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콜라는 서구의 철학에 대응하는 것이 비서구의 인류학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비서구의 인류학이 하는 것을 서구의 철학이 한다. 전회(turn), 그것이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전회이든, 칸트의 상관주의 혹은 구축주의를 넘어서는 사변적 실재론 혹은 신실재론으로의 전회이든, 그러한 철학이나 인류학에서 하는 이론적 실천은 비홀리즘적 사고로 나아가는 방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비홀리즘적 사고를 넘어서 다원적 사고를 찾아가려 하는지의 답은 이미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이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그것을 우리 자신이 드러낼 수 있도록 앎의 힘으로 발휘되는지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밀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지난 2018년 일본에서 다음의 학술강연뿐만 아니라 대중강연을 수차례 행했다. 그 주제는 욕망의 시대를 철학한다였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표현하면 '카니발의 시대를 인류학한다'가 되지 않을까..?) 욕망 그 자체를 철학으로 대체하는 것, 아니면 욕망을 철학으로 전회하게 하는 것, 나는 그의 철학이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응원하고 기대한다.

 

 

 

우주ㆍ세계ㆍ실재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네가티브한 것,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 진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뒤에 이야기할 포지티브한 것입니다.

 

노무라 교수의 그림에 저는 철학적으로도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을 초우주’(hypervers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초우주는 복수의 우주 시스템을 가리키며, 또한 철학적이며 이론적인 우주로서 그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 우연이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 억측의 성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고방식일 테지만,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보이는 것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다중우주론의 전문가가 오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네가티브한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왜 네가티브라고 하는지는 곧 알 수 있습니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세계란 무엇이며 존재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not, 그러니까 부정형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지만, 부정형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러한 화제(話題) 자체가 트리키(tricky)한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될 때에 부정형이 사용되기까지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세계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철학자가 세계를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계란 모든 것입니다. 세계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많은 철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이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XX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이다, 나는 나, 도쿄는 도쿄, 글루온(gluon)은 글루온 등등.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사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틀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면불교는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사고하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라고 할 때 당신이 생각하는 대상은 세계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렇게 파고들어야 철학자가 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천 년 전 그리스나 중국이나 인도 등 다양한 장소에서 철학자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현대 과학은 없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은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실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도쿄는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은 지구 위에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 속에 있습니다. 태양계는 하늘 위 은하수 속에 있습니다. 은하수는 은하단 속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상한에 도달합니다. 우주(universe), 초우주(hyperverse), 그리고 그 상한에 도달한 곳이 세계라고 한다면, 세계를 정의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계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전체입니다. 블랙홀 등의 hole(구멍)이 아니라 whole(전체)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이 그의 일부인 전체, 그것이 세계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후보가 셋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세 번째의 것이 베스트라고 설명하려 합니다. 실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이론에서 따지고 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첫 번째의 사고방식, 이것은 매우 나이브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대상물이 가득 모인 총체로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세계를 용기로 봅니다. 세계는 용기이므로 그 용기 안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제 손도 그 안에 있으며, 도쿄의 지하철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 강연장 밖에 있다 해도 강연장 안에는 가구가 있다는 식입니다. 이렇듯 세계란 사고와는 독립적인 대상의 총체가 됩니다. 가구가 강연장 안에 있듯이, 다양한 것들이 세계 안에 있습니다. 내지는 쿼크, 글루온, 렙톤(lepton), 뭐든지 좋습니다. 그러한 모든 대상이 모여 있는 것이 세계라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한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지금 제 손안에 대상이 있냐고 하면, 한 자루의 펜이 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로 세는 것일까요? 둘로 셀 수도 있는데 말이죠. 혹은 물리학자라면 어떤 스케일이나 척도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말할 겁니다. 매우 작은 스케일에서 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상이 있습니다. 양자의 수준에서 보면 펜이라는 동일성 있는 하나가 사라지고 맙니다. 원자ㆍ분자의 수준에서 보면 매우 큰 수가 나옵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대체 몇 개의 대상을 손에 쥐고 있을까요?

 

이론과 독립적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한 사고에서 독립한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령 기독교의 신이 있다고 해봅시다. 기독교의 신이라 해도 '대상의 총체, 모든 대상이 모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신조차 무언가의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판단이라는 사고로부터 독립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세지 못하면서[이를테면 손안의 대상이 하나인지 둘인지 혹은 무수히 많은지 판단하지 않으면서], 하나하나를 개별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대상의 총체일 수 없습니다.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절망적입니다.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어권 철학자의 95% 정도의 사람들이 이 사고방식을 믿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말의 문제일까요? 문화의 문제일까요? 영어권의 철학자가 왜 세계를 대상의 총체로 생각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과학과도 맞지 않는 사고방식인데 말입니다. 이제 이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두 번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사고방식인데, 그는 자신의 저 유명한 책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란 성립하는 상황의 총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이란 성질의 구체화입니다. 나는 인간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소립자에도 성질이 있습니다. 제게는 없는, 예를 들어 회전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회전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물리학적인 특질로서 회전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이렇게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로서 관찰 가능한 우주는 대략 400억 광년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합니다. 교토는 부퍼탈(Wuppertal)[독일 서부의 공업도시]보다 깨끗한 도시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찬성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틀렸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이란 관계입니다.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명제라는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그러한 형태로 사물을 제시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가령 물질 aF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자의 사실입니다. 약간은 물리학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은 논리학입니다. 물리학의 언어를 가져와서 원자에 대한 명제로 말한 것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제일 작은 단위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여기에 있는 무언가의 방법으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면, 이것은 사실의 한 이해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의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많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총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나는 두 인간보다 작다’, ‘나는 한 인간이다, 혹은 나는 3인 미만의 인간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또한 무한합니다. 또 제가 지금 노무라 교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데, 이리저리 거리를 조정해가며 자리를 옮겨 무한히 많은 위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세밀하게 공간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고, 또 공간을 계속해서 측정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공간적인 거리를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적으로 위치를 바꿀 수 있어서 위치는 무한히 나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은 무한히 많습니다. 그 전체라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렇다면 그 총체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느낌만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연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사실의 총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보일까요? 집합의 집합으로 보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실에 대한 명제를 집합으로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대상과 그 성질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집합의 집합이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수학적인 문제입니다. 집합의 집합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수학적인 논리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인 시스템으로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실이 시스템의 논리인 시스템은 없습니다. 어떤 시스템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이를 알지 못했지만, 사실이란 총체를 이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조금 더 직감적인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영역입니다. 생각해봅시다. 한 유물론자오래된 철학적인 입장입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에너지적이다. 거기에는 정의 등은 없다. 물질=에너지적인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또 한사람이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우주 공간 속에 들어있는 것, 물질=에너지적인 것의 총체가 우주다.”, “우주 속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우주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에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나라는 인간은 우주의 일부지만, 우주 그 자체는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 속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면, 그리고 우주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존재하기 위해 물질=에너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면, 전우주(全宇宙)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거야 괜찮습니다만, 그렇다면 우주 자체로서 있다는 것과 우주의 일부로서 있다는 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우주의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조금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부터 내려오는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물리학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주는 크지만 유한하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주선으로 우주의 끝까지 여행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그 여행에 막대를 가지고 간다고 해봅시다. 우주 끝까지 가서 이 막대기를 우주선 밖으로 내밀면 그 막대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간다고 하면 거기는 어디일까요? 막대기를 내민 순간 막대기를 쥔 손은 우주의 끝에 간 것일까요? (물론 그 어딘가로 갈 수 없으며, 누구도 그러한 어딘가로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입니다.) 손을 우주선 밖으로 내밀 때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면 더 큰 전체의 일부에 우주가 존재하고 있을까요? 다중우주 혹은 초우주는 이와는 다른 것일까요? 초우주가 이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럼 초우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은하는 그러한 초우주의 일부일 수는 없습니다. 초우주로서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모든 영역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안의 몇몇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 전부에 관해 의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도쿄는 존재합니다. 물질도 존재합니다. 손도 존재합니다. 소수도 존재합니다. 소수, 숫자가 존재하고 도시, 정의, 아름다움, 물질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7이라는 숫자를 도쿄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시다. 그러면 도쿄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제는 뉴욕에 있었다.’, ‘오늘 7은 도쿄에 있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7은 그러한 의미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의(正義)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하나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도쿄, 교토, 부퍼탈 등을 포함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란 물리학의 대상영역입니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대상영역입니다. 숫자는 특정 룰에 따릅니다. 도시는 다른 특정 룰에 따릅니다. 법적인 룰, 역사적인 룰, 정치적인 룰 등에 따릅니다. 그리고 우주는 수학적인, 자연법적인, 그 외 다양한 역학에 따릅니다. 숫자는 그러한 역학에 따르지 않습니다. 숫자 1과 숫자 2의 관계는 약한 상호작용(interaction) 혹은 중력에 의해 통제되어서 12가 점점 가까워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법적인 룰과도 상관없습니다. 가령 천황이어도 ‘21에 선행한다.’고 정할 수 없습니다. 12의 관계를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산수인지만, 이것은 여하간 사실입니다. 천황은 도쿄와 교토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천황의 법적인 권한이 거기까지 미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도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도쿄를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도쿄는 도쿄입니다. ‘도쿄는 도쿄라는 사실은 몇몇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없습니다. 각각의 영역에 규칙이 있고, 그것들은 제각기 다릅니다.

 

이 룰에 관해 나는 의미(sens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의미가 이 영역을 개별화합니다. 의미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한 영역이 한 영역이고 다른 영역이 아닌지를 의미는 설명해줍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의미에 의해 어떤 것이 하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글루온은 우주의 영역에 있지만 숫자의 영역에는 없듯이. ‘모든 영역의 영역이라 할 때도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세계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란 무엇일까요? 유물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숫자에는 이러한 물질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추상적 및 항구적입니다. 글루온은 시간에 의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절대적인 숫자와는 또 다릅니다. 도쿄는 추상적인 시간과 관계 없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이 도시는 아닙니다. 확실히 우주는 도시가 아닙니다. 물론 메타포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우주는 도시는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 또한 도시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어떠한 기능이길래 총체를 부여해주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요. 답이 없을 때는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철학자는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해왔습니다. 이것도 존재한다, 저것도 존재한다, 그럼 발명해보자, 큰 의미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만들면 좋겠다, 라고. 그러면 존재(existence)란 무엇일까요? 존재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문제에 대한 답이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한 해결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존재라고 부른다면 답은 될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하이데거는 이것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아닌 어떤 정신적인 말을 만들었습니다. 존재는 독일어로 ‘Sein’이라고 하는데요, 하이데거는 옛 19세기의 표기방식을 따라 ‘Seyn’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Sein’ 위에 엑스표를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존재라는 것을 적절하게 표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식적으로 표현된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러나 이 일이 잘못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설명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총체숫자, 도시, 우주…―는 무엇도 아닌 곳으로부터 존재에 이르게 된다고, 즉 느닷없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빅뱅에 의해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나 도시에 대해서도 빅뱅이 있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비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어로는 ‘Satz’라고 씁니다. Satz라는 말은 비약을 의미하면서도 명제라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는 “Der Satz von Ground”라는 책을 썼습니다. 근거율(根據律)이라고 불리는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비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론을 회피할 뿐입니다.

 

 

지금부터 포지티브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잊어주세요. 총체, 절대적인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영역이 현실 하에서 매핑(mapping)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국지적으로 함께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 숫자, 그리고 우주가 함께 있다면?

 

우주라는 관점에서 그것들의 연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도시의 스케일은 꽤 큽니다. 도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큰 규모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도쿄는 그 역사까지 포함해서 도쿄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으며, 조금 더 작은 레벨에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도쿄는 매우 복잡한, 국소적인 존재의 기능으로도 파악될 수 있습니다. 숫자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파악된 숫자는 어쩌면 뇌 속에 있는 것의 표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뇌 속에서 우주를 생각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우주 속에 있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우주의 관점에서 숫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도쿄 속에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숫자는 대상에 대해 셀 수 있습니다. 도쿄를 제로라로 할 수 있을까요? 교토를 첫 번째, 부퍼탈을 세 번째로 순서를 정하는 것도 숫자가 하는 일입니다. 우주를 n이라는 숫자로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n이라는 것은 매우 큰 숫자를 의미입니다.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이런 식으로 매핑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여기서 생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는 어떻게 될까요? 해리포터에 대해 지금까지 쓰이지 않은 소설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위의 시도는 도시, 숫자, 우주 등의 무작위적인 목록을 제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을 하나의 영역에 담을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왜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3천 년간 서양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동양의 철학에서는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철학에 매우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철학에서는 제가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주는 어쩌면 무한히 큰 것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해방식이 맞는지에 따라서는 무한에 가깝게 큰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모든 것보다 우주는 작습니다. 따라서 가령 다중우주일지언정 무한을 초월하는 상태에는 이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우주 속에 있는 대상보다 많습니다.

 

어쩌면 우주는 무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주는 작습니다. 철학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우주는 매우 작습니다. 모든 대상이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는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모든 것이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접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취해보겠습니다. 즉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현대 과학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환상으로 이해하거나 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제멋대로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그것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꿈을 꾸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꾸며낼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꾸며낼 수 없습니다. 즉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몇천 년 전의 이해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사고로부터도 독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20세기 무렵까지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지성을 가진 생물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현실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서 사고는 주관적이며 현실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없어도 현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라는 이해방식이 그러한 철학에 담기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말해도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면, 현실 속에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는 현실 속에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의미는 현실 속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까요? 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어떻게 의식과 관계하고 있는 걸까요? 왜 뇌가 없으면 의식이 지원되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컴퓨터는 겉보기에는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그렇다면 컴퓨터는 의식이 있는 걸까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나쁜 사고방식의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반드시 마음에 의존한다고, 관념론자처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독일은 관념론적으로 흐르기 쉬운 전통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인이며 관념론적이지만 종래의 관념론자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지 않을 뿐더러 마음에 의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념론자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다고 기능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의식인 걸까요? 이것은 관찰자라는 말을 사용해서 혼란스럽게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현실은 마음까지 포섭하고 있으며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미의 장이 됩니다. 특정 법칙이 있고 그로부터 의미의 장이 형태 지어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숫자의 법칙이 있습니다. 저기서는 도시의 법칙이 있습니다. 도시의 법칙과 숫자의 법칙은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시는 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도시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z라는 숫자만큼 도시가 있다고 해봅시다. 구체적인 숫자의 도시가 있으므로 수의 의미의 장과 도시의 의미의 장은 그 의미에서 중첩됩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나아가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의미의 장 속에 존재합니다. 고래는 물속에 삽니다. 고래의 생활방식, 즉 수중생활을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의미의 장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안하는 철학의 관념에서는 이런 식으로 현실이 존재합니다. 국소적으로 겹치는 의미의 장의 직물세공과 같은 것으로서 말이죠.

 

나아가 글로벌한 맥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체라는 맥락은 없고 로컬한 맥락밖에 없습니다. 로컬한 맥락뿐이므로 맥락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져서 그를 통해 구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미의 장에 대해, 혹은 의미의 장의 중첩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신의 관점은 없습니다.

 

여하간 우리가 현실에 대해 찾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은 항상 예상 밖이며 놀라움을 동반합니다. 물리학은 경험적인 과학에서조차 항상 그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승려도 다중우주를 이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그리고 때마침 운이 좋아서 그런 식으로 파악된 것일는지 모릅니다. 다른 승려는 다른 이해방식을 할테니까요. 다중우주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다중우주 자체가 억측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현실은 이론에 저항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심지어 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서양의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존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로컬ㆍ스트럭처(local structure)입니다.

 

 

앞서 도시와 숫자의 부분은 겹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물리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중우주 연구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자가 대체로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여하튼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주에는 근본적인 레벨이 있어서 나머지는 그 근본적인 레벨의 어딘가에서 나온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는 모른다.' 예를 들어 바다의 파도나 입자의 움직임을 볼 때 입자의 움직임은 파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종류의 파도로 보입니다. 입자의 움직임은 소위 보통의 파도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간이 보면 마치 파도처럼 보이지만 진짜 파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파도는 인과의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파도가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루온이 다른 글루온을 흡수했다.’라거나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는 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다릅니다. 고래는 고래입니다.

 

글루온과 고래는 이처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할까요? 우주의 세부조정이 없다면 원래 고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래와 같은 동물과 우주의 연결은 어떠할까요? 이것은 물론 깔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은 것이 있어서 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가령 물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구성된다는 사고방식을 저는 레고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레고라는 블록이 있지요. 우주는 그러한 레고처럼 구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다면, 우주에는 깔끔한 숫자가 있고 실제로 깔끔한 것이 되는 무엇인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깔끔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우주는 이미 있는 이론적인 거품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철학자, 물리학자, 또 과거에 철학자와 대화한 물리학자는 총체가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주를 사고할지에 대해, 즉 물리학 그 자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총체가 없다면, 만약 그 총체라는 것이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3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에 관해 말한 것을 지금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총체에 대해 말한 것을 현재의 우리는 왜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물학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가 말한 총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걸까요? 우리는 좀 더 깊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동시에 맞으면서 틀린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특히 그레이엄 프리스트(Graham Priest)라는 철학자에 의해 다른 논리학의 발전 속에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리스트는 이미 몇천 년 전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이러한 사고를 방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소적인 문제라면 이 비모순에 의해 혼란이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를 저는 엄밀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지지해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기에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미 최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이 논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과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시에비치(Lukasiewicz)라는 폴란드의 논리학자는 19세기에 그 모순이 진실이어도 문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리스트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방 입구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봅시다. 제 몸의 반은 밖에 나와 있고, 반은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방 밖에 있는 것일까요? 방 안에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애매합니다. 이 애매함은 사람의 사고나 말이 있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이 애매함은 모든 곳에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방 안에도 없으며 방 밖에도 없지만, 방 안에도 있으며 방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명제는 틀렸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래서 총체를, 이론의 총체를 접으면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가능해집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총체에 반대하는 이론을 보여주려 합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제안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매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지금 이야기한 논리를 우주와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을 간단한 결론과 함께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 이러한 현실성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가? 그것은 너무나 너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존재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 곧 의식은 그물망(mesh) 작업 속의 일부입니다. 의식 그 자체는 뇌와 같지 않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해야 할 만큼 깁니다. 뇌가 없다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뇌와 의식이 같다고 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물론 뇌는 의식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로서 필요하지만,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최종적으로 틀린 이론을 접으면, 앞서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틀린 이론은 유럽에서 3천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마이너스 유산입니다. 제 연구의 대체적인 경향은 3천 년 전의 옛 논리를 옹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를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철학] 또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여러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풀어가겠습니다.

 

 

 

 

 

 

マルクス・ガブリエル、「宇宙世界実在」『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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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천문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퍼스펙티비즘이 17세기 광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라는 것도 데스콜라가 주장한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천체물리학과 대질시킨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지난 2018610일 일본 도쿄대학에서는 칸트를 넘어선 새로운 실재론을 주창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과 천체물리학자의 강연과 대담이 있었고, 《현대사상》 201810월 임시증간호 마르쿠스 가브리엘 특집편에서는 이 강연록과 대담록을 실었다. 각각의 강연록과 대담록을 차례로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그 첫 번째로 일본의 천체물리학자인 노무라 야스노리의 강연록을 번역해서 올린다.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

 

 

노무라 야스노리(野村泰紀)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라는 테마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우주에 대해 사람들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우주라고 말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큰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중우주’(multiverse)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 다른 곳에서 들은 분도 계실 테지만, 저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 적어도 몇몇은 어렸을 때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든지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어른이 되면 바쁜 일상 속에서 잊히게 되는 의문인데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언티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의문 자체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할 때 우주가 무엇인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주의 가장자리에 벽과 같은 이 있고 그 바깥에 무언가 젤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지금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해서 우주라고 하겠다고 하면, 말뜻 자체로 볼 때 우주의 끝이나 바깥 등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의 끝을 이야기하려 할 때 우선 우주란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겠습니다. 바깥이나 이전이라고 할 때 바깥은 공간적인 바깥이고 이전이란 시간적인 이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나 공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보통 시간은 시간이고 공간은 공간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질문의 경우 우주가 시작한 순간 등의 극한의 상황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때 시간이나 공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보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중우주의 이야기는 철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오늘 드디어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상과 전혀 다른 우주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중우주의 단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중우주와 같이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할 때 우리의 우주란 무엇인지를 정해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우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소립자 이론 표준모형으로 기술됩니다. 그것은 소립자의 쿼크가 있고 전자가 있고 질량이 얼마이고등등이 됩니다. 작금에 이르러 실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원자핵의 이론 내지는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생명이 된다는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소립자 이론은 지구에서든 안드로메다에서든 그 외의 다른 곳에서든 같다는 것이고, 모든 관측에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며 우주는 빅뱅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팽창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은 말로만 그렇다는 거 아님?’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의 팽창은 직접 관찰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저 멀리 있던 은하가 더욱 급속히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이상의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빅뱅 자체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현재 커지는 중이라면, 예전에는 그 속에 물질이 꾹꾹 담겨 있어서 고온고밀하기 때문에 번쩍번쩍 빛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지금 일만 년 전의 은하를 본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가 유한하므로 일만 년 전에 나온 은하의 빛에 의해 일만 년 전의 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100억 광년 떨어진 은하를 본다면, 100억 년 전에 나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며 100억 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는 먼 옛날에는 빅뱅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배경은 온통 빛으로 빛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밤하늘은 어둡습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에서 나온 빛은 도플러 효과에 의해 희미해집니다. 이 효과에 의해 빅뱅 시대의 빛은 가시광의 영역에서 벗어나 전파영역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전파의 차원에서 밤하늘을 본다면 밤하늘은 전면에서 반짝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습니다.

