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藤田省三著作集4』에 실린 「維新の精神」을 번역한 것이다. 저작집의 해제에 따르면, 이 논문의 1장과 2장은 잡지 『みすず』 1965년 3월호에, 3장은 1965년 5월호에, 4장은 1966년 7월호에 실렸다. 이것을 1997년 발간한 저작집 4권에 모아 실었다. 각주는 본문의 이해를 돕고자 번역자가 일본위키피디아를 참조하여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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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の精神」[유신의 정신]

 

후지타 쇼우조우(藤田省三)

 

  1.

  세월 참 빠르다. 이미 ‘메이지’가 끝난 지 50여년이 흘렀다. 일본의 역사적 과정도 이윽고 유신 후 백년의 이정표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일본의 각계에서는 유신백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이 ‘행사’들이 어떻게 치러질지는 몰라도, 거기서 울려 퍼질 선율의 한두 개는 이미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해양국 일본의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 가운에 어떤 사람들은 백년 전의 ‘해방책’(海防策)[각주:1]과 동일한 모티브를 가지고 노래할 것이다. ‘천황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티브는 ‘조적정벌(朝適征伐)하라’는 예의 목가적인 태평함으로 느긋하게 나아갈 자유를 향한 도전일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개국의 로쿠메이칸(鹿鳴舘)[각주:2] 전통’에 도취한 사람들이 현대적인 정장을 하고 아메리칸 잉글리시를 토해내며 오로지 ‘서양인과의 교제’의 욕구를 충족하려할 것이다. 

  이 여러 모티브들이 함께 구성하는 테마는 유신을 재현하는 ‘명곡’을 이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분명 있겠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터내셔널리즘’과 ‘내셔널리즘’이 결합하고 ‘민족의 상징’을 분명히 하면서 ‘국가독립’의 장비를 문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유신의 테마를 현대에 재현하는 ‘명곡’ 아니던가? 일본의 ‘음악평론가’도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작곡의 기술적 규칙은 넘쳐나고 곡조는 더할 나위 없다. ‘해방책’(海防策)은 ‘건강한 마음’으로 표현되며, ‘로쿠메이칸(鹿鳴舘)적 개국’은 ‘로코코풍의 화려함?’으로 반복출현하고, ‘천황’의 모티브는 ‘상민풍의 토착성’의 ‘민요가’를 덧붙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유신의 주제는 그러한 모티브들로 짜 맞춰진 테마일까? 우리는 여기서 ‘유신의 노래’의 모티브를 하나하나씩 짚어가며 유신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해보는 것이 어떠한가?

 

  2.

  유신은 무엇으로 유신일 수 있는가? 그리하여 서두의 ‘노래’의 주제를 구성하는 제1동기는 유신에서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물론 다양한 각도에서 유신의 원리이든 사태이든지를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이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신을 일으켰는가? 라고 사람들이 물을 수 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해방책’을 둘러싼 사태의 변천을 개관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해방책’의 대량발생의 계기는 외국선의 도래였다. 특히 막부말기 외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일본국 내의 ‘학자선생’들 대부분은 ‘해방책’을 열렬히 논했다. “토우진”(唐人)[각주:3]들은 방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방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이는 해안에 “다이바”(台場 에도시대 말기 바다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포대)를 설치하고 대포를 일렬로 배치함’과 동시에 나무 덩굴에 ‘소포’를 숨겨야 한다고 제안했고, 어떤 이는 “토우진”은 대륙전에 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상륙시켜서 창이나 검으로 찔러죽이자 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는 “겐코우”(元寇 1274년과 1281년 원군이 일본을 침공한 사건)의 선례와 같이 작은 배를 타고 “토우진”의 군함까지 밀어붙이고 군함에 직접 뛰어올라 ‘적’을 전멸시키자고 딴에는 진지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그 모습은 광신적인 옛 군부지도자와 같고 또 오늘날의 ‘재군비론자’와 같으며 말하자면 황당무계하여 손톱만큼의 리얼리즘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막부가 가장 정통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막부의 전쟁과 군대에 관한 지식은 저 멀리 여러 번주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그러나 ‘해방책’(海防策)을 둘러싼 이 엉망진창의 갖가지 비난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막번체제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논의는 백 가지 천 가지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각주:4]의 사태가 여기저기서 발생한 것이다. 막부에 의한 ‘국론의 통일’은 덧없이 사라졌다. ‘통일적 해방책’이 붕괴하고 제멋대로의 다양한 ‘해방책’이 분출했다. 즉 ‘해방책’이 활황을 맞이할수록 실제의 ‘해방’(海防)은 가장 취약해지고 불안정해졌다. 이미 그것은 체계적 통일성을 조금도 갖추지 않은 방비 계획일 뿐 실제로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막번체제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외적인 무방비는 외부로부터 충격을 더욱 세게 직접적으로 받게 한다. 이미 막부체제의 쇄국은 시행할 것까지도 없었다. 나아가 ‘해방책’ 논의의 영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제멋대로의 논리가 회자되는 속에서 막번체제가 세운 의견의 유통체계는 붕괴되었다. 위에서 위로 의견을 올려 보내면 번주와 막번의 중간관료의 결정을 통해서만 주변으로 전달된다는 이른바 정점을 공유하는 무수한 삼각형의 커뮤니케이션 양식은 모두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순간 해체되었다. 당연히 제멋대로의 논의는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에 삼각형을 더 큰 삼각형으로 통합해가던 막번체제의 의견체계 역시 그에 따라 해체된 것이다. ‘처사횡의’(処士横議)의 금지는 가련하게도 ‘팻말’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횡단적 논의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외의 온갖 경우와 마찬가지로 횡적인 논의의 전개는 횡적인 행동의 전개를 동반한다. ‘횡의’(橫議)의 발생은 ‘횡행’(橫行)의 발생을 도모한다. 번의 경계를 허물고 전국을 '횡행'해갔다. 즉 ‘탈막번’의 낭인이 ‘부랑’을 시작했다. 이제 낭인(浪人)이란 불쌍한 실업자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논하고 논쟁하며 연락하며 날뛰었다. 아니, 그들은 그러려고 ‘탈막번’한 것이다. 이른바 그들은 의식적이며 적극적으로 낭인이고자 했다. 옛 낭인처럼 사회체제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구사회를 스스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들에게 낭인이란 이미 불쌍한 존재가 아니며 자랑스러워할 존재였다. 낭인은 막부를 대신해서 ‘천하국가’를 짊어져야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분’이 아닌 ‘뜻’만으로 상호 판단하여 결집하는 ‘지사’(志士)가 생겨나고 그들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네이션 와이드의 연결망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었다. 구사회의 체제 내에 신국가의 핵이 생겨난 것이다. 유신의 정치적 한 측면이 이때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러한 횡적인 결집이 결코 ‘존황도막’(尊皇倒幕)의 ‘지사’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바쿠하”(佐幕派 에도막부 말기 막부를 돕자는 일파)의 ‘지사’ 역시 마찬가지의 양태로 사회적 과제를 실현해갔다. 여하간 ‘봉건의 범위를 초월해서’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행동했다. 막부 말기 유신의 ‘진짜’ 싸움은 이렇게 ‘구태여 봉건군주의 명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양 파벌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쇼우기타이”(彰義隊)[각주:5]이든 “하코다테”(函館)의 군(軍)이든 그들 모두는 ‘지사’들의 집합이었다. 그들은 ‘상경’을 번주에게 제지당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났으며, ‘일을 성사시키려면 군주를 떠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번 정부는 우리를 도망자라고 보아도 좋다’고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단언하고 토사(土佐:高知県의 일부지방의 옛 지명)를 출발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1837-1919)의 모습은 전국적으로 출현한 ‘낭인’과 ‘지사’의 정신형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일단 ‘신분’ㆍ‘격식’ㆍ‘문벌’의 원리를 버리고 ‘뜻’에 따른 결합의 원리를 세우고 나면 횡적인 연결은 다만 사족 사이의 연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기병대’가 생겨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 ‘기병대’뿐만 아니다. “보신”(戊辰)[각주:6]에서 초우슈(長州)의 본진(本陣)의 이름도 ‘중의소’(衆議所)였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고 ‘코뮌’의 이름을, ‘소비에트’의 이름을, ‘인민회의’의 이름을 상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유신에서 횡적인 결합은 이미 이야기되어온 것처럼 하층무사 이하 민중으로 넓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앞서의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분명히 존재했고 각처로 진행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 없이는 ‘사민평등’의 슬로건이 제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뜻’ 곧 이념이야말로 ‘신분’에 대항하여 평등에 복무한다.

  이렇게 보면 ‘해방책’이 유신을 유신답게 만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유신을 일으킨 것은 ‘백론비등’(百論沸騰)과 ‘처사횡의’(処士横議)와 ‘낭인횡행’(浪人橫行)과 ‘지사’의 횡단적 결합이다. 바꿔 말하면, ‘해방책’을 포함한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횡단적 논의와 횡단적 행동, 그리고 현세적 지위(status)가 아닌 ‘뜻’을 가지고 모여든 횡단적 연대가 출현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유신은 유신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을 보아도 ‘해방책’ 논의가 비등하기 전부터 이미 앞서와 같은 여러 계기가 점차 성장했고 막번체제의 내적위기는 심화되어갔다. 아니, 본래의 막번체제 자체가 전국의 다이묘(大名) 분국제(分國制)에서 엄청나게 전개된 ‘횡행시대’에서 ‘횡행’의 계기를 모조리 탈각시키고 ‘다이묘 분국제’의 계기만을 ‘정착’시켰다. 따라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횡행’의 어떤 역사적 근거가 있는 이상 막번체제는 그 처음부터 어떤 역사적 무리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막부체제가 종종 직면한 문제에는 그 역사적 무리수가 전반적으로 크든 작든 노정해왔던 것이다. 그 내포적 위기의 증대의 극치에서 ‘해방책’의 논의가 일어났을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횡의’(橫議)ㆍ‘횡행’(橫行)ㆍ‘횡결’(橫結)이 발전할 때만이 유신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본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20세기 후반에 이른 지금, ‘횡’의 토론과 ‘횡’의 행동 형태와 ‘횡’의 연대가 달성되었다고 하면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이룬 것일까? 세상은 이미 자국(自國)만의 세상이 아니다. 자번(自藩)만의 세상이 아닌 것처럼. 유신의 원리를 ‘오늘의 과제’로 살려내고자 한다면, ‘해방책’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유해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일본의 상태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소련을 비롯해서 많은 이웃의 국민들과의 ‘횡’의 교류와 연대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행동 그대로 시무를 시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말잔치로 끝날 소지가 다분하다. 현재 유신의 ‘해방책’을 답습하는 것은 오히려 유신의 원리를 방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유신의 원리를 오늘날의 세계에 살려내는 길은 ‘해방책’의 고사(古事)를 방기해서 ‘비무장’을 관철하는 가운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다. 과연 유신에서 오늘날의 ‘비무장’으로 이어지는 방책이 어떻게 제출될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그 방책이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 풀어놓은 유신의 원리에 더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원리를 오늘날에 살려내는 길까지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행한 자가 있다. 게다가 그는 유신최대의 지도자였다. 그 사람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이다. 그는 소란을 피우던 ‘해방책’의 논자들에게 뭐라고 말했던가? 우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생각하라’고. 그는 그렇게 ‘세계보편의 진리’가 왜 중요한지를 설파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해보게, 제군. 제군의 큰 소동은 마치 끝나지 않은 전쟁의 휴전상태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보면서 강도를 생각하는 고로 처음 만나는 외국인에게 경계심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분 나는 대로 공사에 임하면 될까? 국제적 교제에서도 그러한 처방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매한 것이 아닌가. 즉 윤리적으로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손해와 이득을 따졌을 때 불이익에 큰 손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상대방이 상대방을 밟으려는 ‘예의’를 행한다 해도 이쪽에서는 그와 똑같이 행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외국은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일단 ‘예의’를 실행해본다. 그렇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 ‘격의 없이’ 솔직하게 교섭해봐야 한다. 이쪽이 ‘진리’에 따라 ‘신실’(信實)을 쫓아감에도 불구하고 저쪽이 겉으로만 그런 척을 하고 실제로는 일본을 빼앗으려는 ‘발칙한 행동’을 한다면, 그 나라는 ‘세계의 진리에 등지는 세계 속의 죄인’이기 때문에 그때야말로 ‘진리를 수립하고 일본국의 위력을 떨쳐보여야’하는 것이다(福沢諭吉, 『唐人往來』).

  후쿠자와는 위와 같이 설파했던 것이다. 최근 ‘해양국가’ 일본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만약 저 때에 있었더라면 ‘후쿠자와는 파워ㆍ폴리틱스의 실태를 모르는 단순한 도덕주의자다’ 라는 식의 발언을 뽐내듯이 좌담회나 어디서 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후쿠자와는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러한 초보적 개념에 꼼짝 못할 인물이 절대 아니다. 반대로 후쿠자와는 파워로 기능하는 것은 물리적 힘만이 아니고, 윤리와 제 개념과 경제력 등도 큰 파워로 작동된다는 점을 충분히 방법적으로 자각하고 주목했던 선구자였다. 물론 위의 문장에서도 그러한 점이 충분히 고려되고 있다. “분큐”(文久 1861-4년간의 연호)의 상황이 그 근거가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만고불역(萬古不易)의 격률(格律)을 제출한다. “세상을 다스릴 때에도 난을 일으킬 때에도 지켜야 하는 것은 세계보편의 진리”라고. 그렇게 “유일의 진리를 지키면서 움직인다면 아무리 적이 대국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고, 함부로 타인의 모욕을 받지 않으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의’가 ‘폭력’에 압도되었던 수많은 예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수많은 예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베트남 하나의 사례만 보아도 분명하다. 아니, 우리들은 중일전쟁의 예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통감의 경험을 가지도 있으면서도 결단의 순간에 감히 전자의 예만을 방패삼아 군사적 폭력을 자국에 허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무능력자라 놀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그 정신적 임포텐츠가 어떻게 유신의 전통을 독점할 수 있을까? 보여 달라. “세계보편의 진리에 따라 신실을 다한다”고 했던 후쿠자와의 말은 뜻밖에도 일본국 헌법 전문의 한 구절에 완전히 부합한다. 헌법의 이 원리는 이미 백년 전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에 의해 ‘자주성’으로서 제출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 전통에 영광 있으라, 라고 기원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3.

  서두의 ‘유신의 노래’의 제2모티브인 ‘천황’에 대해서 말해보자. 두말할 필요 없이, 유신에서 ‘천황’의 의미이든 유신의 결과로 태어난 ‘천황제’이든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즉 다각적인 관련 하에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파고드는 분석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다 다룰 수가 없다. 또 여기서의 과제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확히 하려는 것은 유신을 사회변혁으로서의 유신으로 만드는 원리가 ‘천황’에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을 검토하는 것이다. 유신에 의한 일본의 신생(新生)이 그것[천황제]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질문에 관해 ‘천황’ 심볼의 기능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 점에 관한 한 분명히 밝힐 수 있다. 앞서 대략적으로 개관하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천황이 있기 때문에 유신의 변혁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천황’은 고대 이래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전통적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그 전통적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가치’가 막부 말기와 유신에서 부각된 것일까? 이것 역시 잡다한 질문 중 하나이지만, 한마디로 답한다면 새로운 가치체계의 제시와 ‘전도’(傳道)를 행하는 ‘예언적 리더쉽’이 성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앞서 서술한 ‘낭인’의 ‘횡의(橫議)ㆍ횡행(橫行)’에 일정한 방향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 새로운 질서로의 통합을 가져야만 하는 ‘지도’가 보편적 가치나 초월적 가치의 ‘예언’을 통해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가치의 ‘예언’은 당연히 무엇보다 사람의 내면에 호소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예언의 지도’ 하에 사회적 운동이 전개될 때에 그 운동은 사람들의 ‘회심’을 동반하며 그 ‘회심’을 기축으로 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내면에 새로운 질서가 발생하면 그 외적 구체화로서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 나아가, 바꿔 말해서 이 경우에 사회질서의 변혁은 사회의 가치체계 그 자체의 변혁을 동반한다. 이때 사회질서는 가장 깊은 지점에서 근저적으로 재생한다. ‘막말로우시’(幕末浪士)는 일반적으로 보아 그러한 ‘회심’을 거쳤는가? 노-이다. ‘횡의(橫議)ㆍ횡행(橫行)’은 신분의 해체를 일으켰고 신분사회의 해체는 그들 ‘낭인’에 충성의 대상을 제거했다. 주군에의 인격적인 헌신은 그 대상을 상실하고 헤매었다. 이 내면적 공허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로우시’(浪士)[각주:7] 중에는 그 정신적 공허의 지점에 히라테 미키(平手造酒)[각주:8]나 “신센구미”(新撰組)[각주:9]와 같이, 전략적인 퍼스펙티브를 내던지고 단지 전투만을 전문으로 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을 탄생시켰다. 또 그들은 그 내면적 공허를 운명으로 체념하고 ‘어쨌거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정신적으로 소극적인 사생활주의도 대량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자포자기의 길을 거부했다. 그들은 새로운 충성대상을 원했다. 그렇게 문제는 이 선택의 기회에서 발생했다. 예를 들어 니이지마 죠(新島襄 1843-1890 교육가 종교가)의 도(途)는 문자 그대로 종교적 ‘회심’을 거쳐 광대한 세계로 재생하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도(途)는 우주와 세계의 법칙을 파악하고 세계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나와 달리 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강렬한 애국심은 결코 ‘나라’(國)에 얽매이지 않았다. 니이지마 죠에게 충성의 궁극적 대상은 보편신으로 일원화되었으며, 후쿠자와에게는 지성의 우위가 범할 수 없는 수준에서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이 ‘예언’이 되어 전일본의 ‘로우시’(浪士)의 내면에 스며들었던가? 그들의 심리적 욕구에 재빨리 응했던 것은 오히려 눈앞에 있는 전통적인 가치로서 ‘천황’이었다.

  만약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조금이라도 ‘교토’와 밀접하게 연결된 체제였다면 ‘천황’ 심볼이 ‘낭인’의 심리적 욕구에 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번(藩)과 막부에 대한 충성의 소멸은 연쇄적으로 조정에 미칠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막번체제에 ‘정나미’가 떨어지는 즉시 조정에도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또 반대로 막번 체제가 조정을 권위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제출하는 체제였다면, ‘낭인’의 충성일반으로의 심리적 결핍은 그렇게까지 경박하게 ‘천황’에 흡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천황’ 심볼은 사회적 가치로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낭인’의 충성에의 심리적 욕구는 간단하게 즉석에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생의 충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충성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는, 이른바 내면적 노동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혁명의 이름에 값하는 사회적 ‘회심’이 열려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점을 고려하면, 막번체제와 조정의 관계는 ‘낭인’의 심리적 욕구가 기성의 심볼로서 이미 만들어진 ‘천황’을 재빠르게 수렴할 수 있도록 알맞게 기능했던 것이다. ‘천황’ 심볼은 ‘막번’과 함께 무너지기에는 너무 ‘막번’과 떨어져 있었던 데다 당시 그 어떤 ‘낭인’에게도 ‘막번’보다 높고 큰 충성대상으로 바로 떠오를 정도로 유통되고 삼투되었던 것이다. 무가(武家) 체제에 있어서 ⑴ ‘공가’(公家) 세계와 ‘무가’(武家) 세계와의 엄격한 분리 ⑵ ‘무가’와 그의 전통적인 명목상의 ‘존황’(尊皇) 이라는 두 계기의 결합은 해체기에 이르러서 ‘낭인’의 존황열(尊皇熱) 상승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이때 막번체제의 전통적 ‘존황’이 극도로 ‘명목화’되어 종종 『甲子夜話』[각주:10]가 말해주는 것처럼 은근히 천황을 깔보았던 막번체제에 애정을 소진한 ‘낭인’이 도리어 존항에게 진심을 다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막번에 분개하고 껍데기만 남은 존황을 공격함으로써, 존황은 진정한 존황이 되었다. 또 이름만의 존황을 추구했던 막부에 대한 도막주의(倒幕主義)가 성립되었다. 이 과정은 막번체제의 가치 시스템이 마침내 역회전을 시작한 것이며, 결코 가치체계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번 체제는 본래 카마쿠라(鎌倉)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스스로의 손으로 실증해가는 자주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저 요령 좋게 고대의 권위에 편승하여 ‘往夷大將軍에 부임’ 받는 것으로 자기의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 결과 이번에는 반대로 고대의 망령이 반역자에 편승하여 막부체제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막부제도가 명목적 권위의 원천으로서 고대의 망령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존황열이 상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번 말기에 이르러 ‘천황’ 심볼의 가치상승이라는 현상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보다 포지티브한 계기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거국(擧國)[闔国]의 상징이라는 계기가 거기에 있다. 물론 그것은 흑선도래의 ‘위기’로 인해 긴급히 요구되었다. 그 시기에 딱 맞는 상징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황국’의 설파는 고대 이래의 시간적 연속성을 강조함으로써 막부체제를 일시적으로 경과하는 역사적 상대화를 꾀했고, 그와 동시에 공간적으로도 번국할거(藩國割據)의 다이묘령국제(領國制)를 넘어설 수 있음을 의미했다. 효과적이라는 측면만을 말하면, 이 정도로 즉효작용을 가진 심볼은 아무리 초근대적인 ‘정신분석학’적 기술이나 ‘사회심리학’적 테크닉을 구사한다 해도 쉽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를 대체하고 나아가 훨씬 강인한 내면적 정착성을 가진 사회적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세계와 국민에 의해 반복적으로 점검되고 검증되는 보편주의적 가치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황국’이 거국(擧國)[闔国]을 상징한다는 말은 무엇보다 성구가 맞는다. (‘皇国’과 ‘闔国’의 일본어 발음이 “코우코구”로 같음) 그런데 어조가 지나치게 맞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군에 대한 퍼스널한 충성밖에 모르는 사무라이들은 ‘황국’ 심볼에 의해 처음으로 ‘나라’(國) 그 자체에 대한 책임과 충성을 알게 된 반면, 이때 괄호에 넣어진 ‘근대로의 대전환’은 정신구조의 자기변혁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퍼스널한 충성은 의연하게 퍼스널한 충성 그 자체로 좋았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확대하는 일뿐이었다. 막부 말기의 근왕가(勤王家)는 ‘제 다이묘는 소군이었고 조정은 대군이었다’로 말해지는 종래의 소충(小忠)을 대충(大忠)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메이지가 되었을 때도 정부는 ‘소충소의’의 관행을 타파하여 ‘대충대의’를 만들어낼 것을 선전했다. 이 번드르르한 어조는 그러나 매우 실현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퍼스널한 충성은 특정의 가문의 특정의 사람에게 향해있을 때야말로 퍼스널한 충성인 것이기 때문에 원래 자유로이 신축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매우 곤란했기 때문에 메이지 정부는 정부가 되자마자 ‘대교선포’(大敎宣布)하며 일본 중의 신관ㆍ승려를 동원하여 ‘교도직’에 앉히고 ‘기대되는 인간상’의 선전선동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막부 말기 “로우시”에 관한 한 모두 ‘황국’에의 ‘대충주의’가 풍미했고, 현실가능하기 어려운 일이 비교적 간단하게 가능했던 것은 어떤 역사적 전제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서술했던 명목적 존황의 전통 외에 실은 도쿠가와 시대에 ‘주군에의 퍼스널한 헌신’이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이미 순수하게 특정인격에 대한 퍼스널한 헌신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주군이란 이미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고 ‘주가’의 ‘상속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게다가 때에 따라서는 번주의 우두머리도 ‘나라 바꿈’에 의해 바뀌었고 이에 따라 낭인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전근’했으며 교설(敎說)도 유교에 의해 ‘율법화’되었으므로 중세무사의 ‘퍼스널한 충성’이 완전히 합리화되어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적인 제도로 변하여 이동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화된 충성이 ‘법’에의 충성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als ob’(가정)된 ‘퍼스널에의 충’이며 동시에 ‘als ob’(가정)된 ‘법에의 충’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역설적으로 퍼스널한 충의 ‘제도화’ 혹은 ‘율법화’ 혹은 ‘보편화’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충성의 감각은 정부(貞婦)의 서방에 대한 것처럼 특정자에 대한 철저한 충이 결코 아니다. 물론 추상적인 ‘법’에의 헌신은 있을 수 없다. 그냥 딱 ‘황국’에 맞춰진 것이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천황’ 개인에 대한 연정도 아니고, 그러한 탓에 어디에도 편승되는 ‘충성’!?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신상태로 유신을 목표로 하여 시대를 선도했던 지도적 “로우시”(浪士)는 ‘황국’을 확실히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심볼로 자각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는 ‘천하’와 ‘총체’[惣体]가 진정한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의미에서 지도적인 “로우시”에게는 분명 ‘나라’의 의식이 독립적으로 생겨났다. 이 “로우시”는 앞 절에서 논했던 자발적 ‘낭인’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충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심리적 욕구불만의 ‘낭인’은 정신구조에 있어서 전통적인 룸펜적 낭인에 속한다. 여기서 전자[“로우시”]는 후자[‘낭인’]에 충의 대상을 부여함으로써 이것[충]을 조직화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이 ‘지사’들은 충의 대상에 걸맞는 ‘옥’(玉)을 자유로이 조작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천황’은 거국(擧國)[闔国]의 단순한 상징에 지나지 않고 ‘천하’ 그 자체가 아니라면 거국(擧國)[闔国] 그 자신도 아니다.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각주:11]가 ‘조정이 진력을 다해 각번각심(各藩各心) 혹은 양이(攘夷)라 말하고 혹은 거국(擧國)[闔国]이라 말하고 혹은 개국(開國)이라 말한다. 오늘날 이를 통일하지 않고서는 천하의 와해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 따라서 하나의 모략을 설계하자. 오늘날의 제후의 봉토는 모두 조적(朝敵) 도쿠가와가 수여하는 모양새를 띠고 있으며 천자(天子)의 옥새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크게 명분을 올바로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천하를 세운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천하’의 ‘통일’이 목적이고, 다른 ‘명분’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구사되어야 하는 수단이다. ‘조적’이라는 것도 ‘천하의 옥새’라는 것도 장기의 말처럼 조정되고 있다. 그 의미에서 ‘황국’을 가장 많이 휘두른 그들이야말로 천황에 대해 가장 충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신의 변혁의 정치적 측면을 짊어진 자가 실은 천황에 충성을 다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불충으로 ‘모략의 수단’으로서 ‘옥’(玉)을 조작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배신의 마키아벨리즘이 탄생함과 동시에 ‘국가’(스테이트)가 전통적 가치와 세간의 권위의 포위로부터 독립하는 사고가 존재한다. 이와 같이 열강에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전진하며 대외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권위에의 심리적 연결에서 벗어나 ‘국가’의 이해상황을 리얼하게 판단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의 대외독립은 ‘국가’ 관념의 대내독립 특히 전통적 신조체계로부터의 독립과 분리로 이어진다. “스테이트맨”(Statesman)이란 실은 이러한 사고로 ‘국가’(스테이트)의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사회의 전통적 가치체계에 매달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거의 모든 사고의 혁명을 필요로 한다. 유신의 정치적 지도자에서 “스테이트맨”이 탄생했다는 것은 앞서와 같은 내적과정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본에서 ‘현실주의’라는 이즘을 물건으로 내다파는 많은 지식인들은 이 ‘정치적 리얼리즘의 정신적 기초’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도리어 종종 정치적 리얼리즘을 상실하고 있다. 리얼리즘 없는 ‘현실주의’라는 골계의 모습은 유신의 정신과는 관련이 없다. 이른바 열광적인 ‘존황’에 유신의 유신다운 근거를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가련하게도 초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스테이트맨”의 탄생이 정치적 측면에서 유신의 원리를 표현했던 것인데, ‘정치가’(政治家)에서 ‘정치적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해도 그에 따라 사회의 가치 시스템이 ‘민주화’로 향하여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스테이트맨”의 정치적 리얼리즘은 전통적 가치를 통합수단으로서 이용함으로써 그 결과 그것을 온존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의 정신구조라는 국면에서 유신은 “스테이트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기구 밖에서, 즉 ‘정치외의’ 영역에서 거국(擧國)[闔国]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짊어져왔다. 극도로 목적의식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선택하여 탐구했던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막부 말기의 동란의 한가운데에서도 ‘정치적’으로 과열하지 않고 냉정하게 정치사회의 침착함으로 선두에 서서 어쨌든 곧 도래할 유신을 맞이하여 앞서 논했던 이른바 새로운 사회의 “스테이트맨”다운 직분을 맡음으로서 그 준비에만 전념했던 자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정말로 얄미울 정도의 전망과 선택이었다. 당연히 유신의 사회변혁의 큰 부분이 그와 그의 동지에 의해 짊어지게 되었다.

  그 후쿠자와에게 우리의 신성한 거국(擧國)[闔国]의 심볼이 어떻게 다뤄졌는가. 심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황국’이라든지 ‘조정’이라든지 ‘본조’(本朝)라든지 ‘본나’(本那)라는 문자에 궐자(闕字)하는 것을 폐했던 이가 후쿠자와였다. 궐자, 즉 문장 중에 ‘존경하는 심볼’이 나올 경우 문장이 끝나지 않아도 그 앞에 한 글자를 띄어쓰기 하여 그 “존경하는 심볼” 앞에 “천한 심볼”이 위치하지 않게 하는 습성은 전후 일본에서 마침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즉 그전까지 궐자 있는 문장이 범람했던 것이다. 이것은 명목론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결여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당연히 막부 말기, 유신 당시에 있었던 궐자는 일반적 관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궐자를 행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당할지 모를 가능성이 있었다. ‘관습의 노예’를 거부했던 후쿠자와는 그 궐자를 폐해버렸던 것이다. 후쿠자와는 궐자가 ‘국법’의 명을 받은 것이라면 몰라도 ‘국법’이 정해주지 않은 것인데 단지 ‘세간의 선례’라는 것만으로 그것에 ‘따르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각주:12]에 찾아가 궐자가 ‘국법’의 규칙인지 아닌지를 묻고 정중하게 절차를 밟아 폐해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일어나는 기화(奇禍)’를 지혜롭게 막고자 한 후쿠자와의 정 떨어질 만큼 신중한 이른바 비무장방어법을 엿볼 수 있는데, 이와 동시에 ‘법’ 이외의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정신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유신 이후의 그의 후기 저작에 나타난 사유방식이 명료하게 관철되고 있다. 앞서의 구관을 깨는 대범한 지적모험이 극도로 진중한 절차를 거쳐 단행되는 것에도 후쿠자와의 하나의 정신을 볼 수 있지만 지금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나라’의 강제력이 ‘법’ 이외의 어떠한 전통적 권위에 의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후쿠자와에게 거국(擧國)[闔国]은 이미 ‘법’에의 충실을 통해서만이 통합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황국’이 반드시 거국(擧國)[闔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후쿠자와에게 있어서 ‘황’(皇)의 글자에 궐자를 동반하는 것과 같은 정신에 의해 나라가 통합되는 것은 거국(擧國)[闔国]이 아니었다.

  ‘국가인’(Statesman)에게 거국(擧國)[闔国] 개념은 ‘천황’ 심볼의 제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가 보기에 이 전통적 심볼이 통합수단으로 남용되었고 그 결과 온존되었던 것이다. ‘세속을 문명으로 이끄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후쿠자와는 그 반대로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신란’(親鸞)[각주:13]이 스스로 육식하고 육식의 남녀를 교화했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 문체상에서 오로지 세속의 속문을 철저히 사용했으며, 그 다음에 그의 과제에 반하는 전통적 심성을 단호히 철폐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고귀한’ 단어를 사용하면 그로부터 사회가 고귀하게 된다는 기호의 정신병리는 여기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비루하고 속된’ 세속의 문장법에 응함으로써 ‘세속과 함께 문명의 가경(佳境)에 도달하려는 본령’에는 정말로 그가 자신했던 것처럼 카마쿠라 종교개혁의 혁명적 정신이 관철되고 있다. 종교성과는 아무 연고 없는 현세적 인물로 간주되는 후쿠자와의 행동강령의 깊은 곳에 관철되고 있는 것은, 실은 과학의 시대의 신란(親鸞)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 가치의 현세로의 투입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대중종교성’에 대항하는 ‘지성의 대중화’와 ‘대중의 지성화’가 발생된 것이다. 유신을 유신답게 한 것은 ‘황국’ 심볼의 가치의 앙등이 아닌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글을 중단한지 일 년이 지났다. 전술한 것과 같이 유신의 정신은 ‘해방책’이나 군비증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단순한 진통촉진제로 하여 생겨난 바로 ‘횡의’ㆍ‘횡행’ㆍ‘횡결’의 관계에 있었다. 이로써 막번 체제의 사회적 맥락(커뮤니케이션 양식)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적 연결의 구조가 맹아로서 탄생했다. 또한 그러한 횡적인 교류를 그럭저럭 통합해서 국민국가를 건축해낸 것은, ‘횡결’의 지사가 ‘천황’의 상징적 가치를 신앙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유신국가의 스테이트맨이 전통적 가치로서의 ‘천황’ 심볼로부터 내면적으로 해방되었던 까닭에 이 전통적 가치 곧 ‘옥’(玉)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그로부터 국가건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적 근대국가로서의 ‘천황제국가’야말로 실은 ‘천황’에의 신앙으로부터 해방된 자에 의해 처음으로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패러독스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유신의 원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유신이 사회에 일정한 변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이 스테이트맨의 원대한 건축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군자’보다도 ‘사람에 다스려지는 소인’의 문명을 중요시함으로써 처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소민’(小民)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야말로 유신의 사활을 결정하는 문제였고, 여기서 ‘정부’와 ‘공무원’[役人]에 위탁되는 것을 거부하고 전심으로 ‘사회’의 변혁에 노력하는 ‘사회의 스테이트맨’이 탄생하여 초월적 보편가치로서의 ‘문명’이 현세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앞 절에서 논한 ‘줄거리’는 이상과 같다.

