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적 전회란 무엇인가?

 

마음을 소거할 수 있을까?

 

‘신실재론’의 가브리엘은 현대의 자연주의적인 철학의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에 기초한 자연주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인 인지과학적인 ‘자연주의적 전회’를 다뤄보겠습니다.

 

우선 그 특징적인 경향을 알기 위해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캠퍼스 교수인 폴 처치랜드(Paul Churchland, 1942~)의 논문 「소거적 유물론과 명제적 태도」(1981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논문에서 그는 ‘소박심리학’이라고 불리는 심리에 대한 상식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신경과학 등의 인지과학적인 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처치랜드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소박심리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두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통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용이하게 그리고 수미일관되게 타자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설명이나 예측의 경우에 우리는 표준적으로 행위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욕구, 신념, 공포, 의도, 지각 등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설명은 법칙을—적어도 대략적인 법칙을—전제로 삼는다. (중략) 이 지식의 총합체를 그 본성과 기능을 고려한다면 ‘소박심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심리학이 ‘소박심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학문적으로 형성된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이 유년시절부터 길들여진 타인과 자신의 마음에 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처치랜드는 이 ‘소박심리학’에 대해 그 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자연지(自然誌)와 동물과학의 관점에서 호모 사피엔스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조성(組成), 발달, 행동능력에 관해 소립자물리학, 원자ㆍ분자이론, 진화론, 생물학, 생리학, 그리고 유물론적인 신경과학을 포함하는 정합적인 서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이제야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론적 총합을 파악했고, 그 일부는 이미 인간의 감각입력, 신경활동, 그리고 운동제어에 관한 면밀한 기술과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처치랜드가 이 논문을 썼을 때에 신경과학은 아직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고 또 희망적 예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뇌과학과 인공지능연구 등의 발달에 의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지과학—뇌과학에서 마음의 철학으로』(1995년)에서 처치랜드는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뇌는 어떻게 작동되는 것일까? 어떻게 뇌는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꿈을 꾸는 자아를 유지하고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의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신경과학 혹은 최근의 인공 뉴럴 네트워크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성과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일군의 통일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중략)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무엇보다도 지금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추상과 오랜 세월의 비밀에 관한 새로운 설명의 가능성을 목전에 두고 내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다만 이것은 나 한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 몇몇 학술분야는 고양되는 분위기로 넘쳐난다.

 

이와 같이 처치랜드에 따르면, 신경과학과 정보과학, 인공지능연구 등의 학술적인 인지과학의 융성에 의해 지금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마음’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확장된 ‘마음’

 

처치랜드의 ‘인지과학론적 전회’와 협력하면서 새로운 길로 향해가는 이가 있었으니 에딘버러대학 교수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입니다. 클라크는 1998년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의식하는 마음』의 저자)와 공저로 논문 「확장한 마음」을 발표하고, 마음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합니다.

 

인간은 외적인 존재와 두 방식의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통일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 시스템은 독자의 인지 시스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의 성분들은 능동적인 인과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통상의 인지와 동일한 종류의 방식과 연동되어 행동을 지배한다. 만약 외적인 성분이 제거된다면 뇌의 일부를 제거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행동적인 능력이 저하될 것이다. 우리의 테제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렇게 연결되고 통일된 과정은 인지과정과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클라크와 처치랜드가 주창하는 것은 ‘마음’을 머릿속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신체와 그 주변 환경과의 상호연관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논문의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확장된 마음’이라는 테제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그들은 능동적 외재주의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존재방식이나 움직임을 머릿속에 가두는 ‘내재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나 주변 환경과 연결짓고 움직이는 ‘외재주의’인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마음’을 외부로 확장시킨다는 것이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계산할 때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자릿수 덧셈이나 뺄셈이라면 머릿속에서 처리할 수 있지만, 세 자릿수나 네 자릿수가 되면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계산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쓴다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운동해야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이 점을 확인해두고 앞서 인용한 문장을 읽으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클라크는 1997년에 『나타나는 존재』를 출간합니다. 원제는 ‘Being There’인데, 이 말은 하이데거가 1927년에 출간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표현으로 제시한 독일어(Dasein ‘현존재’)의 영역(英譯)입니다.

