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마르쿠스 가브리엘 욕망의 시대를 철학한다』(2018년 12월 출간)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지난 2018년 6월 일본을 일주일 방문한 중에 NHK에서 방송한 그의 강연 및 일본의 인공지능연구자인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와의 대담의 기록, 그에 더해 일본 철학자인 마루야마 슌이치(丸山俊一)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일본방문의 행적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다음의 영상을 보면 일본 내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난 것 같다(https://www.youtube.com/watch?v=H9J19m4ey8g). 다음의 강연 또한 대단한 호평을 받은 모양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에게서 책을 어렵게도 쓰고 쉽게도 쓰며 대중강연도 능수능란한 21세기 철학자의 또 하나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다음의 글은 쉬우면서도 깊다. 그리고 20세기의 근 100년간의 철학사를 일목요연하게 논하면서 자신의 관점과 이론으로 끌고 오는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신실재론'의 의의와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하는 이 글은 '신실재론'의 입문으로 읽힌대도 좋겠다 싶다.
철학은 현대와의 격투다―가브리엘의 ‘전후철학사’ 강좌
유럽의 새로운 세대의 지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의 역사를 개관한다. 과연 얼마나 광대한 관점이 만들어질까?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그다음은? 스테레오타입의 ‘역사라는 서사’를 일단 접어놓으면, 피상적으로 끝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철학사’가 시작된다.
1. 모든 것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인식론을 빼고서 철학을 말할 수 없다
지금 왜 철학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일까? 왜 갑자기 많은 사람이 철학을 요청하는 것일까? 이제까지 많은 일반인도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철학이란 결국 대체 무엇일까? 지금부터 설명할 매우 단순한 문제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 눈에 물방울이 들어갔다고 하자. 그때 눈동자를 살짝 누르면, 내가 둘로 보이지 않을까? 누구라도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이중으로 보일 텐데, 어째서 보통 눈으로 믿고 있는 현실이 왜곡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짜 현상의 복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판단해버리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은 정보사회 전체를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숙고해야 할 문제는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사실과 그 표현, 즉 그러한 사실과 이미지와의 격차와 얽혀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주사위를 손에 들고 있다. (카메라를 향해) 보입니까? 지금 내가 몇 개의 물체를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다.
세상의 극히 일반적으로 세는 방법을 적용하면, 내 손에는 주사위 두 개가 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물체’가 몇 개냐를 묻는 질문에 모두가 일제히 ‘둘’이라고 답할까?
모서리를 세어도 된다. 주사위의 면에 있는 숫자를 세어도 된다. 혹은 주사위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세어도 된다.… 어째서 소립자나 면, 주사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주사위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아가 내 손안에 정말로 실제로 주사위가 두 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강연은 방송프로그램이고 내가 단지 당신 모두를 속이기 위해 이 프로그램 제작팀이 만든 홀로그램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째서 모두가 두 개라고 답할까? 정말로 자신의 머리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이것은 가장 철학적인 물음 중 하나다. 아니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인 물음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철학적인 문제는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앎의 논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철학 자체가 현실과 유리되고 말 것이다.
컴퓨터도 철학자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일단 철학의 중요성은 알았다.
다음으로 우선 ‘현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현실이 나타나는 방식과는 별도로 현실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단계를 밟지 않으면, ‘글로벌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지구는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절대로 답할 수 없다. 애초부터 근본적인 인식에 관한 물음은 현대 사회, 오늘날의 삶에 관한 모든 물음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철학은 특히 우리 시대에 이르러 더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물음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컴퓨터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이 방송도 컴퓨터 기술이 탑재된 TV에서 보고 있고, 스마트폰도 늘 곁에 두고 있다. 컴퓨터는 당신이 살고 있는 상황 속에 항상 있는 매체 중 하나다.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현실의 하나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컴퓨터란 무엇일까? 놀랍게도 누가 벌써 답해놓았다. 만약 그 인물이 그에 대해 생각해놓지 않았더라면 컴퓨터 같은 것은 없었을지 모른다.
1950년대 이전 ‘컴퓨터’라는 말은 계산한다(compute)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계산하는 사람(computer)을 가리켰다. 인간이 간단한 산수 문제를 푸는 느낌, 그것이 컴퓨터였다. 그랬던 것이 현재의 ‘컴퓨터’가 된 데에는 천재 컴퓨터 과학자인 앨런 튜링이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그가 천재성을 발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암호를 해독한 덕에 영국이 독일에 승리할 수 있었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컴퓨터가 무엇인지를 해명했다. 그 후 컴퓨터는 과학이 되었다. 그 근본에 있는 주요 사고방식을 확인해보자. 컴퓨터란 논리적인 시스템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논리란 무엇인가? 복잡한 것 같지만 실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 내 손안에 물체 두 개가 있다. 주사위 두 개가 있다. 이 물체를 왼손에 놓으면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고서도, 나는 왼손에 두 개의 물체가 있으며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양손에 하나씩 물체를 가지고 있다가 가지고 있는 물체를 왼손에 옮기면 왼손에는 물체가 두 개 있게 된다. 그것은 ‘계산 가능’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계산순서)은 대략 이러한 느낌이다. ‘1 더하기 1은 2’. 아니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A 더하기 B는 C’. 모두가 알고 있다, 이 구조를. 이것이 하나의 알고리즘이다. 컴퓨터는 일종의 하드웨어에 내장된 논리와 다름없다. 전자기의 정보 변환에 의해 나타나는 논리 말이다. 그것이 컴퓨터다. 컴퓨터는, 그 근본적인 논리의 구조를 밝힌 튜링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발명되고 구상되었다.
모든 이데아는 철학에서 시작되어 연결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은유’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나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 그리고 내 뒤에 이미지의 이미지가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직 그 무엇도 복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미지의 이미지―을 현실이라고 알까? 플라톤은 바로 이 상황을 고찰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동굴 속 사람들이 벽을 보고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들 뒤에는 불이라는 투영장치가 있다. 누군가가 사각형의 주사위나 손 등의 다양한 모양을 불에 비춘다. 그러면 동굴 벽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들이 벽만 볼 수 있다면, 그림자가 진실의 세계가 된다. 그러나 진실의 세계=이데아의 세계는 동굴 밖에 있다. 이것은 저 유명한 플라톤의 철학인데, 시네마의, 영상에 대한 최초의 이론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시네마라는 개념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까지 발명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람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이데아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러분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 자막의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 자막은 당신에게 보이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것[당신의 이데아]을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이데아에 대해 내 나름의 이데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또한 나의 이데아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대략 해온 일은 이데아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는 일이다. 이처럼 모든 이데아는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방에서 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사위가 있는 곳에서 스튜디오의 저편에 있는 바비인형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고,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할 과일이 있는 곳으로도 갈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방을 둘러보면서 방에 있는 것들을 연결할 수 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일종의 정보구조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했다. 이것이 인터넷의 유래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톤은 ‘이데아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이데아를 알려주었다. 이데아의 이데아, 플라톤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이데아’라는 용어까지 만들었다.
