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적 전회란 무엇인가?

 

마음을 소거할 수 있을까?

 

‘신실재론’의 가브리엘은 현대의 자연주의적인 철학의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에 기초한 자연주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인 인지과학적인 ‘자연주의적 전회’를 다뤄보겠습니다.

 

우선 그 특징적인 경향을 알기 위해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캠퍼스 교수인 폴 처치랜드(Paul Churchland, 1942~)의 논문 「소거적 유물론과 명제적 태도」(1981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논문에서 그는 ‘소박심리학’이라고 불리는 심리에 대한 상식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신경과학 등의 인지과학적인 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처치랜드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소박심리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두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통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용이하게 그리고 수미일관되게 타자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설명이나 예측의 경우에 우리는 표준적으로 행위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욕구, 신념, 공포, 의도, 지각 등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설명은 법칙을—적어도 대략적인 법칙을—전제로 삼는다. (중략) 이 지식의 총합체를 그 본성과 기능을 고려한다면 ‘소박심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심리학이 ‘소박심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학문적으로 형성된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이 유년시절부터 길들여진 타인과 자신의 마음에 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처치랜드는 이 ‘소박심리학’에 대해 그 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자연지(自然誌)와 동물과학의 관점에서 호모 사피엔스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조성(組成), 발달, 행동능력에 관해 소립자물리학, 원자ㆍ분자이론, 진화론, 생물학, 생리학, 그리고 유물론적인 신경과학을 포함하는 정합적인 서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이제야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론적 총합을 파악했고, 그 일부는 이미 인간의 감각입력, 신경활동, 그리고 운동제어에 관한 면밀한 기술과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처치랜드가 이 논문을 썼을 때에 신경과학은 아직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고 또 희망적 예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뇌과학과 인공지능연구 등의 발달에 의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지과학—뇌과학에서 마음의 철학으로』(1995년)에서 처치랜드는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뇌는 어떻게 작동되는 것일까? 어떻게 뇌는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꿈을 꾸는 자아를 유지하고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의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신경과학 혹은 최근의 인공 뉴럴 네트워크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성과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일군의 통일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중략)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무엇보다도 지금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추상과 오랜 세월의 비밀에 관한 새로운 설명의 가능성을 목전에 두고 내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다만 이것은 나 한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 몇몇 학술분야는 고양되는 분위기로 넘쳐난다.

 

이와 같이 처치랜드에 따르면, 신경과학과 정보과학, 인공지능연구 등의 학술적인 인지과학의 융성에 의해 지금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마음’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확장된 ‘마음’

 

처치랜드의 ‘인지과학론적 전회’와 협력하면서 새로운 길로 향해가는 이가 있었으니 에딘버러대학 교수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입니다. 클라크는 1998년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의식하는 마음』의 저자)와 공저로 논문 「확장한 마음」을 발표하고, 마음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합니다.

 

인간은 외적인 존재와 두 방식의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통일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 시스템은 독자의 인지 시스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의 성분들은 능동적인 인과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통상의 인지와 동일한 종류의 방식과 연동되어 행동을 지배한다. 만약 외적인 성분이 제거된다면 뇌의 일부를 제거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행동적인 능력이 저하될 것이다. 우리의 테제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렇게 연결되고 통일된 과정은 인지과정과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클라크와 처치랜드가 주창하는 것은 ‘마음’을 머릿속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신체와 그 주변 환경과의 상호연관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논문의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확장된 마음’이라는 테제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그들은 능동적 외재주의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존재방식이나 움직임을 머릿속에 가두는 ‘내재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나 주변 환경과 연결짓고 움직이는 ‘외재주의’인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마음’을 외부로 확장시킨다는 것이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계산할 때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자릿수 덧셈이나 뺄셈이라면 머릿속에서 처리할 수 있지만, 세 자릿수나 네 자릿수가 되면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계산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쓴다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운동해야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이 점을 확인해두고 앞서 인용한 문장을 읽으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클라크는 1997년에 『나타나는 존재』를 출간합니다. 원제는 ‘Being There’인데, 이 말은 하이데거가 1927년에 출간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표현으로 제시한 독일어(Dasein ‘현존재’)의 영역(英譯)입니다.

 

그러므로 클라크의 책은 바로 인간의 존재방식(현존재)을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뇌와 신체의 세계’를 연결짓는 시스템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고의 의의를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뇌는 신체화된 활동의 컨트롤타워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 이상의 성과는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금의 시점의 전환은 마음의 과학을 구성해가는 데에 큰 영향을 준다. 실은 이를 통해 지적행동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 이후 일반화된) 마음의 영역과 신체의 영역의 구별. 지각/인지/행위를 정연하게 분할하는 선. 고차원적인 차원의 추론을 작동시키는 뇌의 집행중추.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와 신체화된 행위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연구방법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새로운 마음의 과학이다.

 

이러한 클라크의 논의는 인간이나 환경,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즉 그가 제기한 사고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도덕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다

 

철학의 ‘자연주의적 전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향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의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 대해서는 3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여기서 잠깐 그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면 철학은 드디어 심리학이나 뇌과학과 밀접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학ㆍ대학원 시절 그는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 인도출신의 경제학자)과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라는 저명한 철학자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그 후 그는 심리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뇌과학의 방법을 습득하여 뇌가 어떻게 ‘마음’이 되는가를 해명하게 됩니다.

 

그린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른바 ‘광차문제(trolley problem)’라고 하는 두 선택지에 관한 사례에 대해 MRI를 사용한 뇌화상법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다섯 명을 살릴 것인가, 한 명을 살릴 것인가라는 같은 문제인데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광차문제’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그린은 뇌화상법을 통해 뇌가 움직이는 장소가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린의 연구가 획기적인 것은 선함과 악함이라는 도덕적인 판단이 뇌의 어떤 구조나 움직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논증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논한 도덕문제가 뇌과학에 의해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고에 대해 철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쏟아냅니다. 그린이 출간한 『모랄 트라이브즈(Moral Tribes)』(2013년)에 대해 뉴욕대학 교수인 토마스 내겔(Thomas Nagel)이 서평을 썼는데, 그 제목이 「당신은 뇌스캔으로는 도덕에 대해 배울 수 없다—도덕심리학의 문제」로 매우 도전적입니다. 내겔은 그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린은 우리를 도덕심리학이 도덕철학보다 근본적이라고 설득하고자 한다. (중략) 그린은 어떤 낡은 문제와 격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의 심리학적 접근방법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린의 연구가 도덕철학에 준 충격은 상상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를 계기로 ‘뇌신경윤리학(neuroethics)’이라는 학문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호주의 철학자인 닐 레비(Neil Levi)가 2007년에 출간한 『뇌신경윤리학—21세기에의 도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린의 연구 이후 도덕을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는 연구가 명확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연구 분야로 확장된 것도 확인해두어야겠습니다. 『모랄 트라이브즈』에서도 언급됐지만, 그린의 연구는 노벨상 경제학자인 다니엘 카네만의 ‘행동경제학’과도 연결됩니다. 뇌화상법을 통해 인간의 경제행동이 어디까지 설명 가능한 것일까요? 이러한 ‘신경경제학’은 ‘신경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확장은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심적인 움직임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직 그 맹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와 협동하여 크게 비약하지 않을까요?

 

 

20세기 이후의 철학의 동향

 

 

岡本裕一朗、2016年、「自然主義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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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탈종교화’의 과정이었다

 

 

약 100년 전 독일의 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서양근대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세계의 탈주술화’라는 표현으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근대가 되면 서양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독립한 세속적인 국가가 형성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사회적으로 침투해갑니다. 또 계몽정신에 기초하여 종교적인 편견이 탈각되고 근대과학이 발전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종교의 힘은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여 20세기에는 서양근대를 ‘세속화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Ludwig Berger, 1929~)는 ‘세속화’라는 개념을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나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현대사회를 이러한 세속화의 시대로 보았습니다. 확실히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이러한 세속화 상황이 세계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유럽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낮은 반면 반대로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미국에서는 주류파 프로테스탄트는 감소하고 있지만 원리주의적인 복음파 신도는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이러한 상황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합니다.

 

21세기 초두에 나타난 종교의 회귀현상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사회통념〔세속화 이론〕을 깨고 있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했습니다. 근대세계(글로벌 금융자본)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근대건축을 궁극에까지 구현했던 세계무역센타 건물에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테러리스트들이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 직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부주의하게도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대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를 내세웠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이슬람교 신자에 의한 대규모적인 테러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오히려 ‘포스트세속화의 시대’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종교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는 기존의 세속화 이론은 유럽의 기독교에 대해서 타당하다 할지라도, 세계전체를 생각하면 종교로의 회귀현상이 현저해지고 있습니다. 베버가 근대를 규정할 때에 ‘세계의 탈주술화’를 제창했다고 한다면, 현대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재주술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의 ‘탈주술화’인가 아니면 ‘재주술화’인가—현대사회는 바로 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현대사회의 어려움은 이 양자가 명확하게 분할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에 담긴 문제를 생각하고 미래를 전망해보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종교를 생각하다

 

1985년 독일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근대(모던)의 의의를 재검토하며 『근대의 철학적 딜레마』를 출간합니다. 그 책의 서두에서 그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개념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막스 베버에게는 그가 서양적 합리주의라고 이름붙인 것과 근대 사이에 어떤 내재적 관계, 즉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는 여전히 자명한 것이었다. 그가 <합리적>이라는 개념 하에서 기술한 것은 유럽에서 종교적 세계상이 붕괴하고 그 강력한 세속문화가 발생하는 탈주술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의 경험과학들, 자율을 획득한 예술, 또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 및 법의 이론들과 함께 이 문화적 가치영역들이 형성되어 왔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서양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지금까지도 미완성이므로 ‘커뮤니케이션적인 합리성(이성)’의 관점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버마스는 ‘근대’파 철학자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철학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하버마스 철학이 크게 방향전환을 합니다. 지금까지 근대적인 세속화론자라고 간주되었던 그가 놀랍게도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왜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꾀한 것일까요?

 

아마도 그 원인 중 하나는 20세기 말에 생명과학이나 뇌과학 등이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며 인간의 인격이나 정신의 이해를 오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일 것입니다.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며 그 인격과 정신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주의’적 이해를 하버마스는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가 기독교와 만나게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포스트세속화론적 전회’라 부르겠습니다.

 

2004년에 하버마스는 기독교 신학자인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대화를 시도하고, 그 이듬해에 공저로 책을 출간합니다. 라칭거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로마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지냈기 때문에 이 대화는 매우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기독교도와 근대와의 만남). 그 책에서 하버마스는 클라우스 에더(Klaus Eder, 1946~, 독일의 사회학자)의 ‘포스트세속화의 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점차 세속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종교가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전개하며 앞으로도 당분간 사회가 종교적 공동체의 존속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라는 표현은 종교적 공동체가 자신이 원하는 동기와 태도의 재생산을 행하는 기능에 공적인 감사를 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의 사회에서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시민들이 신앙을 가진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접촉하는 그 교류의 방식에서 중요한 규범적인 사고가 공공의 의식에도 반영되고 있다. (중략) 종교 측에서도, 세속 측에서도, 이 양자가 사회의 세속화를 상호보완적인 학습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공공의 장에서 논쟁되는 다양한 테마에 대해 상대로부터의 기여를 인식상의 이유에서 서로 진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속화의 변증법’의 결과로서 하버마스는 현대를 ‘포스트세속화 사회’로 다루고 이성과 종교와의 화해를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이전의 하버마스 철학으로 말한다면, 참으로 보수적인 해결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의 이 전회를 어떻게 평가한다 해도 ‘세속화—포스트세속화’ 문제가 현대의 긴급한 테마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종교적 전회로

 

하버마스는 현대사회를 이해할 때에 ‘포스트세속화’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근대적인 세속주의가 간과한 문제를 경고합니다. 그러나 본래 세속화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일까요? 세속화를 다르게 이해하게 되면 ‘포스트세속화’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겠죠. 그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캐나다의 철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1931~)가 2007년에 출간한 대작 『세속의 시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테일러에 대해 말하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리버럴리즘 논쟁 시 코뮤니타리얼리즘(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리버럴리즘ㆍ리버타리아니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그 후 90년대에 이르러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대표적 논자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해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어 테일러는 ‘종교적 전회’를 꾀합니다. 본래 가톨릭 신자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종교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시대 상황이 테일러에게 ‘종교적 전회’를 재촉한 것이 아닐까요?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성’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와 종교 간의 분리, 즉 정치와 종교 간의 분리입니다. 이에 따라 종교는 ‘사사화(私事化)’됩니다. 또 하나는 신앙의 쇠퇴, 즉 사적 영역으로 종교가 쇠퇴해갑니다. 그에 대해 테일러가 착목한 ‘세속성’은 제3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신앙의 조건의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 제3의 의미의 ‘세속성’과 관련하여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 제3의 의미에서의 세속적인 사회로 검토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내가 그 특징을 명확하게 하고 검토하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회로부터, 단호하게 신앙을 갖는 신자에게도 단순한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게 된 사회로의 변화이다. (중략)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환경에 따라 신앙을 이어가는 것이 곤란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성’의 변화를 생각하기 위해 테일러는 서양근대의 500년을 대상으로 분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기 1500년 무렵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에 비해 2000년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하기조차 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테일러가 이 질문을 제기할 때에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현주의 혹은 표현혁명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상황입니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 표현의 방식’을 원리로 삼고 있으며, 패션으로 대표되는 소비중심사회와도 연결됩니다. 이 입장에서 말하면, 신앙은 자신의 본래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테일러가 현대의 ‘세속성’을 설명할 때에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표현주의의 입장에서는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내면과 연결된 종교는 삶의 방식의 하나의 선택지로서 새롭게 모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대사회에서 ‘신종교’가 적극적으로 추구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오늘날의 종교의 모습들』(2002년)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방향을 따라가면 비기독교적인 종교, 특히 동양에 기원을 두는 종교의 부흥이 있으며, 뉴에이지형의 다양한 활동양태 그리고 인간주의적 환경과 영적인 것 간의 경계를 가교하고자 하는 견해들, 혹은 영적인 치료와도 연결되는 실천 등의 폭발적인 증대가 있다. 나아가 점차 많은 사람들이 예전이라면 채용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간주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자인하면서 그 교의의 중핵적인 많은 부분들을 거부한다. 혹은 기독교와 불교를 조합한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의 유무를 확신하지 못한 채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보면 ‘세속의 시대’라고 해도 테일러가 단순히 종교의 쇠퇴설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간파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테일러의 ‘세속화’ 논의는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서양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속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세계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돌출적인 행동을 주시하면 서양에 한정된 논의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속화론에서 탈세속화론으로

 

글로벌한 시점에서 세속화와 ‘포스트세속화’의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피터 버거의 논의를 검토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세계를 이해할 때에 버거 자신이 세속화론으로부터 탈세속화론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거는 왜 그랬을까요?

 

우선 1967년에 발표한 『성스러운 덮개—신성세계의 사회학』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속화를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와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베버와 마찬가지로 서양근대를 세속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버거는 그 세속화론을 후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세속화’론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이후의 저작과 관련되는데, 그 개념의 열쇠를 생각하면 실제로 계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생각은 단순하지 않다. 즉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마음에서 종교의 쇠퇴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20세기 말이 되면 버거는 이러한 ‘세속화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1999년에 논집 『세계의 탈세속화—부활하는 종교와 세계정치』를 편집하는데, 그 책의 권두논문에서 이전의 ‘세속화론’이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버거는 미국이나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전체의 글로벌한 시점에서 보면 종교적 원리주의와 같은 탈세속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논점은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예외가 있다 해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광폭하리만치 종교적이다. 이것은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세속화론’이라고 딱지 붙인 연구 문헌의 상당 부분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초기 저작은 그러한 연구들에 기여한 바가 있다.

 

버거는 세속화를 생각할 때에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의 두 차원을 구별하는데, 이 두 차원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조직이 쇠퇴한다 해도 개인의 신앙은 여전히 강한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로 개개인이 종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해도 종교적인 조직이 사회적ㆍ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간 ‘종교와 근대 간의 관계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세계를 살펴볼 때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모든 주류파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쇠퇴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복음주의는 융성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 가톨릭은 비서양지역에서 열광적인 신자들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정교회가 부활했고 민중들 틈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유대교, 힌두교, 불교 등도 소멸하기는커녕 더욱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운동이겠지요.

 

확실히 유럽에 한정해서 말하면 세속화가 진행되어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속화는커녕 오히려 탈세속화의 거센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세계는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岡本裕一朗、2016年、「近代は「脱宗教化」の過程だった」『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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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2016년 9월에 출간된 『지금 세계의 철학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몇몇 부분들을 번역해올리겠다. 대중서인지라 내용이 그렇게 깊지는 않지만지금 학문의 세계에서 주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논점들을 잘 정리해놓은 것 같다. 다음의 이 글은 '실재론'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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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전회란 무엇인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란?

 

21세기에 이르러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활동이 바로 ‘실재론적 전회’라고도 불리는 조류입니다. 그런데 이 조류는 젊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번역서도 많지 않고 또 전체상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소개의 의미로서 그 성립과정을 다루고자 합니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이탈리아의 철학자)의 『신실재론입문』(2015년)에 따르면, ‘실재론적 전회’가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대한 시론』(2006년)입니다. ‘이 책이 출판되고 2년 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운동, 즉 사변적실재론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주요 멤버는 메이야수 자신과 3인의 사상가들(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1968~, 미국의 철학자), 이안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영국의 철학자),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1965~, 영국의 철학자))입니다. 그들의 논의에 대해서는 2011년의 논문집인 『사변적 전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과는 별도로 페라리스 자신과 독일의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에 의해 전개되는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운동도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년)에 따르면, “신실재론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를 말해주는 철학적 입장을 기술한다”고 합니다. 페라리스는 이를 수용하여 2012년에 『신실재론 선언』을 저술하고 그 입장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페라리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던적인 사상가인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 1936~)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바티모의 철학은 ‘약한 사고’로 표현되는데, 그 모든 것은 해석이라는 니체의 사상과 가다모의 해석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라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바티모 밑에서 배울 때에도 “나(페라리스)의 입장은 언제나 실재론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브리엘과 함께 ‘신실재론’을 선언한 것도, 입장의 선회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변적실재론’이든 ‘신실재론’이든 현재 구태여 ‘실재로의 전회’를 의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목할만한 것은 실재론적 전회를 주창하는 사상가들이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그들 모두가 ‘포스트모던 이후’를 분명하게 표명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말에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해 그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역사적으로 보다 넓은 시야에서 다시금 다룬다는 것입니다.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정점을 찍었던 언어론적 전회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페라리스는 이에 대해 ‘푸칸트(푸코+칸트)’라는 농담 섞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아가 이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페라리스는 ‘데칸트(데카르트+칸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푸칸트’라는 말도 ‘데칸트’라는 말도 존재는 사고에 의해 구축된다고 하는 ‘구축주의’를 희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축주의가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던 사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할 즈음에는 포스트모던의 유행도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적 전회는 그것을 사상적으로 매장하고자 했습니다. 그 의미에서 페라리스가 말한 것처럼 현대의 실재론적 조류를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실재론적 전회라고 해도 하나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논자에 따라 내용이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논의를 각각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는 사변적 전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서 젊은 ‘스타’인 메이야수와 가브리엘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소멸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세기 후반(70년대 이후),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이 미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 그러한 거장들도 사라지고 사상적 카리스마가 부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상적 히어로로서 등장한 이가 퀑탱 메이야수입니다. 현재 파리제1대학에 준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1967년생으로 아직 젊을 뿐만 아니라 30대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2006년에 출간된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는 ‘사변적실재론’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이 책에 대해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은 상찬의 말을 서문에 싣습니다.

 

지금까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를 사고해왔던 철학의 역사 속에서 퀑탱 메이야수가 새 장을 열어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중략) 주목해야 하는 이 ‘비판철학의 비판’은 이 책에서 어떤 과잉의 수사도 달지 않고 각별히 명석하고 논증적인 문체로 본질을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바디우의 추천사 때문인지 메이야수는 일약 현대사상계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의 기본적인 시좌(視座)는 칸트 이후 근대철학의 중심개념이 ‘상관(相關)’에 있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상관’이라는 말로 불러들이는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사고와 존재의 상관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한쪽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렇게 이해되는 상관을 넘어서기 불가능한 성격을 인정한다는 사고의 모든 경향을 상관주의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소박한 실재론을 바라지 않는 모든 철학은 상관주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이러한 ‘상관주의’는 20세기의 현상학이든 분석철학이든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언어론적 전회와 포스트모던 사상도 예외가 아닙니다. 메이야수는 이러한 상관주의를 넘어서서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향해갑니다. 그 의미에서 실재론을 목적지로 삼는 것이지만, 앞서의 ‘소박한 실재론’과는 구별됩니다. 오히려 그가 ‘실재’로 생각하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에 의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입장을 메이야수는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되묻습니다.

 

칸트 이후 (중략) 대체 왜 철학은 초월론적 혹은 현상학적인 관념론과는 반대의 길을, 즉 수학이 가진 비-상관적인 영역을—바꿔 말하면 사고를 탈중심화하는 힘으로서 정당하게 이해되는 과학적 사실 그 자체를—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일까? 철학은 왜 과학을 사고하기 위해 사변적 유물론으로 단호하게 향해가지 않고—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앞서 서술한 것처럼 초월론적 관념론에 주력하게 된 것일까?

 

인간의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사고하기 위해서 메이야수는 인류의 출현 이전의 ‘선조이전성’을 문제로 삼거나 혹은 인류의 소멸 이후의 ‘가능한 사건’을 상정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으로부터 분리 가능한 세계’로서 과학적으로는 충분히 고찰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상관주의’는 그러한 이해를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인식론적 전회)도,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회도, 포스트모던 사상도 상관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메이야수의 철학은 이제 겨우 기본적인 시점(視點)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전개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의 논의를 기대해봐야겠습니다.

 

 

‘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마치 메이야수의 ‘사변적실재론(유물론)’에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회’가 제창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1980년생이며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현재 본 대학의 교수로서 발표한 저서만도 이미 수십 권에 이르며 종종 ‘천재’라고 평해지고 있습니다.

 

2013년에 출간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철학서로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가브리엘의 재능을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전문서라기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저작인데, 그의 ‘신실재론’의 구상이 매우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축주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축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를 그 자체로 알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해도 그것은 어떤 점에서 항상 인간에 의해 가공된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의 안경’(메이야수의 전회(turn) 부분에서 전술)의 예를 끌어온 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축주의는 칸트의 ‘녹색의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가 몸에 길들이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만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등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구축주의’에 대해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제창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어떤 사상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가브리엘이 제창한 구체적인 예를 다뤄보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말합니다.

 

아스트리드(Astrid)가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는 것에 비해 우리(너와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낡은 실재론(이것을 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스 산뿐입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떤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하게 보일 뿐입니다. ‘구축주의’의 입장에서는 세 개의 대상, 즉 ‘아스트리드의 베수비오스 산’ ‘너의 베수비오스 산’ ‘나의 베수비오스 산’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대상과 물(物) 그 자체가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가브리엘이 주창한 ‘신실재론’은 적어도 네 개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베수비오스 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너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것들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비밀스런 감각조차도 사실’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한쪽의 낡은 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만을, 다른 한쪽의 구축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그에 대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뿐일지라도 보는 사람의 세계만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와 같이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상상 속 동물과 같은 ‘공상’조차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실재론’의 일반적인 메이야수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이렇게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시킴으로써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2015년에 출간된 『나(자아)는 뇌가 아니다—21세기를 위한 정신과학』이라는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로 환원하는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러한 ‘자연주의’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인 물(物)이나 그 과정뿐이며, 그 이외에는 독자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그것을 원리적인 차원해서 재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재론이라고 할 때, 어쩌면 과학적인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자연주의’가 상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그러한 과학적인 우주뿐만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도 긍정합니다.

 

 

 

岡本裕一朗、2016年、「実在論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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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상의 출처를 밝히는 것, 그것은 이론에 관한 지식이 결코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지식과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실천적으로 해명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생성의 인류학'―차이를 통한 타자로의 열림―이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것은 그것이 시대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글은 그것을 잘 서술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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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의 변덕스런 혼』 일본어판 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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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Eduardo Viveiros de Castro, “O mármore e a murta: sobre a inconstância da alma selvagan”(2002 In A inconstância da alma selvagem. São Paulo: Cosac Naify, pp. 183-264)의 번역본이다. 이 책의 초안이 된 논문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맨 처음 버전은 1992년에 발표된 포르투갈어 논문이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1993년 불어판이 나왔고, 2011년에 영어판이 나왔다. 이 영어판은 1992년의 포르투갈어판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2010년 수정한 미발간 포르투갈어 원고에 기초한다. 1992년의 포루투칼어 논문집에 수록된 다른 논문들도 향후 수세이샤(水声社)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의 번역과정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당초 번역자들은 새롭게 재작성된 영어판에 기초하여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콘도 히로시(近藤宏), 후반부는 사토미 류주(里見龍樹)가 담당했다.) 그런데 진행 중에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재작성한 원고에서 각주 등이 대폭 생략된 영어판을 번역의 원본으로 삼는 것은 저자의 희망을 따르지 않는 부적절한 조치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자들은 일단 작성한 번역문을 2002년의 포르투갈어판과 대조하여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이 작업은 주로 콘도 히로시가 맡아 진행했다). 이때 포르투갈어판과 영어판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전자에 따르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상이한 부분, 특히 영어판에 더 추가된 포르투갈어판의 부분은 〔 〕표시를 해두는 방침을 세웠다. 포르투갈어판의 각주를 모두 담아내어 영어판보다 더 원저에 충실하고자 했다. 다만 이 책에서 혹시 있을 부정확한 번역어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영어판 제목에서 따왔다. 이 책의 초안이 된 포르투갈어판의 제목은 “대리석과 은매화—야생의 혼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인데,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제목이 책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의 제목을 달게 되었다. 다만 제목이 길지 않도록 영어판의 부제는 생략했다. 나아가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름을 포함하여 인명 표기는 기본적으로 기존 관례에 따랐고 또 책 전반의 일관성에 유의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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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그는 1951년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고, 폰띠피시아 카톨릭 대학 리오데자네이루 사회과학부에서 사회학을 배운 후 1974년 브라질국립박물관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1974년 야와라피티(Yawalapíti)에서 조사를 시작하여 1977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부터 파라주에 있는 투피계 인디오인 아라우에테에 대한 조사를 행했다. 이 조사를 기초로 1984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간행된 박사논문 『아라우에테—식인의 신들』(1986년) 외에 1990년대에는 「아마존의 트라비타형의 측면들」(1993년)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메리카니스트로서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아가 「우주론적 직시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1996; 1998)이라는 논문을 계기로 지역을 불문하고 인류학 분야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새로운 이론적 동향을 이끌고 있다. 이제까지 일본에 번역 출간된 그의 논문ㆍ저작은 다음과 같다.