  이제 ‘서두’의 제3모티브에 대해 논해야 할 단계에 왔다. 그런데 이러저러한 것을 장황하게 논할 생각은 없다. 사회변혁으로서 유신의 ‘정신’은 군사적 ‘양이’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반드시 ‘존황’의 신념에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살펴본 지금에 와서는 제3의 모티브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음이 이미 분명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권위를 가진 외국’에 대해 단지 ‘환대’(好遇)할 뿐만 아니라 ‘약삭빠름’이 일본사회를 관철하고 있다. 어떤 아메리카의 학자가 말한 것에 따르면,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의 호의적 태도와 일본정부의 약삭빠름’이 서양인과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선의’와 ‘옵티미즘’(optimism)의 시대를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메리카 잡지 『Show Magazine』 1963년 5월호에는 ‘새로운 극서(極西)의 나라 일본’(Japan the New Far West)이란 제목의 특집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과 더불어 그와 나란히 ‘일본정부의 정책’이 일본의 이미지를 ‘극동’으로부터 ‘극서’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이미지의 전환을 아메리카의 『Show Magazine』이라는 잡지가 포착했다는 것은 로쿠메이칸(鹿鳴舘)의 현대판을 그대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다. ‘극서’(極西)라는 대문자로 쓰인 말에도 일본의 당사자들의 과잉 서비스가 조금씩 스며 나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메이지의 로쿠메이칸(鹿鳴舘)은 실은 이 현대판과는 크게 다르다. 첫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의 교태정책은 현대판처럼 간단하게 성공을 접수할 수가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갈수록 엄중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상황이 곤란해진 탓에 궁여지책으로서 교태정책이 실행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안이한 ‘행복’의 꿈에 부푸는 현대판과는 아무리 닮으려 해도 닮을 수가 없다. 즉 ‘일찍이 조약개정으로 노저어가는 유신이 목적한 대외독립을 어떻게 해서든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어떠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빨리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서는…’이라는 구절에는 어떤 비장하고 초조한 빛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로쿠메이칸(鹿鳴舘)은 국가형성을 짊어진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의 결단과 리더쉽 하에 전개되었다. 이 의미에서 그곳에 참가한 일본의 ‘걸’도 그 ‘목표’에 ‘혼신을 다해’ 협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대판에서 ‘긴자의 뒷골목의 빠-걸’은 그러한 ‘퍼블릭’한 의식을 가지고 일본의 이미지를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부도 각별의 결단을 가지고 ‘지도성’을 발휘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발의권의 소재를 굳이 묻는다면, 그것은 ‘프라이베이트’한 이해에 의해 구성된 어떤 하나의 ‘풍속’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약삭빠르지 않은’ 정책은 오히려 그 ‘풍속’의 뒷를 쫓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세 번째의 차이점에 도달한다. 즉 로쿠메이칸(鹿鳴舘)에서 메이지 정부의 리더들은 그들이 교태를 부리는 상대에 대해 독립과 대결의 정신을 비록 왜소한 형태로나마 비밀리에 갖고 있었다. 거기서 교태는 자각된 정책이었다. 따라서 그 정책의 기저에는 분명하게 ‘전술’의 의식이 존재했다. 어떤 외국의 역사가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와중에도 유신 이후의 ‘메이지 정신의 특징’인 서양에의 ‘숭배’와 서양에 대한 ‘전술’의 교착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찰은 어떤 측면에서 정곡을 찌른다. 교태의 기저에 전술의 의식이 관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전형적인 일본형 부르조아이자 로쿠메이칸(鹿鳴舘)의 당사자의 한사람이었던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각주:14]가 로쿠메이칸(鹿鳴舘) 정치를 에도의 가부키의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각주:15]와 47인의 지사’라는 방탕전술로 덧씌울 수 있었다. 물론 이 사례 자체는 로쿠메이칸(鹿鳴舘)의 전술의식의 무대를 천박하게 보여준 것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판 로쿠메이칸의 당사자의 누가 이러한 전술의 전설로서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큰 ‘숭배’가 없다면 또한 ‘전술’의 의식도 없다.

  현대판 아메리카니즘과 로쿠메이칸과의 격차는 이와 같다. 하물며 [아메리카니즘과] 유신과의 격차는 말해 뭐하리. ‘하물며’라는 말은 물론 로쿠메이칸과 유신과의 사이에 어떤 원리적인 차이를 전제하고 있다. 이 양자는 어떻게 다른가? 로쿠메이칸 속에 서양에의 ‘찬탄’의 의식과 서양에 대한 ‘독립’의 의식이 교착하고 있다는 그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로쿠메이칸이 어찌되었든 메이지 건설기의 한 측면을 드러내는 것은 그 교착에 있다. 이 교착은 오히려 로쿠메이칸을 유신과 연속시키는 한 측면이다. 유신과의 차이는 이 두 의식의 교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의식의 관계의 방식에 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차이는 한층 내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의 지도적 정신에서 서양에의 ‘숭배’ㆍ‘찬탄’ㆍ‘존경’은 분명히 세상 어느 곳에나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문명의 정신(무형의 문명)이다. 그리하여 ‘독립’ㆍ‘동등’ㆍ‘대결’의 의식은 만국의 ‘권의’에 기초하여 서양열강의 권력성에 대항하며 자각되어왔다. 따라서 거기에는 ‘강적을 염려하면서도 그 나라의 문명을 그리워한다’는 태도가 발생한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히 ‘경모’(敬慕)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서양제국의 부강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한 나라의 권위는 추호의 경중함도 없이. 도리를 다하며 꿈꿔왔던 그날에 이르러서는 온 세계를 적으로 두어도 두렵지 않는’ 것이다. 후자의 계기는 문명에 대한 존경을 접는 데에 있지 않고, 전자의 계기는 ‘동등의 권리’를 맹목적으로 자각하는 데에 있지 않다. 따라서 ‘권리’와 ‘상태’의 구별이 적확하게 존재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자기의 ‘상태’를 깨달은 자기비판이 성립한다. ‘존경’은 존경할 수밖에 없고 ‘대항’은 대항할 수밖에 없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들의 각 계기는 상호 ‘도리’에 기초하여 각각의 레벨에 위치하고, 그럼으로써 각각은 정신의 제 차원에서 내적긴장을 가지고 공존한다.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정기(正氣)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는 부분의 부당한 확대와 전체의 제 부분으로의 분해라는 이상정신의 특징은 없다. 유신을 이끌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정기의 정신이었다. 정말로 거대한 변혁기에는 거대한 정기가 출현하다. 그것이 없다면, 파괴는 가능할지라도 사회의 건설은 가능하지 않다.

  이윽고 우리는 유신의 정신의 한 측면이 ‘존경’과 ‘적의’를 각각 양립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한 차원적 사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막부 말기 ‘횡의’ㆍ‘횡행’ㆍ‘횡결’을 만들어낸 정신도 그러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횡의ㆍ횡행을 개시하고 여러 나라의 자발적 결사와 그 중심인물들을 횡적으로 연결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운동가 요시다 쇼우인(吉田松陰, 1830-1859, 에도 시대의 지사이자 교육가)이 ‘자연표류’를 가장해서 그 횡행과정을 세계에까지 확대하고자 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관념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적(敵)의 ‘실체를 알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경우에 그 정신은 전투자의 ‘병학’(兵學)적 고려에 근거했다. 진지한 전투자가 탁월한 ‘적’을 발견했을 때 ‘적’과 자신에 대한 리얼한 인식으로서 적을 존경하면서 적과 대결한다는 태도가 요시다 쇼우인의 마음가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사리분별 없이 폭주하는 ‘양이낭인’(攘夷浪人)과도 이질적이며, 이와 더불어 ‘흑선’(黑船)을 보는 즉시 ‘화속’(花束) 등을 선물했던 정신의 ‘쇄국’(鎖國)의 선택과도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말할 것도 없이 요시다 쇼우인에게서 유신의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신의 사회변혁을 지도했던 정기의 정신은 한 측면에서는 분명히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병학적 레벨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전투자의 비체계적인 지혜에 멈춰선 것이 아니다. 사회의 의식적 형성은 여러 종류의 일상의 제 영역에 걸쳐 관철되는 일정한 방법적 자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존경’과 ‘적의’가 차원적으로 양립하는 사고는 후쿠자와에게 단계를 상승하여 체계화하면서 문명론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앞서 서술했던 전형적인 유신의 정신은 여기서 결실을 맺는다.

  이제, 앞에서 전술한 구조와 과정을 거친 유신의 정신에 견주어볼 때 로쿠메이칸은 어떻게 ‘타락’했다는 것인가? 이미 밝힌 것처럼 거기에는 ‘숭배’ㆍ‘존경’의 계열과 ‘독립’ㆍ‘대결’ㆍ‘전술’의 계열이 차원의 구별을 잃고 동일차원에서 융합되고 말았다. 바로 그 혼합물이 교태정책이다. 여기에서 ‘숭배’와 ‘존경’의 대상은 이미 추상화된 문명의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특수하고 구체적인 ‘유형의 문명’에 불과하다. ‘부강’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다. 그것은 동시에 ‘대결’과 ‘전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은 ‘특수 구체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 이미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존경’과 ‘적의’도 같은 레벨에서 작용한다. ‘부강’에 ‘존경’과 ‘대결’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전술’의 의식과 뒤섞인 교태였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전술적인 뇌살자의 교태가 아니며, 그렇다고 철저한 연정도 아니다. 앞서 거론했던 ‘외국의 역사가’—로쿠메이칸의 ‘숭배’와 ‘전술’의 교착을 지적했던 역사가—도 로쿠메이칸의 정신적 융합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쿠메이칸의 내면적 구조에서 유신정신의 깊은 그리고 미세한 변질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그 변질은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과의 분리가 완전히 상실될 때, 어떻게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의 입장으로부터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상황을 변혁하고자 하는 태도가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 지점에 민감하지 않은 역사가는 멋진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변질과 그 역동성을 간과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예시한 ‘역사가’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메이지유신』 등에서 자신의 예민한 역사 감각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주목받은 M. 얀센(Jensen)이다. 그의 ‘인간사’에 관한 감각의 예민함에서 세련된 비유는 실제로 매우 탁월하다. 그러나 물리지 않는 ‘경험적 인간’에 대한 방관적 흥미는 종종 의도하지 않게 초월적 가치로의 무관심을 만든다. 그렇게 초월적 목적으로의 무관심은 역사의 정신적 기저에 있는 어떤 중요한 역동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확실히 초월적 가치로의 경도한 자는 그것만으로도 현실부정의 실천력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힘을 결여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적 인간사’만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는 실천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식’ 그 자체에서도 중요한 측면을 놓치기 쉽다. 얀센의 예는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얀센이 포착하지 못한, 로쿠메이칸에서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구별이 상실되었음을 알아채는 순간, 또 하나의 정신적 융합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로쿠메이칸의 지도자에게 ‘공적정책의 선택’이 어느 새인가 ‘사적향락’과 유착되어 본인 스스로도 무서우리만치 무엇인가 구별할 수 없는 조연(躁宴 비의적이며 향락적인 연회)으로 펼쳐지는 과정이다. ‘전술’의 자각을 가지고 시작된 교태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 자체가 ‘결코 재미없지 않기 때문에 다소 당면의 목적의 범위를 벗어나려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大倉喜八郞). 조약개정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광태가 반대로 당사자에게 ‘재미를 준’ 탓에 어느 새인가 목적이 되어버려 조약개정은 향락을 위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빛깔 좋은 대의명분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무념극한의 것이기에 자기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되고 말았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이다. 문제는 ‘방탕’이 ‘재밌어’지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정신적 처리 상태에 있다. 한 나라의 형성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서는 그 목적을 위해 선택한 수단이 무엇이든지간에 그 수단을 자기 목적화하는 것은 셀프-컨트롤의 불완전함에 대한 무념이며, 이를 절치부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도착(倒着)이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해도 그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원죄 그 자체는 인간의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죄로 의식하는 지점에서 인간적인 태도가 발생한다. 하물며 그들은 신을 대신해서 이 세상의 질서를 형성시키고자 했던 것인데, 어째서 ‘대중적’ 오르지아시틱(orgiastic)(躁宴)에 도취하여 현실을 잊고만 것일까? 메이지의 정치적 지도자의 정신적 성숙이 이 정도라는 것이 확실히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음주가무’[盆踊り]의 도취를 잊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수염 기른 위인이 소박한 촌사람의 ‘음주가무’에 동참하는 것처럼 풀어내지도 않고 그래서 ‘향락의 연회’에 대한 향수에 대의명분을 주고 현대인의 복장을 하고 만족하는 꼴을 하고 있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에 있어서 ‘공’과 ‘사’의 유착은 그와 동시에 ‘리더’의 ‘대중화’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엇에 과욕을 부린 것일까? 그들은 ‘화족제도’를 신설하기까지 ‘노블’이 되고자 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적 책임을 지는 ‘리더’이고자 했고 그와 동시에 ‘대중적 방탕’에도 가담하여 그 즐거움을 향유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무엇인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에게 요구되는 희생(비용)의 의식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을 선택하는 것은 동시에 특정한 비용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라는 선택의 엄격함에 대한 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의 선택은 동시에 비용의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서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해도 자기의 ‘방법’이 자기에 부과하는 비용을 받아들이고 참아내는 자세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쿠메이칸에서 아무리 ‘평등조약실현’의 과제를 짊어진 비장한 선택이 작동되고 또 세론의 욕설과 조소와 분개를 참아내는 대외적 용감함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유신의 정신이 아니다. 첫째 거기서 요구되는 국제적 평등함은 열강과의 평등에 지나지 않으며 약소국에 대해서는 조금도 ‘권리의 평등’을 자각하지 않았다. 유신의 정신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열강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한편으로 ‘천리인도(天理人道)에 따라 상호 교류를 맺으며, 도의상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도 두려워하며, 도를 위해서는 영국과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보편적 평등의식이지 않는가. 이처럼 보편적 가치의식을 가진 자는 반드시 그것과 특수구체적인 사적 욕구 간의 긴장을 스스로의 내면에 내장하고 있다. 따라서 유신의 정신에서는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유착도 공과 사의 정신적 융합도 지도자의 ‘대중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의 세계에서 그것들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바로 깊은 자기비판에 처해진다. 즉 정신적 융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유신의 처음부터 ‘보편적인 문명의 정신’과 ‘특수적인 유형문명으로서의 부강’의 혼효(混淆)는 존재했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에는 지금까지 서술한 보편적 가치 관념이 한 점으로 존재했으며, 그리하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유신은 사회변혁다운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지금까지 서술한 바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로쿠메이칸’의 교태와 미묘하게 변질된 ‘유신’이 ‘반로쿠메이칸’의 슬로건 하에 정신적 쇄국 무드를 수반한 ‘유신’관을 불러일으켰고 그것들의 교착의 가운데에서 ‘유신’은 점차 이데올로기(허위의식)로 변해갔다. 오늘날 ‘유신’ ‘유신’이라고 부르는 목소리 가운데에는 이때 생겨난 이래 반복되고 증폭되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유신’이 잠복해있다.

  그렇다면 만약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가 오늘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보편적 가치로의 ‘존경’과 권력과의 ‘대결’, ‘권리’의 평등과 ‘상태’에 대한 자각,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늘 긴장하는 정신. 이 정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있어도 몸에 익히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계기의 각각은 전후 일본국 헌법이 제도적으로 보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보증을 다양한 압박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유신의 정신적 계승자는 나타날 것이다.

 

 

  1. 해방론(海防論)은 에도막부 말기 서방의 일본진출로부터 일본을 보호하자는 국방론을 총칭하는 말. [본문으로]
  2. 로쿠메이칸(鹿鳴舘)은 1883년 동경에 서방과의 조약 교섭을 위한 사교장으로 건립한 양옥의 이름. [본문으로]
  3. “토우진”(唐人)은 “카라비토”라고도 읽는다. 이 말은 유신시대 때까지 중국과 조선인을 의미했으며, 넓게는 외국인 일반을 가리켰다. [본문으로]
  4. 처사횡의(処士横議 "쇼시오우기")는 제멋대로 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르는 말. [본문으로]
  5. 쇼우기타이(彰義隊) 1868년에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쇼군의 경호 등을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 메이지친정부군에 의해 패배 해산했다. [본문으로]
  6. 보신전쟁(戊辰戦争)은 1868년에서 69년에 걸쳐 16개월간 왕정복고를 거쳐 메이지유신을 수립했던 초우슈(長州) 번주 등을 중핵으로는 신정부군과 구 막부세력의 동맹세력간의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보신”(戊辰)은 1968년이 무진년(戊辰年)인 것에서 유래한다. (일본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7. 섬길 영주를 잃은 사무라이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8. 히라테 미키(平手造酒) 에도 시대 막부 말기의 검객. 낭인의 대표적 캐릭터로 가공되어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본문으로]
  9. “신센구미”(新撰組) 에도시대 말기 막부 반대파를 진압하던 사무라이 패거리를 가리키는 말. [본문으로]
  10. 『甲子夜話』(“캇시야와”)는 에도시대 후기 “히젠노쿠니”(肥前国 현재 사가현과 나가사키현에 해당하는 옛 율령국의 하나)의 9대 번주인 마츠라 키요시(松浦清)가 쓴 수필집. 서명의 유래는 마츠라 키요시가 은퇴 은거한 후인 1821년의 갑자년의 밤에 기술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11. 키도 타카요시(木户孝允) 1833-1877년. 일본의 무사, 정치가. ‘유신의 삼걸’ 중 1인. [본문으로]
  12. 에도 시대에 막부가 만든 양학(洋學) 학교. 동경대학의 전신. [본문으로]
  13. “신란”(親鸞) 1173-1262년. 카마쿠라 시대의 일본의 승려.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시조. [본문으로]
  14. 오오쿠라 키하치로우(大倉喜八郞) 1837-1928. 메이지, 다이쇼기에 무역, 건설, 화학, 제철, 식품 등의 다수의 기업을 운영했던 실업가. 로쿠메이칸(鹿鳴館), 제국호텔, 제국극장 등을 건설. 도쿄경제대학의 전신인 오오쿠라상업학교의 창설자. [본문으로]
  15. 오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內藏之助)는 에도시대 전기의 무사. 겐로쿠아코우(元禄赤穂) 사건으로 인해 이름이 알려짐. *겐로쿠아코우 사건은 겐로쿠(元禄)14年(1701年)에 아코우 번주가 에도성의 성주에게서 자상을 입은 후 아코우 번주의 낭인 47명이 심야에 에도성으로 잠입해 에도성의 성주와 단판을 벌인 사건. 오오이시는 그 47인 중의 한 사람. 이 사건은 후에 인형극과 가부키로 유명해졌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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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의 마지막에 실린 마루야마 마사오의 강연록을 번역했다. 일본정치사의 전체 역사를 다루는지라 번역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일본정치사(사상사가 아니라)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만한 글인 것 같다. 독자가 일본어를 몰라도 한자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이 되도록 노력했다. 한번에 쓰윽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장의 난해함 때문이 아니라(글은 전혀 난해하지 않다) 사전지식의 불충분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차분히 읽어내려간다면, 마루야마의 논지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강연록은 『전집』에도 실려있지 않다. 1984년 11월 마루야마가 행한 심포지엄 <일본사상사를 둘러싼 제문제>에서의 강연을 『百華』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글을 『현대사상』1994년 1월호에 다시 실었고 본 특집호에 또 다시 실었다. 마루야마의 후기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글이라 판단되고 번역서가 없어 번역해서 올린다. 중간에 빠진 몇 문단이 있다. 추후에 채워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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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事の構造: 政治意識の執拗低音[정사의 구조: 정치의식의 집요저음]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나는 일본정치사상사라는 분야를 대학 때부터 공부해왔습니다.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도 이 분야에 관한 것인데, 오늘의 테마는 비교적 최근에—라고 해도 벌써 10년도 더 지난 것입니다—생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도식 같은 표가 그려진 인쇄물이 배포되었을 겁니다. (도표 A, B) 이 도식들은 “마츠리고토”(政事)[정치]에 관한 일종의 패러다임입니다. 어떻게 이런 도식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또 일본사상사의 방법론으로서 이러한 접근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을까 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므로 오늘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광고처럼 들릴까봐 심히 우려스럽지만,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와 극작가 기노시타 쥰지(木下順二)와 저 3인이 수년전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좌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같은 대학의 다케다 키요코(武田清子) 씨가 정리해서 <일본문화의 숨은 형(形)>이라는 제목으로 이와나미서점에서 2,3개월 전에 출간했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대학에 있을 때의 강의에서 현재의 사유체계에 이르기까지, 유래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러한 발자취를 서술해놓았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그것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말하자면 거기서 언급했던 문제를 전제로 하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다만 아주 간단하게 그 전제를 요약하면, 넓게 말해서 일본사상사, 협의의 의미에서는 일본정치사상사의 역사적 발전에는 무언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가 있다는 가설입니다. 그 형태를 넓게는 세계상, 더욱 세분하면 역사의식이라든가 윤리의식과 같은 것을 통해 찾아내고자 했던 것이며, 그 하나의 분야로서 정치의식에 대한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강연의 테마입니다. 일본사상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왜 문제로 삼느냐 하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역사상 온갖 교의나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등장하는 정치사상이라는 것은 거의 외래사상입니다. 유교, 불교, 기독교, 메이지 이후에는 리버럴리즘, 데모크라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일본 ‘밖에서’ 들어온 외래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일종의 외래사상 콤플렉스를 갖고 있고, 그 반응으로서 그러한 ‘외래’ 사상에 대항하는 일본적인 세계관 혹은 토착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중 매우 분명한 것은 에도시대 중기 이후의 이른바 국학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카라고코로”(漢心)를 배격한다 혹은 “호토케고코로”(佛心)를 배격한다는 미명하에 이제까지 외래사상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된, 순수하게 일본적인 사상을 구하고 그것을 국학이라고 말하는 하나의 사상운동입니다. 그것은 학문적으로 특히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등의 일본고전연구 분야에서 매우 큰 성과를 올렸는데, 학문적 성과를 별도로 하고 사상의 족적을 보면 적어도 그것과 비슷한 사유체계는 일본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로 정리되는 교의 내지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말하면, 일본의 사상은 발생학적으로 전부 외국산입니다. 외국산이라고 해서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또 거기에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본이 지리적으로 대륙과 떨어진 섬이고 고대로부터 언어, 인종, 생활의식 등에서 상대적으로 큰 통합을 해왔다는 것과 같은,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정으로 인해 ‘안’과 ‘밖’의 구별에 매우 민감한 의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외래사상 콤플렉스도 그 나름의 역사적 사정이 있는 것인데, 1930년대부터 급격이 흥해왔던 일본주의나 일본정신 등을 강조하는 경향도 역시 그 하나의 변종입니다. 근대일본에 독이 되는 구미사상을 배격한다는 형태로,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영역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일본정신’론이 전쟁 중에 쇠퇴한 것은, 아무래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의 결과인 것 같은데,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이뿐만이 아닙니다. 유교나 불교 혹은 유럽에서 온 기독교, 정치사상으로 말하면 리버럴리즘이나 입헌주의나 데모크라시 등의 갖가지의 보편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항하며 일본적인 세계관이라든가 일본적 정신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하나의 교의로서 구하려는 시도는 에도시대의 국학운동을 포함해서 모조리 실패로 끝났습니다. 국학 또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긴 했지만 ‘이데올로기’로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국학은 잠시 메이지유신의 이데올로기 중 하나가 되었지만 히라타파(平田派) 국학의 운명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일본의 사상사라는 것은 외래사상의 유입사에 불과한 것인가 라고 하면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유학 전공자는 중국의 주자학이 일본에 들어오면 ‘진짜’와 달라지며 일본의 유학자에 의해 왜곡된다고 지적합니다. 혹은 유럽의 리버럴리즘이나 데모크라시가 근대일본에 이식되면 이상하게 변형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일본과 중국의 유학사의 비교연구나 메이지 이후의 밀, 스펜서, 진화론과 사회주의의 이식사에 관한 연구는 그 자체로 큰 테마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교의와 체계적인 세계관에 대한 일본의 사상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외래사상이므로 ‘진짜’는 ‘밖’에 있다는 전제를 세우고 나면 일본의 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왜곡의 역사에 불과하고 맙니다. 한편에서는 그러한 외래사상에 대항하여 ‘순일본적’인 세계관을 구하려는 노력이 매우 어렵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사상사를 외래사상의 ‘진짜’의 일탈의 역사로 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것들이 그다지 생산적인 포착방법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령 음악에 비유하자면 주 선율은 거의 전부 외래사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 이식되었을 때 그대로 울리지 않습니다. 매우 같잖은 비유로 들릴까 염려스럽지만, 음악에서는 basso ostinato, 영어로 말하면 바소오스티나토 즉 집요에 반복되는 저음의 음형이 있습니다. 바소오스티나토가 밖에서 들어온 주 선율과 서로 어우러지기 때문에, 음악은 단지 주 선율이 화음을 만들어서 울리는 것과는 다른 울림을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수정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곡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를 띠지만 ‘수정’은 그 자체의 결과로 생각되거나 괘씸하다는 등의 가치판단은 없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세계관이나 교의를 ‘수정’해서 썸 타는... 그렇게 집요에 반복되는 음형이라는 의미에서 ‘바소오스티나토’를 가령의 예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고대로부터 정치의식에 대해 어떠한 ‘집요저음’이 있음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간관계상 논리를 비약했고 또 역사적 사례를 충분히 보여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도그마틱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여기서 나눠드린 ‘정사(政事)의 도식’(도표 A)을 참조해주세요. 우선 ‘마츠리고토’라는 단어는 ‘정사’(政事)라는 한자에 대응합니다. 이것은 메이지유신 직후까지 대체로 이 글자를 사용했습니다. 현재에는 아시다시피 ‘정치’라는 글자를 사용하지만, 유신 전까지만 해도 ‘마츠리고토’에는 ‘정사’(政事)라는 한자어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정사의 패러다임이 보시는 바와 같이 도표 A인데, 이 패러다임의 기초가 된 것이 율령체제의 확립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띤 일본고대 천황제국가입니다. 5세기경부터 이러한 형태를 갖추었고 대체로 7세기부터 8세기 사이에 확립된 야마토(大和)국가입니다. 어째서 이 시기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율령제의 형성기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의 근대국가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로 외국의 법, 정치, 경제의 체계를 섭취해서 국가의 체제의 대개조를 시행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대화개신(大化改新)[각주:1]과 메이지유신은 일본사에서 가장 큰 양대 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확히 메이지 이후의 정치체제가 유럽의 체제를 모델로 했던 것처럼 율령제는 중국의 당제(唐制)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충실히 모방한 것인데, 반대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 시기를 잡으면 일본사에서 ‘정치문화’의 변화패턴이 오히려 잘 드러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자는 포네틱(phonetic 음성)으로 사용됨과 동시에 이디어그래픽(ideographic), 즉 표의어로 사용됩니다. 후자는 온갖 훈독을 이릅니다. 훈독은 처음부터 야마토의 언어를 대략 비슷한 한자어에 끼어 맞춘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한자어가 그대로 음독되어 표의문자로서 일본어화하는 경우도 있으며 추상어에는 오히려 그 방식이 많습니다. 여하튼 정치용어에 한해서는 대규모로 한자어를 표의문화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대규모로 당제의 법ㆍ정치의 용어가 유입되었을 때 이것들을 ‘훈독’함에 의해 앞서 말씀드렸던 바소오스티나토도 이 단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즉 정치의 세계에서 문화변용[문화접변]의 일종의 실험장으로서 율령체제의 확립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우리에게 공히 알려져 있는 일본사의 고대문헌을 기초문헌으로 삼아 ‘키워드’를 골라내었습니다.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 『풍토기』, 「祝詞」[각주:2](연희식(延喜式)[각주:3]에 있습니다), 『고어습유(古語拾遺)』, 『만엽집(萬葉集)』 등입니다. 이것들에서 한자는 표음문자(이른바 “만요우가나”(萬葉假名)[각주:4])나 표의문자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사기』와 『서기』를 비교하면, 『서기』 쪽이 좀더 정식의 한문체로 쓰여 있는데, 그래도 표음문자로서 한자어가 원일본어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고 편찬자가 판단하는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한자를 표음문자로 사용하거나 본래의 중국어와는 맞지 않을 것 같은 한어적 표현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러한 몇몇 군데는 집요저음을 찾아내는 데에 특히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속일본기』도 전체적으로는 한문체로 쓰여 있지만, 그 속의 「宣命」[각주:5][詔勅]는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宣命」는 “미코토노리”(詔)[조칙]의 일종인데, 통상의 조칙은 한문체로 쓰지만, 宣命는 한자를 사용하면서 전체적으로 야마토의 언어로 쓰기 때문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고문헌의 읽는 방법입니다. 모토노리 오리나가는 『고사기』쪽이 한자를 표음문자로서 자유롭게 사용했고 변태 한문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카라고코로”에 오염되지 않은 고대일본인적인 사유방식이 『서기』보다 순수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입장에서 그는 『고사전기』(古事傳記)를 일생의 작업으로 완성했습니다. 오리나가의 ‘훈독’은 지금에 와서 여러 비판을 받지만, 뭐라 해도 그의 연구는 획기적인 것이며, 오늘날의 학자도 『고사전기』와 『歷朝詔詞解』(이것은 宣命의 주석서입니다)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연혁으로 말하면, 오히려 『고사기』는 오리나가가 발굴하기 전까지는 간과되었고, 그에 비해 『서기』는 예부터 궁중강독의 전통 속에서 이어져왔으며 교양신도의 바이블이 오로지 『서기』뿐이었던 탓에 주석서도 많습니다. 그런데 『서기』는 오리나가의 『고사전기』처럼 ‘결정타’가 없어서 그 한문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적어도 『서기』의 편찬자들은 어떠한 ‘훈독’을 기대했던 것일까—에 대해, 이설(異說)의 여지가 많습니다. 게다가 내용적으로도 『고사기』가 『서기』와 『속기』의 본문보다도 “카라고코로”(漢心)에 오염된 정도가 좀 더 적습니다, 라고 오리나가가 어떻게 단언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카라고코로에 오염된다’는 것은 현대어로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좀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데올로기성의 존재방식이 두 서적에서 달리 나타난다고 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의 정통성을 변증하는 계기가 강하고, 『서기』는 정사(正史)이기 때문에 야마토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초가 보다 전면에 부각됩니다. 이데올로기성이라고 하면 양쪽에 모두 존재하고, 역사서라고 하면 양쪽 다 역사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학적인 것을 오늘 강연의 인용서와 관련하여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또 ‘훈독’에 대해서도 물론 저는 일본어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략적인 통설만 말해두고자 합니다. 다만 중국 고전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상하게 생각될 ‘훈독’ 방식과 문체의 구성에 착목해서 집요저음의 단서를 추출해내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서설이 길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잡아먹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정사’(政事)의 어의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본에서 “마츠리고토”(政事)는 “마츠리고토”(祭事)입니다. 제사(祭事)와 정사(政事)의 훈독이 일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국체’는 제정일치다 라는 설명이 예부터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전전(戰前)에 받았던 교육은 물론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훈독’에 근거한 정사=제사라는 논리는 에도시대부터 있었습니다. 만약 정사=제사라면 제가 앞에서 열거한 고문헌의 어딘가에 ‘祭事’라는 한자어가 빈번하게 나와야하지만, 제가 찾아본 바에 의하면 ‘祭事’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헤이안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것, 즉 후세의 표현으로 말하는 종교적인 제사(祭事)는 처음에 어떤 단어로 표현되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이하이고토”(イハイゴト), “이미고토”(イミゴト), “이츠키고토”(イツキゴト)를 한자로 표현하면 ‘제사’(齊事), ‘기사’(忌事) 등이며, ‘제사’(祭事)가 아닙니다. ‘제’(祭)가 단독으로 동사로서 등장해도 훈독은 “이하이마츠루”(イハイマツル) 또는 “이츠키마츠루”(イツキマツル)입니다. “이하이마츠루”(イハイマツル), “이츠키마츠루”(イツキマツル)와 같은 말은 종종 등장하지만, 그 경우에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하후”(イハフ), “이츠쿠”(イツク), “이무”(イム)의 레벨에 있는 것이지 “마츠루”(マツル)의 레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츠키고토”(イツキゴト)든 “이미고토”(イミゴト)든 정사(政事)(“마츠리고토”)와 훈독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츠쿠”(イツク)라는 것이 고래의 야마토의 언어이며 한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편찬자가 생각했다는 것은 『고사기』의 초출의 몇 군데에 ‘伊都久’의 음독으로 일부러 주석을 붙여 넣은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마츠루”(マツル)라는 야마토의 언어용법은 반드시 종교적 행사에 한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만요우(万葉)의 노래에 자주 나오는 ‘豊御酒祭’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송별연 등 통상의 세속행사의 연회 등에서도 사용되며 술 한 잔을 바친다는 단순한 의미입니다.