정보화 시대, 컴퓨터 시대,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질문의 상당수는 실은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철학의 문제에 이른다. 이를테면 ‘정치’나 ‘민주주의’와 같은 용어 또한 처음에는 철학적인 표현이었다. 현실에서 실행된 철학적인 사고였다.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철학적 사고다. 즉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인류 세계에서 기본적인 구조의 상당수는 철학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사고에 부착된 많은 문제들, 그에 대한 답들 중 상당수는 실은 종종 틀리기도 했다. 세상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지금 이 스튜디오에서 시작해보자.
더 기본적인 철학의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그것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가장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시간의 경과’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간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문제를 이야기했다. 현실과 그 표현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것을 이야기한 후 지금 시간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 순간이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제 당신은 무엇인가를 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어제의 장면에 있는 동안 무언가가 일어났을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도, 다른 어딘가에도. 그리고 당신은 이 둘을 연결했다. 어제 일어난 장면은 어떻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것, 즉 당신이 이것을 보고 있는 순간과 연결될까? 그 커넥션, 관계성이란 무엇일까? 커넥션을 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려서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비교하고 있는 이 지금, 세 번째 장면이 생겨났다. 어제 일어난 것, 지금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세 번째의 장면, 이 세 개를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제 일어난 것, 지금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이 둘의 연상 상의 비교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음, 세 번째의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 이 셋의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제, 지금, 그리고 당신이 어제와 지금을 연결해서 상상하고 있는 그것. 그리고 이것들을 연결하는 네 번째의 장면이 곧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실은 어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란 아이가 던지는 주사위다. 시간은 뛰노는 아이다―이렇게 바꿔 말해도 무방하리라. 이것이 그에 의한 시간의 정의다. 여기에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아이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놀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주사위를 던진다. 그래서 나온 무작위적인 결과, 계속해서 던진 결과―그것이 시간이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 이번에는 이렇게 시간을 느껴보자. 틈과 다음의 틈과 그다음의 틈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통해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지금 당신은 나의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는 항상 변한다.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나를 보고 있기에.
눈이 움직이고, 몸, 생체나 뇌 속에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의식에 대한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음의 이미지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전체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가진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스냅사진의 연속이다.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의 스냅복사에서 다음의 스냅복사로 보이지 않는 추이(推移)다.
시간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시간을 볼 수 없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어도 시간의 경과는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매우 심오한 미스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상황이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없다. 혹은 많은 철학자가 말했듯이 현실에는 고유의, 본래부터 있는 이미지 구조가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나를 볼 수도 있다. 이미지의 층(layer) 위에는 더한 이미지의 층이 있다. 앞서 증명했듯이 그것 또한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다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역사에서 가장 큰 이미지를 분류해보는 것이다.
2. 현대철학을 되돌아보다
역사란 ‘숨겨진 상상성의 통일’?
역사란 무엇일까? 가장 흥미진진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시간이 환상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그 이야기로 되돌아갈 테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역사란 무엇일까? 시간과 역사는 확실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라는 것이 주요한 이벤트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역사의 어느 시점(時點)에서도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어제(2018년 6월 12일)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났다. 그러나 왜 그것이 역사인 것일까? 어째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구조를 부여하는 주요한 사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통일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특정 사건에 숨겨진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건에 숨겨진 통일성이 있다는 생각은 metaphysics=‘형이상학’이라고 한다. ‘넘는다’는 의미의 ‘meta’와 ‘physics’=물리학이 조합된 말이다.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서 물리적인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물리학’을 ‘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의 회담 등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고 믿는 한편, 이러한 이벤트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왠지 모르게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가장 단순한 이해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는데, ‘중요한 이벤트의 연쇄’라는 사고다. 유럽인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 많은 사람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냉전, 1989년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등…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어떤 일들. 많은 철학자가 그것들을 믿었다. 역사가 중요한 이미지의 연쇄이며, 그것이 구조를 부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시간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왜 역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를 염두에 두고 최근의 철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부터 철학 자체의 주요한 전환, 중요한 이벤트를 살펴보고, 그것들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철학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의 반성에서 시작된 ‘실존주의’
현대철학에서 지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하나의 큰 장면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여러 국가에서 ‘실존주의’라는 운동이 번져나갔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에 그 사실은 거의 잊혀졌다.
실존주의라는 것은 다음의 매우 훌륭한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결국 틀렸지만. 실존주의의 가장 큰 성과는 다음의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자신의 인생 이외에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의미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도가 믿는 일신교의 신이 인생의 의미를 밝혀주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은 20세기의 공포와 사리가 맞지 않았다. 신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지 못하고, 만약 신이 있다 해도 그것이 왜 공포가 아닌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힘이 세고 전지전능의 누군가가 있다고 해보아도, 그것은 의미의 원천보다는 공포의 근원으로 다가왔다. 당시 전쟁의 비참함을 직접 목도한 수많은 사람은 신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의 문제가 도출된다. 인생은 애당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실존주의자의 답은 인생에 의미를 가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게 ‘투기’(投企)라고 불리는 것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 좋다. ‘투기’란 무엇인가? 사람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구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의미를 찾는다. 의미를 ‘던지고’ ‘꾀한다’, 즉 ‘투기’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넘어서서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즉 인생에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당신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론 인류의 시간성(일시성)에서, 즉 인간에 의한 시간의 경험에서 역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바로 만들어진다. 역사가 있고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모든 것에 ‘투기’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이나 민주주의 등에 대한 전체적인 ‘투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라는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작은 ‘투기’를 위한 ‘투기’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고다. 실존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슬로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요컨대 이 의미다. 우선 당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생에 의미를 준다.