 

우주는 현재 138억 살 정도인데, 우리는 전파영역의 빛까지 해서 38만 살 정도의 젊은 시절의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의 우주의 가장자리는 밀도가 너무 높아서 빛이 통과할 수 없고, 위의 방법으로는 보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오는 빛의 전파를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연령이 현재의 0.003%였을 무렵의 전체의 상세한 지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았습니다. 밀도가 거의 동일한, 이를테면 수프 같은 상태였지요. 10만분의 1 정도 외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0만분의 1 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으로, 예를 들어 옥수수 수프를 아무리 저어도 1%는 덩어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것은 왜 현재 우리가 보는 우주가 항성도 있고 은하도 있으며 물질의 밀도가 일정하지 않은 우주인지를 말해줍니다. 이 초기의 10만분의 1의 흔들림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력은 인력이므로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더 강한 중력이 작용하고 점점 사물이 모이게 되며, 밀도가 낮은 곳에서는 점점 사물이 흩어지게 됩니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순식간에 물질이 모여 은하가 생기고. 이는 38만 살 무렵의 우주의 전체지도가 있으므로 그것을 컴퓨터에 넣어서 시뮬레이션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은하가 생기고 필라멘트가 생기고해서 현재의 관측과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고르게 펼치면 현재의 우주와 거의 같은 모양을 이루게 됩니다. 즉 우주는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과학자가 즐겨 그리는 그림으로 나타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그림 1). 이것은 시간을 세로축으로, 공간을 가로축으로 한 시공도’(時空圖)로서, 물리학자들이 자주 그리는 그림입니다. 빛의 경로는 반드시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것이 룰입니다. 이 그림에서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가로 방향(공간 방향)의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빅뱅은 밀도가 매우 높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그림 1에서 가로 방향으로의 단계적 차이(gradation)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앞서 말했다시피 우주가 38만 살 때 나온 빛(우주배경복사라고 합니다.)을 약 138억 년 후의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은 45도 사선으로 기울어진 두 개의 화살로 나타납니다.

그림 1. 우주의 시공도

만약 이 그림상이 정말 맞다면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기 때문에 우주의 밖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관해 거의 완전히 알았다. 어디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 물리를 적용할 수 있다.’가 되겠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요?

 

실제로 관측결과는 그림 1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여러 번 경험했다시피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예가 있습니다. 지구입니다. 대지는 구()로 보이지 않습니다. 10킬로미터 사방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지구가 둥글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는 하나의 예입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개념이 나왔을 당시 최첨단 과학자들의 반론은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떨어져 버릴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힘 덕분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일본)과 이곳의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에서 각각 상하반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물론 지구는 둥글다는 것에 대한 당시 반론의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래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모두에게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래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아래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는 만유인력에 의해 지구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물을 떨어뜨리면 아래로 가기 때문에 아래는 아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 개념적 변경을 수반할 때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맥락에 맞춰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개념적 변경을 수반하면 그때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겉으로 보이는 픽처우주는 무한히 확장한다가 틀릴 가능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림 1과 같은 의미에서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다중우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요구되는 개념적 변경이란 무엇일까요? 그 하나가 시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은 빛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맥스웰이라는 사람이 전기와 자기의 방정식을 완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석, 즉 자기가 움직이며 전기가 생깁니다. 실제로 이것을 사용해서 수차나 터빈으로 자석을 움직이게 해서 발전(發電)을 합니다. 또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긴다는 것도 압니다. 좋은 예가 전자석입니다.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기고 자기가 생기면 전기가 생기며, 이를 통해 계속해서 파()와 같이 전달되는 해()가 방정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 파()는 어째서인지 빛가시광에 한정되지 않고 X, 자외선, 적외선, 전파 등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빛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이 파()의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일 때, 내 자신이 시속 30킬로미터로 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고 하면 저 차의 속도는 내게 시속 70킬로미터로 보이게 됩니다. 더군다나 지구 자체가 자전하고 있기 때문에 시속 100킬로미터의 차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구의 중심을 돌게 됩니다. 나아가 지구 자체도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즉 속도는 누구에 대한 속도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라고 말할 때는 땅에 대한 속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빛의 경우는 무엇에 대한 속도인지를 지정하지 않고서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습니다. 즉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갑니다. 당초 이 속도는 우주에 대한 속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가 우주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면, 빛의 속도는 이 수치에서 미미하지만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대단한 것은 계산으로 그 속도가 나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부분, 예를 들어 시간이라든가 공간이라고 했던 부분에서 우리의 개념을 변경할 필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전차에 타고 있고, 빛을 위에서 아래로 쏘아서 바닥에서 튕겨내는 실험을 한다고 칩시다. 전차의 높이는 1미터입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만들기 위해 빛의 속도를 매초 2미터로 잡읍시다. 1미터의 높이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튕겨 되돌아오면 2미터이기 때문에 1초 사이에 빛은 전차의 위아래를 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차 밖에 있는 사람이 보면, 이것은 달리는 전차의 이야기이므로, 위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되돌아오기까지의 거리는 2미터가 아닙니다. 빛은 수직 방향이 아니라 사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거리[밖에 있는 사람에게 보인 빛의 거리]4미터였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는 누가 보아도 매초 2미터로 같기 때문에 빛이 아래로 튕겨서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전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1초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2초가 됩니다. 즉 시간은 보는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측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의 실험에서 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험결과와 전혀 맞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 위에서 소립자가 생겨서 내려온 것을 지상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한 소립자 속에는 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의 수명을 가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 위에서 내려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소립자 측에서 보면 마이크로초의 수명을 갖는 것이 지상의 인간 측에서 보면 소립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현상이 이와 같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것이 아니며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그림 2. 시간에 의한 우주의 공간

여기에 중력까지 고려하면 시간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밀고 나가면 최종적으로 다중우주에 이르게 되고, 빛의 경로가 45도 기울어져 그림 1이 아닌 그림 2와 같은 우주의 묘상(描像)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새로운 그림에서 우리의 지구는 중앙 윗부분의 작은 역삼각형 안쪽의 야구장과 같은 영역에 대응합니다. 지금 이 우주를 바깥에서, 다시 말해 큰 역삼각형의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수평으로 묘사되는 점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거품처럼 생겨나서 보글보글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1, 2, 3, 4의 우주의 사이즈는 이러한 점선 속에 역삼각형의 안쪽에 있는 부분의 길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주는 작게 태어났고 거의 빛의 속도로 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안쪽, 즉 그림 속 큰 역삼각형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그림 속의 켜켜이 쌓인 곡선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생긴 순간부터 무한히 크며 어디 가도 똑같이 보인다는, 즉 곡선의 어디라도 똑같은 밀도의 영역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보통 우주가 거품처럼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품이라면 벽이 있으며, 중심이라는 개념 또한 있으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밖에서 보면 거품이고 크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한결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지구가 실제로는 둥글지만 아래를 오로지 아래라고 생각해서는 둥근 지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의 성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끝의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은 이 역삼각형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것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영역은 시간 제로 이전이 되므로,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물음이 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가 시작하기 전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거품의 밖과 완전히 같은 영역이고, 그러므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를 묻는 질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주의 바깥이나 시작 이전이라는 것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지 않으면 탐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누가 보았을 때인지를 지정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의미를 잃고 맙니다.

 

덧붙여 이 그림은 항상 빛의 속도를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룰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갈 수 있는 부분은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을 정점으로 한 역삼각형의 부분뿐입니다. 왜냐하면 45도 보다 옆으로 더 달려나가는 순간 빛은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중우주론을 논할 때 원칙적으로 갈 수 없는 영역을 논하는 것은 과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우주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는지를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습니다.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까요. 누구도 과거로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사이언스가 아니라면 공룡시대나 고고학은 전부 사이언스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거로 갈 수 없다 해도 과거에서 시그널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정밀한 측정을 하거나 이론의 여타 예언을 찾아보거나 해서 무슨 일인지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중우주는 볼 수 없고 갈 수 없기 때문에라고 되묻는다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갈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거품 우주의 바깥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를 생각해보기 위한 힌트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가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면,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데 그 팽창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1998년의 일로, 2011년에 나의 동료인 솔 펄머터(Saul Perlmutter) 등이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발견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을 때 중력은 반드시 인력이므로 팽창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빅뱅에 의해 은하들끼리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면 그 속도는 중력으로 인해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펄머터 등이 측정하고자 했던 것은 감속 매개변수(parameter)라는 것으로 팽창 속도가 얼마나 느려지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가 마이너스로 나타납니다. 즉 팽창이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보통의 물질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쿼크라거나 다크매터(dark matter)라거나 했다면 이렇게는 안됩니다.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물질 이외의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 무엇이 우주의 주요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체가 바로 진공에너지’(vacuum energy)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팽창이 가속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 시대에서부터 이미 알려져 왔습니다. 진공에너지란 물질이 전부 사라져도 남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이 에너지는 부호에 따라 척력 같은 것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부호가 반대면 인력이 작용해서 우주가 으스러지고 맙니다). 펄머터 등은 이 진공에너지의 대부분이 non-zero로 측정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사이즈가 기적적인 사이즈였다는 것입니다. 진공에너지는 이론적으로 대략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되어야 하는지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측정한 사이즈는 이 이론적인 평가치보다 120자리 배나 작았습니다. [진공에너지가 우주팽창의 가속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상의 수치가 있는데, 실제 측정치는 그보다 120자리 배나 작게 나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이론물리학 사상 가장 엇나간 예언 중 하나일까요? 게다가 불가사의하게도 우주에는 은하나 기타 물질도 있는데, 물질에너지 밀도와 진공에너지 밀도가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두 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100자리 배 정도 컸으면 좋으련만, 두 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불가사의하냐면 물질에너지 밀도는 질량÷부피로 주어지는데, 우주의 팽창에 의해 부피가 점점 커지기 때문에 물질에너지 밀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낮아집니다. 그런데 진공에 대해서는 아무리 팽창해도 진공은 어디까지나 진공이므로 진공에너지 밀도는 일정합니다. 그것이 지금 딱 두 배 정도라는 것입니다. 즉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먼 옛날에는 진공에너지가 물질에너지보다 몇 십 자리 배 작은 먼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거의 같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면 진공에너지만이 남겠죠. 만약 우리의 우주가 한개 뿐이라면, 빅뱅의 때에 우주나 이론이 진공에너지를, 즉 은하가 생겨나고 생명체가 생겨나고 위성(satellite)을 쏘아 올려 진공에너지를 관측할 때쯤 물질에너지와 거의 같게 될 정도의 수치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측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진공에너지가 1998년에 발견되기 전에,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론의 예언보다 110자리 이상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점차 정밀도가 높아지면서 1998년 무렵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10자리 배나 작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론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110자리 이상 작은 것이라면 진공에너지는 아마도 제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메카니즘이 있어서 제로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그에 대해 이론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표준모형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이고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라는 사람은 메카니즘이 없기 때문에 사고방식을 바꿔서 진공에너지가 상이한 우주가 있다면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87년의 일입니다. 그 결과 진공에너지가 지금의 수치보다 조금 크다면, 은하나 모든 것이 탄생하기 전에 진공에너지가 지배적이었던 우주는 척력으로 팽창했으며 그 속에는 무엇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하도 혹성도 인간도 무엇도 없는 것이지요. 진공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한다면, 그 대부분에서 진공에너지가 너무 커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어쩌다 딱 맞는 크기의 우주에만, 말하자면 딱 맞는 크기에 들어간 우주에만 은하나 인간 등의 복잡한 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 우주를 관측할 때에 진공에너지는 반드시 딱 그만큼의 수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우주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우주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구는 숲도 있고 호수도 있으며 매우 아름답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기본방정식은 매우 간단한데, 왜 이렇게 풍부한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사막이나 얼음 혹성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아니 실제로는 사막이나 얼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때마침 체액의 물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딱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혹성이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소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때마침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없었을 것이기에 우리가 있는 곳을 발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두가 진공에너지를 제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러한 이론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약 우주가 무수히 많다면 진공에너지가 제로에 가까운 수치일 것이라는 이론은 우리의 우주 아닌 어딘가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와인버그는 만약 진공에너지가 그러한 이유에서 작다고 한다면, 때마침 딱 좋은 범위에 들어앉은 우주의 진공에너지가 제로는 아니기 때문에 관측의 정밀도가 높아지면 언젠가는 진공에너지가 발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제로라고 생각할 때 말이죠. 그리고 11년 후에 발견됩니다. 현재 수많은 우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공에너지의 사이즈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것이 맞다는 증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게 호소하지 않고서도 신의 세계처럼 인간에 딱 알맞은 이곳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가설입니다. 그리고 물론 거대한 가설에는 증거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증거는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실은 이론물리의 법칙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찍부터 드러내 왔습니다. 늦어도 198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감지했고 돌이켜보면 그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전부 무시되었지만 말입니다.

 

그중 하나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력과 전자역학을 통합한 이론의 거의 유일한 후보입니다. 공간의 한 점은 통상 가로, 세로, 높이를 지정받습니다. 공간이 가진 차원이 세 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초끈이론에 따르면, 수학적으로 공간의 차원은 아홉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떻게 보아도 3차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남은 여섯 개는 없다고 해도 될 만큼의 작은 것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실은 이런 일은 물리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얇은 종이를 생각해봅시다. 통상 우리는 종이를 2차원의 물체로서 다룹니다. X축과 Y축 각각의 수로 지면 위의 점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면 위에 사는 작은 세균의 입장에서 보면 두께라는 세 번째 차원이 열립니다. 종이는 큰 스케일에서 보면 2차원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2차원의 모든 곳에서 작은 두께 방향의 차원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3차원의 공간에서도 모든 곳에서 6차원의 공간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잊을 수 있다는 것이 8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6차원 공간이라는 것은 꽤 복잡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기본방정식은 간단해도 매우 복잡한 수의 해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의 DNA 등의 유기질의 경우에 탄소와 질소와 산소만을 가지고 슈뢰딩거 방정식 하나에 넣어도 무수한 가능성이 나옵니다. 6차원 공간 또한 이와 같아서, 6차원의 모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무수히 많은 종류가 나옵니다. 우리의 우주는 6차원을 평균화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6차원의 모습이 다르면 전혀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6차원 공간의 모습에 의해 3차원 방향의 우리 물질의 소립자의 질량이나 성질, 진공에너지 등이 전부 달라집니다. 즉 초끈이론에는 와인버그의 논의에 필요한 수많은 종류의 우주라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들어있습니다. 80년대의 사람들은 앞서간 6차원이 나왔다는 것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공간의 차원이, 이론이 예언하는 그것과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6차원의 모습을 가진 우주가 방정식의 해로서 존재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러한 우주가 실제로 생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겼습니다. 우주가 하나 시작했다는 것은 양자 터널링이라는 효과에 의해 또 다른 6차원의 모습을 한 영역이 보글보글 거품처럼 생겨나서 그것이 커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라고 불리는 현상의 일종으로 그것 자체는 희귀하지 않습니다. 물이 끓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물이 끓으면 증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그 거품이 커져서 묶이고 마지막에는 물이 전부 수증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주의 경우에는 항상 거품이 생기고 커지지만 거품과 거품 사이의 공간 또한 넓어지기 때문에 거품들끼리 전부 묶이지는 않는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우주는 확률적으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의 거품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거품, 거품, 거품이 생겨나서 다양한 우주가 차츰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이 성질, 즉 거품의 상전이(相轉移)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론이 가진 난감한 성질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와인버그의 설명에 필요한 다양한 우주를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주는 자동적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시사적입니다. 인간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난감한 성질에 당면하면 방정식을 믿고 앞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을 숨겨버립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실은 난감한 성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난감한 성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필요한 성질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거품이 생기는 과정은 수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보면실제로 풀린 것은 1970년대입니다, 우리가 전우주(全宇宙)라고 말하는 곳은 가장 크게 보글보글 생긴 거품의 내부라고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품의 내부에는 6차원 공간이 때마침 있는 특징의 모습을 취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가 생기고 진공에너지 또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거품이 보글보글 계속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서 그림 2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거품은 밖에서 보면 작게 태어나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많은 거품 속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0.0000……1 정도의 매우 작은 확률로 때마침 진공에너지가 작게 되어서 인간이 생기는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인간, 이랄까 여하간 생명체 같은 복잡한 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럭키한 우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역으로 고등생명 같은 것이 생겨서 우주를 관측했다고 한다면, 그때 우주는 그러한 고등생명에 딱 맞는 우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중우주라고 불리는 빅픽처로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3과 같습니다.

그림 3. 다중우주

다중우주라고 하면 우주는 무수히 많다는 것만을 어렴풋하게 말할 뿐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이미 수천 년 전에 인도에서 명상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묘상(描像)을 사이언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할 수 있냐고 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영역은 일종의 과거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그널이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끼리 부딪혔다고 한다면, 그 시그널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이론즉 초끈이론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보글보글 거품이 생긴다는 것이 정해지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 외에도 다른 귀결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귀결 중 몇 가지는 우리 우주 속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를 설명하겠습니다. 만약 그림 2가 맞고 우리의 우주가 거품이라고 한다면, 우주의 곡률이 음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우주의 곡률이란 무엇일까요? 삼각형으로 생각해봅시다. 삼격형이란 세 점을 찍고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연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각도가 세 개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하면 180도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경우에만 맞습니다.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닌 공간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의 표면을 생각해봅시다. 그 위에 삼각형의 세 점을 찍어서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이어봅시다. 그렇다면 부푼 삼각형과 같은 것이 되고 내각의 합은 분명 180도보다 큽니다. 이러한 공간을 양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 양의 곡률을 가진 2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으로 눌린 공간이면 이때 합은 180도보다 작게 됩니다. 이것을 음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2차원 면의 경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차원을 하나 높여서 3차원의 공간이라 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에 세 점을 찍어 최단거리로 묶고 그 내각의 합을 측정함으로써 우주의 곡률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다중우주론은 이 합이 반드시 180도보다 작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그것이 180도 보다 어느 정도로 작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179.999……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험적으로는 그러한 작은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우주에 실험상의 대삼각형을 만들어서 지금의 정밀도로 측정하면 180 플러스마이너스 1도 정도로 나옵니다. 앞으로 정밀도가 더 높아지고 그러한 정밀도로 측정해서 180도와 같게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중우주론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1 플러스마이너스 0.01도가 되면 곡률이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오늘 이야기한 것은 전부 묻히게 될 것이고 사이언스로서 퇴출되겠지요. 곡률에 대한 관측의 정밀도는 앞으로 20~30년 사이에 2자리 배 정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그때 측정치가 양으로 나온다면 볼 장 다 본 것이지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다중우주는 끝장납니다. 이 이야기는 앨런 구스(Alan Harvey Guth)라는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다중우주는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간과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론의 귀결을 내기 위한 수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직접 다른 우주에 갈 수 없다고 해서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판단한 후에 사고를 밀고 나간다면, 이러한 수단은 발견될 수 없습니다. 나와야 하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서 사이언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앞으로 관측적으로 지금 이상의 증거가 모인다는 보증은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이야기한 곡률과 같은 예언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가 다중우주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로 공간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중우주론의] 연구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조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중우주의 관점에서도 우리가 공간ㆍ시간이라고 하는 것은이미 시간이 보는 사람에 의해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아도 이 말은 이상하지만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앞서와 같이 모두가 동의하는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나 자신의 사색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부 사이언티스트들 사이에서 조금씩 동의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에게서 미친놈 소리를 들은 이야기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만큼의 동의는 얻지 못할 것이며 나의 주관 또한 개입되어 있지만, 즐거운 이야기이므로 해보겠습니다.