  제사(祭事)(“마츠리고토”)=정사(政事)(“마츠리고토”)는 ‘훈독’에서 기초한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은 제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이미 모토노리 오리나가가 『고사전기』에서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마츠루”(マツル)의 어원에 대해 오리나가가 말했던 모든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정사=제사라는 통설적인 등식을 부정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그렇게 “카라고코로”를 배격했던 오리나가가, 유교의 덕치주의에 대해 일본 황실의 혈통에 의한 통치의 전통을 그렇게 높이 삼았던 오리나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 정사(政事)의 “마츠리고토”는 ‘제사’(祭事)에서 온 것이라고 누군가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카미즈카사(神祇)의 제사(祭祀)는 오호키미(大君)의 통치 속에서도 매우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숙려해보면, 정사(政事)(“마츠리고토”)라는 언어의 유래는 제사(祭事)(“마츠리고토”)가 아니고 봉임사(奉任事)(“마츠리고토”)이다. 천하의 신(臣)ㆍ연(連)(“무라지”)[각주:6]가 천황의 명을 받들어 각자 그 직무에 봉임하는 것이 곧 천하의 정치이다. 물론 천황이 신(神)에 봉임하는 것도 “마츠리고토”이며 그 근본은 같다. — 즉 정사(政事)를 한다고 할 때에 주어는 군(君)이 아니라 군에 봉임하는 신(臣)ㆍ연(連)이라는 것이 오리나가의 해석입니다. 과연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문헌을 정독한 이는 오리나가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국학이 나중에서야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 에도시대의 국학자ㆍ신학자ㆍ사상가ㆍ의사) 등에 의해 신학으로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을 때, 제사=정사설이 부상한 것인데, 오리나가의 사유방식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고어의 용법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학문상의 방법론으로 일관했으며, 그것만으로도 그의 설명의 신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사(政事)(“마츠리고토”)란 제사(祭事)(“마츠리고토”)이다 라는 어원적 근거에서 제정일치를 일본의 정치적 전통을 말하는 사고는, 제가 보기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1293-1354)의 『神皇正統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설의 발생 시기는 아마도 이세신도(伊勢神道)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세신도 또는 와타라이신도(度会神道)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카마쿠라(鎌倉) 초기에 이세의 외관(外官)의 신관이었던 와타라이(度会) 씨가 내관(內官)에 대해 외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한 동기에서 일종의 ‘신학’을 편찬했습니다. 카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의 신도는 교의상으로는 이세신도의 계보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쨌든 교의신도는 결국 이데올로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 흐름에서 정사=제사설이 나왔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신들의 제사는 행사가 중심이며 본래 ‘경전’에 준한 것이 아니므로 신도의 ‘교의’를 만들려고 하면 어떻게 해도 불교나 유교의 세계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외래 이데올로기와의 ‘습합’을 배제하는 오리나가는 당연히 교의신도의 일체의 입장을 부정했고 ‘신도’의 ‘도’라고 말하는 방식 자체도 유ㆍ불의 ‘도’에 대항하면서 후세로 이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리나가가 ‘정사’(政事)에 대해서도 교의신도와 같은 어의적 해석을 배격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제가 오리나가의 주장도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것은 ‘마츠리고토’의 본래의 뜻이 ‘봉임사’(奉任事)가 아니고 무엇인가를 헌납한다라는 의미에서 ‘헌상사’(獻上事)가 ‘마츠리고토’의 더 오래된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豊御酒祭’의 예를 들었는데, 또 하나 만요우집에서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あきつはに にほへる衣 君に奉らば 夜も着るがね”

  이것은 일종의 러브송입니다. 대략의 뜻은 자신이 이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고 당신에게 바친다는, 꼭 밤에도 당신이 이 옷을 입고 잤으면 한다는… 것인데, 이 “마츠루”(‘奉る’)에는 물론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없으며, 봉임한다는 의미뿐입니다. 단순히 옷을 연인에게 ‘바친다’는 것이 “마츠루”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보다 깊은 언어로 말하면 “타테마츠루”(タテマツル)[받들다, 모시다]와 같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행사에 대해 “이츠키마츠루”(斎祭)라는 표현이 사용될 때에도 ‘성스러운 것’의 의미는 ‘이츠쿠’(斎く)[각주:7]라든가 ‘이하후’(祝う)라든가 ‘이무’(忌む)라는 말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 행사에서는 아시다시피 신에게 공물을 바칩니다. 그것이 ‘이츠키마츠루’의 ‘마츠루’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에게 공물을 헌상하는 것도 ‘마츠루’이며 연인이나 군주에게 헌상하는 것도 ‘마츠루’이며 헌상하는 것 자체에 종교적 의미는 없습니다. 종교적 행사의 주재자를 ‘제주’(斎主) 혹은 ‘신주’(神主)라고 표현하고, 이것을 “이하히누시”나 “카무누시”라고 훈독합니다. (제주라는 한자어도 드물게 나오지만 이 경우에도 통설의 훈독은 “이하히누시” 혹은 “이츠키누시”입니다.) 신들에 대해서든 인간에 대해서든 헌상하는 ‘것’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것’을 한 단계 추상화하면 헌상물, 곧 봉임사(奉任事)가 됩니다. 봉임사를 동사로 훈독하면 “츠카에마츠루”입니다. 그러므로 “마츠르고토”는 ‘봉임사’(奉任事)이다 라는 오리나가설도 ‘마츠루’의 제2의 뜻으로 제출된 의미로 보면, 그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서비스라든가 서번트라는 어휘에는 “웨이트”(待つ)라는 함의가 있으며 요리를 서브하는 사람을 “웨이터”라고 하는 것도 재밌는 부합입니다. 그러므로 제2의 뜻이라 해도, 봉임을 ‘헌상’한다는 것을 “마츠루”라고 말하며 “마츠루”가 “츠카에마츠루”(任奉)의 약어가 된 것은 그렇게 후대가 아닌 기기(記紀)[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시대에 이미 그러했던 것이지요. 다만 앞서 인용한 만요우의 노래의 경우에서와 같이, 옷이라는 구체적인 물건을 헌상하는 의미에서의 “마츠루”가 발생학적으로 더 오래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패러다임을 보면, 여기서는 정통성과 결정이라는 두 가지의 레벨을 구별합니다(도표 A 참조). 도표 A의 어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정통성(Legitimacy)이라는 것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의 정통의 하나의 형태입니다. 즉 통치라는 것을 단순히 발가벗겨진 폭력관계—이것은 영속성이 없습니다—를 넘어서 통치의 대상으로서 신하 혹은 인민에 대한 어떤 사리분별을 갖는 힘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것에 의해 권력으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관념적 근거가 정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스베버의 저 유명한 지배의 정통성의 세 유형—카리스마적 지배ㆍ전통적 지배ㆍ합리적 지배—에서 예의 Legitimitat가 여기서 말하는 정통성입니다. ‘통’(統)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정당성’이라는 번역어를 피했던 것은 정당성과 윤리적인 올바름(Richitigkeit)이 헷갈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복종자가 가치판단으로서 올바른 통치가 아닌데도 통치자의 권력을 조폭이 행사하는 권력이나 폭력과는 다른 무언가의 '사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복종한다는 현실이 있는 한 그러한 현실에 정통성이 있는 것입니다.

  결정(decision-making)은 설명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책결정에도 위아래의 다양한 레벨이 있기 마련이고, 한번 최고레벨에서 정책결정을 내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정통성의 소재와 정책결정의 소재는 확연히 분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일본의 ‘정사’(政事)의 집요저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로 나누어 그 사이의 상호관계를 도식화한 것입니다.

  이 두 레벨의 확연한 분리는 중국과 매우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이르기까지 ‘절대군주제’와도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율령제는 매우 큰 규모로 중화제국을 모델로 하면서, 아시다시피 천황 아래의 “다이죠우칸”(太政官)이라는 최고정책결정기관을 설치했습니다(近江令[각주:8] 이후). 이것은 메이지유신 때에 긴 막부정치가 끝난 후 부활되었는데,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메이지유신의 경우에 역사가들은 “다죠우칸”이라고 훈독하는 것에 반해 옛 율령제 때에는 “다이죠우칸”이라고 훈독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다이죠우칸”이 “카미즈카사칸”(神祇官)과 나란히 천황 아래에 설치되었고, 나아가 그 아래에 관내성(官內省)ㆍ대장성(大藏省) 이하 여덟 개의 성(省)이 설치됩니다. 이 자체가 매우 재밌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당제의 경우에는 황제가 만기(万機)를 통솔하고, 그 밑에 상서성(尙書省)과 문하성(門下省)과 중서성(中書省)이라는 삼성(三省)을 직접 예속합니다. 이 세 성(省)이 각각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으므로 넘어가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해 세 성은 황제에 예속되었고, 각 성을 총괄하는 “다이죠우칸”에 해당하는 직제가 중국에는 없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황제가 천하의 대정(大政)을 총괄한다는 것이 제도상으로도 분명히 표명됩니다. “다이죠우”(太政)에 임하는 관제를 설치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각제도로 말하면 소위 ‘내각’에 해당하는 통합기관이 없고, 황제에 직접행정의 각 성이 예속됩니다. 게다가 중국의 삼성(三省)은 황제의 자문기관이었고, 결정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최고결정의 소재는 어디까지나 황제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도상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최고 정책결정을 언제나 황제가 내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도상의 표명은 어디까지나 ‘일군만민’이며, 모나키(monarchy 단독통치)였습니다. 그런데 야마토의 조정 하에서 중앙집중화를 행했던 일본의 경우, “다이죠우”(太政)에 해당하는 관을 천황(황실)과 각 성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정통성의 원천인 군주와 실질상의 최고결정기관을 제도적으로 분리한다는 하나의 사유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규모로 당제를 모방했지만서도 이 양자의 차이의 의미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이원적 분리에 기초한 도식이 만들어집니다. 다음으로 간단히 이 도식의 훈독에 대해 주석을 달아보겠습니다.

  다양한 어휘가 점선과 직선에 따라붙습니다. 직선은 고대의 문서 중에 어떻게 문장이 연결되는가—주어와 술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자동사ㆍ타동사의 용법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에 비해 점선은 통치구조의 실질적인 관계와 역할을 나타냅니다. 우선 결정의 레벨부터 말씀드리면, 여기에 대신 이하 경(卿)ㆍ군경(群卿)ㆍ대부(大夫) 등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예시적인 것이고 또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만, 여하튼 이들은 ‘정사’(政事)를 하는 주체, 곧 정책결정의 주체입니다. 이들을 통칭해서 “마헤츠키미”(まへつきみ)로 부릅니다. 복수의 군경(群卿)(군신(群臣))도 일반적으로 “마헤츠키미타치”(まへつきみたち)로 훈독합니다. 대신은 보통 “오호오미”(おほおみ)로 읽는데, 좀더 정식의 옛 훈독으로는 “오호마헤츠키미”(おほまつきみ)입니다. 대신에는 아시다시피 좌우의 대신이 있는데, 태정대신(太政大臣)이라는 것은 상설의 관직이 아닙니다. 이 점은 중국의 당제에서 황제의 사전(師傳)의 직을 본뜬 ‘칙투(則鬪)의 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안되”(その人なければすなわち欠く)는 것입니다. 태정대신을 야마도의 언어로 읽으면 “오호마츠리고토노오호마헤츠키미”(おほまつりごとのおほまへつきみ)라고 하는데, 아무리 고대의 정치의 일이 간단했다 해도 태정대신을 일일이 “오호마츠리고토노오호마헤츠키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길고 번잡했으므로 “다이죠우다이신”(太政大臣)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여하튼 대신 이하 모두는 결정의 레벨에 위치하고, 이는 태정관이 “마츠리고토”(政事)의 주체가 되는 이유입니다.

  자, ‘정사’(政事)를 목적어로 해서 어떻게 동사가 이어지는가에 대해서 열거해보겠습니다. 이것도 모든 것을 망라한 것은 아닌데, 고문헌에서 주요 사례를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a는 “마츠리고토ㆍ츠카헤마츠루”가 됩니다. “츠카헤마츠루”를 표현하는데 어떤 한자어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그 바로 아래의 괄호 안에 적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동사와 목적어(정사)와의 문장상의 접속관계이기 때문에 직선으로 표시해놓았습니다. “마츠리고토”라고 하면 동사로서 “츠카헤마츠루”와 중복으로 표현되는데, 일본의 고어에서는 이렇게 중복되는 용법이 적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b가 ‘정치를 한다’ 혹은 ‘정사를 행한다’입니다. 이 경우의 동사에는 괄호에서 쓴 것처럼 한자어를 사용합니다. 이것도 “마오수”(まをす)[각주:9]의 동류(同類)를 망라한 한자어는 아니고 몇몇 주요한 것을 뽑아놓았을 뿐입니다. “츠카헤마츠루”나 “마오수”가 실질적으로는 정사를 목적어로 하는 타동사가 되는 의미는 후에 서술합니다.

  c가 ‘마츠리고토를 행한다’입니다. 이 한자에서 쓰인 ‘치봉’(治奉) 등에 대한 어휘는 일본에서 만든 말인데, 제가 보기에, 중국고전에 ‘치봉’에 해당하는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미묘한 조어가 사용되는 것도 후에 서술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마츠리고토”가 기본적으로 헌상사(獻上事)—상급자에 대한 봉임의 헌상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미묘한 한자어가 가능한 것이지요.

  d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통용되기 쉬운 용법입니다. 마츠리고토를 이룬다, 정사를 행한다, 정사를 취한다—이것들은 그대로 현대에도 이해됩니다.

  그런데 e가 현대의 감각에서 이해되는 한에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츠리고토를 장악하다’의 내용에 대해서도 후에 설명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f의 ‘마츠리고토에 향한다’(政ことむく) 라든가 ‘정사를 취해 화해를 이룬다’(政事ことむけやはす)는 것은 일반적인 정사(政事)의 집행보다도 조금 특수한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지방에서 야마토 조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반란을 평정한다고 할 때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 바로 밑의 괄호에는 ‘言向’ ‘言趣’ 등이 쓰여 있는데, 이것 또한 중국고전이나 사기의 한문에는 나오지 않는 조어입니다. 물론 ‘화평’(和平)이라는 말이 있지만, ‘언향화평’(言向和平)과 같은 숙어는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어구입니다. 즉 오늘날 “갸루”(ギャル)(걸(girl)의 일본외래어)나 “나이타-”(ナイター)(나이트게임(night game)의 일본외래어) 등의 일본제 영어와 같이 아주 자유롭게 한자어를 구사해서 야마토의 언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도 설명하면 긴데, “고토무쿠”(ことむく)에서 “고토”(こと)는 그다지 의미가 없으며 접두어 같은 것으로 중요한 것은 “무쿠”(むく)쪽입니다. “무쿠”(むく)라는 것은 “오모무쿠”(おもむく)의 “무쿠”(むく)와 같은 말로, 얼굴을 이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모무쿠”(おもむく)의 반대가 “소무쿠”(そむく)가 됩니다. “소무쿠”(そむく)라는 것은 “등을 향한다”—즉 얼굴을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토무쿠”(ことむく)가 평정을 의미하는 것은 반란을 일으켜 “소무이타”(そむいた)[등을 보였던] 자를 조정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 그 유래가 있습니다. “소무쿠”(そむく)는 자동사이고 “고토무쿠”(ことむく)는 타동사이기 때문에 주어가 다르게 옵니다(“오모무쿠”(おもむく)는 자동사, 타동사 둘 다 쓰입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는 뿌리가 같습니다. 등을 보였던 자를 “오모무케”(おもむけ) 혹은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하는 것이 천황으로부터 토벌을 명받은 신하관료의 임무가 됩니다.

  f 아래의 참조에 “오모무케”(おもむけ)(風化)라고 쓰인 것은 “오모무케”(おもむけ)라고 할 때에 ‘풍화’(風化)라든가 ‘교화’(敎化)라는 한자어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본래 한자어의 경우, 풍화, 교화에는 매우 윤리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왕자의 덕으로 감화시킨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모무케”에는 윤리적인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대적으로 희박합니다. 오히려 얼굴을 다른 신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는 동방향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구나 구체적으로는 무력토벌이기 때문에 왕자의 덕으로 감화한다 라는 것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격차가 있습니다. 군사력의 행사를 ‘풍화’라는 한자어로 표현한 것은 재밌는 점입니다.

  등 돌린 자를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가 “쿠마소”(熊襲)[각주:10]를 정벌하는 것은 “고토무케야하수”(ことむけやはす)의 전형적인 한 예인데, 평정을 끝내면 야마토 조정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점선으로 표시된 “마이리노부루”(まゐりのぼる)가 됩니다. 더 높은 상급자에게 가까이 간다는 의미가 특히 “노보루”(のぼる)라는 위로 향하는 동사 속에 암시되고 있으며, “마이루”(まゐる)는 야나기다 쿠니오(柳田国男)가 후세의 속어로 항복한다는 뜻을 ‘参った’(마이따)로 표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官まいり’의 ‘まいる’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그리하여 관에 참내해서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의 순서가 됩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는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복주(復奏), 복명(復命), 보명(報命)이라는 한자어로 사용됩니다. 이것들은 본래의 한자어로, 일본인이 조어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리나가는 어떤 의미에서 조금 지나치게 엄밀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자어에서 ‘복주’(復奏)라고 할 때에는 황제로부터 무언가의 명을 받아 그에 대해 리플라이—반답(返答)을 주상(奏上)한다 라는 의미가 있는데, 고어에서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야마토 조정에 돌아와서 주상한다 라는 구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으로 반답(返答)을 아뢴다는 뉘앙스와는 다른 것이다 라고. 일본과 중국의 언어의 의미의 차이를 아무리 지나치게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고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방에서 지방의 반란을 평정한 후 야마토에 돌아와서 무사평정을 대군에게 보고하는 것이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인 것입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에서 ‘정사’의 사이클의 일단이 완결되는 것입니다.

  ‘정사’의 결정 레벨에 있는 대신이나 경(卿)들이 정치를 “츠카헤마츠”하거나 “마오”했던 것은 모두 보통의 정책결정과 그 집행을 의미합니다. 그에 대해 정통성의 레벨에 있는 천황, 대군, 황제는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경(卿)들이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키코시메수”(きこしめす)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가 천황인 경우에는 정사를 “키코시메수”한다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시로시메수”는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키쿠”(聞く)라든가 “시루”(知る)라는 것은 어찌되었든 감각적으로 외계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작용이며, 거기에서는 수동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정사를 보는 직업의 주체는 대신이나 군경(群卿)들이며, 정사를 보는 대로 그 결과를 “키코시메루” 내지는 “시루시메루”하는 지위에 있는 것이 천황입니다. (세부적인 것을 말하면, 본래 일본에서 정통성을 가진 것은 천황 개인보다도 황실이라는 혈연집단이었고, 언어에서도 ‘천황’이라는 한자어적인 표현은 반드시 지금 직위하는 천황만이 아니라 그 외의 상황(上皇)이나 황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그 용법은 실로 복잡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황제’가 문자 그대로 일군(一君)을 가리키며 복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과도 다릅니다.)

  오리나라가 정사(政事)의 직접적인 주어는 신(臣)과 연(連)(“무라지”)이라고 말했던 것은 지금까지 서술한 바입니다. 경(卿), 대부(大夫)가 행한 정사(政事)를 “키코시메시” “시루시메수”하는 것이 천황(황실)이고 그에 의해 ‘정사’(政事)적 결정권은 정통성을 갖게 됩니다.

  ‘정사’적 결정 레벨과 정통성의 레벨의 차이를 역투사[逆照射]해서 말하면, 앞서 서술했던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가 됩니다.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復奏)는 말할 것도 없이 “마오수”(まをす)(奏ㆍ申)의 하나의 특수적 형태입니다. 그런데 『朝日古典叢書』에서 『고사기』의 주석을 행했던 칸다 히데오(神田秀夫)ㆍ오오타 요시마루(太田善麿)가 찾아낸 것을 보면, 『고사기』에서 “마오수”(奏)라는 글자의 용례 23개 중 14개가 ‘복주’(復奏) 내지는 ‘복주’(覆奏)—즉 “카헤리고토마오수”(かへりことまをす)입니다. 특히 상권ㆍ중권만을 보면, “마오수”(奏)의 14개의 용례 중 12개가 ‘복주’(覆奏)입니다. 어떻게 ‘복주’(覆奏)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 예를 들어 유명한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 일본신화 속 고대국)의 평정신화에서 고천원(高天原 일본신화 속 하늘신이 사는 곳)에서 먼저 파견된 사자 “아메노호히노카미”(天菩比神), 그리고 뒤이어 파견된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가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의 지배자인 대국주신에 ‘빌붙어’ “카헤리고토마오사즈”(かへりことまをさず)(不復奏)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망명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사자가 파견되었고 드디어 대국주신이 일정한 조건 하에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葦原中国)—즉 일본국—의 통치를 “아마테라스”의 자손으로서 평화적으로 위탁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만이 아니라 “카헤리고토마오사즈”가 단적으로 불복종 혹은 반역을 의미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카헤리고토마오시”에서 처음으로 ‘정사’(政事)의 사이클이 완료된다고 앞서 말했던 것은 그에 의해 ‘정사’적 집행이 처음으로 정통화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등 돌렸던 자가 조정에 복종하면, 그것을 “마츠로우”(まつろふ)라고 말합니다. 도표 A의 글자 밑에 쓰인 것처럼 귀복(歸復), 귀순(歸順)이라는 한자어가 있는데, 이 경우 한자어의 본래의 의미와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마츠로우”(まつろふ)는 “마츠로”(まつろ)와 어원이 같다고 오리나가는 말하지만, 이것은 지금의 국어학상에서는 이론(異論)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고사기』의 “令和平麻都漏波奴人等”에서 麻 이하의 다섯 글자를 읽어보면 주기(注記)한 것과 같이 “마츠로후”(まつろふ) “마츠로하누”(まつろはぬ)라는 특수한 야마토의 단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로 적어도 반란한 자가 귀순하면 결과적으로 대군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것이 됩니다. 즉 귀순해서 중앙정부에 봉임하게 되면, 다른 신하와 관료와 같은 레벨에 서게 됩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해서 대군의 명을 받들어 밑에서부터 움직인 ‘정사’를 대군은 “키코시메루” “시루시메수”하고, 이로써 정사는 하나의 사이클을 완료하는 것입니다.

  이제 도표 밑에 신하관료가 아닌 일반인민에 관해 보면, “오호미타카라” 혹은 “오호무타카라”, “히토쿠사”, “아오히토쿠사”라고 하는데, 그것은 여기서 예시한 것과 같은 한자어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인민은 중앙의 대군에, 보다 직접적으로는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에 대해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한 관계에 있습니다. 대신, 경들이 천황에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한다면, 이와 마찬가지의 패턴으로 일반인민이 지방 내지는 중앙의 관료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가 →←의 대립ㆍ지배의 관계로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위’로 향하는, 동방향적으로 봉임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지배관계가 없을 리가 없다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어휘관계를 통해 표현되는 이데올로기의 레벨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중국사나 중국문학을 전공하는 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인데, ‘신민’(臣民)이라는 숙어는 중국의 문헌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신’(臣)과 ‘민’(民)이라는 말은 각각 존재하지만, 신과 민은 확실히 구분된다고 합니다. 대일본제국신민이라고 할 때에 ‘신민’이 하나의 단어로서 관념되고 있는 반면, 중화제국에서 신(臣)은 군주에 직속된 관료를 의미합니다. 즉 신(臣)은 민으로부터 구별되어 ‘군신’(君臣)으로서 군과 묶입니다. 예를 들어 유교의 오륜에서 ‘군신의 의’는 군과 그에 직속된 관료와의 관계의 규범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군신의 의’라고 할 때에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일반인민도 포함해서 군신과 군민 간의 양방의 관계를 포함합니다. 본래 에도시대의 막번(幕藩) 체제에서는 주군이란 직접적으로 번주를 의미하는데, 기본적으로 군과 신 사이에 보호ㆍ충성의 상호윤리가 번주와 일반가신 사이에 통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막번체제가 붕괴하고 메이지에 ‘천황친정’이 부활하면서 율령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료가 대군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패턴으로 일반국민이 황실에게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하는 동방향성의 원칙이 관철되어 그로부터 '황국신민'이라는 표현이 일반화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므로 이 도표가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중요한 두세 가지의 문제만 말하겠습니다.

  전술했던 것처럼, abcde는 정사(政事)를 목적어로 하는 타동사용법입니다. 예를 들어 b의 “마오수”를 보면, “마츠리고토마오수”라는 표현은 지금의 어감으로 말하면 정사를 누군가가 윗사람에게 아뢴다 라는 의미로 한정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c나 d와 마찬가지로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넓은 의미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주상’(奏上)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중요한 것은 정사의 ‘아래에 대한’ 행동이 “마츠리고토마오수”로서—즉 ‘밑에서 위로’의 주상과 같은 의미로—사용되는 것입니다. ‘신정사’(申政事)라는 표현은 중국의 고전한문에 나오긴 하지만 결코 정사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치봉’(治奉)이라는 표현도 “센묘우”(宣命) 등에 자주 나옵니다. 이것도 실질적으로는 ‘치’(治)와 동일한 뜻을 갖는데, 전술한 대로 중국의 문헌에서 ‘치봉’(治奉)과 같은 단어는 사고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예들은 일본의 경우 정사적 통치는 위에서 아래로의 지배보다는 아래에서 위로의 ‘봉임의 헌상’이라는 측면이 강조됨을 표상하며, 이 속에서 정사의 ‘집요저음’이 울리고 있습니다.

  “마츠리고토ㆍ마오수”의 레벨과 “키코시메수”의 레벨의 차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센묘우”(宣命)의 하나를 예시해보겠습니다. 고닌천황(光仁天皇, 709-782)의 호키(宝亀 일본의 연호 770-780) 2년 2월의 “센묘우”(宣命)로, 『속일본기』에 있습니다. 그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겠습니다.

  “今日よりは大臣の奏したまひし政事はきこしめさずやならむ”

  이것은 좌대신인 후지와라 노나가테(藤原永手)라는 사람이 훙거(薨去)했을 때에 천황이 그것을 매우 슬퍼해서 한 말입니다. “오늘부터는 후지와라의 좌대신이 다녀와서 아뢰던 정사를 천황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입니다. “키코시메사즈”[듣지 못한다]의 주체는 천황이며, “마오수”[아뢰다]의 주체는 좌대신 후지와라입니다. 정사에 대해 이렇듯 “마오수”의 레벨과 “키코시메수”의 레벨의 차이가 짧은 문장 속에서도 매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더 한가지의 예를 들면, …(중략)…^^;;;

  여기서 나눠드린 종이의 도표 B를 보아주십시오. 이것은 율령제 후의 역사적인 변질과정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이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드린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분리의 패턴이 율령제가 붕괴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될 뿐만 아니라, 마치 결정체를 아무리 잘게 부수어도 같은 모양을 하는 것처럼 겹겹이 세분화되어 반복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대화개신에 의한 ‘천황친정’의 원칙의 변절은 우선 섭관제의 등장으로 나타납니다. 섭정과 관백(關白)은 이름과 제도 모두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천자가 어릴 때나 병약할 때에 임시로 두는 관직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이윽고 사실상의 상설 관직이 되어 후지와라(藤原永手)가 그 자리를 독점했던 것과 같은 실태로 이어졌습니다. 섭관 자신이 “료우게노칸”(令外官), 즉 율령제의 정식의 관직 밖의 관직이 된 것인데, 대체로 율령제의 변질과정은 “료우게노칸”(令外官)이 점점 늘어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납니다. 내대신(內大臣), 쿠로우도도코로(蔵人所)[각주:11], 참의(參議), 검비위사(檢非違使), 헤이안 시대 이후는 율령제 하의 실권의 소재는 거의 “료우게노칸”(令外官)에게 있었습니다. 좌대신, 우대신이라는 정식의 고관은 이름뿐이었고 정치적 의미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천황친정에서 율령제를 모델로 해서 신체제를 만들었던 메이지 유신의 경우에도 그렇고 참의 등이 태정대관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결정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공식화(informalization)의 경향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당면한 과제로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섭관제가 등장했어도 정통성의 레벨은 여전히 황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섭관을 비롯한 “료우게노칸”(令外官)은 결정의 레벨에 있습니다. 게다가 최고의 결정자였던 섭정백관은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후지와라(藤原永手) 씨는 황실의 외척으로서 섭정의 지위를 독점했는데, 원칙으로는 정통성의 보유자인 천황의 ‘후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후의 일본의 정치과정의 큰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즉 정사(政事)의 정통성을 가진 최고통치자의 배후에는 언제나 ‘후견’이 있었고 리모콘이 있었습니다. 황실의 내부에서는 드디어 ‘원정’(院政)이 등장하는데, 이 원정도 역시 ‘후견’이라 불렸습니다. 원(院)은 상황(上皇)으로, 별명으로는 태상천황(太上天皇)이라 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황’은 결코 단독의 별칭이 아닙니다. 황자나 황녀도 ‘천황’이라 부르는 예가 있습니다. 라고 앞서 말씀드렸지요. 그러나 상황의 원정(院政)시대에는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현 천황에 있으며 직위를 이양했던 전 천황은 ‘후견’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마치 섭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중에까지 남는 재미있는 또 하나의 집요저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섭관제의 경우에도 원정(院政)의 경우에도 현실에서 실제의 결정자는 섭정, 관백 내지는 원(院) 자신이 아니라는 것, 마치 “료우게노칸”(令外官)에 해당하는 비공식화 혹은 “미우치”(身内)화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비공식화 혹은 “미우치”화는 원(院)의 경우에도 원(院)의 근신(近臣), 즉 측근이 ‘원사’(院司)가 되어 관위가 낮아져도 원의 정사(政事)의 광범위한 실권을 장악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어느 원사는 ‘밤의 관백’이라 할 정도로 실권을 가졌습니다. 섭관의 경우에는 역시 후지와라(藤原永手) 씨의 가정기관인 ‘가사’(家司)가 실질적인 섭관의 이름으로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에 결정과정의 실태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섭관도 원(院)도 천황에 대한 ‘후견’의 지위에 있는 것인데, 그 ‘후견’에도 ‘후견’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경우에는 공적지위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사적인 가정기관인 것이지요.

  가사(家司)의 근무지는 “만도코로”(政所)라고 칭했습니다. “만도코로”(政所)라는 명칭은 무가(武家)정치에도 계승되는데, ‘정사’의 구조를 실로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정권의 하강경향을, 또 한편에서는 정권의 “미우치”화, 사화경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턴이 무가(武家)정치에서 완전히 재생산됩니다. 카마쿠라막부가 생겨났을 때, 막부를 『愚管抄』(구칸쇼우)에서는 ‘후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섭정ㆍ백관의 경우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막부는 물론 교토의 조정에 대한 후견자는 그 무엇도 아닌 거의 독립의 권력체였습니다. 특히 본소(本所)ㆍ영가(領家)의 장원령을 제외하고 막부의 가인(家人)과의 관계에서는 교토의 공가(公家)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던 권력입니다. 막부라는 것은 동아시아 지방의 그 어디에서든 볼 수 없는 정치형태입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였는데, 일본만이 공가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무가권력이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일본국 통치의 정통성의 소재는, “세이이타이쇼우칸”(征夷大将軍)이라는 장군의 호칭이 조정으로부터 수여되었던 것이 상징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공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의 실권은 막부에 있으며 게다가 그 실권은 점점 확대되어 역으로 율령제는 명목화해갑니다. 그런데도 그 막부가 원칙적으로 조정에 대해 ‘후견’을 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재밌는 점입니다.

  나아가 이번에는 카마쿠라 막부의 내부구조에 눈을 돌리면, 여기에도 역시 모두들 아시다시피 동일한 정통성과 결정권의 이원적 분리의 패턴이 재생산됩니다. 막부의 ‘쇼군’은 막부레벨에서 정통성의 원천입니다. 그리하여 호조씨(北条氏)가 ‘집권’을 합니다. 집권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는 것처럼, 여기에서 “주재하는”[とりもつ] 관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집권의 직접적 의미는 물론 실권을 ‘잡은’ 자라는 것이지만, 호조집권은 한편으로는 쇼군과 카마쿠라의 가인(家人) 사이에 개입하여 그 ‘사이를 주재하는’ 역할을 맡고, 또 한편으로는 무가를 대표하여 교토의 공가와의 매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막부는 공가에 대해 ‘후견’의 관계에 있지만, 막부의 내부를 보면 집권은 장군의 ‘후견’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패턴이 겹겹이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쇼군 자신이 명목의 실권자가 되며, 바로 이 때문에 후지와라(藤原永手) 가문에서 쇼군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권’이라는 공공의 결정자 자신의 역할이 점차 변질되어 갑니다. 다양하고 복잡한 과정이 있고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호조씨(北条氏)의 승계자[家督]를 “토쿠소우”(得宗)라고 합니다. 이것은 호조씨(北条氏)의 이른바 자부심 넘치는 ‘가문’의 통솔자를 가리키는데, 집권정치의 실태는 토쿠소우정치이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집권의 직을 떠났던 전 집권이 현 집권의 ‘후견’으로서 자주 큰 역할을 맡습니다. 마치 상황(上皇) 즉 ‘태상천황’의 경우와 같이, 정식으로는 양위했음에도 불구하고 ‘후견’으로서 현실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패턴과 동일합니다.

