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전반부(http://sarantoya12.tistory.com/84)에 이어 후반부를 번역했다. 이 논문은 1998년의 「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ism」을 조금 수정해서 2005년 『The land within: indigenous territory and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에 실린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세부적인 차이만 있을뿐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1998년 논문에서는 우주론(cosmology)에 기반해서 아메리카인디언의 퍼스펙티비즘을 중점적으로 논했다면, 2005년의 논문에서는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의 논리(적 연관)을 좀더 부각시켰다. 

 

실은 지난 전반부를 번역했을 때에는 무척 고되었다. 반면 이번에 후반부는 즐겁게 번역했다. 그동안 카스트로의 그외의 글들의 번역과 강의준비와 리뷰를 통해 공부가 늘은 탓이다.

 

카스트로의 이론이 워낙 압축된 논문이라 결코 혼자 독해될만한 것 같지는 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고 서로 파악한 내용을 교환하고 토론해야만 습득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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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족중심주의

 

이제는 매우 유명해진 데스콜라의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에게는 인간성이 집단의 경계에서 소멸한다는 것, ‘진짜 인간’을 의미하는 대자적인 민족 명칭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으로부터 예증된 사고, 바꿔 말하면, 어떤 방식을 통해 외지인을 인간-외의 영역에 속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까지 다루는 사고를 논하고 있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는 서양의 가련한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집합적인 생활 본래의 자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태도의 보편적인 상호성을 어떤 일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수년 후 대앤틸리스제도[서인도제도의 주요섬군]에서 스페인인은 선주민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긴 시간에 걸쳐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수장하고자 했다(Lévi-Strauss 1952: 329).

 

이 우화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지하다시피 모순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야만인이란 무엇보다 우선 야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수년 후 앤틸리스의 사례를 재인용할 때, 레비-스트로스는 퍼스펙티브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타자>의 인간성에 대해 조사할 때에 백인은 사회과학에, 인디오는 자연과학에 의지하였고, 백인은 인디오가 동물이라고 결론내린 반면 인디오는 유럽인이 신이 아닌가 의심했다((Lévi-Strauss 1955a: 82-83). ‘동일한 무지에서’ 저자는 후자의 태도 쪽이 보다 더 인간에 적합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본 것처럼 이 우화는 이와는 별도의 것을 보여준다. 우선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하나다. 즉 유럽인침략자와 마찬가지로 인디오는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인간성을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외지인은 인간을 동물이나 정령으로부터, 문화를 자연이나 초자연으로부터 구분하는 경계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자 매트릭스로서 자연/문화의 대립은 사회적 통각이라는 보편으로서 나타난다. 즉 스페인침략자들에 의한 질문의 해답은 긍정형으로 나타난다. 확실히 야만인은 혼을 가지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글을 썼을 때, 우리가 만든 것과 동일한 구분을 야만인도 만들어낸다고 논증한 것에는 그들의 충분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야만인이 그들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문화를 자연으로부터 구분하고 자연민족(Naturvolke)이 항상 타자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 간의 문화적 구분의 보편성은 인간적인 <자연>으로서의 <문화>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크게 변하고 있다. 야만인은 이미 자민족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주론적인 중심을 점하고 있다. 야만인은 동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대신에 그들이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립시키기 위해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이 아닌 사람인지를 드러내야한다. 그들에게 자연과 문화는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영역의 일부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과 동물성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인 <거대한 분할>을 우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견해는 생태학의 기본적인 교훈을 예언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바로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Raichel-Dolmatoff 1976; Wagner 1977). 이전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인간적인 속성을 다른 인간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피와 살이 거론되었다. 이제는 우리에 의한 대상화의 한계가 허용되는 한에서 습득해야 하는 ‘생태학적 예지’를 그들이 표할 때에 그러한 속성이 자신의 종의 경계를 저 멀리 뛰어넘어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한다(Århem 1993). 일찍이 야생의 사고를 내추럴리즘의 유아단계인 자기도취적인 애니미즘으로 동화한 것에 반론하기 위해 토테미즘이 인간과 자연 간의 인지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애니미즘은 다시 야만인에 귀속되고, 또 (서둘러 강조하건대 데스콜라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 속에서 애니미즘은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는, 순진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어리석은 탓에 우리 근대인이 항상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인 혼교를 둘러싼 진정한 혹은 적어도 ‘유효한’ 지(知)가 되고 있다. 근대적인 오만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미개와 포스트모던의 하이브리드(hybrid)다.

 

따라서 두 개의 이율배반은 실은 하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의 관념을 확장하기 위해 자민족중심주의자답게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토테미즘에서처럼 대립시킨다. 혹은 그들은 그러한 구분을 표명시키지 않고 우주중심적으로 애니미즘적이기에, 세계에 있는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인 관용성의 모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폐쇄적인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일까(Levi-Strauss 1991:ⅹⅶ)?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율배반의 해법은 예를 들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태도를 논한 최신버전이 정당하다고 단언하며 그 외의 버전을 전근대-포스트모던의 그늘로 쫓아내자고 하듯이 한 쪽을 선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테제와 안티테제가 함께하는 진실이지만(양자 모두 견실한 민족지적인 통찰과 일치한다), 동일한 현상을 각기 다른 양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는 적합하지 않는 자연과 문화라는 카테고리의 실체론적인 이해를 조정한다는 점에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부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저 자민족중심적인 자기언급을 만들어내는, 보통 ‘인간’으로 번역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용어는 자연종으로서의 인간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은 오히려 인격성의 사회적 조건이며, 특히 ‘진정한’, ‘실제’, ‘진짜’ 등의 강조말로 수사되는 경우 체계적이지 않을지라도 용어 논리상으로는 실명사(實名詞, noun substantive)라기보다 대명사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를 지시한다. 언명의 표지라 해도 이름은 아니다. 이 용어는 (‘사람’을 민족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되는 의미론적인 감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사람’을 ‘인간’이라는 집합적인 대명사로 이용함으로써) 명사에서 퍼스펙티브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집합적인 동일성의 카테고리에는 한 에고의 근친에서부터 인류 전체, 나아가 의식의 모든 존재까지 맥락적ㆍ대조적으로 표시하는 대명사에 특징적인 시야의 특출난 가능성이 부착된다. ‘민족명’으로 응고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처럼 생각된다. 문헌에 기록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민족명의 상당수는 자기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명된 경우(그 대부분이 멸칭(蔑稱)이다)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명에 의해 대상화되는 자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타자로 격하되는 자다(Urban 1996: 32-44). 민족명은 제3자의 이름이며, ‘우리’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들 간에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고유명사학의 수준에 있는 자기언급의 기피다. 이름은 그것을 운반하는 자나 그 인물 앞에서 발설되지 않는다. 이름 짓기는 외재시키는 것,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집합적인 자기언급은 ‘사람이라는 종의 성원’이 아니라 ‘인격’을 의미한다. 그것은 발화하는 주체의 관점을 기록하는 인칭대명사며, 고유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이나 영령을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이라고 서술하는 것이며, 비-인간에 주체라는 언표행위의 위치를 점하는 의식적인 지향성과 행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이 비-인간들이 내려주는 혼과 정령으로서 대상화된다. 주체란 혼을 가진 자이며, 혼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혼과 주체성이란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퍼스펙티브와 관련한 카테고리이며, 우주론적인 지시사(指示詞)이기도 하다. 그 분석에 필요한 것은 실체적인 심리학보다도 기호의 용어론이다(Viveiros de Castro 1992b: Taylor 1993b: 1996).

 

이처럼 관점이 부여되는 모든 존재는 주체일 수 있다. 혹은 더 정확성을 기하자면, 관점이 있는 곳에 주체의 위치가 있다. 우리의 구축주의적 인식론이 소뤼르의 정식—‘관점이 대상을 창조하는’ 주체적인 존재는 원초적으로 관점이 그로부터 발생되는 고정된 상태다—에 의해 요약 가능한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관점이 주체를 창조한다는 선을 따라 전개된다. 관점에 의해 활성화된 것이나 행위능력을 가진 것은 우선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와리(Vilaça 1992), 테네(McDonnell 1984), 마세(Århem 1993) 등은 ‘사람’을 의미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존재의 계층을 표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이 말들은 인간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말이 멧돼지(peccary)나 원숭이(howler monkey), 비버(beaver)에 의해 사용될 때에는 멧돼지, 원숭이, 비버로 자기 언급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이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에 선다, 라는 것만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샤먼의 설명 혹은 보통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공언하는 바에 따르면, 비-인간들은 자신을 형태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으로 간주한다. 동물을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사람화와 문화화를 함의한다. 즉 선주민적인 사고의 인간중심적인 성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것이 문제시된다. 자신에 관한 일인 것처럼(vicariously) 참조항의 관점에 서는 모든 존재는 주체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이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본다. 인간적인 신체의 형태와 인간적인 문화—특수한 배치에 ‘신체화되는’ 지각과 행위의 도식—는 앞서 논한 자기-지시와 동일한 타입의 대명사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재귀적 혹은 통각적인 도식(스트래선(1988)이 말한 의미에서는 ‘물상화’)이며, 이를 통해 모든 주체는 스스로를 파악한다. 즉 축어적이며 구성적인 인간적인 속성이 예를 들어 부적절하게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될 수는 없다. 이 속성들은 관점에 내재되어 있으며, 관점과 더불어 이동한다. 인간은—태어날 때부터—바로 그 특권(prerogative)을 향유한다. 그리고 헷갈리기 쉬운 형용모순을 바엘이 제시한 것처럼(Baer 1994: 350) “자신을 자신으로서 본다”.

 

확실히 해두자. 혼을 받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물은 그것들이 (변장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그것들은 (잠재적으로)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주체>의 본성이다. 주체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할 때의 형상이다. 애니미즘은 실체적이며 인간적인 질(質)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대자적인 관계의 실제적인 등가성이다. 이리는 이리를,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처럼—인간으로서—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리는 이리에게 인간이다. 왜냐하면 앞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기 때문이며, 인간성이란 <주체>가 띠는 일반적인 형상을 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형태 혹은 문화적 관습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타입의 의식과 지향성을 비-인간적인 존재에 부여하는 것은 통상 중립적으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의인화’로 불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두 라벨은 대립하는 우주론적인 태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양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진화론은 어마무시하게 인간중심적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의인화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대로 선주민의 애니미즘은 의인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분명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간을 제외한 수많은 존재가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일 수 없다. 구래의 ‘미개의 나르시시즘’은 풍문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진짜 사례를 찾아보자면, 근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마르크스가 우리의 종에 대해 기술한 일설을 살펴보자.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인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임을 확증한다. (중략) 그렇다, 동물 또한 생산한다. (중략) 그러나 동물은 단지 자신 혹은 그 존재를 위해 직접 필요로 하는 것만을 생산한다. 즉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중략) 동물은 다만 그에 속한 종의 기준과 욕구에 따라 형상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다른 종의 기준에 따라서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Marx 1961[1844]: 75-76 in Sahlins 1996).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산한다”는 이 명제를 통해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지 간에 나는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라면 다른 동물종 각각은 특수한 인간성인 것은 아닐까?) 인간성은 행위자의 보편적인 형상이라는 점에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관념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르크스의 판단을 실은 그 순수한 반전이다. 그것은 모든 종들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동물 속에서 지각되는 이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의미에서 인간은 보편적 동물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 보편성은 인간중심적인 반면, 선주민의 경우에 보편성은 의인화다.

 

지금까지 내가 논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각각의 종의 대자적이고 재귀적인 관계와 논리적인 등가물을 표현한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북서부해안의 츠므시족(Tsimshian族)의 우주론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자.

 

주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보기에 세계에는 영적인 영역에 둘러싸인 인간적인 공동체라는 틀이 있으며 그 영적인 영역은 모든 존재가 각각의 특징에 따른 삶을 영위하며 상호 존재에 간섭하는 동물의 왕국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로—예를 들어 연어로—변신한다면, 연어인간에게 자신은 우리에게서의 인간인 것으로서, 인간은 나스노크[정령] 혹은 연어를 탐하는 곰으로 나타난다. 이 번역의 과정은 몇몇 차원을 횡단한다. 예를 들어 스키나 강에 떨어진 목화 잎사귀는 연어인간에게는 연어다. 잎사귀에게는 연어가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연어인 것처럼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곰처럼 보이지 않는다면(Guédon 1984: 141-42).

 

즉 연어는 인간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연어에게 나타나는 것이라면—이것이 애니미즘이다—, 연어는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인간 또한 연어에게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이것이 퍼스펙티브주의다.

 

아마도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에서는 데스콜라의 모델에서 예견되는 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관계가 토테미즘과의 사이에 놓여있다. 왜 동물들(이나 그 외의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는 것일까? 내 생각에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그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리라. 멧돼지가 자신을 멧돼지로 보는 것(그리고 인간이나 그 외의 존재가 그 특징적인 의복 밑에 멧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보일 때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간주하며, 비-인간으로부터는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령으로—간주된다면, 동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퍼스펙티비론적인 애니미즘의 비대칭적인 비틀림은 토테미즘이 노정하는 대칭성과 매우 흥미로운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 특수한 동물이라는) 재귀적인 동일성의 상관이 인간적인 계열과 동물적인 계열의 관계에 대한 기초가 된다. 후자에서 (한 인간은 한 동물에게, 다른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 그러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차이의 상관이 두 계열을 분절한다. 차이의 상관이 대칭적이고 가역적인 구조를 산출하는 반면, 동일성의 상관은 애니미즘이라는 비대칭적이고 유사투영적인 구조를 산출한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결국은 애니미즘이 주장하는 것이 동물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라기보다 동물들은—우리처럼—자기 자신과 다르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밖에 있는 외연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포적인 것이다. 모든 것에 혼이 있다면, 이로부터 어떤 분류도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간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아니다. <존재의> 기저에 있다는 인간성은 시사적으로 종 특유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성을 문제시한다.

 

 

다자연주의

 

주체적인 위치의 다원성을 아우른 세계라는 사고방식은 즉각 상대주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분명 상대주의에 대한 직접적 내지는 간접적인 언급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종종 나타난다. 마쿠나족(makuna族)의 민족지학자인 카이 오렌이 전경으로 밀어낸 다음과 같은 판단을 생각해보자. 오렌은 아마존의 북서부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적인 우주를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 관해 말하자면, 현실에 대해 다원적인 관점이 있다는 사고를 포함하는 바, “모든 지각은 동등하게 유효하며 또한 진실하”고 “세계에 대한 진실하고 정확한 하나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Århem 1993: 124).

 

오렌은 확실히 옳다. 다만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완전히 그 반대로 세계에는 진실로 정당한 하나의 표상만이 존재한다고 마쿠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유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어망 속에 타버린 물고기로서, 독수리에게 보이듯이 본다면, 우리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독수리로 변신하고 있다는 것, 즉 보통 때라면 누구의 평면에도 기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병 들을 불운의 전조다. 퍼스펙티브는 분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샤먼만이 종에 관해 양성구유적인 것처럼 각기 다른 종들을 교신시킬 수 있는데, 그것도 특수하고 제약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층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이론은 오렌이 논한 것처럼 동일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다원성을 상정한 것일까? 민족지학자의 논의를 수용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반대로 취하는 것은 여기까지 해두자. 모든 존재는 세계를 동일한 비법으로 본다(표상한다)—바뀐 것은 그것들이 보는 세계다. 동물은 인간과 동일한 카테고리와 가치를 이용한다. 우리 세계처럼 그들의 세계는 어로와 수렵, 요리와 발효주, 교차사촌혼과 전쟁, 의례와 입사식, 샤먼과 추장, 정령을 중심으로 움직인다(Guédon 1984: 142). 달과 뱀, 재규어가 인간을 맥이나 야생돼지로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그들이 맥이나 야생돼지를, 즉 인간에 적합한 식량을 먹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는 있을 수 없으며 비-인간은 고유의 구역에서 인간이며, 그들은 사물을 인간이 보듯이 본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곳의 것들은 별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은 재규어에게 발효주다. 죽은 자의 영(靈)에게 부패한 유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다. 우리가 진흙탕으로 보는 것은 맥에게는 거대한 의례용 건물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반직관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도와 땅의 반전으로서 널리 알려진 착시도처럼 그 자체가 반대물로 변형하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라드 웨이스(Gerard Weiss)는 캄파족(campa族)의 세계를 “다른 타입의 존재가 동일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상대적인 외견의 세계”로서 기술하고 있다(1972: 120).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웨이스가 간과하는 것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사실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을 본다는 사실의 단순한 귀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같은 사물’로 간주된다는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관계에서 무언가의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일까? 웨이스의 정식은 물(物) 자체의 망령이 덧씌워져 있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다자연주의다. 문화상대주의는 일종의 다문화주의가 전제하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표상의 다양성이며 각각은 외재적으로 통일된 자연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데, 자연은 그것들의 표상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은 그 반대물을 제시한다. 실재하는 다양성으로 골고루 적응되는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현상학적 혹은 표상의 통일체다. 유일한 ‘문화’와 다원적인 ‘자연’, 즉 불변의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퍼스펙티비즘은 다자연주의다. 퍼스펙티비즘은 표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퍼스펙티브가 표상하지 않는 이유는 표상이 정신의 재산인 반면 퍼스펙티브는 신체에 거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설 수 있는 능력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혼의 잠재능력이며, 그래서 비-인간은 정신을 가진(혹은 정령인)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그리고 어떤 관점은 차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는 혼에 없다. 혼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을 관통하는 동일자며, 모든 곳에서 같은 사물을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신체의 특수성에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가능해진다. 만약 비-인간이 인격이며 혼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동물들이 우리가 다른 사물을 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그것들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언급하는 것은 물리학적인 차이—이 점이 제기되는 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단일성을 인식한다—가 아니라 각각의 종들의 신체를 특이한 것으로 만드는 정태, 경향성, 역능이다. 즉 먹는 것, 교신하는 방법, 사는 곳, 군집성이라든지 단독성이라든지 등등. 신체의 형태학은 정태로서의 이것들의 차이에 대한 힘으로 넘쳐나는 기호지만, 그것은 눈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인간적인 외견은 재규어적인 정태(jaguar-affect)를 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신체로 부르는 것은 변별적인 신체적인 실질이나 특징 있는 해부학적 구조와 무관하다.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정태와 존재의 양태의 집합체다. 혼이라는 형상적인 주체와 유기체라는 실질적인 물질성 사이를 정태와 역능의 다발로서 신체가 점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퍼스펙티브의 원천이 있는 중핵적인 평면이 존재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라는 정신적인 본질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체적인 매너리즘(maniérisme)이다.

 

그러나 신체 간의 차이는 외재적인 관점의 타자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적으로 모든 부류의 존재는 동일한 형상(인간이라는 총칭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타성(他性)이 그 자체로 파악되는 양태다. 통상의 양태에서 우리가 동물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신체가 각각(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퍼스펙티비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만약 <문화>가 혼의 관념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의 재귀적인 퍼스펙티브라면, <자연>이란 다른 신체적 정태에 대한 행위자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문화>가 <주체>의 본성이라면, <자연>은 신체인 한에서, 즉 다른 누군가에 대한 무언가인 한에서, <타자>의 형상이다. <문화>는 ‘나’라는 대명사의 자기참조적인 형상을 띤다. 반면 자연은 비인칭적인 대명사인 ‘그것’에 의해 드러난다. 객체의 특히 ‘비-인격적’인 형상이다(Banveniste 1966a: 25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시선에서 신체가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전한 일화 속 스페인 사람과 앤틸리스 주민이 취한 타자의 인간성을 탐사하는 방법이 그처럼 비대칭적이었다는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인에게 타자를 혼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로 판단하고자 했다. 반면 선주민의 목적은 타자가 어떤 부류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유럽인에게 우월하고 변별적인 것, 즉 퍼스펙티브의 차이화 장치(=微粉機)는 혼이다(인디오는 인간인가, 동물인가?). 인디오에게 그것은 신체다(유럽인은 인간인가, 정령인가?). 유럽인은 인디오가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인디오는 유럽인이 혼을 가지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혼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가 알고자 했던 것은 이것들의 ‘혼’의 신체가 그들 자신과 동일한 정태를 가지고 있는지—유럽인이 인간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였다. 정리해보자. 유럽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에 스스로가 가진 것과 동일한 혼이 있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성립된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함으로써 성립된다.

 

잉골드가 강조한 것처럼(Ingold 1994: 1996), 서양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양의적이다. 한편으로 사람이라는 종은 그 외의 것들과 동일한 동물종이며, 동물성이라는 영역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반면 인간성은 동물을 배제하는 도덕적인 조건이다. 이 두 가지 지위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라는 문제와 이접적인 이념으로서 양립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근대인]의 우주론은 인간과 동물 간에 형이하학의 연속성과 형이상학의 불연속성을 가정한다. 전자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인류’를 만들어내며, 후자는 인문학의 대상이 된다. 정신은 우리의 중요한 차이화 장치다. 정신은 우리를 동물이나 물질 일반보다 상위에 위치 지으며 우리 동료들에 대해 개별의 인간을 특이화 한다. 정신은 집합의식과 시대정신 등의 어휘를 통해 문화와 시대를 구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체는 주요한 융화장치(=집적회로)이며, ‘근대적인 융합’의 매체다. (DNA, 탄소화합물 등) 보편적인 기질(에 의해 융화된) 다른 생물에게 우리를 접속시킨다. 달리 말하면 모든 물질적 ‘신체’라는 궁극적인 자연에 연결시킨다. 한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의 존재들 간에 형이상학의 연속성과 형이하학의 불연속성을 조정한다. 전자는 애니미즘—예를 들어 ‘미개의 융합’—으로, 후자는 퍼스펙티비즘으로 귀결된다. 정신과 혼—비물질적인 실질이라기보다 재귀적인 형상으로서—은 융화하고, 신체—물질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활성화하고 있는 정태의 체계로서—는 차이화 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이다. 아마존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른 논의를 살펴보자. 르나르-카즈비츠의 마치겡가족의 신화론에 대한 저작(Renard-Casevitz 1991)을 검토해보자. 인간인 주창자가 외부자의 마을을 방문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뱀과 박쥐, 불덩어리를 ‘물고기’, ‘아구티’, ‘마코앵무’(인간의 식량)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렇게 불리게 된 신화를 해설하면서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아님을 깨닫는다.

 

신화는 모든 국면에서 유효한, 문화횡단적이고 민족횡단적인 규범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규범은 동일한 기쁨과 혐오, 음식에 관한 동일한 가치나 동일한 금지와 기피를 규정한다. (중략) 신화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야만적인 선호나 부적절한 언어의 이용이 아니라 견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바에 있다(Renard-Casevitz 1991: 25-26).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더할 나위 없는 평범함을 인정해버렸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없었다.

 

퍼스펙티브에 몸을 두는 것은[mise en perspective] 보편적인 사회적 실천의 적응과 전조에 불과하며 X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Y의 시부모라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중략) 점유된 장소에 따른 이름의 가변성은 어떻게 A가 동시에 X에게서 물고기이며 Y에게서 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Renard-Casevitz 1991: 29).

 

사회생활에 고유한 위치에 기반한 상대성의 일반화는 종들 간 혹은 세대 간의 차이에 적응함으로써 인간적인 문화를 자연에, 즉 절대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귀결에 이른다는 것이 문제시된다. 누구라도 ‘물고기’를 먹게 되고, ‘뱀’을 먹는 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나르-카즈비츠가 말한 친족에서 위치잡기와 존재의 상이한 유형에 따라 물고기 혹은 뱀으로 알려진다는 것 간의 아날로지는 매우 흥미롭다. 사고실험을 해보자. 친족용어는 열려진 관계사로서 논리를 조작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는 명칭의 계층에 속한다. (물론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나타내는 라벨이 있다. ‘이항술어’ 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물고기’나 ‘나무’ 등의 개념은 닫힌 혹은 명확하게 경계를 긋는 ‘고유’ 명사이며,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특성에 의해 어떤 대상에 끼어 맞춰진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 곧 ‘물고기’, ‘뱀’, ‘해먹’, ‘카누’ 등의 명사에 의해 지명되는 실질은 관계사로서 명사와 대명사 간에, 실사(實詞)와 직시(直示) 간에 있는 무언가로서 사용된다. (‘물고기’ 등의 자연종의 이름과 ‘해먹’ 등의 인공물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다—다음을 참조할 것.) 한 인물은 그 인물을 아버지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한에서 아버지다. 즉 부성과 관계한다는 것인 반면, ‘물고기성’ 혹은 ‘뱀성’은 물고기나 뱀 본래의 특성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은 어떤 사물 또한 이 사물을 물고기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이며 물웅덩이가 맥의 해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누이인 이사벨의 딸 니나가 나의 조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면, 어떤 상대주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통상 표현이 의미하는 한에서 주관론적인 니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사벨은 니나에게서의 어머니가 아니다. 이사벨은 니나의 어머니고 이사벨은 바로 객관적으로 니나 어머니며 나도 니나의 외삼촌이다. 관계는 내적으로 속격(屬格)—이처럼 산자의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인 것처럼 나의 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며, 그리고 나는 그 인물의 외삼촌이다—이며, ‘그 자체’가 무엇이든지간에 단지 물고기로서 표상된다는 것을 함의하는 “X는 누군가에게서의 물고기다”라고 하는 부류의, 외적이고 표상적인 연결이 아니다. 니나는 이사벨의 딸이지만 내 딸은 아니기 때문에 니나는 내게서의 ‘딸’이 아니다—왜냐하면 니나는 실제로 정확하게는 나의 누이의 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세계(real world)>라는 어구는 서 있는 위치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꿔내는 <어제>나 <내일>과 같은 것이다”(Whitehead 1929: 65, in Latour 1994: 197). 즉 관점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다. ‘어제’나 ‘내일’이라는 관념에 주관적인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나의 어머니’나 ‘너의 형’이라는 관념도 그와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종의 현실세계는 그 관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각기 다른 종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관점에 의해 각각의 종 동료들이 분기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사물에 대한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사물과 존재야말로 관점이다(Deleuze 1969: 203). 즉 여기서 문제는 ‘원숭이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Chency&Seyfarth 1990)가 아니라 원숭이를 통해 어떤 세계가 표현되는가, 원숭이는 어떤 세계에 대한 관점에 있는가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적 실질’은 이러한 타입에 관한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동일한 양친을 둔 두 개인이 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물고기, 같은 뱀, 같은 카누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종이라고 상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마존 지역의 우주론에서 인간과 인척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것들로서 종종 동물들이 사고된다는 것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나의 누이는 나의 처형의 아내인 것처럼—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간의 피는 재규어의 발효주다. 종들 간의 혼인을 이야기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화는 실로 무수히 많다. 인간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자식이 동물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부모와의 어려운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행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의 아날로지를 하나의 아날로지로 묶는 그 자체다. 이렇듯 퍼스펙티비즘이 교환들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퍼스펙티비즘의 교환의 양태(서두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퍼스펙티브의 상호성)로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교환 자체가 이 용어에 의해—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서—규정되어야 한다(Strathern 1988, 1992a, b).

 

이제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론을 입수했다. 그 존재론에서는 개별의 신체적 실질과 실체적인 형태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여기서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철학에서의 전통적인 대비를 불러온다면—사이에는, 혹은 ‘삶의 사실’과 ‘제도적 사실’—셜의 최근 저작(Searl 1995)에서 제시된 이원성을 불러온다면—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셜의 이 저작에 대해 간단하게 논해보겠다. 저자는 의식이란 독립된 실재성에 있는, 그가 삶의 사실과 객체라고 한 것—중력과 산, 나무와 동물(모든 자연종은 이 계층에 속한다)—을 그 존재, 동일성, 목적이,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특정의 문화적인 의미에서 유래하는, 제도적이라고 불리는 사실과 객체—혼인과 화폐, 도끼와 컴퓨터 등—에 대치한다. 문제가 되는 이 저작은 베르크(Peter Berger)와 루크만(Thomas Luckmann)의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구성』이라 불리는 것에 주의하자. (삶의 사실에 대한 언명을 포함한) 제도적 사실이 구축된다고 하지만, 삶의 사실은 구축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자연/문화의 이원론의 현대화된 버전에서 문화상대주의는 자연의 보편주의가 자연인 객체에 적합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화적인 객체에 대해 유효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논의를 셜이 우연히 착목했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모든 사실은 정신 내지는 제도적인 타입에 관한 것이며 모든 객체는 나무와 물고기조차 화폐와 카누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나무토막이나 종이조각으로서가 아니라 화폐나 카누로서)이며, 이 또한 특수한 실재성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와 이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라고. 이것은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며, 그것도 극단적이며 절대적인 모습을 띠는 상대주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애니미즘적인 퍼스펙티비즘의 존재론이 함의하는 하나는 자율적인 자연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의 ‘자연’이 다른 자에게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정적인 규칙, 혹은 제도적 사실을 표하는 정식이 “맥락 C에 있어서 X는 Y로 간주된다”(Searle 1959: 51-52)라고 한다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선주민적 사실은 바로 이 타입에 관한 것이다. “재규어의 맥락에 있어서 피는 발효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적 사실(셜의 정식에서 Y)은 보편적인 것의, 삶의 사실이 보편적이고 제도적 사실이 특수하다는 셜의 대안을 피해가는 어떤 것이다. 퍼스펙티비즘을 (모든 사실을 제도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들에는 문화적인 가변성이 있다고 결론내릴) 구축론자의 상대주의로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은 그 반대물로서 자연상대주의문화보편주의(이 표현은 라투르로부터 빌려왔다) 혹은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방식으로는 다자연주의의 하나의 사례다.

 

 

야생의 신체

 

아마존의 우주론에서 신체가 우수한 사회적 장치로서 나타난다는 관념—즉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동일한 타입의 존재를 통합하는 것—은 이 지역의 민족학에서 고전적인 질문을 새로운 조망 하에 재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마존의 사회들에서 신체성의 의의라는, 지금은 고풍스럽게 울려 퍼지는 이 주제(Seeger, DaMatta&Viveiros de Castro 1979)는 우주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주제를 통해 예를 들어 동일성의 카테고리—개별적이든 집합적이든, 민족적이든 우주론적이든—가 빈번하게 특히 식사의 실천과 신체장식 등의 신체적인 성구를 통해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식량이나 요리 제도의 상징적인 함축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익힌 것과 날 것”에서부터 피로족 사람들을 백인과 문자 그대로 차이화하며 피로족을 피로족으로 만드는 ‘진짜’ 음식(Gow 1991a)까지. 중앙브라질에서 ‘신체적인 실질 집단’을 규정하는 음식기피(Seeger 1980)에서부터 식습관에 연관된 존재의 기본적인 분류(Baer 1994: 88)까지. 공식성(共食性)과 식생활의 유사성과 먹이-객체와 포식자-주체라는 상대적인 조건의 개념적인 생산성(Vilaça 1992)으로부터 혼인, 식사, 전쟁 등과 관련한 타자와의 모든 관계의 ‘술어적’ 평면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편재성(Viveiros de Castro 1993)까지. 이 보편성은 신체를 구성하는 습관과 과정이 바로 동일성과 차이가 출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동일성의 확정과 사회적 가치의 유통의 경우 신체를 기호론적으로 정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Turner 1995). 아마존 사회체에서 관계성의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물의 자원적 제약—사회적 교환이 증여경제나 상품경제처럼 물질적인 객체화에 의해 매개되지는 않는 상황—과 (특히 그 가시적인 표면에서) 신체의 중층결정 간의 연결에 대해서는 터너가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리했으며, 인간적인 신체가 사회적인 객체의 원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신체의 사회적 구축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적인 기질의 문화화라기보다 시차적(示差的)으로 인간적인, 이른바 인간적인 신체의 산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특징지어짐으로써 신체를 ‘탈-동물화’하려는 갈망이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아무 특징도 없는 신체를 다른 인간적인 집단과 그 외의 종으로부터 차이화함으로써 특수화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차이를 낳는 퍼스펙티브의 장으로서 신체는 그 퍼스펙티브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차이화되어야 한다.

 

인간적 신체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계보투쟁의 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며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제어될 필요 때문이 아니다(Riviére 1994). 신체는 주체가 표현하기 위한 근원적인 도구임과 동시에 타자의 시야에 던져진 특단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신체가 사회적으로 최대한 객체화된다는 것, 즉 장식과 의례적 피로(披露)를 통해 표현되는 최대한의 특수화가 동시에 최대한의 동물화의 기회가 되는 이유다(Goldman 1975: 178; S. Huge-Jones 1979: 141-142; Seeger 1987 ch. 1&2; Turner 1991; 1995). 그때 신체는 깃털, 채색, 도안, 가면, 그 외의 동물적인 보철들로 덮인다. 의례적인 동물로 치장하는 인간은 초자연적으로 벌거벗은 자신의 신체의 ‘자연적인’ 특수성을 자신에게 드러낸다. 이 인간은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으로 나타남으로써 정신의 ‘초자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정신 모델은 인간적인 정신인 반면, 신체 모델은 동물적인 신체다. 그리고 주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화가 <나>의 총칭이 되는 형상을 띠고 자연이 <그것>의 형상을 띤다면 주체자신의 대상화에는 신체의 특이화—문화의 자연화 곧 문화의 신체화—를 요하게 되는 한편, 객체의 주체화는 정신의 수준에서 의사소통—자연의 문화화 곧 자연의 초자연화—을 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연/문화의 구분의 문제계는 인간-동물이 공유하는 애니미즘적 사회성의 이름하에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퍼스펙티비즘의 광명 하에 재독되어야 한다.

 

‘신체 모델은 동물적 신체’라는 사고를 지지하기 위한 중요한 논거는 아마존 민족지와 신화론에서 인간으로 ‘치장하는’ 동물, 즉 인간의 신체를 의복처럼 몸에 두르는 사례가 사실상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인간적인 신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신체는 의복에 싸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동물이 인간적인 의복과 장식을 몸에 두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적인 의복을 몸에 두르고 동물이 되는 것인가, 동물이 동물적인 의복을 벗고 인간으로 나타나는가, 이 둘 중 하나다. 인간적인 형상은 신체의 내부의 신체며, 원초적인 벌거벗은 신체—신체의 ‘혼’—다.

 

이러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체는 여건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신체의 계속적인 제작이라는 수법이 강조된다(Viveiros de Castro 1979). 신체적, 성적, 영양적인 유체의 공유를 통해—물질적인 본질(substantial essence)의 수동적인 유전이 아니라—개인을 적극적으로 동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친족 관념(Gow 1989; 1991a), ‘고기’로 기재되는 기억 이론(Viveiros de Castro 1992a: 201-207), 나아가 더 일반적으로는 신체에 위치지어진 지식 이론(Mc Callum 199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형성은 정신보다도 신체에서 이뤄진다. 신체의 변태, 즉 정태와 역능을 규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건이라기보다 행위수행적인 신체의 특징, 즉 신체가 ‘자연적으로’ 차이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신체를 차이화시켜야 한다는 사고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항상 그 가능성이 표명된다. 종들 간의 변신(metamorphose)과 분명히 연계되어 있다. 신체를 탁월한 차이화 장치로서 조정함과 동시에 그 변신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론에서는 특이성이 정신의 특징으로 상정되지만, 이를 통해 (이를테면 독아론은 항상 문제시된다 해도)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 표명되는 것도 아니라면, 교육이나 종교적인 회심 등의 과정에 더 잘 일어나는 심적 내지는 정신적인 변태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바로 정신이 심적이 필요로 하는 차이의 장이기 때문이다(서양인은 인디오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신체적인 변신은 영적인 회심이라는 유럽적인 주제인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는 그 반대물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이라는 복합체에서 영적빙의라는 양의성 없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희귀한 것도 신체의 변신이 우세하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선주민의 종교적 회심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주민의 ‘문화적응’ 경험은 정신적인 동화라는 사고보다도 서양의 신체적인 습관의 수용과 신체화—음식물, 의복, 민족 간의 섹스, 육체적인 능력으로서의 언어 등—쪽에 초점을 둔다. 사회문화적인 변용에 관한 인류학의 이론은 혼혈이나 인종적 동화가 민족-문화적 구분의 상실과 연결된다는, 서양의 민족발생론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와 반대로 문화적응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변화, 즉 무엇보다도 현지의 ‘신념’에 악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과정으로서 규정된다. 문화적응은 딱 문화가 종교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되는 것처럼, 종교적 회심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더욱 세밀한 채색을 가하는 것 같은 아비투스의 개념조차 문화적응에 휘말린 신체의 변화는 그 원인보다도 ‘집합적 표상’의 수준에서의 그 효과로서 이해된다. 생각해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변신이 평온한 과정이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가치가 부여된 목적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독아론이 우리의 우주론을 위협하는 환영(幻影)—동종의 동료들이 인식할 수 없다는 공포의 확장, 잠재적으로 절대적인 정신의 특이성을 고려해둔다면 실은 그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라면, 변신의 가능성이 표현하는 것은 그 대극에 있는 공포, 동물로부터 인간을 이미 차이화할 수 없다는 공포, 나아가 자신이 먹은 동물 신체에 잠재된 인간적인 것을 보는 공포다(Goldman 1975: 183; Brightman 1993: 206ff; Erikson 1997: 223). 이것은 퍼스펙티비즘의 더욱 중요한 민족지적 반복 속에서 번역된다. 동물들의 옛 인간성이 가시적인 형상에 숨겨진 현재의 영성(靈性)에 부가되기 때문에 신화적으로는 인간과 동일 실체인 몇몇 동물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명된다면, 특정 동물을 먹기 전에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가 필요하다는, 식량금기 혹은 예방책으로서 성립되는 복합이 산출된다.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는 동물의 영을 무력화하고 그 고기를 식물로 구체화하든지 덜 인간적인 다른 동물로 의미론적으로 환원한다—이 모든 것은 사람을 먹는 보복의 포식으로서 이해되는, 질병의 모습을 취하는 복수의 위협 하에 있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은 포획물의 영, 인간을 동물로 변태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치명적인 전치를 통해 포식자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독아론이라는 문제와 동등한 것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이다. 독아론이라는 문제가 신체적인 유사성이 정신 사이에 실재하는 공동성을 보증하는 것인지에 대한 염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은 정신의 유사성이 실재하는 신체적인 차이에 우월한지를, 그리고 먹힌 동물이, 가령 샤먼에 의한 탈주술화의 시도가 있다 해도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지를 위태로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근원적인 독아론자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세련되거나 문자 그대로 식인적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될 이유는 없지만.

