이해를 ‘그들의 문화’에서 선주민의 주제로 변용할 때, 그리고 백인이 ‘원산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상품’인 것을 선주민이 이해할 때, 그러할 때조차 다의성은 동일성이 되지 않는다. 타자의 타자는 언제나 타자이다. 그리고 만약 다의성이 오진, 환상, 거짓이 아니라 차이의 관계적인 실증성의 형성 그 자체라고 한다면, 그에 대립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초월론적인 의미의 실재를 희구하는 일의적인 것이다. 착오나 환상은 무엇보다 각각의 다의성의 이면에 일의적인 것을 숨긴 것이며, 인류학자는 [자신을] 그 복화술사로 상상한다.

 

 

7.

 

따라서 무엇보다 우선 선주민으로 회귀하는 것 이상으로, 혹은 그것과 별개로 의문이 생긴다. 만약 회귀가 있다면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사상(事象)으로의 놀라운 회귀’이며, 철학의 전면적인 회귀이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그것들은 우선 동의어일까? 그렇다면 좋다!) 간의 배타적인 양자택일이 아니라 실험형이상학 혹은 필드의 철학지리학으로 이해되는 인류학과, 개념을 창조하는(들뢰즈&가타리 1991) 고유의 에스노인류학의 실험으로 이해되는 철학과의 이접적 총합으로서 회귀이다. 이 인류학과 철학의 횡단화는—이것은 『천의 고원』의 저자가 ‘악마적 결연’으로 지명한 것인데—같은 목표를 향해 설정되어 사고의 영속적인 탈식민화 상태(어떤 내포의 고원)에 진입한다.

 

사회인류학이나 문화인류학이 훨씬 이전부터 근본적 및 전체적으로 철학적 문제와 개념에 의해—특히 무엇보다 ‘신화’라는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그 문제에 이르기까지—횡단해온 것들을 다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시사한 것처럼, 철학으로부터, 즉 인류학의 문화적 매트릭스로부터 어떻게 멀어졌는가를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극히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고로 여기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학자가 철학자와 결코 단절하지 않고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과 구태여 맺어야 하는가? 그것이 바라는 것은 분명 무엇인가? 무엇이 가능한가? 칸트를, 하이데거를,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면서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를 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내용의 평면에서 직접적인 평행성을 설정하는 것도 우선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마존적인 우주론에서 본질의 세계와 현현(顯現)의 세계 간의 다의적인 유사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플라톤의 독해로 이끌릴 수 있다(그러나 그 유일한 관심은 이 선주민의 플라토니즘이 얼마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가를 나타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면, 이 모든 것은 야생의 사고가 우리에게 부여한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류학이 연구해온 집합성에 의해 발견되는 수많은 복잡한 기호실천적인 배열 속에서 우리가 착목하고자 하는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며, 특히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다. 나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고에서 파악되는 파동을 전파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로서 그것을 선택했다.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는 인류학적 담론에 의해 재총합되는 대상이다(굳이 말하자면, 선주민의 이론에서 실천적인 방식으로 이 정도까지 알찬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메리카의 어느 민족지학자가 들뢰즈주의자가 되는 것과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어느 선주민이 되는 것, 이 둘의 만남의 결과이다. 선주민이 되는 것,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천의 고원』의 생성에 대한 장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것은 일찍이 내가 소리 높여 선언했듯이 “선주민들은 들뢰즈주의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렇기도 하다라는 것은 우선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을 선주민의 사고로 두드려 보면 공허한 소리만 들리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들뢰즈에 의해 특권시된 일련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 속에서 비주류의 계보 속에 있는 만큼 그 전통의 외부끼리의 연대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지 않다. 선주민은 들뢰즈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칸트주의자이기도 니체주의자이기도 베르그송주의자이기도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이기도 메를로-퐁티주의자이기도 마르크스주의자이기도 프로이트주의자이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레비-스트로스주의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버마스주의자이기도 한 선주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더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분명 ‘문제는 질 낮은 방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다자연주의자의 반(反)인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철학을 야생의 사고의 빛에 비추어 읽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의 잠재성으로서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가 되는 것, 이것을 현실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 밖의 사고와의 만남을 위해 저 밖을 사고하며, 다른 끝으로 향하는 것(그러나 중국을 사고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고의 경험은 모두 우리의 사고의 경험이다.