자신의 존재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난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삶은 의미의 원천이 아니라, 실존주의자에 의하면 ‘투입’(投入)에 불과하다. 현실에 던져졌을 뿐이다. 그것은 별로 인생에 의미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많은 국가의 많은 도시에서처럼 모든 의미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생겨난 훌륭한 사고방식인 실존주의이지만 동시에 문제도 있었다. 인간적인 활동에서 철학자가 말하는 ‘주체’라는 근본적인 개념이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일종의 구조를 부여하는 중심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실존주의의 경우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부여하는 구조다.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로
그러나 만약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는 구조가 어떤 이유에서 외부의 요소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실존주의’는 ‘구조주의’라는 사고방식으로 대체되어 간다.
구조주의 또한 훌륭한 사고방식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자신의 ‘주관성’, 즉 자신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구조의 네트워크의 하나의 결절점, 교차점과 같은 것이다. 구조의 요소에는 가족, 자라난 장소, 최근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 나아가 경험한 것에 대한 담론, 문화적인 가치 등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로부터 생겨난 구조가 인생에 의미를 준다. 그것이 구조주의에서 기본적인 사고다.
구조주의자는 신화학 등의 연구 성과 속에서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세계 속에 유사한 구조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저 유명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선조다. 그는 인간에 의한 모든 이야기의 화술에 근본적인 구조가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것은 가령 일본의 연극도 고대 그리스의 연극도 비슷한 구조가 있는데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어느 국가의, 어느 문화의 연극도 그러한 구조와 맞아떨어지며, 모든 연극의 표현양상에 공통하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다. 시 혹은 컴퓨터 게임에도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인간의 ‘투기’의 외측으로부터 다른 무엇이 인생에 구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구조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구조주의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말에 작은 문제가 떠올랐다.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은 또 다른 파탄과 시기가 겹친다. 20세기의 공포 후에 ‘사회의 재구축은 간단한 일’이라는 사고가 파탄을 맞았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수많은 사람이, 살아 있는 엄청난 권력을 여전히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재구축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사람들은 역사와의 더한 과격한 분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자고. 이러한 복잡한 이유가 있었고, 그것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표출되고, 그러한 흐름이 유럽의 학생운동을 계기로 모아지게 되었다.
또 그것은 철학의 풍조를 바꾸었다. 주목해야 할 다음의 단계로의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구조주의’로
‘포스트구조주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의한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고도 멋진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언어를 떠올려보자.
언어는 특히 글에 의해 구성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이 스튜디오에서 영어로 말하고 있고, TV를 보고 있는 당신은 아마도 화면 밑에 표시된 일본어 자막을 읽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일본어를 읽는 동안, 그리고 내가 영어를 말하는 동안, 일어나는 것의 구조는 더 작은 단위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문장, 문학, 말, 어조, 표현 등등으로.
이것들은 극히 작은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애당초 이러한 작은 요소를 포함하는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영어라는 언어의 존재를 믿는 어떤 적절한 이유가 있을까? 우선 언어는 변한다. 어느 시점(時點)에서도 안정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항상 변한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지금 입 밖에 내고 있는 문장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많은 이야기들은 당신에 의해 처음으로 이야기된 것들이다. 즉 언어는 이미 존재하거나 연결되어 있는 일련의 표현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결되어 있는 작은 구조가 아니라, 그것은 더 큰 전체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 더 큰 전체의 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어라는 하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누구?
데리다의 가설에서는 하나의 언어 대신 ‘차연’(差延)이라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차연’은 유명한 개념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룬다는 ‘지연’(遲延)과 다르다는 ‘차이’다. ‘차’이와 지‘연’. ‘차연’은 불어에서는 일종의 말놀이로 이 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차연이란 아직 없지만 미래에 있을 것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 사이에서 요소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글을 끝내고 있다. 이것으로 끝났다. 글의 시작을 입 밖에 내는 것은 ‘글을 끝내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글을 입 밖에 내기 시작할 때 글은 아직 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서 글을 입 밖에 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글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글의 끝은 존재하지 않지만 글에 구조를 부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미래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구조를 부여한다.
데리다 이전의 많은 철학자, 그리고 당시의 과학도 사건은 모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이해했다. 현실은 현재에 있다고. 그러나 결국 언어의 현실에서조차 이 가정은 사리가 맞지 않는다. 언어라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미래에서 현재를 통해 과거로 흐른다. 언어는 역 시간방향을 가진다.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말로 표현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신의 인생 또한 역방향으로 거슬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은 사고하는 생물체로서 삶에서 죽음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향해간다. 데리다에 의하면 역방향인 것이다.
미래가 현재에, 그리고 현재가 과거에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거대한 패러독스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대로 재밌을 것이므로 생각해보자. 시간에 세 부분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그럴듯하다. 어제는 무엇을 했고, 지금은 하고 있는 것을 하고 있고, 내일은 아직 무엇을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제, 오늘, 내일이 있다고. 그러나 물론 오늘도 시간에 의해 구성된다. 오늘은 아침, 점심, 그리고 맞이하면 좋을 밤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이 그때까지 파괴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지금 순간에도 이 세 부분으로 이뤄지는 시간 구성이 있다. 1분을 살펴보자. 1분 사이도 과거, 현재, 미래에 의해 구성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현재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현재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한다면, 현재가 없다면 어떻게 시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과거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라,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현재는 점점 더 분해된다.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또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에 대응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예를 들어보자. 이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의 하나라고 해보자. 당신의 모든 인생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좋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간 개념 속에는 더 작은 시간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의 최초의 5년간이랄지, 그렇게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 작은 개념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과거 두 달간이랄지. 시간의 최소구조, 최소단위라는 것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더 작게 분해된다.
현재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이 시간의 문제를 설명한 데리다의 논점이다.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통찰이기도 하지만,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문제는 더욱 큰 사고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근대성, 계몽주의, 민주주의 등의 베이스에 있는 것은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사고다. 인류의 ‘진보’, 과학과 기술의 ‘진보’ 등과 같이 ‘진보’를 믿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 ‘진보’의 현실에서 살아간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구조, 나아가 시간이 필요하다.
자크 데리다가 한 것처럼 구조, 시간, 역사의 개념을 무너뜨리면, 즉 이 전체구조를 무너뜨리면 어떻게 무언가의 형태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데리다의 사고방식을 밀고 나가면 때때로 일종의 현실 괴리가 일게 된다. 현실을 파악하려 들면 다른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은 항상 빠져나가고, 이 손에 쥘 수 없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현실은 도망친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빌면 “시간을 파악하려 들면 시간은 도망친다.”