2011년 「강도적 출자와 악마적 결연」 『현대사상』

2013년 「구조주의와 생성변화」 『사상』

2013년 「내재와 공포」 『현대사상』

2015년 『식인의 형이상학』

2016년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 『현대사상』

이중 2013년 『사상』지에 실린 논문에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자신의 지적인 영향 관계 등이 담긴 인터뷰에 기초한 역자 해제가 덧붙여져 있다. 또 이 논문을 포함한 『식인의 형이상학』에는 ‘다자연주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들뢰즈 철학과의 관계 등 최근 인류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논의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이 책은 세계적인 인류학자로서 입지를 다진 저자가 그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책이다. 2002년의 저작집 전체 제목에 이 책의 초안인 논문의 부제가 쓰인 것을 보아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자신에게도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생성론적 인류학을 확립했고 지금까지 그 개념적 논의를 전개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근접해가는 브라질 출신의 민족지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해두어야겠다. 그가 현지조사를 시작한 1970년대에 아라우에테와 그 종족이 속한 투피-구아라니계의 사회들은, 인류학의 영역에서 마이너한 아마존 지역 선주민 사회들 속에서도 그 복합적인 사회조직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메이저한 제어족(Gê語族)과도 다른 연구대상이었다. 인류학에서 극히 마이너한 집단 특유의 사회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논의는 그 출발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점차 확장해갔다. 이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속에서 아라우에테와 투피-구아라니 연구는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하면서도 인류학 및 정치학의 사상사적 질문을 포섭한다. 이와 동시에 이 책은 기이하게도 같은 시기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와 존재의 원리로서 제기한 ‘타자로의 열림’을 처음으로 고찰한 저작이기도 한다. 이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레비-스트로스의 『살쾡이 이야기』(1991년)와 ‘타자로의 열림’에 관한 논의를 긍정적으로 참조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 논의야말로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살쾡이 이야기』는 아마존 사회들의 사회성을 개념화하기 위한 중요한 착상의 원천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류학적 사고의 출발점을 밝히는 초기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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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논의는 1992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1992년은 브라질 리오에서 지구서밋(서방선진국 정상회담)이 개최된 해이며, 또 신대륙 ‘발견’으로부터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이다. 식민지 개척에 의한 대륙 발견을 축하함과 동시에 구대륙과 신대륙의 만남을 새롭게 조명한 이 해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그러한 만남을 다시금 문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 논문이 다룬 주제는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인디오 혼의 ‘변덕스러움’이다. 그러나 유럽인과 선주민의 만남을 다시금 되묻는 주제로서 이 논의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등장하는 질베르토 프레이레(Gilberto Freyre)는 브라질의 국민 형성을 논한 저서—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비판적으로 언급한 저작이기도 하다—에서 이 책의 자료와 동일한 사료를 가지고 선주민 여성이 성과 생식에 의해 (피)식민자로 통합되는 과정을 브라질 국민형성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논증한다(Freyre 2005). 존 헤밍은 16세기 브라질 아마존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유럽인의 도래 이후 점차 선주민을 휘감은 전쟁의 격화를 다룬다(헤밍 2010). 몬티이루는 16세기 중반 이후 인디오 지배를 확립한 두 가지 대응, 즉 멘데사의 투피족과의 전쟁과 예수회 신부의 교화촌 건설에 주목한다(Monteiro 1999).

이처럼 남미의 동해안에서 유럽인과 선주민의 만남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손에 남겨진 영역에 추가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 책 23쪽)고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선택한 ‘변덕스러움’이라는 논점은 이제까지의 질문들을 되묻는 것이라는 저자 자신의 판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입장을 단서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사고의 기저를 이루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을 마주할 때 사고해야 하는 것’에 접근하면서 이 책의 의의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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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책의 최초 판본이 레비-스트로스의 『살쾡이 이야기』(1991년)에 동시대적으로 응답한 것이라는 점이다. 『살쾡이 이야기』는 이 책과 유사한 관점에서 쓰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점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1991년에 간행된 레비-스트로스 신화론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저작인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북아메리카 북서 해안부의 안개 신화와 바람 신화 등의 신화군이 분석되는데, 책 전반에서 이 지역의 신화군에 차용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민요가 언급된다. 이야기의 차원이 아니라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만남이라는 유사한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이 만남의 주제화는 서론의 다음 구절—이 책에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참조한 구절이기도 하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을, 그 철학적ㆍ윤리적 원천까지 파헤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이원론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백인이 [인디오와] 정반대의 자질로 인해 인디오와 맞부딪혔다고 하지만 백인과의 최초 접촉에서 인디오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타자에게 열려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의 사건을, 즉 신세계—발견이라기보다—침략을, 그 사람들과 그 가치의 파괴라고 나는 부르고자 하는데, [인디오와 백인의 만남을] 축복으로 삼을 때에 이것[타자로의 열림]이 상기되는 것은 회한이며 기도이기도 하다. (레비-스트로스 2008: 1270)

‘타자로의 열림’의 순간에 펼쳐지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가 진행되었는데(山口 2011; 渡辺 2009 등),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자신이 ‘이항성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 것을 찾아내고 또 확인한다. 이 이항성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은 영속적인 시소 게임 속에서 잡히지 않는 균형 위에 수립된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쌍생아와 연결된다. 쌍생아는 […] 듀메질(Georges Dumézil)이 고찰한 인도유럽 문명의 사고와 같은 동일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신화론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차이를 상징한다. […] 불균형한 두 극의 부단한 운동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은 우주를 뒤흔들며 그 균형을 확보한다. (Mauzé 2008: 1875)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레비-스트로스의 발견에 전면적으로 의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최초 저작인 아라우에테 민족지는 그 집단만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그 외 투피-구아라니계의 민족들과의 비교 속에서 기술된다. 그 목적은 ‘투피-구아라니의 우주론의 포괄적 모델의 구축’(Viveiros de Castro 1992:ⅹⅴ)이다. 동일성을 원리로 삼지 않고 우주론적으로 포섭된 사회의 양상을 기술하는 속에서 투피남바 족에 관한 민족지적 보고도 등장한다. 양자(『살쾡이 이야기』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문)는 각각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면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공통의 사고로 근접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와 이 책 사이에는 확실히 공통의 저류가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인디오혼의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를 특징짓는 ‘타자로의 열림’을 묘사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증 절차는 매우 번잡스럽다.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철학을 논하기 위해 선교사의 눈에 비친 인디오의 모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대응과 대조된다. 레비-스트로스는 투피남바 족을 논할 때에도 새로운 인물이 탄생됨에 따라 차이가 더욱 확대되도록 이야기가 전개되는, 백인 신(神)인 마이루가 등장하는 신화 텍스트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타자로의 열림을 표상하는 인물, 즉 신대륙에서의 쌍생아의 형상—동일하면서도 불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간다.

이와 비교하면 ‘변덕스러움’을 가이드로 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방식은 기억하는 자가 보다 전경(前景)에 나타난다. 분개하는 비에이라, 낙관시하는 노브레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안시에타…. 변덕스러움은 선교사들의 시선에 비친 투피남바 사회의 양식에 관한 것으로서 그 시선의 소유자를 불러내지 않고서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다. 투피남바와 같은 시대를 산 유럽인이 이 논의에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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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 전개에서 16세기 유럽인이 불가결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살쾡이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 즉 16세기 유럽인인 몽테뉴가 소환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살쾡이 이야기』에는 「몽테뉴 다시 읽기」라는 제목의 장이 개개의 신화분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장 직전에 돌연 배치되어 있다.

프레데릭 켁은 레비-스트로스의 후기 저작에서 보이는 몽테뉴에 대한 참조를 루소에 대한 언급과 연결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참조하는 인물의 변화는 “자연주의에서 회의론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인 패러다임”일뿐만 아니라 “18세기—인류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진화론에 의한 해결을 눈앞에 두고서 루소, 칸트와 함께 초월론적인 심리학이 응답한 때라고 레비-스트로스가 재발견한 시기—에서 16세기—인류학이 인문학=인간성의 나머지 반(半)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했던 정복의 시기이며 몽테뉴는 이 시기를 최초로 자각한 증인이다—로 거슬러가는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로도 이해될 수 있다(Keck 2008: 1878). 구대륙과 신대륙의 만남 이후 500년,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를 이끌어가기 위해 몽테뉴를 동시대인으로서 호출했다. 그러나 그 몽테뉴론은 다소 기이하게 전개된다. 여기서 조금 우회해서 그 큰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상록』의 여러 장에는 신세계 발견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 충격에 대한 몽테뉴의 반응은 신세계 관습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었다. 반면 투피남바 족을 논할 때에는 “이성에의 호소가 후렴구처럼 되살아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46-47).

이러한 몽테뉴의 태도에는 계몽의 철학—‘이성에 기반한 사회라는 유토피아’—과 문화상대주의—‘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의 부인’—의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사변적이지 않다면 실천적인 이성의 지령에 응하는 움직임”, 즉 “모든 습관에는 동일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양식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사회의 관습에 순응하게”(레비-스트로스 2008: 1447) 된다.

한편 몽테뉴 나름의 문화상대주의를 『수상록』의 “다른 장보다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민족지적인 테마로 다루는”(레비-스트로스 2008: 1447) 「레이몽 스봉의 변호」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그 속에서 다양한 관습의 관점에서 이성 그 자체가 판단된다. 새롭게 발견된 신대륙 관습은 유럽의 그것과 이질적이면서도 유사하다. 결국 그것은 관습조차도 확실한 기반이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철학전반에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회의론의 정식화—우리는 존재와의 사이에 어떤 교류도 가질 수 없다—에 이른다.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지(知)에 대한 이 회의는 “지(知) 자체를 규정하는 지(知)는 지(知)인 것일까?”라고 의심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0).

그러나 지(知)의 회의론은 철저하지 않다. “만약 이 근원적인 회의론에 우리의 사고와 활동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삶은 불가능해진다. 경험적인 확인사항과 대립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회의론은 자살 등의 가장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1). 결국 “회의론은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의례작법으로 환원한다. 그 대신 (다름 아닌) 이 의례작법의 존중은, 실제 생활의 활동전체를 고려한다면 회의론의 표명이 기질의 문제일 뿐인 세계를 보는 것을 허용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2). 이와 같이 회의론은 특정한 ‘보수주의적인 색체를 띠게 된다’.

이렇게 독해된 몽테뉴는 16~17세기의 선교사와 모험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라고 레비-스트로스는 평가한다. (다만 켁이 지적하듯이 『살쾡이 이야기』 이후 레비-스트로스는 더욱 인상적인 방식으로 몽테뉴를 종종 언급한다.) 몽테뉴의 모습과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선교사나 모험가는 신대륙 선주민의 관습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의 그것과 연결지음으로써 그 발견이 주는 충격을 흡수해간다. 즉 신세계는 유럽의 과거와 동화되었다.

몽테뉴 개인의 모습까지 파묻어버리는 이 기묘한 몽테뉴론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오레곤과 브리티시콜롬비아의 선주민 신화에 차용되는 캐나다-프랑스계의 민요의 재창조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보이는 ‘유럽인의 반응’과는 매우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 측에서 발견되는 것은 앞서 보았던 타자로의 열림인데,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오레곤과 브리티시콜롬비아의 선주민이나 투피남바 족이 아닌 또 다른 선주민 사회인 아스텍과 잉카를 가져온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아스텍과 잉카의 붕괴, 즉 유효한 저항으로써 정복자들과 싸울 수 없었던 그들의 모습은, 성스러운 전승(傳承)이 그 귀환을 예언하고 나아가 현지 민중을 기다리게 한 행방불명의 신들을 현지인이 정복자들 가운데서 느꼈다는 사실에 의해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레비-스트로스 2008: 1445)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아스텍과 잉카는 사회의 파국을 더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여기서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와의 만남에서 몽테뉴의 회의론이기도 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던 ‘유럽인의 반응’과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반응이 병치된다. 그런데 이 병치는 그 어떤 다른 물음으로 옮겨가지 못한다. 아스텍과 잉카에서 보이는 ‘불가능한 쌍생아’의 형상을 확인하면서 「몽테뉴 다시 읽기」의 장은 마무리된다. 몽테뉴의 사색을 살펴보려는 이 시도는 또 다른 유럽적인 반응과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태도를 찾아내는 것 혹은 1992년 이전에 다시금 발견되어야 하는 윤리와 도덕의 편린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몽테뉴의 사색을 단순히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주의와 이성이 충돌한다는 점 등에서 자신의 사고를 몽테뉴의 사고에 근접시키고 있다.)

어느 쪽에도 치중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할 정도로 대조적인 반응의 이 단순한 병치는 그 차이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신대륙의 선주민을 상상하는 ‘회한과 기도’의 장을 열어놓고 그 속에 남아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몽테뉴론은, 1991년 출판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레비-스트로스 2013a: 103)고 저자 자신이 회고한 『살쾡이 이야기』—레비-스트로스 자신 안에 축적된 연구과제인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회철학인 이원론의 고찰—에서 동시대 사회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적인 대응이라는 성격이 부여될 수도 있다. 『살쾡이 이야기』가 출간된 직후인 1992년에 이탈리아 일간지인 ‘레프브리카’에 게재된 「몽테뉴와 아메리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상징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지적했다. 신세계 발견으로부터 정확히 백년 후인 1592년이 몽테뉴가 서거한 해라는 것, 즉 백년 주기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몽테뉴가 중첩된다. “현대의 사고의 기초를 이룬” 몽테뉴는 적어도 그 사색을 신세계에 빚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서양세계 또한 자신의 발전의 상당 부분을 신세계에 빚지고 있다. 이 우연의 일치는 사물의 가치의 측면뿐만 아니라 현재의 서구가 신세계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레비-스트로스 2013b).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타자로의 열림’의 발견은 신대륙에 대한 서구의 위치를 역사 속에 재위치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백년 주기가 만들어낸 역사적인 우연의 일치가 상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해소되지 않는 부채이며,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파괴된 것 혹은 파괴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도하는 것’ 혹은 존재가 위협당하고 있음을 사고하는 것이다. (『살쾡이 이야기』를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간 만남의 재고로 위치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모호크 인디언 봉기 때문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회고하였다.) 기억을 회복하거나 기도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동시대 사회에 타자의 모습을 불러내고 비판의 계기를 열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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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에게 『살쾡이 이야기』는 서구의 역사가 그려낸 동시대 세계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며 몽테뉴가 그 안내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의와 얼핏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살쾡이 이야기』의 몽테뉴론을 살펴본 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몽테뉴처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노브레가와 안시에타 등이 그 나름의 비판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시대로 불러낸 인물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디오에 관한 것만이 아닌 ‘변덕스러움’이라는 주제의 설정은 자신과 닮지도 않았고 동화시킬 수도 없었던 16세기 유럽인을 논의 속에 필연적으로 호출한다. 그리고 이 인물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인디오에 관해 말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산출하게 된다. 이렇게 설정함으로써 이 책의 행간에 감춰진 동시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신대륙에 살고 있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비판은 서구 세계에 살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이 책의 형식적인 특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는 서두에서 말미까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주된 논의가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으로 완결되는데, 논문의 주석이 아닌 보족적인 코멘트가 종종 삽입되어 있다. 이 코멘트에는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로베르트 다마츠타와 피터 가우 등의 남미 저지대 선주민의 민족지학자, 파가손과 샤농, 자크 리조 등 야노마미 연구자, 질베르트 프레이레와 브아르키 데 오란다 등의 브라질 역사가, 진보파 교회에 속하는 현대 선교사들, 인디헤니스모[각주:1]의 추진자들이다.

이 모든 이들은 20세기 브라질과 아마존 인디오와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논의가 16세기 선교사들의 모습을 환기하는 논의와 병렬로 놓인다. 이 형식에서 분명한 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투피남바 족을 논하는 것은 동시대 사회를 겨냥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합중국의 인류학자인 나폴레옹 샤농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이 책 108-110쪽). 이 야노마미 연구자는 지금도 인류학의 윤리를 둘러싼 광범위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게 된 계기는 2000년에 영어권에서 출간된 『황금향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어느 저널리스트의 책(Tierney 2000)에 있다. 이 저작의 일부는 거의 근거 없이 기술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샤농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사실로서 확인되는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그때까지 아카데미즘 내에서 이뤄져왔던 비판을 다시금 정리해서 기술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Borofsky 2005) 이 코멘트도 이 책의 최초 판본(1992년)에 이미 언급되었으며, 『황금향의 그늘』 이전에 샤농의 어떤 논문을 계기로 일어난 논쟁을 문제로 삼고 있다.

1988년 샤농은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야노마미 사회에서 나타나는 복수 등 살해를 수반하는 폭력이 생식상의 성공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을 통계 데이터를 통해 논증하고자 했다(Chagnon 1988). 그는 사망자 수에서 차지하는 살해 비율이나 다툼의 경험자 비율 등의 통계 데이터를 사용해서 야노마미의 폭력성을 평가하고 그 폭력을 야노마미 사회의 본질적인 활동으로 보았다. 이 논문에 대해 브루스 알베르와 자크 리조 등의 다른 야노마미 연구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야노마미에 관한 인구와 살해자 통계 데이터를 수집한 장소의 정보가 모호하다는 의구심이 제기되었고 현지 개념의 의미를 혼동해서 통계 데이터가 작성되었음이 지적되었으며 여성을 둘러싼 다툼으로 전쟁을 위치짓는 논의 자체가 일부다처의 낮은 비율을 생각하면 통계적으로도 지지받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리조는 그 자신이 야노마미에서 행한 조사결과에 기초한 연구를 샤농이 불명료한 형태로 참조했으며 야노마미의 폭력은 인상적일만큼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비판도 표명하였다(Albert 1989; Lizot 1989).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또한 그와 같은 관점에서 그들을 지지하였다. 또한 리조는 샤농의 서술이 미디어에 확산됨으로써 야노마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비판이 함의하듯이 샤농 논문의 문제는 과학적 데이터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발생시키는 집단의 이미지와도 결부되었다. 

1987년부터 브라질의 야노마미가 살아가는 일대에는 불법적인 금 채굴이 성행하였으며 야노마미와 금광채굴업자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한 탓에 의료 팀 등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이 이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지하자원 개발과 더불어 야노마미의 권리가 인정된 토지의 경계를 재검토하는 논의가 브라질 국내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샤농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야노마미를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람들로 규정하는 내용의 기사가 영어권에서 유포되었으며 이어서 브라질 국내의 몇몇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일 직후 브라질 군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 야노마미의 토지를 세분화하는 정책안을 채택한다. 그들이 하나의 토지에 함께 살면 더욱 폭력적으로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상황에서 브라질 인류학회—당시 회장은 마뉴엘라 카르네이로 다 쿠냐—가 인류학자의 학술적 성과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항의문을 북미 인류학계에 전달하기도 했다(Albert 1992; Borofsky 2005). 즉 인디오의 폭력을 말하는 것이 사회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직접적으로 이 일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의 논의가 사실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있을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폭력과 관련된 측면에서 타자를 대상화할 때의 배려가 엿보인다.

그런데 샤농을 언급하는 부분은 다른 인류학자인 파가손에 대한 코멘트에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샤농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파가손의 논의는 샤농을 비판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샤농의 논문이 일으킨 논쟁이 보여준 문제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만들어낸 대립적인 틀—샤농파/반샤농파—에 자신을 위치짓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논쟁을 소화 흡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논쟁이 일으킨 몇몇 논의가 폭력과 관련된 측면에서 타자를 대상화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의 대처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영어판에서 부활한 한 구절—1992년의 논문에 적혀있던 한 구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이 책 106-107쪽). 폭력의 발생을 역사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사회생물학적인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둘은 모두 그 사람들을 고유한 방식으로 ‘사회를 생각할 능력이 없는 자’로 위치짓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선주민 고유의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방식과 같은 이유로 인지과학적인 상징표현론이 비판된다(Viveiros de Castro 2013: 493).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인디오의 폭력을 문제시하는 논의에 대한 응답은 폭력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폭력의 현상을 통해 타자를 파악할 것인가를 되묻는 것이다. 즉 폭력적인 관점에 기초한 대상화는 실제의 폭력적 행위를 타자의 본질로 삼는 것과 같지 않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취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상/사고 없는 자로서 인디오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타자를 사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나름의 작업에 의한 대칭성—“현지인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Vibeiros de Castro 2003)—에 기초한 타자이해의 모랄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대상화의 모색은 동시대의 다른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1980년대 말 건설안이 제기된 싱구 강 댐 개발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루시아 멘도사 모라토 데 안드라데와 공저)에서는 그 계획의 담론에 묻힌 인디오의 대상화 양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 한다.

계획을 입안할 때 환경에 대한 영향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이때의 환경이란 물리적 환경, 생물적 환경, 사회-경제적 환경을 그 하위개념으로 갖는 개념이다. 이 환경개념에 의해 인간 또한 댐이나 보전구역이라는 환경의 구성요소가 된다. 반대로 그 환경 혹은 ‘복합이 주체’가 된다. 그 결과 “인구는 자연화되고 자연종으로 동화되어 <부정적인 영향>이나 일시적 혹은 <창조적>인 정비에 복속된다”(인용문 중 <>는 저자 자신이 댐 개발 계획서에서 인용했음을 나타낸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0: 66).

이러한 계획의 담론은 인디오 사회를 광의의 환경으로 포괄하고 또 그 사람들을 ‘자연인’에 가깝게 만든다. 이 이미지는 자연의 수호자로서 자연환경과 일체가 되는 인디오의 이미지에도 가깝다. 그런데,

인디오 사회를 사회적인 주체로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이 손해는 그 대상(代償)으로서 국가의 공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부정적인 자연화를 일으킨다. 이것은 진화론의 도식에 기초하여 확립된, 뒤처진 것으로서, 또 충분히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디오 사회를 표상한다. 인디오 사회를 관념적인 대문자 인간의 불완전한 샘플—그리고 통계상 무의미한 것—로 이해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이 사람들이 충분한 사회 상태에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고 객체화된 비대칭적이고 자연화된 형식 하에서가 아니라면 문화적인 차이를 사고할 수 없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0: 67).

이렇듯 국가차원에서 인디오는 국가에 통제된다. 브라질의 경우 그 통제는 양의성으로 가득한 ‘보호’의 형식을 취한다. 이 ‘보호’란 신체적으로 보호되면서도 통합에 의해 고유의 사회성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이 보호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인디오의 영토를 자본의 투자에 대해 개방하는’ 것이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3).

인디오 고유의 사회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은 인디오의 자연화(그것과 동질의 역사화)에 항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동시대의 사회 속에 인디오를 위한 다른 장소를 만들어내는 대응과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는 과제이기도 하다. “왕 없는, 법 없는, 신앙 없는” 암묵의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부재에 의해 사회를 특징짓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성 그 자체 속에서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인디오를 둘러싼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한 커다란 과제이기도 한다.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은 이를 해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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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이 현실적인 문제임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변덕스러움은] 브라질 인디오에 대한 현대의 규율 훈련가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다.” 또 20세기 브라질을 살아온 인물이 16세기 선교사들의 모습과 중첩되는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질베르토 프레이레와 부아르키 데 오란다 등 브라질의 국민성 논의와 관련된 역사가, 그리고 인디헤니스모의 추진자, 진보교회파, 인류학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후자의 그룹은 동시대 사회 속에서 인도적인 모습으로 인디오와 결부된다. 그들은 모두 경험적으로 인디오에게서 변덕스러운 종자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16세기 선교사의 모습과 중첩된다.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을 성가시게 생각한 선교사는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현실적인 인물상이다. 반면, 질베르토 프레이레 등에게 성가시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인디오의 모습은 어떤 인종주의적인 인식과 일체가 된다. 부아르키 데 오란다 등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은 생산성을 높이는 활동 혹은 ‘시민사회’적인 모랄과의 불화의 증거이다.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어떤 무능력을 노정하는 인디오의 모습은 브라질에서는 인디오의 법적 신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였다. 1916년의 민법 이후 인디오에게는 특별한 법적신분—‘한정적 무능력’—이 할당되었다. 인디오의 법적인 능력이 통상의 시민보다 제한하는 상태에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공적기관이 인디오에 대해 후견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되어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차별적인 규정으로 보이지만, 아마존 개발 과정에서 인디오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인디오에 대한 국가의 후견권을 구체적으로 담당하는 행정기관인 인디오 보호국(Serviço de Proteção aos Índios)이 설립 당초 “필요하다면 내 자신이 죽어도 결코 죽이지 않겠다”를 모토로 삼은 것처럼, 후견 제도는 분명 인디오 보호에 공헌해왔다. 이 제도는 “속기 쉽기 때문에 <한정적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상용거래에서 특별히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선주민에 대한 후견이라는 관념은 경멸적인 시대착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매우 유익한 법적 영향력을 그들에게 끼치고자 하는 것이다”(Carneiro da Cunha & Almeida 2000: 318). 이후 몇몇 법과 개정헌법을 통해 인디오에게 법적인 특권, 세금 우대나 토지에 대한 영속적인 점유 등이 승인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통합이라는 틀을 전제로 하는 신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특수한 법적 신분으로부터 탈각하여 통상의 시민이 되는 절차는 1973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했다. 이에 따라 필요한 것은 ‘이탈(Emancipação)’의 절차였다. 이것은 후견 제도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며 언어능력과 양복을 입는 습관 등을 몸에 익힌 인디오가 청구하여 민사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탈은 그와 동시에 인디오의 신분을 지켜왔던 특권을 잃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권한상실을 의미했다. 정부가 인정하는 집단의 영속적인 점유권 대신 개인의 특권으로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보호를 통해 인디오 이외의 경제활동이 금지된 토지가 매매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Ramos 1998: 243-248; Carneiro da Cunha & Almeida 2000). 인디오가 통상의 시민이 되는 것과 토지가 매매 가능하게 되는 것이 일체가 되는 이 신분의 변화에 대해서는 1978년 당시 내무장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Ramos 1998: 243).

1988년에 새로운 헌법이 발포된다. 신헌법에서 인디오의 권리로서 토지에 대한 집합적인 권리가 인정되는 대신에 특별한 법적 신분은 폐기된다. 그러나 이 헌법의 초안이 논의된 1987년에는 ‘문화변용한 인디오’, ‘문화변용하지 않은 인디오’의 구분이 정해짐으로써 ‘토지에 대한 권리의 법적 승인에 의해 다른 법적인 철자를 확립하기’ 위한 법령이 발포된다. 그 결과 투카노와 야노마미는 토지에 대한 배타적인 점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지하자원 채굴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Carneiro da Cunha 1993: 14). 나아가 그보다 앞선 1981년에도 최종적으로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국립인디오재단(인디오 학살과 권리를 둘러싸고 부당하게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1967년에 해체된 인디오 보호국의 후견조직)은 ‘인디오성(性)의 기준’을 확정하는 60가지 이상의 항목을 만들고자 했다(Ramos 1998: 249-252). 카르네이로 다 쿠냐는 새로운 헌법을 논한 1990년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그것[행정부]이 인디오의 권리들을 오로지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미개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에 더 이상 인디오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권리들이 소멸하는 것은 분명하다”(Carneiro da Cunha 1993: 15).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누가 인디오인가, 그리고 인디오란 어떤 자인가? 이러한 질문이 1980년대 브라질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나아가 행정부는 어떤 진화론적인 관점을 인디오가 무능력하다거나 문화 적응했다거나 하는 판단의 기반으로 삼았다. ‘한정적 무능력’이라는 신분 탓에 인디오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보호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으로의 통합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 신분을 제거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 설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차이는 통합의 도식과 그에 기초한 능력의 진단 속에서 위치지어진다. 인디오를 시민으로 삼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해도 이러한 처분이 가능했던 차이의 사고방식이 [브라질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다 큐냐는 지적한다.