 

다중우주를 생각하면 진공에너지의 이론적인 크기가 설명될 수 있고 초끈이론이나 다양한 것들이 무모순적이어서 기쁘기는 하지만, 다중우주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의미에서 존재하게 된다면 실은 조금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중우주에서 거품 우주가 보글보글 생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무한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우주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한히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일본미래과학관에서 강연하고 있는데요, [] 어제 싸운 우주, 싫어하는 것이 있는 우주, 좋은 것이 있는 우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른 우주들 중 어느 것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생각해봅시다. 보통 확률의 계산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주사위를 흔들어 몇 번 던져서 어느 눈이 몇 번 나오는지와 같이, A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고 B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는지의 비율을 말합니다. B 쪽이 A 쪽의 3배로 일어난다면, A25%, B75%가 됩니다. 그런데 다중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히 일어나기 때문에, AB도 무한히 일어납니다. 요컨대 확률의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무한÷무한을 약분해서 1로 해도 소용없고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의 예언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 자체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을 해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앞으로 쭉 무한히 계속된다는 데에서 무한이라는 것이 나온 것이듯이, ‘시간에는 단락이 있고 한 시간보다 앞선 것은 없다등등으로 해명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주장은 실은 이 답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미로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중우주일 때와 같이 물리학의 법칙은 그 해답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인데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과 블랙홀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즘 잊고 있었던 호킹의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블랙홀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지구에서 물체를 탈출시킨다고 해봅시다. 물체를 위로 던지는 정도로는 택도 없습니다. 비행기도 소용없습니다. 로켓에 실어 로켓과 함께 대기 밖으로 내보냅니다. 일정 속도보다 빠르면 지구의 중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처럼 지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곳에서는 초속(初速)을 더 키우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곳이 꽉꽉 차 있다면 그곳에서 물체를 빛의 속도로 던져도 그곳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블랙홀입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블랙홀에서 지평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측에서 빛을 확 던져보았을 때 일정 높이 이상을 갈 수 없다고 하는, 빛이 최대로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말합니다. 이 내측으로부터 어떤 시그널도 올 수 없습니다. 지평면이라고 해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러한 경계의 이름일 뿐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블랙홀입니다.

 

그 블랙홀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블랙홀에 책 A를 떨어뜨려 봅시다. 지평면에 가까워지면 중력의 효과로 인해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책은 블랙홀의 표면으로 자근자근 흡수되고 블랙홀 본래의 무게+A의 무게의 새로운 블랙홀이 생겨납니다. 호킹이 발견한 것은 블랙홀이 그 자체의 어떤 것이 아니라 증발해가는, 그것이 우리의 우주라면 빛의 알갱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긴 블랙홀도 마지막에는 증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책 A가 아니라 무게는 같지만 B라는 다른 책을 떨어뜨려 봅시다. B는 마찬가지로 블랙홀로 흡수될 것이며 조금 무거운 블랙홀이 생겨날 것이고, 그다음에 그것은 증발할 것입니다. 같은 무게의 책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블랙홀은 AB의 경우에서 같은 무게를 가집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호킹의 복사(輻射)도 계산하면 똑같은 것이 됩니다. 이것을 호킹의 블랙홀 정보문제라고 합니다. 원래 책이 A였는지 B였는지의 정보를 완전히 잃고 완전히 똑같은 최종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서 뭐?’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시간 발전이 11이 아니게 됩니다.

 

도대체 왜 물리는 가능할까요? 우리가 현재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뉴턴 방정식을 풀고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을 날려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예언될 수 있습니다. 한편 시간에 대해 반대로 풀어보면, 지금 이 장소를 이러한 속도로 공이 움직이고 있다면, 어디에서 얼마의 초속(初速)으로 던져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이언스가 시스템의 시간 발전을 해명해서 예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양자역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도 시간을 앞에서 풀거나 뒤에서 풀어서 과거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블랙홀의 정보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를 풀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초기 상태에 대응하는 최종상태가 완전히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생각하면 같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간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이언스가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블랙홀의 패러독스입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발전이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킹의 계산은 근사값을 사용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와 책 B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 다르기 때문에 시간을 반대로 풀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A를 재현하고 책 B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B를 재현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우리네 일상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보는 실천적으로(pragmatically) 거의 항상 소실됩니다. 예를 들어 책 A를 태워도 책 B를 태워도 최종상태에서는 거의 같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재가 됩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는 최후의 공기와 재 전부의 분자의 위치와 속도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서 시간에 대해 방정식을 역으로 풀 때 한쪽의 경우에는 책 A가 되며 다른 한쪽의 경우에는 책 B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킹이 최초에 말한 의미에서의 정보문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중력이 재밌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앞서 행한 책을 떨어뜨리는 실험에서 떨어지는 책을 책과 함께 자유낙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해봅시다. 자유낙하하고 있으면,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든 엘리베이터의 예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창이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고 사과가 있다고 해봅시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매단 줄을 끊으면 사과도 인간도 엘리베이터 자체도 전부 같은 속도로 떨어집니다. 따라서 자유낙하하고 있는 사람은 중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주비행사는 이것을 사용해서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자유낙하함으로써 무중력의 훈련을 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떨어지는 책을 보면 책은 지평면으로 흡수되어 호킹 복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뚝 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블랙홀의 지평면은 별도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낙하하는 책과 함께 그대로 떨어지게 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AB도 그대로 그 속에 있게 됩니다.

 

여기서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앞서 책이 우선 자근자근 지평면에 흡수되어 마지막에는 그 정보가 전부 밖으로 복사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의 정보랄까 책 그 자체는 전부 내측에 도달해서 그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느 쪽이 맞을까요? 바로 떠오르는 것은 정보가 둘로 복사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정리(定理)가 있어서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복사기에서 복사가 가능한 이유는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극히 일부의 정보만이 복사되기 때문이며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패러독스입니다. 게다가 이 강론에서는 초끈이론 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초끈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것, 자유낙하 중에는 중력이 없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기본적 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성질 외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중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틀렸을까요?

 

이 패러독스의 해답은 아직 암시(suggestion)에 불과하지만 제안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묘상과 두 번째의 묘상 둘 다 맞지만 동시에 맞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블랙홀을 밖에서 보면, 책이 지평면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고 나중에 그 완전한 정보가 외측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평면의 내측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홀인 것이고, 밖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책이 표면에 도달해서 정보가 되돌아올 뿐입니다.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간주해서 정보를 복사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원리적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빛의 속도로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말해도 떨어지고 있다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떨어지는 사람으로서는 떨어지면 확실히 책은 내측이 있어서 내측에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서는 자신 또한 내측에 있기 때문에 지평면으로부터 밖을 향해서 나오는 호킹의 복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도 복사는 없습니다.

 

요컨대 밖에서 볼 때 블랙홀의 내측은 없고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사람에서 보면 확실히 블랙홀의 내측에 공간이 있지만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것은 누구 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공간으로 보이고 어떤 때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며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기술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이거나 공간이 아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블랙홀의 지평면과 같이 원리적으로 정보가 파악되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이중적으로 카운팅되기 때문에. 호킹의 복사가 있다고 하니까 블랙홀의 내측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하나뿐인 정보를 두 번 카운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 4. 우주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이 다중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가상적인 관측장치가 그림 4의 선이라고 해봅시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우주가 변하면 으깨져 죽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 합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 발하는 각도는 45도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관측기에서 점선으로 그려진 삼각형의 바깥 영역에서는 어떤 신호도 도달하지 않게 됩니다. 즉 이 영역은 블랙홀의 내측 같은 것으로 느껴지고 원리적으로 관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블랙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떻게 될까요? 그림 3과 같이 다양한 우주가 무수히 많은 탓에 진공에너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해답은 양자역학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전부가 확률의 문제입니다. 소립자 실험 등을 하면, 예를 들어 가속기에서 전자와 그 반입자인 양전자를 부딪히게 합니다. 그러면 최종상태는 확률적으로 뮤(미크론) 입자가 되거나 다른 입자가 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확률의 평행세계(parallel worlds)로 분기된다는 식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적인 다세계(多世界)라고 말이죠. 거품 우주가 생기는 과정도, 양자역학의 과정도 말입니다. 이런 거품이 생긴다, 저런 거품이 생긴다……라고 전부 확률적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거품의 생성이 확률적인 것이고, 관측기에 대해 어떤 장소에 거품이 생기거나 조금 어긋난 다른 곳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다른 거품이 생기거나……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한 각각의 평행세계를 편의상 전부 하나의 그림에 겹쳐서 집어넣은 것이 그림 3의 다중우주의 빅피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으로 분기된 양자역학적인 세계에는 무한이 없습니다. 앞서 말했던 무한히 A가 나오고 무한히 B가 나오는 문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의 다중우주라는 것은 원래 확률공간 외에는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1%, 이것이 5%, 2%, 4% 등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률이기 때문에 무한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에 다중우주 전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한이 나옵니다. 2, 3, 4중으로 카운팅되니까 무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의 블랙홀로 말하면, 내측의 공간도 있으며 동시에 외측의 공간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블카운팅하게 됩니다. 그러한 구조는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합의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하나의 세계에는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세계에는 다른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확률적으로 이것들을 전부 겹쳐서 그리면 이른바 일반상대성이론적인 다중우주의 묘상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앞서의 무한대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양자역학은 이유를 모르는 세계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엄청난 정밀도로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거대한 세계로 확장해보면 위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간ㆍ시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는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 또한 관측계에 의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물이 있고 파()의 이러저러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조사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분자가 어떤 관측적인 움직임을 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이나 시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의 연구는 최근 크게 진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인 연구자 또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 또한 지금까지 해온 연구입니다. 다중우주를 해왔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시간이나 공간의 성질을 깊이 배워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대지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틀렸고,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념의 변경이 수반되었습니다. 나아가 지구도 태양계에 있는 8개의 혹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들어와서 분란이 일어났고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손에 잡힌 것은 태양계라는 모델이며 태양계는 은하계에 엄청나게 많은 혹성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우리의 은하계조차 우주에 엄청나게 많은 은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때마침 21세기에 우주라고 말하는, 표준모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우주의 전부라고 말하기가 낯설어집니다. 다중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도 무수한 거품 우주 중 하나입니다. 더욱 다양한 구조나 성질이 있습니다. 또 다중우주의 정의상 무언가가 일어나도 다중우주로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어쨌든 다중우주론이 마지막은 마지막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그때마다 얻은 깨달음은 우리가 정말로 하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표면의 극히 얇은 곳에 살고 있을 뿐이지만, 실은 그 지구 자체가 밤톨만하고 태양계 또한 밤톨만하고 은하계 또한 밤톨만하고 우주 또한 밤톨만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이언스를 통해 배워왔던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은 부분의 일부 표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위의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언스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여기저기 글을 써왔지만, 다중우주가 맞다면 그것들 대부분이 틀렸습니다. 우선 우리의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성운과 서로를 끌어당겨서 40억년 정도 지나면 하나의 은하로 합체됩니다. 다른 은하는 가속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40억년 이후에는 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우주라는 것은 은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되묻는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 은하 하나도 중력 때문에 10의 22승 억년 후에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 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천문학자가 있다면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블랙홀이라는 거군요라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블랙홀도 호킹에 의하면 점차 증발해갑니다. 10의 100승 년 후에는 증발해서 부슬부슬 가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어딘가의 시점에서 우리의 우주 자체도 그 속에서 태어난 거품 우주에 잡아먹혀 다른 우주가 될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그것이 어떤 우주인지를 확률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이론의 힘으로는 그 확률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웃음).

 

 

 

 

 

野村泰紀、「々の宇宙えて」『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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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덴마크의 인류학자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영혼 사냥꾼(Soul Hunters)(2007)4종과 인격성의 관념의 번역본이다. 필자가 덴마크 학자인데다가 시베리아 동북부지역의 수렵민인 유카기르족의 우주론을 다룬 책이다 보니,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핵심을 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뒤늦게 주목받았다. 그렇지만 콘과 카스트루 등이 다룬 아마존 인디오의 우주론과 상당부분 공명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애니미즘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앞으로 한 장씩 이 책을 번역해 올리겠다.

 

 

 

4. ()과 인격성의 관념

 

인격의 카테고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카기르족(Yukaghir)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생명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아이비, 즉 영혼 혹은 생의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된다. 유카기르족에게 세계전체는 이처럼 타일러적인 애니미즘의 의미에서 살아있는 영혼에 의해 활성화된다.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이해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식 있는 존재와 의식 없는 존재를 구별한다. 개념적인 수준에서 이 구분은 적어도 대체로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우리의 범주에 대응한다. 연로한 유카기르족 사냥꾼인 와시리 샤루긴은 동물과 수목과 하천은 움직이고 성장하며 호흡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lyudi kak my)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들은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돌과 스키와 식료 등의 생명 없는 것과 구별된다. 그는 이어서 정적인 것은 단 하나의 영혼, 즉 그림자의 아이비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반면 동적인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림자에 더해 두 개의 혼령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두 개의 혼령이란 움직이게 하고성장시키는마음의 아이비호흡시키는머리의 아이비. 사냥꾼은 그것들[두 개의 혼령]이 인간으로 인정한 생명 있는 존재자들과의 사회적인 공유관계에 그저 얽혀있을 뿐이라고 귀띔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것만이 [꿈속에서] 우리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선물을 준다.”고 말하며 그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것과 살아있으면서그와 동시에 인간인것에 대한 샤루긴의 구별이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들이 인식하는 인격의 카테고리는 인간 종에만 결코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생명 있는 존재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격성의 연속체가 끊어지는 특정 포인트가 있다(Descola 1996: 324). 우선은 인격의 지위가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이 분류를 곰, 늑대, 울버린, 여우를 포함한 육식의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엘크와 순록을 포함한 사냥감의 주요 종들에 대해서도 할당하는 것 같다. 조류의 어떤 종, 특히 큰까마귀 또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곤충, 물고기, 식물을 포함한 그 외의 생명 있는 존재들은 언어와 의지능력을 갖춘 의식 있는 존재로 이야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기계적이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은 유카기리족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합적이고 단일한 영역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방식에서 고도로 인격화된 세계의 여기저기서 조우하는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의 연속으로 지각된다(Pedersen 2001: 416).

나아가 특정한 동물 종이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인간 종과 동물 사이에는 인격이 감지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잉골드가 지적한 것처럼 북방수렵민은 인간 종에 대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고유명[이름]을 사용해서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물은 개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 간주된다. 즉 동물의 인격화되는 것은 그 현현이라기보다 오히려 타입”(Ingold 1986a: 247 강조는 잉골드)이다. 유카기르족 신화에서 이러한 출현은 식별가능하다. 신화적인 인간 종의 등장인물들이 개개의 이름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물들은 -남자’. ‘산토끼-남자혹은 여우-여자와 같이 종종 남자여자라는 접속사를 수반해서 자신의 종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북방수렵민이 동물 그 자체가 아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영적인 소유자만을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1986a: 247). 그러나 그의 논의는 유카기르족과는 맞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한 동물과 그것과 연결된 영적인 존재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냥꾼들은 동물이 항상 단지 그 주재자의 영(master spirit)으로부터 인격성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양자가 공히 그 자체로 인간임을 주장했다. 요헤르손 또한 유카기르족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이를 유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카기르족의 견해에서 사냥의 행운은 동물의 수호령의 선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동물 자신의 그것에도 의존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만약 순록이 사냥꾼이 하는 일을 탐탁치 않아하면 그는 순록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Jochelson 1926: 146).

따라서 동물의 인격은 단지 그 주재자의 영의 인격의 연장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동물들은 그 자신이 인격이다. 다음 장에서 유카기르족에서 동물의 인격성 개념개별의 속성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서은 사냥꾼이 모방의 실천을 통해 사냥감과 관계하는 경향 속에 있는 그 특유의 방식에 상당부분 유래함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 종이라는 카테고리를 제외하면 인격으로서의 실체가 갖는 지위는 유한하지도 않으며 고유하지도 않다는 것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사냥꾼의 일상생활에서 실체는 상황에 따라 인격성을 들락거리며 움직인다. 이것은 인간 다음으로 전형적인 생명 있는 존재로 인정되는 대형 포유류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지에서 나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마을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피리돈 노인에게 엘크와 곰과 순록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그는 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아들아,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런데 다른 기회에 내가 그와 사냥에 나갔을 때 못보던 엘크의 발자국을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오호, 이 동물을 궁지로 몰아 숨통을 끊는 데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겠군.”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피리돈 노인은 스키 막대로 나를 세게 후려치며 엄숙한 목소리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들[엘크들]은 서로 대화를 나눠. 만약 누가 한 마리라도 자네 말을 들었다면 나머지 것들에게 전해주어 모두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고!”

왜 사냥꾼이 어떤 상황에서는 동물을 의식 있는 존재로 보고 또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은가라는 난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겠다. 여기서는 인간으로서의 동물이라는 유카기르족의 관념을 그들의 경제 및 영적인 신념에서 가장 중요한 종과의 관계에 기초해서 묘사한 후에 그 속에서 인격성에 관한 그들의 사고가 의거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은 곰과 순록, 엘크를 포함한 몇몇 동물을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자신들과 매우 닮았다고 본다. 그들의 신화는 엘크를 항상 빈틈없고 동료들 간의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성격의 특징은 단지 신화적 사고의 표현만이 아니라 그 동물의 행동특성에 관한 경험적 지식의 반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냥꾼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여우, 검은담비, 울버린은 더럽고 냄새나는 장소에 꼬이고 그래서 그것들의 소굴은 냄새가 심하지만, 그와 달리 엘크는 그런 장소에서는 살 수 없다. 만약 버려진 기름통으로 인해 강물이 오염된다거나 악취가 생기면 엘크는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그는 또한 한 엘크가 포식자에게 쫓겨 지치게 되면 종종 동료 엘크의 큰 무리 속으로 뛰어들고 그 무리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짐으로써 그 엘크가 도망치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포식자는 지친 엘크의 발자국이 어떤 것인지를 찾기 어려워진다. 마찬가지로 눈이 두껍게 쌓일 때에 엘크는 교대로 길을 만들어 약한 것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각의 엘크에는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멍청한 것도 있고 똑똑한 것도 있고 신경질적인 것도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있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언제나 서로를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것 같아.” 이러한 이상적인 모습은 젠더의 관점으로 관념화된다. 즉 대체로 엘크는 남성 사냥꾼에 대한 성적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바치는여성으로 지각된다. 후에 살펴볼 것처럼 사냥꾼들의 언어는 엘크사냥과 성적유혹 간의 상징적인 유사함으로 넘쳐난다.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인격과 확실히 구별된다. 개는 유카기르족에서 유일하게 기르는 동물이며 이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사이에서 기묘한 위치를 점한다. 어떤 점에서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생명체보다 인간존재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냥꾼은 종종 자신의 개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개들은 주인인 인간에게 경고하고 인간을 보호한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곰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캠프에 접근하는데, 그때 개들은 심하게 짖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모은다. 나아가 사냥꾼은 사냥뿐만 아니라 운송에서도 개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 지금은 스노모빌이 월등해서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부상했지만 썰매 끄는 개 무리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스노모빌의 구입과 유지, 연료보급에 드는 고비용이 소련 붕괴 이후 사냥꾼들이 연달아 현금부족에 빠진 것과 맞물려 최근 10년간 개 무리의 부활을 촉진했다. 개는 충실한 근무태도와 위험한 상황에서의 유용성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들조차 더럽다고 간주된다. 개들과 같이 있으면 깨끗한 사냥감 동물들도 곧 더러워진다. 또 개들에게 엘크, 순록, 곰의 중요한 장기(심장과 장)를 먹이는 것은 터부시된다. 사냥꾼들은 개의 부정함, 성적난교를 즐기는 것, 배설물 따위를 먹는 기호성, 그리고 불쾌하고 강렬한 체취 등등의 점에서 개를 엘크의 멋진 행태 및 편안하고 온화한 몸 냄새와 대비한다.

늑대, 검은담비, 여우, 울버린 등 포식성의 동물 또한 더럽다고 간주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사냥꾼들은 이 동물들의 부정함을 그것들이 가진 억제되지 않는 살생의 즐거움과 살해된 먹잇감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 사냥꾼은 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놈들이 엘크를 죽여서 몸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부끄러워. 고기를 나눠먹을 때 특히 가장 강한 놈이 가장 먼저 먹고 최고로 좋은 부분을 모두 제 것으로 취하거든.” 그러나 반사회적인 것의 권력화로 간주되는 놈은 따로 있다. 울버린은 모든 비인간적 인격 중에서 가장 탐욕이 세고 쩨쩨하며, 다른 놈으로부터 빼앗은 먹잇감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죽은 동물을 발견하면 사체에 구석구석 오줌을 뿌려놓아 다른 포식자들이 건들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내게 울버린과 맞닥뜨리면 반드시 죽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왜냐하면 울버린은 아나키스트라서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야.”라고 어느 사냥꾼은 말했다.