마찬가지로 사실 또한 도망치고 도망치고 계속해서 도망친다―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도 영향을 준다. 즉 사실을 일찌감치 알 수 없게 만든다.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면 사실이란 본래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확실히 ‘존재한다’라는 것
이제 우리가 지금 있는 현대로 옮겨오자.
간단한 질문을 하겠다. 여기에 과일이 몇 개 있을까? 세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바나나가 다섯 개 있다. 그리고 딸기가 세 개 있다. 산수를 사용해서 3 더하기 5는 8. 과일이 여덟 개. 과일바구니에 여덟 개의 물체가 있다. 좋다. 이 물체들은 어떤 사실에 짜 맞춰진 것들이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 옳지 않다면, 특별히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 철학자가 말하는 ‘사실’이다. 물체의 구조를 이룬다. 사실에는 물체가 있다. 즉 과일바구니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에 더해 이 상황의 구조를 보증하는 사실도 있다.
그러나 만약 데리다가 옳다면,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들의 위치조차 특정할 수 없다. 결국, 여기서 일어나는 것에 당신이 접근할 수 있는 현재=이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 없이는 변동과 변화도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인식은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구조는 이미 사라졌고 잡을 수도 없다. 즉 과일바구니에 과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필요하다. 이것은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심호흡하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사실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한번 더 반복하겠다. 사실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 과일바구니에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은 진짜다. 그리고 이 여덟 개의 과일은 항상 붕괴하고 있다. 썩어가고 있다.
일 년 후 혹은 10년 후에 돌아와 보면 과일은 이미 없을 것이다. 즉 거기에 있는 것은 열역학의 제2법칙에 따라 수많은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다. 과일에 손대지 않아도 10년 후에는 없어질 것이다. 붕괴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기에. 그러나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은 붕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다. 특정 시점(時點)에서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은 항상 옳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은… 아직 과일은 여덟 개 있다. 그 사실 자체는 붕괴하지 않는다. 즉, 지금 살아 있는 현실은 단지 붕괴하지 않는 물체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당신을 포함해서 온갖 붕괴하는 물체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이 붕괴하고 있는데도.
그러나 데리다가 옳다면, 파악하기 어려운, 붕괴하는 물체라는 현실 레벨에 더해 사실이라는 레벨이 있게 된다.
사실이라는 레벨은 시간을 완전히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를 수반하지 않는 영원의 차원에서 특정 시점, 결정적인 시점에서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통해 이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근대물리학의 진상(眞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물리학에 의하면 물리적인 현실조차 붕괴하고 있는 물질만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시공(時空)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설명한 후에 내가 권장하려는 현대철학인 ‘신실재론’에 들어가겠다. 그리로 가기 전에 우선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현실은 실제로 보이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매우 간단한 질문을 해보겠다. 지금 여기에 영상이 있다. 유니콘, 질주하는 뿔 달린 짐승의 영상이 있다. 이것이 유니콘이 아니라면 유니콘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유니콘이라는 생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그러나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니콘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신실재론’은 당신에게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유니콘은 정말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 동영상 안에 있다, 고.
자, 이 유니콘은 시부야의 교차로에서는 볼 수 없다. 이 유니콘은 절대로. 이 영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유니콘은 이 영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유니콘인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해보자. 이것이 유니콘 모습을 하고 있는, 교묘하게 변장한 망아지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가령 이것이 뿔 달린 말이라면…? 그럴 리 없다, 이것은 진짜로 유니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영상 속에 유니콘이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유니콘이 있다는 것만이 사실은 아니다. 다른 수많은 기묘한 것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유니콘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유니콘에 대한 당신의 이미지, 당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도 존재한다.
당신은 자신의 시점에서 유니콘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시점에서 같은 유니콘을 보고 있다.
이 유니콘에다가 유니콘에 대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유니콘뿐만 아니라 손과 손의 이미지, 카메라, 인터넷 등등도, 그 속에 존재한다. 숫자도 존재한다. 여덟 개의 과일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8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여덟 개의 과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8이라는 수는 과일이 몇 개 있는지를 드러내는 숫자이며 그것은 유니콘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이미지다.
따라서 현실은 우리가 보는 사물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에서도 구성된다. 그 이미지에도, 현실 자체에도 어떤 성질이 있다.
3. 철학에서 본 전후사
세계사의 전환점이란?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흐름 속에 가장 중요한 최근 사건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종결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20세기의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적 사고를 발동시켰다. 그로부터 근대사상의 큰 전환점을 이룬 것이 1968년의 학생운동이다. 그 후에도 동서 냉전의 긴장 고조가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도 있었고 세계 속의 다양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큰 전환점으로 다뤄야 하는 사건은 1989년의 일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 뒤로 이어진 독일의 재통일. 또 그것은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모든 이들에게 많은 희망을 준 자유민주주의가 마침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다.
그리고 철학에서 보면, 나로 대표되는 운동인 ‘신실재론’이 태어났다. 그 주요 계기는 2001년과 2008년에 있다. ‘신실재론’은 2008년의 경제위기, 그 원인인 2001년의 동시다발테러, 세계적인 테러의 시작과 연결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 경제체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 이 둘이 담고 있는 심각한 위기의 여파 속에 있다.
그 의미를 지금부터 하나씩 보여주겠다.