  그렇게 “토쿠소우”(得宗)의 가정기관을 ‘내관령’(內官領)이라고 말하는데, 집권에서 토쿠소우정치로의 전화로 말해지는 것의 실체를 보면, 토쿠소우 밑의 ‘내관령’이 점차 막부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즉 권력의 하강화가 여기에서도 “미우치”(身内)화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도표 B에도 써져 있는 것처럼 “미우치”(御内), “미우치가타”(御内方)라는 호칭으로 이어집니다. “미우치”, “미우치가타”는 토쿠소우의 부하이며 토쿠소우의 ‘피관’(被官)의 지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집권의 지위 자체가 원칙화되는 것인데, 그 토쿠소우 정치에서 토쿠소우 또는 전 토쿠소우의 “미우치”, “미우치가타”가 매우 큰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일화이지만, 호조씨(北条氏) 시대에 나가사키 타카스케(長崎高資)라는 자가 ‘내관령’(內官領)으로서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增鏡』에는 타카스케의 아버지인 나가사키 엔키(長崎入道円喜)에 대해 ‘우리들의 후견’이라고 하며 ‘이 세상의 대소사가 엔키에 손에 주재되어 계획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후견’ 자체가 사화(私化)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가 되면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에 있으므로 관동에 ‘관령’(管領)을 둡니다. 타카우지(尊氏)의 아들, 모토우지(基氏)가 관동관령이 되었는데, 그는 ‘관동공방’(關東公方)이라고 합니다. ‘공방’이라는 이름은 막부 중앙에서 한 단계 낮은 직위입니다. 그런데 이 관동공방의 내부에 또 정통성과 결정권의 두 레벨이 분화합니다. 관동공방이 정통성의 레벨에 위치한다면, ‘집권’이라는 관동공방의 부하가 실권자로서 등장합니다. ‘집권’이라는 어휘는 역시 앞서 언급한 ‘주재하다’와 관련됩니다. ‘관령’(管領)은 교토의 막부의 집권에 해당하는 역할명이기도 하지만, 거기에서도 ‘관령’(管領)의 ‘피관’(被官)의 ‘봉행인’(奉行人)이 큰 권력을 잡게 됩니다. 앞서 서술했던 명령으로서의 교서(敎書)가 ‘봉서’(奉書)인 것과 마찬가지로, ‘봉행’(奉行)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던 “츠카헤마츠루”(つかへまつる)(任奉)와 어원적으로 같은 뿌리를 갖습니다. ‘관령’(管領)의 실권이 ‘내관령’(內官領)으로 이행하는 것은 앞서 서술했던 공가(公家)의 내부에서 원정(院政)의 경우에 ‘원사’(院司)가, 섭관의 경우에 ‘가사’(家司)가 실질적인 결정의 역할을 점하는 것과 평행을 이룹니다.

  매우 긴 역사적 과정, 게다가 다양한 사례를 단시간에 급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적 설명으로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 염려가 됩니다. 굳이 단순화하면 정통성의 레벨과 결정의 레벨의 분리라는 기본적 패턴에서 한편으로는 실권의 하강화 경향이, 또 한편으로는 실권의 “미우치”(身内)화 경향이 파생적인 패턴으로 발생하여, 그것이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도, 막부정치의 변질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겹겹이 재생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연적인 경향성을 띠며 일본정치의 집요저음을 이룬다는 것이 저의 가설입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이 하강한다 해도 정통성의 소재지(locus)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통성 자체의 레벨은 관점에 따라 겹겹이 설정됩니다. 일본전체를 보면 실권이 공허화된다 해도 최고의 정통성은 황실에 있습니다.

  무가정치(막부정치)를 그 자체의 하나의 통치구조로 보면, 정통성의 소재지는 쇼군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통성의 소재를 움직이지 않는 채로 실권이 한편에서는 하강하고 또 한편에서는 “미우치”(身内)화하는 것입니다. 일본사에는 ‘혁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혁명’을 정치적 정통성의 변혁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혁명의 부재의 대역에 복무했던 것이 실질적 결정자의 부단한 하강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권력의 하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권력의 하강을 방지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연적 경향성은 더욱 강해져왔습니다.

  무라마치(室町) 시대의 중기 이후 ‘하극상’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전국(戰國) 시대는 이른바 하극상의 하나의 극점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오와리”(尾張 옛 지방이름, 현 아이치현의 서부 지역)의 토백성의 신분에서 관백태정대신이 된 것은 ‘하극상’의 극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관백태정대신이 조정에서 내린 칭호라는 것는 ‘하극상’이 진정 정통성의 변혁이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1930년대 군부의 내부에서 청년장교들이 들고 일어섰을 때, 이때의 현상을 하극상이라고 부릅니다. 2.26사건은 쇼와 초기 군부의 하극상의 이른바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2.26사건은 일본의 혁명인가? 군부의 조직자체를 변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습니다. 단지 이 하극상은 ‘올바른 것’을 구실로 군부 전체의 발언권을 강화했을 뿐입니다.

  무라마치(室町)→전국(戰國)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세를 바르게 하고 ‘천황태평’을 이룬다는 깃발 하에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도막부는 ‘하극상’의 경향을 막으면서도 정통성의 최고의 소재인 황실(공가)에는 조금도 손대지 않고 그 대로 그 실권을 거의 기하학상의 ‘점’에 비교될 만큼 극소화했습니다. 에도막부의 역사의 경우는 오늘 생략하지만, 에도막부는 권력의 하강경향을 막기 위해 실로 교묘한 장치와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미우치화”(身内化) 혹은 사화(私化)의 경향은 오히려 친번(親藩)ㆍ보대(譜代)와 외양의 구별에서 보이는 것처럼 권력하강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엄중한 통치의 메커니즘과 신분제도 하에서도 “소바요우닌”(側用人)[각주:12]의 대두와 같은 하강화현상이 권력의 비공식화와 함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에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정통성의 소재와 결정권의 의식적 분리, 그리고 거기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하강화 경향과 “미우치화”(身内化) 경향—이 경향은 당연히 정기적으로 제도적 ‘시정’이 행해지는데—이라는 일본의 정치의 ‘집요저음’이 이 글의 시작에서 말했던 “마츠리고토”(政事)라는 말에 관한 도표 A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요약하고자 합니다.

  정사(政事)가 상급자에게 봉임의 헌상사를 의미한다는 것은 정사(政事)가 이른바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서양이나 중국의 경우와 정반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버먼트(government), 지배자(ruler)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성을 가지는 표현입니다. 중국의 고전에서 ‘정’(政)의 용법은 한두 개 예시하면, …(중략)…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의 방향성을 가진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에서 ‘정사’(政事)는 “마츠루”=헌상한다 로써 신(臣)의 레벨에 있으며, 신(臣)의 경(卿)이 행하는 헌상사를 군(君)이 “키코시메수”=받아들인다 라는 관계에 있습니다. 여기서 일견 역설적인 것은 정사(政事)가 ‘아래로부터’ 정의된다는 것이고, 결정이 신하에게로, 또 그 신하에게로 하강해가는 경향과 무관계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리현상으로서 결정의 무책임체제가 되며, 감히 말하면 전형적인 ‘독재’ 체제의 성립을 곤란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 도식은 정사(政事)를 하나의 사이클로 묘사하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니지만, 천황자신도 실은 황조신에 대해 “마츠루”라는 봉임=헌상관계에 있어 아래로부터 위까지 “마츠리고토”(政事)가 동방향적으로 상승하는 모양을 보여줍니다. 절대적 시점(최고통치자)으로서의 ‘주’(主)는 엄밀히 말해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일본서기』의 한 구절에는 국조(國造)를 끝낸 “이사나키노미코토”(イサナキノミコト)가 ‘하늘에 올라 “카에리고토마에수”’한다고 써 있습니다. “이사나키”가 천신의 누구에게 “카에리고토마에시”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일단의 사이클의 ‘완료’로서 설명해드렸지만, 엄밀히 말해 사이클의 완료는 없습니다. 무한의 불특성의 상급자에게 소급될 뿐이며, ‘궁극의 것’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덧붙여놓겠습니다. 긴 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대화개신은 아수카(飛鳥)시대 코우도쿠텐노(孝徳天皇) 2년(646년)이 발포한 “카이신노미코토노리”(改新の詔)에 기초하여 시행된 정치적 개혁을 말한다. 호족(豪族)과 사민(私民)의 토지를 걷어 들여 천황의 공지(公地)로 하고, 지방행정구역을 군과 현으로 정비하고, 호적(戶籍)과 계첩(計帖)을 작성하여 공지를 공민(公民)에게 대여하고, 공민에게 세와 노역을 부담하게 하는 제도로 개혁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2. “노리토”(祝詞)는 제사의식을 할 때 소리 내어 읽는 말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3. 헤이안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4. 고대에 일본어를 표기하게 위해 한자를 차용해서 만든 글자. [본문으로]
  5. 고대 일본어의 이두체로 쓰인 조칙. [본문으로]
  6. 고대 일본에서 신(臣)과 함께 정치에 참여한 명가(名家)를 이르는 말. [본문으로]
  7. 목욕재계하고 신을 받든다는 고대 일본어. [본문으로]
  8. 오우미료우(近江令)는 아수카(飛鳥) 시대(592-710)에 제정된 법령체계. [본문으로]
  9. “まをす”[申す]는 정사에 종사하다는 뜻. [본문으로]
  10. 고대 야마토 정권에 저항했던 규슈 남부의 부족명. [본문으로]
  11. “쿠로우도”(蔵人)가 집무하던 관청. “쿠로우도”(蔵人)는 일본의 율령제 하의 “료우게노칸”(令外官)의 하나. 천황의 비서역할을 맡았다. [본문으로]
  12.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직명의 하나. 쇼군(将軍)의 근시(近侍)로서 노중(老中)과 쇼군(将軍) 사이를 중개하는 소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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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丸山眞男セレクション』[마루야마 마사오 셀렉션](2010년 4월, 平凡社)에 실린 「二十世紀最大のパラドックス」[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라는 제목의 강연록을 번역한 것이다. 이 강연록은『전집』 9권에도 실려 있고, 최초의 출처는 본 글의 끝에 기재해두었다. 한국에 번역된 마루야마의 단행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아, 예전에 <마루야마 강독회>를 하면서 번역해두었던 것을 올려둔다. 

  강연록은 글의 내용을 보건대 8.15 패전의 날을 기념하여 행해진 것 같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그의 '전후 민주주의'론을 이해해볼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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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오늘 이 집회에 오기 전에 다마묘지(多摩墓地)에 다녀왔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기 죄송한데, 8월 15일은 제 어머니의 기일입니다. 제 어머니는 쇼와 20년(1945) 8월 15일 패전의 날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당시 군인으로 히로시마시의 우지나(宇品)에 있었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매년 8월 15일이라는 날은 매우 복잡한 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날은 조용히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 실은 저는 개인적인 체험이나 실감을 공공의 장소에서 말하는 것은 제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8월 15일에 대해서 무언가 말해야 한다면 그러한 개인적인 체험을 빼놓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전후 어느 때에 ‘아, 나는 살아있는 건가’라고 문득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무언가 제가 아슬아슬한 우연에 의해 전후에까지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 가혹한 전쟁을 빠져나온 국민들 중에서 어쩌면 저와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저의 경우 특히 그 실감을 지탱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패전 직전의 원폭입니다. 제가 있었던 히로시마시의 우지나 마을은 바로 원폭투하 지점에서 약 4km 떨어진 곳입니다. 그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또 그 직후에 제 눈으로 직접 보았던 광경을 여기서 말할 기분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매우 많은 ‘만약’—만약이었다면 나의 생명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전후에 없었다 라고 느낍니다. 말하자면, 무수한 ‘만약(가정)’의 사이를 메워 오늘날 살아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지나 마을은 히로시마시의 남단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해상에서 침입해오는 B29의 원폭탑재기에 타있던 아메리카 병사가 1분 일찍 버튼을 눌렀더라면, 그 순간에 저의 몸은 증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 시각은 매일 아침 점호할 때였고, 우리 부대에는 사령부의 매우 높은 탑이 있었고, 버섯구름은 마치 그 탑의 바로 뒤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희는 그 높은 탑이 열의 직사 혹은 맹렬한 폭풍을 상당부분 차단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만약 실내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 방을 그 직후에 들어가 보았는데, 참담한 광경이었습니다. 창유리는 모두 파편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었고, 입구의 문은 경첩이 부서져서 실내에 넘어져 있었습니다. 탁자는 뒤집혀져 서류는 마루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당번으로 혼자서 실내에 남아있던 장교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 다음다음날, 제가 우지나 마을로 외출했을 때 우지나 마을에도 사상자가 많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저는 방사능 같은 것에 무지하기도 했거니와, 그 날 하루 종일 원폭 중심지 부근을 돌아다녔습니다. 그 외, 그 외의 ‘만약’을 생각하면, 저는 오늘날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로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요즘 허망이라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실은 저의 자연적 생명 자체가 무언가 허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살아있습니다. 아, 나는 살아있구나 라는 돌연한 생각과 더불어,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남은 저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죽은 전우에 대하여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의 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저기서 말해지고 있지만,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신변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좀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에서 몇몇 노래를 지었습니다. 아가씨시절의 수십 년 외에는 노래를 짓지 않았지만, 죽음 직전에 무슨 영문인지 그러고 싶어 하셨다고 합니다. 그 노래들에는 출정하는 저를 배웅하는 노래가 한두 개 있습니다. 매우 죄송스럽지만, 그중 일부를 여기에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름을 받아 떠나간 아들을 병상에서 울며 그리워하는 불충의 엄마야.” 저는 이 가사가 꾸며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병상에서 천황각하의 부름을 받아 전쟁에 가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메이지에 길들여진 어머니의 규범의식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정의 날 아침의 이별을 떠올리며 우는 자신—자신은 불충의 엄마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라는 마음, 그래도 자신은 불충이라도 이 끊을 수 없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분열된 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에 길들여진, 자식을 전쟁에 보낸 수많은 어머니의 공통된 감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쇼와 초기에 소년시대를 보낸 제게 천황제에 대한 느낌은 이미 그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생 때부터 우선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하물며 당시의 실천운동에 관계하는 대체성에도 맞지 않았으며, 겁이 많은 저는 그러한 생각에 도무지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봄 <유물론연구회>라는 단체의 집회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고등학생이 딱 둘뿐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대학생이나 사회인이어서, 제가 상당히 운동의 대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이 실은 나중에까지 특고(特高)[각주:1]와 헌병대와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맨 처음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특고가 제게서 몰래 가져간 일기를 앞에 두고 취조를 받았습니다. 일기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빨간 종이가 끼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빼내면 안되는데, 그 중에 1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져 있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는 자신의 신앙을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국체(國體)는—국체란 것은 젊은 여러분을 위해 한마디 말씀드리면, 체육에서의 국체가 아니고 오늘날의 단어로 말하면 천황제입니다—일본의 국체는 회의의 도가니 속에서 단련되고 있는 것일까’. 저는 단지 의문형으로 썼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패전할 때까지 혹은 패전의 직후에까지 천황제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준열히 취조했던 특고가 빨간 종이의 군데군데를 가리키며 너는 천황제를—아니 천황제라고 말하지 않고 군주제라고 했습니다—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황해서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때부터 갑자기 맹렬한 욕설과 철권이 나를 엄습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고자이 요시시게(古在由重 1901-1990, 일본의 철학자) 선생 등이 말했던 어마어마한 체험과 비교하면, 그 시절의 저의 체험 따위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은 에피소드에서 전전(戰前)의 일본 체제를 특징짓는 하나의 사상적 의미를 파헤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고가 회의와 부정을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은 반드시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뭐라 해도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의심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의 ‘지지’이며,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선택할 기회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선택의 존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그러한 성질의 ‘지지’인 것입니다. 무릇 부정을 피해가는 긍정입니다. 그것은 결코 전쟁 중의 군국주의 시대만의 것이 아닙니다. 메이지 헌법의 천황제가 본래 그러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의 다수가 전후의 천황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것에는 그 ‘지지’의 사상적 의미가 전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언제라도 부정할 권리가 보증된 하에서의, 일정한 정치형태의 ‘지지’입니다. 이것이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민주권의 원칙의 채용에 이르는 거대한 역사적 전회의 사상적 의미입니다. 그 두 개의 ‘지지’ 사이에 가로놓인 논리적인 단절과 그 내포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체로 전전에도 전후에도 어떤 말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후의 민주주의는 허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하는 논의가 무성합니다. 저는 안락한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 전후의 민주주의는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거나 평화헌법은 정말 실없는 소리이다 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뭐 좀 안다는 사람의 어조를 매스컴에서 보면 솔직하게 말해서 혼자 들떠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전후 민주주의나 일본국 헌법에 대한 의문이나 회의가 제출되는 그 자체는 대단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전(戰前)에 대일본제국 헌법은 허망한 것이다 라고 떠들어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이 잠깐 잡혔다 풀려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일생, 국가권력에 의해 어디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줄곧 감시당하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했겠지요. 전후 민주주의가 허망하다라든지 평화헌법은 별거 없다 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전후 민주주의가 무엇보다도 대일본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에서는 역설이라고 할까요, 파라독스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극한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한상황에서는 역설적 진리가 종종 출현합니다. 아시다시피, 논어나 성서라는 고전의 곳곳에는 파라독스의 형태로 인생의 가르침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직면하는 극한상황에서 진리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자는 생명을 잃을 것이고, 생명을 잃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가, ‘최후의 것이 최초가 될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명제입니다.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반드시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그러한 ‘이상’(異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얼마든지 널려있습니다. 따라서 성서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이로하가루타(イロハガルタ) [각주:2]속에서도 ‘급하면 돌아가라’라든가 ‘거짓말에서 나온 진실’이라든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처럼 역설적인(paradoxical) 명제가 다양하게 있습니다.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것은, 두 지점 간의 최단거리는 두 지점 간을 연결하는 직선에 있다는 기하학의 명제에서 보면 명백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역설의 진리를 인정하는 기회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다만 보통의 형식논리만을 가지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지는 것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저는 8․15가 가진 의미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에 있었던 일본, 즉 가장 늦게 구미의 제국주의를 추종했다는 의미에서 제국주의의 최후진국이었던 일본이, 패전을 계기로 평화주의의 최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파라독스였다—그렇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世界』1965년 10월호, 岩波書店)

 

  1. 특별고등경찰의 줄임말.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천황암살계획인 대역사건을 받아, 1911년 경찰청에 종래 있었던 정치운동대상의 고등경찰에서 갈라져, 사회운동대상의 특별고등경찰과를 설치했다. 이것이 특별고등경찰의 시작이다. 1945년 10월 4일, 연합국군최고사령관총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치안유지법과 함께 폐지되었다.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본문으로]
  2. イロハガルタ(伊呂波歌留多) 이로는 47자(히라가나 47자)를 한자씩만 넣어서 읊은 7․5조의 노래와 경(京)을 첫 글자로 한 속담을 적은 48장의 딱지와 그 내용을 그린 그림딱지 48장으로 된 딱지놀이를 말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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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과 푸코

번역글 2014. 12. 10. 02:12

<사회학의 행방>을 다룬 『현대사상』2014년 12월호에서 루만과 푸코를 비교한 논문을 번역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논문은 루만의 사회시스템론의 관점에서 푸코의 논의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사회시스템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탈콧 파슨즈의 <현대사회들의 체계>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푸코의 저작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이 논문을 읽지 말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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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会学理論のツインピークスを超えて」[사회학 이론의 트윈픽스를 넘어서]

오오사와 마사치(大澤真幸)

 

 Ⅰ. 사회학의 빈곤

사회학이라는 앎은 근대사회의 자기의식의 순화된 형태의 하나로 19세기에 태어났다. 사회학의 그다지 깊지 않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근년의 이론의 빈곤이다. 사회학사에서 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은 항상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1980년대 전후의 연구를 끝으로 영향력 있는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이론의 생산은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현 단계의 이론이 이미 충분히 올바르고 설득적이며 개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많은 사회학자는 현 단계의 이론이 ‘최장부도거리’(最長不倒距離: 점프 경기에서 넘어지지 않고 착지하는 가장 먼 거리)라고 평가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 단계의 이론이 완전무결하고 설득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증거로는 경험적 연구는 양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연구가 근거 혹은 전제로 삼는 이론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회학 연구의 대다수는 20세기 말의 ‘최장부도거리’의 연구를 간단하게 무시한다.

그렇다면 심오한 이론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논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반성과 탐구를 결여한 연구는 중대한 희생을 동반한다. 그 희생이란 사회의 전체성에 대한 시야를 잃는 것이다. 어떤 사회현상도 국소적인 원인관계만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복잡하면서도 무수한 제 관계 속에서 어떤 원인관계와 논리관계가 중요한지는 전체사회에 미치는 제 요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전체사회의 여러 요인 중에 어떤 원인관계와 논리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 이론이다. 요컨대 이론에의 자각을 결여한 사회학적 설명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상식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여기에서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해보겠다. 20세기말까지 사회학 이론의 정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나아가 우리가 전진하기 위해서 어떠한 이론적 구상이 필요한가?

내가 보기에 현 시점에서 사회학 이론의 정점에는 두 개가 있다. 두 사람의 사회학자로 대표되는 두 정점. 두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관심과 완전히 다른 주제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고 방법도 문체도 완전히 대조적이다. 실제로 상호 간에 교류도 없었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다. 사망한 년도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태어난 년도는 1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독일인이며 또 한 사람은 프랑스인이다. 얼핏 다르게 보이는 두 학자의 이론은 실은 동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이론의 무엇이 부족한지도 드러날 것이다.

두 사회학자, 사회학 이론의 쌍두마차는 바로 니클라스 루만(1927-1998)과 미셸 푸코(1926-1984)이다.

 

Ⅱ.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우유성(偶有性)으로부터의 자기창출

1. 선택의 결합으로서 커뮤니케이션

루만은 구조-기능분석이라 불리는 사회시스템의 이론을 정식화한 탈콧 파슨즈 밑에서 사회학 교육을 받았다. 즉 루만도 사회를 ‘시스템’으로 개념화하는 이론을 계승한다. 시스템으로 간주되는 실체는 물론 사회뿐만 아니다. 시스템은 요소와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요소 사이에 특정한 관계가 있으며 무언가의 질서가 형성될 때, 그것은 시스템으로 불린다. 사회 시스템은 어떤 특징을 가진 시스템인가? 다른 시스템과 어떻게 다른가?

적어도 네 개의 중요한 시스템이 있다. 기계, 생체, 정신(인격), 그리고 사회이다. 루만은 이 네 개 중에서 사회시스템을 다음의 세 조건으로 정의한다. 첫째, 사회시스템은 자기창출시스템이다. 자기창출시스템의 엄밀한 정의는 후술하겠다. 여기에서는 내부에 설계자를 가지지 않는다고 거칠게 이해해도 좋다. 기계는 외부에 설계자가 있다. 그러나 생체, 정신, 사회는 모두 자기창출적이다. 둘째, 사회시스템은 의미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다. 이 점에서 정신과 사회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생체는 그렇지 않다. 셋째, 사회시스템은 요소가 커뮤니케이션한다. 이 점에서 정신과 사회는 구별된다. 정신시스템에서 요소는 사고와 감정이라는 정신프로세스에 놓여있다.

사회시스템의 정의에 관해서 세 개의 계기가 중요하다. 오토포이에시스(*), 의미, 커뮤니케이션이다. 오토포이에시스에 대해서는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나중에 해명해보겠다. 다른 두 계기에 관해서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루만은 의미개념을 현상학에서 빌려온다. 의미의 본질은 부정(구별)에 있다. 즉 지향대상의 의미(그 대상이 무엇인가라는 것)는 가능성의 지평 가운데에 부정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이것’이 ‘테이블’이라는 것은 ‘책상이 아니다/의자가 아니다…' 등 부정을 매개로 규정된다. 의미의 근본적인 특징은 그러한 부정된 가능성이 소거되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다는 데에 있다. 결국 부정되어 선택되지 않는 선택지는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중립화되고 괄호 안에 들어가서, 취득된 선택지로서 보류되는 것이다. (*오토포이에시스 autopoiesis: 칠레의 생리학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제창한 생명 시스템을 특징짓는 개념. 자기 생산을 뜻하며 시스템의 구성 요소를 재생산하는 메카니즘을 가리킴. )

사회학사의 표준적인 이해에서 사회시스템의 이론에 의미개념을 도입한 것은, 루만의 획기적인 업적이다. 루만 이전에 사회학 이론에서는 ‘기능’의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사회시스템론과 ‘의미’의 개념에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현상학적 사회학을 필두로 하는 각각의 학파가 물과 기름처럼 대립해왔다. 루만은 사회시스템론이 의미개념을 거둬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양자 사이에 가교를 세웠다.

의미에 기초한 세계 체험에는 세 가지의 차원이 있다. 의미는 대상을 무엇인가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때 세 차원에 따른 일반화가 발생한다. 첫째, 의미는 사상적(事象的) 차원에 따라 일반화한다. 이것도 저것도 말(馬)이지 암소가 아니라는 등등. 둘째, 시간적 차원의 일반화가 발생한다. 보이는 방식이나 모습이 변해도 저것은 말(馬)인 채로. 셋째, 사회적 차원의 일반화. ‘비자아’가 다른 사람의 자아로 체험된다. 즉 같은 대상이나 세계가 다른 시계(視界)로 체험되는 것이 사회적 일반화이다. 이 사회적 차원이 ‘커뮤니케이션’에 관계한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를 커뮤니케이션으로 간파하는 것은 이론의 비약이다. 루만은 이렇게 자화자찬했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는 행위 혹은 인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회시스템의 부분시스템인) 경제시스템은 다양한 형식의 매매를 통해 작동하는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며 이 시스템에서는 은행구좌를 소유하는 ‘인간’은 요소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은 ‘정보’ ‘전달’ ‘이해’라는 세 가지의 선택의 총합이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비가 내리고 있네’라고 말한다고 치자. 이 때 우선 A로서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를 선택한 것이다. A는 B가 단지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A가 정말로 B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을 B가 인지하기를 A는 의도하고 있다. 이것이 전달의 수준의 선택이다. 이 두 가지를 B가 이해할 때, 커뮤니케이션은 완결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과 접속하여 커뮤니케이션을 하나하나 생성해간다. 커뮤니케이션의 접속이란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선택이 후속의 커뮤니케이션의 전제로 채용됨을 가리킨다. ‘전제로서 채용된다’는 것은 반드시 받아들이는 쪽에 전달이 수용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실제 접속에서는 ‘거부’보다 ‘수용’의 개연성이 높다. 커뮤니케이션의 가능한 최대도달범위, 즉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의 총체가 ‘전체사회’라 불린다.

자, 그렇다면, 우리들로서는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의문을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접속되는가? 왜 선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무시되지 않고 후속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선택의 지평을 형성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수용되는 확률이 거부되는 확률보다 높은가? 이러한 의문은 루만이 제기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에서는 질문을 적어두는 것으로 끝내고 루만의 이론을 서둘러 소개하겠다.

2.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으로서의 사회시스템

시스템 이론에는 두 세대가 있다고 한다. 루만은 제2세대를 대표하는 시스템 논자의 한사람이다. 제2세대의 시스템이론은 ‘제2차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이라 불린다. 루만 이전의 사회시스템론, 즉 파슨즈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기능분석의 사회시스템론은 제1세대의 시스템론에 대응한다.

제1차 시스템이론과 제2차 시스템이론은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론이 어떠한 ‘구별’과 어떠한 ‘차이’에 집중하느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1차 시스템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부분/전체’의 구분이다. [제1차 시스템이론에서는] ‘전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분’의 단순화 총화를 넘어서는 것이 시스템의 시스템다운 근거가 된다. 제2차 시스템이론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시스템/환경’의 차이이다.

시스템과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시스템을 환경으로부터 구분하는 메르크말(Merkmal: 標識)은 무엇인가?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복잡성의 격차이다. 복잡성이란 ‘요소’ 및 ‘요소 간의 관계’의 다양도를 말한다. 시스템은 환경보다 복잡성이 덜하다. 사회시스템의 내측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나 그 접속의 다양도가 환경에서의 그것보다 낮다. (사회시스템의 하나인) 조직시스템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대학시스템에서는 연구나 교육에 직접적ㆍ간접적으로 관련된 커뮤니케이션만이 그 속의 요소로서 인식(=관찰)된다. 환경에서는 친구 동료의 친목을 위한 모임도 가능하지만,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은 대학시스템에서는 관심 밖이다. 복잡성의 감축이야말로 시스템의 근본과제, 곧 시스템이 존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어떤 종류의 시스템에는 인풋도 아웃풋도 없다’. 이와 같은 시스템에는 사회시스템도 포함된다. 인풋도 아웃풋도 없는 시스템이라는 개념화는 루만이 제기한 가설 가운데에서 가장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인풋과 아웃풋의 부재는 시스템이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경우에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조작적으로 닫혀있다는 것은 ‘시스템/환경’을 구별하는 조작 자체가 시스템의 내재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즉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시스템은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언어’는 조작적으로 닫혀있는 시스템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나 ‘언어에 의해 지시되는 지시대상(물자체)’ 또한 말로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말과 그 외부는 말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다. 언어 밖의 현실 또한 언어화하지 않고서는 언어시스템 속에 들어와 다른 어휘와 발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결국 ‘인풋’이 되는 것도 모두 언어시스템에 내재하는 요소이며 순수한 인풋이 아니다.

생체는 이미 조작적으로 닫혀있기 때문에 인풋도 아웃풋도 없는 시스템이다. 그 전형이 면역시스템이다. 먼역시스템에서는 항원이 되는 침입물이 인풋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스템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리셉터(수용기)를 가지고 있으며, 식별할 수 있는 항원이 아니면 반응하지 않는다. 면역시스템은 말하자면 외부에 닫힌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이미지에 합치하는 대상만을 항원으로 인식한다. 이 의미에서 항원은 이미 면역시스템의 내적인 요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시스템이나 사회시스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사회시스템에 대해 생각해보자. 커뮤니케이션은 다만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만 반응하여 커뮤니케이션을 접속해간다. 조작적인 닫힘은 전체로서의 사회시스템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부분 시스템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법시스템. 그것은 ‘법이다/아니다’라는 판별기준에 따라 ‘법’으로 간주하는 커뮤니케이션에만 반응한다.

이와 같이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에는 인풋도 아웃풋도 없다. 그러나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들은 서로를 환경으로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혈액의 순환시스템과 면역시스템은 공히 각각 조작적으로 닫혀있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주지 않으면, 어느 쪽의 시스템도 작동되지 않는다. 혹은 경제시스템도 법시스템도 조작적으로 닫혀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상태가 ‘구조적인 커플링’이다.

이와 같은 자기언급적인 시스템을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엄밀히 말해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란 자기언급적인 창출이 시스템의 전체성(시스템 자신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시스템의 개개의 요소에까지 미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생체의 요소(혈액순환시스템에서 혈액의 순환, 면역시스템에서 항원과 항체 등등)는 생체 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산출되지 않는다. 정신시스템의 요소인 사고와 감정은 사고와 감정을 통해서만 하나하나 만들어진다. 사회시스템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의 네트워크 밖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스템은 모두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이다. 루만은 이 시스템 개념을 생물학자인 마투라나(Humberto R. Maturana)와 바렐라(Francisco J. Varela)에게서 차용하여 사회시스템에 채용했다.

확인하면, 시스템의 오토포이에틱한 활동을 통해 환경의 과잉한 복잡성은 감축된다. 복잡성을 좀 더 과감히 감축하기 위해서는, 즉 시스템의 선택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내적인 복잡성을 높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한 분업이나 유연한 조직체계를 가진 조직이 일매암(一枚巖)의 집단보다도 다양한 환경에 좀 더 잘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복잡성을 감축하기 위해서는 시스템 자체의 복잡성을 증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시스템이 내적인 복잡성을 증대하여 선택능력을 높이는 과정으로서 사회시스템의 진화를 도모할 수 있다. 루만에 따라면, 진화는 세 단계를 거쳐 왔다. 환절적(環節的) 시스템(동일한 시스템이 횡적으로 결합한 시스템)으로부터 성층적 시스템(계층의 분화를 가진 시스템)을 거쳐 기능적으로 분화한 시스템(다양한 기능으로 특화되는 시스템을 내부에 가진 시스템)으로 변화해왔던 것이다. 이  세번째 단계의 시스템, 즉 기능분화한 시스템이 근대사회에 대응한다.

