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상관주의 비판, 도구, 사물, 배치, 교차교환

 

문화인류학과 현대철학이라는 두 영역에서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부상하는 경향의 하나로 인간과 자연(및 사물)의 관계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묻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서양문명이 문화들을 상대주의적으로 다루는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객관적인 자연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에 다름이 있음을 주창하고 있다. -인간의 퍼스펙티브에서 파악된 세계가 다종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에서도 대상세계를 인간주체와 상관적인 형태로만 파악한다는 퀑탱 메이야수의 비판(상관주의 비판)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 또한 인류부재의 세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는다. 물론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20세기에도 있었지만, 다양한 비-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심적 위치를 점할 수 있고 나아가 사물이 일정한 퍼스펙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기묘한 논점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객체지향의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한 그레이엄 하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이라는 논의를 발전시켜 사물과 사물이 상호 절대적으로 독립하고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세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진 <도구>가 연관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 연관에 불확정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스스로의 실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갖는 인간이다. 인간의 수발을 들 때 <도구>는 불확정한 존재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에 반해 하만은 각각의 <도구>나 사물 자체가 인간존재를 떠나 이미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불확정성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온갖 사물, 대상, 혹은 <도구>를 생각해낸다 해도 이제까지는 그것들을 연결하는 중심적인 매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주체였다. 대상세계가 아무리 다양성과 차이를 품는다 해도 그것들을 무언가의 정합성 속으로 회수하는 것은 주체의 움직임이며, 그 과정에서 주체 자체가 변질된다 해도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이 특권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대상세계가 차이와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특권적인 주체가 본 잉여, 외부로서 그렇다.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사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성에 대해 열린 여지를 주체에 남겨주기 위한 이론이었다. 기존 철학에서는 대상세계가 주체로부터 진정 독립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주체와 대상을 상관적으로만 다루었다는 메이야수의 작금의 비판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주체와는 별도로 대상이나 <도구>를 매체로 함으로써 이러한 구도를 뒤집으려는 것이 현대철학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이다. 하만이 말하는 오브젝트(object) 또한 그러하며, 인간부재의 세계로부터 사고를 출발시키는 메이야수 또한 그러한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는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들이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외부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주체에게 나타나는 한에서의 사물=대상만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물과 사물 또한 서로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물로부터 보고 다른 사물은 표면적인 그 나타남(감각적 오브젝트)으로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하만은 말한다. 사물에는 그 숨겨진(탈각한) 외부(실재적 오브젝트의 일부분)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의 부정확한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주체에 의한 퍼스펙티브뿐만 아니라 사물로부터 본 사물, <사물의 퍼스펙티브>로부터 보이는 사물을 고찰해야 한다. 사물이나 비인간을 매체로 복수의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발상이 현대철학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사물이나 <도구>에 대한 이러한 착상, 그리고 그를 통해 기존의 방법론을 비판하려는 태도는 인류학에서도 메릴린 스트래선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사회학이나 비평이론의 인류학버전인 재귀인류학에서는 타문화 속에 몸을 던지고 그 문화의 내측을 체현해서 말하는 특권적인 <화자>를 부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행자로서의 <화자>는 복수의 문화들에 동시에 몸을 던지고 자문화조차 상대화하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결여항적인 매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류의 문화상대주의는 문화들을 단지 단편적인 형태로만 제시할 뿐이라고 스트래선은 비판한다.

이에 반해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도구>=사물이라는 매체다. 한 집단을 특정의 배치(, ) 하에서 연결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도구>. 즉 그 <도구>를 통해 무언가의 해석을 하고 특정의 관계(배치)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때 동일한 <도구>가 인접하는 다른 사회집단 하에서는 다른 해석이 내려지고 다른 배치가 묘사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도구>는 그러한 동료집단들의 문화를 상대화하면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이때 각각의 인간집단이 읽어 들이는 용도에 앞서서 그러한 <도구>=매체는 이미 존재한다. <도구>나 사물의 <모조리 퍼 올릴 수 없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간의 <도구>는 한 집단에서는 중심적인 기능을 맡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듯이 또 다른 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 다른 집단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맡는 또 다른 <도구>가 존재할 것이다. <도구>는 집단이 그리는 배치()와 다른 집단이 그리는 배치()를 부분적으로 연결하며, 그 한편으로 배치() 자체 또한 이미 다른 <도구>를 포함하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매체로서의 <도구>와 배치()는 고정되지 않고 각각 다양한 모습을 띤다. 문화들은 배치()의 배치()인 최대의 구조로 회수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재귀인류학처럼 단지 단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최대의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어떤 부분에도 복잡한 사물=<도구>와 배치()의 교차교환의 복잡한 관계가 발견된다는 것이며, 도처에 그것이 예시(豫示)된다는 것이다.

<도구>=사물이 다양한 인간집단의 행위를 상대화하는 기축이 됨과 동시에 그러한 사물 자체가 복수로 나타난다는 스트래선의 논의와 그 방법론은 주체중심의 발상 그리고 세계의 다양성을 인간주체와의 상관성을 벗어나는 잉여로만 보는 사고방식을 진작 넘어서고 있다. 철학이 마침내 근대서구의 사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기 시작한 오늘날, 인류학으로부터 얻는 시사점은 매우 풍부하다. 현대사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제까지의 주체중심의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사물을 중심적 매체로 편성하는 이론을 지역적인 문화사상에 머물지 않고 보편화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시야로부터 자연과학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Lexicon 現代人類学148-15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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