 

 

 

  1. 이마주는 프랑스어로 어떤 사물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상상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베르그송은 이 말을 자신의 현상학적 용어로 개념화한다. 베그르송의 이마주는 표상과 실재의 중간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2. 명제적 표상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식표상을 가리킨다. 즉 주체, 대상, 시간 등이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나타나는 추상도가 높은 표상을 말한다. [본문으로]
  3.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토 쪽은 시간상 한쪽 공간만을 선택해야 하는 산책길의 두 갈래로 나뉜 각각의 방향을 뜻한다. [본문으로]
  4.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시각’을 뜻한다. 이와 대조되는 말로 크로노스가 있다. 크로노스가 과거에서 미래로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흐르는 기계적인 시간을 뜻한다면, 카이로스는 인간의 주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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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2014 영어판, 일본어판은 2015년 10월 출간)의 일부를 번역했다. 이 책은 번역출간이 예정되어 있어서 번역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번역본이 (빨라야) 내년 말이나 되어야 나온다고 하고, 세미나 텍스트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다른 논문을 삼기에는 그 내용이 이 책만 못하다. 그래서 책의 일부를 번역하기로 했다. 내가 번역의 원텍스트로 삼은 것은 일본어번역본이다. 어차피 (저자가 정본으로 인정한) 불어본도 포루투칼어 논문과 영어 논문의 편집번역본이기 때문에 '중역'은 매한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방심하기로 했다. 오역에 관해서는 한국어번역정본이 나오면 비교참조할 생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교차독해하는 이 책의 일부를 굳이 번역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야생의 사고』의 독해가 여전히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의 사고』는 이제까지 서너번은 읽은 것 같다. 그런데도 책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지치긴 하는데 하다보면 논파되겠지..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식인의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식인의 형이상학』 또한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 사유방식의 전제를 완전히 뒤엎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생의 사고』보다는 친절한 것 같다. 이 책은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사상(事)의 놀라운 회귀

2장 퍼스펙티브주의

3장 다자연주의

4장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

5장 기묘한 상호교차

6장 다양체의 반-사회학

7장 모든 것은 생산이다

8장 포식의 형이상학

9장 횡단하는 샤머니즘

10장 생산이 모든 것은 아니다

11장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

12장 개념 속의 적(敵)

13장 구조주의의 생성

 

이 중에서 먼저 3장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앞으로 4장, 8장, 12장, 13장을 순차적으로 (시간 나는대로)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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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연주의

 

 

 

 

“분명 우리 근대인은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내재평면(內在平面 Plane of Immanence)을 잃고 말았다…(들뢰즈&가타리 1991: 100).”

 

[내가 이 책에서] 지금까지 기술한 것은 모두 선주민의 이론적 실천에 따른, 대륙의 신화학의 창시자적인 직관에 이끌린 일종의 연역적 전개에 다름 아니다. 즉 그것을 채우고 구성하고 분할하고 현실적인 실재로 넓혀가는, 모든 ‘순간’의 존재론적인 상호침투에 의해 규정되는 고유하게 역사적인 환경—어떤 유명한 절대적 과거, 결코 한 번도 현재가 되지 못하였기에 지나가버린 것도 아닌 과거, 그리하여 현재가 그저 흘러간다는 그러한 전(前)역사적인 환경—의 직관에 의한 전개에 다름 아니다.

 

『신화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선주민의 내재평면을 서사화하는 것은 그곳에서 나타나는 인물 혹은 행위자의 종(種) 형성의 이유와 결과—특징적인 신체성의 상정—를 특권적인 방식으로 해명한다. 이 속에서 모든 것은 인간적 측면과 비인간적 측면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뒤섞인 불안정한 일반적 조건을 나누어가진다.

