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탱 베르케는 1942년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인으로 일본사상 및 일본문화 연구자이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다음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다. 다음의 글을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https://sarantoya12.tistory.com/153)와 같이 읽으면 동양(일본)과 서양(유럽)의 자연관에서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주체성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
1. ‘누구’란 어떤 것인가?
얼핏 보면 인류학자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인류학적이다. 이 질문에서 ‘누구’란 인류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인 듯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라고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가진) 주인은 인간 주체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은 일본어의 세계 특유의 지적환경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간을 뜻하며, 한자 ‘誰’의 구성요소 또한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이 글자의 의부(意符)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言’이고 음부(音符)가 ‘隹’(새 추)이다. 이 글자는 “인간 특유의 옛 새점 풍속에서 누구라도 불특정한 자를 추측할 때 새점을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白川靜, 『字通』, 平凡社, 1996). 이렇듯 ‘누구’는 인간존재의 대명사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어 원문 제목 ‘À qui appartient la nature?’에 나오는 대명사 ‘qui’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물 일반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은 qui의 것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자연을 ‘가지는’ 주인은 자연 자신도 포함되고 인간은 물론이고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제목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데스콜라의 논문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그가 확실히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논문의 결론에서 제안하는 관계보편주의(universalisme relatif)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성을 기본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분명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에 썼듯이,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이 의미에서 데스콜라의 견해는 와쓰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류학자 데스콜라는 철학자 와쓰지와 달리 풍토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본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은 와쓰지의 풍토론과 유사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일찍이 『지구와 존재의 철학』(1996)에서 시도한 바, 데스콜라도 환경윤리의 가능성을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자연과의 관계성(즉 풍토성)을 기반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1
2. 이원론의 재검토
이 장에서는 그러나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에 한정되지 않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까지 고려하고자 한다. 이 문제 제기는 30년 전부터 나의 연구의 통저음(通低音)이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여름에 쓴 (후에 『풍토의 일본─자연과 문화의 통태(通態)』(1992)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책의 결론을 ‘자연이라는 더없는 주체(La nature, ce sujet ultime)’로 내린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풍토성을 고찰한 저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존재의 관계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풍토』의 첫 줄에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 정의된 와쓰지 데쓰로의 기본개념인 풍토성을 médiance라는 신조어로 만들어내었고 나의 풍토론의 또 하나의 기본개념인 trajection의 번역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일본어본에서 그것을 ‘통태(通態)’로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 통태는 시간적인 과정이며 공간적인 구조계기인 풍토성을 발생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지금까지의 문제군을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분명 일본 풍토와의 만남이었고,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그 자체는 보편적이다.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논하는 가운데 그 보편성을 발견하고 심화했다.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이원론을 재검토하면서 그 두 개의 신성 축, 하나는 객체적인 동기로서의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cogito(근대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기 창조)인 주객(主客)의 절대적인 구별의 추상성에 불만을 자각하고 그를 대신한 풍토론의 입장에서 자연과 주체성의 관계 재구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재구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재검토이다. 자연은 주체의 자연환경이면서 그와 동시에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자연과 주체성은 나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주체’의 재검토이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와쓰지의 ‘자기발견성’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Dasin)에서 습득하는 사실)한다. 그러한 주체성의 장은 그 신체의 국소성(topicité)에 결코 한계지을 수 없다. 풍토(風土)에도 있는 바람(風)이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도 살아가는 한, 기계와 다른 한 부류이며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3. “Sujet”의 다양성과 위태로움
그리스어 hupokeimenon(밑에 깔려있는 것, 기저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인 subjectum에서 유래하는 sujet, Subjeckt, subject 등등의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현대일본어에서 단 하나의 단어인 subject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러 개이고, 그것들은 겉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것 같고 또 경우에 따라 상반돼 보인다. 주어, 주체, 주관, 주제, 문제, 이유, 대상, 환자, 신하 등은 모두 저 하나의 단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것은 논리학자에게 sujet(주어)가 물리학자에게는 object(대상 또는 객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주제(subject)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양과의 접촉 이전 일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언어학자가 밝혔듯이(예를 들어 『근대 일본어의 사상』에서 “‘주어(主語)’는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썼듯이), 지금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어, 주체, 주제라는 말들의 개념은 결국은 메이지 시대의 박래품(舶來品)이고 최근까지 그에 반발하여 「일본어는 주어가 필요 없다」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확실히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발생하여 서양사상, 서양문명의 기본조건이 된 문법적 삼항구조 S-V-O(주어-동사-목적어)와 논리적 이항구조 S-P(주어-술어)가 일본어와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구조임을 말해주는 저 유명한 문구인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와 같이 두 개의 주어를 가진 문장을 일본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는’과 ‘이/가’가 보여주는 바, 명사 ‘코끼리’(주제)와 ‘코’(주어)의 문법적인 기능은 실제로 다르지만 그러한 구조는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중국어의 구조 또한 일본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같은 문장, 예를 들어 ‘那個人嘴大大的’(저 사람은 입이 크다)와 같은 예는 흔하다. 중국어에는 ‘은/는’과 ‘이/가’가 없으므로 중국의 문법학자는 그러한 구조를 간과하여 ‘主謂謂語句’(주어-술어 문장)’이라고 부른다. 주어는 술어에, 술어는 주어에 되먹임되는 구조인데 서구에서는 언어 문법뿐만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은/는’과 ‘이/가’를 교환을 하려고 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케이다.’를 ‘내가 베르케이다.’로 바꿔도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하여 의미가 ‘베르케는 나다.’로 되기 때문에 S(주어)와 P(술어)에서 P가 S로 역전한다.