 

아마존의 카니발리즘이 의도하는 것은 적의 주체적인 상(相)을 흡수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적(敵)은 동물의 신체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탈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주체화된다(Viveiros de Castro 1992a; Fausto 2001 참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샤먼의 움직임 속에 선량한 부분은 죽은 동물을 탈주술화해서 먹기 위해 어떤 위험도 존재하지 않도록 순수하게 자연의 사체로 변신시킨다는 점이다. 반대로 정령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그것들은 한층 더 탁월한 대식가, 즉 사람을 잡아먹는 자가 된다. 따라서 탁월한 동물적 포식자는 정령들이 즐겨 나타나는 형상이 된다. 나아가 왜 먹잇감인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 보는가, 포식자는 우리를 먹인감인 동물로 보는가, 왜 먹히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동물은 정령과 관계하는 경우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있다.

 

변신의 관념은 이미 몇 번이나 언급한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교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신체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장’이라는 사고와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을 해석할 때에 상기되는 외견본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양립시켜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중요한 오인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체적인 ‘외견’을 비활성적이고 허위인 것으로서, 정신적 ‘본질’이 활성 있는 진정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오인이다(골드만의 결정적인 견해를 참조할 것. Goldman 1975: 63, 124-145, 200).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의복과의 관계로 신체에 대해 말할 때의 사고에서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신체가 특정 종의 의복이라기보다 의복이 특정 종의 신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피부에 효과적인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적절한 의례적 맥락에서 이용된다면, 몸에 둘러진 인물의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태시키는 힘을 저장한 동물의 가면이 사용된다(혹은 적어도 그 원리가 알려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면-의복을 두르는 것은 동물적인 외형 밑에 인간적인 본질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신체의 힘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샤먼이 사용하는 동물적인 의복은 코스프레가 아닌 도구다. 그것은 카니발 의복이 아니라 다이빙용품이나 우주복에 가깝다. 잠수복을 몸에 두를 때의 지향은 수중에서 숨을 쉬게 하는 것,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를 기묘한 덮개 밑에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물 사이에서 인간적인 타입의 내적인 ‘본질’을 씌우는 의복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동물 각각을 규정하는 정태와 역능을 품고 있는 변별적인 장비다. “외견은 속일 수 있다”(Hallowell 1960; Riviére 1994).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인상으로는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주제로 다뤄지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이야기의 관심은 그것이 숨기는 것보다도 이 의복이 이루는 것에 있다. 게다가 존재와 그 외견 사이에 있는 것이 신체다. 그리고 그 신체는 단지 그것인 이상의 것이다—이야기 그 자체는 어떻게 외견과 일관되지 않는 신체적인 제스처에 의해 항상 외견이라는 ‘가면이 새겨지는’ 것일까를 이야기한다. 즉 다음과 같다. 신체는 처분가능 및 교환가능하며 그 ‘배후’에는 형상의 측면에서 인간으로 확정 가능한 ‘주체성’이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관념이 외견과 본질 사이에서 우리가 품는 대비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 관념은 신체의 객체적인 교환가능성이 정신의 주체적인 동등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 틀에서 해석될 수 있는 남미 민족지학의 또 하나의 주제는 산자와 죽은 자 간의 사회학적 불연속성이다(Carneiro da Cunha 1978).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근본적인 구분은 정신이 아닌 신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죽음은 신체적인 파국이며,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교통하는 ‘활력’을 억누르는 차이화 장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은 동물의 시야로 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을 죽은 자의 세계를 보는 양태로 향한다. 그것은 산자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로부터 결정적인 순간까지 분리되므로 죽은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인 신체와의 분리에 의해 규정되는 영(靈)으로서 죽은 자는 논리적으로 동물의 신체로 옮아간다. 이것은 왜 죽은 자가 동물로 변태하는지, 또 그와 마찬가지로 왜 인척이나 적대자 등의 다른 신체적인 타성의 형상으로 변태하는지가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애니미즘은 인간과 동물 간의 주체적이고 사회적인 연속성을 끌어내고, 그 육체적인 보완물인 퍼스펙티비즘은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사이의 객체적이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연속성을 확립한다. (조상숭배에 기초한 종교는 그 정반대를 가정한다. 즉 정신적 동일성이 죽음이라는 신체적인 장벽을 뛰어넘으므로 산자와 죽은 자는 동일한 정신을 표하는 만큼 동일하다—이렇듯 한편에서는 초인적인 조상의 영의 빙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죽은 자의 동물화와 신체적인 변신이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내포하는 다양한 논점들을 이제까지 검토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신의 종-횡단적인 균일성에 부여된 우주론적인 역할이다. 내 생각으로 이 속에서 특정 카테고리의 관계론적인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악평일색이었고 유용성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초자연>이라는 카테고리다. ‘천체 이상’의 유형이 속하는 우주지(宇宙誌)의 영역으로 라벨링되거나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지향성을 가진 존재의 제3의 유형—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내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정령’이다)—을 규정하는 것 등 잘 알려진 사용례와는 별도로 초자연의 관념은 특정한 관계적인 맥락과 특수한 현상학적인 질을 지시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 맥락과 질은 사회적인 세계를 규정하는 간주관적인 관계로부터도 동물의 신체화의 ‘간-객체적 관계’로부터도 마찬가지로 구별된다.

 

대명사적인 계열과의 유사(Benvenisete 1996a, b)에 따라 (혼이나 정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재귀적인 <나>와 (신체적 타성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자연이라는 비인격적인 <그것> 사이에는 간과된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너>라는 2인칭이며, 그 관점이 <나>의 관점의 잠복된 메아리인 것처럼, 다른 주체로서 받아들여진 타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관념이 초자연적인 맥락을 규정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체가 우주론적으로 우세한 다른 관점에 포획된다는 예외적인 맥락, 그가 비-인간적인 퍼스펙티브의 <너>인 맥락에서는 <초자연>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형상이다. 인간적인 나를 이 <타자>에게서 <너>로 대상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의미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상황의 전형은 처음에는 단순히 동물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로부터 정령이나 죽은 자로서 나타나 인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를, 인간이 숲 속에서 마주친다는 것이다. (타일러의 텍스트에서는 이 의사소통의 역동성이 정교하게 분석되어 있다(Taylor: 1993b). 이 만남은 응답자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비-인간적인 주체성에게 정복되면 그것들 쪽으로 옮겨가서 발신자와 동일한 부류의 존재—죽은 자, 정령, 동물—로 변태해버리기 때문이다. 비-인간에게서 <너>라고 불려 그에 응답한 자는 그 존재의 ‘2인칭’의 조건, 즉 그에게서의 <나>의 위치에 이미 담겨 있는 비-인간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자다. (정의상 혹은 공식적으로 다자연적인 존재인 샤먼만이 여러 퍼스펙티브를 왕래할 수 있고 자신의 주체의 조건을 잃지 않고 동물 혹은 영적인 주체로부터 <너>로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을 <너>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만남의 기준형식은 타자가 ‘인간적’임을 서둘러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자동적으로 응답자를 탈인간화하고 소외시켜서 먹잇감—동물—으로 변신시키는,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견의 배후에 숨겨진 것으로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품고 있는 염려가 진정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외견이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무엇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느 쪽이 지배적인 관점인지, 즉 어느 쪽의 세계가 작동하는지가 결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위험하다. 특히 모든 것이 인간이며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때에는.

 

 

맺음말을 대신해서

 

서로 대조해본 두 개의 우주론적인 관점—내가 ‘서양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통약불가능하다. 컴퍼스라는 것은 한쪽의 다리를 고정하고 다른 한 쪽의 다리가 그 주변을 돌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응하는 다리를 우리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다른 다리가 문화적인 다양성의 축을 그려내도록 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론적인 컴퍼스의 기준이 되는 다리로서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에 대응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자연’을 계속적인 변화와 변이에 위탁하고 있다. 양쪽 다리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컴퍼스—상대주의의 극단—는 기하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컴퍼스의 끝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다리가 머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이 구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머리 부분의 끝 주변을 배회한다. 라투르(Latour 1991)가 정교하게 논한 것처럼 <이론>이 실천이라는 ‘중간세계’를 실태나 원리 등의 대치된 영역으로 분리하고 순화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끝에 있는 점은 우리의 근대에서 이론-외적인 실천에서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연>과 <문화>처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아마도 모든 신화적 사고—는 그 정반대의 궤적을 선회한다. 왜냐하면 신화론의 대상은 <자연>과 <문화>의 분리가 아직 순수한 잠재성이라는, 바로 머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퍼스펙티비의 잠세적인 원천에서 절대적인 운동과 제한 없는 다원성은 경직된 부동성과 형용할 수 없는 통일성을 구분불가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점을 이야기해보겠다. 선주민이 옳다고 한다면 두 관점 간의 차이는 문화적인 문제도 아니고, 하물며 ‘정신성’의 문제도 아니다. 상대주의와 퍼스펙티비즘, 혹은 다문화주의와 다자연주의 간의 대조성이 우리의 다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닌 선주민의 학설 하에서 독해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퍼스펙티비의 상호성은 상호성 그 자체로 적합하다. 그리고 차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사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중 몇몇은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똑같이 언제나 잘 사고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보는 아마도—가령 이 용어가 그 경우에 더 적합하다면—의식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항상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류는 그 긴 역사를 통해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엮여왔을 것이다(Levi-Strauss 1955b: 255)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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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현대사상 2015년 12월 <인공지능> 특집호에 실린 '인공생명'에 관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규명한다면, 인공생명은 무의식을 규명한다. 역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규명되어야 인공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생명은 인공지능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생명을 통해 무의식이 규명될 수 있다니,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지능 개념이 인공지능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공지능이 지능 개념을 아우르고 또 생명 개념이 인공생명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인공생명이 생명 개념을 아우른다는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이 있다. 심지어 기술이 의식을 앞서는 singularity에서 더 나아가 다시 의식이 기술을 앞서가는, 그러나 이번에는 기술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기술을 이끌어간다는 post-singularity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한편의 논문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그러한 singularity가 예술, 건축과 어떻게 교차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건축과 신체의 관계를 논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건축의 형식으로서의 순수한 신체'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파악했을 뿐이다. 이에 관해서도 다른 한편의 글을 더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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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화하는 사회와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케가미 타카시(池上高志 복잡계 연구자)

 

 

최근 10년 간, 그 이전까지의 과학발전과 비교하면 과학에 대한 이해와 기술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데이터흐름(data flow)의 존재로서 그 압도적인 양, 압도적인 복잡함, 초고속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과학과 비교도 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의 양이 어느 정도 쌓여 복잡화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에 ‘생명화’가 깃든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 이론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

 

인공물에 생명성이 깃드는 것을 ‘인공생명화’라고 일러두자. 다양한 서비스와 미디어의 배후에 있는 기술이 자동화되면서 그 작동방식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제어가 미치지 못하게 되고, 편리성뿐만 아니라 시스템 고유의 자율성과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와 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인공생명화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해방식은 생명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창발성을 기본으로 한’ 이해방식이다. 왜냐하면 자동화되는 그 작동방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는 상향식(bottom up)을 찾아내어 이해한다는 태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하향식(top-down)의 인과적인 발생에서 이해한다는 태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즉 세계는 점차 인공생명화된다. 예를 들어 딥러닝(Deep Learning)을 비롯한 기계학습방법이 데이터와 함께 공진화함에 따라 데이터센터가 신전이 되고 구글이 대학의 연구실을 흡수해가며 학문을 인솔한다. 이렇듯 이러한 흐름 자체가 세계의 인공생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의 인공생명화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동화와 인공생명화

 

기술발전의 한 방향은 자동화다. 현재 모든 것의 자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의 로봇이나 비행기의 오토파일럿은 인간을 대신해서 장치를 조작하고 조종하고 있다. 티켓과 식품이 다양한 자동판매기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이 또한 상점에서 사람이 파는 것 대신에 기계가 파는 것이다.

 

이 자동화된 기계들은 아직 생명화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것은 이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의 예측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근 상당히 멀리 갔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가정에 도입된 “Pepper君”이라는 로봇. Pepper군은 실은 우리의 예측을 쉽게 뒤집었다. 2015년 7월의 TED×Tokyo에 Pepper군이 개발자인 미츠요시 슌지(光吉俊二)와 함께 등장했다. 그런데 Pepper군은 팔을 휘적거리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했다. 마치 아이가 보채는 것과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Pepper군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혹은 자동차의 자동운전이 구글 등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자동차라는 것은 본래 말 혹은 인간을 대신해 물건을 옮기기 위한 자동기계다. 장해물을 만나면 자동정지한다거나 속도를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이제까지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 운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전 그 자체도 자동화되어 인간은 탑승만 할 뿐이다. 처음에 이 자동운전 카-를 유튜브인가 어디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일반도로를 보통속도로 주행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험코스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Pepper군에 대해서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자동운전 카-에 대해서는 사람이 운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모두 ‘자연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Pepper군과 구글 카- 등의 진보한 기술ㆍ인공물은 섬뜩함과 생명성을 띤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이 사회에서 인공생명화된 최초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즉 인공생명화란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ㆍ미디어가 자동화하여 그 작동방식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자연현상화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스템의 조작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조작이 아닌 소프트웨어 그 자체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기계를 보고 “이거, 어떻게 하면 움직이지?”라는 감상을 갖는 것은 그 조작에 흥미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자연현상’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든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서 이해를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상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기술이 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여기서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공생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공생명이 이제까지의 우리의 생명관을 변신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공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논의되는 생명보다 ‘광범위하다’. 인공생명화하는 기술은 우리의 제어를 벗어나 자율성ㆍ항상성ㆍ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을 갖는다. 자율성은 자동화와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항상성이란 자신의 기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자기발전성이란 우리와의 관계성과 자기 자신의 기능을 혁신시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자동기계화와 인공생명화 간의 차이는 사회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의 구축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이 ‘사람인지 프로그램인지’를 대화식의 테스트를 통해 표면화시켰듯이 생명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무엇이 생명인가’라는 정의항목을 리스트업할 수 있다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비생명적인 머신’이 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비생명적인 머신이라면 이미 충분히 생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튜링테스트와 달리 여기서의 인공생명은 ‘언어적인 대화의 성립’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스며든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방식으로도 구별된다. 언어가 의식의 산물이라면, 사람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인공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튜링테스트보다도 훨씬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의 관계성으로서의 인공생명의 문제를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 위해 다음으로 ‘겉보기의 생명현상’을 다뤄보겠다. 이것은 생명의 ‘속살’을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이야기다.

 

 

마네킹 강연과 신선한 생명

 

마네킹 강연이란 마네킹에 3D 프로젝션ㆍ매핑을 가해서 표정 등을 만들어내어 ‘강연’을 하게 하는 시도로서, 2013년 3월 사카베 미키오(坂部ミキオ)와 야마가타 요시카즈(山縣良和)라는 두 젊은 패션디자이너가 『絶ㆍ絶命展』에서 발표한 전시수법이다. 이 전시는 시부야 파르코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마네킹 얼굴의 입체면에 맞춰서 이미지를 투영하고 인간의 얼굴을 마네킹에 재구성한다. 실제로 투영된 것은 몇몇 연구테마에 대해 강연하는 자신들의 얼굴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아바타에 의한 가상세계 강연이다. 배경에는 각각 강연 내용에 대응되는 발표용 슬라이드가 깔린다. 마네킹 옷의 직물, 시뮬레이션 되는 큰 무리의 새들의 동영상, Mind Time Machine이라는 세 개의 스크린과 15개의 비디오카메라, 그 배후의 인공 뉴트럴네트워크(neutral networks)로 만들어낸 뇌 시스템 동영상, 움직이는 기름방울의 실험동영상 등 연구테마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絶ㆍ絶命展』은 12일간 지속된 전시회로 ‘삶’과 ‘죽음’과 ‘신생(新生)’의 세 구간으로 나누어 각각 나흘씩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우리가 젊은 두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해낸 테마가 ‘신선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신선함’과 패션의 ‘신선함’의 연결을 시도해본다는 뜻이다. ‘신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업데이터할 가능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신선한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인공생명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생명의 정의는 자기복제 혹은 자기유지 등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규정된 것에 비해, ‘신선한 생명’은 주관적 혹은 감각질적인 질문으로서 최종적으로 혹은 처음부터 추구해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질이 없는 생명 시스템은 기능적인 생명과 같은 기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생명 연구에 대한 이 도전의 응전으로서 절명전(絶命展)에 출품한 것, 그것이 마네킹 강연이었다.

 

각각의 나눠진 세 기간에 조금씩 다른 실험을 시도했다. ‘삶’ 기간에는 마네킹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투영했고, ‘죽음’ 기간에는 앞서의 모습에 스크래치나 반전 등을 가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패턴이 얼굴에 투영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뜻밖의 효과를 내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즉 사람은 한 가지에 길게 집중할 수 없다. 반드시 주의를 잃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관람객을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마네킹에 신선함을 가미했다. 그 때문에 ‘신생’의 기간에도 같은 효과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생’의 기간에는 또 하나의 응전으로서 실제 인간 모델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프로젝션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섬뜩함이 출현하게 된다. 안드로이드 개발의 일인자인 이시구로 히로시는 “사람은 모두 섬뜩하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말을 체현했다. 이 섬뜩함은 ‘죽음’의 기간에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효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관람객을 계속해서 붙잡아두려고 했고, 그런 시도 속에서 사람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을 투영함으로써 발생한 ‘효과’는 차원이 다른 섬뜩함을 만들어내었다.

 

로봇을 기계적인 것에서 인간적으로 것으로 끌어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이 겹치는 데서 오는 상당한 섬뜩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섬뜩한 골짜기’다.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시구로는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 배후에는 섬뜩한 골짜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섬뜩한 골짜기에서 전형적인 인간의 이미지로부터 일탈한다. 그 일탈이 신선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선함이라는 것은 예측을 벗어나는 ‘보지 못한 것’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네킹 강연을 본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의 일탈’을 ‘보는 측의 상상력’으로 보충하고자 한다. 신선함은 섬뜩함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일탈적인 섬뜩함은 신선함을 구성한다. TED×Tokyo에서 난폭하게 굴었던 Pepper군에게서 본 것은 바로 섬뜩함에서 비롯된 실제성(actuality)이다. 이러한 섬뜩함에서 생성된 신선함은 의식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생명이 우리 사회에 출현하기 시작하면 생명인 우리의 의식도 변혁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다—인공생명화된 시대의 인간상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인간이란 인공생명화되는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ㆍ시대를 변혁하는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패션이란 그 하나의 양상일 것이다. 아티스트인 아라카와 슈사쿠(荒川修作)는 ‘착륙장(landing site)’이라는 아이디어로 미타카 천명반전주택(三鷹天命反転住宅)을 지었다.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주택이란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가치와 언어를 만들어내어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다. ‘착륙장’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감각기관은 모순을 일으키고, 그 결과 순수한 신체와 자기 자신 혹은 건축이라는 형식에 빠져든다. 그 형식 속에 없는 것을 보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려는 능력은 인간의 기본적 성능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능적인 것(먹이를 찾아내거나 적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발휘하는 어떤 것)으로 회수하게 되면 신체와 건축은 상실되고 만다.

 

『絶ㆍ絶命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삶’의 기간에 행해진 통상의 프로젝션ㆍ매핑을 ‘죽음’의 기간에서 다양한 효과를 통해 파괴해보면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신선한 생명’이 잠깐씩 나타난다. 효과는 이형적(異形的)이다. ‘죽음’에서 생명성이 반전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카와의 말을 빌려 말하면, 그곳이 ‘착륙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적으로는 주의집중의 문제이지만, 더 파고들면 파괴됨으로써 출현하는 순수한 신체라는 형식이 드러난다. 섬뜩한 골짜기는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내재화되면서 베일에 덮이는 것이다. 은폐됨으로써 보는 측의 상상력을 상기시켜 신선함(freshness)을 이끌어낸다.

 

아라카와와 깅스는 그들 자신이 쓴 『건축하는 신체』라는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의 제목은 처음에는 ‘생명을 건축한다’였다. 그런데 결국 제목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자 한 것은 생명의 재구축 혹은 생명을 재구성(reconfigure)함으로써 생명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인공생명적인 접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인공생명 연구가 아라카와&깅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과 정반대인 이유를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생명 연구의 많은 부분이 생물과 유사해지도록 자기복제와 자기유지 등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아라카와&깅스는 눈, 귀, 코, 입 모든 것을 빼앗고 그 다음에 남는 ‘신체’의 형식 혹은 생명성이라는 형식을 순수하게 추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지(天命反転地)’는 형식=건축으로서의 신체 혹은 생명이 내려앉는 장소가 된다. 향후의 인공생명은 아라카와&깅스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향해갈 것이다. 그 목적이야말로 “지금 당장 도움을 주는 과학”을 넘어선 가치의 창조다. 인공생명화된 세계에서는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재창출되어야만 과학 또한 창조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아라카와&깅스가 목표로 했던 것이 생명의 재구성(reconfigure)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술적 특이점’이다.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의 문제

 

기술적 특이점은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의 가치가 바뀌는 문제를 다룬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45년에는 AI가 인류보다도 훨씬 현명해질 것이며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불연속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저에서부터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예부터 논의되어온 나노기술에 의한 새로운 의료기술의 진보나 수명을 20년 연장시킨다거나 과학의 오토메이션화가 진행됨으로써 교육의 내용 그 자체가 바뀐다거나 하면 지금까지의 세계관ㆍ인생관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시스템의 나노기계화에 의한 치료가 실현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다빈치(da Vinchi)’라 불리는 수술원조로봇은 숙련된 외과수술을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 과학의 오토메이션화에 대해 말하면, 코넬 대학의 ‘유레카 프로젝트’는 실제 데이터에서 배후의 수리모델을 자동적으로 산출할 수 있고, 캠브리지 대학의 아담과 이브 로봇은 합성생물학에서의 가설과 검증을 자동적으로 행할 수 있다.

 

여하간 이러한 논의로부터 기술적 특이점의 문제가 촉발되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SpaceX의 창시자인 엘론 머스크와 같이, 그러한 기술혁신에 의한 세계가치의 전환을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극단적으로는 SF의 터미네이터, 공각기동대, 혹은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201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직업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특이점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넘어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변하여 폭발적인 기술의 진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년 전의 인간의 가치관과 현재 인간의 가치관이 불연속적이듯 향후 인간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다. 가치관의 개혁은 철학서와 종교에서 일어나기보다 현재의 기술변혁에 의해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AI는 인공생명화하는 기술 중 하나로서 사이드효과에 불과하다. 닉 보스트롬(Niklas Boström)이 말했다시피 “자율적으로 작업을 판단해서 실행하는(Sovereign)” 타입이 등장하는 순간 인류는 위협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 Sovereign이라는 타입이 인공생명을 뜻한다. da Vinchi 기술로봇도, 유레카도 인공생명은 아니다. 그것은 기계화된 도구 혹은 진보된 프로그램이다. 그곳에는 SF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기술은 없다. 그렇다면 인공생명이 만들어진다면 위협이 될까? 나는 인공생명화된 기술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다만 그것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의 기술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기술이 필요하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요구된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과 다시금 해후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인공생명

 

초현실주의는 본래 어떤 사물의 특정한 사용법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른 것들과 합성하여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미로, 키리모 등의 아티스트들이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트랜스시켜서 무의식의 구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흐름이 오토마티슴(automatisme)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것을 좀 더 형식화한 아티스트가 마르셀 뒤샹이다.

 

뒤샹의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이 있다. 최근 아티스트인 모리 유우코(毛利悠子)가 이 작품이 도쿄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견학을 왔다. 모리 유우코는 다양하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운드아트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젊은 예술가다. 예를 들어 종이가 천천히 말려들어가면서 먼지나 흙을 묻히고 그것이 악보의 역할을 한다. 그것을 센서로 읽어 들여서 모터를 움직이게 하여 음이 생성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은 환경의 노이즈를 음으로 변환시키는, 즉 장치 자체의 내부 상태로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인 장치다. 이것은 또 다른 인공생명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와 함께 도쿄대 미술관에서 뒤샹의 작품제작의 메모를 보고 처음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소재의 설명이다.

 

그림. 마르셀 뒤샹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도쿄대학 교양학부 미술박물관 소장.

 

<신부> 부분

ㆍ신부

약한 실린더가 있는 모터, 사랑의 가솔린 저장고, 욕망의 마그네트 발전기 등

ㆍ높은 곳에 게시, 은하

레터박스, 알파벳, 환기통, 그물망

 

<독신자> 부분

ㆍ수컷 모형의 아홉 개의 거푸집, 제복과 틀에 박힌 묘지, 독재자 기계

사제, 헌병, 경찰관, 카페도어보이 등

ㆍ물레방아가 있는 고랑

물레방아, 고랑, 사륜차

ㆍ모세혈관

ㆍ여과기, 파라솔

ㆍ초콜릿 파쇄기

총검, 장식용 리본, 롤러, 루이 15세의 권좌

ㆍ가위

ㆍ안과의사 증인, 검안도

 

요컨대 이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은 서로 무관계한 구성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아라카와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의미의 메커니즘’ 그 자체이며, 형식으로서의 인공생명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가진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압살시킨 다음, 전체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처음부터 유념해왔다.

 

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본래 초현실주의가 테마로 한 무의식을 폭로하고자 한 활동, 우리의 마네킹 강연, 이시구로 히로시의 안드로이드, 그리고 아라카와 슈사쿠의 건축하는 신체는 무의식을 건드리거나 혹은 무의식을 시스템의 설계원리로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AI연구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으로서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어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의식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식이라는 것은 거대한 무의식의 극히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AI가 다루지 않은 창조성, 자기 참조성, 욕망과 유희가 무의식 안에 있다. 따라서 어떻게 무의식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열쇠가 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인공생명화가 지금 사회로 향하고 있다. 

 

 

池上高志 「人工生命化する社会とシュルレアシスム」 『現代思想』 2015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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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인 흐름에서 들뢰즈 계열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의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10년 전 글이고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했는데,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주체와 객체에 관한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버리자는 그의 주장처럼 이 글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예상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하고 나니 그 어격들이 ‘상식’처럼 느껴진다. 언어를 관통하는 바람! “바람의 인류학”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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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

 

 

팀 잉골드(Tim Ingold)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느끼는 감각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감각을 정립된 사고의 범주나 규범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야외/열린 공기(open air)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하늘이나 대기를 순환하는 것일까? 그것들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대기가 우리 혹성을 감싸고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원을 그린다고 한다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어떤 형상이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하늘로 이뤄진 이 열린 세계의 밖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바람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열린 곳에 거할 수 있을까? 열림이 닫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바람은 어떻게 부는 걸까? 나는 지금부터 ‘야외/열림’(in the open) 속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다음에서 논할 것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가 지면에 의해 분할된 하늘과 대지라는 상호 배타적인 반구로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흐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은 외부로서의 주변과의 촉각적인 접촉을 가늠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이 혼합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호흡하며 땅을 형상화하는 뒤섞인 삶-선들(life-lines) 속에서, 하늘의 바람과 빛과 습기는 끊임없이 경로를 자아내면서 대지의 물질과 결합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본고는 네 단계를 밟는다. 먼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하늘의 현상이 쉽게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거주기능의 지면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드러나듯이 사람과 사물만 거할 수 있는 지면과 새와 구름을 뺀 빈껍데기뿐인 하늘이라면, 그 하늘은 실내공간을 모델로 하는 세계의 유비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열린 세계에서 존재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열린 객체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매질(媒質)의 흐름에 한결같이 침투하기 때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유기체가 매질로부터 공기를 취하면서 방출하는 호흡과정은 모든 생명에 근원적이다. 마지막으로 열림 속에 거하는 것은 기후-세계(weather-world) 속에 거하는 것임을 밝힐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지속하는 가운데 바람, 비, 햇빛, 그리고 대지와의 결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을 어떻게 습득하는지에 관해 인지발달심리학의 영역에서는 현재 몇몇 논쟁이 진행 중이다. 많은 연구는 우주에 둘러싸인 견고한 구체로서의 대지라는 ‘올바른’ 지식은 모든 곳의 아이들이 그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세계를 이해할 때 맨 처음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전제와 대립함을 시사한다. 그 전제에서 지면은 평평하다. 그리고 만일 지지대가 없다면 사물은 낙하한다. 대지는 공처럼 둥글며 사람들은 낙하하지 않고 그 표면의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다는 반직관적인 이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역사적 패러다임과 비견될 만큼 하나에서 열까지 개념적인 재구축이 아이들의 정신 속에서 요청된다. 6세에서 11세까지의 아동의 경험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대지에 대한 사고가 팬케이크와 같은 평평한 대지라는 최초의 멘탈 모델에서 시작해서 이 전제를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은 정보와 조정하기 위해 아이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중간적인 모델을 거쳐 최종적인 구 모양의 대지에 이른다는 발달의 시퀀스를 특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osniadou 1994; Vosniadou&Brewer 1992; 그림 1 참조).

 

그림1. 대지의 메타모델. Vosniadou&Brewer(1992: 549)에서 게재.

 

그런데 이 연구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이 실험에서 직면하는 조정의 문제는 세계에 대한 아이들 스스로의 직관 혹은 ‘소박한 이론’에 관여한다기보다 말한 것 혹은 질문에 의해 유도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험상황의 요청과 관계한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이 비판자들은 실험 중의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에 대한 어떤 신념이나 직감 혹은 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오픈마인드적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의 지식은 교사 등의 지식을 가진 성인뿐만 아니라 교실 한구석에 있을 법한 지구의까지, 발판이 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획득된다. 여기서 넘어야 하는 최초의 관념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적절한 발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구의의 ‘과학적’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기성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에서는 그 그림들을 그들 스스로 그리게 하거나 대화에 답하게 했을 때 작은 아이들과 큰 아이들 간에, 나아가 아이들과 어른들 간에 그 이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나는 이 논의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지식의 획득이 생득적인 정신구조에 의해 결정되는가 혹은 학습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더 근저적으로 의존하는가라는, 심리학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논쟁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진영의 공통된 요소다. 이 두 논의 진영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다른 인식들은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모두 잘못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더욱 기묘한 것은 대지가 있는 장소에는 하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두 진영이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여하간 하늘의 성질과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서 개략한 논쟁에서 대립적인 각각의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에서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두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의 질문에 응한 여섯 살의 에단은 대지는 공의 형상을 취하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밑을 보아야 하고 대지는 우주(space)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험자가 에단에게 대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대륙과 같은 형태의 윤곽을 그려 넣는다. 다음으로 실험자는 “그러면 하늘을 그려줘”라고 말한다. 당황한 에단은 “하늘은 형태가 없어”라고 반론하면서 “우주를 말하는 거지?”라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을 그려야 했고 대지를 나타내는 원 주변에 또 하나의 둘레를 덧그린다(Vosniadou&Brewer 1992: 557; 그림2 A 참조).

 

그림2. A: 에단이 그린, '하늘'에 둘러싸인 구형의 대지. B: 다아시가 그린 하늘과 (집이 있는) 지면 및 구형의 대지. Vosniadou&Brewer(1992: 558)에서 게재.

 

두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는 대지, 사람들, 하늘에 관한 다음의 항목들에서 선택 가능한 16개의 조합이 하나씩 그려진 그림카드 한 세트를 준비했다. 대지: 고체의 구/평평한 구/떠 있는 구/원반, 사람들: 빙 둘러 서 있다/위에만 서 있다, 하늘: 빙 둘러 있다/위에만 있다. 아이들(5세에서 10세)과 어른들까지 포진된 참가자들에게 각각 우선 현실의 지구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카드를 선택하게 했다. 다음으로 ‘가장 비슷한 것’에서 ‘가장 비슷하지 않은 것’까지 순위를 정하기 위해 남은 카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밟아나갔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52-4). 피실험자의 3분의 2정도는 최초의 선택지로서 고체의 구를 빙 두른 사람들과 하늘이 배치된 조합을 선택했다. 이 조합의 그림에서 대지는 녹색과 갈색이 섞인 구로 표현되고 경직된 레고 모양의 사람들이 그것을 빙 둘러 서 있으며 구름을 묘사하는 것 같은 둥실둥실한 하얀 문양이 드문드문 그려진 강물 색의 배경을 하고 있다(그림3). 연구자는 대다수의 참가자들의 이 선택이 “지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드러낸다”고 설명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55-7). 그러나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역설적이다. 구 모양을 한 고체의 대지의 바깥 표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배치되는 한편, 하늘은 대지의 배경으로 깔리고 뒤를 쳐다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지를 구로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관점은 구름이 점재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림3. 사람들과 하늘이 에워싼 구형의 대지. Nobes et al.(2005: 54)에서 게재.

 

구 모양의 대지와 하늘을 한 장에 그려 넣으려는 시도에 수반되는 관점의 이중성은 두 번째 실험의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실험의 참가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단은 실험자가 하늘이 아닌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주는 우리 주변 일대에 있다는 이해를 전달하기 위한 의사표시로 바깥쪽의 원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실험의 다른 참가자인 아홉 살의 다아시의 반응은 조금 색다르다. 다아시는 실험자의 요청에 응하여 둥근 대지를 그리고 달과 별 또한 그려 넣었다. 이때 실험자는 에단에게 한 것과 똑같이 다아시에게도 하늘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다아시는 이 질문에 당황한다. “그것은 뭔가 이상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해결책은 구름의 밑단과 매우 비슷한 대충 몇 개의 수평선을 종이 상단에 이미 그려져 있는 대지, 달, 별의 위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험자가 “사람들은 어디에 살지?”라고 묻자 다아시는 종이 하단에 밑 부분이 있는 것처럼 집을 그려 넣었다. 실험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다아시는 또 다른 집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물었을 때 다아시는 결국 실험자의 요구에 굴복하여 집 하나를 지우고 막대 모양의 인간을 둥근 대지 위에 그려 넣었다(그림 2B 참조). 그런데 이것은 일련의 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집은 대지 위에 있는 거지?”라고 실험자는 지워 없어진 집 옆에 아직 남아있는 집 그림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좀 전에는 둥글게 그렸으면서 왜 이 대지는 평평한 거야?” 그 후 다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아시: 그래도 그것은 지면에 있기 때문이야.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왜 평평하게 보이도록 그린 거야?

다아시: 그래도 지면은 평평하잖아.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대지의 모습은...

다아시: 둥글지.

(Vosniadou&Brewer 1992: 570)

 

실험자에게 다아시는 둥근 대지의 표면과 평평한 대지의 표면이라는 관념 사이를 왔다 갔다 헤매는, 마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실험자가 깨닫지 못한 것은 다아시가 대지(earth)와 지면(ground)의 구분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완벽하게 수미일관된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다아시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에 그려진 대로 대지는 정말이지 둥글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는 집은 지면 위에 지어졌고 지면은 평평하다. 즉 그림 속 집은 지면에 있고 결코 대지의 표면에 있지 않다.

