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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8 스칼렛 요한슨의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 2013)을 보고

몇 년 전에 개설한 티스토리 블로그가 휴면계정이 되었으나, 이미 사라진 프리챌 메일로 아이디를 등록하여 휴면을 풀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 집은 그 집 대로 놔두고, 다시 집을 지을 수밖에.

어쨌거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언더 더 스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박사논문을 끝내고 빈둥거리는 한량 짓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책보다는 영화로 오늘을 마감하고 싶었다. 

내가 스칼렛 요한슨과 케이트 윈슬렛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들의 풍만한 육체 때문이다. 나의 몸이 빈약해서인지 요즘 걸그룹 아이돌의 비린 체형보다는 그녀들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끌린다. 그래서 <언더 더 스킨>이라는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몸이 아줌마 체형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매혹적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살짝 처진 가슴과 살집 있는 허리도 보기 좋았더랬다.

<언더 더 스킨>의 내용은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다. 스칼렛 요한슨이 외계인으로 나온다. 그녀는 지구인의 육체를 갈취하기 위한 '미끼'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흑발과 붉고 도톰한 입술과 풍만한 육체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마침내 유혹에 넘어간 남자들을 심연의 '저장고'에 빠뜨린다. 물과 같은 액체로 가득찬 심연의 저장고에서 남자들의 육체는 서서히 피부와 박리되어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피부만을 남겨둔 채 내부의 것들이 골고루 뒤섞여 외계로 운반된다.

영화 전반부에는 잡음인가 싶은 기계음이 깔려있다. 그것은 스칼렛 요한슨이 세상을 '외계'로 감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에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고 불규칙한 기계음과 같이 어렴풋하게 들린다. 그녀는 다만 기계적으로 남자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몇 마디 말을 걸 뿐인데, 남자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와 말 몇 마디에 욕정을 느낀다. 

그런데 그렇게 '미끼'의 역할에 충실한 그녀가 어느 날 얼굴이 흉직한 어느 청년을 만나면서 변화한다. 자신의 얼굴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 청년의 손길에서 그녀는 '미끼'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로 자신을 느낀다. 그 후 그녀는 '미끼'로서의 유혹의 몸짓이 아닌 남자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고, 먹고 걷는 등의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남자들과 함께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미끼'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감시자'(포주와 같은)의 위협을 불러온다.

<언더 더 스킨>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아>나 <희생>처럼 묵시록적이다. 아주 세련된 SF물이다. 네이버의 네티즌 평점이 형편없는 것은 스칼렛 요한슨의 상업영화를 기대한 탓일 게다. 그러나 <언더 더 스킨>은 별점테러를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휼륭한 영화가 그러하듯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스칼렛 요한슨의 변화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며, 스칼렛 요한슨은 그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스칼렛 요한슨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녀가 기계적으로 유혹의 대사를 건냈을 때의 남자들 또한 그 유혹에 반응할 뿐이다. 그녀가 소통을 원하는 순간 남자들 또한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욕망의 대상에서 연민의 소통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다. 욕망과 사랑의 질적인 차이는 누가 누구의 정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민으로 서로를 바라봄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스칼렛 요한슨은 연민의 소통을 통해 어느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의 피부를 "입었을" 뿐이고 남자의 육체를 받아들일 '질'이 없다. (어느 영화평에서는, 결정적인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가랑이에 스탠드의 불빛을 가져다보는 것이 촉감에 당황해서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불발로 끝난 정사 직후 집을 뛰쳐나간 것은 그녀를 찾아온 '감시자'를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사가 거의 없어서 확실히 말 못하겠다.) 그녀는 절망에 휩싸여 숲 속을 헤매다 숲 속에서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이 남자는 그녀를 겁탈하려다 그녀의 피부를 찢고 그 피부 속에 검은 형체를 발견한다. 그녀가 '미끼'가 아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순간, 그녀는 그나마 연민으로 위장가능했던 '피부'마저 잃어버린다. 겁탈하려한 숲 속의 그 남자는 검은 형체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다. 그녀는 벗겨진 자신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싸안으며 불길에 휩싸인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하늘에서 쏟아지며 날리는 검은 눈발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작은 말 한 마디에 흔들린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건넨 말들은 소소하다. 미소가 아름답다느니, 조금 전에 보았다느니, 외롭지 않느냐 느니.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피부'가 '미끼'를 위한 것인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에 따라 그녀와 남자들의 관계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육체를 거울에 비추며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연민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자신의 육체를 연민하는 남자에게 비로서 연민을 느낀다. 물론 그녀가 변화했다고 해서 남자들이 모두 그 변화에 조응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겁탈하려했고 불질렀던 숲 속의 남자가 있다고 해도, 그녀의 '피부'에 연민으로 대했던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다. 

어느 영화평론가는 <언더 더 스킨>이 에로티즘의 허무함을 다룬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름다운 스칼렛 요한슨(외계인)과 볼품없는 남자들(지구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다룬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문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니까.

8월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무리해야 할 일과 오는 가을 학기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2014년 여름, 무진장 헤매고 무진장 놀았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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