그런데 유카기르족에게 중요한 것은 계층의 사고가 아니라 차이의 사고이며, 또 지위적인 계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울버린이 내가 숨통을 끊어놓은 엘크의 사체를 끌고 가버렸을 때였다. 고기를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내가 스피리돈과 함께 살해현장에 도착했을 때 동물의 사체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울버린의 오줌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이런 빌어먹을 도둑놈!”이라고 나는 욕을 내뱉었다. 스피리돈이 응대했다. “, 그런 식으로 울버린을 보지 말게. 우리가 먹는 고기는 선물과 다를 바 없듯이 울버린 또한 자기가 찾은 고기를 하지아인[영적인 주재자]에게서 받은 선물로 본다네. 누가 먹어버리든 하지아인은 모든 아이들과 똑같이 울버린에게도 먹을 것을 준다네. 그러니까 울버린은 자기가 하는 짓을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걸세. 그러기는커녕 울버린의 마음속에는 훔쳤다는 이유로 울버린을 죽이려는 우리야말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걸세.”

스피리돈이 지적한 것은 유카기르족의 세계에서 선한행동과 악한행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채택된 퍼스펙티브에 의거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후에 퍼스펙티브주의’(Viveiros de Castro 1998)라고 불리는 관점으로 이 관념을 논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이해 가능한 중요 지점은 사냥꾼은 일반적으로 울버린을 적으로 보고 일 있을 때마다 죽이려 하면서도 울버린이 본질적인 선한다른 종과 대조되는 사악한 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종은 각각에 고유한 독자의 사회적 및 도덕적인 코드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울버린은 자신의 종의 습관에 따를 뿐이며, 사냥꾼에게서 도둑질을 한다 해도 반드시 사악한 의지로 그리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카테고리에는 자연의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물의 지도령(spirit guide), 인간의 혼을 먹는 식인령(cannibal spirit)(유카기르어에서는 ku’lku’l인데, 사람들은 대개 사하어에서 채용한 아바쉬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및 다른 수많은 정령 등 우리로 치면 초자연적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존재까지 포함된다. 이 존재들은 보통 깨어있을 때에는 눈에 지각되지 않고, 냄새, 소리, 감각만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에서 분리된 현실성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신비한 존재들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물리세계의 주인이며, 그것들은 적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는 즉각 현실에서 존재하는 자들로 경험된다.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불안

 

사냥감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유카기르족에게는 생의 본질이다. 1930년대에 소규모의 온실재배가 도입되었는데 짧은 여름철을 이용해서 감자, 토마토, 오이 들을 재배한 이들은 네렘노예(Nelemnoye)의 러시아인들이다. 많은 유카기르인들, 특히 옛날 세대의 사람들은 야채에서 나무같은 맛이 난다며 야채 먹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의 정열은 고기로 향한다. 특히 빨갛고 지방이 많은 고기는 그 어떤 음식물보다 중요시되고 그런 고기 없는 식사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한다. 고기는 가장 열띤 교환의 대상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족은 친족관계의 유대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고기를 나눈다. 또 남자들은 고기를 연인에게서 성적인 봉사를 확실히 받기 위한 선물로서 활용하거나 지방소재지인 지리안카에서 연료와 교환된다.

그런데 고기가 아주 중요한 한편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과 먹는 것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식재료로 가장 선호되는 동물인 엘크, 순록, 곰이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고 이해된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어느 젊은 사냥꾼이 말했다시피 엘크나 곰을 죽였을 때 인간 누군가를 죽인 것처럼 느낀 적이 있어.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쫓아내야해. 그렇지 않으면 수치심으로 이상해진다고.” 동물들을 죽이는 것에서 유래하는 이 도덕적 딜레마는 사냥과정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된다. 후에 사냥꾼이 어떻게 해서 사냥감에게 위험한 사랑의 감정을 발전시켜 그로 인해 사냥감을 죽이지 못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겠다. 나아가 살해 후에 이어지는 의례에서 사냥꾼은 자신이 그 동물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기가 마을에서 나눠질 때 샤먼의 주술이 사용될 만큼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였다고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각자 할당된 몫을 거부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곰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로 곰을 먹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까 곰을 먹는 것은 일종의 식인에 관여하는 것이다.

아마존의 일부 민족 집단에서 샤먼은 주술을 통해 원래는 문제 있던 고기를 문제가 되지 않는 음식물로 바꿀 수 있다(Hugh-Jones 1996; Descola 1996: 91-92; Fausto 2007). 그러나 유카기르인은 그와 달리 사냥감을 죽여서 먹음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관점에서 동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동물이 정확히 인간처럼 독자의 마음과 사고를 가진 것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상정된다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죽임을 당한 동물의 영혼이 환생한다는 유카기르의 사고 또한 죄의 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렇지만 사냥꾼이 사냥감을 죽일 때 종종 현실적인 도덕적 불안을 자각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유카기르족은 평상시에는 육식을 즐기고 육식할 때에 죄 혹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분명한 징후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인의 문제는 그들 사냥의 우주론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도덕적 패러독스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바쉬랄이 식인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냥감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식인자라고 유카기르인들은 말한다.

 

 

신체와 냄새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성은 정신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특성까지 포괄한다. 신체와 냄새는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의 관념의 일부이며 지금 당장 그들 자신이 어떤 부류의 종과 왕래하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데에 중요하다. 냄새에 관해 가장 중요한 구분은 이레예(ile’ye)페이옐(pe’yel)이다. 부패, 질병, 죽음을 의미하는 후자는 다양한 악의 속성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의 영은 언제든지 눈에 보인다고는 할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는 다만 그 불쾌한 냄새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바쉬랄이 사냥감을 찾는 동안에는 언제나 냄새가 나지.”라고 어느 늙은 여인네가 말해주었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악취를 풍긴다네.”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유체는 페이옐이 되어 가까운 친척을 오염시킨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이것은 친척 남성이 그 후로 일 년이 지날 때까지 동물을 잡는 데 순탄치 못할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몸에 두르게 되어 그것이 사냥감 동물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겁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레예는 달콤함, 즐거움, 기쁨을 의미하고 특히 맛있는 음식의 냄새, 아이나 여성의 냄새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에 대한 애정은 입맞춤보다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아주 좋은 냄새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목덜미나 턱의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여성의 성적매력은 겉모습보다 냄새의 문제이며, ‘딸기꽃이나 산초냄새가 나면 좋다고 말한다.

예로부터 냄새는 한 인물이 어떤 민족에 귀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로 간주되어왔다. 요헤르손은 유카기르인이 에벤인을 그들이 내뿜는 다람쥐와 썩은 순록고기 냄새로 식별하고 또 사하인을 그들이 내뿜는 썩은 생선 간과 소똥 냄새로 식별한다고 했다(Jochelson 1926: 23). “그렇지만 지금은...”이라고 어느 연로한 여성은 말했다. “누구에게라도 많던 적던 똑같은 냄새가 나.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고 같은 것을 먹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 특히 사하인이 러시아인의 냄새에 대해 드러내는 강한 혐오감에 놀란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러시아여성과 결혼한 네렘노예(Nelemnoye) 출신의 사하 여성과 함께 저녁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은 적이 있다. 아들이 자신의 아이를 모친에게 안아보라고 건네주었을 때 러시아인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 아이를 안는 것을 거부했다.

비인간의 인격이 내뿜는 냄새는 유카기르어에서는 별도의 어휘, “코에 관계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요로라(yo’rola)에 의해 지시된다. 이 말은 강한 향기를 발산하는 포유동물에 대해 특히 사용된다. 즉 여우, 울버린, 엘크, (특히 발정기의) 순록 수컷 및 유럽족제비를 말하며, 이 중에서도 유럽족제비는 유달리 강한 냄새를 풍긴다. 나는 사냥꾼들이 울창한 타이가 숲에 숨어 지내는 엘크와 곰을 냄새만으로 찾아내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똥은 사냥감 동물의 은신처를 드러내는데, 그 냄새로 알아챌 수 있다. 많은 사냥꾼이 이 일에 숙련되어 있으며, 똥의 강도나 냄새를 기초로 그 동물의 성별, 연령, 건강상태까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다. 또 사냥꾼이 말하기를 각각의 장소의 영적인 지배자는 자신의 영역을 냄새의 흔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물이 냄새자국과 영역표시의 지점을 확정해서 활동영역을 나타내는 것과 거의 유사한 행동방식이다. 실제로 어느 사냥꾼은 한 정령의 영역을 통과해서 다른 정령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냄새만으로 알 수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강조해야하는 것은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이 후각을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시각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냥꾼이 엘크의 냄새를 몸에 묻히고 그 몸짓을 모방해서 엘크를 흉내 낼 때 그들의 목적은 그 동물을 가시화해서 공격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으로 불러내는 데에 있다. 뉴기니 숲의 우메다족(Umeda)(Gell 1996: 233-54)이나 아마존의 수야족(Suya)(Classen 1993: 8-9)처럼 시각을 경시하고 억압한다고 보고된 문화에서조차 그들의 생업활동에서 특히 사냥감을 공격하는 순간에는 확실히 시력에 의존하려 한다. 실제로 나는 무문자사회를 반시각적으로 정형화하는 경향을 조금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유카기르에서 나 자신의 경험은 스미스의 경험(Smith 1998: 412)과 공명한다. 그는 치페완족(Chipewan)의 사냥꾼들(데네족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숲의 감성이 강조하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감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 그리고 나아가 한층 강력하게 그것들의 감각이 상호작용하고 독자의 의식수준을 만들어내듯이 그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일 것, 이다.” 이 언명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즉 여러 감각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감각의 명확한 계층구조를 구축하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수렵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냥에 나설 때에는 사람의 모든 감각이 가동되어야 하고 지각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각각의 감각이 협동해서 투입되어 분리가 거의 불가능한 채로 뒤섞여야 한다.

사례를 들어보면, 사냥꾼의 머리는 그의 시각, 청각 및 후각에게 공통의 장이다. 사냥꾼이 사냥감 동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면 필연적으로 눈과 코를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돌리게 되며, 그러한 행동은 동일한 정보원에 대해 방향지어진다. 따라서 분리된 지각의 회로를 통해 사냥감을 감지한다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다라기보다, 이러한 각기 다른 감각들은 기능에 따라 그 겹쳐짐을 현시하는 것이며 신체적인 방향지움이라는 전체시스템 하에서 편성되는 것이다(Merleau-Ponty 1998: 317-18; Ingold 2000: 262). 랑거(Langer 1989: 49)가 제시한 사례도 이와 같다. “예를 들어 만약 나의 시선이 책상 위 꽃병에 꽂히면, 나의 눈이 그것을 훑어서 움직이는 방식은 내 손가락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을 미리 지시한다.” 그녀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대상을 느끼는 이상으로 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느끼고 손으로 대상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각기 다른 감각들의 현시는 단 하나의 것으로서, 감지하는 신체 그 자체로 상승작용 하는 시스템 속으로 휘감긴다. 그 때문에 그 감각들을 지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된다.

유카기르족 언어에는 신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정신에 해당하는 말이 없지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냥꾼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와시리 샤루긴에게 물었을 때, 그는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머릿속 아이비의 움직임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그 어느 쪽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다른 부류의 인격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고도 주장했다. “물론 인간과 엘크, 곰은 다른 사고를 하지. 그것들은 각각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야.”라고 그는 논했다. 이처럼 아이비와 생각하는 능력 사이에는 분명히 연결되고, 그것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비인간의 인격에서도 형태상으로는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한다. 이 차이의 근원은 내게는 신체의 특이성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이비가 이성의 능력을 일으키는 것에 반해, 신체는 사고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매개점이 된다. 바꿔 말하면, 비인간의 인격이 인간이나 다른 비인간의 인격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비 혹은 영혼 때문이 아니다. 아이비가 동일한 이성적 능력을 인간과 비인간에 부여하는데도 그것들의 인격이 다른 모습으로 사고하는 것은 각각의 종이 특정한 신체적 존재이며, 세계에 대한 지향성을 일으키는 독자의 육체적 자연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면 특정한 신체의식’(1998: 317-8)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유의 신체를 가진 결과로서 각각의 종은 세계를 독자의 방식으로 지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와시리 샤루긴은 인간의 포식행위와 아바쉬랄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해주었다. “우리 사냥꾼들이 엘크사냥에 나가는 것처럼 아바쉬랄도 사냥을 한다. 그러나 아바쉬랄들에게는 우리의 아이비가 엘크다. 여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암컷 엘크가 보인다. 남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수컷 엘크가 보인다. 그리고 아이의 아이비를 볼 때 정말이지 작은 엘크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들, 마른 사람들, 늙은 사람들 혹은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아바쉬랄에는 그것들이 각기 다른 크기와 연령의 엘크로 보일 것이다. 아바쉬랄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냥꾼이지만 무엇이 엘크로 보이는지는 우리와 다르다.”

아바시(abasy)가 인간 종의 아이비를 죽이고 먹는 것에 성공하면 해당 인간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루긴은 내게 아바쉬랄은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는 당연히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힘겹게 설명해주었다. 그것들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캠프를 가지고 있으며 개썰매로 여행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아바쉬랄은 그 자체로 사악한 생명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보는 한에서 인간의 아이비를 죽여서 먹는 것은 나쁜 행위가 된다. 인간 또한 사냥감이 되는 동물의 눈에서 보면 아바쉬랄이다. 내가 이를 깨달은 것은 사냥감 동물이 인간 사냥꾼을 무서워하는지 니콜라이 리하체프에게 물었을 때였다. “물론 무서워하지라고 그는 답했다. “우리는 그 몸을 먹어. 그래서 동물에게 우리는 악마야.” 그리고 그는 그래서 동물은 우리에게 질병이나 그 외의 액을 보내지. 죽여서 먹는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 말야.”라고 덧붙였다.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성의 동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후술하기로 하고,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유카기르인에게 아이비는 다양한 존재를 연결하고, 그것들을 잠재적인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한편으로 이러한 존재의 각기 다른 부류의 인격으로서의 독자성은 각각이 가진 신체의 특이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형상이나 움직임, 냄새를 풍기는 신체의 육체적 특질이란 바로 종별의 각기 다른 정체성이 창발하는 장이다. 사냥꾼이 자기를 인간 종의 사회적도덕적인 척도에 맞추어 사고하는 인간의 인격으로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그의 신체가 인간존재의 신체이기 때문이며, 순록이나 아바시 또는 그 외 비인간적인 인격의 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종의 공동체 내부에서 사냥꾼에게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 자의 신체가 아니라 아이비. 한편 종들 사이에 걸친 관계에서 그것은 역전한다. 이 관계에서 어떤 부류의 인격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다. 한 인격의 종으로서 정체성은 신체에 귀속되거나 혹은 신체에 접합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며 구축하는지는 당신이 가진 신체의 종류에 의한다.

 

 

상황으로서의 인간성

 

유카기르족에서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성을 해명하는 것으로서 포괄적 및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창조신화는 요헤르손도 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카기르인이 성서의 창조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출현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내게 연로한 여성 아크리나 샤루기나는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먼 옛날,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세계는 매우 더웠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매우 작아서 다람쥐 모피로 한사람분의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부른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날고기를 먹었으며 불 피우는 법을 몰랐다. 세계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작은 사람들은 다람쥐를 죽여 그 모피를 입었다. 그래도 너무 추웠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횃불을 들고 강림했다. 예수는 그것을 작은 사람들에게 내려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불 연기가 작은 사람들을 키 크게 만들었고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

 

불이 자연의 물질을 문화적 용도로 전화시키는 원형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틀에 박힌 양식 중 하나이다. 요리란 그 가장 명백한 사례다. 그러나 유카기르인에게 불은 또한 사람들을 변용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캠프파이어 연기에 쐼으로써 한 인격의 종으로부터 다른 인격의 종으로 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해보자. 유카기르인에게 좋은 사냥꾼은 자신의 인간 냄새를 억누르는 기술에 숙달된 자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사냥꾼이 숙련된 탈인간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들의 일반이론이다. 즉 한 인간이 가진 인간 신체의 성질을 사냥감 동물의 신체의 그것으로 바꿔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냥꾼은 숲에 나가기 전날 밤에 바냐(banya 사우나)를 하러 간다. 그들은 비누를 사용하는 대신 마른 자작나무의 묶음으로 온몸을 문지른다. 엘크는 자작나무 잎의 향기를 맡으면 도망가지 않고 사냥꾼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아가 특히 강한 인간의 냄새가 난다는 아이는 사냥꾼에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집 안에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부모는 아이들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사냥꾼이 숲으로 출발할 때에는 아이의 냄새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식이나 손자를 안아서도 안된다.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전제조건은 성적인 절제다. 적어도 사냥에 나가기 전날 사냥꾼은 성교를 참아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냥꾼이 성교를 참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성적인 관심이 사냥감 동물 및 그것과 결부되는 영적 존재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성적접촉이 그의 신체에 명명백백한 인간의 악취를 남기는 때문이기도 하다. 사냥꾼들은 내게 사냥감 동물을 매료하는 이들은 오직 인간 체액의 냄새가 없는 이들뿐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사냥하는 동안 숲의 세계나 잡힌 동물들에게 이질적인 외부자의 신체이기를 정지시킨다. 그들에게 사냥의 본질은 사냥감 신체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함으로써 사냥감과 동일화하고 그 지각과 행동 모드를 알아내려는 시도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캠프가 있는 땅은 인간의 냄새, 특히 나무연기 냄새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담배든 캠프파이어든 연기야말로 동물의 냄새를 중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숲과 캠프의 경계는 어떤 물리적인 표지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파이어의 연기가 도달하지 않는 곳의 위치로 그어진다. 따라서 나무연기는 인간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냥꾼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그에게서 타자성을 쫓아내고 그를 인간화한다는 현실적인 감각을 준다. 유카기르족에게 나무연기와 인간성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간성이라는 상태가 인간존재에만 귀속되지 않고 모든 인격 종에 머문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은 인간의 삶과 유사한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숲을 돌아다닐 때 혹은 강을 헤엄칠 때 물고기나 사냥감 동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숲의 어딘가 혹은 강과 호수 깊은 곳에 있는 그 자신의 땅에 들어갈 때 그것들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산다고 한다. 비인간의 집은 인간의 집과 완전히 똑같다. 집 한가운데에 난로가 있고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숲에서 돌아오는 그것들을 인간화한다. 다만 그 변용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변용한 상태가 되어도 동물이나 다른 비인간은 변용 전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고 하며, 이러한 특징에 의해 그것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특별한 집단의 존재로서 부류가 결정된다. 다음 장에서 언급할 이야기에는 한 사냥꾼이 순록인간과 만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천막에 머무는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신음소리를 내고 고기 내신 이끼를 먹는다. 마찬가지로 여우인간은 강렬한 냄새를 풍기고 교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더러운 집에 산다. ‘엘크인간은 일반적으로 우호적이고 배려심이 있으며 집을 깨끗이 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거나 이전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행동들은 다음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동물은 인간 종의 사냥꾼과 만날 때가 아니라 자신의 땅에 있을 때만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숲속에서 그것들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문화적인 속성을 잃는데, 이 과정을 통해 카니발리즘을 범하리라는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동물을 죽여서 소비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크리족(Cree)에 대해 탄너(Tanner 1979)가 제시한 해석이다. 사냥감 동물이 동물의 눈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외견을 띠고 있는지는 숲을 돌아다니는지 자기 집에 머무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고방식은 크리족과 유카기르족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다. 크리족에게 사냥감 동물은 두 수준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한다. 하나는 자연적 수준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수준이다.”(Tanner 1979: 137)라고 탄너는 주장한다. 자연적 수준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죽임을 당해 소비되는 단지 물질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화적 수준에서는 사회적문화적 조직에 대한 전통적인 크리족의 양식을 모델로 하는”(1979: 137) 영역에 참여하는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재-해석된다.

그러나 이미 잉골드(Ingold 2000: 48-52)와 브라이트만(Brightman 1993: 176-77) 등의 논자가 지적했듯이, 동물의 출현을 한편으로는 영적/문화적’,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자연적으로 나눠서 사고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 첫째,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으로서의 사냥감의 지위는 실제 사냥 전후에 이뤄지는 이야기로서 인류학자가 상징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만 표명되지 않는다. 사냥꾼이 숲에 있는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행동에서 사냥감의 지위는 인격으로서 언급된다. 잡힌 동물의 인격은 단지 이야기하는 중에 부가되는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의 실천적인 행위에 침투한다. 유카기르인이 사냥의 성공을 종종 사냥꾼에 대한 동물의 사랑으로 되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고방식은 상호 응답하는 <타자>를 전제로 하는”(Brightman 1993: 177)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짜여진행동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잡힌 동물은 단순한 사물로 환원되지 않고, 사냥꾼은 그것을 마음 없는 고기 이상으로 본다.