 

물론 ‘earth’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사물을 뜻할 수 있다. 발밑의 지면(ground)을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흙(soil) 그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혹은 이 혹성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실험의 인터뷰의 맥락에서 대지는 분명히 마지막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아시는 그에 따른 구분을 지키기 위해 ‘ground’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험자는 그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검토해보면, 과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하늘을 덧그려서 혹성으로서의 대지의 그림을 완성하라는 실험자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대지는 그 위에 사람들이 생활하고 그 생활이 만든 현상학적인 지면의 모습으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과는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아니라 같은 페이지에 이중으로 그려진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하나는 우주로부터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우리 혹성의 그림이며, 또 하나는 거주자의 현상학적 세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지면과 하늘, 사람들이 사는 주거의 그림이다. 그러나 실험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들 자신의 관점의 이중성을 피험자에게 투영한다(Vosniadou&Brewer 1992: 569-71). 이와 같이 다아시는 그 외의 많은 피험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대지 모델(dual earth model)’의 소유주다. 즉 그 모델은 대지는 평평하다는 소박한 전제와 공처럼 둥글다는 성숙한 이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합성모델 중 하나다(그림 1).

 

두 개의 대지모델에 따르면, “대지는 두 개 존재한다. 하늘에 떠있는 둥그런 것과 사람들이 사는 평평한 것이다”(Vosniadou&Brewer 1992: 550). 두 개의 대지모델의 소유주는 지면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구름, 태양, 달, 별뿐만 아니라 주민들 자신이 표면에 발 딛고 서 있는 또 다른 대지도 볼 수 있다. 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 모양의 대지는 앞서 다룬 두 사례 연구 중 후자에서 ‘올바른’ 그림 카드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보여준다(그림 3). 연구자에 따르면, 이 카드를 선택한 아이들은 “사람들과 하늘이 대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Nobes et al. 2005: 59).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대기며, 그것은 대지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희박해지는 가스 상태의 덮개다. 카드에 그려진 하늘이 대기의 정확한 표현으로 이해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으며, 실험자도 그렇게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카드를 선택한 피험자는 하늘의 디자인을 일상의 경험에서 실제로 본 형태와 색깔을 그려 넣는 일종의 벽지로 다루었고 그 위에 아마도 교실 한쪽에 놓여있는 눈에 익은 지구의를 모델로 하는 완전히 다른 대지의 이미지를 덧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아시가 혹성적인 대지와 발밑의 지면을 구별할 필요성을 제기했듯이, 대지를 견고한 구 모양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완전히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성을 둘러싼 대기와 머리 위의 하늘을 구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하늘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실제로 첫 번째 사례의 실험자는 “아이들에게 하늘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기묘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인정한다(Vosniadou&Brewer 1992: 544).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제의 목적은 하늘이 대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하늘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판별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둥근 대지 위에 하늘을 그린 다아시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두 개의 대지 모델을 표명한 반면, 대지의 주변에 원을 그린 에단은 올바른 구 형상 모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대기라는 관념을 결여한 에단은 실험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하늘이 아닌 우주라고 생각했다. 다아시는 하늘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지면으로 인식된 대지의 그림에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거주에 관계된 이상 하늘은 ‘위’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자들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실험자들은 함께 작업한 아이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지구의 대지의 바깥쪽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반직감적이며,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Vosniadou&Brewer 1992: 541). 바로 그대로다. ‘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대지의 주자(住者 exhabitants)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면과 마찬가지로 하늘 또한 사람들이 거주(inhabit)하는 세계의 일부다. 요컨대 하늘은 경험에 주어진 세계, 즉 현실의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현상학적인 차원에 속한다. 혼란의 원인은 실험자가 이 차원들 간의 구별에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대지를 설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주자의 관점에서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력한 접근법 중 하나가 제임스 깁슨의 선구적인 작업인 『생태학적 시각론』(Gibson 1979)에서 제시된다. 깁슨은 우선 그가 ‘물리세계’와 ‘환경’으로 불리는 것들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1979: 8). 혹성인 대지는 자기를 둘러싼 대기와 함께 물리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대지와 대기는 해양과 지표면에 생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환경은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의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 주변에 상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환경은 물리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만 공간 속의 사물과 신체의 현실이 아니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자의 현실이다. 이렇듯 상정된 환경은 “매질(medium)과 물질(substance) 및 양자를 나누는 면(surface)에 의해 적절하게 기술된다”고 깁슨은 주장한다(1976: 16).

보통 인간에게 매질이란 공기다. 당연히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기는 약간의 저항과 함께 우리가 움직이고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사물에 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방출된 에너지나 규칙적인 진동을 전달하고, 그에 따라 우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나아가 공기는 후각 수용체의 흥분을 일으키는 분자를 확산시키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있다. 깁슨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매질은 이동과 지각을 제공한다. 반면 물질은 이동과 지각의 상대적인 저항이다. 물질은 바위나 자갈, 모래, 진흙, 나무, 콘크리트 등과 같은 어느 정도의 경도차가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의 소재는 생명에게 불가결한 물리적 기반을 설치한다. 여하간 우리는 서 있기 위해서도 그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통해서 이동하거나 지각할 수 없다. 물의 지위는 양의적이다. 물고기와 같은 수생생물에게 물은 매질이다. 인간과 같은 육상생물에게 그것은 물질이다. 그런데 이 양의성은 그 자체로는 생물과 매질의 구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며, 다만 환경의 질이 특정한 생명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는 논점을 부각한다(Gibson 1979: 16-21).

 

매질과 물질의 접점이 된다. 면은 방출된 에너지가 반사하거나 호흡하는 장소며, 진동이 매질에게 전달되는 장소며, 매질로의 증발이나 확산이 발생되는 장소며, 우리의 신체가 접촉하는 장소다. 지각에 관여하는 만큼 면은 “거의 모든 활동이 그 속에서 행해지는 장소”(Gibson 1979: 23)가 된다. 모든 면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배치를 통해 변형과 붕괴에 저항하고 특유의 형상과 특징적이고 물질적인 결(texture)을 만들어낸다. 깁슨은 그 실례로서 자질구레한 주변의 면면을 담은 각기 다른 종류의 여섯 장의 사진을 제시한다. 나무의 단면, 하늘의 구름, 풀 베인 초원, 직조된 천,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 그리고 돌무더기. 어떤 사진이더라도 표면의 결을 보고 그것이 어떤 면인가를 바로 특정할 수 있다(1979: 26-7). 우리는 면에 반사된 빛이 가지는 고유한 산란 패턴에 의해 시각적으로 결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만약 포위광 속에 변별 가능한 패턴이나 구조가 없다면 그 속에서 특정 가능한 결은 존재할 수 없으며 면을 지각하는 대신 공허함만을 느낄 따름이다(Gibson 1979: 51-2).

 

하늘의 지각은 좋은 사례다. 청명한 여름날의 결 없는 푸른 하늘과 발밑의 대지의 결을 비교하면, 대지의 면은 통상 지면으로 불리는 무언가로 지각되는 반면 머리 위의 하늘은 끝없는 공허의 공간으로 지각된다. 깁슨에 따르면, 지면이란 “지상의 환경의 문자 그대로의 기초……그 외의 모든 면의 규준이 되는 면이다”(1979: 10, 33). 그것은 중력에 의해 대지로 이끌린 사물을 떠받치며,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뻗어나간다. 대조적으로 하늘은 면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결 없는 공허함 속에, 예를 들어 구름처럼 하늘 속에 면을 특정할 수 있는 결 있는 영역은 가능하다. 그래도 하늘의 노을구름은 예를 들어 강우로 지면에 내려앉은 물방울과 다르다. 물방울이 마르면 하나의 면(물의 면)이 사라지고 또 다른 면(마른 흙의 면)이 남는 반면, 구름이 사라질 때에는 어떤 면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약 숲 속에서 위를 쳐다보면 천장처럼 위를 덮은 나뭇잎들이 머리 위의 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 사이의 빈공간은 하늘로 열려 있으며 우리는 단지 틈을 볼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틈이다”라고 깁스는 말한다(Gibson 1979: 106).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깁슨의 설명에는 모순이 있다. 만약 하늘이 공허함의 전형이라면, 또 올려다 볼 때 지각되는 것이 그 공허함이라면, 하늘은 거주 환경의 일부인가 아닌가? 환경은 틈을 가질 수 있는가? 환경은 정말로 ‘열려’ 있는가? 깁슨이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환경이 공간 중의 사물, 즉 닫힌 윤곽선의 형태와 공허한 공간에 정지된 것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환경은 오히려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지며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안에 산, 구름, 불, 일몰, 돌, 별이라는 다양한 물(物)을 가진다”(1979: 66). 이처럼 구름과 일몰 혹은 별은 환경 중에서 하늘로 불리는 부분에 위치 지어진 현상으로서 제시된다. 하늘은 거주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두 부분, 혹은 반구의 한쪽이다. 또 다른 한쪽은 대지다. 거주자가 서 있는 지면은 대지-하늘의 경계며 수평선, 즉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상반구와 하반구 간의 경계의 큰 원”(1979: 162)으로 확장된다.

 

외견상 이 우주관은 ‘중공구(hollow sphere)’ 모델과 유사하다. 그것은 두 개의 대지 모델과 마찬가지로 평평한 대지의 관념과 고체의 구인 대지의 관념 사이를 매개한다. 중공구 모델에서 대지는 아랫부분이 고체이고 윗부분이 속이 빈 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개의 반구지대 사이의 평평한 경계면에 서 있다. 그들에게 하늘은 머리 위의 돔으로 나타난다(Vosniadou&Brewer 1992: 549-50 그림 1 참조). 그러나 이 우주관과 깁습의 모델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깁슨의 모델에서는 거주자의 지각에서 ‘구형의 영역’은 무한하다. 지평선은 거주자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경계가 될 수 없다. 지평선에 도달하거나 지평선을 횡단할 수 없다. 사물은 가로막힌 장벽을 뚫고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위를 볼 때 닫힌 면에 둘러싸인 자기를 발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의 생명은 열림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평한 기반과 돔 형상의 상부를 가진 중공반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깁슨은 바로 그 국한이라는 사고가 윤곽을 그리는 실천에서 비롯된 인공물임을 시사한다(1979: 66). 그러나 하늘은 윤곽을 갖지 않으며 그것을 그릴 수 없다. 그릴 수 있는 것은 하늘 사물이며 하늘 비춰진 실루엣이다.

 

그런데 깁슨은 다른 곳에서 “열린 환경은 좀처럼 혹은 전혀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게 열린 환경에서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1978: 78). 보통 상황에서 환경은 언덕과 산, 그리고 동물과 식물, 물체와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물들로 “넘쳐나고” 있다. 혹은 달리 말하면, 환경은 설치된다(furnished). 그리고 깁슨은 “대지를 정비하는 것은 방에 배치된 가구처럼 대지를 생활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이 없는 하늘은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거주 불가능하고, 따라서 생물체에게 어떤 부분의 환경도 되어줄 수 없다. 새는 그 속을 날 수 없다. 그리고 텅 빈 대지는 서 있거나 걷기 위한 기반 이외의 그 무엇도 거주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대지에 설치된 것들은 그 외의 모든 행동의 기반을 제공한다”(1979: 78). 깁슨이 생각하는 지각자는 열림에 남겨지는 만큼 앞서 묘사한 심리학적 실천 속에서 대지의 면의 “바깥쪽에 들러붙은” 인형처럼 세계의 외주자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대 위의 배우로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비품과 배경이 설치된 면에 단 한 번 입장할 수 있다. 무대장치를 배회하듯이 혹은 다락방에 들어간 집주인처럼 이 사람들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세계의 한복판을 신중하게 걷도록 운명 지어진다.

 

환경은 단지 대상(object)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진,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속에 있는 대상”(1979: 66)이라고 깁슨은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대상으로 다뤄지는 사물들을 생각해본다. 대지 위에는 산과 돌과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구름과 일몰과 별이 있다. 대지 위의 사물들 중에 아마도 돌만이 통상의 의미에서 대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때에도 각각의 돌은 그 주변의 돌들이나 그것이 있었던 지면과 흘러들어온 과정과 분리되어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언덕은 대지의 면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지의 면을 형성하고 대지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풍광(landscape)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떨어져 나와야만 언덕은 대상으로 사고될 수 있다. 또 불은 대상이 아니라 연소과정의 출현이다. 하늘을 살펴보자. 천문학적인 중요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별은 대상이 아닌 빛의 점으로 지각된다. 일몰은 태양이 태평양의 저편으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빛남으로 지각된다. 구름 또한 대상이 아니다. 모두 법칙성이 없는, 매질의 흐름 속에서 번영하고 흐르는 잠시잠깐의 팽창이다. 구름을 관찰한다는 것은 구름에 설비된 물품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오지 않는 형성-과정의 하늘/정보(sky-in-information)의 잠시잠깐의 출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진정 열린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은 자신 안에 갇혀서 세계에 등을 돌리고 자신에 이르게 된 경로와 차단하여 응결된 외면만을 누군가의 시선에 방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는 안팎이 없으며 다만 오고 감(coming and going)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성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형성, 팽창, 성장, 융기, 발생이므로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서 언덕은 융기한다. 또 언덕은 언덕을 오름으로써 혹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음으로써 경험된다(Ingold 2000: 203). 불은 타오르는 불꽃의 흔들거림과 연기의 소용돌이와 그 열에 의해 알 수 있다. 돌은 구른다. 돌의 둥근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이 굴러다님이다. 돌 위를 걸을 때 밭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과 별이 빛난다.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것들(they are)이란 그 빛나는 각각이며 피어오르는 각각이다. 언덕이란 융기하는 것이며, 불이란 타오르는 것이며, 돌이란 구르는 것이다.

 

즉 깁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늘과 대지의 열린 지구가 거주 가능한 환경으로 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대상으로 설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설비된 세계란 실물의 모형, 즉 실내로 끌고 들어와 전용의 공간에 재구축된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언덕은 무대장치처럼 지면위에 설치되고 별, 구름, 태양, 달은 매달린다. 이 본뜬 세계(as if world)에서 언덕은 융기하지 않으며 불은 타지 않으며 돌은 구르지 않으며 태양과 달과 별은 빛나지 않으며 구름은 피어오르지 않는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단1도 진행되지 않는다. 단 한번 무대가 설치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열린 세계는 그들을 위해 새롭게 준비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열린 세계는 서서히 사람들 주변에서 형태를 잡아간다. 열린 세계는 바로 그러한 형성과 변용의 과정의 세계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지각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또 지각된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에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자와 지각된 현상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침투당하는 세계-형성의 동적인 과정에 착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응결된 물질과 그것이 보여주는 견고한 표면으로부터 물질이 그 속에서 형태를 취하며 녹아들어가는 매체로 시야를 옮겨야 한다. “대부분의 활동이 일어나는” 곳은 깁슨이 생각한 면 위(1979: 23)가 아니라 매질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생명의 바람

 

야외/열림에서 아무 것도 없다 하더라도 매질은 중지하지 않는다. 매질은 거의 언제나 유동상태에 있다. 때로는 이러한 흐름이 거의 지각되지 않을 만큼 미비하지만, 때로는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건물을 쓰러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풍차를 움직일 수 있고 선박을 세계각지로 보낼 수 있다. 이 매질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나는 몇 년 전 이 질문을 하버드대학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기후와 땅(land)의 관계(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었다. 나는 실내에서 학술적인 문헌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것과 야외에서 주변 땅과 함께 기후에 녹아들어가면서 논의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를 검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땅과 기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것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리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대개 실내에서 생각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설비된 실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이 내부공간에서 쫓겨난다면 외주자 외에 어떤 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면, 대지와 하늘의 열린 세계를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사유의 환경의 고향”(메를로-퐁티 1967: 62)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까?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우리는 교외를 거닐기로 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미풍이 불었다. 우리는 미풍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인정했듯이,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과 호흡을 통해 미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이 느낌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만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느낀다는 것(feeling)과 만진다는 것(touch)이 촉감을 가리키는 데에서 단순 교환 가능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할 때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때 등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진다. 그리고 친밀한 사교의 형식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지고 타자는 우리를 만진다. 만진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특정기관, 특히 손, 입술, 혀, 발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사물에 대한 신체적 접촉을 기도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자기와 그 주변 간의 어떤 종류의 상호침투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세계가 준비한 ‘우리에게 침입하는’ 존재방식이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메를로-퐁티 1974: 168). 따라서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우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는 만지는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만지는 주체로서의 지각자, 이 둘을 분리시키기 위한 존재론적 전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느끼지 않고 만질 수 없다.

 

요컨대 바람을 느끼는 것은 이 혼효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지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촉각적인 지각에 대한 이 이해는 시각적인 혹은 청각적인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하늘의 현상으로 되돌아가보자. 하늘은 바람 이상으로 지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이란 우리가 그것 보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교외를 거닐면서 모든 종류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햇빛에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빛 속에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빛남 그 자체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빛은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로서 경험되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바람 속에서 만질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늘 속에서 본다. “하늘의 푸름을 바라보는 나는 무세계적 주체로서 그와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 몸을 싣는다. 나는 이 신비함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다가와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나는 하늘 그 자체가 된다. …나의 의식은 이 무한한 푸름으로 채워진다”라고 메를로-퐁티는 쓰고 있다(1974: 19-20).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신비함이란 시각의 신비함이며, 사물이 보인다는 완전한 일상성의 이면에는 본다는 근원적인 경험이 있음을 발견한 경이로움이다. 빛은 바로 이 발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Ingold 2000: 264-50). 마찬가지로 음의 신비함은 우리가 듣는다는 발견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주변의 바람 속에서 만지고 하늘 속에서 보고 비 속에서 듣는다. 신학자인 존 헐은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바로 태양이 세계를 빛에 적시듯이, 내리는 비가 어떻게 세계를 음에 적시면서 “모든 것의 윤곽을 분명히 하는지”를 묘사한다. “나의 신체와 비는 섞이면서 하나의 청각적으로 촉각 가능한 3차원의 우주가 되고 그 속에서 신체를 통해 나의 의식은 뻗어간다”(Hull 1997: 26-7, 120).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 산다는 것은 매질의 흐름, 즉 햇빛, 비, 바람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이 잠김은 각각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물론 바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니콜 레벨(Revel 2005)은 필리핀의 파라완 고산족이 어떻게 새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지를 기술한다. 새는 아주 일시적이긴 하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동료로서 고찰된다. 이 관계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은 연날리기의 실천으로 응축된다.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잎사귀나 종이를 붙여 만드는 연은 새를 모방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육생의 인간이 조류인 동료를 경험할 수 있는 공유 가능한 매개다. 연날리기 기수는 얼레를 쥐고 실을 풀어 바람과 장난치면서 새가 날개로 느끼는 것을 느낀다. “대지에 붙어 있는” 파라완족의 연날리기 기수는 “하늘에서 꿈결 같은 기분이 되고 이 고양의 느낌은 하늘을 빙글빙글 도는 덧없는 공작물의 반짝임과 일치한다”(Revel 2005: 407). 새가 된 그들의 의식은 연에 생기를 부여한 것과 동일한 공기의 흐름에 투사되어 대기의 변덕스러움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상으로만 설비된 본뜬 세계에서는 연도 새도 날 수 없다. 대상들의 세계에 바람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바람은 단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예를 들어 불이나 구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불이 타오르는 것이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과 같이 바람은 부는 것이다. 바람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속하며, 세계에 대한 무언가의 실물모형에 속하지 않는다. 새는 공기의 ‘틈’을 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나무는 활처럼 휜 기둥과 줄기 속에 자기를 키워준 바람의 흐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류학과 물질문화연구 분야에서는 마치 사람들과 물질적인 사물이 실제로 이미 그곳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지각은 서로에 대해 활동하는 신체화된 인격과 물질화된 사물 간의 상호작용이 된다. 나아가 만약 사물이 ‘반응한다(act back)’면 그것은 바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물에도 행위주체성(agency)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연의 사례를 살펴보자. 땅에 발 딛은 기수는 실이라는 경로를 통해 연에 작용하고 하늘의 연은 그에 상호적으로 기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이(것)들의 활동을 통해 양자는 서로의 움직임에 대한 스스로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연은 기수의 행위주체성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다. 연이 나는 것은 바람의 흐름 속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단절되면 바람은 죽은 새처럼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지면에 떨어진다. 바람을 품은 연에 의해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크리스토퍼 틸리의 풍광(landscape) 현상학 탐구를 살펴보자. 틸리는 화가와 나무를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화가는 나무를 보고 나무는 화가를 본다. 이는 나무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화가의 감정을 흔들어(affect) 화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 이 의미에서 나무에게는 행위주체성이 있으며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2004: 18). 그리고 나무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연필을 쥐고 그 나무의 고유한 곡선을 그려나가는 화가의 시각-수작업적인 몸의 움직임은 나무 그 자체의 움직임과 공진한다. 공기의 흐름 속에서 급강하하는 연의 움직임에 기수의 몸의 움직임이 공감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기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기수와 연, 화가와 나무처럼 상호 공진하는 움직임은 매질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적심/잠김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이라도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적심/잠김 때문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기수는 연과 상호작용할 수 없고 화가는 나무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조금 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사람과 사물로 환원된 세계에서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히 사물에게 ‘행위주체성’을 부여할 뿐이라면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과도하게 선언된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창작물이며, 그 연원은 현실에 대한 전도된 관점에 있다. 즉 다양한 종류의 형태들(forms)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세계(生世界)의 동적인 잠재력을 형태 그 자체 속에 분배된 내적인 속성으로 사고하고 그로부터 세계가 움직여나간다고 상정하는 관점이다(Ingold 2005b: 125). 이것은 마치 강이 흐르는 원인이 소용돌이와 강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강의 흐름 그 자체가 없다면 상호작용하는 소용돌이도 강둑도 있을 수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질의 흐름이 없다면 사람도 나무도 새도 구름도 불도 일몰도 혹은 우리가 고찰해온 다른 모든 현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의는 바로 생명이 의미하는 것과 관계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나 나무도 살아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그 자체로 이미 닫힌 실재들이 거하고 있는 곳으로 추측하는 사고의 관습은 생명이 사물의 내적 속성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저 멀리 떼어놓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생명 속에 사물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물은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에 감긴다. 모든 실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여된다는 인식은 고전적인 인류학 문헌에서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존재론적인 제약(commitment)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 전통적인 오랜 사고관습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실로 비활성의 사물에 생명과 정령을 불어넣는 신념의 체계다. 그런데 이 사고관습은 이중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하나는 애니미즘이 세계에 대한 신념체계라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세계 속에 있는 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폐쇄성보다 개방성, 즉 항상 유동상태에 있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과 응답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 하나는 애니미즘은 사물 속에 생명을 주입한다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운동으로 사물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애미니즘적 우주관이 바람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람은 사람들의 삶에 형상과 방향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행위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바람이 곧 행위주체성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바람은 불어옴이며 부는 무언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임은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그 자체다. 따라서 바람에 인격적 힘을 복귀시키는 것은 어떤 기묘함도 아니고 의인화도 아니다.

 

열린 세계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오가는 것임은 앞서 고찰했다. 메를리-퐁티는 화가의 작업을 논하면서 “당연히 존재에는 흡기(吸氣 inspiration)와 호기(呼氣 expiration)가 있다”(19666: 266)고 말한다. 숨을 마시고 내쉬면서 사람은 매질과 통섭하면서 개방한다. 흡기란 숨이 되는 바람이며, 호기란 바람이 되는 숨이다. 호흡에서 오고감의 교차는 생명의 본질이다. 수많은 언어에서 생명과 바람 그리고 호흡을 나타내는 단어가 병행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고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애니미즘 개념의 기반이 된 ‘생기를 들이마신다(animat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animare(삶을 부여한다)와 anima(숨)에 유래하며, 바로 이 둘은 그리스어의 anemos(바람)에서 유래한다. 즉 생명은 그 생성하는 형태와 함께 매질의 흐름에 휘감긴다. 데이비드 메컬리가 쓴 것처럼 “대기의 두터움에 잠기는 머리 혹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휘감기는 가슴과 다리와 함께 우리는 공기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호흡하고 사고하며 꿈을 꾼다”(Macauley 2005: 307). 바로 이 때문에 열림 속에 산다는 것은 생명이 신체의 모습을 띤 견고한 거푸집 속에 직조되거나 말려드는 것과 같은 육화(肉化)의 경험이 아니다. 또 정신이 세계의 물질적인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이탈의 경험도 생겨날 수 없다.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은 오히려 세계 속에 형성의 파동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사람들과 사물들의 “끊임없는 탄생”(1966: 266)이라고 한 것에 영원히 입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호흡이 세계가 스스로를 그러한 곳으로 열어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토해낸 최초의 호기인 것처럼. 이 속에서는 바람이 신체로서 육화하기보다 신체가 호흡 속에 풍화(風化 enwinded)한다.

 

 

기후-세계

 

나의 관심은 내부에 산다/거한다(inhabit)는 것이 무엇인지, 즉 닫혀 있기보다 오히려 열려 있는 세계-구의 안에 산다/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세계에 장벽은 없으며 거주자 각각의 다양한 이동에 따라 조금씩 노출되는 지평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평상은 없으며 단지 발아래의 지면이 있다. 천정은 없으며 머리 위 활을 그리는 하늘만이 있다. 설치된 비품은 없으며 형성과 함입만이 있다. 나는 앞서 우리가 주로 실내에서 사고와 집필을 하기 때문에 문서에서 묘사된 세계를 마치 닫힌 내부 공간에 이미 완비된 것처럼 상상한다고 지적했다. 그 본뜬 세계에는 오직 사람들과 사물들만 거하며 바람, 비, 햇빛, 안개, 서리, 눈 등으로 경험되는 매질의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인간과 물질세계의 관계에 관한 모든 논의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매질을 누락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했다. 내가 제시한 대안은 열림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물에 의해 구비가 끝났다는 세계의 면 위에서 생명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거주자들은 구비가 끝난 면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과정의-세계 속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자가 그 속을 움직이는 매질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이 결론과 더불어 나와 학생들이 애버딘셔의 유원지를 걸으면서 고심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기후와 땅의 관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지면에 의해 분할되는 서로 다른 영역, 즉 각각 하늘과 대지, 매질과 물질로 귀속되는 것일까? 요컨대 깁슨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는 “대기환경의 매질은 기후라 부르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1979: 19). 따라서 기후는 매질 속에서 진행 중인 무언가다. 그러나 대지의 물질은 이 진행 중인 것을 투과하지 않는다. 지상의 면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불투명하며, 매질과 물질은 각각의 영역을 견지하면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대지가 땅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하늘에 등지고 그 이상의 교류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에 따라 기후는 땅 위를 휘감으면서도 그 형성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거주자가 알고 있듯이 비는 경작지를 진흙의 바다로 만들고 우박은 견고한 바위를 깨뜨리고 번개는 여름의 건조한 땅에 산불을 내고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를 모래 언덕으로, 눈은 눈덩이로, 호수와 바다에 파도를 일으킨다. 알래스카의 코유콘 사람들의 환경인지에 관한 한 연구에서 리처드 넬슨이 서술한 것처럼 “기후는 쇠망치고 땅은 철침”이다(Nelson 1983: 33). 땅이 매질의 흐름에 반응하는, 보다 미세하고 정밀한 방식도 있다. 서늘한 여름 아침에 식물의 덩굴이나 거미줄을 장식하는 이슬을 생각해보자. 혹은 수풀의 떨어지는 잎사귀나 구부러진 나무줄기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남겨진 흔적을.

 

경험이 풍부한 거주자는 어떻게 땅을 바람과 기후의 치밀한 기록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코유콘 사람들은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갑자기 타오르는 정도에 따라 태풍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고 유핏크족의 노인은 눈을 뚫고 나온 식물의 언 꽃송이의 방향이나 얼어붙은 호수의 눈의 ‘파도’로부터 탁월품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Bradly 2002: 249, Nelson 1983: 41). 그러나 땅을 읽어낼수록 물질의 끝과 매질의 시작을 확신에 차서 분석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기후가 그 흔적을 땅에 남기는 것은 바로 매질과 물질의 결부(binding)를 통해서다. 따라서 땅 자체는 양자를 분리하는 경계면이 아니라 모호하게 고정된 혼효와 혼합의 영역대가 된다. 누구나 여름에 침엽수림을 걷노라면 ‘지면’과 현실이 명료하게 나뉘는 면이 아니라 덩굴, 낙엽, 암설, 이끼, 돌과 바위, 나뭇가지, 크레바스의 균열, 나무뿌리의 엉킴, 늪과 습지를 뒤덮은 부초 등이 얽히고설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장소의 지하는 딱딱한 돌덩이로 이뤄져 있고, 어느 장소는 청명한 하늘 위에 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중간지대에서, 생물의 거대함과 계속해서 견고해지는 환경을 관통하는 능력에 조응한 그 깊이 속에서 살아간다.

 

이 의미에서 생물은 땅 속에서 사는 것이지 그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매질과 물질이 혼합되지 않는 세계, 즉 견고한 구 안에 대지가 갇혀 있고 하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계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라도 물질과 매질의 경계면의 분리가 교란되고 상호 침투되며 연결된다. 생명이 세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운동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정을 통해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 그 자체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장과 운동에서 생명은 계속해서 전개되는 직물의 일부가 된다. 땅은 말하자면 항상 커나간다. 고고학자가 과거의 삶의 흔적을 해명하기 위해 땅을 파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땅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만져질 수 있는 얽히고설킨 거주자들의 삶-선들(life-lines)이다. 바람 또한 땅을 불어서 물질과 혼합시키며 오솔길이나 산길에 통과의 흔적을 남긴다. 바람(wind)은 ‘구부러짐(winds)’이다. 그렇게 비틀어진 경로를 따라 지상의 여행자는 길을 떠난다. 경로는 때로 밧줄과 닮았다. 사미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밧줄에 매듭을 묶으면 바람이 멈추고 풀면 다시 불기 시작한다고 한다(Helander&Mustonen 2004: 537). 이처럼 땅과 기후의 관계는 대지와 하늘의 불투명한 경계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묶고 푸는 관계다. 열린 세계에 살아가는 일은 기후를 물질적인 삶의 형태와 연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땅의 결을 짜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묶으면 경계는 사라진다. 매듭이 그것을 만든 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묶는 것이 세계를 포함하거나 닫는 것이 아니다.

 

묶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불이다. 우리는 난로 연기에서 역의 변화, 즉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휘발적인 모습으로 물질을 매질로 방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후-세계에서 연기는 촉발됨에 따라 공기의 흐름과 혼합, 구름으로 응축되기도 한다. 내가 조사한 핀란드 북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거주가 ‘연기’로 설명된다. 한적한 한겨울에 백야가 하늘에 수직으로 올라서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 설명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서 난로가 있는 주거지는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마찬가지로 열린 세계에 속한다. 살아있는 신체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주거지는 거주자의 끊임없는 오고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따뜻한 외투와 같이 거주자의 주위를 에워싸는 주거지로서의 ‘실내’를, 앞서 서술한 닫힌 공간에 재구축하는 본뜬 세계의 ‘실재’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가 삶을 위한 장소라면, 후자는 일종의 컨테이너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를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자기완결적인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은 근대건축에서 오랜 야망이었다. 이 봉쇄된 귀결의 일부는 장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그 자체로 불가피한 측면의 교란을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숨김으로써 대지와 하늘의 완전한 분리라는 환상을 창출했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근대건축에서 난로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경위를 해명할 수 있다. 난로가 주거지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한편 연기는 길게 이어지는 굴뚝의 내부로 격리되었다. 공장의 높은 굴뚝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대지와 하늘의 절대적인 분리를 소리 높여 선언하고 그와 동시에 불꽃이 타오르는 교란의 지점을 은폐시켜버렸다. 그런데도 굴뚝의 역사는 아직까지 쓰이지 않고 있다.

 

출발점이 된 대지와 하늘의 이미지로부터 참으로 멀리 왔다. 그 이미지는 구 모양의 대지가 윤곽선의 하늘에 완전히 둘러싸인 에단의 그림에 응축되어 있다(그림 2 A).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올바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그림은 사람들을 대지의 외면에 외주자(外住者)로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거주가 가능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질문했다. 깁슨은 사람들이 활동 속에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물들로 박혀 있는 열린 대지의 면을 상상하라고 회답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세계가 열려 있지 않고 오히려 닫혀 있는 한에서 지상은 환경으로서 거주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부분적인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거주자는 크든 작든 세계로부터 추방자의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나는 열린 세계에는 대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열림에 거주하는 것은 닫힌 면 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매질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생명은 거주자의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이러한 흐름에 잠겨 있다. 이 기후-세계에는 대지와 하늘을 분리하는 명확한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물질과 매질이 존재자를 조성하는 혼합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존재자는 그 활동을 통해 기후-세계를 땅의 결로 묶는다. 그림4는 외주(外住)로부터 거주(居住)로의 이론적 여행을 추적한 것이다.

 

그림4. A: 대지의 외주자, B: 기후-세계의 주거(내) 거주자.

 

알래스카의 코유콘 족은 그들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수수께끼를 통해 불러들인다. 수수께끼를 내는 자는 수수께끼에 언급된 존재의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 익숙한 인간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를 모방함으로써 마치 그 자신이 수수께끼의 대상이 된 것처럼 특징적인 움직임을 표명한다. 그 존재들은 마치 일련의 바람처럼 모든 것을 휘감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 기후-세계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이 세계는 누구도/개체로서의 어떠한 일자(一者)도 가지지 않는다(no-one).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멈추는 것은 없으며 수수께끼를 내는 자가 불러오는 이미지가 나타나건 말건 사라져간다. 20세기 초엽 예수회 사제인 줄리안 제티가 기록한 수수께끼 중 하나에서 수수께끼를 낸 자는 그 자신을 한 묶음의 풀이라고 생각한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기 주변을 나는 온몸으로 쓸어낸다

over-there around I-sweep-with-my-body

(Jetté 1913: 199-200)

 

수수께끼를 낸 자는 빗자루(broom)며 빗자루은 쓸어내는 것이다. 그는 바로 첫눈 위를 의연히 뚫고 버티는 풀처럼 자신의 주변을 쓸어낸다. 바람 속에서 풀을 꺾거나 땅 위에 쌓인 부드러운 눈을 만지면 작은 원 모양이 그 주변을 쓸어낸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는 에단이 그린 대지와 하늘 그림과는 스펙트럼의 대극을 이룰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거주자의 관점에서 본 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의 다양성의 총체를 정밀도와 같이 응축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의 전체는 한 묶음의 풀 안에 있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대지로부터 맹아를 틔우고 지금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은 눈 속에 소구획을 창출함으로써 세계 내에 자신의 장소를 만든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는 열린 세계에 거하는 것이다.

 

 

 

Earth, Sky, Wind, and Weather.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y Institute 13: S19-38, 2007.

(http://onlinelibrary.wiley.com/wol1/doi/10.1111/j.1467-9655.2007.00401.x/full)

「大地、空、風、そして天候」(古川不可知訳)『現代思想』2017年3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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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현대사상 '인공지능' 특집호에서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ANT를 공부하면서 이론적 한계로 내가 느낀 점을 잘 정리한 글이다. 행위자의 특성은 관계성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행위자로 실체화하게 되면 관계성의 사실성이 소거된다는 바로 그 점을 논리적으로 잘 분석해놓았다. 중간에 예시로 든 일본에서 행해진 장기버전의 "알파고와 인간의 대전"의 소상한 내용 부분은 생략했다. 아무래도 일본장기에 무지한 (나를 비롯한 일부) 독자들에게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 예시가 없어도 글의 논지는 충분히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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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기계의 인류학: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

 

쿠보 아키노리(久保明教 기술인류학)

 

 

 

우리는 기계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확실히 인간과 기계의 일상적인 관계는 대체적으로 평온하다. 다기능 전자렌지, 하이브리드카, 스마트폰을 편리한 도구로 볼 것인가, 신체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집합지(集合知)의 매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현대생활이 엄청난 수의 기계와의 밀접한 제휴를 통해 성립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속에서 기계가 떠받치는 현대사회의 시시비비를 기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나 로봇 등의 지능기계를 화제에 올리면, 기계에 대한 우리의 애증은 증폭된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가 가져오는 빛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운운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절망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우리는 지능기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소박한 질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되면서도 사상의 언어를 통해 정면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프레임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기계의 구체적인 양상보다 인간적인 지성의 문제로 제시된다. 가령 현대를 대표하는 어느 사상가는 휴대전화에 대한 자신의 증오의 근간에 자리한 인간적인 욕망을 분석한다. 기계를 둘러싼 문제를 인간에 관한 문제와 접속시킴으로써 우수한 성과물들을 쌓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상의 언어를 통해 기계의 구체적인 형태와 동작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단절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단절을 넘어서 기계와 인간에 대해 동시에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길잡이 삼아 그 분석방법으로서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정을 제시함으로써 기계를 둘러싼 언어의 단절을 중화하고 지능기계와 우리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파악하는 방법론을 구상하고자 한다.