지금의 논의는 언어학자나 논리학자의 전문가들의 정연한 논리로 벌써 이야기되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문명의 원천, 즉 anthropocene(인류세)의 주요 요소인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논리상의 주어(sujet)와 술어(prédicat)의 구조계기는 존재론상의 본질(substance)과 우유(偶有, accident)의 구조계기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저와 같은 ‘역전’은 존재와 자기동일성에 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뿐더러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계기를 재검토하는 것이 시급한 의무이기도 하다.
4. ‘자연’은 nature였던가?
현대일본어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적어도 과학에서)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에 따라 주체와 상반된 객체화・기계화된 대상 nature에 대응하는데, 그것 역시 메이지의 번역 사상의 결과에 불과하며, ‘자연’이란 본래 도교의 저 유명한 표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老子』 제25장)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도가 그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현대 문법에서 말하는 명사라기보다 오히려 부사에 가까우므로 전통적인 훈독 ‘스스로 있는’이 그것을 잘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스로 있는’은 뜻밖에도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야훼가 호렙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응답한 말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을 상기시키는데, 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일신교의 야훼가 삼라만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것에 반해 도교의 ‘스스로 있는’은 삼라만상에 내재하며 삼라만상의 자연, 자연의 더없는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주체의 자기창립을 표현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존재라는 동일화를 설정하는데, 결국 호렙산 정상에서 발신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 상응한다. 코기토는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므로 나는 그것을 ‘호렙산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에서 ‘자’(근대 주체)의 주체성은 객체화된 삼라만상(근대 자연)의 기계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에 쓰인 것처럼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론, 기계론, 공리주의, 유명론 등등의 그 무엇으로 불리더라도, 근대과학 곧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호렙산의 원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원리는 근거가 신비적이며,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라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과학이 하루가 멀다고 밝힌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 또한 어떤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분명히 표명했듯이 고전 근대과학과 달리 현대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리적으로 풍토론과 데스콜라의 관계보편주의와 호응한다.
그런데도 십계명에 정해진 법처럼 과학에 의한 자연의 기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 적절한 예로서 학계는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1902~1992,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의 ‘분화이론(棲み分け理論)’을 언급한다. 2
5. 자연의 주체성 외폐(外閉)
몇 년 전 『진화론은 왜 철학의 문제가 되는가』(2010)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입수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웹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소개 문구를 볼 수 있다.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계와 철학계의 틀을 넘어서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축으로 과학철학, 시스템 이론, 수학, 심리학, 역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 속에서 다양한 과제를 전개한다. 원리적인 문제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이 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봐도 색인을 뒤져봐도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논의된 이마니시 진화론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진화론이 틀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은 이마니시 진화론을 문제 제기에서부터 제외하고 폐쇄했다. 의식의 ‘밖(外)’으로 배제하고 의식의 문을 ‘닫은(閉)’ 것이다. 이마니시의 ‘분화이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화이론’이 전적으로 무시될 만큼 이마니시 진화론이 어떤 규정을 어긴 것일까? 그것은 이마니시가 만년에 저술한 『주체성의 진화론』(1980)의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고전적 근대 범례의 두 개의 신성 축을 동시에 쓰러뜨리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생물학의 철학』의 ‘마을’로부터 외폐되고 말았다.