나아가 유카기르족은 동물을 그들 자신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할 뿐만 아니라 사냥꾼 자신을 사냥감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것은 잡힌 동물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대화를 절제하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일련의 덫을 점검할 때 사냥꾼은 홀로 잘 다닌다. 그런데 가령 엘크나 곰을 사냥하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할 때도 무엇보다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소리를 내는 경우 그 소리는 동물을 유혹하려고 동물의 소리를 모방할 때뿐이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동물의 소리나 신체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문화적인 것에 대치되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유카기르어에는 우리의 자연에 대응하는 말이 없으며 인간고유의 속성으로서의 문화에 상당하는 말도 없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냥꾼이 사냥감과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때, 그 동물의 기분과 감각 및 감수성과 어떤 형태로든 공명하는 퍼포먼스를 만들어냄으로써 동물을 유혹하고 동물이 자신을 바치도록유도한다. 따라서 동물의 정체성을 몸에 두르는 것은 탈주체화의 프로세스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화의 프로세스로 생각할 수 있다. 사냥꾼은 동물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적 경험 혹은 네겔이 말한 경험의 주관적 성격’(Nagel 1997: 166)을 도입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personhood)은 인간 종의 증거가 되는 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란 인격의 수많은 외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엘크나 순록이 자신의 집에 돌아갈 때 인간의 겉모습을 띤다고 유카기르인이 주장할 때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영역[문화와 자연]을 횡단해서 비유적인 유사함을 끌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화의 전제가 되는 참된 단일성을 지시하는 것이다”(Ingold 2000: 50). 나는 이 단일성을 상황으로서의 인간성’(Descola 1986: 120)으로 제시하겠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의 인격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인다 해도 인간의 행동과 유사하거나 완전히 동일한 행동양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유카기르인은 믿는다.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Viveiros de Castro 1998)가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논문에서 퍼스펙티브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 사고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으로부터 다양한 부류의 인격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현실을 지각한다”(1998: 469). 이것들은 동일한 세계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이 아니라 동일한 관점을 각기 다른 현실에 들여온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부류의 종은 각각 독자의 영역에 있으며 세계를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각각이 무엇을 보는지는 그 신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인간 종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동물을 동물로서, 또 정령을 (만약 보인다면) 정령으로서 본다. 그렇지만 (포식) 동물과 정령은 인간을 동물(사냥감)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사냥감으로서의)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서 아니면 (포식) 동물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동물과 정령은 자신을 인간으로서 본다. 그것들은 자신의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혹은 의인적 존재가 된다고) 지각하며, 자신의 관습과 특징을 문화의 형식으로 경험한다”(Viveiros de Castro 1998: 470).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대략적으로 유카기르의 사고와 공명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종의 존재자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지각경험을 하는지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아바쉬랄이 인간의 아이비를 엘크로서 보는 반면, 인간존재는 아이비를 영혼 혹은 생명의 본질로 본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엘크를 사냥감으로 보는 반면, 엘크는 인간을 아바쉬랄로 본다. 따라서 정령과 인간 양자 모두는 사냥감을 보고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나서지만 무엇을 사냥감으로 지각하지는 다르다. 그리고 누구를 악령으로 생각하는지는 어떤 신체의 퍼스펙티브를 채택하는지에 달려있다.

덧붙이면 특정한 종이 다른 종에 대해 가지는 퍼스펙티브는 그것이 자신의 양식과 실천을 지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냥꾼은 울버린을 탐욕이 강하고 부도덕하다고 보지만, 울버린의 퍼스펙티브에서 보면 그 반대다. 스피리돈이 지적했듯이 울버린은 자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반면, 인간 사냥꾼이 울버린을 죽이려 할 때에는 부도덕한 행동규칙을 시인하는 자로서 울버린을 본다. 이처럼 다양한 인격의 종들 각각은 말을 사육하고 불을 소유하며 발화능력을 활용하고 도덕규범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인간주체로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일한 조건에서 자신을 지각한다.

나의 이 관찰에 비춰보면, 유카기르족에게 인간성의 유래를 설명하는 포괄적인 기원신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기묘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인간성이란 모든 종의 인격이 제각기 고유한 자연을 경험하는 형식이다(Viveiros de Castro 1998: 477). 다양한 부류의 종의 인격의 차이는 주로 개별의 퍼스펙티브의 처소인 특유의 외적특징 혹은 신체에 존재한다. 따라서 동물의 기원에 얽힌 유카기르족의 무수한 신화가 바로 이 점다른 부류의 동물들이 어떻게 각각의 신체적인 외견을 입수했는가에 관련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Jochelson 1926: 241-98: 1900; Zokova, Nikolaeva, and Demila 1989; Spindonov 1996[1930]: 46-57).

그러나 조금 불가사의한 것은 동물이 자신의 땅에 있을 때조차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지 않고 동물의 특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실제로 모든 종의 인격이 해부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이 자신을 보듯이 자신을 본다고 한다면, 동물들이 자신의 숨겨진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데도 자신을 동물의 생리적 및 행동적 특질까지 갖춘 것으로 본다는 패러독스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신체의 문제 그리고 동일성과 타자성의 동태에 대해 신체가 맺는 관계의 문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Rane Willerslev (2007) “Chapter 4. Ideas of Species and Personhood”, Soul Hunters: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h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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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상관주의 비판, 도구, 사물, 배치, 교차교환

 

문화인류학과 현대철학이라는 두 영역에서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부상하는 경향의 하나로 인간과 자연(및 사물)의 관계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묻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서양문명이 문화들을 상대주의적으로 다루는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객관적인 자연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에 다름이 있음을 주창하고 있다. -인간의 퍼스펙티브에서 파악된 세계가 다종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에서도 대상세계를 인간주체와 상관적인 형태로만 파악한다는 퀑탱 메이야수의 비판(상관주의 비판)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 또한 인류부재의 세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는다. 물론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20세기에도 있었지만, 다양한 비-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심적 위치를 점할 수 있고 나아가 사물이 일정한 퍼스펙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기묘한 논점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객체지향의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한 그레이엄 하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이라는 논의를 발전시켜 사물과 사물이 상호 절대적으로 독립하고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세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진 <도구>가 연관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 연관에 불확정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스스로의 실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갖는 인간이다. 인간의 수발을 들 때 <도구>는 불확정한 존재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에 반해 하만은 각각의 <도구>나 사물 자체가 인간존재를 떠나 이미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불확정성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온갖 사물, 대상, 혹은 <도구>를 생각해낸다 해도 이제까지는 그것들을 연결하는 중심적인 매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주체였다. 대상세계가 아무리 다양성과 차이를 품는다 해도 그것들을 무언가의 정합성 속으로 회수하는 것은 주체의 움직임이며, 그 과정에서 주체 자체가 변질된다 해도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이 특권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대상세계가 차이와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특권적인 주체가 본 잉여, 외부로서 그렇다.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사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성에 대해 열린 여지를 주체에 남겨주기 위한 이론이었다. 기존 철학에서는 대상세계가 주체로부터 진정 독립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주체와 대상을 상관적으로만 다루었다는 메이야수의 작금의 비판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주체와는 별도로 대상이나 <도구>를 매체로 함으로써 이러한 구도를 뒤집으려는 것이 현대철학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이다. 하만이 말하는 오브젝트(object) 또한 그러하며, 인간부재의 세계로부터 사고를 출발시키는 메이야수 또한 그러한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는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들이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외부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주체에게 나타나는 한에서의 사물=대상만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물과 사물 또한 서로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물로부터 보고 다른 사물은 표면적인 그 나타남(감각적 오브젝트)으로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하만은 말한다. 사물에는 그 숨겨진(탈각한) 외부(실재적 오브젝트의 일부분)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의 부정확한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주체에 의한 퍼스펙티브뿐만 아니라 사물로부터 본 사물, <사물의 퍼스펙티브>로부터 보이는 사물을 고찰해야 한다. 사물이나 비인간을 매체로 복수의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발상이 현대철학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사물이나 <도구>에 대한 이러한 착상, 그리고 그를 통해 기존의 방법론을 비판하려는 태도는 인류학에서도 메릴린 스트래선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사회학이나 비평이론의 인류학버전인 재귀인류학에서는 타문화 속에 몸을 던지고 그 문화의 내측을 체현해서 말하는 특권적인 <화자>를 부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행자로서의 <화자>는 복수의 문화들에 동시에 몸을 던지고 자문화조차 상대화하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결여항적인 매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류의 문화상대주의는 문화들을 단지 단편적인 형태로만 제시할 뿐이라고 스트래선은 비판한다.

이에 반해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도구>=사물이라는 매체다. 한 집단을 특정의 배치(, ) 하에서 연결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도구>. 즉 그 <도구>를 통해 무언가의 해석을 하고 특정의 관계(배치)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때 동일한 <도구>가 인접하는 다른 사회집단 하에서는 다른 해석이 내려지고 다른 배치가 묘사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도구>는 그러한 동료집단들의 문화를 상대화하면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이때 각각의 인간집단이 읽어 들이는 용도에 앞서서 그러한 <도구>=매체는 이미 존재한다. <도구>나 사물의 <모조리 퍼 올릴 수 없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간의 <도구>는 한 집단에서는 중심적인 기능을 맡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듯이 또 다른 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 다른 집단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맡는 또 다른 <도구>가 존재할 것이다. <도구>는 집단이 그리는 배치()와 다른 집단이 그리는 배치()를 부분적으로 연결하며, 그 한편으로 배치() 자체 또한 이미 다른 <도구>를 포함하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매체로서의 <도구>와 배치()는 고정되지 않고 각각 다양한 모습을 띤다. 문화들은 배치()의 배치()인 최대의 구조로 회수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재귀인류학처럼 단지 단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최대의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어떤 부분에도 복잡한 사물=<도구>와 배치()의 교차교환의 복잡한 관계가 발견된다는 것이며, 도처에 그것이 예시(豫示)된다는 것이다.

<도구>=사물이 다양한 인간집단의 행위를 상대화하는 기축이 됨과 동시에 그러한 사물 자체가 복수로 나타난다는 스트래선의 논의와 그 방법론은 주체중심의 발상 그리고 세계의 다양성을 인간주체와의 상관성을 벗어나는 잉여로만 보는 사고방식을 진작 넘어서고 있다. 철학이 마침내 근대서구의 사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기 시작한 오늘날, 인류학으로부터 얻는 시사점은 매우 풍부하다. 현대사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제까지의 주체중심의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사물을 중심적 매체로 편성하는 이론을 지역적인 문화사상에 머물지 않고 보편화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시야로부터 자연과학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Lexicon 現代人類学1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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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애니미즘, 이와타 케이지, 쇼보겐조(正法眼蔵), 상관주의, 원풍경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anima)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애니미즘의 세계관 자체를 서구근대의 그것과는 다른 존재론(ontology)으로 재정하려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문화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을 내추럴리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이라는 유형과 더불어 유력한 세계관들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근대서구의 인간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내추럴리즘과 특히 대조를 이룬다. 내추럴리즘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들을 다종다양한 것으로 사고하는 한편으로 자연계 그 자체를 객관적인 법칙이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인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나 비인간 또한 각기 세계를 가치짓는 퍼스펙티브의 중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과 같다. 그러므로 세계 그 자체는 다양한 퍼스펙티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한마디로 내추럴리즘이 다문화주의와 단자연주의인 반면, 애니미즘은 단문화주의(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와 다자연주의다.

단순한 문화상대론이나 가치상대론에 의한 이질적인 문화의 허용은 근대에서도 포스트모던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주의 자체를 뒤집지 않는 한, 근대적인 세계관의 연장선상으로밖에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문명에 대해서도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층(古層), 그 핵심부에 도달할 수 없다. 21세기에 이르러 철학자 미셸 세르는 데스콜라의 작업을 채용하면서 서양문명 자체에 내추럴리즘 이외의 세계관이 실제로 짙게 남아있으며 켜켜이 뒤얽혀있음을 세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태도는 애니미즘적인 문화 위에 대륙전래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형성된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참고할만하다. 일본문화 속에 역사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면서 현대문명과 혼효하는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서구근대의 그것과 길항하는 <사상>으로서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우리[일본인]가 애니미즘에 대해 그 뉘앙스를 남김없이 음미하고자 한다면, 프랑스사람인 데스콜라가 고찰한 것보다 우리의 세계관에 내재한 접근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떠할까?

 

전전(戰前)부터 전후에 걸쳐 교토학파의 학문의 흐름을 이어받은 특이한 인류학자 이와타 케이지의 애니미즘론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전후 교토의 지사인(慈済院)에서 하숙하면서 도원(道元, 1200~1253, 일본의 禪僧)正法眼蔵을 읽으며 청년시대를 보낸 이와타는 본래 지리학을 배우는 중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코스모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지층의 퇴적 및 조산활동, 기상, 식물의 수평수직 분포 등이 모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질서를 가진 것으로 이 세계를 그리려는 시도다. 전일체(全一體)로서의 세계, <코스모스>를 다루는 과제를 이와타는 훔볼트에게서 이어받는다. 선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코스모스>에 대한 강한 희구는 이와타가 후에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여 애니미즘의 연구로 나아간 출발점이 되었다.

세계를 전일체로 파악하기 위해 훔볼트가 코스모스에서 탐구한 방법은 결국 상관학(Physiognom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이 복수의 층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 관련되고 합쳐지는 모양을 손금을 읽듯이 읽어가는 것이다. 이때 전일체로서의 세계, 집대성된 코스모스를 통일하는 것은 그것과 대치하는 인간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의식이 미치는 한에서의 <끝없는 전세계>. 현대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 인간에게 자연과 세계, 인간과 관련되는 (상관적인) 한에서만 고찰되어왔다는 것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사물과 세계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상관주의 비판으로 불리며 21세기 철학에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와타는 훔볼트의 <코스모스> 속에서 바로 상관주의적인 한계를 진작 알아채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진정한 <코스모스>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만년의 훔볼트는 카멜레온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카멜레온이 좋소. 카멜레온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각기 다르게 움직일 수 있소. 오른쪽으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왼쪽으로는 땅을 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오.” <코스모스>와 대치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의식은 특권적이지만 <코스모스>의 외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는복수의 퍼스펙티브를 갖는 것은 통상 불가능하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공존교차해야만 진정한 전일체, 진정한 <코스모스>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아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을 통해,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까지 실현하는 것이 그의 학문의 목표였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에게 로컬의 <문화의 내측>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그 문화가 <문화의 외측>의 퍼스펙티브를 더불어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한 복수의 퍼스펙티브의 교차공존이야말로 애니미즘 문화의 특징이라고 이와타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교차공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일까? <문화의 내측><문화의 외측>은 이와타에게 종종 각각의 <근경(近景)><원경(遠景)>에 비유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전일체로서의 <코스모스>는 그 양자가 겹치는 곳에서 성립하는 <원풍경(原風景)>이다.

예를 들어 보르네오의 이반족에서는 벼의 탈곡에 사용하는 절구가 그대로 악기가 되고 그 소리가 그들의 일상생활에 구심력으로 작용한다고 이와타는 말한다.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하는 힘은 그 자체로 사물 내지는 자연과 함께 한다. 그러나 그 절구소리는 벼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문화의 외측>에 있는 자연 그 자체에로, 그대로 땅과 연결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환경과 우리는 불가분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한다. 그 속에서 사람과 사물, 풍경은 말하자면 거울적이다. 그러나 또 그 풍경은 바로 거대한 풍경, 자연과도 저절로 연결된다. 주체대상의 관계는 주체를 축으로 겹쳐 쌓이고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세계, <원풍경>=<코스모스> 속으로 포섭되고 만다. 아니, 그렇지 않다. <문화의 내측>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과 자연 속에서 이미 <코스모스>는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새가 하늘을 날 때, 새는 하늘과 일체가 된다. 그러나 본래 하늘은 무한의 하늘 그 자체와 일체이며 비공(飛空)의 행리(行履)는 가늠할 수 없다.”(어디까지 날고 어떻게 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좌선잠’(坐禪箴)을 해석해서 도원은 말한다(正法眼蔵). <근경><원경> 그리고 <원풍경>은 바로 그렇게 연결된다. 흔하디흔한 사물 혹은 자연과의 대면의 순간에 그 장면 자체를 포섭하는 더욱 큰 <원풍경>을 직접 느끼는 것. 그 놀라움과 함께 근대의 이원론을 뒤집고 그렇게 스며든 애니미즘의 사고를 본류로 되돌리고 나아가 전일체로서의 세계의 품에 다시금 안기는 것. 바로 이 의미에서 이와타의 바람은 애니미즘 사상의 회생이었다.

 

Lexicon 現代人類学10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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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오쿠노 가츠미(奥野克巳)

 

키워드: 에드워드 타일러, 종교기원론, 인지진화, 데카르트주의, 서구이원론, 인간과 비인간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은 생물의 인지능력이 만들어낸 세계를 환경세계로 파악했다. 진드기가 진드기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넘어서 물리적인 환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현실뿐만 아니라 초현실의 영역으로 뻗어가는 지각이야말로 인간의 인지능력이며 인간의 환경세계의 특징이다.

그러한 인지능력을 인간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일까?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원초의 인간이 꿈이나 죽음을 통해 평소 머무는 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실체로서의 혼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추론한다. 타일러는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혼이나 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애니미즘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것을 종교의 원초형태로 규정했다. 애니미즘이란 움직이는’ ‘이라는 뜻이며 여러 장의 그림을 연속해서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에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다.

애니미즘이 다신교로, 나아가 일신교로 진화한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일러는 종교의 기원론에도 관심이 컸다. 타일러와 동시대 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는 에밀 뒤르켐 등이 이끈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는 문화인류학의 주요한 토픽이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문화진화론이 비판받으면서 문화인류학은 종교의 기원이라는 테마를 더 이상 다루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20세기 후반이 되면 동물행동학과 영장류학, 진화론과 인지과학등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과 고고학 등이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를 행하였다.

인지고고학자 스티븐 마이슨에 의해 제기된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가설에 의하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3만년 전에 종교가 출현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에는 언어영역, 사회영역, 기술영역, 박물영역 등의 영역들이 분리되어 있었고 그래서 사물 그 자체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반면 현생인류의 뇌에서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한 벽이 무너지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조직이 형성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회로를 통해 영역들을 횡단하는 유동적인 지능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현생인류는 비유나 상징을 조작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의식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현생인류는 지금과 여기를 초월한 영역으로 뻗어가는 인지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고 종교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또한 타일러가 애니미즘이라고 부른 현상과 동일하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애니미즘은 인류학 내부에서 다시금 조명받기 시작한다.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남미 선주민이 인간, 동물, 정령이라는 존재자에 대해 각각의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간주하며 동물이나 정령들은 자신들에게도 사회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인간과 동물 등 인간이외의 존재들 간의 차이는 몸에 두르는 것(의상과 장식)에 있다. 그 점에서 인간, 동물, 정령은 내면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이며 다른 것은 신체적인 면일 뿐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인간, 동물, 정령 등의 존재들이 자신들에 대해 가지는 재귀적인 관계가 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필리프 데스콜라는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인간과 비인간(인간 이외의 존재)이 서로 유사한 내면성과 각기 다른 신체성을 가지는 양태를 애니미즘으로 고찰했다. 그의 애니미즘에서는 인간이 동식물 및 그 외의 환경적 요소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비인간들 사이에서 그것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타일러의 애니미즘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구분한 후에 인간만이 혼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서구이원론에 기초한다. 인간 이외의 생물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혼이나 정신을 투영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이에 반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의 애니미즘의 새로운 정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이해에 기반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의 애니미즘론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주객이원론의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서구가 잃어버린 세계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세계와 다른 존재자들 간의 차이를 흡수해서 연결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파악한 누리트 버드-데이비드(Nurit Bird-David)를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라는 모호함의 존재양태를 가지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주장한다. 월러스레비의 애니미즘은 또한 팀 잉골드의 애니미즘과 공명한다. 잉골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분할선 이전의 사물의 끊김 없는 삶의 흐름 그 자체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animacy)이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분할에 앞서는 애니미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나무는 바람의 흐름과 어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바람가운데나무로서 살고 있다. 잉골드가 말하는 애니믹한 존재론’(animic ontology)이란 존재들이 한 몸이 되어 생성과 운동을 부단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세기의 철학자 뤼시앙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n)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여란 원초의 인간이 가지는 심성을 뜻한다. 미개인의 심성에게 일()과 다(), 같음과 다름 등의 대립은 한쪽을 긍정하는 것이 다른 한쪽을 부정하는 필연을 포함하지 않는다. 양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민속학자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는 인간이 가진 비교의 능력을 유사점을 직관하는 동화[類化]성능순간적으로 차이점을 느끼는 구별화[別化]성능으로 나누었다. 동화성능이란 표면적으로 다른 것들 간에 공통성과 동질성을 찾아내는 사고법이며, 구별화성능이란 차이에 기초해서 구성되는, ‘AA’ 라는 과학사고의 기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포함하는 사고법이다. 오리구치는 고대인의 마음이 동화성능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애니미즘이란 동화성능적인 사고에 대한 것이다. 이 사고는 또한 오늘날의 애니미즘론을 선취한다.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라는 서구이원론의 사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의 비판의 입장에서 철학자 오모리 쇼조(大森荘藏)는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 인간 이외의 존재가 마음 있는 것으로 등장하는 상황에 착목하고, 이 지점에서 애니미즘의 본질을 발견한다. 시인 야모오 산세이(山尾三省)가 도쿄에서 이주한 야쿠시마(屋久島)에서 애니미즘을 발견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애니미즘은 과학합리주의와는 대극에 있는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와 결합될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다. 바람과 공기를 포함한 자연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옛 애니미즘으로부터 숨이 모음으로 알파벳 속에 불어넣어짐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잠재된 영력이 인간의 머릿속에 스며든 덕분에 인간에만 적용되는 자기재귀적인 애니미즘으로서 화현했다고 주창한 데이비드 아브람(David Abram)의 애니미즘론은 이색적이다. 마지막으로 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에 대해서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와타는 서구이원론의 사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쳐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도원(道元)의 사상에 이끌려 독자의 풍부한 애니미즘론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Abram, David (1997) The Spell of the Sensuous Perception and Language in a More-Than-Human World. Vintage Books.