 

 

1. 기계의 토테미즘

 

기계와 사상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의 맹아는 기계를 둘러싼 근대적 사고의 단서가 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프랑스의 생명과학철학자)에 따르면 유기체와 기계의 유비성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벽시계, 물레방아, 인공분수, 파이프오르간 등 당시의 선진기술에 의거하고 있다. 이 기계들은 도끼나 지레 등 인간의 생체에 ‘달라붙어 있는’ 기존의 도구와 달리, 제작과 시동을 별도로 하면 인간 없이 끝낼 수 있는 자동기계다. 그것들은 원활하게 작동할 때에는 인간의 관여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때만큼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유기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계들은 그 동력원을 (시계나 지레와 비교하면 간접적이지만) 인간에 의지하며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기계는 표면적으로는 개별적인 몸체로 작동하지만 그 내부는 동력과 목적을 부여한 인간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에서 ‘기계를 제작하고 동력과 목적을 부여하는 인간’에 대응하는 무언가는 무엇일까?

 

데카르트의 『인간론』의 서두를 장식한 “신체란 신이 가능한 한 자신과 유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의도적으로 모양을 낸 흙으로 만들어진 상 혹은 기계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라고 나는 상정한다.”라는 기술에 기초하여 캉길렘은 동물=기계설은 다음의 두 가지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논한다. 첫째, 동물=기계(‘신체’)를 제작하는 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기계의 제작에 앞서 생체가 이데아로서 주어진다는 것.

 

동물=기계는 동력원으로서의 신, 그리고 형상인(形相因) 및 목적인(目的因)으로서 모방해야 하는 생체가 선재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생명이해가 방기되는 것은 아니고 목적론의 배치가 달라진다. 즉 개개의 생물의 내부에 설정된 요인들은 신이 그것을 모방해서 신체를 만드는 생체의 이데아 및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신에게로 다시금 배치되며 자연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동물과 인간 신체를 필두로 하는 자연물은 고유의 목적과 영혼을 탈취당하고 객관적인 법칙에 따르는 존재=기계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이론상의 ‘생명의 기계화’를 통해 자연과 동물의 기술적인 이용이 정당화되고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이 나타난다.

 

캉길렘의 논의를 부연하면, 신에 의한 자연의 창조를 인간에 의한 기계의 제작에 빗대는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자연:신::기계:인간)의 산물로서 동물=기계설을 다룰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계를 유기체에 빗댈 수 있는 한편으로, 이면상으로는 항상 인간과 연결된 기계에 빗대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유기체에서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나아가 이 개념조작은 이차원적인 인간의 분절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요인들을 결여한 자연=기계의 일부로서의 신체(연장)와 그것들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정신(사유)이라는 구분이 인간적인 영역에 도입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논한 것과 같이 많은 인류학자가 분석해온 토템 신앙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示差的) 격차와 인간집단들 간의 시차적 격차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 인간사회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면, 동물=기계설은 인간이 제작한 자동기계를 매개로 자연 속에 있는 분절(자연종/신)과 인간 속에 있는 분절(연장/사유)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영역을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계의 토테미즘’에 있어서 벽시계나 파이프오르간 등의 구체적인 기계는 극히 중요함과 동시에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다. 그것들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유비성을 보여주는 논의의 입구에서는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이 도출되는 논의의 출구에서는 사상적인 동물=기계만이 전면화되며 현실의 기계들은 어떤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기계들은 인간이 소유한 자연을 이해하고 억제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실현기구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술)로 격하되며,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이성에 의해 정당화 내지는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적 논의와는 저 멀리 멀어진다. 데카르트의 논의가 당시의 선진적인 기술의 구체적인 양상에 의해 가능해진 것, 즉 ‘이성적인 정당화에 대한 기계 제조의 선행성’은 모조리 망각되고 만다.

 

그런데 사상의 언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에서 기계들은 그 존재감을 다시 강화한다. 기계와의 다름을 통해 인간적인 영역의 분절(연장/사유)이 보장되는 이상, 기계들 그 자체가 이 분절을 넘어 인간에 접근한다면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의 지위는 보증될 수 없다. 사상적인 기계와 달리 현실적인 기계들이 어떤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는 미리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계 제조의 선행성’이 재생된다. 그것은 생물과 외견상 구별할 수 없는 정밀한 동작이 가능한 기계, 인간적인 사유를 실현한 기계, 자동기계(automaton), 로봇, AI 등으로 불리는 지능기계가 실제로 제작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공포라는 모습을 취하며 대중문화와 기술들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다시 개화된다. 선행성의 망각이 떠받치는 사상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기계들을 말하는 것은 항상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선행하는 기계들의 인간적인 영역으로의 삽입이 사상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사상적 기계로의 변환을 통한 인간적인 영역으로서의 접속이 중심화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도정이라 할 수 있다.

 

 

2. 하이브리드한 위조품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사상과 기계의 단절, 사상에 의한 기계의 선행성의 망각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술적 기계’나 ‘장치’ 등의 사상적 기계의 현대적 형상과 그 계보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현실적인 기계들과의 접점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본고에서는 우선 구체적인 기계들로 건너가기 위해 사상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몇몇 야만적인 논의,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참조하기로 한다.

 

브뤼노는 우선 근대라는 기구(Constitution)를 떠받쳐온 이중성을 주목한다. 즉 근대적인 지(知)와 제도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라는 대구로 표현되는 두 개의 영역을 표면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순화’한 후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그것들을 항상 암암리에 연결시키는 ‘번역’ 혹은 ‘매개’를 통해 양자의 혼합인 하이브리드한 존재를 증식시키는 이중의 실천에 의해 구동되어 왔다고 논한다.

 

근대주의자는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의 실천 속에서 전자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근대사회와 그 이외의 사회 혹은 근대과학과 문화적 전통을 대립시키고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라투르가 제시하는 것은 ‘번역’이나 ‘매개’가 이뤄지는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양자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는 ‘비근대론’(Non-Modernism)의 입장이다.

 

비근대론에서는 근대와 비근대, 과학과 문화가 그 본성상의 차이에 의해 환원론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행위자(actor)가 엮어내는 관계의 그물망이 어떤 규모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라는 점에서부터 연속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행위자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 속에서 모든 행위자의 형태와 성질은 항상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들(네트워크)을 통해 만들어진다. 행위자 네트워크론(이하 ANT)은 네트워크의 운동을 통해 다양한 존재가 나타나고 변화하며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기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창되었다.

 

라투르의 논의를 검토하면 왜 근대인이 로봇이나 AI 등의 지능기계에 이 정도로 열중해왔는가가 명확해진다. 데카르트가 행한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은 유기체를 기계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잉여(‘동물=기계가 아닌 것’)로서의 근대적인 인간상을 확립하고 인간에 고유한 영역(‘사회’와 ‘문화’)과 자연(을 해석ㆍ제어하는 과학ㆍ기술)의 영역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순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무한히 접근하는 지능기계라는 특권적인 하이브리드를 순화의 바로 옆에 부상시킨다. 순화의 이면에서 수행되는 무분별한 번역이 사상(捨象)되는 한편, 지능기계—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기계인간’—만이 마치 유일무이의 중요한 하이브리드인 것처럼 표상되며 기계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계들의 인간에 대한 지배나 반란에 대한 공포가 운위된다는 것이다. 지능기계는 근대적인 사고틀이 사상(捨象)하는 번역의 영역으로 이성을 꾀어내는 주요한 회로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지배/피지배의 서사를 통해 번역의 운동으로부터 그 즉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한 모조품으로서 활약해왔다.

 

매일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상당부분을 SNS와 이메일을 통해 행하는 현재 우리의 생활은 반세기 전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기계에 지배받는, 하이브리드화한 사람들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화의 구분을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체적인 양상이 스마트폰, 페이스북, 카톡 등의 기계들과의 하이브리드화를 사상(捨象)하고 그것들을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인간이라는 순화된 자기 이미지를 멋지게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2045년에 대단히 유능한 지능기계가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반세기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30년 후의 사람들을 오해할 뿐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기계들의 지수함수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발전에 수반되는 주체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양상을 단적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인 기계들이 가속적으로 앞서감에 따라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구조 그 자체가 마침내 사상적으로도 기술적으로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3. 네트워크의 구멍

 

라투르의 비근대론적 인류학에 기반하면, 근대인은 지능기계의 중요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창된 ANT는 유감스럽게도 현대에서 지능기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물론 로봇과 AI로 불리는 동력기계와 소프트웨어를 행위자로 다루면서 그것들이 과학적ㆍ사회적ㆍ문화적 요소를 포섭하며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가는 분석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그 기계/소프트가 왜 로봇과 AI로 불리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봇과 AI는 기계나 소프트가 인간이나 생물과의 유비성 속에서 파악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생물과 ‘닮았다’는 술어적 요소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기계와 소프트는 로봇이나 AI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로봇이나 AI의 연구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기계공학자나 인지과학자로 명명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과학적인 정의를 항상 벗어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성을 어떤 모습 속에서 찾아낼 것인가에 따라 지능기계의 정의는 항상 쉽게 변신된다. 따라서 지능기계가 인간이나 생물이 기계와 결부되는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아무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ANT에서의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시행’의 과정을 통해 그 움직임이 명확하게 정의된다.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게 다양한 작용을 행하는 주어적인 존재자다. 인간적인 주체성과 비교하면 그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무수한 행위자들이 상호 능동적/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행위자 네트워크는 운동한다. 이 때문에 ANT에서 분석의 초점은 네트워크의 운동이 안정화하여 자명한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필수적인 통과점’)을 맡는 행위자에 있다. 바로 그러한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생화학자를 주역으로 한 라투르의 저작 『프랑스의 파스퇴르화(The Pasteurization of France 1984)』가 마키아벨리즘적인 과학자상(像)에 안이하게 의거한 분석으로서 사회학자 부르디외로부터 격렬하게 비판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ANT논자가 마키아벨리즘적인 발상으로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미세한 주어적 행위자들 간의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는 네트워크 모델 자체가 그러한 발상을 이끌어내고 만 것이다.

 

비환원론을 표방해온 ANT는 그러나 지능기계를 단순한 기계로 환원해버린다. 그것은 기계적 행위자와 유기적 행위자의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술어적 요소 자체가 ‘지능기계’라는 실체가 되어 네트워크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태를 ANT에서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어적 요소가 항상 행위자로 환원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된 존재자라는 수많은 구멍들을 잠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계성 자체가 실체적 권역(圈域)을 분리하고 현실적인 기계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례로서 소프트와 인간 간의 치열한 전투에 의해 최근 크게 주목받은 장기전왕전(將棋電王戰)을 제시하겠다.

 

 

4. 두려움을 갖지 않는 기계

 

2011년 제1회부터 2015년 마지막 시리즈까지 4회에 걸쳐 행해진 장기전왕전에서는 최고의 장기기사에 필적하는 소프트의 실력(통산 10승 5패 1무)이 드러남과 동시에 기사와 소프트가 장기라는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둘 간의 차이에 대해 제5회 최종국을 다툰 아쿠츠 치카라(阿久津主税)8단과 제2회와 3회 등장한 아베 코오루(阿部光瑠)5단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앞의 수를 계승하는 ‘선(線)’으로 사고합니다. 따라서 ‘선’이 연결되지 않을 때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로 예정변경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심하여 다음의 한 수를 선택합니다. 컴퓨터는 한 수가 두어지면 그 국면에서 새로운 수를 덧붙여 생각하면서 두 수, 세 수를 앞서 가며 최선의 수를 선택합니다. 인간이라면 이 흐름을 탈 수 없는 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의미에서 [컴퓨터는] ‘점’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수를 둘 때 자신과 상대가 두었던 수들에 대응해야 하므로 읽어야 하는 양이 늘어나고 그만큼 피로도가 쌓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컴퓨터는 두려움 없이 읽고 밟아나갑니다. 강할 수밖에 없어요.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기 기사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선의 사고/점의 사고’, ‘두렵다/두렵지 않다’라는 대구로 기사와 소프트의 차이를 다루는 두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은 그러나 실전의 국면에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우선 선의 사고와 점의 사고라는 대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례로서 제2회 전왕전(電王戰) 제3국ㆍ후나에 코헤이(船江恒平)5단-츠츠카나戰을 검토해보겠다. ‘카쿠가와리(角換わり 일본장기의 대표적인 전법 중 하나)’의 전투태세가 되었던 본국에서 선수를 잡은 후나에가 전반부에는 약간 우세했다. 그런데 종반부에 접어들면서 후수인 츠츠카나가 은(銀)을 버리는 기묘한 수를 두었다. 그 수를 읽지 못한 후나에 기사는 그 당시 매우 흔들렸음을 나중에 고백했다.

 

받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수가 날아들었다. 6六銀. 종반부의 거의 막바지, 시급한 국면에서 읽기 어려운 한 수가 두어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했다. 긴장, 불안, 초조, 여러 감정이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국면에 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직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6六銀은 버리는 수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6六同龍을 두었다.

 

대국이 끝난 후 검토할 때에 6六銀에 대해 ▲6六同龍과 銀을 두지 않은 방식(▲2七角△5五銀▲5七角)에서는 분명 선수가 이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나에 기사가 둔 ▲6六同龍은 결과적으로 거의 안전한 수였다. ▲6六同龍을 받고 다시 한 번 계산을 행한 츠츠카나는 銀을 희생시키고 상대의 玉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한 수 앞을 내다본 흐름(실제로는 츠츠카나의 玉이 가로막혀버렸다)을 버리고, 다른 흐름으로 틀어 △4二步의 수세로 돌린다. 바로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다. 어느 쪽으로든 막히는 변화를 서로 회피하기 위해 국면은 다시 종반부의 입구로 돌아온다. 우세를 의식한 후나에 기사는 급소를 쳐서 승리를 가져오려 했지만 그 수는 점차 흩어져 안타깝게도 패배를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내 정신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 기다리던 ▲1六步. 그리고 나는 생각을 끝내버렸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닐까? 그래 분명 내가 이긴다. 나는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실제로 이 국면은 본국에서 내가 가장 승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나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 승리에 들떠 기쁨에 취하고 싶은 그 유혹에 내가 진 것이다.

 

츠츠카나의 △6六銀→△4二步라는 수는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임과 동시에 아베가 말한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이기도 하다. 본국을 관전한 토야마 마사아키(遠山雅亮)5단은 자신의 블로그 기사에 “(△6六銀에 대해 후나에 기사가 두었던 ▲6六同龍에) 인간 상대라면 △5八金으로 응수하고 다음으로 (후나에가 상대의 玉을) 가로막아서 끝나는 흐름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장면에서 소프트는 “두려움 없이” “포기하지 않았다”. 본국뿐만 아니라 전왕전에서 발휘된 소프트의 강점은 아베 기사가 말한 것처럼 장기기사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츠츠카나를 포함한 장기 소프트는 본래 공포, 체념, 피로에 대응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성질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지치고 이기고 싶고 마지막에는 포기하기도 하는 인간 기사와의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인간과 소프트의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술어적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최초의 관계성에 재도입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소프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부정형으로 언급되는 소프트의 존재양상은 매우 순조롭게 관계성에서 실체로 이행하여 그 강한 요인이 되어간다.

 

…[중략]…

 

 

5. 네트워크와 추상적 관념

 

앞 절에서 검토한 것처럼 관계성 자체의 실체화는 그 관계성을 맡는 항이 가진 특성으로 쉽게 대체된다. 통상 우리는 AI나 로봇을 특정한 성질을 가진 확고한 행위자로 다루며, 그것들이 소프트나 기계와 무엇이 다른지를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관계성을 문제시 하는 경우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체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학의 역사에서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추상적이고 내실이 불확실한 관념이 상당히 오랜 기간 타문화 연구의 핵심적인 열쇠가 되어 왔다. 마나와 하우를 도덕적인 강제력을 가진 가치체계의 기반으로 파악한 모스의 주술론과 증여론, 그리고 그것들을 인식론적인 체계에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로 다룬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서 문화를 다뤄왔던 20세기의 주류 인류학은 이 추상적 관념에게 인식체계의 중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 왔다.나아가 라투르나 ANT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현대인류학의 조류에서는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우리에게는 ‘얼핏 비합리적인 신념’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현지 사람들의 집합적인 실천을 통해 분명한 사실성(reality)을 갖는 과정을 분석해왔다. 그런데 이 존재자들을 ANT의 행위자와 같이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주어적인 존재로 그려내면, 그 실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근대적인 분석틀과의 괴리를 낳고 ‘그들은 그 존재들을 믿고 있다’라든지 ‘그들은 그 상징들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기존의 담론을 ‘그들의 존재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실재한다’는 담론으로 대체할 뿐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아가 추상적 관념을 행위자로 대체해버리면, 정령이나 주술사가 현지 사람들에게도 내실의 불확실한 존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이 사상되고 만다.

 

정령도 지능기계도 그에 익숙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자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는 실체며 동시에 그 내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행위자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노드(node)로 포함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상할 수 있다. 추상적 관념은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이 실체화됨으로써 나타나며 확고한 행위자는 되지 않지만 존재자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한다. 그 네트워크에 익숙한 자에게 추상적 관념은 비교적 쉽게 관계성의 일단을 이루는 항의 특성으로 파악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분명히 존재를 공상하는 기묘한 행위로만 비춰진다.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추상적 관념의 움직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나름 익숙하지만 그 실재는 긍정되지 않는 관념을 다뤄보자. 코마츠 카즈히코(小松和彦)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의 일례로서 ‘운’을 검토한다. 코마츠는 다음의 예를 든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4인이 마작을 시작한다. 그 중 1인이 평상시라면 예상할 수 없는 승률을 올린다. 그때 그는 “오늘 난 어쩐지 운이 좋아”라며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자네는 운이 붙었어”라며 희한해한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내리 지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이기기 시작하면, “자네는 운을 쫓아냈어”라든지 “이제 운이 돌기 시작하는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운’이라는 관념은 이 이상한 승률을 이끌어낸 요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관계항의 특성(“자네는 운이 붙었어”)을 쉽게 부여하지만 그 내실은 극히 모호한 상태다.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 결과가 그 당사자의 내적인 조건(실력이나 연습량)과도, 관계하는 다른 행위자의 개입(조언이나 도움)과도 연관된다고 상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마작의 게임장을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관계성이 앞서와 같은 이상한 상황을 발생시킬 때 이상성을 띤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되고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에 접속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비합리적인 인식의 산물이 아니고 분명한 영향력과 내실의 불명료함을 겸비한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움직인다.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아름답다’라는 술어적 요소가 ‘아름다움’이 되어 ‘미(美)’로 실체화되고 회화, 아티스트, 미술관 등의 행위자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 내실을 바꿔나가는 것처럼. 추상적 관념은 실천을 배후에서 규정하는 상징체계의 구성요소로서가 아니라 실천을 구동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에 주어적인 행위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추상적 관념을 노드로 포함하는 네트워크론의 구상은 보다 정밀한 이론적 정비와 풍부한 사례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잠정적인 모델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활동에서 파악된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상호 작용하는 자율적인 관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의 특정 시점에 지적능력이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기계가 나타나는”, 그 내실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관념이 확실한 실효성과 함께 과학적ㆍ사회적ㆍ정치적인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현재 상황에서, 그 타당성을 객관적인 데이터와 법칙을 통해 판정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 의미를 사람들의 공상과 기대, 문화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점차 가속화하는 기계들을 둘러싼 네트워크의 운동에 대해 충분히 분석적인 효력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기계가 인간과 기계의 아날로지컬한 관계성을 통해 나타나는 한, 그 미래의 모습은 기계와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축적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몇몇 낙관적인 조망도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화와 번역의 이중구조를 폐기하고 ANT가 그 입구를 제시한 곳에서 머물러 있는 비근대론적 인류학의 흐름을 치밀하면서도 야만적인 방법론으로 추진해야 한다.

 

 

久保明教 「知能機械の人類学─アクターネットワーク論の限界を越えて」 『現代思想』 2015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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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안드로이드 기술 개발자인 이시구로 히로시의 『인간과 기계 사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에 실린 글의 후반부를 번역해 올려둔다.

그 글전반부의 번역글은 http://sarantoya12.tistory.com/116 이다.

 

의식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의식이 있는 것이라는 의견은 충분히 옳다. 그런데 언어가 있고 의식이 있는 것임에도 왜 의식은 의식이 있고 언어가 있게 만드는 것일까? 의식의 "무시간성"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의식은 시간을 소거하고 무한한 무(無)의 세계에 입성하려고 하는 것일까?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는 점이 정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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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진화의 역문제

 

그것은 진화일까?

 

이시구로: 본래 진화와 퇴화란 무엇일까요? 저는 진정한 진화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이 세계를 만들고 변화시키듯이 모든 에너지의 사이클, 자연의 사이클이 인공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아직은 천재지변이나 기후변동 등에는 관여할 수 없으나 그런 것들까지도 조절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지배며 진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배가 진화라는 것은 자신들이 가장 번영하기 수월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태양플레어(solar flare)처럼 잠시잠깐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생명이라면 어찌할 방법이 없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어나고 죽고 썩어간다’는 사이클에서 벗어나 신체와 환경을 더욱 기계화하여 인공적이고 항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신체와 환경의 항상 유지의 상태를 만들어낸다면, 보다 이상적인 인공물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주의 역사가 빅뱅으로부터 발생한 단순물리법칙의 세계로부터 지능생명체에 의한 재구조화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케가미: 인간의 진화는 자연현상을 복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자연에서는 태양만이 일으켰던 핵융합반응을 인간은 그보다 온도가 훨씬 낮은 지구표면에서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학기술이지요. 그런데 복사가 지배라는 바로 그것이 생명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시구로: 복사하는 것은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절 하에 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핵융합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태양을 모조리 만들어내지 않아도 큰 에너지 원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태양이 폭발한다면 모두 죽을 테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태양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갖춘 인류로 진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내성을 갖추고자 한다면 적어도 혹성 간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물리현상을 반드시 능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물리현상은 이미 인공물로 대체되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간의 규모와 범위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100만배 혹은 1억배로 확장해서 생각하면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은 지수 함수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케가미: 바로 그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생명/비생명을 불문하고 공존하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창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의 생태계를 모방한 완전히 새로운 인공사회로 점차 진화하여 사람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생기게 되는 것처럼…….

 

이시구로: 저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요컨대 자연현상에 기초한 자연발생적인 생명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인공적으로, 지적생명체가 자기 재생하듯이 인공생명이 만들어지는 세계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와 진화의 역문제

 

이시구로: 제가 안드로이드를 통해 진행하고 있는 것도 인간을 어디까지 기계화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케가미: 그렇게 생각할 때 기술을 진화시키는 것이 언어라고 한다면, ‘인간이 만든다’는 것은 ‘언어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이시구로: 예를 들어 아픔 등의 감각질의 감각을 개념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세계가 없다면, 적어도 철학적인 개념의 세계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다는 명시적인 자아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또 그 한편으로 언어라는 것은 객관성입니다. 자신만 보기 위해서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세계 속에 자신을 위치 짓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프로토콜(protocole)인 언어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말로 인해 바로 타인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각이나 패턴만으로 우리는 언어 이전의 자신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을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감각질의 감각이 어떻게 개념으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요구됩니다.

 

이케가미: 그렇습니다.

 

이시구로: 머릿속에서 말이 들려옴으로써 객관성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시간개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이케가미: 확실히 언어는 무시간입니다. 언어와 의식이 가깝다는 것은 바로 그 ‘시간 없음’에서 공통의 성질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말이 먼저입니다. 말하는 것에서 의식이 생겨납니다. 반드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맨 처음에는 의미를 수반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이케가미: 의미는 뒤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시구로: 그렇죠. 요컨대 되돌려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언어를 가지게 하면 그로부터 의도와 욕망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생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말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케가미: 거기서 역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보통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언어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저는 안드로이드 연구를 통해 그러한 역문제의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 “욕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하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어라는 존재는 전혀 의심스럽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 즉 시간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자기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해서 그로부터 의도와 욕구를 거쳐 마지막으로 의식과 자아에 이르는 것이 제 연구의 골격입니다. 이케가미 씨가 생명의 정의에서 출발한다고 한다면, 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활동에서부터 점차 파고들어 의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무언가에서 갑자기 시작하려는 사람은 이제까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인간다운 무언가를 찾는) 방법이라고 말하면 다양한 바이프로덕트(by-product)가 생기고 연구비도 따기 쉽기 때문에(웃음) 저는 약간 부풀려 말하긴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곳에서 정반대의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케가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연구하고 있는 ALIFE(인공생명)은 무기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시도입니다. 이 또한 역문제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명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 후에 원리적인 것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짚신벌레나 바퀴벌레에서 인간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지난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 대신 진화의 알고리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ALIFE입니다. 어쩌면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리는 편이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ALIFE(Artificial Life)가 진화해서 BLIFE(Biological Life=유기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BLIFE로부터 ALIFE가 되는, 즉 생명으로부터 무수한 유사생명적인 것이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개념과 기술

 

이시구로: 언어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하면 언어라는 것은 3인 이상이 있어야만 의미를 가집니다. 일대일의 서로에게 적응해버리면 변변한 언어가 생기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란 강도 높은 사회성을 수반하게 됩니다.

 

이케가미: 반촘스키군요. 저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가 없다면 핵융합반응도 원자역학도 없는 것이지요. 블랙홀이 우주와 관계없는 곳에서 탄생한 이유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개념세계와 언어조작에 의해 기술에 생겨나 블랙홀이 탄생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시구로: 개념세계라는 것은 실세계의 복잡한 현상을 모델화할 수 있는, 엄청나게 파워풀한 수법입니다.

 

이케가미: 핵융합반응까지 일으킨 인간의 개념세계와 언어조작이라는 것은 매우 파워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개념세계보다 현실의 기술 쪽이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SF 발상이 둔해진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현실세계의 사이클이 더 앞서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개념 쪽이 훨씬 앞서갔지요. 예를 들어 30년쯤 전에 SF는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견했잖습니까? 그것은 개념세계 쪽이 훨씬 앞서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개념세계가 앞설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개념세계와 현실세계의 어느 쪽이 넒은 것일까? 현실이라는 관측 가능한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지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세계가 시간개념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는 빛이나 정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한정된 세계이며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념세계는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념은 비약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케가미: 저는 “인간의 기술의 변화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정, 다른 기술,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루이지 노노(Luigi Nono, 1924~1990,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자)의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만, 다른 언어가 만들어질 수 없다면 개념은 불어날 수 없습니다.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면, 양자역학 등이 유입됨으로써 고전수학이 아닌 확률론적인 수학 쪽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케가미: 그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A인 확률과 B인 확률”과 “A면서 B인 확률”을 비교하면, “A면서 B인 확률” 쪽이 반드시 작다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후자가 큽니다. 이것은 개념이 없으면 제기될 수 없고, 이것을 사용해서 컴퓨터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이시구로: 혹은 1과 2밖에 없던 세계에 “제로”라는 개념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허수가 발견되고, 나아가 양자역학적인 수학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념이 발전해감에 따라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케가미: 계산이라는 것도 개념입니다. 계산에서 다룰 수 없다 해도 계산을 구현화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따라서 개념이 가능하면 그것을 구현화하는 장치가 생겨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초가 말씀이 계시니라”인 것이지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해도, 어찌되었든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를 실재로서 역력히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바꿔 말해 그것이 무리한 일인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인공생명연구의 마음입니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개념을 구성하는 모델이나 수학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인공생명은 개념 측에 있지만, 개념이 현실에 발 딛고 있지 않다면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이시구로: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드로이드에 계속 전념할 것입니다.

 

 

 

사회—로봇의 사회성

 

인간이 마이너리티가 되는 장면

 

코뮤-(CommU)는 두 대 이상이 대화할 수 있는 로봇을 말한다. 실제로 세 대의 코뮤와 한 인간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에 참가하면 이상한 대화감을 느낀다’고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누구라도 이야기한다. 코뮤는 실은 음성인식을 전혀 하지 않지만 대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대화란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지금 수준에서는 처음부터 위화감 없이 로봇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만,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봇 두 대가 가까이서 때때로 이쪽을 언뜻언뜻 본다면 어떠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토리를 상정하고 대화에 끼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다고 해보자. 함께 있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때때로 이쪽을 보고 방긋방긋 웃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자신도 대화에 참가하고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즉 대화라는 것은 그 ‘내용’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가 어딘가로 전개하는 상태”를 만듦으로써 대화감이 채워진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복수의 로봇을 가지고 와서 로봇들 사이에서 학습한다거나 협조한다거나 하는 동작이 나오면, 바로 로봇이 로봇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인간은 갑자기 ‘인간다움’을 로봇으로부터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 대의 로봇에 인간 한 사람이 끼어있다면, 인간은 그 장에서 마이너리티가 된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사회적 제약이 발생하고 인간은 상당 부분 로봇 측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하다. 로봇의 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혹은 다른 인간이 있어도 그렇다. 로봇과 로봇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인간 댄서가 있는 공간에 혼자 있다면 어떠할까? 인간 쪽이 기계에 맞추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다움’이나 ‘생명다움’을 만들기 위한 가장 큰 조건은 로봇이 인간과 환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러 대의 로봇과 함께 하는 것은 그것들과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것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새롭게 개발한 “기계인간 오르타”에서 해보았던 실험이기도 하다.

 

 

마음은 존재인가 현상인가?

 

여러 대의 로봇이 있으면 그 속에서 개성도 생겨난다. 그것은 서 있는 위치만으로도 결정되며 사용하는 기재에 의해서도 바뀐다. 즉 그 속에서 사회성을 찾아내는 순간 인간은 그 단순한 하드웨어의 특징을 개성처럼 자유롭게 해석해버린다.

 

개성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로봇의 경우에는 하드웨어의 유형이나 디바이스의 작은 불균형이 개성의 느낌을 충분히 자아낼 수 있다. 그것은 로봇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즉 ‘개성’을 ‘기계의 사양’의 차이에서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측이 임의적으로 구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나 ‘마음’ 또한 보는 측의 인간이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 연극에서 안드로이드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재밌는 것은 ‘마음’이 어떤 언어에도 존재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타인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는 실제로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명명할 뿐으로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는 내 자신 속에 ‘마음’이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실감한 적이 없으며 정말로 ‘마음’이 있다고 실감한 사람이 분명 존재할까 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정의할 수 없다 해도, 또 물리적인 존재로 볼 수 없다 해도, 인간은 상대방으로부터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마음’이 사회성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인간은 그들을 ‘마음을 가진 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마음’이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주관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은 말하자면 복잡한 인간의 뇌 활동을 외부에서 관찰한 것이다. ‘의식’은 뇌 활동 그 자체지만 ‘마음’은 외부에서 본 ‘의식의 용기’와 같은 것이다.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가는 길

 

로봇연구에 “섬뜩한 골짜기”라는 개념이 있다. 로봇의 움직임이나 시선이 인간에 가까워짐에 따라 인간은 로봇에 친근감을 느끼지만, 인간은 로봇을 인간으로 간주하기 직전의 어떤 시점에서 갑자기 섬뜩함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는 것이 로봇개발의 하나의 테마이기도 한데, 나는 오히려 인간 측의 적응의 문제가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츠코 데랏쿠스(1972~, 일본의 여장 연예인)의 안드로이드인 “마츠코로이드”을 만들었을 때에도 처음에 마츠코 씨는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거부감을 표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녹음하는 날 마츠코 씨를 포함해서 관계자 전원이 마츠코로이드가 여기에 ‘있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적응함으로써 마츠코로이드는 드디어 섬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진 ‘인간’으로서 현장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섬뜩한 골짜기를 매우 깊게 (가장 기분 나쁘게) 느끼는 부분은 좀비와 같이 “움직이는 사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령 좀비라 해도 만약 한 달 정도 함께 산다면 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공유되는 것이다. 모두가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한다든지 유행하기 때문에 여하간 하고 싶다든지 욕망과 의도의 생성 또한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러한 상호작용은 인간 동료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지만, 반드시 인간 동료 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식—‘나’를 둘러싼 철학

 

안드로이드 연구

 

로봇연구는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산업용 로봇에서 인간생활의 장에서 일하는 일상 활동형 로봇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이 일상 활동형 로봇 연구에 착수하였고, 주로 오사카대학과 ATR 이시구로 히로시 특별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전세계적으로 로봇연구가 성행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상 활동형 로봇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에 관여하면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방이 인간이다. 따라서 기계공학이나 인공지능 연구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심리학, 뇌 과학 등의 지식도 불가결하다. 로봇연구란 기존의 학문분야의 범위를 뛰어넘어 전개되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존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로봇 그 자체의 개발에 있어서 로봇의 동작과 일반기능에만 주력하여 개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일상 활동형 로봇의 이상형은 어디에 있을까? 본래 인간의 뇌의 신체는 다른 인간을 인식하고 다른 인간과 관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로봇의 이상형은 인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특정 작업을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한 공장 등에서는 특정 기능을 가진 로봇 쪽이 훨씬 편리성이 높다.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인간을 상대하는 한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로봇이 인간에게서 어떤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듯 목표를 설정하면 기존 연구에서는 보지 못한 문제가 발생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로봇은 어디까지 인간다운 형상을 가질 수 있을까?

● 로봇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 로봇의 지각능력은 어느 정도 인간과 같아질 수 있을까?

● 인간다운 로봇이 어떻게 인간다운 대화능력을 실현시킬까?

● 인간다운 복잡한 로봇을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개발할까?

 

이 기초적인 문제들은 아직까지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로봇’을 만드는 목적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험을 진행하면서 그 결과를 로봇 설계에 반영시킨다. 그렇게 인간이해와 기술개발이 동시에 진행된다. 그렇게 나는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로봇=안드로이드 개발을 목표로 삼아왔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안드로이드를 예시로 인간과 로봇을 둘러싼 철학적인 문제들을 살펴보겠다.

 

 

자기의식의 모호함

 

실재여성을 모델로 겉모습과 동작 등을 인간처럼 재현한 여성의 안드로이드를 2004년에 개발했다. 그러나 이 여성 안드로이드는 인간다운 겉모습과 움직임을 하고 있지만 인간다운 대화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사람은 안드로이드가 인간다워지면 인간답게 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자연언어이해의 기능은 있지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은 한정되었으며 인간과 똑같은 대화능력은 없었다. 또 발화 또한 미리 녹음된 음성을 그대로 재현할 뿐이었다.

 

접화 마이크로폰을 사용하면 90% 정도의 언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명료한 음성으로 말하는 경우에 한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해야 하지만, 수많은 노이즈가 마이크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인식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게다가 음성을 인식할 수 있다 해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후 발화의 내용을 생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능을 해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공지능의 궁극의 연구과제이다. 요컨대 인간과 같은 레벨의 대화능력을 컴퓨터로 재현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원격조작으로 대화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인 ‘제미노이드’이다. (나 자신을 모델로 하여 “이시구로이드”로 불리고 있다.) 나는 제미노이드를 개발하면서 무엇보다 시선을 진짜처럼 처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표정과 동작을 만드는 얼굴과 몸의 각 부분을 움직이기 위한 작동장치(actuator)의 수를 50개로 늘리고 (여성 안드로이드에서는 약 40개) 나의 습관적인 동작을 가능한 한 충실히 재현하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제미노이드를 본 나 자신의 인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똑같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제미노이드가 ‘나 자신’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동작까지도 나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울처럼 인식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동일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후 새로운 원격대화형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F’를 만들었을 때에도 모델이 된 인간 여성 또한 나와 똑같이 말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몇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통 일상 속에서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거울은 매우 기묘한 정보매체며,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좌우가 뒤바뀐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인물이다. 인간의 얼굴은 좌우대칭이 아니기 때문에 좌우가 뒤바뀐 얼굴은 다른 인물로 보인다. 이것은 사진 속 얼굴과 거울 속 얼굴을 나란히 세워두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 거울 속 얼굴을 ‘자신’이라고 인식한다. 물론 사진 속 얼굴도 자신의 얼굴로 인식할 수 있지만, 오히려 거울 속 얼굴 쪽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진도 동영상도 그것들은 이차원으로 투영된 것이며 그 속에 투영된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다.

 

또 습관 등의 동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습관은 거의 의식할 수 없다. 대화를 나눌 때에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는 배우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철학적 질문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객관화하지 않은 채 자아를 확립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다.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위치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미노이드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그 인식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

 

제미노이드의 원격조작 시스템을 내가 조작하면 제미노이드로부터 나의 음성이 들리고 제미노이드의 움직임에 나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된다. 입술의 움직임은 목젖으로부터 입이 열리는 방식을 추정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 생성된다. 그 외 눈의 움직임이나 호흡에 수반되는 가슴과 어깨의 움직임 등의 무의식적인 동작은 프로그램으로 자동 생성되는데, 자동 생성된다는 의미의 측면에서 인간 또한 안드로이드와 동일하다.

 

이 제미노이드에서 제미노이드와 대화하는 자도 조작하는 자도 그 제미노이드를 조작자 본인처럼 느낀다. 그리고 대화자는 제미노이드의 조작자를 모를 때에도 제미노이드를 ‘인간’처럼 느낀다.