이 시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앞서 다룬 싱구 댐에 관한 것 외에도 인디오의 신분에 관해 짧게 언급해두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정책 차원에서 인디오의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후견 제도에 대해(Vibeiros de Castro 1983), ‘인디오성의 기준’ 등의 유사과학적인 판단이 후견 제도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Vibeiros de Castro 1982), 마땅한 토지승인의 양상에 대해(Seeger & Vibeiros de Castro 1979) 등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그 나름의 견해를 표명해왔다.

‘인디오성의 기준’을 비판할 때에는 ‘인디오성’은 어떤 인류학자도 규정할 수 없는 ‘유사과학적’ 개념이라고 비판한다(Vibeiros de Castro 1982: 32). 민족적인 특징이란 맥락에 따라 변용하는 것이며, “어떤 집단의 민족적인 동일성은 유전적, 사회적(사회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초월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통일성은 언제나 상황적이며 맥락에 의존하며 구축되는 것이다[…]”(Vibeiros de Castro 1982: 34). 확실히 여기서는 통합을 전제로 타자를 배치하는 ‘인디오성의 기준’이라는 개념적인 장치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비판을 행하고 있다. 앞서 댐에 관한 논의도 살펴보면, 인디오 정책을 비판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브라질 인디오의 운명을 좌우해왔던 인디오라는 차이의 통치에 의한 대상화를 되묻고 있다.

이와 같이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은 인디오의 대상화를 되묻는 시도이다. ‘변덕스러움’은 확실히 16세기 선교사들의 시선에 비친 인디오의 모습인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선교사들과 같은 시선을 20세기의 다양한 사람들 또한 공유하고 있다. 선교사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무능력을 인디오에게서 찾아낸 것처럼, 부아르키 데 오란다는 시민사회적인 행동에 대한 무능력을 찾아내고 있다. 통합을 전제로 하는 정책을 생산한 관료적인 관점이 인디오에게서 찾아낸 것은 ‘능력’의 유무이다. 그렇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변덕스러움의 모습을 재고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미개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타자에 장소를 부여하거나 빼앗는 사고, 백인의 것을 사용하는 것을 ‘문화적응’으로 진단하는 사고에 항의하면서 20세기 말 브라질이라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백인 유래의 물품을 인디오가 이용한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문화적응’이라고 평가하는 것 사이를 단절시키는 사고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는 이미 확립된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라우에테를 자신의 조사지로 선택한 경위를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인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투피족은 과거의 절멸했거나 ‘문화적응’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구성과 ‘민족변용’의 사회학 이회에는 민족학적인 조사를 통해 해명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70년대에 아마존 횡단도로가 개통되면서 파라주에 사는 ‘고립된’ 투피-구아라니계의 인디오와 막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리니, 아라우에테, 파라카냐 등이 그들입니다. 아시다시피 투피-구아라니계의 고전적인 자료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유명한 투피남바 족의 전쟁에 의한 식인입니다. 그런데 아라우에테에게서 무언가 그와 비슷한 것이 발견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라우에테로 조사를 간 것은 이제까지 연구되지 않은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그들이 투피계였던 것이지요. 아라우에테에서 조사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그들이 외부와 접촉한지 5년 정도 경과된 후였고, 5년은 매우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지요. (Viveiros de Castro 2002: 479)

아라우에테는 그 외의 투피계와는 다르게 문화 적응한 상태가 아니었고 오히려 막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화적응의 상태에 있다고 상정하기 어려운 집단을 선택해서 조사를 행한 것인데, 그런데도 그들에게서 백인 유래의 물품이 흔하게 보였다.

전통적인 치료방법을 구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인디오 포스트[인디오와 접촉하기 위해 국립인디오재단이 설치한 출장소. 다양한 교역품이 여기서 인디오 마을로 유입된다.]가 존재하는 한에서) 서양의 의료와 치료의 방법에 대한 아라우에테의 의존도는 매우 높다. […] 의료와 헬스워커(health worker) 서비스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매우 높았고, 현실적이든 상상속이든 인디오의 필요성을 한층 증폭하고 정치-의례적인 영역까지 그것이 미치고 있었다. […] 모든 점에서 내린 결론은 아라우에테가 틀림없이 백인의 수중에 있으며, 민족의 모습이 급속하게 그리고 통렬하게 변형되는 길을 가게 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점이다. (Viveiros de Castro 1992: 20)

그러나 백인이 인도한 길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에서 종족의 모습이 상처 입거나 변형하는 것, 즉 문화적응의 표지는 없었다. 위의 인용문을 뒤이어 다음의 문장이 이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지적인 대응이며 아라우에테는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스타일에 의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개념적인 차이를 상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Viveiros de Castro 1992: 20)

요컨대 백인의 물품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문화적응 혹은 종족변용으로 진단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의 판단을 바꾼 것이다. 동화의 증거가 읽힐 수도 있는 곳에서 아라우에테의 차이에 대한 사고를 차이로서 읽어 들인 것이다. 즉 동화의 징후의 해독에서 새롭게 대체된 사고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차이의 장을 여는 사고이다.

‘변덕스러움’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은 이것과 동형의 사고의 실천일 것이다. “야생의 변덕스러움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사회에서 함께 생활할 때에 경험하는 어떤 것에 확실히 대응한다”라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본인 또한 변덕스러움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에게는 자신과 동화되지 않는 상대 그 자체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때때로 ‘변덕스러움’에 대한 선교사의 비판의식이 자유간접화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된 이 텍스트는 그렇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혹은 적어도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텍스트를 그렇게 구성하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선교사와 부분적으로 중첩된 위치에 있는 만큼, ‘변덕스러움’을 재고하는 것이 단지 16세기의 몰이해에 대한 비판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대응은 그 자신조차 거꾸로 새로운 사고를 탐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변덕스러움에 초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혐오하는 감성에, 그로부터 파생하는 차별의식에, 그 의식에 의해 용인된 불평등한 대우에 결코 일치하지 않는 사고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곧 인디오 사회를 해체할 수 있는 사회정책을 지지하는 사고의 조건에 항의하는 것이며, 동시대 사회에서 실현되는 차이를 사고하는 조건을 바꾸려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 사고의 이미지는 후에 현대적인 인류학적 사고로서 결실을 맺는다. “인류학의 역할은 타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원적으로 만드는 것이다”(Viveiros de Castro 2014).

여기서 구대륙에서 신대륙을 사고하는 레비-스트로스와 달리 인디오 사회의 일원으로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차이를 생각해내기 위해 불가결한,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지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태도와 일체화가 되었을 때 차이에 대한 사고는 사회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차이에 대한 사고의 조건을 되묻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차이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로 전화되지 않는 사고방식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20세기말 브라질 사회, 앞으로 더욱 인디오와 관계가 밀접해질 사회, 16세기 선교사가 자신으로 동화시켜야 하는 누군가가 있는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차이를 사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대응은 단지 타자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완수할 수는 없다. 문화개념, 나아가 권위와 복종을 둘러싼 사상사적인 사정범위를 더욱 깊게 파고들어 ‘우리’의 사고에 근본적인 도전을 해야 했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차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차이를 혐오와 차별과 불평등으로 전화시키지 않는 사고를 탐구하는 것은 다만 20세기 말의 브라질 사회에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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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역자들이 처음 만난 곳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게스트로 맞은 2010년 12월의 국제심포지엄의 회장이었다. 당시 지금처럼 그의 연구를 맞아들일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그때의 우연이 지금의 기회로 이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타자를 생각하는 것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맛본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이 책의 번역 과정에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포르투갈어 번역과 가타카나 표기에 관해서는 다카하시 케이스케(高橋慶介)에게, 16세기 선교사의 텍스트 해석에 대해서는 파울라 오죠스 한토리(Paula Hoyos Hattori) 씨에게 조언을 구했다. 물론 이 책의 모든 책임은 역자 2인에게 있다. 또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씨와 연락을 도운 야다우치 타다수(箭内匡) 에게 감사하다.

또 수세이샤(水声社)의 고토 토오마(後藤亨真)에게, 부분적으로 이 책의 돌발적인 제작 과정을 잘 이끌어왔던 것에 감사하며, 또 번역의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

 

 

  1.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의 복권운동.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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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6년 5월호에 실린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이 논문은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이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와 만나는 여러 지점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조금 더 논의를 밀어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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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라는 ‘궤변’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 개념에 기초한 칸트인류학 비판

 

오오하시 칸타로우(大橋完太郎)

(사상사/표상문화론)

 

1.

경험은 일말의 분자로부터 수백 년을 단번에 앞질러서 생명의 전 역사를 거슬러 인간사회에 이르는 장대한 총합의 시도를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일찍이 진화론이 지껄였던 그러한 ‘자연의 철학’은 종종 최악의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이 발언은 1976년에 발표한 미셸 푸코의 논고 「<생물-역사학>과 <생물-정치>」의 서문의 일부이다. ‘생명의 역사’가 초래한 최악의 결과란 무엇인가? 푸코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을 중심으로 진행된 우생사상에 기초한 사회정책이다.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한 우생학이 나치즘 정권 하에서 단종과 격리의 논의를 형성했고 실제로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되었던 것은 오늘날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위기에 저항한 프랑스의 현대지식인으로서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의 사례는 푸코의 염려를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는 모리스 블로흐의 논의에 기초하여 레비-스트로스가 놓인 상황과 그의 작업의 의의를 개괄한다. 블로흐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가 독자의 인류학 이론을 구상한 이유 중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강력하게 대두된 우생사상에 대한 저항이었다. 즉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라는 종의 이론, 나아가 인종의 이론을 지지하는 ‘자연주의’적인 견해와는 다른 관점을 세우고자 했다. 1943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9년에 간행한 『친족의 기본구조』는 우생학의 이름으로 알려진 사회-생물학적인 사고를 거부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우생학적인 사고는 진화론적인 관점 하에서 자손을 남기려는 이전 세대의 관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부모-자식의 유전학적인 연결을 강조하고 그에 의해 친족관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타인이 자신과 혈연관계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사회의 기원과 성립을 설명하는 사고이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사회를 혈연적 유대로 환원하는 사고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는 일종의 에고이즘을 은폐할 뿐이다. 거기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한 존재라거나 그 이행할 때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 망각되고 만다. 근친상간 금지란 인간사회의 기반에 혈연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혈연이 아닌 것들과 유대를 맺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구성한 복잡한 교섭체계로 [근친상간 금지가] 사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문화의 복잡성이 뇌를 중심으로 하는 신경계의 복잡함에 기원하지도 않으며 문화를 뇌의 구조의 직접적인 반영으로도 간주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에 침전되면서 자신을 얽어매는 문화를 만들고 변화시킨 존재이며 그러한 변환의 주체로서 인간정신을 일종의 ‘튜링 머신’(Turing machine)[각주:1]같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이 두 사람에게 생물학적 진화론의 기원의 사고의 총합은 위험한 귀결을 초래할 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의 분리 및 결합의 양태이다. 본론에서는 이러한 분열을 어떤 방식으로 결정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한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를 검토하면서 그 문제점을 소묘해나가겠다.

 

 

2.

칸트는 1784년에 간행한 『세계시민적 견지에서 보편사의 이념』에서 자연의 경향성과 사회의 통일성을 가교하여 인간을 사회의 형성으로 향하게 한 것을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이라고 명명했다. 이 인간본성은 분명 모순된 내용을 포함한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자연본성은 ‘사회 속에 들어가고자 하는 성벽(性癖)이지만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사회를 분단하는 공포의 한 일반적 저항과 연결된 성벽’이다. 전자의 사회적 경향성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 자신의 자연적 소질이 발전해가는 것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에 머물지 않고 모든 것을 생각해보기 위해 ‘혼자 있고 싶다(고립하고 싶다)’는 성질을 자신 속에서 발견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립상태의 양의성이다. 고립상태에 놓인 인간은 자기의 경향과 타자의 경향이 상반되며 결과적으로 그 인간은 자기 안에서 타자에 대한 경향을 발견함과 동시에 타자 안에서도 자기에 대한 저항이 있음을 본다. 이 저항을 단서로 인간은 문화적 상태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저항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힘을 불러일으키고, 태만으로 기우는 마음을 넘어서게 하며, 분명 함께 있는 것은 싫지만 놓아줄 수도 없는 동료들 옆에서 공명심과 지배욕과 소유욕에 뛰어들어 하나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 인간을 몰아세운다. (p.8 (A21))

인용한 이 구절이 칸트에 의해 ‘문화 상태로의 진정한 첫걸음’이라 불리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에게 타자에 대한 적대와 질시, 자기 것을 독점하고픈 욕구는 ‘거친 자연소질’이지만 이 소절을 통해서 인간은 ‘목가적인 양치기’나 온후한 ‘방목된 양’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고 칸트는 생각한다. 비사회성 혹은 일반적 저항은 인간이 자연에게서 받은 은혜이며 때로 재해를 일으키면서도 그것 없이는 문화적인 발전을 구동시킬 수 없는 본원적인 자연의 힘이다. “인류를 길러내는 자연과 예술 및 그보다 우월한 사회적 질서는 모두 비사회성이 맺은 결실이다. 이 비사회성은 자기훈련을 거쳐 그 강제적인 기법을 통해 자연의 맹아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도록 우리 신체에 강요한다”(p.11 (A22))는 언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칸트가 생각하는 문명사의 발전에서 자연 상태로부터 문화적인 상태로 이행할 때에 필요한 ‘자연의 힘’이 개체의 레벨에서 요구된다. 문화적인 상태는 자연 상태의 연장이지만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연성을 괄호에 넣고 그와 별개의 특수한 자연성에 의해 구동됨으로써 발생한다. 루소적인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통해(이 타입의 자연성은 홉스의 자연 상태와 유사하다) 자연과 역사를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자연의 합목적성에 따라 사회의 발전이 보증된다. 이 또 하나의 자연성의 내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티격태격 하고 사람을 시기하고 경쟁을 좋아하는 허영심,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혹은 지배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태만을 좋아하는 자연성과 불화하는 또 하나의 자연성을 조정하는 해결책으로서 자연이 요청하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의 실현이다. 칸트에게 역사의 목적성과 자연의 목적성의 일치는 이처럼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성을 화합시킴으로써 성립한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자연성이 실제로는 얼마만큼 질적으로 다르며 또 어느 정도로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인간의 자연적 성질의 총체와 역사적 성질의 총체의 차이는 예를 들어 유전과 민족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어휘에 의해 사고될 수 있다. 그리고 복수의 서로 다른 자연을 하나의 자연으로 사고하고자 한 칸트가 보편사의 성립, 인류사의 기원, 만물의 종언, 인종의 차이를 거의 동시에 사고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푸코와 레비-스트로스가 우려한 바는 이미 칸트의 영위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칸트에게 인류의 기원과 종말을 생각하는 것과 인종 간의 차이와 동일성을 사고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엇이 저류로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3.

여기서는 앞서 서술한 모호한 자연의 영역을 명확히 하기 위해 칸트에 의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차이에 주목해보자. 1788년에 발표한 『철학에서 목적론적 원리의 사용에 대하여』에서 칸트는 요한 게오르그 아담 포레스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연사와 자연기술의 개념을 구별하고 있다. 자연사란 ‘인간이성의 손에 닿지 않는 자연의 사건에 대한 서사이며’ ‘식물이나 동물의 최초의 성립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서사를 말할 권리는 신이나 조물주에 속하며,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법칙을 관찰에서 끌어내어 현재와 옛 시대와의 연관을 작용법칙에 따라 추적하는 권능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 방식으로 세계의 기원을 탐구하는 ‘자연사’에 대해 칸트는 그 가능성 자체는 인정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사의 탐구는 자연기술의 정치화(精緻化)에 의해 한계지어진다.

실제로 이 두 작업은 서로 완전히 이질적이다. 한편(자연기술)에서는 학문으로서 위대한 체계의 위용으로 나타나는 데에 반해, 다른 한편(자연사)에서는 단순한 편린이나 동요하는 몇몇 가설만이 제시될 뿐이다. 이처럼 양자를 분리하여 후자를 독자적인 하나의 학문으로서, 눈앞의 (그리고 어디서라도) 작품이라기보다도 투영도(投影圖)의 모습으로만 수행 가능한 학문(여기서는 대다수의 질문에 대해 ‘해답 없음’이 제시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으로 그려낼 때에 내가 여기서 바라는 것은 한편의 학문에 대한 잘못된 통찰에 의해 본래는 다른 한편의 학문으로만 귀속하는 사태를 바라는 대로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자연사에서 현실적인 인식의 범위(실제로 이미 약간은 소유되고 있다)와 그와 동시에 이성 그 자체만으로 자연사적 인식의 한계와 이 인식을 최선의 모습으로 확장하기 위한 원리들을 보다 명확한 방식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칸트는 자연사의 탐구를 ‘투영도’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데에 대한 염려를 말하고 있다. 이성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정밀과학(자연기술)의 성과를 확장하는 것은 이성의 자의적인 행사일 뿐이다. 기원이나 성립을 묻는 ‘자연사’의 탐구는 이성에 내재하는 인식의 한계와 그것을 ‘최선’의 방식으로 확장하는 원리에 기초하여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전개된다. 칸트는 포레스트가 제창한 흑인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유전적 특성의 존재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인도인, 아메리카인의 유전적 특성을 동일한 클래스 분류 속에 위치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한 인종을 특별시하지 않는 칸트의 인종이론은 그 의미에서 평등하며 반인종차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칸트에게 인종 개념은 실은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개념 자체가 칸트에게 이념(이성개념)일 뿐이며 그 의미에서 오성에 의한 무조건적인 논증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칸트는 자연기술에서 이해된 인류라는 보편적인 표징을 근간, 종족들(변종들), 나아가 다양한 인간품종(變樣種)으로 분류하는데, 이 분류 자체는 관찰을 거쳐 자연기술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 모두는 종에 대한 단순한 이념이며, 생식에서 최대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이 이성에 의해 통합된다는 정도로 상정”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성은 생식의 다양성과 혈통의 최대의 통일을 동시에 보증하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서 특별히 합목적적인 기능을 가진다. 그리하여 종족의 다양성이 근간의 합목적성에 의해 기초 지어지고 보증되는 것과 동일한 구도로 변양종의 다양체는 종족의 합목적성과 그 통일성을 한계 짓는다. 달리 말해, 교배의 무한의 가능성은 그것이 일정 정도의 통일성을 필연적으로 파괴하는 변양종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냄으로써 보증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이 생각은 동물과의 비교에서 명백한 주장으로 귀결된다. 즉 칸트에게 이성에 의해 통일되는 인간에게는 잡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은 다양성과 그 통일이라는 이념에 의해 통제되며,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한 인간은 ‘자연적인 부류’, 즉 ‘하나의 근간으로부터 맹아를 꽃피운 자연적인 종’으로서 자연사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인종이란 생식능력을 통해 유전적인 다양성을 담보하면서 통일되는 각각의 클라스 내에서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존재인 것이다.

칸트의 인종론에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연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자연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한정된 관찰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연이다. 이것은 인과연쇄를 가능하게 하는 힘(‘근본력’)의 개념을 매개로 발견되는 이른바 아프리오리한 인과성에 의해 규정된다. 또 하나는 인간의 다양성과 통일을 인간고유의 것으로 만드는 이념과 관련된 자연사적인 자연이다. 후자는 자유의 목적을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는 다른 곳에서 자연사적인 혈족관계 속에서 근친상간 금기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자연의 목적성과 유용성의 측면에서 해석한다. 즉 근친상간이 유전적 자질을 수렴시키고 자연적 다양성을 해친다는 것이 마치 자연 그 자체의 목적인 것처럼 조정된다. 자연의 요청과 경험에 기초한 도덕적인 요청이 이 점에서는 일치한다. 자연의 목적성을 근거로 경험적인 자유가 제한된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이성의 명법은 인간이라는 종을 유용한 한계 내에서 다양한 것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명이다.

이러한 사고가 칸트가 생각한 종말과 얼마나 관계하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언해두겠다. 칸트가 말하는 ‘만물의 끝’이란 모든 것이 물리적인 레벨에서 붕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끝’이란 시간적 존재자가 영원한 모습으로 이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 의미에서—다시금, 할 만한가?—‘만물의 끝’은 이념이며 그 기원은 물(物)의 ‘도덕적 경과’에 대한 사변이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고유한 산물이다. ‘인간들의 손을 거친 만물의 그 끝은 그들이 선한 목적을 가질 때조차 어리석은 것’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참된 끝이란 ‘일체의 변화가 멈춘 어떤 시간점’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때 사고와 감정은 전혀 교대하지 않고 석화하며 항상 동일한 것에 머문다. 존재자는 그 속에서 시간의식을 빼앗기고 ‘절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실천이성의 이념이 가진 궁극목적을 달성한다.

칸트에게 자연과 기원, 그렇게 종말로 휘감기는 사고는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권리를 보증하는 것으로서 이념의 목적의 위상을 동시에 명확하게 드러낸다. 자연에서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보편적 자연법칙에 안주하는 인간본성(=자연)과 그로부터 일탈하는 반자연적인 인간본성의 갈등이 있다. 거기에서 소여로서의 자연성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자연성을 구성하는 인간의 본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본성은 인간본성을 뛰어넘는 본성을 가지고자 하며, 그것이 시민사회를 구성한다. 유사의 구조를 가지는 논의가 생물학적인 지견을 기반으로 전개될 때, 그것은 인종에 기초한 논의가 된다. 모순된 복수의 본성은 여기서 자연기술의 대상으로서 자연과 자연사를 구성하는 자연으로 치환된다. 식민지 개척을 통해 공간적인 지평에서 발견된 인종 간의 기호적인 차이가 인간의 유전에 얽힌 자연법칙을 증명하는 표상을 구성한다. 그 표상에 대해 오성이 이념의 감독 하에서 움직이며 가능한 해석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고찰도 올바른 비판철학의 구도 속에 있다. 즉 그 자체로 실체화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상정되는 ‘근간’이 인간의 변양체(變樣體)를 다양하게 발생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각각의 인간의 종을 통일시키는 것으로서 계층화되어간다. 이 속에서 인류는 자연의 목적과 도덕적인 요청이 결과적으로 일치하는 합목적적인 존재로서 이념에 포섭된다. 이념, 즉 이성의 목적은 인종을 <혈족관계의 다양성과 통일> 하에 종별화해가게 된다. 표현을 달리 하면, 이성의 프로그램에는 혈연의 연속성과 통일이 이미 기입되어 있다. ‘만물의 끝’에는 별개의 이념이 저장되어 있다. 그 이념의 궁극적인 달성은 인류의 정지이자 오성의 소멸이며 영원으로의 융합이다. 그러나 이 이념의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는 신 외에는 없다. 칸트는 이 프로그램을 실행하고자 한 인간의 영위로서 노자의 체계와 동양의 범신론, 또 스피노자주의 등을 들고 있는데, 이것들이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켜 인간의 ‘절멸’을 불러오는 어리석은 시도로 생각했다. 인간의 지혜는 오히려 절멸을 피하기 위해 이성의 이념에 반하지 않는 소극적인 선(善)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칸트의 사고는 세 개의 요소—즉 문화의 발전에서 모순된 인간본성이 맡은 역할, 자연사적 인간에 내재하는 생물학적 집단성의 보존의 프로그램, 절멸을 숭고한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피하는 소극적인 실천—의 총체로서 이해된다. 이성의 목적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구동시킨다. 발전한 문화에서 인간의 기원의 탐구는 이성의 한계 내의 자연기술의 수법의 연장에 의해 행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이념으로서 발견되는 종의 보존의 논리가 그와 동시에 인류를 절멸의 실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맡는다. 즉 칸트는 오성의 무한원점(無限遠占)에 있는 이성의 존재를 축으로 하여 순수이성의 자연의 영역을 실천이성의 자유의 영역과 접합시킨다. 여기서 생물학적인 생식 현상도 ‘인류’라는 특수한 종의 이념으로 전환되며, ‘반(反)-절멸’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다. 문화를 구성하는 특정의 순수한 종이 절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종이나 잡종을 말소한다는 ‘소극적인 선’에 기초한 생각이 도출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4.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혈연관계에 얽혀있는 종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곧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상황에서. 형이상학이라는 사고가 생식에 의해 연결된 신체를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일 수 있다, 라는 것을 상기해보는 것은 유효하다. 『성찰』의 「제1답변」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추론의 기초로서 어떤 원인의 계열에도 의거하지 않으며, 어떤 무언가 이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인식되는 것에 나 자신의 존재를 사용하는 것을 오히려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나에 관해서는 내가 일찍이 어떤 원인에 의해 산출되었는가보다 내가 어떤 원인에 의해 현재 시점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일찍이 모든 원인의 계기로부터 내가 자유롭게 되었는가를 나는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것이 반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또 조부에 의한 것임을 내가 고찰하고, 그리고 양친의 양친을 탐구하면서 나는 무한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그렇게 질문은 끝나기 때문에 어떤 제2의 원인이 있다고 내가 단정한다, 라고 하는 경우는 완전의 별개가 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정신은 신체의 생식적인 연결과 단절되는 곳에서 나타난다. 이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원칙적으로 신체의 발생론적 질서에 믿음을 주지 않고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도 삼지 않는다.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의 철학은 이런 류의 형이상학의 현대적 복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유한성 이후』에서 메이야수가 칸트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태도를 ‘상관주의’로 명명하고 그 불철저성을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기원과 역사라는 문제계를 재고하기 위해 메이야스가 제시한 논의는 앞서 전개한 비판철학의 체계에 기초한 견해에 어떤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을까? 메이야수의 핵심 개념인 ‘선조이전성’을 단서로 생각해보자.

첫째, 메이야수는 ‘인간의 역사’를 선조나 인류에 얽매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조이전적’ 개념이란 ‘세계에 대한 온갖 형태로 인간적 관계에 앞서 제기된’ 것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출발에 앞서는’ ‘알 수 있는 한 지구상의 온갖 생명의 형태에 앞서는’ 것이다.

반면 상관주의자는 선조이전적 심급을 생각할 때에 필연적으로 ‘후방투사’를 행한다고 메이야수는 지적한다. (이것은 바로 칸트가 자연사 개념을 전개할 때에 목격한 사태이다.) 즉 상관주의자는 ‘현재를 기점으로서 과거를 후방투사’한다. 현재 존재하는 인간의 주관성을 통해 모든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때 후방투사된 언명 속에 나타나는 선조이전적 언명의 대상은 상관주의자에게 극히 모호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즉 간주관적인 방식으로 검증되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언명에 의해 올바로 기술되는 측면에서 그 대상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속에서 기술된 사상(事象) 그 자체가 의식과 무관계하게 출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사상은 올바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의 괴리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메이야수는 선조이전적 사건이 의식의 발전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의식에 앞서는, 바꿔 말하면 시간의식이 증여로서 주어지기 이전의 사건은 초경험적이며 존재론적인 레벨에서 상관주의에 의해 파악되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관주의에 부수하는 이러한 곤란에 대해 메이야수는 ‘원화석’(原化石)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과학적 수법을 통해 드러나는 선조이전의 연대에 논의를 한정함으로써 대처한다. 그 속에서 비교적 최근 탄생한 인류라는 종의 발생과 사멸은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즉 메이야수는 과학이 보여주는 시간성에 대해 그것이 의식의 시간성과 관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고의 독립적인 의미를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메이야수는 ‘인류’라는 문제와 완전히 단절한 것은 아니다. 메이야수는 자신의 책의 본문에 달아놓은 긴 주석에서 의식을 가진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경계를 서술하고 있다.