 

[나는 당신에게 단순한 질문을 하겠다. 신화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시대의 이야기=역사라고. 이 신화의 정의는 내개 꽤 흥미로운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Lévi-Strauss & Éribon 1988: 193).

 

이 정의는 실제로 매우 깊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가 염두에 둔 것은 [지금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향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겠다. 신화적 담론이란 완전한 투명성을 갖춘, 잠재적이며 전(前)우주론적인 조건에 기초하여 사물의 현재 상태를 현실화시키는 운동의 영역에 있다. 그것은 ‘카오스모스’이며, 그곳에서는 존재들의 신체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이 각각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 전(前)우주는 보통 서술되는 것처럼 인간과 비인간 간의 원초적인 동일화를 보이기는커녕, 무한의 차이에 의해 관통될 뿐만 아니라, 차이가 각각의 인물 혹은 행위주에 내재할 때조차도(혹은 그러한 탓에) 그러하다. 이 무한의 차이는 현실적 세계의 종(種)과 질(質)을 구성하는, 무한하고 외재적인 차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에 따라 신화에 고유한 질적 다양성의 영역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신화에서 샤먼이 재규어의 모습을 한 인간의 정동 덩어리인지 인간의 모습을 한 고양이과 동물의 정동 덩어리인지는 엄밀하게 결정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변신(metamorphose)’은 하나의 사건, 즉 현장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질적 상태의 외연적인 위치변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질적인 상태의 내포적인 중첩이다. 신화는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변신은 과정이 아니며, ‘아직껏’ 과정이 ‘아니’며, ‘결코’ 과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신은 과정의 과정에 앞서 그 너머에 있다. 그것은 생성의 형상(혹은 형상화)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술된 신화 담론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이어짐(線)이란 식별 불가능한 전(前)과정적 흐름이 우주론적인 과정 속에서 흘러갈 때의 순간적인 박편(薄片)이다. 이후 재규어의 (혹은 인간의) 고양이과 동물적 및 인간적인 차원은 각각 잠세적인 지도와 지면으로서 서로 교대해가며 기능하게 된다. 이에 기초하여 원초적인 투명성 혹은 무한한 착종은 세계의 모든 내적인 존재자들의 구성을 특징짓는 (인간의 혼의, 동물의 정신의) 비가시성과 (인간의 신체와, 동물의 신체적인 ‘의복’의) 불투명함 속에서 분기되며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가시성과 불투명성은, 잠재적인 기저가 파괴 불가능한 것이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반전 가능하다(선주민의 세계의 재창조라는 거대한 의례는 바로 이러한 파괴 불가능한 기저의 반(反)-실현 장치이다).

 

우리는 앞서 신화에서 유효하게 움직이는 차이란 무한하고 내적이며, 그것은 종(種) 간의 외적으로 유한한 차이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신화적인 사건에서 행위자와 피행위자를 규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들이 다른 존재일 수 있는 능력을 내재적으로 갖춘다는 것에 있다. 이 의미에서 각각의 인물은 무한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라진다. 그러한 인물은 신화적 담론에 의해 단숨에 설정되고 치환되고 변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차이화’는 ‘정신’ 개념의 특징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모든 신화적 존재는 정신으로서(혹은 샤먼으로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든 유한적인 양태 혹은 현실적인 존재자는 그 존재이유가 신화 속에서 말해지며 정신으로서(정신이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다. 정신적 주체 간에 상정되는 미분화는 유적(類的)이든 종적(種的)이든 개별적이든 본질적이고 고정된 동일성, 즉 구성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

 