 

직접 대면한 상황에서 제미노이드와의 대화가 시작되면 그 즉시 대화자는 제미노이드의 눈을 본다. 그리고 대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마치 대화자는 그것이 인간인 양 행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미노이드의 조작자가 목소리의 억양을 강하게 하여 화를 내면 대화자는 혼난다는 느낌을 갖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많은 대화자가 안드로이드가 사람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원격조작의 얼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연구자도 예를 들어 제미노이드가 “내 몸을 만져도 좋아!”라고 말하면 순간 머뭇거리게 된다.

 

여기서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물론 몸속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인간도 제미노이드도 몸속을 확인할 기회는 없다. 제미노이드는 겉모습, 동작, 발화 등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인간 같다. 잘 보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인간이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 같다. 그런 행동들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인간과 같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령자에게 제미노이드와 인간의 구별은 더더욱 어렵고 실제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즉 일부 고령자들에게 제미노이드는 인간과 같다.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자의 내부를 보통은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도 표면만으로는 정의되기 어렵다. ‘인간의 정의’가 내려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복잡한 내부구조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일상생활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기에는 일상생활이 그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나아가 사회적인 장면에서 제미노이드와 인간 간의 구별은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인 장면이란 제미노이드와 대화자가 대화하는 장면을 제3자가 관찰하는 정황이다.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대화하는 것을 관찰할 때는 제미노이드와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때보다 제미노이드를 더 인간처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람과 대화하는 자는 사람이다’라는 선입관이 작동하기 때문이리라. 가령 그것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다른 인간이 이미 대화 상대자로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제3자 또한 제미노이드를 대화가능한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즉 상황을 잘 전개시켜나가면 지금의 제미노이드라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정의에 어떤 영향을 줄까? 분명 지금까지 인간을 쏙 빼닮은 납 인형을 만들어왔지만, 그것들은 겉모습만 닮은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양식(modality), 즉 행동방식은 인간과 확실히 다르므로 인간의 정의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움직임이나 대화까지도 인간과 같은 제미노이드의 경우는 어떠할까? 속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에 연민을 느끼기 쉬운 이유

 

제미노이드의 인간다운 모습과 움직임은 대화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때에 곧바로 조작한 것이 앞서 서술한 무의식적인 동작의 생성이다. 그와 동시에 인지심리학적인 실험도 행했다. ‘얼마의 시간을 들여 관찰해야만 대화자가 그것이 안드로이드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었다. 결과는 약 2초까지는 대화자의 7할 정도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5초 이내에 전원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음으로 행한 것은 5분간 대화를 나누고 대화자의 시선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실험이다. 그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실험에서 대화의 상대로서 인간ㆍ안드로이드ㆍ로봇(이 실험에 사용된 로봇은 “와카마루”라는 이름의 미츠비시(三菱重工)가 개발한 로봇의 겉모습을 가진 로봇)의 세 종류를 준비했다. 5초가 지나면 모든 대화자가 상대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자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에 대해 거의 동일한 시선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로봇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상대를 사회적인 대화상대로 보는지에 따라 시선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다르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 가설에 따라 대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동일한 사회적인 대화상대로 보았으며 로봇은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대화자는 제미노이드를 의식적으로는 안드로이드로 보아도 무의식적으로는 인간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제미노이드를 본인과 비교하면 그 존재감은 다소 미약하다. 그것은 표정의 풍부함이나 움직임의 빈약함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필자인 나보다 제미노이드와 이야기하기가 더 쉽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하기 쉬움의 이유는 존재감의 미약함 때문이 아니다.

 

제미노이드를 주의해서 보면, 그 즉시 그것이 안드로이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드로이드와 대화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식될 수 있고, 의식하면 그것을 안드로이드로 볼 수 있다.

 

안드로이드로 본다는 것은 상대에게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닿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로 치면 친한 동료와의 관계다. 즉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닿아도 괜찮다고 의식할 수 있고 그러함으로써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드로이드를 처음 대면하게 되면 안드로이드와의 심적인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나 자신을 복사한 제미노이드(Geminoid HI)보다도 미려한 성인 여성형 제미노이드(GeminoidF, 이하 “F”라고 한다)에서 보다 현저하게 나타난다. F는 미려하게 웃는 얼굴로 미소를 지을 수 있는데, 남성 대화자들 중에는 F에 대해 연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상대에 관해 알아야 하고 자신에 관해 알려야 하며 상호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에 대해서는 그런 프로세스 없이 거리감을 좁힐 수 있다. 이것이 필자의 제미노이드가 필자 자신보다도 이야기하기 쉬운 상대로 인식되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제미노이드는 인간과의 거리감을 조정하는 목적으로 사용될만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안드로이드는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되는 것이 적절한가?”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미노이드가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사회적인 인간의 정의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안드로이드의 신체에 적응하는 인간

 

제미노이드의 대화실험에서는 조작자 또한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다. 대화자가 제미노이드의 볼을 찌르거나 안으면 조작자는 바로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이것은 조작자가 제미노이드의 신체에 적응하여 제미노이드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처럼 느끼는 것이다.

 

제미노이드의 시각과 청각은 이미 원격조작시스템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남은 감각은 촉각과 후각이다. 촉각이 가상적이면서도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신체를 거의 자신의 신체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제미노이드가 완성도를 갖춰나가면 후각조차도 가상적으로 공유될 가능성이 있다.

내가 처음에 아동형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때 그 아동형 안드로이드를 뒤에서 안고 안드로이드의 어깨 부근에 턱을 울리고 주변 시야로 안드로이드를 쳐다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아이 냄새가 났다. 물론 진짜 냄새가 아니라 가상의 냄새다. 다른 사람에게도 시도해보았는데, 몇몇이 같은 의견을 제출했다. 즉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그 안드로이드의 냄새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냄새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미노이드에게는 냄새까지도 가상적으로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제미노이드의 신체에 적응하는 이유는 아마도 뇌와 신체의 연결 방식에 있을 것이다. 원래 뇌와 신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걷고 있는 와중에는 어떤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감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신체는 뇌로부터 주어진 ‘걸어라’라는 지령 하에서 자율적으로 보행패턴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걷게 만든다. 그리고 걷는다는 행위가 시각 등의 다른 감각을 기초로 한 예측에 반하지 않는 한 뇌는 신체가 적절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처럼 원래 뇌와 신체의 연결이 느슨하다는 바로 이것 때문에 가령 그것이 제미노이드의 신체라 해도 뇌가 그 몸체의 일부에 대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다면 뇌는 예측에 기초하여 다른 감각까지도 가상적으로 재현해버린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뇌와 신체는 분리 가능한가?” 혹은 “뇌와 신체는 재배치 가능한가?”이다. 이제까지 철학에서는 ‘뇌가 신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때 그 뇌는 인간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미노이드 시스템이 상용가능하게 된다면, 이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조작자는 세상 속에 있는 어떤 제미노이드와도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마음 내키면 다른 제미노이드(신체)로 갈아탈 수도 있다.

 

기술개발의 목적은 뇌를 신체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기술은 인간의 능력 하에서 발상을 얻어 인간 능력을 기계로 대체해왔다. 전화를 사용하면 이동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기술에 의해 뇌는 더 자유롭게 되고 신체의 물리적 의미는 점점 희박해진다.

 

한편 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뇌의 성장에서 신체는 필요불가결하다. 발달단계에서 뇌와 신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신체적 발달의 장해가 뇌의 발달장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발달의 어떤 단계에서 뇌와 신체가 분리되는 것일까, 혹은 본래 영구적으로 뇌와 신체는 제미노이드처럼 시스템 속에서 분리된 것은 아닐까? 가령 전화나 텔레비전은 뇌와 신체의 분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지금 당장 제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의 시스템은 이처럼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의문을 던져왔다.

 

 

안드로이드와 아이덴티티

 

자기 자신의 복사로서 제미노이드를 개발하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쪽이 자기 자신일까?”라는 질문이다. 제미노이드는 안드로이드고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쪽인 나를 가리키며 이쪽이 자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보는 방식은 과연 그러할까? 사회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일까?

 

자신의 제미노이드를 개발한 후 주변으로부터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내가 제미노이드와 닮아간다는 의견이다. 사실이라면 제미노이드가 나와 닮아간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비교의 주체가 제미노이드가 되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나의 아이덴티티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특징짓는 다양한 속성, 바로 그것이 아이덴티티며 벌거벗은 상태의 ‘특징 없는 인간’은 사회에서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없다. 실제로 자신이 개발한 로봇이나 전신이 검은 복장 등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있다.

 

나의 경우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자신의 복사인 제미노이드는 나와 같은 겉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작동시키면 현실세계에서 사회적으로도 나 자신이라고 간주된다. (아직은 한정된 상황 하에서지만 나를 대신해서 회의장에 갈 수도 있다.) 이것은 내게 매우 큰 문제다. 살아있는 몸의 나 자신과 제미노이드 중 어느 쪽이 나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확실히 제미노이드 쪽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심스러운 문제가 있다. 바로 노화다. 나는 늙어가지만 제미노이드는 인공물이기 때문에 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겉모습도 중요한 아이덴티티다. 어느 연령대의 겉모습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이덴티티를 얻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영화배우의 아이덴티티는 늙어 비실비실해진 모습과 한창 시절의 스크린 속의 활기찬 모습 중에서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제미노이드는 연구 성과며, 연구자로서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시선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모습의 아이덴티티는 나이를 먹으면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 이 아이덴티티의 문제도 인간의 사회적인 존재를 묻는 철학적인 문제일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연기하는 인간

 

로봇에게서 사회성을 발견하는 순간, 즉 로봇이 다른 인간과 대면하는 순간, 로봇을 인간과 같은 것으로 느끼기 쉽다고 앞서 말했다. 이 주장을 더 밀고 가면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시나리오 하에서 시선도 철저히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소개한 히라타 오리자 씨와의 안드로이드 연극이 바로 그것이다.

 

히라타 오리자 씨와는 이 안드로이드 연극을 함께 하기 전부터 미츠비시가 개발한 “와카마루”라는, 로봇의 겉모습을 한 로봇을 사용한 로봇연극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두 대의 로봇과 두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는 20분 정도의 단막극으로 시나리오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래의 일본에서 실업자에게 생활지원대책으로 로봇이 지급되고, 실직한 부부의 가정에도 두 대의 로봇이 지급된다. 그런데 남편은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대의 로봇 중에 한 대도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일한다는 것이란? 힘들다는 것이란? 인간이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연극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히라타 씨의 연출이 인간에 대해서도 로봇에 대해서도 완전히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0.3초, 잠깐을 포착해보세요!”라든가 “30센티 앞에 서보세요!”와 같이 히라타 씨의 연출은 동작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정신론은 일절 없다. 그에 따라 로봇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측도 히라타 씨의 연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연극은 로봇에게도 인간인 배우에게도 완전히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무대가 되었다. 관람 후의 설문조사에서 관객의 거의 대부분은 로봇과 배우 모두에게서 ‘인간다운 마음’을 느꼈다고 답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란 몸짓과 발화로 충분히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며, 그 실체는 단순한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마음’은 실체가 없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타인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느끼는 것만이 문제시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느낌으로써 자신에게 그와 똑같은 ‘마음’이 있음을 느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의 정체가 아닐까?

 

 

안드로이드는 인권을 가지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조금 이야기를 비약해보겠다. 안드로이드가 사회에 받아들여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또한 히라타 오리자 씨가 생각한 사고 실험에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 나오는 완전 자율형의 안드로이드가 진짜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아직은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와 같은 원격조작형의 안드로이드라면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하다. 원격조작이라고 해도, 상당 부분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인공지능의 기술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부분만이 원격 조작된다. 조정하는 한 사람이 복수의 안드로이드를 원격 조작한다는 것이 실용적인 안드로이드 시스템이다.

 

그러한 시대에 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이를 빼닮은 안드로이드를 구입했다고 치자. 교통사고로 죽기 전의 비디오나 사진 등의 다양한 기록을 참조로 하여 만들어진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와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이야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의 안드로이드에게 애착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살아있었을 때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애정을 쏟는다.

 

그러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어머니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강도로부터 어머니를 지키고자 강도 앞을 가로막았다. 강도는 봉으로 아이를 때려 쓰러뜨렸다. 강도는 “로봇은 인간에게 맞서지 마!”라며 쓰러진 아이의 안드로이드를 집요하게 봉으로 두들겨 팬다.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몇 번이나 멈추게 하려 해도 강도는 계속해서 아이의 안드로이드를 두들겨 팬다.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점점 힘을 잃어간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와 강도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때 어머니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어머니는 단순한 살인범일까?

 

논점은 ‘아이의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있다. 아이의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된다면 당연히 정당방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아이의 안드로이드의 몸속은 기계이자 로봇이다. 로봇에게 ‘인권’은 인정될 수 있는지의 문제 또한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것은 신체의 내부인가? 기계의 신체를 가진 자는 인간이 아닌가? 인공장기나 인공사지가 점차 진화해간다면 인간의 신체 또한 기계화될 것이다. 그때 무엇을 남겨서 인간이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본래 인권이라는 것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흑인 노예도 아메리카 사회로부터 인권을 인정받음으로써 인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인권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로봇이 스스로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프로그램화된다면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로봇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문제는 그 사회가 로봇에게 인권을 인정해줄 것인가에 있다.

 

인간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이의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은 인권을 주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정의할 것인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난폭하며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정의는 역사 속에서 점차 변화해왔으며, 바로 지금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 의해 다시금 크게 바뀌려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와 철학

 

안드로이드 연구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구 분야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와 더불어 실제로도 안드로이드를 개발하여 현실세계에 출현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생각하는 새로운 재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알지 못한다 해도 실제로 그 문제를 느끼게 하는 뛰어난 매체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뇌 과학과 의학이 엄청나게 발전한다 해도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내부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의 정의란 표층적인 관측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 ‘나’라는 자아를 나타내는 말, ‘마음’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말, 그러한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걸맞는, 여기에 소개한 제미노이드를 비롯한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일상에 근거한 새로운 철학의 툴(tool)이 될 것이다.

 

일찍이 철학은 학문의 중심이며 그 개념적 사고는 다양한 연구 분야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개념적 사고만으로 인간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래 개념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이제야 비로소 실질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개념적 사고를 떠받치는 신체와 감각의 의미, 나아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 의한 사회의 의미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논증에만 의거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세계에서 실증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 이해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안드로이드와 로봇 연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철학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 분야가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식의 연구를 통해 철학이 과학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바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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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보적인 안드로이드 기술 개발자인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의 글을 두 번에 걸쳐 번역해 올려둔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비로소 인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생산'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생산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생식이다. 생물학적 재생산이 인간의 삶(혹은 인류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귀착되는 한,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즉 인류사회의 진화, 전쟁, 갈등, 위계, 계약과 협동까지도 동물집단의 유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의 디푸스 컴플렉스)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려고 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개념은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끊는 것이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를 상기해보라.)

또 하나는 노동이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과 결부되어 있는 한 자기의식은 해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즉 현실세계로부터 메타화될 때, '인간'이라는 개념을 창출하는 인간의 의식이 해명된다. 가령 '가상세계'(virtual world)는 근대의 (노동의) 물질주의(materialism)가 은폐한 '보이지 않는 세계'(invisible world)를 복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이시구로 히로시는 그 최전선에서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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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3차원에서 자유롭기 위해

 

 

의식은 무엇에 필요한가?

 

요즈음 의식에 대해 쭉 생각했다. 계속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가 어느 날 밤 깜박 졸던 중에 설명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감각질(感覺質 Qualia)이 아닌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이란 자신에 대해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에 관한 것, 즉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자기를 언급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를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반사행동만으로 사는 동물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고, 지금 단계에서는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복잡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언젠가는 자기의식과 같은 것을 부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없으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자기의식을 되도록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이해하면 기억을 참조하는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생각할 수 있다. 경험이 누적되면서 비축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억들을 동시에 접속할 수는 없다. ‘나’라는 기억의 참조자가 기억의 발생과 함께 머릿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기억을 찾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기능적으로 자기의식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에 기초해서 세계를 모델화하고 그 모델화된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생각하는 의식 혹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반향시키는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자신을 보는 자신

 

자신을 보는 자신이 있다. 이것이 자기의식이다.

 

머릿속의 자신은 조금이라도 현실세계로부터 떠 있는 느낌을 갖지 않는가? 그것은 그 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을 메타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즉 모델화하는 감각으로서 의식의 ‘세계로부터 약간 떠 있는 느낌’ 혹은 ‘세계와 융합하는 느낌’이 발생한다.

 

반대로 만약 머릿속의 자신이 현실세계에 딱 들러붙어 있다면 현실세계에 무언가가 일어날 때 사고는 전부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멈추지 않는다. 어떤 현실이 일어날지라도 머릿속의 ‘자신을 보는 자신’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혹은 잠자고 있을 때는 시간감각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꿔 말하면 의식이란 ‘세계’와 ‘자신’의 모델화다. 뇌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다. ‘세계’의 인식과 ‘자신’의 인식, 그것이 뇌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다만 세계는 고정된 시간으로서, 자신은 시간을 주관하는 자로서 모델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자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실세계를 고정된 시간과 자신이라는 시계로 분해하는 것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뒷모습을 보려고 거울을 등지고 앞에 또 다른 거울을 들고 등 뒤의 거울을 비춰보면 한순간 무한후퇴가 발생한다. 가깝게 비춰지는 자신과 멀리 비춰지는 자신 사이에는 현실에 대한 다른 느낌의 거리감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수준의 추상도에서 현실세계를 이러 저리 탐색하려하는 것, 그것이 의식이지 않을까? 현실에 뿌리 내린 자신과 현실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현실세계에서 활동하면서도 독립된 의식이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기억의 시간

 

기억이라는 것은 현실세계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기억이 ‘지금 여기’에 단단히 붙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완전히 ‘주관’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란 자기의식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시간과 완전히 일치된 세계의 관점을 가리킨다.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편 우리는 기억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기억된다. 요컨대 컴퓨터를 계속 지켜보지 않아도 책상 위에 컴퓨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하고 행동할 수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계 전체를 그와 같이 고정적인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세계가 뇌 속에서 모델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만약 조금 전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엄청난 정보량을 요하므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좁다. 마치 복수의 눈으로 세계를 계속 관찰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벌레와 같다. 즉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감각한 것이 ‘주관’(현실세계에 들러붙은 시간)에서 분리됨으로써 기억이라는 ‘자신이 객관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억의 시간감각은 엉터리다. 강한 기억은 가까운 일로 생각되지만, 가까운 일도 바로 잊힐 수 있다.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일년 전의 감동적인 요리는 기억날 수 있다. 싫은 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만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뒤의 시간관념은 그리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기억이란 얼핏 시계열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기억을 통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 실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없으며, 그때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다는 식으로 그 외의 여러 에비던스(증거)와 관련지음으로써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는 전혀 답할 수 없다. 꿈에서는 ‘언제’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전자회로의 메모리는 플립플롭(flip-flop)이라는 회로로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는 입력과 출력이 연결되어 루프를 구성한다. 인간의 기억의 메카니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입력과 출력이 연결됨으로써 신경회로가 루프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라는 현실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을 지운다는 것이다.

 

 

의식과 기억

 

여기서 기억이란 자기이외의 것이 ‘있다’(책상이 있다, 당신이 존재한다 등)는 객관성(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며, 의식이란 그 객관세계 속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 세계의 정보를 추출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행위주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자기의식이다. 즉 자신의 주관적 관측을 중첩시켜서 그것이 ‘객관세계’인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객관세계에서 ‘주관적 관찰을 행하는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며 이 시뮬레이션을 행하는 자신이야말로 자기의식이다.

 

현실세계에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과 그에 수반하여 광대한 정보량의 흐름을 뇌 속 모델로서 고정하는 기계야말로 의식과 기억의 역할이 아닐까?

 

옛 기억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어제와 오늘의 자신이 연속한다고 믿지 못한다면 아이덴티티는 구축될 수 없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자기의식은 같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의식은 과연 연속적인 것일까? 라는 질문은 과학적으로도 논의되고 있으며, ‘매우 순간적인 (0.1초 정도의) 단기기억’과 ‘가까운 미래의 예측’을 연속적으로 잇는 것이 의식의 주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의 연쇄가 어떻게 해서 태어난 순간부터 동일인물로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이 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시간을 지우는 것이리라. 우리는 시간관념을 버림으로써 보편성(기억)을 획득하고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자기(의식)를 획득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현실세계의 가장 큰 제약이다. 그리고 보편성이란 시간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그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기를 형성해간다면, 그것은 마치 3차원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이 이 한 방향의 시간에 속박된 세계를 극복하려는 것과 같다.

 

이 실세계를 기술에 의해 다양하게 모델화해온 인간이 지금도 모델화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의식이 무엇인지를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과 의식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극복해야=모델화해야 3차원 세계를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 극복의 과정에 인공적인 의식의 생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의 뇌

 

인간은 관찰에 의해 세계를 뇌 속 모델(기억)을 만들고, 그것을 기본으로 자기의식을 만들어낸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계속해서 관찰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방이 이런 느낌이다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이런 것이다 등등 방과 세계에 관한 뇌 속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관계하지 않고서도 존재함을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이다.

 

따라서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갖게 한다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장치=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 장치가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시간의 변화에 직면한 뇌 속 모델이 갱신될 수 있을까? 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모델화함으로써 보편성=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실세계에서의 변화에 따라 모델을 계속해서 변신해가는 것. 그 밸런스가 현실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안드로이드에 한정되지 않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뇌 속 모델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켜 망상벽이 강한 인간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화에 대응해서 살지 않으면 생물로서의 신체로서 유지해나갈 수 없다. 나아가 앞으로는 기술이 진보하고 무기물의 신체에 뇌를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면, 의식의 존재방식 또한 크게 변화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의 이야기다.

 

 

 

지능—세계의 모델화

 

 

인간의 두 진화방법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나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며, 또 하나는 기술에 의한 진화다. 본래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구와 기술의 사용여부에 있다.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 인간이며,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능력을 고양시켜가는 것이 인간의 진화방법이다.

 

달리기 속도는 변할 수 없지만 자동차와 비행기 등의 탈 것을 통해 장거리를 더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힘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도 기계를 통해 산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며, 무기를 통해 도시를 한순간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인간은 100년 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즉 인간은 유전자와 기술이라는 두 방법으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에 의한 진화속도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 그 때문에 인간과 동물 간에는 압도적인 능력차가 발생하였고 이 세상은 인간에 지배받는 세계가 되었다.

 

기술이 인간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단서로 기술이 개발되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도구와 기술은 인간 자신의 능력을 바꿔놓거나 고양시켜왔던 것이다. 더 멀리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고 건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다양한 건축기계를 개발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발명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전화가 생겨났다. 이처럼 기술은 단기간에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치환하고 그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해왔던 것이다.

 

 

멈추지 않는 기술개발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고 확장하는 기술개발의 역사에서 그 기술개발이 멈췄던 때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은 능력을 확장해야 살아남는다는 숙명에 따라 그 능력을 계속해서 확장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낸 기술은 풍부한 경제활동을 창출했다.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기술은 이 세상에 번영해서 살아남는 데에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며, 그것을 손에 넣어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 된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에서 기술이 쇠퇴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술개발 그 자체가 인간이성의 프로세스이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힘을 얻어 살아남았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는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개발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포함하기 때문에 멈춰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본래 인간이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뇌의 큰 용량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뇌는 그 크기와 복잡함으로 인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보는 자신’을 재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많은 감각기관은 진화 과정에서 피부로 변해왔으며 대개 바깥쪽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얼굴도 볼 수 없고, 자신의 위나 장 속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정보들을 연결함으로써 뇌 속에 보편성을 갖는 ‘자신’의 모델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뇌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참조하여 기술로 치환할 수 있었다. (물론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원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객관적인’ 자신의 이해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진 자기의식을 확립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모델화하여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인간의 능력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인간을 모델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신체의 팔을 로봇 의수가 대체하여 그 신체의 팔이 가진 능력과 같거나 그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의 의수는 인간의 팔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로봇의 의수를 통해 ‘팔’을 완전히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신을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 탓에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 기계화될 수 있을까?

 

기술의 역사란 인간의 기능을 기계로 대체해온 역사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왔다.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되면 언제나 그 기술에 기반해서 인간 전체의 대체를 시도해왔다.

 

예를 들어 시계 기술이 발전한 스위스에서는 그 자동화 기술에 의해 오토마타(autómata: 인간의 지능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장치)라 불리는 자동인형을 만들어내었다. 19세기에 조지 무어에 의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계인간이 고안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다양한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기능의 기술로의 대체는 인간을 모델화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거법적인 인간이해의 방법이기도 하다. 기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가 점차 기계로 바뀌어 가면 최종적으로 과연 인간의 코어 같은 것이 남아있겠는가?

 

몇 백 년 전의 사회에서는 손발이 없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통상의 인간사회에 참가하기가 어려웠다. 통상의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었고 차별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수나 의족을 하고서도 충분히 보통의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나 제세동기를 육체에 심는 수술도, 인공장기도 통상의 의료행위다. 이윽고 육체는 인간임의 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따라서 기술에 의한 인간의 기능의 대체라는 것은 인간임의 조건에서 생물로서의 인간고유의 것을 지워냄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검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의와 튜링 테스트

 

튜링 테스트(Turing test)란 기계(인공지능)에 인간과 동일한 지능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테스트다. 키보드와 모니터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를 통해 상대가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인데,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으면 (기계로 판단되지 않으면) 그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현재 컴퓨터의 기초가 된 튜링 머신을 구상한 앨런 튜링이 1950년의 논문 「계산기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제창한 이후 그렇게 불린다.

 

다만 인간을 속일 뿐이라면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은 바로 제작되었으리다. 그러나 무엇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면 최종적으로 그것이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튜링 테스트의 전제 자체가 케케묵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기’ 위한 테스트고, ‘기계가 인간으로서 다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테스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으로서 다뤄지는 것들과 그 이외의 것들을 구별하는’ 테스트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해서 모델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튜링 테스트의 목적 또한 규정될 것이다. 그때 재료, 즉 육체의 재질은 이미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기계화—인간이 안드로이드가 될 때

 

 

이미 발생한 특이점(singularity)

 

기술은 이미 가속도로 진화를 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 속에 가장 범용적이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컴퓨터다. 컴퓨터는 해마다 두 배 이상의 속도로 성능이 향상되고 있으며, 이것을 ‘무어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른 컴퓨터의 진화 속도는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초기현상에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한계점에 도달한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도 컴퓨터의 성능은 끊임없이 가속도로 향상되고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의 설계에 컴퓨터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 자체의 설계에 관해서는 이미 인간이 수작업으로 도면을 그린다거나 그를 위해 필요한 계산이나 시뮬레이션을 행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컴퓨터가 한다. 물론 인간은 항상 새로운 설계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과 컴퓨터의 계산능력의 향상 중 어느 쪽이 새로운 컴퓨터설계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있는가? 문외한인 나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지만 컴퓨터 자체의 성능향상이 설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컴퓨터가 컴퓨터를 개발하고 로봇이 로봇을 개발한다. 컴퓨터나 로봇이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서 가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특이점’이라고 말한 것인데, 특이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가속도가 붙은 기술의 진화는 컴퓨터뿐만 아니라 로봇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뇌는 인간을 인식하고 인간에 관여해왔다. 따라서 그 인간이 사용하기 편한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제품에 필연적으로 인간다운 기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간의 시선을 모방한 로봇인 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라고도 불린다)의 연구개발은 최근 10년에서 15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라면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시선과 행동방식을 대체하고 나아가 실제 사회에서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기능, 즉 타자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양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다.

 

물론 아직 개량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상황과 목적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에 더욱 가까운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 접수대에서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 착각한다. 또 무대에 선 안드로이드는 특히 인간의 역할 이상으로 인간 같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로서의 안드로이드는 홍콩에서 압도적인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가장 큰 목적은 안드로이드에 의도와 욕구를 심어주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금의 안드로이드와 로봇 등에게 행위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만 의도와 욕구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화를 나눈다 해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질문에 정해진 답변을 의미 없이 되돌려줄 뿐이다. 대화가 성립된다 해도 진짜 인간다운 대화는 할 수 없다. 이 안드로이드에게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만드는 배경으로서 의도와 욕구 또한 프로그램화된다면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러한 의도와 욕구를 가진 안드로이드는 대화상대인 인간의 의도와 욕구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발화와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부 모델에 비추어 맞춰보고 자신이라면 어떤 의도와 욕구를 가지고 그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와 욕구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의도와 욕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며 자신의 의도의 일부를 특정한 인간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도의 공유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다

 

한편 인간 동료의 관계는 늘 대등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영화배우와 일반인은 일대다의 특수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의도를 공유하고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보다 사회에서 어떻게 널리 인지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만담계의 두 번째 인간국보인 고 카츠라 베이초(桂米朝)의 안드로이드를 만들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미수(米壽: 88세)의 기념강연을 위해 제작한 것인데, 당시 카츠라 베이초 씨는 이미 만담을 연기하는 것이 힘든 지경이었다. 따라서 카츠라 씨가 만담가로서 전성기를 누렸을 즈음의 모습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는 지금까지도 카츠라 씨를 대신해서 만담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비디오 영상과는 완전히 다른, 카츠라 씨의 존재감을 그 자체로 재현한 매우 박력있는 모습이다. 물론 조금 주의 깊게 보면, 그것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만담이 시작되면 그 만담에 점차 빠져들어 마치 진짜 카츠라 씨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현장감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이 안드로이드가 참가하는 만담 공연은 언제나 만석으로 티켓은 바로 매진된다.

 

카츠라 씨와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만담을 연기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다. 그 관계가 안드로이드에 의해 유지됨으로써 카츠라 씨는 만담가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담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카츠라 씨는 안드로이드가 되어 지금까지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안드로이드는 사회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수단,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카츠라 씨는 말하자면 신체의 모든 것을 안드로이드로 대체한 것인데,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은 카츠라 씨와 같은 저명인이 아니어도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지, 장기, 세포……육체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다 해도 그 사람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신체’가 이미 인간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기술은 본래부터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대체해왔다. 인간의 능력이 기계로 대체됨과 동시에 로봇도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 로봇사회에서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자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로봇 사회의 본질

 

로봇 사회에서 로봇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왠지 풀어야 할 것 숙제로 느껴지면서도 마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말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로봇을 보면서 이 말들을 연상시킨다면 어떠할까? 상황은 한 순간 일변하지 않을까? 이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로이자씨와 안드로이드 연극을 제작했다. 이것은 고전적인 연극예술로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연극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안드로이드에 인간다운 마음을 느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일까? 연극에 사용한 안드로이드는 외모와 표정이 인간과 똑같게 제작되었지만, 프로그램으로 기록된 동작과 발화를 순차적으로 재생했을 뿐으로 지능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제작방식의 안드로이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똑같은 ‘마음’을 느낀다면, ‘마음’의 본질은 인간이나 로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해서 느끼는 측에 있게 된다. 즉 ‘마음’이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주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봇과의 관계가 증가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믿으며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의미 불명인 말들과 그 말들이 지시하는 문제에 대해 깊게 사고하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로봇이 증가하면 생활은 편리하고 풍부해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인간은 인간에 대해 깊게 사고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로봇사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며 기술에 의해 진화해왔다. 그 기술이 만들어낸 로봇사회에서 인간은 그 본질로 향해가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진화란 인간 그 자체의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기 위해 태어나다

 

기술이 더 진보하게 되면 인간의 신체는 점차 기계로 대체되고 그 수명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뇌 자체도 컴퓨터로 대체되고 인간은 완전히 기계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기체로서의 육체가 가진 질병이나 수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기술에 의해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기질로 진화해갈 것이다.

 

이것은 ‘브레인 업로드’라고 불리는 꿈의 기술이며 당장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먼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가령 그러한 일이 가능한 시대가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시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떠올려보자.

 

한 나라의 입장에서,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존재인 인간국보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제작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의 안드로이드가 사회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감으로써 그 뛰어난 예술인을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어쩌면 사회 속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그 후 안드로이드로서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어 그 존재가치를 불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일지도 모른다.

 

 

 

池上高志・石黒浩、『人間と機械の間―心はどこにあるのか』、講談社、2016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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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데스콜라의 1996년 논문을 번역해 올려둔다. 이제는 상식(?)이 된 그의 자연 개념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논문이다. 이 논문이 실린 『자연과 사회: 인류학적인 관점』은 인류학 내에서 '문화'에서 '자연'으로 개념의 '존재론적인 전환'을 이끌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용어와 관련해서는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이 논문의 일본어번역본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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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구축: 상징생태학과 사회적 실천

 

필리프 데스콜라

 

 

이제는 많은 인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자연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구축되어 왔으며 이러한 개념이 문화ㆍ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존재론의 한 패러다임에 불과하며 그에 적합하지 않는 많은 문화에 투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다. 이렇게 재고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서양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대한 내적인 비판이다(그 중에서도 Rosset 1973, Horigan 1988, Latour 1994 참조). 이것은 또한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물리적 환경을 스스로 말하거나 그에 관여하는 존재양식을 기술하기에는 자연-문화의 이분법이 부적절하거나 혹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도구임을 깨달은 인류학자들의 민족지적 연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들[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인간의 성향이나 행동의 원인이 식물과 동물에 유래한다고 생각할―이것은 인류학의 가장 오래된 난제 중 하나다―뿐만 아니라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비인간적인 유기생명체의 범위를 정령, 괴물, 인공물, 광물, 나아가 양심, 혼, 커뮤니케이션 능력,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성장할 수 있는 것, 사회적인 처신, 도덕률 등의 두드러진 특징을 가진 어떤 존재물에까지 확장시킨다. 생물, 인공물, 도깨비 간의 경계가 흐릿하고 또 비인간과 인간이 상당수의 특성을 공유하는 수많은 문화들에서 토착의 분류법을 끌어오기 위해 사용하는 형태학적ㆍ행동학적 상동성의 기준의 유용성은 극히 한정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공통의 기준은 토착의 분류기준을 등한시함으로써 다양하게 개념화된 존재를, 우리가 서양적인 자연의 범주 내에서 찾은 것으로 상정된 사물의 분류질서에 끼워 맞출 뿐이기 때문이다.

 

이 자연주의적인 편견의 귀결은 인류학 내의 분업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민족생물학자들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물종의 민속분류와 명명법 연구에 야심을 한정하는 한편으로, ‘상징’ 인류학은 토착의 코스몰로지 이론을 해명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그 구성요소가 영역 고유성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고 분류되는 듯하다. 분류의 방식에 따라 그 내용이 동질적으로 되거나 이질적으로 되기 때문에 분류라는 것 자체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정의되어 다뤄져왔다. 이것은 인류의 단일성을 상정하는 이 학문분야에서는 이례적인 변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이론적인 이원론은 어떤 모습으로 제시된다 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항 대립으로 지속되는 데에 공헌한다. 자연이 문화ㆍ역사횡단적인 실재의 범위에 있다고 상정되는 이상, 통상의 물리적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현상이나 존재물이 초자연적이라고 라벨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한 세기 전에 뒤르켐이 말했듯이(Durkheim 1960), 초자연적인 질서에 대한 관념은 필연적으로 사물의 자연 질서 관념에서 비롯되며 우주 법칙의 합리적인 움직임으로 포섭되지 않는 모든 현상과 어울리는 잔여 범주에 다름 아니다. 물론 자연-초자연의 대립은 물리적 세계의 수학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루클레티우스(T.C. Lucretius)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종교라는 환상에 대항하는 유물론 철학의 대표적인 무기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학적으로 보편적인 것임을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화생태학이나 마르크스주의인류학의 몇몇 조류 등 근대의 자칭 유물론적 접근은 뒤르켐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자연의 사회적 구축을 물리적ㆍ기술적 제약이 마음속에 기계적으로 반영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연의 관념이란 이데올로기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즉 ‘객관적’인 물질적 힘의 왜곡된 표상―생태계로부터 자의적으로 선출된 제약요인이든 불완전하게 정의된 생산력의 단계든―이며 그것이 사회들의 구조와 진화를 형상화해왔다(Descola 1988). 이 자연의 페티쉬화는 극단적인 생태학적 상대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이 속에서 모든 사회는 적응에 의한 고유의 산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매우 유사한 환경을 공유한 사회들이라 할지라도 한 사회가 다른 한 사회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나 자연-문화의 이분법은 예를 들어 구조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했듯이 때로 유용하고 실속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렇지만] 『친족의 기본구조』(레비-스트로스 1949)에서 인세스트 터부(근친혼 금기)가 혼인교환의 기원과 조건이기 때문에 자연-문화의 이분법이 사회생활의 기원과 조건이기도 하다는 설명의 기반의 가설적 전제로서 기능한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이 책의 도입부에서 표명된 것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타나는 결연이론의 기원―사견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과 이론적으로 분리될 뿐만 아니라 인간화(호모니제이션)(Descola and Palsson 1996 참조) 과정에 관한 최근 논고를 살펴보더라도 자연 상태에서 느닷없이 문화가 발생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저작, 특히 「구조인류학과 생태학」(레비-스트로스 1972)에서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배후로 밀어내고 자연주의적인 사고를 표명하고 있다. 이 속에서 정신의 움직임은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차이를 해설하기 위한 여과장치로 간주된다. 한편 『신화학』에서 자연-문화의 구분은 의미론적인 매트릭스로서 신화 속에 그려진 다양하고 대조적인 속성과 특성을 정리하기 위한 중심적인 도구로 재등장한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소재의 대부분을 의거해온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 사회에서는 우리가 하는 방식으로 자연과 문화가 나눠지지 않는다―가령 나눠진다 해도 우리의 분리방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축을 따라 묘사한 대립항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정통한 인류학자들에게 납득될 수 있었다. 나아가 이 이항대립은 동일사회 혹은 근린사회에서 수집한 새로운 자료로부터 유효한 추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발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 패러독스의 열쇠는 자연-문화의 구분이 민족지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지각 가능한 성질의 대조적인 조합을 레비-스트로스가 때마침 정리할 때에 사용한 총칭적인 라벨링에 지나지 않는 한편으로, 아메리카인디언들은 우리가 하듯이 두 개의 다른 존재론적 영역 하에 이것들의 성질을 끼워 맞출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

 

자연이 사회적으로 구축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난해한 질문을 설정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문화가 각기 다른 시기에 생겨난 자연에 관한 특유의 사고방식을 가능한 한 기술하도록 스스로를 한정해야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경험적으로 무궁무진한 자연-문화의 다종다양한 복합을 비교가능하게 하는 질서의 일반원칙을 탐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나 자신은 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외의 다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대주의는 확립되어야 하는 존재를 다시금 전제로 삼아버리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에 의해] 만약 모든 문화가 섞임 없이 자연세계를 코드화하는 특정한 의미체계이며 그 자연세계에 우리 자신의 [서양] 문화가 그렇게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모든 특징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자연-문화(들)의 분단의 바로 그 원인이 의문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주의의 선언이란 그와 모순되게도 서양문화에 주어진 인식론적인 특권, 즉 스스로 내린 자연의 정의가 다른 모든 문화를 가늠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되는 유일한 문화라는 특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차단한다.