‘물질주의’에서 ‘인생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세계질서가 등장했다. 지금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세계질서다. 이 세계질서의 기반은 총체적인 세계평화를 안정화시키려는 시도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 세계가, 즉 국제사회의 구조가 일체화를 지향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각국, 각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의 안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글로벌파워가 생겨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로켓과 비행기가 중요한 기술이 되고, 그리고 이는 일단 전쟁이라는 사태가 발발하면 전쟁이 지상ㆍ해상을 막론하고 공중전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이 인간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틀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조가 기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시작을 결정지었다.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적어도 2자의 주요한 플레이어가 존재했기 때문에, 곧 붕괴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담긴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에는 물론 아메리카와 그 동맹국이 있다. 아메리카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개념을 대표한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이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개념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과학적ㆍ기술적인 ‘진보’라 말할 수 있는 변화의 프로세스가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는 드디어,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지상에서의 최종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과학적ㆍ기술적인 프로세스가 인류의 궁극적인 구제를 불러온다는 이데아 하에서 우리는 모두 단결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역설이 숨어있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완전히 물질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즉 물품의 생산과 돈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의미 있는 해답을 약속한다. 그런데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프로세스로부터 어떻게 하면 인생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냉전체제에서는 주로 소련에 의해, 그 후에는 중국이나 다른 해당국에 의해 대표되는 공산권이 존재했다. 공산주의적인 세계관은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을 제공한다.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이것은 매우 철학적인 관점인데―,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과학적ㆍ기술적 진보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의 진보이기도 하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진보는 사회적 현실에 관해 우리가 어디까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그 의미에서 결국 소련의 기초과학은 자연과학, 즉 물질세계의 틀의 과학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사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에서는 단지 부와 돈의 분배 말고 중요한 것이 대두된다. 미소[미국과 소련]라는 이 둘의 세계관을 가진 국가가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충돌한 것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세계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전후 ‘세계’의 사상의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역사가가 아닌 데다 이것은 말하자면 ‘세계사’가 아니라 철학사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사’가 있다고 믿을 턱이 없다(웃음). 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하는 것으로 하겠다.
전후의 질서는 현실에 대한 두 개의 총합적인 철학적 견해에 의해 규정되었다. 아메리카와 소련이라는 두 개의 강국이 서로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것들은 개념의 레벨에서도 싸웠다.
두 강국은 그 역사와 현실에 대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했다. 전후의, 현실의 전체적인 설명으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보기와는 달리 실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개의 이론이 있다. 현실 전반에 대한 철학적인 이론이다. 자연적 현실(natural reality)과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이 특정 방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둘의 세계관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세계관의 충돌은 많은 철학적인 이론의 성분변경을 일으킨다. 가장 현저하게는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에서 두 이론이 조합되게 된다.
요컨대 한쪽은 마르크스주의이고 다른 한쪽은 정신분석학이다. 이것이 ‘냉전’이 일으킨 또 하나의 효과라는 표현도 가능하겠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해설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분업에 의해 특정한 사회적인 이익이 형성되고 서로가 대립하기 시작하는 상황을 뜻한다.
정신분석학은 계급투쟁이 일으킨 정신적 질환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조합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입장에 설 가능성이 생긴다.
이 조합은 아메리카의 물질주의적인 세계이미지가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련의 세계이미지인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이 제공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1960년대의 유망한 개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매우 문제적인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비평가에 의하면 이 개념은 세계질서 자체가 안정되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가 그 무엇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설명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위기를 심화한다.
라캉의 ‘거울단계’
냉전 시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철학자 두 사람을 꼽으라면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더 코제브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을 들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철학에서 유래한, 그들을 이끈 기본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헤겔은 사회와 주관성의 관계, 사회 전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헤겔의 가장 중요한 사고방식의 하나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내가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너는 너, 어째서 이렇게 인식할 수 있을까?
내가 나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너가 너인 것은 어떠한 것일까? 모두 제각각의 타자와의 비교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보고 너가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너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를 생각하고, 너는 내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를, 어떤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를, 어떤 행동습관이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나는 너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너를 보면서 나는 내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판단할 것이며, 너도 나를 보면서 너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특징들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관점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식할까? 나는 너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모르며, 너도 내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모른다.
이러한 까닭에 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우리는 스테레오타입의 일정한 시퀀스를 고안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도 상상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실은 그 속에 있다.
따라서 나와 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투영하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코제브에 의하면 이것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에 대한 그의 유명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자크 라캉에게 이어져 ‘누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는 자극제가 된다.
라캉에 의하면, 특히 1960년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이 교차한다. 이것은 대략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일어나는데, 우리는 모두 그가 ‘거울단계’라고 부르는 이론을 제창한 것을 알고 있다. ‘거울단계’에서 유아는 생후 6개월부터 한 살 반까지의 시기에 자신을 동물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세계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가족이 보호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무력하고 조그마하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가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자마자, 자신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라캉에 의하면, 아가는 ‘자신은 신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거울에서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은 신이 아니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가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주변의 모든 이들과의 비교에서 무력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돌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것이 그들의 셀프이미지를 산산조각낸다. 거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거울은 부서진다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그러한 까닭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타자가 확인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타자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공상을 타인에게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라캉에 의하면 자신이 무력하고 자그마한 아기라는 인상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나는 당신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나를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신분석학의 전형적인 설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설명은 당신이 어른으로서 가지는 정신생활의 모든 것을 유년기에 일어난 것으로 회수시키고 만다. 이것이 기본구조다.
‘물질주의’와 ‘유물론’이 싸울 때
라캉의 ‘거울단계’의 이론은 ‘실존주의’의 창시자인 장 폴 샤르트르와 실존주의를 둘러싼 이론을 계승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사회와 역사가 헤겔이 말한 바의 ‘승인을 둘러싼 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진화해왔다는 기본적인 개념에 찬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은 참된 셀프이미지가 없는 장소에서의 셀프이미지를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꾸며내고 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묘하게 생각되지만, 실은 매우 개방적으로도 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유럽에서 성 혁명을 일으킨다. 계속해서 이 투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고 그 근저에는 어떤 현실도 없으며 그것이 바로 타자의 곁에 있는 거울이라는 것, 1960년대에 이러한 의문을 사람들이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해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인생이 집합적인 꿈이라면, 사회생활에도 그 집합적인 꿈의 구조가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우리는 룰을 변경하지 않는 것일까? 왜 1960년대의 새로운 양상의 카타스트로피, 특히 베트남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냉전(冷戰)이 열전(熱戰)이 되는 그러한 대참사를 일으킨 억압적인 사회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리고 이제 조금 전 다루었던 두 개의 세계관, 순수한 물질주의와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이 실제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해되고, 핵을 이용한 제3차 세계대전과 인류전멸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모두가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가? 이것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철학의 정신, 그리고 아마도 1980년대의 철학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희망, 많은 낙관을 주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4.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
네오리버럴리즘은 왜 대두했나?
1960년대, 그리고 특히 1970년대 초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지구상의 정치지도자와 사회시스템이 지금의 네오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두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내었다.
네오리버럴리즘은 특히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에 의해 확산된 사고방식이다. 이 조류는 극단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 레이건과 대처가 상징하는 네오리버럴리즘은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개념이 된다.