선조이전성의 논의가 본질적으로 ‘목격자 없음’의 반론과 구별된다면, 선조이전성에 대한 논의는 반대로 의식의 단독의 탄생과 죽음이 그 자체로, 의식적인 것일 수 없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론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때 상관주의는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되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개별적으로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을 주장하며 자신을 지켜낸다. 간주관성에 의해 직조된 시간이란 여러 의식의 공동체의 시간이며 그 속에서 탄생과 죽음은 다른 의식에게도 탄생과 죽음이며, 다시금 에고의 집합성에게 소여로 환원되면서 전개된다. 우리는 상관주의자의 이러한 대응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생과 사멸을 그에 대한 타자의 인식으로 환원한다. 우리는 이 도피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논의를 선조이전의 것으로 제한한다. 선조이전의 것은 모든 공동체를 일소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어떤 상관성도 이미 다룰 수 없게 된 시간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이 과학에 의한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이점을 갖는다.

인간의 의식의 발생과 기원을 묻지 않는 명백한 이유가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분명해진다. 첫 번째 이유는 상관주의에 의한 시간의식은 간주관적이며 공동체에 속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이 공동적인 의식에서 모든 삶과 죽음은 거기에 속한 다른 주체에 대한 삶과 죽음 외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요컨대 상관주의적인 시간의식에서 다뤄지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이야수의 비판은 간주관적인 의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에도 고유한 삶과 죽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고유한 삶과 죽음이라는 표현이 엄밀한 의미에서 타당한지는 차치해둔다. 메이야수가 문제로 삼는 것은 의식의 간주관성의 구조 속에서 어떤 삶과 죽음이 항상 간주관성의 작업을 통해 여러 의식(에고)에게 소유로 환원되고 만다는 것이다. 메이야수가 이것을 ‘절망적인 궤변’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식에서도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의 삶과 죽음이 다른 존재에게 집합성을 보존하기 위한 소여로밖에 인지되지 않는다면, 삶과 죽음은 태어나고 죽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메이야수의 시도는 모든 사상(事象)의 고유한 생성과 소멸을 묻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선조이전의 것’이란 삶과 죽음, 발생과 사멸을 ‘공동성으로부터 일소’하기 위해 던져지는 사변적 도구(tool)가 아닐까?

칸트의 인류학적 사고는 이성의 합목적성의 이름 하에서 인간의 발생을 ‘인류사’(혹은 인간의 ‘자연사’)라는 지평에서 사고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연개념의 모순과 다양성 혹은 이념으로서의 외부성은 담보로 제공되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 uniformity)은 자유의 조건으로, 즉 도덕적인 요청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으로는 생물의 역사처럼 다만 확고한 인간의 역사가 확립된다. 이러한 칸트의 인류사의 구조를 메이야수의 ‘선조이전성’의 관점에서 보면, 칸트가 ‘인류’의 이름으로 제시하고자 한 ‘공동성’의 의식도 분명해진다. ‘인류’란 칸트에게 불사의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인류가 직조한 인간의 ‘자연사’는 분기하면서 순환된 복수의 인종의 병립구조를 보존하며 ‘인류’가 통일체로서 연장해갈 수 있는 수단과 목적을 제공한다. 우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됨으로써’ 계속해서 살아간다. 이 구조 속에 종과 다른 것 혹은 종으로서 다른 이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불순’하고 ‘잡종’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통일을 견지하는 다양성으로부터 일탈하는(그렇게 간주되는) 자들은 휴먼적인 인간에 의한 순화의 폭력에 짓밟힐 수 있다. 역사에 총합되지 않는 삶과 죽음을 영위하는 잡종적인 존재방식이 바로 그러한 폭력에 저항한다. 

 

 

 

  1. 1936년 영국의 튜링(Turing, Alan M 1912-54)이 고안한 상상의 계산 기계. 현재의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원리가 됨.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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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올 수밖에 없는 인류학> 시리즈로 출간된 다섯 권 중 4권인 『人と動物の人類学』[사람과 동물의 인류학](2012년, 靑風社)의 서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 책에 담긴 총 열편의 논문 중 서너 개를 골라 번역할 생각이다. 인류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학문으로서 인류학이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주요테마로 다루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동물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방식이 완전히 파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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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지구적 차원에서 묻다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

1. 분절된 사람과 동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사람과 동물은 별개의 존재이다. 우리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영위하고 세계를 만드는 주인공이며, 그 주변에 개와 고양이, 보통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식용을 위해 사육되는 소와 돼지가 있고, 나아가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 기린이나 코끼리나 사자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 이렇게 배치된 데에는 그 나름의 인류사적인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비롯된 합리성과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전지구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그러한 사람과 동물의 배치가 고착되어왔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기독교의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동물로부터 사람을 떼어내고 사람을 사고와 감정과 정신을 가진 존재로 다뤄왔다. 그 의미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명료한 분할선이 그어져있다. 동물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토대로 구축된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우리의 생활과 제도에서도 사람과는 다른 존재이다.

한편 사람과 동물 사이에 그어진 분할선은 서양사고의 내측에서 천천히 붕괴되어왔다. 동물들은 적자생존의 개임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구탄생이후 유구한 세월을 거쳐 이뤄져온 그러한 영위의 결과 동물로부터 사람이 탄생해왔다는 학설이 19세기 중반 제창되었다. 생명과학과 영장류학 등 사람과 동물의 공통적인 평면을 다루는 현대과학의 현저한 진전에 따라, 오늘날 적어도 학문상으로 사람과 동물은 그렇게 확실하게 나눠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사람과 동물이 별개라는 사고방식이 깊게 침투해있다. 동물에게는 정신도 감정도 없다는 생각이 근현대의 주류적인 사고방식이 되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동물에게도 의식이 있으며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대항적인 사고방식이 출현하고 있다. ‘사람 동물’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동물로부터, 동물로부터 사람을 구분하고 나누는 것이라고 말이다.

 

2. ‘와/과’를 생각하기 위한 수사실험

『사람과 동물의 인류학』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사람과 동물’이라는 저 흔한 표현에 담긴 ‘와/과’에 주목해보자. 우리는 사람과 동물 사이에 ‘와/과’를 끼우고 사람‘과’ 동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의식하는 못하는 사이에 사람과 동물을 분리한다. 혹은 사람‘과’ 동물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람과 동물을 병렬로 놓는다. 여하간 ‘와/과’를 끼어둠으로써 사람과 동물은 다른 존재가 된다.

사람과 동물을 분리하고 별개의 존재로 만드는 언변은 ‘와/과’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와/과’ 자리에 ‘에게’를 삽입해보자. 사람에게 동물, 동물에게 사람이라고 말할 때, 사람과 동물은 병렬에 놓인다. 혹은 사람에게는 동물이, 동물에게는 사람이 나뉘어 적용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에게’에 의해 사람과 동물 사이는 멀어진다.

나아가 이번에는 ‘의’를 삽입해보자. 사람의 동물이란 사람의 소유물로서의 동물이며, 동물이 사람에 종속되게 된다. 그때 사람은 동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동물은 관리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동물의 사람이라고 하면, 동물 속에 있는 인격이나 인간성과 같은 것이 읽힐 것이다.

조금 더 이러한 수사실험을 이어보자. 이것은 사람과 동물을 분리해서, 구분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상상해보기 위한 단서를 얻기 위해서이다.

‘와/과’ 대신에 ‘은/는’을 삽입해보자. 사람은 동물, 동물은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어떤 사태가 나타날까? 사람은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다. 보통 사람은 동물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사람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놓고 있다. 반대로 동물은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어떠할까? 동화나 민요에서 동물은 말을 하거나 울거나 우는 등 사람처럼 행동한다.

‘와/과’ 대신에 ‘도’를 넣어보면, ‘은/는’을 사용할 때와는 의미내용이 다르다. 사람도 동물이라는 표현은 사람 또한 동물의 범주에 포함됨을 의미한다. 반면 동물도 사람이라고 바꿔 말하면 듣는 이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동물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 표현에는 동물도 사람의 범주에 포함됨을 뜻한다. 지구상에는 북미선주민들과 같이 전통적으로 동물도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다음으로 ‘(으)로부터’를 넣어보자. 사람으로부터 동물, 동물로부터 사람. 사람으로부터 동물로, 혹은 그 반대로 동물로부터 사람으로는 무언가가 부여되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사람으로부터 ‘사육’ 동물에게는 먹이가, 동물로부터 사람에게는 고기 등이 얻어지는 것처럼. ‘(으)로부터’는 증여의 방향을 나타낸다. 나아가 그렇게 바꿔 말하는 속에는 ‘와/과’에서 구별되는 것처럼 사람과 동물 사이에 설정된 경계선을 초월하여 사람으로부터 동물로, 혹은 그 반대로 동물로부터 사람으로 영역을 침범하는 초경의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람과 동물의 ‘와/과’를 대신에서 그 자리에 다른 단어들을 넣어보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양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동물 또한 사람이라는 사태이거나(행위주체성), 사람과 동물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섞이는 모습이거나(분리불가능성), 사람과 동물 사이에 분할선이 가정되거나(경계성), 그러한 분할선을 넘어 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침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초경성). 사람과 동물 사이에는 다양한 관계의 양태가 가능하다.

 

3. 문학이라는 본보기

그런데 문학은 이제까지 사람과 동물의 관계의 다양한 존재방식에 관해 실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는 알래스카 여행에서 만난 동물들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과 대조하면서 동물도 사람도 함께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행위주체임을 상기시킨다. 프란츠 카프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의 고뇌를 그렸다. 그레고르에게는 사람의 내면성과 벌레의 신체성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합되어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서 말(馬)의 혼 속에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16살의 존 그래디의 심정과 성장을 그렸다(『모두 다 예쁜 말들』). 1915년 북해도의 천염개척촌에 어느 큰곰이 나타나 이틀간 6명을 살해한 일본 동물피해의 역사상 가장 큰 참사를 다룬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는 경계를 넘어온 맹수와 그 공포와 사람들의 격투를 그렸다.

문학에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한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성으로 넘쳐난다. 이에 대해 『인간과 동물의 인류학』에서 시도하는 것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존재방식을 지구차원에서 민족지로 기술 검토하는 것이다.

 

4. 네 가지 관계성

‘행위주체성’, ‘분할불가능성’, ‘경계성’, ‘초경성’이라는 네 가지 양태를 설정한 속에서 사람과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탐구해보자.

제1부 ‘행위주체성’에서는 동물이 가진 ‘행위주체성’이 상정되는 민족지적 상황이 다뤄진다. 동물의 사람 혹은 동물은 사람 혹은 동물도 사람이라는 관계성이 다뤄진다.

「동물과 말하는 사람들」(1장)에서 야마구치 미카코(山口未花子)는 주체를 가진 동물과 관계를 맺는 캐나다 수렵민인 카스카족을 통해 ‘동물과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한다. 카스카에게 동물은 사람과 같은 존재이다. ‘동물과의 대화’는 단순한 해석이나 믿음의 산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카스카족의 생활 속에서 재검토해보면 그것은 동물과의 신체적ㆍ초자연적인 교섭을 통해 획득된 기술이나 지식임을 할 수 있다. 카스카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면서 동물과 교섭함으로써 동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왔다. 동물과 사람 사이에는 더욱 농밀한 사회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

「고자질 하는 돼지꼬리원숭이」(2장)에서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는 보르네오섬의 수렵민인 푸난 사회에서 천계의 신에게 사람의 조야한 행동을 고자질 하는 동물의 사례를 들고 있다. 동물은 사람과 같이 행동한다. 오쿠노는 사람과 동물,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항을 상정하고 그것들을 관계 짓는 구래의 동물 애니미즘을 비판하고 사상(事象)과 환경을 좇아 살아가는 그들의 행동 속에서 행위주체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여 동물이 가지고 있다는 인간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제2부 ‘분리불가능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섞여있다는 ‘분리불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사람도 동물이며 동물 또한 사람이라는 사태를 다룬다.

「서구에 나타나는 혼종성으로서 괴물」(3장)에서 마츠다이라 토시히사(松平俊久)는 중세에서 근세까지 나타난 유럽의 괴물을 다룬다. 괴물은 사람과 동물을 융합한다. 본래는 대립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동물을 하나의 신체의 구성요소로 만드는 괴물 그 자체는 무질서에 지배되지만, 그 한편으로 괴물은 사회적ㆍ집합적인 이해 혹은 합의라는 이름의 질서가 부여된 창조물이라는 적극적인 의미 또한 갖고 있다.

「‘인간고릴라’와 ‘고릴라인간’의 민족지」(4장)에서 오오이시 타카노리(大石高典)는 중부아프리카의 수렵채집민인 바카족과 농경민인 바쿠베레족을 다루고 인간과 고릴라가 표상 속에서 어떻게 섞이는지를 민족지적으로 그려낸다. 바카족은 바쿠베레족을, 죽으면 고릴라로 다시 태어나는 ‘고릴라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바쿠베레족은 바카족을 작은 동물로 변신하여 밭작물을 훔쳐가는 등 나쁜 짓을 한다고 여기며, 또 고릴라 안에는 고릴라이면서도 혼은 인간인 ‘인간고릴라’가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오오이시는 이 두 사회의 상호관계의 지평에서 사람도 동물이며 동물도 사람이라는 착종적ㆍ혼동적인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살아있는 만다라」(5장)의 서두에서 이시쿠치 토시아키(石倉敏昭)는 인간과 그 외 동물들에 공통하는 구강(口腔) 공간을 다루면서 사람도 동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카트만두분지에 위치한 네와르 지방도시 산쿠에서 만다라 모양의 도시공간구성의 경계를 이루는 네 개의 ‘문’과 그 외부의 ‘숲의 사원’을 둘러싼 바슐라 요기니 여신의 신화를 검토하고, ‘인간성’, ‘동물성’, ‘여성성’이라는 각각의 원리가 어떻게 상호 결합하여 사람과 사람 이외의 존재로 이루어지는 집합적인 세계상을 직조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제3부 ‘경계성’에서는 사람과 동물을 포함하여 존재자들 사이에 그어진 ‘경계성’의 존재양식을 검토한다. 사람과 동물, 사람에게 동물이라는 표현 속에 보이는 분절을 둘러싼 문제를 다룬다.

「오키노시마(隠岐島)의 둔갑하는 뱀」(6장)에서 콘도 시아키(近藤祉秋)는 오키노시마의 노인에게서 들은 사람으로 변신하는 뱀 이야기와 체험담을 회상한다. 이 속에서 동물은 동물로 고정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적인 종 분류법은 현실세계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다양한 종 분류법의 하나이지 않을까? 콘도는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의 정체를 꿰뚫어본다거나 지벌[각주:1]의 원인을 찾는다거나 하는 주제에 관한 오키노시마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니미즘’론의 지평에서 검토하면서 동물 분류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고찰한다.

「야생동물과 사귀는 법」(7장)에서 이케다 미츠호(池田光穂)는 생물다양성 보존을 둘러싼 논의에 등장하는 반달곰과 듀공과 현대일본인 사이에 상상되는 ‘사귀는 법’을 다룬다. 동물에 대한 사람의 ‘믿음’의 인지과정을 단서로 반달곰의 ‘항의활동’과 듀공의 법적인 ‘당사자적격’을 기술 검토한 하에서 동물에 대한 사람의 일방적인 ‘섀도복싱’ 상황을 그려낸다.

제4부 ‘초경성’에서는 동물이 사람과 동물 사이에 가설적으로 설정된 경계를 넘어 인간의 영역으로 침투하거나 몸을 던지는, ‘경계성’을 둘러싼 문제를 고찰한다. 이 속에서 동물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관계의 양태를 둘러싼 문제가 거론된다.

「공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경계>의 재생산」(8장)에서 메구로 토시오(目黒紀夫)는 아프리카의 마사이 사회에서 오늘날 야생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경계를 넘어 침입하여 사람들의 생활기반을 파괴하는 사태를 다룬다. 마사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야생동물과 ‘경계’를 만들지 않고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일상적 및 쌍방향적인 공격과 회피를 통해 거리와 긴장감을 수반한 공존을 실현하고 있다. 메구로에 따르면, 현재 정부의 개발ㆍ보존정책에는 그러한 ‘경계를 둘러싼 전술=거리의 재생산’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

「간극의 초경성(超境性)의 재검토」(9장)에서 니시자키 노부코(西崎伸子)는 자연보호사상을 출발점으로 하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설정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전개에 관한 전망을 살펴보고, 에디오피아의 야생동물 보호의 맥락에서 야생동물이 사람의 영역으로 경계를 넘어 침입하는 사태를 로칼한 경계인식의 관점에서 다룬다. 그리고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계성의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것 혹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선호되는 자연환경을 주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전제를 만들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 등을 제시한다.

「동물에 숨겨진 증여」(10장)는 Nadasdy, Paul(2007) "The Gift in the Animal: The Ontology of Hunting and Human-Animal Sociality" American Ethnologist 34(1), pp.25-43의 번역본이다. 지금까지 필리프 데스콜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팀 잉골드 등은 사람과 동물, 문화와 자연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이끌어왔다. 폴 나다스디는 그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 ‘동물에 숨겨진 증여’라는 북방선주민의 사고방식을 위치짓고 탐구한 인류학자이다. 그는 사람도 동물도 함께 ‘인간’이라는 관념 속에 포섭되는 존재로 여기는 북방선주민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둘러싼 북방선주민의 서사를 ‘은유’로 다루는 종전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넘어서고자 한다. 여기서 ‘인간’으로 번역한 것은 나다스디의 원문의 “person”이다. 북방선주민은 사람에게도 사슴(moose)에게도 ‘인간성’(personhood)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 의미에서 사람은 사람인간이며 사슴은 사슴인간이다.

 

5.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성

사람과 동물을 절단한 분할선에 의해 양자의 관계성이 정해져왔다는 지점에 동물을 둘러싼 오늘날의 과제가 숨겨져 있다. 동물은 사람을 위해 애완화되고 애완화하는 사람 손에 의해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단절된다. 동물은 육식을 위해서만 집단 속에서 사육되고 가축화된다. 사람과 달리 동물에게는 정신이나 감정이 없다고 간주되고 동물은 사람에 의해 관리ㆍ통제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인데, 그러한 동물들에 관한 문제의식이 이 책의 저류에 흐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특히 산업화 시대 이후 사람을 위해 목숨을 잃는 동물의 영을 위로하는 신앙실천이 왕성하게 이뤄져왔으며, 또 오늘날 유럽을 시작으로 동물권에 중점을 두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한 움직임은 동물을 사람과는 다른 단순한 물적 존재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일 수 있다. 지금 사람과 동물의 관계의 분할선을 뒤흔들고 있다. 아니 본래부터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다양하지 않았는가!

이 책 『사람과 동물의 인류학』의 목표는 인류사회라는 큰 시야 속에서 사람과 동물의 다양한 관계양상을 그려내고 동물에 관한 현대적인 과제를 생각해가기 위한 단서를 찾아내고 그에 대해 깊이 탐구하는 데에 있다.

 

 

  1. 신(神)이나 부처에게 거슬리는 일을 저질러 당하는 벌.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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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술술 읽힐 글이 아니다. 각 잡고 필기하면서 공부해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의 대략(http://sarantoya12.tistory.com/86)을 이해한 후에 최근 이 사상이 어떤 이론적 맥락에서 재평가되는지를 알고 나면, 적어도 왜 서구의 근대적 사고체계가 문제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다.

다만 이 글에서 퍼스의 재평가가 철학(수학의 철학 Philosophies of Mathematics)과 논리학에 한정되어 있지만, 실은 기호학, 지식사회학, 정치철학, 인류학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있다. 예를 들어 ‘공생과 연대’로 나아가는 퍼스의 공동체주의는 존 듀이에게 계승되어 최근에는 걸출한 여성정치철학자들(현대의 프래그머티즘을 이끄는 학자들 중에는 여성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을 중심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는다.

또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호학이 핵심적인데 이 글에서는 다만 간략하게만 언급되어 있어 글의 내용이 충분히 이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퍼스의 기호학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다룬 책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에두아르도 콘, 사월의 책, 2016년 9월 예정). 그 책이라면 퍼스의 기호학의 현재적인 학문적 의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체계의 핵심에 있는 데카르트주의, 그리고 데카르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플라토니즘. 퍼스의 사상과 그 사상을 복원한 현대의 사상가들이 이 데카르트주의와 플라토니즘을 어떻게 넘어서고 있는지를 잘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하면 이제 서구중심의 근대세계는 끝을 향해 가고 있고, 우리는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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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프래그머티즘

맥베스(Danielle Macbeth)와 띠에르슬랭(Claudine Thiercelin)

 

 

퍼스 재평가의 조류

2014년은 퍼스 사후 백년이 되는 해였다. 또 퍼스보다 세 살 연하인 제임스는 1910년에 사망했다. 2010년대에 사는 우리는 따라서 고전적 프래그머티스트의 사후 1세기가 지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프래그머티즘은 이 사상의 원류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014년에는 미국의 퍼스협회를 필두로 여러 학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퍼스 사후 백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고, 그보다 25년 전인 1989년에는 <퍼스생애 150주년 국제학술대회>가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1989년은, 로티가 『프래그머티즘의 귀결』이라는 책에서 퍼스의 의의를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명칭을 고안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폄하한 때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이 국제학술대회는 프래그머티즘의 본향인 하버드대학의 수학과 철학의 연구동, 대학의 중심부에 위치한 강당인 ‘메모리얼 홀’을 주회의장으로 삼아 일주일간 진행되었다. 수백 개의 개인발표를 포함하여 엄청난 규모로 진행된 이 대회는 퍼스에 대한 국제적인 철학 대회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티가 퍼스의 의의를 축소하자고 제창한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35년이 흘렀다. 그 동안 이 철학에 대한 위상은 크게 변모했다. 그리고 이 사상의 역사를 단순화해서 말하면, 그 최초의 징조는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의 국제학술대회에서 나타났으며, 프래그머티즘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금의 흐름으로 귀결되었다. 

25년 전 국제학술대회 논문집에 서술된 퍼스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① 유럽계의 철학자들에 의한 퍼스 평가의 고양

② 미국에서 퍼스 논리학의 평가

③ 수학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

이제 이 순서대로 살펴보겠다.

 

유럽계의 철학자들에 의한 퍼스 평가의 고양

1989년의 이 대회에서 미국계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유럽계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다수 기조강연을 행했는데, 그중에는 토마스 세벅(Thomas A. Sebeok 1920~2001, 헝가리 출신 미국 기호학자이며 철학자, ‘생명기호학’을 제안했다), 움베르트 에코, 위르겐 하버마스,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 1922~, ‘언어론적 전회’를 주장하는 독일철학자), 야코 힌티카(Jaakko Hintikka 1929~, 핀란드의 철학자) 등이 있었다. 이 사람들이 각각의 사상적 원류로서 퍼스에 대해 열정적으로 논했다는 것은 그때까지 미국철학 내부의 사상가로 여겨왔던 퍼스가 ‘유럽계의 현대철학에서도 원조의 한사람으로 간주된다’는 평가가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퍼스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함께 ‘기호학’의 창시자라는 것은 20세기 후반 유럽철학의 주류였던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기호, 의미, 언어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미 충분히 인식되었던 바이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독자적인 퍼스해석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호론적 문제의식이 소쉬르 계통의 프랑스 사상을 넘어서 보편적ㆍ초월론적인 프래그머틱한 관점으로 나아가고, 그러한 관점을 채용하는 하버마스, 아펠 등의 철학에까지 미친 결과, 퍼스의 언어철학이 영미권과 대륙철학의 양쪽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 학술대회를 통해 확실해졌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리차드 로티는 분석철학과 유럽철학의 불필요한 이분법을 강하게 비판하고 데리다와 푸코의 사상의 프래그머티즘적 성격에 강한 관심을 표해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20세기 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듀이,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의 3인의 사상가를 꼽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듀이의 사상적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 학회에 참가한 유럽철학자들이 보여준 ‘언어철학적 전환’의 이미지는 로티의 해석과 반드시 겹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퍼스 논리학의 평가

한편 유럽계의 퍼스평가와는 반대로, 미국 내부에서 퍼스평가는 기묘하게도 로티의 소극적 판정에 호응하는 듯한 어떤 부정적인 색채를 띠었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상징적 대표이며 앞장에서 살펴본 네오프래그머티즘의 위대한 보스라고 말할 수 있는 콰인이 평한 퍼스의 논리학이 그러하다.

콰인은 1989년의 이 대회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에 행한 프레게-러셀 유래의 논리학을 통한 퍼스 평가와 그에 대한 수정의견ㆍ비판적 의견을 검토했다. 퍼스에 대한 콰인의 예전 평가는 하츠혼(Charles Hartshorne, 1897∼2000)과 와이스(Paul Weiss, 1901~2002)가 편집한 『퍼스 저작집』(전6권, 1931-35)의 논리학에 관한 서평(1935년)에 담겨있다. 하츠혼과 와이스는 콰인과 마찬가지로 C. I. 루이스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의 제자이며, 당시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조수로 근무했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화이트의 권유로 그때까지 간행된 퍼스의 논문과 미간행 원고를 총합하여 퍼스의 체계적인 사상의 전모를 공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 『저작집』 편집자의 한 사람인 하츠혼이 103세라는 나이에 미국의 현역철학자 최장수자로서 등장하여 퍼스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을 비교 검토했다. 그리고 그보다도 열 살 이상 젊은 콰인—그럼에도 90세에 가까웠다—은 예전의 서평에서 행한 자신의 분석에서 그 일부를 수정할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라고 표명했다.

콰인의 맨 처음 평가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퍼스가 창시한 형식논리학은 ‘존재그래프’라는 이름의 기하학적 수단에 따른 기호법을 채용하여 지나치게 복잡했다. 그래서 논리학으로서는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복잡한 방법과는 별도로, 프레게와 마찬가지로 표준적인 기호논리학에서는 한정사의 도입 등에 관한 연구성과가 확실히 돋보인다. 그러나 프레게-러셀 유래의 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명제개수(命題開數)’ 개념의 파악이 불충분하며, 그 때문에 이 형식을 사용한 논리연산은 실질적으로 러셀이 비판한 조지 불(George Boole 1815~1864)의 대수적(代數的)인 집합산(集合算)의 구식단계에서 그다지 진전되지 않았다. 콰인은 이 대회에서 이러한 자신의 예전 평가를 변경할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대수(代數)는 수 대신에 문자를 사용하여 수의 성질이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하며, 집합산(集合算)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과 같은 집한연산을 가리킨다. )

그런데 이 강연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 사이에서 콰인의 논리학사 이해가 일면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들에 따르면,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이뤄진 논리학의 다원적인 발전을 더 강하게 의식해야 했고 그 속에서 퍼스의 역할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이 대회의 논문집을 참조할 수 있다.