결국 근대사회는 기능적 시스템을 분출시키는 사회시스템이다. 어떠한 기능이 있는가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능시스템은 그 시스템에 고유한 ‘매체’를 가진다. 이 경우 매체는 각각의 시스템에 관여적인 이원코드에 의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경제시스템의 매체는 화폐이며, 코드는 ‘지불하다/지불하지 않는다’의 이원적인 선택지이다.

3. 우유성과 필연성의 통일로서의 우유성

이상과 같이 루만의 이론을 표준적인 오서독스로 해설해보았다. 해석의 측면에서 독창적인 지점은 전혀 없다. 이 요약만으로는 루만의 이론이 적이 따분해 보일는지 모르겠다. 이 이론의 진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이러한 구성을 구동시키는 모티브를 알아야 한다. 즉 이 모티브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을 꼭 집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유성 Kontingenz 이라는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우유성이란 필연성과 불가능성 둘 다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는 양상, 바로 그것이다. 즉 필연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이 우유성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보류를 동반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우유성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이 원고를 쓰고 있는데, 영화를 관람하거나 잘 수 있다. 나의 선택은 우유적이다.

복잡성의 감축은 바로 시스템의 근본과제이다 라고 앞서 나는 말했다. 이것은 시스템에서 요소와 요소 사이의 관계가 우유적임을 함의한다. 요소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와 같이’ 될 때에 시스템은 복잡성을 감축한다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시스템에서 우유성은 이중적이다. 자기 선택에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의존하는 타자의 선택에도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사회시스템에서 우유성은 본원적으로 이중일 수밖에 없다. (즉 우유성은 둘을 합산한 이중이 아니다.) 우유성은 타자의 규정적 요소의 하나이다. (즉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확정적으로 예기할 수 없는 것이 타자이다.) 그 타자와의 상관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선택의 우유성도 주제화된다. 결국 타자가 없다면 우유성 그 자체도 있을 수 없다.

복잡성을 감축하며 질서를 창출함으로써 시스템을 환경으로부터 끊어내는 것은 우유성을 흡수하여 질서에 (유사) 필연성의 양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본래에서라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있었던 관계가 마치 ‘이와 같은 것에 다름 아니다’로 나타날 때에 질서가 성립하며 시스템이 환경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이다.

루만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러나 우유성이 결코 환원되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우유성은 괄호에 넣어져 무해화(無害化)되지만, 실제로는 보존된다. ‘의미’에 관해서도, ‘커뮤니케이션’을 구성하는 선택에 관해서도, 각 기능시스템을 정의하는 미디어의 이원적 코드(수용/거부)에 관해서도, 거부된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온존된다.

루만의 이론은 따라서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는 것이다. 헤겔에서는—적어도 교과서적으로 채택된 헤겔에서는—내적으로 필연적인 ‘본질’, 곧 대문자의 ‘이념’이 현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외화한다. 현상 자체는 우유적인 것이다. 이에 따라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우리들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다양한 우유적인 현상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념이다 라고. 루만의 시스템론은 그 반대이다. 필연성을 띠고 나타나는 것도 실은 우유적이다. 필연성이야말로 가면이며 그 실태는 우유성에 있다. 헤겔과 루만의 대조는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헤겔에게서 ‘필연성(본질)/우유성(현상)’이라는 대립 자체를 지지하는 양상은 필연성이다(필연성={필연성/우유성}). 루만에게서는 그 반대로 ‘필연성/우유성’이라는 대립의 지평은 우유성에 있다(우유성={필연성/우유성})

다시금 정리하면, 루만은 다음과 같이 논한 것이 된다. 시스템 내로 거둬들인 요소—사회시스템의 경우에는 커뮤니케이션—의 존재양상과 그 관계의 양태는 본래적으로 우유적이며 복잡의 과잉이다. 바로 그 때문에—시스템이 아이덴티티를 가지기 위해서는—복잡성을 감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시스템은 자신의 반전상(反轉像), 자신의 부정(우유성의 부정)을 자신의 ‘되어야 하는 모습’으로 투사함으로써 환경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분하고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다.

4. 래디컬한 구성주의와 래디컬한 아이러니즘

루만의 오토포이에틱ㆍ시스템의 이론은 그 이론적인 함의가 반실재론일 수밖에 없다. 객관적인 ‘실재’도 각각의 시스템의 내적으로 조작된 ‘관찰’의 상관물이기 때문이다. 즉 시스템에 외재한다고 간주되는 임의의 ‘실재’는 그 자체, 시스템의 구성물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면역시스템은 생체에서 ‘이물’을 발견하지만, ‘이물’ 자체는 면역시스템의 관찰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이와 동일하게 사회시스템도 성립한다. 법시스템은 위법행위와 존법행위를 발견하지만, 그러한 행위는 법시스템의 고유한 관찰이 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스템의 구성물 외에 진짜 실제(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없으며 또 그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색’은 객관적인 실재로 보이지만, 색을 식별하는 능력의 하나의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실제는 이와 동일하다. 이것을 ‘래디컬한 구성주의’라 부른다.

루만이 말년에 저술한 책들의 타이틀은 기묘하다. 어쨌거나 『사회 X』. 이 X에 다양한 기능적 분야 명칭이, 예를 들어 경제, 법, 정치, 교육, 예술이 들어간다. 타이틀은 모든 X가 사회시스템의 구성의 소산임을 보여준다. 이 ‘사회 X’의 궁극의 버전은 X가 관찰=구성의 주체로 자기언급적으로 회귀하는 경우, 곧 ‘X=사회’가 되는 경우이다. 『사회의 사회』이다. 사회는 전체로서 하나의 관찰(인식)의 형성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이 구성되는 유사적 ‘실재’라는 것이다.

이 래디컬한 구성주의의 실천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당연히 보편적인 진리 혹은 보편적인 정의라는 차원은 배제된다. 항상 특정의 시스템의 관점으로 보는 유사적 ‘진리’ 혹은 ‘정의’가 있을 뿐이다. 진리 혹은 정의는 시스템의 관점에 의해 상대화되고 만다.

그렇다면 래디컬한 구성주의는 우리의 사회적 실천에 궁극적으로는 그 무엇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 래디컬한 구성주의가 함의하는 실천적인 태도는 래디컬한 아이러니라고. 이 이론은 사람들이 ‘진리’ 혹은 ‘정의’로서 서로에게 관여한다는 것이 특정의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착각이라는 것을 아이러니컬하게 폭로하는 데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학이 성립하는 것, 사회학이 성립하는 것은 단지 사태를 기술함으로써일 뿐이다. 그러한 기술이라면 ‘사회의 사회학’으로서 상대적인 ‘진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왜 필연적인가?

 

Ⅲ. 미셸 푸코의 이론—담론과 권력

1. 연구의 세 단계

루만과 푸코는 일반적으로 자질이 전혀 다른 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앞서 보았듯이, 루만의 사회학은 철저히 추상적인 시스템 이론의 구축을 지향한다. 그에 비해, 푸코의 학문적인 주제는 늘 역사, 서양의 역사였다. 그의 탐구는 학문과 사상과 철학에 향해 있는 한편, 정치적인 실천과 무명의 인물의 사적인 영위에 향해 있다. 어쨌거나 언어와 언표의 역사야말로 푸코의 생애 내내 변하지 않는 연구대상이었다.

본래 추상적인 이론의 구축을 목표로 삼았던 루만도 그 저작이나 논문을 읽으면 역사에 대한 엄청난 지식과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의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푸코의 최종적인 목표 또한 역사에 있다. 그러나 그의 역사학은 통상의 역사학자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푸코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추상적인 이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주행하며 그에 공명한다.

푸코의 학문적 행보는 분명하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초기 연구의 주제는 담론과 에피스테메이다. 『광기의 역사』(1961)에서 『말과 사물』(1966)을 거쳐 『지의 고고학』(1969)에 이르는 저작들, 곧 1960년대에 잇따라 발표한 제 저작들에 대응하는 시기이다. 중기는 1970년대이며 이 즈음의 푸코는 권력분석, 특히 근대의 생물권력(생명정치)의 역사적인 기원에 관한 연구에 전념한다. 대표작은 『감옥의 탄생』(1975)과 『앎에 의지 성의 역사Ⅰ』(1977)이다. 이 시기의 연구가 가장 사회학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생의 기법에 관심을 쏟았다. ‘자기에의 배려’를 핵으로 하는 생의 기법 말이다. 대표작은 『쾌락의 활용 성의 역사Ⅱ』와 『자기에의 배려 성의 역사Ⅲ』(1984)이다.

푸코의 경우, 이와 같이 연구의 단계가 매우 신축성 있는 형태의 3기로 나뉜다. 이 단계들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어째서 연구의 주제가 이처럼 옮겨진 것인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사회학 이론으로서 푸코의 연구의 골격을 추출할 수 있을 것이다.

2. 담론의 분석

초기 연구에 대해서는 대표작인 『말과 사물』만을 극히 간단하게 살펴보자. 이 대작의 주제는 서양의 에피스테메의 변화이다. 에피스테메란 특정 시기 사회의 사고 시스템의 기본적인 배치를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에피스테메의 준거점, 곧 에피스테메의 좌표축의 원점이 되는 사항은 다음과 같이 변화해왔다. 중세로부터 이어진 르네상스에서 그것은 ‘유사’이다. 그에 비해 고전주의 시대(17세기~18세기)에 준거점은 ‘표상’으로 옮겨간다. 마지막으로 근대(19세기)의 에피스테메의 준거점은 ‘인간’, 선험적 및 경험적인 이중체로서 인간이다.

유사의 에피스테메의 시대로부터 표상의 시대로의 전환점에서 푸코는, 17세기 초두에 출현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본다. 돈키호테는 아직 르네상스의 에피스테메에 살고 있다. 그 에피스테메에 따라 문헌은 세계 그 자체에 연속적이며 세계와 닮아가야 한다. 돈키호테는 세계라는 직물이 문헌과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돈키호테가 세계를 해독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늘 ‘유사’였다. 그는 근소한 유사를 단서로 여인숙을 성(城)으로, 가축의 무리를 군대로, 여종업원을 귀부인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미 ‘유사’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유사에 기초한 해석의 타당성은 증명되지 않았다. 돈키호테의 행동은 원활하지 않았으며 망상과 환각에 의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앎, 곧 박물학, 부의 분석, 일반문법의 세 가지는 상호 독립적인 분야이지만, 이미 ‘표상’이라는 태양의 중심을 회전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박물학이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경제학으로, 그리고 일반문법이 문헌학으로 환치된다. 이 자리바꿈은 독립적으로 발생하지만, 완전히 같은 형식을 취한다. 그 어떤 전환에서도 중심은 ‘표상’에서 ‘인간’으로 이행했다. 이와 같이, 에피스테메의 세 준거점은, 인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객체이기도 한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다.

푸코의 견해로는 그 ‘인간’마저 지금(20세기 후반)에 와서 주역의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한다. 인간은 ‘물가의 모래 얼굴처럼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푸코와 루만이 동시대적으로 공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만의 사회시스템론이야말로 인간주의의 소멸이라는 푸코의 예언을 예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시스템의 요소는 행위와 인간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때에 루만은 사회학의 이론에서 ‘인간’을 배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 이와 같은 에피스테메의 변화는 어떻게 찾아진 것인가?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인데, 푸코의 담론(discourse)은 언어의 의미와 더불어 언어의 존재조건(특정 언어의 존재를 지지하는 구체적인 조건의 전체)을 가리킨다. 담론의 집합을 시스템으로서 파악한다면 그것은 ‘아카이브’라 할 수 있다.

시대와 사회 각각의 담론이 희소화되고 있다. 즉 문법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것이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카이브는 랑그의 범위보다 훨씬 한정된다. 그러나 아카이브는 현재 말해지거나 쓰이는 것의 파롤의 총체보다 크다. 즉 아카이브는 가능적인 것을 포함한다. 또 아카이브는 계급적 이해에 엮이는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넓다. 그런데 어떠하든 반복하자면 그것은 문법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모든 것은 아니다. 루만의 술어를 차용하면, 담론의 복잡성은 감축하고 있다.

담론의 희소화에는, 다시 말해 담론의 집합의 복잡성의 감축에는 시대와 사회마다 명확한 방향성이 있다. 그 경향성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무언가 기준이 되는 희소화의 특정의 방향성을 찾아낼 수 있다면, 바로 에피스테메의 준거점을 찾아낸 것이다.

푸코의 담론분석은 루만의 래디컬한 구성주의와 동일한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근대의 앎이 외적인 실재로 간주하는 것, 즉 담론의 실정적인 근거가 되는 ‘인간’은 담론에 의한 구성물이다. 이와 같은 관점이야말로 구성주의와 친화적이지 않는가?

나아가 이와 같은 구성주의의 철저화는 울가(S. Woolgar)와 폴라치(D. Pawluch)가 ‘존재론적 선긋기 ontological gerrymandering’라 했던 문제를 남긴다. 존재론적 선긋기란 ‘실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그와 같은 구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객관적인 실재를 전제로 한다는 문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고전주의 시대의 부의 분석과 근대의 경제학을 비교할 때에 ‘인간’이라는 실재가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부의 분석은 교환가치의 학문이며, 여기에서 상품은 항상 그것에 의해 교환될 수 있는 다른 상품의 표상으로 다뤄진다. 그러나 19세기 경제학은 노동이라는 활동이 표상의 분석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부에 일정한 질서가 있으며 무엇인가를 무엇인가로 팔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시간, 노동, 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경제학은 말한다. 이때 표상으로부터 인간으로의 전환이 발생한다. 즉 노동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을 소비하는 ‘인간’이라는 실재가 경제학의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부의 분석’과 ‘경제학’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상이한 담론을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 이때, 한편에서는 표상(교환가치)에 의해, 또 한편에서는 인간(노동)에 의해 파악되는 ‘동일한 대상’이 담론외적인 실재로서 전제된다. 실재가 구성되는 것임을 가리키는 연구는 이처럼 구성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미래를 알지 못하는 속에서 전제되고 만다. 이때, 구성되는 유사 실재와 객관적인 진정한 실재 사이에 자의적인 경계가 설정된다. 이것이 존재론적 선긋기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확인하겠다.

3. 권력의 분석

담론의 집합의 복합성은 감축되고 있다. 즉 담론은 희소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담론의 분포에 특정의 경향성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담론의 출현과 존재를 결정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회답으로서 푸코가 전제하는 것은 권력이다. 우리는 보통 권력을 억압의 작용으로 간주한다. 그에 비해 푸코가 발견한 권력은 담론의 생산을 선동하는 권력, 곧 구성하는 권력이다. 푸코의 초기 담론 분석은 이렇게 권력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우선 그는 『말과 사물』이 발견한 근대의 인간주의적인 주체, 이것을 구성하는 권력의 윤곽을 그리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이 권력은 푸코가 발견한 권력이다. 푸코는 이것을 ‘생물권력 bio-pouvoir’이라 이름 지었다. 고전적인 ‘죽이는 권력’에 반해 ‘살리는 권력’이다.

생물권력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권력의 전형이다. 그 생물권력의 한 형태가 『감옥의 탄생』이 구체적으로 묘사한 규율훈련형 권력이다. 밴덤이 고안한 감옥, 팬옵티콘이 그것을 물질적ㆍ건축적으로 은유한다. 또 규율훈련형 권력의 가장 중요하고 극적인 효과는 『앎의 의지』가 상술한 ‘고백’이다. 규율훈련형 권력에 의해 감시받는 자는 끊임없이 고백에 쫓긴다. 나는 올바르게 행동했을까, 나는 무엇인가 좋지 않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 등등의 강박적인 자기반성과 고백은 끝날 줄을 모른다. 그 고백의 결과로서 개체의 ‘내면’이 산출된다. 고백해도 고백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원천으로서의 ‘내면’ 말이다.

푸코의 연구는 나아가 고백을 강요하는 권력, 규율훈련형 권력의 역사적인 기원으로 거슬러 간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고대 헤브라이즘의 전통 중의 목자[牧人]적 권력이다. 헤브라이즘의 세계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은유된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배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배려하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은 은유는, 푸코에 의하면 헤브라이즘의 전통 외에는 없다.

생물권력의 특정 타입에 대한 종속이 근대의 인간주의적인 주체를 산출한다. 푸코의 이 분석은 매우 선명하고 설득력이 풍부하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으면, 하나의 곤란을 불러들인다. 학문적인 곤란이 아닌 실천적인 곤란.

만약 주체가 권력의 상관물로 구성된다면, 주체는 어떻게 권력에 저항할 수 있을까? 어떻게 권력으로부터 해방의 길을 열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는 주체야말로 권력에의 저항의 거점이었다. 주체는 권력이라는 독립적인 실천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야말로 권력의 주요한 산물임을 깨닫고 말았다. 이 래디컬한 구성주의에 영합하는 결론을 전제로 할 때에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루만과 마찬가지로 아이러니즘만이 남겨진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는 그 무엇도 아니며, 계몽의 입장에서 사태를 냉소적으로 기술하는 것만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인 것 같다.

그러나 푸코는 다른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푸코의 말년의 탐구로 이어진다.

4. 자기에의 배려

푸코는 탈출을 위한 단서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고대 헤브라이즘과는 다른 서양의 전통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 사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자기에의 배려 souci de soi, epimeleia heautou’라는 관념이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에의 배려는 그리스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핵적인 관념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상의 중심적인 테제로서, 특히 소크라테스의 이름과 결부된 테제로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령이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자기에의 배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길 가는 행인을 붙들고 설파한 것은 자신의 부속물—부와 지위 등등—을 자기 자신보다 우선해서는 안된다는 것, 자기 자신을 깨닫고 가능한 한 선량한 사람이 되도록 배려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푸코는 스토아학파가 자기에의 배려를 위해 자기 음미의 네 가지의 기술을 제안했음에 주목했다. 동지들 간에 서로가 서로의 생활의 세부를 기술하는 편지, 자기의 양심의 점검, 자기 인식을 위한 아스케시스(금욕), 그리고 꿈의 해석이 그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통치 가능하도록 자기에의 배려를 유지하기 위한 생의 기술이 있다면 (머지않아 규율훈련형의 권력으로 성장해간다) 목자의 권력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저항의 거점을 확보하지는 않을까? 이것이 푸코의 암묵적 의도이다.

고전고대에 ‘자기에의 배려’라는 관념을 탐구하는 속에서 푸코의 최종적인 관심은 ‘파레시아 parresia, parrhesia’라는 그리스의 관념에 있다. 죽음 직전 2년간 푸코는 파레시아만을 연구했다. 파레시아란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 진리에의 용기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다. 자기에의 배려를 통해 진리에 도달한 주체는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의 배려’가 그리스 사상의 중심적인 관념이라고 한다면, ‘파레시아’는 그 중심 중에서도 중심이다.

고전고대의 문화의 내부에서 파레시아와 파레시아가 되어야 할 것과의 구별을 덧붙이겠다. 푸코가 파레시아와 철저히 대립하는 실천으로 본 것이 ‘레토릭’이다. 파레시아란 단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레토릭의 안목은 ‘잘 말하는 것’에 있다. 레토릭의 교사의 전형은 소피스트이다. 소피스트에 대항하여 그들의 기만을 폭로한 소크라테스가 바로 파레시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레시아, 곧 진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는 확실히 권력에 위협적이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의 지배층이 소크라테스를 역겹게 느껴 민회에서 사형까지 언도했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체제에 극히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여기까지 푸코의 사고를 쫓아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최종지점에서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의 배려와 파레시아를 적출하는 사상사연구자로서 푸코의 수완은 대단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그가 탐구한 것을 찾아낸 것일까. 푸코가 말한 것들은 주체를 구성하는 권력, 규율훈련형의 권력과 생물권력에 저항의 거점이 되었을까?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의 실마리는 푸코가 말한 관념과 실천 속에 있을까?

아무래도 어떤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자기에로 배려하는 개인과 규율훈련형 권력이나 목자적 권력이 산출하는 주체성은 각각 어떻게 다른가? 자기 자신에 자기언급적으로 배려하는 개인이란 주체의 정의 그 자체가 아니던가? 권력에의 저항거점은 그 권력의 산물과 너무나 흡사하다. 불합격을 받은 답안을 고치지 않고 다시 제출하는 것이 아닌가? 파레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파레시아는 ‘고백’과 정말 유사하다. 고백과 파레시아는 어떻게 다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기에의 배려’라든가 ‘파레시아’는 원죄에 의해 추방당하기 전 인류가 살았던 낙원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종류의 ‘고백’이다. 그것은 원시적인 고백, 아직 무구하며 원죄를 범하기 전의 고백이다. 고백이 강박적인 철저성을 띠는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신=목자에 의한, 혹은 판옵티콘의 감시자에 의한 보편적인 시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철저한 보편적인 시선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고백은 강박적으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에 해당하는 것은 보편화한 감시이다. 그러한 감시자 앞의 무고한 고백, 그것이 ‘자기에의 배려’이며 또 ‘파레시아’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회답일까? 무고하며 원시적인 고백은 권력에의 저항거점을 마련해주는가? 결국 자기에의 배려와 파레시아에서 권력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한 거점을 구하는 것은 ‘철저한 고백은 안되지만, 적당한 고백이라면 좋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철저한 고백이 권력의 효과에 내재하는 것이라면, 적당한 고백 역시 그러하다. 예를 들어, 성실하고 학교 측에 순종하는 극단적인 우등생과 적당히 게으르면서 아쉬운 대로 공부하며 학교 측에 대강 따르는 (그러면서 종종 위반도 하는) 생도의 두 부류가 있다고 치자. 전자는 학교권력에 내재한다. 그렇다면 후자는? 후자는 권력에서 해방되었을까? 극단적인 우등생이 학교 권력에 내재한다면, 적당히 하는—따라서 적당히 나쁜—생도도 그러하다. 그런데 푸코의 말년의 논의는 적당히 하는 생도가 학교의 지배에서 벗어나있다는 제안에 가깝다.

루만은 논리의 귀결에 충실한 실천적인 태도를 채용했다. 그것이 래디컬한 아이러니즘이다. 푸코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이론적인 함의를 철저하게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 권력의 지배에 저항하는 거점을 찾아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불철저로부터 오는 유사적인 저항에 다름 아니다. 진짜 저항도 해방도 거기에는 없다.

 

Ⅳ. 신의 육화처럼

1. 유대교의 반복

이제까지 사회학 이론의 두 정점을 개관했다. 일견 완전히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사회학자, 루만과 푸코. 그러나 두 사람은 완전이 동일한 논리에 따라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설명하고자 하는 현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발생을 설명하는 이론은 같은 형식을 공유한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그 단서가 담론과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복잡성 혹은 우유성의 과잉이다. 루만에게서 이 전제는 명시적이다. 푸코의 경우에는 묵시적이지만 동일한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단서[복잡성 혹은 우유성의 과잉]의 과잉성을 환원하려는 초월(론)적인 계기가 외부에,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집합 외부에 자율적으로 착종한다고 간주된다. 그 초월(론)적인 계기가 루만에게서는 ‘사회시스템’이며, 푸코에게서는 ‘권력’이다. 그 초월(론)적인 계기, 곧 시스템과 권력은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무력(無力)을 보상하는 반전상(反轉像)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력’이란 과잉의 복잡성을 처리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다른 것도 될 수 있다’라는 우유성을 중화하여 무해화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력을 해소하는 계기가 초월(론)적인 외부에 착종된다. 루만도 푸코도 사회의 작동을 이러한 플롯으로 설명했다.

자, 그렇다면 이 논리는 유대교적이다. 종교에 유비하는 것이 느닷없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루만과 푸코가 사회학이론에서 활용하는 논리는 고대 유대교의 무의식적으로 발동된 논리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 무슨 뜻인가? 설명해보겠다.

유대교는 인류사상 최초의 엄밀한 일신교이다. 유대인은 인간에 대해 가능한 한 초월론적이며 전능한 유일신을 믿었다. 그런데 일찍이 베버가 주목했듯이 유대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대 유대인의 공동체 주변에는 강대한 제국이 있었고, 그에 비해 유대인은 너무나 유약했다. 유대인은 전쟁에도 끊임없이 패했으며 수시로 침략당하여 급기야 나라가 망해 집단적으로 포로가 되기도 했다. 보통은 불운이 덮치거나 전쟁에 패하면, 그 공동체의 신은 버림받는다. 인간은 번영과 승리를 위해 신을 신앙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도 마찬가지의 기대를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 그러하다면 유대인만큼의 불운과 패배라면 야훼에 대한 신앙은 당연히 저버려야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것이 베버가 가진 의문이었다.

유대인만큼 고난과 패배를 경험한 민족은 없다. 그런데 유대인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전능의 유일신을 만들어냈다. 어째서일까? 전능의 신이야말로 유대인의 극단적인 유약함을 보상하기 때문이다. 전능의 신은 유대인 자신의 상이다. 단지 그것을 반전하는 상, 유대인 자신의 실태를 거꾸로 뒤집는 상, 유대인과 역접에 의해 대응하는 상이다. 유약한 유대인은 강한 신이라는 모습으로 자기 자신을 외화하여 그것을 초월적인 수준에 착종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유약함은 신의 강함에 의해 보강되고 해소된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이 잇따른 패배와 침략과 이산(離散)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보존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루만과 푸코의 사회학이론은 추상적이며 형식적인 수준에서 유대교와 동일한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의 수준에는 수습하기 어려운 유약함이 있다(과잉의 복잡성, 순치할 수 없는 우유성). 그리고 이 유약함을 반전시키는 초월(론)적 계기, 곧 시스템과 권력이 이 곤란을 해소한다.

2. 신의 육화의 논리

그러나 종교와 사회학이론 간의 이러한 유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기에 사회학이라는 앎에 내재하는 인식상의 이득이 있을까? 있다.

이 유비는 사회학 이론의 두 정점을 넘어서고, 나아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상기해보자. 유대교는 완결적이지 않다. 유대교 다음에 기독교가 후속한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에 부가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전능한 신의 육화라는 착상이다.

사회학이론의 이제까지의 도달점은 유대교의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하다면, ‘신의 육화’에 대응하는 부분에까지 나아간 이론이 있지 않을까? 신의 육화라는 기묘한 이야기 속에 있는 합리적인 핵을 흡수하는 사회학 이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신의 육화’는 유대교의 논리에 무엇을 부가할까? 유대교는 포이에르바하적인 소외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란 인간의 유적인 본질의 외화라고 했다. 이제까지 말한 것과 같이 유일신으로서의 야훼는 확실히 유대인의 유적(공동적) 본질을—반전을 도모하는—외화시키는 것이다. 그 신의 육화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은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공동적ㆍ유적 본질이 ‘신’이라는 형태로 외화될 때 신과 인간 간에는 역접의 관계가 있다. ‘전능한 신’이라는 관념은 공동적ㆍ유적 본질(유약함)을 반전시키는 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접은 본래 인간 그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이며 분열이다. 그 분열 한쪽의 극을 신으로 외화함으로써 인간은 분열을 은폐해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이 인간이 된다. 신 자신에게도 같은 분열ㆍ모순이 내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신’이라는 형식의 분열이 초월적인 신 자체에 내재한다. 그렇다면 이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역접이 아닌 순접으로 전화한다. 왜냐하면 ‘인간/신’이라는 분열은 본래 인간 그 자체에 내재한 모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를 쉬운 표현으로 반복해보자. 인간들(유대인의 공동체)은 유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접의 형식으로(반전상이라는 형식으로) 그 유약함을 부정하는 강력한 유일신을 착종한다. 그러나 그 신이 인간이 된다. 즉 신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약하다. 이 인간과 신과의 동일성(‘마찬가지’라는 관계)을 순접이라 했다.

이 육화의 논리까지 조직하는 사회학 이론이 구상 가능할 것이다.

3. 제3자의 심급과 구심화/원심화 작용

마지막으로 나 자신(오오사와)의 사회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논해보고자 한다. 전부터 나는 사회시스템의 질서를 설명한 후에 ‘제3자의 심급’이라는 관념을 활용해왔다. 제3자의 심급은 루만의 ‘시스템’과 푸코의 ‘권력’ 혹은 유대교의 ‘전능한 신’과 등가의 움직임을 갖는 초월(론)적인 계기이다. 이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나의 이론 또한 유대교적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신체에 관한 현상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임의의 지향작용은 이중작용의 복합에 의해 성립한다고 생각해왔다. 이중작용을 나는 ‘구심화작용/원심화작용’이라 한다. 세계에 내속하는 신체는 현상을 늘 이 <나>에 구심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으로 파악한다. 이것이 구심화작용이다. 이와 동시에 구심화의 중심을 <나>의 외부로 원격화하는 움직임이 활성화한다. 이것들이 원심화작용이다. 이 이중의 작용은 레비나스가 모방했다. <나>가 (<타자>의) 얼굴을 볼 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나>가 타자의 얼굴을 볼 때(구심화작용), <나>는 타자의 얼굴 또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한다(원심화작용).

이 구심화/원심화 작용을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에 대응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하는 요소로 발전할 수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구심화/원심화 작용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조건이다. <나>가 전달하려고 하면, 혹은 <나>가 이해하고자 하면 우선 대상을 <타자>로 인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것이 또 한 사람의 <나>(또 하나의 자아)이면서 결코 <나>가 동일화할 수 없는 무한의 차이이기도 하다는 모순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 구심화/원심화작용이다.

구심화/원심화작용을 전제로 할 때에는 신체들 간의 간신체적(間身體的) 연쇄가 형성된다. 즉 동일한 대상에 대한 경험을 함께 귀속하는 복수의 신체가 단일한 신체처럼 느낀다. 예를 들어 사람이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킬 때 그 손가락의 연장선에 있는 대상을 함께 바라보게 된다. 이 때 하나의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 다수의 눈이 마치 하나의 신체처럼 느끼고 수용한다. 이것이 간신체적 연쇄이다.

간신체적 연쇄는 우유적·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상술할 여지는 없지만, 간신체적연쇄는 역접과 부정의 계기를 품지 않으며, 순접적으로 제3자의 심급을 불러일으킨다. 즉 간신체적연쇄는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반전시키지 않고—제3자의 심급으로서 투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서술했듯이 신의 육화의 논리는 인간과 신 사이의 순접관계와 등가였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제3자의 간신체적연쇄로까지 환원할 수 있을 때 육화의 논리를 그 내부로 짜 넣는 사회학이론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종래의 사회학 이론의 도달점은 유대교로 진단가능했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여기에 기독교적인 비틈을 가하는 것이다. 신의 육화에 대응하는 계기를 지닌 사회학이론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천적인 함의에 대해서도 말해두고자 한다. 루만은 어떠했는가. 그는 사회변혁을 목표로 삼는 임의의 운동을 아이러니컬하게 조용히 바라보았다. 여하간 운동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들은 편견과 환상에 기초한 운동이기 때문이다(자신들의 상대적인 가치관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오판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다르다. 그는 반대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실패했다. 왜냐하면 그는 운동에 뛰어들기위해 시대에 뒤떨어진 고대적인 가치관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리스도의 육화의 원리까지 조직화한 논리가 있다면 어떠할까? 그것은 실천에 관해 무엇을 시사할까? 아마 그 원리가 지시하는 운동 역시 실패할 것이다. 다만 그것은 올바르게 실패하지 않을까? 즉 지나고 나서 되돌아볼 때 그것이야말로 성공이었다고 여겨지는 형태로 실패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구제자로서 임했던 신이 결국 인간에게서 배신당해 참담하게 사형에 처해졌다. 이보다 더한 실패가 있을까? 인간을 구제한다는 신이 거꾸로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실패야말로 기독교를 일으켰다. 만약 신이 이 만큼의 대실패를 연행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있을 수 없었다. 공전의 대실패야말로 성공을 위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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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2월 17일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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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政事の構造:政治意識の執拗低音」[정사의 구조: 정치의식의 집요저음]

이 논문은 『현대사상』마루야마 특집호 맨 마지막에 실린 것으로 1984년 11월에 행한 마루야마의 강연록이다. 이 강연은 강연에 앞서 출간한 『日本文化のかくれた形』[일본의 숨은 형](1995년 국역본 출간)이라는 책의 보론이라고 한다.

이 논문은 일본의 정치구조와 정치사상사의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블로그에는 논문의 번역본 전체를 올리지는 않겠고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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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사(政事)는 일본어로 “마츠리고토”라 읽는다. 일본어의 한자에는 음독과 훈독이 있다. 음독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한자음에서 차용한 것이고, 훈독은 한자로 표기하되 그 일본어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다. 가령 “形”이라는 한자를 한국어에서는 “형”이라 읽는데, 그것은 “모양”을 뜻한다. 그런데 “모양”은 “形”의 기의가 아니라 한국어의 기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자의 훈’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 한자의 한국어 기표인 것이다. 즉 일본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되 “かた”[카타]로 읽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形”으로 표기하고 중국어의 한자발음을 차용한 “형”이라 읽는다. 이와 같은 일본의 한자어 훈독은 ‘중화문화’의 유래와 일본문화와의 습합과정을 밝히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아니,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유발해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시기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번역’에 집착했던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에도시대 중기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가 중국의 한자어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일본주의 혹은 일본정신을 강조하며 “漢心”(카라고코로: 중국식 사고방식)을 배격하려했던 것도 일본의 한자어 훈독이 일본에 유입된 ‘외래사상’을 끊임없기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모토오리 노리나가뿐만 아니라 일본주의 혹은 일본사상을 견지하고자 했던 일본의 사상가들은 모두 그러한 프로젝트에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사상은 ‘진짜는 밖에 있다’는 ‘밖’을 전제하는 사상으로 일본의 사상사는 외래사상의 왜곡의 역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 즉 일본정치사상의 ‘집요저음’(*)으로 밝혀내고자 했다. (*‘집요저음’은 음악학의 용어로 집요하게 반복되는 저음의 음형을 가리키는 basso ostinato의 번역어이다.)