실존주의자,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는 기본적으로는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사회구조라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고 거기에는 더 깊은 현실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행위를 통해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 대한 더 깊은 근거는 없다. 그것은 매우 표면적인 가면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오리버럴리즘은 이러한 철학적 이론화에 대항해서 자기 나름의 철학적 이론화의 수단을 행사하기 위해 철학자에 도전할 수 있는 괜찮은 경제적인 개념을 생각해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측면이 경제적으로 실행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대략의 짜임새는 이와 같다.
만약 정말로 사회영역이 실제로 이미지의 투영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면, 그 투영의 메카니즘을 자신의 것으로 해서 그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 셀프이미지의 구축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계급투쟁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네오리버럴리즘은 역설적으로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되었듯이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이론적인 가르침을 완전히 받아들여서 그것을 거대한 광고산업으로 변화시켰다. 왜냐하면 광고산업이라는 것은 이미지와 셀프이미지의 투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도쿄의 지하철을 타면 끊임없이 더 좋은 셀프이미지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 더 아름다워집시다. 먹는 것을 참아라. 더 먹어라. 더 부자가 됩시다. 대출을 합시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갑시다 등등. 이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공격받고 조롱당한다. 그것들은 이미지를 투영해서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바란다면 이뤄진다고.
그리고 그것들은 당신의 마음에 스며든다. 광고산업은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어서 당신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디어는 당신이 결국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 모두 환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예시인 할리우드 등의 환상 업계 또한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어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셀프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느새 인간들 사이에서 구축될 뿐만 아니라 제3의 행위자(actor), 제3의 주체에 의해서도 구축된다. 저 유명한 이미지의 철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산업’이라고 부른 것이 그러하다. 문화산업은 광고산업과 함께 철학에 대한 통찰을 실행함으로써 그 대상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해방의 철학이 그 자신과 싸우기 시작하고, 이 싸움은 철학의 세계 자체에 심각한 충격을 주며 철학의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전체의 이론화의 수정을 재촉한다. 이것이 네오리버럴리즘의 본질이다.
‘승인을 둘러싼 투쟁’―헤겔의 이론
이제 그 다음 단계로 가자. 지금 내가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이는 우리 철학자에게 다음의 중요한 지혜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철학의 이론화를 하면서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회적 현실 그 자체에 좋든 싫든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현실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개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개념을 다른 종류의 모델이나 이론으로 전환할 수 있다.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철학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철학은 요컨대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하나의 사고를 입 밖에 내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헤겔의 ‘승인을 둘러싼 투쟁’의 이론에서 얻은 지혜다. 즉 나는 이 글을 입 밖에 내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는 내가 실제로 생각하는 모든 생각에 해당된다. 내가 실제로 생각하는 어떤 생각도 수많은 생각 중 하나다. 지금 이 모든 것에는 앞서 말한 대로 구조가 있다.
철학은 사상의 구조 자체를 연구한다. 사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물론 이 통찰은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네오리버럴리즘은 이 의미에서 어떤 깊은 철학적인 통찰을 경제 시스템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철학이 사람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철학자들이 이를 의도하지는 않는다. 마치 철학적인 모략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희망’
내가 알기로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는 철학자와 이야기하는 것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철학자가 왕이나 여왕이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난 적이 없다. 정반대다. 그때 우리와 대립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아이디어에서 권력을 얻고 바로 그 아이디어에 대항해서 사용해왔다. 이는 특히 70년대와 80년대 초에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와 관련한 철학적 이론화에 있어서 일종의 아이러니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저작에서 얻을 수 있는 지견(知見)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이 어떻게 현실에서 소외되는지에 대한 해설이다. 푸코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에 입각하여 사회의 발전을 본다. 그래서 그는 ‘모더니티’=‘근대성’, 나아가 그가 보고 있는 역사 전체를 억압적인 전략의 결과로서 사고한다. 그 억압적인 전략은 모두 철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푸코에 의하면, 철학의 사상, 즉 사상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타인과의 교류방법을 갈고 닦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역사를 절망적이고 아이러니한 것으로 기술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저항할 수 없다, 언제나 그들이 성공한다, 고.
어떤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저작은 극히 비관적이다. 반격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이제 우리는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셸 푸코의, 그가 당시 참가한 학생운동의 실패에 대한 리액션이다. 즉 왜 당시 학생운동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지금 나는 당시 학생운동의 실패 후에 에둘러온 1980년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네오리버럴리즘’이라고 불리는 순수자본주의의 다크시스템(dark system)이 완전히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독일에서 ‘평화적인 혁명’이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평화적인 혁명은 독일의 재통일로 완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그 결과 소련도 붕괴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준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의 타이틀을 빌어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때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희망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 이 새로운 희망을 떠오르게 한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유민주주의가 전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새로운 이상의 현실을 펼칠 것이라고. 그 배경의 하나는 특히 중대한 변화가 없어도 역사의 방향성을 보존하게 하는 영원의 평화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글로벌한 세계질서―완전히 개방적인―는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사인펠드(Seinfeld)》가 가르쳐준 ‘모든 것은 표층에 있다는 것’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여러 지적 풍조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TV프로 하나가 있다. 《사인펠드》(NBC 1989~1998 방송)라는,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이 봤다는 국민적 인기를 얻은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는 다양한 아파트에서, 특히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제리 사인펠드가 사는 아파트에서 각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러 뉴요커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완전히 자유롭다. 그들은 ‘사회적 제약’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그들의 생활에는 어떤 억압도 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들이 경제적인 압력이나 무언가로 고민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다, 마치 극중에 있는 것처럼.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완벽한 실존주의다. 모두가 해방되어서 자기 자신의 셀프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과 잘 지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는 방법이나 좀 더 깊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깊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표면적이다. 무엇도 남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저 그 속에 있을 뿐이다. 이 드라마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처럼, 현실은 a show about nothing=“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다. 이것은 유명한 대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
《사인펠드》의 상징적인 에피소드의 한 장면을 소개하겠다.
등장인물들은 어느 날 TV프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날 TV프로가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획을 큰 방송국에 팔아넘긴다.
방송국 관계자가 이것이 무엇에 대한 쇼인지를 묻는다. 어떤 쇼를 해보고 싶은지를 주인공들에게 묻는다.
“이 쇼로 무엇을 할 생각이죠?”
주인공은 답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에요.”
조지 코스탄자라는 등장인물이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그 무엇에 관한 것도 아닌 쇼다.