 

수학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

한편 콰인과 젊은 세대 간의 의견의 차이는 이 대회의 주최측에 의해서도 표명된다. 그 점에서 이 대회는 하버드대학의 신구 철학자의 교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로티는 콰인의 입장에 가까웠고, 그것은 네오프래그머티즘을 콰인과 쿤의 연장선상에서 구상했던 로티로서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콰인에서 로티, 퍼트넘으로 넘어간 네오프래그머티즘 운동은 이 대회를 전후해서 그 주역을 퍼트넘으로 삼았고, 이후 로티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퍼트넘과 그 일파는 이 대회에서 퍼스가 1898년에 하버드대학 주변에서 행한 ‘추론과 사물의 논리’라는 표제의 연속강연의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다. 그들은 이 연속강연을 한권의 저작집으로 하버드대학 출판국에서 근간할 예정임을 공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퍼스의 논리관이 프레게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콰인에게 결함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 차이로부터 수학의 철학에게 결정적으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퍼스가 제창한 ‘연속주의’라는 이름의 특이한 형이상학적 입장과 그로부터 귀결되는 다양한 지식관ㆍ인식론의 통찰을 중시할 필요를 제기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추론과 사물의 논리』에 첨부된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필자 자신이 편집ㆍ번역한 『연속성의 철학』(이와나미 문고, 2001년)이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논문집의 간행

지금까지 25년 전의 퍼스 평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로티류의 네오프래그머티즘에 대한 프래그머티즘의 비판적 계승과 대결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퍼트넘의 새로운 프래그머티즘 해석으로 나타나는 한편, 맥베스 등 로티측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언어철학을 기반으로 내부적 비판이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앞서와 같이 퍼트넘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 퍼스의 수학사상은 이후 더 넓은 맥락에서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이러한 퍼스의 논리사상ㆍ수학사상에 대한 관심의 고조는 지난 20년 간 (앞에서 언급한 하츠혼이 편집한 1930년대의 저작집을) 면밀하게 교정한 저술연대순의 퍼스저작집의 재출간과 그 부산물로서 『퍼스 주요논문집』(전2권)이라는 매우 완결적인 논문집의 간행으로 이어진다. 이것들은 폭넓은 독자층에게 다시금 현대의 관점에서 그의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나아가 그의 수학논문 수십 편이 수록된 논문집이 출판되었다. 그리하여 수학의 철학 분야에 관련된 문헌을 더욱 쉽게 독해할 수 있게 되었고, ‘현대철학의 선구자로서의 퍼스’라는 이미지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이 논문집은 기하학의 연속성, 무한소, 칸토어의 연속성가설 등 다양한 테마를 다루었고, 이 논문집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텍스트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퍼스의 수학논문집도 앞서의 저작집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이미 전집에 실린 것들이지만 그에 접근할 수 있는 독자는 한정적이었다.) 이 논문집의 간행에 의해 25년 전 퍼트넘과 그 일파가 제기한 퍼스의 독자적인 수학사상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퍼스의 수학ㆍ논리학의 이해

여기서는 이 분야의 최근 연구에서 퍼스에 대한 관심문제로서 다음의 두 논점을 지적해둔다.

① 전문적인 수학자로서 퍼스의 구체적인 업적을 19세기 이후의 수학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위치지을 것인가의 문제—이에 관해서는 특히 ⑴ 퍼스가 고안한 특이한 토폴로지의 의의를 19세기의 수학사를 조망하는 가운데 재평가한다. ⑵ 그의 무한소 이론을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 러시아의 수학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 독일의 수학자)의 무한소 개념과 비교 검토한다. ⑶ 그의 기하학적 연속성의 관점을 아브라함 로빈슨의 초준해석(超準解析 nonstandard analysis: 비표준해석이라고도 한다)과의 비교를 통해 퍼트넘의 해석을 넘어 보다 근대적인 ‘범주론(category theory)’과의 유사성의 지적으로 나아가는 등 극히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한 테마로서 최근 흥미로운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② 퍼스의 수학론을 프래그머티즘의 진리론이라는 테마와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의 과제—이미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살펴본 것처럼 논리학의 역사의 시야에서 보면, 그가 19세기 후반에 한정사를 포함하여 형식논리학을 체계화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성과를 통해 그는 프레게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거한 논리학을 타파하고 현대논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콰인의 퍼스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논리학상의 성과를 프레게-러셀류의 논리학의 사상과 등가로 놓기에는 얼마간의 보류를 요한다. 그 큰 문제 중 하나가 (예를 들어 논리실증주의의 설명에서) 이제까지 프레게-러셀의 ‘논리주의’로 불러왔던 사고에 퍼스가 기여한 바가 없다는 점이다. 프레게-러셀의 논리주의는 수학적 명제와 진리를 이미 논리학의 개념과 진리로 바꿔 써왔다는 것, 즉 수학은 논리로 환원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퍼스는 수학과 논리학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한 바로는, 형식적인 사고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수학적 사고와 진리이며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오로지 형식적으로 순수한 수학에서 파생한, 한계가 분명한 분야에 관한 적용례라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서는 수학이야말로 논리적인 가능성이라는 통상의 개념을 넘어서 모든 의미의 가능성을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는 참된 가능성의 학문이다.

 

수학론에서 본 진리의 객관성

퍼스는 이렇듯 가장 넒은 의미에서 수학을 가능성의 학문으로서 ‘사물의 가설적 상태에 관한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즉 수학은 모든 대상의 영역에 적용 가능한 가설-귀결 관계에 관한 일반이다. 그렇다고 그가 수학적 추론이 가진 확실성, 보편성, 필연성을 방기한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수학적 추론으로부터 내재적ㆍ가설적ㆍ추론적이며 게다가 ‘객관적인 요소’를 건져내면서 그 형식적 필요성을 용인했다.

이 독특한 주장은 당연하지만 어떤 인식론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의 ‘탐구의 이론’과 ‘기호학적 인식론’과의 교차점에서 수학적 명제의 진리와 추론의 타당성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그러나 문제는 인식론적인 테마에 한정되지 않는다. 퍼스가 채용한 수학관은 20세기 이래 수학의 존재론에 관한 다양한 철학적 입장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라는 존재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0세기에 활발하게 논의된 수학의 철학 분야에서 중심적인 테마 중 하나는 이른바 ‘실재론 대 유명론’의 대립이다. 퍼스는 이 주제에 대해 수학의 철학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 걸쳐 매우 풍부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의 논의는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어떤 의미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스콜라적 논의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수학론에 대한 그의 관심의 초점은, 이 테마와 얽힌 그의 수학론을 논함으로써 프래그머티즘과 진리의 객관성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지점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의 테마인 ‘프래그머티즘과 진리의 객관성’과 가장 밀착된 문제로서 특히 이 존재론적 주제와 엮여있는 최근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수학적 진리를 둘러싼 실재론ㆍ비실재론 논쟁과 퍼스의 관점에서 본 해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1970년대에 폴 베나세라프(Paul Benacerraf 1931~, 미국의 철학자, 현대의 수학의 철학을 대표하는 연구자 중 한사람)가 제기한 모든 수학적 진리의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라는 것을 다룰 필요가 있다.

 

수학의 철학에서 ‘플라토니즘’

플라토니즘이라는 말은 이 책에서 논한 듀이의 철학사론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 명칭은 여하간 플라톤의 사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철학적 발상을 가리키기 때문에 수학의 철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듀이의 『철학의 개조』(1920년)까지 갈 것 없이 19세기 이후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 등 유럽계의 철학사상에서 플라토니즘은 나쁜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사상의 편향을 가리는 말로 사용되어 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수학의 철학에서 플라토니즘이라는 명칭은 조금 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된다.

실은 이 말은 베나세라프보다 한 세대 먼저인 파울 베르나이스(Paul Isaak Bernays 1888~1977)라는 독일의 논리학자ㆍ수리철학자(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보다도 조금 연장)에 의해 1935년을 전후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막스 프랑크와 함께 수학했고 그 후 다비트 힐베르의 조수로 일했으며 1921년 괴팅겐대학의 조교수로 취임했다. 베르나이스야말로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수학의 철학의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나이스는 나치를 피해 1934년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했고 거기서 행한 ‘수학적 진리’라는 국제적인 강연에서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강연의 테마는 ‘수학의 기초의 새로운 위기’였는데, 이 위기는 아렌드 하이팅(Arend Heyting 1898~1980),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Nikolaevich Kolmogorov 1903~1987, 러시아의 수학자) 등이 품었던 문제의식, 즉 직관주의와 유한주의의 가능성, 혹은 형식체계의 불안전성을 둘러싼 새로운 탐구의 필요성이라는 의식을 가리킨다.

베르나이스는 이 강연에서 플라토니즘에는 온건한 타입과 강한 타입의 두 종류가 있으며, 세부적인 차이는 별도로 하고 이것들 모두가 수학적 대상의 집합 전체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연수 전체라는 집합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체’를 우리의 사유작용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베르나이스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은, 어떤 수학적 대상의 집합이 만드는 전체는 그 전체를 사고하는 인식주체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명쾌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해석하는 입장에 있다. 즉 무엇인가의 수학적 대상의 전체가 그것을 파악하는 인식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한다는 사고를 그는 플라토니즘이라고 불렀다.

 

플라토니즘의 딜레마

여기서 플라토니즘의 가능성을 논하는 베르나이스 자신의 문제의식이 인식주체와 그 대상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된다는 점에 주의해보자. 이것은 그와 그 주변의 철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신칸트학파나 현상학이라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미국류의 프래그머티즘과는 완전히 다른 철학사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은 당시 ‘새로운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넘어서 수학의 철학의 영역에서 계속해서 확장된다. 그런데 신칸트학파가 아닌 분석철학의 버팀목인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기초로 하여 다시금 플라토니즘의 문제를 제기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미국의 베나세라프이다.

베나세라프는 베르나이스와 함께 편집한 『수학의 철학』에서 20세기의 수학의 철학의 기본적 맥락을 널리 알림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이 대표적 논문집 2쇄에 자신의 1937년 논문인 「수학적 진리」를 한편 수록했는데, 이 논문이야말로 그 후 수학의 철학에서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결정짓는다.

그 논문에서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학적 대상의 독립자존을 주장하는 플라토니즘에 준하여 수학적 대상이라는 추상적 존재의 실재성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의 인식에 관한 직접적인 앎, 즉 직관적 파악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수학에 관한 진리는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을 조금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① 수학적 대상은 일반적으로 개개의 언어와 공간적 특성 혹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독립한 추상적 존재이다.

② 한편 우리의 지식이란 일반적으로 인식된 대상과의 인과적 접촉에 기초한 정당화된 인식이다, 라고 보통 이해된다. 따라서 추상적 대상인 수학적 대상은 통상의 의미에서 지식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③ 고로 수학적 대상에 관한 인식은 보통의 의미에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에는 뉴욕보다 오래된 대도시가 적어도 세 개 존재한다’는 문장과 ‘17보다 큰 완전수는 적어도 세 개 존재한다’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전자는 구체적인 대상인 뉴욕에 ‘더 오래된’이라는 경험적 성질을 연결시킨 문장이다. 후자는 추상적인 대상인 17에 ‘더 큰’이라는 경험적 성질을 연결시킨 문장이다(완전수란 그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이 그 자신과 같은 수, 예를 들어 6이나 8과 같은 자연수를 말한다).

이 두 문장은 닮아있다. 그러나 전자는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에서 충분히 처리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자연수와 그 부분집합이 가령 존재한다 해도 그 진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특수한 인식을 필요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애당초 진리라고 할 수 없거나, 이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

형식적 사물이나 추상적 대상의 승인과 경험주의적인 인식론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할까? 퍼스의 수학론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그의 특이한 수학관이 수학적 대상에 관한 진리를 둘러싼 이 논쟁에서 이제까지 고려되지 않았던 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띠에르슬랭의 해석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수학의 철학에서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의 문제를 다뤘던 사상가는 적지 않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콰인의 대응인데, 이 입장에서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은 그것을 결여하고서는 과학의 현실에의 응용이 불가능하다는 프래그머틱한 요청에 기초한 것만이 인정된다. 또 콰인과는 대조적으로, ‘과학적 대상인식에서 직관적 파악을 인정한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마디(Penelope Maddy)의 답변도 잘 알려져 있다. 이것들은 유명론에 가까운 실재론과 그 반대로 매우 강고한 실재론의 각각의 사례인데, 여기서는 이 논의를 염두에 두고 퍼스의 이론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논고를 소개한다. 그것은 맥베스와 띠에르슬랭이라는 두 여성철학자의 해석이다.

앞서 베나세르프가 말한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의 3단 논법에서 결론[③]을 피해 수학적 대상에 관한 진리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두 방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수학적 대상이 어떤 추상적인 것일지라도 경험적인 지각의 차원과 연결된다는 입장이다. 즉 ①에서 ②로의 추리를 부정하는 입장을 채용하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경험적ㆍ인과적 연결을 거부할지라도 그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 즉 ②에서 ③으로의 추리를 부정하는 입장의 방향이다. 띠에르슬랭은 퍼스의 수학 사상을 전자의 방향으로 해석하는 반면, 맥베스는 퍼스가 후자의 방향을 채용했다고 해석한다.

우선 띠에르슬랭의 약력을 소개하면, 그녀는 소르본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학위를 취득한 프랑스인 철학자로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형이상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이제까지 프래그머티즘에 비교적 냉담했던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형이상학자로서 퍼스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1970년대 이후 유럽 철학자들의 퍼스 평가의 귀결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녀의 퍼스 해석에 따르면, 퍼스의 입장은 유명론과 가까운 콰인의 입장과 수학적 인식의 직관적 파악을 인정하는 (예를 들어 괴델과 같은) 플라토니즘 사이에 위치한다. 그녀의 이해에 의하면, 퍼스는 수학적 대상을 단지 추상적ㆍ자존적 존재가 아닌 가설적ㆍ추론적ㆍ귀결적으로 확장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적 대상에 대한 이 이해는 반데카르트주의에 서는 것이며 인식의 직접성, 비매개성, 내관성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퍼스는 수학적 대상에 관해, 강한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 즉 ‘대상이 인식주체에서 완전하게 초월한 영역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을 애당초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강한 플라토니즘이 거부된다고 해서 수학적 대상의 가설성을 강조하는 이론이 수학적 대상의 실재성을 방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각도에서 대상의 일반성과 경험적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수학적 대상=가설적인 대상의 파악이라는 인식적 사태를 가능하게 하는 가설형성적 추론의 역할에 있다.

 

가설형성적 추론이란 무엇인가?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이란 우리가 보통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그 합리적인 설명을 도출하고자 하는 일종의 추측적인 추론이며, 연역적 추론(deduction)과도 귀납적 추론(induction)과도 다른 독자의 추론형식을 갖는다. 

연역이란 진리를 확보하기 위해 전제에 포함되는 내용을 분석적으로 석출하는 추론이다. 귀납이란 유한한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 보다 일반적인 명제를 형성하는 추론이다. 이에 비해 가설형성은 불가사의한 현상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능케 하는 어떤 가설을 제언하는 추론이다. 이를테면 ‘이제까지의 경험이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사상(事象) C가 눈앞에 있다. 그런데 만약 H가 있다면 C의 성립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고로 어쩌면 H인 것은 아닐까?’라는 추론의 형식이다.

이 추론에 나오는 H는 하나의 가설이면서도 C로 이어지는 전제이기 때문에 하나의 일반자 내지는 보편자이다. 따라서 수학적 대상이 가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일반자이자 보편자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경험적인 대상과 단절된 존재자라는 의미에서의 추상적 존재는 아니다. 가설형성이라는 추론에는 불가사의한 현상 속에서 합리적인 설명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지각’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가설을 찾아내는 것은 데카르트적 직관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순수하게 수동적인 감각경험도 아니며, 단정적인 인과적 상호작용도 아니다. 그것은 시사적(示唆的)인 인식이며 능동과 수동의 중간에 위치한 인식이며 경험내재적 및 경험초월적인 인식이다.

퍼스는 직관과 감각의 중간에 위치한 이 미묘한 인식의 형태를 기호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아이콘적 표상’이라고 불렀다. 전제로부터 귀결을 분석해서 산출하는 연역적 작업은 기호에 포함된 개념내용을 분석적으로 해석하는 작업과 다르다. 연역적 작업을 허용하는 기호는 의미내용을 확정한 상징이다. 반면 어떤 불가해한 사상(事象) 속에서 이해 가능한 개념을 읽어 들임으로써 이 형태를 부각하는 가설형성적 작업은 이 사상(事象)을 아이콘으로 보고 그 속에서 어떤 시사적(示唆的)인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이다.

아이콘적인 표상은 시사적인 의미를 대상으로 가지는 한에서, 경험적인 현실이나 객관적인 세계와의 연결을 확보한다. 그것은 가설적인 것이라 해도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사상(捨象)하는 추상적 대상은 결코 아니다. 나아가 이 아이콘 내의 형상을 파악하는 움직임은 바로 대상 속에서 어떤 모습을 발견한다는 도상적(圖像的)인 사유의 움직임이라는 의미에서 기하학적인 추론을 그 본성으로 한다. 즉 가설형성적 추론으로서 수학적 추론은 그 대상에 관해 준-경험적인 차원을 가짐과 동시에 그 인식의 스타일로서 도상적인 사고를 본질로 한다.

콰인은 퍼스의 논리학이 도상적인 방향으로 편향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띠에르슬랭의 해석에 따르면, 그것은 콰인이 가설형성적 추론의 대상으로서의 수학적 개념이라는 발상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퍼스에게는 수학이 논리학에 선행한다. 이것은 상징으로서의 기호에 순화되어 형식화된 논리학 체계가 상징에 본질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며, 나아가 상징은 결코 아이콘이나 인덱스적 성격을 완전하게 사상(捨象)할 수 없다는 것이다. 퍼스의 사고에서는 상징의 차원만으로 추론하는 논리학은 기호의 복합적인 차원을 추상화한 것만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수학적 추론에 비해 파생적이며 이차적이다.

이상의 해석을 정리하면, 수학적 대상의 지각이라는 인식에는 가설형성적인 요소가 본질적으로 관여한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적인 앎이라는 의미에서의 직관이 아니고, 그보다 추론적이고 가설형성적ㆍ확장적인 지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포리오리한 인식이 아닌 지각경험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험적인 인식이라는 본성은 결여되지 않는다. 퍼스의 입장은 ‘수학적 대상의 인식’을 이와 같이 성격짓기 때문에 베나세르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맥베스의 해석

한편 띠에르슬랭과는 또 다른 논의로 ‘플라토니즘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한 맥베스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캐나다대학 출신으로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피츠버그학파에 속하는 철학자이다. 현재 펜실베니아주의 하바포드 콜리지(Haverford College)의 교수이며 대표작으로 『프레게의 논리학』이 있다.)

띠에르슬랭에서 확인했듯이 퍼스의 인식론에서는 수학적 인식이든 감각적 인식이든 어떤 인식작용도 기본적으로는 기호적이며 비직관적이기 때문에 수학적 대상에 관해서도 직관적인 접근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퍼스의 입장에서는 수학적 대상인 수와 기하학적인 도형은 당연하게도 그 자체로서 독립 자존하는 플라톤적 대상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또 다른 의미에서 수학적 대상을 추상적인 존재로 승인가능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수학적 대상 내지는 수학적 개념의 ‘의미’를 퍼스의 의미 이론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본다면, 그러한 개념의 유래를 경험이나 지식의 역사적 발전의 차원에서 되돌아보도록 하는 역사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의 초반부에 서술했던 ‘프래그머틱한 격률’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외부세계의 대상도 아니고 내관(內觀)에 부여되는 직관적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실험적인 상황 하에서 상정되는, 가정과 귀결의 관계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추이적(推移的)ㆍ추론적ㆍ조건법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퍼스의 이 사상에 관해 종종 간과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개념의 의미의 비인과적ㆍ추이적ㆍ귀결적ㆍ조건법적 성격을 적용하는 것이 실은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적 개념 일반이라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수학적 개념이나 논리적 개념에 대한 것이라는 매우 독특한 사실이다.

확실히 퍼스 자신이 의미의 격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예는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에 대한 명제인데, 그로부터 그의 개념의 의미에 관한 분석이 외적세계에서 경험적 성질의 인식을 전형으로 한다는 이해가 자연스레 도출된다. 그러나 그의 의미의 격률의 최초의 정식화는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 실은 과학의 이론의 해명에 앞서) 전문적인 철학 잡지에 게재된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전개된다.

퍼스는 보통의 의미에서의 경험적 개념보다도 오히려 수학적 개념의 의미 분석이 중요한 문제이며, 이 점을 이해한 버클리의 사상의 의의와 그 분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버클리는 영국경험론 철학자로 세계는 물질이 아니라 관념에 의해 가능하다는 관념론의 주장으로 유명한데, 수학의 철학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무한소 개념을 비판하며 당시 역학이 전제로 삼은 뉴튼적인 물질 개념을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능성에 열린 수학적 진실

퍼스는 이 버클리론에서, 제곱근과 허수 등 그 자체로는 경험적인 이미지와 감각적 지각에 대응하지 않는 개념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유의미한 개념인지를 문제로 삼는다. 이 개념은 얼핏 보면 참으로 기묘한데, 수학적 대상에 대한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복잡한 수가 아닌 단순하게 마이너스를 표시하는 숫자를 생각해도 된다. 마이너스는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양한 계산과 표시를 가능케 하는 매우 유효하고 생산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이 개념들은 의미에 관해 귀결적ㆍ추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귀결적 의미란 그것들이 어떠한 계산적 실천과 증명적 실천과 작도적(作圖的) 실천 속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맥베스에 따르면, 퍼스뿐만 아니라 프레게에서도 실은, 일반적으로 논리주의의 철학으로 이해되는 그의 플라토니즘에는 결코 단순한 직관적 인식으로 수용되지 않는, 귀결주의적ㆍ조건법적 의미의 이론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에게 수학이나 논리학의 이른바 아포리오리한 개념이야말로 조건법적인 의미내용의 전형을 드러낸다는 사고는 이제까지 수다한 프래그머티즘의 진리론에서 상대주의와 비실재론적 경향에 대해 매우 선명한 반론의 가능성의 효과를 갖는다.

제임스, 콰인, 로티를 따라 점차적으로 더욱 강하게 비실재론적 논조가 만들어지는 인식의 전체론적 성격의 발생과정을 생각해보자. 제임스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은 ‘담화의 우주’라는 전체론적 시스템을 형성하고 그 속에는 중심도 주변도 없지만 모든 신념과 진리는 이 영역의 불확정적인 발전에 조응하여 그 진리치를 바꿀 수 있다. 마찬가지로 콰인은 이제까지의 아포리오리 내지는 분석적인 수학의 진리는 신념의 거미줄의 중심부분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건강하며 이 외측에 있는 신념은 경험을 이루는 매우 가변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로티는 신념 전체가 자문화의 관심의 견지라는 조건 속에서 의미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은 것, 바꿔 말하면 진리의 후보를 결정한다.

그런데 맥베스의 퍼스론은 인식의 전체론적 이미지에 관한 이러한 이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새로운 도식을 제안한다. 그녀가 보기에, 퍼스의 신념의 거미줄에서 가장 외측에 있고 그에 따라 항상 개정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콰인에게는 가장 중심에 있는 논리와 수학의 명제이다. 반대로 퍼스의 신념의 거미줄에서 가장 내측에 있고 그에 따라 보다 건강한 진리요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보통의 일상적 경험에서의 감각적 인식의 명제와 신념이다. 퍼스의 수학론에서 수학적 진리는 아포리오리도 아니고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새로운 개념구성의 가능성으로 열려져 있으며 그 결과로서 항상 새로운 진리의 발견에 열려져 있다. 그것은 인식의 전체적인 영역의 중심이 아니라 외측의 주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신념의 궁극의 기반

그러나 그렇다면 왜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 건강하고 수학적 진리는 그보다 가변적인 것일까? 그것은 후자가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인식의 역사적 발전의 성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 신념은 동물이 가진 신념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체의 생리적 조건에 제약되는 신념이며 무엇보다도 견고한 핵을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동물적 신념에 이러저러한 정신적 개입을 행함으로써 세계를 더 넓게 볼 수 있는 조감도적인 인식과 표상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 조감도적인 표상을 철저하게 추상화함으로써 데카르트 좌표와 토폴로지적 표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수학적 신념의 세계이다. 그것으로 도달하는 이 과정은 역사적 진화의 과정이며 그 궁극의 기반이 되는 것은 감각적ㆍ일상적인 경험이다.

퍼스가 강조했듯이 신념의 가장 깊은 루트는 동물적인 본능에 있다. 그러나 그 본능에서 정신적 진화의 결과로서 수학적인 추상적 사고가 성장한다. 따라서 수학적 진리의 세계가 세계와의 인과적 상호작용을 결여한다고 해서 그에 관한 실재론을 방기하는 것은 아니다. 

맥베스가 보기에, 베나세라프가 말하는 플라토니즘의 딜레마는 우리의 수학적 인식이 ‘직관인가, 직접적 외계와의 인과관계인가’라는 잘못된 이분법 하에서 제기된 것이다. 수학적 진리가 직관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다면, 외부세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에 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플라톤도 주목했다시피, 역사적인 발전 과정 속에 있는 개념적 성과로서 그 의미는 항상 개정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인과적인 연결을 결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험적 기반을 가지지 않는 비ㆍ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적ㆍ감각적 경험이라는 기반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파생된다는 의미에서 외적인 경험세계와의 연결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또한 20세기에 활발했던 네오프래그머티즘의 상대주의적 경향에도 이러한 잘못된 이분법이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로티와 그 일파의 다원적 진리론에서는 ‘직관인가,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인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인가, 세계관 및 가치관의 관여인가’라는 이분법을 사용하는데, 이때에도 ‘직접적 외부세계와의 인과관계 없이는 실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실재성 및 객관성과 외계와의 인과관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맥베스에 따르면, 이미 로버트 브랜덤(Robert Boyce Brandom)도 강조했던 이 발상을 퍼스의 수학론에 의한 딜레마의 해결이라는 방향에서 더욱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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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출간된 프래그머티즘에 관한 또 다른 입문서(大賀裕樹『希望の思想─プラグマティズム入門』、筑摩選書、2015年)에 따르면, 퍼스의 생애가 평탄치는 않았다. ‘만성적인 안면신경증에 시달린 탓에 모르핀과 코카인을 항시 복용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1859년부터 30년간 미합중국의 해안측량부에서 일했지만 기괴한 행동으로 쫓겨나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 후 퍼스는 유산으로 펜실베니아의 거대한 토지를 사들였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어 빈한하게 살았고 심지어 하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체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체포를 피해 뉴욕에서 2년 가까이 노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퍼스를 위해 제임스가 퍼스의 연속강연을 기획하고 그 강연료를 미리 건네주었지만 강연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고, 또 친구들이 퍼스의 집필 작업을 위해 기금을 모아주었지만 단 한권의 저술도 남기지 못한 채 1914년 자택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21-22). 그가 살아생전 자신의 사상이 100년을 뛰어넘어 21세기의 ‘미래의 철학’으로 부활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글을 통해 대략을 이해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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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의 프래그머티즘―퍼스

 

 

격동하는 신세계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탄생 사이에 놓인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미국이라는 나라는 엄청난 변모를 경험했다.