 

그러므로 클라크의 책은 바로 인간의 존재방식(현존재)을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뇌와 신체의 세계’를 연결짓는 시스템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고의 의의를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뇌는 신체화된 활동의 컨트롤타워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 이상의 성과는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금의 시점의 전환은 마음의 과학을 구성해가는 데에 큰 영향을 준다. 실은 이를 통해 지적행동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 이후 일반화된) 마음의 영역과 신체의 영역의 구별. 지각/인지/행위를 정연하게 분할하는 선. 고차원적인 차원의 추론을 작동시키는 뇌의 집행중추.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와 신체화된 행위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연구방법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새로운 마음의 과학이다.

 

이러한 클라크의 논의는 인간이나 환경,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즉 그가 제기한 사고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도덕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다

 

철학의 ‘자연주의적 전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향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의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 대해서는 3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여기서 잠깐 그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면 철학은 드디어 심리학이나 뇌과학과 밀접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학ㆍ대학원 시절 그는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 인도출신의 경제학자)과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라는 저명한 철학자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그 후 그는 심리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뇌과학의 방법을 습득하여 뇌가 어떻게 ‘마음’이 되는가를 해명하게 됩니다.

 

그린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른바 ‘광차문제(trolley problem)’라고 하는 두 선택지에 관한 사례에 대해 MRI를 사용한 뇌화상법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다섯 명을 살릴 것인가, 한 명을 살릴 것인가라는 같은 문제인데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광차문제’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그린은 뇌화상법을 통해 뇌가 움직이는 장소가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린의 연구가 획기적인 것은 선함과 악함이라는 도덕적인 판단이 뇌의 어떤 구조나 움직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논증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논한 도덕문제가 뇌과학에 의해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고에 대해 철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쏟아냅니다. 그린이 출간한 『모랄 트라이브즈(Moral Tribes)』(2013년)에 대해 뉴욕대학 교수인 토마스 내겔(Thomas Nagel)이 서평을 썼는데, 그 제목이 「당신은 뇌스캔으로는 도덕에 대해 배울 수 없다—도덕심리학의 문제」로 매우 도전적입니다. 내겔은 그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린은 우리를 도덕심리학이 도덕철학보다 근본적이라고 설득하고자 한다. (중략) 그린은 어떤 낡은 문제와 격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의 심리학적 접근방법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린의 연구가 도덕철학에 준 충격은 상상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를 계기로 ‘뇌신경윤리학(neuroethics)’이라는 학문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호주의 철학자인 닐 레비(Neil Levi)가 2007년에 출간한 『뇌신경윤리학—21세기에의 도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린의 연구 이후 도덕을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는 연구가 명확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연구 분야로 확장된 것도 확인해두어야겠습니다. 『모랄 트라이브즈』에서도 언급됐지만, 그린의 연구는 노벨상 경제학자인 다니엘 카네만의 ‘행동경제학’과도 연결됩니다. 뇌화상법을 통해 인간의 경제행동이 어디까지 설명 가능한 것일까요? 이러한 ‘신경경제학’은 ‘신경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확장은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심적인 움직임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직 그 맹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와 협동하여 크게 비약하지 않을까요?

 

 

20세기 이후의 철학의 동향

 

 

岡本裕一朗、2016年、「自然主義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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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탈종교화’의 과정이었다

 

 

약 100년 전 독일의 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서양근대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세계의 탈주술화’라는 표현으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근대가 되면 서양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독립한 세속적인 국가가 형성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사회적으로 침투해갑니다. 또 계몽정신에 기초하여 종교적인 편견이 탈각되고 근대과학이 발전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종교의 힘은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여 20세기에는 서양근대를 ‘세속화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Ludwig Berger, 1929~)는 ‘세속화’라는 개념을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나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현대사회를 이러한 세속화의 시대로 보았습니다. 확실히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이러한 세속화 상황이 세계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유럽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낮은 반면 반대로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미국에서는 주류파 프로테스탄트는 감소하고 있지만 원리주의적인 복음파 신도는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이러한 상황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합니다.