다만 저 ‘마을’은 개구리의 우물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철학의 입장과 다르다. 예를 들어 『과학』 2003년 12월호에는 「자연과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 일본의 임상심리학자)가 이마니시 자연관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찰했다. 이마니시가 연구하려 한 것은 근대적 자연 대신 ‘스스로 있는’ 자연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마니시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의 ‘스스로 있는’ 변화의 힘에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가와이 하야오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된, 지구 규모의 환경위기를 일으킨 제도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탐구한 이마니시의 자연학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자연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감한다. 기계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존재를 추상해온 나머지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과학은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존재를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띤 제도를 점차 구축해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초극(超克)해야 한다. 정말로 이마니시 자연학은 그러한 초극의 길을 걸었을까?
6. 아기는 정말로 ‘설 수 있어서 선’ 것일까?
알다시피 정통 진화론은 개체(지금은 유전자)를 단위로 하여 통계학적 합계(population)를 추정하고 자연도태에 의한 그 비율의 변화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어떤 주체성도 활동하지 않으며 우연(돌연변이)과 필연(통계법)에 지배된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마니시는 그러한 기계성을 부정하고 생물에 주체성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 고찰했다. 그것은 자연의 무주체성이라는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일뿐더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까지 소급 가능한 중세의 보편논쟁(querelle des universaaux)과 에밀 뒤르켐과 허버트 스펜서의 대립을 거쳐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유명한’ 발언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s as society).”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론(부류의 실재를 인정하는 파)과 유명론(개개의 실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파)의 대립에 저도 모르게 말려든다. 이마니시의 기본 개념인 ‘종(種) 사회’와 ‘생물 전체 사회’는 근현대에 이르러 (특히 앵글로색슨족 문화권에서) 우세를 점한 근대과학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인데, 또 다른 신성한 규정을 신성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이마니시를 벌하려 한 것인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듯 영국에서 대처 급의 유명론자 비버리 할스테드(Beverly Holstead, 1993~1991, 영국의 고생물학자, 동물학자)가 도쿄를 방문하여 몇 주간의 짧은 체류 기간 후에 이마니시 진화론을 뒤집은 책까지 출간한다(『이미니시 진화론의 여행』, 1988). 원문 Kinji Imanishi: the view from the mountain top은 발간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Nature 317 : 587-589, 17 oct, 1985.).
사반세기가 지난 후 저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봐알(Frans de Waal)이 할스테드의 뻔뻔한 태도는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드 봐알도 영장류학에서 거둔 이마니시의 거대한 성취와 패러다임 전환을 칭찬하면서도 이마니시 진화론의 중심가설인 (개체의 자연도태를 둘러싼) 종 전체의 동시 변화에 대해서는 난해한 사고라고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실은 이마니시 자신이 그 가설을 적극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년의 『주체성의 진화론』에서 그는 결국 그러한 공동변화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아기가 “설 수 있어서 선”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 또한 “변할 수 있어서 변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진화론이 ‘할 수 있어서’가 멈춰선 것은 진화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마니시 진화론이 학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것은 아마도 ‘과정’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인 목적론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마니시 진화론의 ‘과정’은 일종의 목적론과 유사할지라도 그것을 그의 자연학 전체에서 주체의 문제 제기 속에서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외폐(外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할 수 있는’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현대일본어에서 ‘べく(할 수 있는)’라는 조동사는 결의・의지와 의무・당연함을 뜻한다. 이 모두 주체성을 전제한다. 의무를 느끼고 의지를 갖추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결의하는 존재는 반드시 주체여야 한다. 실제로 주체성의 문제는 이마니시의 자연학을 시종일관 관통한다. 그는 『생물의 세계』(1941)에서 이미 정통 진화론의 사고방식인 자연도태에 의한 환경의 생물로의 일방적인 영향 또는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마니시는 그것을 ‘주체의 환경화’라고 부른다.), 오히려 주체의 환경화는 환경의 주체화이기도 하며 환경의 주체화는 주체의 환경화이기도 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윅스퀼의 환세계론의 입장과 매우 가까운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미니지의 논문에서 그는 한 번도 윅스퀼의 환세계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환세계론과 완전히 같은 전제(단, 인간에 한정해서)를 가진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간 이마니시의 자연학도, 환세계론도, 풍토론도 개체든 사회든 종이든 생물 전체 사회든 우선 존재자의 주체성을 전제로 놓고 그 주체의 현실을 환경 일반(윅스퀼이 말하는 Umgebung, 와쓰지가 말하는 ‘자연환경’)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밝혔다.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환경 일반으로부터 특수한 환세계(와쓰지의 경우는 풍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장’과 같이 모호한 표현에 그친 이마니시는 환세계나 풍토라는 본격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체화된 환경’은 환세계나 풍토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와쓰지가 정의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물 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환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이마니시 자연학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조계기’란 독일어 Strukturmoment의 번역어인데, 역학에서 파생한 개념이다. 통상적 의미에서는 ‘계기’와 ‘동기’의 동의어이고, 철학에서는 ‘사물을 조직,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구조계기로서 ‘환세계성’이란 주체와 그 환세계의 동적인 관계를 가리키므로 이 양자를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여 어느 한 흐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를 어느 한뜻(趣)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이마니시 진화론의 ‘할 수 있는’의 뜻과 같다.