2.

먼저 마루야마는 일본에서 천황제 국가, 곧 야마토 국가(大和国家)가 확립된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로 율령체제를 받아들이고 당제의 법과 정치의 용어를 유입하면서도 몇몇 용어는 ‘훈독’으로 남겨두었다. 그중의 하나인 “마츠리고토”는 메이지유신까지 “정치(政治)”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마츠리고토”(政事)는 발음이 “祭事”와 같다는 것으로 일본고대의 제정일치의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간주되어왔으며 일본의 “국체”가 예부터 존재해왔다는 준거로 제시되어왔다. 그런데 제정일치설 또한 역사적 산물이다. 게다가 政事=祭事라면 일찍부터 일본의 고문헌에 “祭事”가 등장했을 터인데 “祭事”가 일본역사에 등장한 것은 헤이안시대 이후이다. 마루야마는 政事를 “마츠리고토”로 훈독한 유래는 “奉仕事”에 있다고 주장한다. 천하의 신하는 천황의 명을 받아 각자의 직무를 다하는 것, 이것은 천하의 “마츠리고토”였다는 것이다. 즉 “마츠리고토”(政事)를 할 때의 주어는 군주가 아니라 군에게 소임을 다하는 신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정치구조에서는 정통성의 소재와 정책결정의 소재가 분리되어 이원화된다. “마츠리고토”는 이와 같은 이원화를 보여준다. 정통성은 천신으로부터 이어져온에서 천황에서 주어지되, 결정은 신하의 직무에서 행해진다. 당의 율령제부터 서구의 절대군주제에 이르기까지 최고정치기구는 황제로 표상되어왔다. 여기서 황제를 넘어서는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는 행정기구를 직접적으로 예속하며, 예속된 행정기구는 관료제로서의 신하를 말한다. 반면 일본의 천황은 정통성의 층위에는 존재하지만 결정의 층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본정치구조에서 신하는 관료제가 아니라 결정권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에 위치한다. 당의 율령제와 서구의 절대군주제에서 ‘신’은 ‘民’과 구별되며 ‘君’에 엮여 ‘군신’으로 말해지는 반면, 일본에서는 ‘황국신민’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 ‘신’은 ‘민’과 엮인다.

그런데 “마츠리고토”는 상급자에 대한 직무의 헌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정치적 직무를 마친 후의 보고로 행해진다. “마츠리고토”는 야마토로 돌아와 무사평정을 대군에게 보고하는 것이며 그러한 순환의 일단의 완결을 가리킨다. 이때 천황은 “마츠리고토”의 결과를 다만 수리하는 지위에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마츠리고토”는 천황과 신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신과 민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치자와 피치자는 →←라는 대립과 지배의 관계로 어우러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동방향적으로 직무하는 관계에 놓인다.

3.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주목된 바와 같이 정통성의 층위와 결정권의 층위가 분리되는 패턴은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출현하는데, ‘천황친정’의 외형은 섭정(攝政)과 관백(關白: 天皇를 보좌하여 정무를 총리하던 太政大臣의 중직)이라는 섭관제(攝關制)를 등장시킨다. 섭관제는 ‘후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마츠리고토”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통치자의 배후에는 늘 ‘후견’이 있었다. 이처럼 비공식화 혹은 ‘身内’(“미우치”)화(**)는 결정과정의 복잡한 사태로 이어진다. ‘후견’에게도 ‘후견’이 있다. 이러한 ‘후견’의 존재로 인해 공적지위라 해도 내실은 사적인 가정(家政)기관인 것이다. (**“미우치”(身内)는 일본어에서 자신과 가까운 쪽을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측근’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패턴은 무가(武家) 정치에서도 완전히 재생산되어왔다. 막부라는 것은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정치형태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중국을 모델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인데, 일본에서만 공가(公家)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한 무가정권이 발생했다. 물론 일본국 통치의 정통성의 소재는 쇼군이라는 칭호가 조정에서 수여되는 것이 상징하는 것과 같이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공가에 있다. 그러나 통치의 실권은 막부에게 있으며 게다가 그 실권은 점점 확대되어 그 반대급부의 효과로 율령제는 명목화된다. 그럼에도 그 막부는 겉으로는 조정에 대해 ‘후견’할 뿐이라고 말한다. 막부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쇼군의 ‘후견’이 존재하며 ‘후견’이 현실의 결정권을 갖는다. 이처럼 결정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집권의 지위 자체는 형식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후견’ 자체가 사화(私化)(***)되는 과정과 같다. (*** 사화(私化)는 결사형성적/비결사형성적의 횡축과 정치적 권위에 대한 구심적/원심적의 종축의 좌표에서 비결사형성적이며 정치적 권위에 대해 원심적인 좌표에 위치하는 개인의 출현패턴을 가리킨다.)

율령제의 변질과정에서 정통성과 결정권의 이원화 경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실권의 하강화 경향과, 또 한편으로는 실권의 “미우치”화 경향이 또 다른 파생적 패턴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사에서 ‘혁명’이 부재한 것을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혁명의 대역을 맡아온 것은 실질적 결정자의 부단한 하강하 경향이며 이러한 권력이 자연적 경향성을 띠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통성의 소재와 결정권이라는 의식적 분리 및 그것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의 하강경향과 “미우치”화경향이라는 일본정치의 ‘집요저음’은 병리현상으로서 결정의 무책임체제로 이어져왔다. 아래에서 위로 규정되는 “마츠리고토”는 결정이 신하에게로, 또 그 신하의 신하에게로 하강해가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불특정의 상급자에게로 무한히 역급(逆及)되는 곳에서 ‘궁극적인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마츠리고토”의 완료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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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마루야마 마사오 특집호에 실린 또 한편의 논문을 번역했다.

근대사상가로서 마루야마의 면모는 일본의 정치사상가를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하며 정치사상사를 재구성했다는 데에 있다. 마루야마는 독일의 현대사상가들의 이론을 방법론의 도구 삼아 일본의 정치사상가들을 근대사상가로 '발견'하고 발굴했다. 마루야마의 이러한 작업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근대사상에 일본의 시대적 맥락의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사상에 역사성을 입히는 작업은 서구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유입되는 과정을 사상가들의 사유를 통해 소상하게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현대의 최신 사상을 연구한다 해도 사상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다음의 논문은 마루야마가 만하임, 베버, 헤겔의 이론을 통해 후쿠자와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을 다룬다. 결국은 마루야마의 분투는 슈미트와의 가상적 대결로 집약되고, 20세기 인류사를 결정 지은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인식론적 토대가 동일한 근대적 사유체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김항, 슈미트, 그리고 다음의 논문을 조합하여 마루야마의 근대성에 대한 나 나름의 사유를 정리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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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론

「「虚妄」に賭けることは可能か?丸山真男にとっての福沢諭吉」

‘허망’에 건다는 것이 가능한가?  

마츠다 코우이치로우(松田宏一郎)

 

1. ‘이데올로기’와 ‘사유범형’(思惟範型)

 

마루야마 마사오는 사상사가로서 ‘후쿠자와 연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후쿠자와 독해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 때문에 후쿠자와의 사상보다도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왔다. 그러나 이 관심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마루야마가 그려낸 후쿠자와의 이미지는 과도하게 이상화되었고, 반대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영향권에 휩쓸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을 간과했다고 비판 받기도 했다. 마루야마는 자신이 후쿠자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후쿠자와의 논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경험 때문이라고 인정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있지만, 그가 그 정도로 후쿠자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연구의 초기부터 “사람들은 일본의 사회적 병리현상에 대한 후쿠자와의 구체적인 비판의 적확함과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겨 그 비판의 근저에 흐르는 사유방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즉 마루야마는 자신이야말로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을 비판적으로(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검토한다고 자부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첨예한 사안을 다루었다거나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어떤 의도에서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를 자신은 알고 있다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저술에서 제기된 사항에 대해, 일단 자신의 ‘시좌’(視座)를 감추며 말해야만 하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재구성하는 작업공정에, 무엇보다도 후쿠자와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고 마루야마가 생각했다)는 점에 매혹되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보기에 오규 소라이와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고는 일본 역사상 그러한 타입의 사상가가 극히 소수였을 것이다. 후쿠자와가 자신의 사고를 스스로 발견하는 ‘방법’을 의식했다는 것, 즉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어떠한 원칙에 따르며 그것이 어떠한 도구와 스타일로 논해질 수 있을까를 의식했다는 것이 일본사상사의 예외적 사례이며, 마루야마에게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자신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의식이 좀처럼 생겨나기 어렵다는 것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도 말해지듯이 마루야마의 전제였다.

나아가 후쿠자와의 ‘방법’의 발견은 마루야마 자기의 ‘방법’의 발견이었다. 어쩌면 마루야마는 1942년의 논문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비판」에서 자기의 발견을 의식했을 것이다. 혹은 후쿠자와를 일본의 만하임으로 논하고 싶은 희망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이데올로기 폭로’에서 ‘이데올로기론’으로 후쿠자와의 논의가 ‘성숙’하고 있다고 논한 것은, 후쿠자와가 단지 유교의 표면적인 덕목이 현실의 권력구조를 은폐하고 지배관계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허위’라고 폭로하고 그 해학을 밝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 ‘사유범형’(Denkmodelle, 만하임의 용어)으로서 ‘역사적 사회구조와의 조응성’을 검토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즉 적대의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 그 허위성을 문제 삼는 차원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회구조’(geschichtlichen gessellschaftlichen Struktur)가 어떻게 사람들의 ‘사유’나 ‘시좌구조’를 구속하는가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우수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온갖 입장을 특정한 상황에서의 원근법적 인식으로 의식하기에, 어떠한 테제에서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타당성을 거부하고 독자에게도 자기의 퍼스펙티브의 배후에 다른 퍼스텍티브를 가능하게 하는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의 세계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다.”

온갖 테제의 이면을 들추어 원근법(퍼스펙티브)을 성립하게 하는 것이 “무한한 생각의 깊이를 가진 객관적 존재”라는 것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무한한 생각의 깊이는 그 배후에서 얼마든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때문에, 이것을 ‘객관적 존재’라 부르기에는 근거가 기이하다. 이것은 난바라 시게루(南原繁, 정치학자 1889~1974)가 말했던, 마루야마의 학생시절 논문 「정치학에서 국가 개념」(1936년)에 대해 ‘존재피구속성’(Seinsverbundenheit des Denkens)이라는 것으로는 포지티브한 국가에 대해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와 연관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겠다.

물론 이것은 후쿠자와가 ‘사유범형’의 관찰자로 안주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마루야마 자신도 그렇게 안주하기를 원치 않았다.

마루야마의 견해에서 후쿠자와는 ‘역사적 사회구조’에 의한 ‘사유’의 구속이 어떻게 일어나며 무엇을 일으키는가 라는 문제를 명확화 했으며, 바로 이것을 자기의 ‘사유’의 ‘방법’으로 의식했고, 나아가 이 의식은 후쿠자와가 ‘가치의 분산화를 통한 국민정신의 유동화’를 과제로 삼게 했다는 것이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학문적 시도를 명기했다. 앞서의 인용문 외에도 마루야마는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이라는 표현을 했다. 즉 후쿠자와는 자기의 의지로 ‘퍼스텍티브’를 ‘유동화’할 수 있었다. 이른바 퍼스펙티브를 자기조작할 수 있는 깊이 있는 주체임에 자부하며 나아가 그와 같은 주체의 성립을 ‘국민정신’으로 일으키고자 시도한 것이다. (‘국민정신’(Volksgeist)의 다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만하임의 서술에서 이 ‘유동화’라는 말에 대응하는 부분은 다음의 인용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노라면 정치라는 영역에서 이론이 다양한 모습으로 분열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즉 사회의 유동성(sozialen Strome) 가운데 성립하는 개개의 의견[입장—만하임에 의한 보족]은 각각의 흐름 속에서 다른 지점에 서 있고, 그 지점에서 흐름 그 자체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유동화’에 대비되어 협소하게 경직된 퍼스펙티브에 대해서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역사적 현실로서의 일본사회에 향해 있을 때, 거기에서 찾아낸 것은 온갖 형태의 정신의 화석화이며 그 필연적 결과로서 사회적 가치의 일방적 응집이었다.”

‘정신의 화석화’의 비유는 막스 베버에게서 찾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의 정신』(1920)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장차 이 철의 감옥에 살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거대한 발전이 끝날 그때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인가 혹은 옛 사상이나 이상이 부활할 것인가. 그러고도—그 어느 쪽이 되어도—어떤 종류의 기이한 거만함으로 분장한 기계적 화석(mechanisierte Versteinerung)으로 변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덧붙이자면, 이 논문의 1905년 초판에서 이 부분은 ‘중국적 화석화’였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1905년판에 익숙하다고 하면 ‘중국적 화석화’(chinesische Versteinerung)라는 표현이 주는 임팩트는 좀 더 강했을 것이다.

좀 더 따져보면, 이 ‘중국적 화석화’에 대응하는 표현으로 베버의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1904년)에서 ‘중국적 경직성’(chinesische Erstarrung)이 있다. Erstarrung은 ‘응고’ ‘굳어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마루야마가 이것을 Versteinerung[화석화]와 같은 내용의 개념으로 간주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전쟁 전 출간한 이 논문의 번역서인 『사회과학방법론』(1936년)에서 이 부분은 ‘지나인식(支那人式)의 무감각’으로 번역되었다. 나아가 이 인용문 바로 앞에 “‘역사적 개체’가 되는 자의 범위는 언제라도 유동적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도 ‘유동화’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베버의 논의를 정확히 살펴보면, ‘화석화’는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다다르기 전에 ‘정신이 없는 전문인, 심정이 없는 향락인’이 스스로를 ‘연료’(화석이기 때문에)로 ‘철의 감옥’에 계속 공급하는 사태를 말한다. 한편,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에 나타나는 ‘화석화’는 근대화의 장해가 되는 ‘사회와 정신의 응어리’이다. (‘응어리’는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논문의 chinesische Erstarrung가 힌트가 되었을지 모른다.) ‘연료’와 ‘응어리’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유럽의 근대적 합리화 이전에 ‘중국적’ 합리화 같은 것이 있다는 베버의 빈정거리는(진지한 것이었나) 표현에 대해 후쿠자와는 ‘중국적’인 현상을 ‘반개’(半開)적 동양의 전형으로 보고, 일본이 조속히 그곳으로부터 탈출하자고 요청한다. 이 점에서 ‘화석화’의 비유는 후쿠자와론과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서도 마루야마는 ‘정신이 없는 전문인’이 천황제의 연료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사태를 암시하기 위해 ‘화석화’의 비유를 숨겨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에 걸친 인식의 객관성」에는 또 한 부분에서 ‘유동’에 대한 중요한 문단이 있다.

“사회과학적 인식의 ‘객관성’ 곧 경험적 소여는 늘 가치이념—이것만이 사회과학적 인식에 인식가치를 부여한다—에 기반하고 규정되며 이 가치이념으로부터 그 의의가 이해된다. … 우리들은 모두 생존의 의미를 엮어내는 궁극최고의 가치이념의 초경험적인 타당성을 무엇인가의 형태로 마음 깊이 믿고 있는데, 이 신념은 경험적 실재가 신념에 의해 의의를 획득하는 구체적인 여러 관점의 끊임없는 변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변동을 포함한다. … 가치관계의 구체적인 형성은 늘 유동적이며 인간문화의 유원(幽遠)한 미래에까지 변동해간다.”

즉 인식의 ‘객관성’은 부동의 가치이념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항상 ‘관점’을 ‘변동’시킴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픽션’과 ‘허망’

그렇다면 마루야마는 후쿠자와가 어떻게 해서 ‘화석화’한 ‘국민정신’을 ‘유동화’했다고 본 것일까? 마루야마는 조금은 의외의 각도에서 그 논리들을 연결하는 이음새의 개념을 투입한다.

“앞서 우리는 후쿠자와의 주요한 명제가 모조리 조건적인 인식이며 이른바 괄호 친 이해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여기서 퍼스펙티브를 끊임없이 유동화하는 그의 사고의 특질을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생은 유희이다’라는 명제는 그가 붙인 최대의 괄호일 것이다. 유희란 짐멜도 서술하듯이 인간 활동에서 그 모든 실체성을 사상(捨象)하고 형식화하는 데에서 성립하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픽션이다. 그리하여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 후쿠자와는 인생의 전체를 ‘흡사’[恰も]라는 괄호를 치고 그것을 픽션으로 판단함으로써 스스로 의식하는지의 여부를 불문하고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던 것이다.”

마루야마가 이 논문에서 인용한 것처럼 확실히 후쿠자와는 “인생은 본래 유희이고 한 장면의 유희를 유희라 하지 않고 흡사 진정한 것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택하는데, 마루야마는 이것을 ‘픽션’ 개념과 연결시키고자 했으며 이것은 큰 비약을 동반하는 논리적 재구성이다. 마루야마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퍼스펙티브’가 ‘존재피구속적’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유동화’시킬 수 있는 입각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퍼스펙티브’를 위와 같이(‘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인식하고 그것을 ‘유동화’하고자 시도하는 자는 존재할 수 없다. 마루야마는 오규 소라이를 통해 ‘성인’(聖人)을 제도의 ‘제작자’로서 외부에 선 절대적 작위자로 논함으로써 퍼스펙티브(소라이의 경우는 ‘도’(道)였다)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내는 논리를 구축했지만, 후쿠자와에 대해서는 그러한 절대자를 상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픽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희인 인생을 “‘흡사’라는 괄호에 넣어 픽션으로 판단한다”라는 후쿠자와 독해에 도움을 준 것은 마루야마가 논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문제』(1917년)일 것이다. 확실히 짐멜은 ‘흡사’=als ob를 단서로 유희로의 진정성이 제도의 (‘형식’의) 실효성을 기초 짓는다는 논의를 하고 있다.

“사교는 유희이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한 것처럼, 그리고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특히 존경하는 것처럼 ‘행한다’. 이것은 대개 거짓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유희나 예술이 현실로부터의 모든 일탈에 의해서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마루야마가 주로 언급하는 짐멜의 Gessellighkeit(사교)의 장 가운데에는 정치한 분석이 사교적 대화나 ‘교태’로 향하는 것과 같이, 짐멜의 관심은 내용적 가치를 ‘괄호 치는’ 사교상의 기능으로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짐멜은 같은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유희가 단순한 형식의 만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용이 어떠한 고유 가치를 가져서는 안된다. 즉 논의가 실제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더 이상 사교적인 것이 아니다.”

덧붙이자면, 마루야마가 사용한 ‘괄호 치기’라는 표현도 직접적으로는 짐멜이 사용한 Aufhebung(변증법의 ‘지양’과 같은 말이면서, 실질적 가치에 대한 판단을 허공에 매단다는 뜻도 있다)에 대응된다. 다만 마루야마의 ‘괄호 치기’는 구키 슈조(九鬼周造 1888~1941)의 『‘삶’의 구조』(1930년)에서 ‘교태’[媚態]를 논한 부분에서 “실생활에 대항하는 괄호 치기”로부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괄호 치기’가 끝난 것은, 후쿠자와의 ‘국민정신의 유동화’의 프로젝트가 일본에서 ‘사교’ 공간의 자율적 가치를 확립한 후 한 단계 더 나아가 논의를 추진시키는 개념조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픽션’이 걸려든다. 앞서의 인용문에서 “픽션이야말로 신도 자연도 대신할 수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라는 마루야마의 표현은 인간을 초월한 신앙과 자연에 기초하지 않는 ‘휴머니즘의 논리’만으로 ‘국민정신’이 스스로를 타고 넘어서는 논리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픽션’이 매우 신뢰할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은 ‘픽션’에 의한 자기극복의 논리는 짐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짐멜의 『사회학의 근본개념』에도 Fiktion은 등장한다. 현실이나 역사가 어떻든 간에 ‘평등’이라든지 ‘자유’라는 일반적 이념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일단 ‘픽션’으로서 낱낱의 개인으로 해체하여 논리를 다시 짜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으로서의 ‘인간성의 순수개념’이 생생한 ‘개성’을 ‘외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맥락이 쌀쌀맞다(よそよそしいものであるという文脈で用いられている。).

무슨 이유에서인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않은데, 마루야마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픽션’ 개념에는 헤겔의 『순수법학』(1934년)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위 혹은 바깥의 누구인가(혹은 무엇인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권리주체’라는 fivtive한 사고방식이 왜 가능한가를 논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즉 권리주체의 권리(특히 사적소유권)은 국가의 실정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선행하여 존재한다 라는 마루야마의 사고방식은 무엇으로부터 뒷받침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객관적 법(objective Recht)과 달리, 그것으로부터 독립된 주관적 법(subjective Recht: 실정법적 질서에 선행하는 권리)이라는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점점 중요해진다. 즉 사적소유권이라는 제도를 보증하는 법 질서가 변동될 수 있다는 것이며, 늘 변동하면서도 인간의 의지(Willkur)로 형성된 질서에 지나지 않으며 신의 영원의 의지나 이성이나 자연에 입각한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 인식되는 경우이다. 특히 이와 같은 질서의 설립이 민주주의적 수속에 따라 행해지는 경우가 그러하다. 객관적 법과는 달리 그 현실존재로부터 독립된 법, 그리고 객관적 법에 뒤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그것 이상으로 ‘법’(“Recht”)인 (주관적) 법이라는 사상은 법 질서에 의해 사적소유권의 제도가 폐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사적소유권의 제도]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관적 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왜 개인의 자유, 자치적 인격이라는 윤리적 가치에 연결되는가 라는 문제는 이 자유에는 항상 소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인격으로 승인하지 않는 질서, 즉 주관적 법을 보증하지 않는 질서, 이러한 질서를 본래 법질서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헤겔의 논의와 조합하면 한층 더 명확해지듯이, 후쿠자와가 “휴머니즘의 논리를 아슬아슬한 한계에까지 밀어붙였다”라고 마루야마가 논평할 때의 ‘휴머니즘’은 당연하지만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이상주의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치적 인격’이라는 ‘픽션’ 이외에 근거를 가지지 않는 법=권리체계의 가능성을 후쿠자와가 구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헤겔이 지적한 것처럼 법의 근본규범에 실체성을 상정하기 어려운 민주주의 국가에서야말로 ‘픽션’의 역할은 중요하다.

마루야마가 이렇게 후쿠자와를 이해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1952년)에서 “자연법사상에서 국가이성의 입장으로의 과도기로서 『문명론의 개략』은 특수의 입지를 점한다”라는 기술은 조금 기묘하다. 마루야마는 「『후쿠자와 선집』제4권 해제」에서 “유명론의 사회관”(121쪽)으로부터 “안과 밖이라는 두 계기에 의해 후쿠자와의 이른바 조숙한 성장을 이끌었던 국가이성(레종 데타) 사상은 언어가 가진 본래의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불가피하게 수반했다”(153쪽)라고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앞서의 논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쿠자와가 스스로의 ‘사유방법’에 대해 성찰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개인이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과 국가가 권리주체라는 ‘픽션’의 채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문명론의 개략』에서 이미 행했다 라는 큰 줄거리를 잡아가고 있다.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은 적어도 초기의 논리구성을 보면, 이데올로기론을 픽션론으로 연결하며 이행시키고, 이 속에서 베버, 만하임, 헤겔을 억지로 공투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루야마의 싸움 상대는 그의 눈앞의 일본사회를 우선 놓아두면, 슈미트이다. 법을 기초 지은 근본규범이라는 ‘픽션’을 인간은 견딜 수 없다. 신 혹은 자연 혹은 단체로서의 국민을 실체로서 그대로 승인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치적 결단주체가 나타난다는 것 이외에 법체계를 담보하는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논리에 마루야마는 매료되면서도 저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픽션’을 음미하며 선택하는 주체의 옹호는 이야말로 베버가 말한 ‘가치이념’이라는 전제를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증보판 후기의 유명한 한 구절, “전후민주주의를 ‘허망’으로 보는가 아닌가는 결국에는 경험적으로 검증되는 문제가 아니라 논자의 가치관에 걸려있다. …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일본제국의 ‘실재’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에는 분명히 베버를 의식한 용어법이라 해도 마루야마의 ‘사유방법’의 언명이 존재한다. 더욱이 ‘방법’적으로 말하면, ‘대일본제국’의 ‘허망’보다도 전후민주주의의 ‘허망’에 걸겠다는 편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일반 독자는 감동하지 않겠지만.

안타까운 것은 전후(戰後)의 강연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람과 사상>(1971년)에서 그가 후쿠자와에서 ‘픽션’의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래 기본적으로 인생은 유희이다. 즉 허구이며 픽션이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정작 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정신적인 진폭의 흔들림을 막을 수 있다. … 이것이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결입니다.”

후쿠자와의 ‘사유방법’은 “결단이라는 활발한 정신활동의 비평”이라는 인생교훈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가령 후쿠자와가 결국 그러했다 하더라도 마루야마는 ‘전후민주주의’라는 ‘픽션’에 ‘방법’적으로 ‘내기’를 걸었던 것이 아니던가?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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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은 눈물이 날 정도로 즐거운 작업이었다.

김항의 이 논문은 2014년 8월 도우지샤대학(同志社大学人文科学研究所)의 『社会科学』44(2)에 실린 것이다.

근대의 사유의 근원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상으로부터 '일본론'이라는 사유의 공백을 찾아나서는 그것이 공백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대가 안고있는 근원적인 사유의 불가능성과 연결짓는다. 그리고 일본정치사상사에서 사유의 공백으로 남은 불가능성이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된다"고 결론짓는다. 이 논의의 흐름은 그의 박사논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조선 혹은 해방후 한국으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사상적 지주였던 박종홍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는 그가 가진 특유의, 근대의 사유체계와 시대적 맥락을 연결시키고 정치사상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성력을 볼 수가 없다. 박종홍의 사상적 이력을 슈미트에 대비시키고 만다. 밋밋하다. 한국어와 일본어 각각의 논문의 퀄리티가 이처럼 차이 나는 이유가 무얼까 싶다.

일부 중략했으며 역시 오역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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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範と事実のはざまで」[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론」—

 

1. 문제의 소재

사고는 그 한가운데에 결코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내포한다. 이 공백은 사고주체의 인내, 논리의 치밀함, 언어능력의 결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하물며 대상의 시공간적인 한계 등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공백은 사고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잠재하는 것이고, 주체의 태만이나 방법의 오진에 의한 지식의 결여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공백이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드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언어화되는 사고의 한계를 가리키는 이 ‘공백’의 현시는 어떤 공간에서 다양한 사고의 총체인 언어체제의 효력을 일거에 허공에 매다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와 같은 실천을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에 의거하며 방법론으로서 제기한다.

 

“푸코는 『지의 고고학』의 서문과 완전히 일관된 방법으로, 주체(과학 공동체의 구성원)의 관점에 기초한 통상과학의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으로부터, 주체에 대한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전체’와 ‘표상’(‘언표전체가 부각되어’ ‘그렇게 묘사되는 … 표상’)의 순수한 발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감벤은 여기서 푸코의 패러다임 개념을 토마스 쿤의 그것과 구별한다. 쿤의 패러다임은 어느 특정한 시대의 과학적 언설을 ‘정상’으로 판단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동의되는 규범 내지 전제이다. 이 속에서 쿤의 패러다임은 학지(學知)의 영위에 포획된 제 주체가 현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인식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푸코의 패러다임은 아감벤에 따르면, 그렇게 동의되는 인식의 틀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의 패러다임은 사고가 언어의 문턱을 넘어 제 언어가 현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사고의 공백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푸코가 근대의 규율권력의 패러다임으로 묘사했던 ‘팬옵티콘’을 생각해보자. 알다시피 팬옵티콘은 감시하는 시선의 교묘한 배치에 의해 주체에 대한 규율이나 통제에 획기적인 테크놀로지를 가능하게 하는 패러다임적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패러다임으로서 팬옵티콘은 근대의 권력-주체론에서 연구자가 동의하는 인식 프레임, 혹은 근대의 권력작용의 범례의 규칙 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푸코의 팬옵티콘이라는 장치는 근대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한계영역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푸코는 팬옵티콘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나 육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규율이나 통제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복종해야 할 힘이 불가시하며 감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그것을 스스로 내면화하여 실정화한다는, 극한적인 권력의 테크놀로지의 형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권력론을 관통하는 공백이다. 이것은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로 표현할 수 있다. 권력이 누군가에게 소유되고 행사되는 것이라면, 권력기관은 비대칭적인 주체동료의 관계로, 그 비대칭성을 사고하여 언표화하는 다양한 언설과 함께 환원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법에서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누군가를 억압하여 금지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팬옵티콘은 그러한 구속주체 없이 권력의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속에서 놀라운 것은 불가시하고 감지할 수 없는 시선이 인간을 훈육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푸코가 팬옵티콘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은 주체 없는 순수한 권력의 작동이었다. 푸코는 잔혹하고 가시적인 권력의 동작이 팬옵티콘으로 ‘이행’했다는 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팬옵티콘이라는 주체 없는 권력의 작동이야말로 권력의 극한적인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극한의 형상이야말로 “주체로의 어떠한 준거도 없는 ‘언표 전체’와 ‘표상’의 순수한 발생”을 다루도록 촉구하는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주체를 단호하게 끊어내는 권력론이며 주체가 아닌 순수한 주체화만을 문제 삼는 권력론의 한계영역이다. 주체가 게재되는 권력론에서 최종심급은 권력이 아닌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권력의 주체와 객체라는 ‘신화소’를 권력론으로 끌고 들어오는 치졸한 형이상학에 다름 아니다. 푸코는 팬옵티콘을 ‘권력 작동의 영점’라고도 할 수 있는 차원의 극한의 권력론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의 팬옵티콘은 권력론의 공백을 문제화한다. 주체에 오염된 권력론은 권력 작용의 메커니즘(이것이야말로 권력론의 궁극의 테마이다)을 최종적으로 주체나 객체로 환원하기 때문에 권력이 산출하는 주체화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사고의 영역에서 주변화하고 말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의 작동을 사고할 때의 극한 영역, 즉 ‘실체 없는 주체화의 효과’를 공백으로 내장시켜왔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권력론은 권력이 권력으로서 작동하는 그 순수한 발생을 주체와 객체로 귀속시키고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의 효과로 분절화될 수밖에 없는 주체와 객체를 역으로 권력의 기원으로 사고하도록 강제해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실체 없는 주체화라는 권력의 순수한 작동은 기존의 권력론이 가진 그 효과에 의한 공백으로서 그 안에 그대로 보존되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 공백을 언어화함으로써 권력론의 실효성을 일거에 허공에 매달고 바로 ‘패러다임의 전화’를 기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길게 푸코의 이야기를 한 것은 다음의 논의에서 권력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일본연구’ 혹은 ‘일본론’에서 공백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일본’이라는 것을 사념하여 발화하는 가능성의 조건, 혹은 그 조건 없이 ‘일본’에 휘감기는 언어는 성립불가능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결코 언어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다음의 논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공백이 결코 실체로서 담론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공백은 담론에서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다양한 전략과 우회를 거쳐 추적되어야 한다. 즉 일본론이라는 담론에서 말하지 않고 남겨둔 대상이나 개념들이 아니라 말했던 것 속에서 잠재된 회피와 부인의 전략을 고바야시 히데오의 ‘일본사상’에 관한 에세이에 주목하여 소묘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본론’이라는 것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를 회피하고 우회하면서 ‘일본적인 것’을 담론화한 것임을 드러낼 것이다.