 

가령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ㆍ물리적 환경의 표상을 만들어낼 때 공통의 어떤 일반적인 패턴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와 작용의 징후를 어디서부터 찾아야할까? 그러한 탐구는 민족생물학적인 분류학에만, 적어도 그것에만 의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선 동식물의 분류는 자연의 사회적인 객체화에 한정된 한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분류과정에서 각각의 문화는 환경의 특정한 특징과 그 환경에 대한 실천적인 관여의 특정한 형식을 특히 내세우게 되는데,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는 우주의 움직임에 대한 로컬적인 이론, 비인간의 사회학과 존재론, 사회적ㆍ비사회적 영역의 공간표상, 다른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존재물을 다루는 방법이나 관계방식을 통제하는 의례적인 규정과 금지 등의 측면이 포함된다. 게다가 진화민족생물학자가 강조해왔던 분류구조의 보편성으로 간주하기에는 이제까지 강한 의문이 제기되어왔다. 이러한 의문에는 민속분류의 단위를 좌우하는 의미론적 결정요인의 터무니없는 다양성(Friedberg 1986, 1990)이나 분류의 산물의 자의성(Ellen 1993)의 지적에서부터 자연종의 존재 그 자체(Ellen 1979)나 민족생물학적 분류를 계층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상정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Howell 1989)까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지각이 생물종 사이에서 찾아지는 불연속에 대응하고 분류영역고유의 내포에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가령 받아들인다 해도 의문은 남는다. 그러한 보편적인 패턴에 대해 아는 것이 비인간을 개념화하는 방식의 실제의 다양성을 더 깊게 이해하는 것에 어떠한 공헌을 할 것인가? 바꿔 말하면, 만약 모든 문화가 식물이나 동물을 동일한 절차에 기초한 분류로서, 그러나 그 각각의 문화가 생물에 특정한 속성과 사회적 측면을 부여하고 그것들과의 관계들을 각각 독자의 방법으로 다룬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민족생물학적인 분류법이 그 다양화의 과정에서 부차적인 움직임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모든 비인간의 개념화에 공통된 특징은 그것들이 항상 인간계에 대한 참조에 의해 기초 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사회적인 범주와 관계들이 우주의 질서화를 위한 정신의 주물과 같은 것으로 사용될 시에는 사회중심주의적인 모델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서양의 코스몰로지처럼 자연을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한 질서를 가진 실재로서 부정적으로 정의할 시에는 이원론적인 단일세계라는 것이다. 비인간의 사회적 개체화는 포섭 혹은 배제의 그 어느 쪽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해도 인간의 객체화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다. 어떤 과정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회의 관념들과 실천의 배치이며 모든 사회는 그로부터 자기와 타자의 개념을 도출하고 있다(Descola 1992: 111). 이 두 과정에서 환경은 고정적인 것이고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며 문화라는 매체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버클리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인간의 유기적ㆍ비유기적 환경이 특정한 문화적인 코드의 프리즘을 통해 지각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상징적 소산이라고 서술하자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개념적으로 질서지운 다음 현재적(顯在的)인 사회적 분류에 과도한 비중을 두는 것은 종에 고유하고 유전적으로 만들어지는 지각적ㆍ산정적(算定的)인 프로세스로 그것을 환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오인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그렇게 되면 뒤르켐적인 낡은 이원론이 곧바로 재생되고 말 것이다. 그 속에서 자연은 사회의 단순한 사생화에 불과하고, 즉 사람들의 실천이나 환경을 이용하거나 지각할 때의 물리적인 요인의 쌍방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현재적인 사회적 분류의 정적인 투영으로 간주된다.

 

나아가 서양과학의 전통을 제외하면 많은 경우 비인간의 다양한 표상을 수미일관한 체계적인 관념의 집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일상적인 행동과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즉 살아 움직이는 지식과 신체기법 속에서, 또 실제적인 선택이나 분주한 의례 속에서 ‘말할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것들 속에서 표현된다(Bloch 1992).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주로 비언어적인 실천의 심적 모델을 세세하고 단편적인 것으로부터 재구축해왔다. 얼핏 보기에는 사사로운 행위나 조각난 발언을 이어붙임으로써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들어왔다(Descola 1994a). 이것들의 의미 있는 패턴은 우리가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행위의 가이드라인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의 민족지적인 분석의 청사진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전자의 가능성을 내가 선호하는 이유는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성원의 대부분은 자신의 문화적인 관습의 기본원리를 명시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해도 토대를 이루는 패턴의 한 기초방식에 자신의 실천을 적용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 이러한 토대가 되는 패턴, 곧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도 조직하는 것 같은 패턴은 내 생각으로는 문화ㆍ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정신의 보편적 구조는 아니다. 이렇듯 내가 프락시스(praxis)의 도식 혹은 도식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실천이 단지 객체화된 특성, 즉 관계의 카테고리의 기본적인 조합 하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다양성을 포섭하는 데에 제 역할을 다하는 인지유형 혹은 매개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들의 패턴은 관계하는 요소들의 숫자보다 다양하지 않으므로 이것들의 프락시스 도식이 무한의 변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해 보인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인지적 보편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해도 비인간의 사회적인 개체화를 조직하는 정신모델을, 문화를 넘어서 존재하는 유한한 조합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친족체계의 아날로지를 사용하면 보다 잘 설명될 수 있다. 사회실천으로서 친족체계는 결연의 규칙, [친족] 호칭, 행동양식에 의한 사회적 영역의 질서화의 원칙, 그리고 다종다양한 신체적 구성요소의 호환성과 비호환성, 집합적ㆍ개인적인 권리와 정체성의 귀속성과 전도(傳導)를 규정하는 다양한 개체들 간의 호환성과 비호환성에 관한 관념들에 의해 구조화된다. 즉 친족체계는 관계양식, 분류양식, 그리고 동일화 양식을 조합시켜 조직한다. 이것들은 이제까지 망라적으로 기술되고 이해되어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많은 인류학자는 유한의 변환군으로 종합하여 다뤄왔다. 비인간의 사회적인 객체화 또한 관계양식, 동일화 양식, 그리고 분류양식의 조합에 의해 동등하게 구성되며 그와 마찬가지로 취급되도록 적합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상징생태학

 

동일화 양식

 

자(自)와 타(他)의 경계를 획정하는 동일화 양식은 인간과 비인간을 다루는 데에도 표현되며, 그것이 특정한 코스몰로지나 사회의 토포그라피(topographie)를 형상화한다. 내가 이미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토테미즘적인 시스템’과 ‘애니미즘적인 시스템’ 간의 대립은 이러한 동일화 양식의 두 양상을 반영한다(Descola 1992). 토테미즘적인 분류가 자연종들 간의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비연속성을 사용해서 사회적 단위의 경계를 결정하는 분절질서를 개념적으로 조직하는 것에 반해(Lévi-Strauss 1962) 애니미즘은 자연의 존재물에 인간적인 성향과 사회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그 때문에 토테미즘적인 분류의 대칭적인 반영이다.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개념적 질서를 사회에 부여하기 위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인 관계들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종 간의 관계들을 개념의 항으로 조직하기 위해 사회생활을 구조화하는 기본적인 카테고리를 사용한다. 비인간은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에서는 기호로서 다뤄지며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에서는 관계의 항으로서 다뤄진다. 여기서 강조해야하는 것은 이 둘의 동일화 양식이 단일한 사회 내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마쿠나족(Makuna族)에 관한 Arhem(1996)의 논의 참조).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은 분절조직과 결부되기 때문에 출자(出自)집단을 가지지 않은 사회에는 분명 부재하지만, 그 다른 한편의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공계(共系)적인 사회에서도 분절사회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양쪽의 시스템이 다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예를 들어 네이티브아메리카 사회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처럼 많은 경우 비인간의 서로 다른 범주 간에는 명확한 경계가 존재하며, 그 한편으로 토테미즘적인 분류에 의해 객체화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애니미즘을 통해 객체화된다.

 

동일화의 세 번째 양식은 우리에게는 보다 익숙한 내추럴리즘이다. 내추럴리즘은 요컨대 자연이 존재한다는 것, 즉 우연성과 인간의 의지에 의한 영향의 어느 쪽에도 외적인 원리에 따라 어떤 사물이 존재하며 전개되고 있다는 신념이다(Rosset 1973). 내추럴리즘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전형적인 서양의 코스몰로지로서 특정한 존재론적 영역, 즉 (스피노자의 유명한 ‘신이 곧 자연’과 같은) 신으로부터 생기든 세계의 그물망에 내재하든(‘자연의 법칙’), 여하간 섭리나 원리가 없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질서와 필연성의 장을 만들어내었다. 내추럴리즘이 우리 자신의 동일화 양식이며, 그것이 과학적 실천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식 속에도 젖어들어 있는 이상, 그것은 우리의 인식론, 특히 타자의 동일화 양식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구조화하는 ‘자연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 이 맥락에서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학문으로서는 흥미롭지만 잘못된 표상, 즉 우리가 자연이라는 부르는 현상의 특정하게 한정된 범위를 단지 표상적으로 조장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선입관에 사로잡히지 않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적인 영역으로서의 자연의 존재 그 자체는 대화가 가능한 동물이나 인간과 캥거루 사이의 친족적 유대와 마찬가지로 경험으로부터 그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갈릴레오 이후 근대과학이 리얼리티의 내적인 움직임을 점차 유효하게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 우리의 이원론적인 코스몰로지의 근원적인 진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바로 라투르가 설득적으로 논의한 것처럼(Latour 1994), 17세기 이후 과학기술의 전개를 특징지은 점차 진전하는 자연의 인공화는 자연과 사회의 두 극단 사이의 대립을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실천적으로 가능해졌다. 존재론적인 혼종성의 개념화를 방어하는 이원론적인 에피스테메는 실제로 현상의 측면에서 혼종화의 증식을 지지해왔다. 사회생물학자가 좋아하는 내추럴리즘적인 사회제도에 대한 설명은 이 패러독스의 동시대적인 예시다. 자연이 DNA라는 장치 하에 그 생식능력을 최대화함으로써 사회관계의 [생성을] 촉진하게 될 때 그 [자연]은 바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말한 희소한 수단과 무한의 목적의 자유 시장에서의 호모 이코노미스처럼 행동한다(Sahlines 1976, Ingold 1996). 그렇게 생각하면 내추럴리즘은 애니미즘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내추럴리즘은 자연과 문화의 실제의 혼종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도 그 사실을 개념화할 수 없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은 내추럴리즘이 은유적으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인간과 비인간의 연속성을 의례에 의해 산출하는 상징적인 변신(metamorphose)으로 개념화한다.

 

관계양식

 

그러면서도 애니미즘, 토테미즘, 그리고 내추럴리즘은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 속에서 특정한 관계적인 정체성을 분할하는 추상적인 위상학적 격자(grid)일 뿐이다. 이것들의 정체성은 사회적인 실천(praxis)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스타일과 가치에 반영된 관계양식 혹은 상호작용의 도식에 매개될 때 상호 구별되며 인류학적으로도 의미를 가진다. 나는 이 관계양식의 두 양상을 포식과 호혜성이라는 라벨로 정의한 바 있다(Descola 1992). 양자는 애니미즘의 일반적인 틀에서 아마존 강 상류 유역의 기술, 거주패턴, 분업 등이 매우 유사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 별개로 존재한다.

 

콜롬비아 동부의 투칸 인디언의 코스몰로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호혜성이란 생물권(生物圈)을 공유하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다. 엄격한 균형의 원리에 기반하며, 이 생물권은 동적 평형을 가진 닫힌 서클로 간주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력의 총량에 한정되기 때문에 내적인 교환은 특히 사냥과 같은 음식물 조달의 과정에서는 비인간으로부터 빼앗은 에너지의 일부가 비인간에게 되돌려지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인간의 혼을 ‘동물들의 주재자’에게 반환하는 것과 그 귀결로서 일어나는 피수렵동물로의 변신에 의한 에너지의 피드백은 확실하게 행해진다. 그리하여 인간과 비인간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신하는 것이며, 양자는 공히 호혜적인 교환에 의한 우주의 일반적인 균형의 원리에 기반한다. 언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각 부족, 각각의 로컬집단은 자신을 지역적인 메타시스템으로 통합되는 하나의 요소로서 다루며, 여성, 상징, 인공물의 규칙화된 교환에 빚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포식은 에콰도르동부와 페루의 히바로族에서 지배적인 가치로 표현된다. 여기서도 비인간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성질을 일정 정도 공유하는 인격(aents)으로 생각되며, 인간은 (재배되고 있는 식물에게는) 혈족적, 혹은 (숲의 동물들에게는) 인척적 유대를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은 인간과의 교환 네트워크에는 참가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취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 대신 비인간들은 여성이나 아이의 피를 마심으로써 마니옥[카사바]의 보복을 행하거나, 수렵동물의 경우에는 과잉의 수렵자들을 뱀에 의한 교상으로(신화담론에서는 식인적인 포식으로) 벌함을 ‘동물들의 주재자’에 위탁함으로써 보복하고자 한다. 이 호혜적인 포식은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 또한 통제한다. 히바로 부족들 간의 머리사냥과 끊임없는 분쟁은 (여성과 아이의 유괴와 더불어) 잃은 생명을 벌충할 필요성을 가까운 친인척의 실제의 정체성 혹은 가상의 정체성을 포획함으로써 표현한다. 이때 보복은 기대되지만 실제로 의도되지는 않는다. 즉 상호의 포식이란 적의에 가득 찬 상호관계를 통해 생명을 똑같이 교환한다기보다 호혜성에 대한 일방적인 거절에 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쌍방에 대한 대조적인 양식으로서 호혜성과 포식은 문화의 에토스에 침투한 지배적인 도식을 구성한다. 그러나 호혜성과 포식 양자는 특정한 상황에서 각각의 반대물의 존재를 다시금 배제하지는 않는다. 히바로 부족들 간의 균형적인 호혜성은 통상의 결연을 통제하며, 때로는 시집보내기를 즐기는 투칸족은 우주전체의 식물연쇄에 자신이 위치지어진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Arhem 1996 참조). 바꿔 말하면 호혜성은 투칸족에게 포식을 포섭하게 하고 히바로 부족에서는 그 반대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타입의 계층적인 포섭은 세 번째 관계양식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보호다. 보호는 비인간의 재생산과 번영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 의존하고 있는 곳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여기서 비인간은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인간과 관계가 깊은 몇몇 가축동물과 재배식물이 될 것이다. 이 동식물종은 사회전체로서 중요한 구성요소(예를 들어 가축화된 소), 혹은 더 작은 친족단위로서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반려동물, 선조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 등)로 나타난다. 의존적인 유대는 종종 호혜적이지만 비인간에 대한 보호는 많은 경우 유익한 결과를 보증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공리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생존의 기반을 보증하거나 감정적인 애착의 필요를 채운다거나 교환을 위한 통화를 제공하거나 혹은 박애적인 신성(Divinity)과의 유대를 영속시키기 위해 기능할 수 있다. 현대의 보호주의 운동과 같은 가장 이타적인 차원에서도 비인간에 대한 보호는 [인간 측의] 자기욕구의 충족을 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데카르트적인 자연지배와 소유를 다른 차원으로 변환한다. 그 차원이란 죄의식이 누그러져 지배가 온정적인 보호와 비적인 오락으로 왜곡되고 변형되는 소세계다.

 

보호는 상호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종종 비대칭적인 관계의 반복에 의해 다른 존재론적인 차원을 이어주고 증폭하는 의존의 연쇄이기도 하다. 몇몇 문화에서는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에 행하는 박애적인 보호를 통해 또 다른 비인간군을 대표하는 것들, 즉 신성에 포섭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태도를 정의하기도 한다. 신성은 때로 지역경제에서 특히 중요한 동식물의 화신이 되며, 인간이 이용하고 보호하는 비인간의 궁극적인 제공자로서—때로는 직접적인 생명의 부모로서—다뤄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시조나 보호자로서 다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는 포식의 형식(직접적인 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인 비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과 호혜성의 형식(동식물인 비인간에 대한 지배를 확실하게 영속시키기 위해 신성의 비인간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조합시킨 포섭적인 관계 시스템으로서의 가치를 보호하기에 이른다. 이것들의 관계항 세트가 여기서는 계층적으로 조직되는데, 비인간의 사회적인 객체화는 또한 아날로지의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다.

 

범주화 양식

 

인간과 비인간의 세계의 개념화는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를 나누어 가지는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지되는 범주에 개체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할당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그러나 범주화는 단지 분류학적인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다(Quere 1995 참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현대의 주류 민족생물학자에게 자연종의 분류는 서술적 추론, 곧 대상을 무언간의 계층으로 내포함을 뜻한다. 이 관점에서 분류된 대상은 실체로서 이해되며 상호 대조적인 특징과 보통은 특정한 언어적 특징에 의해 구별된다. 이렇게 분류된 것은 개인의 심적인 표상으로 다뤄지고 그 표상에는 동질적으로 간주되는 지각적 특징의 결과로서 시차적인 자율성을 부여받는다. 분류학적인 유형이 자연에서 소여의 항목 혹은 특정한 인지와 지각의 제약의 결과의 항목에 기초해서 행해진다고 보면, 민족생물학의 민속분류의 내적인 구성이 보편적이지 않은 몇몇 특징적인 성질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Atran 1990, Berlin 1992). 그러나 범주화의 프로세스는 칸트의 도식론의 전통에 따르면 개별적인 것을 조직적으로 결정함으로써 동적인 공간을 질서화하는 프로세스로서 보다 넓은 시야를 획득하게 한다. 그 관점에서 보면, 범주들의 구성은 그 상대적인 위치의 한 함수이며, 관계적인 정체성은 대체로 암묵적인 절차에 의해 구축된다. 아유르베다의학(인도의 전통의학)에서 질병의 분류(Zinmermann 1989)나 마다가스카르의 자피마나리族의 사회적 특성의 조직화(Bloch 1992)는 그러한 분류의 원리들에 관한 소박한 인류학적 설명을 제공한다. 분류학적인 유형은 속성의 논리에 기반하는 것에 반해, 종종 범례적이라고 칭하는 이러한 질서화의 종류(Petitot 1985)는 관계의 논리에 기반한다. 이 변별은 새롭지 않다. 칸트는 기억에 기여하는 체계화로서 스콜라학파적인 구분과 자연의 구분을 다르다고 생각했다. 후자는 확립된 라벨이 아닌 조합의 법칙에 기반하여 생물을 나눈다(Kant 1947). 그러나 패트릭 토르(Patrick Tort)에 따르면 이 두 개의 분류도식은 상반된 것으로 다뤄질 수 없다. 토르는 18세기 드 마르세(Château De Marçay)가 만든 비유의 분류에서 사용된 어휘를 가져와 유사성으로 분류되는 은유적인 도식 그리고 속성 혹은 성질에 의해 분류되는 환유적인 도식을 통하면 어떤 분류 장치도 성립될 수 있다고 논했다(Tort 1989). 이 도식의 어느 쪽도 절대적으로 우세하지 않다. 왜냐하면 한쪽이 확립한 눈에 보이는 질서는 다른 한쪽의 도식의 고유한 질서에 의해 항상 은폐되기 때문이다.

 

동식물의 표준적인 민속분류는 많은 경우 유사성의 원리, 곧 은유적인 도식에 따라 조직된다. 그러나 명명의 의미론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면 무엇보다 [이미] 분류된 것의 질과 용도에 따라 변별이 행해지는 아속(亞屬)의 분류군의 차원에서 명명을 결정하는 것은 종종 환유적인 도식이다. 반대로 상징적 혹은 토테미즘적인 분류는 환유적인 도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양자는 인간집단(class)과 비인간집단(class)은 상호 맞물리는 성질의 이어짐을 통해 연결되는데 만약 하나의 범주에서 나타나는 대조적인 세트의 조직화가 다른 한쪽의 조직화 개념모델 또는 그 반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상관시키기 때문이다(이 사회중심주의적인 버전에 대해서는 Derkheim and Mauss(1903)를, 그 역에 대해서는 Levi-Strauss(1962)를 참조). 그러나 상징적인 분류에 개입하는 연관의 원리는 그 자체로 유사성의 원리에 의해 말소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템종의 본질적인 성질과 그 토템명으로 불리는 출자집단의 성원들의 본질 사이에 유사성이 강조되는 경우가 있다. 환유적 도식과 은유적 도식—이 둘은 많은 상징적 분류에서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것들이 움직이는 것은 다른 논리ㆍ맥락의 차원에 있다— 간의 경계의 결여가, 레비-스트로스가 토템환상(1962)이라고 부른 인류학적인 페티쉬가 지속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각각의 문화와 역사적인 에피스테메는 이 둘의 분류도식을 분절하고 접합함으로써 특정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조합의 존재방식은 지배적인 도식의 종류와 그 도식에 의해 포섭되는 차원의 숫자와 분류의 각 차원에서 각각의 도식에 의해 특권화되는 분류양식의 종류의 따라 다르다. 이것들의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은유적 도식은 형태학적 유사성에 의해 분류될 것이며(미쉘 아당송(Michel Adanson, 프랑스 식물학자, 1727-1806)이래 주류식물학), 아날로지(구조, 디자인, 지적능력 혹은 도덕적 성향의 아날로지)와 (구조음운론, 분기론, 인종주의적 생태인류학처럼) 대조적인 특징의 매트릭스에 의해서도 분류될 것이다. 환유적 도식에서도 그것은 속성과 용도에 의해 (예를 들어 고전 이전의 서양의 식물학처럼) 공간적인 우유성(偶有性)의 관계(민족생물학의 민속분류에서 생식영역에 의한 분류 혹은 민속 코스몰로지에서 토포스에 의한 분류)에 따라, 혹은 시간적인 우유성의 관계(특정한 출자집단의 빈속분류나 진화생물학의 계보적인 원칙)에 의해서도 분류될 것이다. 내 생각에—오히려 신념에 기반한 편향된 행위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분류도식과 분류양식의 계층적인 조합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서로 다른 종류의 범주화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이 탐구에 의해 적어도 민족을 연구하는 과학이 장기간에 걸쳐 그 사이를 진동해왔던 두 개의 선택지, 곧 문화적 방법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선택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류학적 종별화만 배려한 생물종의 질서화에서 인공적인 보편성이라는 선택지를 회피할 길이 열리게 된다.

 

 

조합(Combination)

 

지금까지 가설에 기초하여 다양한 명제를 제시해왔는데, 민족지적인 사례 몇 가지를 제공함으로써 논의의 범위와 잠재적인 이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면의 제약상 다양한 동일화 양식과 관계양식의 조합으로부터 발생한 비인간의 객체화의 몇몇 타입만을 주목하여 분류양식을 다뤄보겠다.

 

애니미즘적인 변이

 

애니미즘은 동일화 양식으로서 적어도 세 개의 주요한 타입의 관계성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그것은 포식, 호혜성, 그리고 보호다. 히바로 부족에서 포식적인 애니미즘의 사례는 앞서 언급되었는데, 그 특성은 주로 아메리카대륙에서 호전적인 사회들의 상당수에 적용가능하다. 그 속에서 인격, 정체성, 신체, 그리고 구성요소의 결함과 포획이 카니발리즘적인 사회철학의 시금석을 형태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문두루쿠족(Mundurucú族)(Murphy 1958)이나 그랑차코의 니바크레족族(Ritzenthaler 1978)을 들 수 있다. 호혜성은 포식의 반전이며, 인간 동료들 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예배, 혼, 식물 혹은 총 생명력의 끊임없는 교환에 의해 활성화되는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을 특징짓는다. 그러한 시스템에서 지배적인 신념은 인간이 비인간에 대해, 특히 비인간이 식물을 제공해준다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의무를 면해보려는 한편 비인간은 호혜성의 균형을 재확립하려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비인간이 인간의 인격의 구성요소를 취하거나 식물을 먹거나 생명력의 일부를 탈취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제까지 이미 다룬 북서아마존의 투칸사회 외에 북미의 북극ㆍ아북극지방 사람들, 예를 들어 이누이트(Blaisel 1993), 몬타니에 나스카피(Speck 1935), 북부오지브와(Hallowell 1981), 마 베티세크(Karim 1981) 등의 사례에서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호는 지배적인 관계양식으로서 애니미즘적인 시스템과 거의 관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니미즘적인 시스템은 주로 수렵이 인간과 비인간을 매개하는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쪽의 보호는 보호받는 종과의 직접적이고 영속적인 관여와 비인간의 인간에 대한 의존을 보여주며, 길들여진 것과의 상호관계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하마욘은 남시베리아의 에키리트족과 불라가트족이 실천하는 [목축의 샤머니즘]에 대한 분석에서 보호적인 애니미즘의 사례를 분명하게 기술했다(Hamayon 1990: 605-704).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축동물(소, 말, 양)의 상징적인 지위는 시베리아의 사냥꾼의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부리야트족의 수렵사회가 피수렵동물과 [숲의 정령]과 그들과의 관계를 평등하고 동맹적인 관계로 다룸에 반해, 부리야트족의 목축민들은 인간과 보호받는 비인간(소)과 그 쌍방을 보호하는 ‘주재자 소’로 부르는 비인간 간에 계층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소가 하위에 위치함에 따라 동물의 공희를 통한 교환관계가 확립되며, 그 보답으로서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지속이 보증된다.

 

토테미즘적인 변이

 

토테미즘적인 시스템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전형적인 관계양식은 필연적으로 이분법적이다. 이 시스템에서 비인간은 사회적인 분류에 사용되는 차원의 레토릭을 제공한다. 비인간은 사회가 그 분절을 개념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며, 그 자체로 인간과의 사회적인 관계항을 구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인간의 의미와 기능은 사회적 분류라는 역할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 실천적 혹은 상징적인 잠재성의 다양한 측면이 사회생활의 다른 차원에서 강조될 수 있다. 그 때문에 토템종과의 포식적 관계는 분류개념으로서의 종과 그 종의 개개의 성원들 간의 명확한 구별이 이뤄져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버리지니(Aborigine, 오스트로네시아계의 원주민)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속에서 수렵은 인간과 동물 간에 행해지는 교환과 계약의 산물로만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극히 일상적인 음식물 조달의 활동으로 취급된다(Testart 1987). 아메리디안[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리베리아의 코스몰로지처럼 피수렵동물과의 관계가 인척관계나 결연관계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렵자들은 그들의 포획물을 그 죽음이 배상해야하는 분신으로 다루지 않는다. 포식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표현하면 그 속에서 특정한 코스몰로지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수렵의 범위를 벗어나면 동물의 이례적인 취급은 비인간의 커뮤니티와 인간의 커뮤니티 간의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의례적인 조직에서 강조되고, 그 속에서 사회의 전체성을 만드는 서로 다른 분절들 간의 연대와 상보성이 장려된다. 그 때문에 동물은 맥락에 따라 먹기에 적합한 것이 되거나 사고의 양식(糧食)을 가늠하지만 사회적인 파트너는 될 수 없다.

 

토템인 비인간과의 호혜적인 관계는 포식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토템종은 사회분절의 단순한 시니피에(기의)인 이상 인간과의 호혜적인 관계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를 벗어나면 순수한 토테미즘 시스템은 예외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많은 경우 비인간의 적어도 그 일부와의 애니미즘적인 시스템과 조합되며, 그에 따라 호혜관계를 표할 수 있다. 그러한 사례는 브라질의 보로로족에서 발견된다.

 

토테미즘적인 시스템과 보호 관계의 조합은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의 양식의 상대적인 이분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이분법은 다른 관계양식만큼 명백하지 않다. 보호받는 비인간은 반드시 토템종의 세트의 일부가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토템의 기능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즉 비인간은 사회적인 지위와 관계의 징후로서 사용될 수 있다. 누어족은 이 후자에 대한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누어족은 분절리니지의 개념화에서 특정한 비인간(포유동물, 조류, 파충류, 나무)이 취하는 매우 정통의 토테미즘 시스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회적인 과정과 관계를 소에 의해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에반스-프리차드 1940: 19). 이러한 측면은 의례생활에서 특히 강조된다. 예를 들어 남성들의 입사식에서 각각의 젊은 남성들은 그의 ‘수소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 이름은 이름의 원주인인 특정한 수소를 소유하지 않은 뒤에도 장기간 보유된다. 누어족의 사례에서 소는 보호하기에 적합한 것이며,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의 징후로서 사고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그리고 교환의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의 직접적인 대체물로서 사회화하기에도 적합한 것이다.

 

내추럴리즘의 변이

 

모든 동일화 양식 중에서 내추럴리즘은 분명 서양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표명은 이율배반을 일으키고 유토피아의 영역에 계속 머무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서로를 파트너 등의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물로 상상하는 호혜성의 관계를 구축하기를 바란다 해도 내추럴리즘의 코스몰로지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는 어떤 공통의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 내추럴리즘은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연결된 커뮤니티에 속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 서술적인 역할을 잃지만, 양자가 다른 존재론적 영역에 고정될 때 호혜성의 변증법은 이원론의 무효화라는 불가능한 원망을 표하는 은유에 불과하다. 이런 류의 원망은 철학과 문학의 담론에 광범위하게 표명되어왔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에서) 셸링,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괴테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 (자연의 변증법에서) 엥겔스 혹은 최근의 미셸 세르(Serres 1990) 등의 다양한 대변인이 여러 형식을 통해 말해왔다.

 

포식적 내추럴리즘에 대해서도 그것은 숲의 대부분이 개간을 위해 한꺼번에 제거되었던 중세에 활약한 옛 유럽적 실천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 실천이란 데카르트철학에 의해 정당성을 입증 받았던, 세계의 기계화에 그 표현—기술적 의미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의 표현—을 빌린 실천이다. 그리고 이 실천은 부르주아 사회가 자연 질서의 체현으로서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던 시대에 생산이라는 이름하에 유럽의 역사적 운명으로 그 모습을 탈바꿈했다. 그 상태에서 자연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장식을 두르고 특정한 가축동물과의 관계와 정원의 발전(Thomas 1983)에서 이미 경험한 감수성과 행동방식을 야생종과 자연의 경관으로까지 확장했다. 자연을 초월론적인 객체로 페티쉬화함으로써 (그 통제 방식은 포식적인 자본주의로부터 근대경제의 합리적인 관리로 치환되었을 뿐인데) 환경보호운동은 서양의 코스몰로지의 근거를 되묻기는커녕 오히려 근대 이데올로기에 전형적인 존재론적 이원론을 영속시켜왔다. 그러나 환경운동가가 보여주는 프로세스는 아무리 의미있는 것이라 해도 내추럴리즘의 해체로 향해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범위의 비인간의 생존이 점차 인간에 의한 파괴로부터 보호받도록 되고 있고, 머지 않아 사회적인 규약과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큰고래, 오존층, 남극의 생존조건은 현재 동물원에 있는 야생종과 생물데이터뱅크의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자연은 그 유래를 갖는 정의로부터 멀어져가고 자율적인 발전의 원리에 의한 산물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즉 그러한 올 수밖에 없는 붕괴는 개념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역사의 길고 긴 한 장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결론

 

자연이라는 관념은 그 모호함으로 인해 서양사상의 역사의 건설블록을 이루는 일련의 이분법(자연-문화, 자연-초자연, 자연-예술, 자연-역사, 자연-정신 등)에서 주요한 기둥이 되어왔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Heidegger 1968), 자연은 일련의 반정립적인 개념의 기본용어 이상의 것으로 지속해왔다. 이것들의 모든 변별에서 자연은 대립하는 각각의 개념의 바로 그 특징을 정의하는 하나의 포섭적인 전체성으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자연에 의해 그 개념규정을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많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는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개념을 초월하려는 시도로서 그 존재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 개념을 진압해버리면, 서양의 공적(功績)으로서 철학적인 대 건조물 전체가 너덜너덜하게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지적대변동은 하이데거가 계속해서 비판한 ‘존재(Being)’의 위대한 무익함과 대치하는 장에 우리를 남겨 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가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아직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수많은 문화들에게는 이국적인 우리의 코스몰로지를 변조할 뿐이다. 그렇다면 글로벌리제이션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것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의 철폐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원리로의 회귀도 아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사회적 장치에 의해 인간과 비인간이 더 이상 쾌적하게 관리될 수 없는 혼종성의 세계에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대처하고자 분투함으로써 ‘그들’에게 ‘우리’를 근접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공통의 기반이다.

 

그러한 카드의 절단이 최종적으로 일어날까? 또 그것이 보다 좋은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내가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학에서 인식론적 귀결은 분명 예기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문화의 이분법의 유산인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고찰하는 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 양자를 반정립적인 프로세스로 의도적으로 옮기는 것을 퇴폐시킬 것이다.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성과 물리적 자연을 자율적인 실체로 다루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며, 그리하여 개개의 존재와 집합적인 존재의 구축을 진정 생태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길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존재물들은 자기완결적인 것 혹은 외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든, 인간에게 공작된 것 혹은 인간에게 지각되는 것이든, 유형 혹은 무형이든, 그렇게 구축된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와 정체성을 가진다. 관계와 결부된 사물들에 앞서는 관계방식이 존재한다면, 이 관계들은 그 항을 만들어내는 프로세스 그 자체 속에서 자신을 현세화(現勢化)시킨다. 비이원론적 인류학은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구조현상학이다. 그 속에서 관계들의 로컬한 시스템이—라투르(Latour 1994)와 카론(Callon 1991)이 대칭성의 인류학으로 제창한—유대의 규모와 유형을 통해 서로 다른 기능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라 변환군의 변이로서, 즉 한정된 수의 요소들 간의 호환성과 비호환성에 의해 구조화되는 조합의 세트로서 기술되며 비교된다. 이 요소들 사이에는 인간과 비인간의 객체화의 관계들(Descola 1994b), 범주화의 양식들, 매개의 체계들, 그리고 특정환 환경에 적합시키는 기술적ㆍ지각적 어포던스(affordance: 일종의 행위 유도성)(Gibson 1979)의 유형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자연-문화가 직교하는 낡은 격자(grid)를 떨쳐낸다면, 새로운 다차원적 인류학의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돌도끼와 쿼크, 재배식물과 게놈, 수렵의례와 석유산업은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도 포함하는 관계들의 단일한 세트 내의 다양한 변이로서 이해될 수 있다.

 

 

 

 

Philippe Descola. 1996. Constructing Natures: Symbolic Ecology and Social Practice in Nature and Society: Anthropological Perspective. London & NY: Routeledge.