 

21세기 초두에 나타난 종교의 회귀현상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사회통념〔세속화 이론〕을 깨고 있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했습니다. 근대세계(글로벌 금융자본)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근대건축을 궁극에까지 구현했던 세계무역센타 건물에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테러리스트들이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 직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부주의하게도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대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를 내세웠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이슬람교 신자에 의한 대규모적인 테러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오히려 ‘포스트세속화의 시대’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종교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는 기존의 세속화 이론은 유럽의 기독교에 대해서 타당하다 할지라도, 세계전체를 생각하면 종교로의 회귀현상이 현저해지고 있습니다. 베버가 근대를 규정할 때에 ‘세계의 탈주술화’를 제창했다고 한다면, 현대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재주술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의 ‘탈주술화’인가 아니면 ‘재주술화’인가—현대사회는 바로 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현대사회의 어려움은 이 양자가 명확하게 분할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에 담긴 문제를 생각하고 미래를 전망해보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종교를 생각하다

 

1985년 독일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근대(모던)의 의의를 재검토하며 『근대의 철학적 딜레마』를 출간합니다. 그 책의 서두에서 그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개념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막스 베버에게는 그가 서양적 합리주의라고 이름붙인 것과 근대 사이에 어떤 내재적 관계, 즉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는 여전히 자명한 것이었다. 그가 <합리적>이라는 개념 하에서 기술한 것은 유럽에서 종교적 세계상이 붕괴하고 그 강력한 세속문화가 발생하는 탈주술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의 경험과학들, 자율을 획득한 예술, 또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 및 법의 이론들과 함께 이 문화적 가치영역들이 형성되어 왔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서양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지금까지도 미완성이므로 ‘커뮤니케이션적인 합리성(이성)’의 관점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버마스는 ‘근대’파 철학자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철학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하버마스 철학이 크게 방향전환을 합니다. 지금까지 근대적인 세속화론자라고 간주되었던 그가 놀랍게도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왜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꾀한 것일까요?

 

아마도 그 원인 중 하나는 20세기 말에 생명과학이나 뇌과학 등이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며 인간의 인격이나 정신의 이해를 오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일 것입니다.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며 그 인격과 정신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주의’적 이해를 하버마스는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가 기독교와 만나게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포스트세속화론적 전회’라 부르겠습니다.

 

2004년에 하버마스는 기독교 신학자인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대화를 시도하고, 그 이듬해에 공저로 책을 출간합니다. 라칭거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로마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지냈기 때문에 이 대화는 매우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기독교도와 근대와의 만남). 그 책에서 하버마스는 클라우스 에더(Klaus Eder, 1946~, 독일의 사회학자)의 ‘포스트세속화의 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점차 세속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종교가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전개하며 앞으로도 당분간 사회가 종교적 공동체의 존속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라는 표현은 종교적 공동체가 자신이 원하는 동기와 태도의 재생산을 행하는 기능에 공적인 감사를 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의 사회에서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시민들이 신앙을 가진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접촉하는 그 교류의 방식에서 중요한 규범적인 사고가 공공의 의식에도 반영되고 있다. (중략) 종교 측에서도, 세속 측에서도, 이 양자가 사회의 세속화를 상호보완적인 학습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공공의 장에서 논쟁되는 다양한 테마에 대해 상대로부터의 기여를 인식상의 이유에서 서로 진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속화의 변증법’의 결과로서 하버마스는 현대를 ‘포스트세속화 사회’로 다루고 이성과 종교와의 화해를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이전의 하버마스 철학으로 말한다면, 참으로 보수적인 해결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의 이 전회를 어떻게 평가한다 해도 ‘세속화—포스트세속화’ 문제가 현대의 긴급한 테마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종교적 전회로

 