Bird-David, Nurit (1999) “Animism Revisited: Personhood, Environment, and Related Epistemology”, Current Anthropology 40(S1): S67-S91.

Descola, Philippe (2006) “Beyond Nature and Culture”,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139: 137-155.

Ingold, Tim (2000)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 Essays on livelihood, Dwelling and Skill. Routledge.

--------- (2011)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Routledge.

Viveiros de Castro, Eduardo (1998) “Cosmology Deixis and Ameridian Perspectivism”,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n.s. 4(3): 469-88.

Willerslev, Rane (2007) Soul Hunter: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exicon 現代人類学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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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통약불가능성, 이방인적 개념, 민족지 이론, 비교, 다문화주의

 

 

인류학이라는 학지(學知)는 궁지에 몰렸다. 무엇보다 주요한 분석 개념을 철학에 기대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진단 하에 2011민족지적 이론을 위한 학술지로서 하우(HAU)가 창간되었다. 이 잡지를 발기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지오바니 다 콜(Giovani da Col)에 따르면 현재 인류학은 초창기 인류학과 역전의 관계에 있다. 즉 토템, 포틀래치, 터부 등 현지의 여러 개념들이 타 분야에 영향을 준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류학이 놓인 상황을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는 다음의 딜레마에 있다.

초창기와 비교하면 서구의 권위가 추락한 한편으로 서구 외의 세계를 둘러싼 지()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전개된 1980년대 인류학의 자기비판은 기존의 모든 인류학이 서구중심적인 것임을 자각조차 못했다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인 논의 틀이 철학으로 옮겨갔다. 이 속에서 서구의 개념사를 거슬러 검토하는 비판 작업이 전개되었고 서구 외의 개념들이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대의 민족지가 [기존 인류학을 포함한 서구사상 전반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민족지적 사상(事象)[기존 인류학의] 기술분석 개념에 의거하면 의거할수록 그 개념적 의의가 인정되지 않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염두에 두면서 하우에서는 모든 민족지적 통찰의 이론적 잠세력(潛勢力)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하였다. 그들이 제창하는 민족지 이론에서 이방인적 개념’(stranger-concept)은 이형동의어(異型同義語)를 스스로 민족지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그렇게 찾아낸 이형동의어가 각기 다른 세계들 간에 조화를 이루기보다 동형이의어(同型異義語)처럼 이해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같은 용어들 사이에서 틈이 생기도록 사고를 놓아두어야 기존의 개념과 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비판의 여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는 사고의 전개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학술지가 조직 가능했던 현실이 보여주듯이,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려는 사고가 인류학에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우의 창간 이전부터 현대 인류학에서 타자성이라는 논점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부각되어왔다. 실제로 그레이버 등은 민족지 이론의 재구축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단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별적으로 있어왔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착오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인류학이라는 지()를 활성화하기 위해 타자성에 다시금 주목한다는 점은 잡지명 및 그 특유의 논조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하우는 마오리족의 개념으로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하우에서는 인류학/민족지의 고전적 논고가 재록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족지란 쓰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읽히는 것이라는 이해일 것이다. 물론 독해는 기술에 의해 대상을 표상하는 저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를 촉발시키는 이방인적 개념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영위에 달려있다.

2001년에 인류학연보(Annual Review of Anthropology)에 게재된 엘리자베스 포비넬리(Elizabeth Povineli)의 논문 주제는 근원적 타자성이다. 이 주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통약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다룬다. 우선 포비넬리는 각기 다른 해석이나 의견이 통양가능한 방식에 의해 어떻게 이론화되고 있는가를 묻기 위해 언어인류학의 성과를 가져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게 언어학으로 생각되는 문법언어적인 문제라고 해도 사회관계의 권력성을 띤다. 그 권력관계에 의해 문제 그 자체가 규정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포비넬리는 자유주의 철학에 기초한 사회적인 통약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문법논의를 문제화한다. 이 논의에서 통약가능성은 한쪽 세계로 다른 쪽 세계가 합쳐지도록 한쪽 세계가 다른 쪽 세계를 교정하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승인또한 그 하나로 말할 수 있다. 동시대에서 목격되는 통약가능성에는 이러한 한계가 있다. 여기서 타자성을 둘러싼 인류학적 연구인도 뭄바이의 노숙자들, 기독교원리주의자들과 이슬람원리주의자들, 퀴어 활동가들, 브라질의 선주민권리활동가 등에 관한 인류학이 참조되고 있다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원적 세계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교정의 가능성을 은폐시키는 통약가능성과도 비판적으로 마주할 필요성이 있다. 타자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대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휘감는 상황, 어쩌면 우리도 그 일부일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비넬리는 근원적 타자성이라는 논점을 자유주의가 확장하는 20세기 말의 동시대적 상황에서 찾아내었지만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게도 다른 맥락에서 문제시된다. 카스트루가 논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 또한 다문화주의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비판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문화주의적인 승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약불가능성이라는 논점은 하우창간호 서문에서도 언급되었다. ‘민족지적 이론이 찾아내려는 것은 필드에서 바로 이해될 수 없는 과잉민족지적 번역이다. 그 번역은 통약불가능성과 관계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적으로 문화적 통약불가능성을 말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학적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비교불가능성이 아니라 생성중인 비교가능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약불가능성의 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타자성에 대한 태도와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타자성에 대한 감수성은 여전히 현대인류학의 민족지 이론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그레이버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으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전회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현실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다양성을 풍부하게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가치를 두지만, 실재가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포위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Graeber 2015: 31). 그레이버에게 근원적 타자성이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는 실재이며 논의의 사정 밖에 머물러 있다. 한편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산 하게(Ghassan Hage)는 근원적 타자성을 통해 비판적 인류학을 논하고 있다. 하게는 타자성이라는 가능성에 우리를 내놓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힘을 창출시키고 타자성을 우리 세계에 빙의시키는 것이 현대적인 인류학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타자성에 기대하고 있다.

루카스 베시레(Lucas Bessire)는 남미파라과이의 선주민이 직면한 외부사회와의 접촉상황 하에서 존재론적 타자성, 즉 통약불가능성에 주목하는 논의는 현실비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한편으로 마리오 블라세(Mario Blaser)와 마리솔 데 라 카데나(Marisol de la Cadena) 등은 자원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현대적인 상황을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타자성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그것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현대인류학이 직면한 이 질문에 과연 일반화할 수 있는 해답이 있을까? 인류학이 설정하는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고, 그 속에서 생기는 타자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판단, 진단이 요구되어야 한다. 각각의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함께 타자성을 사고한다면 그 속에는 다각적인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통약불가능성으로 향해갈 것인가? 마주하는 각각의 방식은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축적된 논의와 대화를 병행함으로써 인류학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Bessire, Lucas (2015) Behold the Black Caiman: A Chronicle of Ayoreo Life.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Blaser, Mario (2010) Storytelling Globalization from the Chaco and Beyond. Duke University Press.

de la Cadena, Marisol (2015) Earth Beings: Ecologies of Practice across Andean Worlds. Duke University Press.

Greaber, David (2015) “Radical alterity is just another way of saying “reality”: A reply to Eduardo Viveiros de Castro”,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5(2): 1-41.

Greaber, David and Giovani da Col (2011) “Foreward: The return of ethnographic theory’,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1: -XXXV.

Hage, Ghassan (2015) Alter-Politics: Critical Anthropology and the Radical Imagination. Melbourne University Press.

Povineli, Elizabeth (2011) “Radical worlds: the anthropology of incommensurability and inconceivability”,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30: 319-334.

Viveiros de Castro, Eduardo (2016) The relative native. Hau book.

 

 

 

 

Lexicon 現代人類学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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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_콘도 히로시

번역글 2018. 7. 17. 14:05

포식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폭력, 인척, 아마존, 정체성, 네이션

 

포식. 동물행동을 생각나게 하는 이 말을 인류학 용어로 다룬 논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글로벌리제이션 론에서 정체성 개념으로서의 포식성이다. 또 하나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이후의 아마존 민족지학에서 관계개념으로서의 포식이다.

먼저 아파두라이 논의를 살펴보자.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구축하고 또 그것을 동원하기 위해 그 자신에 근접하는 다른 사회적 범주를 말소해야 하는 정체성을 아파두라이는 포식성 정체성이라고 불렀다. 그 전형적인 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즘인데, 인도에서 힌두교도가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때에도 이와 동일한 타입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고 그는 말한다. 후자의 경우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카테고리의 섬멸을 통해 자기 획정한다는 것이다.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은 메이저리티 집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저리티와 네이션이 집단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때 불확실성의 불안을 메이저리티가 품는 경우가 생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포라는 감정이 양성되면 그 사회적 카테고리를 말소하는 폭력을 긍정하면서 자기획정이 이뤄진다. 이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는 섬멸의 역능이다.

아파두라이는 이러한 포식성을 불러들이는 조건을 소수자를 본질적 마이너리티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찾는다. 마이너리티가 본질적으로 메이저리티로부터 구별된 집단이 된다는 것은 자기 동질적인 메이저리티로부터 계속해서 배제되어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메이저리티 또한 자신의 특성을 본질화 한다. 아파두라이는 지배자집단이 수적으로 소수이면서 열등집단의 섬멸을 지향하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수적으로 많고 적음이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사회 속에서 네이션이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과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포식성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 정체성 논의는 현대사회를 대상화하는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 민족지에서 포식의 개념은 아파두라이 논의와는 대조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의 특유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된 논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인간과 신, 친구와 적, 친지와 외부자 등 대립물 간의 이음새로서 남미의 선주민이 생각하는 인척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기초하여, 브라질의 동업자들은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레비스트로스 2000: 719). 즉 포식이란 인척이라는 고전적인 친족관계의 개념과 연결된다.

아마존에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결합된 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척이라는 개념은 혼인으로부터 해방된 형태로 관계성을 사고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죽은 자, , 동물, 신 등의 타자성을 띤 모든 존재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까지 지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우에테족에서는 티와라는 인척을 가리키는 말이 알게 모르게 백인, 친구 등 아직 인척관계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포괄한다. 나아가 죽인 적이나 신 등을 지시하는 경우에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

실제로 아마존에서는 혼인이 발생하게 되면 양의적인 상태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띠게 된다. 아마존에서 혈연이란 생활을 공유함으로써 깊어지는 관계성, 즉 구축되는 것이다. 혼인에 의해 연결된 인척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점차 강화해간다. 이에 반해 순수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관계하지 않는 인격 사이에서 생긴다. 이에 따라 인척이란 외부성 혹은 타자성과의 관계이며 구축성과 연결되는 혈연성에 앞서서 소여로 주어지는 관계성이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 타자가 반드시 인간적인 타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존재도 타자성을 띤 존재이므로 그것과의 또한 인척성을 띨 수 있다.

이러한 아마존적인 인척관계는 위험이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타자성을 띠는 존재와의 관계는 사냥, 전쟁, 수렵, 카니발리즘 등의 활동과 친화적이다. 앞서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글처럼 바로 이것이 아마존적 포식의 특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포식이란 단지 폭력의 대상으로서 타자성을 띤 존재의 위치를 매기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자성을 띤 존재와의 관계에는 외부의 내화라고 할 수 있는 사상(事象)이 수반된다. 히바로족의 수렵이나 투피남바족의 전쟁에서 적의 타자성을 자신에게 도입함으로써 자시변용이 일어난다. 아라우에테족에서 전자는 죽인 적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전사로서의 새로운 자기가 된다. 그 속에서 죽인 자는 적이라는 타자로의 변성을 이뤄낸다. 즉 위험한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의해 자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결한 타자와의 관계성이 포식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특징을 타자의 절대적 필요성혹은 타자 없는 세계의 사고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카스트루 2015b).

이 점에서 아마존적 포식관계는 아파두라이가 정체성이 기술하는 포식성의 정체성과는 정반대에 놓인다. 즉 아마존적 포식이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 불가결한 타자성 그 자체와의 관계성이며 타자 없는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이 두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아파두라이의 논의에서 네이션과 그 타자를 둘러싼 사회적 카테고리의 문제와 연결된 포식성에서 타자는 섬멸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며, 포식성의 정체성 속에서 자기 획정할 수 있는 집단은 섬멸이라는 행위의 동작주의 입장에 고정된다. 이 상상력의 기제 속에서 죽임을 당한 후의 타자를 위한 장소는 없다. 반면 아마존의 포식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가 문제시된다. 적의 시점이야말로 자기를 구성한다고 할 때 자기는 적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에두아르도 콘은 송곳니가 육지거북이의 등껍질에 꽂혀 부서져서 더 이상 포식할 수 없게 되어 죽어버린 재규어가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육지거북이에 의해 포식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콘이 사냥을 통해 그려낸 포식성처럼, 아마존적 포식에서 드러난 관계성의 두 입장은 그 관계에 의해 연결된 이항 사이에서 쉽게 반전된다. 즉 동작주의 입장이 특정한 존재에 고정되지 않는 관계성이 아마존적 포식성의 관계성이다(2011).

동일한 용어를 둘러싼 두 논의의 차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존재론적 전회라는 인류학의 논의 흐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는 포식이라는 용어의 다양성, 그 동형이의(同型異義)적인 어긋남 또한 볼 수 있다. 현대인류학에서 포식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크게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준다.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을 둘러싼 각기 다른 상상력의 연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적이란 섬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적에 의해 우리는 상처 입어서는 안된다라고, 행위의 능력을 본질화하면서 자기 획정하는 네이션의 상상력 바로 옆에는 적을 통해야 비로소 우리가 변한다라며 타자와의 관계성을 찾아내는 아마존의 포식성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방인적 개념을 의식하면서 포식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를 떠올려봄으로써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이 네이션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박이대승박수경 역) 식인의 형이상학, 후마니타스, 2018.

아라준 아파두라이(장희권 역) 소수에 대한 두려움: 분노의 지리학, 에코리브르, 2011.

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역)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

Lévi-Strauss, Claude (2000) “Postface”, L’Homme: 154-55.

 

 

 

Lexicon 現代人類学8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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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민족지(multispecies ethnography)

 

오쿠노 가츠미(奥野克巳)

 

키워드: 복수종, 함께 살다, 반려종, 종들간의 관계성, 뒤엉킴

 

인류학은 새로운 세기에 진입한 이래 문화표상을 둘러싼 논의로부터 동식물과 사물 등을 포함한 자연과 인간이 뒤엉켜서 살아가는 세계에 관한 학문으로 그 연구 방향을 전환시키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작금의 인류학은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너머에서 인간을 말하는 학문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이종들 간의 창발적인 만남을 다루면서 인류학을 인간 너머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려는 다종민족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동물을 사고하기에 적당하다고 파악한 것에 대해, 마빈 해리스는 먹기에 적당하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동물을 포함한 그 밖의 생물종은 인간에게 단지 상징적 혹은 물질주의적인 관심대상만이 아니다. 타종(他種)은 인간 및 다른 생물종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뒤엉켜 살아왔다. 도나 해러웨이가 착목했듯이 동물을 비롯한 다른 생물종들은 인간에게 함께 살아가는존재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유래한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의미 있는 타자성을 새롭게 파악하면서 다른 생물종들과의 공생과 협동의 윤리의 존재방식을 탐구했다. 다종민족지는 복수종의 만남을 다룸으로써, 인간만을 주체로 인정하고 아프리오리에 인간존재를 설정하는 기존 인류학의 개념적 틀을 재검토하며 인류학에 내포된 인간중심주의적인 경향에 도전하고자 한다.

로라 오그던(Laura Ogden 2013) 등에 따르면, “다종민족지란 행위주체인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내부에서 생명의 창발을 통한 민족지 조사 및 기술이다. 그것은 서구중심주의적인 특유의 인간상을 탈중심화로 향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흐름에 위치하는 새로운 학문적 장르이다. 톰 반 두렝(Thom Van Dooren 2010)에 의하면 다종인류학은 타종을 단순한 상징, 자원, 인간 생활의 배경으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종들 간 및 복수종들 간에 구성되는 경험세계, 존재양식, 그 외의 생물종의 생물문화적 조건에 관한 두터운 기술을 목표로 한다.

이 글에서는 다종민족지의 몇 가지 사례를 다뤄보겠다. 우선 절멸의 위기에 놓인 독수리의 고통에 관한 톰 반 두레의 연구를 소개한다. 인도에서는 연간 수백만 마리의 소가 죽는다. 그 소들은 신성시되기 때문에 사람이 먹지 않는다. 소가 죽으면 유체처리장으로 운반된다. 그것을 30분만에 깨끗이 먹어치우는 것이 독수리다. 그러나 오늘날 독수리는 소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빈곤층이 소와 일을 하기 위해 우족의 질병, 유선증, 출산곤란 등에 대한 처치로 비 스테로이드계의 값싼 항생제인 디클로페낙(diclofenac)을 소에게 투여한다. 그 약이 독수리에게 신장병을 일으키기 때문에 소를 먹은 독수리는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현재 소를 먹는 독수리가 감소하는 대신 소를 먹는 개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개는 독수리처럼 짧은 시간에 남김없이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지 못한다. 또 그 부작용으로 개가 사람을 습격하고 광견병에 걸리는 일이 잦다. 독수리가 없으면 인간과 동물의 건강에 심각한 해가 올 수 있다. 개체란 관계론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포함한 복수종의 맥락에서 타자인 독수리가 느끼는 고통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어떤 종이 멸종하면 많은 유기체가 의존하는 상호작용 또한 사라지게 되므로 복수종의 뒤엉킴은 중요하다. 반 두렝에 의하면 독수리의 고통은 모든 생명이 얽혀있는 뒤엉킴 속에서 증폭된다.

함께 살아가는것의 기초는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사랑만이 아니다. 다종민족지는 나방이나 진드기 등을 포함한 혐오스러운 것들’(해충이나 유해동물)까지 시야에 넣는다. 데보라 버드 로즈(Debora Bird Rose 2011)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과수원 경영자에게 큰박쥐는 유해동물이다. 역으로 큰박쥐의 식재료였던 원시림을 인간이 벌채해서 큰박쥐가 먹을 것이 없어지자 큰박쥐는 어쩔 수 없이 과수원을 습격하게 되었다. 과수원에서는 전기울타리를 설치해서 큰박쥐 무리가 식재료를 구하러 과수원으로 날아올 때 전기울타리에 감전시켜 큰박쥐의 목숨을 끊어놓는다. 큰박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굶어죽던지 전기충격이라는 죽음의 블랙홀에 빠지던지 둘 중 하나다. 큰박쥐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복수종의 네트워크에서 그것은 더욱 나쁜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로즈는 말한다.