방송국 관계자는 매우 당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라는 게 뭐죠?”
“음, 단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쇼에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죠. 그저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이것은 단지 우리에 대한 쇼에요. 그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입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현실 그리고 사회적 현실, 과학적 현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라고 알려주는 이론적인 조류다.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뭐든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떤 구조도 없으며 어떤 존재도 없고 현실도 진실도 없다.
이것이 권력과 싸운다는 아이디어 후에 찾아온, 그다음 단계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면 니힐리즘이 찾아오고, 절대적인 니힐리즘을 선택하면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마음에 품고 모든 것을 파괴하면 네오리버럴리즘도 제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문화산업 모두를 일소할 수 있으며, 자신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배우들은 자신의 TV프로 제작을 시작한다. 그들은 미디어를 다시 한번 조절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다. 여기에 엄청난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완전한 자유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파괴하자.”
‘포스트모던’을 이용한 트럼프
안타깝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당시 생각한 만큼 해방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디어 공간의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켰다고는 말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티 프로의 풍조 가운데 나타나는 창조의 일부다. 그리고 여기에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질문이 있다. 최근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 리얼리티 프로를 가지고 있었을까?
도널드 트럼프가 분명하게 답했다. 트럼프는 포스트모던 이론을 정치에 완벽하게 집어넣은 예다. 여기에 우리의 새로운 철학적인 적이 존재한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의 다음 라운드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현명하다. 실제로 그는―그 자신이 즐겨 강조하는 바―정말로 천재다. 그는 포스트모던적인 천재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찰을 경제적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적인 개념은, 앞서 말한 것을 기억하겠지만, 이 모든 것을 추동한 것은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없고 사회적 현실 따위도 없고 영상 밖의 현실도 없고 다만 하나의 거울만이 또 하나의 거울 옆에 있다는 개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더 확실히 거울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때다.
‘시뮬레이션 속에 산다’는 환상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의 회담이 행해졌다. 사람들은 이 회담을 SF영상처럼 볼 것이라고 앞서 지적했다. 그리고 회담 영상을 실제로 보면 확실히 매우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현실의 계층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진실의 포스트모던 레벨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이 거대한 세계의 포스트진실을 볼 수 있는지 설명해보겠다. 인터넷 시대에는 정말이지 뉴스를 믿지 못하겠다. 많은 가짜뉴스, 혐오 발언, 그리고 현실의 부당한 허위 사진들이 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이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다. 그는 인터넷 시대의 개념을 통해 만들어진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것을 전혀 다른 새로운 플랫폼으로서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인 부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한다.
그것이 그가 트위터를 사용하는 이유다. 그가 우리에 대해 소셜미디어의 구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소셜미디어란 완벽한 포스트모던 플랫품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테면 누군가가 비디오 게임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디오 게임에 불과하니까. 무슨 일로 당신이 인터넷상에서 누군가에 대해 혐오 발언을 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로 생각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우리는 이미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혹은 SF영화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김정은을 보고 사람들이 ‘이것은 SF영화다.’라는 인상을 받는다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이 둘은 SF영화의 대본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디지털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속단의 사실을 우리에 대해 이용한다.
5. 신실재론
‘상대주의’에서 ‘신실재론’으로
여기에 우리에 반응해서 행사되는 포스트모던 이론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무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무대 위에는 완전히 새로운 생산물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이제 필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혐오나 폭력은 유료가 된다. 우리는 ‘실제의’ 혐오나 폭력을 위해 돈을 지불한다. 호러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트럼프가 취하는 행동은 호러영화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당신은 혐오나 폭력을 보기 위해 돈을 낸다. 혐오나 폭력은 사고파는 물건이 되었다. 그것은 공포와 무지의 정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산다, 결과적으로.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여기서 ‘신실재론’이 등장한다.
‘신실재론’이 몇몇 이론화와 함께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약 10년 전이다. 내가 ‘신실재론’이라고 부른 데에는 유명한 제창자 둘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와 미국의 철학자 폴 보고시안(Paul Boghossian)이다. 같은 해에 그들은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우리가 어떻게 시대의 개념적 공간을 새롭게 창조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두 권의 매우 중요한 철학서를 출간했다. 메이야수와 보고시안은 상대주의와 사회구성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보겠다.
여기서 상대주의의 정의는 ‘모든 의견은 다른 의견과 마찬가지로 좋다.’는 개념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항상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의견의 차이가 있다면 통상 우리 중 누군가는 항상 틀림없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내 손가락의 수로 의견의 차이를 보인다면, ‘누가 제대로 말해주는지’를 분명히 하면 된다.
사물의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사물의 사실 따위는 없다고 논한다. 이때 도덕적 상대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겠다. 많은 사람은 안타깝게도 도덕적 상대주의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상대주의란 다양한 도덕관이 있다는 관념이다. 일본의 도덕관이 있고 러시아의 도덕관이 있고 서양의 도덕관이 있고 당신이 가르쳐준 도덕관이 있다.
‘서양’ ‘동양’을 넘어서서 보편성을 추구하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은 서양의 도덕관이 ‘종교를 넘어 과학, 계몽, 발전에 기반하여 완벽히 비종교적인 사회를 가져야 한다.’는 개념으로부터 성립되었다고 배웠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각각의 인생과 각각의 권리를 가지기를 바라고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는 사회적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서양의 도덕관은 보편적인 인권을 믿는다.
그런데 도덕적 상대주의에 의하면 실제로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정 인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서양의 인간들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권…, 예를 들어보면 공격받지 않는 인권, 아파트에 홀로 생활할 수 있는 인권 등이다. 상대주의는 러시아인, 일본인, 혹은 인도인의 사고방식이 각기 다르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양의 많은 사람들은 그다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요컨대 러시아인은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반면 서양 사람들은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으며 어쩌면 돈을 더 중시할 모른다. 그리고 상대주의자는 ‘이러한 도덕관의 선악을 결정짓는 기반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단지 이다지도 다른 도덕관이 존재할 뿐이라고.