하버마스는 현대사회를 이해할 때에 ‘포스트세속화’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근대적인 세속주의가 간과한 문제를 경고합니다. 그러나 본래 세속화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일까요? 세속화를 다르게 이해하게 되면 ‘포스트세속화’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겠죠. 그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캐나다의 철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1931~)가 2007년에 출간한 대작 『세속의 시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테일러에 대해 말하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리버럴리즘 논쟁 시 코뮤니타리얼리즘(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리버럴리즘ㆍ리버타리아니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그 후 90년대에 이르러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대표적 논자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해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어 테일러는 ‘종교적 전회’를 꾀합니다. 본래 가톨릭 신자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종교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시대 상황이 테일러에게 ‘종교적 전회’를 재촉한 것이 아닐까요?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성’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와 종교 간의 분리, 즉 정치와 종교 간의 분리입니다. 이에 따라 종교는 ‘사사화(私事化)’됩니다. 또 하나는 신앙의 쇠퇴, 즉 사적 영역으로 종교가 쇠퇴해갑니다. 그에 대해 테일러가 착목한 ‘세속성’은 제3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신앙의 조건의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 제3의 의미의 ‘세속성’과 관련하여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 제3의 의미에서의 세속적인 사회로 검토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내가 그 특징을 명확하게 하고 검토하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회로부터, 단호하게 신앙을 갖는 신자에게도 단순한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게 된 사회로의 변화이다. (중략)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환경에 따라 신앙을 이어가는 것이 곤란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성’의 변화를 생각하기 위해 테일러는 서양근대의 500년을 대상으로 분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기 1500년 무렵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에 비해 2000년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하기조차 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테일러가 이 질문을 제기할 때에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현주의 혹은 표현혁명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상황입니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 표현의 방식’을 원리로 삼고 있으며, 패션으로 대표되는 소비중심사회와도 연결됩니다. 이 입장에서 말하면, 신앙은 자신의 본래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테일러가 현대의 ‘세속성’을 설명할 때에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표현주의의 입장에서는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내면과 연결된 종교는 삶의 방식의 하나의 선택지로서 새롭게 모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대사회에서 ‘신종교’가 적극적으로 추구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오늘날의 종교의 모습들』(2002년)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방향을 따라가면 비기독교적인 종교, 특히 동양에 기원을 두는 종교의 부흥이 있으며, 뉴에이지형의 다양한 활동양태 그리고 인간주의적 환경과 영적인 것 간의 경계를 가교하고자 하는 견해들, 혹은 영적인 치료와도 연결되는 실천 등의 폭발적인 증대가 있다. 나아가 점차 많은 사람들이 예전이라면 채용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간주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자인하면서 그 교의의 중핵적인 많은 부분들을 거부한다. 혹은 기독교와 불교를 조합한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의 유무를 확신하지 못한 채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보면 ‘세속의 시대’라고 해도 테일러가 단순히 종교의 쇠퇴설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간파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테일러의 ‘세속화’ 논의는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서양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속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세계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돌출적인 행동을 주시하면 서양에 한정된 논의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속화론에서 탈세속화론으로

 

글로벌한 시점에서 세속화와 ‘포스트세속화’의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피터 버거의 논의를 검토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세계를 이해할 때에 버거 자신이 세속화론으로부터 탈세속화론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거는 왜 그랬을까요?

 

우선 1967년에 발표한 『성스러운 덮개—신성세계의 사회학』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속화를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와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베버와 마찬가지로 서양근대를 세속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버거는 그 세속화론을 후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세속화’론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이후의 저작과 관련되는데, 그 개념의 열쇠를 생각하면 실제로 계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생각은 단순하지 않다. 즉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마음에서 종교의 쇠퇴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20세기 말이 되면 버거는 이러한 ‘세속화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1999년에 논집 『세계의 탈세속화—부활하는 종교와 세계정치』를 편집하는데, 그 책의 권두논문에서 이전의 ‘세속화론’이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버거는 미국이나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전체의 글로벌한 시점에서 보면 종교적 원리주의와 같은 탈세속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논점은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예외가 있다 해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광폭하리만치 종교적이다. 이것은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세속화론’이라고 딱지 붙인 연구 문헌의 상당 부분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초기 저작은 그러한 연구들에 기여한 바가 있다.