다종민족지의 리더격인 아나 칭에 의하면, 소나무, 송이버섯, 균근균, 농가는 서로 얽히면서 생존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메마른 땅에서 소나무와 송이버섯이 공존하며, 그 속에서 균근균이 키워낸 것이 송이버섯이다. 인간은 땔감이나 비료를 구하기 위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이로 인해 소나무 숲은 유지될 수 있고 소나무로서는 적당히 교란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소나무, 균근균, 농가 사람들이라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송이버섯이 자라난다. 칭은 여기서 인간과 자연이 복수로 얽혀 있으며 의존하는 다종적인 관계를 고찰한다. 칭은 인간의 자연은 종들 간의 관계성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아이디어는 앞서 말한 해러웨이의 반려종 개념과 함께 다종민족지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다종민족지의 기본은 민족지 기술 및 조사이지만, 그 조사는 특정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문화인류학의 장기조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복수의 장소에서 행해지는 다종민족지인 경우도 많다. 또 다종민족지는 바이오아트나 예술실천 등과도 관계가 깊다. 2008년의 아메리카인류학회의 연례대회의 하나로 개체된 다종 살롱이 그것을 웅변한다. ‘바이러스와 사이 좋아지려는 시도라는 제목 하에서 C형간염에 감염된 예술가의 혈액을 그것에서 아무 해를 입지 않는 민들레에게 주고 예술가는 민들레 뿌리를 약으로 섭취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 점에서 다종민족지를 주창하는 에덴 커크시(Eden Kirksey 2014)의 논고가 문화연구의 거점인 학술잡지에 게재된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다종민족지는 또한 최근 발흥하고 있는 환경인문학내에도 자리하고 있다. 환경인문학은 1970년대에 등장한 환경철학, 1980년대의 환경사, 1990년대의 에코크리티시즘 등의 학문을 토대로 발전해온, 환경을 둘러싼 새로운 학제적 영역이다. 우르술라 하이즈(Ursula K. Heise)는 최근 환경인문학의 인류세를 둘러싼 논의에서 다종민족지는 생산적인 장르이며 탈인간중심주의를 시야에 넣은 분야라고 평가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인류학에서 이제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아온 인간사회를 복수종에 의해 구성되는 코뮤니티로서 다루고자 한다. 복수종에는 예를 들어 인간의 위장에 사는 미생물, 감염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식용으로 재배되는 식물, 식용동물이나 애완용 동물 등이 포함된다.”

 

Kerksey, Eden (2014) The Multispecies Salon. Duke University Press.

Ogeden, L., Hall, B., & Tanita, K (2013) "Animals, Plants, People, and Things: A Review of Multispecies Ethnography", Environment and Society: Advances in Research 40(1): 5-14.

Rose, Deborah Bird (2011) "Flying Fox: Kin, Keystone, Kontaminant", Australian Humanities Review 50: 119-136.

Tsing, A. (2015)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ng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stone University Press.

Van Dooren Thom (2010) "Pain of Extinction: The Death of a Vulture", Cultural Studies Review 16(2): 271-289. 

 

Lexicon 現代人類学54-57.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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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전회'가 한국인류학계에 진작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프랑스 지성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 맥락에서 비로소 파악되는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지식의 주변부에서 번역은 주요한 학문활동이다.) 그래서 프레데릭 켁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논문을 번역해올리고자 한다. 켁은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의 4세대 인류학자이다. 주로 불어로 책과 논문을 집필하는 탓에, 불어번역을 할 수 있는 인류학자가 희소한 한국에서 그의 한국어 번역본은 아직까지 나와있지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책의 영어번역본도 거의 없고, 특이하게도 일본어로 번역된 책과 논문은 다수 있다. 그중에서 2008년과 2013년 사상지에 게재된 두 편의 논문 중 전자를 번역(중역)했다. 후자는 한국어 번역본(중역)이 있다(http://multitude.co.kr/607).  이 일본어 번역본의 역자는 이미 고인이 된, 일본에서 상당히 저명한 레비스트로스 연구자이자 인류학자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겠냐만 30대 초반의 젊은 프랑스 인류학자의 글을 한갑의 일본인 노학자가 번역했다는 사실이 한국학계의 '중요하겠냐만'의 토를 달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한다. 그 노학자의 '해제'가 있어 이 논문에 대해 따로 부연설명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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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에 있어서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

일어본 번역 와타나베 코우조(渡辺公三, 1949~2017, 인류학자)

 

[일어본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레데릭 켁이 본지 특집호를 위해 특별히 투고한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프레데릭 켁은 국립과학연구소(CNRS) 교수로서 고등사범학교 강사를 겸임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를 계승한 가장 젊은 4세대 인류학자를 대표한다. 이미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두 권의 저작을 저술했으며, 20세기 전반의 프랑스철학에서 인류학적 성찰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뤼시앙 레비브뢸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간행했다. 또 레비스트로스 저작집의 편집을 담당한 4인의 젊은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토테미즘, 야생의 사고, ‘소신화학가면의 길, 질투심 많은 여 도공, 살쾡이 이야기등을 소개하고 상세한 평주(評註)를 붙이는 작업에 참여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요 업적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고 소위 구조주의의 붐도 지난 이 마당에 켁은 새삼스레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을 텍스트로서 읽어내고 21세기의 세계 현실에 비추어 그 의의를 재고하는 작업을 이끌고 있다. 켁은 원저자에게 저작의 배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희귀한 경험은 레비스트로스가 천수를 누린 덕분이다.

20085월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집 간행을 계기로 몇몇 잡지에서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꾸몄고, 켁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주간지의 인터뷰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탐구 궤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구조주의의 탄생을 알린 친족의 기본구조(1949)사이버네틱스에 의해 변신하게 된 뒤르켐 사회학이다.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로서 혼인연대와 출자(出自 descent)의 보편적인 법을 통해 성 관계를 통제하고 인간고유의 질서를 생성시킨다.

그의 필생의 사업인 신화학(1964~71)생태학으로 확장된 마르크스주의이다. 한 사회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생산의 조건과 관계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 조건에서 동물과 식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야생의 사고(1962)는 위의 둘 사이의 휴지기에 해당한다. 사회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정신의 수준에 진입해야 한다. 이 저작의 주제는 토테미즘과 공희(供犧)라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문제를 1960년대 사상의 대주제인 역사와 변증법의 철학논쟁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뛰어난 지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간결하여 독단적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켁의 저작을 읽으면 그가 폭넓은 시야로 대상을 깊게 파고들어 읽어내었음을 납득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생의 사고(2004)레비스트로스하나의 서론(2005) 이 두 저작은 모두 젊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난해한 업적을 명쾌하게 논하고 있다. 나아가 켁은 레비스트로스의 작품전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은 물론2005년의 저작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연구에 사용한 텍스트군을 상호 공명시킨 수법을 레비스트로스 작품군을 독해하는 데에 적용했다고 서술한다., 프랑스에서의 철학, 사회학, 인류학의 조류를 두루 살피고 있으며, 특히 2005년 저작의 후반부의 논쟁과 응용에서는 동시대의 인문과학분야와 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으며 그 쟁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문학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알튀세르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호의적 평가에서부터 비판에 이르는 전개과정, 푸코에 대한 영향, 들뢰즈의 독자적인 레비스트로스 독해 등의 소개는 프랑스 철학사상의 지적 중심인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읽혀왔는지를 짐작케 하는데, 이는 젊고 뛰어난 지식인들 간의 일종의 비의적인 전승의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모리스 고들리에 등의 2세대에 이어 3세대의 브뤼노 라투르, 룩 볼탄스키(Luc Boltanski), 필리프 데스콜라 등이 레비스트로스 작품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왔는지에 대한 소개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저작들과 병행해서 20048-9월호의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 기고문 「『야생의 사고에 있어서 개체와 사건, 그리고 2004엘느(Elne)지 레비스트로스 특집호(82)에 게재된 「『벌거벗은 인간』 「에필로그에서 인간의 해체를 통합한 것이 본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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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체는 1960년대 구조주의의 가장 큰 테마군 중 하나였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테마를 다뤘다. 푸코는 여기서 근대서구의 인간이 그것들[생명, 노동, 언어] 가운데 하나의 특이한 습곡에 불과한, 생명과 노동과 언어의 다양한 형태의 연구영역을 개척했다. 스피노자의 목적론에 대한 공격을 재현한 이 테마는 윤리적인 차원을 갖는다. 즉 주체 비판은 존재와 사물에 깊은 경의를 품은 관계의 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이와 마찬가지로 해체라는 부정적인 처사가 긍정적인 의식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어떤 수준에서 부정된 것이 다른 수준에서는 긍정된다는 변증법의 새로운 버전으로서, 환상의 부정으로서의 주체의 해체가 어떻게 해서 그 자체로 참다운 긍정성을 열어주는가를 설파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불교를 언급했다. 그러나 불교와 변증법은 그의 저작 내부로 흡수되지 않았고, ‘이러한 부정의 역전이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에서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나는 이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자연에 관한 끊임없는 사고와 연결된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사고 속에서 점차 명확해지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파국]라는 테마와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또한 이 연결이 야생의 사고의 다양한 형태를 기점으로 야생의 사고신화학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연 속에서 주체는 카타스트로피로서, 즉 테마의 연속성 속의 불연속으로서,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깊은 직관이다. 이러한 카타스트로피적인 존재는 바로 생태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내포한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인데, 우리의 성찰을 요구하는 그 가르침의 의미는 아직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를 두 방식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즉 근대적 주체의 출현을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와 연결하는 하나의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룰 것인지, 아니면 현재진행중인 카타스트로피에 대한 주체적인 응답의 방식으로서 해체를 다룰 것인지 이다.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라는 표현의 한쪽 의미로부터 다른 쪽 의미로 이행하는 것이 주체의 해체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주체주의적인 철학에 대항해서 인문과학의 객관성을 주제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가 갈수록 우리의 이 세계를 더욱더 특징짓고 있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부딪히기 위해서는 다시금 주체의 해체의 의미를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해체가 야생의 사고(1962)의 핵심을 이룬다면,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슬픈 열대(1955)의 핵심을 이룬다. 열대가 슬프다는 것은 정복하는 주체성이 전개하는 연속된 선을 따라 구세계로부터 신세계로 이동하는 따위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슬픈 열대한국어번역본 105). 이 책머리의 선언은 인류학자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타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이러저러한 경험이 가득 담긴 여행 사진들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주체성을 가지고 다니는 정복자에게도 향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여행한다. “만약 서양세계가 민족학자를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깊은 회한이 서양세계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서양세계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회의 모습과 마주보게 하여 다른 사회로부터 그와 같은 결점이 비치지는 않는지, 어떻게 해서 그 결점이 서양세계에서 자라나고 심해졌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다른 사회가 서양사회를 도와줘야 한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한국어번역본 698, 전면수정).

슬픈 열대에서도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로의 망명을 강권한 1940년대의 카타스트로피가 근대의 주체성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그리고 구세계와 신세계를 구분한 훨씬 더 근저적인 카타스트로피의 귀결이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이 저작에 20세기의 목격증언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 세기의 관심의 양상과 간극을 벌려놓았다. 이야기는 1934년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로 출발하는 데에서, 그리고 1941년 뉴욕으로 망명하는 데에서 상호 중첩되며 시작된다. 인류학자와 인디오는 진행 중인 카타스트로피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한순간 동일시된다. 학자와 야만인이 공통적으로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존재와 사물을 파괴의 위협에 노출시키는 카타스트로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주체화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신석기 시대의 인간의 지능이라고 자인한 것은 아이와 같은 정동에 사로잡힌 더딘 지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들이닥친 굶주림이나 가뭄을 이겨내려고 개척한 땅을 버리고 떠난 다른 환경에서도 동일한 도구를 사용해서 브리콜라주로서 헤쳐갈 수 있는 상징을 탐하는 야심에 들끓는지성을 뜻한다. 원시적 생활의 지성이 아니라 야만적인 환경에서 살아남는 지성이다.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의 문학적 명상에 대한 과학적인 대응물로서 쓰였다.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아간 민족학자의 우울은 모든 사회에 공통하는 지성에 닿으려는 인류학자의 즐거움으로 반전한다. 근대의 시작을 표지한 카타스트로피는 모든 현상을 기호로 받아들이는 야생의 사회와 기호를 현상으로 고찰하는 근대 학자와의 만남으로 변환된다. 이 책은 다음의 말로 끝맺는다. “가장 현대적인 모습의 과학 정신은 그 자신만이 예견할 수 있었던 야생의 사고와의 만남을 통해서 야생의 사고의 원리를 정당화하고 그 원리를 회복하는 데 공헌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터득하는 것은 곧 야생의 사고의 정신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다”(야생의 사고한국어번역본 382-83,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현상을 복수의 결정의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야생의 사고와 각각의 현상에 단 하나의 결정의 수준을 지정하려는 과학적 사고에 공통하는 언어의 발견을 목표로 삼았다. 인류학이 바로 그 공통언어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상이 주어지는 사회적자연적 장일뿐더러, 실제 일어나고 있는 분류체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각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슬픈 열대는 지각의 층의 착종된 축적에 의해 기억이 구성되는 만화경의 논리로 되돌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야생의 사고는 감각적인 것에 추상적인 카타스트로피를 투사하지 않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에서 기호를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논리의 이론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주체성의 환상을 비판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가 문명의 조건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앞선 탐험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야생의 사고의 경우 주체의 환상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즉 민족학에 있어서 토테미즘의 환상,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 사건의 환상이다. 이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 1962년의 레비스트로스가 두 권의 저작(야생의 사고오늘날의 토테미즘)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의 토테미즘은 집합적 주체, 즉 사회의 환상을 해체한다. 집합적인 주체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 간의 동일성을 긍정하는 사회조직, 음식물 금기, 신앙체계의 총체가 의미를 획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종교생활의 원시형태에서 뒤르켐이 제시한 이론을 표적으로 삼는다. 뒤르켐의 이론에 따르면, 토테미즘은 사회가 그 집단적 비등상태(沸騰狀態)에서 스스로를 표상하는 증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사회학적 관념론을, 영국류의 경험론에 의거하면서 이 관념론이 통일적인 이론을 토대로 모아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족지적 사실이 실은 제각각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뒤집어버린다. 레비스트로는 극히 칸트적으로 경험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쌍분적인 구조의 사실에서 지성으로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찾아낸다. 뒤르켐이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의 서문에서 보여준 초월적인 예감에 따른다면, 지성은 새로운 종류의 구조적 상관관계가 관찰되는 현상의 영역이다. 그 영역은 폴 리쾨르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이며,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경험론이다. 그리고 야생의 사회에서 관찰되는 분류는, 분류의 미개형태에서 뒤르켐과 모스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면, 이 지성의 영역이 원초적으로 현현(顯現)하는 장이다.

민족학에서 주체의 해체가 토테미즘 비판과 뒤르켐에 대한 논박에 의해 행해졌다면, 철학에서 그것은 사건의 비판과 샤르트르에 대한 논박으로 행해졌다. 샤르트르는 그 자신이 후설을 탁월하게 독해한 논문 자아의 초월에서 주체 없는 초월의 영역 탐구의 기초를 닦은 것 같다. 그러나 존재와 무를 기점으로 실존주의의 정식화를 통해 샤르트르는 자기의 자유의 의식화를, 주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사건이라는 소여를 무화하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 그리고 샤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혁명적 실천의 사건에 의해 역사의 운동에 접근할 수 있는 변증법적 이성과 실천적 타성태(pratico-inerte)에 주목하고, 이러한 재구축의 길을 닫아버린 분석적 이성을 준별하기 위해 야생의 사회에 견주어 사건을 고려하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데이터를 전체화하는 힘을 가진 변증법적 이성이 야생의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이러한 대비를 논박하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생각에 인간에 관한 것(나아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도 배제됨을 용납지 않는 야생의 사고에 대한 강경한 거부에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변증법적 이성의 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나의 견해는 샤르트르와는 완전히 다르다”(한국어 번역본 352쪽 부분수정). 그래서 레비스트로는 샤르트르의 휴머니즘에 대항하여 인문과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용해하는 것”(354)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리하여 야생의 사고의 논증 전체는 샤르트르가 제기한 문제에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상을 분류체계에 끼어 맞추기 위해 분류하는 일에서 이렇게나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고는 사건을 위한 장을 갖추고 있을까? 왜냐하면 사건이란 외부로부터 도래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강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레비스트로스는 샤르트르에게서 그의 주요한 착상 가운데 하나를 채용한다. 그것은 전체화라는 착상이다. 그것은 전체화를 총합적인 방식으로 선취하여 실현하는 주체를 전제로 삼는 착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경험 내부에 복수의 전체성이 출현하는가?’를 기술할 수 있게 만드는 착상으로서, 확실히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가장 흥미로운 착상 가운데 하나이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사건이 현상의 희소성을 의식화한다는 사실로 인해 사건이야말로 이 전체화의 과정을 현실화한다. 혁명적 주체를 만들어낸 1789년의 바스티유 요새 탈취는 그에 앞선 몇 년의 기아와 연결되고 그와 동시에 궁정의 추문과도 연결된다. 정치적 경험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감정적 등등 경험의 장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경험의 장을 전도(轉倒)하는 사건.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경험의 모든 차원이 필연적으로 상호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자전거 기아를 바꾼다고 해서 반드시 속도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기아가 체인에 제동을 걸 듯이 그 사이에 제동의 작용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수준에서 전체화는 다른 수준에서 탈전체화를 수반하며 복수의 수준에서 현실화하는 또 다른 전체화를 계산에 넣지 않고, 그와 반대로 서로를 지워버린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고는 그 기원의 산출력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건을 또 다시 가열하기보다 오히려 역으로 사건이 복수의 수준에서 지각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냉각하는 사고이다. 사회에서 의미작용 하는 존재와 사물의 총체를 탐지하면서 원천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근대사회의 신화적 사고는 새로운 주체성을 기초짓는 것에 의의를 두는 철학자에게서 실행되지 않고 고문서의 경험적인 풍요성을 존중하는 역사연구자에게서 실행되는 만큼 근대사회의 역사적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곧이곧대로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결국 프랑스혁명이라는 신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했는가?’라는 문제로 요약된다”(한국어번역본 364, 부분수정)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샤르트르의 착오는 프랑스혁명을 전체화작용의 한 형태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코기토의 원천으로 변경한 것, 그렇게 해서 존재와 사물의 다양성을 그렸건만 전통적으로 폐쇄사회의 특징인 왜소성을 드러낸”(357) 것에 있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실행한 조작은 원천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카타스트로피이다.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함의를 품은 것이 아닌 연속성의 내부의 불연속이라는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카타스트로피이며, 이 카타스트로피로 프랑스혁명을 기술하는 것이다. 확실히 구조주의적 방법은 인간의 정신이 현상적인 연속성을 지각하는 다양한 과정을 불연속의 격자를 통해 분석하면서 정신적인 것 본래의 연속성을 재구축하는 데에 있다. 최초의, 그리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는 카타스트로피가 언어의 출현이며, 그렇게 생성된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간의 어긋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대범하면서도 사변적인 텍스트인 마르셀 모스의 작품에 대한 서론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이 전체화 작용을 가진 자아의 연속성”(야생의 사고367, 부분수정)을 비판하면서, 의미를 산출하려고 복수의 카타스트로피를 관계 짓기 위해 그로부터 이끌어낸 귀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에 따르면, 실상 프랑스혁명을 새로운 주체성의 기초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술하려고 사용한 격자에 의해, 이 사건은 이를테면 물리-화학적 작용이라거나 경제적 원인에서 일어났다거나 정치적 슬로건의 효과라거나 등등 각기 다른 의미작용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다른 사건과 관련짓는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각각에 의해 사건은 의미를 달리 하는데 그 의미가 올바른 의미라고는 할 수 없다”(364). 따라서 정신적인 고유한 의미를 가진 카타스트로피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과 그것이 고려하는 장과의 관계를 서로 비쳐주는 카타스트로피의 계열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나 국소적인 편성의 산물이다.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 장에 대한 나의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 전체를 재독하여 불확정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분류체계가 대립한다고 간주되는 두 개의 현상 사이의 모순을 대립하는 이항 사이에 중간적인 항을 도입함으로써 해결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간적인 항은 분류의 내부에서 다른 존재와 관계 짓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바꿔 말하면,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카타스트로피적인 것으로 경험된 상황(구덩이에 숨어서 매를 사냥하는 히다차 족의 사냥꾼과 같은)은 야생의 사고의 안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예를 들어 히다차족은 오소리와 여성의 월경을 관계 짓는다) 카타스트로피를 순화한다. 그런데 분류체계는 다른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토템적 분류에 있어서 자연의 종으로 향할 것인가, 혹은 카스트 체계에 있어서 문화적 직능으로 향할 것인가 이듯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방법적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자연의 카타스트로피도 문화의 카타스트로피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카타스트로피의 사고의 방향이 자연으로 방향지어질 것인지, 문화로 방향지어질 것인지의 문제만이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생의 사고의 분석에서 보편과 개별의 대립 또한 확고하지 않다. 그것은 분류가 보다 추상적인 대상을 향해 열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보다 구체적인 존재를 향해 졸라맬 것인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야생의 사고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그리고 개별로부터 보편으로, 복수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분류의 동력학이다. 자연과 문화, 구체와 추상은 존재들을 양극성으로서 보족하며 다양한 수준에서 또 다른 양극성과 관계 짓는 분류도식이 이동하는 수평축과 수직축을 이룬다.