결국 신화는 유동적이고 내포적인 차이에 의해 명받은 존재론적 영역—그것은 이질적인 연속성 위의 각각의 점에 우발적인 일로 갖춰진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영역에서 변용은 형식에 앞서고 관계는 항에 우선하며 사이는 존재에 내재한다. 각각의 신화적 주체는 순수한 잠재성이기 때문에 ‘다시금 이미’ 그것이 ‘뒤이은 곳의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포스트신화적인 (광의의) 특징화에 의해 도입된 외연적인 차이는 구조인류학의 거대한 테마(신화소)를 구성하는 연속성에서 이산성(離散性)으로 이행하는데, 무한의 내적인 자기동일성을 가진 몰(mole)적인 덩어리로 결정화되고 만다(각각의 종은 내재적으로 등질적이며 각각의 분지항(分肢項)은 그와 마찬가지로 무차이적으로 종을 그 자체로 표상할 수 있다). 이 덩어리들은 외재적인 틈새에서 분리되고 양화되어 측정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種) 간의 차이는 상관성의, 비율의, 성격의 교대의, 동일한 영역의, 동일한 성질의, 유한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전(前)우주론적 세계의 이질적인 연속성은 그리하여 그 장소를 등질적인 이산(離散)에 물려준다. 그곳에서 각각의 존재는 그 자신뿐인데, 이것은 그 자신이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신이 증명하는 것은, 모든 잠재성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으며 신화의 유동적인 소용돌이는 소리를 지어내지 않고 타입과 종(種) 간의 명백한 비연속성 하에서 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관점의 차이가 동시에 사라지면서도 증대하는 신화 속에 그 지리적 장소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 절대적 담론에서 각각의 존재는 다른 존재 속에서 마치 자기 자신에게—인간으로서—나타나는 것처럼 나타난다. 각각의 존재는 이미 명백하게 그렇게 구분되어 결정된 동물의, 식물의, 정신의 본성을 제시하면서 행동한다 해도 그러하다. 퍼스펙티브주의의 보편적인 도주점인 신화는 신체와 이름이, 혼과 행위가, 자기와 타자가 상호 침투하며 전(前)주체적 혹은 전(前)대상적인 환경 속에 내쳐진 존재의 상태를 말해준다.

 

신화학의 의도는 바로 이 ‘환경’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이행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이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다른 학자들이 시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서술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즉 이러한 이행의 중심성은 정반대로 그 깊은 아마존을—그 선주민의 사고에 대한 (다양한 의미에서) 이중의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화학』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점차 명백해진다고. 마찬가지로 이 이행에서 지나간 생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중요한다. 이 이행이란 서양의 통속적인 진화론에서 논하듯이 동물에서 출발하는 인간의 분화 과정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공통의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적인 거대한 분할은 문화가 자연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이라기보다 자연이 문화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는 어떻게 동물들이 상속되고 보유된 속성을 인간에 의해 잃게 되는지를 말해준다. 비인간은 오래된 인간이다. 인간이 오래된 비인간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유행하는 인류학이 보통 인간성을 문화에 의해 숨겨진 동물적 기반에 옷을 입힌 것—예전에는 ‘완벽하게’ 동물적이었으며 여전히 우리의 ‘근저에는’ 동물적인 것이 남아있다—이라 간주하는 반면, 선주민의 사고는 예전에는 인간이었던 동물과 그 외의 우주론적인 존재자들이 계속해서 존재하며, 우리에게는 명석하지 않다 해도 그러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제기되는 더 일반적인 질문은 왜 존재하는 각각의 종(種)의 인간성이 주체적으로는 명확하고 (그리고 동시에 극히 문제적이고) 또 객체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은지 (동시에 집요하게 확인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것이다. 왜 동물들 (혹은 다른 것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우리를 인간으로 보면서 그것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이다. 멧돼지는 자신을 멧돼지로 볼 수 없다(그리고 인간과 그 외의 존재자가 특수한 옷을 입은 멧돼지라는 사실로 사고한다라고 누구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그것들이 보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보고, 비인간으로부터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신으로—보인다면, 그 때 동물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퍼스펙티브주의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은 동물이란 ‘근본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결국 어떤 ‘근저’를, 어떤 다른 ‘측면’을 갖추고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가 차이화하는 것이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애니미즘도 아니며 토테미즘도 아니다. 애니미즘은 동물과 인간 간의 실질적 혹은 아날로지적인 유사를 주장하고, 토테미즘은 인간내부에서의 차이와 동물들 간의 차이 사이에서 형식적이고 상동적인 유사를 주장한다. 퍼스펙티브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각각의 존재 내부에서의 인간/비인간의 차이와 관련된 내포적인 차이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로지 차감적인 이중의 조건 하에서 다른 존재와 유사하다. 차감적인 이중의 조건이란 공통의 자기분리성이며 엄밀한 상보성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존재자의 존재양태가 자신에게 인간이며 다른 어떤 것에서도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성이란 상호 반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재규어는 재규어에게 인간이다. 멧돼지는 멧돼지에게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다(재규어가 인간일 때 멧돼지는 인간이 아니며 또 그 반대도 그러하다). 최종적으로 이것들은 ‘혼’을 의미한다. 만약 모두가 혼을 가졌다면 누구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모두가 인간일 수 있다면 명석 판명한 방식으로 인간인 것도 아니다.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형식으로서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만약 비인간이 인간이라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본다면, 왜 그것들은 모든 우주적 인물을 자기 자신을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 것일까? 만약 우주가 인간성으로 넘쳐난다면, 어째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에테르(ether)는 불투명할까? 혹은 최적의 경우에도 어째서 그것들은 인간의 이미지를 한 방향으로만 반사하는 뒷면 없는 거울과 같은 것일까? 이 질문들은 우리가 이미 앤틸리스(Antilles) 제도[카리브 해의 서인도 제도의 섬 중 루케이언 제도를 제외한 섬들]의 사례에 대한 논평에서 예기되었듯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체’라는 개념과 결부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통해 퍼스펙티브주의의 준인식론적인 개념에서 다자연주의의 참된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행한다.