 

버거는 세속화를 생각할 때에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의 두 차원을 구별하는데, 이 두 차원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조직이 쇠퇴한다 해도 개인의 신앙은 여전히 강한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로 개개인이 종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해도 종교적인 조직이 사회적ㆍ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간 ‘종교와 근대 간의 관계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세계를 살펴볼 때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모든 주류파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쇠퇴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복음주의는 융성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 가톨릭은 비서양지역에서 열광적인 신자들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정교회가 부활했고 민중들 틈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유대교, 힌두교, 불교 등도 소멸하기는커녕 더욱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운동이겠지요.

 

확실히 유럽에 한정해서 말하면 세속화가 진행되어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속화는커녕 오히려 탈세속화의 거센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세계는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岡本裕一朗、2016年、「近代は「脱宗教化」の過程だった」『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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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2016년 9월에 출간된 『지금 세계의 철학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몇몇 부분들을 번역해올리겠다. 대중서인지라 내용이 그렇게 깊지는 않지만지금 학문의 세계에서 주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논점들을 잘 정리해놓은 것 같다. 다음의 이 글은 '실재론'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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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전회란 무엇인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란?

 

21세기에 이르러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활동이 바로 ‘실재론적 전회’라고도 불리는 조류입니다. 그런데 이 조류는 젊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번역서도 많지 않고 또 전체상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소개의 의미로서 그 성립과정을 다루고자 합니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이탈리아의 철학자)의 『신실재론입문』(2015년)에 따르면, ‘실재론적 전회’가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대한 시론』(2006년)입니다. ‘이 책이 출판되고 2년 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운동, 즉 사변적실재론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주요 멤버는 메이야수 자신과 3인의 사상가들(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1968~, 미국의 철학자), 이안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영국의 철학자),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1965~, 영국의 철학자))입니다. 그들의 논의에 대해서는 2011년의 논문집인 『사변적 전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과는 별도로 페라리스 자신과 독일의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에 의해 전개되는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운동도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년)에 따르면, “신실재론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를 말해주는 철학적 입장을 기술한다”고 합니다. 페라리스는 이를 수용하여 2012년에 『신실재론 선언』을 저술하고 그 입장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페라리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던적인 사상가인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 1936~)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바티모의 철학은 ‘약한 사고’로 표현되는데, 그 모든 것은 해석이라는 니체의 사상과 가다모의 해석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라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바티모 밑에서 배울 때에도 “나(페라리스)의 입장은 언제나 실재론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브리엘과 함께 ‘신실재론’을 선언한 것도, 입장의 선회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변적실재론’이든 ‘신실재론’이든 현재 구태여 ‘실재로의 전회’를 의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목할만한 것은 실재론적 전회를 주창하는 사상가들이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그들 모두가 ‘포스트모던 이후’를 분명하게 표명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말에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해 그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역사적으로 보다 넓은 시야에서 다시금 다룬다는 것입니다.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정점을 찍었던 언어론적 전회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페라리스는 이에 대해 ‘푸칸트(푸코+칸트)’라는 농담 섞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아가 이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페라리스는 ‘데칸트(데카르트+칸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푸칸트’라는 말도 ‘데칸트’라는 말도 존재는 사고에 의해 구축된다고 하는 ‘구축주의’를 희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축주의가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던 사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할 즈음에는 포스트모던의 유행도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적 전회는 그것을 사상적으로 매장하고자 했습니다. 그 의미에서 페라리스가 말한 것처럼 현대의 실재론적 조류를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실재론적 전회라고 해도 하나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논자에 따라 내용이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논의를 각각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는 사변적 전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서 젊은 ‘스타’인 메이야수와 가브리엘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소멸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세기 후반(70년대 이후),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이 미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 그러한 거장들도 사라지고 사상적 카리스마가 부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상적 히어로로서 등장한 이가 퀑탱 메이야수입니다. 현재 파리제1대학에 준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1967년생으로 아직 젊을 뿐만 아니라 30대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2006년에 출간된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는 ‘사변적실재론’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이 책에 대해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은 상찬의 말을 서문에 싣습니다.