생각해보면 분류의 모든 수준에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이 있다. 고찰대상 사회가 어느 수준을 내세운다 해도 그것은 다른 수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특별히 선택된 수준도 다른 수준과 형식면에서는 같은 것으로서 그 차이는 일반과 특수, 자연과 문화라는 한 쌍의 대비에 근거하여 작용하는 총괄적 좌표에서 상대적 위치의 차이일 뿐이다.

토테미즘을 논하는 논자의 잘못은 자연종에 기초를 두고 구성된 수준이라고 하는 하나의 분류 수준만을 자의적으로 분리시켜 취급하여 그것에 제도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도 다른 여러 수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수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만큼 그것만을 끄집어내어 가령 추상적 범주나 명사적 분류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다른 분류의 수준보다 그것을 특히 중요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준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말하자면 조절장치가 있는분류의 존재이다.

그것을 수용한 집단은 지적 도구를 다른 것과 바꾸지 않고 가장 추상적인 면에서 가장 구체적인 면까지 또 가장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자연적인 면에 이르는 모든 면에 초점을 맞추는수단을 갖는 셈이다”(212, 부분수정).

민족학자의 잘못은 분류의 역동학의 부푼부분을 정상적인 제도, 즉 토템으로 잘못 잡은 것이다. 주체가 기초지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과 문화, 추상과 구체가 매우 안정된 혼합체, 즉 제도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는 그물코가 막힌 중심부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변으로 향하고 그 주변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생성한다. 야생의 사고는 소쉬르가 묘사한 언어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밟는다. 즉 자의적인 것으로부터 동기지어진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동기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의적인 것으로 향해간다. 분류체계가 현실적인 것의 전체를 정상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그물망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하는 까닭은 사건이 반드시 체계의 외부로부터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류의 이 불확정한 확장은 한계에 도달하면, 즉 사고가 더는 그 이상으로 분류할 수 없고 지시만 가능한 한계에 도달하면 정지(停止)한다. 거기서는 야생의 사고와, 그에 저항하여 야생의 사고로서는 포섭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포섭할 수밖에 없는 요소와의 만남 가운데 현실적인 것의 요소가 순수상태로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현실적인 것은 분류적 사고의 핵심부분, 주체와 객체의 대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한계에, 정상상태가 된 분류의 내부에서는 의미를 획득할 수 없는 카타스트로피와의 만남 가운데 위치한다.

그리하여 다음의 귀결을 견지해야 한다. 즉 현실적인 것은 가장 구체적인 극과 더불어 가장 추상적인 극에 존재한다. “종 조작매체의 논리적 효력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에 힘입어서 상호 간에 상당히 다른 여러 분야를 분류도식 내에 통합할 수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분류법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수단, 즉 보편화에 의해서 초기의 집합 밖의 분야로 진출하거나 특수화에 의해서 분류작업을 그 자연의 한계 너머, 즉 개별화까지 연장한다”(247-48,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가 보편화의 극은 질병이 발병하거나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출현했을 때 무대로 올라온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거의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류체계 내에서 아직 장소를 찾지 못한 새로운 개체가 등장하는, 특수화의 극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분석을 행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개체화의 문제를 두 장에 걸쳐 자크 데리다와 에드먼드 리치와 같은 노련한 평론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유명 체계에 관한 훌륭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편화에 대한 분석을 한 번도 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에는 가능성이 풍부하다.

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수화의 형태를 중시하고 보편화의 형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건에 관한 샤르트르와의 논쟁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 아닐까? 실제로 고유명 분석은 야생의 사회가 사람의 탄생이라는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지 새로운 사람, 즉 태어나는 아이들만이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현재 존재한다. 그런데 개별화를 하나의 분류로 취급하는 어떤 체계이든지(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다)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 구조가 새삼스레 문제시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289)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해결은 신생아를 두 개의 요소로 분류하는 것이다. 즉 환원할 수 없는 잔여로서 분류의 체계 외부에 머무르는 개체와, 개인이 사회의 무대에서 알려져 인식되기 위해 장착하는, 가면과도 같은 인격이라는 두 개의 요소이다. 근대의 주체의 탄생이란 개체와 인격이 유일한 실체로서 일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분류에 저항하는 무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의 인식을 기초지은 자로서 자기를 노정한다. “서양문화[civilization]에 있어서는 마치 개인이 각각 자기의 개성을 토템으로 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개인의 존재를 기표라 하면 개성은 기의가 된다”(312). 좀 더 파보면, 놀라운 역전에 의해 개인이 사회에게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사회야말로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는 사회성을 간주관성으로부터 설명하려는 후설이 직면한 어려움이나 집렬성(集列性, série)으로부터 집단을 고찰하려 한 샤르트르가 직면한 어려움에 의해 드러난다.

이 분석이 얼마나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가진 차원 중 하나를 상실시키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근대의 주체의 출현은 인식과 세계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것은 인식이 주체에 빌붙어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축으로 회전하도록 강제한다는 의미에서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이 지적인 혁명은 신기한 것이 분류적 사고로부터 그 수단을 잃게 만드는 놀라운 현상으로 출현하는 대신 모든 사고의 원천으로서 신기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삼았던 르네상스시기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로서 스스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해체라는 테마는 비판적인 차원을 잃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보수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근대인이 아닌 야만인으로서 사고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띠게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여준 교훈은 이와 다르다. 카타스트로피는 신기한 것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근대적 주체가 창출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살아있는 장으로서 이 가치부여를 일으킨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카타스트로피는 야생의 사고가 인격으로서 자기를 노정하는, 새롭게 태어난 자와 조우하는 특수화의 극이 아니라 질병으로서 스스로를 노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과 조우하는 보편화의 극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근대의 주체를 창출함으로써 인식의 흐름을 바꾼 서구의 장과는 다른, 서구의 정복자와의 만남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사회의 장이라는 제2의 근대에서 장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편화의 극을 공백인 채로 남겨둠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오 사회에서 고유의 주체화의 형태를 분석하기 위한 여지를 열어두고 그것을 신화학으로서 제기했듯이 사태는 진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를 기점으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야생의 사고(1962)신화학(1964-71)에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1962년의 책에서는 철학적 증명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사회들을 비교한 반면, 신화학의 사부작은 변환의 관계를 보이는 신화군을 비교함으로써 남북아메리카의 사회들을 연구한다. 그 결과로서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 사회로부터 데스콜라가 애니미즘 사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며 야생의 사고와는 또 다른 주체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토템적인 주체에게는 미분차이적으로 배분된 질()의 전체를 통해 개체를 집합적인 주체로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반면, 애니미즘적 주체에게는 신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혼의 연속성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야생의 사고의 분석은 개체가 선조와 연결되기 위한 매개체인 성스러운 대상으로서의 추링가의 표상에 이르러 종결된다. 신화학의 분석은 새의 둥지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주인공이 요리의 불에 의해 구분된 영역을 활보한다. 야생의 사고가 분류와 명명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반면, 신화학은 식도락과 작법과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분석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자연이 발하는 기호를 사용하여 브리콜라주하는 대신에 자연에 스스로의 관념을 밀어 넣는 기술자의 사고를 창출하지만, 신화학에서 그것은 수천 년간 변환을 통해 천천히 세련되게 마감된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폐절시키는 정복자의 도래를 다룬다. 식탁작법의 기원의 논증의 마지막은 다음의 성찰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사고하듯이 주체의 내적인 청정함을 존재와 사물의 외적인 부정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만인에게는 주체의 부정함으로부터 존재와 사물의 청정함을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다.” 주체는 야생의 사고가 점차 편협한 것이 되어가는 역사의 단계가 아니라 신화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부정’(不淨)이다.

이 차이는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에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의 의미를 바꿔놓는다. 이 또한 다시금 논쟁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논쟁의 하나는 리쾨르처럼 신화분석에서 주체에 충분한 장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철학자에 향해 있고, 또 하나는 에드먼드 리치처럼 의례와 감정성(憾情性)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민족학자에 향해 있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의 입장은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장과 완전히 다르다. 야생의 사고의 논증전체가 사건과 관련해서 샤르트르를 논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반면, 신화학의 궤적은 에필로그에서 중단하지 않고 제한 없이 뻗어간다. 실제로 신화의 구조분석은 스스로 서로 사고하는신화의 변천에 따라 순수하게 내재적인 형태로 산출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이 속에서 이러한 변천을 사고한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변천의 연쇄를 조감하는 어떤 위치를 취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본서의 주체는 익명적인 사고에 내밀어진 실체 없는 장소가 되려는 것이다. 이때 익명적인 사고는 이 실체 없는 장을 가득 채우며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참된 의지를 되찾아 실현하고 스스로의 유일무이한 본성에 고유한 제약을 배려하면서 자기편성을 취하기”(신화학4 벌거벗은 인간) 위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신화에 대한 코멘트이며 분석을 재개하면서 각각의 장의 서두에 색다른 에피그라프(épigraphe)를 붙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허용한 수많은 여담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들의 변천의 연속하는 계보를 분절하지 않고 오히려 신화가 자신 안에 편성해서 자신과 수직으로 교차시키며 신화들 간의 차이로 충전한 의미작용을 밝히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들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잠시잠깐 주체가 스스로를 위임한 자유로운 몽상이며, 자신의 임무로부터 해방된 주체는 그 속에서 어떤 몽상 속에서 자신이 해체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는 여기서 간주관성과 타자성의 쟁점을 극복하기 위해 호출되고 있다. 질문은 두 주체성 간의 관계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화적 사고의 고유성이란 바로 그것이 주체 없는 사고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작품이든 집합적인 구술전승의 작품이든 신화는 주체보다 더 먼 장소, 특정한 신화를 말하는 개인에 구조적인 속박을 부과하고 신화들의 성운으로부터 도래한다는 시차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방법론적이라고도 부를 만한 차원에서 주체의 말소가 필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말소야말로 신화를 오로지 신화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주의, 그에 따라 신화를 외부로부터 검토함으로써 그 외부요인을 발견하는 경향을 가진 판정자의 시점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따르기 때문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인류학자라는 주체는 다른 주체와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접근불가능한 채로 멈춰있는 다른 대상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이렇듯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적인 시점을 암묵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이에 대해 루소, 마르크스, 뒤르켐, 소쉬르, 프로이트 등의 선학들을 따라서 구조주의가 완수하려는 것은 다른 객체의 모습을 의식 속에서 개시하는 것이다. [] 다만 의식한다는 표현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여전히 머리로 생각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바꿔 말하면, 의식은 스스로가 적응하는 현실과 실체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만 구비되는 특성조차도 몸에 두르는 현실 그 자체이다. 이 때문에 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외관 하에서는 의식에 주체를 다시금 인도할 필요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 자아를 한편에서는 익명적인 타자로, 다른 한편에서는 개별화된 욕망(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존재)으로 바꿔 놓는다 해도 이 두 개를 재차 붙여서 그 전체를 뒤집는 것만으로, 그 폐기가 큰 소리로 선언된 해당 자아를 이면에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주체를 그로부터 영원히 도주시키는 타자의 존재를 향한 욕망에 의해 운반되는 주체로서 이해할 수 없다. 그림자에 들이치는 빛처럼 주체는 그에 용모를 맞추는 객관성의 체제에 참여하는데, 주체는 자신이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자신 이외의 것인 땅 위에서 출현한다. 주체는 언제나 종말 없는 운동 속에서 자신을 의식화하는 현실적인 것의 총체이다. 이 주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현실적인 것을 구성하는 광선이 상()을 형성하는 탓에 교차하는 허초점’(virtual focus)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체의 해체를 다루는 데에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음악적인 의미에서의 에필로그가 더 적합한 형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분석을 구성하는 스스로 닫힌 주체를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시적인 소실을 확인하고 레비스트로스가 자아라고 부르는 잔재가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아가 다시금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작품을 다 쓴 후일뿐이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그 장에서 배제된 자아는 이제야 작품전체를 조감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저작의 중단만이 주체의 해체를 정지시킨다. 주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는 저작의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광선의 허초점으로서의 주체는 잠시잠깐 현실의 자아가 된다. 오케스트라는 그것을 지휘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까지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이뤘던 경험적인 개체에 장소를 내준다. 주체란 하나의 동일한 유기체를 통과하는 감정적인 반향의 총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음악적 형식이 가진 위기는 스스로에게 닫힌 경험적 주체의 형상을 다시금 설립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신화학의 통일성의 유일한 보증은 신화들 간의 변천이 인류학자의 정신이라는 동일한 정신을 통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 인류학자의 정신은 경험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고들이 교차하는 경험의 장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주체는 궤적의 형태를 띤다. 신화들 간의 불연속성은 음악적 감동의 형식 하에서 변천을 경험하는 자아의 연속성 속에서 폐절된다. “음악의 청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작품이 실제로 완수되어 어려움(이라고 청자만이 느껴지는 것)을 떼어내고 성공에 이르는 그 도정에 대한 것이다. 발명의 재능을 혜택 받아 음악의 세계에 잠재된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작곡가라면, 그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에 부과되는 갖가지 해답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보여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카타스트로피는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와중에 신화학자가 경험하는 단순한 어려움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신화학의 독자가 이 저작에게서 받은 유별난 신화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정신 그 자체에 부여한 경험을 분리해야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에필로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미로 넘쳐난다고 내게 생각되는 어떤 저작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형식이 발전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이 경험적 주체의 막다른 길을 신화에서 음악으로의 이행에 대한 대범한 가설을 설정함으로써 성공리에 우회하고 있다. 즉 신화가 그 형식적 가능성을 고갈시켰을 때, 음악이 신화를 대신한다. 이것은 악극을 통해 신화체계의 잠재적인 힘을 재발견한 바그너에게서 음악이 정점을 이루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때 신화의 변환을 자신 속에서 전체화하는 경험적 주체를 통과하는 것은 이미 필요치 않게 되고, 음악의 청취를 종결시키는 침묵이 과거 형태의 잠재적 힘과 그것을 지워버리는 카타스트로피를 함께 표출하도록 놓아두면 된다. 에필로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수학과 달리 음악은 주체에 있어서 공허한 형식에 육체를 끼어 맞출 수 있다면서 머뭇거리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문명의 파괴적인 카타스트로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 의해 무언가 분명히 생성된것을 증언하는 능력을 갖춘 이 공허한 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나의 혹성의 표면으로부터 인간이 분명히 사라져가고 그와 동시에 대립하는 현실 또한 소멸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 고통, 기쁨, 희망, 작품 또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저편의 확실함을 한순간도 놓쳐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잠시잠깐의 현상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상의 이미 무감각한 표층으로부터 머지않아 사라진다 해도 잠시잠깐의 몇몇 현상은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소소한 증거로 남기겠지만, 결국 무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글은 조제프 아르튀르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82, 인종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민족학자)오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98, 프랑스의 시인)의 구조이기도 하며 푸코의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을 상기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공허한 형식의 작품이란 일어난 것임에 주목한다. 주체는 이러한 형식이 파괴되도록 운명 지어진 이 지구의 표면에 남겨진 궤적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신화학에필로그는 주체의 두 모델, 즉 카타스트로피가 남긴 형식을 자신 속에 통합할 수 있는 카타스트로피의 증인으로서의 주체, 그리고 존재들과 사물들의 복수성에 대해 열린 카타스트로피의 산물로서의 주체 사이에 주저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주체 없는 초월론주의의 틀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인 것의 논리에서부터 형태의 논리로, 그리고 명제의 논리(이것들은 각각 신화학의 최초의 세 권에 담겨있다)로 이행하면서 그는 하나의 ’, 칸트의 정식화에 따르면 모든 표상과 함께 하는이 공허한 형식에 도달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내가 순수한 사고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갖는 의식 속에서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 존재의 무엇도 나에게 사고해야 하는 것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칸트의 주체를 그 외의 다른 사회에서 행사되는 인간적 사고의 총체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칸트가 비판서와 현실적 견지에 있어서 인간학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 초월론적 주체와 경험적 주체 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을 메우려 했다. 나아가 그는 주체의 위치지움을 칸트가 비판력 비판에서 행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나는 생각한다’(코기토)를 다시 파악하고 차이의 게임에서의 산출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체에 관한 서구적인 사고를 강력하게 형태지우는 칸트주의에 특이한 뒤틀림을 부과하면서도 그 틀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많은 점에서 소신화이론가운데 벌거벗은 인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살쾡이 이야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체의 해체에 대한 자신의 사고에 대해서 칸트가 아닌 몽테뉴를 참고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와 어떤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존재를 공허한 형식으로 보는 칸트의 사고보다 과격하다. 그것은 몽테뉴가 칸트처럼 근대성을 순수주체의 형식 속에서 내면화 해버린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기점이 된 카타스로피의 진정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사고는 자신들이 인류의 모든 전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인류의 반만을 형성한 데 불과하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의 최초의 응답이다. 이 사고는 이성이 예비한 다른 형태의 사고를 흡수해버릴 가능성에 대한 근저적인 비판이며 그로부터 시론(에세이)과 단편의 형태로 금욕적인 문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내가 나의 책을 썼다기보다 나의 책이 나를 만들었다.”는 몽테뉴의 말은 레비스트로스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몽테뉴를 언급한 후에 주체 철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 이어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보편적인 형식을 순수주체에서 찾아낸 일반신화학의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 “어느 특정한 문화의 집합에 속할 뿐더러 지리적인 지역과 시대구분에 한정된 신화들의 비교대조에는 멈추지 않는 위험이 없지 않지만, 이 운동에 의해 신화적 사고가 점차 자신의 형식으로 환원되어 간다는 것을 자각하지만 한다면 결코 쓸데없지는 않다. 문제는 이제 신화가 말해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 수준에서 파악할 때 신화가 점차 무엇도 말하지 않게 된다 해도 신화가 어떻게 말했을까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이때 구조분석에 기대되는 바는 구조분석이 그 외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탓에 공허한 담론만을 발산하면서 그 동작 메카니즘을 샅샅이 드러내어 노골적인 정신의말하자면 순수상태에서움직임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상태에 있는 인간정신, ‘벌거벗은 인간은 이미 형식적 연산의 주체가 아니라 어떤 금욕의,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를 두는 작업의 성과이다. 이 작업은 각각의 신화를 민족적인 맥락으로 되돌려놓음을 함의하며 자연 속의 산책에 가깝다.

살쾡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륙이 그 정도로 닫힌 것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에서 주장했듯이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두며, 그것이 역사속에 기입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초기 쌍분제(双分制) 사회를 재차 고찰하면서 안개와 바람의 테마 분석과 뒤섞음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에 특징적인 쌍분관(双分觀)가령 그것이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해도은 근본적인 불균형 하에 성립되었고 새로운 존재의 여지를 남기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캐나다의 몇몇 신화는 초기 유럽인 탐험가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새둥지 잡이 신화의 모티브인 요리의 불의 출현 등 기원의 카타스트로피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신화학적인 주체성의 구축을 통해 이에 응답한다로부터 시작되는 대신, 살쾡이 이야기는 살쾡이와 코요테라는 쌍둥이 이야기를 통해 불가능한 주체성에서 시작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가 항상 예견해온 카타스트로피로 열려간다. 주체는 존재들과 사물들에 장소를 내어주기 때문에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타자성에게 장소를 예비해두었기 때문에 역사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는 주체의 해체라는 이 기획은 1999년에 비평지가 바친 찬사에 대한 응답에서 특히 감동을 주었다. 고령에 이른 레비스트로스는 몽테뉴를 언급하면서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잠재적인 자아와 그것을 할 수 없는 현실의 자아 사이에서 무너진 홀로그램의 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현실의 자아는 마지막 해체에 이르기까지 용해되어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손을 뻗는 동안 그것과는 다른 고마움의 감각을 준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의사소통하는 개체가 존재하는 한 주체는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해체로부터 잠시잠깐 피해있는 것에 불과하다. 신체의 죽음은 정신이 자기와 자기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준비된 물리적인 카타스트로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근대의 시작을 기록한 카타스트로피가 자신과 화해한 주체의 형상으로서 닫혀버리지 않고 다른 일련의 카타스트로피와 연관지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게으름 피우지 않는 자연에 대한 고찰자연은 야생의 사고의 실습의 장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의 생태적 조건에 대한 배려는 근대의 주체의 해체로부터 비로소 형태의 생명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카타스트로피,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주체성에 대한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レヴィストロースにおける主体解体生態的カタストロフィー」 『思想No. 1016200812岩波書店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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