 

2. 모노(モノ)와 사실을 직시하는 실제가(實際家)

에토우 쥰(江藤淳)은 안보투쟁 직후의 상황을 전후 일본을 지배했던 사고의 틀과 연결지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고가 근저에 깔려 있다. 한 방울의 기름도 없는 드럼통과 같은 불모가 ‘논단’이라는 장소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육체에 쌓인 피로에 진력난다면 그때는 풍요로운 ‘사상’이 회복되는 것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공백 혹은 불모는 더 본질적인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일종의 지적파산 후의 공허함이다. / 무엇이 파산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전후 일본의 인텔리겐차가 신봉해온 규범이며 사고의 형태일 것이다. (…) 요컨대, 전후 15년간 대다수의 지식인이 군림했던 허구의 모든 것이 파산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소위 ‘진보파’ 지식인을 향한 직격탄이다. 에토우는 전후 민주주의가 배양한 사상적 및 정치적인 요소가 일거에 폭발했다고 하는 안보투쟁 속에서 역으로 전후 민주주의라는 틀의 파산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비난의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예상대로 마루야마 마사오였다. 에토우는 마루야마가 안보투쟁 중에 행한 <복초의 설>(複初の說)이라는 강연을 겨냥하면서, 전후의 지식인이 만들어내었던 허구란 <8.15>에 모든 것은 끝나기 시작했다는 역사의식이며 헌법이 바뀌어 정치가 변하고 이에 따라 일본전체가 바뀐다고 하는 도덕적인 이상주의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전후의 허구는 에토우가 보기에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이상(理想)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를 쌓아가는 속에서 전후 일본이 ‘점차 백치적으로 비만’해진 사실을 외면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전후의 지식인을 비판한다. “인간은 폐쇄된 머리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 외에도 위라는 것이 있어서 머리가 자살을 공상한다 해도 위는 착실히 저작운동을 한다는 냉철한 사실에 점차 눈떠간다.” 즉 에토우는 전후의 지식인이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허구에 기반한 도덕담의(談義)에 빠져들었던 것이 안보투쟁 후의 허탈상황에서 확인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전후’라는 허구를 없애보자. 생활하는 실제가들의 노력이 일본을 지탱해왔고 그 노력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 이상가(理想家)의 환상이었다는 것은 하나의 흐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가들이 얼마나 개인의 불행을 참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생활자는 불운을 관념으로 흘려보내고 해소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스스로로 라는 것 이외의 사상에 관여하지 않았다. 권력과 사상, 도덕의 야합은 차고 넘친다.”

 

에토우의 비판은 명료하다. ‘사실’이나 ‘실제가’와 ‘허구’나 ‘이상가’라는 대비에서와 같이, 에토우가 주어진 표준으로 사실을 계측하는 시선을 거부하고 사실 그 자체를 스스로의 눈과 입으로 바라보며 비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로 대표되는 전후의 지식인은 이 의미에서 어떤 종류의 주어진 규범이나 이상을 맹신하는 머리만 큰 인텔리겐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에토우의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에토우의 고유한 관점이 아니다. 오히려 에토우는 걸출한 한 사람의 비평가의 추종자가 됨으로써 전후 지식인에 대한 비판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비평가란 에토우가 “비평을 창조했으며 예술적인 표현을 고양함과 동시에 그것을 파괴한” 절대자이며 그 사람이 “참아왔고 지금도 참고 있는 것의 무게에 비교하면” “일본 근대” 나아가 “역사” 그 자체마저 의미를 잃게 된다며 존경심에 마지않았던 고바야시 히데오이다. 1961년에 행해진 어느 대담에서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에토우: 결국 우리들 현대의 인텔리겐차의 미에 대한 태도가 그렇게 얕다는 것이죠. (…) 우리들의 생활이 언제나 정치의 과잉 속에 있기 때문에 작은 체험이 정말로 어렵게 되어버렸죠. 현대 사회에서 어느 순간인가 이데올로기랄까 관념이랄까 그러한 것에 속박되어 좀처럼 사물[모노 モノ]을 만질 수 없어요. (…)

고바야시: 그렇지요. 그런데 가령 여성이 키모노를 보는 경우에 맞춤옷을 보는 느낌으로 본다는 것이죠. 나는 그 관점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봅니다. (…) 미(美)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화에 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뭐든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에토우: 제대로 생활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고바야시: 지식과잉이랄까, 언어과잉이랄까. 미란 것은 바로 우리 옆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에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있지요. 생활의 반려이니까요. / 그렇다 해도 현대문화에서는 미의 위치에 대한 사유—, 미의 일상성에 관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유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면 언어 외에는 그 무엇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미’를 언어로밖에 사유할 수 없는 인텔리겐차가 에토우가 비판했던 전후 지식인이며 옷을 보는 여성이나 일상에 있어서 미를 경험하는 자가 실제가임은 명백하다. 이 문답에서 두 축은 머리와 입으로 미를 사념하여 발화하는 지식인과 모노를 이것저것 손에 쥐고 선택하는 일상의 사람들인데, 에토우와 고바야시는 후자야말로 자연의 진정한 미적 감각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와 같은 인식의 태도는 ‘다양한 의장(意匠)’으로부터 ‘모차르트’에까지 이르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의 핵심을 이루는 시좌(視座)에 다름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아름다운 꽃이다’(花の美しさなどない。あるのは美しい花である。)라는 언명으로 대표되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비평은 작가의 눈이나 손과 그 앞에 나타나는 일회 한정의 ‘모노’ 사이의 조우를 온갖 개념이나 전제를 제거하고 추출해내는 것이다. 그가 ‘역사란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규정할 때에, 역사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가버린 일회 한정의 실감을 말한다. 그의 역사관이 위와 같은 비평관에 근거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에토우는 이와 같은 고바야시의 비평 및 역사관을 마스터함으로써 전후 지식인이 ‘모노’와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며 공허한 이상주의에 매몰되었다고 비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바야시와 에토우가 자연에서 건강한 눈과 손으로 전후의 폐허를 살아내었던 형상으로 제시하는 실제가란 전후의 ‘일본론’에 대한 래디컬한 비평이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헌법이라는 ‘허구’로 환원되어 사념되었던 ‘일본’적인 것의 ‘의장’을 철거하는, 사실로서의 실제의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고바야시와 에토우는 언어, 이념, 개념 등으로 구성된 전후의 ‘일본론’으로부터 실제로 생활이나 사실을 존립시키는 ‘일본’을 구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눈에 ‘실제가의 일본’은 근대적인 역사기술이나 국체 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이념이나 이상이 말하고 표상하는 역사나 국가야말로 생활의 장에서의 ‘건강한 경험’에 의해 가능하다. 그리고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와 같은 ‘실제가의 일본’을 ‘전통’으로 제시함으로써, 근대 이후의 ‘일본론’에 대한 역사적인 비평을 기도했다. 고바야시가 오규 소라이, 모토오리 노리나가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에 이르는 사상사의 계보를 다시 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 고바야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의 암시적인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시론을 전개한다.

 

3. 고바야시 히데오의 마루야마 마사오 비판

고바야시 히데오는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문예춘추』에 에세이를 연재했다. 그것을 모아놓은 것이 「考えるヒントⅠⅡ」인데, 그 연재 중반에 주요하게 언급된 것은 오규 소라이였다. 어째서 소라이였던 것일까? 그가 이에 대해 확실히 표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발언이 있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소라이론에서 언급된 부분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는 익히 알려진 책으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구조의 역사적 추이로서 주자학의 합리주의가 고학(古學) 문헌학의 비합리주의로 전환되는 필연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와 소라이의 학문을 사상의 형태의 해체과정으로 다뤄지는 작업의 성질상, 마루야마의 논술은 디알렉틱(ディアレクティーク, 변증법)보다 오히려 아날리틱한 성질이 강하며, 따라서 애매함 없이 특히 소라이에 관해서 이런저런 생각할 점이 있지만 나로서는 다만 소라이라는 인물의 내막[懐 ふところ]에 관해 더 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미 훑은 바와 같이, 마루야마의 소라이론은 소라이의 사상 속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맹아란 인간의 질서(道)는 자연의 질서(性)와 달리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이라고 정식화함으로써 질서의 수정이나 전복가능성까지 정치적 사상으로 열어놓는 논리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구해진다. 이 속에서 소라이는 질서를 자연이나 사실에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 사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인’이라는 인격에 의해 구성되는 픽션으로 다룬다. 따라서 소라이는 사실을 추상화하여 논리를 구축하는 근대적인 사상가인 것이다. 그런데 고바야시는 소라이론을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끌고 간다.

 

“소라이는 회의파도 아니고 비합리주의도 아니다. 사물과 자연에 있는 이(理)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理)는 탐구하는 마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이(理)를 만나면 좋은데, ‘세계는 이(理)이다’라거나 ‘이(理) 속에 세계가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理)라는 언어에 도취해버리고 만다. 학자의 도취심[醉心]에 빠지면, 그 사유는 학설의 수미일관 등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 공자가 ‘좋아한다’라는 말에 주의했던 것은 이와 상통한다. 소라이는 후세의 학문에서 의지를 찾는 것에 예민하고 마음을 찾는 것에 서두르며 이(理)를 마음에서 구하여 다변이 된다고 했는데, 공자처럼 학자가 되면 달변을 싫어하고 ‘생에 기대한다’는 침착한 태도를 학문의 근저로 삼게 된다고 했다. 이(理)를 말하며 지혜를 즐거워하기보다 삶을 살아가는 쪽이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알기보다 행하는 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소라이의 기본적인 사상이었다.”

 

고바야시는 이와 같이 이(理)보다도 생을 중시하는 마음의 태도를 가진 자로서 소라이를 그려낸다. 이것은 근대적인 맹아를 제시했던 이론가 소라이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제가 소라이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로써 고바야시는 마루야마의 비판을 되받아친다. 즉 ‘사실에 모리를 조아리는’ ‘실감신앙’이라는 비난을 마루야마에게 되돌려주면서 그것이야말로 ‘실제가의 일본’이라는 계보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계보를 고바야시는 진사이에서 소라이를 거쳐 노리나가에 이르는 ‘일본의 전통’으로 잣아 내는 것이다.

…(중략)…

 

4.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고바야시의 ‘일본론’은 일종의 극한을 다룬다. 왜냐하면 그의 ‘일본론’을 구성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인 설명도 신비적인 분장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있다는 사실에 충실한 생활인의 눈과 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일본’은 어느새 ‘일본’이라는 이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확실한 사실로서 사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념을 단순한 자연주의나 실감신앙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의 생활이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그때까지 세계를 파악해왔던 전이해(前理解)를 허공에 매달 것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즉 고바야시의 ‘실제가’는 자연이나 사실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엄격한 태도나 방법을 갖추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루야마도 1961년에 썼던 『일본의 사상』의 후기에서 “고바야시 씨는 사상의 추상성이라는 것의 의미를 문학자의 입장에서 이해했던 소수의 한사람이며 나로서는 실감신앙의 일반적 유형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극한 형태로서 고바야시 씨를 인용할 생각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고바야시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1964년의 『증보판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의 후기에서 “전후 민주주의라는 허망에 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바야시의 강인한 정신이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같이 온갖 인식의 틀을 젖혀버리고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룬 반면, 마루야마는 그와 동일한 강인한 정신을 통해 자연/사실의 존재양상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인위적인 제도로서 가져오려는 규범(그리고 규범화하는 결단)을 옹호했다. 마루야마의 ‘허망’이란 속임수나 거짓말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픽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 속에 날 것[ナマ]의 생의 불변성과 건강함을 보는 방법적인 아나키의 시선이 있고, 또 한편에서는 외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상위의 규범을 창출하고자 하는 단호한 결단이 있다. 그리고 고바야시의 시선과 마루야마의 결단은 암시적인 논쟁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사고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반대로 보일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방향은 실제로는 사고에서 동일한 회피 전략을 거꾸로 공유하는 경상(鏡像)과 같다. 그렇다면 양자는 무엇을 회피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과 규범은 결코 강인한 정신이나 결단하는 주체에 의해 가교되지 않는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칸트파를 상기시킬지도 모를 이 언명은 규범과 사실의 이원론에 기초해서 규범과 문화영역에 독자의 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주안점은 고바야시와 마루야마의 ‘일본’이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회피하면서 언설화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들의 일본론은 일본을 소여의 것으로 전제하고 그 특질을 서술해내는 통속의 일본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일본론은 실체화된 ‘일본’을 철저히 물음으로써 ‘일본’을 자연화하고 미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그들에게 일본은 일본이 서양기원이든 동양기원이든 기존의 술어나 범주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고 반대로 환원 그 자체를 다시 묻는 장소이다.

이 속에서 그들에게 일본은 서양근대가 이룩하고자 했던 계몽의 프로젝트를 계승하는 급진적인 하나의 비판적인 기획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서양근대의 계몽의 프로젝트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주체 스스로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게 하는 기획이었다면, 고바야시와 마루야마는 계몽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 아닌 그 태도나 방법을 적극적 및 근원적으로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의 주체나 기존의 이해의 틀을 철저하게 허공에 매다는 강인한 정신은 모두 칸트가 정식화했던 계몽에서의 주체와 정신의 궁극의 존재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야말로 근원적인 불가피성이 잠재한다. 슈미트의 주권론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들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피하며,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이 시사하는 것처럼 데카르트적인 회의는 인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광기의 식별불가능성을 노정할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슈미트-벤야민-푸코-데리다의 논쟁 그 자체에서 결단하는 주체가 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과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한편으로 신을 모델로 하는 한에서 결단하는 주체는 결코 사실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규범의 인격화로서 미래로 이끌리던지 초월의 고양으로 추상화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강인한 정신이 광기와 식별 불가능한 한에서 정신은 기존의 규범을 내던지고 정신으로 성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존의 관념을 방법적으로 (언어적으로) 허공에 매달고 사실을 찾아내는 정신이 광기에 빠진다면 기존의 규범질서는 결코 방법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따라서 규범으로부터 사실에 이르는 고바야시의 정신과 사실로부터 규범으로 향하는 마루야마의 결단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무능하고 우울한 생의 형상을 회피한 결과 엮어진 것은 ‘픽션’ 외에 다름 아니다. 양자의 비판적 및 반성적인 지적영위에 의해 추출되었던 ‘일본’은 극히 이성적이고 위생적이며 지적인 주체와 정신의 장소이자 이름이었다. 이 ‘일본’은 통속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일본론과 결별하며 엄격한 방법과 금욕의 태도로부터 추출되었다. 이 의미에서 양자의 ‘일본론’은 어떤 종류의 극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극한의 일본론이 성립되었던 사고의 공백이란 바로 결단하지 않으면서 과거와 단절하지 않는 어떤 우유부단한 주체 혹은 유약한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 주체와 정신은 규범과 사실의 틈새에서 결코 빼내올 수 없다. 그것은 규범이 통제하는 힘과 사실이 압도하는 힘에 의해 이중 구속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체와 정신은 ‘일본’이라는 것을 결코 완전히 형상화 한다거나 관념화 한다거나 역사화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이 우유부단하며 유약한 주체와 정신으로부터 새로운 ‘일본론’이 엮어질 수 있을까? 그 작업은 여기서의 과제는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엮여진 ‘일본론’은 신이나 이성을 모델로 하는 주체나 정신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의 폭력에 탐닉하면서 타자로부터의 폭력에 겁먹는 어떠한 안정적인 동일성도 보유할 수 없는 성가신 존재의 양상으로 발산될 것이다. 이 때 ‘일본’은 국경이나 역사 속에서 자기폐쇄적인 경상(鏡像)에 달라붙는 아이덴티티가 아닌 타자와의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애정에 넘치는 분열적인 공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장으로 사념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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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2014년 8월)에 실린 김항(金杭)의 논문.

<현대사상>에는 필자의 연구분야와 이름만을 기재하기 때문에 재일코리안인가 했다. 문장이 수려하고 어렵다. 김항의 글을 처음 접했고 이 글만으로는 김항의 마루야마에 대한 사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칼 슈미트와 마루야마 마사오의 관계를 해명한 글인데, 칼 슈미트의 글도 읽어본 것이 없어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단 번역했으니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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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市民の哀悼劇:丸山真男と決断の帰趨」[근대시민의 애도극: 마루야마와 결단의 귀추]

김항(金杭)

 

  1.

  나치즘과의 불운한 동거가 파탄난 후 곧 수인(囚人)의 몸이 된 카를 슈미트는 스스로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노예선을 뺏긴 가련한 선장, 베니토 세레노의 부단한 세월에 자신을 빗대며 한때 유럽의 공법(公法)을 짊어진 위대한 법학자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주권국가의 기사(騎士)로서의 상호승인의 질서를 미소 양국이 보편적인 패권전쟁을 통해 나눠가지는 시대의 추세 속에서 단지 침묵하는 것만이 법학자의 유일하게 정해진 길임을 감수했던 것이다. 15세기 젠틸레(Gentile, 1370~1427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가 ‘신학자여 타인의 노동 앞에서 침묵하시오’라는 일침으로 유럽의 공법의 시작을 알려주었다면,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20세기에 ‘법학자여 침묵하시오’라는 형벌로써 슈미트는 동족의 계보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물론 슈미트는 『대지의 노모스』라는 대작에서 후예를 버리다 못해 지구규모의 새로운 법질서의 출현을 예감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 전망은 점차 희미해질 뿐으로 ‘취득 Nahme’을 근원으로 하는 노모스의 질서가 미소 양국의 보편주의로부터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다하게 되었다. 대륙의 정주(定住)와 장소확정과 경계설정의 패러다임은 지구 규모에서 보편적 이념의 레짐(regime)을 목표로 하는 보편주의에 의해 소멸의 길을 독촉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슈미트는 이미 법 질서의 내력(來歷)과 존립을 내세우는 법학자로서의 사명을 방기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어느 정도 설명하다 끝내지 못한 유럽 공법의 핵심적인 개념인 주권으로의 회의에 눈을 돌렸다.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주권자란 실은 근원적으로 존립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고.

  슈미트가 그러한 의심을 ‘권력의 대기실 Vorraum’이라는 표상을 통해 제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권력을 일신에 집중시키는 주권자의 방 앞에는 겹겹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대기실이 있고 주권자의 모든 결정은 대기실을 점유하는 관료와 막료와 측근들에 의해서 행해진다. 이는 주권자의 권력이 결정해야 하는 사정이 매우 많고 주권자 한 사람만으로 그 일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필연적으로 주권자로 통하는 대기실에서 그 결정을 대행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은 권력이 결국 간신들과 침식하는 것이라는 범용한 교훈을 가리키지 않는다. 궁정에서 오가는 농담과 감언이 현실과 주권자 사이를 가로막아 견명한 결정을 흐린다는 식의 분노가 슈미트의 진의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의심이 품은 무거움은 주권자의 결정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진짜 권력상황을 은폐해버린다는 사실을 회한에 가득 차 인정한다는 데에 있다. 주권자의 결정이라는 법 개념은 슈미트에게서 자신의 법학적인 영위의 근저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법뿐만 아니라 국가와 정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공적인 질서와 행위의 모든 것은 이 개념이 아니고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와 같은 스스로의 근본개념을 슈미트는 방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 글에서는 우선 슈미트의 이와 같은 자기회의를 확인하고 논의를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결정이나 결단을 입 밖에 내는 사상적인 영위는 대체적으로 모두 슈미트의 자기회의의 근변으로 회귀하는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자부심 높은 유럽 공법의 최후의 적자, 슈미트를 그와 같은 모멸적인 자기회의로 이끌었던 진짜 권력상황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권력행사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정당화의 불가능성이다. 즉 모든 권력상황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매번 창출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결단할 수 없는 군주, 아감벤이 그려낸 오이코노미아 신학, 아렌트가 본 근대의 권위 상실, 그리고 푸코의 주권을 결여한 통치의 테크놀로지 등 이 모든 것은 슈미트의 자기회의와 공명하는 사유임은 이미 지적되었다. 나는 이 리스트에 한 사람의 이름을 덧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루야마 마사오이다.

  마루야마는 슈미트의 지대한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동경일고(東京一高)에 입학한 해에 만주사변(1931년)이 발발했다는 사실이 상징하는 것처럼, 그의 학창시절은 후에 초국가주의로 이름 붙인 천황제 파시즘과 나치즘을 포함한 광의의 ‘파시즘’이 기존의 정치질서를 붕괴시킨 시대였다. 명민하고 다감한 마루야마는 그러한 시대 속에서 호흡했고 동대법학부 조수 시절이었던 1938년 ‘영미 및 독일 정치학계’라는 리뷰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발했다.

  “현대는 정치화의 시대라고 한다. 여러 문화체계는 이미 자립성을 잃었다. ‘과학을 위한 과학’의 깃발은 퇴색하고 이제 과학은 머리 위로 권력을 바라보며 발밑에 대중을 두기에 이르렀다. 이데(관념)로부터 이데올로기로 — 취향은 다름 아닌 정치학에 있어서 가장 현저하다. 영미의 정치학계가 이데올로기의 다채로운 갈등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하는 것에 반해, 독일의 그것은 다만 일색뿐이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철학적 기초에까지 침하되어 그곳에서 학문적 논술을 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왜 그곳이야말로 정치적 색채가 강렬한 것일까. 이러한 시대에서 과학적 정신의 존망은 어느새 이미 학자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적 광란의 소용돌이에 침몰될 것인가 아닌가는 대중의 자각에 더 크게 의존한다.”

  마루야마가 1939년 나치즘의 사상적 지주로 통용되었던 슈미트의 「국가, 운동, 민족」의 초역(抄譯)을 소개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는 이 초역이 나치즘 법학의 ‘고전’을 소개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단언했지만, 실은 그의 속마음은 슈미트의 사상 그 자체의 실체를 시대의 추세와 겹쳐 맞춰보면서 추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슈미트의 사상에는 위기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라는 것이 마루야마의 슈미트 독해인데, 그것은 슈미트가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는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진정한 섬광을 녹여버리는 마물 같은 힘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슈미트에 현혹된 마루야마의 심정은 그 직후 일본사상사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국면을 열어놓은 소라이론(徂徠論)[荻生徂徠 오규소라이, 1666년~1728년)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정을 이른바 ‘마루야마 키즈’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두 가지의 소라이론을 포함한 전집 제1권의 해제에서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우에테 미치아리(植手通有, 1931~)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사고구조와 사회질서관념에서 자연 대 작위의 대립(이에 대해서는 누구의 영향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앞의 문장에서 만하임의 영향을 중점적으로 지적했던 것을 보면, 이를 악다문 이 거부는 독자들로 하여금 더욱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든다. 그렇다, 명백한 이 거부는 마루야마에 대한 슈미트의 영향을 투박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그 증거를 일일이 열거할 여유가 없다. 위에서 다루었던 영미 혹은 독일 정치학계의 리뷰에 있어서 마루야마가 자꾸만 슈미트를 다루고 있다는 것, 1930년대 초반 로우야마 마사미치(蝋山政道, 1895.11.21~1980.5.15 일본의 정치학자)의 세미나에서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강독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소라이론에서 결정적인 여러 곳에 슈미트의 『정치신학』으로부터 홉스가 인용되며 소라이에서 노리나가로 이어지는 논리를 슈미트의 『리바이어던』의 논리를 차용하고 논증하고 있다는 것.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소라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道) 그 자체의 궁극성이 부정되고 성인(聖人)이라는 인격에 의거하게 되었다. 소라이에 있어서 이 인격이 피안적인 것으로 고양됨으로써 도(道)는 매우 절대적인 보편타당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유교의 도(道)에 이르는 길은 때때로 위험신호를 울린다. 생각하건데 이제 도(道)의 가치가 천연자연의 진리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 자체의 궁극적인 이데(관념)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성인(聖人)이 만들어가는 것과 관련된다. 도(道)를 행함으로써 도(道)를 만드는 것은 이치가 아니고 권위이다(Auctoritas, non vertasu, facit legem! [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든다] 홉스). 그러면서도 권위는 권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권위다워진다. 소라이학에서 성인(聖人)의 권위는 믿지 않는 자를 도(道)의 진리성으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심대한 소라이학의 체계는 따져 들어가면 ‘우로(愚老)는 부처를 믿지 않으며 성인을 믿는다’라는 한 지점에 의거하고 있다. 위험하다랄까, 이 거점으로 해서 처리해버린다 랄까, 성인(聖人)의 도(道)는 그 전체 구성과 함께 홀연히 대지로 스며든다.

  ‘진리가 아닌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홉스의 언명은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결단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인용된 바이다. 마루야마가 작위의 논리, 즉 자연의 흐름이 아닌 주체의 의지적 작위에 의해 인간계의 질서가 창설된다는 논리를 구축할 때에 이 언명을 인용한 것은 의아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홉스-슈미트로 이어지는 결단주의가 위기의 정치논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마루야마는 소라이를 그와 같은 위기상황에 있는 사상가로 위치 짓고 있다. 그런데 마루야마의 슈미트 참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권위는 권위에 대한 믿음에 의해서만 권위’이며 그것을 믿지 않는 자를 설득할 수 없다 라는 마루야마의 날카로운 해석은 실은 슈미트의 홉스독해를 채용한 것이다.

  슈미트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침식했던 것이 다름 아닌 스피노자로부터 멘델스존에 이르는 유대의 사상가들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는 슈미트의 반유대주의가 가감 없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글에서는 그 주변 정황을 탐색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슈미트가 절대주의 국가의 붕괴를 초래한 것에 대해 격론을 펼친 것인데, 이는 홉스가 ‘내면의 보류’라고 했던 것이다. 외면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만으로 주권이 기초 지어지는 까닭에 홉스의 국가는 개개인의 내면신앙의 자유에 의해, 바꾸어 말해 ‘주권을 믿지 않는 자유’에 의해 붕괴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마루야마가 권위를 믿는가 아닌가의 자유가 성인의 도(道)를 위기에 빠뜨린다고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슈미트의 논리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30년대의 마루야마에게 슈미트는 정치가 최종심급으로서 세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위기의 시대에 명석함으로 그 깊은 곳의 비밀을 체계적으로 보여준 도표였다.

  그러나 그의 지적인 영위가 슈미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해도, 마루야마는 슈미트의 단순한 추종자로 머물지 않았다. 스스로가 말했던 것처럼 그는 슈미트와의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첨예화했으며 정치의 우위라는 슈미트의 테제에 가담하기 않기 위해 애썼다. 이때 슈미트와의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마루야마가 정치적인 고려와 실천의 기초로 삼았던 것은 다름 아닌 ‘결단’이라는 계기였다. 그는 슈미트의 결단을 되받아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 정치의 우위를 비판하며 파시즘에의 대항논리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논리는 앞서 말했던 슈미트의 자기구축으로 빠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3.

  혼돈의 자연으로부터 질서를 형성하는 부단한 실천, 이것이 마루야마의 민주주의라는 것에는 덧붙일 말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초국가주의론은 이와 같은 질서형성의 계기를 결여한 패전 전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초국가주의를 지탱한 천황제는 이와 같은 체제를 유지하는 독특한 혼합물이었는데, 통치의 억압 제도가 제도로서 인식되지 않고 자연적인 것으로 인지된다는 것도,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운동이 제도와 질서의 창출로 이어지는 합리적인 사고를 결여한 혼돈의 에너지에 머무른 것도, 모두 천황제라고 하는 ‘자연의 제도 혹은 제도의 자연화’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마루야마의 분석이다.

  이러한 ‘일본적인 맥락’ 속에서는 비판이나 저항의 근거를 외부 혹은 상부로부터 강요된 제도와 대립하는 소여의 아이덴티티나 전통 등에서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천황제라고 하는 전통적인 아이덴티티가 외부ㆍ상부로부터 강제된 제도와 식별불가능하게 착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공산당 지도자의 전향이든 급진적 우익의 혁명이든 그 모두는 천황으로 귀의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무정형인 그대로 역사 속에서 유령과 같이 떠도는 수밖에 없다. 마루야마가 ‘결단’을 하나의 논리적 태도인 동시에 정치적 태도로서 제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도와 자연이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혼돈되고 있다는 특수한 일본적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혼돈(자연)으로부터 질서(제도)를 창출하는 시원의 순간(바꿔 말하면 자연과 제도를 나누는 방법적인 의식으로서의) ‘결단’에 일본적인 정신과 신체의 수용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루야마는 이 도박을 내셔널리즘론으로부터 시작한다.

  패전 후 1949년, 마루야마에 의한 일본정치사상사의 논의는 내셔널리즘과 국민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마루야마는 국민을 ‘국민이란 결국은 국민이 되고자 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라고 하면서 내셔널리즘을 ‘국민의 국가로의 집결’이며 ‘하나의 결단적인 행위’로서 정의한다. 개인이 국가로 집결하여 국민이 되고자 하는 내셔널리즘의 운동이 결단인 이유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즉 무자각적으로) 공유해왔던 여러 관습이나 전통을 의식적인 것으로 공유했다는 자각을 하기 때문이다. 즉 결단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이란 관습이나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들을 관습이나 전통‘으로서 의식’하는 것, 그것이 자연이 아니고 제도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공유하는 질서가 제도인 한에서 이것으로부터 ‘창출되는’ 실천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단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은 언제나 곤란이 뒤따른다.

  “인식함으로써 실패 혹은 좌절에서 배워가기 때문에 인간의 진보, 이에 따른 역사의 진보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과정에서는 어떤 인간도 실패하거나 좌절한다. 그것은 인식이 완전한 인식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인식이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인식인 것에 대해 그 행동은 언제나 알지 못하는 미래로 뛰어든다는 도박의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밀한 이론에서도 행동하는 입장에 서는 순간 그 다음에 오는 상황을 구석구석에까지 규정할 수 없다. 최후의 순간은 언제나 자신의 결단의 순간이다.”

  마루야마는 본래 결단이 내셔널리즘으로 귀착하는 이유에 대해 ‘근대’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의 결단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설명 자체는 상황의 추종과는 다르다. 결단으로서의 내셔널리즘을 통해 마루야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내셔널리즘을 결단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셔널리즘을 자연적인 것에 귀속시키지 않고, 위로부터의 지배이데올로기로 파악하는 사고양식에서 탈피하여 폐허 속에서 국가를 재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역사의식과 미래로의 투기를 만족하기 위한 언설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근대시민이란 위기의 순간 과거의 인식에 기초한 미래로의 행동을 일으키는 ‘결단’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 근대시민의 결단이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이 ‘실패나 좌절’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마루야마의 결단에 내재하는 균열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어떤 제도(내셔널리즘)를 창출하는 결단이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미래로의 도박의 미지의 결단이 있다. 전자는 현재에 있는 제도를 과거에 소급해서 인식하는 원리이며, 후자는 미래로 나서는 행동의 원리이다. 마루야마의 결단은 이 두 가지의 계기를 통합하는 것에 의해 완전한 의미를 획득하는데, 여기에서 마루야마의 결단은 슈미트의 자기 회의로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그 통합은 어디까지나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결단불능의 시간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4.

  마루야마는 결단을 설명할 때에 자주 살인의 예를 든다. 인간이 사람을 죽이겠다고 결단할 때에는 무로부터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증오이며 순간적인 행동이다. 살인이라는 행위는 절대적으로 그 근거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논의이다. 그는 행동원리로서의 결단을 그와 같이 살인에 빗대어 이해한다.

  이렇게 말할 때 마루야마는 법 규범과 법 실천에 내재하는 어떤 공백을 포착한다. 근대법은 일어난 사건을 대상으로 하고 인간의 행위에 판단을 내리는 처벌을 선고한다. 최소한의 법 규정의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죽이고자 생각할 때에 그 사람을 법적으로 판가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 실천의 영역에 들어오면 사정은 바뀐다. 재판에 회부된 살인범은 살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보다 살인에 이르는 동기를 찾아 그에 의해 처벌된다. 즉 행위가 행해져 법 실천의 영역에 파고들어가자마자 법 규범이 관여하지 않았던 내면의 동기가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결단도 이와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다. 마루야마는 결단에 이르는 인식과 결단을 근거지우는 행동을 시계열적으로 순열시켰는데, 실제의 시계열은 그 역순이 된다. 즉 사람은 결단의 결과에 의해 과거의 인식이나 내면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단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통합은 부득이하게 모순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과거에의 인식에 기초해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 후에 그것을 재촉하는 인식을 추궁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슈미트가 말한 진짜 권력상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결단을 구성하는 인식과 행동이 결국 역순이 된다면, 그때 결단은 미리 항상 누군가에게 판가름되는 운명 하에 있으며 그 때 결단은 결코 결단으로서 무언가를 창출할 수 없다. 즉 마루야마의 결단은 슈미트의 군주적인 독재의 결단을 민주주의의 기초로 하는 근대시민의 결단과 역립시킨 것인데, 결국 결단 그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벤야민은 재빠르게 슈미트의 주권론에 내재하는 이와 같은 불능을 캐치하여 그것을 독일 애도극이라는 역사적 형식으로 그 사례를 형상화했다. 아마도 마루야마가 ‘결단하는 근대시민’에 대해 제기된 벤야민적인 애도극은 패전 후의 일본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을 둘러싸고 자주(自主)가 억압적인 것인가를 논쟁한 끝에(결단일까 아닐까), 가련한 군주놀이를 하는 한 사람의 참주(僭主)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식과 행동을 독점하는(결단을 심판하는 권력의) 현재 상황은, 마루야마의 결단의 오마주적인 애도극에 다름 아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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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래서 본래의 문장의 맛을 살려내기가 어려웠다. 부분적으로 의역을 했고, 역시나 오역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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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역사의 웅덩이(歴史の窪地)

1. 역사의 웅덩이

일본문화가 창조성으로 넘쳐난 때는 대체 언제인가? 본서의 관심은 이 소박한 의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은 예전부터 번성했다고 하는데도 이런 식의 질문은 의외로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들은 정치적으로 구획된 시대를 각 시대별로 그 성격에 대해 이런저런 논평을 해왔지만, 어느 시기에 창조의 환경이 크게 조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무엇보다 역사는 결코 평평하고 단조로운 평면이 아니라 요철(凹凸), 틈새, 단층이 많은 함몰지대를 이룬다. 그러한 요철을 억지로 평평하게 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함몰이나 기복의 다채로움을 잃지 않으면서 역사를 측량하는 방법을 찾아내야한다. 본서의 표제로 제기한 <부흥문화>란 바로 그러한 측량을 위한 하나의 지표이다. 간단히 말해 부흥기 혹은 <戰後>라는 것은 일종의 옛이야기와 같은 — 짧고 조금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며 때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적이 일어나는 — <자유>의 시간대이며, 이 때문에 활동기와 안정기에는 볼 수 없는 특성이 나타난다. 거대한 파괴 후의 다공질의 지반 위에서 새로운 현상을 부지불식간에 빗물처럼 담아내는 역사의 웅덩이, 그것이 부흥기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흥은 전쟁의 환란이나 재난 등과 비교하면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수수하며,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변경할 기회를 제공해주기 어려울 것이라 느껴진다. 그런 탓일까, 부흥기를 긍정적으로 다뤘던 철학이나 평론은 많지 않다. 본래 오늘날의 작가나 예술가, 비평가들은 대체로 활동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예외적인 카오스가 출현하는 때야말로 일상의 사회가 감춰두었던 것 — 인간의 폭력성, 질서의 기만, 혹은 정신의 기적적인 아름다움 등등 — 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평상시에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들의 비자명성이 사람들에게 재인식되기 때문이다. 분명 문화나 예술의 중요한 사명은 사회에 경보를 울리기 위해 <예외상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본래 문화나 예술에는 경보기로서의 사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상당한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기능도 있지 않을까. 이것이 본서의 기저가 되는 질문이다. 애초에 부흥문화란 정의상 거대한 사건(전란이나 재난)의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건 후에 —혹은 그 흔적으로 — 작동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 때, 전쟁이나 재해 이전의 베이스라인의 딱 거기까지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건 후=흔적에 새로운 소재나 방법론을 불러들이면서 시스템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는 것, 그것이 일본의 부흥문화의 본뜻이다. 그 반대로 구래의 질서가 불사조와 같이 화려하게 부활한다는 스토리는 일본문화가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파괴나 재난은 종종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변경을 문화에 가한다. 그러나 불가역적인 변이 속에서도 파국으로 향하는 일직선으로 밀어닥치는 것이 아니라, 부흥기 혹은 <전후>라는 웅덩이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이러 저리 옮겨 다니며 그곳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다 —, 이와 같은 안식과 창조의 시간대가 일본문화에는 확실히 존재해왔다. 나는 이 시간대에서, 선대의 비평가인 하나다 키요테루(花田清輝)가 말했던 <부흥기의 정신>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자 한다.