이제 이 추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이족보행을 이야기해보자. 다음의 논증은 이 문제를 연구한 크리스틴 타르디외(Christine Tardieu)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이족보행자가 되었는가?』(2012)를 참조한다. 예상외로 이족보행은 인간의 게놈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동물(예를 들어 늑대)에 길러진 인간 아이, 이른바 ‘늑대소년’은 실제 사례로도 보고된 바, 그들 대부분은 성장해도 언제까지나 사족보행의 상태 그대로 동물처럼 움직인다. 이족보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환세계(가족,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으로 격려받으며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필름을 몇 통이나 찍고 분석한 타르디외는 기묘한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 돌아본다. 마치 [스스로] 그들의 의견과 칭찬을 구하듯이.
이러한 사례를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인간 아이가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특수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쓰지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에서 밝혔듯이 그 유대관계란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를 건립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기를 세우는 동기는 윤리감과 그 주요 요소인 의무감의 맹아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러한 의무감과 당연함을 가리키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마니시가 말한 ‘할 수 있는’이 아닐까? 추상적인 ‘자연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아기는 설 수 있어서 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의 범위가 인간의 삶에 한정되는 것일까? 진화라는 현상의 규모에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8. ‘과정’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주체성’을 ‘주관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觀)’은 지각(시각과 의식), 즉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머물지만, ‘체(體)’는 육체 전체이므로 지각만이 아닌, 몸의 행동과 작용까지 포함한다. 윅스퀼이 말하는 Funktionkreis(機能環)에서 동물의 지각범위와 작용범위는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일어난다. 나만의 환세계론에서 그러한 상기(想起)를 통태(通態, trajection)라고 부르며, 환세계성・풍토성이라는 존재의 구조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 통태는 자연환경 일반(Umgebung)을 토대 또는 자원으로 해서 특수한 주체의 신체성과 그 특수한 환세계(Umwelt)라는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만드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의 창조성은 주체로서의 생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 통태라는 상기(想起, co-suscitataion)는 단지 주관성의 투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의 주체와 그 환세계를 동시에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앙드레 레로와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사람화)은 삼중의 과정을 거친다. 앙드레는 기술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공화(anthropisation)와 상징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간화(humanisation)와 그 귀환작용(feedback)에 의한 사람화(homonisation)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이마니시가 주장한 환경의 주체화, 주체의 환경화의 과정에 대응한다.
시간의 척도를 바꿔서 마찬가지의 과정이 진화 전체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모든 생물은 그 특수한 기능환(機能環)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그에 작용하고 다시 귀환작용에 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관점은 근본적, 존재론적으로 자연도태라는 결정론과 다르다. 자연도태에서는 우선 환경 일반이 있고 생물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주체적인 창조성이 없고 기계적이며 통계학적인 도태만이 있다. 따라서 정통 진화론은 진화의 창조성(즉 신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이마니시의 자연학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이 제기되어왔다. 재생산뿐만 아니라 창조성이 있으려면, 어느 한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진화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종은 ‘변할 수 있어서 변하는’ 만큼,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을 결정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호렙산 원리의 광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화가 단지 우연(돌연변이)의 결과였다면, 단백질의 가능한 조합의 수(10의 130승)를 고려한다면, 원 상태의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가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는, 말하자면 무한의 시간이 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특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생명 전체의 각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의 과정은 어느 흐름의 어느 정도로 결정된 주체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제 ‘과정’은 반드시 목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목적론의 신비성이 필요하지 않다. 주체가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역사 세계에서 ‘자기발견’을 한다면─,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 어느 한 뜻이 스스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 스페인의 시인)의 어느 유명한 시구인 “여행자여, 길은 없다 … 여행자여, 길은 너의 흔적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생명과 그것을 육체화하는 생물 모두는 살아가는 한 자기 존재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견지할 수 없고 환경 속에 흩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자기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존재(自存在)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 기억을 지금은 게놈이라고 부르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원리란 주체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박테리아의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만큼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차도의 원리’라고 부른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생물이여, 과정은 없다 … 생물이여 과정은 너가 걸어온 길(진화) 그 자체이므로 스스로 있으며 같아지는 오직 그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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