自然の構築:象徴生態学と社会学実践」『現代思想』2017年3月号(難波美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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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팀 잉골드의 경우

 

 

야나기사와 타미(柳澤田美)

 

 

 

0. 초콜릿과 치즈를 나란히 놓다

 

들뢰즈&가타리가 창출한 매력적인 개념 가운데 ‘도주선’(ligne de fuite)이라는 것이 있다. ‘선’(ligne)이란 우리의 삶 그 자체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무수한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선’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는 다양한 해석의 격자들, 서사, 개념, 존재론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현실을 생산하고 삶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개념을 국가라는 권력의 집중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 사용하며 부모와 자식을 구성원으로 하는 ‘가족’이라는 모델과 이 ‘가족’ 모델에 입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즉 그들이 비판의 칼끝을 겨눈 곳은 주로 정신분석이라는, 담론에 의한 권력의 행사며 또 국가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다양한 권력의 담지자다. 이는 아직까지는 온당하다.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Tim Ingold)는 이 ‘도주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선’(line)이라는 개념을 기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들뢰즈&가타리가 전제한 정신분석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잉골드가 한 사람의 인류학자로서 오리지널한 모색을 전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개념의 응용 자체가 비판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의 독해는 가타리는 물론 적어도 들뢰즈 철학의 큰 테두리에서 일탈하지는 않는다. 잉골드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ㆍ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잇는 노선에 들뢰즈&가타리를 위치짓고, 삶에 관해 그들의 이해를 매우 충실하게 공유한다. 잉골드를 포함하여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이해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것’은 분단할 수 없는 ‘흐름’이자 ‘운동’이며, 이 ‘운동’에는 외부가 없고 또 이 ‘운동’을 잘라 나눈 부분들의 집합으로 다뤄질 수 없다. 이 테제를 반복하는 잉골드는 사상사적으로는 화이트헤드, 베르그송, 들뢰즈를 잇는 계열의 직계임이 분명하다. 그 의미에서 기본도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가 어떤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상의 계열에 잉골드 자신이 참조하고 있는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을 덧붙여도 무방하다.

 

그의 모색이 이채로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학들의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적인 모색을 그 자신의 대담한 직감에 의해 구체적인 사상이나 실천과 결부시키는 그의 비상한 재주 때문이며, 또 그렇게 결부시킴으로써 오리지널한 사색을 스스로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해도 “초콜릿과 치즈”라는 극과 극에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나란히 놓게 된다고 술회한 것처럼,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우스울 정도로 호쾌하게 잉골드는 철학적 사색과 구체적인 사례를 결부시키면서 논의를 전개시켜나간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에서 특히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검토하고, 이 작업을 통해 잉골드의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 잉골드가 이 개념을 어떤 실천으로 구체화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도주선’이라는 개념 자체의 실천적 의의에 대해서도 일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1. 애니믹 온톨로지: 물질과 생명의 불가분성

 

들뢰즈&가타리의 저작과의 만남을 통해 ‘선’이라는 결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잉골드는 그 후 『Lines: A brief history』(2008)를 저술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음악, 보행, 문학, 소묘, 건축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있는 것 그 자체의 궤적이 악보그리기, 교통수단, 인쇄기술, 원근법, 제도법 등의 다양한 제도에 의해 점과 점을 연결하는 고정적인 선이 되면서 그 역동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앞서 나는 잉골드의 독자성은 추상적인 논의를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하는 대담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선’을 단순한 비유로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선’과 결부시켜 풍요로운 선의 세계를 그려내었다. 이러한 ‘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거쳐, 2011년 『Being Alive』라는 논문집을 출간한다. 잉골드는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탐구에 착수한다. 물론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권력기구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도주선을 자각적으로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인류학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가장 유망한 도주선인 이상, 우리는 그가 탐구하는 새로운 인류학의 기술법에서 잉골드에 의한 도주선의 묘사방식의 가이드라인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Being Alive』에서 ‘도주선의 묘사방식’이라는 본고의 테마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재구성해보겠다. 잉골드의 사상은 말하자면 생명=물질의 일원론으로서 유물론이자 철저한 내재주의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정신이 자연이나 물질에 대해 초월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 각각이 생명의 선을 무수하게 도주해나가면서 뒤얽히는 상태로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상을 전제하는 잉골드가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했는가를 미리 서술하면, 무언가를 새롭게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물질에 따른다”(following the material)는 것이다. 잉골드는 이 문구를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의 야금술에 관한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자신의 논문집의 제17장 ‘만들기의 텍스틸리티’(Textility of making)에서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물질에 따른다”는 테제를 검토한 후에 제18장과 에필로그에서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드로잉(drawing)을 논한다.

 

우선 제17장에서 언명한 “사물에 따른다”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확인해보자. 모든 존재자들의 무수한 선들의 일원적으로 뒤얽히는 모습으로 세계를 그리는 잉골드는 서구의 자연과학이 전제로 삼고 또 그 영향 하에 있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다양한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부정한다. 제5장 ‘생명 있는 것을 재고한다, 사고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Rethinking the animate, reanimating thought)에서 잉골드는 우선 비활성(非活性)의 물질과 생명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비판한다. 이러한 서구적인 사고에 의해 미개사회의 ‘애니미즘’은 비활성의 물질 혹은 물질에 생명을 귀속시키는 미신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동시에 이러한 비활성의 물질이라는 이해에 의해, 우리는 환경을 생물이 활동하는 정적인 무대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상식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라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잉골드에 따르면, ‘활성’(animacy)이란 생명과 물질이라고 하는 이원론에 앞서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관계성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또 ‘활성’은 무수하게 도주하는 선들에 의해 그물 세공(meshwork)을 형성한다. 잉골드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애니믹 온톨로지(animic ontology)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바로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운동이 생명의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유보하면서도, “생명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한다. 여기서 잉골드는 인류학자답게 애니믹 온톨로지의 사례로서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의 문화를 가져온다. 이 종족에서 동물의 이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또 북아메리카 평야에서 발견되는 비문에서 태양은 다음과 같은 상형문자로 표현된다(그림 참조).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하늘을 통과하는 움직임의 길”이라는 이해다.

 

그림

 

 

잉골드는 이렇듯 아름다운 사례들에 기초하여 대지든 하늘이든 우리를 휘감는 환경 속에는 활기 없는(inanimate)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움직이고 흐른다고 서술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 유동하는 세계를 관찰할 때 과학자들이 종종 상정하듯이 이 세계로부터 자신들이 분리되어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유동하는 자에 의한 관찰이라는, 행위와 지각을 통한 참여(participation)가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선, 즉 유동의 뒤얽힘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자연과학에도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한 관찰과 기술방법이 요구되고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하면서, 움직이는 흐름으로서 세계를 다루는 데에 능숙한 자로서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를 참조한다.

 

 

2. ‘방심’을 축복하다

 

이처럼 제5장에는 잉골드가 자신의 논문집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전부 담겨 있다. 첫째, 세계란 모든 존재자가 물질로서 유동하고 생성하는 상태에 있다. 둘째, 그 세계는 생성하는 선들의 뒤얽힘, 곧 그물 세공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세계관을 전제로 할 때, 비활성의 물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나 표상을 투영한다는 이해방식은 중지되어야 한다. 넷째, 인간이 세계를 관찰하는 입장에 설 때조차 인간 또한 유동하는 선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되고 관찰자 또한 참여자로서 세계의 흐름의 일부를 이룬다는 새로운 모델과 기술방법이 필요하다. 다섯째, 이 새로운 모델의 존재방식은 화가나 장인 등의 크리에이터에게서 발견된다. 그의 이 주장들은 책의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는데, 예를 들어 첫 번째, 두 번째 문제가 제10장의 ‘날씨 세계’(weather world)에서 다시금 전개된다. 또 세 번째 문제가 각각 소재를 달리 해서 제1장과 제17장에서 다뤄진다.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도주선의 문제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제의 핵심인데, 이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장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제18장과 에필로그의 제19장이다.

 

제5장의 요약 내용처럼 잉골드에게 세계는 무엇보다 유동하는 선들의 뒤얽힘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 관찰자인 인간 측의 이해와 해석에 좌우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이미 선들을 무수하게 도주시키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리 자각한다 해도 우리가 느닷없이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이나 아메리카 선주민처럼 애니믹 온톨로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동물화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제6장에서 더욱 깊게 파고든다.

 

제6장에 등장하는 것은 제임스 깁슨, 마르틴 하이데거, 야콥 폰 윅스퀼,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다. 조금 논의가 복잡하므로 가능한 단순하게 정리해보겠다. 우선 잉골드는 깁슨의 환경이해와 윅스퀼의 환경이해를 비교한다. 깁슨과 윅스퀼은 세계의 ‘의미’를 유기체와 환경과의 관계성 속에 위치짓는다는 점에서는 입장을 같이 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인지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모든 존재자를 관계성의 그물 세공으로서 파악하는 잉골드 또한 이 입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깁슨은 유기체와 환경 속에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지각하고 채용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환경 내의 의미, 더 강하게 표현하면 환경 그 자체의 자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고 잉골드는 비판한다. 이러한 환경의 유기체에 대한 자립성은 결국 매우 서구적인, 곧 생물이 활약하는 고정적인 무대로서의 환경=세계라는 모델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윅스퀼의 ‘환경세계’는 철저하게 관계적인 개념이다.

 

깁슨의 용어에서는 피난처 혹은 석전의 돌 무기는 모두 다듬어서 이용가능하게 된 돌의 특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윅스퀼에게 그것은 해당의 생물이 필요로 함에 따라 바로 그 돌에 주의한다는 행위로부터 돌에 전수된 성질이다. 게는 급할 때 돌을 피난처 삼을 수 있다. 또 개똥지빠귀는 껍질을 부수는 받침으로 돌을 쓸 수 있고, 나아가 사람들이 그것을 던지기 위해 돌을 주워들었을 때 돌은 무기가 된다. 이러한 활동의 외부에서 이 사물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따라서 세계의 특정한 ‘니치’(niche)와는 적합하지 않고 동물 쪽이야말로 기능적인 성질을 자신이 맞부딪히는 사물에 대해 귀속시킴으로써,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성질들을 동물 자신의 정합적인 시스템과 통합함으로써,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 접합시킨다. 이 시스템—동물의 지각과 행위의 회로의 내측에서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을 가리키기 위해 폰 윅스퀼은 환경세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중략)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니치’(niche), 곧 의미장치는 환경 쪽에 있으며 유기체의 힘을 방향 짓는다. 그러나 환경세계는 정반대에 있다. 그것은 환경의 방향으로 향해 있는 유기체 쪽에 있다. 유기체를 제외하면 환경세계는 유기체와 함께 사라진다. (『Being Alive』79-80쪽)

 

그러나 인간에 관해서는 어떠할까? 라고 잉골드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에게만 환경 내의 의미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윅스퀼에 입각하면서서 인간의 특권성을 견지한 하이데거로 잉골드는 향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윅스퀼의 논의에 경의를 품고 참조하면서도 “돌은…무세계적이다. 동물은 세계빈곤적이다. 인간은 세계형성적이다”라고 말했다. 돌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동물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가진다 해도 빈곤한 방식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에 열려 있음에 반해 동물은 환경에는 열려 있지만 세계에는 닫혀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동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환경에 촉발되어 행위를 하는 양태에 대해 “사로잡혀 있다”(benommen/captivated) 혹은 “방심”(Benommenheit/captivation)으로 표현한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다음의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인간 또한 장인처럼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할 때에는 얼핏 ‘방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세계를 가지지 않는’ 동물과,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닫혀 있을 수 있는 인간과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둘째, 하이데거의 환경 이해는 유기체로부터 독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깁슨의 환경이해보다는 양호하지만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는 관점 자체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셋째,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지 않고 생명을 뒤얽힘으로서 다루기 위해서는 동물의 ‘방심’을 하이데거와 달리(아마도 윅스퀼에 입각하여) ‘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의 방심을 축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잉골드는 동물에게 실현되는 ‘방심’이야말로 “용기에 담기지 않고 그 주변을 에두르는 모든 경계를 넘어 흐르는” 리좀 위로 확장해가는 “생명의 개방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쌍방의 외부로부터 관찰된 생태학적 입장도 아니고(깁슨), 유기체 측으로부터 관찰된 현상학적 입장도 아니며(하이데거)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구분에 앞서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방성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선들에 대해 말하는 자로 윅스퀼을 읽어내는 들뢰즈&가타리가 참조된다.

 

생성변화의 선은 그것과 결부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또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생성변화의 선은 점과 점 사이를 빠져나와 중간에서만 맹아를 피울 뿐인가? … 근접하는 점과 떨어져 있는 점 사이로 국한되는 관계에 대해 선은 이 점들을 횡단하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점은 항상 기원이다. 그런데 생성변화의 선은 처음도 끝도 없고 … 생성변화의 선에는 <중간>이 있을 뿐이다. … 생성변화는 항상 <중간>이며, 이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중간>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생성변화는 일(一)도 이(二)도 아니고, 이 둘의 <사이>이며, 이 둘과 수직을 이룬다. … 도주…의 선이다. (『천의 고원』)

 

하이데거는 환경을 의미로 넘쳐나는 것으로 다루며 생명체는 환경으로부터 촉발되도록 환경을 ‘억지 해제하는’, 즉 다양한 자극에 대해 닫혀 있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 인간은 환경을 인식해서 행할 수 있지만 동물은 ‘억지 해제’를 선택하지도 못하며 자각하지도 못한다는 의미에서 ‘빈곤하다’. 잉골드는 여기서 생명체가 이미 포위되어 있음에 ‘열려 있다=억지 해제한다’는 의미에서의 ‘열려진’ 것이 아니고 생명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한 ‘열려’ 있고,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도 포위되거나 갇힐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듯 열려진 선에 의해 이뤄지는 세계는 그물 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핵심은 그것이 네트워크와 같이 점들의 연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들뢰즈의 꿀벌과 난의 예, 그리고 곰과 파리의 예를 들면서 각각의 관계성은 분명 선상 위에 있지만 그것은 양자를 묶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한다”고 서술하고, “만약 이 선들이 관계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사이(between)의 관계가 아니라 따르는(along) 관계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최종적으로 생명을 얽어매는 그물 세공에 대한 논리는 제5장과 동일하다. 제6장은 세계나 환경에 대해 초월적인 위치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정신을 다룬다. 잉골드는 도주선을 유기체의 활기 있는 모습에서 찾아내어 동물의 ‘방심’을 ‘생명에 대해 열린’ 것과 동일시하여 이것을 ‘축복’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는 동물처럼 ‘방심’하는 것을 우리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권유하지 않는다.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동물이 되는 것’(devenir animal)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으며 또 조르주 아감벤의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권태’ 간의 유사성에 관한 논의를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동물이 되어’ ‘방심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는 잉골드 특유의 리얼리즘을 본다. 생명세계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을 언제나 표명하면서도 소박한 실재론자이기도 한 잉골드는 좋든 나쁘든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흐름으로 지각하기 위한 도구적인 방책을 다음과 같이 찾아낸다.

 

이것들의 차시성(此是性, haecceitas)은 우리가 지각하는 무엇이 아니다(what we perceive). 왜냐하면 유동공간의 세계에 지각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함께 지각하는 무엇이다(what we perceive with). 요컨대 환경을 지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물을 회고하는 것도, 고정화된 형태나 배치를 식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물들의—그리고 우리의—진행 중에 형성에 기여하는 물질의 흐름이나 운동에서 그 사물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 (『Being Alive』88쪽)

 

차시성(haecceitas)은 들뢰즈의 개념인데, 여기서 잉골드는 삶을 직조하는 선 더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what we perceive와 what we perceive with의 대비다. 그는 이를 통해 드러나는 ‘대상화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유동을 다루고, 유동과 일체화하는 행동을 중심으로 ‘선을 그리는 방법’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3. 물질에 따르다.

 

‘살아있는 것’을 역동적ㆍ창조적인 흐름으로 다루는 많은 사상가들은 살아있는 것의 발상 형태를 미개사회의 문화, 생명세계, 그리고 예술 속에서 찾아내었다. 들뢰즈&가타리,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베이트슨과 함께 잉골드 또한 이 사상적인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Being Alive의 마지막 파트, 제5부에서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으로 그는 장인이나 예술가를 모델로 한 드로잉론을 제기한다. 이 논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잉골드가 선 그리기를 단순한 은유로서 혹은 추상적인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우리가 유기적인 신체를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선을 그려간다는 것을 우직하게 추구한다는 점이다.

 

잉골드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선을 그린다. 이는 다만 걸으면서 남은 흔적이 선이 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16장에서는 중세의 사본화가, 애버리지니(Aborigine,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의 예술, 그리고 칸딘스키의 화법(畫法)을 사례로, 그림 그리기가 화가의 머릿속의 표상을 물질세계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과 세계를 진행시키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이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고 제17장에서는 화가, 건축가, 장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제까지와 동일한 논리로 전개해간다. 비활성의 물질세계에 이미지를 투영한다는 모델을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의 질료ㆍ형상 개념을 사례로 비판한 다음, ‘만들기’란 “운동 상태에 있는 세계의 살결(texture)을 찾아내어서 그 전개를 덧그림과 함께 발전해가는 어떤 목적에 부합시키면서 그 흐름을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앞서도 서술했던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테제가 인용된다.

 

제17장에서는 본래 작품의 완성 모습, 대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부터 그 이미지를 소급하여 작가라는 행위주체성(agency)의 내적 표상과 의도를 파악한다는 유추를 ‘가설적 추론’(abduction)을 통해 비판한다.

 

예술작품은 대상(object)이 아니라 사물(thing)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모든 창작인의 역할은 그것이 참신할 수 있다고 사전에 마음속에 품은 아이디어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형태를 만드는 소재의 힘과 흐름에 합체하며 그것에 따르는 것이다. 작품은 관람자를 예술가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관람자는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모습을 작품과 함께 보는 것이며(to look with it as it unfolds in the world), 그 배후에 작품이라는 최종형태를 일으킨 원래의 의도를 독해하는 것이 아니다. (『Being Alive』216쪽)

 

어떻게 ‘보는/관람하는’ 것이어야 할까? 코유콘족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며 장인전문가나 예술가도 아닌 우리가 ‘선 그리기’ 전에 미리 이 관점의 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 앞 절의 마지막에서도 확인했다시피 우선은 ‘대상’(object)으로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unfold라는 말에서 표현되듯이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열려진 모습을 그에 수반하는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 unfold라는 말이 염두에 두는 것은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의 논의다. 봄은 유동하는 세계의 조직을 이루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면서 은폐된 질서가 전개되는(unfold) 세계를 내장질서(implicate order)로 부르고, 표상된(imagined) 질서가 전개된 세계를 외장질서(explicate order)로 부른다. 그리고 물리학이 내장질서를 기술하고자 한다면, 항상 실제의 양자(量子)의 움직임을 이해하면서 손상시킨다는 점을 봄은 지적한다. 봄은 관찰자를 포함한 운동 전체를 기술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잉골드는 봄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잉골드는 사물의 묘사(description)를 논할 때 봄의 두 질서의 대비를 사용한다. 내장질서와 외장질서는 단지 대립적으로 다뤄져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 내장질서를 다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잉골드는 말한다. 우리가 주시하는 어떤 현상에도 그 속에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어 있다고. 본래 현상이란 관계성 전체가 전개할 때 그 전개의 순간적인 결과다. 따라서 어떤 현상 속에서도 이 내장질서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결국 잉골드는 유동하는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논한다. 대상으로서 보지 않고 그 전개에 수반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관점은 관찰자적으로 맹목적인 것이라고 잉골드는 단언한다. 이러한 관찰방법을 저지하는 방법으로서 잉골드가 제안한 것이 바로 ‘소묘하기’(drawing)다. 그리기 전에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묘사함으로써 보는 것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옥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사생 화가를 예로 든다. 화가가 이젤을 세우고 옥외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캔버스 위에 선으로 그린다.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너무나도 풍부한 세계,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와 마주하여 그것들을 캔버스 속에 종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분적인 이미지의 단편을 종합함으로써 실현되지 않는다. 앞서 제17장의 요약에서 다루었듯이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하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포함한 복수의 존재자들에 의해 생겨나는 운동을 묶어내야만 실현될 수 있다. 나아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유머러스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잉골드는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곁눈질’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대화(dialogue)에 참가하는 태도에 뿌리박힌 상대적인 태도(comparative attitude)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드로잉하는 화가의 눈의 지각과 손의 움직임, 그리고 손의 그 움직임의 흔적은 그대로 캔버스 위에 선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그리기 방식은 보는 것을 대상화한, 즉 전치사 of의 관계가 아니라 with 혹은 along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소묘하는 화가가 붓이나 목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옥외의 빛과 공기와 호흡하며 종종 자세를 바꿔가면서 손과 팔목 등의 자기 자신의 신체 전체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는 바로 복수의 유동하는 것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자신의 신체를 조정하면서 소묘한다. 여기서 행해지는 조정은 이미 손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캔버스 위의 선으로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묘사(description)와 관찰(observation)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화의 상황에 놓인다고 잉골드는 말한다.

 

이와 같이 잉골드의 논의에 의하면, 선으로 그리는/소묘하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 의해 움직이는 흐름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보는 것’과 ‘그리는 것’의 양자가 일거에 실현된다. 잉골드에게는 이러한 관찰과 기술의 실천이야말로 인류학(anthropology)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예외적인 사례와 이질적인 것을 사상해서 일반화하여 법칙을 세우는 자연과학과는 대조적으로, 또 현장으로부터 퇴각하려는 이른바 안락의자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이질적인 것’(the unfamiliar)에 더욱 근접해서 그것을 이질적인 그대로 묶어나가며 “이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 그것이 잉골드가 제창하는 인류학이다. 그러나 본고의 서두에서 논했다시피 인류학이 서구적 사고 혹은 근대 과학적 사고에 억압된 우리의 삶을 적절하게 고쳐나가는 기술이라면 바로 이것이 잉골드가 말하는 ‘도주선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소묘하는 태도로 살펴보자. 분명 새롭게 ‘보일’ 것이다. 즉 그것은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보임’이다. 이 ‘보임’ 속에서 삶의 움직임의 모든 것은 도주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잉골드가 상정하는 존재론에서 살아있는 것들과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도주선을 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서구적 존재론, 물질관, 세계관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한 제도들에 의해 삶의 역동성이 억압되어 왔다. 예를 들어 차보다 달리기가 좋다, 키보드보다 필기가 좋다는 잉골드의 지적은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처방전과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 속에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다양한 사고와 습관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는 ‘선’을 그리는 것이다. 단지 내일부터 차를 타지 않겠다거나 컴퓨터를 버리겠다거나 하는 이외에도 적극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방법의 전개는 잉골드의 텍스트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Being Alive』의 제13장 ‘분류에 대항하는 이야기’(Stories against classification)에서 ‘지식’(knowledge)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다뤄보자. 이 문제의 도식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실체화하고 공정하게 다루는 관점 대신 운동으로서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잉골드는 전달이나 학습을 독립적인 지식을 운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소위 ‘운송’ 모델을 비판한다. 여기서 잉골드가 염두에 두는 것은 문화의 전달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전달도 포함하며, 그 어느 쪽도 어떤 정보가 개체로부터 개체로 수직적으로 ‘운송’된다는 계보학 모델이 채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계보학 모델은 분류라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며 분류 또한 지식이 개별적으로 분할되어 독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유전자를 예로 들어보면, 눈 모양의 유전자, 머리털 색깔의 유전자로 분할되어 분류된다. 이러한 지식을 분할ㆍ독립을 통해 다루는 이해에 대해 잉골드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를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분류에서 개개의 사상은 기능이나 그 밖의 것과의 접촉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성질에 의해 ‘무언가’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모든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의해 ‘무언가’가 제시되며, 그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들과의 관계만으로는 그것이 ‘무언가’인지를 알 수 없다. 잉골드는 여기서 다시금 봄을 가지고 와 분류를 외장질서에, 이야기를 내장질서에 대응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에 의한 지식의 전달은 ‘운송’이 아니다. 이야기된 지식은 실제로 그 청자들의 나아감에 의해 비로소 전달된다. 잉골드는 이러한 이야기에서의 지식의 전달을 ‘운송’(transport)과 대비하여 ‘도주여행’(wayfaring)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을 계보학적 모델을 따라 선조의 유산으로서 개개가 소유하게 되는 유전적인 성질과 같은 부류로 간주할 수 없다. 분명 숙련자는 미숙련자보다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머릿속에 담긴 학습된 표상의 증가로서의 내적 내용물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에 있는 단서를 보다 잘 포착하는 감수성과 판단과 정직함에 기초하여 이용 가능한 단서에 보다 잘 반응할 수 있는 우수한 자질에 있다. 말하자면 이 차이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있다. 잘 알고 있는 자는 말할(tell) 수 있다. 그들이 세계의 서사를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의 지각적 깨달음을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는 것은 주위의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알면 알수록 지각의 깊이와 명확함이 더욱 확장된다. 요컨대 말하기는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뒤에서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경로를 그리는 것이다. … 대체로 이야기는 의미가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사람들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듣는 쪽이 자신의 삶의 역사의 맥락 속에 그 이야기를 위치짓는 것을 통해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이야기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은 말해진 다음일 수 있다. 그때 당신 자신은 이야기가 관계하는 것과 똑같은 경로를 따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이야기는 사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경로를 알려준다. 분명 볼로시노프(Volosinov)가 언어에 대해 논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받은 재발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는 지형을 통해 흔적을 더듬게 된다. (『Being Alive』162쪽)

 

이야기하기가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그 뒤를 더듬을 수 있는 길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삶의 흐름이 수반하는 다양한 삶의 행동 또한 말해짐에 의해 이미 도주선에 들어선 것이며 게다가 다른 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여행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잉골드는 자신의 사례들에 입각해서 그것은 산보이기도 하며 연날리기이고 하다고 말한다. 어떤 일상적인 행동 또한 이러한 도주선의 길에 수반하여 합류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다양한 사물들이 뒤얽혀 살아가는 세계의 흐름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동물처럼 방심할 수는 없다. 또 숙련된 장인처럼 지금 당장 살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을 수는 있다. 앞서의 인용에서 잉골드가 ‘아는 것’을 지각의 명료함과 깊이와 결부시켰듯이, 또 이제까지 여러 번 확인했듯이, 우리는 세계 이해에 대한 습관화된 착오를 그 때마다 정정할 수 있도록 세계의 대상화하지 않는 지각방식을 무엇보다도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지각의 훈련 또한 ‘선 그리기’라는 태도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세계 속에 선을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4. 착지하는 도주선

 

지식이란 타자들이 더듬을 수 있는 길이며 그것이 이야기됨에 따라 타자들을 안내하고 또 그 안내에 따르는 타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Being Alive』의 다른 장들의 내용과 합치해서 사고할 때에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미개사회의 문화, 자연현상, 예술, 공예, 건축과 같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살아가는 것’의 흔적인 도주선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잉골드 스스로가 이 도주선을 더듬어 찾아내고 나아가 다양한 우리의 사고의 제약에서 빠져나오면서 도주선을 그리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잉골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도주선의 길을 안내해준다.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은 들뢰즈&가타리가 가진 마이너 지향을 불식시킨 결과,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어떤 부류의 회고적인 보수주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사상적으로는 생명을 절대시하는 낙관적인 낭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의 의의는 이 지구에서, 이 스케일에서, 이 신체에서, 이 중력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실천 가능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그 의미에서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는 들뢰즈&가타리와 같이 사회적 규범을 돌파해가는 경쾌함을 결여한다 해도, 일상적으로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경험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경험의 깊이 속으로 바람구멍을 내기 위한 유효한 도구를 풍부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나의 생각이다.

 

 

 

柳澤田美 「どのように線を描けばよいのか」 『現代思想』 2017年3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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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7년 3월 임시증간호에서 '인류학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최근 인류학의 이론적 동향과 현대철학과 교차되는 지점들을 다루고 있다. 1년전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행방'이라는 주제로 다뤘던 권호보다 훨씬 내용이 깊다. 그 사이에도 이론적으로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호에서 재밌는 글들을 골라 번역해올리겠다. 

 

다음의 글은 실재론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상통하는 측면으로서 "비홀리즘적 전회"를 논하고 있다. 이 글은 그 둘의 가교로서 메릴린 스트래선의 이론을 가져오는데, 가교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난해한 스트래선의 문화이론 자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존재론적 전회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학자 중 한 사람인 스트래선의 소개글로도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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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ㆍ홀리즘적 전회: 인류학에서 현대철학으로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2016년 11월, 〈사물 그 자체—오늘날의 형이상학과 실재론〉(Choses en soi: Métaphysique et réalisme aujourd’hui)이라는 제목의 학술회의가 엠마누엘 알로아(Emmanuel Alloa)와 엘리 듀링(Elie During)의 주관 하에 파리 서낭테르(西Nanterre)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퀑탱 메이야수,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패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등 쟁쟁한 학자들이 참가한 이 모임이 어떠했는지를 말하기에는 현시점에서 정보가 충분치 않다.

 

그러나 공식사이트에 게재한 취지문에 “어떤 이들은 사물의 상호객체성을 이론화하여 새로운 코스몰로지의 길을 열고자 노력하고, 다른 이들은 이를테면 <다자연주의>의 퍼스펙티브와 함께 민족지 혹은 문화인류학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고 한 것처럼, 사물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철학의 21세기의 경향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컬리지(Goldsmiths college)에서 열린 학술회의가 사변적실재론의 조류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사변적실재론으로 세상의 이목을 모았던 브라시에와 메이야수의 이름이 있는 반면 하만과 그랜트의 이름이 없고 그 대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 마니글리에라는 인류학자 혹은 인류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포스트구조주의를 넘어서 철학을 갱신하고자 하는 운동을 앵글로색슨권으로부터 프랑스로 옮기려는 의도를 가진 모임이었음은 분명하다.

 

하만과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투르는 종종 공저를 발표했는데,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하만 주변과 적극적으로 손을 맞잡았다거나 의견교환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알로아와 듀링이 공동주관한 이 학술회의는 바로 이러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필자는 2015년에 듀링 씨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건축가인 카라사와 유우스케(柄沢祐輔)와 함께 약 네 시간에 걸쳐 환담을 나누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복수의 존재론(ontology)를 다루는 인류학의 최근 경향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교육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차분하지 않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동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현대사상의 갱신이라는 기획을 둘러싸고 앵글로색슨권이 선취한 정세를 뒤집을 유력한 지원군으로서 인류학의 온톨로지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2007년에 열린 학술회의는 결과적으로 영미와 유럽대륙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의 사상운동의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프랑스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영역의 우수한 학자들에 의해 확인받고자 했다는 것이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가 개화한 바로 그 곳에서 새로운 세대가 낡은 사조를 청산하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현대 철학은 전회를 하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홀리즘을 어떻게 초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오늘날의 사상을 다양하게 모색하려는 것이다. 인류학이 현대사상에 제시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홀리즘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비베이로스의 퍼스펙티브주의, 복수의 대립적인 이항 조합과 그 변화에 의해 형성되는 데스콜라의 네 유형, 그 자체의 역할을 변환하여 집단과 개인, 전체와 부분, 객체와 주체의 위치를 가환(可換)하는 다양한 ‘도구’에 관한 스트래선의 민족지 등은 모두 대립적인 이항 속에서 상호 위치의 교체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항으로 부상해온 이 경향이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방법론과 비교하면 과연 얼마나 다르며 그리고 왜 그것이 유망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은 아직까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측면에서 이론상의 분석을 시도하며, 그와 더불어 작년 『현대사상』의 인류학특집(「인류학의 행방」)에서 검토한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최근사상인 간(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라는 구상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1. 홀리즘을 탈구시키다

 

먼저 오늘날의 영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의 한 사람인 메릴린 스트래선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저작인 『부분적인 연결』(Partial Connections)이 제시하는 것은 전체성과 부분의 관계의 변경이다. 특히 민족지 연구에서 어떤 집단이나 요소들의 집합이 ‘부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 포섭하는 전체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연결에 의한 것임을 이 책에서 그녀는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부분을 '부분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 간에 일방향적인 위계(hierarchy)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민족지의 대상은 조사의 스케일이 작든 크든 마찬가지의 치밀함과 복잡함을 가질 수 있다.

 

통문화적인 비교에 관심이 있는 인류학자가 스케일 혹은 스케일 상의 몇몇 지점에서 [그 때마다] 상이한 레벨을 그 혹은 그녀의 도식에 도입할 수 있는 것은 비교나 차이화를 상대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인 의미에서 파푸아뉴기니의 사회들에서 하겐과 기미의 차이는 고지대와 저지대의 차이나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차이와 똑같이 중요하다.

 

복수의 문화를 횡단하는 비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차이화와 비교 그 자체의 ‘상대적인 억압’ 때문이기도 하다고 스트래선은 말한다. —문화들의 차이를 표면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문화들에 얽힌 정보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는데, 무제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문화의 특징 그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여하간 어떤 억압 하에서 그것들을 조망해야 하며, 그에 의해 치밀한 비교도 가능하다. 따라서 예를 들어 하겐과 기미라는 뉴기니의 지역들 간의 비교가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와 같은 큰 지역 간의 비교보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유명한 ‘칸토어의 먼지’처럼 작은 스케일의 대상도 큰 스케일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치밀함과 농밀함을 가질 수 있다. 그 지역들은 아무리 세분화된다 해도 전체이며 부분은 그 자체 또한 전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선 소박하게 생각하면 부분의 총화로서 전체가 구성된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발견되는 부분의 구성물로 전체를 환원해버리는 발상이다. 이에 반해 전체가 부분들을 뛰어넘는 순간 비로소 전체의 부분들이 성립된다는 입장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홀리즘적인 전체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이라고 불러야 한다. 예를 들어 “뒤늦게 출발한 아킬레스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역설에서 지속하는 전체여야 하는 아킬레스의 운동을 공간의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 패러독스의 원인이라고 할 때, 패러독스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지속=전체다.

 

이때 전체와 부분은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한편으로 지속=전체가 있다는 것에서 부분들이 산출된다. 패러독스를 예로 들면, 부분들끼리는 거꾸로 선 원추형의 각 절단면마다 축약의 정도를 바꿔가며 병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분화시키는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속=전체에 의해 이끌린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배반하며 배반하기 때문에 상호 성립하고 생성된다. 홀리즘은 이러한 양극의 차이를 끝까지 중시하는 입장이다.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épétiton)에서 들뢰즈 또한 베르그송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알랭 바디우가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홀리즘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홀리즘적인 경향에 대해서 그는 말년에 라캉이론을 도입한다거나 과타리와 제휴해서 탈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홀리즘을 기피할 목적으로 이론을 모색하면서 전체와 부분을 배반적이지 않도록 다루는 방법론을 확립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현재 존재론적 전회를 제기하는 인류학에서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관계 그 자체를 직접 재고함으로써 홀리즘을 무효화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를테면 스트래선처럼 인류학에서 포스트모던 비평(포스트콜로니얼 비평)에 대한 반론이라는 형태로 매우 명료하면서 자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2. ‘봉지에 넣기’(Ensachage)로서의 세계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부분적인 연결』에서 스트래선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민족지의 소재가 스케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치밀한 농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본래 ‘부분들을 넘어서는 원인으로서의 전체’라는 논점을 처음부터 무시한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해 후자가 전자로 포섭되는 관계로 다루는 서양적 및 메레올로지(Mereology)적인 전체/부분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은 메로그래픽(Merographic)한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一)과 이(二)의 관계에 대해 이(二)에 일(一)이 포섭되어 이(二)가 분할됨으로써 일(一)이 생겨난다는 사고에는 계층성이 있지만, “일(一)은 그 두 배가 된 이(二)를 포함한 것이며, 이(二)는 이(二)의 반인 일(一)을 분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각각의 측면에서 ‘상호 부분으로서의 관계’ 또한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지 연구에서는 그 대상의 “어느 쪽을 어느 쪽의 부분으로 보는가?”라는 퍼스펙티브의 상호 전환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이뤄질 때, 어느 한 부분과 다른 한 부분은 각각 상호포섭적으로 된다.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의료인류학 분야에서 행위자 네트워크이론(ANT)을 효과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안네마리에 몰(Annemarie Mol)에게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다(多)로서의 신체 The Body multiple』). 라투르가 ANT를 이론화하면서 참조한 미셸 세르는 무엇보다 이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몰에 시사점을 던져준 것 같다. 본래 세르의 강의 수강자이기도 했던 몰이 세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포섭관계의 개념의 극복이라는 주제다. 몰은 여기서 ‘상자에 넣기’(Emboîtement)와 ‘봉지에 넣기’(Ensachage)에 관한 유명한 세르의 비유를 가지고 들어온다.