찰스 퍼스(1839~1914)가 이 사상의 이름을 처음으로 고안한 1870년 무렵 영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에 의한 경제적 팽창이 최고조에 이른 한편 파리코뮌과 같은 혁명적 기운도 높아갔지만, 미국은 아직 남북전쟁을 일으킨 분단과 상호불신, 전투와 사상자로 넘쳐나던 극히 비참한 세계에서 겨우 몇 년 지났을 뿐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윌리엄 제임스(1842~1910)가 이 사상을 국내외의 사상계로 발신했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때에 미국은 그때까지 ‘팍스 브리태니커’를 구가해왔던 영국제국의 국력을 따라잡으며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세계의 패자(覇者)로서 도약해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부호의 대명사이기도 한 록펠러 가문의 최초의 성공자인 존 록펠러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오하이오주에 작은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석유자본의 선구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이 1865년이며, 또 미국중서부와 서부해안을 잇는 대륙횡단철도를 개설한 것이 1869년이다. 이 시기는 프래그머티즘의 첫 번째 탄생시기와 완전히 겹친다.

이러한 사업을 시발로 석유산업의 경이적 성장과 서부개척운동의 활발화에 의해 19세기 말 뉴욕의 주식시장은 매매규모에서 런던의 주식시장을 앞서갔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시장으로 발돋음 한다.

미합중국은 내부적으로 분단되고 혼란스러운 신세계에서 세계를 석권한 경제대국으로 급속하게 변모해갔다. 프래그머티즘은 무엇보다 이 격동하는 신세계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청년들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사상운동

퍼스와 제임스는 동시대를 살았으며 하버드대학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사이였다.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이 발흥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신세계의 경제적인 급 발전과는 별도로 당시 하버드대학을 둘러싼 문화적, 사상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그들이 젊은 연구자였던 시절 남북전쟁 후의 신생미국은 당시 구세계인 유럽의 과학적 진전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미국 독자의 과학연구의 발전이 요구되었다. 당시 링컨대통령 등 국가의 핵심적 리더들은 이를 강하게 의식했고, 실제로 퍼스의 아버지 세대는 그러한 과학적 발전을 경주하게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의 주요대학에서 그때까지 2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청교도(Puritan) 개척민의 신학적 전통에 반발하는 별종의 철학적ㆍ사상적 운동을 예비하는 정신적 기운이 생겨난 것이다. 그 중심적 역할은 하버드대학이 위치한 보스턴 주변 지역에 널러 퍼져있던 ‘초월론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독자적인 사상에게 주어졌는데, 그 사상으로부터 문예와 종교에 관한 새로운 발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등의 문학가들이 모여들었고, ‘아메리카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미국 독자의 사상운동이 형성되었다.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와 같은 특이한 문학가의 세계도 이 운동의 기풍을 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이 에머슨의 지적인 그룹에는 하버드의 유력한 수학교수였던 퍼스의 아버지와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 자연과학자ㆍ신학자ㆍ철학자)주의의 종교가인 제임스의 아버지가 있었다. 프래그머티즘의 ‘원류’에 위치하는 퍼스와 제임스는 이 아버지들 세대의 친교를 통해 하버드의 학창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의 고도의 발전에 대한 희망을 키워감과 동시에 정신적인 사상운동에도 공명해나가는 것—이것이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스트들을 길러낸, 당시의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의 매사추세츠ㆍ뉴햄프셔ㆍ버몬트ㆍ메인ㆍ로드아일랜드ㆍ코네티컷 등 6개 주의 총칭) 특유의 지식환경이었다.

 

형식논리학에서의 혁명

고전적 프래그머티즘의 최초의 주창자인 퍼스는 링컨대통령의 과학아카데미 설립계획에도 참여한 유력수학자인 아버지 벤자민 퍼스의 차남으로 유년시절부터 과학자, 수학자, 논리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전도유망한 학생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아버지 벤자민 퍼스는, 19세기 중반 서양의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이제까지의 상식을 깨는 대대적인 혁명뿐만 아니라 수론에서 기하학까지 수학 일반을 토폴로지 등을 응용하여 추상성 높은 일반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자 하는 야심적인 기획을 목표로 삼았다. 19세기 중반의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혁명이란 유클리트 기학학의 공리와는 다른 공리체계에 따른 비유클리트기하학—니콜라이 로바쳅스키(Nikolai Lobachevsky 1792~1856, 러시아의 수학자)와 게오르크 리만(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 독일의 수학자)—과 무한의 요소를 가진 집합에 대한 연구—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 러시아의 수학자)—등의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혁명은 바로 철학에서 근대를 개척한 데카르트가 고대 이후의 기하학과 아라비아 유래의 해석학을 총합하여 해석기학학의 창출이라는 혁신을 이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세계에서 엄청난 혁명이었다.

퍼스 자신은 부친의 이러한 수학적 기획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연구방향을 세우고 그것을 형식논리학의 분야에서의 혁명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한편,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의 사상적 전제와 문제설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통해 서양근대철학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고하는자 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은 바로 이 후자의 반데카르트주의 철학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는 논리학의 분야에서의 퍼스의 업적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것인데, 그것은 이 테마가 철학사의 언저리에서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형식논리학에서 퍼스가 일으킨 혁명은 철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고대그리스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철학의 세계에서는 암묵적으로 논리학이라는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완성했고 그 이후 논리학에는 어떤 발전도 변화도 없다고 이해해왔고, 퍼스와 고틀롭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독일의 논리학자ㆍ수학자ㆍ철학자)에 의한 이 한계의 돌파는 이 논리학에 대한 그간의 암묵적인 이해에 대한 결정적인 파산선고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퍼스는 칸트의 범주론 등의 연구와 아버지의 토폴로지 등의 공간구조의 연구를 병행함으로써 도상적인 ‘관계의 논리학’의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그것은 내용적으로 완전히 독자적인 방식으로 한정사(quantifier)[명제함수를 정의하는 데 사용하는 기호를 말하며 양화사(量化詞)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모든 ~에 대하여’를 나타내는 전칭양화사는 ∀이고, ‘어떤 ~에 대하여’를 나타내는 존재양화사는 ∃이다]를 포함한 함수적인 형식논리학을 독일에서 구축했던 프레게의 업적과 거의 맞먹는 것이다. 게다가 퍼스와 프레게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는데도 거의 동시기(1880년을 전후)에 각각의 체계를 공공화했다. 퍼스의 논리기호의 시스템은 그 후 에른스트 슈뢰더(Ernst Schroder 1841~1902, 독일의 수학자ㆍ논리학자)와 앨프리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ㆍ철학자)에 의해 채용되고, 프레게 체계는 화이트헤드의 제자이며 공저자이기도 한 러셀에 의해 발전된다. 우리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게 될 콰인의 계승자들은 화이트헤드와 러셀 등의 논리 사상을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그 초석을 닦은 한 사람이 퍼스라고 말할 수 있다.

 

반데카르트주의 철학

이제까지 논리학자로서 퍼스의 업적을 극히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 등의 형식적인 학문뿐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등 실질적인 과학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의 업적과 경력은 그의 생애를 통해 여러 분야로 제각각 흩어져 있고, 그 속에서 가장 길게 이어간 것은 미합중국 연안측량부에서 지리학ㆍ물리학의 연구자로서의 위치와 하버드대학의 천문대 연구원이라는 자리였다.

수학자이면서 과학자이기도 하고 철학자였던 퍼스는 자신의 사명이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등 과거의 위대한 과학자ㆍ철학자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의 최대 과제를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를 비판한다는 테마로 설정했다. 그의 반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은 대체로 다음의 단계를 밝아가며 전개되었다.

①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출발점을 이루는 ‘보편적 회의ㆍ방법적 회의’라는 발상은 애당초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기획임을 보인다.

② 데카르트는 ‘회의’ 끝에 ‘명석ㆍ판명한 관념이야말로 진리이다’라는 원리를 세웠다. 그러나 ‘회의’가 무의미하다면 ‘관념의 명석성’의 다른 기준ㆍ격률(格率)이 세워져야한다. 우리가 가진 신념이나 관념은 어떻게 명석화 될 수 있을까? 그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③ 이 기준 하에서 관념이 명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정의해야 한다.

퍼스는 1876년경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라는 과학 잡지에 ‘과학의 논리를 해명한다’라는 표제로 연속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과학적 탐구에 관한 다양한 테마—예를 들어 귀납법의 문제라든지 가설 형성의 방식 등—을 순차적으로 논했는데, 그가 자신의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을 공적으로 논한 텍스트의 중심에 이 논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이 논문을 통해 퍼스를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위의 ①의 논점에 대해서는 ‘과학의 논리를 해명한다’라는 논문 시리즈보다 8년 전, 그가 30세 무렵 『사변철학잡지』라는 또 다른 잡지에 낸 두 편의 논문을 참조한다. 먼저 이 후자의 논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데카르트적 회의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은 ‘방법적 회의’라는 신선한 발상이다. 『방법서설』 등에서 전개된 데카르트 철학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과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일체의 일상적 신념과 과학적 지식을 백지로 돌려놓고 전면적인 회의를 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면적인 회의 후에 어떤 관념이 아직 정신 속에 남아있는가를 검토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을 출발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전면적인 회의를 행한 다음 무엇이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인가를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하고 회의로부터 ‘코기토 에르고 솜’으로 향하며 근대적인 자아를 확립했다.

그러나 퍼스는 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주제에 대해 과감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이 테마를 『사변철학잡지』에 발표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몇몇 종류의 능력에 대한 질문」과 「네 능력의 부정의 귀결」이라는 두 논문에서 주장한다.

데카르트적 탐구의 논리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면적인 회의를 행한 후 자신의 정신을 들여다본다 해도 우리의 정신에는 그러한 ‘내면’이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러한 내면이 있다고 해도 회의라는 방법으로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과 지식을 모두 완전히 백지로 철회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퍼스가 이 논문들에서 말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몇몇 종류의 능력’이란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의 세계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구별을 넘어서 공통으로 확인되어온,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이미지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의 인식작용이란 인식주체인 내가 자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직관 혹은 지각하는 것’라는 도식, 즉 ‘사고란 내적인 관념의 지각’이라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퍼스는 서양의 근대철학에 공통하는 이 도식에서 암암리에 인정되는 능력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눈다. ‘관념’, ‘확실한 자기인식’, ‘기호 없는 사고’, ‘물 자체의 인식’으로서, 이 인식능력들에 대해서는 심리학의 실험결과를 보아도, 개념 그 자체의 정합성을 보아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관념설이 전제하는 ‘네 가지 능력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인식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코기토로서의 나는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 혹은 인식작용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견해란 우리가 ‘기호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식주체로서의 자아란 바로 그것이 산출하는 기호의 연쇄 그 자체이며 인식 혹은 사고란 결국 기호적인 표현 혹은 언어를 연쇄적으로 만들어내며 종결 없는 추론의 과정에 참가하는 것에 다름 아닌 사고이다. 인간이란 기호 내지는 언어이며, 기호와 인간은 서로를 배우며 서로에게 가르친다. 기호체계가 변화하고 발전하듯이, 인간의 사고도 변화하고 발전하고 과정적으로 이행한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이 최종적으로는 ‘내관(內觀)’에서 종결하며 나아가 ‘직관’이라는 단적인 모습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고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에는 ‘내관’에 의해 투시되는 것과 같은 투명한 의식의 내면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기호에 매개되어 물질적인 측면을 소거할 수 없으며 외계에 대한 지시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바꿔 말해 외부세계와 단절된 코기토로서의 ‘나’는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코기토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은 단지 정신이라는 실체가 마음속에서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공부한 ‘보편적 회의’라는 철학적 탐구방법이 사실은 실행불가능하며 무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회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출발점은, 철학연구에 착수하고자 할 때에 우리가 실제로 취하는 모든 선입견이다. 이러한 선입견을 하나의 격률에 의해 불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입견은 본래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서에서 회의론은 단순한 자기기만이며 실제의 의심이 없다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적 방법의 추종자이든 다른 누구든 우선 형식적으로 방기한 모든 신념을 다시금 형식적으로 발견하기까지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퍼스는 이처럼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보편적 회의는 실제로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우리의 지적활동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실제의 의심(real doubts)’, ‘진짜 회의’라고 한다. 퍼스가 생각하는 진짜 회의란 우리가 견지하는 다양한 신념의 기존의 네트워크에서 어떤 의심들이 생겨나고 그 의심들을 버려두면 우리의 삶의 활동이 지장을 받게 될 때 그러한 장면에서 행해지는 문제제기이다. 우리는 신념의 네트워크에 기초하여 개개의 욕구와 희망을 만족시키며 무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행동에서 실패와 좌절이 연속된다면 우리는 어떤 신념이라도 의심하며 그 신뢰성을 다시금 음미할 것이다.

 

신념과 회의의 연쇄

우리는 본래 다양한 활동으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적능력을 활용하고 무언가를 인식한다거나 신념체계를 형성한다거나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누구라도 활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쾌하며 실패나 좌절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동, 행위, 실천은 그리스어로 ‘프라그마(pragma)’라고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인 회의의 길을 부정하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역할을 음미하고자 하는 그의 인식론은 행위를 축으로 사고하는 한에서 프래그머티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에서 우선 주목되어야 할 ‘프라그마’라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자연스레” 이해하는 속에서 무수한 활동을 행한다. 이 추론은 신념이 욕구가 조합됨으로써, 외부세계로 향해가는 행위를 위한 디딤판을 제공한다(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저녁식사로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가짐과 동시에 오믈렛이 맛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오믈렛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떠올려보고 그 재료를 얻기 위한 필요한 수단을 정리하여 그 수단과 관련된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다 … 이 경우에 다양한 신념을 엮어내어 하나의 추론의 연쇄가 생긴다).

이 행위의 버팀목으로서 각각의 신념은 그러나 항상 신뢰가능하며 확실한 기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 신념은 다양한 행위의 맥락을 통해 신뢰성이 상당히 희박한 것, 혹은 극히 의심되는 것으로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 그 전까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던 신념이 다양한 새로운 상황 하에서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극히 의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지적탐구에서 회의란 퍼스에 따르면, 이러한 실제 행위의 맥락 속에서 의심되는 것으로 간주된 낡은 신념을 진지하게 음미해보는 것이다. 회의란 이 맥락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고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회의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지적탐구에서 신념과 회의는 항상 역동적으로 교체되는 연쇄를 이룬다. 다양한 신념의 네트워크 없이는 구체적인 회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탐구의 수행을 거쳐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념은 다른 내용으로 개정된다. 우리가 신념에 기초한 회의로 나아가고 이 회의로부터 탐구로 향함으로써 새로운 신념에 도달한다는 【신념—회의—개정된 신념】의 사이클에서 모든 신념은 상호 관여함과 동시에 잠재적으로는 오류일 가능성을 가진다. 모든 신념은 연계되어 있음과 동시에 개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류적(可謬的)’이다[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우리의 탐구에 의해 달성되는 지식이란 이처럼 데카르트가 꿈꾸었던 것처럼 절대적인 확실성의 기초(코기토 에르고 솜)의 기저로부터 파고들어가 명석판명성(明晳判明性)이라는 기준으로 선별된 지식의 층이 순차적으로 쌓아간다는, 수목과 같은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신념의 네트워크가 몇 겹으로 조합되는 시스템으로서의 지식이다.

 

프래그머틱한 격률

그러나 모든 것이 신념의 네트워크이며 그 모든 부분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개정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신념체계에 ‘진리’라는 개념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모든 신념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확실성을 부정당하고 어떤 신념도 지식체계의 기초라는 지위를 얻을 수 없다면 애당초 신념에 대한 진위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근저에서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 자체로 지식의 단념, 진리의 방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그 때문에 퍼스는 앞서 반데카르트주의의 철학으로 ②와 ③의 논점을 제기하고 이것을 1877년의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서의 연속논문 시리즈로 논했다.

그는 우선 ②의 테마를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와 연계된 신념이라는 발상 하에서 ‘사고와 판명, 신념과 명제를 명석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논한다. 그가 여기서 ‘명석ㆍ판명한 관념은 진리’라는 ‘데카르트의 격률’에 대체하여 ‘프래그머틱한 격률’을 도입한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등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ㆍ인식론으로서 우리가 자신의 정신을 반성적으로 이끌고자 할 때에 필요한 지침으로서 ‘격률’을 제기한다. 격률이란 근본적인 원리는 아니지만 행위지침으로서 충분히 기능하도록 하는 유의미한 규칙을 말한다.

퍼스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보편적 회의가 무의미한 것처럼, 데카르트의 격률, 즉 ‘명석ㆍ판명한 관념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무효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 ‘명석ㆍ판명’이란 어디까지나 정신의 내면에서 출현한 관념의 특징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주관적인 현상이며 대개 개인이 품는 ‘느낌’과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념이 개인에게 명석하게 느껴지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명석하고 활용 가능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사고는 내면에서가 아니라 공적인 장면, 기호 등의 공공적인 것을 매체로 함과 동시에 그것이 행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회의를 포함하여 지적노력의 의의가 안정된 행위의 지침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한다면, 사고의 명석ㆍ판명은 어떤 행위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귀착되어야 한다. 그래서 퍼스는 다음과 같은 ‘프래그머틱한 격률’을 사용해서 관념 혹은 신념에 관한 ‘고쳐 쓰기의 도식’을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과 데카르트와의 대비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의 논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념을 명석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서 관념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내관(內觀 introspection)에 의해 지각되는 마음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신념’ 혹은 ‘글’이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는 관념ㆍ신념ㆍ글‘다이아몬드를 사용해서 긁으면 모든 물질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관념ㆍ신념ㆍ글

이것은 얼핏 보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문장의 교정인데, 문법적으로는 큰 변환이 숨겨져 있다. 처음의 문장은 ‘주어+술어’의 보통의 평서문이며 단문이다. 한편 그 다음 문장은 두 개의 문장을 포함하는 복문이며 그 형식은 ‘앞서 행하면 그 다음으로 귀결한다’는 전제ㆍ귀결을 표하는 조건문이다. 즉 보통의 평서문은 이 ‘명석화’의 방법에 따르면 조건문으로 고쳐 쓸 수 있다.

고쳐 쓴 전제ㆍ귀결의 조건문은 행위의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인가에 흠집을 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때, ‘다이아몬드를 사용해서 긁으면 모든 물질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신념’이 이 욕구표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명석함의 제3단계

서장에서 잠시 살펴본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서 제임스는 프래그머티즘이 우선 퍼스에 의해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고 하면서 퍼스가 만든 ‘격률’을 언급했다. 제임스는 퍼스의 격률을 그 나름의 사고 변형을 가해 설명했는데, 그것은 퍼스가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 실은 첫 번째 논문, 「우리의 관념을 어떻게 명석하게 할 것인가?」에 서술된 격률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격률을 보면, 퍼스의 원래 문장과 제임스의 인용문과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변화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의 엄밀한 이해라는 관점에서는 결코 무시될 수 없지만, 대략을 소개하는 본 글에서는 큰 문제로 삼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해의 명석함의 제3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가진 개념의 대상이 무엇인가의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우리가 생각한다고 해도 만약 그 효과가 행동에 대해서도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상정된다면 그것이 어떤 효과라고 생각되는지를 꼭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 음미에 의해 파악되는 효과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관념이야말로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모든 개념을 이룬다.

퍼스는 여기서 이해의 명석함에 관한 제3단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의미하는 제1단계란 사회적인 통념의 수준에서의 명석함 혹은 우리가 상식 하에서 ‘자명’하다는 명석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제2단계는 데카르트적 회의 하의 내관의 수준에서의 명석함이다. 이에 반해 그 자신이 말하는 명석함의 제2단계란 어느 대상에 대한 사고와 관념을 그 대상이 ‘효과가 행동에 대해서도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상정된다면 그것이 어떤 효과라고 생각되는가’ 라는 모습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퍼스는 이 격률을 ‘프래그머틱한 격률’로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고내용을 실천과 행동에 임하는 자기 자신에 의한 유의미함의 관점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행동에 임할 때의 유의미함의 관점이란 대상이 행동에 대해 어떠한 실제의 영향, 효과를 갖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격률을 중심으로 구상되는 우리의 인식 혹은 지혜의 본성과 의의를 생각하는 철학전체에 대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신념의 진리화로의 길

조금 더 이 의미의 격률에 대해 부가하면, 이 의미의 격률은 통상 평서문에서 표현되는 신념(‘S는 P이다’)을 행위와 효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조건문(‘만약 행위a를 실행한다면 효과e가 얻어질 것이다’)의 모습으로 고쳐 쓰시오 라고 명한다.

평서문에서 조건문으로 고쳐 쓰기를 언어철학과 논리학의 문제로서 조금 더 언급하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퍼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에서 평서문의 이해를 함수와 변항(變項 variable)의 형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프레게와 나란히 현대논리학의 선조가 되었다. 이때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의 형식논리적인 표기는 거칠게 정리하면 ‘함수ㆍ단단하다(x) 그리고 x=다이아몬드’이며, 그것은 명제 간의 진리보존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연역적 추론에서 큰 위세를 발휘한다.

그러나 집합론적 의미론에 대응하는 이 함수표기적 분석과 실천적 신념의 활용이라는 입장에서 사유되는 평서문의 조건법적 변환이라는 발상은 완전히 동일한 아이디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반드시 서로 잘 들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퍼스의 의미의 격률을 엄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면 논리학적으로는 다양한 기술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2부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조금 더 다룰 것이며 나아가 3부에서 살펴볼 퍼스의 수학론의 재평가라는 테마와 관련해서도 한 번 더 검토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선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즘의 기본적인 발상을 다룬다는 맥락에서 이 의미 분석의 골격을 대략적으로 이해해보았다.

여하간 우리의 신념은 이 격률을 활용함으로써 행위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유의미한 신념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을 갖게 된다.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을 예로 간단하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평서문의 형식의 주장은 가설적인 조건문으로 변환됨으로써 행위의 맥락에서 이용 가능한 유의미한 문장으로 명석화된다. 그러나 문장이 명석하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임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명석화하기에 앞서 그 진리화의 길을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신념 확정의 스타일

앞서 언급했다시피,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에서 진리라는 것을 해명하는 단계 ③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행하는 지적활동에서 탐구는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다. 그에 주목하여 사고의 명석화에 더욱 적합한 탐구방법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그 스타일이 채용할 수밖에 없는 진리관을 진리의 새로운 정의로 채용하게 된다. 이것이 단계 ③이다.

우리의 지적탐구는 어디까지나 다양한 의심의 상태에서 벗어나 신념을 확정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려는 기획이다. 탐구에 대한 이 정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일정한 신념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것이 된다. 즉 ‘어떤 방법도 무방하기 때문에 신념만 얻을 수 있다면 좋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퍼스는 말한다.

신념을 ‘확정하는 힘’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 그것들을 그룹으로 분류하면, 각각의 스타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신념이 그 후의 의심에 대해 더욱 강고하게 저항하여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신념의 획득법인가 라는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신념의 확정스타일로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른다’, ‘사회적 귄위에 따른다’,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과학적 탐구의 공동체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라는 네 종류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확정하기 위해 이것들 중 어떤 방법에 따른다고 할 때에 어떤 신념의 확정스타일이 유의미한 스타일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위해 충분한 탐구 과정을 밟을 수도 있으며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믿는다고 할 수도 있다.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다양한 환경의 변동이나 위기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일체의 의심을 품지 않고 어떤 신념을 “그냥” 계속해서 믿는 것이며, 종종 ‘타조정책(ostrich policy)’이라는 경멸적인 어구로 표현되기도 한다(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으로 머리를 박고 ‘보지 않으려는 행동’을 한다고 한다). 또 ‘사회적 권위에 따른다’는 방법은 자신의 신념체계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기 위해 현실직시를 거부한다는 자세는 아니지만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는 경우, 예를 들어 국가지도자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상의 절대적 지도자의 교시를 절대시하는 것으로서 맹신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이것들은 신념을 확정하는 힘으로서는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며 무가치한 정책인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념을 개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극히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이며, 대가가 따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와 대가라는 것을 최대한 중시한다면, 신념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지적노력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신속하게 신념을 확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이 극히 유력한 스타일이다.

 

과학적 탐구의 방법

그러나 이 두 스타일은 사회의 변화와 환경의 격변에 대응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분명 건강함을 결여하고 있다. 신념체계에 어떤 의심이 생길 가능성이 있을 때에 종래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체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극히 폐쇄적인 사회에서만 유효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의 격변 등을 경험한다면 매우 큰 혼란을 낳을 수 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는 방법과 과학적 탐구를 중시한다는 후자의 두 방침은 맹종도 아니며 지적인 의미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다만 그것들은 지적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상 어느 쪽에서 지적노력이 유효한 것일까 라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 점에 대해 퍼스는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기초한 탐구는 단지 방법적 회의라는 자기기만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이라는 모호한 개인적 자질에 의거하고 있는 한에서 그 결론은 결국 개인적 선호의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추론이 이성에 맞을까? 그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판단되는 한, 그것은 개인적 선호의 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개인적 선호의 판정이 무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념의 실패나 좌절에 동기 지어지는 회의와 탐구가 개인적 선호의 판정으로 귀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중간하다.

신념이 개정된다면, 그것이 대가를 수반하는 작업인 이상, 신념이 고정 후에는 가능한 한 장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즉 가능한 한 건강한 것이어야 한다. 그 때문에 개인적 선호에 의거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신뢰성이 낮다. 따라서 개인적 판정의 단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복수의 탐구자의 의견과 신념을 상호 비판적으로 대조하여 그 합의에 따라 더 나은 탐구를 기도한다는 과학적 탐구로 나아간다. 바꿔 말하면, 탐구를 개인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탐구자의 공동체의 결착에서 판정을 구하는 스타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신념개정의 가장 우월한 스타일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즉 과학적 탐구방법이야말로 우리의 신념의 확정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방법은 그것이 복수의 탐구자의 공동 작업에 의해 성립된다는 의미에서 단독의 이성적 반성자의 인식보다도 더 건강하며 유효성이 높다. 그러나 과학의 강함은 탐구자의 복수성이라는 것만으로 산출되지 않는다. 과학적 탐구는 가설의 경험적 실험이라는 의미에서의 귀납적 추론과 가설의 착상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설 형성적 추론과 법칙이나 가설로부터의 예측의 도출이라는 의미에서의 연역적 추론이라는 세 종류의 추론의 패턴이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모습으로 잘 맞추어서 실행된다. 즉 과학적 탐구는 복수의 서로 다른 추론 스타일이 그물망처럼 서로가 서로의 추론의 강함을 보강한다.