 

지금까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를 사고해왔던 철학의 역사 속에서 퀑탱 메이야수가 새 장을 열어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중략) 주목해야 하는 이 ‘비판철학의 비판’은 이 책에서 어떤 과잉의 수사도 달지 않고 각별히 명석하고 논증적인 문체로 본질을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바디우의 추천사 때문인지 메이야수는 일약 현대사상계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의 기본적인 시좌(視座)는 칸트 이후 근대철학의 중심개념이 ‘상관(相關)’에 있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상관’이라는 말로 불러들이는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사고와 존재의 상관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한쪽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렇게 이해되는 상관을 넘어서기 불가능한 성격을 인정한다는 사고의 모든 경향을 상관주의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소박한 실재론을 바라지 않는 모든 철학은 상관주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이러한 ‘상관주의’는 20세기의 현상학이든 분석철학이든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언어론적 전회와 포스트모던 사상도 예외가 아닙니다. 메이야수는 이러한 상관주의를 넘어서서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향해갑니다. 그 의미에서 실재론을 목적지로 삼는 것이지만, 앞서의 ‘소박한 실재론’과는 구별됩니다. 오히려 그가 ‘실재’로 생각하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에 의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입장을 메이야수는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되묻습니다.

 

칸트 이후 (중략) 대체 왜 철학은 초월론적 혹은 현상학적인 관념론과는 반대의 길을, 즉 수학이 가진 비-상관적인 영역을—바꿔 말하면 사고를 탈중심화하는 힘으로서 정당하게 이해되는 과학적 사실 그 자체를—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일까? 철학은 왜 과학을 사고하기 위해 사변적 유물론으로 단호하게 향해가지 않고—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앞서 서술한 것처럼 초월론적 관념론에 주력하게 된 것일까?

 

인간의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사고하기 위해서 메이야수는 인류의 출현 이전의 ‘선조이전성’을 문제로 삼거나 혹은 인류의 소멸 이후의 ‘가능한 사건’을 상정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으로부터 분리 가능한 세계’로서 과학적으로는 충분히 고찰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상관주의’는 그러한 이해를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인식론적 전회)도,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회도, 포스트모던 사상도 상관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메이야수의 철학은 이제 겨우 기본적인 시점(視點)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전개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의 논의를 기대해봐야겠습니다.

 

 

‘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마치 메이야수의 ‘사변적실재론(유물론)’에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회’가 제창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1980년생이며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현재 본 대학의 교수로서 발표한 저서만도 이미 수십 권에 이르며 종종 ‘천재’라고 평해지고 있습니다.

 

2013년에 출간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철학서로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가브리엘의 재능을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전문서라기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저작인데, 그의 ‘신실재론’의 구상이 매우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축주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축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를 그 자체로 알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해도 그것은 어떤 점에서 항상 인간에 의해 가공된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의 안경’(메이야수의 전회(turn) 부분에서 전술)의 예를 끌어온 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축주의는 칸트의 ‘녹색의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가 몸에 길들이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만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등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구축주의’에 대해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제창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어떤 사상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가브리엘이 제창한 구체적인 예를 다뤄보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말합니다.

 

아스트리드(Astrid)가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는 것에 비해 우리(너와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낡은 실재론(이것을 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스 산뿐입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떤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하게 보일 뿐입니다. ‘구축주의’의 입장에서는 세 개의 대상, 즉 ‘아스트리드의 베수비오스 산’ ‘너의 베수비오스 산’ ‘나의 베수비오스 산’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대상과 물(物) 그 자체가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가브리엘이 주창한 ‘신실재론’은 적어도 네 개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베수비오스 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너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것들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비밀스런 감각조차도 사실’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한쪽의 낡은 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만을, 다른 한쪽의 구축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그에 대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뿐일지라도 보는 사람의 세계만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와 같이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상상 속 동물과 같은 ‘공상’조차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실재론’의 일반적인 메이야수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이렇게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시킴으로써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2015년에 출간된 『나(자아)는 뇌가 아니다—21세기를 위한 정신과학』이라는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로 환원하는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러한 ‘자연주의’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인 물(物)이나 그 과정뿐이며, 그 이외에는 독자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그것을 원리적인 차원해서 재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재론이라고 할 때, 어쩌면 과학적인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자연주의’가 상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그러한 과학적인 우주뿐만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도 긍정합니다.

 

 

 

岡本裕一朗、2016年、「実在論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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