 

주체적인 위치의 다양체를 포괄하는 세계라는 발상이 직접적으로 상대주의를 이끈다. 이 관념의 직접적ㆍ비직접적인 기술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의 기술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 아마존의 마쿠나(makuna)를 현지 조사한 아르엠 카즈(Århem Kaj)의 결론을 들어보자. 아르엠은 이 북서 아마존의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주의적인 우주를 자세히 기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서 존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관념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퍼스펙티브는 동등하고 유효하며 진정한 것’이며 ‘진정으로 정확한 세계의 표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93: 124).

 

이 필자는 확실히 옳다. 그러나 어느 한 의미에서만 옳다. 즉 그와 정반대로 마쿠나가 인간에 관해서는 세계에 대해 진정으로 정확한 표상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사체에 몰려든 구더기를 구운 생선처럼 보는 독수리들처럼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인간의 혼이 독수리에게 빼앗긴 것이며 그것들의 어떤 것으로 변용된 것이며 그 혈육이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그것은 상호적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때 인간은 중대한 병에 걸렸으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혹은 실천적으로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재규어에게도 일어난다. 각각이 구분되는 퍼스펙티브를 보유하기 위해—왜냐하면 그것은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온갖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샤먼만이 종에 관한 이중의 시민성(산 자와 죽은 자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그들은 특정의, 제약된 조건 하에서 그것들을 전달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론은 실제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민족지의 서술을 고찰함으로써 그와 정반대의 사태의 발생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까? 즉 모든 존재자는 세계를 같은 방식으로 본다(‘표상한다’). 변화하는 것은, 그것이 보고 있는 세계이다. 동물들은 인간들과 동일한 ‘범주’와 ‘가치’를 이용한다. 그들의 세계는 수렵과 어로, 요리와 발효음식, 교차와 전쟁, 통과의례와 샤먼과 추장과 정령과 … 등등의 주변을 순회하지 않는가? 만약 달이, 뱀이, 재규어가 인간을 맥(貘)이나 멧돼지처럼 본다면, 그것은 달과 뱀이 우리처럼 맥이나 멧돼지를 먹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인간의 음식물을 먹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영역에서 인간인 비인간은, 인간이 사물을 보듯이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처럼 [비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이 그것들을 보듯이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고 있는 사상(事象)은, 우리(인간)가 그것을 보듯이 그것들이 볼 때에는 다른 것이 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이 재규어에게는 술이다. 죽은 자의 혼에게 썩은 사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casaba)[라틴아메리카 원산의 열대관목, 덩이뿌리식물]이다. 우리가 진흙으로 보는 것이 맥에게는 멋진 의식의 공간이다.