퍼스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가 공동체적이라는 것과 다수의 추론스타일의 상호보증이라는 것은 사태의 표리이다. 과학은 형이상학을 근간으로 하여 그곳으로부터 성장하는 줄기와 같은,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탐구자와 많은 가설적 추론이 하나의 그물망처럼 얽혀감으로써 그 강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미래’와 진리

즉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진리’의 의미는 탐구방법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스타일이 있을 때에 그 스타일 속에서 전제되는 진리개념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한에서 과학적 탐구방법이야말로 그러한 신뢰성 높은 탐구방법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산출되는 진리의 의미란 과학적 지식의 추구에서 상정되는 진리개념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공동체가 상정하는 진리개념이란 결국 어떤 것인가? 퍼스에 따르면, 그것은 ‘탐구의 공동체라는 이념적인 조직을 사고하고, 그 속에서 탐구의 무제한적인 지속을 통해 무한의 과정의 수렴점으로서 생각되는 최종적 신념’이다. 진리란 눈앞에서 바로 찾아지는, 이미 손에 넣은 신념이 아니다. 모든 신념은 가류적인 이상, 최종적 신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 신념’으로서의 ‘진리’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무제한의 탐구의 지속이라는 이념적인 모델과 상관하는, 이념적인 존재로서 무수한 탐구를 이끄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공동체와 결속되며, 나아가 공동체의 미래의 모습과 결속되는 개념이다. ‘언젠가’ 모든 신념이 총합적으로 체계화되어 최고도의 조화를 체현하는 것이라면, 그때 진리란 현현(顯現)하는 무엇인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학과 논리학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선구적인 과학적 발견을 해낸 퍼스는 이러한 ‘공동체의 미래’에서 의견일치라는 비전을 자신의 진리개념으로 삼았다. 그는 때로 다양한 신념의 네트워크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수렴점으로 결정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강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탐구과정이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이론적 조화로 ‘수렴’하는 것. 이것은 여러 과학적 분야에서 활약하며 수학과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발자취를 남겼던 퍼스가 품은 ‘진리’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온 프래그머티스트들의 상다수(콰인, 로티 등)는 이 개념에 강한 의문을 표명한다. 그리고 그 의문을 최초로 표명하고 진리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한 사람이 바로 다음에서 살펴볼 퍼스의 절친, 제임스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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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 사상사에 관한 책의 서문을 번역했다. 프래그머티즘이 어째서 21세기의 '미래의 철학'과 다시금 접합되면서 활력을 얻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뒤로 갈수록 아주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많은데, 어디까지 번역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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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

이토우 쿠니타케(伊藤邦武)

 

 

1. 복수의 탄생과 재생

 

세 번의 탄생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은 대체 언제 탄생했는가?

기묘하게도 프래그머티즘은 복수—적어도 두 번, 경우에 따라서는 세 번—에 걸쳐 탄생한다.

첫 번째 탄생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탄생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유방식이 하나의 유력한 철학사상으로서 미국 안팎의 철학계에서 선언된 것으로, 최초의 탄생에서 20년 이상이 지난 1898년에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사상은 이 무렵부터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여 미국철학에서 주류적 입장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탄생은 20세기 중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어떤 의미에서는 사상계의 배경으로 물러나있던 프래그머티즘이 다시금 미국 철학계의 중심으로 도약한 사실을 가리킨다. 프래그머티즘의 탄생의 해라기보다는 재생의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이 미국의 사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유래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이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을 전후해서 미국철학은 다시 프래그머티즘으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그 확대운동이 20세기말까지 세계전체로 파급됨으로써 결국 20세기의 중심적 사상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첫 번째의 탄생시기인 1870년을 전후하여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이 사상의 ‘창시자’는 철학자 찰스 퍼스이다. 퍼스는 과학자ㆍ논리학자로서 평생을 보낸 사상가인데, 1870년을 전후한 당시 신진기예(新進氣銳)의 연구자로서 미국동부해안의 하버드대학 철학과의 주변에서 몇몇 친구들과 ‘형이상학 클럽(Metaphysical Club)’이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조직했다. 그는 클럽의 중심적 인물로서 이 클럽의 토론석상에서 이 사상의 이름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다.

두 번째의 탄생시기인 1898년에 이 사상의 의의를 세계로 설파한 이는 퍼스의 사상적 동반자이며 형이상학 클럽의 멤버이기도 했던 윌리엄 제임스였다. 그는 이 무렵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런 그가 19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미국서부해안의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철학의 개념들과 실제적 효과(Philosophical Conceptions and Practical Results)’라는 제목의 강연을 행하고 그 속에서 이 철학사상이 하나의 독립된 체계적 세계관, 인간관, 인간의 지적능력과 본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임을 강하게 설파했다. 제임스의 이 강연 후,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각국에서 이 사상에 공명하는 철학자, 사상가들이 생겨났고, 이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서양의 유력한 사조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의 탄생시기인 1951년에 이 사상의 재생을 부추긴 것은 당시 하버드대학의 가장 유력한 철학교수이자 논리학자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이다. 그는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로 대표되는 영어권의 분석철학을 계승한 미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가 이 해에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라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유력한 논리실증주의라는 사상의 근본적 문제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의 대안적 사상의 원리로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발상의 의의를 주창했다.

콰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세계의 철학계 전체를 이끈 중심적 사상가였기 때문에 그의 이 주장에 의해 프래그머티즘은 논리실증주의의 세례에서 벗어나 보다 세련된 철학사상으로 재생할 수 있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콰인 자신은 자신의 사상을 오로지 프래그머티즘으로만 특징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하간 그 후에 이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이 콰인의 프래그머티즘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 사상을 전개해왔고, 이 전개운동은 ‘네오 프래그머티즘’으로 불리게 되었다.

 

첫 번째ㆍ두 번째 탄생의 반향

그런데 퍼스가 처음으로 이 사상을 형성하고 제기했을 때, 그의 주변에는 제임스뿐만 아니라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Oliver Wendell Holmes Jr.)와 천시 라이트가 있었다. 그들은 법률, 철학, 의학, 신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도유망한 전문가ㆍ연구자로서 활약 중이었다. 이 시기는 미국 최대(최악의) 내전인 남북전쟁이 종결된 후 5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60만 명이 넘었다.

그들은 이 비참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청년세대의 날 선 의식을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표현하고자 했으며 그 사적모임의 명칭으로 ‘형이상학 클럽’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다시금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의 기반을 본격적으로 재구축하려는 의기투합이라기보다는 청년세대 특유의 굴절된 자의식 혹은 유머감각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하버드에 모인 퍼스의 동료들은 일부러 ‘형이상학’이라는 고루한 이름을 표명함으로써 그 반대로 새로운 별종의 사상을 만들어내자는 역설의 열기를 내보이고자 했다.

이 퍼스의 사적연구클럽 내의 사상의 선언은 그 후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라는 과학잡지에서 논문시리즈로서 공표되기도 했는데, 그 반향은 극히 한정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 후 제임스가 이 사상의 내실과 의식을 세계에 설파했을 때에는 그에 동조하거나 반발하는 철학자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제임스는 버클리 강연 후 1906년과 1907년에 두 연구기관에서 일반청중을 상대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연속강연을 행하였고 그것을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에두아르 르 루아(Édouard Le Roy), 가스통 밀로(Gaston Milhaud) 등의 사상가들로부터 상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실러(Ferdinand Canning Scott Schiller)와 미국의 존 듀이 등 많은 찬동자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당시 정통의 철학세계에서는 이 사상을 기묘하고도 유치하며 풋내 나는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 사상을 경시한 철학자들은 전통주의적인 사람들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프래그머티즘과 마찬가지로 구래의 신칸트주의와 헤겔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분석철학이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상을 구상해온, 그들보다도 한세대 젊은 철학자인 영국의 무어와 러셀조차도 이 사상이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라고 하면서 강하게 비판한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면, 일본에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 출판된 때는 메이지40년[1907년]인데, 이후 일본에서도 이 사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다나카 오도(田中王堂 1868~1932, 와세다대학 문학부 교수, 존 듀이의 제자이며 일본에서 프래그머티즘에 기초하여 평론활동을 전개했다.) 일파 등의 열렬한 신봉자가 나오는 한편 메이지45년[1912년]에 출간된 『영ㆍ독ㆍ불ㆍ일 철학어휘』에도 ‘실용주의’라는 용어로 소개되었다. 니시다 키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 교토대 철학교수, 교토학파 창시자) 또한 당시 미국에 있던 친구 스즈키 타이세츠(鈴木大拙)를 통해 제임스의 사상을 접했으며 다이쇼 기간 동안 교토대학의 <철학개론>에서 이 사상을 ‘실용주의’라고 번역하여 ‘진리란 인생에서 유용(useful)한 것을 뜻한다. 그 외에 다른 영속 불변한 것 자체에 진리와 같은 것은 없다’고 소개했다.

 

세 번째 탄생과 논리실증주의 비판

제임스가 활약한 이후 20세기 전반의 미국에서 프래그머티즘은 세상의 이러저러한 평판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으로부터 이입된 논리실증주의의 엄격한 논증스타일에 압도되어 일시적으로 사상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윽고 콰인이 이 사상의 재생을 선언함과 동시에 루돌프 카르납(Rudolph Carnap)으로 대표되는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해 강력한 내재적 비판을 전개한 결과 러셀류의 분석철학의 일 분파라고 할 수 있는 카르납의 사상은 크게 방향전환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콰인을 계승한 철학자로서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am), 리차드 로티 등 많은 사람들이 프래그머티즘을 기초로 삼아 사상을 전개하며 20세기 후반의 철학계에서 활약했다. 그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분석철학의 유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이지만, 논리실증주의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특유의 ‘사실과 가치의 변별’이라는 대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하게 프래그머티즘 진영에 서있다.

카르납의 실증주의에서는 외적인 세계에 관한 과학적 진리로서의 사실적 진리 이외에는 도덕이나 미적인 가치에 관한 진리일 뿐이다. 그 외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주관적인 감정이나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은 진리에 관한 이러한 과학일변도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리고 콰인 이후의 분석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색채가 남아있는 입장뿐만 아니라 프래그머티즘적인 경향을 강조하는 입장도 포함한다. 20세기 후반의 분석철학의 주류는 당연히 후자라 말할 수 있으며, 후자의 경향이 크게 우세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패거리 세대의 구세주와 배반자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의 형성에는 이와 같이 복수의 탄생이 관계하고, 그 발전의 역사 또한 장기간에 걸쳐있다. 게다가 이 형성과 발전의 궤적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 즉 다양한 입장의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앞서 ‘들어가며’에서 서술한 것처럼 현대사상으로서 이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사조의 교대 속에서 긴 호흡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이 긴 호흡은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 사상이 복수의 탄생을 거쳐 몇 번이나 재생해왔다는 그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이렇게 복잡한 역사적 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한편으로 우리가 가령 ‘프래그머티즘이란 어떤 사상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에 대한 답변 또한 복수일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적어도 누군가가 ‘이 사상은 본래 어떤 사상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정의와 이미지를 제기할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장기간에 걸친 사상운동에서 그만큼 다양한 철학자가 관련된 이상, ‘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들이 여기저기 흩어질 수밖에 없음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분명한 하나의 사상체계 혹은 세계관이 아니라 다수의 사상이 모여든 일종의 모호하고 어렴풋한 철학적 신념의 패거리 세대가 아닐까—? 우리는 경우에 따라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재밌게도 이 상념은 실은 이 사상의 (두 번째) 탄생기에 이미 공적으로 표명되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아서 러브조이(Arthur Oncken Lovejoy 1873∼1962)라는 철학자는 하버드대학의 제임스의 제자였는데, 그는 오늘날 철학사의 대작인 『존재의 대연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러브조이는 1908년에 『Journal of Philosophy』라는 잡지에 「13인의 프래그머티스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이 잡지는 당시 제임스를 중심으로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아성이며 지금도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 잡지의 지위를 갖고 있다. 러브조이의 이 논문을 수록한 논문집은 『13인의 프래그머티스트』라는 제목으로 1965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프래그머티스트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서로 매우 다른 철학을 품고 있으며, 나아가 그 속에는 분명히 모순된 입장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세하게 해명한다. 이때 ‘13’이라는 숫자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배신자 유다 또한 포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족일지 모르나, ‘이 운동의 구세주가 누구이며 배신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사상운동의 처음부터 제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로부터 장기간에 걸쳐 온 이 운동의 역사에서도 언제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보여주는 프래그머티즘의 역사의 통람 또한 하나의 수수께끼를 해명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구세주도 배신자도 한사람으로 한정되지는 않겠지만.)

 

프래그머티즘은 초점 없는 사상?

여하간 스승으로서 제임스 자신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책을 발표한 그 이듬해, 프래그머티즘의 거점이 되는 잡지에 러브조이의 논문이 실렸다는 사실을 보아도 이 사상의 주변에 흐르는 혈기와 함께 여러 의미에서 사상의 혼란이라든지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형성, 발전, 장래를 생각해본다는 이 사상은 탄생의 시점부터 이미 혼란스러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정합적인 사상의 기라성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의미에서 ‘프래그머티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프래그머티스트의 수만큼 답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상은 일반적으로 말의 ‘정의’라는 것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음에서 상세하게 논하듯이 우리의 지성이 산출하는 사상의 레테르, ‘~이즘’이나 ‘~주의’라는 입장이 사상 그 자체로서 확실하게 고정된 정의를 가질 수 없고 경계와 윤곽이 희미하며 다양한 사상의 ‘내용’, ‘의미’, ‘의의’라는 것은 그 사상의 명칭에 있기보다도 그것이 응용되고 활용되는 장면에서 구체적인 이용의 맥락 하에서만 확실하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이 주장하는 주요의제 중 하나이다.

나아가 프래그머티스트들 간에는 각각의 주장의 방향과 중점의 위치가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그 핵심에 있는 사유방식, 즉 많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을 이어주는 발상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입장의 이합집산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서로의 주장이 중첩되면서 부상하는, 이 사상의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그리고 그 초점은 흐릿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2. 제임스가 생각한 ‘프래그머티즘의 의미’

 

방법론에서 진리론으로

여기서는 앞으로 좇아갈 프래그머티즘의 사상내용의 전개의 그 첫걸음으로서 이 사상을 정면에서 특징지었으며 그와 더불어 그 보급에 가장 공헌한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책을 우선 다루고, 그 속에서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성격규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제임스의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버클리에서 강연을 한지 8년이 지난 후인 1906년과 그 이듬해에 보스턴의 로웰협회와 뉴욕의 콜롬비아대학에서 일반청중을 상대로 행했던 연속강연,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표제의 강연시리즈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8회에 걸쳐 행해진 강연시리즈는 ‘프래그머티즘과 상식’, ‘프래그머티즘과 휴머니즘’, ‘프래그머티즘과 종교’ 등의 제목의 회차를 포함하고, 특히 2회차의 강연인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서 그는 이 사상의 골격을 분명하게 그려내었다.

‘프래그머티즘의 의미’란 무엇인가?—이 강연의 설명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즘이란 본래는 ‘방법’이며 이제는 ‘진리’의 이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이 사상은 두 얼굴을 가진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때 프래그머티즘이 ‘본래는’ 방법이라는 것은, 이 사상의 시초의 발안자인 퍼스에게 이 사상은 무엇보다 우리의 지적탐구의 ‘방법’에 관한 기본이론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는’ 진리의 이론이기도 하다는 것은 퍼스의 사상을 계승하고 확장하는 제임스 본인이 이 사상을 ‘진리론’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철학상의 더욱 폭넓은 영역에서 활용의 가능성을 넓혀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제임스는 퍼스가 생각한 ‘프래그머틱한 방법’에 대해 퍼스의 표현을 다소간 그 자신의 용법으로 바꾸어 소개한다. 그리고 이 퍼스의 사상을 나름의 진리론으로 변경한 결과를 자신이 이해하는 프래그머티즘으로서 표명한다. 이와 같이 그가 전개한 논의는 퍼스가 주장하는 방법론을 진리와 가치라는 철학의 근본원리에까지 적용하고 반성한 것이며 이로써 이 사상의 혁명적 성격은 더욱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에 의한 프래그머티즘 해설

프래그머티즘의 중핵적 사상을 논하는 제임스의 설명은 이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그 문장도 읽으면 바로 이해될 수 있을 만큼 단순 소박하지 않다. 이것은 그의 강연이 일반청중을 대상으로 했다 해도 그 청중의 대다수가 지식계급이었고 강연자체가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제임스의 해설을 읽는 자는 누구라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확실하게 와 닿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설은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상가가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선 염두에 두고 논하는 글이다. 그 문체는 19세기 후반에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즘을 다룬 것이기에 돌려서 말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것은 이 사상이 어떤 고풍의 분위기와 만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우선 여기에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애초 프래그머틱한 방법은 이것 없이는 언제 끝날지도 모를 형이상학상의 논쟁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이 말이 처음으로 철학에 도입된 것은 1876년 찰스 퍼스에 의해서였다. … 퍼스는 우리의 신념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을 지적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하나의 사상의 의의를 밝히는 것은 그 사상이 어떤 행동을 산출해내는 데에 적합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행동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그 사상의 유일한 의의이다. 우리의 모든 사상의 차이는 가령 얼마나 미묘한 것이라 해도 근저에는 실제상의 차이로 표현되지 않을 만큼 미묘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관한 우리의 사상을 완전하고 명석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얼마나 실제적인 결과를 일으키는가?—그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감동을 기대할 수 있는가?—어떤 반동을 우리는 각오해야 하는가? 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은 이제는 더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진리론의 의미로 활용될 수 있다. … 즉 진리란 그들에 의하면, 관념(그 자체가 우리의 경험의 일부에 불가하다)이 참되기 위해서는 이 관념이 우리의 경험의 다른 부분을 만족시키는 관계에 있어야하며 경험의 다른 부분들을 총괄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무한히 잇따라 생기는 특수한 현상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아도 관념적 지름길을 통해 경험부분의 사이사이를 교묘하게 헤집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소위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타고 다닐 수 있다는 관념, 물(物)과 물(物) 사이를 잘 연결해서 어떤 불안함도 없이 돌아다니며 사태를 간략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우리의 경험의 한 부분에서 다른 한 부분으로 순조롭게 우리를 운반해가는 관념, 이것이 바로 그만큼의 의미에서 참됨이며 그만큼의 범위에서 참됨이며 도구라는 의미에서 참됨이다.

위의 문장은 하나의 사상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꽤 길지만 인용해두었다.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주의

프래그머티즘을 설명한 제임스의 이 문장들을 우리의 스타일대로 정리하면 두 논의로 요약된다.

① 프래그머티즘은 제1의 의미에서는 우리의 지적인 논의의 소재가 되는 개념과 사상의 ‘의의’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며, 자신의 개념과 사상을 명석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상이다. 그러나 개념의 의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개념명석화의 방법을 설파하는 이 사상은 그와 동시에 인간의 지적활동으로서 탐구방법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퍼스의 이 이론, 즉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우리의 탐구가 항상 탄력적이며 계속해서 오해를 개정하는 가류적(可謬的)인[과오를 거듭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탐구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확실한 지식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17세기 서양근대 이후의 데카르트적인 지식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그 의미에서 무엇보다 ‘반데카르트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② 한편, 이 사상은 더 넓은 의미에서 관념과 경험의 진리를 무엇에 대한 이론으로 삼는다. 이 진리관에서는 어떤 관념이 참되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것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이며 ‘물(物)과 물(物) 사이를 잘 연결해서 … 우리의 경험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순조롭게 우리를 운반해가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 행동에서 유용한 도구로 진리를 보는 것인데, 그것이 ‘진리’라는 관념의 단순한 정의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다음에서 살펴보듯이 진리를 도구로 삼는 이 사상은 존재론적 ‘다원주의’ 혹은 사실과 가치의 구별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세계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를 근저에서부터 전복하는 혁명적인 견해를 이끌어낸다.

 

다각적인 타원구조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이처럼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주의라는 매우 대범한 주장을 전개한다. 말할 것도 없이 반데카르트주의라는 것은 서양근대의 선조격인 데카르트적 발상을 근본에서부터 비판하고 철학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 다원주의적인 진리론을 제창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의 일원론을 구가해왔던 뉴튼적 서양근대의 과학관에 강력한 이견을 제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의미에서 철학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의 근본적인 지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 두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이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혁명적인 사상인가 혹은 그러한 발상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어떠한 임펙트를 주는 발상인가에 대해서는 근대 및 현대철학의 다양한 전제를 하나씩 밝혀내야 비로소 답할 수 있는 문제이며 철학적으로도 이러저러한 검토가 필요한 문제이다. 이 책의 앞으로의 논의는 바로 이 지점에 관심을 두고 근 100년간의 프래그머티즘의 역사 속에서 반데카르트주의와 다원적 진리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제안되었으며 또 어떠한 방향으로 돌진해왔는지를 사상가들의 사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하간 이 책이 보고자 하는 것은 프래그머티즘 100년의 역사가 방법과 진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사상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퍼스와 제임스라는 두 사상가에 의해 만들어진, 그들이 고안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이 속에는 분명 완전하게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지지 않는 논의의 흔들림이나 주장의 어긋남이 있다. 그러나 이 흔들림과 어긋남은 이 사상이 지금까지 그 활력을 잃지 않고 발전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며 결코 사상의 모호함과 빈약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프래그머티즘은 그 처음의 형성과정부터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논제를 가지고 있었고,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사상의 역동적인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사상의 수다한 궤적이 현대철학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골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서문에서 말한 것을 본론의 1부 「원류의 프래그머티즘」에서 더 상세한 실제의 논의내용을 통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독자들은 또한 2부 「지난 프래그머티즘」과 3부 「앞으로의 프래그머티즘」의 논의에 다다르면 이 사상의 다각적이고 타원적인 구조가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바로 그 이후의 20세기와 21세기의 철학운동 속에서 더욱 강도를 더해가며 보존되고 진폭을 넓혀 전개되어 그로부터 오늘날의 우리시대의 새로운 프래그머티즘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도정을 염두에 두면서 방법론과 진리론으로서 그 실제의 다양함과 그 활용의 가능성에 대해 지금부터 순차적으로 검토해보겠다.

 

伊藤邦武、「プラグマティズムとは何か」『プラグマティズム入門』、ちくま新書、2016年。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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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논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개념도 어렵고 문장도 어려워서 시간이 꽤 걸리더라. 그래서 일단 글의 전반부만을 먼저 올리고 후반부는 기일을 두고 올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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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은 관찰자의 선택에 의존하도록 구축되어왔다. 여기서 관찰자가 증인으로 소환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그가 설명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관찰자의 신체이지 그의 정신이 아니다. — A. N. 화이트헤드

 

내가 신화적 사고의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해온 퍼스펙티브의 상호성(la réciprocité de perspectives)은 더욱 폭넓은 적용범위를 요구할 것이다. — C. 레비-스트로스

 

 

본고의 주제는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사고의 하나의 틀인 ‘퍼스펙티브의 성질’(Århem 1993)과 ‘퍼스펙티브의 상대성’(Gray 1996)이다. 이 대륙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관념은, 인간적인 것도 있고 비-인간적인 것도 있는 다른 부류의 주체가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 주체들은 특징적인 퍼스펙티브로부터 현실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사고의 전제와 귀결은—리마(Lima 1995: 435-48)가 보여준 것처럼—우리 사이에 흔해빠진 상대주의에 대한 관념, 즉 무엇보다도 정신에 호소하는 것 같은 사고방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실은 그 전제와 귀결은 이른바 상대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과 직교하도록 위치지어진다. 우리의 인식론적인 논쟁의 어휘에 대해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퍼스펙티브즘이 보여주는 저항력은, 그 논쟁을 조장하는 존재론적인 분할이 확고하며 어디에도 적용된다는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특히 많은 인류학자가 (이유를 불문하고) 이미 결론내린 것처럼, 비-서양적인 우주론의 내적인 영역들에 대한 서술에 <자연>과 <문화>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사용해버리면 민족지적으로 엄격한 비판을 받아들여야 함을 피할 수 없다.

 

우선 이 비판이 요구하는 것은 <자연>과 <문화>라는 항목 하에 대치되어왔던 두 개의 범례를 포섭하는 술부(述部)를 분리하고 재배치하는 것이다. 즉 보편과 특수, 주관과 객관, 물리와 도덕, 사실과 가치, 여건과 구축물, 필요성과 자연발생성, 내재와 초월, 신체와 정신, 동물성과 인간성 등을 포함하는 수많은 이항대립이 그것이다. 개념의 카드를 잘라 다시 붙이는 나의 사유는 아마도 근대적인 ‘다문화주의자’의 우주론과 대조를 이루는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의 사고의 특징의 하나인 다자연주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다문화주의 개념은 자연의 단일성과 문화의 다원성이라는 상보적인 함의—자연의 단일성은 신체와 물질의 객관적인 보편성에, 문화의 다원성은 정신과 의미에 관한 주관적인 특수성에 의해 보증된다—에 기초한다. 이와 반대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개념은 정신의 단일성과 신체의 다원성을 조정하는 것 같다. 문화, 즉 주관적인 것은 보편성의 형상을 띤다. 자연, 즉 객관적인 것은 특수성의 형상을 띤다.

 

사변 이상의 것이기에는 너무나도 대칭적일 수 있지만 이 반전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적인 개념의 현상학적인 해석으로부터 전개하는 것 속에는 틀림없이 ‘자연’과 ‘문화’로 부를 수 있는 맥락의 구성적인 조건을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을 그 즉시 탈-실체화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재구성해야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서 <자연>과 <문화>의 범주는 그 내용이 서양의 유사물과 다를 뿐만 아니라 동일한 지위를 구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의 범주는 존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적인 배치, 가능성의 퍼스펙티브주의, 즉 관점을 보여준다.

 

자연/문화라는 구분은 확실하게 비판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비판은 이러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가 그 구분에 부여한 ‘무엇보다도 방법론적인 가치’(Lévi-Strauss 1962b: 327)는 특히 비교에 관한 가치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원론에 서양적인 특징이 있다고 비판하는 화려한 산업은 이항성의 지적인 재산을 방기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문제는 매우 현실적인데, 민족지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대안은 현재로서는 포스트이항대립을 갈망하는 것으로 축소되는, 엄밀하게는 개념적인 것이라기보다 표현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기다리기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 구분과 우리가 사용하는 구분을 대조하고 그것을 퍼스펙티브주의로 전화시켜보고자 한다.