 

세르는 우리의 사고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단순한 객체물(Things)을 즐겨 주시한다. (중략) 그가 언급하는 객체 중 하나는 상자다. 우리는 대체로 객체를 추이적(transitive)으로 상호 관여하는 고형의 상자와 같은 것으로 다룬다. 어느 한 상자가 다른 상자보다 큰지 작은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약 상자가 크다면 그보다 작은 상자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고 만약 상자가 작다면 그보다 큰 상자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세르는 이러한 추이적(transitive)인 포섭관계를 마트료시카(Matryoshka)[러시아목제인형]의 겹쳐 쌓이는 상태라고도 말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부분과 그것을 포함하는 더 큰 전체와의 비가역적인 관계가 있다. 나아가 이것은 포섭적인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이 단계적으로 분기해가는 수목형의 구조이기도 하다. 이 모델에서 포섭적인 큰 것은 더 작은 부분적인 것을 병존적으로 연결하는 매체가 되며 부분적인 것은 비가역적인 계층을 거슬러 분기해간다. 서구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답습한, 하나인 것 곧 Ens로부터 세계가 뻗어나가는 과정을 그려낸 ‘포르피리오스의 나무’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이러한 의미에서 큰 것 혹은 전체가 실체의 개념과 결부되는 경향이 강하고 또 그 속에서 전체와 부분의 배반적인 역할분담이 끝없이 지속되면서 분류가 이뤄진다. 이때 이러한 배반성을 동적인 과정으로 다루어 전체 쪽이 그 이항성의 표지를 달아주고 갱신하는 동인(動因)이 되어 다양한 부분이 분기해간다는 바로 그 생각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다.

 

이 구조에서 부분과 부분은 상호 괴리해가는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은 전체로서의 보편적인 것에 대해 어디까지나 배반적으로 뒷걸음쳐갈 뿐이다. 이에 대해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가 서로 만나 또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서로를 부분으로 포함해서 합쳐지는 상황(메로그래픽으로 상호포섭적인 국면)이 있다고 한다면, 다양한 개별적인 것 속에도 매체적인 기능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체가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물(個物),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일 것이다. 홀리즘적인 사고에서 실체화되는 어떤 것과 달리, 이러한 매체=사물을 전면에 등장시키려는 것이 스트래선이나 몰이 가진 것과 같은 오늘날의 인류학의 문제의식이다.

 

다음으로 앞서 서술한 마트료시카적인 구조(추이적인 관계)에 대해 세르가 제시한 <봉지>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파란 봉지 안에 노란 봉지를 집어넣었다 해도 그 노랑 봉지를 꺼내어 펴보면 이번에는 역으로 파란 봉지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 이러한 상호적 포섭으로 세계를 생각하는 것. —물론 추이적인 관계가 있어서 좋다. 추이적인 관계를 집어넣듯이 ‘전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비홀리즘적인 발상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서로를 <봉지에 넣기>로 포섭할 때, 포섭된 부분들로서의 봉지는 주름처럼 접힌다. 세르의 <봉지에 넣기>에는 물론 모나돌로지(monadologie, 單子論)적인 다원론의 함의가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는 부분이나 매체는 각각에 개별적인 것으로, 전체로 향하는 비가역적이고 추이적인 과정에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3. 복수의 매체와 비(非)ㆍ홀리즘

 

이러한 대상의 모델만을 예로 들면, 부분이나 매체가 각기 다른 양태로 나타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느슨하게 전체를 형성해가는 구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평이한 이미지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본래 위계를 형성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이미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포섭이나 스케일의 문제가 스트래선에게 어떻게 포스트콜로니얼 비평과 ‘성찰 인류학’(reflective anthropology)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면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인류학인 ‘성찰 인류학’은 그 진지함으로 인해 민족지를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미완결적인 것으로 제시해왔다(「세계시스템의 단편화」로 이어져왔다). 그 속에서 특권적인 화자로서 ‘현장연구자’가 일방적으로 이문화(異文化)를 대변한다는 구래의 접근법은 벌써 폐기되었다. ‘성찰 인류학’의 화자는 ‘이문화’를 여행하는 중에 무언가의 변화를 꿈꾸고 ‘그 자신의’ 사회로 귀환하는 ‘여행자’이며, 이 ‘여행자’를 통해 복수의 문화가 중층화된다. 문화들을 단편화하며 다양한 부분들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줄줄이 엮는 이 ‘여행자’의 존재인 것이다.

 

‘여행자’는 어떤 문화의 특권적인 ‘대변자’일 수 없는 만큼, 그 부분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매체다. 특권적인 대변자=화자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들을 중층화시켜 다뤄야만 한다는 이 발상은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텍스트론과도 상통하며, 그 민족지가 미완결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에 대해 텍스트가 열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정한 부분으로서의 문화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순수한 매체가 된 ‘여행자’는 부분들을 산출하기 위해 부분들과 배반적이어야 하는 특별하고 유일한 매체며 실제로 바로 그것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에서의 전체=매체다. ‘여행자’는 확실히 어떤 부분=문화의 대변자라는 의미에서 익명화된 플랫의 존재인데, 그 자신을 부분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면서 문화들을 단편해가는 유일한 주체다. 그리고 또 ‘여행자’와 문화들 사이에는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 추이적인 관계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스트래선이 시도한 것은 문화들이 서로에게 부분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매체 그 자체를 이러한 ‘유일한 주체’로 다루지 않는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주목한 것은 어떤 문화집단을 연결하면서 다른 문화집단과도 부분적으로 연결될 정도로 상이한 대상적인 매체=사물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도구나 사물은 피리, 가방, 가면, 가발 등이며, 때로는 특정한 의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구=사물이 부분적인 연결이 되는 것은 그에 대해 어느 한 부족이 갖는 특유의 의미가 다른 부족과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겐의 남자들이 오락으로 부는 피리는 다른 곳에서는 남자들의 오두막 안에 자루에 담겨있거나 소년 입사자들을 위압하는 도구인 성스러운 기다란 악기로 다뤄진다. 조심스럽게 말해도 연결은 부분적이다. 연결이 부분적인 것은 피리의 사용법에 [일관된] 접근법을 만들기 위한 기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환기해야 할까? 위압에 사용되는 피리의 유비물을 하겐의 남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득을 위한 말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하겐의 오락을 위한 악기의 유비물을 기미의 소문이나 농담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매체로서 사물=도구는 복수의 문화를 연결하면서도 그 문화들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받으며, 그 용도나 의미부여에는 일관된 접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한 부족에서 오락을 위해 부는 피리가 다른 부족에서는 소년들을 위압하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그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물=도구를 빈번하게 차용한다.

 

다양한 부족들을 듬성듬성 연결하는 이러한 사물=도구는 각각의 사회집단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는 사물=도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각기 다른 다양한 사물=도구가 그러한 기능을 맡게 된다. 재귀인류학에서 ‘여행자’라는 주체가 결여태로서 홀리즘의 불변의 역할을 맡았음을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교차교환

 

앞서 서술한 것처럼 스트래선이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역할을 가진 사물=도구며 그로부터 사람들이 분명하게 만들어내는 관계들 그 자체다. 또 그러한 관계들을 알리기 위한 연행(performance)도 그것들을 둘러싸고 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들과 연행에 대해 스트래선은 지도(figure) 혹은 이미지로 말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적극적 및 연쇄적으로 점차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생성해나간다. 이 이미지의 반전은 한 이미지를 지면으로 삼으면서 그로부터 다른 이미지, 즉 지도가 “떼어내지”듯이 만들어진다. 이 속에서 지면과 지도의 역할은 끊임없이 반전된다.

 

지도(figure)와 지면(ground)의 반전에 의해 지면이 잠재적인 지도가 되기 때문에, 이 반전의 움직임은 지면에서 “떼어내진” 지도가 지면에 덧붙여진 지도가 아님을 당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물론 그 지도들이 단편인 탓도 아니고 그 속에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있는 탓도 아니다. 오히려 지도와 지면은 두 차원으로 기능한다. 그것들은 스케일을 스스로 만들어낸다(self-scaling). 본래 두 퍼스펙티브가 아니고, 지면은 또 하나의 지도이며 지도는 또 하나의 지면이기도 한 것처럼 하나의 퍼스펙티브가 두 갈래로 조망되는 것이다. 다른 쪽에 대한 관계에서는 어느 쪽도 바꾸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차원들이 전체화되도록 구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도구=사물은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의 배치(도) 곧 이미지를 스스로 가진다는 것인데, 이에 기초하여 다른 관계들의 배치(도)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물=도구에는 이러한 배치(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지도는 다양한 사물=도구를 관계짓고 결부시키는 매체지만 동시에 사물=도구는 상이한 배치가 겹쳐 만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한 배치(도)로부터 다른 배치(도)가 산출될 때 맨 처음의 배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물=도구는 종종 주변적인 역할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복수의 배치를 결부시키는 매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물=도구이다. 다양한 배치로 회수되지 않는 사물=도구의 선재성(先在性)이 새로운 배치(지도, 이미지)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는 국면에서 이렇게 노출된다.

 

지도가 다른 지도의 부분(단편)으로서 회수되어 가는 추이적인 전체화에서는 다만 지도만이 포섭적인 매체로 상정된다. 이것은 관계주의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또 한 사물=도구에 다양한 배치가 단지 덧붙여지기만 한다면, 그 경우는 사물=도구만이 매체가 된다. 이것은 페티시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들은 부분들의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는 것(그것이 관계 그 자체인가, 사물인가라는 차이가 있다 해도)의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확장이나 전체화의 프로세스 자체는 단선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양극이 매체가 되며, 나아가 그 쌍방이 점차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간다는 스트래선의 모델에서는 확장의 프로세스 그 자체가 반복적으로 단절(절단)되며 사물을 매체로 함에 따라 복선화하며 또 배치(도)도 어긋남으로써 사물도 대체되어 간다. 홀리즘은 이러한 조작을 거쳐 마침내 회피된다. 성찰 인류학에서 매체로서의 ‘여행자’는 동일인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들이 상대화되어 다뤄지는 것인데, 실제로는 사물=도구로서의 매체가 복수화될 필요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도와 지도도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상호포섭이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며 또 그에 의해 배치(도)와 배치(도)가 상호포섭하게 된다.

 

 

 

5. 정교화(Elaboration)와 창조

 

도구=사물에 관계들의 배치가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교차교환적인 왕복에서 도구=사물이 매체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왕복에서 어느 한 지도로부터 다른 지도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멜라네시아 혹은 파푸아뉴기니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조작은 창조행위이기도 했다. — 스트래선에 의하면, 그것은 관계들의 정교화(Elaboration)하는 행위이며, 관계의 증대(전체화)로서는 오히려 배치의 재독해로서 정교화라는 특수한 사건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물과 배치(도)의 상호포섭과 왕복을 통해 단절을 낳으면서 또 연결해가는 세계는 이러한 창조행위와 더불어 스스로를 개시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아직 분명해지지 않은 잔여의 부분(말하자면 지면 그 자체)도 그러한 운동의 배경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시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배치(도)는 다양하게 단절되며 다른 배치(도)들 사이에서 관계를 반전시키는데, 본래 이러한 상호포섭과 단절이라고 하는 복수의 배치(도)에 의해 직조되는 메타적인 관계 그 자체가 사물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전통에 은유적인 균열을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의 표면을 자른다. 또 그들은 개인을 은유적으로 전도시켜 문화적 기원(roots)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대신에 문자 그대로 나무뿌리를 뽑아 거꾸로 세워 나무줄기가 항상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리터럴리즘(直解主義, literalism)을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절단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다. 남자들과 나무와 정령과 피리와 여자들과 카누 모두가 서로의 아날로그로 간주될 때, 그리고 완토와트(Wantoat)에서와 같이 나무를 쓰러뜨려 광장 중앙에 끌고 왔을 때 사람들은 나무를 한 사람의 남자의 이미지로서 숲에서 떼어낸 것이다.

 

“떼어낸” 사물들은 사물과 지도의 상호교섭, 지도(이미지)와 지도(이미지)의 상호교섭, 그리고 그것들 간의 절단이라고 하는 앞서 서술한 관계, 그러한 사건 그 자체를 선취(Prefigure)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직조된 관계(지도)는 여기서는 이미 이중화되어 있으며 겹쳐 쌓이게 된다. 관계들의 매체 혹은 메타적인 관계는 거대한 포락선(包絡線, 엔빌로우프 곡선)을 그리면서도 다시금 사물 속에 차곡차곡 쌓이듯이 포섭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사물과 관계(도)의 양극을 어디까지나 가역적인 것으로서 다루고자 하는 의지며, 그러함으로써 비홀리즘적ㆍ비서구적인 부분들의 연결에 의해 직조되며 복선적으로 겹쳐 쌓이는 세계를 스스로 정교화(Elaboration)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세계창조에 대한 의지다.

 

 

 

6. 선재하는 사물, 복수의 프로세스

 

스트래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수법과 문제의식을 지금 다시 한 번 일반적인 형태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물과 관계(도)를 상호 포섭적이고 가역적인 것으로 다룬다. ② 사물과 관계(도)를 그것들이 서로를 포섭하면서 매개하는 운동 속에서 복수화한다. ③ 관계(도)와 관계(도) 또한 각각 사물을 포함해가면서 상호포섭적인 것이 된다. ④ 이 조작들, 메타적인 관계를 ‘내재시키는’ 사물을 ‘떼어내고’ 그것에 착목한다. ⑤ 거기서 나타난 사물과 지도를 연마=전개(Elaboration)하면서 점차 변주해간다(고정화되지 않으면서 복수화한다).

 

결국 사물(객체)을 축으로 복수성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복수성을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생각하는 사고는 홀리즘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고다. 왜 여기서 사물(객체)과 그것이 낳는 관계들의 배치, 또 창조행위라고 하는 일련의 주제에 특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첫 번째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사물(객체)이 성립할 때, 숲에서 나무를 ‘떼어낼’ 때, 그 성립은 무엇보다 단적이며 일회적이다. 그러나 그 사물(객체)이 어떤 배치 속에 놓일 때, 그 존재방식은 복수적일 수 있다. 사물이 창조된 행위와 다양한 배치(도)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수적인 낙차가 존재한다.

 

본래 홀리즘이란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다수성이나 부분들을 생각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 다수성과 단일성의 문제, 다(多)와 일(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때 다수성은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회수되어(혹은 그 과정으로 사고되어) 실제로는 과정 그 자체는 끝난 것이 아니고 열려진 것으로만 사고되며, 다수성 그 자체도 이미 회수되지 못하는—따라서 프로세스의 단일성도 실제로는 완결되지 않는다— 여기에 홀리즘적인 구조의 난점이 있다. 다수성은 그 속에서 회수 불가능한 잉여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회수 불가능한 잉여는 또 객체의 문제로도 고찰된다. 예를 들어 칸트에서 보이듯이, 초월론적인 통각이 현상들을 다수성으로 정합해서 총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해도 물 자체가 그 속에 회수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객(主客)의 문제이기도 하며, 나아가 앞서의 일(一)과 다(多)의 문제가 “완결되지 않고” “열린” 그대로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여기서의 주체도 객체도 여전히 프로세스적이며 단독의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Ancestral) 세계에 대한 언명을 사람들은 과연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적인 입장까지 포함한 철학이 주객의 상관관계로만 대상세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메이야수는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 또한 홀리즘적인 발상의 권역을 20세기까지의 사상이 벗어나지 못했음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주객의 문제와 일대다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상관주의적 및 프로세스적, 홀리즘적인 해결이 산발적으로 주어질 따름이었다. 나아가 그 결과로서 주체와 객체, 일대다의 어느 쪽도 개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태에 머물고 만 것이다.

 

쌍을 이루는 복수의 문제가 병렬적, 아날로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물(객체)과 그 ‘떼어내짐’, 창조행위라는 관점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렇게 떼어내져 창조된 사물(객체)이 단적으로 현전하게 될 때, 그것이 나타내는 관계의 배치(도), 그 사물=도구의 역할은 복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로 사물(객체)과 그에 관한 어떤 관계를 그려내는 주체 혹은 다른 사물(객체)이라는 주제에 복수성(다수성)의 주제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일대다 관계는 창조행위(조작행위)를 통해 주객관계와 나선형으로 조합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이때 다수성, 주체, 잉여, 단일성, 객체라고 하는 요소들은 홀리즘적인 모델과 버선 뒤집듯이 대칭적인 존재방식으로 조합된다. 사물(객체)은 그 자체로 ‘하나인 것’이지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역할, 그것에 관해 묘사되는 관계의 배치(도)와 주체는 복수적, 즉 다수다. —통상의 상관주의적인 모델처럼, 총합하는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다수성으로서의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객관계의 프로세스는 이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나란히 다수화, 복선화한다. 또 이러한 재편성에 의해 다수성은 ‘이미 포함된 것’의 위치와 반대로 놓이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물(객체)과 그것이 그려내는 배치(도)가 다른 사물(객체)을 중심으로 하는 배치(도)와 서로 포섭하는 형태로 단절을 일으키는 ‘하나인 것’의 같은 부류도 다극화하기 때문에, 각각이 그려내는 배치(도)는 비가역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 전도되어 고리로 연결된다. 이러한 복선화, 전도, 절단, 겹쳐 쌓이는 상태의 상호포섭에 의해 전체와 부분의 스케일 그 자체가 무화된다. 이로써 마침내 세르가 말한 ‘봉지에 넣기’(Ensachage)의 상황이 성립된다.

 

이러한 연결에 의해 성립하는 세계는 일대다의 결절점으로서의 사물(객체)을 여러 개 가진 네트워크와 같은 구조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 속에서 바로 반복해서 단절이나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인 것’으로서의 사물(객체)의 선재성이 그러한 단절, ‘떼어냄’, 즉 연속적인 창조행위의 반복 속에서 노출되기도 한다. 비상관주의적인 사물의 선재성, 고립이라는, 그레이엄 하만이 중시한 그 주제도 사물에 관한 이러한 연속적인 창조행위와 고리, 상호포섭의 분석을 기점으로 좀 더 명확해져야 한다.

 

 

 

7. 데스콜라의 경우

 

주객의 관계와 일대다 관계라는 두 쌍을 중첩시키고 그 조합을 대체한다는 방법은 필리프 데스콜라의 작업 속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주체와 객체는 인간정신 및 문화와 자연이라는 식으로 읽히는데, 단수의 (하나로서의) 자연과 복수의 문화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을 그는 내추럴리즘이라고 부르며 서양근대적인 사고로 서술하는데,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일한 자연과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다뤄지는 문화들이라는 구도는 얼핏 보면 그 반대일 것 같으면서도 총합하는 움직임인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그것으로 회수되는(그리고 회수되지 않는) 잉여적인 사물(객체)이라는 도식이 그려낸 것과는 완전히 동일한 비가역적으로 단일한 홀리즘을 전제로 하며, 주체와 객체는 그 속에서 끝까지 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은 이러한 단자연주의에 대해 <다자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애니미스트는 생명과 정신을, 생물종을 넘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본래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먼저 제기한 것인데, 그 퍼스펙티비즘의 주장은 여기서도 전제로 놓인다. 동물이나 비인간은 각각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의 배치를 다루는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 비인간은 서로 각각의 퍼스펙티브 속에서 상대편을 포섭하고자 한다. 모든 퍼스펙티브를 총합한 ‘객관적인’ 퍼스펙티브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만큼 자연은 복수적이며 사람과 비인간은 동렬에 놓인다.

 

이러한 세계관은 사물=도구와 각각을 둘러싼 다양한 배치(도),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포섭이라는 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이 분석한 것과 동일한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 —사물=도구, 창조행위, 그 속에 ‘내재’하는 다양한 배치, 그것들이 다극적이며 서로 포섭하려는 한편으로 각기 그 자체로서는 바뀌지 않는 것으로 있다는 균열(단절).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이것들이 도구역할을 행할 때 비로소 <다자연주의>일 수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관의 구조는 데스콜라에 의해 ‘하나인 것’으로서의 정신ㆍ생명과 ‘여럿인 것’으로서의 비인간의 신체성,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생겨나는 퍼스펙티브와 다양한 자연의 (단절을 낳는) 다수성이라는 식으로 규정되는데, 이것을 단순한 내추럴리즘으로서 주객관계와 일대다관계의 조합의 전도로 다뤄서는 안된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자연, 신체)는 단층을 이루면서 그 자체로 복수가 되며, 또 스트래선이 말하는 정교화(Elaboration)로서의 창조행위도 사물이나 배치를 아울러가며 연선과 변주를 반복하면서 지속해간다. —전자를 자연, 후자를 창조적 행위와 함께 자기를 다양하게 전개하는 정신ㆍ생명으로 다루는 데스콜라에 의한 애니미즘과 <다자연주의>의 정식화가 이러한 물구나무선 형태를 탐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8. 인류학에서 철학, 미학으로—비ㆍ홀리즘적 전회의 도미노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류학의 조류들이 철학이나 미학 등의 현대의 동향과 어떠한 모습으로 교차하고 있으며 또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오늘날의 철학이 자각하고 있는 것은 주객관계, 일대다관계라고 하는 대립하는 이항은 이제까지의 상관주의적인 사고에서는 비가역적 및 홀리즘적 과정 속에서 다뤄질 뿐이었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그 자체로 단적인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리즘적이고 단일한 ‘열린’ 구조를 20세기가 마구잡이로 만들어왔던 것에 대한 비판은 최근에는 미학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엘리 듀링은 어느 한 부류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다양한 해석에 ‘열린’ 채로 스스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학은 포스트모던적인 비평 속에서도 집요하게 잔존하고 있는 홀리즘적인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해왔는데, 그와 마찬가지의 사고의 전환이 금세기에 이르러 각 영역에서 일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듀링은 앞서 서술한 과잉의 <해석주의의 축척>을 <낭만주의>라는 이름하에 단죄했다. 듀링과 함께 작년 말 심포지엄을 조직한 알로아도 <해석주의>의 비판이라는 취지하에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듀링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무엇보다 하나의 ‘원형’(prototype)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열기관이 발명됨으로써 온도가 몇도 상승한 기관의 내부로부터 증기를 자동적으로 배출하기 위한 밸브가 고안된다. 이 밸브라는 사물=도구에는 압력솥과 같이 내부의 과열을 피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용도에 대한 적용이 사후적으로 복수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해석에 앞서서 우선 오브제로서 완결해서 성립하는 것이 예술작품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창조행위, 사물(객체)을 축으로 다루고 그것을 둘러싼 역할의 해석을 사후적으로 복수로 찾아내며, 그에 의해 포스트모던적인 해석주의를 비판한다는 입장은 스트래선의 주장과도 매우 상통한다. 듀링은 또한 시간론과 공간론에서도 <객관적인> 단일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복수적인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여 서로를 상호포섭하려는 구조를 집요하게 고찰하는데, 그러한 문제의식 그 자체가 매우 21세기적인 것이다.

 

상관주의적이고 홀리즘적인 모델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교차교환적, 상호포섭적인 창조론에서는 단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복수의 쌍이 병행적이지 않은 중첩되는 형태로 고찰된다. 예를 들어 사물(객체)은 하나인 것이기도 하며 그로부터 도려내어진 배치(도)나 해석이 수많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물(객체)은 또한 다극적으로 여럿인 것이기도 하며, 그러한 창조행위(연마)에 의해 다양한 사물을 아우르는 창조행위가 스스로를 변조해가며 산출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체와 부분이 상호적인 포섭에 의해 서로에게 그 의미를 중성화하는 것처럼, 주체와 객체, 하나와 여럿, 만든 것과 만들어진 것은 그 어느 쪽도 배반적이지 않으면서 중성화한다. 그것들이 단적인 것으로서 주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항들이 중성화한다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다.

 

철학에서는 2007년에 미셸 세르가 데스콜라의 네 유형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라는 개념을 Écrivains, savants et philosophes font le tour du monde(『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책에서 그의 착상은 주체, 하나와 여럿이라는 대립하는 항에 의한 복수의 쌍과 조합을 특정 인물의 작업이나 어떤 대상 속에서 여러 겹 중첩시켜서 읽어가는 시도로 실천적으로 추구된다. 예를 들어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작품은 토테미즘적인 조합 속에서 읽을 수 있음과 동시에 애니미즘적인 조합 속에서도 읽어갈 수 있으며, 총체적이고 혼합적인 종교인 카톨릭이나 학문(Sciences) 그 자체도 네 유형을 동시적으로 복잡하게 중첩시킴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립하는 이항이 중성화하여 그에 의해 도리어 객체와 주체, 하나와 여럿 등 대립항의 각각의 극이 단적인 모습으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다. 데스콜라가 제기한 각각의 유형, 즉 조합의 형태 또한 그러한 단적인 표현형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표현형은 다른 표현형과 교체가능하며 특이하게 창조된 것(작품, 학문 등), 창조하는 자(작가, 학자, 철학자 등), 즉 창조행위와 그 산물이 생길 때에 그것들의 표현형 자체가 복수 겹쳐지는 것이 발견될 수 있다. 창조하는 것을 축으로 그러한 유형 혹은 표현형의 가변성과 중첩을 독해해나갈 때,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복수의 대립항의 쌍, 복수의 데스콜라적 유형(표현형)에 앞서는 가장 중립적인 상태며 그로부터 완만하게 각각의 항이 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조합(표현형)을 만들어낸다. 세르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해간다.

 

이러한 중성적인 상태에 발을 들이면서 다양한 항을 분석적으로 발견해서 또 표현형과 표현형의 중첩을 독해해가는 것은 바로 신체의 다양한 조직을 산출하는 줄기세포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세르는 철학에 줄기세포를 비견해서 말한다. 이러한 줄기(幹, Souche)와 그것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조작과 분석이 간-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다. 대립하는 이항을 복수 조합시켜 중성화하여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생기는 관계들을 교차 교환한다는 아이디어는 세르 자신이 처음부터 다양한 형태로 세련화시킨 것인데, 데스콜라의 방법은 그러한 시행착오에 보다 구체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세르에게 그것은 가장 먼저 과거의 다양한 창조행위의 에피스테몰로직한 분석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게 된다. —복수의 표현형이 겹쳐져, 얼핏 보면 무질서한 작품, 줄기(Souche)로서의 작품과 그것을 창조하는 자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렇지만 간-형이상학이라는 주제가 이미 <창조된> 작품이나 학문에 대한 분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 또는 주체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것들이 ‘여럿인 것’으로서 상호 포섭적으로 혹은 겹쳐 쌓여서 네트워크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 어떠한 기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 전반에 해답이 구해진 것은 아니다. 세르의 경우, 전자 곧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個物), 그리고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혹은 스스로를 만들어내며 생성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특수한 문화적 사례를 넘어 모든 사례로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작년 발표한 ‘간-형이상학으로서의 인류학’에서 시도되었듯이, W 제임스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순수경험론과의 접합이 이론적으로는 유망할 수 있겠다. 주어진 지면을 할애하여 보편적인 세계구조로서 간-형이상학을 그려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아마도 그것이 성립한다면, 하만 등의 문제의식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으며, 그러한 강고한 이론적 배경을 가진 금세기적이고 범생명론적인 새로운 오브제의 철학이 탄생될 것이다.

 

 

 

清水高志「非・ホ─リズム的転回」『現代思想』2017年3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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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이라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하여

 

 

요시카와 히로미츠(吉川浩満, 문필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나 관심을 갖는 질문들이다. 그만큼 이 토픽—생물종으로서의 인류의 역사—은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도그마(편견이나 선입견)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최근 인류학, 고고학, 집단유전학, 진화생물학 등에서 이뤄진 몇몇 획기적인 발견은 이 도그마를 돌파할 힘을 갖는 것 같다.

 

본고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두 개의 도그마를 다루고, 그것이 최신연구를 통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그 현황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덧붙이면 현재 인류연구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도그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TV프로그램, SNS, 각종 광고, 블로그 등을 통해 원치 않아도 그 도그마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류연구를 일부 포함하는 우리 사회 전체에 침투하고 있는 그러한 통념이다.

 

 

첫째, 인류는 기원을 가져야 한다는 특권성의 도그마다. 간단히 말해 인류는 기원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왜 기원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것일까?

 

생명의 탄생 이래 생물진화는 언제나 이미 “중간부터 스타트”(Daniel Clement Dennett)하고 있다. 인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원이라는 말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처럼 영어의 origin에 담긴 유래ㆍ출자(出自)라는 함의를 살려낸 진화적 용법보다는 창세기류의 일회적ㆍ특권적인 시점을 말하는 서사적 용법에 더 힘이 실리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특권적인 역사적 서사, 즉 신화에 버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란 “세계의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서사”이다. 그에 따라 신화는 “존재하는 것을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이유를 기초 짓는” 것이 된다.

 

이 의미에서 기원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인 개념이다. 만약 ‘인류’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에서 분기한 것이 문제라면, ‘분기’ 혹은 ‘(종)분화’로 말하는 것이 정확하며, 또 오해도 적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기나 분화에 그 역할을 맡길 수는 없다. 분기나 분화의 개념은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특권성을 결정적으로 결여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인 호소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실질적으로는 분기나 분화에 대해 서술한 문헌 혹은 기록이 기원신화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서사적인 호소력에 설득당한 만큼 기원신화를 믿고 있다.

 

 

둘째, 인류의 진화는 이미 완료했다는 동일성의 도그마다. 이에 대해서도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의 인류든 현대의 인류든 미래의 인류든 모두 각각의 완성품인 것처럼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통상의 생물진화의 스케일에 비해 개별의 인간의 생애주기는 압도적으로 짧다는, 어느 정도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언제나 이미 진행 중인 인류 진화에 대한 관심은 ‘원시인’이나 ‘미래인’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실상 사람들은 진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두 번째 도그마는 첫 번째 도그마와 연관된다.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인 기원의 개념은 인류가 그 동일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기원 신화가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류가 변화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바뀌어버리면 신화는 서사적인 호소력을 잃기 때문이다.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존재로 자주 이야기되는 기업체와 유비를 시도해보자. 통상 기업의 서사에 ‘기원’이 거론되는 아니다. 기껏해야 ‘탄생’이다. 왜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기업이 신화적 존재로서 갖춰야 할 충분한 특권성과 동일성을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기업은 범속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업이 ‘기원’과 함께 말해질 수 있으려면, 그것은 GM, 애플사, 구글 등과 같이 특권성과 동일성을 그 나름의 제국적 기업으로서 갖춘 경우에 한할 것이다. 이때 인류는 거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주에 더 가깝다.

 

그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특권성과 동일성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기원신화를 필요로 한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사회의 신화』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신화란 역사가 자연으로 변환된 것이라고 논했다. 신화는 역사를 소재로 사용하면서 그 구체성을 개발하여 일정불변의 자연의 섭리로 변형시킨다. 요컨대 오늘날의 신화란 자연스러움을 갖춰가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라는 토픽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현대의 신화를 구성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언어활동이나 사회현상에 흥미를 가진 이들에게 전혀 무관한 토픽이 아니다. 그 신화작용을 독해하고 개발시킨 구체적인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임무가 제기된다.

 

다행히도 현대의 인류연구는 그 재료로 적격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인류의 기원신화를 일정정도 탈신화화하는 지식체계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선조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로부터 분기한 것은 약 700만 년 전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분기직후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우리의 일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들은 언제 우리의 동류가 되었을까?

 

최근 연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상식인데, 인류는 일거에 인류가 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인류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성질들—직립이족보행, 큰 뇌용량, 언어의 사용, 인간적인 사회성 등등—은 말하자면 모자이크모양의 점차적인 획득과정을 거쳐 왔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상정하는 기원의 개념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징들의 기원을 묻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 또 그러한 특징들 중 하나둘을 주요소재로 삼아 서사를 직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아가 인류는 직선적으로 한길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의 갈라짐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몇 종류의 ‘인류’가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는데, 신종의 설정에 신중한 통합주의자로 불리는 연구자들조차 10종류를 말하고, 신종의 설정을 좋아하는 분리주의자들은 20종류로 추정하고 있다. 인류는 그만큼 수많은 ‘기원’을 거쳐 왔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몇 번의 갈라짐의 과정에서 한 가지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에 다양한 인류가 등장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복수의 인류가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수만년전)에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라고 말하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가리키지만, 인류의 역사에서는 ‘우리 이외의 인류’(우치무라 나오유키内村直之)들이 공존한 시대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보다 훨씬 길었으며,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우리만이 남은 최근의 수만 년이 예외적인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의 인류 진화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인류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캐나다의 영장류 학자인 메리 파벨카(Mary Pavelka)가 제기한 “모든 사람이 같은 수의 자식을 갖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인류 진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유에 포함된 락토스(유당)을 소화하는 능력의 획득을 들 수 있다. 젖을 뗀 후에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포유류는 통상 젖을 뗀 이후에는 락토스를 분해할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인류는 목축문화에 의해 락토스를 분해하는 유전자의 변이를 가진 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은 우리의 게놈이 문화적 습관에 의해 일순간(수천 년 안에)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례만으로도 인류의 기원설화와 그것을 지지하는 두 가지의 도그마를 돌파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체계의 보급에 의해 우리의 도그마는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도그마는 일찍이 최전선에 있었던(하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쳐진) 지식체계가 사회통념으로서 침전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두 도그마는 100년 전만 해도 학계의 공식적인 교의였다. 확실히 그러한 측면이 있었다. 이 도그마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도, 현재 최전선의 지식체계는 점차 사회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아니다. 실증적인 증거도 없고 또 어떻게 실증할 수도 알 수 없는 채로 인간에게 특권성과 동일성에 도달하는 기원신화는 매우 뿌리 깊은 휴먼 유니버설의 하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권성과 동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신화 혹은 신화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사회라는 것을 나는 과문한 탓인지 알지 못한다.

 

목축문화를 통해 인류가 락토스의 내성을 얻게 된 것처럼, 과학문화를 통해 인류가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예지적 존재로 되어가는 도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귀스트 콩트나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예수회사제, 고생물학자)이 꿈꾸었던 발전적 진화관이며 그 자체가 초-신화적 서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18세기 독일에서 일었던 헤르더와 칸트의 논쟁을 떠올려보자.

 

헤르더는 『인류사의 철학고』에서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하여 당시의 과학적ㆍ인문적ㆍ종교적 지식체계를 집대성했다. 그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도 신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과 역사의 발전을 통일적으로 다루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역사철학을 제창했다. 헤르더는 헤겔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까지 근대의 인류사를 다루는 작가 모두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비판철학의 선조인 칸트다. 칸트는 헤르더의 인류사의 구상을 독단적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칸트가 문제 삼은 것은 헤르더의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연과 역사의 통합에 스피노자주의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가였다.

 

칸트가 내린 진단은 우리 인간은 항상 통합이 결여되어 있든지(통합론), 과잉되어 있든지(합리론), 둘 중 하나에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서 『비판력 비판』이 쓰인 것인데,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문제가 배증되므로 여기서는 더 들어가지 않겠다.)

 

그래서 칸트에게 전략은 인류사가 기원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원의 개념을 (구성적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규제적으로(regulatively) 사용하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기원을 구성적으로 사용하는, 즉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적 대상으로 확장하는 것은 인류사를 신화로 전화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 대신 경험적 영역에서 지성의 움직임의 방향을 잡아내는 것으로만 기원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적용사례의 하나가 「인류의 역사의 억측적 기원」이라는 소품이다. 이 에세이에서 칸트는 기원신화는 구성적인 억측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 다음으로 자유롭게 ‘억측’을 구사하여 성서를 지도로서 역사의 유람여행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헤르더의 구성적인 인류사 서사에 대한 멋진 탈구축적 비평이며, 행간에는 자크 데리다의 “유한책임사회 abc...”를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유머마저 부유하고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현대사회의 신화를 자연의 역사로 전환, 자연스러움을 갖춘 역사로 간주하는 바르트의 신화분석은 그러한 칸트의 분석철학의 계승이자 발전이다. 역사와 자연의 분리를 고심한 칸트를 계승하면서 신화작용에 의해 일단은 자연으로 전화된 역사를 끊임없이 그 구체성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바르트의 신화분석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비판철학자는 20세기에 신화학자로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는, 천년만년 단위의 인류사라는 서사에 대한 비평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여하간 폭우로 형용하기에 적절할 정도로 다수의 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죽순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필연이며, 신화학자가 해야 할 작업은 날로 쌓여간다. 일찍이 질 들뢰즈와 하시미 시게히코(蓮實重彥)가 가르쳐주었듯이 그것은 차이와 반복(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운동을 기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획으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전략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근년의 획기적인 몇몇 과학적 지식체계는 어쩌면 헤겔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주의의 관철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그 여명은 비판철학=신화학은 “사라져가는 매개자”(프레드릭 제임스)로서 그 역할을 끝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포스트 휴먼의 시대의 도래와 궤를 같이 한다.

 

그 까닭에 지금 인류는 시대에 뒤쳐진 도그마와 프리휴먼에 관한 실증적 지식체계와 포스트 휴먼으로의 개막의 예감 간에 노출된 붕괴감각을 맞이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나의 시대진단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심정이 반드시 불쾌한 것만은 아니다. 매일 수신되는 과학뉴스를 체크하면서 그것이 일으키는 붕괴감각을 은밀히 즐기고 있으므로.

 

 

 

 

吉川浩満 「人類の起源という考えそのものについて」 『現代思想』 2016年5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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