 

이러한 발상은 처음에는 직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다안정적인 대상의 사례와 같이 그것들은 반대로 끊임없이 변용된다. 예를 들어 제럴드 바이스는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아샤닌카족(Ashaninka族)의 세계를 “상대적으로 출현하는 세계이며, 그곳에서는 다양한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상(事象)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1972: 170)고 기술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옳다. 그러나 바이스가 ‘보지 않은’ 것은 바로 다른 타입의 존재자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상(事象)을 본다는 사실은 단지 다른 타입의 존재자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상(事象)을 보다는 사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같은 사상(事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위의 귀결의 논리에는 없다.] 바로 누군가와의, 어떤 종과의, 어떤 방식과 관련해서, 무엇이 ‘같은 사상(事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는 주체적이고 부분적인 다양한 표상과 유일하게 전체적이며 표상과 무관한 외적 자연에 관한 사건을 상정한다. 그런데 아메리카 선주민은 그 반대를 전제한다. 그곳에서는 한편으로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표상적 통일성이 있다. 우주론적인 주체의 포지션을 점령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적인 것이며, 모든 실재자는 사고하는 것으로서 사고된다(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고한다). 즉 하나의 관점에서 ‘활성화시킨’ 혹은 ‘짜여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적이고 객체적인 근원적인 다수성이 있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자연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퍼스펙티브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퍼스펙티브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표상이란 정신의 특성이며 그에 대해 관점은 신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는 것은 혼의 힘에 의해 가능해지며, 비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은 그것들이 정신을 가진(정신인) 것에 부응한 결과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는—관점이란 차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혼 속에 있지 않다. 혼이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에서 동일한데, 모든 곳에서 동일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차이란 신체의 특수성에 의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동물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상(事象)을,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신체는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생리학적인 차이를 참조하자는 것이 아니고—그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제일성(齊一性)[자연은 동일한 사태 하에서는 동일한 현상을 일으키도록 하는 통일적인 질서를 견지하고 있다는 원리]을 인식하고 있다—, 각각의 종의 신체를 그 강함과 약함을 특이화시키는 정동을 참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먹는 것, 그들을 움직이는 방식, 의사소통하는 방식, 어디서 사는가? 군생하는가, 고립한가? 얌전한가, 떠벌이는가? … 신체적인 형질학은 차이의 강력한 기호이다. 그것은 속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형상은 재규어의 정동을 숨길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신체’라고 부른 것은 그렇게 때문에 판명성을 갖춘 생리학도 아니라면 특징을 이루는 해부학도 아니다. 그것은 아비투스, 에토스, 에스노그라피를 구성하는 방식과 양태의 집합이다. 혼의 형식적인 주체성과 유기체의 실질적인 물리성 사이에는 정동과 능력의 다발처럼 신체라는 중심적인 평면이 있다. 그것이 바로 퍼스펙티브의 기원이다. 상대주의가 정신적인 본질주의라면, 퍼스펙티브주의는 신체적인 애니미즘이다.

 

 

다자연주의는 각각의 종에 고유한 오성의 범주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물 자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선주민이 ‘X라는 무엇’, 예를 들어 인간이 피로 마시는 무엇, 재규어가 술로 마시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상상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자연 속에 실재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지각되는 자기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피/술이라는 타입의 관계론적이고 직접적인 다양체이다. 피와 술 간에는 경계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이 둘의 ‘근접한’ 실체를 의사소통시키고, 각각을 분기시키기도 하는 언저리뿐이다. 결국 어떤 종에게 피이며, 다른 종이게 술인 X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피/술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인간/재규어라는 다양성의 특징적인 특이성 혹은 정동성인 것이다. 인간과 재규어 간에 상정되는 유사성은 결국 양자가 함께 술을 마신다는 것인데, 인간과 재규어 간의 차이를 이루는 것을 지각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은 언어 속에 있거나, 다른 것에 있다. 세계의 이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이면은 없다”(Jullien 2008: 135).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은 피 속에 있거나 술 속에 있다. 누구도 음료수[라는 언어] 자체를 마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술은 피라는 이면의 맛을 갖추고 있으며 그 역 또한 참이다.