 

 

퍼스펙티브주의

 

이 고안을 도입하도록 자극한 것은 아마존의 민족지에 자주 등장하는 선주민의 이론에 대한 언급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 거하는 동물 및 다른 주체—신들, 정령, 죽은 자, 우주의 다른 위계에 거하는 자, 식물, 천문학적 현상, 지리학적 기복, 물체와 인공물—를 보는 양태는 이 존재들이 인간이나 서로를 보는 양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를 들어보자. 평상시의 상태에서 인간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동물을 동물로서 본다. 정령에 관해서는, 평소 볼 수 없는 이러한 존재[정령]를 보는 것은 ‘상태’가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확증한다. 한편 포식동물과 정령이 인간을 사냥감의 동물로서 보는 것처럼 사냥감의 동물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정령과 포식동물로서 본다. 아마존의 마치겡가족(Machiguenga族)에 대해 기록한 바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본다. 그러나 달, 뱀, 재규어, 천연두의 마마는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인간을 맥(獏ㆍ貘: 포유동물로 모양은 물소를 닮고 흑갈색이며, 남태평양ㆍ남미 등지의 밀림의 물가에 산다) 혹은 멧돼지로 본다’. 동물과 정령은 우리를 비-인간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본다. 이 존재들은 자신들의 집과 마을에 있을 때는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파악한다. 나아가 자신의 습관과 특징을 어떤 종류의 문화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즉 식량을 인간의 음식으로서 (예를 들어 재규어는 피를 마니옥 술로, 죽은 자는 귀뚜라미를 물고기로,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보며, 자신의 신체적인 특성(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을 문화적인 장식품이나 도구로서 보며, 자신의 사회체계를 인간적인 제도(추장, 샤먼, 의례, 혼인규칙 등)처럼 조직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로 본다’는 표현은 지각대상에 대해 문자 그대로 언급하는 것이며, 아날로지에 의한 개념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현상의 감각적인 틀이라기보다 범주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사례에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여하간 우주론적인 도식론의 주(主)이며(Taussing 1987: 462-63), 교차하는 퍼스펙티브와 의사소통하며 그것들을 제약하는 것에 바쳐진 자, 즉 샤먼은 항상 개념을 감지가능하게 하고 직관을 이해가능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즉 동물은 사람이다. 혹은 자신을 인격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념은 ‘각각의 종(種)의 가시적인 형태는 포장된 것(의복)이며 그 속에 인간적인 형상을 은폐한다’라는 사고와 연결된다. 그 인간적인 형상은 통상, 동일한 종(種) 혹은 샤먼 등의 어떤 종-횡단적인 존재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이 내적인 형상은 동물의 정신이다. 즉 인간적인 의식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지향성과 주체성이며, 이른바 동물적인 가면 밑에 숨겨진 인간적인 신체도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표면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공통하는, 정신의 일 부류인 의인화된 본질 그리고 각각의 종에 특징적인,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외견 간의 구분이 존재한다. 특히 후자의 외견은 고정된 속성이라기보다 가변적으로 탈착 가능한 의복이다. 실제로 ‘의복’이라는 관념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변신(Metamorphose)—동물의 모습을 하는 정령, 죽은 자, 샤먼, 다른 동물을 보는 동물, 의도치 않게 동물이 되어버린 인간—을 특권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아마존의 문화들이 노정하는 ‘변태에 넘치는 세계(highly transformational world)’로 편재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남미 선주민에 관한 몇몇 민족지에 기록되어왔는데, 대체로 간략하게 언급되었을 뿐인데도 ‘그것이 정말로 균형 잡힌 시각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기서 다뤄지는 우주론에서는 참으로 고상하다. 또 그것들은 북미의 북극권과 아시아의 문화권에서의 그것보다 한층 창의에 넘치는 가치를 수반한 것으로 보이며 더 진귀하고, 다른 대륙의 열대지역의 수렵채집민의 원조이기도 하다. 남미 중에서도 북서아마존 지역의 사회들이 더 완결적으로 전해오고 있다(Århem 1993, 1996을 참조). 그렇지만 지금 과제에 더 직접적으로 공헌하는 것은 와리족의 카니발리즘에 관한 민족지(Vilaça 1995)와 주르나족의 인식론에 관한 민족지(Lima 1995)이다. 이것들은 비-인간적인 관점과 우주론적인 범주에서 관계론적인 자연이라는 논점을 타성의 일반경제의 출현이라는 더 넓은 틀과 연결 짓는다(Viveiros de Castro 1993a, 1996b).

 

더 밀고 나가는 어떤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퍼스펙티브주의가 (다른 존재도 포섭하는) 모든 동물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브주의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종(種)의 동물에서이다. 뛰어난 포식자나 육식성의 동물, 예를 들어 재규어, 아나콘다, 검은 독수리, 독수리, 혹은 인간의 전형적인 먹이인 멧돼지, 원숭이, 물고기, 사슴, 맥 등의 동물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주의가 전치(轉置)될 때의 기초적인 차원이자 구성적인 차원은 포식자와 먹이라는 상대적으로 관계적인 상태와 관련된다. 아마존에서 포식의 존재론은 퍼스펙티브주의에 상당히 적합한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있다.

 

둘째, ‘인격성’과 ‘퍼스펙티브성’—특정한 관점에 서는 능력—은 이러저러한 종(種)에 고유한 변별적 특성이라기보다 정도와 태도의 문제이다. 이 잠재성의 양태를 어떤 동물보다도 완전하게 현세(現勢)적으로 등장시키는 동물이 있다. 그 동물 안에는 자신의 종에 대해 더 우세한 강도를 가지고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보다도 ‘더 인격적’인 존재가 된다(Hallowell 1960: 69). 또 다른 논점은 사후(事後)에 본질이 되는 성질에 관한 것이다. 이전에는 보잘 것 없던 존재가 (꿈과 샤먼의 담론에서) 인간사에 해를 끼치는 능력 있는 의인화된 행위자로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다. 자신의 일이든 타자의 일이든 인격의 경험은 우주론을 둘러싼 명문화된 어떤 의무보다도 결정적이다.

 

나아가 혼과 주관성이, 살아남은 종(種)의 개체의 표상으로 회귀하는 사례가 항상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신화 이후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은 의식의 능력 등의 정신적인 속성의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우주론의 사례 또한 발견된다. 한편 동물의 영적인 ‘주(主)’의 관념(‘사냥감의 어머니들’이나 ‘멧돼지의 주재자들’)은 주지하다시피 아메리카대륙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 영적인 ‘주’는 모두 인간적인 지향성과 유사한 것을 갖추고 있으며 그와 관계된 동물성의 위격(位格)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개별 동물에게는 정신이 없을 것이라며 인간-동물 관계를 위한 간주관적인 영역을 창출한다. 덧붙여, 영적인 형체로 보였던 동물과 종의 영적인 주재자 간의 구분이 항상 명확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항상 관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Alexiades 1999: 194)을 말해둔다. 분명한 것은 숲에서 동물을 만났을 때, 단지 동물일 뿐이라 여겼던 것들 모두가 다른 본성을 가진 정령의 변장인 경우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기억해 두어야하는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보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관념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과 동물 간의 비-차이화(non-differentiation)라는 원초적인 상태라는 점이다.

 

[신화란 무엇일까?] — 만약 당신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무렵의 이야기이다, 라고. 이 신화의 정의는 우리에게 꽤 흥미로운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Levi-Strauss & Eribon 1988: 193).

 

신화의 이야기 속에는 그 모습, 이름, 행동이 인간적인 속성과 비-인간적인 속성이 농밀하게 섞여있는 존재들로 넘쳐나며, 그것들은 현세(現勢)하는 인간-간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과 동일한 상호교신가능성에 의해 공유된 맥락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신화 속에서 관점 간의 차이가 무효화되거나 강화되거나 하는 잠세적인 초점을 찾아낸다. 신화라는 이 절대적인 담론에서 각각의 종(種)은 스스로에 대해—인간으로서—다른 종의 눈에 나타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별적으로 규정된 동물과 식물, 정령의 본성이 이미 노정된 것처럼 행동한다.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인물은 무언가의 방식으로서 샤먼이며 아마존의 문화에서 그것은 확실하다(Guss 1989: 52).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것처럼, 신화는 주체 없는 담론이다(Lévi-Strauss 1964: 19). 혹은 ‘주체만’으로 가능한 담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담론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담론에 의해 말해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인데, 퍼스펙티브주의의 보편적인 소실점에서 한 신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前)-주체적 및 전(前)-객체적이라고도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신체와 이름이 혼과 행동에 침투해서 섞여가는 존재의 상태이다. 바로 신화가 그 종언을 이야기하려는 경우(境遇)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원이란 끝(end)이기 때문에.

 

이 끝—또 귀결이라는 의미에서도—은 주지하다시피 레비-스트로스의 기념비적인 사부작(Lévi-Strauss 1964, 1966, 1967, 1971)에서 분석한 자연과 문화의 차이화이다. 그러나 그 과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지점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우리 근대적인 진화론자의 신화에 흐르는 동물로부터 차이화된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원초적인 조건이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적인 거대한 분할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가 자연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문화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인간들에게 이어지고 유지되는 속성들을 동물들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Lévi-Strauss 1985: 14, 190; Brightman 1993: 40, 160). 인간이란 자신과 동일한 그대로 이어지는 자이다. 동물이 원-인간이지, 인간이 원-동물은 아니다.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인간성은 원초적인 플래넘(plenum)[일종의 확산장치]의 요소’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정식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동물에 한정되지 않으며 잠재적으로 모든 것의 원초에서 나타난다는 형상이다.

 

칸바족의 신화론의 대부분은 어떻게 해서 처음의 칸바족 사람들이 점차 동물 및 식물종의 최초의 대표자로 불가역적으로 변신했으며 또 천체와 지형의 기복으로 변태했는지에 관한 역사이다. (중략) 즉 우주의 전개란 그 무엇보다도 다양화의 과정이며, 인간성이란 원초적인 실체이며, 그로부터 우주의 (모든 것이 아닐지라도) 다수의 존재와 사물의 범주가 생겨났다. 오늘날의 칸바족은 변화를 피해간 선-칸바족의 후예이다(Weiss 1972: 169-70).

 

우리에게 익숙한 인류학=인간학에서는 언제나 문화에 의해 은폐된 동물성이라는 토대 위에 인간성을 구축하는데—우리는 예전에는 ‘완전히’ 동물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안의 ‘밑바닥에’ 동물인 채로 남아있다—, 이와 반대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에서는 우주에 거하는 동물과 그 외의 존재는 예전에는 인간이었으며, 그 분명한 양태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인간이기를 계속해왔다고 결론짓는다.

 

즉 ‘자연의 모든 존재의 공통적인 참조항은 종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조건으로서의 인간성이다’(Descola 1986: 120). 사람이라는 종과 인간적인 조건의 구분은 강조되어야 한다. 이 구분의 강조는, 분명 이 구분을 공유하는 인간적-정신적인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사고로서 동물적인 의복, 그리고 퍼스펙티브주의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샤머니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아마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두 개의 특징을 연결한다. 즉 수렵의 상징적 가치화와 샤머니즘의 중요성이다. 수렵에 관해서는 생태학적 의존이 아니라 상징적인 공명이 질문시 된다는 점을 강조해두겠다. (수렵이든 어로이든) 동물적인 포식에 부여하는 우주론적인 가중치, 동물의 영적 주체화, 고유한 퍼스펙트비즘이 인정되는 인간-외의 지향성으로 우주가 넘쳐나고 있다는 이론에 관해서는, 츠카노족과 주르나족이라 불리는 부지런한 화전경작민—경작 외에는 주로 어로로 살아간다—과 캐나다와 알래스카의 우수한 수렵민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이 의미에서 식물, 천체현상, 인공물의 정령화는 동물의 정령화 혹은 그 파생물로 간주될 수 있다. 동물은 인간-외의 <타자>의 원형이며, 인척이라는 타성 외의 원초적인 형상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서 나타난다.

 

널리 보급된 수렵민의 이 이데올로기는 샤먼의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비-인간은 비가시적인 의인(擬人)의 형태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사고방식은 선주민의 실천적 위상에서 근본적인 전제에 놓인다. 다만 이 사고는 어떤 특수한 맥락에서 전경(前景)으로 등장하는 샤머니즘이다. 아마존의 샤머니즘을 정의하자면, 어떤 개인이 의도적으로 신체의 경계를 넘어서 다른 종의 주체성의 퍼스펙티브주의에 서기 위한—이 존재들과 인류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양태의—분명한 소질이다. 비-인간적인 존재가 자신을 보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존재를 (인간으로) 봄으로써 샤먼은 종-횡단적인 대화에서 활약하는 방언자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들은 그 다음에 이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귀환할 수 있다. 그것은 보통의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퍼스펙티브의 해후와 교환은 위험한 과정이며 일종의 정치적 기법—외교—이다. 서양의 ‘다문화주의’가 공공정책으로서의 상대주의라면, 아메리카대륙의 샤먼의 퍼스펙스티비즘은 우주적 정치활동으로서의 다자연주의이다.

 

샤머니즘은 앎의 양태를 암시하는 행동의 양태, 혹은 지식에 관한 어떤 이념이다. 이 이념은 몇몇 측면에서 서양적 근대에서 우대받아왔던 객관주의적인 인식론과 대극을 이룬다. 후자[서양의 객관주의적 인식론]에서 객체(=대상)이라는 범주는 텔로스(telos)를 산출한다. 즉 앎은 객체화(=대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주체에 속한 것으로부터 혹은 원치 않는 모습으로부터 혹은/그리고 불가피하게 대상에 투사되는 것으로부터 객체 자체의 본래적인 것을 구분해낼 수 있다. 나아가 앎은 탈주체화하는 것, 현전하는 주체의 일부를 이념적으로 최소량까지 줄여나가서 대상으로서 해명하는 것이다. 객체와 마찬가지로 주체는 객체화 과정의 귀결로 간주된다. 주체는 주체가 산출하는 객체와 함께 구성되고 인식되며, 하나의 ‘저것’으로서 ‘외부에서’ 보이게 될 때에 객관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우리의 인식론적 게임은 객체화로 부를 수 있다. 객체화되지 않는 것은 비실재적인 추상인 채로 남는다. <타자>의 형식이란 물(物)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이념에 의해 이끌리는 것 같다. 앎은 인격화하는 것이며 알아야만 하는 저기—저편이라기보다 저 자(者)—의 시점(視點)에 서는 것이다. 즉 샤먼의 지(知)는 ‘누군가’ 즉 다른 주체나 다른 행위자인 ‘무언가’를 조준한다. ‘타자’의 형식이란 인격이다.

 

유행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샤먼적인 인격화ㆍ주체화는 데네트(Dennett 1978)를 필두로 하는 정신에 관한 근대적인 철학자들(혹은 근대정신에 대한 철학자들)이 조망해온 ‘지향자세’의 보편화 경향을 반영한다. 더욱 정확성을 기하자면—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물리적’이고 ‘기능적’인 자세를 취하는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자면—, 세계의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의 표상에 이르기 위해 ‘환경적인 지향성’을 제로까지 줄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이념적인 인식론에 직면한다. 진정한 지(知)는 지향성의 최대한의 개방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위해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주체성의 가설형성적 추론(abduction)’의 과정을 취한다(Gell 1998). 나는 앞서 샤머니즘을 정치적 기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것을 정치적 예술이라고 말한다. 즉 샤먼의 탁월한 해석이란 하나하나의 사건을 실제로는 하나의 행동, 즉 어떤 행위자의 내적인 상태와 지향적 속성의 표현으로 본다는 결과에 이른다(앞의 책: 16-18). 성공적인 해석은 대상 혹은 노에마(Noema: 의식의 대상이 되는 측면)로 회귀하는 지향성의 서열에 정비례한다. 주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물이나 물(物)의 상태, 바꿔 말하면 알고자 하는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관계를 결정할 수 없는 자는 샤머니즘적으로 무의미하다—즉 그것은 정밀하고 정확한 지(知)에 대해 저항하는 ‘비인칭적인 요인’이자 인식론적인 잔재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객관주의적인 인식론은 그 반대쪽으로 선회한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지향자세를 편의적인 의제로만, 즉 목표-대상의 행동이 매우 복잡하고 원초적인 물리적 과정으로 분해할 수 없을 때에 우리가 채용하는 무언가로만 간주한다. 망라적ㆍ과학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모든 행동을 인과론적인 사건의 연쇄로, 그리고 그러한 연쇄를 (원격작용 등이 아닌) 물질적으로 긴밀한 상호작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요컨대 근대의 자연주의자의 세계에서 주체는 충분히 분석되지 않는 객체이고,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반전을 포함하는 것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해석상의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즉 객체란 불완전하게 해석된 주체이다. 여기[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서는 인격화하는 것 자체가 앎이다. 알기 위해서 인격화하기 때문이다. 해석의 대상이란 객체의 반(反)-해석이다. 즉 객체는 충분한 지향성의 형상—인간을 모습을 하는 동물로서, 정신으로서—에 이르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혹은 적어도 표출하는 주체와 대자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자에게 ‘접근하여’(Gell 앞의 책) 존재하는 무언가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제2의 선택지에 관해서는 비-인간적인 행위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인간적인 문화의 형상 하에서 지각한다는 사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인간-외의 존재의 주체성의 세계로 향하는 ‘문화’의 번역은 ‘자연적’인 몇몇 사건과 대상을 사회적 행위능력의 가설형성적 추론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재정의하는 색채를 띠게 된다. 가장 많이 보이는 사례로서, 인간에게는 삶의 사실뿐 인 것이 다른 종의 시점에서 보면 고도로 문명화된 인공물과 장비품으로 변태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가 ‘피’라고 부르는 것은 재규어의 ‘발효주’이며, 우리가 진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맥에게는 의례용의 큰 건물이다. 인공물에는 이 흥미진진한 양의적(兩義的)인 존재론이 있다. 그것[인공물]은 대상이지만 필연적으로 어떤 주체를 지시하며, 그 때문에 동결된 행동, 즉 비-물질적인 지향성의 물질적인 구현화처럼 보인다(Gell 1988: 16-18, 67). 요컨대 ‘자연’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타자에게 ‘문화’일 수도 있다. 여기에 바로 인류학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이 담겨있다.

 

 

애니미즘

 

내가 말하는 ‘퍼스펙티브주의’는 최근 데스콜라의 논의(Descola 1992: 1996)가 복권시킨, 토테미즘과 대칭적 혹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자연의 계열과 사회의 계열을 분절시키는 양태로서의 ‘애니미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데스콜라는 ‘자연의 대상화’의 세 가지 양태를 구분할 때, 비-인간에 대한 모든 개념화는 항상 사회의 영역을 참조한다고 단정한다. 토테미즘이란 사회의 내적인 질서를 논리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 자연종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의 자연과 문화의 관계는 은유적이며 계열-내, 계열-간의 불연속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애니미즘에서는 ‘사회생활의 기본 범주’가 인간과 자연종 간의 관계를 조직화하며, ‘자연의 존재에 인간적인 성향과 사회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에 기초해서 자연과 문화 간의 사회형태적인 연속성이 규정된다(Descola 1996: 87-88). 자연주의란 서양의 우주론에 전형적이며 환유적인 불연속성에 의해 분리된 영역인 자연—필연성의 영역—과 문화—자연발생성의 영역—간에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조정한다. ‘애니미즘적 양태’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 사회처럼 ‘자연과 자신의 사회화를 대상화하는 핵심적 전략’(Descola 1992: 115)으로서 동물이 되려는 사회의 특징으로서, 세련된 내적인 구분을 결여한 사회형태학 하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 또한 토테미즘과 공존하는 조합의 방식에서 생겨나기도 하며, 거기서는 사회가 내적으로 분할된다. 예를 들어 보로로족과 그들의 의한 아로에/보페의 이원론처럼(Crocker 1985).

 

데스콜라의 논의는 야생의 사고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적인 상상력을 특징짓는 토테미즘과 분류의 논리에서 은유의 일방적인 과정에 대해서 폭넓게 나타나는 불만의 한 사례이다. 이러한 불만에서 생겨난 것이 구조주의라는 이름의 달의 뒷면을 탐사하고자 하는 근래의 시도이며, 이 시도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성주의가 떠나보낸 감정을 ‘상호융합’과 ‘애니미즘’ 등의 관념에 의해 되돌려놓으려 한다. 그러나 데스콜라가 해놓은 많은 정리(定理)는 (정리를 시도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에 이미 있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조직화하는 ‘사회생활의 구조화의 기본적인 범주’는 본질적으로 데스콜라가 논한 애니미즘의 사례에서는 친족범주이며, 특히 혈족과 인척이라는 범주이다. 그런데 『야생의 사고』에서 다음과 같은 소견을 볼 수 있다.

 

토템 분류나 직능 분화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민족에서 혼인교환이 어떤 식으로든 자연과 문화를 중개하며 또 직접 응용하는 모델이 되기 때문임을 이와 같은 신화는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Lévi-Strauss 1962b: 170[레비-스트로스 1999: 203 일부수정]).

 

여기서는 그 후 많은 민족지학자가 주장한 아마존의 우주론적 조작자로서의 인척의 역할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는 자연과 문화 간의 교환모델과 토템적인 체계모델의 상보적인 분포를 시사하면서 여기서 논하고 있는 애니미즘적인 모델과 아주 유사한 것을 생각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수렴(收斂)의 사례를 들어보자. 데스콜라는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의 공존의 사례로서 보로로족을 참조했다. 그러나 토템과 마니도(Manido)[오지브와족의 홍수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 각각의 체계가 조합되어 있는 오지브와족(Ojibwa, 북미인디언)의 사례도 인용할 수 있다(Lévi-Strauss 1962a: 25-33). 그것은 토테미즘과 공희(供犧) 간의 일반적인 대립을 나타내는 매트릭스로 기능했기 때문에(Lévi-Strauss 1962a: 295-302), 토테미즘/애니미즘의 구분의 틀에서 직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음으로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를 대비해보자. 이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특징적인 차이를 이해하기에 적절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기존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의 대비를 다루면서, 근대적인 자연주의를 오로지 ‘존재론적인 이원론’이라는 말로 기술하는 것은 어딘가 불충분해보인다. 토테미즘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혼성의 현상으로서 존재론적이라기보다 분류적인 것 같다. 즉 다른 두 개의 양태처럼 자연과 문화 간의 관계들의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하게 이론적이고 시차적인 상관관계이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부터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를 논하겠다.

 

애니미즘은 인간적인 계열과 비-인간적인 계열과의 관계들에 사회적인 특징을 조정하는 존재론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자연과 사회 사이의 틈이 바로 사회 그 자체이다. 자연주의는 반전된 공리에 기초한다. 사회와 자연의 관계들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다. 실제로 애니미즘적인 양태에서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사회적인 세계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은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환경에 놓이게 되는데(그리고 이 의미에서 자연은 포괄적인 사회의 일부이다), 자연주의에 있는 존재들에게 이와 동일한 구분은 자연의 내부에 있다(그리고 이 의미에서 인간적인 사회는 다른 어떤 곳에도 없는 자연현상이다). 애니미즘은 사회를, 자연주의는 자연을 무표(無標)의 극으로서 아우른다. 이 극은 제각기 대조적으로 세계의 보편적 차원으로서 기능한다. 그 때문에 애니미즘과 자연주의는 비대칭적이고 환유적인 구조이다(그것들은 은유적이고 등가적인 구조인 토테미즘과 구별된다).

 

우리가 아는 자연주의의 존재론에서 사회/자연의 경계면은 자연이다. 즉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동일한 유기체이며, 다른 신체와 힘과의 ‘생태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어떤 신체-대상으로서 모든 것을 생물학 및 물리적인 필요성의 법칙에 의해 규제받는다. ‘생산력’은 ‘자연의 힘’을 이용한다. 사회적인 관계, 이것은 주체 간의 계약적 관계 내지는 제도화된 관계이며, 인간적인 사회 내부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자연주의의 문제이다—이것들의 관계들 속에 어떤 것이 ‘비-자연적’인 것일까? 자연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한,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의 자리매김은 불안정하며, 우리의 전통이 보여준 것처럼,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오늘날 그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자연의 일원론과 (문화연구와 상징인류학이 현대적인 표현형의 하나가 되고 있는) 자연/문화의 존재론적인 이원론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이원론과 (신체/정신, 순수이성/현실이성 등의) 그 상관물을 확립하는 것은 <자연>의 관념이 궁극적인 참조항이라는 성질을 강요할 뿐이다. <자연>의 관념과 <초자연>의 관념의 신학적인 대립, 그 투명한 인식론의 직접적인 계보의 후예로서 <자연>의 관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는 <정신>의 현대적인 이름이다. 적어도—자연과학(Naturwissenshaften)과 정신과학(인문과학 Geistewsissenchaften) 간의 구분을 떠올려보라—<자연>과 <은총> 간의 불확실한 계약의 이름이다. 애니미즘에 관해서는 불안정함이 대극(對極)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질문은 동물적으로 나타나는 문화와 자연의 혼성을 인식한다 해도, 우리 사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종합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자연을 보편적인 사회적 형식으로부터 차이화하는 것이며, 또 ‘특히’ 인간적인 신체를 ‘공적(公的)’으로 종-횡단적인 정신으로부터 차이화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인간적인 세계 속에 있는 차이와 성질을 비-인간적인 세계에 투영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정의하는 것과, 즉 인간-내의 범주와 관계성이 모든 사물의 배치도를 그려내기 위해 사용되는 ‘사회중심’적인 모델로서 애니미즘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해도 그것이 과연 의의 있는 일일까(Descola 1996)? 이러한 투영론적인 해석은 이론에 대한 몇몇 주석에 분명하다. ‘토템적 체계가 자연에 따르는 사회를 모델로 한다면, 애니미즘적 체계는 사회에 따르는 자연을 모델로 한다’(Århem 1996: 185). 여기에서 분명해지는데, 문제는 애니미즘이라는 용어의 전통적인 의미와 ‘미개의 분류’를 사회형태학으로 환원하는 것과의 사이에 원치 않는 유사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래드클리프-브라운—토테미즘에 대해 서술한 그의 최초의 논문—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사회/자연의 관계에 부여된 고전적인 특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잉골드(Ingold 1991, 1996)는 아날로지칼한 투영 혹은 자연의 사회적인 모델화라는 도식이 자연주의의 환원론을 피해가지만 [결국] 자연/문화의 이원론에 빠질 뿐이라고 말한다. ‘진짜 자연적’인 자연과 ‘문화적으로 구축된’ 자연을 구분함으로써 무한후퇴에 직면하는 우주론에 관한 전형적인 이율배반으로서 나타날 뿐이라는 것이다. 모델 혹은 아날로지라는 관념은, 사회관계가 구성된 것이라는 자의적인 영역과 그러한 관계가 표상된 것이라는 비유적인 영역 간의 구분을 먼저 묘사하도록 상정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사회성에 의해 인간과 동물이 관련된다는 사고는 모순적이지만 제1의 존재론적인 불연속성에 의존한다. 비-인간적 세계에 대한 인간적인 사회의 투영으로 해석되는 한, 애니미즘은 ‘토템적’ 내지는 분류적인 독해에 현혹된 채의 환유의 은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영역과 그것과 인간적인 사회와의 관계성을 관념화하기 위해 인간적인 사회의 영역의 범주를 비유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기술할 수 있을까의 문제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질문은 데스콜라가 말한 ‘애니미즘’과 어딘가 닮아있는 것도 같은 퍼스펙티브주의가 실제로 어떤 점에서 인간중심주의를 표명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즉 ‘동물은 인격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하나 의문이 있다. 만약 애니미즘이 인간적인 인지와 지각의 능력, 즉 동일한 주체성의 형식을 동물에 부여하는 것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동물이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면 동물과 인간 간의 차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약 동물이 사람이라면 왜 그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퍼스펙티비즘이 생겨나는 것일까? 우연찮은 신체적인 형상(의복)을 정말로 외견과 본질 간의 대비의 관계로 기술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Descola 1986:120; Århem 1993: 122; Riviére 1994; S. Hugh-Jones 1996a). 마지막으로 애니미즘이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대상화의 기능이라면 남미의 우주론에서 이 대립이 담당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암시하는 그 수많은 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서양적인 이원론에 대한 선주민의 투영이 아니라고 한다면, 또 다른 ‘토템적 환상’을 다룰 수 있을까? <자연>과 <문화>라는 개념을 단지 개략적으로 이용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이 개념들은 아메리카대륙의 다수의 신화의 의미론적인 대조성, 단일하고 근본적인 이분법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이 대조성을 조직하기 위해 『신화학』에서 사용하는 ‘백지의 라벨’(Descola 1996: 84)에 불과한 것일까?

 

(계속 이어집니다)

 

 

Perspectivism and Multinaturalism in Indigenous America in THE LAND WITHIN-Indigenous territory and perception of environment, 2005, pp. 36-74.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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