 

2. 두 종류의 부흥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것은 <부흥문화론>이라는 구상 자체는 결코 나의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점다. 예를 들어, 비평가 야마자키 마사아키(山崎正昭)는 7세기에 일어난 하쿠스키노에(白村江)[백마강] 전투(*번역자 덧붙임: 663년 백제와 일본 연합군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전투)의 <전후>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아름다운 문화의 시대[하쿠보우(白鳳) 문화]가 실은 하쿠스키노에(白村江) 전투의 패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663년, 일본은 당의 수군의 결정타를 맞았고 텐지(天智) 천황은 조선경영을 단념하고 내정으로 전향한다. 실은 이때 섬나라 일본의 운명이 결정지어진 것인데, 일본 최초의 문화는 하쿠스키노에의 전후문화였다는 것이다. ...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문화는 언제나 부흥문화로서 발전해왔으며, 그 원형이 7세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방점 인용자)

늠름한 하쿠보우 문화의 기저에는 확실히 <부흥>의 동기가 있었다. 텐지 천황의 조선경영이 하쿠노스키노에(白村江)의 패전에 의해 좌절되었고 그 10년 후 임신(壬申)의 난이 이어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상을 입은 후에야 아수카요미가하라노미야(飛鳥浄御原宮 7세기 후반 천황의 궁) 및 후지와라쿄우(藤原京: 아수카 시대 말기[694-710] 야마토의 도읍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등장했다. 일본사를 돌아보면 확실히 이러한 종류의 <전후>의 공간에서 결정적인 변이가 반복해서 발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서에서는 이러한 부흥기 혹은 <전후>의 사례에 더해, 중국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다룬다. 중국의 국가적 위기나 멸망체험은, 종종 바다 건너의 일본문화에도 중대한 변이를 일으켰다. 적잖이 기묘한 것은 자국의 리얼한 <전후>뿐만 아니라 이국의 사실상의 <전후>도 일본의 부흥문화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원격조작이 일어난 것도 역시 극동의 섬나라이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사가인 하야시야 타츠사부로(林屋辰三郞)도 야마자키와는 다른 각도에서 일본의 부흥문화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역사의 변혁기를 맞아 언제나 고대가 부활해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복고주의도 상고(尙古)사상도 현실로의 부정을 깊이 머금은 혁신의 일본적 표상으로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 연희ㆍ천력의 시기는 새롭게 장원을 기초로 하는 귀족정치를 열어가는 전환기였으며, 일본문화로의 자각과 함께 율령국가가 깊이 추념되어 續『万葉』(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편집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和歌모음집)의 의미를 담아 새롭게 『古今和歌集』이 만들어졌고, 『일본기』의 속편에 대해 『실록』이 편찬되는 등 노래와 이야기 모음집이 꽃피우며 새롭게 고전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고전부흥에 의한 고전의 창조였다. 고대, 중세의 변혁기에는 또 연희ㆍ천력을 고전적 세계로서 『新古今和歌集』이나 야마토 회화 등이 창조되었다. ...”

하야시야는 옛 것에서 혁신성을 끌어왔다고 하는 일본의 정치나 문화의 경향을 날카롭게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메이지 정부는 천황친정 및 행정단위로서의 쇼우(省: 정부의 행정관청)를 채용했는데, 이것은 고대의 율령국가의 리메이크였다.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메이지인의 의도는 거꾸로 말해 고대국가의 틀을 형식적으로 <부흥>하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은 어디까지나 왕정복고였지 시민혁명이 아니었음을 여기서 한번 더 언급해둘 가치가 있다. (나아가 서양의 르네상스가 이슬람을 경유하여 전승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정신을 부흥했던 경우에 비추어볼 때, 일본의 <고전부흥>은 어디까지나 자국에 잔존된 자산을 되살리는 것이었음에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복고=혁신의 사상은 일본사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사에서도 관찰된다. 우선 제3장에서 살펴볼 것과 같이, 중국은 이 사상의 선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야시아와 같이 복고=혁신을 일본의 사례에 한정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동아시아의 시간은 반드시 직진하지 않는다. <古>는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속에 잠재되어 신흥세력이 스스로의 주장을 합법화하고자 할 때 재이용된다. 이러한 <왔다 갔다>의 시간감각 속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와 문화는 서양과 같은 초월적인 신을 매개로 하지 않고, 자신들이 했던 것으로부터 정의의 보증을 부여받는다. 정통성의 원천으로서 <古>를 불러내는 것은 일신교적인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가장 실천적인 정치수단의 하나였다.

하여간 야마자키와 하야시야의 견해를 짚어가면서 우리들은 대략 두 종류의 부흥을 상기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이나 재난 후의 부흥이며, 또 하나는 고대의 문화, 예술, 정치 시스템의 부흥=르네상스이다. 본서는 어느 쪽인가 하면 전자에 무게를 두면서 후자의 문제를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이 양자의 견해는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양자 모두 문화의 재생의료로서 부흥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3. 사회의 만성적 부상

이제 부흥문화가 일본을 해명하는 하나의 열쇠를 갖는다고 하면, 오늘날의 일본사회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논의가 적용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예스>라고 답하겠다. 왜일까. 그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리고 있고, 그 둔한 탄력성이 풍부한 시스템을 묻어버려야 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에둘러 돌아가는 것이긴 한데, 이 점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두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냉전종결 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글로벌의 이권을 장악해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전면화는 소비의 사이클을 점점 가속화하여, 온갖 사물을 하나의 다발로 유통시키는 상품으로 변하는, 이른바 유체역학적(流體力學的) 상태를 불러들인다. 이에 따라 종래 인간을 보호해왔던 가치관에도 강한 타격이 가해지게 된다.

그것은 <사랑>과 같은 숭고한 가치관에도 예외가 아니다. 본래 서양의 <사랑>의 개념은 절대적인 유한성에 갇힌 인간을 정신적인 무한성/영속성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유약한 개체는 사랑의 작용에 의해 특별한 존재로서 이 세계와 이어진다... . 그렇지만 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지금에 와서는, 무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행위가 되어버렸고, 그 대신에 유한의 상품화된 <에로스>를 전전하는 것이 대대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한다. 아이덴티티와 존경의 기반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임기응변의 유체적(流體的)인 에로스 속에서 구해진다. 물론 에로스는 타자를 상품으로 바꾸어버리지만, 쉽게 이동되는 상품으로서의 에로스가 매개되기 때문에 사람은 다종다양한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한발 한발 내딛을 수가 있다. 에로스는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점에서 양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유한의 에로스의 전제(專制) 곁에서 사랑은 이제 기껏해야 에로스의 대해원에서 가끔 기적적으로 출현하는 암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한 무한의 사랑과 영원의 행복을 꿈꾸는 시대착오의 로맨틱은 현대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주인공이 그러한 것과 같이, 극한까지 포화된 어떤 에로스의 거품이 꺼져버린 후 온갖 인간적 감정이 증발된 백치적인 미래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이다... .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바람은 인간이라고 한다면 무언가로의 변모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다양한 욕망의 언약이 오늘날의 사회를 넘치도록 채우고 있지만, 에로스는 애초부터 크든 작든 반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에로스는 때로 가정—즉 재생산=생식의 장—을 위협하며(불륜이나 동성애) 많은 인간의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속악한 이미지를 사회에 흩뿌린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의 아이덴티티의 기반에 깊게 침투한 다종다양한 에로스의 에너지를 말소시키자는 것은 이제 인간의 존경을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에로스의 영역에 정치권력이 간섭하려 하고 그때마다 왕왕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들의 불안정한 개체를 안도시키고 승인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는 이미 여력이 남아있지 않으며, 만성적인 상처를 완치하지도 못한 채 우리들은 에로스라는 기호의 대해원을 헤매는 네델란드인처럼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 한편으로, 인간의 예측을 넘어서는 거대한 상실이 세계자유로서 단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어느 정도 인류사회의 문명화가 진행된다 해도, 아니, 문명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우발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상실이나 피해는 공포스러울 만치 심대하다는 것은 지금의 일본인에게 상식이 되었다. 이러한 크고 작은 여러 상처로부터 인간을 완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쁜 점은 이러한 유체적인 세계에서는 어떤 무엇이 굴욕감의 원인인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동이나 발언이 무언가의 박자에 맞추어 굴욕감을 부채질 하고, 그 굴욕의 이유는 자신밖에 (혹은 자신이라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리는 것은 어제 오늘의 희귀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영원의 사랑>을 꿈꾸는 것만도 불가능한 채, 죽음에 이를 때까지 크고 작은 여러 상처와 굴욕감을 이고 가는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들의 숙명적 상황이 아닐까?

 

4. <다시 일어서는> 철학

전쟁과 재해라는 거시적 상실이든 고도자본주의 사회의 미시적 상실이든 인간의 지를 초월하는 셀 수 없는 상처가 개인에게 축적되어갈 때, 그 당사자에게도 자각될 수 없는 비밀의 영역이 증가해간다. 그 상처=비밀이 일정한 양을 넘어서면, 그때까지 친밀했던 인간과도 소원해지며 서로 이해될 수도 없다. 실제로 타인에게는 어떻게 해도 전달될 수 없는 상처=비밀이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모티프는 작금의 서구에서도 두드러지는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뒤집어 말하면 누구라도 무언가의 상처나 굴욕감을 갖고 있다는 그 하나가 오늘날의 우리들의 거의 유일한 존재론적인 공통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짊어진 존재끼리 새로운 동료로서 서로를 발견하는 것도 충분히 일어날만한 일이다. 상처=비밀의 축적은 단지 기존의 인간관계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만은 아니다. 에로스가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처럼, 상처는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하면서도 미지의 커뮤니케이션을 생성한다. 상실이나 삽질은 확실히 몸을 쓰리도록 갈기갈기 찢는 체험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인간끼리의 새로운 결합과 공명의 가능성도 잠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상처는 연대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셀 수 없는 상처=비밀을 짊어진 현재의 문명에 있어서 그 상처들로부터 출발해서 무엇을 건설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상처 없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을 리 없고, 인간에게도 사회에게도 실수나 상실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가 문명론적인 과제로 상승된다. 그 때에 우리들은 상처를 미학적으로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실천적 철학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다시 일어서는> 철학의 단서는 일본의 부흥문화의 역사 속에 수두룩하다. 반복해서 말하면, 일본의 부흥기란 간단한 치료요법의 시간대가 아니며, 혹은 원래의 베이스라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검은 구름에 긴장하는 시간대도 아니다. 전례의 작은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대이다. 우리들의 선조는 폭풍이 지나간 후=흔적의 시공간을 다양한 사상의 모색이나 표현을 발휘하는 특별한 웅덩이로 변화시켜왔다. 이러한 웅덩이의 문화체험 그 자체를 하나의 가치로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들 자신의 생존의 지침으로 삼는 것, 그것이 본서가 겨냥하는 바이다.

물론 어느 시대가 부흥기인가 하는 것은 지난 후에 되돌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당연히 어렵다. 오히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따라서 온갖 <부흥>은 반신반의인 채 그대로이다. 우선 미시적으로도 거시적으로도 많은 상실로 넘쳐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무엇이 사건의 <後>인가, 그것이 아니면 <前> 혹은 <最中>인가 라는 것은 점점 판별하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2013년의 일본은 재액의 <후>인가 아니면 <전>일까?)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부흥>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해서 잃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는 힘(탄력성)을 문명에 파묻기 위한 역사기술이 제안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국민을 억지로 통합하고자 하는 공식적으로 평평한 역사적 서사뿐만 아니라 생기 넘치는 에너지의 생산지로서 전통이 높이 평가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문화란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며 세계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과제에 응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평가를 고쳐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쓸쓸함>(侘び寂び)이나 <무상관>(無常觀) 등의 손 때 묻은 일본적 미학을 염불처럼 반복해서는 이제 오늘날의 복잡하고 가혹한 세계에 대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의 세계의 상황을 되짚어가면서 일본이 오랜 세월동안 다듬은 부흥문화를 하나의 가치체계로서 부흥하고자 한다. 물론 이 시도가 잘 되었는가는 본서를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판단할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두고자 한다. 어떤 장부터 읽어도 상관없지만, 나로서는 제1장과 제2장, 제3장과 제4장, 제5장과 제6장이 각각 한데로 묶이면서 전체를 구성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는 처음 부분에서는 일본의 고대문학을, 다음 부분에서는 근세의 중국 및 일본을, 마지막 부분에서는 근현대 일본의 문학과 서브컬쳐를 주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두 장씩 한 단위로 읽으면 내용의 이해가 보다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어서 시작해보자.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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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라캉의 '일본론'--서구의 일본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도 읽힐 수 있는--을 바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분석한다. 일본인의 정신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가 18세기에 출현한 근대적 정신문화현상이라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역시 연구자는 동일한 논제를 다루더라도 자신만의 사유체계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는 "야마토타마시이"를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으로 풀이한 반면(『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이득재 역, 문화과학사, 2003 참조), 가라타니 고진은 그것을 그것의 허구성과 회귀성이라는 비평의 자리로 올려놓으며 다음의 문제의식을 예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글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2002년 이후 일본의 근대문학에 대한 비평을 그만두고 왜 [세계사의 구조], [제국의 구조]로 연구주제를 옮겨왔는지 그 고민의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원문은 http://www.kojinkaratani.com/jp/essay/post-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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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신분석 재고 (강연) 2008년 12월 7일

오늘 제가 <일본라캉협회>에 초대된 것은 예전에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에서 라캉을 언급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논문에서 저는 라캉이 일본에 대해, 특히 한자의 훈독 문제에 대해 말한 것을 인용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문제를 말할 것인데, 이에 앞서 약간의 경위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은 1991년에 쓴 것으로, 『가라타니 고진 전집 제4권』(이와나미 서점)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정신분석』(코단샤 학술문고)이라는 제목의 책과 다릅니다. 후자는 2002년에 쓴 것으로, 여기서 저는 앞서 쓴 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일본정신분석」을 쓸 당시에 저는 일본인론과 일본 문화론을 부정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그 안에 포섭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 후 저는 ‘일본론’에 대해 어떠한 글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기분으로는 저의 그 논문을 다시 읽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와카모리 요시키(若森栄樹, 1946~ 프랑스철학자, 라캉학회 이사) 씨를 비롯한 라캉파 사람들에게 저의 논문이 평가받아 강연을 의뢰받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재고’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재고라 해도 별도로 새로운 견해를 제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제가 이야기함으로써 여러분들이 다시금 고민할 기회를 갖는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 온 것입니다.

「일본정신분석」이라는 논문의 주제는 제가 1980년대 후반에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에 쓴 논점을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마루야마는 서양의 사상사를 기준으로 일본의 사상사를 고찰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본 사상사에는 다양한 개별 사상의 좌표축이 될 만한 원리도 없고 어떤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할 전통도 없으며, 모든 외래 사상이 수용되어 공간적으로 잡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원리적인 대결이 없기 때문에 발전도 축적도 없다(『일본의 사상』이와나미 신서 1961 년). 다시 말해,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법 없고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자신과의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로 저장되며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면 돌연 호출된다. 그리하여 일본은 어떤 무엇이라도 다 있다. 그는 그것을 ‘신도’라고 부릅니다. “‘신도’는 이른바 수직으로 휑하게 늘어진 물주머니처럼 당대의 유력한 종교와 ‘습합’하여 그 교의내용으로 채워왔다. 이 신도의 ‘무한포옹’과 사상적 잡거성은 앞서 언급한 일본의 사상적 ‘전통’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같은 책).

마루야마 마사오는 서양과 비교하여 일본을 고찰한 사람인데, 다른 한 사람, 중국과 비교하여 일본을 고찰한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 문학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 1910~1977)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 서양과의 접촉에서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은 그에 대한 반동적인 ‘저항’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그것이 없이 원활하게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는 일본에는 사상의 좌표축이 없다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의견과 같습니다. 즉, 원리적인 좌표축의 존재는 ‘발전’보다 오히려 ‘정체’를 이끌어 낸다. 일본의 ‘발전’의 비밀은 자기도 원리도 없는 것에 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시적인 침체를 수반하더라도 중국과 같은 ‘저항’을 통한 근대화가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편이 오히려 서양 가깝다고.

저는 그들의 주장에 별로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했을 때 확실히 그렇습니다. 근대 일본의 다양한 문제가 여기세 집약됩니다. 단지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아무래도 집단으로서의 일본인의 심리를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넓은 의미로 ‘정신분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루야마는 『일본의 사상』 이후 1972년에 「역사의식의 古層」이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사상』에서 지금 언급한 문제, 즉 신도라든가 사상의 좌표축이 없다든가 하는 것들을 고대로 역행해서 풀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그것을 『古史記』의 분석을 통해 수행했습니다. 그 때 그가 ‘古層’에서 찾아낸 것은 의식적인 조작ㆍ제작에 대해 자연적인 생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였습니다. 고층(古層)은 일종의 공동 의식입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의 古層’이라는 개념을 더 이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편, 당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의 일본문화론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모성사회 일본의 병리』라는 책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융 학파였기 때문에, 당연히 집합무의식 같은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다룹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양인의 경우는 의식의 중심에 자아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정합성을 갖는다. 그리고 자아는 심층[무의식]에 존재하는 자기와 연결된다. 이에 반해 일본인의 경우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도 확실하지 않고 의식의 구조도 오히려 무의식 내에 존재하는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중심을 가지는지의 여부도 의심스럽다”(『모성사회 일본의 병리』).

하지만 저는 이와 같은 집합적 무의식을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처럼 다루는 데에 의심을 품습니다. 어느 일본인 개인을 정신 분석할 수 있겠으나, ‘일본인의 정신분석’이란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자, 프로이트는 어떻습니까? 그는 집단심리학과 개인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매우 신중했습니다. 그는 개인 심리라는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 집단 심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개인 심리와 별개로 상정되는 집단 심리(귀스타브 르봉)를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집단적인 것이 어떻게 전해질까요? 이에 관해 프로이트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학설을 가지고 온다거나 인류의 과거 경험이 제식(祭式) 등을 통해 전승된다거나 하는 등의 여러 가지를 말하지만, 명확히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라캉은 이 문제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의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언어에서 생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집단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은 언어의 습득을 통해 집단적인 경험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즉, 언어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면, 집단 심리학과 개인 심리학의 관계라는 성가신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라캉은 사람들의 언어습득을 어떤 결정적인 도약으로서, 즉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때 언어가 집단적인 경험으로서 과거로부터 면면히 계승되는 것이라고 하면, 개인에게 집단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일본인 또는 일본 문화의 특성을 볼 때 그것을 의식 또는 관념의 수준이 아닌 언어적인 수준에서 봐야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물론 언어라고해도 다음에 주의해야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ㆍ일본 문화의 특징을 일본어의 문법적 성격에서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어는 주어가 없다, 그래서 일본인에게는 주체가 없다는 등과 같은. 그러나 그렇다면 같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주변 국가인 한국은 어떻습니까? 기이하게도 일본 문화를 언어로부터 고찰하는 어느 연구자도 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본 문화의 특성을 제대로 보려면, 서양이나 중국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한국과 비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메리카인ㆍ아메리카 문화의 특성에 대해 생각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메리카(합중국)를 유럽, 라틴아메리카 혹은 동양과 비교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캐나다와 비교해야 합니다. 즉, 아메리카 문화의 특성은 같은 영국의 옛 속국이며, 같은 이민 국가인 캐나다와 비교했을 때 보이기 시작합니다. 캐나다에서 이러한데, 미국은 왜 이럴까. 그러나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외라고 하면, 총에 의한 대량 사살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Bowling for Columbine입니다. 그는 캐나다는 미국보다 오히려 총 소지 비율이 높은데 총을 사용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폭력 사건을 통한 문화론이며, 게다가 정신분석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캐나다와 미국의 차이는 영국과의 관계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을 생각할 때, 서양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분명히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론은 일본을 서양이나 중국과 비교하여 고찰한 것입니다. 그래서는 틀에 박힌 인식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는 ‘일본정신분석’의 특질은 언어로부터 살펴보는 것, 한국과의 비교에서 살펴보는 것, 이 두 지점에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중국에 대한 관계의 차이에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자에 대한 태도의 차이입니다. 한국이나 베트남 등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모두 한자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전부 방기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어가 독립어라면 주변의 언어는 교착어이다) 한자의 사용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한자가 남아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자에서 유래한 두 종류의 표음적 문자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3종의 문자로 단어의 출처를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 기원의 단어는 한자 또는 카타카나로 표기됩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무시한다면, 문학은 물론 일본의 모든 제반 제도와 사고는 이해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제반 제도와 사고는 그러한 에크리튀르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에서는 어떤 외래 사상도 수용될 수 있지만 단지 그것들은 잡거하고 있을 뿐 내적인 핵심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것은 문자사용의 행태에서입니다. 한자나 카타카나로 수용되는 것은 결국 외래적인 것이며, 그래서 무엇을 받아들인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외래적인 관념은 어떤 것이든 먼저 일본어로 내면화되므로 거의 저항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기상 어차피 한자나 카타카나로 구별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내면화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에 대한 투쟁도 없으며 단순히 외래적인 것으로 정리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외래적인 것은 모두 저장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일본의 사상’의 문제는 문자의 문제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역사의식의 古層’이라고 하는 것 혹은 집합무의식과 같은 것은 보지 않다고 됩니다. 한자, 카나, 카타카나의 3종 에쿠리튀르가 병용되어 온 사실에 주목하면 됩니다. 이것들은 현재 일본에서도 존재하고 기능합니다. 일본적인 것을 고찰하는 데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기이하게도 제가 생각한 이것을 누구도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도 무엇인가를 하려면 누군가 이미 손대고 있는 선행 연구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라캉입니다. 사실상 저는 와카모리(若森) 씨가 번역한 라캉의 짧은 논문을 읽고 라캉이 일본의 문자, 특히 한자의 훈독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는 ‘에크리’의 일본어판 서문에서 ‘일본어와 같은 문자의 사용방식을 쓰는 사람은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독자는 이 서문을 읽는 즉시 나의 책을 덮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쓰인 책이다’ 라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라캉이 주목한 것은 일본에서 한자를 훈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연하게도 발화하는 인간을 위해서 음독은 훈독을 주석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로[음독과 훈독]를 연결시키는 펜치는, 그것들[음독과 훈독]이 구워낸 와플처럼 생생한 것을 보면, 실은 그것들이[음독과 훈독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일본을 제외하고] 어느 나라에도 국어에서 시나어[중국어]를 구사하는 행운을 갖지 못하고, 무엇보다도—더욱 강조해야 할 점인데—, 끊임없이 사고(思考)로부터, 즉 무의식으로부터 어휘(파롤)와의 거리를 감지 가능하게 할 정도로 미지의 국어에서 문자를 차용하지 않습니다. 정신 분석을 위해 가끔 국제적인 여러 언어 가운데 적당할 것 같은 언어를 꺼내 보일 때에 성가신 일탈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해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말하면, 일본어를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임을 막론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임이 일상다반사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1972년 1월 27일) (*번역자 덧붙임: 아는 만큼 번역했음. 오역이 있을 수 있음. 원문 참조 바람.)

사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본인은 한자를 받아들일 때, 그것을 자국의 음성으로 읽었다. 즉 훈독으로 읽은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음성을 한자를 쓰면서 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흔한 일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으로부터의 문자의 수용은 당연한 일이었고, 세계의 여러 문명의 중심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은 이를 경험했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단지 [외부로부터] 알파벳을 수용했다고 해서 바로 자신의 말을 적기 시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중심에서 온, 문명에서 온 텍스트를 번역하는 형태로 자국의 언어를 만들어내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단테가 라틴어로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이탈리아 지방의 한 방언으로 번역해서 썼습니다. 그 방언이 현재의 이탈리아어가 되었습니다. 즉, 단테가 번역을 통해 만든 말로 지금의 이탈리아 사람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메이지 일본의 언문일치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를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언문일치’의 경우 그 말하는 방식이 그럭저럭 타당하다고 하면 도쿄지방에서뿐입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언문일치의 문장이란 ‘언’(구어)과는 무관한 새로운 ‘문’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이러한 ‘문’으로 말하게 됩니다. 언문일치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제가 다다른 생각은 메이지에서 일어난 일이 이미 나라시대부터 헤이안시대에 걸쳐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헤이안시대에 지방 사람들이 교토의 궁정에서 이야기되는 말로 쓰인 「겐지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 읽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교토의 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방 사람들이 방언으로만 말하면 통하지가 않는데, 헤이안시대에 통할 리가 없었겠지요. 「겐지 이야기」와 같은 화문(和文)이 어디서나 통했던 것은 그것이 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한문의 번역을 통해 형성된 화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헤이안 시대의 여성작가, 시인)라는 여성은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던 사람으로 한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어를 의도적으로 괄호에 넣고 「겐지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인은 한자를 수용해서 훈독을 해서 일본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기이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탈리아 사람은 이탈리아어가 애초에 라틴어 번역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일본어의 에크리튀르가 한문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자이기 때문에 외래적입니다. 그러나 외부성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와 같이 한자를 외래어로서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한자가 남아있으면서 그 외부성이 소거된 것입니다. 이 점이 기이합니다.

저는 이 점에 주목합니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제도=문명이 전면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과거와 환관을 포함한 문관제도가 일찍부터 확립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중국의 제도=문명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거부합니다. 이 기이한 방식이 문자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라캉에서 배운 사고로부터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인은 이른바 ‘거세’가 불충분합니다. 상징계에 진입하면서도 상상계라고 할까요, 거울단계에 머물러있습니다. 이 견해는 일본의 문화ㆍ사상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마루야마 마사오 등이 다뤄 온 문제는 이러한 문자의 문제를 관통하는 ‘정신분석’을 통해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라캉이 일본인에게는 ‘정신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이유는 아마도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상형문자’로 파악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인데, 이는 음성언어화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에 있는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로는 이른바 ‘상형문자’가 그대로 의식에서도 드러난다. 거기에서는 ‘무의식에서 파롤까지의 거리를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에게는 ‘억압’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의식(상형문자)를 항상 노출시키고 있기—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일본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캉의 일본론을 읽고 제가 떠올린 것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겐지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잘 만들어내는 일이라 해도 그 속에 진실이 있어야 하며, 만들면서도 아와레(あはれ, 마음에 스미는 절절한 정취)를 이르는 말)로 마음을 움직이는 일. ......더욱이 헛소리를 하면서도 헛소리에 없는 것을 아는 일. ......이야기에 좋고 나쁜 것은, 유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시비와 같지 않으므로 그 정취를 말하는 것.”(* 번역자 덧붙임: 옛 일본어라 오역이 있을 수 있음. 원문 참조 바람.)(「겐지 이야기 구술의 작은 빗」) 즉, 이야기에서 ‘좋고 나쁨’은 유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시비’와는 다르다. 이야기는 만드는 일, 그런 것인데, 그러므로 표현되는 ‘사물의 아와레’야말로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라캉이 말한 것을 상기해주십시오. “일본어를 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거짓말쟁이임을 막론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임이 일상다반사로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이러한 견해ㆍ사고를 “야마타고코로”(大和心)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해도 똑같은 것입니다. 제가 ‘일본정신분석’이라고 했을 때 ‘일본정신’은 이와 같은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군국주의 혹은 체육계의 일본정신과 다른, 어떤 모양새(여성스러움)입니다. 실제로 야마토타마시이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겐지 이야기」에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물론 그것은 한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의 반대 개념이 카라고코로(漢意)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유교와 불교의 사고방식을 가리키지만,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 도덕적, 이론체계적 사고라고 해도 됩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자로 표현되는 개념을 가리킵니다. 군국주의적인 일본 정신은 물론 漢意입니다. 반면 노리나가(宣長)는 ‘사물의 아와레’라는 감정을 견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적ㆍ이론적이지 않더라도 인식론적이며, 도덕적이지 않더라도 깊은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야마토고코로(大和心)인 것이다, 라는 겁니다.

또한 노리나가(宣長)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면 죽어도 좋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비록 극락에 간다고 정해져도 죽는 것은 슬프다, 라는 것입니다. 신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신뿐만 아니라 나쁜 신도 있다, 나쁜 일을 해도 행복한 경우도 있으며, 선한 일을 해도 불운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신을 진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라고. 이것을 보면, “일본인은 항상 진실을 말하고 있다”라는 라캉의 말이 납득됩니다.

노리나가(宣長)의 언설은 유교를 비판한 노장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지만, 그는 정작 노장도 漢意도 비판합니다. 노장이 설파한 자연은 인공적인 유교 사상에 대해 인공적으로 사유된 자연에 불과하다, 라고. 야마토고코로(大和心)라고 하면 배외주의적으로 들리는데, 노리나가(宣長)는 일본의 신도 또한 漢意이라고 합니다. 신도라는 것은 불교와 유교에 대항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체계이다, 라고. 반면 노리나가(宣長)가 말하는 자연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것은 ‘~의 길’이며,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고학’(古學)입니다.

노리나가(宣長)는 자신의 학문을 ‘고학’이라고 부르며 한번도 ‘국학’(國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고의 길’(古の道)을 현세에 실현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취한 것은 오히려 온건한 점진적 개혁의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정토종의 문인이었으며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국학’을 만든 것은 노리나가(宣長) 사후에 등장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입니다. 그것은 이념으로 상정되는 고대사회를 지금 세상에 실현하려는 정치사상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 왕정복고 사상으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노리나가(宣長)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아츠타네(篤胤)와 같은 생각을 漢意로 비판할 것입니다.

노리나가(宣長)가 말한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라는 것은 작위성이나 억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는 꽤 괜찮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정신분석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일본인에게 실제로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인이라는 것도 밝혀질 수 없습니다. ‘고의 길’은 노리나가(宣長)가 일종의 분석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념으로 세우면 필연적으로 히라타 아츠타네가 말한 신도적 이념이 됩니다. 야마토타마시이(大和魂)는 이내 일본 정신이 됩니다. 즉, 야마토고코로(大和心)라는 것은 실제로 얻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얻고 유지하는 것에는 대단한 지성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노리나가(宣長)는 그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고학’입니다. 그러나 고학이라도 해도 『古事記』를 읽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 「겐지 이야기」를 읽을 것을 권장합니다. 이를 통해 漢意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정신분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정신 분석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라캉에 대해, 저는 야마토고코로(大和心)를 갖기 위해서는 역시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저는 2002년 ‘일본정신분석’을 쓴 이후 이러한 문자의 문제 혹은 일본의 문제, 문학의 문제에 대해 쓰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동안 계속 생각해 온 것은 ‘세계사의 구조’입니다. 그 중에 일본을 특별히 다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일본인으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다만 저는 그것을 일본의 문제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한 것은 이곳이 ‘일본라캉협회’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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