 

이제 우리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대한 번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그리하여 서양적인 인류학의 존재-기호론적인 술어에서 퍼스펙티브주의의 번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유사한 혼의 소유란 모든 존재자 측의 아날로지적인 개념의 소유를 포함한다. 고로 어떤 존재하는 종으로부터 다른 종을 이해할 때에 변하는 것은 그 혼의 신체이며, 그 개념에 대한 참조이다. 즉 신체란 각각의 종의 ‘담론’ 간의, 참조적인 이접의 장소이며, 또 도구이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문제란 다른 두 표상(‘새벽의 샛별’과 ‘초저녁의 샛별’)에서 공통의 참조항(이른바 금성이라는 혹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다의성 주변을 순회하는 것이며, 그러한 다의성이야말로 재규어가 ‘카사바의 술’이라고 할 때에 우리와 ‘같은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적으로 우리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퍼스펙티브주의는 항상적인 인식론과 가변적인 인식론을 전제로 한다. 즉 같은 표상과 다른 객체로서 유일한 의미와 다양한 참조를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펙티브주의적인 번역의 목적은—그것은 샤먼의 기본적인 방식의 하나인데—다른 종이 거기에 있는 같은 것을 말할 때에 이용하는 표상으로서 이형동의어(異型同義語 synonym)를 인간적인 개념인 우리의 언어 안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언어를 다른 종의 언어와 결부하면서 분리하는, 흩어진 동형이의어(同型異義語 homonym)의 내부에 숨겨진 차이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서양의 인류학은 해석에 기반한 선의의 원리(사고하는 것의 양심, 타자의 조야한 인간성에 대한 관용의 원리)에 기초 지어진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문화 간의, 자연적인 이형동의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대항인류학은 이것과는 정반대로 기피하기 어려운 모든 종류의 다의성의 기원이 되는, 살아있는 종의 담론 간의, 반자연적인 동음이의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예방원칙이다. 왜냐하면 지향성을 갖춘 생명체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세계가 상당한 악의로 넘쳐나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은 인류학적인 다문화주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것의 결합에 대해 분명히 다른 두 방식과 관련된다. 따라서 다의성 있는 타입의 복수성을 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문화의 다양성처럼. 즉 좋은 문화의 다수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반대로 다의성을 문화에서 포착하여 다양성으로서 문화를 포착할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두 번째 방향이다. 다자연주의의 관념은 여기에서 그 패러독스적인 성격으로부터 유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자연’에 대한 우리의 마이크로적인 개념은 참된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복수의) 자연’이라는 발상을 포함하는 존재론적인 오용을 의식시킨다. 고로 그 잘못을 바로잡도록 위치이동을 실현시켜주어야 한다. 상대주의에 관한 들뢰즈의 정식(1988: 30)을 차용하면, 아마존의 다자연주의는 자연의 다종적인 존재방식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종성으로서의 자연성 혹은 자연으로서의 다종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자연주의적인 서양적 정식화의 역전은 기능(통일성과 다양성)에 의해 상호적으로 규정되는 말(자연과 문화)뿐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말’과 ‘기능’의 동일한 가치와 관련된다. 인류학자인 독자는 여기서 물론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에 의한 신화의 기본정식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1958/1955: 252-53). 퍼스펙티브주의자의 다자연주의는 서양적인 다문화주의의 변용이지만, 그것은 이중으로 중첩된다. 즉 그것은 번역가능성과 다의성과의 문턱인 기호-역사적인 문턱을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며, 나아가 퍼스펙티브적인 변용의 문턱을 지시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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