확실히 사람들은 매우 다르며 각기 다른 문화가 있다. 일본인은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서양인은 포크와 나이프로 밥을 먹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단지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다. 포크와 나이프 혹은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선택일 뿐이며, 기호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약 도덕관이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면, 《하우스 오브 카드》(넷플릭스 2013년~방송)에서 프랭크 언더우드를 연기한 저명한 배우가 말하듯이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정의 따위는 없고 있는 것은 정복뿐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정치적 상황은 각기 다른 도덕관이 있으며 서로 맞부딪힐 뿐이다. 이를테면 서양의 도덕관에 대해 러시아의 도덕관이 그저 맞부딪힐 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현실에서―진실이 없다면―순수한 다툼이 생긴다. 그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세계관이다. 결국 정의는 없고 있는 것은 정복뿐이다. 그것이 그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에서 확고한 신념의 상대주의가 이 상황을 추동한다. 많은 사람이 지금 이 사태를 믿고 있다. 당신은 이슬람 국가들은 예를 들어 코란에 기초한 완전히 다른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들은 성서에 기초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이 도덕적 상대주의다. ‘신실재론’은 이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이를 고문해도 될 이유는 없다
한가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항상 일반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이 내 손이 다섯 개 있다고 믿고 있고 나는 내 손이 두 개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둘 다 옳다. 내게 손이 두 개 있거나 다섯 개 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설명해보겠다. 두 개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손이 두 개 있다고 믿고 있다면 내가 옳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 내게 두 개보다 많거나 적은 손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단지 다를 뿐이다!
상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진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상대주의가 일반적으로 진실이라고 한다면, 잘 알다시피 그것은 그 자신에 적용된다.
즉 만약 상대주의가 진실이며 당신이 상대주의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단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당신은 상대주의가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상대주의가 진실이라면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알겠는가? 만약 상대주의 자신이 상대주의에 대해 상대적이라면 그것을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그것은 무작위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이며,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도덕의 게임을 살펴보자. 다양한 도덕관은 정말로 존재할까? 요리에는 다양한 양상이 있다. 다양한 먹는 방식이 있다. 의문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다양한 도덕관은 존재할까? 다음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절대적으로 대다수 인간이 러시아인이든 일본인이든 인도인이든 독일인이든 ‘아이를 고문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아이를 고문해도 될까요?”
답은 “NO”다! 아이를 고문해도 될 이유는 없다.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이를 고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절대적인 공포다. 아이를 고문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도덕관은 없다.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관의 결여다.
그것은 ‘아이를 고문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바로 증명한다. 그런데 만약 하나의 도덕적 사실이 있다고 한다면―지금 제시한 대로―,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moral fact)이 존재한다는 것, 도덕적 상대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도덕적 사상(事象)에 선택지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과 ‘도덕’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더 파고들어서 이 개념을 일반화해보자.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좀더 과격해 보자.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를 고문하지 마라. 최악의 부모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한다. 싫은 자가 아니라면, 이웃과도 잘 지낼 것이다. 많은 사실이 있다, 분명한 도덕적 사실이. 지금 제시한 매우 단순한 것들이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이러한 도덕적 사실들이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 사실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내 대답이다. ‘신실재론’에 의한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물음에 대한 전반적인 답이다.
도덕적 사실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 때에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이 경우의 도덕적 의문은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받고 싶어할까?’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내게 해주기를 원치 않는다. 당신이 지금 매우 화가 나서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싶다고 상상해보라. 어쩌면 정당한 이유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자신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상대방이 되는 것을 상상해보라. 당신은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싶을까? 대답은 NO다. 상대방은―당신이 이 상대방의 입장에 되어 그러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당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당신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도덕적 사실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런데 당신이 상대방의 입장에 있는 것만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이 관점에서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도덕적 사실에 의해서 판단한다.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모든 사실을 데스크에 의제로 올리면 당신에게 다름을 제기하지 않는다. 당신이 상황을 완전히 설명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지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지식과 과학은 도덕관을 형성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식과 과학을 공격하면, 그에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혹은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권위주의적 인물이 과학을 공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와 같이 기후변동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실제의 지식을 의심하기 위해 과학적 전문가를 공격한다. 이것은 다음의 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
스스로의 ‘아는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던의 독재자―우리 시대의 많은 유감스러운 반민주주의자, 포스트모던의 악한 이용을 꾀하는 반계몽활동가―에게는 다음의 계획이 있다.
그들은 당신을, 당신이 아는 것을 정말로 알지 못한다고 믿게 만든다. 그것은 새로운 레벨의 난감한 계획이다.
당신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만, 정치의 짜임새가 당신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은 당신에게 두 개의 손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기후변동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시리아의 내전도 기본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그 속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신은 시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당신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요컨대 당신은 당신 스스로 아는 능력을 의심한다는 것. 만약 당신이 아는 능력을 스스로 공격하게 된다면, 그에 따라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도덕관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관은 우리의 아는 능력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따라서 당신은 바로 도덕관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적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높인다.
‘위기의 시대’에 당신이 알았으면 하는 것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 기후변동, 중동의 파멸의 가능성 등등의 위기다. 위기의 시대다. 위기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관념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 쪽으로 향해가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공공의 철학적인 내적 성찰을 해야 할 때다.
방금 들은 것에 입각해서 당신은 지금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해를 시키고 싶은 철학적 결론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진짜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인류 전체로서 힘을 모아야 한다. 경제적 사실, 우주에 관한 사실, 그리고 도덕적 사실. 만약 우리가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분명한 사실인지를 알 수조차 없다면, 민주주의가 나설 차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거칠게 요약하면, 내가 ‘명백한 사실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지켜야 할 가치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모아서,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점과 점을 연결하여, 현실의 계통적 해석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의 계통적 해석에 발 딛어야만, 즉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다.’라는 환상을 뛰어넘는 해석에 기초해야만 비로소 우리 시대의 커다란 의문에 답해나갈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동물,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진실의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의 답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만약 포스트진실의 위기에 직면했다면, 진실을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 진실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도덕적 사실을 포함해서 사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보편적이다. 그것들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우리가 같은 종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심대한 차이는 없다. 지역적인 문화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그렇게 심대하지 않다.
나와 당신은 근본적으로 같다. 현실과 도덕적 사실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자 동물이다. 인간이며 동물이라는 것의 합리성에 관한 이 통찰을 우리 교육 시스템에 편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끊임없이 직면하는 거짓이나 가짜뉴스를 의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은 이를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의 의무는 임마누엘 칸트가 이미 18세기에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Sapere Aude, 용기를 내어 알고자 하라!
「哲学は時代との格闘だ」、『マルクス・ガブリエル 欲望の時代を哲学する』、2018年12月、NHK出版親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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